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영남유학연구회 문과과정 제19강 안동대학교 이종호 선생님의 "한국의 구곡문화"입니다.

2017. 3. 1. 01:57잡주머니

첨부파일 영유회 문과과정 제19강(안동대 이종호 교수, 4. 16).hwp

 

한국의 구곡문화

 

이종호(안동대 한문학과 교수)

 

1. 景과 曲

 

 

근대이전 우리나라는 누천년 동안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 속해 있었다. 지금도 한자문화권에서 완전히 탈피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중국문명(문화)의 영향이 적지 않다. 한자문화의 특성은 한자로 표현된 기록물의 유입과 수용 그리고 개변과 자국화에 있다. 이러한 한자문화의 특성을 잘 체현하고 있는 것 가운데 팔경(八景)과 구곡(九曲)이 있다. ‘팔경’은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여덟 가지 경관을 말하고 ‘구곡’이란 문자 그대로 흘러가는 물줄기 ‘아홉 구비’를 뜻한다. 팔경은 정적인 ‘점’의 미학이고 구곡은 동적인 ‘선’의 미학이다. 그런데 점 안에 바람과 같은 움직임이 있고 선 안에 심연과 같은 고요함이 있다.

왜 하필이면 ‘팔경’이고 ‘구곡’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팔경’은 ?주역? 팔괘(八卦)에서 ‘팔(八)’이란 숫자를 취한 것이다. ‘구곡’에 대해서는 ?주역? 건괘(乾卦) 제5효인 ‘구오(九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우이동구곡기(牛耳洞九曲記)」에서, “무릇 구(九)라는 숫자는 양(陽)이 왕성하고 숫자가 극에 달한 것이다. 그러니 건괘(乾卦)에서 구(九)를 쓴 것이다.”라고 해서, ‘구’를 양의 수로 극진한 데서 찾았고, 권섭(權燮, 1671-1759)은 「화지구곡기(花枝九曲記)」에서 “고인들이 그 굽이의 수를 아홉으로 정한 것은 모두 형상을 취하려는 뜻이 있었으니, 후인들이 단지 모방하고 따를 뿐이다.”라고 하여, 주자가 아홉 개의 굽은 형상을 취하여 구곡으로 정했고, 이를 후인들이 그대로 따르면서 ‘구곡’이 용어로 굳어졌다고 보았다. 굽이진 형상을 취하되 힘 있고 큰 수인 구를 취했다고 보면 되겠다.

팔경은 중국의 소상(瀟湘)팔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려 말 이후 산수화의 화제(畵題)로서 즐겨 지어지다가 점차 독립된 서경시의 한 유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국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 남쪽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곳의 빼어난 여덟 경관[八景]을 소재로 하여 북송시대 송적(宋迪)이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그렸고, 소동파(蘇東坡)가 소상팔경시(瀟湘八景詩)를 지은 바 있다. 이를 원류로 하는 팔경문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이래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소상팔경시첩(瀟湘八景詩帖)>과 같은 서화예술이 풍미하게 되었고, 실경을 보지 않고 그리는 관념적인 소상팔경시(관념산수시) 창작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한편 송도팔경, 관동팔경, 동도팔경, 단양팔경 등 지역마다 팔경을 설정하는 문화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거니와 그에 부수되어 지어진 팔경시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남아 전한다.

그런데 조선의 선비들, 특히 도학자들은 팔경과 구곡을 구분하여 수용했다. 송준길(宋浚吉, 1606~1672, 호 同春)은 “당초엔 <소상팔경도>이나 <관동팔경도>과 같은 경치를 그린 그림을 얻고자 했으나, 마침 <무이구곡도>를 만나보니, 이는 등한한 풍경과 비교가 되지 않으니 감상하면서 감흥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듯하다.”라고 한 바 있는데, 이러한 발언에서 그러한 변별의식을 엿볼 수 있다.

‘구곡’에서 ‘구’는 물의 흐름이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면서 커브를 그리며 굽이치는 횟수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굽이치는 숫자를 정확히 셈하여 구곡으로 명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 꺾여도 경관이 좋은 곳을 골라 구곡으로 뭉뚱그려 일반화하는 경우도 있다. 지질학적으로 깊이 있게 논할 수는 없지만 구곡은 협곡지형에서 많이 나타난다. 협곡은 필시 일정 시기에 지각변동으로 생겼음은 물론이다.

구곡의 조건을 갖춘 지형은 전 세계적으로 무수히 산재하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구곡은 특정의 역사적 조건 하에서 나타난 문화적 개념이다. 구곡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이는 남송의 성리학자 주자(朱子, 1130-1200, 이름은 熹)이다. 주자는 복건성(福建省)의 우계현(尤溪縣)에서 태어나 19세에 진사에 급제, 24세에 복건성 천주(泉州) 동안현(同安縣)의 주부(主簿)가 되어 처음으로 출사(出仕)한 이래 71세가 될 때까지 여러 벼슬을 받았지만 예우 수준의 명목상 직책이 대부분이어서 부임하여 복무한 시간은 9년 정도에 불과했다.

54세인 1183년(순희 10) 4월, 주자는 복건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에서 구곡을 경영하여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노래함으로써 복건성의 문화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무이산은 본디 풍부한 전설과 노래와 이야기가 뒤섞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던 곳이다. 한족(漢族)이 들어오기 전에는 남방의 이민족이 살았던 곳으로 절벽에 매장하는 장례풍속이 남아 있었고 불교와 도교의 자취가 우세했던 곳이다. 그런 곳을 주자가 점유하여 유학자의 강학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다.

무이산은 복건성의 숭안현(崇安縣)에서 남쪽으로 30리, 그리고 건양현(建陽縣)에서 서북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국의 동남쪽에서 산수경관이 최고라는 찬사를 받는 명산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한나라 때의 신인인 무이군(武夷君)이 최초로 여기에 거주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무이산에는 36개의 봉우리와 9개의 구비(曲)가 마치 가운데를 얽혀서 꿰뚫고 나아가고 있는 듯하여, 그 경관이 너무나 기묘하여 천하의 명산이 되었다.

주자는 무이정사에 은거하면서 주변의 사물을 읊은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짓고 아울러 정사를 경영하게 된 내력을 적은 「무이정사기(武夷精舍記)」를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주자는 약 7년간(1183-89) 이곳에 머물면서 후학을 위해 강학하고 학문연구에 힘쓰는 한편 산수의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한시로 노래했다. 그 가운데서 구곡의 발견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주자는 배를 타고 무이산 구곡을 따라 유람하며 「무이도가(武夷櫂歌)」[武夷九曲詩] 10수를 비롯한 수많은 한시를 창작하였다.

주자는 심상한 생각으로 구곡을 설정하고 「무이도가」를 지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려 말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수용된 이후 본격적으로 학문적 탐구와 토론의 대상이 된 16세기 조선에 오면, 퇴계 이황과 같은 이들에 의해 「무이도가」는 주자의 문학과 사유를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의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 「무이도가」를 차운하는 바람이 불었을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무이도가」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정확한 이해인가를 따지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불가(佛家)에서 사용하는 말 가운데 ‘권리풍광(卷裡風光)’이니 ‘본지풍광(本地風光)’이니 하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 호 西浦)의 ?서포만필(西浦漫筆)?에도 등장하는데, 오늘날 학문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바람과 빛’을 뜻하는 ‘풍광’은 경치나 경관으로 바꾸어 말해도 좋다. 책이나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권리풍광’이라면, 실제로 현지에 드러나 있는 것이 ‘본지풍광’이다. 김만중은 금강산을 예로 들어 설명한 바 있다. 정작 산에는 가보지도 않고 그림이나 보고 책이나 뒤지면서 금강산을 말하면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진짜 금강산이라고 착각하는 그런 학자가 있다. 김만중은 그런 학문유형을 ‘권리풍광’이요 ‘지상면목(紙上面目)’에 견주어 그 허위성을 비판했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학자로 행세하는 부류가 이 세상에는 지금도 넘쳐난다. 만일 그들이 ‘본지풍광’에 익숙하여 금강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꿰뚫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장안사 주지라도 만난다면, 그로부터 생겨나는 수치심과 낭패감을 무엇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이 풍광론은 책과 그림을 통해 중국 현지문화를 이해할 수밖에 없던 조선 지식인의 고뇌에 찬 자기고백이다. 중국문화를 논하는 자리에서 앞서의 ‘수치심’과 ‘낭패감’은 조선인이 중국인과 같은 수준에서 특정의 문화현상을 이해하거나 체현할 수 없다는 열패감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권리풍광’은 문화 현장에서 일회적으로 느끼는 독특한 분위기인 ‘아우라(Aura)’를 감수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간간히 조선지식인들의 오해를 불러오기도 하고 상상력과 관념적 유희를 극도로 자극하는 효과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 어떠한 중국문화라도 일단 조선에 들어오고 나면 더 이상 중국의 것이 되지 못한다. 반드시 중국옷을 벗고 조선옷으로 갈아입는 현장의 탈각(脫却)과 의식의 전화(轉化)의 과정이 반드시 뒤따른다.

