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 - 22. 장안 시민들이 향유한 오랑캐 문화
| ▲ 장안사람들의 연희모습을 묘사한 당대 무덤 벽화 | |
당대 장안에 서역문화가 대유행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당 제국 자체가 호한통합의 국가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도 있다. 당대 장안은 물론이고 지방 각지의 민심을 장악하고 있었던 불교에도 그 영향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 점을 제일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이 淨土變相(극락정토의 왕생을 설하는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정토변상들에는 어김없이 부처가 앉아있는 전면의 무대에 胡旋舞를 추는 무희와 그 무희를 중심으로 주변에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이 배치돼 있다. 그 악공들이 연주하고 있는 악기는 중국 전래의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역에서 전래된 악기들이다. 음악 역시 서역의 그것과 동떨어진 음악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역으로부터 전해진 악기와 음악, 그리고 그 음악에 맞춰 호선무를 추고 있는 서역 출신 무희들의 화려한 몸놀림, 이러한 것들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당대의 불교인들이 왕생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정토의 풍경이었다.
몇 년 전, 카슈가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카슈가르는 우리가 흔히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사막남도와 사막북도의 두 갈래 길이 만나는 서쪽 끝 지점에 있다. 중국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서쪽 끝 도시이기도 하고, 여기에서 더 서쪽으로 향하면 파키스탄(옛날의 간다라)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연결되는 곳이다. 중국의 중앙아시아를 향하는 서쪽 관문도시인 셈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대부분 무슬림 곧 이슬람 신자들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무슬림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슬림이긴 하지만 이슬람 도래 이전의 전래 풍속 역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비록 종교적인 영향 때문에 술은 마시지 않지만, 노래와 춤을 여전히 즐긴다. 이방의 관광객들이 방문하면 전통 노래와 춤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남북조 시대와 당대의 불교 벽화에 나타나는 정토변상의 호선무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당대의 장안 사람들은 이 서역 음악과 서역의 무희들이 춤추는 장면을 보면서, 그 모습을 마치 극락세계의 모습인양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정토변상에 호선무를 추는 서역 출신 무희와 서역의 악기와 악공들이 그려진 것은 그 아름다움에 열렬히 반응했던 서역문화의 추종자들이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남북조 시대와 당대의 정토변상은 말할 것도 없고, 후대의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변상에까지 이 정토변상의 모습은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이야기다.
唐人들, 이국적인 것에 열광하다
그런데 왜 서역문화가 당대의 장안 사람들 특히 당인들이 열광할 만큼 호응을 얻었던 것일까. 그 뿌리는 남북조 시대에 이미 시작된다. 이미 북위 시대의 낙양에 살았던 西夷 곧 서역인만 수만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북위 왕조는 서역출신의 胡人들에게 일정한 자치권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들 서역인들이 얼마나 중국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었는지는 북제 말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北齊書』 「열전·恩倖傳」에는 “서역의 추악한 무리나 龜玆의 광대로서 왕에 봉해지거나 관료가 된 자가 많았다.”다는 기록이 있다. 오죽하면 북제의 무성제나 후주가 호인들을 등용해 막중한 임무를 맡겼던 것이 북제 멸망의 원인 중의 하나라는 평가마저 있을 정도다. 이것은 적어도 북조 말기에는 서역인들이 북조 사회 깊숙이 들어와서 일원으로 당당하게 행세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서도 독자적인 풍속을 유지하는 데는 걸림이 없었으니까, 서역문화 혹은 胡風이 은연중에 퍼져나갔을 것은 목도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한 일이다.
비록 북제는 멸망했지만 그렇다고 중국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던 서역인들이 일거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수를 이은 당 역시 서역인들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우호적인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이전 시대보다 위축될 일도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이전의 연재 글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당은 소그드인을 중심으로 하는 서역인들을 제국 서방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입장이었다. 소그드인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들이 장안성 西市의 물류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중국 각지의 대도시에 남아있는 회족거리 역시 알고 보면 이 같은 서역인 거리가 시초가 됐던 셈이다.
거리 혹은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그 독자적인 문화가 유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작정 독자성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장안의 한족들과의 거래 그리고 교류 역시 활발했다. 이 거래와 교류의 과정에서 독자적인 문화는 자연스럽게 한족들에게 걸맞은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색다르기도 하면서 익숙한 무언가도 있는, 이것이 서역문화가 장안 그리고 나아가 당의 도시 각지에서 유행하게 된 배경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 중앙아시아 출신의 서역인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에도 적지 않게 개입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색적인 문화가 당대 사회에 퍼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 ▲ 서역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호희의 모습을 묘사한 당대무덤벽화 | |
생활 속에 스며든 카펫과 음악, 기마와 화장의 습속
唐末에 쓰여지긴 했지만, 관료이자 시인이었던 元稹(779~831년)이 남긴 「法曲」이라는 시에는 당대의 호풍 유행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서역의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서역의 카펫이 장안과 낙양에 가득하네./ 여인은 서역인의 부인이 되려고 서역의 화장술을 익히고/ 기생은 胡音을 권하고 胡樂에 힘쓰네./ 서역의 음악과 기마와 화장의 습속은 오십 년 동안 끊임없이 중원에 전해졌네.”
