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로사〔六老辭〕 - 허백당 성현 外

2017. 5. 2. 16:02


   ‘악학궤범’을 편찬한 조선초기 문관이자 음악학자인 허백당(虛白堂) 성현은 조선초기 큰 권세를 누렸던 창녕 ‘성’씨의 후손으로 아버지와 두 형 모두 고위 관직을 지냈다.

   1493년 성종의 명을 받아 쓴 악학궤범은 조선시대 궁중음악의 전승을 가능하게 해 준 책으로, 음악 이론과 쓰임새, 악기의 구조와 연주법, 궁중무용의 종류와 절차 등을 그림과 곁들인 종합적인 악서(樂書)이다. 특히 그는 연주법을 기록할 수 있는 ‘합자보’(국악의 옛 악보)를 창안해 현금합자보를 간행하기도 했다. 성현은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현재 대학 총장),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다.




       육로사〔六老辭〕 -허백당 성현| 명문집성 사(辭 詞)

낙민 | 조회 35 |추천 0 | 2016.02.01. 04:18
  


육로사〔六老辭〕



늙은 선비〔老儒〕

 

나는 내가 고인에게 못 미침을 슬퍼하여 / 余悲不及古之人兮
평생토록 쉬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했네 / 恒兀兀以窮年
성인의 교훈에만 마음을 쓰고 / 非聖訓爲無所用其心兮
성인의 글을 통해 뜻을 기르니 / 頤情志於簡編
등불 켜고 밤늦도록 독서하였고 / 焚蘭膏而繼晷兮
거문고에 의지하여 밤을 지샜네 / 據枯梧而不眠
품은 뜻이 오로지 여기에 있어 / 志專專其靡他兮
선현들과 벗 삼기를 기대했으니 / 冀尙友乎前賢
순 임금의 조정에서 문치 도우며 / 黼黻虞朝之文治兮
고기와 주선하길 기약하였네 / 與皐夔以周旋
과장(科場)에 나아가서 수염을 뽑고 / 擬摘髭乎科第兮
향기로운 선계를 쥐려 했으나 / 攬仙桂之芳鮮
궁문에서 문지기가 나를 떠밀어 / 閽者倚閶闔而排余兮
비틀대며 나아가지 못하게 되니 / 竟蹭蹬而莫前
두 눈이 침침하여 우물에 떨어지고 / 玄花黯以落井兮
희끗희끗 센 머리는 쓸쓸하게 나부끼네 / 素髮颯以飄顚
남들은 다 푹신한 모피 옷을 입었는데 / 人皆狐狢之蒙茸兮
나만 홀로 누더기에 신발은 헤어졌고 / 余獨鶉結而履穿
늘어선 저택에선 만종의 녹 받건만 / 紛紛甲第之萬鍾兮
나만 양식 떨어지고 돈도 한 푼 없으니 / 余獨囊竭而無錢
까마귀와 개미떼를 염려할 게 뭐라든가 / 烏鳶螻蟻之不足慮兮
구학에 버려져서 뒹구는 걸 감내하리
/ 甘丘壑之棄捐
영원히 휘장 치고 두문불출 들어앉아 / 長下帷而不出兮
누항에서 마음 편히 한 몸을 보존할 터 / 保陋巷而怡然
유관이 몸 망침을 일찌감치 알았으니 / 早知儒冠之誤身兮
차라리 괭이 들고 힘껏 농사지으려네 / 寧抱耒而力田
내 분수를 헤아려서 스스로를 지킨다면 / 揣吾分而自守兮
누가 나를 허물하고 누가 나를 책잡으랴 / 又誰咎而誰愆
무당에게 묻고 말고 할 것이 뭐라던가 / 巫咸不可問兮
내 장차 길흉을 하늘에다 맡기련다 / 吾將任吉凶於蒼天

 

[주C-001]육로사(六老辭) : 늙은 선비〔老儒〕, 늙은 장수〔老將〕, 늙은 하급 관리〔老宦〕, 늙은 상인〔老商〕, 늙은 기녀〔老妓〕, 늙은 말〔老馬〕의 여섯 가지 소주제로 구성된 작품이다. 앞의 〈비조사(悲弔辭)〉처럼 각 편 뒤에 해당 소주제가 원주(原註) 형식으로 붙어 있는데, 편의를 위해서 원주를 앞으로 옮겨서 소제목(小題目)으로 처리하였다.

