전방후원분과 하남시의 백제, 그리고 거대 도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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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전방후원분과 하남시의 백제, 그리고 거대 도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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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11-01 21:15:25


                                  
   
   Ⅰ. 서론
   백제는 B.C. 18년에 건국되어 A.D. 660년에 멸망하기까지 거의 700년간 존속하였다. A.D.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점령하므로써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한성은 약 500여 년에 걸친 기나긴 기간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그런데 한성시기의 유적은 夢村과 風納洞土城, 방이동과 석촌동고분군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파괴되었다. 특히 풍납동토성은 을축(1925)년 대홍수에 토성의 일부가 없어져 버렸고, 토성의 중심부에는 민가가 들어섰으며, 근래에는 아파트공사로 유적이 파괴되고 있다. 방이동과 석촌동의 고분군일대는 일제시대까지 약 50여기에 달하였으나, 1970년 강남권의 무계획한 개발로 인하여 현재는 4∼5기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석촌동고분은 도로공사로 파괴되었다가 이형구교수의 노력으로 발굴 복원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韓宗燮씨는 백제의 고도를 찾고자 조사하던 중 하남시에서 교산동토성을 발견하였다. 그 이후 百濟文化硏究會는 일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그 일대의 도시유적들을 하나하나 밝혀내었다. 이 과정에서 貊夷民族會의 김성호를 비롯하여 KBS 등 언론기관의 협조가 있었으며, 하남시 관계자들의 관심 또한 컸다. 이러한 관심에도 백제유적이라는 결론을 도출되지 못했다. 이 곳을 조사한 단체들은 백제문화연구회의 조사결과 성과를 과소평가하고, 경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백제문화연구회가 10여년간 조사한 과정과 성과를 정리하고 공개하므로써 이 지역이 백제의 수도였을 가능성을 알려주고, 아울러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Ⅱ. 본론
1. 黔丹山 東明廟 제사유적
韓宗燮1)씨는 1992년 3월 8일, 백제의 초기도성인 하남위례성을 찾기 위하여 한강이남의 가장 높은 산인 黔丹山을 조사하였다. 이 곳은 정상으로부터 남쪽으로 4번째 봉우리(해발 550m)에 정상부근에서 제사유적을 발견하였다. 바닥에 잔돌을 이용하여 폭 281cm, 길이 704cm의 장방형으로 축조하였는데 그 깊이는 약 30cm 정도이다. 이 곳에서는 정상이 나침반의 북쪽방향에서 시계방향으로 20°정도 되는 眞北 방향으로 바라다 보인다. 제단의 북쪽에는 제물을 진설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평편한 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이 부근에 "배알미리"라는 지명이 남아있어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東明廟에 拜謁하였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2)





『1씨는1984년 양천구 신정동에서 백제초기의 산성으로 추정되는 신투리성과 약수터의 백제거주지를 찾아냈다 』 필자는 1992년 5월에 이곳을 처음 답사하였다.3) 그 해 10월 3일 貊夷民族會는 黔丹山 정상에서 東明大祭를 거행함과 동시에4) '백제 하남위례성 정도 2000년 기념행사'를 주최하였다. 필자는 이곳에서 <河南慰禮城址 發見을 통해본 百濟初期史의 復元>5)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졸본부여 계통의 溫祚집단은 고조선과 부여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들어왔을 漢나라의 천문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 당시의 상용척인6) 古韓尺을 쓰지 않고 漢尺으로 이 제사 유적을 축조하였다. 이로 보아 후한이 멸망한 220년 이전의 유적으로 백제초기의 온조가 동명에게 제사를 지낸 유적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이 자리잡은 검단산의 지명은 의미가 있다. 즉 黔이란 "가미", "고마", "곰", "감" 등 神을 나타내는 고어로서7) "신성한 단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이 산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동명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東明이란 "새밝8)" "새벽의 밝음" "黎明"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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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종섭1992.<백제건국지 하남위례성지의 규명에대한연구(pp16~19)1992.10. 1994위<례성백제사>집문당pp45~48
3)오순제1995.<한성백제사>pp27~31貊夷民族會, 1992. 10≪國學≫
4) 吳舜濟, 1992.10. <하남위례성지 발견을 통해본 백제초기사의 복원> ≪백제하남위례성 정도 200년 기념-東明大祭-≫, 맥이민족회, p.25
5) ) 新井宏, 平成 4年. ≪まはろしの古代尺≫, 吉川弘文館.
6)) 梁柱東, 1970. ≪古歌硏究≫, 一潮閣, p.8.
7) 이로 보아 백제 당시에는 "崇山(숭배받는 산)"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금암산이 "가마산"으로 불려져 "釜山"으로, 청량산이 "큰산"을 뜻하는 "漢山" 또는 "日長山"9)과 같은 의미로서 한성지역을 지키던 三山이였음을 나타낸다. 삼산이란 고대전통사상에 나오는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산다는 三神山으로 蓬萊山, 方丈山, 瀛洲山 등이다. 백제의 사비시대에는 日山, 吳山, 浮山으로 되어있고10) 백제인들이 건설한 일본의 아스까에도 耳成山, 香久山, 畝傍山11) 등이 있다.12)

2. 推定 王宮址
   한종섭씨는 이성산성과 검단산 사이에 백제도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덕풍천을 따라 조사하는 과정에서 1992년 4월12일에 교산동토성과 그 안에 위치한 추정왕궁지를 발견하였다. 이 사건은 5월14일에 KBS TV 9시뉴스에 방영하였다. 필자는 5월17일 씨와 함께 방문하여 방형의 토축으로 둘러쌓인 내부에 형태로 초석이 배치되어 있음을 밝혀내었고, 이는 5월18일에 재차 KBS에 방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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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梁柱東, 앞의 책, p.389.
9) 이것은 "해가 길게 걸려있는 산"이라는 뜻의 日長山으로 日門山인 黔丹山에서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이곳을 계속 비춘다는 뜻인데 한종섭씨가 찾은 하북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방학동토성에서 나타나고 있는 "해가는길 日嚴"자와 같은 뜻이다. 이것은 태양숭배사상을 가지고 있던 백제인들의 사상을 나타낸 것이다.왜냐하면 신시시대의 "배달", 고조선의 "아사달"과 "조선", 북부여의 "解慕漱(해머슴애)", 졸본부여의 "東明", 의자왕의 아들인 천지천황이 지은 일본의 국호인 "日本" 등이 光明사상과 관련있었음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10) ≪三國遺事≫, 卷第2, 南扶餘前百濟.)
11) 일본에서는 이것을 大和三山이라고 한다.
12) 오순제, 앞의 책, p.75.

