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14. 22:53ㆍ율려 이야기
궁중정재(宮中呈才) - 향악정재(鄕樂呈才) / 다섯
*향발무(響鈸舞)
향발무는 작은 타악기를 두 손에 하나씩 들고 치면서 추는 춤이다. 무원 8명으로 구성되며 음악은 일승월항지곡(一昇月恒之曲)를 쓴다. 고려 때부터 전해지며 조선시대의 각종 진찬·진연에서 무고와 더불어 빠지지 않는 춤이다 조선 말기까지 전해졌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전기에 창작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하나. 향발(響鈸)이라는 작은 타악기를 좌우손의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에 각각 하나씩 매고, 장단에 맞추어 치면서 추는 춤이다.
1719년(숙종 45)의 ≪진연의궤≫, 1744년(영조 20)의 ≪진연의궤≫, 순조 이후의 각종 의궤에 빠지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향악정재 가운데에서 가장 즐겨 추던 춤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춤의 무보는 ≪악학궤범≫과 ≪정재무도홀기 呈才舞圖笏記≫에 전한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무원은 8명이나 ≪정재무도홀기≫에는 2명으로 되어 있다. 1828년(순조 28)의 ≪진작의궤≫에는 2명의 무동(舞童)에 18명의 협무(挾舞)의 그림이 있고, 1829년의 ≪진찬의궤≫에는 2명의 원무에 20명의 협무가 추는 그림과, 4명의 여기(女妓)의 춤도 보인다.
이 춤은 여기의 춤과 무동의 춤의 두 가지가 있었고, 무원의 수에도 변화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말기 1893년(고종 30)의 ≪정재무도홀기≫에 의하면, 당악정재인 <오양선 五羊仙>의 창사를 부른 점에서는 ≪악학궤범≫의 향발과 같으나, 향악정재의 특징인 면복흥(俛伏興)으로 시작하여 면복흥퇴(俛伏興退)로 끝맺는 전통적인 양식은 보이지 않으므로, 향악정재와 당악정재 양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춤의 반주음악은 ≪악학궤범≫ 시절에는 <보허자령 步虛子令>이 쓰였고, ≪정재무도홀기≫에는 <향당교주 鄕唐交奏>가 쓰였다. 1829년의 ≪진찬의궤≫에 의하면 무동의 복식은 아광모(砑光帽)를 쓰고, 홍라포(紅羅袍)·백질남선중단의(白質藍縇中單衣)·남질흑선상(藍質黑縇裳)에 녹한삼(綠汗衫)을 매고, 학정대(鶴頂帶)를 띠고, 흑화(黑靴)를 신는다.
여기의 복식은 화관을 쓰고, 초록단의(草綠單衣)·황초단삼(黃綃單衫), 속은 남색상(藍色裳), 거죽은 홍초상(紅綃裳)에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띠고, 오채한삼(五彩汗衫)을 매고, 초록혜(草綠鞋)를 신는다.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조선 전기에 창작된 향악정재의 하나. 향발이라는 작은 타악기를 좌우 손의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에 각각 하나씩 매고, 장단에 맞추어 치면서 추는 춤이다.
국립국악원 수요춤전: 국립국악원 무용단[2015.10.07.]
게시일: 2015. 10. 12.
향발무는 향발(響鈸)이라고 하는 작은 무구를 두 손에 하나씩 들고 치면서 추는 궁중무용이다.
일으켜주고 춤의 아름다움은 시각을 황홀하게 한다.
○ 출연/김혜영, 이정미, 유재연, 최성희
○Dance/Kim Hye-yeong, Yi Jeong-mi, Yu Jae-yeon, Choe Seong-hui
Hyangbal refers to a small percussive dance prop.
○ 주최 및 촬영/국립국악원[National Gugak Center]
이순희 2012 대구 야외상설공연-향발무
게시일: 2012. 7. 18.
이순희 소리보존회 2012 7월 14일 대구 코오롱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대구 야외상설공연 우리가락 우리마당에서
이순희 소리보존회 초청공연 중 손삼화 무용단의 향발무.
비가 많이 와서 비록 공연 관람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공연을 보러오신 분의 응원 감사드립니다.
[태교콘서트] 숙명가야금연주단 '달콤한 하품'(5) 궁중정재 - 향발무
업로드된 날짜: 2011. 11. 6.