[주D-001]黼黻 : 대본에는 ‘黻蔽’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02]고기(皐夔) : 순(舜) 임금의 신하인 고요(皐陶)와 기(夔)로, 현신(賢臣)을 지칭한다.
[주D-003]과장(科場)에 …… 뽑고 : 한유(韓愈)의 〈기최이십육입지(寄崔二十六立之)〉 시에 “해마다 과거에 급제하기를, 턱 밑의 수염을 뽑듯이 하네.〔連年收科第 若摘頷底髭〕”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아주 쉽게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뜻이다.
[주D-004]향기로운 …… 했으나 : 선계(仙桂)는 과거 급제를 뜻한다. 진(晉)나라 극선(郤詵)이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급제한 것을 두고 “계림의 나뭇가지 하나를 꺾고 곤산의 옥돌 조각을 손에 쥔 것과 같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주D-005]두 눈이 …… 떨어지고 : 두보(杜甫)가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 시에서 하지장(賀知章)을 두고 “지장의 말 탄 모습 배를 탄 듯 흔들흔들, 눈이 어른거려 우물에 빠져 자기도 하였지.〔知章騎馬似乘船 眼花落井水底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곤궁한 삶에 시달려 꾀죄죄해진 행색을 형용한 것이다.
[주D-006]까마귀와 …… 감내하리 : 죽은 뒤에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언덕과 골짜기에 시신이 버려져서 까마귀와 개미 떼의 밥이 될 만큼 곤궁한 처지가 되었다는 말이다.




늙은 장수〔老將〕

 

가을바람 일어나고 흰 눈이 풀풀 날면 / 秋風起兮白雲飛
변방에 풀 시들고 오랑캐 말 살 오르니 / 塞草荒兮胡馬肥
천교(天驕)가 방자하게 사막을 건너오면 / 驕憑陵兮超沙漠
장군이 창을 쥐고 보란 듯이 휘두르네 / 將軍唾掌兮金戈揮
수레에는 창칼 싣고 / 車載兮短兵
몸에는 갑옷 입고 / 躬擐兮鐵衣
좌우에 명을 내려 진격시키고 / 令左右而驅進兮
한 화살로 겹겹의 포위 뚫었네 / 一箭穿乎重圍
현왕과 곡려의 귀를 베다가 / 䤋賢王與谷蠡兮
황궐에서 승전가를 연주했으니 / 奏凱獻于彤闈
주렁주렁 찬 인장에 늘어진 인끈 / 印累累而綬若若兮
모두들 나의 영광 부러워했지 / 衆皆慕余之光輝
어찌하여 시운이 어그러져서 / 何時運之舛錯兮
위기를 모면하지 못함으로써 / 未免蹈夫危機
공중을 휙휙 나는 빠른 준마를 / 使騰空之逸足兮
노새와 함께 고삐 매이게 했나 / 共轅駒而馽鞿
용감하게 성 위의 모호기 뺏어 / 旣不能拔城上之蝥弧兮
선봉에서 위엄을 과시 못했고 / 先三軍而發威
연연산에 올라 돌에 공적을 새겨 / 又不能登燕然而勒石兮
크나큰 덕 기리지도 못하였어라 / 頌盛德之巍巍
말에 올라 정정함을 과시하려도 / 欲據鞍而鑠兮
마음과 일이 서로 어그러지며 / 心與事其相違
허벅지에 투실투실 살이 붙으니 / 脾生肉而不消兮
내 처음 계획과는 크게 다르네 / 顧初心而自非
내 어찌 나라 위해 희생했던가 / 吾豈不惜夫軀命兮
낮고 천한 지위가 애통하구나 / 痛名位之卑微
남들은 대장 되어 지휘하는데 / 人皆擁旄而制閫兮
나만 홀로 이 운명을 괴로워하니 / 吾獨困乎此欷命也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바에야 / 吾末如之何兮
세상 사람 조롱하게 버려둘 밖에 / 吾將任世人之嘲譏

 

 [주D-007]천교(天驕) : 한(漢)나라 때 흉노족이 스스로를 천지교자(天之驕子)라고 불렀던 데서 나온 말인데, 이후 강성한 변방 오랑캐를 지칭하게 되었다.
 [주D-008]현왕(賢王)과 곡려(谷蠡) : 흉노의 최고위층을 지칭한다. 현왕은 흉노의 귀족 봉호이고, 곡려는 곡려왕(谷蠡王)으로 흉노의 고위 관명(官名)이다.