   筆者가 내성으로 추정하는 지역은 동서 55m, 남북 90m 장방형 토축으로 둘러쳐진 약 2000여평으로서, 가로와 세로로 각각 50m의 크기 안에 직경 1m 정도의 대형주초석 50여개가 객산의 정상방향으로 줄지어 배치되어 있었다. 오른쪽 석렬은 질서가 정연하나 나머지는 흐트러져 있다. 주위에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기와편이 산재하여 고려나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다만 질서가 정연한 오른쪽 석렬은 주초석의 간격이 2.5∼3m 간격이었다. 이는 新井 宏이 3∼4세기에 한국에서 사용하였다고 추정한 古韓尺의 一尺 26.7cm의 10배인 2.67m에 근접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 곳은 백제 시대기의 대형건물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궁터는 북쪽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약 20m 정도가 훼손되었다. 강찬석씨는 이 곳이 단일건물지로는 가장 큰 宗廟를 능가하는 최대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 곳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두 개의 높은 봉우리 사이에 南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현재 남쪽으로 뚫린 차길이 원래는 높은 담이었다는 사실로 보아 타당성이 높다. 특히 한종섭은 남문 밖에는 덕풍천을 이용한 垓字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본회는 조사를 통하여 백제의 왕들은 배를 이용하여 한강에서 덕풍천을 運河로 이용하면서 이 곳 남문에 도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광주문화원의 李勳宗 원장은 객산이라는 지명을 들어 광주객사였음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1993년 3월31일 貊夷民族會의 김성호씨가 이곳의 초석이 도난되었음을 서울신문에 보도하자 백제문화재 전문위원들이 이곳을 방문하였으며, 이들은 조선시대의 客舍 건물지로 추정하였다. 1995년 4월5일 百濟文化硏究會와 세종대학은 나무가 뽑혀나간 구덩이를 정리하여 초석의 1/4을 70∼80cm 밑으로 시굴하였다. 주초석 밑에 지름이 160cm 정도의 적심석이 있고, 그 밑에서 황갈색, 흑갈색 2층의 판축을 발견하였다. 백제시대의 흑회색연질무문토기, 회백색연질타날문토기, 적색와편, 숯 등이 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이 건물지가 백제시대에 만들어졌음을 추정하게 한다. 특히 숯이 채집된 사실은 한성백제시대에 왕궁이 화재가 났었다는 삼국사기 비류왕 30(330)년의 기록과 연관되어진다. 강찬석씨는 입구에서 오른쪽 건물지 끝의 벼랑부분 나무밑에서 초석을 찾았는데, 그 밑에는 10여개의 積心石들이 드러나 있었다. 본회는 1996년 10월27일 公山城를 공동으로 조사하여 공산성 궁궐터의 적심석이 같은 구조였음을 알아냈다. 김종규씨는 이 곳의 중앙에 돌로 사방을 돌린 연못이 있었으며, 이 곳에서 수영을 하였는데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이로보아 공산성에서 나타난 백제의 장방형연못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에서는 회백색타날문연질토기편이 지표면에 산재하였으나 그동안 거쳐간 2000여명의 방문객들에 의해 현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이 곳에서 나오는 타날문은 대부분 양면이다. 봉황문막새기와와 "田", "", "官" 등의 명문와편도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王名을 나타내는 ""자가 나온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글자의 아래부분이 日자가 아니라 田자로 되어 있었다.



   1997년에 한종섭씨는 궁궐지의 동쪽 과수원부근에서 치미조각을 발견하였다. 이곳에서 많은 유물이 나온 장소로 궁지와 남문사이 평탄한 대지가 전개되고 있어 필자는 이곳 왕이 업무를 보던 南堂으로 추정하고 있다.1999월 8월3일 KBS 일요스페셜에 방영되자 백제문화재 전문위원들이 2차 방문하여 통일신라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후 강찬석씨의 제보로 조익현 의원이 국회에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여 현재 경기도매장문화재가 발굴하고 있는 중이다.

3. 교산동토성
   1992년 4월12일 한종섭13)씨에 의하여 발견된 평지성으로서 이 성은 객산의 정상에서 북으로 뻗은 능선부를 삭토하였음이 밝혀졌다. 5월17일 이후 필자14)가 씨와 함께 이곳을 공동으로 조사하는 과정에서 장대지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내었고, 현재 과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 중성임을 밝혀냄과 동시에 장대지에서 토축이 두 개로 갈라져 내려오는 것도 확인하였다. 김종규씨가 남측 외성의 성벽과 궁지로 추정되는 곳을 "담안에"라고 불려졌음을 제보하므로써 이 곳에 남아있는 토축이 성벽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이 곳을 조사한 백제문화재 전문위원들은 역시 이 토축이 성벽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5대조부터 이곳에 거주한 김종규씨는 현재 차도에 의해 절개되어버린 토벽이 이전에는 고개처럼 매우 높아 달구지가 그 언덕을 넘어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선법사 남쪽 송신탑부근에 토루가 완벽하게 남아있음이 조사된 동시에 객산 정상부근에서 흑회색연질토기편을 수집하므로서 이곳이 망루지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성의 전체윤곽은 마름모꼴이며 동서가 1,000m, 남북 1,200m로 되는 총 5km 정도의 거대한 크기이다. 대부분은 자연능선을 이용하였고 군데군데 토루로 연결하였다. 서편의 남북으로 뻗은 성벽아래에는 덕풍천이 평행으로 흐르고 있어 해자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문으로 추정되는 향교부근 다리옆의 철탑이 있는 봉우리를 조사한 필자는 와편과 토기편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곳은 이성산성과 그 사이의 넓은 분지와 향교고개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곳으로 서문의 망루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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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한종섭, 앞의 글, pp.16∼19. 앞의 책, pp.45∼48.
14)오순제, p.25. 앞의 책, pp.27∼31.






