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18. 07:52ㆍ美學 이야기
조선 후기의 문인화
울트라맨 조회 27 추천 0 2003.11.03. 21:04
문인화란 전문적인 화가가 아닌 시인․학자 등 사대부층 사람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
문인화는 처음에 특정한 양식을 갖지 않았으나 <원말 4대가>의 출현으로 양식의 전형이 완성되었다. 이를 남종화(南宗畵) 또는 남화(南畵)라고 하며, 비로소 문인화 특유의 양식이 정착하였다. 한국의 경우, 조선 전기 (姜希顔) 등의 문기(文氣) 넘치는 문인화가가 있었으나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유행하였던 17세기 이후부터 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麟祥) 등의 남종문인화가 나왔고, 조선 후기에는 (金正喜) 같은 대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1] 조선 말기(약1850~1910)회화의 양상
조선 말기라함은 대략 1850년부터 1910년까지라고 본다.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남종화와 함께 조선 후기를 풍미했다면 말기시대의 화단 경향은 이전과는 굉장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 말기 시대는 그 전시대와 달리 회화에 있어서 학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을 사람이 3명으로 한정되어 버린다. 그들은 바로 김정희(金正喜, 17786~1856), 허련(許鍊 , 1809~1892), 장승업(張承業, 1848~1897)이다.
1. 조선말기의 시대적 배경
대외적으로는 구미 열강과 일본, 중국 소련 등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각축을 벌이며 위협을 가해 왔으며, 대내적으로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대원군의 쇄국정책, 개화파의 등장과 패퇴 등이 이어지면서 이에 수반한 각종 사건들이 줄지어 발생하였다. 기독교의 토착으로 서구의 사상과 문화가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종래의 신분계급이 와해되었다. 이처럼 급변하던 어지러운 시대적 상황과 조류가 당시의 문화와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회화에서도 당시의 상황이나 조류가 어느 정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더 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항은 당시 중인계층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인들은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유는 당시 중인들은 외국의 문물에 박식해서 사대부 출신 못지않은 예술의 세계를 창출할 수 있었다. 특히 회화에 있어서는 이들의 손을 빌어 남종화의 세계가 적극적으로 전개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는 저선후기로부터 축적된 중국 송, 원, 명의 남종화가 계승되고 새로이 청으로부터 전래된 정통파(正統派), 양주팔괴(楊洲八怪) 등 여러 계통의 화풍과 화론이 수용되어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는데 필요한 풍부한 자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북학파의 영향을 받은 청조 문화의 적극적 수용으로 인해 김정희의 영향력은 증대되었고 이에 따라 가속화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또한 북경을 통한 서양화법의 수용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만들었다. 서화를 즐기는 경향도 확대되었고, 아울러 서민대중을 위한 민화가 보급화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조선 말기의 회화는 조선 후기의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화풍과 비교해 볼 때 대체적으로 보다 중국적인 성향을 띠었고,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수준이 하락되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 원인은 전대의 훌륭한 회화상의 업적을 외면하고, 중국적인 사의의 세계에 학문이 부족한 상태에서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2] 전통의 위축
조선 말기 회화의 수준이 하락된 이유는 전통을 계승하긴 했지만 전대의 전통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조선 후기의 회화와 비교를 해보면 자명해 진다.
먼저 정선일파의 진경산수화나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이 구축했던 풍속화의 전통이 이 시대에는 별다른 발전을 이루지 못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이전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 모두에서, 조선후기의 정선 일파,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넘치는 활기와 해학, 멋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말기에는 앞서 말했듯이 진경산수화나 풍속화의 전통이 저변화 되어 민화에서 적극적으로 그려졌음이 주목된다. 이점은 조선 말기의 회화가 정통 화단에서는 위축되었지만 대중들 사이에서는 강하게 뿌리 내렸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진경산수화나 풍속화 이외에도 김홍도 산수화풍의 계승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김홍도의 화풍은 말기에도 계승되었음이 일반 회화나 민화에 의하여 분명해지지만 그의 그림들에서 언제나 느낄 수 있는 활력과 생동감은 이제 말기의 작품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조선 후기에 수용되어져 오던 서양화풍도 조선 말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조선 말기의 서양화법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채용신의 초상화들이다. 채용신의 초상화를 가지고 우리나라 초상화를 전 후 구분하는 것은 조선 후기 전통에 비중을 두고 서양화법을 비교적 소극적으로 수용하던 경향이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양화법의 비중을 높임으로써 화풍상의 변화는 물론 격의 하락을 초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변화는 남종화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전통을 제대로 계승한 조선 후기의 남종화에 비해 말기의 남종화는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나은 결과를 낳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 남종화의 문제는 조선 말기 회화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 김정희파의 파란
조선 말기의 회화에서 무엇보다도 관심을 끄는 주된 경향은 역시 남종화풍이다. 조선 말기에도
남종화풍은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조선 후기의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하였다기 보다는 청대의 남종화를 위주로 하고 명대와 원대의 남종화도 섭렵하는 경향을 보편적으로 띠었다. 이러한 경향은 아마도 청대의 화단과 긴밀한 교섭을 가졌던 김정희(金正喜)의 영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믿어진다. 즉 그가 옹방강 부자, 완원, 주학년을 비롯한 청대의 대표적인 문인들과 교유하고, 그들을 통하여 중국의 문물과 서화를 직접 접하면서 중국 문화에 대한 자신의 견식을 넓히고 스스로의 감식안을 키워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인 듯하다. 김정희가 당시의 대표적인 화가들에게 화평과 화론을 통하여 영향을 미쳤음은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 실린 그의 평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그 평들 중 몇 가지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 북산 김수철
<계당납상도>. ꡒ대단히 잘 된 곳이 많으니, 요즘의 아무렇게나 쓱쓱 그리는 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채색을 너무 지나치게 한 것이 흠이다.ꡓ
<매우행인도>, ꡒ배치가 대단히 익숙하고 붓놀림이 또한 막힘이 없다. 다만 색칠을 할 적에 세밀하게 하지 못하고 또 우산 받치고 가는 사람이 조금 환쟁이 그림같이 되었다.ꡓ
● 회원 이한철
<춘산독왕도>, ꡒ매우 깨끗한 풍치가 있으나, 그 그림방의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속세를 벗어난 기운이 조금 부족하다.ꡓ
● 소치 허련
<추강만촉도>, ꡒ또한 일종의 풍치(風致)가 있어 붓놀림이 고삽(枯澁)한 기운이 없으니 참으로 볼 만하다.ꡓ.
<사교청망도>, ꡒ붓놀림이 너무 방종하여 전연 꺼리는 것이 없다. 그러나 전생(前生)의 솜씨가 팔 밑에 쌓여서 능히 멈출 수 없게 되었다.ꡓ
이 평들을 통해서 몇 가지 점들이 주목된다.
첫째, 원말사대가의 화풍을 도달해야 하고 참고해야 할 대상으로 삼고 있었음이 간취된다.
둘째, 동인의 습기를 범했다는 구절도 보여, 조선 후기나 그 이전의 우리나라 화풍이 별로 참고 되었거나 참고할 만한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셋째, 청대의 사왕오운(四王吳釘)의 화풍은 몰론 개성이 강한 유민화가(遺民畵家)들의 화풍이 원말사대가의 화풍과 함께 폭 넓게 수용되고 참고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조선 말기의 회화가 지녔던 필묵법과 채색법의 문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섯째, 김수철의 작품에 대하여 평하면서 일종의 ꡐ솔이지법ꡑ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김정희의 영향력은 당시 굉장한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김정희의 이러한 평은 당시 화단에 정곡을 찌른 것이며, 또 그만큼 화가들에게 도움이 되고 권위가 있는 것이었다고 믿어진다.