우리가 지금 논하려는 구곡문화도 마찬가지이다. 무이구곡을 직접 본 사람들이 없는 시대에서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는 무이구곡의 경물을 눈에 보이는 듯이 상상하고 말할 수 있던 구곡문화에 관한 한 ‘선지식(善知識)’들이었다. 일부 인사들은 무이구곡의 의미맥락을 지나치게 천착하여 본의와 동떨어진 해석을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이는 불가피한 사태발전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무이도가」가 조선에 유입된 이후 ‘구곡시’는 토포스(Topos)와 같이 문학적 관습으로서 점차 관행화된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구곡경영과 구곡문화가 선비들의 행동양식을 문화적으로 제약하는 하나의 아비투스(Habitus)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토포스와 아비투스는 16세기 이래 사대부 계급 내에서 향유되고 세습되는 독특한 역사적 성격을 내장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곡을 단지 경관이나 문학 단위로 국한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구곡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러 관심사를 ‘문화’의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구곡문화를 형성하는 기본요소는 무엇인가.

첫째 구곡의 설정, 둘째 구곡시(九曲詩)와 잡영(雜詠), 정사기문(精舍記文)의 창작, 셋째 구곡도(九曲圖)의 제작이다. 이를 종합하고 부연한 것이 ?무이지(武夷誌)?와 같은 형태의 문화지리서이다. 여기에는 역대로 축적된 설화와 작품, 그리고 다기한 정보들이 얼마든지 풍부하게 수록될 수 있다. 퇴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청량산과 도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구곡문화를 ?청량산지(淸凉山誌)?나 ?도산지(陶山誌)?의 편찬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거니와 ?청량산지?는 후대에 ?오가산지(吾家山誌)?로 구체화되었고 ?도산지?는 후인들이 기획은 했으나 미쳐 완성을 보지 못한 듯하다.

 

 

2. 武夷九曲詩

 

 

한국의 구곡연구는 1980년대 초를 전후하여 구곡시(九曲詩)와 구곡도(九曲圖)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까지 진행된 문헌자료를 근거로 한 구곡연구에 의하면, 조선에서 가장 이른 시기인 15세기에 구곡을 경영한 사례로 박구원(朴龜元, 1442~1506)의 고야구곡(古射九曲: 밀양)과 박하담(朴河淡, 1479~1560)의 운문구곡(雲門九曲: 청도)을 든다. 또한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해동잡록?에 의하면 조신(曺伸, 1454-1529)이 가야구곡(伽倻九曲: 합천)을 경영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역시 점필재 김종직과 그 문도들에 의한 영남사림파의 형성과 구곡문화의 전개가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박구원과 조신은 김종직과 사우관계를 맺고 있고 박하담 역시 기묘사화 이후 강화된 사림의식을 체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조선의 구곡문화는 퇴계의 시대에 들어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또한 16세기 이후 전개된 구곡문화의 흐름을 살펴보면, 기호지방의 적극적인 활동에 주목하게 된다.

주자학이 조선에 유입된 이후, 16세기에 들어오면 사림파 지식인의 「무이도가」 해석은 두 가지로 갈렸다. 하나는 「무이도가」를 도학적으로 인식하여 입도차제(入道次第: 유교 도학의 경지로 진입하는 차례)를 읊은 시라고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서정적으로 인식하여 인물기흥(因物起興: 일정한 사물을 통하여 시인이 흥취를 일으키는 것)을 읊은 시라고 보는 관점이다.

대립하는 해석이 나오게 된 데에는 「무이도가」(?주자대전? 권9)에서 제9곡을 읊은 시,

 

 

구곡이라 골짝 다하자 눈앞이 환하게 트여 九曲將窮眼豁然

이슬 맞은 뽕과 삼 평평한 들판에 보이네 桑麻雨露見平川

어부가 도원으로 가는 길을 다시 찾는다만 漁郞更覓桃源路

인간 세상 아닌 곳에 다른 세상 있을까 除是人間別有天

 

 

에서 ‘상마우로(桑麻雨露)’와 ‘별유천(別有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관건으로 작용했다. 즉 ‘상마우로’를 평범한 경치로 보자는 쪽과 도체(道體: 도의 본체)로서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형이하학에서 출발하여 형이상학으로 올라감)하는 계제(단계)로 보자는 쪽으로 나뉘고, ‘별유천’을 제9곡 자체의 경관을 말한다고 보는 쪽과 또 다른 승경처나 이상향을 말한다고 보는 쪽으로 나뉘었다. 여기서 ‘除是’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오직’ 혹은 ‘모름지기’로 해석하는 경우인데, 이때는 뒤의 ‘別有天’이 곧 ‘인간세상’이 되고, ‘아니다’로 해석하는 경우엔 ‘別有天’이 곧 ‘桃源境’이 된다.

조익(趙翼, 1579-1655, 호 浦渚)과 기대승(奇大升, 1527-1572, 호 高峰)은 양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이는 바, 흥미로운 것은 퇴계의 태도였다.

퇴계는 ?무이지(武夷志)?를 읽고 「무이도가」를 차운했는데, 제9곡을 읊은 시는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 먼저 지은 것은 종래 「무이도가」 시를 풀이한 주석의 뜻을 따랐으나 나중에 지은 것은 주자의 본의가 주석자의 의도와 다르다고 판단하여 수정한 것이다. 그런데 퇴계가 차운한 제9곡이 도학의 묘리를 읊은 것인가 아니면 자연경물을 읊은 것인지를 두고 연구자마다 견해를 달리하는 사태가 한 동안 벌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관점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이렇게 된 이유를 따져보면 결국 퇴계가 스스로 시인의 창작본의와 독자의 감상이해가 서로 일치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데서 연유한다.

다시 말하면 「무이도가」를 지은 주자의 생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천착해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와 별개로 독자가 시를 읽고 받은 느낌도 역시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때문에 조도시(造道詩: 도학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로 보든 서경시(敍景詩: 자연경치를 펼쳐낸 시)로 보든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물론 퇴계는 당초에 주의(註意)에 입각하여 조도시의 입장에서 제9곡 시를 차운하여,

 

 

구곡에 이르니 문득 망연하여 九曲來時却惘然,

진원은 어디인가 다만 이 시내뿐 眞源何許只斯川

어찌 바랄까 상마우로 밖에서 寧須雨露桑麻外

다시 산속의 일선천 찾는 것을 更問山中一線天

 

 

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렇게 교조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주자 본의와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구곡에 산이 열려 다만 광활한데 九曲山開只曠然

인가와 촌락이 장천을 굽어보고 있네 人烟墟落俯長川

여기서 놀이가 끝난다고 말하지 말라 勸君莫道斯遊極

별일천의 묘처를 다시 찾아야지 妙處猶須別一天

 

 

라고 하여, 입도차제나 단순 서경으로 시야를 국한시키지 않고 달리 해석할 여지를 남겨놓았다.

퇴계는 주자가 ‘경치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 탁흥우의(托興寓意: 흥취에 가탁하여 생각을 붙임)했다[雖亦本爲景致之語, 而其間不無託興寓意處]’는 다소 모호한 결론을 내렸다. 산수의 흥취에 의탁하여 무언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았다는 말이 ‘탁흥우의’이다. 이렇게 되면 서경시나 조도시의 차원이 아닌 이 둘을 포괄하는 회통적(會通的) 시각이 요구된다. 퇴계는 ‘갱멱(更覓)’과 ‘제시(除是)’라는 낱말을 두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주자가 제9곡 시에서 ‘상마우로’와 같은 현실공간을 이탈하지 않으면서, 그 속에서 학문적으로 진일보하려는 정신을 ‘별유천’에 가탁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퇴계가 ‘별유천’에 대해 단장취의(斷章取義)하는 고인의 예를 빌어 새롭게 해석하려 한 것 같지만, 이 모두를 주자의 본의에 반하는 것으로 보아 수용하지 않았다.

 

 

*A. ?退溪集? 卷13, 「答金成甫別紙」(癸亥): “此等句, 皆以景致盡處. 故更欲別尋一仙境, 以爲究竟處. 竊意先生初意亦只如此而已, 而讀者於諷詠玩味之餘, 而得其意思超遠涵畜無窮之義, 則亦可移作造道之人深淺高下抑揚進退之意看, 如子貢無諂無驕爲至, 曾子隨事精察而力行之, 顔子從事博約而欲罷不能之時, 皆以眼豁平川爲極至處, 及聞貧而樂富而好禮, 及聞一貫之旨, 及見所立卓爾, 皆是到得別有天意思也. 然此意當如古人引詩斷章取義之例, 而作如此看, 詩之本意, 正不說此也. 知此則所詰所立卓爾之說, 不辯而明矣.”

 

 

*B. ?退溪文集攷證? 卷4, 第13卷 書, 「答金成甫」, ‘註意’: “案, 元懼齋陳氏普(1244~1315), 謂武夷櫂歌九曲寓意, 純是一條進道次第, 其意固不苟, 不但爲武夷山水也. 遂作註解.”