서역의 말이 주요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고, 서역의 물산인 카펫(carpet)이 장안과 낙양에 가득하다. 우리가 동서 교통로를 흔히 ‘실크로드’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서역 그리고 그 너머 유럽까지 전해진 중국 쪽의 주된 물품이 실크 곧 비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받아들인 주된 물품은 말과 카펫 같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물품이었다. 원진의 시는 당대에 장안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서역 물품들을 애용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타고 다니는 말도, 바닥에 깔고 앉은 카펫도, 그 카펫에 앉아 즐긴 먹거리도 당나라 시대에는 강북 전역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밀로 만든 면 종류의 음식이었고, 그들이 즐긴 음악과 무용도 모두 서역의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장안과 낙양 사람들의 주된 사치품 품목의 상위에 매겨진 물품의 대다수가 서역을 원산으로 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서역에서 유래돼 중국에서 유행했던 풍속 중에 蘇莫遮라는 가무희도 있었다. 이 소막차라는 가무희는 장안에서도 꽤나 유행했던 것인데, 나중에는 신라와 고구려에서도 적잖게 행해졌던 기록이 남아 있다. 소막차에 대해 『一切經音義』(현존하는 불경사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팔만대장경 속에만 들어 있다. 이 책은 모두 25권으로 649년 玄應이 편찬했고, 그의 이름을 따서 ‘현응음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456종의 불경에 나오는 어휘들을 경별로 제시하고 해설했다)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막차(蘇莫遮)는 徐戎의 오랑캐 말이다. 바르게는 삽마차(颯麿遮)라고 한다. 이 놀이는 본시 서쪽의 龜茲國에서 나온 것으로, 지금도 이 곡이 있다. 그 나라의 渾脫, 大面, 撥頭 등의 종류다. 혹은 짐승의 얼굴을 하기도 하고, 혹은 귀신 모습을 하기도 하며, 여러 가지 가면의 모양을 빌렸다. 혹은 진흙탕을 행인들에게 흩뿌리기도 하고, 혹은 올가미를 던져서 사람을 얽어매어 잡는 것으로 놀이를 삼았다. 매년 7월 초에 공식적으로 이 놀이를 개최했는데, 7일이 지나면 멈춘다. 그 지역에 전해지가를 ‘항상 이 방법으로 나찰과 악귀를 물리치고 쫓아내어서 인민의 재난을 없앤다’고 했다.”(『一切經音義』 제1권, 『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音義』중에서)
설명처럼 소막차는 가면극이면서 일종의 액막이를 위한 제례가 곁들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체경음의』가 저술된 것이 정관 말년이라고 하므로, 640년대 말의 기록이다. 곧 정관연간에 이미 장안에도 서역인의 가무희인 소도차가 전해져 있었던 것은 물론 빠르면 이미 북제 시대부터 민간에서 연행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文獻通考』「夷部樂」에 따르면 소막차는 원래 康國(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매년 11월에 개최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중앙아시아의 康國에서 기원한 일종의 제례가무희가 서역 전체에 퍼졌다가 중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불경인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간다라 지방(오늘날의 파키스탄)에도 폭넓게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내용을 보면, 짐승탈이나 귀신탈 등 여러 가지 가면을 활용하고 거기에 가무를 곁들인 형태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독특한 가무희가 중국에 전해진 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당과 매우 밀접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신라는 물론 일본에도 전해진 흔적이 있다. 『삼국사기』 「樂誌」에는 최치원이 남긴 「鄕樂雜詠」 다섯 수를 수록하고 있는데 金丸·月顚·大面·束毒·狻猊가 그것이다. 이 다섯 가지 놀이는 신라 五伎라고도 하는 것으로 다섯 가지의 탈춤놀이이다.
이 중에서 금환과 대면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모두 서역에서 전래한 것으로 보인다. 월전은 우전국 곧 호탄 지역에서 전래된 탈춤으로 추정되고, 속독은 그 이름에서처럼 소그드 지역 곧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서 유래된 춤을 말한다. 속독 같은 경우는 일본에서 받아들인 고려악에 走禿 혹은 宿德 혹은 宿禿이라는 소그드의 음사 표기로 나타난다. 마지막의 산예는 사자춤을 말한다. 산예라는 말이 사자를 일컫는 한자표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북청사자놀음이나 봉산탈춤 같은 것들의 원형이 되는 탈춤놀이였을 것이다. 龜茲樂 곧 실크로드 중 사막북도에 있는 쿠차 지역에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설명하는데, 아마도 그보다 더 서쪽의 사자가 서식하는 곳에서 비롯된 놀이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 산예 역시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래돼 전해지고 있다.