김정희가 당시 화단에 미친 영향은 비단 「예림갑을록」에 올라 있는 화가들에게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영향은 당시의 왕실, 사대부, 중인 출신의 여기화가, 화원 등 각계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와 그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인물들을 함께 묶어서 우리는 그들을 김정희파(金正喜派)라고 지칭할 수 있겠다.
김정희는 청에 다녀온 이후 쌓은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당시 우리나라의 화단을 남종화 지상주의적, 모화적인 것으로 이끌었다고 하겠다. 이것은 결국 당시 화단을 일원화하고 다양성을 잃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믿어진다. 또한 종래의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화풍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김정희 일파의 주요 화가들과 그들의 화풍에 대해 대충 살펴보기로 하겠다. 제일 먼저 이 일파의 주체인 추사 김정희이다. 그는 고증학, 금석학 등을 깊이 탐구하여 실사구시의 학문을 대성시키고 파격적인 추사체를 이루었음은 주지되어 있는 바이다. 또 당시의 화단에 미쳤던 영향의 심도도 대단했음을 이미 대강이나마 알아보았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엄격한 사의정신, 간결한 포치, 투명한 갈필법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김정희를 따르던 인물들 중에는 한미한 집안 출신의 화가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에서 제일 연배가 올라가는 사람은 우봉 조희룡이다. 조희룡은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와 같은 참신한 산수화와 함께 죽(竹), 매(梅), 난을 그렸다. <매화서옥도>에서는 절벽 같은 산, 눈송이 같은 매화꽃, 서예적인 필법, 특이한 설채법 등이 눈길을 끄는 요소들이다. 이는 종래의 기대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화풍으로 김수철 등의 이색화풍과도 맥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묵죽도>와 같은 뛰어난 대나무 그림도 그렸지만, 무엇보다도 매화를 몹시 좋아하였다. 또한 난초도 자주 그렸으나 김정희로부터 ꡒ(그가) 내 난초를 배워서 그리지만 끝내 화법의 한 길을 면치 못한다.ꡓ는 평을 받았다.
고람 전기는 불과 30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시서화 감별에 뛰어나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전형적인 예술인이었으면서도 학구적인 측면이 있었고, 이것이 훌륭한 선배들과의 교유와 함께 그의 예술을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공시켰다고 볼 수 있다. 대표작으로는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중에서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는 갈필법을 연상시키는 소략한 화풍을 보여주며 이른바 ‘원근법’을 연상시켜 준다, 이것이 김정희의 영향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전기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회화를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예림갑을록」에 올라 있는 인물로 회원 이한철(1808~1880이후), 혜산 유숙, 하석 박인석, 자산 조중묵이 있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듯이 김정희의 영향을 받았던 화가들 중에서 조희룡, 전기, 허련, 김수철이 특히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즉 저술을 남길 정도의 학문을 닦았던 조희룡, 전기, 허련 등이 남종화풍에서 성공을 했으나 그렇지 못한 화가들은 반대로 사의의 세계를 충분히 구현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믿어진다.
김정희의 영향을 받았던 화가로서 난초를 주로 그렸던 인물은 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다. 그의 난초는 김정희의 것에 비하여 더 섬세하고 유연한 느낌을 준다. 이 시대 난초 그림의 전통은 운미 민영익에 의해 변화하였다. 난 잎이 길고 강경하면, 잎의 굴곡이 번잡하지 않고 정돈된 느낌을 자아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잎의 끝이 종종 무디게 표현된 것도 보이고 농묵을 쓰되 갈필 취향을 나타낸 경우도 적지 않다.
이색화풍의 대두
조선 말기의 회화에서 크게 주목되는 업적 중의 하나는 현대적 감각의 이색적인 화풍이 일부 화가들에 의하여 창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색화풍은 북산 김수철과 학산 김창수의 간결한 화풍과 석창 홍세섭의 서구적 감각의 화풍으로 구분된다. 김수철과 김창수가 수채화적인 설채법에서 특히 이색적인 효과를 낸 데 반하여 홍세섭은 습윤한 묵법으로 감각을 살려 서로 대조를 보인다.
김수철은 산수와 화훼를 주로 그렸는데 한결같이 간략한 구도, 단순한 형태, 산뜻한 색채, 호초점(胡椒點)의 애용 등의 특징을 보여준다. 거의 직선적이면서도 분명한 구륵법, 유탄약사법(柳炭略寫法)의 사용도 두드러진 특색이다. 그러나 김수철의 화풍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그가 철저하게 남종화풍에 토대를 두고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창출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수철의 이색화풍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김수철의 이색화풍의 연원은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즉, 신윤복→윤제홍→김수철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하겠다.
어쨌든 김수철의 화풍은 조선 말기의 남종화가 이룩한 뚜렷한 업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의 화풍과는 또 다른 성격의 뚜렷한 이색화풍을 이룩한 사람은 석창 홍세섭이다. 홍세섭은 산수보다는 수묵사의(水墨寫意) 화조화를 주로 그려 주제나 재료면 에서부터 김수철이나 김창수와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승지(承旨)까지 지낸 전형적인 문인 출신의 화가였다. 당시 홍세섭의 화풍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국면을 형성하였는데 홍세섭의 대표작인 <유압도(遊鴨圖)>를 이례로 보면 화면 그득히 물위를 헤엄쳐 오는 두 마리의 오리들을 철저한 조감법을 구사하여 묘사하였다. 일렁이는 물결, 대화를 나누는 듯한 오리들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 농담이 적절하게 어울린 습윤한 묵법, 화면에 액샌트를 가하는 크고 작은 점들, 수면을 감싸듯 배치된 조밀한 작품들에서도 대동소이하게 엿보인다.
간결한 구성과 밝은 채색을 구사하여 이색화풍을 형성한 김수철과 김창수, 수묵으로 신격(神格)을 이룬 홍세섭은 조선 말기의 화단을 빛내준 대표적인 화가들임에 틀림없다.
허련 ․ 장승업 두 계보의 확립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조선왕조 말기가 차지하는 큰 비중과 의의는 그것이 현대 화단을 위한 하나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소치 허련과 오원 장승업은 이 점에서 더욱 중요시 된다. 그들은 각기 자기 나름의 계보를 형성하여 현대 화단에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치 허련은 진도(珍島) 출신으로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제자였다가 초의의 소개로 김정희의 훈도를 받게 되었고 중앙의 화단에서 종횡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김정희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남종화의 대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허련은 산수, 인물, 송, 죽, 매화, 모란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고 한결같이 그의 작품은 남종화의 세계를 지향하였다. 다소 거칠고 소박한 느낌을 자아내는 갈필법과 푸르스름한 담청을 즐겨 쓴 설채법이 예찬이나 황공망계의 변형된 구도와 아울러 그의 독자적이 화풍을 창출하였다. 그는 이러한 그의 작품들에 시문을 추사체로 써넣는 일이 많아 시서화를 함께 구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히 하기도 하였다.
그는 모란꽃 그림을 많이 그려 ‘허모란’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는데 그의 모란꽃 그림은 먹으로만 모란을 그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모란이라는 것은 가정의 부귀영화를 의미하고 있었던 터라 궁중은 물론 일만 서민들까지도 이 그림을 요구했다. 이렇다 보니 허련은 할 수 없이 이러한 요구에 부응을 했다. 하지만 모란꽃 그림을 먹으로만 그렸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수요에 응하면서도 남종화가로서의본분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허련의 화풍은 주지되어 있듯이 그의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 남동 허건(許楗),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과 그들의 수 많은 제자들을 통하여 현대까지 계승되거 있다. 또한 그의 화풍은 호남화단(湖南畵壇)의 중추를 이루며 전개되어왔다.
