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나교 / 인도철학사(교안) 임성택 교수

2013. 7. 27. 10:22경전 이야기

 

 

인도철학사 강의안 4-2

- 자이나교 -

 

 

  1. 자이나교의 형이상학

  자이나교(Jainism)는 고대의 비베다적․비정통적 사상이자 실천체계이다. 이것은 베다를 중심으로 하는 바라문교(Brahmanism)에 대한 반동이자 개혁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와르다마나(Vardhamāna)가 자이나교의 창립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자체 전통에 따르면 그는 띠르땅까라(Tīrthaṁkara, 완전한 영혼, 인류의 안내자) 중에서 스물 세 번째 인물이다.  

 

  와르다마나(Vardhamāna)는 B.C. 540년에 오늘날의 비하르(Bihar)에 위치한 꾼다그라마(Kundagrāma)에서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는 다른 대부분의 왕족들과 같이 조기에 결혼하여 30세에 이르기까지 가장으로서의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실존의 뚜렷한 특징인 고통과 질병과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출가한다. 이후 수년간의 모색 끝에 해탈의 길을 발견했다고 선언한다. 이 발견에 의해 그는 지나(Jina, 정복자) 혹은 마하비라(Mahāvīra)가 되었다. 그는 여생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에 바치다가 B.C. 468년 입적했다.  

 

  자이나의 형이상학은 생명적 실체(jīva)와 무생명적 실체(ajīva)를 엄격히 구분한다는 점에서 철저한 이원론(二元論, dualism)의 형식을 취한다. 또한 무한수의 특성을 지닌 무수한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원론적(多元論, anekāntavāda)이다. 바로 이점은 우빠니샤드의 일원론적․통합주의적 입장과 대조를 이루는 것인 동시에, 바라문교에 대항하는 사문(沙門, śrāmaṇa, samaṇa) 전통의 종교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경향이기도 하다.

 

  또한 자이나교에서는 무한수의 실체들이 인식 주관과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즉 형이상학적 실재론(realism)의 관점을 견지한다. 그들에 따르면 실체(dravya)란 성질을 소유한 것이며, 다시 성질은 본연적인 속성(guṇa)과 우연적인 양태(paryāyā)로 구분된다. 본연적인 속성은 실체가 그것으로 인해 그것답게 되는 것인 반면에 우연적 양태란 실체가 한 때 소유했다가 다른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영혼(jīva)이라는 실체는 의식을 본연적 속성으로 지니며, 고통이나 쾌락은 우연적 양태로 지닌다.

 

  이러한 방식으로 본연적 속성은 세계의 영구성을 뒷받침하며 우연적 성질은 세계의 변화하는 모습을 설명해준다. 예컨대 영혼이라는 실체는 항상 의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변화하지 않지만, 가변적인 고통이나 쾌락에 반복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에서 변화한다. 따라서 자이니즘은 우빠니샤드의 브라흐만과 같은 절대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실체 개념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무상과 무아에 입각한 불교의 절대적 변화 개념도 거부한다.  

 

 

  2. 자이나교의 6가지 실체

  자이니즘에서는 실체를 6가지로 나눈다. 영혼(jīva)․물질(pudgala)․공간(ākāśa)․다르마(dharma)․아다르마(adharma)․시간(kala)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에서 맨 앞의 것만이 생명적이며 나머지는 비생명적이다. 또한 앞의 5가지는 공간 속에서 일정한 크기 즉 연장(延長, extension)을 지니지만 맨 마지막의 시간은 비연장적 실체이다.

 

  자이나의 형이상학에 따르면, 영혼(jīva, 命我)은 모든 정신적인 작용의 주체임과 동시에 행동의 주체이기도 하다.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영원한 영혼들이 그들이 머무는 물체나 육신의 크기에 따라 한계 지어진 형태로 존재한다. 즉 영혼은 그들이 거주하는 물체에 따라 변화하면서 특정한 크기로 존재한다. 또한 영혼은 그들이 소유한 감각의 숫자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뉘는데, 예컨대 식물은 촉감만을 지닌 가장 낮은 차원의 영혼을 지니고, 인간은 마음을 포함한 여섯의 감각을 지닌 최고급 영혼을 지닌다.  

 

  영혼은 의식(consciousness)을 본연적인 속성으로 지니는데, 이 의식은 지각(perception)이라든가 인식(recognition) 등과 동일한 개념이다. 이 영혼은 본래 완전무결한 인식능력(全知性, omniscience)을 지니지만 특정한 신체 안에 머물면서 그러한 능력에 제약을 받는다. 따라서 신체에 의한 제한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혼의 인식은 완전무결하게 된다. 그러나 해탈에 이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체에서 분리된 의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의식은 언제나 신체와 결합된다.  

