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선무 外

2017. 4. 15. 13:19율려 이야기




   호선무 동영상    http://blog.naver.com/inter_view04/120066780628





한국민족문
화대백과사

호선무

다른 표기 언어 胡旋舞

요약 테이블
유형 개념용어
분야 예술·체육/무용

요약 고구려, 백제 등 삼국시대에 연행된 또는 형식 및 형태를 이르는 춤.

개설

고구려(高句麗)나 강국(康國: 현재의 사마르칸트) 등에서 전래된 당나라 궁정 연회 춤의 하나.

연원 및 변천

고구려나 백제의 호선무는 남북조시대에 중국에 전해졌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중원을 통일시킨 후에 국경 밖 변방 국가들의 음악과 춤을 모아서 자기 나라의 연회 때에 공연하게 했는데, 호선무는 당나라 9부악(九部樂) 중 고구려기로 선택되었다. 9부악이 10부악(十部樂)으로 재편된 후에는 강국(康國: 사마르칸트[Samarkand])의 호선무가 채택된 것으로 여겨진다. 당나라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호선무뿐 만 아니라 남쪽과 서쪽의 여러 국가들에도 각각 호선무를 잘 추는 사람이 있었다. 당나라 왕실에 여러 나라에서 ‘호선녀’(胡旋女)를 바친 기록이 있다.

내용

『신당서(新唐書)』의 고구려기는 공 위에 서서 바람처럼 돌아가는 모습의 기예적 호선무이다. 반면 강국의 호선무는 급하게 회전하는 것이 특징이다. 당나라 때 특히 유행하여 현종(玄宗)의 애첩 양귀비(楊貴妃)와 서역 출신 신하 안록산(安祿山)도 호선무를 잘 추었다고 한다. 이로써 중당시인(中唐詩人)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는 ‘호선녀’라는 시를 통해 황제(현종)의 마음과 나라를 함께 어지럽힌 원인이 호선무에 있다고 비판하였다. 당나라 말에 호선무는 유혹과 방탕의 춤이라고 평가되어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현황

현재는 고대 문헌에서만 볼 수 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체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新唐書』卷21, 「志」第11, 禮樂志
  • 『樂書』卷159, 「樂圖論」 胡部歌 九部樂, (宋, 陳暘 撰)
  • 『舊唐書』 卷200上, 「列傳」 第150上, 安祿山
  • 『通典』 卷146, 「樂」 6 四方樂
  • 「高句麗 胡旋舞와 康國 胡旋女舞의 二元性 고찰」(이종숙, 『한국무용사학』 6, 2007)





KBS 역사기행 2부작 고구려 음악(=인도, 드라비다,타밀어) 대탐사 1~2부
(전인평, 2007.03) / 인도음악무용 / korea koguryu india music dance



                                            


게시일: 2013. 6. 15.


이동영상은 전인평교수님이 올리신 총6개의 동영상을
시청의 편리를 위해 1개로 합친 자료입니다.
문제가 되면 삭제하겠습니다.^^


http://blog.naver.com/sungnyonara/100...
http://blog.naver.com/lovepogu/120192...

제 1편. 인도에서 고구려를 만나다.
[2007. 3. 11(日) KBS 1TV 밤 11:00~11:50]


제 2편. 히말라야를 넘어, 고구려로!
[2007. 3. 18 (日) KBS 1TV 밤 11:00~11:50]

Chun In Pyong (전인평), Ph.D. Ex dean of the College of Korean

Music Chung Ang University, Professor of Music composition and

history of Korean Music and a Ph.D. in Korean music theory from

Korean Studies. Vice President of Korean Music Critics Association.

He is the president of Council for Asian Musicology and has

published English journal [Asian Musicology] twice in a year from

2002.


His work has been funded by the UNESCO and the Korean Arts

Promotion Foundation. He was an examiner for World Intangible

Heritage for Humanities of UNESCO 2009-2011.


He has authored many books, Guakjakgogipmun (국악작곡입문 [The

Guide for Composition for Korean Musical Instruments] 1988),

SaerounHangugueiagsa (새로운 한국음악사 [New History of Korean

Music] 2000), SilkroadwaHangugueiag (실크로드 음악과 한국음악

[Silk Road Music and Korean Music] 2001), Asia Ueimakyeongu (아시

아음악연구 [Asian Music Studies] 2002), Silk Road; Gil wiuinorae (실

크로드, 길 위의 노래 [Silk Road and its' Music] 2003),

Urigajeongmalalayahaluriueimak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음악)

[Essential Korean Music for Korean] 2008).