장승업의 화풍은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과 소림(小琳) 조석진(1853~1920)에게 계승되었고 이들을 통하여 그들의 제자인 심산 노수현,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등의 현대 화가들에게 이어졌다. 안중식의 <풍림정거도(楓林停車圖)>를 한가지 예로 보면 반복적이고 과장된 산의 모습, 스산한 느낌을 주는 담청의 애용, 문기(文氣) 없는 분위기 등에서 장승업의 화풍의 외형적 계승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조석진도 장승업의 영향을 받아 형태의 반복, 담청의 애용을 드러내지만 그의 <수포고촌도(水抱孤村圖)>에서 보듯이 보다 투박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화풍으로 변모하였다.
안중식과 조석진의 화풍은 세칭 현대화의 사대가들에게 이어졌으나 이들 후진들은 초기에만 스승의 화풍에 따랐을 뿐 각기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면서 스승을 통해 계승받았던 오원 장승업의 화풍으로부터 점차 탈피하게 되었다.
맺음말
조선왕조 말기의 회와를 중요한 경향과 주요 화가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먼저 이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다난하고 어지러운 때였음과,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전통은 위축되고 김정희를 필두로 한 남종화풍이 풍미했음을 알아보았다. 앞 시대인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가 시들고 사의를 중시하는 남종화가 유행했던 것이 이 시대의 회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학문을 익힌 소수의 화가들만이 남종화를 성공적으로 창출했고 나머지 다수는 남종화를 외형적으로만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시대에는 이 밖에 김정희의 영향을 받았던 김수철에 의하여 간결한 구도와 홍염(烘染)을 특징으로 하는 이색화풍이 창출되었으며, 또한 홍세섭에 의하여 윤묵선염법(潤墨愃染法)을 써서 이룬 참신한 감각의 화풍이 창작되었음이 크게 주목된다. 이들의 화풍은 조선 말기의 회화가 이룩한 뚜렷한 업적의 하나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 말기의 회화가 중요시되는 이유는 이 시대의 회화가 현대의 우리와 가장 밀접하며 또 현대로 계승되어 그 공과(功過)가 어떠하든 맥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일 중요시되는 것은 소치 허련 일파와 오원 장승업의 또 다른 일파이다.
오원 장승업 이야기
오원 장승업이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다는 전설적인 일화는 솔거나 최경이 미천한 신분으로 그림을 배운 일화와 비슷하다. 장지연은 『일사유사逸士遺事』에서 오원이 그림을 배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ꡒ ……(장승업은) 일찍 부모를 잃고 집도 무척 가난하여 의지할 곳조차 없었다. 총각으로 굴러다니다가 서울에 와서, 수표교에 있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벼슬을 지낸 이응헌의 집에 붙어살고 있었다. 장승업은 어릴 때 글을 못 배웠으므로 글씨에는 캄캄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총명하여 주인집의 글 읽는 아이들을 따라 옆에서 듣고 거의 이해하게 되었다.
이응헌의 집에는 중국 원元,명明 이래의 이름난 사람들의 그림과 글씨를 많이 수장하고 있어, 그림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보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럴 때마다 장승업도 함께 매번 유심히 바라보고는 하다가 하루는 마치 전생에 화가였다는 듯이 문득 깨달음이 있어, 신神이 모이고 뜻이 통하였다. 평생에 붓 자루도 쥘 줄 몰랐는데, 하루는 문득 뭇을 잡고서 손이 내키는 대로 붓을 휘두르고 먹물을 뿌려서 대나무(竹), 난초(蘭), 매화(梅), 바위(石), 산수山水, 등을 그려 보니 다 자연스레 하늘이 이루어 놓은 듯하여 신운神韻이 감돌았다.
이응헌이 보고 깜짝 놀라며 ‘이 그림을 누가 그린 거냐?’고 하니 장승업은 사실대로 말하였다. 이응헌은 ‘신이 도우는 일이다.’ 하며, 종이 , 붓, 먹 등을 장만해 주고 그림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화명畵名이 세상에 날려 사방에서 그림을 청하는 이가 줄을 이었고, 수레와 말이 골목을 메웠다.ꡓ
오원 장승업은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 겸재謙齋 정선鄭敾,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와 더불어 조선 시대의 4대 화가로 꼽힌다.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오원 장승업은 조선 시대의 화가 가운데 현대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서,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화단에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학계에서 안견과 정선, 김홍도, 장승업을 조선 시대의 4대 화가로 칭하는 이유는 이들이 남긴 거대한 예술적 업적과 영향력 때문이다. 조선 초 세종世宗․세조世祖 연간의 찬란한 문화 가운데 회화 예술을 대표하는 안견과, 조선 후기 영조英祖, 정조正祖 연간의 화화 예술을 대표하는 정선 김홍도는 우리 민족의 회화사에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좀 더 설명하자면, 안견은 조선 시대 초기 산수화의 대가로서, 그의 화풍은 조선 초기와 중기의 화단에 200여 년 동안이나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시대 후기의 정선과 김홍도는 각기 우리나라의 산천을 그린 진경 산수眞景山水와 실경 산수實景山水를 형성시켰고, 조선 말기의 오원 장승업은 근대 화단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 채 우리 회화사에서 근대 미술을 이끌어 냈다.
오원 장승업의 출생과 생김새
오원 장승업은 1843년에 태어났으나, 출생지라든가 부모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대원大元 장씨의 무반武班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오늘날 대원 장씨가 없지만, 조선 시대의 잡과 입격자 가운데는 대원 장씨가 여럿이 보이고, 『성원록』의 ‘대원장씨’ 기록에는 무관과 역관이 일부 있는 것을 보면, 오원 장승업이 무관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일사유기』의 기록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근원近園김용준金瑢俊(1904~1967)은『근원수필』의 ‘오원 질사吾園軼事’ 편에서 장승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보기에는 대단히 호기스러운 선비가 있었으니 그가 곧 오원 장승업이었다. 그는 얼굴 모습이 약간 기름한 데다가 조선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노오란 동공瞳孔을 가진 것과, 주독酒毒 때문인지 코끝이 조금 불그스레하고 우뚝한 코 밑에는 까무잡잡한 수염이 우스꽝스래 붙은 것이 특색이었다. 그다지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으나 어디인지 모르게 맑고 동탁한 빛이 떠오르는 듯하여 멀리서 보아서도 으가 서기瑞氣 도는 사람처럼 훤해 보인다는 것이 더 한층 큰 특색이었다.”
세상에 나와 세상의 눈을 뜨다
장승업은 일찍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집도 가난하여, 처음에는 일가 들을 찾아다니며 얹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동안 그런 생활을 하다가 차츰 나이가 들자 그는 친척들의 눈치를 보기도 싫고, 워낙 한 군데 붙어 있기를 싫어하는 성미여서 홀연히 고향을 떠나 정쳐 없이 여기 저기 떠돌아다닌다. 그의 고향이 경기도 광주라는 말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떠돌던 시기에 광주 지역의 어디에선가 한동안 머슴살이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향을 떠난 장승업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수표교에 있는 역관譯官 이응헌李應憲(1838~?)의 집에 들어가, 물도 긷고 장작도 패고 마당도 쓸어 주는 것으로 밥값을 하며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바로 이 이응헌의 집에서 장승업은 그림을 그리고 스승을 만나는 인생의 중대한 계기를 맞게 된다. 따라서 오원 장승업과 이응헌의 만남은 운명적인 만남으로 승화된다.
