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하남의 도미나루가 시사하는 백제도성' ㅡ 3. 하남의 도성소재 당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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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하남의 도미나루가 시사하는 백제도성'
3. 하남의 도성소재 당위성
2013년 08월 05일 (월) 10:52:35윤제양 기자 yjy2040@empal.com
      

1)하남에 백제도성이 있었던 이유


(1)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과 한성(漢城)은 한산(漢山)에 있었고 한산은 하남(河南市)에 있다.


   삼국사기 권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BC18)조에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만한 땅을 둘러보았다. 열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하남위례성에 도읍하였다고 하여 한산(漢山)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고 온조왕13년(BC6) ‘가을 7월에 한산아래(漢山下)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기고 온조 14년(BC5) 봄 정월에 수도를 옮겼다’ 고 하였으며 온조왕25년(7) ‘봄 2월에 한성(漢城)의 인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하였고 근초고왕26년(371)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라고 하여  백제의 도읍이 한산을 떠난 때가 없었다.

그러면 한산은 지금 어디에 있는 산이라는 것인가.


   하남에는 많은 절터가 있는데 대략 열거하면 동사(同,桐寺) 천왕사(天王寺) 약정사(藥井寺) 자화사(慈化寺) 신복선사(神福禪寺) 봉수사(奉水寺) 선법사(禪法寺) 법화사(法華寺) 도미사(渡迷寺) 서양사(상사창동 샘골) 계두사 여가산절 범굴절 사막골절 검단산절 등 상당히 많으며 이들 중 약정사(藥井寺) 신복선사(神福禪寺) 봉수사(奉水寺)는 1530년(중종25)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광주목(廣州牧) 불우조(佛宇條)에서 모두 한산(漢山)에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약정사 재한산(藥井寺在漢山)’이라 하여 ‘약정사는 한산에 있다’ 하였고, ‘신복선사 구재한산(神福禪寺俱在漢山)’이라 하여 ‘신복선사는 한산에 함께 있다’ 하였으며 ‘봉수사 구재한산(奉水寺俱在漢山)’이라 하여 ‘봉수사는 한산에 함께 있다’라고 사찰의 소재지를 명기하고 있는데 이 세 사찰 모두 근자에 명문기와 출토 등으로 모두 하남시(河南市)에 있음이 확인되었다.36)

그러면 한산(漢山)은 하남시(河南市)에 있는 산이 명백하니 ‘한성백제(漢城百濟)의 도성(都城)이 한산(漢山)에 있었다.’ 함은 ‘한성백제의 도성이 하남시(河南市)에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한성백제 시대의 한산을 현재 남한산에서 하남시를 양쪽으로 병풍처럼 삼태기 또는 말굽형태로 두르고 있는 U자(字)형의 커다란 산 전체를 한산으로 지칭한다.
 
   이는 이러한 U자형의 산에 유적 유물이 고르게 분포하고 있음에 기인한 것으로 그 안에 광주의 치소(治所)인 광주관아(廣州官衙)가 있었으며 이는 백제 초기부터 1626년(인조4) 남한산성으로 관아가 이전하기까지 약1644년(1626+18)동안 옛 광주(廣州)의 중심도시에서 벗어난 때가 없었다.
따라서 한산(漢山)이 소재한 고을이기 때문에 한산주(漢山州)가 되었고 한산주의 진산은 인근의 검단산이며 광주향교가 하남시에 있음도 그 까닭이다.
옛 광주의 관아는 남한산성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한산이 있는 현재 하남시 춘궁동에 존재하였다.


   그리고 이성산성(二聖山城) 3차 발굴시 산성내의 제1저수지에서 출토된 목간(木簡)에 ‘무진년 정월십육일 붕 남한성 도사..(戊辰年正月十六日朋南漢城道使,,)’40)라는 묵서명문(墨書明文)은 도사(道使)41)라는 관직명으로 보아 고구려나 통일신라시대의 목간임을 암시하고 있지만 목간이 출토된 위치가 저수지 바닥에서부터 1m 위의 쌓인 토사 속임을 상기할 때 토사가 1m까지 쌓이는 기간과 저수지를 사용할 때의 수시로 준설하는 관리 작업이 병행되었음을 감안 할 때 산성(山城)이나 저수지의 조성연대는 훨씬 그 이전으로 계산되어야 할 것이며 명문내용이 이성산성은 남한성(南漢城) 또는 한성(漢城)으로 불리었다는 방증(傍證)으로 이 산성이 한산(漢山)에 있는 성이라는 뜻이므로 이곳이 한산(漢山)이었음을 간접시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백제가 현재의 하남시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처음 도시가 형성된 것이요 그 도시가 유지되었기에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 까지 지역중심도시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풍납토성이 도읍이었으면 당연히 그곳을 중심으로 발전되었을 것인데 풍납토성은 옛 광주지역의 중심에 있었던 시기가 한 번도 없고 변방 한촌으로 있었기에 도시 발전과정을 상기해 보아도 한성백제가 하남에 소재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2) 하남 춘궁동에는 ‘궁안(宮內) 등 마을이름이 현재까지 통용되고 있다.