 

 

*C. ?退溪集? 卷13, 「答金成甫德鵾別紙」(癸亥), “大抵九曲十絶, 竝初無學問次第意思, 而註者穿鑿附會, 節節牽合, 皆非先生本意. 故滉嘗辯其非, 而奇明彦亦以爲然矣. 獨於九曲, 與滉後改之說不同者, 蓋自八曲自是遊人不上來此一句及此一絶, 雖亦本爲景致之語, 而其間不無託興寓意處. 故雖明彦之辯洽, 不能不爲牽合之說所動而然也. 故鄙意竊謂先生此一絶, 本只爲景物而設, 而九曲一境, 山盡川平而已. 素號此處別無勝絶, 殆令遊興頓盡處. 故詩前二句, 直敍所見, 而末二句意, 若曰, 勿謂抵此境界爲極至處, 而須更求至於眞源妙處, 當有除是泛常人間而別有一段好乾坤也云云. 觀諸賢和詩, 和此意者, 亦多有之.”

 

 

*D. ?退溪集? 卷16, 「答奇明彦論四端七情第二書」, 別紙: “意若勸遊人須如漁人尋入桃源之境, 則當得世外別乾坤之樂. 至是方爲究竟處, 不但如今所見而止耳. 乃旣竭吾才後, 如有所立卓爾處, 亦百尺竿頭更進一步處. 然則此處及八曲所謂莫言此地無佳境, 自是遊人不上來之類, 可作學問造詣處看矣.”

 

 

*E. 李玄逸, ?葛庵集?, <愁州管窺錄>: 懼齋陳氏普, 武夷櫂歌註解云; 九曲寓意, 純是一條進道次序. 其意固不苟, 不但爲武夷山水也. 其門人劉槩極意稱述, 以爲與感興詩二十篇相表裏云. 竊謂聖賢之言, 有託意寓言處, 有白直平說處, 其寓言處, 自當闡發微意, 其平易處, 不可鑿敎幽深. 若非聖賢本意, 而強要懸空杜撰說, 縱使說得寶花亂墜, 亦只是自家臆度見識也, 豈於聖賢所說本義, 有相交涉者乎. 若陳氏所著武夷櫂歌註解文字, 愚決知其非朱夫子本意也. 何以言之. 夫子平日所著大小文字, 擧皆平易明白, 使人易曉, 其論入道次序, 則具著於經傳集註章句或問等書, 至他形諸筆札, 發於篇什者, 亦皆直指明言, 究極精微, 何用更託詩章, 爲此艱深隱晦之語乎. 愚嘗反復其篇, 而詳其語意, 則祗是從容諷詠, 以盡其山川林木舟楫沿洄閒靜幽闃之趣而已, 曷嘗有如陳氏之所以爲說者乎. 設令其間或有一言半句依俙近似者, 豈可因此傅會, 便謂全篇大意實出於此耶. 屈原離騷, 以望舒蜚廉飄風雲霓之屬, 託言神靈護衛之意, 初無善惡之分也. 爲之註解者, 以飄風雲霓爲小人, 月爲淸白之臣, 風爲號令之象, 朱子譏其皆無義理, 又嘗謂學春秋者, 多鑿說, 乃言曰, 漢末有發霍光壻范明友奴冢, 奴猶活說光家事, 與漢書相應, 某說學春秋者, 今如此穿鑿說, 只恐一朝於地中, 得夫子家奴出來說夫子當時之意, 不如此爾. 愚於陳氏武夷櫂歌註解, 亦云.

 

 

구재 진씨(懼齋陳氏 진보(陳普))의 ?무이도가주해(武夷櫂歌註解)?에 “구곡(九曲)의 우의(寓意)는 순전히 한 가닥 도로 나아가는 차서(次序)로서 그 뜻이 진실로 구차하지 않으니 단지 무이의 산수만을 읊은 것이 아니다.” 하였고, 그 문인(門人) 유개(劉槩)는 이를 극도로 칭술(稱述)하여 “감흥시(感興詩) 20수와 서로 표리가 된다.”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현의 말은 우의(寓意)하여 말한 곳도 있고 사실 그대로 평이하게 말한 곳도 있다. 우의하여 말한 곳은 그 은미한 뜻을 응당 천발(闡發)해야겠지만 평이하게 말한 곳을 천착하여 고의로 뜻이 그윽하고 깊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만약 성현(聖賢)의 본의가 아닌데 억지로 아무 근거 없이 허황하게 엉터리 설을 만들어 낸다면 비록 말을 잘하여 허공에서 천화(天花)가 어지러이 떨어질지라도 이는 단지 자신이 억지로 헤아린 억견(臆見)일 뿐이다. 어찌 성현이 말한 본의와 상관이 있겠는가.

진씨가 지은 ?무이도가주해?란 글은 주자의 본의가 아님을 나는 분명히 알겠다.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는가. 주자가 평소에 지은 여러 글들은 대개 평이(平易)하고 명백(明白)하여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 도에 들어가는 차서를 논한 것은 경전의 ?집주(集註)?, ?장구(章句)?, ?혹문(或問)? 등의 책에 갖추어 드러나 있고 기타 서찰이나 시문(詩文)으로 표현된 것도 모두 곧바로 가리키고 분명히 말하여 정미(精微)한 이치를 극도로 밝혔으니, 다시 시편(詩篇)에 가탁하여 이렇게 뜻이 숨겨져 있어 알기 어려운 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그 시편들을 반복해 읽고 그 말뜻을 상고해 본 바 단지 조용히 읊조려서 그곳 산천과 숲 속에서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서 느끼는 고요하고 그윽한 멋을 다 표현한 것일 뿐이니, 진씨가 말한 바와 같은 것이 애당초 어디 있단 말인가. 설령 이 시편들 속에 일언반구(一言半句) 그러한 의사(意思)와 비슷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이로 말미암아 견강부회(牽強附會)하여 대뜸 ‘전편(全篇)의 대의(大意)가 실로 여기서 나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서는 망서(望舒 달의 수레를 모는 신), 비렴(蜚廉 바람의 신), 표풍(飄風 회오리바람), 운예(雲霓 구름과 무지개) 따위로 신령이 호위한다는 뜻을 가탁하여 말하였을 뿐 애초에 선(善)ㆍ악(惡)의 구분을 두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주해(註解)하는 이가 표풍과 운예를 소인으로, 달을 청백(淸白)한 신하로, 바람을 호령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자 주자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였고, 또 일찍이 ‘?춘추(春秋)?를 공부하는 이들은 천착(穿鑿)한 설이 많다’ 하고서 “한(漢)나라 말엽에 곽광(霍光)의 사위 범명우(范明友)의 노복(奴僕)의 무덤을 발굴하였더니 노복이 그때까지 살아 있어서 곽광의 집안일을 이야기하였는데 ?한서(漢書)?와 상응하였다. ?춘추?를 공부하는 이들이 지금 이와 같이 천착한 설을 내어놓았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땅속에서 부자(夫子) 집의 노복이 살아 나와서 부자의 당시 저술하신 뜻이 이렇지 않다고 말할까 걱정스럽다.” 하였다. 나는 진씨의 ?무이도가주해?에 대해서 역시 이렇게 말하노라.

 

 

*F. 兪鎭河(1846~1906), <汶陽九曲序> ?存齋遺稿?, “夫山水者 天地之査滓 陰陽之糟粕 而所寓者 理也. 渾然無間 是以包羲氏 畫卦而取止險之義 孔夫子 論道而稱仁智之樂 至我晦翁先生 則又推廣此義於武夷之泉石 說者 以九曲詩爲進道次序 豈非知道之言乎 彼䂓䂓於形勝 而不論其理者 眞所謂過闕里而不見孔子之顔者也.”

 

 

율곡 이이는 중국시가 선집인 ?정언묘선(精言妙選)?에서 주자의 「무이도가」를 한미청적(閒美淸適)의 미의식을 구현한 작품집인 ‘형자집(亨字集)’에 넣었다. ‘한미청적’이란 ‘조용하고 침착하며 스스로 흡족하게 여기는 삶 속에서 흥에 겨워 표출되는’ 그런 경지의 시적 경계이다. 세상의 권세나 재리, 명성, 영화는 애초부터 ‘한미청적’과는 거리가 멀다. 율곡과 같은 선비들은 욕심 없이 한가롭게 유유자적하면서 사는 평화로운 삶을 동경했기에 자연 ‘한미청적’과 같은 풍격을 선호했을 것이고, 그러한 지평 위에서 「무이도가」를 적극 수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16세기 사림파 지식인들은 「무이도가」를 수용하면서 해석하는 방식을 달리했거니와 이러한 흐름은 조선후기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세계관과 미의식을 공유하면서 「무이도가」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미세한 정도의 차이를 드러냈던 것이다.

