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 자화상自畵像, 종이에 수묵담채, 38.5×20.5㎝, 국보240호, 개인소장>
<자화상>의 눈매는 상당히 매서워 첫인상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또 활활 타오르는 듯한 수염은 내면 깊은 곳에서 기를 발산하는 듯하다. 그렇게 작품을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면 점차 으스스한 느낌이 돌고 결국은 어느 순간 섬칫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인물은 정면상으로 정확한 좌우대칭을 이루며, 입체감은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서 바깥으로 뻗어난 수염이 표정을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극사실로 그려진 이 작품 속의 인물은 놀랍게도 귀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목과 상체도 없다. 마치 두 줄기 긴 수염만이 기둥인 양 양쪽에서 머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는 화면 상반부로 치며 올라가 있다. 덩달아 탕건의 윗부분도 잘려져 나갔다.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가 없는 사실적인 얼굴 표현뿐인데 그 시선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이런 초상이 무섭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 초상화가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 저번에 소개한 바 있는 작자미상의 <전 이재 초상>과 더불어 최고의 걸작이자 불후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윤두서의 <자화상>이며, 초상화로서는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작품 속의 인물이 윤두서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글씨는 하나도 없다. 더구나 작품에는 가로 접힌 금이 같은 간격으로 많이 나 있다. 이것은 작가가 종이를 말아둔 상태에서 그대로 납작하게 눌려서 생긴 금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이 초상화가 <윤두서의 자화상>인줄 알게 되었을까? 윤두서와 절친했던 이하곤李夏坤(1677-1724)의 글 '윤두서가 그린 작은 자화상에 붙이는 찬문'을 한번 살펴보자. "여섯 자도 되지 않는 몸으로 온 세상을 초월하려는 뜻을 지녔구나! 긴 수염이 나부끼고 안색은 붉고 윤택하니, 보는 사람들은 그가 도사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진실하게 삼가고 물러서서 겸양하는 풍모는 역시 홀로 행실을 가다듬는 군자라고 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 이 찬문에 묘사된 인물의 생김생김은 분명 <자화상> 속의 그것과 같다. 이 <자화상>을 대하는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그림의 비정상적인 구도와 과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생략으로 거의 충격적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놀랍도록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아니 묘사가 사실적인 만큼 더욱더, 몽환 중에 떠오른 영상처럼 섬짓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이 그림에서 보이는 충격적인 회화 효과는 결코 조선 사대부가 추구하던 윤리도덕과 거기에 근거한 당시의 미감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신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터럭과 피부 한점이라도 감히 다치고 상하게 할 수 없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당시 관념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를 떼어내고 신체를 생략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도저히 사대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앞서 이 그림이 작가가 의도한 결과물이 아니라 우연히 작업이 중단된 미완성작이라고 추측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품고 있던 1995년 가을,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집하고 조선총독부가 1937년 발행한 '조선사료집진속朝鮮史料集眞續'이라는 책의 제3집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의 옛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진속의 윤두서의 모습은 지금 작품과는 달리 도포를 입은 상반신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 결과 현 작품에서 몸 없이 얼굴만 따로 떠 있는, 거의 충격적이라 부를 만큼 지나치게 강하기만 하고 날카롭기만 했던 <자화상> 속 윤두서의 인상이 원래는 훨씬 어질어보이는 얼굴에 침착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띠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 원래 있었던 윤두서 <자화상> 사진 속의 상반신 윤곽선이 그 뒤 어떻게해서 감쪽같이 없어졌을까? 비밀은 몸 부분이 유탄柳炭으로 그려진 데에 있었다. 유탄이란 요즘의 스케치 연필에 해당하는 것으로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가는 숯이다. 이것은 화면에 달라붙는 점착력이 약해서 쉽게 지워진다. 그래서 데생하다가 수정하기에 편리하므로 통상 밑그림을 잡을 때 사용한다. 그런데 자화상의 경우, 중요 부분인 얼굴부터 먹선을 올려 정착시키고 몸체는 우선 유탄으로만 형태를 잡는 과정에서 그 몸에 미쳐 먹선을 올리지 않은 상태, 즉 미완성 상태로 전해오다가 언젠가 그 부분이 지워져버린 것이다. 아마도 미숙한 표구상이 구겨진 작품을 펴고 때를 빼는 과정에서 표면을 심하게 문질러 유탄 자국을 아예 지워버리게 된 것 같다. 이제 지금껏 조선 초상화의 최고 걸작이며 파격적인 구도를 가진 완성작이라고 생각해 온 <자화상>은 미완성작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귀가 없었던 것이다. 또 완벽하게 마무리된 수염에 반하여 눈동자 선이 너무 진하고 약간 생경해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완성작임이 드러났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작품의 예술성도 미완성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화상>은 완벽하다. 미켈란젤로는 일찍이 <노예상>을 조각하면서 미처 다 쪼아내지 못한 대리석 조각을 남겼다. 그런데 이 미완성작이 오히려 드물게 보는 걸작이라고 평가된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이라는 작품 재질과 그로부터 영혼이 깃든 형상을 이끌어내려는 작가 의식 사이에 말할 수 없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자화상> 또한 미완성작이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마지막 손질이 더해지지 않은, 작가 자신에 대한 심오한 상념이 전개되는 과정, 그리고 생생한 자기 성찰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나 윤두서는 어쩌면 똑같이 미완성작 속에서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완전성을 감지하고서 그 이상의 작업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자로서 해남의 고산고택을 이어가던 윤씨집안의 종손이었다. 그는 또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윤두서는 성리학은 물론 천문, 지리, 수학, 의학, 병법, 음악, 회화, 서예, 지도地圖, 공장工匠 등 다방면에 걸친 박학을 추구했던 학자였다. 윤두서는 초상화와 말그림이 유명하며, 특히 하층민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서민풍속화(나물 캐는 아낙네, 밭 가는 농부, 짚신 삼는 사람)도 남김으로써, 우리나라의 풍속화를 개척하여 시작한 화가로서 조선회화사에서 그 업적을 평가를 받고 있다.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회화의 3재三齋(공재 대신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넣는 사람들도 있다)라고 불린다.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도 그림을 잘 그려서 이들의 작품이 현존한다. 이 글은 오주석이 지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1999, 솔출판사)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