 [주D-009]용감하게 …… 뺏어 : 전쟁에 출전하여 선봉에서 용감하게 적을 무찌른다는 뜻이다. 모호(蝥弧)는 춘추 시대 정(鄭)나라 임금의 군기(軍旗) 이름이다.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제(齊)나라ㆍ정나라와 연합하여 허(許)나라를 칠 때, 영고숙(潁考叔)이 정백(鄭伯)의 깃발 모호를 가지고 허나라의 성(城)에 맨 먼저 올랐는데, 자도(子都)가 밑에서 그를 쏘아 떨어뜨려 죽였다. 이에 하숙영(瑕叔盈)이 다시 모호를 가지고 성으로 올라가서 휘두르며 군사들을 독려하자 정나라 군사들이 모두 성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隱公11年》
 [주D-010]연연산(燕然山)에 …… 새겨 : 후한 화제(後漢和帝) 때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출병하여 흉노를 크게 격파한 뒤에 오늘날 몽고의 애항산(愛杭山)인 연연산(燕然山)에 올라가 비석을 세워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 그 비문(碑文)은 반고(班固)가 천자의 명을 받고 지은 〈연연산명(燕然山銘)〉으로, 한(漢)나라의 위력과 공덕을 선양한 내용이다. 《後漢書 卷23 竇憲列傳》 역시 전쟁에서 큰 공적을 세우고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주D-011]말에 …… 과시하려도 : 후한(後漢)의 명장(名將) 마원(馬援)이 62세의 노령(老齡)으로 다시 전쟁에 나가려고 하였으나 황제가 윤허하지 않자, 일부러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고 노익장을 과시하니, 황제가 “강건하고 씩씩하도다, 이 늙은이여!〔矍鑠哉 是翁也〕”라고 찬탄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주D-012] : 대본에는 ‘鑊’으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13]허벅지에 …… 붙으니 : 전장에 나가 싸울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 말이다. 촉한(蜀漢)의 선주(先主) 유비(劉備)가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한번은 변소에 갔다가 자신의 허벅지에 살이 오른 것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유표가 그 까닭을 묻자 “나는 늘 말을 탔기 때문에 허벅지에 살이 붙을 틈이 없었는데, 지금은 말을 타지 않다 보니 허벅지에 살이 붙었습니다. 세월은 빨리도 흘러 이제 곧 늙을 터인데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三國志 卷32 蜀書 先主傳》



늙은 하급 관리〔老宦〕

 

높디높은 궁궐 문이 활짝 열리고 / 天門高兮洞開
청운이 향기로운 티끌 감싸니 / 靑雲擁兮芳塵
붉은 옷의 고관들이 분주하게 줄을 이어 / 朱紫雜遝而後先兮
휘황찬란한 자태를 요로에서 과시하네 / 爛誇詡乎要津
길옆에 선 사람들은 부산하게 절 올리고 / 路傍拜揖之紛紜兮
빈객과 수종원은 수레 호위하였는데 / 賓從翼乎朱輪
사람들 다 달려 나와 비굴하게 청탁하니 / 人皆競進而求索兮
명성의 드러남이 나날이 더 새롭구나 / 名聲著而日新
나는 어찌 이렇게도 운명이 기구하여 / 何余生之菲薄兮
시운이 지독하게 나쁜 때에 태어났나 / 遭時命之孔屯
윤달 만난 황양목(黃楊木)이 줄어드는 것과 같고 / 黃楊厄閏而漸退兮
길바닥에 괸 물에서 죽어 가는 붕어 같네 / 涸鮒守轍而摧鱗
옛날에 〈간혜〉에선 영관이 되어 / 昔簡兮之仕伶兮
서방의 미인을 생각하였고
/ 思西方之美人
풍당은 낭서에서 노년을 보내 / 馮唐老於郞署兮
흰머리로 곤궁함을 슬퍼했으며
/ 窮白首而傷神
급장유는 충직한 신하였지만 / 汲長孺之忠讜兮
적신에 마음 상해 탄식하였고
/ 猶感歎乎積薪
두소릉은 뛰어난 인재였으나 / 杜少陵之俊才兮
수레 없어 걷느라고 고생했으니
/ 猶徒步而艱辛
선철들도 간혹 이와 같았을진대 / 先哲尙或如此兮
나처럼 지지리도 불운한 자랴 / 況我坎壈之纏身
임금님께 부르짖어 아뢰려 해도 / 進呼籲而欲白兮
침묵하고 나를 친히 하지 않으니 / 上默默而莫余親
공명은 나와 서로 어그러지고 / 功名不侔乎枘鑿兮
대궐 문은 수만리나 되는 듯하네 / 君門邈阻乎越秦
무엇하나 뜻한 대로 되지 않으니 / 百所思而不遂兮
누가 나의 충성을 기억해 주랴 / 誰記余之忠純
풀 한 포기 궁벽한 벼랑에 돋아 / 孤草托根乎窮崖兮
따사로운 봄빛 끝내 보지 못하네 / 使終不得見乎陽春


[주D-014]청운(靑雲)이 …… 감싸니 : 청운은 높은 벼슬아치를, 향기로운 티끌은 아름다운 명성을 가리킨다. 즉 아름다운 명성을 지닌 고관들이 대궐에 가득하다는 뜻이다.

[주D-015]윤달 …… 같고 : 황양목(黃楊木)은 회양목이다. 회양목은 1년에 1치 밖에 자라지 않는데, 윤년을 만나면 그나마도 자라지 않고 도리어 1촌이 줄어들기 때문에 지독한 곤경에 처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소식(蘇軾)의 시 〈감동소궁유강직랑중소거사영(監洞霄宮兪康直郞中所居四詠)〉에 “봄날의 동산에는 초목들이 무성한데, 회양목만 윤년 맞아 재앙을 당한다네.〔園中草木春無數 只有黃楊厄閏年〕”라고 하였다.