숙명가야금연주단은 한국형 태교를 위해 조선왕실 태교 콘서트 '달콤한 하품'을
왕세자비가 회임한 후 궁중에서 태교를 위해 가야금 소리를 듣는다는 형식으로 진행된 이 콘서트는
이후 '봄을 위한 세레나데' '매기의 추억' 등 익숙한 음악들을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숙명가야금연주단은 공연에 참가한 임신부와 관객들이 느긋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특히 왕세자비로 등장하는 장예리씨는 실제 임신한 상태로 무대에 올라 해금 연주까지 소화하였다.
한편 숙명가야금연주단은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에서 수학한 가야금 연주자 18명과
/파이낸셜뉴스 fncast 이동환, 박동신PD
*무 고(舞鼓)
궁중무용(宮中舞踊)의 하나이다. 가운데 무고라는 북을 놓고 8명의 무원(舞員)이 여러 가지 모양을 짜가며 추는 춤으로 향악정재((鄕樂呈才)에 속한다. 이 춤의 유래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고려25대 충렬왕 때 시중(侍中), 이 혼(李混)이 영해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바다 위에서 부사(浮査)를 얻어 이로써 큰북을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굉장히 커서 이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추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에는 춤추는 사람이 수효대로 북의 수효에 맞추어 4고무(四鼓舞) 8고무(八鼓舞)등으로 발전하였다. 요즘은 여덟 사람이 북 하나를 놓고 추되 4사람은 원무(元舞)라 하여 양손에 북채를 들고 시종 북을 에워싸며 북을 어르거나 두드리며 나머지 네 사람은 협무(挾舞)라 하여 삼지화(三枝花)라는 꽃 방망이를 두손에 들고 가에서 방위(方位)를 짜고 들거나 춤을 춘다. 한편 이 춤에 쓰는 북은 교방고(敎坊鼓)를 약간 작게 만든 것으로 세 기둥 위에 북통을 세로로 올려놓는다. 북 통의 둘레는 청,흥,백,흑,으로 아름 답게 그려져 있다.
고면(鼓面)은 청ㆍ홍ㆍ백ㆍ흑의 빛깔을 사용하고, 원광(圓光)을 그려 사방(四方)의 방위를 상징한다. 북통에는 둥근 고리 셋을 달고 가자(架子 : 악기를 다는 틀)에는 세 기둥을 세우고 기둥 안에 구철(鉤鐵 : 장구나 북 등의 양편 가죽을 통에 부착시키기 위하여 쓰이는 쇠갈고리)을 설치하여 북을 건다.
기둥마다 횡목(橫木) 둘을 두고, 안쪽 끝에 주주(珠柱)를 써서 못을 꿰어 접거나 펴기도 하는데, 모두 붉은 칠을 한다. 북의 형태는 행악(行樂)에 쓰이는 교방고(敎坊鼓)와 같으나 약간 작다.
궁중정재에 사용하는 북의 하나.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무고 그림. 북의 형태는 행악에 쓰이는 교방고와 같으나 약간 작다.
정재 - 무고
업로드된 날짜: 2011. 3. 29.
일시 : 2010년 5월 28일
*봉래의(鳳來儀)
조선 초기에 창제된 정재(呈才)를 위한 무용음악의 하나이다. 세종 대왕의 태조(太祖)창업의 공덕을 경송(敬頌)하여 친히 지은 춤으로 흔히(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로 창사(唱詞)로 부른다. 형식은 전인자·진구호 (進口號)·여민락(與民樂)·치화평(致和平)·취풍형(醉豊亨)·후인자(後引子)·퇴구호(退口號)로 구성된다. 전인자는 전주곡 (前奏曲), 후인자 후주곡(後奏曲)에 해당하며 진구호와 퇴구호는 춤의 앞뒤에서 죽간자(竹竿子)가 부르는 구호(口號)이고 나머지는 무원(舞員) 이 부르는 노래이다.
먼저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을 기악(器樂)으로 연주하면 죽간자 2명이나가(공손히 옛적일을 생각하니 억만년이 되도록 흡족하다)라는 선구호를 부른다. 다음 8명이 나가 해동장(용비어천가1장)인 (해동의 육룡이 날의실제 일마다 천복이시니 옛 성인의 사적과 잘 부합하도다)를 창사한다. 이것이 끝나면 죽간자와 원무(元舞)가 병창(竝唱)하여 야인장 용비어천가 제7장을 노래하고 끝나면 원무만이 근심장(용비어천가 2장)·원원장(용비어천가 3장)·석주장(용비어천가 4장)·금아장(용비어천가 5장)·적조장(용비어천가 10장)을 차례로 노래한다. 이어 몇가지의 무작(無作)이 더 있은 후 죽간자와 무원이 처음의 배열로 서면 죽간자가(만 백성이 마음이 기뻐 길이 스평을 축하하네)라고 후구호를 부른다. 이것이 끝나면 죽간자와 무원이 퇴장함으로써 춤은 모두 끝난다. 이 춤은 아름다운 무작 보다는 용비어천가의 악장을 많이 부르고 있다.
