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 윤두서 "자화상" 리뷰

2017. 3. 31. 08:37美學 이야기



       공재 윤두서 "자화상" 리뷰 (1) | 차 관련 그림들

여정 | 조회 37 |추천 0 | 2016.11.18. 11:38




<윤두서, 자화상自畵像,  종이에 수묵담채, 38.5×20.5㎝, 국보240호, 개인소장>


 

  <자화상>의 눈매는 상당히 매서워 첫인상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또 활활 타오르는 듯한 수염은 내면 깊은 곳에서 기를 발산하는 듯하다. 그렇게 작품을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면 점차 으스스한 느낌이 돌고 결국은 어느 순간 섬칫한 공포감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인물은 정면상으로 정확한 좌우대칭을 이루며, 입체감은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서 바깥으로 뻗어난 수염이 표정을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극사실로 그려진 이 작품 속의 인물은 놀랍게도 귀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목과 상체도 없다. 마치 두 줄기 긴 수염만이 기둥인 양 양쪽에서 머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는 화면 상반부로 치며 올라가 있다. 덩달아 탕건의 윗부분도 잘려져 나갔다.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가 없는 사실적인 얼굴 표현뿐인데 그 시선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이런 초상이 무섭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 초상화가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 저번에 소개한 바 있는 작자미상의 <전 이재 초상>과 더불어 최고의 걸작이자 불후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윤두서의 <자화상>이며, 초상화로서는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작품 속의 인물이 윤두서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글씨는 하나도 없다. 더구나 작품에는 가로 접힌 금이 같은 간격으로 많이 나 있다. 이것은 작가가 종이를 말아둔 상태에서 그대로 납작하게 눌려서 생긴 금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이 초상화가 <윤두서의 자화상>인줄 알게 되었을까?

 

윤두서와 절친했던 이하곤李夏坤(1677-1724)의 글 '윤두서가 그린 작은 자화상에 붙이는 찬문'을 한번 살펴보자.

"여섯 자도 되지 않는 몸으로 온 세상을 초월하려는 뜻을 지녔구나! 긴 수염이 나부끼고 안색은 붉고 윤택하니, 보는 사람들은 그가 도사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진실하게 삼가고 물러서서 겸양하는 풍모는 역시 홀로 행실을 가다듬는 군자라고 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다."

찬문에 묘사된 인물의 생김생김은 분명 <자화상> 속의 그것과 같다.

 

   이 <자화상>을 대하는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그림의 비정상적인 구도와 과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생략으로 거의 충격적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놀랍도록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아니 묘사가 사실적인 만큼 더욱더, 몽환 중에 떠오른 영상처럼 섬짓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이 그림에서 보이는 충격적인 회화 효과는 결코 조선 사대부가 추구하던 윤리도덕과 거기에 근거한 당시의 미감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신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터럭과 피부 한점이라도 감히 다치고 상하게 할 수 없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당시 관념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를 떼어내고 신체를 생략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도저히 사대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앞서 이 그림이 작가가 의도한 결과물이 아니라 우연히 작업이 중단된 미완성작이라고 추측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품고 있던 1995년 가을,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집하고 조선총독부가 1937년 발행한 '조선사료집진속朝鮮史料集眞續'이라는 책의 제3집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의 옛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진속의 윤두서의 모습은 지금 작품과는 달리 도포를 입은 상반신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 결과 현 작품에서 몸 없이 얼굴만 따로 떠 있는, 거의 충격적이라 부를 만큼 지나치게 강하기만 하고 날카롭기만 했던 <자화상> 속 윤두서의 인상이 원래는 훨씬 어질어보이는 얼굴에 침착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띠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 원래 있었던 윤두서 <자화상> 사진 속의 상반신 윤곽선이 그 뒤 어떻게해서 감쪽같이 없어졌을까? 비밀은 몸 부분이 유탄柳炭으로 그려진 데에 있었다. 유탄이란 요즘의 스케치 연필에 해당하는 것으로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가는 숯이다. 이것은 화면에 달라붙는 점착력이 약해서 쉽게 지워진다. 그래서 데생하다가 수정하기에 편리하므로 통상 밑그림을 잡을 때 사용한다. 그런데 자화상의 경우, 중요 부분인 얼굴부터 먹선을 올려 정착시키고 몸체는 우선 유탄으로만 형태를 잡는 과정에서 그 몸에 미쳐 먹선을 올리지 않은 상태, 즉 미완성 상태로 전해오다가 언젠가 그 부분이 지워져버린 것이다. 아마도 미숙한 표구상이 구겨진 작품을 펴고 때를 빼는 과정에서 표면을 심하게 문질러 유탄 자국을 아예 지워버리게 된 것 같다.

