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키아학파와 요가학파 / 인도철학사(교안) 임성택 교수

2013. 7. 27. 10:26경전 이야기

 

 

인도철학사 강의안 8

- 상키야 학파와 요가 학파 -

 

 

  1. 상키야․요가의 전통

  상키야의 사상은 『우빠니샤드』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나며 『바가바드기타』에서도 높은 빈도로 인용된다. 따라서 기원전 2-3세기 무렵에 이미 확립된 체계로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통에 따르면 상키야 철학은 까삘라(Kapila)라는 기원전 4세기 경의 인물을 원조로 하며, 아슈리(Āsuri)라든가 빤쨔쉬까(Pāñcaśika)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초기 사상가들의 저작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하는 상키야의 철학서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것은 이슈바라끄리슈나(Īśvarakṛṣṇa)의 『상키야까리까(Sāṇkya-kārika)』이다. 이 문헌은 기원후 4세기 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유의 이원론과 무신론적 입장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명저로 평가된다. 이후 8세기의 가우다빠다(Gauḍapāda)와 9세기의 비짜스빠띠미슈라(Vācaspatimiśra) 등이 이 문헌에 대한 주석서를 내 놓았다. 한편 9세기에 저술된 『상키야쁘라와짜나수뜨라(Sāṇkyapravacana-sūtra)』라든가 17세기의 『상키야사라(Sāṇkya-sāra) 등도 상키야의 기본서로 꼽힌다.

 

 상키야의 형이상학은 요가(Yoga) 학파에 의해 거의 그대로 수용되어 실천․수행에 활용되었다. 상키야와 요가의 관계는 이론과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상보적인 형태를 이루는 까닭에 자매 학파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상키야의 철학은 인도의 체계화된 학파 가운데 가장 먼저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엄격한 이원론적 사고는 자체적인 결함을 노출하였고, 독자적인 학파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는 데에 핸디캡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요가 학파에서는 실천․수행의 측면에서 상키야의 형이상학을 해석해 들어갔다. 그러나 독립 학파로서 『요가수뜨라(Yoga Sūtra, A.D. 4세기)』라는 소의경전을 지니고 있다. 이 경전은 『우빠니샤드』 등에 산발적으로 제시된 요가 관련 가르침을 상키야의 이원론적 관점에서 정리한 것으로, 요가의 정의와 목적 그리고 실천 방법 등을 간결․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소위 고전요가(Classical yoga)가 바로 이 경전에 근거해 있다. 이후 6세기의 뱌사(Vyāsa)라든가 9세기의 비짜스빠띠미슈라(Vācaspatimiśra) 등이 이것에 대한 주석서와 복주서를 저술하였다.    

 

 

  2. 상키야의 형이상학

  상키야에서는 불교와 같이 세계를 苦로 보며, 이 고를 극복하는 데에 철학적 사유의 주된 목적을 둔다. 또한 세계관에 있어서도 불교와 같이 인간의 심리현상에 대한 관찰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상키야에서는 불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영원한 자아, 즉 뿌루샤(정신, puruṣa)라는 실재를 인정한다. 또한 세계의 존재 원리를 이 뿌루샤와 쁘라끄리띠(물질, prakṛti)라는 두 개의 형이상학적 원리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쁘라끄리띠(prakṛt)라는 개념은 상키야의 형이상학에서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쁘라끄리띠는 뿌루샤(puruṣa)를 제외한 일체의 현상이 그로부터 발전되어 나오는 모태와 같은 것이다. 현상적 존재가 전개되기 이전의 쁘라끄리띠(prakṛti)는 아비야끄따(未顯現, avyakta)로 달리 부른다. 이 아비야끄따는 한계를 가진 경험 세계가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가능성의 세계를 의미한다.