   하남시에 백제궁터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춘궁동에는 지금도 궁안(宮內)이라는 지명이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현재 춘궁동(春宮洞)의 지명도 춘장리(春長里)와 궁내리(宮內里)가 합성되어 생긴 이름이며 백제시대에 처음 축조37)된 이성산성(二聖山城)은 춘궁동에 소재하며 춘궁동을 중심으로 한 부근지역을 ‘고골(古州)’이라고 하여 ‘옛 고을’ 이라는 지명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인근 하사창동(下司倉洞)은 골말(州村)이라고 부르는데 ‘고을 마을’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보고 있다.



(3) 백제 개로왕 시대의 기록인 연하수언(緣河樹堰)과 숭산(崇山)은 하남에서만 고증이 가능하다.  

 
   삼국사기 권제25 백제본기 제3 개로왕조(蓋鹵王條)에 동왕(同王)21년 ‘연하수언 자사성지동 지숭산지북(緣河樹堰自蛇城之東至崇山之北)’이라고 하여 ‘강을 따라 둑을 세워 사성 동쪽에서부터 숭산 북쪽까지 이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제방은 고구려의 첩자 도림(道琳)이라는 승려가  장기와 바둑으로 개로왕에 접근하여 백제의 국고를 탕진하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술책으로 개로왕에게 제시한 네 가지 국책사업이 성곽정비사업, 왕궁신개축사업, 선왕의 능침조성사업, 제방축조사업인데 그 마지막 사업인 ‘강을 따라 제방을 쌓는(緣河樹堰)’ 공사의 이유를  ‘백성지옥려루괴어하류(百姓之屋廬屢壞於河流)’ 라 하여‘ 백성들의 가옥과 농막은 번번히 강물에 허물어지니’로 매년 홍수를 방지하는 방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성(蛇城)동쪽에서 숭산(崇山)북쪽 까지라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그곳은 하남시 강변마을 망월동의 ‘장수동마을’에서 검단산 강가까지를 이르는 말이다.
사성이 있었던 마을은 미사리 조정경기장 근처 장수동 마을로 비정하는 까닭은 마을부근에 ‘뱅개’라는 포구가 있고 그 포구를 중심으로 그곳에 토성을 쌓았던 흔적이 완연한 구릉이 있으니38) 즉 한문으로 하면 사포(蛇浦)로 되며 또 장수동 마을 이름을 6-70년대 까지만 하여도 ‘장수구렁이’라 호칭하였는데 이는 ‘장사구렁이’에서 와전된 것으로 본다.
장사(長蛇)는 ‘긴 뱀’ 또는 ‘큰뱀’이라는 뜻이니 즉 ‘구렁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때는 장사(長蛇)마을로 부르다가 구렁이라는 말이 더 따라붙은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축구(蹴球)’를 ‘축구차다’고 한다거나 ‘역전(驛前)’을 ‘역전앞’으로 부르는 경우와 같다고 할 것이다.
한편 뱅개(蛇浦)를 두르고 있던 토성(土城)의 모양이 뱅개를 중심으로 큰 구렁이가 둥글게 똬리를 틀고 있는 모양을 연상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장수동 마을에 살았던 지인에 의하면 5-60년 전만하여도 현재 미사리 조정경기장의 남쪽 길이 길다란 제방(둑)이었다 한다.39)    
특히 연하수언(緣河樹堰)의 축성목적이 홍수방지인 만큼 홍수가 걱정이 없는 지역은  둑을 쌓을 필요가 없으니 보통 성(城) 같으면 망월동 구산(龜山)으로부터 축성하였을 것이나 구산으로부터 사성까지의 거리는 약 3-400m로 같은 한강변이라도 지대가 상대적으로 높아 홍수의 위험이 없으므로 제방을 쌓지 않고 지대가 낮은 상습침수지역의 홍수예방을 위해 사성 동쪽부터 둑을 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풍납토성근처에서 검단산 까지 연하수언을 축성하였다고 일부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 구역 한강변에는 산도 있고 전혀 홍수와 상관없는 고지대인 구암서원 부근에도 연하수언을 축성하였다는 이야기로 이는 축성목적을 도외시한 군사적 방어성으로 착각하여 제시된 주장에 불과하다.     