당 현종도 사랑했던 胡旋舞 … 西域의 가무와 놀이에 나라가 들썩이다

기사승인 2015.12.09  14:47:02

- 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 - 22. 장안 시민들이 향유한 오랑캐 문화

  

 

▲ 장안사람들의 연희모습을 묘사한 당대 무덤 벽화

 
 


   당대 장안에 서역문화가 대유행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당 제국 자체가 호한통합의 국가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도 있다. 당대 장안은 물론이고 지방 각지의 민심을 장악하고 있었던 불교에도 그 영향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 점을 제일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이 淨土變相(극락정토의 왕생을 설하는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정토변상들에는 어김없이 부처가 앉아있는 전면의 무대에 胡旋舞를 추는 무희와 그 무희를 중심으로 주변에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이 배치돼 있다. 그 악공들이 연주하고 있는 악기는 중국 전래의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역에서 전래된 악기들이다. 음악 역시 서역의 그것과 동떨어진 음악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역으로부터 전해진 악기와 음악, 그리고 그 음악에 맞춰 호선무를 추고 있는 서역 출신 무희들의 화려한 몸놀림, 이러한 것들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당대의 불교인들이 왕생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정토의 풍경이었다.


   몇 년 전, 카슈가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카슈가르는 우리가 흔히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사막남도와 사막북도의 두 갈래 길이 만나는 서쪽 끝 지점에 있다. 중국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서쪽 끝 도시이기도 하고, 여기에서 더 서쪽으로 향하면 파키스탄(옛날의 간다라)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연결되는 곳이다. 중국의 중앙아시아를 향하는 서쪽 관문도시인 셈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대부분 무슬림 곧 이슬람 신자들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무슬림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슬림이긴 하지만 이슬람 도래 이전의 전래 풍속 역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비록 종교적인 영향 때문에 술은 마시지 않지만, 노래와 춤을 여전히 즐긴다. 이방의 관광객들이 방문하면 전통 노래와 춤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남북조 시대와 당대의 불교 벽화에 나타나는 정토변상의 호선무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당대의 장안 사람들은 이 서역 음악과 서역의 무희들이 춤추는 장면을 보면서, 그 모습을 마치 극락세계의 모습인양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정토변상에 호선무를 추는 서역 출신 무희와 서역의 악기와 악공들이 그려진 것은 그 아름다움에 열렬히 반응했던 서역문화의 추종자들이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남북조 시대와 당대의 정토변상은 말할 것도 없고, 후대의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변상에까지 이 정토변상의 모습은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이야기다.

 

唐人들, 이국적인 것에 열광하다

   그런데 왜 서역문화가 당대의 장안 사람들 특히 당인들이 열광할 만큼 호응을 얻었던 것일까. 그 뿌리는 남북조 시대에 이미 시작된다. 이미 북위 시대의 낙양에 살았던 西夷 곧 서역인만 수만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북위 왕조는 서역출신의 胡人들에게 일정한 자치권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들 서역인들이 얼마나 중국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었는지는 북제 말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北齊書』 「열전·恩倖傳」에는 “서역의 추악한 무리나 龜玆의 광대로서 왕에 봉해지거나 관료가 된 자가 많았다.”다는 기록이 있다. 오죽하면 북제의 무성제나 후주가 호인들을 등용해 막중한 임무를 맡겼던 것이 북제 멸망의 원인 중의 하나라는 평가마저 있을 정도다. 이것은 적어도 북조 말기에는 서역인들이 북조 사회 깊숙이 들어와서 일원으로 당당하게 행세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서도 독자적인 풍속을 유지하는 데는 걸림이 없었으니까, 서역문화 혹은 胡風이 은연중에 퍼져나갔을 것은 목도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한 일이다.


   비록 북제는 멸망했지만 그렇다고 중국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던 서역인들이 일거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수를 이은 당 역시 서역인들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우호적인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이전 시대보다 위축될 일도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이전의 연재 글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당은 소그드인을 중심으로 하는 서역인들을 제국 서방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입장이었다. 소그드인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들이 장안성 西市의 물류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중국 각지의 대도시에 남아있는 회족거리 역시 알고 보면 이 같은 서역인 거리가 시초가 됐던 셈이다.


   거리 혹은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그 독자적인 문화가 유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작정 독자성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장안의 한족들과의 거래 그리고 교류 역시 활발했다. 이 거래와 교류의 과정에서 독자적인 문화는 자연스럽게 한족들에게 걸맞은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색다르기도 하면서 익숙한 무언가도 있는, 이것이 서역문화가 장안 그리고 나아가 당의 도시 각지에서 유행하게 된 배경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 중앙아시아 출신의 서역인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에도 적지 않게 개입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색적인 문화가 당대 사회에 퍼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서역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호희의 모습을 묘사한 당대무덤벽화

 
 


생활 속에 스며든 카펫과 음악, 기마와 화장의 습속

   唐末에 쓰여지긴 했지만, 관료이자 시인이었던 元(779~831년)이 남긴 「法曲」이라는 시에는 당대의 호풍 유행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서역의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서역의 카펫이 장안과 낙양에 가득하네./ 여인은 서역인의 부인이 되려고 서역의 화장술을 익히고/ 기생은 胡音을 권하고 胡樂에 힘쓰네./ 서역의 음악과 기마와 화장의 습속은 오십 년 동안 끊임없이 중원에 전해졌네.”