오원 장승업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후원한 이응헌은 18세 때인 1855년 역과에 입격하여 한어 역관이 되었고, 후일 종 2품 동지중추부사에 이른 인물이다. 그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은 우선 이상적(1804~1865)의 사위라는 점이다.
그런데, 장승업이 저절로 그림을 터득하여 그렸다는 말은, 그가 그인 그림들이 조선 말기의 화단에서 매우 독특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오원 장승업의 그림은 단원 김홍도 이후의 조선 후기 화단을 풍미한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는 추사 김정희의 영향(완당 바람)을 받지 않고, 후대의 미술 사학계에서 당대의 중국 회화를 모방한 중국화의 한 아류라고 혹평받을 정도로 조선 말기 화단에서 특징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물론 오원 장승업의 예술에서 중국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해서, 우리의 오원을 사대주의에 휩쓸린 화가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오원 장승업의 스승, 혜산 유숙
유숙은 본관이 한양이고, 자는 선영 야군이며, 호는 혜산이다. 혜산 유숙은 1827년에 태어나 1873에 사망했다고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혜산 유숙은 희원 이한철(1812·1893이후), 임당 백은배(1820·1900)와 함께 19세기 대표적 화원 화가로서, 추사 김정희와 우봉 조희룡(1789~1866), 유최진(1791~?) 등과 그림으로 교유했는데, 그는 자구 황공망(1269~1354)과 운림 예찬(1301~1374)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산수 인물 영모에 능했고 풍속화도 잘 그렸다.
오원 장승업이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게도 필시 스승이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스승이 혜산 유숙임이 구전을 통하여 알려지고 있다. 즉, 심전 안중식을 거쳐 오원의 화맥을 이은 근대화가 이당 김은호 『서화 백년』에서, 혜산 유숙은 장승업이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초년의 스승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실제로 장승업의 많은 작품 가운데 초기의 작품은 혜산 유숙의 산수화나 영모 및 화조화와 흡사한 면이 있다. 혜산 유숙의 「매」와 오원 장승업의 「호취도」를 비교해 보면, 한눈에 혜산 유숙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잇을 정도로 아주 비슷하다. 이를 근거로 하여 보면 유숙이 장승업의 초년에 그림을 가르친 스승이었다는 이당 김은호의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물론 유숙의 화풍은 정형화된 남종화풍 위주였으므로, 장승업이 후기에 이룩한 파격적인 화풍과는 거리가 있다.
그럼 오원이 언제부터 혜산에게서 그림은 배웠을까? 오원이 떠돌아다니다가 이응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한 시기는 그가 20여 세가 되던 무렵으로 추정해 볼 때 1863년경이 된다. 이를 보면 오원은 1863년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혜산이 사망하는 1873년 이전에는 혜산에게서 그림을 배웠을 것이므로, 오원은 고종(1863년 즉위) 초에 혜성과 같이 출현한 화가인 것이다.
오원 장승업 시대의 화단
오원 장승업의 예술이 시작되기 이전인 영 ․ 정조 시대 조선 화단은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의 산수화,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순 ․ 철종 시대에 이르면 전경이나 실경 산수화 ․ 풍속화가 급격히 쇠퇴하고,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인물들의 주도 아래 ‘서권기 문자향’을 중시하는 청나라 말에 유행했던 남종화류 산수화가 널리 퍼지게 된다. 즉, 추사 김정희는 ‘서권기 문자향’을 주장하며, ‘모습의 유사함’보다 ‘뜻을 그려냄’을 중시하는 청나라 말에 중국에서 유행했던 남종화를 훌륭한 화풍으로 인정했는데, 그 제자인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등은 추사의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작품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조선 말기의 조선화朝鮮化된 남종화풍을 보여 주는 추사류파의 대표적 서화가와 그들의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세한도歲寒圖」, 「부작란도不作蘭圖」
▲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
「매화서옥도」,「홍백매도」
▲ 소치小痴 허련許鍊(1809~1892)
「방완당산수도」.「산수도」,「모란도」
▲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매화초옥도」
이들이 조선화된 조선 말기의 남종화풍 이외에도 이를 토대로 하여 청나라의 양주 팔괴楊洲八怪나 석도石濤 등의 화풍을 참조하여 형성시킨 이색적인 화풍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서화가와 그들의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
▲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19세기 중엽 활동)
「무릉춘색도」(1862), 「송계한담도」,「화훼도」
▲ 학산鶴山 김창수金昌秀(19세기) 「동경산수」
▲ 석창石窓 홍세섭洪世燮(1832~1884) 「영모8첩병풍」
이러한 ‘서권기 문자향’을 중시하는 작품이외에도,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장식화를 그린 궁중 장식화와 서민 경제의 발달을 반영하여 이른바 ‘장마당 그림’ 이라고 불리는 각종의 민화가 크게 발달하게 된다. 아울러 영 ․ 정조 시대부터 부분적으로 수용되어 내려왔던 서양 화법이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음영법과 원근법을 중심으로 수용되어 전통 화법에 부분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도 오원 장승업이 그림을 배우고 활동하기 시작했던 19세기 후반의 조선 화단에서는 추사 김정희 이래 상당히 형식화된 남종 문인화풍이 쿠에 유행하고 있었다.
오원이 혜성과 같이 조선 화단에 등장하던 이 19세기 중반에는, 서양의 태서 화법이 조선에 더욱 확산되고 있었으며, 중국 청나라 말기의 양주 팔괴가 구사했던 새로운 화풍이 수입되고 있었다. 청의 새로운 화풍이란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조지겸趙之謙(1829~1884), 임백년任伯年(1840~1895), 오창석吳昌碩(1844~1927) 등 이른바 해상파海上派와 광동성廣東省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거소居巢와 거렴居廉 형제 등의 초기 영남학파嶺南學派의 화풍을 말한다.
오원의 초기 작품을 보면 중국 청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화풍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 나타나는데, 장승업은 어떤 한 가지 유파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화풍을 받아들여 뛰어난 기법과 양식적 다양성을 가진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루어 나간다.
오원 장승업은 조선 후기의 대화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을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으로 ‘오원吾園’이라 스스로 호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주 자신의 작품에는 “신운神韻이 생동生動한다.”고 자부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자부심은 예술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서 오는 내적 자신감의 표현일 텐데 이는 그의 뛰어난 작품들이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안견과 정선, 김홍도와 함께 그를 조선시대의 4대 화가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후원자 이응헌과 변원규
앞에서 말했듯이 역관으로 지낸 이응헌은 그림과 글씨를 모으고 감상하는 취미를 가졌으므로, 오원 장승업의 그림 재주를 즉각 알아보고 본격적으로 활동하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한편, 장승업이 한양으로 흘러 들어와 유명한 화가가 되기까지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전하는 다른 인물로는 한성판윤을 지낸 변원규卞元圭(1837~1894이후)가 있다. 근원 김용준의 ‘오원질사’에 의하면 장승업은 초년 이후에 한성판윤을 지낸 변원규의 집에서도 고용살이를 했다고 한다. 이는 오원 장승업이 그림을 배우던 초년에 이응헌의 집을 나와 한때 변원규의 집에서도 고용살이를 했다는 의미인데, 이 때 고용살이의 일은 주로 그림을 그리라는 주문이었을 것이다. 변원규 역시 역관으로서 청나라와의 외교 업무에 깊이 관여하여 고종의 신임을 얻고, 한성판윤을 역임한 바 있다.