 

   이제 지금껏 조선 초상화의 최고 걸작이며 파격적인 구도를 가진 완성작이라고 생각해 온 <자화상>은 미완성작임이 확되었다. 그래서 귀가 없었던 것이다. 또 완벽하게 마무리된 수염에 반하여 눈동자 선이 너무 진하고 약간 생경해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완성작임이 드러났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작품의 예술성도 미완성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화상>은 완벽하다. 미켈란젤로는 일찍이 <노예상>을 조각하면서 미처 다 쪼아내지 못한 대리석 조각을 남겼다. 그런데 이 미완성작이 오히려 드물게 보는 걸작이라고 평가된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이라는 작품 재질과 그로부터 영혼이 깃든 형상을 이끌어내려는 작가 의식 사이에 말할 수 없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자화상> 또한 미완성작이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마지막 손질이 더해지지 않은, 작가 자신에 대한 심오한 상념이 전개되는 과정, 그리고 생생한 자기 성찰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나 윤두서는 어쩌면 똑같이 미완성작 속에서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완전성을 감지하고서 그 이상의 작업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로서 해남의 고산고택을 이어가던 윤씨집안의 종손이었다. 그는 또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윤두서는 성리학은 물론 천문, 지리, 수학, 의학, 병법, 음악, 회화, 서예, 지도地圖, 공장工匠 등 다방면에 걸친 박학을 추구했던 학자였다. 윤두서는 초상화 말그림이 유명하며, 특히 하층민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서민풍속화(나물 캐는 아낙네, 밭 가는 농부, 짚신 삼는 사람)도 남김으로써, 우리나라의 풍속화를 개척하여 시작한 화가로서 조선회화사에서 그 업적을 평가를 받고 있다.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회화의 3재三齋(공재 대신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넣는 사람들도 있다)라고 불린다.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도 그림을 잘 그려서 이들의 작품이 현존한다.

 

이 글은  오주석이 지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1999, 솔출판사)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공재 윤두서 "자화상" 리뷰 (2)| 차 관련 그림들
여정 | 조회 66 |추천 1 | 2016.11.21. 12:26
  



[편집자주] 인물화 가운데 ‘자화상’은 화가의 필력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인 심리상태까지 읽어낼 수 있어 흥미를 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화상을 그린 역사가 길지 않고, 전해지는 것도 많지 않으나 그중 ‘윤두서 자화상’을 단연 으뜸으로 꼽는 데는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초상화 전공자인 조선미 교수가 ‘윤두서 자화상’의 뛰어난 점을 다른 자화상들과의 비교 속에서 살펴보았다.


   윤두서(1668~1715)는 화가로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아울러 조선의 三齋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인물화와 말 그림에서 정확한 묘사를 기했는데, 무릇 인물과 동식물을 그릴 때에는 반드시 며칠을 주시해서, 그 진형을 파악하고서야 붓을 들었다(‘東國文獻錄’)한다. 그는 또한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높아 마음에 맞는 자리가 아니면 절대로 그려주지 아니하였다(‘練藜室記述’ 別集)하여 문인화가로서의 꼿꼿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윤두서자화상 눈 부분 확대 ©

   ‘윤두서 자화상’은 종이와 먹으로 소폭 가득히 안면을 사출해 낸 작품인데, 화면 가득히 박진감이 가득 차 있다. 윗부분이 생략된 탕건,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 꼬리부분이 치켜 올라간 눈매, 잘 다듬어져 양쪽으로 뻗힌 구레나룻과 긴 턱수염, 약간 살찐 볼, 적당히 힘주어 다문 두툼한 입술에서 우리는 윤두서의 엄정한 성격과 아울러 조선선비의 옹골찬 기개를 읽을 수 있다. 화법은 깔끔한 鉤勒 선으로 안면의 이목구비를 규정하는 필법이 아니라 18세기 당시의 초상화법대로 붓질을 여러 번 가하여 얼굴의 오목한 부위를 시사하고 있다. 귀로부터 턱까지 죽 이어지는 수염은 한 올 한 올 정성들여 그려냈는데, 마치 안면을 앞으로 밀어 올리듯 부각시켜주는 형상이다. 그리고 點睛의 맑음은 고개지가 말했던 바 傳神寫照(정신을 화면에 전달해냄)의 효과를 십분 거두고 있다.



   ‘윤두서 자화상’은 그러나 원래는 도포를 입은 가슴까지 오는 반신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37년에 편찬된 ‘朝鮮史料集眞’에는 당시 ‘윤두서 자화상’의 도판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도포형상이 유탄으로 간단하게 그려져 있다. 현재는 유탄 흔적은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이 안면만 남은 자화상을 보면서 더욱 더 강한 박진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윤두서의 친구였던 이하곤은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지은 찬시에서 ‘육척도 안 되는 몸으로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 긴 수염 나부끼는 얼굴은 기름지고 붉으니 / 바라보는 자는 도사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 저 진실로 자신을 양보하는 기품은 무릇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구나//’ 라 하여 공재의 모습과 풍격에 대해 적절한 표현을 한 바 있다.