   서역의 말이 주요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고, 서역의 물산인 카펫(carpet)이 장안과 낙양에 가득하다. 우리가 동서 교통로를 흔히 ‘실크로드’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서역 그리고 그 너머 유럽까지 전해진 중국 쪽의 주된 물품이 실크 곧 비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받아들인 주된 물품은 말과 카펫 같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물품이었다. 원진의 시는 당대에 장안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서역 물품들을 애용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타고 다니는 말도, 바닥에 깔고 앉은 카펫도, 그 카펫에 앉아 즐긴 먹거리도 당나라 시대에는 강북 전역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밀로 만든 면 종류의 음식이었고, 그들이 즐긴 음악과 무용도 모두 서역의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장안과 낙양 사람들의 주된 사치품 품목의 상위에 매겨진 물품의 대다수가 서역을 원산으로 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서역에서 유래돼 중국에서 유행했던 풍속 중에 蘇莫遮라는 가무희도 있었다. 이 소막차라는 가무희는 장안에서도 꽤나 유행했던 것인데, 나중에는 신라와 고구려에서도 적잖게 행해졌던 기록이 남아 있다. 소막차에 대해 『一切經音義』(현존하는 불경사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팔만대장경 속에만 들어 있다. 이 책은 모두 25권으로 649년 玄應이 편찬했고, 그의 이름을 따서 ‘현응음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456종의 불경에 나오는 어휘들을 경별로 제시하고 해설했다)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막차(蘇莫遮)는 徐戎의 오랑캐 말이다. 바르게는 삽마차(颯麿遮)라고 한다. 이 놀이는 본시 서쪽의 龜國에서 나온 것으로, 지금도 이 곡이 있다. 그 나라의 渾脫, 大面, 撥頭 등의 종류다. 혹은 짐승의 얼굴을 하기도 하고, 혹은 귀신 모습을 하기도 하며, 여러 가지 가면의 모양을 빌렸다. 혹은 진흙탕을 행인들에게 흩뿌리기도 하고, 혹은 올가미를 던져서 사람을 얽어매어 잡는 것으로 놀이를 삼았다. 매년 7월 초에 공식적으로 이 놀이를 개최했는데, 7일이 지나면 멈춘다. 그 지역에 전해지가를 ‘항상 이 방법으로 나찰과 악귀를 물리치고 쫓아내어서 인민의 재난을 없앤다’고 했다.”(『一切經音義』 제1권, 『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音義』중에서)


   설명처럼 소막차는 가면극이면서 일종의 액막이를 위한 제례가 곁들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체경음의』가 저술된 것이 정관 말년이라고 하므로, 640년대 말의 기록이다. 곧 정관연간에 이미 장안에도 서역인의 가무희인 소도차가 전해져 있었던 것은 물론 빠르면 이미 북제 시대부터 민간에서 연행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文獻通考』「夷部樂」에 따르면 소막차는 원래 康國(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매년 11월에 개최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중앙아시아의 康國에서 기원한 일종의 제례가무희가 서역 전체에 퍼졌다가 중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불경인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간다라 지방(오늘날의 파키스탄)에도 폭넓게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내용을 보면, 짐승탈이나 귀신탈 등 여러 가지 가면을 활용하고 거기에 가무를 곁들인 형태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독특한 가무희가 중국에 전해진 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당과 매우 밀접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신라는 물론 일본에도 전해진 흔적이 있다. 『삼국사기』 「樂誌」에는 최치원이 남긴 「鄕樂雜詠」 다섯 수를 수록하고 있는데 金丸·月顚·大面·束毒·猊가 그것이다. 이 다섯 가지 놀이는 신라 五伎라고도 하는 것으로 다섯 가지의 탈춤놀이이다.


   이 중에서 금환과 대면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모두 서역에서 전래한 것으로 보인다. 월전은 우전국 곧 호탄 지역에서 전래된 탈춤으로 추정되고, 속독은 그 이름에서처럼 소그드 지역 곧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서 유래된 춤을 말한다. 속독 같은 경우는 일본에서 받아들인 고려악에 走禿 혹은 宿德 혹은 宿禿이라는 소그드의 음사 표기로 나타난다. 마지막의 산예는 사자춤을 말한다. 산예라는 말이 사자를 일컫는 한자표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북청사자놀음이나 봉산탈춤 같은 것들의 원형이 되는 탈춤놀이였을 것이다. 龜樂 곧 실크로드 중 사막북도에 있는 쿠차 지역에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설명하는데, 아마도 그보다 더 서쪽의 사자가 서식하는 곳에서 비롯된 놀이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 산예 역시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래돼 전해지고 있다.

 

유흥가 곡강지를 배회하는 동아시아 각지의 유학생들

   결국 서역의 다양한 가무와 놀이 등이 당나라를 거쳐 신라와 일본에도 전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결국 호풍 곧 서역문화의 유행은 당나라와 그 수도인 장안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서역에서 전해진 다양한 가무와 놀이문화가 장안에서 모이고, 그 장안에서 다시 한 번 중국 각지와 이웃나라인 신라와 일본에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오늘날 뉴욕에서 유행한 문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형국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장안에서 호풍이 유행하니까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서 호풍이 따라서 유행한 셈이다. 그만큼 일상생활 곳곳에서 서역풍은 만연된 풍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역문화의 유행이 장안 그리고 나아가 당나라의 세계화된 풍조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바람직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백거이(772~846년)의 시 「胡旋女」는 장안에 유행했던 서역문화의 열풍을 엿보게도 해주지만, 반대로 거기에 취한 상류층의 행태가 낳은 부작용도 보여준다. 그 일부를 보자.


