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을 위해 스스로 눈을 찌른 화가......최북

2017. 4. 29. 03:58美學 이야기



       최북의 그림| 기타자료

솔거 | 조회 24 |추천 0 | 2004.06.18.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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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을 위해 스스로 눈을 찌른 화가..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도 스스로 귀를 잘라버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안다.
그러나 그 보다 약 백 몇십년 앞선 시대의 스스로 눈을 찔러버린 우리나라의 화가 최 북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최 북(18세기)은 조선조 영조 때의 화가다.
산수를 잘 그렸다고 하여 최산수(崔山水)라고 불리었고 호는 붓 한 자루에만 의지해 먹고살겠다는 호생관(毫生館)이었다.
그는 이름인 북(北)자를 둘로 쪼개 칠칠(七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칠칠이는 못난이, 바보를 일컫는 속어이다.
그는 아무 곳에도 매인 데가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그리고 싶지 않으면 죽어도 그리지 않았다.
화가에게 눈은 목숨과 같이 귀중한 것일 진데, 그는 스스로 눈을 찔러가면서도
기성의 권위와 강요에 굴하지 않는 기질을 보여주었다.
고흐가 자기 내면의 감정으로 귀를 잘랐다면 최 북이 눈을 찌른 것은
외적 권위와 강요에 대한 대항이었다. 


   한 세도가가 그에게 그림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북은 그려주지 않았고
여러번 강요해도 끝까지 응하지 않자 세도가는 강압적으로 신체적인 위협을 하려 들었다.
이에 최북이 불같이 화를 내며
“남이 나를 강압해 해를 입히지는 못한다. 차라리 내가 나를 위해하마”라며 스스로 한쪽 눈을 찔러 버렸다.
그는 술을 마시며 전국을 주유했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구룡연(九龍淵)에 이르러 그 경치에 탄성을 터트리다가
“천하의 명인이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못 속에 뛰어 들기도 했다.
최 북은 전국 명승지에서 노닐며 경치에 취하고 술에 취했고 인정에 취했고 자기예술에 도취되어 숱한 명품을 남겼다.
그는 욕심이 없으면서도 광기의 기질이 있었다.
예술가는 당당한 자유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표훈사도(表訓寺圖)



금   강산의 표훈사와 그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내듯 뚜렷하게 넓은 폭으로 전개하여 묘사한 작품이다.
일종의 평원산수법(平遠山水法)에 의해 내산과 외산을 거의 동일선상에서 묘사하고 있어,
이것은 마치 산으로 들어갈수록 멀리 있는 높은 산들이 오히려 낮게 보이는 시각의 착각 현상을 그대로 나타낸 작품이다.
족자 종이에 수묵 담채 38.5*57.5cm 한국 개인 소장



서치홍포



맹우도(猛牛圖)


   힘차게 고개를 위로 쳐들고 물을 건너는 황소와 그 위에 채찍을 두 손으로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몸을 꾸부린 목동으로 전체를 채운 간결한 구도의 그림이다.
물결의 무늬나 짐승의 털을 그리는데 있어 사실적 기법의 의도가 보이나
소털 하나하나의 올을 매우 굵게 그려 사실감이 많이 감소된 결과를 가져왔다.
이 그림은 소의 힘찬 운동감이나, 두 눈 사이가 아주 멀어서 대단히 해학적(諧謔的)으로 보이는
목동의 얼굴 등 매우 재미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종이에 채색 24.2*32.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옥산수(草屋山水)


   이 그림은 가운데 접힌 흔적으로 보아 화첩의 한 장이었을 듯 비교적 작은 산수화이다.
그림 왼쪽 위에는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라는 제(題)가 있어,
그 구절대로 공산(空山)의 텅빈 초옥(草屋)이 보이고 그 옆에 선 두 그루의 나무가 근경을 채우고 있다.
그림 가운데 얕은 산봉우리가 보일락 말락 엷은 먹으로 그려져 있고,
왼쪽으로는 약간 강한 묵점으로 숲이 울창한 계곡이 암시되었다.
나무 가지들도 실제의 모습과는 아랑곳없다는 듯 제멋대로 뻗었다.
일반적 화법을 무시한 이 모든 점이 작가의 기이한 성격과 높은 예술적 감각을 잘 나타내 준다.
종이에 수묵 담채 31.*36.1cm 서울 개인 소장





조어산수(釣魚山水)


   최북은 여러 분야의 소재에 두루 능하였으며 전래된 작품도 적지 않다.
비교적 섬세하게 그린 실경산수는 당시의 화풍을 대변하며,
사의적(寫意的)인 산수는 활달한 필치로 두드러진 개성이 보인다.
조어산수는 광생(狂生)이라고도 불리었던 최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듯 대담하고
거친 필치, 빠른 속도로 그린 간일한 구성, 담청 황색의 대조적인 설채(設彩) 등
중국에 있어서도 양주팔괴(揚州八怪)에 비견되는 그림이다.
화원임에도 불구하고 문인화에 방불한 격조와 의취가 담긴 수작(秀作)을 남긴 최북은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인(藝人)의 긍지를 지니고 그림에 임했던
조선시대에 흔치 않은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족자 종이에 담채 66.3*42.9cm 서울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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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반 고흐 최북의 작품세계| ▦▶*포토 갤러리