[주D-016]옛날에 …… 생각하였고 : 〈간혜(簡兮)〉는 《시경》 〈패풍(邶風)〉의 편명으로, 현자(賢者)가 뜻을 얻지 못하여 광대 노릇하는 것을 노래한 시이다. 그 도입부에 “거만하고 거만하게, 가지가지 도구 들고 춤을 추노라.〔簡兮簡兮 方將萬舞〕”라고 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누구를 그리워하는고, 서방의 미인이로다. 저 미인이여, 서방의 사람이로다.〔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라고 하였다.


[주D-017]풍당(馮唐)은 …… 슬퍼했으며 : 풍당은 한(漢)나라 사람이다. 문제(文帝) 때 늙은 나이로 중랑서장(中郞署長)을 지내고 뒤에 겨우 거기도위(車騎都尉)가 되었다.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으나, 이때 그는 이미 90여 세나 되어 벼슬을 할 수 없었으므로 대신 그 아들을 등용하였다. 《史記 卷102 馮唐列傳》
[주D-018]급장유(汲長孺)는 …… 탄식하였고 : 급장유는 한(漢)나라 급암(汲黯)으로, 장유는 그의 자(字)이다. 적신(積薪)은 장작더미를 쌓을 때 나중에 쌓은 장작이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처럼, 인사(人事)에서 원로(元老)보다 신진(新進)을 우대하는 것을 말한다. 급암은 황제 앞에서도 기절(氣節)을 굽히지 않고 강직하게 바른말을 서슴없이 하였기 때문에 무제(武帝)가 그를 꺼려하면서도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고 일컬었던 인물이다. 공손홍(公孫弘), 장탕(張湯) 등 급암의 후배들이 급암보다 높은 지위로 계속 승진하자, 급암이 무제에게 “폐하가 신하들을 임용하는 것을 보면 마치 장작더미를 쌓는 것 같아서, 뒤에 온 자들이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불평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주D-019]두소릉(杜少陵)은 …… 고생했으니 : 두소릉은 소릉야로(少陵野老)라는 자호(自號)를 썼던 당나라 두보(杜甫)이다. 두보의 〈도보귀행(徒步歸行)〉 시에 “청포 입은 조관 중에 가장 빈곤한 이는, 수레 없이 걸어가는 백발의 습유라네.〔靑袍朝士最困者 白頭拾遺徒步歸〕”라고 한 바 있는데, 습유는 일찍이 좌습유(左拾遺)를 지낸 적이 있는 두보 자신을 가리킨 말이다.

 



늙은 상인〔老商〕

 

가련한 장사치들 / 我哀商賈兮
이익만을 도모하여 / 惟利是謀
이익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도 / 以利易生兮
그것이 잘못인 줄 알지 못하네 / 不知其尤
이리저리 둘러보며 농단을 하고 / 登隴斷而左右望兮
솜털만 한 이익조차 따지고 들어 / 柝毫毛而貪求
집 안에 금과 옥을 쌓아 놓고서 / 家長金而積玉兮
흥청망청 재물을 마구 써 댔네 / 棄擲踰乎崇丘
꽃 만개한 아침과 달이 뜬 밤에 / 紛花朝與月夕兮
경쟁하듯 친구들과 놀이하면서 / 爭作隊而朋遊
예쁜 여인 데려다가 옆에 앉히고 / 邀佳人以狎坐兮
근심 걱정 없이 매일 술에 취했지 / 日沈酗而無憂
부가 하늘 덮는데도 만족 못하고 / 富熏天而不知足兮
골몰하여 남해 바다 궁벽한 곳을 / 汨往徂乎南海之陬
사나운 파도 넘어 출몰하면서 / 凌驚濤而出沒兮
이익이 있는 곳은 어디든 갔네 / 隨所利而移舟
이무기와 악어 떼가 목숨 넘봐도 / 付性命於蛟鰐兮
그만둘 줄 모르고 마구 취하니 / 猶攬取而不知休
하늘이 하는 짓을 좋지 않게 봐 / 天不臧其所爲兮
홀연 더는 이익 볼 수 없게 하였네 / 忽利盡於難收
근력은 여지없이 쇠약해지고 / 膂力愆而不支兮
괴롭게도 몸뚱이와 정신만 남아 / 形神苦而獨留
객지에 나와 입에 풀칠하는데 / 反餬口而旅寓兮
해진 옷이 풍상 막아 주지 못하네 / 風霜穿乎
화려했던 지난날 돌아갈 수 없으니 / 想前日繁華之不可再得兮
추구를 큰길에다 버린 것과 같구나 / 若芻狗之拋道周
옛날에는 뭘 잘해서 그런 영화 누렸으며 / 昔何功而榮歡兮
지금은 무슨 죄로 근심 품고 살아가나 / 今何罪而憂愁
예로부터 졸부 되면 갑작스레 교만해져 / 自古驟富而驟驕兮
필경에는 머리 위에 창이 났다 말을 했네 / 畢竟頭上生戈矛