 

  물질(pudgala)은 궁극에 있어서 원자적이다. 관찰되는 대상들의 차별성은 구성원자의 수와 배열의 차이에 기인한다. 地․水․火․風의 요소들은 구분이 불가능하고 속성을 지니지 않은 원자들의 배합의 산물이다. 이러한 물질 존재는 영혼과 결합하여 그것의 능력을 제한하고 또한 속박된 현실 세계에 머물게 한다. 바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물질을 특별히 까르마(業, karma)라 부른다. 까르마는 영혼이 지닌 원래의 전지성을 빼앗는 장애물이며, 영혼으로 하여금 재생과 윤회를 겪게 하는 원리가 된다. 이러한 까르마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존재가 곧 해탈된 영혼이다.  

 

  한편 공간(ākāśa)이란 연장(extension)을 지닌 일체의 사물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공간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지각 불가능한 것으로서 연장으로부터 추리된다. 나아가 다르마(dharma)와 아다르마(adharma)는 사물의 운동과 정지를 설명하기 위한 원리들이다. 그 중에서 전자는 사물 운동 조건이며 후자는 정지의 조건이 된다. 이들은 현실에서 경험하는 사물의 운동과 정지로부터 추리된다. 예컨대 물은 물고기가 운동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며 땅은 그 반대의 역할을 해준다.

 

  마지막의 시간(kala)은 공간 속에서 연장을 지니지 않는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다른 실체들과 구분된다. 이것은 허공과 같이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가지적이지만, 사물의 지속성, 변화, 활동, 새로움, 낡음 등으로부터 추리된다. 시간은 분할할 수 없는 단일한 존재이지만 경험세계 속에서의 시간은 사물의 변화를 통해 각각의 단위로 나누어진다. 즉 인습과 구분, 한계등을 부과함으로써 초, 분과 같은 단위로 나뉘어진다.

 

 

  3. 자이나교의 인식론

  자이나교는 감각기관을 참된 지식의 장애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인식론적 입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고유의 업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이나에서는 영혼(jīva) 존재가 원래의 상태에서는 전지(全知, omniscience)하다고 본다. 그러나 감관에 의존하는 윤회의 삶에서는 그것은 까르마와의 결합되어 불완전하다. 따라서 불완전한 인식수단으로 작용하는 감관이란 영혼(jīva)의 전지한 능력을 가리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영혼(jīva)은 까르마로부터 생기는 제한과 장애를 극복하고 순수․완전․전포괄적인 본래의 인식상태를 회복해야만 한다. 그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영혼에 드러나는 까닭에 존재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앎은 물론 과거․현재․미래의 지식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영혼의 그러한 상태는 지각이나 사고와 같은 일상적인 인식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직접적․직관적․비지각적․비개념적 파악을 통해 얻어진다.  

 

  자이나에서는 모든 인식을 간접적인 것(parokṣa)과 직접적인 것(aparokṣa)으로 구분한다. 간접적인 인식은 영혼 이외의 다른 것에 연루되어 획득하는 인식을 말하고, 직접적인 것은 영혼이 감관의 개입 없이 획득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대부분의 학파에서 감관에 의해 획득되는 지식을 직접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 자이나에서는 이를 간접적인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영혼 자체가 아니라 까르마의 영향 하에 있는 감각이나 마음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자이나에서는 감관에 의한 지각을 ‘상대적으로 직접적인 인식’이라고 부른다. 그들에 따르면 오직 해탈한 영혼(jīva)만이 사물의 모든 측면을 알 수 있다. 세속적인 차원의 까르마적 그물에 사로잡힌 영혼은 포괄적이고 완전한 인식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스얏와다(syādvāda, 상대적인 교설)라는 7가지 판단 형식으로 구체화한다.

 

                1. R(relatively), S는 P이다.

                2. R, S는 P가 아니다.

                3. R, S는 P이며, S는 P가 아니다.

                4. R, S는 진술 불가능하다.

                5. R, S는 P이며, S는 진술 불가능하다.

                6. R, S는 P가 아니며, S는 진술 불가능하다.

                7. R, S는 P이고, S는 P가 아니며, S는 진술 불가능하다.

 

  인식의 상대성에 대한 인정은 명제의 의미를 분석하는 방법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후대의 자이나 사상가들은 의미를 결정하는 관점(naya)을 다음의 일곱으로 제안하였다. ①목적론적 관점(naigammanaya), ②보편적 관점(saṁgrahanaya), ③인습적 관점(vyavahāranaya), ④찰나 관점(ṛjusūtranaya), ⑤동의어 관점(śabdanaya), ⑥어원적 관점(samābhirūḍhanaya), ⑦문맥적 관점(evaṁbhūtanaya) 등이 그것이다.

 

  ①목적론적 관점(naigammanaya)이란 특정한 진술의 의미가 그것의 최종 목표에서 찾아지는 경우를 말한다. 예컨대 누군가 내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묻고 “나는 책을 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경우 내가 실제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책을 쓴다”는 목적에 의해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 ②보편적 관점(saṁgrahanaya)이란 모든 개별적 사물이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예컨대 ‘축’이나 ‘살’이나 ‘테’는 바퀴라는 전체를 통해서 의미를 지닌다. ③인습적 관점(vyavahāranaya)이란 경험에 의거한 일반 대중들의 관습적 관점을 의미한다. 신의 존재는 증명의 가능성과 상관없이 일반 대중의 관습에 비추어 의미를 지닌다. 이상의 세 관점은 실체적 관점(dravyārthika)의 하위 개념에 속한다.