윤근수(尹根壽, 1537~1616, 호 月汀)는 1566년(30세)에 홍문관 부교리로서 서장관에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그때 북경에서 국자학정(國子學正)으로 있던 육광조(陸光祖, 1521~1597)를 만나 주자와 육상산(陸象山) 학설의 차이점을 논변한 바 있다. 육광조는 불교에 심취해 있던 양명학자였고, 윤근수는 퇴계와 율곡을 사사한 사람으로서 중국어에 능했으며 주자학을 신봉하는 문인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왕양명을 종사(從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윤근수가 육광조를 만났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물론 윤근수는 퇴계 이래 조선학계의 왕양명 비판을 근거로 양명학과 육광조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때 양인이 논변한 내용을 정리한 「주륙논난(朱陸論難)」이란 글이 ?월정집?에 전한다. 그런데 이 글을 퇴계도 읽었다. 퇴계는 몰년인 1570년 서애 유성룡에게 답한 편지에서 “경사(京師, 북경)는 사방의 표본으로서 모든 문화가 집중된 곳인데, 사습(士習)과 학술(學術)이 저렇게 어긋나 있으니 이는 하늘이 이렇게 만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잘못이란 말인가? 지금의 오고 간 말들로써 전일의 윤자고(尹子固, 자고는 윤근수의 자)의 문답과 위시량(魏時亮)의 모든 이야기를 헤아려보면, 육씨(陸氏)의 선학(禪學)이 천하를 휩쓴 것이 마침내 이와 같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끝없이 탄식하게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양인의 논변 가운데, 주자의 「무이도가」 해석에 관한 질의와 응답이 한 차례 이루어졌다. 윤근수가 “이른바 ‘제시인간별유천(除是人間別有天)’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所謂除是人間別有天, 何謂歟]?”라고 묻자, 육광조는 “‘제시인간별유천’이란 인간에는 별도의 천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에 별도의 천이 없으니 천은 다만 인간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필 다시 도원길을 찾겠습니까[除是人間別有天, 謂人間無別天也. 人間無別天, 則天只在人間, 何必更覓桃源路也]?”라고 답했다. 이 대목은 16세기 후반 조선 지식인들에게 주자의 「무이도가」 제9곡의 해석을 둘러싼 논의가 얼마나 뜨거운 관심사였는지 알게 한다. 윤근수의 질의에 대해, 육광조는 ‘별유천’을 ‘상마우로’와 같은 구체적인 지상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정신, 곧 인간에게 본래 존재하는 심의 세계로 간주하는 양명학적 해석을 내놓았던 것이다.

「무이도가」 해석을 이어 조선에서 구곡이 경영되고 구곡시가 창작되기 시작했다. 구곡가 계열의 시가창작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거니와, 그 대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6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구곡시가의 창작이 어떠한 흐름을 보였는지를 따지는 작업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구곡시가를 구곡경영과 연결시켜 영남사림과 기호사림으로 나누어 고찰하여 계보를 제시한 연구가 대표적이다. 퇴계가 도산구곡 원림을 구상하면서 주자의 「무이구곡가」 차운시를 지어 영남학파 구곡가계 시가창작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면 율곡은 석담구곡(石潭九曲) 원림을 경영하면서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어 기호학파 구곡가계 시가의 표본이 되었다.

후인들은 「고산구곡가」와 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마주 들어 논하기를 즐겼는데, 퇴계의 노래가 온유돈후(溫柔敦厚)한 맛이 있다면 율곡의 그것은 청명쇄락(淸明灑落)한 풍격이 있다고 평한 예도 보인다. 다만 퇴계는 한시로 된 「도산구곡시」나 국문시가로 지은 「도산구곡가」를 남기지 못했다. 퇴계를 추종하는 후학들은 이 점을 아쉽게 여겼다. 그리하여 퇴계의 「도산십이곡」을 도(道)의 소재처로 보아 「무이도가」와 같은 반열에 놓음으로써 「도산구곡시」의 빈자리를 메워 주자의 「무이도가」와 짝을 맞추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심지어 「도산십이곡」을 한역하는 이가 생겨나기도 했다.

강필효(姜必孝, 1764~1848)는 우암 송시열이 한역한 「고산구곡가」를 의식하고 「도산십이곡」을 한역했다. 「고산구곡가」는 한역시와 「무이도가」를 차운한 시가 모두 있지만, 「도산십이곡」은 시조만 있어 이를 한시화 하여 퇴계와 주자에 대한 경모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

 

 

3. 畿湖 栗谷學派의 九曲經營과 九曲詩

 

 

구곡시가와 관련하여 가장 빈도 높게 연구된 분야는 역시 율곡 이이의 연작 시조 10수 「고산구곡가」에 대한 작품론이다. 「고산구곡가」의 작자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하여 창작의 배경과 작가의식, 작품의 구성(구조), 작품의 품격과 미학특질, 주자의 「무이도가」나 퇴계의 「도산십이곡」과의 비교, 작품의 교육적 의의, 산수문학적 의의, 성리학적 생태인식 등등 다방면에 걸쳐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이의 산수를 애호하는 정신이 주자의 「무이도가」를 만나 조선의 「고산구곡가」를 탄생시키고 있음을 본다. 이는 주자학의 조선적 전개를 표지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뿐 아니라 이황이 미처 성취하지 못한 구곡문화의 토착화를 웅변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산구곡가」 창작의 기본 동기가 주자학을 배우고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의 확인에 있음은 물론이다. 현대어로 풀이한 「고산구곡시」 첫 수와 둘째 수, 그리고 마지막 수를 들어본다.

 

 

고산의 아홉 굽이도는 계곡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모르더니,

풀을 베고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사니 벗님네 모두들 찾아오는구나.

아, 무이산에서 후학을 가르친 주자를 생각하고 주자를 배우리라.

(제1수: 서시)

 

 

첫 번째 굽이는 어디인고, 갓머리처럼 우뚝 솟은 바위에 아침 해가 비쳤도다.

잡초 무성한 들판에 안개가 걷히니, 먼 곳 가까운 곳 가릴 것 없이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소나무 푸른 숲 사이에 맛좋은 술이 담긴 술통을 놓고 벗들이 찾아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

(제2수: 제1곡)

 

 

아홉 번째 굽이는 어디인고, 문산에 한 해가 저무는구나.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돌이 눈 속에 묻혀 버릴까 걱정되는구나.

이리저리 놀러 다니는 사람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제10수: 제9곡)

 

 

이이는 도학자의 입장에서 은거하며 산수자연을 관조와 사색의 매개물로 삼아 그 속에서 강학(講學)과 음영(吟詠)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유흥이 아닌 내적인 자기성찰의 공간으로 구곡의 의미를 극대화하여 한미청적(閒美淸適), 충담소산(沖澹疎散) 등과 같은 품격을 보여준 것이 바로 이 「고산구곡가」이다. 「고산구곡가」는 ‘강학’을 중심으로 보면 철리시(哲理詩)에 가깝고 ‘음영’의 견지에서 보면 서정시에 가깝다. 그러나 「고산구곡시」는 철리시와 서정시가 융합된 그런 도학가의 작품이다.

여기서 우리는 퇴계가 주자의 「무이도가」를 입도차제의 논리로만 접근하는 것에 대해 회의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고산구곡가」는 조선조 사림의 일반적 체질을 잘 체현한 작품이다. 성리학적 세계관과 미의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한결 여유로운 감성의 유로를 용인하는 그런 체질을 율곡이 이 「고산구곡가」를 통해 잘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고산구곡가」가 있고 나서, 한문시가와 국문시가 두 갈래의 구곡시가가 계속 창작되었다. 한문시가는 주자의 「무이구곡」을 차운하는 형식으로 즐겨 지어졌는 바, 조선 구곡시가의 대종을 이루고, 국문시가는 연시조나 가사체의 창작이 여러 차례 있었다.

17-18세기에 오면, 「무이도가」 차운을 통해 주자에 대한 존모심을 고조시켜 가던 흐름이 약화되고 자당의 상징적 인물을 중심으로 구곡시가를 지어서 당파적 결속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한문시가 「고산구곡시」는 당쟁기의 정치적 갈등의 소산으로 서인계의 당파의식이 짙게 베어든 작품이다. 「고산구곡시」는 우암 송시열의 지도 아래 문인 권상하가 주축이 되어 집단적으로 창작한 작품이다. 10인의 참여 인사를 보면, 송시열(宋時烈, 호 尤庵), 김수항(金壽恒, 호 文谷), 송규렴(宋奎濂, 호 霽月), 정호(鄭澔, 호 丈巖), 이여(李畬, 호 睡谷), 김수증(金壽增, 호 谷雲), 김창흡(金昌翕, 호 三淵), 권상하(權尙夏, 호 遂庵), 이희조(李喜朝, 호 芝村), 송주석(宋疇錫, 관 校理) 등 노론의 핵심인물들이다. 당시 송시열은 주자와 율곡을 종주로 받들고 있었거니와 이를 비방하는 인사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백호 윤휴가 있었거니와 이를 두둔하는 세력 역시 동일한 잣대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본래 문인이었던 명재 윤증과 대립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윤증이 자기 부친 윤선거의 묘지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했을 때, 청탁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글귀(병자호란에 강화도에서 탈출한 일)를 수정해주지 않음으로써 끝내 절교(絶交)와 배사(背師)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윤증은 송시열을 공격하게 되어, 이른바 우계학파(소론)와 율곡학파(노론)가 치열한 논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율곡학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부 결속을 도모하는 이벤트를 구상한 것이 바로 「고산구곡시」의 집단창작이었다. 따라서 자연 시의 내용도 율곡의 위대성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작업을 주관한 권상하는 율곡학설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 인물을 구곡시 창작에서 배제하려고 했을 정도로 학통의 순결성을 중시했다.