   1995년 5월 본회와 세종대학교와 공동조사를 하면서 객산의 정상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상에서 두 개의 건물지를 찾아내고, 이를 망루로 추정하였다. 1997년 3월 28일 한종섭, 김성호씨가 객산 정상 바로 밑에서 보루를 발견하였다. 1998년 4월 윤명철 교수는 객산정상부의 후면에 능선부에서 정상까지 옹로가 설치되어있고, 후면의 중간에 보루가 설치되어있음을 발견하였다. 5월 한종섭씨와 윤명철 교수는 객산정상부에서 북으로 뻗은 능선의 끝부분의 동측 사면에서 적을 유인 공격하던 방어시설인 옹로를 발견하였다. 

4. 남쪽 黔丹山 제사유적
   필자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의 기록에서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15)을 참고로 南漢山城의 남쪽에도 黔丹山이 존재할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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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溫祚王 20年 2月 王設大壇, 親祠天地 / 38年 10月 王築大壇祠天地 / 多婁王 2年 2月 王祀天地於南壇 / 古爾王 5年 1月 祭天地用鼓吹 / 14年 1月 祭天地於南壇 / 比流王 10年 1月 祀天地於南壇 / 阿莘王 2年 1月 祭天地於南壇 / 支王 2年 1月 祭天地於南壇

  그후 이 곳을 답사하니 조선시대의 甕城과 烽燧시설이 있었고, 현재는 국가의 중요 시설물이 있어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이 시설을 설치하기 이전에 이 곳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신구대학의 전보삼 교수에 따르면 정상 북쪽의 두 번째 봉우리에 석축으로 된 장방형 유구가 있었다고 한다. 1998년 일요스페셜 촬영을 위해 이 곳을 방문한 필자와 한종섭씨는 시설물로 인하여 모든 것이 파괴되었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곳에서 백제의 연질타날문토기편을 수습하여 이 곳에 백제시대의 유적이 있었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곳은 검단산의 정상부를 진남방향으로 바로 보는 위치로서 동쪽 검단산에 있는 東明廟 제사유적과 매우 흡사한 지형이다. 한종섭씨는 서쪽으로 김포에 검단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필자는 북쪽의 검단산을 ≪大東輿地圖≫와 ≪大東地志≫에서 黔丹山을 찾아내어 현재의 지도와 비교하여 천마산의 북쪽 산아래 팔야리에 "검단"이라는 마을이 있음을 확인하였고, 주금산의 정상 바로 남쪽 봉우리가 검단산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정우영씨는 이 곳에 성황당과 같은 제사유적이 남아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볼 때 왕궁터를 중심으로 四方에 검단산이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한성백제시대 당시에 교산동토성 내의 궁터가 사상적 중심점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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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오순제, 앞의 책, p.80.


5.天王寺址
   하남시 향토사학자인 이철재씨는 이 곳이 "천행이벌"이라고 불리는 것은 "天王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필자와 한종섭씨는 그를 방문하여 천왕사를 입증할 만한 유물이 있는가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없음을 확인하고, 1995년 3월에 이 부근을 지표를 조사하였고, 한종섭씨는 "천왕"이라는 명문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天字가 " °"자 밑에 "大"로 되어있어 天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부여지역의 천왕사지를 조사하던 도중에 이양수씨가 이 글자는 天을 가리킴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후 한종섭씨는 "天王"이라고 반듯하게 쓴 명문기와를 수습함으로써 이곳이 거대한 평지사찰인 天王寺가 있었던 지역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1995년 4월 김종규씨에 의해 전돌이 있는 곳을 제보받고 본회에서 조사하던 과정에서 전돌에 모퉁이에 구멍이 나있음을 보고 강찬석씨가 땅에 깔았던 전돌이 아니라 전탑에 쓰였던 전돌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옆에 탑의 난간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난간석은 황룡사지나 미륵사지 난간석과 매우 흡사하였다. 그후 1995년 6월에 황수영박사가 방문하여 塼塔이었음을 확인하여 주었다. 1995년 5월, 筆者는 여주 지방을 답사하던 중 高達寺址의 <慧目山 高達禪院 國師元宗大師之碑>에 "高麗 太祖의 청에 의해 廣州 天王寺에 주지로 있다가 혜목산 고달사로 옮겨갔다"는 기록을 발견한 후에, 본회의 김충현씨에게 확인을 요청하였다.