≪세종실록≫ 권140에 실린 전인자 악보.
조선 전기에 창제된 정재(呈才:대궐 안의 잔치 때 하던 춤과 노래)를 위한 무용 음악의 하나.
1445년(세종 27) 4월 세종의 명으로 권제(權蹏)·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의 가사에 맞추어 작곡된 음악을 지칭하는 말로서, 그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던 정재 및 무용 음악의 총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음악은 <전인자 前引子>·<여민락 與民樂>·<치화평 致和平>·<취풍형 醉豐亨>·<후인자 後引子> 등 다섯 개의 곡으로 구성되었다. 악보는 ≪세종실록≫ 권140∼145 사이에 전하며, 춤사위에 관한 기록은 ≪악학궤범≫ 권5에 전한다. 5곡 가운데 <전인자>·<여민락>·<후인자> 등 3곡은 황종·태주·중려·임종·남려의 5음음계로 구성되었으며, 시작음과 종지음이 모두 황종이다.
또 <치화평> 1기·2기·3기는 모두 태주·고선·유빈·남려·응종의 5음음계로 구성되었으며, 세 곡의 종지음과 시작음이 모두 남려이다. 그리고 <취풍형> 상하 2곡은 모두 대려·고선·유빈·남려·응종의 5음음계로 구성되었는데, <취풍형> 상에서는 시작음과 종지음이 모두 고선이지만, <취풍형> 하에서는 시작음은 남려이고 종지음은 고선이다. 이러한 여러 악곡들은 32정간(井間)의 정간보(井間譜) 속에 율자보(律字譜)로 기보되었다.
세종 당시 <봉래의> 정재의 반주음악으로 쓰였을 경우에 <여민락>의 10장을 모두 연주하였고, <치화평>은 1기·2기·3기 가운데 3기의 초장에서 16장까지와 종장만을 연주했으며, <취풍형>도 초장에서 8장까지와 종장만을 연주했다. 그러나 성종 때 <봉래의> 정재의 반주음악으로 <전인자>가 춤의 시작에서 연주되었고, 이어서 <여민락>이 연주되었다.
<여민락>의 연주에 맞추어 여기(女妓)들은 한문으로 된 해동장(海東章)·근심장(根深章)·원원장(源遠章)·석주장(昔周章)·금아장(今我章)·적인장(狄人章)·야인장(野人章)·천세장(千世章)·자자장(子子章)·오호장(鳴呼章)을 노래 불렀고, 한 장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다른 춤동작을 계속했다.
<여민락>에 이어서 <치화평> 3기를 연주할 때에도 기생들은 국·한문으로 된 해동장(首章)·불휘장(제2장)·주국장(周國章, 제3장)·적인장(제4장)·칠저장(漆沮章, 제5장)·상덕장(商德章, 제6장)·블근새장(제7장)·태자장(太子章, 제8장)·봉천장(奉天章, 제9장)·일부장(一夫章, 제10장)·우예장(虞芮章, 제11장)·오년장(五年章, 제12장)·말장(제13장)·성손장(聖孫章, 제14장)·양자강장(揚子江章, 제15장)·도망장(逃亡章, 제16장)·천세장(卒章)을 노래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치화평> 3기에 이어서 <취풍형>을 연주할 때에도 기생들은 국·한문의 해동장(수장)·불휘장(제2장)·주국장(제3장)·적인장(제4장)·칠저장(제5장)·상덕장(제6장)·불근새장(제7장)·태자장(제8장)·천세장(졸장)을 노래 불렀고, <후인자>가 마지막으로 연주되었다.
이때 반주음악을 맡았던 음악인들은 월금(月琴) 2인, 당비파 2인, 향비파 2인, 대금(大笒) 2인, 장구 2인 등 모두 10인이었는데, 이들은 악기마다 1인씩 좌우로 나뉘어 정절(旌節)·용선(龍扇)·봉선(鳳扇) 등의 정재의물(呈才儀物)을 든 기생 앞에 앉아서 연주했다.