   한편 당시의 연하수언(緣河樹堰)이 조선후기의 지도에 연하언(蓮河堰)으로 표시되어 있으니 1725년 여지대전도의 광주부도(廣州府圖)를 비롯한 1735년 해동여지도의 광주부도, 1767년-1776년 사이에 발간된 광여도의 광주부도, 18세기 중엽 경기도지도의 광주부도, 18세기 중엽 여지도의 광주부도 등에서 백제시대 연하수언(緣河樹堰) 축조구간(築造區間)인 하남의 장수동마을(蛇城)에서 검단산(崇山) 구간에 연하언(蓮河堰)이라는 이름으로 표시되어 있으니 조선후기까지도 연하수언의 명맥이 이어져 왔음을 입증하고 있으며 풍납토성에서 장수동마을 구간에는 표시되어 있는 곳이 한군데도 없다.  
그리고 검단산(黔丹山)을 숭산(崇山)으로 보는 이유는 검단산이라는 자체가 ‘신성한 제단이 있는 큰 산’ 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고 온조왕 원년(BC18)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인 동명묘(東明廟)가 세워졌던 산으로 지목함에 무리가 없으며 동명묘제단을 발견하였다는 학자가 있고 전술한 백제의 고승 검단선사의 이름을 차용하여 검단산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광주의 진산(鎭山:혹은 主山)으로 임금의 사냥터로 사용되고 그 사냥을 기우의 방편으로 시행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나라의 기우제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4) 하남시에는 도성근처에 대형 사찰이 있었다.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 가을 7월에 진나라(晉)나라 호승(胡僧:서역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로부터 불교가 전승된 이후 침류왕2년(385) 봄 2월에는 한산에 가람을 창건하고 승려 열 명에게 도첩(度牒:승려의 신분증명서)을 주었으며 그 후 나라에서 불교를 육성하여 많은 승려들이 일본에 가서 불법을 전하고 일본사찰건립의 주역을 담당하였는데 그러면 도성 근처에는 신라나 일본처럼 왕실에서 운영하는 대사찰이 있어야 하는데 하남에는 백제시대의 사찰로 추정되는 두개의 큰 절터를 보유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춘궁동 동사지(桐寺址)로 2010년 8월에 문화재 관리국에서 발간한 ‘문화재 대관 사적 제1권’44)에서 발굴된 백제 토기 및 와편 등을 근거로 백제시대 사찰의 가능성이 유력하다는 발표가 있었으며 경주 황룡사에 필적할 규모를 가졌던 사찰로 백제왕성으로 추정되는 이성산성(二聖山城) 정남향 약 1km에 있다.
다른 하나는 하사창동의 천왕사지(天王寺址)로 2천여 평을 상회하는 대사찰로 이곳에서는 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철불(鐵佛)인 춘궁리 철조여래좌상(春宮里鐵造如來坐像)이 있었던 절터이며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소장하였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천왕사지는 교산동 건물지(校山洞建物址)의 정남향 약 1km에 위치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유수(有數)한 고고학자에 의하면 천왕사의 발굴이 더 진행되면 370년대의 백제시대 사찰로 확인될 가능성이 짙은 사찰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교산동 건물지는 백제왕궁지(百濟王宮址)설과 객사(客舍)설이 상충되고 있다.
광주객사라는 주장의 근거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는 것인데 다른 인근지역에서도 같은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혼동을 주고 있다.
또한 건물지 발굴결과 온돌시설이 없으며 객사로서는 너무 크고 관아로부터의 거리가 너무 멀며 아홉 번이나 중건한 흔적이 있는 등 왕궁지(王宮址)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2) 풍납토성이 백제도성이 아닌 이유


(1) 종합적 방어를 염두에 두지 않은 도성이다.