[주D-020] : 대본에는 ‘敞’으로 되어 있는데, 오자로 판단되어 고쳤다.
[주D-021]추구(芻狗)를 …… 같구나 : 추구는 풀을 묶어서 개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물건인데, 제사가 끝나고 나면 바로 내버리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져서 버리는 천한 물건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과거에 누렸던 부귀영화가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늙은 기녀〔老妓〕

 

동풍 불자 온 천지에 봄이 오더니 / 東風來兮百物春
꽃이 지자 봄은 온데간데없구나 / 花已落兮春不在
동산에는 새들 날며 노래하는데 / 園禽上下兮弄新吭
무료하게 홀로 앉아 슬픔에 젖네 / 獨坐無聊兮悲且慨
내가 처음 머리를 얹던 때부터 / 自余之始加笄兮
미모가 빼어나고 교태 많았지 / 美婉孌而多態
노을빛 비단 잘라 옷을 만들고 / 翦霞絹而爲衣兮
명월주(明月珠)를 꿰어 만든 노리개 차매 / 貫明月而爲佩
사람들 모두 나의 아름다움 사모하니 / 人皆慕余之韶艶兮
어찌 그리 하늘처럼 고운 여인이었던가 / 胡然俔天之妹
아금을 연주하며 노래 부르면 / 援雅琴而發謳兮
구슬을 꿴 듯 옥을 부수는 듯해 / 恍珠聯而玉碎
너도 나도 비단 잘라 전두로 주며 / 爭割錦而纏頭兮
새가 사람 따르듯이 사랑하였네 / 飛鳥依人而憐愛
그렇지만 좋은 시절 얼마 못 가고 / 曾日月之幾何兮
곱던 얼굴 갑자기 시들었으니 / 朱顔忽以凋廢
어찌하여 지난날의 균계가 변해 / 何昔日之菌桂兮
지금은 쓸모없는 쑥이 되었나 / 今直爲此蕭艾
순무 뿌리 쓸모가 없어졌으니 / 葑下體而無庸兮
누가 뜯고 누가 베어 가려 할쏜가
/ 謇誰采而誰刈
내가 옷에 향수를 뿌리려 해도 / 我欲薰其衣裳
사람들은 똥 냄새가 난다고 하고 / 人皆謂之糞穢
아름답게 치장을 하려 해 봐도 / 我欲盛其容飾
모두들 흙덩어리 보듯이 하네 / 人皆謂之土塊
등잔불은 꺼질 듯이 깜빡거리고 / 燈花落而明滅兮
비바람 몰아쳐서 캄캄한 이 밤 / 風雨凄其陰晦
고요한 빈 골목엔 인적이 없고 / 空巷闃其無人兮
개 짖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네 / 亦不聞其狵吠
어찌하면 황천의 상여를 살려 / 安得起相如於九原兮
〈장문부〉로 나의 한을 그치게 할까
/ 賦長門而弭我心痗



[주D-022]어찌 …… 여인이었던가 : 《시경》 〈용풍(鄘風) 군자해로(君子偕老)〉의 “어쩌면 그리도 하늘과 같으며, 어쩌면 그리도 상제와 같은가.〔胡然而天也 胡然而帝也〕”라는 구절과 〈대명(大明)〉의 “큰 나라에서 따님을 두셨으니, 하늘에 비길 만한 여인이로다.〔大邦有子 俔天之妹〕”라는 구절을 따다 쓴 것이다.
[주D-023]새가 …… 사랑하였네 : 당 태종(唐太宗)이 신하들의 장단점을 평가하면서 “저수량은 강직하고 신실한 데다 학식이 높으며, 정성을 다해 나를 친히 섬기기를 새가 사람에게 의지하는 듯이 하므로 자연히 더욱 사랑스럽다.〔褚遂良鯁亮 有學術 竭誠親於朕 若飛鳥依人 自加憐愛〕”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러지 않아도 많은 장점을 가진 신하가 정성을 다해 자신을 섬기고 싹싹하기까지 하므로 더욱 예뻐 보인다는 말이다. 《新唐書 卷105 長孫無忌列傳》 여기서는 사람을 친근하게 따르는 예쁜 새처럼 모두가 이 기녀를 사랑했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주D-024]순무 …… 할쏜가 : 《시경》 〈패풍(邶風) 곡풍(谷風)〉에서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이 “순무를 캐고 순무를 캐는 것은, 뿌리 때문이 아니로다. 덕음이 어긋남이 없을진댄, 죽을 때까지 그대와 함께할지니라.〔采葑采菲 無以下體 德音莫違 及爾同死〕”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는 기녀인 자신을 사람들이 찾아 주고 사랑했던 것은 미모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늙어 시들어 버렸으니 누가 필요로 하겠느냐는 뜻으로 한 말이다.