고종과 외척 여흥 민씨와의 인연
장승업은 40대에 이르러 놀라운 기량과 호방한 필력으로 크게 이름을 날렸다. 그 명성은 궁중에까지 들어가서 고종이 그를 불러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러나 장승업에게는 임금의 부름도 크나큰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대한 구속으로 느껴질 따름이어서 이내 그는 궁궐에서 도망치게 된다. 당시 고종 임금의 명으로 장승업이 그린 그림 가운데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 그 중 한 작품인 간송미술과 소장의 「춘남극도春南極圖」와 「추남극도秋南極圖」2폭에는 “영을 받들어 화원 신 장승업이 올립니다.”라는 관식款識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승업이 궁중에서 요구한 그림을 모두 그리지는 못했어도 여러 점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오원 장승업이 고종의 부름을 받았던 일화에서 우리는 그의 진정한 예술가 기질, 즉 일체의 세속적인 가치와 법도는 그에게 하찮은 것이고, 오직 예술과 창작의 영감을 북돋아 주는 술과 흥취만이 그의 벗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잇다. 그는 예술 없이는 자신의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없었고, 반면에 자신의 삶과 처지가 너무 보잘 것 없어 괴로워했던 것 같다. 따라서 장승업에게 예술은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고, 술은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장승업과 여인들
장지연은 『일사 유기』에서 부인 등 장승업과 여인들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품이 또한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노상 그림을 그릴 때에는 반드시 미인을 옆에 두고, 술을 따르게 해야 득의작得意作이 나왔다고 한다. 나이 사십여 세에 비로소 부인을 얻었으나 하룻밤을 자고 버린 다음, 종신토록 다시 장가들지 아니하였다.”
즉, 오원은 마흔 살이 넘은 뒤에야 부인을 맞이했으나 하룻밤을 보내고는, 죽을 때까지는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이당 김은호는 『서화 백년』에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침 먹고 어쩌고 해야 하는 그 규칙 생활이 귀찮아서 집어치웠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김용준의 『근원수필』‘오원 질사’에 의하면, 장승업은 관수동 골목에 소실小室을 두고, 백주白晝에 거나하게 취해서 가다오다 생각나면 문득 찾아가 하룻밤 혹은 며칠씩 묵고 갔다고 한다. 이 소실은 장승업이 죽은 후에 원남동 부근으로 이주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 여자의 이름은 박성녀朴姓女이며 원래 기생이었다고 한다. 한편,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이 동대문 밖 멀리 조그만 집에 거주하던 장승업의 부인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확실치 않다.
오원 장승업과 제자
오원 장승업은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을 제자로 남겼고, 그들에 의하여 우리 근대 미술계의 유명 화가들이 다수 배출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소림과 심전은 1882년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화가 수업을 받게 된다. 1882년이면 오원 장승업의 나이 40세가 e되는 해로, 이 무렵 오원은 이미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림에 뜻을 둔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은 당대의 화가로 자리를 굳힌 오원 장승업을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이 둘은 글을 잘 모르는 장승업의 그림에 글을 넣기도 하고 그 그림을 마무리하기도 하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원 장승업의 영향은 우리나라의 근대 화단에 널리 전파되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오원 장승업에 의하여 정리된 조선 시대 말기 화법을 대 화단에 이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술과 예술, 그리고 장승업
오원 장승업이 술을 좋아하고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궁중에서 그림을 글다가 달아난 일화를 앞에서 소개했다.
장승업의 생애는 술과 예술, 그리고 정처 없는 방랑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의 병을 받드는 궁중 화사로서의 영예도, 그림의 대가로 받은 금전도, 가정생활도 모두 그에게는 흥미가 없는 세상일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술집과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을 전전하며 생활했던 것이다.
당시에 장승업의 그림을 구한 사람들은 위로는 왕과 고관 대작부터 아래로는 s중인과 상인 등 아주 많았다. 그러나 장승업이 그림을 구하려면 권위나 금전보다도 좋은 술과 여자와 그를 아끼는 인격적인 대우가 더 필요했다. 장승업은 아름다운 여인이 따라주는 좋은 술을 실컷 마시고 취흥이 돌아야 생동하는 명화를 그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원 장승업의 창작태도
오원 장승업의 작품은 이미 당대에 임금을 비롯하여 외척, 사대부, 중인, 거부, 상인 등 각계 각층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문화를 향유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예술가로서 그를 인정했고 앞다투어 그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창작 태도는 어떠했을까?
석정 이정직은, 오원은 주문 들어오는 그림을 때맞추어 그려 주지 못하였지만, “거기에 응하고자 하는 기운이 가슴속에 쌓이면 말술을 마시고, 이에 샇였던 기운은 이로 인해 병발(倂發)되고.... 그 용필은 진려(振旅)분신(奮! 迅)하는 듯 떨쳐 일어났으니, 마치 풍우(風雨)가 재빨리 밀려드는 것과 같았고, 필묵에 기대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필묵은 이미 달리게 되었다.” 고 그의 창작 현장을 전한다.
또 앞에서 본 대로 위암 장지연의 『일사 유사』에 의하면 그는 “성품이 또 여색을 좋아하여 노상 그림 그릴 때에는 반드시 미인을 옆에 두고, 술을 따르게 해야 득의작(得意作)이 나왔다.” 고 한다. 장지연의 이 언급은 오원이 그림을 그리는 정경(情景)을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오원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상상하여 관재 이도영 (1884~1933) 은 「오원선생휘호도」(155X33cm)를 그린 바도 있다.
20세기 전반부를 살다 간 육당(六堂) 최남선 (崔南善)은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門答)』에서, “장승업은 중폐(重幣)의 유혹에도 남작(濫作)을 피하고 권위의 억압에도 청조(淸操)를 지켜 그의 예술안(藝術眼)에는 왕자와 부호가 없었다.”고 하였다. 즉, 오원은 예술에 관한 한...
오원 장승업의 죽음
술과 예술로, 그리고 매인 곳 없이 자유롭게 떠돌며 생을 보낸 오원 장승업은 1897년 55세로 숨을 거둔다.
그런데 근원 김용준은 오원이 “실은 사(死)한 ? 痼?아니요 그의 행방(行方)이 불명(不明)인 채 없어졌다고 하는 말이 더 ? 탄?信憑)됨직하다.”고 하면서, 장승업 말년의 친구였다는 청일전쟁 때의 종군 기자 일본인 우미우라 아쯔야가 “신선이 되어 갔다.” 고 말한 것 까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원을 전설적인 인물로 만들고자 한 의도에서 나온 서술일 뿐이다.
오원이 55세의 나이로 죽은 것은 분명하다. 당대의 그와 교유했던 위창 오세창의 『근역서화징』과 위암 장지연의 『일사 유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원 장승업은 조용히 생을 마쳤고, 그가 55세로 생을 마감한 것은 그의 제자와 가까운 사람들에 의하여 분명히 확인되었다. 오세창이 『근역서화징』에서 오원이 55세에 사망했다고 한 것 이외에도 심전 안중식은 1914년에 오원의 「삼인무년도」에 제를 쓰면서, 오원이 죽은지 18년이 흘렀다고 했는데, 이를 역산해보면 그 해 역시 1897년이 된다.
그러나 장승업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명확치 않다. 오원이 너무 조용히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퓐?근원 김용준은 “장승업은 죽었다기보다는 행방 불명이 되었다.”고 했고, 정규는 “어느 마을 논두렁을 베고 죽었다.” 고 했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까! 지 했다. 하지만, 위암 장지연의 『일사 유사』와 위창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에 오원이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적은 것으로 보아, 그의 사망은 그와 가까웠던 몇몇 사람에게는 알려진 것이 틀림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오원은 이 세상을 조용히 떠나기를 바랐기에, 제자들이 그의 죽음을 조용히 처리한 것은 아닐지...