 

  한편 ④찰나 관점(ṛjusūtranaya)이란 특정 시점이나 시간에 있는 사물의 상태만을 고려하는 관점을 말한다. 여기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순간적으로만 존재하는 무상한 것으로 간주된다. ⑤동의어 관점(śabdanaya)이란 형태를 달리하는 명칭들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경우에 해당한다. 예컨대 Ṥakra, Indra, Purandhara 따위는 어원적으로 다른 명칭들이지만 모두 베다 전통의 강력한 한 신을 지칭한다. ⑥어원적 관점(samābhirūḍhanaya)이란 어근에 따라서 말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 ⑦문맥적 관점(evaṁbhūtanaya)이란 특정한 단어의 의미는 그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의미를 달리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상의 네 관점은 양태적 관점(paryāyārthika)의 하위 개념에 속한다.  

 

  자이나의 인식론은 고유의 형이상학적 체계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영혼(jīva)은 본래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업(karma) 물질로 인하여 이러한 성품들이 가려지게 된다. 즉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까닭에 있는 그대로의 색상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서 여러 인식의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채택하게 된다면 오류는 불가피하다.

 

  스얏와다의 7가지 판단 형식은 바로 이점에 근거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든 존재는 본래의 절대적 인식 능력을 제한 받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들만의 편협하고 상대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인식의 상대성에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일단의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치명적 취약점을 안고 있다. ㉠ 상대성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절대적인 것에 비추어서만이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 7가지 판단형식은 판단 가능성의 종합이 아니라 단지 기계적인 조합에 불과하다. ㉢ 은연 중에 인식의 상대성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 인식의 상대성에 대한 절대화는 스스로의 교리체계에 내재하는 해탈의 지혜(kevaka-jñāna, 獨存智)의 개념과도 상충한다.  

 

 

   4. 자이나의 업과 해탈

  자이나에 따르면 영혼(jīva)은 본래적으로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하며, 무한한 지혜(jñāna, 無限智), 무한한 지식(darśana, 見), 무한한 능력(vīriya, 力), 무한한 즐거움(sukha, 樂) 등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업(karma) 물질로 인하여 이러한 성품들이 가려지고 또한 그 정도에 따라 서로간에 차이를 나타낸다. 영혼에 달라붙은 까르마는 미세한 물질의 일종으로서 이것에 의해 영혼은 제 성품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현실 세계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자이니즘은 영혼을 인정하지만 우빠니샤드에서와 같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영혼의 개념을 거부한다. 그러한 거부는 전통적으로 우주의 창조자이며 유지자인 신(īśvara)의 개념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자이나는 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업의 법칙이 그 작용에 있어서 자율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즉 개체 영혼에 상벌을 내리는 것은 신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까르마의 법칙 자체이다. 영혼이 취하는 형태나 그것이 머무르는 신체는 실로 이전에 지은 까르마에 의해 결정된다.

 

  까르마는 인간의 여러 행위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현세에서의 삶을 통해 전생에 쌓은 업은 소진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업이 영혼에 유입되어 새로운 삶이 계속되게 된다. 영혼은 까르마샤리라(karma-śarīra, 業身)라는 업 물질로 구성된 미세한 몸과 더불어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 그러나 자이나에서는 인간이 까르마에 대해 무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올바른 노력에 의해 과거에 지은 까르마를 제거하고 새로운 까르마의 축적을 막을 수도 있다.

       

  해탈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영혼(jīva)이 업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것을 위해 더 이상 새로운 업이 유입되지 않도록 차단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감각기관의 제어를 통해 새로운 업을 유발하는 내면의 격정을 줄여야 한다. 다음에는 이미 들어와 있는 까르마를 고행(tapas, 苦行)을 통해 제거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행하는 고행을 통해 이미 쌓인 업은 자연적인 소멸보다 빨리 소멸된다. 고행은 내면에 쌓인 업을 정화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자이나교의 실천은 고행주의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고행에는 외적 고행과 내적 고행의 두 가지가 있다. 특정한 자세를 취하거나 더위와 추위 등에 맞서는 것이 외적 고행이라면, 티르탕카라에 대한 예배라든가 봉사 혹은 명상이나 참회는 내적 고행이다. 이들은 모두 영혼의 정화를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혼(jīva)이 까르마로부터 완전히 정화되면 다시 환생하는 일이 없이 우주의 맨 꼭대기로 승천하여 거기에서 영원하고 행복한 전지의 삶을 영위한다. 이것이 자이나교에서 생각한 해탈이다.  

 

  * 참고문헌

  각묵 옮김, 『디가니까야 제1권』,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05.

  권오민 지음, 『인도철학과 불교』, 서울: 민족사, 2004.

  이지수 옮김, 『인도철학』 서울: 민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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