 

  쁘라끄리띠(prakṛti)는 모든 것이 발전하여 나오는 질료적 원인(upādāna-kāraṇa)으로서 무한한 창조적 힘(śakti)을 지닌다. 상키야 철학에 의하면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결과도 원인 안에 이미 내재해 있으며, 결과란 그와 같이 잠재적으로 내재하고 있던 원인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상키야에 따르면 세계는 끊임 없이 해체와 진화의 과정을 거친다. 진화란 쁘라끄리띠로부터 일체의 현상이 순차적으로 발전되어 나오는 과정을 의미하며, 해체란 만물이 쁘라끄리띠의 미현현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상키야에 따르면 쁘라끄리띠는 사뜨바(sattva, 지성, 순수성), 라자스(rajas, 운동성, 격정성), 따마스(tamas, 둔중성)라는 세 가지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3가지 속성은 미현현 상태에서 균형을 이루며 존재하다가, 어떤 특정한 요소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서 점점 더 분명한 한계와 형태를 가진 현상세계의 존재로 전변하게 된다.

 

  쁘라끄리띠의 평형상태가 붕괴하고 현상세계가 유출되는 이유에 대해 상키야에서는 뿌루샤의 존재를 그 이유로 든다. 즉 쁘라끄리띠는 뿌루샤의 향수(bhoga)와 해방(apavarga)을 위한 목적적 성향을 지니며, 마치 철이 자석에 이끌리는 성질을 지니듯이 뿌루샤를 위해 봉사하는 성향을 지닌다. 이러한 뿌루샤와의 접촉으로 인해 쁘라끄리띠는 내적인 평형상태를 잃는다. 그때 제일 먼저 라자스가 흔들리고, 이 라자스의 동요로 인해 사뜨바와 따마스가 뒤따라 움직여 세계의 진화가 시작된다.

 

  이러한 과정을 걸쳐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사뜨바를 지배적 성품으로 하는 붓디(知性, buddhi)이다. 이 붓디는 우주론적으로 맨 처음 드러나는 현상계의 구체적 원리가 되며, 그것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이 생성되어 나오는 까닭에 ‘위대한 것’ 즉 마하뜨(mahat)라고도 부른다. 붓디는 다수로서 개체적 삶이 가능케 해주는 원리이며, 우주가 해체될 때 쁘라끄리띠 속으로 잠재해버린 개개인의 고유한 성향(saṃskāra)들을 간직한다.

 

  붓디는 일상적인 정신활동과 함께 인식 및 경험 활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작용으로 한다. 그러나 붓디는 본래 쁘라끄리띠의 산물이기 때문에 뿌루사의 빛이 있을 때만 다른 물건들을 비추어 보는 능력을 지닌다. 이러한 붓디는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사물의 형상에 따라 스스로 변화하면서 쁘라끄리띠와 뿌르샤를 잇는 중개 역할을 한다. 한편 세계의 전개가 더욱 구체화되면서 붓디(buddhi)로부터 자의식(自意識, ahaṁkāra)이라고 부르는 개체적 원리가 생겨나고, 그것으로부터 마음원리(意根, manas)와 5가지 인식원리(知根, jñāna-indrya) 및 5가지 행위원리(作根, karma-indrya)가 산출된다.

 

 이상과 같이 자의식(ahaṁkāra)으로부터 11개의 근에 이르는 내적인 전개가 완료된다. 한편 외적인 전개 또한 따마스(tamas)의 성질이 지배적인 자의식(ahaṁkāra)으로부터 시작된다. 소리․감촉․모양․맛․냄새의 본질을 이루는 미세한 물질로서 5가지 유일한 것(五唯, tanmātra)와, 다시 이것의 배합에 의해 산출되는 허공․바람․불․물․흙이라는 5가지 요소(五大, bhūta)가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의식(ahaṁkāra)으로부터 10가지 외적인 현상의 전개가 완료된다.