   씨는 ≪高麗史≫卷132, 列傳 46, 叛逆 6, 辛旽에 "광주 천왕사의 사리를 왕륜사에 옮기다"라 하였고 ≪高麗史節要≫卷28, 恭愍王 15年 4月條에 "광주 천왕사의 佛舍利를 王輪寺에 안치하다"라고 하였으며 ≪世宗實錄≫卷112, 28年 4月 23日 庚申條에 "광주 천왕사의 사리 10과를 궐내에 바치다"하여 이 곳에 있던 사리를 왕에게 받쳤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이것은 불교를 믿지않던 조선왕조의 상황으로 볼 때, 이 곳의 塼塔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왕륜사와 궐내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廣州鐵佛을 필자는 이 천왕사에 있던 철불로 추정해 왔다. 그 이유는 그 지역 민중들이 만든 도피안사철불과는 달리 서산의 보원사철불처럼 매우 우수하고 단아한 품격의 이 철불은 국가적 대사업이 아니고서는 조형될 수 없는 우수한 작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철불의 좌대를 찾기 위하여 노력을 하던 중인 1995년 6월에 김종규씨가 이 부근의 민가에 소장된 철불의 좌대를 찾아냈다. 현재 이 절터는 많은 민가들이 자리잡고 있고, 민가의 추녀 밑에는 절에 쓰였을 장대석이 박혀 있으며, 민가의 뒷뜰에는 이 절에서 사용되었을 초석과 확돌들이 남아있다. 1995년 7월 강찬석씨는 鄕校 안의 초석들이 여러 가지 초석들로 이루 어져있음을 확인하여, 천왕사가 폐사된 후에 그 곳에서 가져다 쓴 초석이 많음을 확인하였다. 그와 동시에塔에 쓰였을 부재와 확돌 들이 향교 뜰에 있음도 확인하여 주었다.1999년 여름에 전탑부근에 있던 묘가 이장되면서 心礎石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舍利孔 구멍 안에 안치되었을 사리함 등의 유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6. 불상좌대
   본 회는 1995년 3월 철불좌대를 찾는 과정에서 왕궁지의 바로 남쪽에있는 김남현씨 집안에서 八角의 불상좌대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한 그 민가로 들어가는 도로에도 또 하나의 불상좌대가 땅 속에 묻혀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192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사된 자료에서 하사창동 폐사지 철불이 동, 서로 있었는데 서쪽의 것은 크고 동쪽의 것은 작다고 하였다. 이 좌대가 작은 철불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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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朝鮮總督府, 1920. ≪大正六年遺蹟調査資料≫, pp.604∼609. 


7.桐寺址
   동국대학교가 발간한 ≪광주 춘궁리 동사지발굴보고서≫21)에 현재의 대원사 절터 입구 쪽에서 삼국시대의 절터유적이 발굴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본회는 이 자료를 토대로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왔다. 1998년 6월 김종환씨는 이곳에서 치미조각을 발견하였다. 본회의 회원인 불교방송의 김 충현 PD가 시물레이션한 결과 황룡사의 치미보다 훨씬 큰 규모로 추정되고 있다. 이 즈음 본회의 이선호씨는 도깨비암막새와편을 발견하였다. 날씨가 매우 가물었던 1993년 여름에 동사 앞의 저수지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났는데 그 언저리에 토기와 와편들이 즐비하게 깔려있었다. 주민들은 이 저수지가 일제시대에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저수지까지 절터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22) 건축학자인 강찬석씨는 동국대학교에서 발굴한 동사의 대웅전 불상좌대가 팔각형 안에 심초가 있고, 팔각주위에 원형이 둘려져 있으며 이 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배치된 초석들이 동서 27m,남북 27m의 정방형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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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동국대, 1988. <광주 춘궁리 동사지발굴보고서> ≪판교·구리·신갈·반월간 고속도로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경기도.
22) 오순제, 앞의 책, pp.71∼72.





이를 고구려의 금강사지 木塔址와 비교하므로써 목탑지였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1998년 3월18일 KBS TV 9시 뉴스에 "한국 최대 목탑지 발견"으로 방영되었다. 만약 이것이 목탑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우리나라 최대의 목탑이 될 것이다.







8. 金岩山磨崖佛

   동국대학교의 ≪광주 춘궁리 동사지발굴보고서≫23)는 마애불의 머리와 팔이 파괴되긴 했지만 그 모습이 장중하며 옷주름이 U자형으로 매우 굵게 되어있어 백제의 泰安磨崖佛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또 바위절터(岩寺)나 예산의 四面石佛과 같이 바닥에 잔돌을 깔았으며 백제시대의 와편이 나온다고 하였다. 필자는 서산지역을 답사하여 서산마애불, 태안마애불, 예산사면석불 등을 조사하고 이 마애불이 백제시대의 마애불로 추정하였다. 한 종섭씨는 이 마애불의 머리가 왕궁터를 바라보고 있고, 마애불→동사→능너머고분→궁터→선법사로 이어짐을 확인하였고 파괴된 머리조각을 땅에 깔려 있던 돌조각에서 발견하였다. 그리고 전실의 기둥구멍으로 보이는 두 개의 구멍사이의 거리가 80cm로서 古韓尺으로 환산하면 3尺이 되어 백제시대에 지어진 절로 추정하였다. 김종규씨는 그 아래 동굴에서 무속인이 2개의 불상을 발견하여 발굴팀에게 준 것을 확인하였고, 그 안에서 또다른 하나의 금동불을 수습하였다. 그는 마애불 바로 밑에서 샘터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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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동국대, 앞의 책, pp.113∼114.
24) 한종섭, 앞의 책, pp.53∼56. 