조선 초기의 <봉래의>는 조선 말기에 이르는 동안 역사적 변천을 거치게 되었고, 따라서 춤의 반주음악도 본래의 <봉래의> 대신에 다른 음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 <봉래의> 정재 연주 때 기생이 부른 노래의 가사는 조선 초기의 것과 같았다.
고종 때의 문헌인 ≪정재무도홀기 呈才舞圖笏記≫에 의하면 <봉래의> 정재의 반주음악은 <정상지곡 呈祥之曲(與民樂)>·<오운개서조 五雲開瑞朝(步虛子令)>·<치화평지곡 致和平之曲(鄕唐交奏)>·<취풍형지곡 醉豐亨之曲(歌曲의 弄樂)>·<계락 界樂>·<향당교주>·가곡의 편조(編調)·<하승평지곡 賀昇平之曲(향당교주)>이었다.
< 봉래의> 연주 도중에 기생들은 <오운개서조>에 맞추어 한문으로 된 해동장·근심장·원원장·석주장·금아장을 불렀고, <치화평지곡>에 맞추어 한문의 적인장·야인장·천세장·자자장·오호장을 노래 불렀다. 이어서 기생들은 가곡의 농(弄)에 맞추어 국한문의 해동장과 불휘장을 불렀고, <계락>에 맞추어 국한문의 주국장·적인장·야인장을 불렀으며, 가곡의 편(編)에 맞추어 국한문의 상덕장·적조장(赤鳥章)·태자장·봉천장·일부장·성손장·천세장을 불렀다.
이렇게 조선 말기까지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봉래의>정재와 그 반주음악의 전통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다만 문헌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세종의 꿈 봉황의 춤사위 타고 하늘로 오르다 [봉래의]
게시일: 2014. 10. 13.
봉래의 중 여민락 Yeomillak
게시일: 2014. 4. 1.
봉래의 공연 영상 The video of Bongnaeui performance - 여민락 Yeomillak
『세종실록악보』와 『악학궤범』에 전해지는 "봉래의"를 복원 공연한 '봉래의-세종의 꿈, 봉황의 춤사위 타고
봉래의 중 치화평 Chiwhapyeong 1~5장
게시일: 2014. 4. 1.
『세종실록악보』와 『악학궤범』에 전해지는 "봉래의"를 복원 공연한 '봉래의-세종의 꿈,
세종대왕은 나라의 질서를 잡기 위해 최초의 한글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를 짓게 하였고,
King Sejong had national scholars create Yongbieochunga with Hangul, the first Korean alphabet,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연구팀은 3년여에 걸쳐 고악보 정간보에 숨어있는 리듬의 비밀을 캐내고
-공연 정보-
제목 : 봉래의 - 세종의 꿈, 봉황의 춤사위 타고 하늘로 오르다!
일시 : 2013년 11월 21일, 19시 30분
장소 : 국립국악원 우면당
주최 :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연구 및 제작진
樂歌舞 문화코드탐색 : 조규익(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음악복원 : 문숙희(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책임연구원)
무용복원 : 손선숙(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전임연구원)
문학보조연구원 : 이상욱(숭실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박사수료)
음악보조연구원 : 양영진(한양대학교 음악대학 박사과정)
자료영상제작 : 에이비애드
영상 촬영 : 한기형
출연진
음악감독 : 이영(국립국악원 정악단 악장)
연주단 : 집박_이영, 남창_김병오, 여창_박진희/김선경, 피리_민지홍/이종무 해금_한갑수,
무용감독 : 손선숙-궁중정재아카데미 대표
무용수 : 봉래의&궁중정재아카데미
치화평 Chiwhapyeong 6~9장
게시일: 2014. 4. 1.
치화평 Chiwhapyeong 10~13장
게시일: 2014. 4. 1.
치화평 Chiwhapyeong 14~16장, 125장
게시일: 2014. 4. 1.
『세종실록악보』와 『악학궤범』에 전해지는 "봉래의"를 복원 공연한
봉래의 中 취풍형 Chwipunghyeong 1~5장
게시일: 2014. 4. 1.
『세종실록악보』와 『악학궤범』에 전해지는 "봉래의"를 복원 공연한
취풍형 Chwipunghyeong 6~8장, 125장
게시일: 2014. 4. 1.
봉래의 공연 영상 The video of Bongnaeui performance - 취풍형 Chwipunghyeong 6~8장, 125장
『세종실록악보』와 『악학궤범』에 전해지는 "봉래의"를 복원 공연한 '봉래의-세종의 꿈, 봉황의 춤사위 타고 하늘로 오르다!'