 

    뿌루샤(정신, puruṣa)

     ↕              ↖

     ↕                 ↘

    쁘라끄리띠(prakṛti) → 붓디(知性, buddhi) → 자의식(ahaṁkāra) → 마음(意根, manas)

         = triguna(三質)                         ↘ → 인식원리(五知根, jñāna-indrya)

                                                ↘ → 행위원리(五作根, karma indrya)

                                                ↘ → 5가지 유일한 것(五唯, tanmātra)

                                                ↘ →  5가지 요소(五大, bhūta)

 

    三質: sattva(순수성, 가벼움, 밝음), rajas(활동, 불안정, 격정), tamas(무거움, 어두움)

    五作根: 언어기관(목), 행위기관(손), 운동기관(발), 배설기관, 생식기관

    五唯: 소리원소(聲唯), 접촉원소(觸唯), 색깔원소(色唯), 맛원소(味唯), 냄새원소(味唯)

    五大: 땅(地), 물(水), 불(火), 바람(風), 허공(空)

 

  쁘라끄리띠의 전개는 뿌루샤와의 접촉(saṁyoga)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뿌루샤는 순수한 의식으로서 언제나 자유로우며 쁘라끄리띠의 방관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뿌루샤는 붓디가 겪는 마음의 상태들을 스스로 체험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바로 이것을 無知(avidyā)라고 부르며 현상세계의 고통은 바로 이것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상키야 철학에 있어서 속박이란 뿌루샤와 붓디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무지를 말한다. 결국 해탈이란 뿌루샤와 붓디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識別知(viveka-jñāna)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붓디를 중심으로 한 인식과 행위가 의미를 잃게 되면 뿌루샤는 본래의 모습인 독존(kaivalya) 상태에 머무는데, 이것이 곧 상키야 철학에서 말하는 해탈이다.

 

  이상과 같은 상키야의 형이상학에서 해탈과 속박은 모두 뿌라끄리띠의 자체 내의 사건이며 붓디가 그 관건을 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뿌르샤는 본래 청정한 순수 의식으로서 해탈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할 때 상키야의 형이상학은 물질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성을 자각하기 위한 실천적 구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다른 정신과 물질이 왜 최초의 접촉을 시작하였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그 취약점이 발견된다.    

 

 

 3. 『요가수뜨라』의 실천론

  『요가수뜨라(Yoga Sūtra, A.D. 4세기)』는 몇 세기에 걸쳐 발전해온 사상의 단편들을 모아서 편집한 것이다. 이것의 저자로 알려진 빠딴잘리(Patañjali)는 실상 편집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요가수뜨라』는 대체적으로 상키야의 이원론을 수용한다. 그러나 한 학파의 소의경전으로서 독자적 체계를 지니는 것으로 인정된다. 다음은 『요가수뜨라』 1장에 기술된 것으로, 이 문헌 전체에 나타나는 요가의 실천 체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1-2

  요가란 마음작용의 억제이다.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1-3

  보는 자는 그때 자신의 본성에 머문다.

 

  Vṛtti-sārūpyam itarta // 1-4

  그 밖의 경우에는 [보는 자가] 마음작용과 같은 모습을 지닌다.

 

  Vṛttayaḥ pancata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 // 1-5

  마음작용은 다섯 가지로 물든 것과 물들지 않은 것이다.

 

  Pramāṇa-viparyaya-vikalpa-nidrā-smṛtayaḥ //1-6  

  [마음작용이란] 바른 지식, 그릇된 지식, 분별, 수면, 기억이다.  

 

  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 // 1-12

  실천수행과 욕망의 포기에 의해 그 [마음작용이] 억제된다.

 

  Nirvicāra-vaiśāradye' dhyātma-prasādaḥ //1-47

  미세한 생각의 경험마저 없을 때 자신의 내부에 청정함이 있다.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 // 1-48

  거기에는 진리를 간직한 지혜가 있다.

 

  Tajjaḥ saṁskāro' anya-saṁskāra-pratibandhī // 1-50

  그것에서 생긴 잠재력은 다른 잠재력을 방해한다.