한편, 오원에게는 하룻밤을 지낸 부인이 있었고, 소실도 있었다. 그러나 ‘오원 질사’에 의하면 그는 후사(後嗣)가 없었다. 오원 장승업이 예술을 지고 지순(至高至純)하게 사랑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장승업의 후사는 그의 예술과 창작 정신을 계승한 근.현대의 수많은 화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1)장승업의 회화(繪畵) 개관(槪觀)
장승업의 작품은 산수화, 인물화, 동물화,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등 아주 다양하며, 이 여러 종류에서 모두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그런 중에서도 가장 많이 그린 것이 화조화, 동물화, 기명절지화이며, 산수화와 인물화는 상대적으로 적다. 장승업이 많이 그린 화조화, 동물화, 기명절지화는 형태상 병풍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아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장승업의 회화를 양식적으로 볼 때, 한마디로 전통화법과 외래화법을 종합·절충하여 자신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장승업이 활동하기 시작했던 19세기 후반, 우리 나라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이래 상당히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화풍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백은배(白殷培, 1820∼1900), 이학철(李漢喆, 1812∼1893 이후), 유숙(劉淑, 1827∼1873) 등이며, 이 중 유숙은 장승업의 초년 스승이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에는 그 이전, 즉 18세기의 중국 양주팔괴(楊洲八怪)의 화풍이 이미 유입되어 있었고, 또 당시 중국의 신 화풍도 수입되고 있었다. 새로 수입된 신 화풍이란 당시 번창했던 신흥도시 상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조지겸(趙之謙), 임백년(任伯年), 오창석(吳昌碩) 등 소위 해상파(海上派)와 광동성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거소(居巢)와 거렴(居廉) 형제 등의 초기 영남학파(嶺南學派)의 화풍을 말한다.
그러나 장승업의 화가로서의 위대성은 어떤 한 가지 유파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뛰어난 기법과 양식적 다양성을 가진 독자적 경지를 이룬 데 있다. 장승업이 즐겨 사용한 기법으로는 필선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는 백묘법(白描法), 정묘하고 아름다운 공필(工筆) 채색화법, 이와는 정반대인 호방한 필묵의 감필법(減筆法), 수묵의 깊은 맛을 보여주는 파묵법(破墨法), 근대적 감각을 보여주는 신선한 선염 담채법, 그리고 최후에 이룩한 깊은 정신미가 깃든 수묵 사의화법(寫意畵法) 등을 들 수 있다.
장승업은 조선 후기의 대화가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으로 오원(五園)으로 자기 호를 지었다. 그리고 매번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는 신운(神韻)이 생동(生動)한다고 자부하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자부심은 예술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서 오는 내적 자신감의 표현이며, 이는 그의 뛰어난 작품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를 안견(安堅),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한국 회화사상 진정한 대가(大家)의 반열에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장승업의 회화는 초월적 예술정신의 발현이자 암울했던 시대를 밝힌 찬란한 예술혼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2)산수화(山水畵)
장승업의 산수화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초기는 수업기, 중기는 붓 쓰는 방법이나 채색 쓰는 방법에서 장승업의 특징인 활력과 운동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화풍의 형성기), 후기는 뛰어난 기량으로 다양한 양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원숙기이다. 장승업의 생애로 볼 때에는 초기는 대개 20대, 중기는 30대, 후기는 40대 이후로 볼 수 있다.
장승업의 초기에 처음 산수화를 배울 때에는 다른 모든 화가들처럼 당시 널리 퍼져있던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으로 시작하였다. 이런 남종문인화풍은 화가들의 교과서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이나 기타 여러 가지 화보(畵譜), 그리고 선생님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이런 남종 산수화풍의 특징적인 모습은 장승업의 스승이었다고 전하는 조선 말기의 화원 혜산(蕙山) 유숙(劉淑)의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뛰어난 화가였던 장승업은 금새 남종산수화풍을 완벽히 연습하여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런 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서강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세산수도(細山水圖)>라는 작은 그림이다. 이 산수도는 제목이 가리키는 데로 아주 세밀하고 정확한 선으로 산과 나무, 집 따위를 깔끔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의 자유롭고 활달한 기질은 점잖고 깔끔한 남종 산수화풍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장승업은 산은 우쭐우쭐 춤을 추고, 나무와 숲은 바람에 일렁이며 시원한 소리를 내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런 장승업의 활기찬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 중기의 산수화이다. 중기의 산수화는 여러 점이 있지만 그 중 하나만 살펴보기로 한다.
중기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방황학산초추강도(倣黃鶴山樵秋江圖)>라는 작은 작품이다. '방황학산초(倣黃鶴山樵)'라는 말은 '황학산의 나무꾼을 본뜨다'라는 뜻인데, 황학산초는 중국 원(元)나라의 유명한 문인화가(文人畵家) 왕몽(王蒙)의 호(號)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왕몽이 그린 가을철 강변 풍경을 모방하여 그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모방'이라는 것을 요새는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옛날 동양의 화가들은 훌륭한 선배 예술가의 작품을 배우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방편으로 '모방'을 많이 했다. 그래서 모방이란 연습의 방법인 동시에 제2의 창작이기도 했으니 요새와는 많이 다른 것이다. 어쨌든 서울대학교의 <추강도>는 장승업이 중국의 옛날 대가를 모방하여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한 산수도인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추강도>를 보면 멀리 둥글둥글한 산들이 누워 있고, 가까이는 강 위에 조각배를 띄우고 한 사람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가까운 강변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는 사이에 장난감 같은 집이 몇 채 있다. 화면의 위에는 한문으로 화제(畵題)를 써 놓았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아무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혼자 외로이 작은 배를 띄웠네
이 글을 보면 이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잘 드러나 있다. 즉 이 작품의 주제는 가을철 혼자 배를 타고 바라보는 산수의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 속에는 약간 쓸쓸한 기분도 포함되어 있지만, 가(假)없는 자연의 장관을 즐기기 위해서는 오히려 혼자일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산수화는 조용한 가운데 내부적으로 활력이 가득 차 있으며, 차분하게 관찰하면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장승업은 먹과 붓이라는 간단한 도구로써 이처럼 많은 것을 표현해 내었다. 이 <추강도>의 화제 끝에는 다음과 같이 그림을 그린 시기와 작가 등도 기록되어 있다.
기묘년 가을 본관이 대원인 장승업이 황학산초(왕몽)의 가을 경치 그림을 본떠서 그렸다.
위에서 설명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방황학산초추강도>와 함께 중기의 산수화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김연준(金連俊) 소장의 <산수도>(1878년, 36세 작)와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무림촌장도(茂林村庄圖)> 등이 있다. <무림촌장도>는 조선시대 말기에 난초를 잘 그렸던 문인화가 민영익의 부친인 민태호(閔台鎬)에게 그려준 것이다.
장승업의 산수화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게 되는 것은 40대 이후의 후기이다. 후기는 장승업이 화가로서 원숙한 경지에 도달한 시기이다.
몇몇 그림들을 살펴보면 먼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산수도 8폭 병풍>이 있는데, 이 병풍은 장승업의 산수화 중에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우선 여덟 폭 모두 산수도로 이루어진 병풍은 이 작품밖에 없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다음으로 여덟 폭 모두가 제각기 다른 양식으로 그려져 장승업의 놀라운 회화적 응용력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병풍 중 한 폭인 <귀거래도(歸去來圖)>에는 "경인년 가을에 장승업이 그렸다(庚寅秋月 五園 張承業)"라는 낙관이 있어서, 이 병풍은 1890년, 장승업이 48세 때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귀거래도>는 중국 동진(東晋)의 유명한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장승업이 그린 <귀거래도>에도 도연명이 배를 타고 시골집에 도착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귀거래도>도 물결의 표현, 수양버들이나 소나무의 가지, 원산의 묘사 등에서 아주 세련된 필선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간에 적당하게 바탕 면을 남겨 마치 하얀 안개가 감싸고 있는 듯 원근감을 표현하였다.