中 취풍형 Chwipunghyeong 6~8장, 125장 실황 영상
세종대왕, 봉래의 (치화평, 취풍형)
게시일: 2014. 6. 27.
세종대왕이 작곡한 봉래의 가운데 치화평과 취풍형 연주 장면 다큐멘터리 '민족주의 작곡가 세종대왕' 중 일부입니다.
봉래의 무용 자료영상 Footage of Bongnaeui dance
게시일: 2014. 4. 1.
봉래의 무용 자료영상 Footage of Bongnaeui dance
봉래의 - 복원공연이 완성되기까지
게시일: 2013. 11. 21.
봉래의 - 세종의 꿈, 봉황의 춤사위 타고 하늘로 오르다!
봉래의 음악 자료영상 Footage of Bongnaeui music
게시일: 2014. 4. 1.
봉래의 음악 자료영상 Footage of Bongnaeui music『세종실록악보』와 『악학궤범』에 전해지는
봉래의 학술용
게시일: 2013. 12. 16.
*처용무(處容舞)
가면 무용의 한부분으로 가면무용(假面舞踊)의 하나이다. 신라 헌강왕(憲康王)때 지어져 궁중나례(宮中儺禮)나 중요연례(宴禮)에 처용의 가면을 쓰고 춤추던 탈춤이다. 구나의(驅儺義)뒤에 추던 무용의로 대게는 (處容慢機)와 봉황음(鳳凰吟)에 맞추어 춤추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섣달 그믐날 (나례)에 두 번씩 처용무를 추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전해지는데 그 격식은 다음과 같다.
5명의 무원(舞員)이 5위방에 따른 청(東)·홍(南)·황(중앙)·백(西)·흑(北)색의 옷을 각각 입고 처용의 탈을 쓴 다음 한 사람씩 무대에 나가 한 줄로 선채 (처용가)를 일제히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선 자리에서 5명이 두팔을 올렸다 내리고 서로 등져서 선다. 발돋움 춤으로 3보 전진하고 4방으로 흩어져 서로 등을 지고 추는 상배무 ,왼쪽으로 돌며 추는 회무(回舞)를 마친 뒤 중무(中舞)가 4방의 무원(舞員)과 개별적으로 대무하는 오방수양수무(五方垂揚手舞)를 추며 이 춤이 처용무의 절정을 이룬다. 이어 일렬로 북향하고 봉황음(鳳凰吟)을 제창한 다음 잔도들이 곡조에 따라 낙화유수무(落花流水舞)를 추면서 한 사람씩 차례대로 오른 쪽으로 돌아 퇴장한다.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에서 비롯된 가면무. ≪진작의궤≫에 실린 처용무 모습.
출처 이미지 사이즈 517x800 한국학중앙연구원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고려사』 악지(樂志)에는 처용무가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사』 충혜왕조와 신우조(辛禑條)에는 처용희(處容戱)를 즐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에는 처용무는 원래 흑포사모(黑布紗帽)하고 한 사람이 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면,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구성된 시기는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12월 회일(晦日) 하루 전날 궁중에서 나례(儺禮: 잡귀를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를 행한 뒤에 전도(前度)와 후도(後度) 두 차례에 걸쳐 처용무를 추었다.
전도에서는 오방처용무만 추고, 후도에서는 역시 오방처용무를 추되, 요신극환(搖身極歡)이라는 설명에서 보듯이 전도처용무와는 다른 점이 있다.
즉, 전도처용무는 구나(驅儺: 악귀로 분장한 사람을 쫓아내는 의식) 뒤에 오는 의식적인 춤이고, 후도처용무에 이어 「학무(鶴舞)」·「연화대(蓮花臺)」 정재를 연출한 다음, 미타찬(彌陀讚)·본사찬(本師讚)·관음찬(觀音讚) 등 불가(佛歌)를 화창(和唱)하게 되는데, 이는 다분히 오락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고 하겠다.
조선 말기의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따르면, 성종 때에 연출되던 그 후도처용무의 잔영(殘影)으로 미타찬 이하 불가가 끼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현재는 불가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게 되어 있다. 또, 『악학궤범』의 처용무에서는 처용만기(處容慢機: 鳳凰吟一機)에 의한 「처용가」, 봉황음중기(鳳凰吟中機)에 의한 「봉황음가(鳳凰吟歌)」(山河千里國詞), 삼진작(三眞勺)에 의한 「정과정(鄭瓜亭)」, 북전 급기(北殿急機)에 의한 「북전의 노래」(山河千里壯詞)를 각각 노래하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면 춤추며 노래부르던 원래의 「처용가」중에서 그 첫 부분인 “신라성대(新羅聖代) 소성대(昭盛代) 천하태평(天下太平) 나후덕(羅候德) 처용 아바 이시인생(以是人生)에 상불어(相不語)하시란대”를 가곡(歌曲) 중 언락(言樂) 가락에 얹어 부르고, 그 다음은 세종 때 개작한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가기울총총(佳氣鬱葱葱)하샷다/금전구중(金殿九重)에/명일월(明日月)하시니/군신천재(群臣千載)에/회운룡(會雲龍)이샷다”로 시작되는 원래의 봉황음중기의 가사를 가곡 중 편(編) 곡조에 얹어 부른다.