“천보 말년에 세상 형편이 바뀌어/ 신하와 백성들은 교활함만 배웠었네./ 궁 안에는 태진이요 밖에는 안녹산이 있었으니/ 두 사람이 호선무를 가장 잘 춘다고 일컬어졌네./ 이화원 궁궐 안에서는 태진을 귀비로 책봉하고/ 안녹산을 금계병풍 아래에서 길러서 양자로 삼았네./ 안녹산의 호선무는 황제의 눈을 홀려/ 군사가 황하를 건너와도 반란인 줄도 몰랐네./ 양귀비의 호선무에 황제의 마음이 홀려 있어/ 마외(馬嵬)에서 죽여 내버렸음에도 생각은 더욱 깊어졌네./ 이로부터 대지의 축과 하늘을 지탱하던 밧줄도 흔들려/ 오십 년 동안이나 바로잡지 못했다네./ 호선녀여, 헛되이 춤만 추지 말고/ 이 노래를 자주 불러 황제가 훤히 깨닫게 해주시오.”


   호선녀란 서역에서 온 무희를 말한다. 선녀라 일컬을 만큼 인기가 있고 아름다웠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요즘의 아이돌 한류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했을 테니 말이다. 천보 말년은 당 현종이 통치하던 8세기 중엽이다. ‘궁 안의 태진’이란 양귀비를 말한다. 양귀비에 푹 빠진 현종이 22세의 양귀비를 화산의 도사로 출가시켜서 궁궐 안에 지은 도관이 태진궁에 머물게 했기 때문에 ‘궁 안의 태진’이라고 부른 것이다. 속설에는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유지하기 위해서 호선무를 따로 배웠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고, 그만큼 양귀비는 호선무에 뛰어났던 모양이다. 궁 바깥에서 호선무를 잘 추기로는 역시 안녹산을 따를 자가 없었던 모양이다.


   궁 안과 궁 밖에서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두 사람이 모두 호선무의 대가였던 셈이다. 달리 말하면, 황제도 그리고 그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받아야 하는 후궁과 관료도 역시 서역 문화에 푹 젖어있었던 세태를 백거이는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서역문화는 당나라 장안 문화의 대세였다. 알고 보면, 호풍에 빠져 정사를 내팽개친 현종을 비난하는 백거이도 서역문화의 유행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니, 그 백거이도 역시 서역문화의 유행에 한 몸을 맡겼던 唐人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도 하다.


   장안에 올라와 과거를 치러 급제한 선비들도, 토번이나 신라 그리고 멀리 일본에서 유학온 유학생들도 장안의 유흥가 곡강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곡강지 주변으로 널려진 유곽이며 주점에서는 서역에서 온 무희들이 서역에서 교역해온 카펫을 펼쳐놓고 그 위에서 서역음악에 맞춰 호선무를 춘다. 정월이나 초파일이 되면, 인근 대자은사에서부터 곡강지에 이르기까지 환히 밝혀진 등롱들을 따라 서역에서 전래된 가무희가 한바탕 펼쳐지는 광경, 그것이 장안 사람들의 여유로운 일상 한 편에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서역에서 오는 각종 물산이 모였던 곳이 바로 장안대로의 서쪽에 있었던 西市다. 서역 각국에서 온 물품들이 서역 상인들과 한인 상인들의 점포에서 거래되고, 그 물품들을 구하려는 귀족가의 사람들이 그 서시를 부지런히 드나드는 풍경, 그것이 또 한 편에서 장안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서시에 드나든 것은 장안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토번에서, 신라에서, 남소국에서, 왜에서 온 사신이며 유학생들도 저마다 서역 이국의 물산을 구하기 위해서 그 서시에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 물품이 다시 동아시아 각지로 퍼져나가는 길을 따라 서역인도 서역의 문화도 퍼져나갔던 것이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교수신문 editor@kyosu.net

<저작권자 © 교수신문>





6∼7세기의 고구려 춤| 춤.몸짓

꿈꾸는 듬북 | 조회 93 |추천 0 | 2009.04.23. 17:27


 

 

 

 

                                                      중국 돈황 막고굴(220굴) 벽화중의 무용도

 
 

     6~7세기의 고구려 춤은 4~5세기의 고구려 춤에서 볼 수 있는 자연 순박한 면모를 떠나서 관객을 의식한 ‘볼만한 것으로서의 춤’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무대예술에 접근한 하나의 새로운 경지로 들어갔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중국으로부터 그 당시에 풍미했던 서역(西域)의 춤과 음악을 대량으로 받아들이면서 고구려의 독창적이고도 주체적인 역량으로 소화시켜 고구려의 춤과 음악으로 훌륭히 이룩했기 때문이다.