 

  4. 요가 수행의 단계

  요가의 실천 체계에 따르면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한 지견(darśana)은 해탈의 원인이 아니다. 또한 식별지(viveka-khyātir)는 단순히 지식이 증가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마음작용이 소멸할 때 일어나는 초이성적인 것이다. 이러한 식별지를 얻기 위해서는 고유의 실천 행법이 필요하다. 즉 뿌루샤(puruṣa)에 대한 인식은 자의식에 의한 왜곡이 완전히 사라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요가수뜨라』에서는 이것을 위한 방법으로서 다음과 같은 2가지를 제시한다. 실천수행(abhyāsa)과 욕망의 포기(vairāgyābhya)가 그것이다.(1-12). 실천수행은 마음의 작용을 정지시키기 위한 명상수행을 의미하고, 한편 욕망의 포기란 대상에 대해 집착하지 않도록 자기를 통제하는 윤리적 실천을 가리킨다.

 

  tatra sthitau yantno' bhyāsaḥ //YS. 1-13//

  거기에서 실천수행이란 [마음작용을] 정지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a-āsevito dṛdha-bhūmiḥ //YS. 1-14//

  그런데 이것은 오랜 동안 쉬지 않고 정성스럽게 익힌 자만이 확고한 경지에 이른다.

 

  dṛṣṭa-ānuśravika-viṣaya-vitṛṣnasya vaśīkāra-saṁñjā vairāgyam //YS. 1-15//

  욕망의 포기란 보여지거나 전해들은 대상에 대해 무관심한 자의 통제 의식이다.

 

  tat-paraṁ puruṣa-khyāter guṇa-vaitṛṣṇyam //YS. 1-16//

  최고의 [욕망의 포기는] 뿌루샤에 대한 지혜를 얻어 근본속성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다.

 

  그러나 실천수행과 욕망의 포기는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집중 등에 의해서 마음작용이 하나의 대상에 머물면 다른 대상에 대한 욕망은 자연히 억제되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대상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면 마음작용은 내부대상으로 자연히 집중된다. 수행의 입문단계에서는 세속적인 욕망이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로막는다. 따라서 낮은 단계의 욕망부터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명상에 적합한 육체를 만드는 수행을 하며, 욕망의 직접적인 근원인 감각기관을 통제하고, 마지막으로 마음작용을 억제하는 수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수행 과정이 『요가수뜨라』의 2장 29절에서부터 2장 55절까지에 걸쳐 기술되는 8지칙(aṣtānga)이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금계(禁戒, yama)권계(勸戒, niyama)좌법(坐法, āsana)조식(調息, prāṇāyāma)제감(制感, pratyāhāra)응념(凝念, dhāraṇā)정려(靜慮, dhyāna)삼매(三昧, samādhi)이다.

 

  이들 중에서 야마(yama)는 다시 불살생(ahiṁsā, 2-35)․진실(satya, 2-36)․불투도(asteya, 2-37)․청정행(brahmacarya, 2-38)․불탐aparigraha(2-39)을 세부적인 내용으로 하며, 니야마(niyama)는 청정(śauca, 2-40)․만족(saṁtoṣa, 2-42)․고행(tapas, 2-43)․독송(svādhyāya, 2-44)․자재신에 대한 기원(īśvara-praṇidhāna, 2-45)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예비적 수행으로서 요가의 윤리적 수행 단계에 해당된다.

 

  한편 아사나(āsana, 2-46, 47, 48)쁘라나야마(prāṇāyāma, 2-49, 50, 51, 52, 53)쁘라티야하라(pratyāhāra, 2-54, 55) 등은 육체적 수련단계에 해당되고, 삼야마(總制, saṁyama, 3-4)로 통칭되는 드하라나(dhāraṇā, 3-1)디히야나(dhyāna, 3-2)사마디히(samādhi, 3-3) 등은 본격적인 심리적 수행으로 배대된다. 이상의 내용은 요가 수행이 점진적인 향상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아래의 구절들 또한 요가수행의 점진적 성격과 관련한 구체적 내용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taj-jayāt prajñā-ālokaḥ //YS. 3-5//

  그것(saṁyama)을 닦음으로써 지혜의 빛이 있게된다.  