[주D-025]어찌하면 …… 할까 : 상여(相如)는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이고, 〈장문부(長門賦)〉는 사마상여가 무제(武帝)의 비 진 황후(陳皇后)를 위해 지어 준 부(賦)이다. 진 황후가 소박맞고 장문궁(長門宮)에 유폐되어 지내던 중 사마상여가 글을 잘 짓는다는 말을 듣고 황금 100근(斤)을 보내어 글을 청하자 사마상여가 〈장문부〉를 지어 주었는데, 무제가 황후의 고독하고 처량한 처지와 간절한 사모의 정이 잘 드러난 이 글에 감동하여 다시 진 황후를 총애했다고 한다. 《文選 卷8》 누가 자신의 애달픈 처지를 글로 드러내어 예전처럼 사랑받고 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하겠느냐고 탄식한 말이다.

 



늙은 말〔老馬〕

 

악와에서 나온 듯이 신비한 준마 / 夫何渥洼之神駿兮
불쑥 솟은 근골이 비상한 데다 / 聳筋骨之權奇
귀는 대를 쪼갠 듯 날카로우며 / 耳批竹而如削兮
털에는 동전 같은 문양이 있네 / 毛連錢而參差
땀 흘리며 만리를 내달릴 때면 / 窮萬里而汗血兮
조보라도 제어하기 어려웠으니 / 雖造父猶難羈
동으로는 한해까지 이르렀다가 / 東馳至于瀚海兮
서쪽으로 엄자산을 넘곤 하였지 / 西又躒天崦嵫
구령으로 왕자 진을 인도해 가고 / 導子晉於緱嶺兮
요지의 서왕모(西王母)를 방문한지라 / 訪王母乎瑤池
열두 마구 속에서 이름 떨쳤고 / 擅名於十二閑之中兮
웅장한 내 자태에 모두 놀랐네 / 人皆駭我之雄姿
세월이 물과 같이 빠르게 흘러 / 歲月忽其流邁兮
나이 먹고 근력이 쇠약해지니 / 齒旣高而力衰
북을 실은 수레 끌며 구박당한들 / 駕鼓車而驅迫兮
병든 몸을 가지고 어딜 가리오 / 勢玄黃其何之
형편없는 종자들과 나란히 서서 / 與駑駘而竝首兮
마구에서 시들시들 죽어 가누나 / 伏槽櫪而摧萎
세상 두루 돌던 때를 그리워하고 / 想舊日之遊歷兮
재능 펴기 어려운 걸 슬퍼하는데 / 悵奇技之難施
노복들은 날 비웃고 업신여기니 / 輿隸嘲哂而相侮兮
식자들이 안타깝게 여겨줄는지 / 肯識者之嗟咨
배를 채울 꼴마저 얻지 못하여 / 蒭菣尙不可得兮
비통하게 배고픔을 호소하누나 / 每酸嘶而呼飢
내 너에게 이르노니 / 我告于汝兮
상심 말고 슬퍼 마라 / 其勿傷悲
만약에 네 정신이 살아 있다면 / 儻精神之不泯兮
변화하는 때가 정녕 있을 것이니 / 會變化之有時
그때는 분명 네가 용이 되어서 / 吾知爾之爲龍兮
바람과 번개 쫓아 날게 되리라 / 追風逐雷之可期



[주D-026]악와(渥洼)에서 …… 준마 : 악와는 수명(水名)으로, 한 무제(漢武帝) 때에 이곳에서 용마(龍馬)가 나왔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漢書 卷6 武帝紀》
[주D-027]조보(造父) :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 사람으로 말을 잘 몰았다. 왕이 서쪽으로 수렵을 나가 돌아오길 잊고 있을 때 서언왕(徐偃王)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보가 왕의 말을 몰아 하루에 천리를 달려간 덕분에 서언왕을 공격하여 대파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史記 卷43 趙世家》
[주D-028]한해(瀚海) : 고비사막의 옛 이름이다.

[주D-029]엄자산(崦嵫山) : 감숙성(甘肅省) 서쪽에 있는 산으로, 고대에 해가 지는 곳으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주D-030]구령(緱嶺)으로 …… 가고 : 구령은 구지산(緱氏山)이고, 왕자 진(王子晉)은 주나라 영왕(靈王)의 태자로, 왕자교(王子喬)라고도 한다. 왕자 진이 도술을 배워 신선이 된 뒤에 백학(白鶴)을 타고 구지산에 내려왔다는 전설에 의거하여 한 말이다. 《列仙傳 王子喬》
[주D-031]요지(瑤池)의 서왕모(西王母)를 방문한지라 : 주나라 목왕이 팔준마(八駿馬)가 모는 수레를 타고 천하를 두루 유람하다가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의 요지에 가서 전설상의 선녀 서왕모를 만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는 전설에 의거하여 한 말이다. 《列子 周穆王》
[주D-032]열두 마구 : 천자의 마구를 가리킨다. 《주례(周禮)》 〈하관사마(夏官司馬) 교인(校人)〉에 “천자는 마구가 열둘이고, 제후는 마구가 여섯이며, 대부는 마구가 넷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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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가기행 27. 창녕 성씨(昌寧 成氏)허백당 성현(虛白堂 成俔)| 창녕성씨 관련글 모음

포에버 | 조회 36 |추천 0 | 2008.09.24. 20:59


 

[종가기행 27] 昌寧 成氏 虛白堂 成俔

문중 행사 빠짐없이 참여 '500년 世家'의 자긍심 고스란히

20대손 성원식(成元植) 씨 통신회사 수석연구원… 종택은 한국전쟁 때 불타

성현묘소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하면 먼저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제 무협지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인물평을 들어보기 어렵다. ‘남달리 뛰어나고 고아한 풍채’를 뜻하는 이 평은 최고의 존경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선조(宣祖) 대의 유교칠신(遺敎七臣, 선조가 승하할 때 遺命을 내릴 정도로 신임하던 일곱 신하) 중 한 사람인 박동량(朴東亮)이 지은 기재잡기(寄齋雜記)에 보면 이런 일화가 있다. 