9. 藥井寺址
    이 지역이 한산이었음을 확인할 유물을 찾던 중에 김종규씨가 이 절터에서 찾아낸 "藥井寺"라는 명문기와를 필자에게 보여주었다. 필자가 고서를 뒤지던 중에 ≪新增東國輿地勝覽≫廣州, 佛宇條에서 "약정사는 한산에 있다(藥井寺在漢山)"이라는 구절을 발견하여 이 부근이 漢山이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그와 아울러 正祖 때에 지은 ≪梵宇巧≫ 廣州, 寺刹, 藥井寺條에서는 "모두 한산에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俱在漢山今廢)"라고 하여,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에 없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三國史記≫百濟本紀, 枕流王 원년(384) 9월에 胡僧인 마라난타가 晉으로부터 오자 왕이 이를 맞아 궁내에서 예의로써 공경하였으며, 다음 해 2월에 佛寺를 漢山에 창건하고 度僧 10명을 두었다고 한 기록과 일치한 것이다. 성주탁교수는 ≪太宗實錄≫卷第28, 14年 8月 28 戊辰條에 "廣州 尉由城의 전지를 각품(各品)에 도로 주었다" 는 기록과 ≪太宗實錄≫卷32, 16年 10月 7日 乙丑條에 "임금이 상왕을 받들어 廣州 慰要城에서 사냥하고, 초 8일에 환궁하였다", ≪太宗實錄≫卷34, 17年 9月 3日 乙卯條에 "임금이 상왕을 받들고 廣津을 건너 慰要城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저녁에 石島에 머물러 잤다"고 한 기록에서 "慰由城", "慰要城"이란 경기도 광주지역에 있던 백제의 도읍지 慰禮城임을 밝히면서 조선초기까지도 이 "藥井寺" 명문기와 지명이 남아있었으며, 그 당시 검단산 밑에는 강무장이 있어 왕들이 자주 출행하였다고 하였다. 김종규씨에 의하면 궁 안의 외수 부근에는 "도장모루"가, 항골에는 "도장골", 가운데말에는 "도장골"이라는 지명이 남아있어 이 부근에 講武場과 위요성이 존재했음을 밝혀주었다.







  10. 慈化寺址
   具敏會씨가 쓴 ≪南漢秘史≫는 금암산 밑의 절을 일제시대에 鳥居龍藏 박사가 발굴하던 도중에 구민회씨가 방문하여 그곳에서 나온 일본의 법륭사의 벽화글씨와 필법이 동일한 "法隆寺"라고 쓰여진 명문기와가 출토되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김종규씨의 제보에 따라 이 명문기와를 찾던 중 "慈化寺", "慈化寺施主"라는 고려시대의 명문기와를 찾아내게 되었다. 현재 이 곳에는 민묘가 자리잡고 있으며, 깨어진 불상조각과 초석들이 남아있다. 筆者는 이 곳이 백제시대에 法隆寺라는 절이 있다가 하남위례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없어진 터에 고려시대에 성역화 되면서 자화사라는 절터가 만들어졌다고 추정한다. 

11. 神福禪寺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神福禪寺俱在漢山"이라고 하여 이 지역에 신복선사가 존재하였음을 알게 해주었다. 또 洪敬謀가 쓴 ≪南漢誌≫에 따르면 신복선사는 李穀의 <廣州 神福禪寺 中興記>에 누대의 명문거족인 朴璉魯가 후원자가 되어 高麗 忠肅王 당시인1314년 시작하여 1323년에 완성한 대찰로 되어있다. 김종규씨는 널무니(廣門峴)로 올라가는 길목의 골짜기가 "신부골"로 불리우고 있어, 이 곳을 조사하던 중에 대형의 석축을 쌓은 절터를 발견하였다. 본회 회원들이 수차에 걸쳐 이 곳을 조사하던 중 고려시대의 거대한 사찰터였음이 밝혀졌다.

12. 法華寺址
   법화사는 淸나라가 南漢山城을 공격하던 중에 황제의 사위인 양고리가 북문전투에서 전사당하자, 전쟁이 끝난 후에 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로서 그의 출생지인 法獪을 따서 법화사라 하였다고 한다. 본회는 이 곳을 답사하여 동굴을 보고, 백제시대의 타날문연질토기를 수습하여 백제시대의 절터였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筆者는 이 절을 공주시대의 穴寺址와 같은 백제시대의 동굴사원으로 한성시대의 南穴寺址에 해당된다고 추정한다.

13. 오야곡요지
   도요지를 찾던 필자는 김종규씨의 제보에 의해 오야곡이 원래 "瓦冶谷" 또는 "瓦野"였다는 것과 그 부근에 있는 330년전의 파평윤씨묘비에 "瓦冶谷"으로 나와있음을 확인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여러기의 요지가 남아있으며 슬랙과 와편, 토기편이 무더기로 남아있는데 본회의 조사과정에서 "官"자의 명문기와가 발견되었다.

14. 백제시대요지
   궁안마을 남쪽, 금암산 줄기 아래 불에 탄 흙과 와편, 전편, 슬래그 등이 나오고 있는데 이 곳은 김종규씨의 말에 의하면 부근에서 흙이 가장 좋아 부뚜막에 바르려고 많이 가져가 대부분 훼손되었다고 한다. 오야곡 요지가 고려나 조선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삼국시대의 것이 많이 나오고 있어 필자는 백제시대의 요지로 추정하고 있다.

15. 奉水寺址
   항동의 부처골에서 당초문암막새와당, 점선문와당이 나오고 있는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奉水寺俱在漢山"라고 하여 약정사와 함께 한산에 있었으나 正祖 당시에는 이미 없어졌다고 하는데 필자와 김종규씨는 이 곳을 봉수사지로 지목하고 있다.

16. 과목산절터
   김종규씨는 항동의 과목산에서 칠연엽숫막새와당을 수습하였는데가운데 동심원 속에 작은 둥근원이 있고 도드라져 나와 있으며 주위에는 동심원이 있고, 그 속에는 작은 점들이 줄줄이 도드라져 있고, 그 사이에 배치된 7개의 연꽃잎파리는 하트모양이다. 필자가 답사하여보니 객산을 마주 바라보는 좋은 위치로 격자문 와편이 나오고 있어 백제시대의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7. 호랑이굴절터
   구마모토(熊本)의 향토사학자이며 시의회의장인 고가(古閑三博)씨를 백제시대의 동굴유적인 공암과 고구려시대의 동굴유적인 강화도의 혈구를 안내하였다. 그후 필자는 동굴신앙과 穴寺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고자 공주지역의 남혈사, 서혈사, 동혈사 등의 혈사유적을 답사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 종규씨가 금암산 밑에 호랑이굴이 존재함을 제보하였다. 본회에서는 이곳을 답사하여 동굴과 절터를 확인하였다. 筆者는 이 절터를 한성시대의 西穴寺址에 해당되는 절로 추정하였다.