   나라의 도성(都城)을 정할 때는 나라가 외침으로부터 위급할 때 어떻게 대처가 가능하다는 몇가지 방어와 퇴로설정은 기본사항이다.그러나 풍납동 토성은 한강이 해자의 역할을 하여주는 이점도 있으나 일단 방어선이 뚫렸을 경우 대처가 매우 어려운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고대의 도성은 대개 자연적 산의 배치를 울타리로 삼고 퇴로역시 산을 통하여 연결됨이 상식인데 풍납토성은 평지성(平地城)으로 포위와 공격당하기 쉬운 허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대가 낮아 상습적 홍수지역이며 풍납(風納)이라는 말처럼 북서풍이 세차게 들이치는 바람맞이 땅으로 도성으로 사용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지역이다.
이는 백제의 유입경로를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세력과 결별하고 남하한 부여 계통의 나라이다.   
고구려의 졸본성(卒本城)인 오녀산성(五女山城) 그리고 환도산성(丸都山城) 국내성(國內城) 그리고 백제가 475년 한성시대를 고구려와의 패전으로 마감하고 그 후 웅진성(熊津城:공주) 사비성(泗泌城:부여) 등지로 천도하였는데 열거한 모든 도성은 산에 의지하여 있다.
이러한 북방민족의 방어이념이 충실한 도성선정 성향에 비추어 풍납토성은 너무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평지에 고립된 작은 성으로 고대국가의  도성선택의 일반성에서 크게 벗어난 허약성을 내포하고 있다.


(2) 풍납토성은 주변에 산이 아예 없고 한산으로 지칭되는 남한산(南漢山)과 금암산(金岩山)및 객산(客山) 등이 보이지 않고  숭산(崇山)으로 지칭되는 검단산도 볼 수 없어 이들 산과 연관된 백제사를 풀어나가기 난감한 성이다.


(3) 풍납토성 주변에는 하남과 달리 삼국시대는 물론 그 이후의 사찰도 발견하기 지난하며 특히 대형 사찰지가 없다는 것은 도성의 존재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      
 
(4) 풍납토성 하나를 가지고 고구려 군사 3만 대군이 7일 동안 밤낮으로 공격하여 함락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475년 가을 9월에 고구려 장수왕은 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사로잡아 아차성(阿且城)아래로 끌고 가 죽였다. 고하였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14 유라쿠(雄略:재위 456-479)천황 20년 조(條)에는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하여 ‘개로왕 을묘년 겨울에 박(狛:개라는 뜻으로 적국의 왕인 장수왕을 지칭)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밤낮 동안 공격해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성을 잃었으며 국왕 및 대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고 기록하고 있는데 과연 3만 대군이 평지의 작은 성에 불과한 풍납토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할 대상이 되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무래도 하남의 이성산성(二聖山城)처럼 산 위에 있는 견고한 성일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5) 왕성이라면 왕궁지(王宮址)가 있어야 하는데 풍납토성에는 왕궁지와 초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왕이 수백년 거처하였다면 성안는 반드시 왕궁지가 있어야 한다.왕궁지를 확인하는 것은 주춧돌인데 주춧돌 없는 왕궁을 그것도 건축술에 있어서는 삼국 중 가장 발달한 백제가 주춧돌 하나 없는 왕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해가 가겠는가?  


(6) 풍납토성은 왕성이 아니고 온조왕이 한강 서북쪽에 쌓은 다용도 성(城)으로 봄이 타당하다.
삼국사기 권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14년(BC5)조(條) 봄 정월에 수도를 옮기고(한산 아래에)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 주민들을 그곳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고하였고
온조왕43년(25) 가을 9월에 큰 기러기 1백여 마리가 왕궁에 모여들었는데 일자(日者)43)가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의 형상이니 장차 멀리서부터 와서 의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家)가 부양(斧壤)으로 와서 정성을 바쳐 복종해 오니 왕이 받아들여 한산의 서쪽에 안치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먼저 온조왕 14년에 한강서북쪽에 쌓은 성은 한강 서북쪽이라 하였으니 한강의 어디를 기점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범위가 너무 넓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그해 1월에 한산 아래(漢山下)로 수도를 옮겨 왔으므로 옮긴 수도(한산)의 위치에서 보았을 때 한강가의 서북쪽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면 정확히 하남에서 보아 풍납토성은 서북쪽이 된다. 만약 풍납토성에서 서북쪽의 한강가의 성으로 민가를 나누어 살만한 정도의 성이 존재 하는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온조왕43년 남옥저(南沃沮)에서 귀순한 20여 가구의 백성을 한산의 서쪽에 안치하였다. 고하여 그 기준점을 도성이 소재한 한산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면 한산의 서쪽이면 어디일까 그것은 풍납토성을 떠 올릴 수 있다.
그들을 받아들임에 있어 확실한 성향은 자세히 알 수 없었을 것이므로 도성(都城)에 두는 것 보다는 도성과 그리 멀지 않은 풍납토성에 살게 하는 것이 왕실의 신변보호에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온조왕 14년에 한강 서북쪽에 축조한 군사와 민생과 왕릉보호를 위한 복합용도의 성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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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하남의 도미나루가 시사하는 백제도성'
2. 다른 지역의 도미설화
2013년 06월 10일 (월) 16:27:48윤제양 기자 yjy2040@empal.com







1)송파의 도미설화
   송파의 도미설화는 하남의 도미설화와 다른 점으로 도미의 직업이 목수이며 도미부인의 이름이 아랑인데 도미부인이 떠난 나루는 송파강의 송파나루로 되어있다.
 