 

  tasya bhūmiṣu viniyogaḥ //YS. 3-6//

  그것은 단계에 따라서 적용되어야 한다.

 

  trayam anter-aṅgaṁ pūrvebhyaḥ //YS. 3-7//

  이 셋(saṁyama)은 앞의 것 [다섯 가지 것]보다 내적인 지칙에 해당된다.

 

  tad api bahir-aṅgaṁ nirbījasya //YS. 3-8//

  [그러나] 이것도 역시 무종자 삼매에 대해서는 외적인 지칙에 불과하다.

 

 

  5. 형이상학적 난점과 수행의 필요성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은 초감각적 세계를 순수한 사고에 의해 인식하려고 하는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논리적 난점(aporia)을 지니는 것이 보통이다. 상키야와 요가의 형이상학 또한 마찬가지인데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문제점을 정리하면 같다.

 

  ⑴ 뿌르샤(puruṣa)는 본래 독존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쁘라끄리띠(prakṛti)의 전개(pariṇāma)와 그것에 대한 향수(bhoga)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해탈(mokṣa)과 벗어남(apavarga)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⑵ 쁘라끄리띠(prakṛti)에는 정신성이 없다. 따라서 뿌르샤(puruṣa)의 해탈과 벗어남을 위해 아무런 목적의식을 가질 수 없다. 한편 그러한 정신성과 목적의식을 뿌루샤에 귀속시키면 뿌루샤는 경험 영역에 관계할 수밖에 없는 자체적인 이유를 지니게 된다. 이것은 초월적 정신성으로서의 뿌르샤와 위배된다.

 

  ⑶ 뿌루샤와 쁘라끄리띠는 본래적으로 영원한 실재이다. 따라서 이들 양자의 결합(saṁyoga)은 항상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 따라서 세계는 창조와 소멸을 일정한 주기에 따라 되풀이 할 필요가 없다. 또한 뿌루샤의 독존이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재결합의 가능성은 항존한다.

 

  ⑷ 뿌루샤는 3가지 속성(guṇa)들과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여럿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키야에서는 뿌루샤가 여럿이라는 견해를 굽히지 않는다. 설사 뿌루샤의 다수성을 인정하더라도, 최초로 전변의 기회를 만든 뿌루샤와 그렇지 않은 뿌루샤 간의 차별이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난점을 회피하기 위해서 『요가브하샤(2-23)』에서는 “지견은 해탈의 원인이 아니다(na darśanaṁ mokṣakāraṇam)”고 하였고, 또한 『요가수뜨라(2-26)』에서도 “동요 없는 식별지가 [무지의] 제거를 위한 수단(viveka-khyātir aviplavā hāna-upāyaḥ)”이라고 언급하였다.  

 

  .... mithyā-jñānānasya dagdha-vīja-bhāva-upagamaḥ punaś-ca-aprasavaḥ ity-eṣa mokṣasya mārgo hānasya-upāya iti //YB. 2-26//

  .... 이것(식별의 지혜)은 삿된 지식에 속한 존재로 나아가는 씨앗이 타버린 것으로, 다시는 싹트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해탈로 나아가는 길이고 단멸을 위한 수단이다.

   

 

  * 참고문헌

  이태영 지음, 『요가철학』, 서울: 도서출판 여래, 2004.

  정승석 지음, 『인도의 이원론과 불교』, 서울: 민족사, 1992.

  권오민 지음, 『인도철학과 불교』, 서울: 민족사, 2004.

  이지수 옮김, 『인도철학』, 서울: 민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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