18. 북쪽사지
   본회와 세종대학은 교산동토성 서쪽 성벽을 북으로 쫓아 답사하던 중에 성벽의 제일 끝 쪽에서 탑에 쓰인 석재와 와편을 발견하였다. 이 곳은 절터가 들어서기에는 매우 작은 공간이었다. 이 곳에 세운 탑은 한강 쪽에서 들어올 때나 향교고개, 혹은 사리고개를 넘어 올 때 어느 곳에서나 다 보이는 높은 위치로 인하여 백제 당시에 중요한 사상적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당시 북쪽사지 언덕 아래 논에서 삼족토기편도 발견하였다.

19. 안샘재절터
   교산동토성 안에서 절터를 찾던 중에 조상규씨의 제보를 받았다. 이곳에는 우물이 있었으며 연꽃잎이 새겨진 주초석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본회에서 조사하여 보니 이 곳에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와편들이 널려져 있었다. 이 곳은 교산동토성 안에 존재하던 절로 선법사터에 있었던 고대의 사찰과 함께 매우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20. 禪法寺
   선법사는 객산폭포와 약수가 있는 곳으로 폭포 옆에는 약사여래불이 새겨져 있으며 그 옆에는 "太平二年丁丑七月二十九日, 古石佛在如賜以重修, 爲今上皇帝萬歲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홍직교수는 태평 2년을 宋나라 太平興國 2년인 高麗 景宗 2년(977)으로 보고 있다. 古佛과 重修라는 말이 새겨져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의 사찰을 고려시대에 다시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본회는 조사과정에서 선법사 바로 뒤의 언덕에서 주초석과 6각형기단석 및 축대를 발견하였는데, 이 축대는 왕궁터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곳에서 백제시대의 와편과 토기편이 나오고 있어 백제시대의 사찰지였음을 확인하였다 더구나 마애불의 발밑에는 선법사 주지스님이 공사 중에 발견한 八蓮葉의 좌대가 놓여져 있는데 백제시대의 막새와당과 흡사하면서 그 중심에는 5개의 원이 새겨져 있어 五方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선법사를 지을 때에 고식기와가 퇴적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주지스님이 전해주었다.






21. 게두사지
   필자가 선리에서 나온 명문기와의 "北漢受國蟹口船" 중에서 蟹口에 대해 연구하던 중에 이성산성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이 "게내(蟹川)"임을 알게 되었다. 김종규씨가 향교고개 부근에 게내의 발원이 되는 샘물 근처에 "게두사"라고 불리우는 절이 있음을 제보하여 본회에서 조사하였다. 필자는 이 절이 위치한 지역은 게내의 발원지로 "게내"와 머리 頭, 절 寺를 합쳐 "게頭寺"로 불리워졌음을 알게 되었다. 게내라는 해천은 반월산성의 발굴된 蟹口라는 명문와편에서도 보듯이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2. 黔丹寺址
   한종섭씨에 의해 조사된 절터로 검단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절터에서도 동굴이 발견되었는데 필자는 이것을 한성시대의 東穴寺지로 추정한다

23. 七星바위
   김종규씨의 제보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교산동토성 서북쪽 모서리에 존재하며 폭 1m 이상이나 되는 거대한 7개의 자연바위를 2∼5m간격으로 하여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하였고 그 옆에는 치성을 드리던 바위가 따로 마련되어있다. 筆者는 이것이 검단산 정상과 이성산성의 9角形 건물지와 일직의 신성라인 상에 위치하고 있음을 발견하여,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백제인들의 고대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9각은 天壇이며, 7星 또한 하늘의 중심자리를 나타냄을 고구려의 벽화와 민간에 남아있는 칠성신앙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日本書紀≫추고천왕 5년에 일본에 건너간 백제의 임성태자가 11년에 북진성국을 세우고 "北斗七曜石"을 봉납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유적이 바로 그 실물임을 알 수 있었다.




24. 능너머고분
   이곳은 능이 있는 곳이 아닌데도 "능너머"라고 불리우고 있음을 김종규씨가 제보하였다. 한종섭씨에 의해 능을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애불→동사지→능너머→왕궁터→선법사로 이어지는 있는 신성라인(Holy Line)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곳은 남북 70m, 동서 50m의 장방형 토대로 높이는 약 4∼5m정도로 삼국시대의 와편과 더불어 "王戍", "元夫", "丈解", "壽言由", "官"자 등의 명문기와가 나왔다. 이 중에서 한종섭씨는 元夫는 "으뜸되는 지아비"로 시조의 능을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筆者는 "왕을 지킨다"다는 王戍라고 쓰여진 기와는 고구려 장군총 꼭대기에 있었을 享堂과 같이 이 능의 정상부에 존재하였던 향당에 쓰였던 기와로 추정하였다. "丈解"는 "10尺이나 되는(거대한) 태양"으로 거대한 태양과 같은 왕의 존재를 뜻한다. "壽言由"는 "오래살기를 빈다"는 뜻으로 고구려 천추능에서 나온 "千秋萬歲"와 비슷한 뜻으로 추정한다.1995년 6월 세종대학과의 공동조사시 능너머 정상부에서 식수를 위하여 작업 중 파괴된 석관묘에서 백제의 타날문토기편을 수습하였다.이때 식수를 위해 파여진 구덩이를 확장하여 두 개의 구덩이를 1.5m 정도 시굴하여보니 두 곳에서 강돌이 덮여있고, 그 아래에는 주조에 쓰이는 검정색에 가까운 매우 고운 강흙이 깔려 있었다. 두 곳은 경사를 이루고 있어 집안 지역에서 나타나는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을 연상케 하였다.