1939년 문장지에 박종화의 소설 ‘아랑의 정조’가 실린 이후 소설에서 전설의 내용이 보강되어 유포된 것으로 생각되며 하남의 도미나루가 많은 문헌과 지도 등에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송파나루의 도미전설은 구전에 의한 설화로서만 유지되고 있어 객관적 고증이 매우 빈약하며 아랑 또한 현대에 작명한 이름에 불과하여 박종화의 소설에 영향 받아 구성된 전설로 생각된다.


2) 충남 보령시 오천면의 도미설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의 도미설화는 오천면 소성리에 도미항(道美港)이 있고 도미부인이 남편을 그리던 상사봉(想思峰)이 있으며 미인도(美人島)가 있다는 등의 근거를 들어 도미설화의 고장임을 부각하여 1991년 ‘보령의 도미설화’ 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였고 1992년에는 도미부인의 정절각(貞節閣)을 세웠으며 1994년에는 도미부의 정절사(貞節祠)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2003년에는 도미부부 묘소까지 이장하고 조성하는 등 일련의 과정들이 근년에 와서 진행되었다.

보령의 도미부인 전설의 내용은 백제 개로왕 시대에 군용마를 기르는 전마뜰(戰馬坪:청소면 진북리의 넓은 들)에 왕이 자주 출행하였는데 왕이 이곳에 와서 들으니 도미라 하는 목수 한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아내가 천하일색(天下一色)이란 말을 듣고 왕은 욕심이 나서 도미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하는 내용을 전개 시켜 도미가 살던 마을을 도미(都彌)마을 이라고 하다가 그 후에 도미(都美)라고 하였는데 그 마을이 도미항(都美港:오천면 교성리)이고 도미의 아내가 성장한 현재 도미항 앞의 그림같이 예쁜 섬을 미인도(美人島)라 하며 뒷산은 도미의 아내가 올라가 남편을 생각하고 슬피 울었다 하여 현재의 오천면 선림사 앞에 위치한 산봉우리를 상사봉(想思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1983년 이고장의 향토사에 관심이 많은 허준31)씨가 새로운 지방 전설을 창작하여 만들어 내 ‘내 고장 보령’ 이라는 책자로 발간한 것이 보령 도미설화의 시작이었다.
 
   따라서 지역 역사의 사실성이나  근거에 상관없이 삼국사기 도미설화와 소설 아랑의 정조에 내용을 담은 이야기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이 설화를 집필한 허준 씨는 일제강점기 때 고향이 웅천인 역사학자 황의돈(黃義敦)씨와 서울에서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집에 자주 출입하였는데 한번은 도미설화를 알려주고 도미설화의 고장을 알 수가 없으니 자네가 한번 찾아보라고 하여 고향에 내려와 이곳저곳의 지명을 생각해보니 오성면 도미항 부근이 딱 맞아 떨어져 이야기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1) 

그것이 지역을 알리고 관광자원화 하고자하는 당시의 시 관계자 및 지역지도자의 호응을 얻어 시 예산으로 도미설화 지역정비 사업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2003년에는 경남 진해시 청안동에 전해오는 성주도씨(星州都氏) 정승묘가 도미(都彌)의 묘로 성주도씨 종중에서 받들어 오고 있었는데 그 묘가 임해공단 개발지역으로 편입되기에 이르자 이장(移葬)이 불가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성주도씨 종중과 보령시가 주축이 되어 2003년 6월 보령시 오천면 정절사 옆에 이장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보령시에서는 향토유적 보호위원회의 묘 이장에 대한 검토결과 묘의 보령시 이장 안(移葬案)이 부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서는 ‘도미부인 선양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도미부부묘의 이장을 강행하여 도미부인 정절사 경내에 지름 5m, 높이 2m의 거대한 백제고분형의 묘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성주도씨 족보에 의하면 도씨의 근원은 한(漢)나라 무제 때(BC110)의 계(稽)가 남월(南越)의 여가(呂嘉)가 일으킨 반란을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여가를 사로잡은 공으로 임채후(臨蔡候)에 봉해지면서 도씨(都氏)의 성(姓)을 사성(賜姓)받음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 후손 도조(都祖)가 고구려로 건너와 유리왕(瑠璃王)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착한 이후 백제 개루왕 때 재상이던 미(彌) 신라 진흥왕 때 도도(都刀)... 등으로 이어져 오다가 고려개국에 공을 세운 도진(都陳)이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므로 성주도씨의 관향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2)
  