「곡운구곡시(谷雲九曲詩)」도 「고산구곡시」와 동일한 집단 창작시이다. 김수증(金壽增, 1624-1701, 호 谷雲)이 당시 강원도 춘천부 사탄(史呑)에서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구곡을 경영하여 1682년 화인 조세걸에게 <구곡도(九曲圖)>를 그리도록 한 바 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김수증은 본인이 제1-2수를 짓고, 자신의 자제들, 아들 김창국(金昌國), 창직(昌直), 조카 창집(昌集),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즙(昌緝), 외손 홍유인(洪有人) 등에게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한 수씩 짓도록 하였다. 「곡운구곡시」 역시 정치적 산물이다. 김수증의 곡운 은거가 번복을 거듭한 환국과 옥사로 인한 극도의 피세의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김수증은 청음 김상헌의 주손으로서 정치적 실패와 좌절, 그리고 박해 속에서 가급적 정치를 멀리하고 가문을 수호해야 할 책무를 지니고 있었다. 이 점이 그로 하여금 곡운 은거와 구곡경영을 충동한 것이다. 「고산구곡시」에서 보듯이 장동김문은 당시 서인 노론계의 중추 가문으로서 자부심이 남달랐던 바, 이 「곡운구곡시」에도 구성원의 결속을 다지고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일부 작용했다고 본다.

국문시가 연시조 형태의 구곡가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작품은 권섭(權燮, 1671~1759, 호 玉所)의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이다. 「황강구곡가」는 옥소 권섭이 82세 무렵에 백부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 호 遂庵)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시조이다. ‘황강’은 권상하가 40여 년이 넘도록 은거하며 강학하던 충북 제천 한수면에 흐르던 강을 말한다. 이 작품이 율곡의 「고산구곡가」를 모델로 하여 창작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황강구곡가」는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수암 권상하로 이어지는 도통의 흐름을 확인하고 백부 권상하를 추숭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지어졌다. 다만 표면적으로는 도학자 권상하의 삶을 노래한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연을 신선세계로 보는 작자 권섭의 낭만적 관점이 반영된 ‘회고의 노래’였다.

「황강구곡가」가 보여주었듯이, 17-18세기에 창작된 구곡가 계열 작품 해석에서 정치적 요인을 크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이후 정치적 변동이 우심했던 17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성리학적 세계관이나 미의식에서 이탈하여 개인적 서정의 수단으로 구곡시가 창작되는 징후가 드러난다. 정치적으로 진전된 환국정치와 학문적으로 가열된 호락(湖洛)논쟁이 구곡시가 창작의 주된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18세기 후반은 호락논쟁이 치열해지던 시기로 김창협과 김창흡의 문인들이 정국을 주도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호론(湖論) 쪽의 권섭이 송시열의 학통이 권상하로 이어졌다는 도통의식을 내세우고자 「황강구곡가」를 지은 것이다.

이른바 ‘구곡가’ 계열 시가문학의 연변양상에 대한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당쟁기의 정치적 갈등에서 오는 은거의 선호가 구곡문화를 보다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정치적 갈등과 무관하게 개인의 유흥적 취미에 따른 탐승의 흥취를 담아내는 문학유형으로 구곡시가 선택되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고산구곡가」에서 「황강구곡가」에 이르는 시가들은 모두가 기호학파 서인 노론계의 작품이었다. 사실 조선 18-19세기에 이르면 구곡경영과 구곡시가 창작이 영남지방에서도 나타나게 되지만, 기호지방에 견줄 정도로 활발하지는 못했다. 특히 화양구곡을 중심으로 하는 충청지역의 구곡경영은 거의 모두 서인 노론계 후예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화양구곡은 송시열이 위치를 정하고 문인인 권상하가 명명했다. 화양동에는 송시열의 벌청존명(伐淸尊明) 의식이 서려 있는 만동묘(萬東廟)와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는데, 조선시대 기호사림의 구심점으로 사론을 형성하고 공론을 주도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곳이다. 김평묵(金平默, 1819~1888, 호 重庵)과 유중교(柳重敎, 1832~1893, 호 省齋)는 가평 옥계동에서 구곡을 경영했다. 그들은 「옥계구곡시」, 「옥계잡영」, 「옥계산수기」, 「옥계구곡기」, 국문시가 「옥계구곡가」를 짓고 <옥계구곡도>도 제작하였다. 가사체 구곡가는 근품재 채헌의 「석문구곡가」, 성재 류중교의 「옥계구곡가」, 후산 이도복의 「이산구곡가」 등이 있다.

 

 

4. 嶺南 退溪學派의 九曲經營과 九曲詩

 

 

여기서 잠시 영남의 구곡경영을 엿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한 박하담 이후 18세기 후반까지 영남의 구곡경영은 좀처럼 시도되지 않았다. 그러다 18-19세기에 이르러 구곡경영과 구곡시가 창작이 다시 활기를 띠어간다. 영남에서 한동안 구곡경영이 주춤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단정할 수 없지만, 아마도 이황이 몸소 구곡경영을 시범하지 않은 데 있지 않을까 한다. 앞서 보았듯이, 이이는 해주 석담에서 고산구곡을 경영하고 시가를 창작한 바 있다. 기호서인들은 보고 배울 모델이 있었기에 구곡경영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남아있는 자료에 근거한다면 퇴계 이황은 도산구곡을 설정하거나 「도산구곡가」를 짓지 않았다. 다만 「무이도가」 차운시를 남겼을 뿐이다. 한강 정구 역시 ‘구곡’을 경영한 바 없고 이황과 마찬가지로 「무이도가」를 차운한 시편을 지었을 뿐이다. 이른바 「무흘구곡시(武屹九曲詩)」라고 알려진 작품은 정구가 「무이도가」를 차운한 시로써 내용이나 구도가 모두 주희의 무이구곡 경관을 추상하여 노래한 것에 불과하지 현재 성주 대가천에 있는 무흘구곡과는 무관하다. 단연코 정구는 무흘구곡(武屹九曲)을 경영하지 않았으니 「무흘구곡가(武屹九曲歌)」를 지을 수 없다. 이황과 정구가 도산서당이나 무흘정사를 경영한 것은 사실이다. 이를 확대해석하여 도산구곡과 무흘구곡을 경영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정사경영이 주희의 예에 의하면 차후 구곡경영의 예비단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퇴도 노선생(退陶 老先生)’께서 구곡을 경영하지 않았는데, 후학으로서 선뜻 감히 마음을 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황은 정사경영에 있어서 「도산기(陶山記)」를 통해 주자의 그것에 기초하여 완전한 형태의 어떤 정형, 조선적 틀을 시범했다. 정사경영의 요체는 은거의 공간과 주체와 방식에 있다. 배산임수를 갖춘 공간에서 유교지식인이 도의(道義)를 기뻐하고 심성(心性)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은거한다는 명제가 그것이다. 배산임수의 지리적 조건을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당초부터 주자의 구곡경영을 수용하는 쪽으로 문제의식이 확산될 개연성이 높았다. 구곡을 설정하고 정사를 중심에 놓이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역으로 정사의 위치를 정해 놓고 상하로 구곡을 정해가는 경우도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퇴계가 도산에 터를 잡은 결정적인 이유가 ‘구곡을 경영’하여 조선의 무이산을 만들고자 하는 데 있었다고 본다.

이는 수정하기 전 「도산기」 초고본을 보면 확연하게 짐작할 수 있다. 금보(琴輔, 1521~1584)에 의하면, 「도산기」 초고본에는 ‘요산요수 중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데[樂山樂水, 闕一不可]’가 ‘무이산이 천하의 절승이 된 까닭은 안에 구곡의 물이 있기 때문인데[武夷, 所以爲天下絶勝者, 以中有九曲水也].’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퇴계는 당초에 청량산을 우리 집안의 산[吾家山]이라 하여 애지중지하면서 노년의 장수지처로 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방으로 둘러싼 산줄기로 인해 물을 앞에 둘 수 없다는 폐쇄성이 그로 하여금 도산으로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물을 앞에 둘 수 없다’면 구곡경영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황이 도산서당을 경영할 무렵, 그의 고심처는 노년의 처지를 감안하여 풍수학상 배산임수를 갖춘 공간의 확보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구곡경영은 후순위로 밀려나 있었다. 또 하나의 원인을 보탠다면, 그가 추구한 도산서당 주변을 소요하는 계산풍류(溪山風流)가 선유(船遊)를 동반하는 긴 동선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구곡 설정이 그에게 그리 급한 과제로 대두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퇴계는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그 미학적 의의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었지만 끝내 실제 구곡을 경영하지는 않았다. 정사를 중심으로 낙천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발견하여 시로 읊었을 뿐이다.