처용탈은 저포(苧布) 혹은 칠포(漆布)로 껍질을 만들고 채색은 적면유광(赤面油光)으로 「처용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덕(有德)한 모습으로 만들어지며, 탈에 씌운 사모는 대[竹]로 망을 얽어 종이를 발라 만들고 모란꽃을 그린다. 두 귀에는 주석고리와 납주(鑞珠)를 걸고 복숭아열매와 가지를 단다.
복식을 보면, 옷은 오방의 방위 빛깔에 따라서 동쪽의 청, 중앙의 황, 남쪽의 홍, 서쪽의 백, 북쪽의 흑으로 구분하고, 앞과 뒤 그리고 소매에는 만화(蔓花)를 그린다. 천의(天衣)는 녹단(綠段)에 만화를 그리고, 안은 오방이 모두 홍주(紅紬)를 쓴다. 길경(吉慶)은 겉과 안 모두 홍초(紅綃)를 쓴다. 상(裳)은 황초(黃綃)를 쓴다. 군(裙)은 동과 북은 홍단(紅段), 서와 남은 흑단(黑段), 중앙은 남단(藍段)을 쓴다.
한삼(汗衫)은 오방이 모두 백초(白綃)를 쓴다. 대(帶)는 홍정(紅鞓)을 쓴다. 혜(鞋)는 오방이 모두 백피(白皮)로 만들고 끈을 단다. 처용무는 일명 오방처용무라고도 이르며, 오방을 상징하는 동·남·중앙·서·북의 다섯 처용의 군무(群舞)이다.
춤은 처음에 처용 5인이 두 팔을 허리에 붙이고 청·홍·황·흑·백의 차례로 「수제천(壽齊天)」(빗가락 정읍)을 아뢴 다음 들어와 좌로 돌아 북향한다. 처용 5인이 모두 두 소매를 들었다가 다시 어깨 위에 걸쳐놓고 허리를 구부려 마주 본다(무릎디피춤).
다시 발을 들고 소매를 들어 안으로 낀다(도돔춤). 그 다음 내디디며(발바딧춤) 중앙에서 북향한다. 각기 무진무퇴(舞進舞退)하여 각 방향에 선다(발바딧작대무).
다시 무릎디피춤을 추고 5인이 가지런히 선 다음 무퇴하여 북향하고 노래를 한다. 끝날 때에는 4분의 6박자 한 장단인 잔도들이[細還入]의 반주와 그 장단에 따라 낙화유수(落花流水)의 춤사위, 즉 두 팔을 양쪽 어깨로 들었다가 뿌리는 동작을 하면서 한 사람씩 퇴장한다.
처용무는 1971년 1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 예능보유자로는 김용(金龍)·김중섭(金重燮)이 있다.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궁중정재 처용무
게시일: 2012. 10. 28.
창경궁 연경당 풍류음악을 그리다. 중
게시일: 2014. 10. 6.
1972 | 기능보유자 : 봉해룡, 김기수, 김태섭, 김천흥, 김룡
[악사] 집박 : 김성진 | 피리 : 정재국, 홍성인 | 대금 : 이상규 | 해금 : 조운조 | 장고 : 김중섭 | 좌고 : 정창영
처용무는 전래된 경로와 발생된 연유가 비교적 정확성을 지니고 있는 계통이 확실한 춤이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궁중무 중
Cheoyongmu [Dance of Cheoyong]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No.39)
1972 | Master: Hae-Ryong BONG, Gi-Soo KIM, Tae-Seop KIM, Cheon-Heung KIM, Ryong KIM
[Musician] Jip-bak : Seong-Jin KIM | Pipe : Jae-Gook JEONG, Seong-In HONG | Daegeum : Sang-Gyoo LEE | Haegeum : Jo-Woon JO | Hourglass-shaped drum : Joong-Seop KIM | Jha-go : Chang-Yeong JEONG
Cheoyongmu is the dance to have clear chain and route how it has handled down. Cheoyongmu is the most outstanding
게시일: 2015. 10. 14
오늘날 전승되는 처용무는 5명의 무용수가 각각 동,서, 남, 북, 중앙의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옷을 입고 춤을 춘다.