장승업의 산수화는 이외에도 많다. 그 중에는 세밀한 선의 묘사와 화려한 채색을 갖춘 장식적인 작품도 있고, 문인화의 경지와 통하는 수묵 선염의 생략적인 산수화도 있다. 그러나 장승업의 산수화는 그 외형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지만 모두 자연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표현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속적인 인간 세계를 떠나 영원히 지속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면서, 거기에 우리도 참여하여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승업의 산수화는 그 필선이 마치 자연의 생명체처럼 생생하며 활기에 차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선경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래서 장승업의 산수화를 통해 우리들은 가장 아름다운 이상향의 세계 - 거기에는 산과 숲과 물과 사람과 동물들이 모두 조화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3) 인물화(人物畵)
장승업의 인물화는 산수화처럼 뚜렷한 외형적 화풍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인물화는 그 전체적 특징과 의의를 알아보고 대표적인 작품을 소개하기로 한다.
장승업의 회화 중 외형상 가장 중국적인 것이 인물화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승업이 즐겨 그린 인물화의 소재는 왕희지(王羲之), 도연명(陶淵明), 이태백, 예찬(倪瓚) 등 역사적 인물이거나, 신선, 포대(布袋), 삼장법사 등 불교나 도교의 인물이든 간에 대부분 중국적이기 때문이다. 또 장승업은 인물화의 기본 구성을 청말(淸末) 상해지역에서 출토된 화보(畵譜)에서 따오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장승업의 인물화는 다른 소재에 비해서도 특히 너무 중국적이며 모화적(慕華的), 사대적(事大的)이라고 부당하게 비판되기도 한다. 하지만 장승업의 인물화에는 예술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진정한 초월적 인간상을 표현해낸 데에 있다. 장승업의 인물화에서 이런 초월적인 면은 주인공이 머금고 있는 신비스러운 미소로 표현된다. 그의 인물들은 다양한 자태와 형식으로 표현되지만 한결같이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화법의 면에서 장승업의 인물화는 단원 김홍도의 신선도 묘법, 중국 양주 팔괴(楊洲八怪) 중 황신(黃愼)의 인물화법, 진홍수(陳洪綏)를 계승한 해상파 임이(任 )의 인물화법 등이 모두 섞여 있다. 그러나 장승업은 이런 다양한 요소들을 흡수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래서 정미한 백묘법(白描法)에서 호방한 감필법(減筆法)과 파묵법(破墨法), 그리고 만년의 깊은 정신성을 보여주는 수묵사의(水墨寫意) 인물화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화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장승업의 인물화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백묘법(白描法)이다. 백묘법은 채색을 사용하지 않고 필선만으로 그리는 방법으로서, 중국의 당대(唐代)에 화성(畵聖)으로 불렸던 오도자(吳道子)와 북송의 이공린(李公麟)이 잘 사용했던 방법이다. 백묘법은 필선만 사용하기 때문에 먹이나 채색으로 잘못 그어진 선을 감출 수 없으므로 아주 뛰어난 기교를 필요로 한다. 또한 필선만으로 인물의 입체감이나 동작, 표정 등을 모두 표현해내야 하므로 그린 화가의 능력이 드러난다.
< 무송반환도>는 도연명의 고사를 표현한 것이다. 도연명은 산수편에서도 설명하였듯이 관직을 버리고『귀거래사』를 읊으며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자연을 벗삼으며 유유자적하며 살았는데, 이런 전원 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일화들이 후대에 그림의 소재로 많이 애용되었다.
이 작품은 그 중 "소나무를 쓰다듬으며 머뭇거림(撫松而盤桓)", 즉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산책하는 도연명의 모습을 그렸다. 이 작품 역시 인물은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옷자락이나 소나무 등걸의 묘사는 생생한 백묘법으로 되어 있다.
< 삼인문년도>는 장승업이 세밀한 필선과 화려한 채색을 한 인물화의 대표적인 명작들이다. 두 작품의 구도는 약간씩 다르나 모두 같은 소재를 표현하였다. 옛날 세 신선이 서로 나이를 자랑하였는데, 한 신선이 말하기를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될 때마다 나는 산(算)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 꼭 열 개를 채웠다"고 하였다고 한다. 작품에서는 이야기에서처럼 신선이 산다는 바다 속의 봉래산 같은 산 속에 세 노인이 마주보고 있다. 그 옆에는 파도가 일렁이며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다. 인물의 모습은 장승업의 다른 인물화에서도 자주 보았던 것이다. 즉 광대뼈가 튀어 나왔고 턱이 넓고 이마가 벗겨진 모습이다. 또 주변의 바위나 산, 나무, 파도의 묘사는 세밀하기 그지없는 필선으로 이루어졌으며, 다른 작품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진한 채색도 하였다.
이상 몇 점의 작품을 통해서 살펴 보았듯이 장승업의 인물화는 모두 확고한 기초실력을 보여주는 백묘법의 바탕 위에 자유로운 응용이 이루어졌다. 비록 일부 도상은 중국의 화보에서 빌려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빌려 입은 옷과 같은 것이다. 장승업은 그 외형을 뛰어 넘어 인물의 신비스러운 미소를 통하여 회화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초월적 자유의 경지를 표현하였다. 장승업의 인물화에 나타나는 이런 초월적 미소는 바로 자기 자신이 깨달은 예술상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
장승업이 가장 즐겨 그렸고, 현재도 작품이 가장 많이 전해지는 분야가 화조영모화이다. 화조영모화란 꽃과 풀, 나무 등을 배경으로 새와 동물을 그린 것을 말한다. 이 화조영모화에 그려지는 소재는 아주 다양하다. 새 종류로는 길기와 독수리, 혹은 매, 학, 오리, 닭, 까치, 구관조, 앵무, 참새 등이 있다. 동물 종류로는 개, 고양이, 말, 사슴, 원숭이 등이 있는데, 개의 경우 보르달이 뜬 오동나무와 함께 그려진 것이 많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형태상으로 병풍에 그려진 것이 많다. 병풍에 그려진 경우 기러기 다음으로 물고기와 게가 많이 그려지는 점도 주목된다. 장승업이 그린 병풍 형식의 화조영모화는 한 가지 전형(典刑)이 되어 안중식과 조석진을 통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조영모화는 그 배경으로 사군자와 파초, 소나무, 오동나무 등 각종 화초와 수목이 곁들여지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화초나 수목은 비록 새나 동물의 배경이지만 그 자체로서도 아름다운 그림의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소재가 이처럼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종류에서 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과 치밀한 묘사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장승업의 전문 화가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잘 보여주는 분야이다. 장승업은 화조영모화를 그릴 때 여러 가지 기법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어떤 때는 아주 세밀하게 표현하고 아름다운 채색을 칠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수묵으로 빠르고 활기차고 단순하게 그리기도 한다. 그런데 외관상 이처럼 다양해 보이는 기법 속에서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필치에 생동감이 있어 대상의 생명력을 잘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가 기운생동(氣韻生動)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이처럼 그의 그림이 단순히 정확하고 아름다운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잘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상당히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중 대표적인 작푸 몇 점을 통해 그 특징을 알아보기로 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산수영모 10첩병풍>은 장승업의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 명품 중 하나이다. 이 병풍에는 화조영모화 이외에도 산수도가 1폭 포함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처럼 화조영모에 산수도나 기명절지도가 끼어있는 것은 아주 드물다. 서울대 소장 병풍에는 매, 닭, 오리, 앵무새 등의 새 종류오 고양이, 사슴, 원숭이의 동물들, 그리고 물고기와 게로 이루어져 있다.