퇴계는 당시에 이미 ‘임하구곡(臨河九曲)’과 같은 구곡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구곡을 설정하는 데 별다른 혐의를 느끼지 않았을 법하다. 실제로 퇴계는 도산구곡을 경영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 증거가 바로 「희작칠대삼곡시(戲作七臺三曲詩)」이다. ‘희작’이란 말은 의미가 심장하다. 주자도 「무이도가」를 지으면서 ‘희작’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장난삼아 짓는다는 말은 무언가 의도가 내재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퇴계가 구곡경영과 도산구곡시 창작에 뜻을 두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월란암(月瀾庵)이 배산임수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고 주변의 산수에서 “초은대(招隱臺), 월란대(月瀾臺), 고반대(考槃臺), 응사대(凝思臺), 낭영대(朗詠臺), 석담곡(石潭曲), 천사곡(川沙曲), 단사곡(丹砂曲)”을 ‘칠대’와 ‘삼곡’으로 읊었다. 그 중 물이 산을 감아 돌아 나가는 곳은 셋뿐이었다. 삼곡에서 구곡으로 확장을 꾀할 수 있었지만 퇴계는 더 이상의 무리한 도모를 거두었다. 이렇게 하여 퇴계의 구곡경영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어떤 논고에 따르면, 퇴계는 그의 문인들이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겨서 그의 도덕을 찬양한 시를 모아 ?도산구곡?을 편찬하자 이 시집의 전파를 막으려고 이봉춘이 보관하고 있던 초고를 가져오라고 편지를 보냈던 일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어떠한 문도도 도산구곡을 논한 적이 없거니와 퇴계의 학풍을 접한 호남의 선비들도 그들의 거주공간의 제약 때문에 구곡문화를 전개하는 데 과감하지 못했다. 재래의 면앙정 송순 계통의 누정문화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참여했을 따름이다.

퇴계는 영남의 낙동강(낙수)를 물 중의 임금이라고 존숭했거니와 그 상류인 낙천(도산 앞으로 흐르는 물)에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했다. 퇴계의 문도인 정유일(鄭惟一, 1533∼1576, 호 文峰)은 “도산에서부터 청량산 아래까지의 물이 모두 ‘구곡’이다. 층진 골짝 겹친 산, 푸른 절벽 붉은 비탈이 갈수록 더욱 기이했다. (선생은) 늘 봄 가을로 벗을 불러 함께 그윽한 경치를 찾아 읊조리고 바라보며 유람하였다. 마음으로 경전을 탐색하고 흥취를 계산(산수)에 붙여 도취되어 지냈으니, (그럴 땐) 세상(현실)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정유일이 말한 구곡은 도산(탁영담)에서 청량산(청량곡)에 이르는 물줄기 주변의 경관에 국한되어 있다. ?선성지(宣城誌)?에서 말한 선성 14곡 가운데서 박석천(博石川, 제1곡: 청량산), 경암담(景巖潭, 제2곡), 고산(孤山, 제3곡: 日洞精舍, 금란수), 월명담(月明潭, 제4곡), 벽력암(霹靂巖, 제5곡), 백운지(白雲地, 제6곡: 우탁), 단사협(丹砂峽, 제7곡), 천사(川沙, 제8곡: 이현우), 월란대(月瀾臺, 제9곡)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의 도산구곡에서 보면 제5곡에서 제9곡에 이르는 것으로 이른바 ‘청량구곡’이라 칭할 수 있는 설정이다. 당시 제1곡 운암에서 제4곡 분천까지는 이미 주인이 있는 땅이어서 퇴계가 이를 외포(外圃)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제5곡 도산부터 제9곡 청량까지 외포를 확장하여 ‘우리 집안의 외포(吾家外圃)’로 만들고자 했고, 생전에 문도들과 함께 자주 그 길을 걷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백 년 동안 예안에 세거해온 원주민 출신들 가운데 일부는 도산구곡이 퇴계 당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비록 지금은 안동댐 건설로 인해 옛터전이 모두 수몰되고 말았지만 퇴계가 도산에서 청량산으로 오르내리던 길을 심방하면서 그러한 생각을 더욱 굳혀가는 이도 있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도산구곡은 형질이 변경되지 않았다는 전제 아래에서 보면, 퇴계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 지금까지 그대로 존재한다. 다만 객관적으로 놓여있는 아홉 개의 자연경관[物象]이라는 존재방식을 인정할 때 그렇다. 이 글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도산구곡’은 특정 시기에 주자의 구곡설정 방식에 따라 중간에 정사를 배치하고 그 하류에서 그 상류로 올라가며 순차적으로 곡을 매기는 성리학 문화 현상의 소산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현상’은 앞서 언급한 ‘자연경관’이라는 존재방식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선성지?에도 ‘선성구곡’이 나타나고 ‘선성십사곡도’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안 경내의 아름다운 물굽이를 물리적 실체에 의존하여 획정한 것으로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면서 곡을 매기는 방식이다. 뿐만 아니라 선성구곡이나 선성십사곡에는 ‘도산’이 전혀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도산’을 중심에 놓으려는 의지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곡의 설정이 특정장소를 염두에 두지 않고 선성(예안)이라는 행정구역 전체를 상정하고 논의해야 하는 읍지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퇴계 이후 영남에서 이루어진 구곡경영은 이형상(李衡祥, 1653-1733, 호 甁窩)의 「성고구곡시(城皐九曲詩)」에서 확인된다. 이형상은 경북 영천으로 내려가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은거하면서 성고구곡을 경영했다. 이형상은 영남출신이 아니었기에 영남학파와 얼마나 유대의식이 공고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 역시 남인으로서 숙종연간 환국정치의 피해자로 외직을 전전하다가 경화를 거부하고 낙남한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성고구곡시」의 제1수 「총론(總論)」을 읽어보면, 그가 주자의 「무이도가」와 퇴계의 차운시를 본받아 구곡시를 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이도가」와 마찬가지로 시의 전개가 뱃놀이의 연속과 주변경관의 찬미로 일관하고 있다. 그 속에서 이형상은 자신의 불우와 위정자에 대한 불만 그리고 은거의지의 정당성을 은근히 드러내려 했다. 흥미로운 것은 종래의 차운시가 주자가 조성해 놓은 「무이도가」의 의상(意象)을 재현하는 데 힘을 썼다면, 「성고구곡시」에서는 엄자릉(嚴子陵)이 은거한 칠리탄(七里灘)의 형상과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구곡문화는 조선후기에서 말기에 걸쳐서 주로 서인 노론계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다. 충청권 괴산이나 경북 문경지역은 구곡경영이 활발했던 곳인데, 거의 서인 노론계가 주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선행연구에서 매우 자세히 다루어졌기에 장황한 논의를 피하기로 한다. 이러한 분위기에 자극을 받아서였을까. 18세기 중반까지 조용했던 영남에서 비록 ‘칠곡(七曲)’에 그쳤지만 구곡경영에 첫발을 내디딘 이는 이상정(李象靖, 1711-81, 호 大山)이다.

안동 남후 광음동에는 구담(龜潭)이 있는데 미천(眉川) 상류에서 내려온 물이 고여 작은 배를 띄울 수 있다. 이상정은 이곳을 사랑하여 즐겨 유상했다. 만년(1768년)에 귀담 서쪽 언덕, 현재의 암산유원지 뒤편에 고산정사(孤山精舍)를 열어 많은 문도를 길렀다. 이상정이 죽자 후학들은 1789년 그 자리에 스승을 향사하는 고산서원(孤山書院)을 세웠다. 고산서원은 일반 서원과 달리 앙지재(仰止齋)와 백승각(百承閣) 양끝에 개방된 마루가 있어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에 용이하다. 일찍이 이상정은 「고산기(高山記)」에서 고산정사를 전후로 곡을 이룬 것이 일곱[孤山七曲]이라 하고 가장 아름다운 제4곡에 정사가 위치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정사 주변의 바위와 대(臺)와 물굽이에 이름을 붙이고, 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시로 그 명승을 노래해 기꺼이 찾아오는 벗들과 함께 인지지락(仁智之樂)를 즐겼다.

이상정의 고산칠곡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성주 대가천에서 무흘구곡(武屹九曲)이 설정되고 있었다. 무흘구곡은 정구를 추모하기 위해 18세기 중엽 후학들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1770년대에 무흘구곡의 조성이 이루어졌고, 1784년(정조 8)에는 무흘정사(武屹精舍)가 중건되었는데, 이때를 기념하여 화가 김상진(金尙眞)에 의해 정구가 소요하던 무흘동천이 실경산수화로 <무흘구곡도>(10폭)에 담기게 되었다. 무흘구곡은 정구의 생장처이자 학문의 거점인 제1곡 회연서원(檜淵書院)과 2곡 한강대(寒岡臺), 유상(遊賞)의 공간인 제3곡에서 제6곡까지, 그리고 피세(避世)의 공간인 제7곡에서 제9곡까지로 3등분할 수 있다.

무흘구곡의 중심은 무흘정사일 터인데, 제7곡에 위치한 것이 이채롭다. 보통 정사공간은 구곡의 중앙인 제5곡에 두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무흘정사의 핵심 공간 인 서운암(棲雲菴)을 그린 <서운암도>를 <무흘구곡도>의 첫머리에 실은 것이 아닐까 한다.