This is a contemporary reconstruction of Cheoyongmu.
03. 처용무(Cheoyongmu)
○ 지도/윤재호, 무용/윤재호·최병재·김태훈·박성호·김영신
○ 집박/황규상, 피리/윤형욱·김철, 대금/이결·이종범, 해금/사현욱·한갑수, 장구/홍석복, 좌고/안성일, 창사/이정규·홍창남
04. 오우의 춤(Ou-ui dance)
○ 안무/한명옥, 무용/안덕기·김청우·정현도·김진우(준단원)·김서량 choreographed by Han Myung-ok
○ 주최 및 촬영/국립국악원[National Gugak Center]
*처용가
동경 밝은 달에 새도록 노닐다가 들어 내 자리를 보니 갈래가 넷이로구나 아으 둘은 내 해이거니와 둘은 뉘 해이뇨 이런 적에 처용아비 곧 보시면 열병신이야 홧갓 이로다 천금을 주랴 처용아비야 칠보를 주랴 처용아비야 천금 칠보도 말고 열병신을 날 잡아 주소서 산이요 들이요 천리외에 처용아비를 비켜가고자 아으 열병대신 발원이시도다.
*무애무(無㝵舞)
문무왕 때 고승 원효대사(617-686)에 의하여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구부러진 호로를 어루만지면서 시중에서 가무 하였다는 설과 인도 즉 서역(西域)에서 사무 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이것은 불교와 관계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무애란 거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원효가 여러 촌을 돌며 교화 하였다는 것을 보면 무애가무 자체가 불교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고려조로 전승된 무애무는 불도(佛道)의 교화에서 벗어나 오락화 되어 여기의 향악재로 변천되어 기생이나 무동(舞童)들이 각각 호로를 하나는 오른손에 다른 하나는 왼손에 쥐고 대무(隊舞)하면서 무작(舞作)을 짓는데 뒤에선 사람은 주악(奏樂)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것은 신라의 민간 예술이 원효에 의해 불교화 되었다가 고려때 다시 향악으로 개작되어 향악정재로 상연된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다용불가어(多用佛家語)라는 것을 보아도 어디까지나 불교적인 색채는 어느 정도 띤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애무의 유래에 관한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보이는 것이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의하면,
고 했다. 무애무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 중에 '농대과(弄大瓠)'라 하는 것을 가면극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려 명종 때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하권에는 무애가 가면이 아니라 호로(葫蘆:호리병박)였음을 말하고, 원효가 만든 무애박과는 달리 호리병박 상부에 금방울을 달고 밑에는 여러 가지 색의 헝겊을 달아, 이것을 흔들면 방울소리가 나고 채백(彩帛)이 휘날려, 연무(演舞)의 흥을 돋구어 주는 일종의 무용구였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 원효가 무애무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편력하며 불교를 포교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원효의 무애가무는 불교적인 내용임이 분명하며, <고려사>와 <악학궤범>에도 연무(演舞)의 설명 끝에 무애가가 불가어(佛家語)를 많이 썼음을 부기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로 접어들면서 불교 교화의 취지에서 벗어나 오락화되어 여기(女妓)의 향악무로 변화하였고, 호리병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금방울과 채백(彩帛)으로 장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의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궁중무용의(宮中舞踊) 하나이다. 조선 순조 때 창작된 향막무로 원무 (元舞) 4명 집당 (執幢) 2명으로 구성된다. 먼저 음악이 연주되면 악사가 무동 (舞童) 에게 윤대 (輪臺) 를 돌려 전내 (殿內) 에 놓고 나오게한다. 이어 박 (拍) 의 신호에 따라 원무4명 은 보등 (寶燈) 을 들고 윤대의 둘레에 벌여 서고 집당2명은 운대의 동서로 각각 자리하여 춤춘다.
조선시대 순조 연간에 창작된 향악정재의 하나. ≪진작의궤≫에 전한다.
조선시대 순조 연간에 창작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하나. 사면(四面)에 오르내리는 계단을 설치하고, 화려한 조각에 붉은 칠을 한 난간이 있는 윤대(輪臺)를 만들어놓고 그 위에서 추는 춤이다. 4명의 무원(舞員)은 보등(寶燈)을 들고, 그 중 3명은 앞에서, 1명은 뒤에서 서로 돌며 춤추고, 2명의 집당기(執幢妓)는 윤대 뒤쪽에 좌우로 벌려 서서 춤을 춘다.