   서역(西域)이라 함은 중국의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소아시아·시리아·이집트 방면까지를 일컫는 말로 중국의 수(隋)·당(唐)시대에 걸쳐 문화의 교류 등 동서 교통(실크 로드)의 핵심이 되는 곳이었다.
고구려는 서역의 춤과 음악을 대량으로 채용한 6세기 후반부터 고구려 말기인 7세기 후반까지 고구려 무악(舞樂)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이 시기는 중국 남북조(南北朝:440~589)에서 수(隋:589~ 618), 당(唐:618~9 07)에 이르는 시기로 중국에서도 무악(舞樂)이 역사상 가장 발전하고 융성하던 때였다. 즉, 남북조 시대에는 동란(動亂)의 시대이긴 하였으나 동시에 여러 민족의 문화가 융합하던 시대였고 여러 종류의 무악예술(舞樂藝術)이 서로 교류·영향·흡수를 꾀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다양한 여러 민족의 춤과 음악은 중국의 중원(中原)지역에 전래되어 중국의 무악을 한층 풍요롭게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당나라로 이어지면서 문화의 세계성을 확보하고, 그간에 있어왔던 여러 민족의 수많은 춤과 음악 중에서 우수한 무악 일곱 가지와 열 가지를 선별하여 수(隋)에서는 칠부기(七部伎, 후에 九部伎로 확충), 당(唐)에서는 십부기(十部伎)를 제정하여 궁정의 연회 때에 사용하였다.

   칠부기와 십부기에는 중국 본토의 무악인 청상기(淸商伎)등 두 가지와 고구려의 무악인 고려기(高麗伎)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서역의 무악인 것을 감안하면 그 당시에 서역의 무악이 얼마나 풍미하였는가를 가늠케 한다.
하지만 서열로는 고려기(高麗伎)가 칠부기 중에 세 번째로 들어있어 중국의 무악 두 가지 다음에 외래악(外來樂)으로는 그 첫째를 차지한 것으로 볼 때, 서역의 무악보다도 고구려의 무악이 그 당시에 크게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백제기(百濟伎)와 신라기(新羅伎)는 잡기(雜伎)중에 포함되어 있어 고구려의 기예가 백제나 신라의 기예보다 우수했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고려기(高麗伎)에는 호선무(胡旋舞)와 고려무(高麗舞)가 들어 있다.
호선무(胡旋舞)는 작고 둥근 양탄자 위에서 선회하는 동작을 주로 하여 추는 춤으로, 원래 강국(康國-현재 우즈베크 공화국의 사마르칸트 일대)등 서역에서 발달하여 중국을 거쳐 고구려에 전래된 춤이다. 그러나 당나라의 십부기에는 강국기(康國伎)의 호선무와 고려기(高麗伎)의 호선무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려기의 호선무가 서역에서 전래되었다 하더라도 서역의 것과는 또 다른 고구려만의 독특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호선무는 중국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공연할 정도로 대단히 성행 하였으며, 당나라 현종(玄宗)도 호선무를 매우 좋아했고 그가 총애한 양귀비, 안록산도 모두 이러한 춤 예술에 빼어났다. 이렇게 호선무는 황실 귀족들이 추기 시작하면서 그 당시의 풍조가 되었고, 궁정뿐만 아니라 고관대작들도 모두 고구려의 무악을 즐겼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호선무가 서역의 호선무보다 기예와 예술성에서 더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중국의 무용학자들은 당나라 때에 만들어진 돈황 막고굴 220굴의 벽화에 묘사된 화려한 춤의 장면을 보고 그것이 ‘호선무’라고 설명하면서 “회전하는 자태와 춤의 정취가 지금의 조선 춤과 아주 유사한 점이 매우 주목을 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 춤이 그 당시에 대단히 풍미하였으며 나아가 중국의 무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고려무(高麗舞)는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702~762)이 고려무를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뿐 안타깝게도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金花折風帽 白馬少遲廻 翩翩舞廣袖 似鳥海東來
(금화 절풍모를 쓰고 백마로 천천히 도네. 넓은 소매를 펄럭이며 춤추는 모습이 해동에서 새가 온 듯하네.)

   이 외에도 고구려에는 가지서무(歌芝栖舞)가 있었으며 그 반주음악은 비파(琵琶)·공후·적(笛)·생(笙)· 소(簫) 등 14종에 이르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여 일부(一部)가 28인의 큰 규모로 연행 되었다.
이와 같이 6, 7세기의 고구려 춤은 가지서무·고려무·호선무 등과 같이 분명한 춤의 명칭이 대두되었고, 춤사위에 있어서는 고구려인의 강건하고 활달한 기질 상 호선무와 같이 동작이 민첩하고 역동적인 춤이 발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반주악기는 그 숫자와 종류가 대단히 많아져서 음색의 변환 및 음향을 큰 폭으로 확대시킬 수 있었으며, 춤추는 사람은 모두 수식과 화장을 하여 더욱 화려하고 장황한 무악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가 선진문화를 수용함에 있어 창조적인 지혜와 주체성으로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고구려의 춤에서와 같이 중국으로 오히려 역수출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국제적인 문화교류 속에서 한국 춤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에 대해서도 시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cafe.daum.net/04nuri/7p...   새물누리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본 고구려의 악기와 무용 그리고 의복> 관련 부분


자, 여기를 보실까요!