 

 

5. 陶山九曲의 經營과 九曲詩 創作

 

 

도산구곡(陶山九曲)은 언제 설정되었고 「도산구곡시」는 언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을까. 이는 아마도 퇴계를 현창하는 사업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오가산지(吾家山誌)?에는 명종 21년(1566) 왕명으로 도산을 그렸고, 영조 9년(1733)과 정조 16년(1792)에 다시 왕명으로 도산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청량산에서 운암에 이르는 구곡을 대상으로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18세기 말에 그린 도산서원도가 포괄하는 경관의 범위가 지금의 도산구곡 설정의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1792년에 정조는 회재를 향사하는 옥산(玉山)서원과 퇴계를 향사하는 도산(陶山)서원에 각각 제사를 지내고 아울러 도산별시를 거행하라고 명했다. 정조는 “정학(正學)을 존숭하려면 마땅히 선현을 존숭해야 한다. 어제 옥산 서원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는데, 옥산 서원에 제사를 지내고 도산 서원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지난번 사학(邪學)이 점차 번질 때에 오직 영남의 인사들이 선정(先正)의 학문을 지켜 흔들리지도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았으므로, 그후부터 나의 앙모(仰慕)가 더해졌다. 각신 이만수는 명령을 받들고 돌아오는 길에 예안(禮安) 고을에 있는 선정 문순공의 서원에 달려가 제사를 지내라. 제문은 지어 내려 보내겠다. 선정의 자손들과 이웃 고을 인사들로서 참여할 자는 미리 와서 기다리게 하라. 제사 지내는 날 각신은 전교당(典敎堂)에 앉아서 여러 생도들을 불러 진도문(進道門) 안뜰에 서게 하고 가지고 간 글 제목을 게시하여 각기 글을 짓도록 하고 시험지를 거두어 조정에 돌아오는 날 아뢰도록 하라.”라고 했다.

이러한 정조의 배려는 영남사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에 충분했다. 도산구곡의 설정도 이러한 분위기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이야순(李野淳, 1755-1831, 호 廣瀨)의 「도산구곡시(陶山九曲詩)」(「무이도가」를 차운함)가 1800년경 지어졌고 조술도(趙述道, 1729∼1803, 호 晩谷)가 이야순의 시를 차운한 것이 1802년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도산구곡의 설정은 1800년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19세기 초에 이르러 이이순(李頤淳, 1754-1832, 호 後溪)이나 이야순 등이 이황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분 아래 도산구곡을 명명하고 주희의 「무의도가」를 차운한 「유도산구곡 경차무이도가운10수(遊陶山九曲敬次武夷棹歌韻十首)」를 지었다.

1802년 임술년 오담에서 예안의 선비 25인이 선유하며 주변 경치의 아름다움을 향유한 바 있다. 이는 1562년(임술) 7월 기망에 퇴계가 소동파가 적벽에서 선유한 고사를 잇기 위해 월천, 후조당, 읍청정, 설월당, 일휴당, 성재 등과 풍월담에서 배를 띄워 놀이하고자 했으나 비가 와서 행하지 못한 것을 후대에 실천하려는 노력의 일단이었다. 실제로 ?퇴계집?에는 이와 관련된 시편이 전하고 있거니와 그로부터 2백년 뒤에 이이순이 주축이 되어 그 실천을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선배들의 고사를 뒤따라 완성하자는 생각에 역동서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역동서원 산장이 모임을 주관하고 도산서원 산장이 모임을 돕는 형식으로 일을 추진하였다. 당시 참가자는 모두 25인으로 오담에서 배를 띄워 풍월담으로 내려가는 코스로 선유가 이루어졌다. 아마 이 무렵 예안의 선비들 사이에서 도산구곡의 범위와 명칭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을 터이고,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이순과 이야순의 「도산구곡시」가 나온 것도 이즈음의 일로 보인다. 이야순은 분명한 설명을 남기지 않아 그가 어떠한 생각으로 도산구곡을 설정했으며 「도산구곡시」를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에 반해 이이순은 무이구곡이 보여준 경관점의 형상에 유의하여 그와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도산구곡을 설정하려 한 것 같다. 그는 한두 동지와 낙천의 물굽이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강산의 경치를 토론하였다. 그래서 하늘 높이 솟구친 영지산(靈芝山)과 부용봉(芙蓉峯)을 무이산의 만정(幔亭)과 옥녀(玉女)에 견주고, 깎아지른 절벽인 학소암(鶴巢巖)과 갈선대(葛仙臺)를 금계(金鷄)와 선장(仙掌)에 비겼으며, 동취병(西翠屛)과 서취병(西翠屛)을 대은(大隱)과 창병(蒼屛)에 비겼고, 청벽(靑壁)과 단사(丹砂)를 벽소(碧霄)와 도원(桃源)에 비겼던 것이다.

도산의 구곡설정을 주도한 이이순과 이야순의 구곡시는 ‘비암’과 ‘오담’의 출입이 있을 뿐 거의 일치를 보여준다. 다만 이이순이 청량산에 남은 퇴계의 자취를 보전하고 조은(釣隱) 이세택(李世澤, 1716~1777)이 엮은 ?청량지(淸凉志)?를 보완하는데 힘썼다면, 이야순은 도산구곡의 존재를 주변에 널리 알리고 도산구곡시 창작(차운) 열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퇴계를 추모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양인 간에 암묵적으로 역할분담이 이루어진 셈이다. 따라서 이이순은 이야순의 구곡설정과 구곡시 창작논의에 개입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훗날 이만여(李晩輿, 1861~1904)가 엮은 ?오가산지?에 오면, 이야순이 설정한 구곡의 순차와 명목(1곡 운암, 2곡 월천, 3곡 오담, 4곡 분천, 5곡 탁영, 6곡 천사, 7곡 단사, 8곡 고산, 9곡 청량)이 그대로 수용되기에 이른다.

1823년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관작이 회복되자 문인 유이좌(柳台佐)등이 서울과 영남의 선비들의 의론을 모아 안동 봉정사에서 ?번암집? 간행을 추진했다. 채제공의 복권은 영남남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게 만들었던 것 같다. 도산과 옥산을 대상으로 구곡시를 지어 퇴계와 회재를 회상하고 흠모하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도 그 즈음의 일이었다.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 1768∼1844)은 1822년(임오) 단양으로 유배를 갔다가 그 이듬해 「도산구곡시」를 차운했다. 1823년 5월, 이가순의 종형인 이야순이 경주로 내려가 양동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옥산서원을 둘러보고, 그의 발의로 옥산구곡을 설정하고, 「무이구곡시」를 차운하여 「옥산구곡시」와 「도산구곡시」를 짓는 모임을 만든 바 있다. 그때 이가순도 이야순의 예에 따라 「무이구곡시」를 차운하고 이어서 「퇴계구곡」, 「도산구곡」, 「옥산구곡」 그리고 한강 정구의 유적지인 「원명구곡(源明九曲)」를 아울러 노래했다.

앞서 이가순이 말한 ‘양동의 여러 선비’란 경주에 세거하던 회재의 8세손 창려(蒼廬) 이정기(李鼎基, 1759~1836), 남려(南廬) 이정엄(李鼎儼, 1755~?), 회재 9세손으로 ?번암집? 교감(校勘) 일에 참여한 치암(恥庵) 이악상(李岳祥, 1763~1829, 자 自彦),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 1709∼1784)의 손자인 남봉양(南鳳陽, 자 鳴應), 그리고 손순지(孫淳之, 자 孟殷) 등을 말한다. 거기에 김종덕(金宗德, 1724∼1797)의 조카로 의성에 거주하던 김경진(金經進, 자 時有)도 잠시 양동에 들렀다가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대명복수가(大明復讎歌)」와 「천군복위가(天君復位歌)」로 유명한 창헌(蒼軒) 조우각(趙友慤, 1765~1839)은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김경진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차운시 작업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산구곡시」는 차운하지 않았다.

이시수(李蓍秀, 1790∼1849, 호 慕亭) 역시 1823년경 「도산구곡가」를 차운했다. 또한 그는 「속도산구곡가(續陶山九曲歌)」를 지었는데, 종래의 「도산구곡」과 다른 가곡(歌曲, 도산12곡의 연장)의 의미로 구곡을 이해하여 도산 경내에서 구곡을 설정하기도 했다.

 

 

6. 19세기 이후 九曲經營

 

 