유흥가 곡강지를 배회하는 동아시아 각지의 유학생들
결국 서역의 다양한 가무와 놀이 등이 당나라를 거쳐 신라와 일본에도 전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결국 호풍 곧 서역문화의 유행은 당나라와 그 수도인 장안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서역에서 전해진 다양한 가무와 놀이문화가 장안에서 모이고, 그 장안에서 다시 한 번 중국 각지와 이웃나라인 신라와 일본에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오늘날 뉴욕에서 유행한 문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형국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장안에서 호풍이 유행하니까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서 호풍이 따라서 유행한 셈이다. 그만큼 일상생활 곳곳에서 서역풍은 만연된 풍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역문화의 유행이 장안 그리고 나아가 당나라의 세계화된 풍조를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바람직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백거이(772~846년)의 시 「胡旋女」는 장안에 유행했던 서역문화의 열풍을 엿보게도 해주지만, 반대로 거기에 취한 상류층의 행태가 낳은 부작용도 보여준다. 그 일부를 보자.
“천보 말년에 세상 형편이 바뀌어/ 신하와 백성들은 교활함만 배웠었네./ 궁 안에는 태진이요 밖에는 안녹산이 있었으니/ 두 사람이 호선무를 가장 잘 춘다고 일컬어졌네./ 이화원 궁궐 안에서는 태진을 귀비로 책봉하고/ 안녹산을 금계병풍 아래에서 길러서 양자로 삼았네./ 안녹산의 호선무는 황제의 눈을 홀려/ 군사가 황하를 건너와도 반란인 줄도 몰랐네./ 양귀비의 호선무에 황제의 마음이 홀려 있어/ 마외(馬嵬)에서 죽여 내버렸음에도 생각은 더욱 깊어졌네./ 이로부터 대지의 축과 하늘을 지탱하던 밧줄도 흔들려/ 오십 년 동안이나 바로잡지 못했다네./ 호선녀여, 헛되이 춤만 추지 말고/ 이 노래를 자주 불러 황제가 훤히 깨닫게 해주시오.”
호선녀란 서역에서 온 무희를 말한다. 선녀라 일컬을 만큼 인기가 있고 아름다웠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요즘의 아이돌 한류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했을 테니 말이다. 천보 말년은 당 현종이 통치하던 8세기 중엽이다. ‘궁 안의 태진’이란 양귀비를 말한다. 양귀비에 푹 빠진 현종이 22세의 양귀비를 화산의 도사로 출가시켜서 궁궐 안에 지은 도관이 태진궁에 머물게 했기 때문에 ‘궁 안의 태진’이라고 부른 것이다. 속설에는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유지하기 위해서 호선무를 따로 배웠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고, 그만큼 양귀비는 호선무에 뛰어났던 모양이다. 궁 바깥에서 호선무를 잘 추기로는 역시 안녹산을 따를 자가 없었던 모양이다.
궁 안과 궁 밖에서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두 사람이 모두 호선무의 대가였던 셈이다. 달리 말하면, 황제도 그리고 그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받아야 하는 후궁과 관료도 역시 서역 문화에 푹 젖어있었던 세태를 백거이는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서역문화는 당나라 장안 문화의 대세였다. 알고 보면, 호풍에 빠져 정사를 내팽개친 현종을 비난하는 백거이도 서역문화의 유행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니, 그 백거이도 역시 서역문화의 유행에 한 몸을 맡겼던 唐人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도 하다.
장안에 올라와 과거를 치러 급제한 선비들도, 토번이나 신라 그리고 멀리 일본에서 유학온 유학생들도 장안의 유흥가 곡강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곡강지 주변으로 널려진 유곽이며 주점에서는 서역에서 온 무희들이 서역에서 교역해온 카펫을 펼쳐놓고 그 위에서 서역음악에 맞춰 호선무를 춘다. 정월이나 초파일이 되면, 인근 대자은사에서부터 곡강지에 이르기까지 환히 밝혀진 등롱들을 따라 서역에서 전래된 가무희가 한바탕 펼쳐지는 광경, 그것이 장안 사람들의 여유로운 일상 한 편에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서역에서 오는 각종 물산이 모였던 곳이 바로 장안대로의 서쪽에 있었던 西市다. 서역 각국에서 온 물품들이 서역 상인들과 한인 상인들의 점포에서 거래되고, 그 물품들을 구하려는 귀족가의 사람들이 그 서시를 부지런히 드나드는 풍경, 그것이 또 한 편에서 장안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서시에 드나든 것은 장안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토번에서, 신라에서, 남소국에서, 왜에서 온 사신이며 유학생들도 저마다 서역 이국의 물산을 구하기 위해서 그 서시에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 물품이 다시 동아시아 각지로 퍼져나가는 길을 따라 서역인도 서역의 문화도 퍼져나갔던 것이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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