   이렇듯 세계가 오래되고 불분명함으로 미루어 당초의 분묘가 현재까지 유지되어 오기는 어려운 상황이고 당시 보령으로 이장할 때 유물과 유구가 없어 관속에 도미부부의 이름을 돌로 새겨 넣었다는 보령시청 관계자의 이야기를 감안하더라도  진해시 청안동 소간산에 있었던 묘는 도미의 실제 묘라기보다는 도미의 신분이 백제의 ‘편호소민(編戶小民)’에서 ‘벼슬하는 조사(朝士)’로 변화한 조선 영조시대에 중간(重刊)된 삼강행실도 발간 이후에 성주도씨 문중에서 초혼장(招魂葬)32-1)으로 모셨던 묘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듯 보령의 도미설화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였거나 지역의 전통적 전래 설화이기보다는 지역 홍보를 위한 창작 설화로 밝혀졌다. 따라서 보령 도미설화의 지역적 사실성은 검토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3) 진해시 청안동의 도미설화
   전술한 도미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진해시 청안동에 있었는데 묘비에는 ‘백제정승 도미지묘 배 정열부인(百濟政丞都彌之墓配貞烈夫人)’이라는 묘비가 함께 있었다. 지금은 충남 보령의 도미부인 정절사(貞節祠) 옆으로 천장(遷葬)되었다.
 
   이곳의 설화는 도미와 도미부인이 우연히 상륙한 섬이 천성도(泉城島)인데 천성도와 같은 음을 가진 천성(天城)마을이 주변에 있는데 이 마을은 부산광역시 천가동(天加洞) 천성(天城)마을로 가덕도(加德島)내에 있는 섬마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상도 웅천현(熊川縣)에 딸린 섬인데 천성(天城)은 이 섬 남서쪽에 있는 왜구(倭寇) 방어기지로서 천성진(天城鎭)이라고 부른 때가 있으며 단지 천성이라는 한글 음이 같을 따름이다.
 
그리고 도미부부가 망명한 고구려의 산산(蒜山)이 경남 김해시 대동면 초정리 낙동강 변에 있는 ‘마산(馬山)’을 모습이 마늘 닮았다 하여 ‘마늘 산’이라고 속칭하던 것을 한자로 훈차표기(訓借表記)하여 산산(蒜山)이라고 부르고 마늘의 머리글자만 가지고 ‘마산’이라 한 것을 한자로 마산(馬山)으로 쓰게 된 것으로 추정33) 하는 등 도미설화와의 유사점을 연결하고자 하였으나 원전의 백제 도성부근의 지역과 상충(相衝)되고 무덤이 있었던 지역과 산산(蒜山)은 동북으로 약 30km. 천성도는 약 5km가 떨어지는 등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34)의 설화임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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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하남의 도미나루가 시사하는 백제도성'
Ⅴ.도미부인이 기지(機智)로 탈출한 백제도성(百濟都城)은 어디인가
2013년 07월 11일 (목) 10:35:06윤제양 기자 yjy2040@empal.com


1. 도미설화의 사실성


   도미설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기록한 것인가의 문제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열전의 제목은 김유신부터 을지문덕 궁예 견훤에 이르기 까지 모두 50편인데 주인공의 이름은 열전 제5에 수록된 고구려의 ‘밀우(密友) 유유(紐由’ 전이 두 사람을 함께 다루었기 때문에 총 51명이 된다.
 
그리고 열전의 주인공은 모두 실존인물을 대상으로 실제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다.
따라서 열전의 수록 목적이 명장 충신 열녀 등의 감동적 사실을 수록함으로서  전체 백성들의 귀감이 되고자하여 기록한 것이다.
도미설화도 군주(君主)의 선정(善政)과 부녀의 정절(貞節)을 강조하는 열녀(烈女)를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발간 당시 고려의 열녀표상으로 도미부인을 선택하였던 것인데 삼국사기 발간 때까지 구전으로만 전하여 전승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도미설화에서 고구려의 간첩 도림의 기록이나 중심인물인 개로왕의 무능과 어리석음으로 폭로하고 한성백제를 상실하게 한 직접적 이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삼국사기 발간당시 사서(史書)의 기록을 원용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34-1)가 있으며 그 사서의 원전을 704년(성덕왕 3년) 한산주 도독(당시에는 총관)에 임명되었던 신라의 성골 출신이면서 화랑 가문으로 신라의 사학자인 김대문(金大問)이 집필한 한산기(漢山記)로 보는 주장34-2)이 있는데 삼국사기 발간 당시까지도 전하고 있었음에 타당성이 인정되며 부언하여 김대문은 본인이 책임지고 있는 한산주는 약 500여 년간 백제의 도성이 소재한 지역이므로 백제왕의 학정을 부각시킴으로서 백제왕실의 향수를 단절하고 신라에 순종하게 하려는 의도를 염두에 두고 당시 한산주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 도미의 실제이야기를 한산기(漢山記)에 수록하였을 것으로 믿어져 설화의 사실성을 객관화 시켜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성리학적 강상윤리(綱常倫理)를 보급하는데 효열(孝烈)의 좋은 소재로 채택되었고 각종문헌에 여러 사례로 다투어 기재됨으로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기에 이른 것이며 이에 편승하여 춘향전과 같은 문학적소재로도 널리 활용되었음을 감안할 때 도미전(都彌傳)이 사실성에 바탕 한 전기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도미부인의 탈출 정황