서울대 소장 병풍 중 매를 보면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뻗어 내린 가지 위에 한 마리 매를 배치하였다. 이처럼 화면 한쪽에서 대각선으로 나무 가지를 배치하고 그 위에 새를 앉히는 구도는 당시 화조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던 방법이다. 그런데 장승업의 경우 매는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 한 반면, 나무 가지나 나머지는 아주 빠르고 생략적인 필치로 묘사하였다. 이런 점은 닭이나 원숭이를 그린 다른 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점은 장승업이 그림의 중심 소재와 부차적인 것을 잘 안배하여 그렸음을 보여준다. 서울대 소장 병풍 중 다른 폭인 사슴을 보면 파초와 함께 그려졌다. 여기에서도 사슴은 세밀한 필선으로 터럭까지 그린 반면 파초는 큰 붓질로 시원시원하게 표현하였다. 한쪽 앞발을 든 채 다소 겁먹은 듯한 사슴의 모습에서 장승업이 대상의 특징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 병풍 중 원숭이는 장승업의 화조영모화 중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소재이다. 또한 당시까지 조선시대 화가들이 즐겨 다루던 소재가 아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장승업이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에게 그려준 병풍에는 원숭이가 들어 있어 당시 서울에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김가진은 구한말 판서까지 역임하고 후에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 병풍은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점이 전해진다. 또한 개인 소장품 중에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작품들이 상당수 있다. 이런 작품들이 공개되어 회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감상되었으면 한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소재 및 화법상 조선 시대 전통 회화의 바탕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시에 새로 수입된 청나라 말기의 해상파(海上派) 화가들, 즉 임이, 조지겸 등의 화조화도 참조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은 전통적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모든 요소들을 자신의 왕성한 예술적 창조력 속에 용해시켰다. 그리고 실재 대상에 대한 세밀하고 끈질긴 관찰을 통해 그 특징을 파악해내어, 뛰어난 화법으로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그래서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더 많은 종류의 새나 동물, 화초를 그려냈으며, 동시에 그 생명력을 잘 표현해 내었던 것이다.
5)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장승업의 회화 중 특이한 것이 기명절지화이다. 기명절지란 말은 말 그대로 도자기나 청동기 등 각종 그릇(器皿) 종류에다가 연꽃, 국화, 매화 등 화훼 절지를 곁들인 그림이다. 기명절지화에는 이밖에도 목련, 백합, 모란, 난초, 수선화 등의 화초, 주전자, 소반, 연적, 붓, 인장, 책 등 문방도구나 생활용품, 영지, 인삼, 밤(송이), 석류, 옥수수, 참외, 복숭아, 무, 배추, 홍당무 등의 과일이나 야채, 심지어는 게 조개 생선 따위의 어물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소재가 그려져 있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병풍으로 그려지거나 화조영모화 병풍 속에 한 두 폭 포함되기도 한다. 또 단독으로 족자나 횡권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조상의 <백물도권(百物圖卷)>이다. 이 작품은 기다란 횡권(橫卷)에 청동기, 주전자, 연적, 난초, 화분, 무, 인삼, 밤, 조개, 게 등을 그린 것으로, 모든 소재들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또 선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기명절지도는 비교적 얌전하고 정밀한 필치로 그려진 것이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서양의 정물화(靜物畵)와 소재에 있어서는 비슷하지만 성격상으로는 다른 그림이다. 정물화는 어떤 특정 대상을 관찰하여 묘사한 것으로 대개 사실적이며 정적(靜的)이다. 그런데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그릇과 화초 따위를 소재로 하면서도 형태를 임의로 변형시키고 붓질을 과감하게 함으로써 활기 찬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즉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물건들까지 상라있는 생명체처럼 보이도록 그리는 데 특징이 있는 것이다. 이런 장승업 기명절지화의 특징은 지그재그의 즉흥적 구도, 시점9視點)의 자유로운 이동, 자유롭고 분방한 필치의 파묵법(破墨法)과 음영법(陰影法), 경쾌한 담채(淡彩)의 효과적 구상 등에서 기인한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조선 후기 정조 임금 시절에 유행했다는 책가도(冊架圖)와 이것이 민화(民畵)로 변한 책거리 그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책가도는 책장 소게 많은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모습을 서양화법으로 그린 것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 있어서 독서나 공부를 중시하는 풍조와 함께 크게 유행하였다. 어쨌든 기명절지화에는 이런 책가도의 전통과 함께 당시 중국에서 새로 수입된 청나라 말기 해상파(海上派)나 영남파(嶺南派)의 세화(歲畵)나 길상화(吉祥畵)의 영향도 받아들여져 있다. 당시에 조선이나 중국에서 이러한 정물화, 혹은 부귀다복(富貴多福)을 기원하는 그림이 유행한 것은 금석학(金石學)과 서화골동취미의 유행에도 그 원인이 있다. 어쨌든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당시의 어떤 회화보다도 즉흥적 필선의 아름다움과 생동미(生動美)를 보여주는 특이한 종류의 그림이다.
⑵장승업의 업적
장승업의 업적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우선 그는 전통 화법을 총 결산하였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화가(大畵家)로서 그는 전통화법을 단순히 종합했던 것이 아니라 그 단점(短點)을 극복하였다. 당시 조선시대 말기(末期)의 화단은 형식화된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 지상주의로 말미암아 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장승업은 잊혀졌던 북종화법(北宗畵法)을 골고루 탐색하였고, 화보가 아닌 실제 동식물을 예리하게 관찰하였다. 그리고 또 당시 새로 수입된 최신 유행의 중국화법도 참작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었다.
둘째, 장승업은 산수화(山水畵), 인물화(人物畵),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 여러 가지 그릇붙이와 화초의 가지를 섞어서 그린 그림) 등 여러 분야에서 당대(當代)를 대표하는 양식을 확립하여 후대의 커다란 모범이 되었으며, 그가 그린 다양한 작품들은 당대 및 후대의 전형이 되었다.
산수화에서는 수많은 전통적 양식을 절충하여 동양적 이상향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였고, 인물화에서는 진정한 초월적 인간상을 그려내었다. 또 화조영모화에서는 다양한 소재를 기운 생동하는 필묵법으로 소화해 내었으며, 기명절지도라는 독특한 장르를 창출해 내기도 했다. 그의 신운이 넘치는 작품 세계는 암울했던 19세기 후반에 있어서 시대를 밝히는 찬란한 예술혼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화가 장승업의 업적 중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순수한 예술정신의 구현에 있다. 장승업은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예술안(藝術眼) 앞에는 왕이나 부자가 따로 없었다. 그의 생애는 미(美)를 위한 구도자의 길이었으며, 세속적인 면에서는 실패했으나 진정한 예술의 면에서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었던 것이다.
넷째, 장승업은 현대에 있어서도 진정한 예술가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예술은 물질적 부(富)와 세속적 권위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점, 또 일상적인 행복과 나태에 빠져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또한 장승업의 생애와 예술은 서구적 가치관이 판을 치고 서양 미술사조가 무분별하게 수입되는 현대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투철한 예술혼이 없는 외형적 양식 추구가 과연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예술가의 인생 자체와 융합되지 않은 예술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 제기에 대한 해답을 바로 장승업 자신의 생애와 작품으로써 해 주고 있는 것이다.
cafe.daum.net/gurapaplaytime/5Zrj/36 충남대 서양화 2005 졸업동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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