그 유명한 안악3호분 대행렬도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행렬도에서 고구려 철갑기병에만 주목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행렬도속에는 고구려 문화가 얼마나 국제적이었나 알려주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악기들입니다."

 

황해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3호분.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이 계속 되고 있다.

 

거대한 무덤속엔 화려한 벽화가 남겨져 있다.

대행렬도엔 철갑기병과 함께 수십 명의 악대가 행진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악기를 사용했을까?

 

 

"담고라고 하는 악기, 그 뒤에 소, 그리고 각이라고 하는 악기가 있구요..."

                                                               - 권오성 교수, 한양대 국악과

 

대행렬도의 악기는 타악기와 관악기로 구분된다.

 

메는 과 메는 종은 타악기다.

담고라고 불리는 타악기 뒤에는 관악기 이 있다.

 

이들은 어떤 음악을 연주했을까?

 

지난 6월 일본의 한 신사에서

고구려의 음악이 연주된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진은 그 신사를 찾았다.

 

일본 도쿄 오타마 이나리 신사.

고마가쿠 나소리 공연.

악단의 연주에 맞춰 암수용 한쌍이 즐겹게 노는 모습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이 1,500년부터 일본 황실에서 전승되고 연주되어 왔다는 고마가쿠, 즉 고구려악이다.

고마가쿠에는 고구려에서 건너온 악기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산노쓰즈미(장구), 고마부에(고려적)

 

"일본의 아악에 속해있는 고마가쿠(고구려악)는

고대의 한반도에서 유입된 춤과 거기에 수반되는 음악으로

오랫동안 일본에서 전승되어 내려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조선반도에서는 고대의 것이 사라졌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전승되어 내려온 음악과 춤의 종류입니다."

                                             - 미타 노리아키, 미즈호 가가루키아 주석악사

 

고마가쿠가 고구려 음악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이 산노쓰즈미라는 악기다.

 

최근 경기도 성남시 이성산성 발굴지에서 출토된 한 유물이 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었던 이성산성의 저수지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마치 작은 장고를 연상시켰다.

 

양쪽은 둥근 북처럼 생기고,

가운데 허리가 잘록한 이 악기는 요고라고 불리는 악기다.

 

요고는 고구려에서 흔히 사용되던 악기로

본의 산노쓰즈미도 이 요고가 변형된 것이다.

 

"삼국시대 기록이나 그림으로 전하던 목재악기가 출토되었다는 것이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요.

특히 이 요고의 경우에는 고구려 벽화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악기가 남쪽까지 전파되었다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배기동 교수, 한양대 박물관

 

 

요고는 고구려 벽화에 자주 등장한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당나라에서는 도자기로 요고를 만들어 사용을 했고,

 

투르판(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쿠처(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쿠처 키질석굴 벽화)에 이르기까지

요고는 아시아 전역에 널리 사용된 악기였다.

 

중국의 <악서> 권 125에 따르면

 "요고는 남만의 천축(인도)에서 나왔다"고 한다.

 

인도의 요고가 고구려까지 들어간 것이다.

 

"이 악기는 인도의 다마루라는 악기입니다.

보다시피 이것은 우리나라 장구의 할아버지격인데

이 악기는 인도에서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악기는 리듬악기로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데

이 악기가 진양악서에는 요고로 소개되어 있고

그것이 고려조에서 사용되었던 요고로 생각되고

바로 이 악기가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그 요고와 같은 계통의 악기라 생각합니다."

                                                              - 전인평 교수, 중앙대 창작음악학과

 

요고를 복원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요고의 수종 분석을 의뢰했다.

발굴된 요고의 파편을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결과 요고에 사용된 나무는 밤나무로 밝혀졌다.

 

"밤나무는 탄닌이라는 떫은 성분이 있어 내구성이 좋은 목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건조가 좀 어렵구요, 단단해서 건축자재나 지구재, 실질적으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는데요,

강도가 필요한 부분에 많이 이용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김수철,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목제보존담당 

 

한국의 전통악기를 제작해온 장인 박성기(궁중악기 대표)가 요고 복원에 나섰다.

 

형태와 크기는 이성산성에서 발굴한 것에 맞추기로 했다.

먼저 밤나무를 요고 형태로 깍아나갔다.

워낙 단단한 터라 다른 나무의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너무의 변형을 막기 위해 칠을 하고 나무의 양옆을 쇠가죽으로 덮어씌웠다.

 

고구려인들은 요고로 어떤 음악을 연주했을까?

 

7세기 당나라 궁궐에서는 10부기라는 불리는 국제음악회가 열렸다.