   설화의 내용으로 보아 21대 근개루왕인 개로왕시대의 사건을 4대 개루왕시대의 이야기로 잘못기재하고 있음은 전술하였으며 도미나루가 하남시의 검단산 아래 창우동에 있는 나루라는 것은 각종 문헌과 지역 전설 및 경기대학교의 현지 실태조사결과 구축물과 유구 등이 확인됨으로서35) 입증되었다.
그러면 당시 백제도성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도미부인이 하남의 도미나루로 도망을 왔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러면 풍납동토성과 하남 춘궁동 두 곳을 비교하여 생각해 본다.
 
1) 상황의 황급성
   도미부인은 개로왕의 강제겁탈을 모면하고자 기지를 발휘하여 도성을 빠져나온 상황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빨리 안전하게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 하였을 것이다.
그 방법 중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배를 이용하여 고구려로 가고자 한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가장 단시간 내에 우선 찾아갈 곳은 제일 가까운 나루터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시간대로 보면 개로왕의 행동으로 보아 저녁녘일 경우가 가장 높은데 아마도 밤을 도와 뱃길로 탈출을 시도하려 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창우리 나루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뱃길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 나루터였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나룻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그곳으로 간 것이다.
만약 풍납토성에서 나왔다면 부근의 나루터 중 하류 쪽의 나루터를 이용하여 고구려로 향하였을 것이다
어차피 배를 이용하여 고구려로 가고자 하였으면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하류 쪽으로 가야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에 2-30리 길을 걸어서 하남의 도미나루까지 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다시 하류인 풍납동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 가야하기 때문에 공연히 힘들이고 시간 허비하는 일을 하였다고는 도저히 추정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도성은 하남시 춘궁동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2) 도성에서 나루터까지의 거리와 시간
   하남의 도성에서 창우리 도미나루까지의 거리는 약 4km, 그러나 풍납토성에서의 거리는 12km 이상으로 보아야 한다.(당시의 도로는 지금보다 더 멀었을 것이다.)
나루터 까지는 어차피 걸어서 갔을 터이므로 하남도성에서 약 40분 풍납토성에서는 3시간 이상으로 보아지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밤길을 달려갈 이유가 없다.
특히 감시를 피하여 도망하는 상황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만약 감옥에서 탈출한 상황이라면 시간보다는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첫째의 명제가 된다.
따라서 그럴 때는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곳을 우회하여 갈 수도 있고 자기를 보호해 줄 인척이 있다면 그곳에 몸을 의탁하기 위해서도 먼 길을 돌아서 갈수는 있다.
그러나 도미부인은 왕과의 약속에서 며칠 후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궁을 나섰기 때문에 누가 추격하거나 감시받는 입장이 아니었다.
다만 도미부인 마음속에만 탈출할 의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니 태연히 행동하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간을 허비할 정황이 아니고 빨리 진행하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먼 곳으로 갈 이유는 없어 당시의 도성은 하남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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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천왕사지 발굴 유물 돌아오다
박물관, 天王’명기와, 용무늬기와, 청동대접 등 556점 위탁
2016년 12월 19일 (월) 10:45:48윤제양 기자 yjy2040@empal.com


   


   하남시 하사창동 일원에서 출토된 천왕사지 용문와당 등 유물 556점이 하남역사박물관이 위탁보관하게 됐다.



  
▲ 천왕사지 출토 '天王'명기와

   하남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이번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유물들은 天王’명기와, 용무늬기와, 청동대접 등으로 하남 천왕사지 유적을 비롯한 전체 10개 유적에서 출토된 국가귀속문화재 556점이다.