25. 금암산 석곽묘군
   한양대의 ≪二聖山城 3次發掘調査報告書≫에 금암산과 이성산을 이어주는 능선상에 200여기의 석곽묘군이 분포되어있으나 상당수가 도굴 파괴되었다고 하였다. 본회에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석곽묘의 방향이 대부분 진북방향을 가르치고 있어 백제시대의 석관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26. 객산 석곽묘군
   본회의 조사과정에서 객산 정상의 남쪽에 위치한 되촌말과 그 부근의 막은데미에도 석곽묘군이 산재하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특히 산기슭에 있는 막은데미의 석곽묘는 금암산의 석곽묘와 같이 진북방향으로 배치되어있어 백제시대의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

27. 옹관묘출토지
   이철재씨는 현재 객산을 뚫고 나오는 수로공사를 하던 중 대형의 합구식옹관묘를 발견하여 신고하였으나 당국에서 별로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후일에 생각하여 보니 매우 중요한 백제시대의 유적이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필자에게 전하여 주었다.

28. 적석총고분군
   1998년 7월 한종섭씨와 윤명철교수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어둔이고개 부근의 산자락에 자리잡은 200여기의 적석총으로 본회의 조사과정에서 1998년 파괴된 적석총에서는 철창, 회백색 연질타날문토기편 등을 수습할수 있어 백제의 한성시대 유적일 가능성이 있었다. 현재는 야밤에 몰래 모두 가져가 파괴되어 버렸다.

29. 돌무데기
   송파구 거여동 돌무데기라는 온 마을에 돌무데기가 많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필자가 조사를 하여보니 이 곳은 금암산을 넘는 가장 평탄한 고개인 널무니고개를 넘자마자 위치한 곳이였다. 이 부근의 서부국민학교를 다녔던 김은수씨의 말에 의하면 일제시대까지만 하여도 이 곳에 10여기가 되는 거대한 돌무데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서울로 편입되면서 민가가 들어서 흔적조차 없다. 1995년 7월 본회에서는 이곳을 조사 과정에 고인돌 2기를 발견하였다. 필자는 이것을 용인지역에 산재한 돌무데기와 함께 한성시대의 무기단적석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30. 신부골돌무데기
필자가 김종규씨의 제보로 신부골의 절터를 답사하던 중 널무니고개를 못가서 신복선사절터 부근에서 무기단적석총으로 추정되는 돌무데기를 발견하였다.

31. 遇陵
   ≪南漢秘史≫에서 구민회씨는 감일리 천마산 기슭 능안의 "우렝이짝"에 담을 길게 쌓은 흔적과 터가 남아있는데 이것은 백제시대의 우능을 수호하기 위한 陵寺로 보았다. 그리고 그 부근에 "재궁", "능넘어"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윗가챙이", "아래가챙이"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이것은 백제시대의 우능을 모시면서 임시로 假廳을 설치하였던 곳이며 재궁이란 임금의 시신을 모시던 곳으로 ≪日本書紀≫ 卷第13, 允恭天皇 5年條와 공주의 정지산 유적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이규보가 강원도에 갔다가 개경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이 곳을 지나다가 "긴 강물 저녁노을이 우릉의 숲에 젖어 들다"라는 시를 지었다. 그는 현재 고려와 조선조에 遇陵이라는 능호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 곳을 백제시대의 왕능으로 비정하였다. 필자는 이 능은 한성 안에 존재하는 적석총과는 달리 최초의 토분일 것으로 상정하고, 이곳에서부터 방이동 쪽으로 내려가면서 토분이 나타나고 있다고 추정하였다. 이 우능을 찾기 위하여 우렝이짝과 윗가챙이 등 천마산 언저리를 수차례에 걸쳐 답사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한종섭씨가 2000년 2월에 천마산 부근에서 거대한 능을 발견하였다.

32. 이성산성의 대형고분
   김종규씨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이성산성 입구에서 우측 성벽을 따라 올라가면 두 개의 대형고분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미 도굴된 것으로 횡혈식석실고분으로 추정된다.

33. 궁남지(추정)
   ≪三國史記≫ 백제본기에 궁남지의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부여의 부소산성 바로 아래의 추정왕궁지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주작대로를 따라 가다보면 정림사지가 나오고 이곳에서 더 내려가면 궁남지가 나오며 그 옆에 이궁지가 있다. 최근 두머니에서 한종섭씨가 공사 도중 궁남지유적으로 추정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지하 약 3m 깊이에서 뻘층이 약 1m 정도 두께로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은 현재 추정왕궁지를 기점으로 남쪽으로 천왕사, 추정궁남지로 이어지고 있어 사비시대의 추정궁지, 정림사지, 궁남지로 되어있는 도시 배치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34. 운하(추정)
   한종섭씨에 의해 덕풍천 주변에 두 군데에서 지하 2m 아래에 운하로 추정되는 토축 제방이 발견되었다. 이 운하의 폭은 약 20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일본에 백제 유민이 건설한 대재부를 막던 水城에 남아있는 운하와 매우 비슷한 구조로 한강으로 흘러드는 덕풍천을 이용하여 운하를 이용해 궁성안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풍천은 교산동토성을 막던 해자로도 사용되고 있다.