 

* 10부기 - 연악, 청악, 서량, 고려, 천축, 구자, 소륵, 안국, 강국, 고창 - <구당서>

 

 

 

구당서에는 당시 10부기에 참가했던 각 악기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고구려의 악기는 서량, 구자의 악기와 상당수 일치한다.

 

서량은 지금의 양저우지역, 구자는 중앙아시아의 구처다.

고구려는 소륵(카슈가르), 안국(부하라)과도 여러 악기를 공유하는데 둘다 먼 서역의 나라다.

 

"수나라, 당나라때의 장안으로 여러 지역의 음악이 들어왔는데

우리나라에는 고구려의 음악이라는 것, 

그리고 서역의 음악이라는 것이 장안의 궁중에서 교류가 된 거죠."

                                                                                               - 권오성 교수, 한양대 국악과

 

고구려와 서역 음악의 교류를 확인하기 위해 취재진은 서역의 쿠처로 향했다.

중국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위치한 쿠처.

 

한나라때 서역도호부가 설치된 이곳은 중국이 경영한 서역문화의 핵심지로

고구려 장군 고선지가 활약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쿠처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가량 떨어진 곳에 오아시스가 있다.

오아시스 앞으로는 거대한 석굴이 서 있다.

 

키질 석굴은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던 3~4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절벽에 굴을 파고 그 내부에 석굴과 불상을 꾸미는데

키질 석굴의 벽화는 쿠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다.

 

키질 38석굴천궁기악도에는  

쿠처에서 사용한 악기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완함횡적이다.

 

완함은 손으로 줄을 타는 관악기,

횡적은 가로 부는 현악기다. 

 

비파.

키질 벽화에 등장하는 악기는 고구려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실총엔 완함이, 5회분 4호묘에서는 횡적이 있다.

 

쿠처인들 남녀노소가 즐긴다는 무카무

1,500년 된 쿠처의 전통 노래춤과 음악이다.

 

중앙아시아의 쿠처와 고구려 음악의 공통점은 악기외에 또 있을까?

 

"쿠처음악에는 우리나라 도드리음악과 아주 흡사한 게 있습니다.

악사는 큰악기를 연주하는데 '덩~딱!~ 덩~딱!~' 이러한 장단입니다.

                                                                                     - 전인평 교수

 

도드리장단은 인도의 음악에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서역과 고구려에서 이와 같은 장단이 공통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도드리장단으로 요고를 연주해봤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요고와 현악기가 함께 연주되었음을 말해준다.

5회분 5호묘에는 이처럼 거문고와 요고가 함께 연주되는 장면이 보인다.

 

"거문고의 저음과 이 요고악기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이 요고악기가 고음보다는 거문고의 저음과 잘 어울리게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 길석근, 국립국악원 정악단

 

서역과 고구려음악은 악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안악3호분 후실 무악도에는 연주자 옆에 무희가 등장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무희는 발을 꼬고 있다.

발을 꼬는 무용은 인도 전통춤 까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을 꼬는 자세는 제일 먼저 무대에 올라가서 처음 시작할 때 하는 자세가 되겠습니다."

                                                                                               - 오인우, 까탁무용가 

 

그렇다면 인도의 춤이 고구려에 전해진 것일까?

 

까탁외에 인도춤과 고구려의 춤의 공통점은 또 있다.

빙빙 도는 동작이다.

 

고구려춤을 기록한 신당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또 한 기록은 호선무춤이 사마르칸트에서 온 춤임을 기록하고 있다.

 

"고리춤호선무인데 바람처럼 빠르게 돈다." - 신당서 21 예악지 11.

 

"사마르칸트 춤은 바람처럼 빠르게 돌아서 호선무란 이름을 얻었다." - 구당서 지9 음악2.

 

"조그만한 원형의 양탄자 위에서 바람처럼 빨리 도는 동작을 위주로 하는 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 당시 고구려 시대때 가장 대표적인 춤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박재희 교수, 청주대 무용학과

 

중국 돈황의 석굴에도 호선무를 추는 무희가 등장한다.

중앙아시아의 호선무가 인도, 중국, 고구려까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시아 대륙적인 것도 가지고 있으면서

또 고구려 풍토가 만들어내는, 또 고구려 인간 만들어내는 그런 관점에서

고구려의 춤과 곡예는 정말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가 오늘날 세계화, 국제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만

1,500년전 고구려이지만 오늘날에 못지않는 세계화, 국제화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 고승길 교수, 중앙대 연극학과

 

 

4.  가연, 당이 달린 바지, 점무늬옷!~

           고구려인들의 의상은 아시아 북방유목민족 계통!~ 

 

 

"지금 제가 연주한 것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기로 알려진 거문고입니다.

학자들은 이 거문고도 외국의 악기를 개량한 것이라 말합니다.

 

작고 귀엽게 생긴 이 악기는 고분벽화속에 등장하는 요고입니다.