1823년 이후 이야순과 교유한 영남의 여러 선비들이 「퇴계구곡시(退溪九曲詩)」, 「옥산구곡시(玉山九曲詩)」와 같이 퇴계나 회재, 한강, 여헌, 대산 등 선현의 자취가 서려 있는 곳을 구곡으로 설정하여 추모하거나 노래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영천(永川)의 선비 조우각(趙友慤)은 1823년(계미) 4월 이야순, 김경진(金經進) 등과 경주 양동(良洞)의 명승을 둘러보며 옥산서원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계정구곡(溪亭九曲)」 10수를 지었고, 또한 이정기(李鼎基)의 시를 차운하여 「옥산구곡시(玉山九曲詩)」와 「양동구곡시(良洞九曲詩)」,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지었다. 조우각은 이야순 등과 어울릴 정도로 구곡산수에 대해 조예가 깊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계산의 몇 굽이 무이산 신령하니, 틈나면 늘 「구곡가」를 읊조리네. 도학(道學)에 진입하는 단계라는 해석은 주자의 본뜻 아니니, 도옹(퇴계)께서 으뜸으로 주자시를 알았다 할 것이네.”라고 하여, 종래의 「무이도가」 이해방식에서 퇴계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로 보면 조선후기에 지어진 영남선비들의 「구곡가」에서 입도차제나 조도시적 성격을 찾으려는 시도는 매우 무모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필자가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도산구곡시」를 지은 작가의 수효가 15명에 달한다. 향후 보다 폭넓은 문헌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그 수효는 수십 인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체로 퇴계의 「무이도가」 해석방식을 수용하여 각 곡의 경치를 묘사하면서 그 사이에 선학을 경모하는 마음을 붙였다. 때문에 십 수 편의 도산구곡시에서 입도차제나 조도시적 성향을 보이는 작품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회재와 퇴계의 자취가 서린 도산, 퇴계, 옥산에 대한 구곡시 창작이 빈번하던 시절에, 최남복(崔南復, 1759~1814, 호 陶窩)은 울산에서 백련구곡(白蓮九曲)을 경영하였다. 최남복은 숙종 때 경주부 이조리제(伊助里第)에서 출생한 인물로서 현재는 대곡댐으로 수몰된 두동면과 두서면 일대, 반구대(盤龜臺) 골짜기의 상류 즉 천전리 각석(刻石)보다 훨씬 북쪽 계곡의 백련암(白蓮庵)이 있던 자리에 1784년부터 백련서사(白蓮書社)를 경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며 장수지소(藏修之所)로 삼았다. 최남복의 구곡경영은 앞서 언급한 이형상 등 선배들의 그것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최남복은 구곡경영과 관련한 글로 산수기문(山水記文), 구곡가(九曲歌), 초은조(招隱操), 정거십영(亭居十詠) 등을 남겼다. 최남복은 백련서사의 터를 여는 축문에서 십년 동안 왕래하며 구곡원림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고 시로 읊조리기도 하면서 돌 하나 나무 하나까지 이름을 부여하여, 원림 속의 샘물소리와 산의 빛깔이 더욱 맑고 시원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최남복의 구곡원림 경영은 장기간 동안 정밀하게 산세를 관찰하고 명당을 모색한 결과였다. 여기서 정밀한 관찰은 주로 백련서사의 터를 잡고 백련구곡 설정을 위한 풍수지리적 조건(환경)을 검토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이원조(李源祚, 1792-1871, 호 凝窩)의 포천구곡(布川九曲)이다.

이원조는 경북 성주 가야산 북쪽에 있는 포천 계곡 상류에 정사공간인 만귀정(晩歸亭)을 짓고 은거에 들어가면서 포천구곡을 경영하였다. 그 역시 「무이도가」를 차운한 「포천구곡시(布川九曲詩)」와 구곡의 실경을 그림에 담은 <포천구곡도>를 남겼다. 이원조는 이를 주변의 지세와 형승을 기록한 ?포천지(布川誌)?에 수록했다. 포천구곡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자당(自黨)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한 구곡설정이 아니라 아름다운 경관을 향유하고자 하는 개인적 욕구가 강하게 엿보인다. 만년의 은거지를 별천지와 같은 이상적인 공간으로 수렴하면서 포천구곡이 선택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의 내용도 선경(仙境)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구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데 치우쳐 있다.

일상 삶의 공간인 제9곡의 만귀정이 곧 별천지라는 의식이 「포천구곡시」에서 느껴지는 바, 이는 종래의 제5곡이나 제6곡에 정사(주거지: 강학처)를 배치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지세가 거주공간을 제9곡에 두지 않을 수 없어서일 터이다.

문경의 금천(錦川)은 조선조에 상주에 속한 하천이었다. 인천채씨(仁川蔡氏)로 권상일(權相一, 1679~1760, 호 淸臺)의 문도인 채헌(蔡瀗, 1715~1795)이 18세기에 명명한 석문구곡(石門九曲)은 현 문경시 산양면과 산북면 일대에 자리하는 원림으로 금천과 대하천을 따라서 약 9키로 미터에 걸쳐 전개된다.

채헌은 석문구곡 제1곡에서 제9곡까지 금천과 대하천을 거슬러 오르며 아홉 굽이를 국문가사로 읊었다. 제1곡 농청대, 제2곡 주암, 제3곡 우암대, 제4곡 벽립암, 제5곡 구룡판, 제6곡 반정, 제7곡 광탄, 제8곡 아천, 제9곡 석문정이 그것인데, 제8곡과 제9곡은 대하천에 있고 나머지는 금천에 있다.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한시 「석문구곡차무이도가운」도 지었다. 또한 「무이도가」 형식을 본뜬 국문시가 「석문구곡도가」를 지어 스스로를 어부에 비기고 시내를 거슬러 오르며 자연을 벗삼아 존심양성하는 어부가 되고자 했다. 또한 그는 「석문정가」로 석문정을 노래했고, 「석문정산수록」을 통해 석문정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소개하기도 했다.

석문구곡에는 농청정, 주암정, 우암정, 석문정이 남아있다. 농청대는 권상일이 1739년 독서하고 수양하던 자리로 대 아래에 졸수재와 한계헌을 둔 ‘존도서와(尊道書窩)’를 짓고 살았었다. 지금은 바위 위에 농청정이 자리하고 있다. ‘농청(弄淸)’이란 맑은 물을 희롱한다는 뜻이니, 권상일이 대 아래로 호수처럼 잔잔하게 흐르는 금천을 사랑하여 붙인 이름이다. 주암정(舟巖亭)은 배 모양의 바위 위에 세워진 좀처럼 보기 드문 암정이다. 주암정은 주암 채익하(蔡翊夏)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00년대에 세웠다고 하는데, 정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예찬하는 정자 건물로도 유명하다.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는 이덕형, 홍언충, 김홍민, 홍여하, 이구, 이만부, 권상일을 제향하는 근암서원(近嵓書院)이 있다. 제향된 인물들은 대체로 정경세 이후 상주지역을 대표하여 퇴계학을 계승하고 수호하려 했던 남인계 학자들이다. 석문구곡은 이러한 퇴계학풍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사상사적 배경 아래 추구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이 송준길의 후예들인 노론계 인사들의 출입과 점유가 승했던 영강 수계의 선유구곡(仙遊九曲), 쌍룡구곡(雙龍九曲), 화지구곡(花枝九曲)과 다르다.

영남지방은 호남에 비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이 발달하여, 수많은 계곡을 조성함으로써 구곡설정이 용이했다. 정자나 정사가 유독 많은 것도 이 같은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정자와 정사는 장수(藏修), 유식(遊息)하는 공간이다. 정자가 유식에 중점을 둔다면 정사는 장수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때에 따라 정자가 정사로 활용되기도 한다. 정자에 오르던 선비가 그곳을 바로 정사로 여기고 눌러 앉으면 주변의 물굽이가 바로 구곡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이런 단순한 발상에 기대어 생각해 보면 물과 산이 있는 영남 도처가 구곡세상이라 여겨도 무리는 아닐 성싶다.

19세기 이후 나타나는 구곡이나 구곡시가는 대체로 외세의 침략이나 일제강점에 저항하는 척사위정(斥邪衛正) 운동이나 의병, 항일독립의 기지로서 기능하는 예가 많았다. 예컨대, 전남 곡성 성출산 청류동에 조성된 구곡은 조병순(曺秉順, 1876-1921)이 설정한 것으로 조선말 위정척사의 기치를 들고 항일독립운동과 국민교육을 이끌던 근거지였다. 또한 전북 진안에 있는 구곡을 노래한 「이산구곡가(駬山九曲歌)」는 최익현의 문인인 이도복이 1925년 구곡승경을 음미하며 지은 가사이다. 3.1운동의 좌절과 일제에 의한 망국의 한을 달래고 조선조의 개국과 깊은 관련이 있는 마이산에서 민족의 기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창작된 것이다.

 

 

7. 정리

 

 

구곡문화의 전개가 조선조 지식인들의 사유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한강 정구는 「무이지발(武夷誌跋)」에서 주희를 “우리 주부자[我朱夫子]”로 불렀다. 주자는 더 이상 이국인이 아니었다. 성호 이익은 「무이구곡도발(武夷九曲圖跋)>에서 “「무이구곡도」는 주자의 초상화와 같고 「무이구곡가」는 주자 화상찬이다[圖其寫眞, 詩便是畫像贊]. 그렇기 때문에 빠짐없이 자세히 그려내어야 한다[纖悉無遺].”라고 했다. 그림과 시를 통해 살아있는 주자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이처럼 구곡문화의 전개는 바로 주자학의 조선화를(조선의 주자가 되었음) 표지한다.

구곡문화는 생활 속에서 주자학의 실천을 추구함으로써 주자학의 외연을 넓혔고, 선비 풍류를 촉진하여 조선사대부의 자연친화(천인합일 의식)를 강화시켜주었다. 또한 구곡과 정사는 산수유상과 독서강학을 겸하는 원림문화를 촉진했으며, 수변공간에 대한 미적감수성을 제고시켜 자연에 대한 심미의식을 강화시켜 주었다. 그에 따라 도원향, 이른바 도학적 유토피아를 산수화 속에 담아내는 풍조를 촉진하였고, 구곡시가 창작을 통해 특정 지역공간을 미적으로 규범화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후기의 구곡문화는 도통을 확인하고 선현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었고, 그 결과 학파성, 당파성이 구곡문화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 막았다. 그렇지만 도학(주자 성리학)에 기초하여 문학(기문, 잡영, 구곡가), 예술(구곡도), 건축(정사, 누정)이 결합된 구곡문화의 생산은 계속되어 사대부의 원림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출처 : 영남 유학연구회
글쓴이 : 황명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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