Ⅲ. 결론

   본회에서 1992년 3월8일 이후 10여년에 걸쳐 조사한 하남시 일원의 백제문화유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교산동토성과 추정궁지, 천왕사, 금암산아매불, 능너머, 동명묘제단터, 제방, 瓮路를 포함한 羅城유적 등은 한성시기의 백제 도읍지를 밝혀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온조는 하북위례성에서 말갈과 낙랑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게되자 직접 나서서 하남지역을 둘러보고 하남위례성이라는 신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한 후에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 곳이 바로 "한산 밑에 책을 세웠다"라고 표현되는데, 漢山이 이 곳이었음이 藥井寺 명문과 ≪太宗實錄≫의 기록을 통해 확증되었으며, 柵이 토성을 나타내는 사실은 이미 발굴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즉 현재 남아있는 校山洞土城은 평지에 있는 얕은 산자락을 최대로 이용한 토성이며, 그 안에 남아있는 推定王宮址는 거대한 자연초석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는 백제시대의 궁성으로 거론되고 있는 몽촌토성에서나 풍납토성에서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백제에서는 불교가 매우 융성했음은 알고있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몽촌토성이나 풍남토성은 그 부근에 불교사찰들이 하나도 조사된 것이 없다. 그러나 고골지역에서는 미륵사나 황룡사와 같이 거대한 평지 사찰이 天王寺, 桐寺 등 2개나 있었다. 이 사찰들에는 木塔 또는 塼塔이 있었으며 그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었음이 밝혀졌다. 불사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얻어와 설악산의 봉정암, 정선의 정암사, 영월의 법흥사, 오대산 상원암, 양산의 통도사 등 5대 적멸보궁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그 외에도 고성의 건봉사와 선산의 도리사 등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天王寺 塼塔은 백제시대에 佛舍利가 모셔져 있었던 매우 중요한 곳임을 밝혀주고 있다.

  필자가 이미 밝힌 것과 같이 風納土城은 발굴결과 유적이 퇴적된 지하 4∼5m에서 나타나고 있고, 일제시대인 을축(1925)년 대홍수 때에는 성벽의 일부가 떠내려갔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풍납동마을이 물에 잠겨 필자가 친구의 집에 가서 여러 번 도와준 사건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이곳에 백제의 왕궁이 존재하였다면 백제의 왕들은 비가 올 때마다 불안에 떨거나 피난을 했어야만 한다. 夢村土城은 송파벌에 존재하고 있는 성으로 적이 이 벌판을 차지하면 완전히 포위될 수 있는 곳이다. 이것은 동경성에 자리잡고 있는 발해의 상경용천부가 벌판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므로써 요나라에게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던 역사적 사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백제와 끊임없이 충돌해왔던 고구려가 國內城이 준엄한 산줄기로 막혀있는 분지에 자리잡았고, 그것도 모자라 환도산성을 만들어 유사시 그 곳으로 피난하였던 사실을 본다면 백제 도읍지 또한 이와 비슷한 지리적 조건을 구비했다 본다. 하남시의 고골 지역은 남한산성이라는 산성이 배후에 존재하여 유사시 그곳으로 피난할 수 있으며, 북쪽에는 해자 역할을 하고있던 한강이 있고, 동, 서, 남쪽의 三面이 산으로 막혀있는 분지여서 국내성과 비슷한 지형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고골은 골짜기마다 절터가 즐비하여 경주의 남산과 비견할 만 곳으로서 백제의 도읍지로써 가장 적합한 곳이다. 그리고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등 단일 토성유적에서는 볼 수 없는 도시적 구조를 나타내고 있는 유적들이 배치되어 있어 고대도시로서의 추정복원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百濟文化硏究會 회원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밝혀졌음을 연구자의 입장에서 감사드리며, 추후 발굴과 함께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동참하여 잃어버린 백제 漢城時代의 역사가 하루 빨리 복원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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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 발견된 전방후원분과 관련된 단체는 강동문화원이지만 직접 조사한 곳은 백제문화연구회입니다. 이곳은 풍납토성이 백제의 수도였다는 학설을 부정하면서 풍납토성은 백제의 일개 성곽일 뿐이고 실제 수도는 하남시의 도시 유적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하남시에 있는 백제의 도시 유적은 인정하지만 고려시대 유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백제문화연구회에서는 전체 유적이 백제의 도시이고...백제의 수도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발견된 전방후원분도 서울시 강동구와 하남시에 걸쳐서 있는 것으로.. 하남시에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라는 주장의 강력한 증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위에 보면 동사지(桐寺址)에 관해서 나오는데...위의 논문은 예전 자료이고.. 최근에 추가적으로 조사한 것에 따르면 목탑의 크기가 28m에..9칸의 한국 최대 목탑으로 밝혀졌습니다. 황룡사 목탑이 22.3m에 7칸이라는 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죠. 하지만 이것에 관해서 하남시의 백제 수도설을 부정하는 쪽에서는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말하고.. 인정하는 쪽에서는 백제 초기 사찰이라고 말합니다.. 그 외에도..백제의 사찰이거나 성곽 도시, 궁궐 유적이라고 주장되는 여러 유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번 전방후원분과 많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전방후원분이 인정된다면..하남시의 도시 유적도 인정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풍납토성과 대치되는 것으로..백제가 한성백제시절부터 거대 도시를 만들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릴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현재로써는 어느 쪽의 주장이 맞는지 판단을 유보하겠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론..대부분 사람들은..내용이 길어서 읽지 않겠지만요..



요약

1. 전방후원분을 조사한 곳은 백제문화연구회이다.
2. 백제문화연구회는 풍납토성이 아니라 하남시가 한성백제시대의 수도라고 주장한다.
3. 백제문화연구회의 주장에 따르면 하남시에는 사비성이나 평양, 서라벌이 맞먹는 거대도시가 있는 곳이다.
4. 한국 역사상 최대의 목탑 유적 등 수많은 사찰 유적, 궁궐, 운하, 성곽 등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5. 만약 전방후원분이 인정되면 하남시가 한성백제시절의 수도였다는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