   홍정(洪正)은 우의정 성세창(成世昌, 성현의 아들: 1481-1548)과 서로 통하는 친구였다. 그가 정월 어느 눈내린 날 밤에 친구를 찾아가 동원(東園) 별실 한가한 창 아래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중 뜰가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창틈으로 가만히 내다보았더니 백발을 휘날리는 한 노인이 매화나무 밑에 눈을 쓸고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 손끝에서 울려 나오는 청아한 소리가 매우 기이하였다. 


   성세창이 자신의 부친이라고 말한 노인은 어느새 손님이 방에 있는 줄 알았는지 서둘러 거문고를 거두어 들어갔다. 이 장면을 보고 홍정은 친구에게 “달빛은 대낮 같고 매화가 활짝 핀 바로 그때 백발이 흩날리고 맑은 가락이 그 사이로 발산되었는데, 아득히 신선이 내려온 것처럼 상쾌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듯하니, 용재 성현이야말로 신선의 풍채와 도사의 기골을 가진 분이라 하겠다”라 말했다. 여기에서 ‘선풍도골’이라는 문자가 나오는데, 정황을 함께 보여주어 실감이 난다. 



   다른 기록에는 허백당이 바둑의 고수라고 묘사되어 있어 그 평가에 더욱 믿음이 간다. 실제로 허백당은 성종9년(1478) 11월 국왕에게 상소하면서 ‘국왕이 이전의 잘못된 역사를 알면서도 그러한 전철에 빠지는 것은 비유하자면 바둑을 구경하는 자는 승부를 알 수 있으나 대국자는 막연해 어쩔 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신하로서 그런 비유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종손 성원식 씨
   허백당은 몰년을 기준으로 볼 때도 500년 전 인물이다.

20대나 가문의 맥을 이어와 유구한 역사가 500년을 넘어섰다. 그래서 허백당 종택은 고가(古家)요 세가(世家)다. 그래도 맛이 부족하여 앞에다 무엇을 덧붙일까 생각해 보았다. 일감은 ‘문학(文學)’이다. 허백당은 타고난 문장가요 시인이었다. 당시 누구보다도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시로 승화해 작품으로 남겼다. 연구자들은 이를 ‘국속시(國俗詩)’라 분류했다. 


   그 다음은 ‘음악(音樂)’이다. 조선 시대에 어떤 인물을 음악가라 규정짓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나라 음악을 집대성한 큰 공을 남겼다. 그 결과물이 유자광과 함께 편찬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이다. ‘악학’이란 ‘음악학’의 준말. 이 책은 조선시대 음악의 지침이 된 유일한 악전(樂典)이다. 


   허백당의 20대 종손 성원식(成元植, 1967년생) 씨를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벤처빌딩에서 만났다.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에서 태어난 종손은 5세 때 부친을 따라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했다.

중견 통신회사의 수석연구원 명함을 가진 종손은 안양중·고를 거쳐 연세대학교 전자공학과(87학번)를 졸업했다. LG중앙연구소에서 1993년부터 2001년까지 근무한 뒤 현재의 직장으로 옮겼다. 93년 진주 강씨와 결혼해 슬하에 필준(必晙·11세), 현준(鉉準·7세) 형제를 두었다. 


   선대 종손인 성연홍(成演洪, 1939년생) 씨는 건국대학교에서 수학했고, 사업을 하다 철도청에 들어가 퇴직한 뒤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성현 묘비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종손의 부친은 가문 의식이 남달랐다. 그래서 문중을 일으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때로는 의견이 다른 지손들과 대립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종손이 시제 등 문중 행사에 빠짐 없이 참여하는 것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가르침 때문이다. 


   허백당의 종가는 경기도 문산읍 내포리에 있었다. 종손의 기억으로는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거주하다 자신이 고교 3학년생이었을 무렵에 돌아가셨는데, 부리던 사람들의 집도 당시까지 남아 있었다 한다.

고서와 고문서가 가득했던 원래의 기와집은 한국전쟁 중에 불타 없어졌다. “구전에 의하면 불순 세력들이 고의로 불을 질렀는데, 당시 주위 사람들이 많은 자료를 가지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두 불탔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묘소가 있는 그곳은 황희 정승 묘소와 가깝다.