   중국의 경우 이미 漢代부터 趙岐라는 사대부화가가 자화상을 그렸지만, 우리의 경우 고려시대 공민왕이 ‘照鏡自寫圖’를 그렸다는 것이 기록상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조 초 김시습이 노·소 두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한다. 그러다가 후대에 그려진 몇 점의 자화상이 전해지는데, 때론 ‘강세황 자화상’을 ‘윤두서 자화상’ 다음가는 것으로 꼽기도 한다. ‘강세황 자화상’은 여러 점이 전해오는데, 그 중 오사모에 옥색 도포를 입은 전신좌상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자화상은 몸은 조정에 있지만 마음은 자연에 있는 자신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그 안면각도나 표정은 이명기라는 직업화가가 그려낸 ‘강세황상’과 똑같으며, 모두 면전에 있는 대상인물을 충실하게 세밀히 그려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자화상 가운데 한 점은 임희수라는 아이에게 고쳐받았다 할 정도로 강세황 자신이 그림실력에 확신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썩 뛰어난 그림실력을 지니진 못했다고 여겨진다. 두 점의 또 다른 자화상 역시 스케치 식으로 그의 유명도에 못미친다.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강세황은 윤두서와 같이 꼽힐 수는 있을지 모르나, 윤두서와 나란히 두고 비교할 계제는 아니라 생각된다. ‘이광좌 자화상’ 역시 마찬가지다. 탕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좌안8분면의 반신상인데, 화면에 쓰인 自評에 의하면 “콧마루가 약간 닮았을 뿐 눈도 전혀 닮지 않았고, 입술에는 반가운 기색이 없으며, 흰 동자에는 묘리가 없고, 검은 눈동자에는 정기가 없다”는 등 자신의 자화상을 두고 신랄한 자기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들 자화상 외에 ‘채용신 자화상’ 정도만이 사진으로 전해지고 있을 따름인데, 조선조의 자화상이 이렇게 드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 이라는 인물이 그려져 보존될 만하다고 하는 자긍심과 아울러 주변의 사회적 인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울러 초상화라는 장르 자체가 그리는 자(화가)의 사실적 묘사기량을 필수적 요건으로 한다. 그런데 묘사력을 지닌 직업화가들의 경우에는 ‘畵工’이라는 지극히 낮은 신분이었기에 자신을 그려 보존하고자 하는 의식이 없었으며, 사대부화가들의 경우 대부분 핍진하게 그려낼 기술적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즉, 조선조의 자화상은 자긍심과 기량이라는 두 요건을 갖춘 극소수의 사대부화가만이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 역시 자화상 제작은 초상화에 비해 열악한 실정이지만, 사대부계층이나 직업화가들의 자화상 제작이 제법 눈에 띈다. 그 이유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은유적·회화적으로 간단히 그려내어 가까운 사람들끼리 보면서 즐겼던 유희적 성격의 자화상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반해, 조선조의 경우에는 대상인물의 특징만을 대중 이미지화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항상 본격적으로 핍진하게 그려내고자 하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조 사대부들이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를 ‘자신의 이미지 전달’이라는 간단한 형식으로 이해했다면, 보다 수월하게 자화상을 제작했을 것이다. 여하튼 이처럼 수가 적은 자화상 가운데 ‘윤두서 자화상’은 단연 돋보이는 걸작이다.


   한편 윤두서는 심득경이란 친구가 죽은 뒤 초상화를 追作(실물을 보지 않고 기억에 의해 그려냄)하여 그의 집에 보내자 온 집안이 놀라 울었다고 하는데, ‘심득경상’을 보면, 화폭 속에 눈두덩이가 퀭한 심득경의 특징적 분위기가 잘 묘출되어 있다. 윤두서는 하지만 자신의 자화상에서는 일보 더 나아가 분위기 이상의 逼眞力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그는 ‘털 끝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 라고 하는 조선시대 초상화가들의 명제를 마음에 새기고, 왜곡이나 변형을 통한 실제 인물 이상의 회화적 효과도, 또한 특징의 강조를 통한 의도적 과장도 추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객체화에 접근하기 위한 사실적 노력만이 극진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자화상에서 중국의 ‘임웅 자화상’처럼 드라마틱한 호소력이나 ‘다노무라 치크덴 자화상’처럼 우의적인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눈앞에 엄존하고 있는 ‘윤두서’라는 인물의 전체 상이 심도 있게 다가옴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픽션의 세계가 아닌 논픽션의 세계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진실성과 감동의 맛과 상통한다고 생각된다.


조선미 / 성균관대·미술사

필자는 홍익대에서 ‘조선왕조시대 의 초상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초상화연구’ 등의 저서와 ‘조선미술사’ 등의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