정재의 시작과 끝에 부르는 선구호(先口號)와 퇴구호(退口號)는 집당기가 부르고, 창사(唱詞)는 보등을 든 사람이 부른다. 사륙체(四六體)로 된 이 구호와 창사는 ≪순조무자진작의궤 純祖戊子進爵儀軌≫(1828) 부편(附編)과 ≪국연정재창사초록 國讌呈才唱詞抄錄≫에 전한다.
≪순조기축진찬의궤 純祖己丑進饌儀軌≫(1829)에 의하면, 무동(舞童)의 복식은 주취금관(珠翠金冠)에 자라포(紫羅袍)·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縇中單衣)·남질홍선상(藍質紅縇裳)을 입고, 남사대(藍絲帶)를 띤다. 그 위에 백우호령(白羽護領)·백우엄요(白羽掩腰)를 하고 학정대(鶴頂帶)를 띠고 비두리(飛頭履)를 신는다. 이 춤의 무보(舞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사자무(獅子舞)
사자의 탈을 쓰고 행하는 놀이의 춤이다. 악귀를 쫓고 복을 맞아들이는 놀이로 동양 여러 나라에서 민속화 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신라 초기에 당나라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이며 5세기경 신라의 우륵 (于勒) 이 엮은 (가야금12곡)중에는 이미 사자기 (獅子伎) 가 들어 있어 처음에는 기악 향악잡영 (鄕樂雜詠) 에도 사자무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 성행하게 된 사자무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중요한 민속 무용으로 되었으니 즉 신사예능 (神事藝能) 인 가구라 (神樂) 무용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우리 나라의 사자무는 조선 말기에 궁중무용으로 채택될 만큼 널리 성행되어 왔으며 북청(北靑)사자놀이·봉산 (鳳山) 탈춤 · 영남오광대 (嶺南五廣大) · 하회 (河回) 별신굿 등의 가면극에서 안무되고 있다. 사자무는 대게 두사람 또는 세 사람이 들어가서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때로는 한 명이 하는 사자 놀음도 있다. 또 청사자·황사자 등 두 마리의 사자가 출연하기도 하며 그 역할과 행동도 지방에 따라 다르다.
사자무(獅子舞)는 본래 성천(成川) 지방의 잡극(雜劇)인데, 1887년(고종 24)에 비로소 궁중에 들여와 쓰게 되었다고 한다. 사자무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 중 등장하는 산예 시로 소급해 갈 수 있는데, 이 시에서는 사자무를 읊었다. 또한 우륵(于勒)의 12곡 중에도 사자기(獅子伎)의 이름이 보이는 점으로 사자무는 이미 삼국 시대에 서역(西域)에서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내용
1901년(신축) '여령 각정재무도홀기'에 기록된 사자무 정재의 진행순서는 아래와 같다. 음악은 보살만(菩薩慢: 영산회상)을 연주한다. 사자 1쌍이 악절에 따라 몸을 흔들고 족도하여 나아가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북쪽을 향하여 엎드린다. 머리를 들어 잎으로 땅을 부딪치고, 눈을 부릅뜨고 눈알을 돌리고, 일어나서 악절에 맞추어 꼬리를 휘두르고 족도하며 좌우를 돌아본다. 또 악절을 맞추어 입을 열어 이빨을 딱딱 치며 앞으로 나왔다 뒤로 물러났다 하며 크게 돌며 즐겁게 춤추다 물러난다. 음악이 그친다.
연계정보
· 관련도서< 정재무도홀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여령정재홀기>, 인남순·김종수 공역, 민속원, 2001< 한국무용개론>, 장사훈, 대광문화사, 1992
cafe.daum.net/performancegirl/Emwb/5 춤 춰야 사는여자 [WID]
중요무형문화제 제17호 봉산탈춤1
게시일: 2015. 5. 31.
2016 봉산탈춤 보존전승회 봄 정기공연
게시일: 2016. 6. 11.
일시 2016년 6월 11일 (토) 오후 3시~5시
장소 소월아트홀 대공연장
주최 성동구
주관 성동문화재단 (사)한국가면극연구회 봉산탈춤보존전승회 CIOFF한국본부
사자탈춤
게시일: 2013. 2. 21.
작년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달맞이 정월대보름 행사가 있었는데
게시일: 2013.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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