이번에 성사된 국가귀속문화재의 위탁을 시작으로 관내에서 출토된 훌륭한 문화유산에 대한 위탁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며 박물관으로 위탁된 국가귀속문화재는 상설 및 특별전시, 교육프로그램 등의 컨텐츠로서 다양하게 활용할 예정이다.




  
▲ 천왕사지 출토 용무늬기와


   하남역사박물관은 문화재청 및 경기도청 등 관계기관과의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지난 2015년 '국가귀속문화재 위탁기관'으로 지정된 바 있다.

하남 천왕사지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어 있는 보물 제332호인 철조석가여래좌상이 출토된 하남시 하사창동 일대의 고려시대 사찰 유적이다. 2000년 대 이후 발굴조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조사 과정에서 ‘天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기와 등이 출토되면서 『고려사』, 『세종실록』등의 문헌에서 고려 및 조선의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하던 천왕사임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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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옛 도읍지를 찾아서 (1)| 우리들 이야기

               

윤제철 | 조회 87 |추천 0 | 2001.08.05. 18:36


   <맑은 바람> 용선식 동문이 강동구 풍납동의 백제 토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의 백제 유적을 답사했다는 글을 읽고 옛 백제의 수도를 잠시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중학교 수학여행을 부여로 다녀 왔지만 그 때의 배움으로 인해 백제의 수도라면 먼저 공주나 부여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던 기간은 서기 583년부터 660년까지 77년, 공주가 수도였던 기간은 475년부터 583년까지 108년에 불과하고,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 거의 500년에 달하는 기간 백제의 도읍은 강동-송파 지역의 한강변이었던 것이다.

백제를 건국했던 온조(溫祚王)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온조는 동명성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왕이 되려는 꿈을 꾸어 왔으나 이복형인 유리(琉璃)왕자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경기지역으로 남하하게 된다. BC 18년, 온조는 먼저 한강 이북지역에서 나라의 터를 잡았으며 그 중심은 오늘날 미아리-우이동 일대, 세검정 일대, 파주-고양 일대 또는 상계동 일대로 추정된다.  


   온조는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고 왕성(王城) 둘레에 목책을 둘러 위리(圍里)를 축조했는데 이 위리는 우리 말에 울(울타리) 또는 우리(cage)에 해당되며 이를 한자어로 위례(慰禮)라 하여 수도를 위례성(慰禮城)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나중에 한강 이남으로 세력의 중심을 옮기기 전까지 이 도읍을 특히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이라 한다.

건국 당시 백제의 도읍지는 전북 익산(益山), 충남 직산(稷山) 지역이라는 설도 있으나, 경기도 광주(廣州)와 서울 강남 일원에 위치한 위례성이라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위례성의 위치에 대하여는 충남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였다는 주장이 최근에 대두된 바 있다.

이후 온조는 한강을 건너 오늘날 강동구 풍납동, 송파구 방이동, 강남구 삼성동 일대에 토성을 쌓고 주민을 다스리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꿨다. 이때 세력의 중심은 풍납토성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토성에 도읍을 세우고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 했다. 온조왕은 이후 한산(漢山) 밑에 다시 성을 쌓아 수도를 한산성(漢山城)이라 하고, BC 5년 수도를 위례성에서 한산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 한산성의 위치 또한 확실하지는 않으나 한산(漢山)이 오늘날 남한산성의 주봉인 남한산(南漢山)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 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하남시 춘궁동, 교산동 일대에서 백제의 유적이 대량 발견되고 있어 그 일대가 한산성 터였다는 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춘궁동 일대는 속칭 고골 또는 고고을이라 하는데 이는 옛 고을(古谷)이라는 말이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춘궁동 고골초등학교 앞 일대는 옛부터 "궁터"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지금도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보면 옛날 건축물의 기왓장이나 주춧돌이 발견되곤 한단다.

이 한산성은 후에 한성(漢城)으로 부름이 바뀌고 근세까지 서울지역의 명칭으로 전해 내려온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남한산성의 주봉인 남한산은 지금은 청량산(淸凉山) 또는 일장산(日長山)으로 불리고 있다. 


   오늘날 남한산성에는 연장 9Km에 달하는 산성(山城)이 둘러져 있다. 성남시 쪽에서 산성을 올라가 남문을 통과하고, 남문에서 성곽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청량산의 주봉이 보인다. 여기서 수어장대를 지나 서문 앞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이 산성의 중심인 산성로터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숭렬전(崇烈殿)이라는 사당을 만나게 된다. 이 사당이 곧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cafe.daum.net/snuh18/EjB/1715   서울사대부고 18회 동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