고구려인들이 사용했던 악기와 고구려인들이 추었던 춤은

멀리 인도에서부터 고구려까지 동아시아 일대가 공유한 국제문화와 같은 것입니다.

 

영토를 확장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국제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요,

 

제가 입고 있는 이 의상도 고분벽화속에 고구려의 귀부인이 입고 있었던 옷입니다.

여기서도 고구려의 국제성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숙명여대 채금석 교수와 함께 고구려벽화속에 나타난 의상들을 살펴보았다.

 

무용총 수렵도에서 활을 쏘는 이 남자는 소매가 좁은 저고리에 바지를 입고 있다.

무척 활동적인 모습이다.

 

"한국사람들이 속하고 뿌리를 내렸던 지역은 동북아시아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대체로 기마와 수렵생활을 주로 했습니다.

 

말을 타고 주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생활에 편리하도록

좁은 소매나 좁은 바지가 아주 적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채금석 교수, 숙명여대 의류학 전공

 

고분벽화를 토대로 채금석 교수가 복원한 옷이다.

성별이나 신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고구려 의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고구려인들의 의상에 구조적 특징을 보면

전체적으로 직선적인 재단과 또 소매는 직선적인 소매가 붙어있고

길이는 엉덩이선을 지나는 둔부선입니다.

 

앞이 열려져 있고, 목둘레선에서 옷의 가장자리에는 선이 붙어 있습니다.  

 

또 허리에는 를 매도록 되어있는, 

또 양쪽으로 팔을 벌리면 T형을 이루는데 이러한 스타일을 카프탄스타일이라고 하고,

 

이러한 스타일의 옷은 우리 고구려 뿐만 아니라

북방계통의 민족이 공통적으로 입었던 저고리 스타일입니다."

                                                                                                  - 채금석 교수

 

소매나 도련에 다른 천을 대는 가연장식은

고대 수메르인에서부터 이슬람지역, 쿠처에서도 나타나는데

고구려의 겉옷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활동성을 고려한 북방민족의 의상은

고구려인들이 입고 있는 바지에서도 드러난다.

 

"각저총에 나타난 등장인물의 포즈를 보면 다리를 거의 90도 각도로 벌리고 앉아 있습니다.

해서 당이 달려있는 바지와 달려있지 않는 바지를 살펴볼 때

당이 달려있는 바지는 이렇게 90도 각도가 용이하고 활동성에 편리함을 줄 수 있는데요,

그러나 당이 달려있지 않는 경우를 보면

다리를 벌린다거나 말을 타거나 달릴 때 상당히 불편한 것으로 보입니다."

                                                                                                         - 채금석 교수  

 

당을 댄 바지

북방기마민족들이 공통적으로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인들이 점무늬 옷입었던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점무늬 옷은 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무늬였다.

중국 여인들의 화려한 옷에도 점무늬가 들어가 있다.

신강 투르판 지역에서는 점무늬 옷이 실물로 발견되기도 했다.

 

신강 투르판 아스타나 39호묘 출토 옷감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옷감 위의 점무늬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현재 학계에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양경애 교수는 가장 간단한 염색법인 홀치기기법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고분벽화를 살펴봤을 때 홀치기기법을 할 때 콩을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콩을 사용했다는 문헌적인 증거는 아직 찾지못했지만

보통 이런 작은 무늬들이 반복해서 나오기 위해서는

작은 곡물이나 아니면 돌맹이 같은 것을 사용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경우에는 한반도나 중국에 자생했던 콩을 손쉽게 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콩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양경애 교수, 충청대학 패션산업디자인과

 

일정한 간격으로 묶인 옷감을 붉은 염액속에 넣었다.

옷감에 물이 들 때 실로 묶인 부분만 염색이 되지 않는데 이것이 홀치기기법이다.

 

염색이 끝난 후 실을 풀어봤다.

마름모 모양의 무늬가 생겼다.

 

실을 묶은 간격과 콩의 색깔에 따라  무늬와 색깔도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다.

고구려인의 점무늬 옷들도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고구려의 옷, 그 속엔 세계가 담겨있다.


 

http://blog.daum.net/bohurja/337 <덕흥리 고분 外> 중에서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앙 아시아에서 기원한 빙글 빙글 도는 춤, 호선무. 인도에도 전혀졋고 중국에도 전해져 당나라에서 유행햇고 물론 고구려에서도 유행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쪽 방향으로 몰아가는 시각의 불편함을 제외한다면 유익하고 재미있고 훌륭햇다. 여기서 제시된 바로 그 똑같은 증거들은 한민족이 단일한 핏줄과 문화의 공동체가 아니라, 아주 옛날부터 아시아 각지의 영향력, 교류를 통해서 발전햇다는 사실, 고구려는 한민족의 위대한 국가라기보다는 다민족 다문화 국가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이런 얘기들은 박노자 교수가 한겨레 21에 연재하는 시리즈에서 탐구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http://sonicscape.tistory.com/65?srchid=BR1http%3A%2F%2Fsonicscape.tistory.com%2F65


출처 :한겨레참역사 원문보기   글쓴이 : 진달래 ㅡ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