남 사랑 | 조회 147 |추천 0 | 2016.08.14. 14:48



조선의 반 고흐,
최북(1720 ~ 1786? )의 작품세계



             


 



최북
본관은 무주(茂朱).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

칠칠(七七), 호는 월성(月城)·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基齋)

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이다.

그는 떠돌이 개처럼 살다가 49세의 나이로 눈오는 날 거리에서 동사(凍死)했다고만 전해져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통해 볼 때 대략 1720년(숙종 46년)에 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1747년(영조 23년)에서 1748년 사이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점철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에 관해서 남공철의 <금릉집>과
조희룡의 <호산외사> 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금강산의 구룡연(九龍淵)을 구경하고 즐거움에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울다 웃다 하면서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외치고는
투신하였던 일이라든가, 어떤 귀인이 그에게 그림을 요청하였다가 얻지 못하여 협박하려하자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고 하며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해
버린 이야기 등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단적으로 알려 주는 대표적인 일화라 하겠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광생(狂生)이라고까지 지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평양이나 동래 등지로 그림을 팔러 가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구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서상기(西廂記)」와 「수호전」을 즐겨 읽었으며,
김홍도(金弘道)·이인문(李寅文)·김득신(金得臣)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호산외사』에 의하면 원말 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의
필법을 존중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별칭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자기 이름인 '북(北)'자를 둘 쪼개서(七七) 스스로를 '칠칠이'라고 했다.
호생관(毫生館)도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이 지었다.
또한 메추라기를 잘 그려서 '최메추라기',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로도 불렸다.
그는 늘 5~6되씩 술을 마셨다. 집안의 책과 종이 천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털어서
술과 바꾸었다. 그림 한 폭을 팔면 열흘 동안 오로지 술병을 끼고 살았다.

박제가는 최북의 무모한 음주벽을 무자식에서 찾았다. 자식이 없어서 삶을 목적을 잃었기 때문에
술을 탐닉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그의 서울 생활을 묘사한 한 시에는 그림을 그려서 근근이 먹고사는 그의 초상이 선명하다.
"한양에서 그림 파는 최북/오막살이 신세에 네 벽 모두 텅 비었네./유리안경과 나무필통
옆에 두고/하루종일 문 닫고 산수화 그려/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끼니 때우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끼니
때우네."(신광수) 애꾸눈에 키가 몹시 작고 몸집이 왜소했던 최북은 성격이 까칠한 편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 교유하며 살았지만 취기가 오르면 안하무인격으로 욕지기를 해대고 술주정을 부렸다.
감정이 격하고 성질이 괴팍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놀렸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술로 벼리어진 자존심과 넘치는 풍류의식으로, 평생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에는 인물·화조·초충 등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이 산수화이다.
그의 괴팍한 기질대로 대체로 치기(稚氣)가 있는 듯하면서 소박하고 시정(詩情) 어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그의 산수화들은 크게 진경산수화와 남종화 계통의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진경산수화에서는 「표훈사도(表訓寺圖)」에 보이는 바와 같이 겸재 정선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것도 있다.
진경산수에 대하여 최북은 “무릇 사람의 풍속도 중국 사람들의 풍속이 다르고 조선사람들의 풍속이 다른 것처럼,
산수의 형세도 중국과 조선이 서로 다른데, 사람들은 모두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좋아하고
숭상하면서 조선의 산수를 그린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고까지 이야기하지만 조선 사람은
마땅히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고 그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 바 있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의 「한강조어도(漢江釣魚圖)」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추경산수도 (秋景山水圖)」등을
대표작으로 하는 그의 남종화 계열의 작품에서는 심사정(沈師正) 등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엿보이기도 한다.
최북은 18세기의 '얼리 어답터'(새 문명을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였다.
서양의 정물화처럼 붉은 무와 가지, 배추를 즐겨 그렸는데 이는 청나라 화단의 유행을 소화한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먹을 찍어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도 앞장서서 실험했다.

이러한 화풍을 계승, 변천시키면서 개인 소장의 「조어도(釣魚圖)」와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에
보이는 바와 같이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자신의 조형양식을 이룩하여 조선 후기 회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이밖에 대표작으로 개인 소장의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와 간송미술관 소장의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등이 있다.

최북은 각별한 사이였던 벗 이현환(李玄煥)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엔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드무네.
참으로 그대 말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을 그린 나를 떠올릴 수 있으리.
뒷날 날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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