LCD파주 공장이 그 너머에 자리잡고 있다. 


   종손의 몸에는 가문의 역사나 범절이 배어 있다.

1997년 문화관광부에서 ‘이달의 문화인물’로 허백당이 선정되었을 때 다양한 행사를 마련해 할아버지를 기리고 알렸다. “제가 어렸을 때 저를 차종손이라고 어른들께서 존대말을 써주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시제를 지낼 때면 저보고 향(香)만 안고 있으면 된다고 했어요. 요즈음은 제 나이가 가장 젊으니까 제수를 옮긴다든지 하는 일을 솔선해서 열심히 합니다.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전통 반가에서는 종손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종손을 높이는 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손이 모시고 있는 조상을 높이는 것이며 그것이 결국은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종가 사람들 또한

용재총화
엄격한 문중 교육을 받아 스스로 존엄성을 지켰다. 일부 문중에서는 독선생을 초빙, 체계적인 교과 과정을 통해 종손을 교육하기도 했다. 

   기제사에 대해 물었다. “저는 위패를 모시지 않아서 지방을 쓰는데요, 컴퓨터로 출력합니다.” 조부는 4형제, 선친은 외동이었다. 당숙이 4명 있어 그나마 고적하지는 않다고 한다. 불천위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선대 기제사만 모시는 종가의 제사에는 제관이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이어서 전공인 통신 분야에 대한 이야기로 옮겼다.

광전송장비 등 전문용어와 함께 현황과 전망까지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그 분야의 앞날에 대해 우려도 털어놓았다. 가만히 듣다보니 분야만 다를 뿐이지 선현들이 시대를 걱정했던 ‘우환의식(憂患意識)’이 종손에게도 있는 것을 느꼈다.

종손은 문중사(門中史)도 꿰고 있었다. “저희 집은 셋째 집이 잘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허백당 할아버지가 셋째, 그리고 돈재(遯齋) 성세창(成世昌:1481-1548)도 셋째입니다.

선영에 모신 묘비를 보면 6·25 때의 총알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안경 너머로 젊은 종손의 자긍과 자손으로서의 도리를 자임하는 마음이 읽혀졌다. 남을 포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진 종손이다. 


▲ 성현 1439년(세종21)-1504년(연산군10)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 호는 허백당(虛白堂), 부휴자(浮休子), 국오(菊塢), 용재(慵齋), 시호는 문대(文戴)
글씨·음악에도 능한 문장가… '용재총화' '악학궤범' 등 대작 남겨


   허백당을 쓰면서 인물 관련 사료가 너무 많아 행복한 고민을 했다. “1호 크기의 작은 유화에다 인물 누드를 그리기가 정말 어렵다”고 유명 서양화가가 고백한 적이 있다. 허백당의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어느 길로 들어서야 목적지까지 제대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날도 저물었다. 


   허백당 성현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문장가다. 그와 동시대에 함께 빛을 발한 이가 허백정(虛白亭) 홍귀달이다. 홍귀달은 허백당보다 한살 많은데 흥미로운 점은 허백이라는 호를 함께 쓰고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이력을 보면 숫제 닮은 꼴이다. 같은 해에 진사시에 합격한 두 사람은 1년이란 시차를 두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한다.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나란히 여러 관직을 역임한 두 사람은 허백정이 먼저 문학하는 신하의 최고 명예였던 대제학에 올랐고 허백당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6개월의 시차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다만 홍귀달은 연산군에 의해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교살된 데 비해, 두 달 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는 부관참시라는 극형이 내려져 무덤이 훼손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성현이 남산 중턱에 지은 홍귀달의 정자인 허백정 기문을 쓰면서 극구 허백(虛白)의 의미를 강조한 것을 통해 두 사람의 교감을 알 수 있다. 


   성현의 학문 계통은 삼봉 정도전, 양촌 권근, 춘정 변계량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원류는 고려 삼은 중의 한 분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에 있다. 그의 뒤를 태재 류방선이 이었고 괴애 김수온, 성현의 중씨(仲氏)인 성간, 성현으로 계승되었다. 성현은 다시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모재 김안국에게 이었고, 초당 허협이 모재를 승계했다. 


   초당 허엽의 아들인 교산 허균이 삼당시인(三唐詩人)의 대표자인 손곡 이달의 시집 서문을 쓴 것이 있다. 여기서 허균은 한 시대의 대방가(大方家)로 사가 서거정, 점필재 김종직, 허백당 성현을 손꼽았다. 최고의 비평가였던 허균이 성종조의 수많은 인물 중에 이 세 사람을 최고로 꼽았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문장가뿐만 아니라 문학 평론가로도 이름 높았던 계곡(谿谷)


   장유(張維) 역시 선조 때의 최고 문장가인 간이(簡易) 최립(崔笠)의 문집 서문을 쓰면서 김종직, 김수온, 서거정, 성현 네 사람을 ‘대가’로 꼽고 있다. 주석으로 '성현과 서거정은 재질이 민첩해 관각체(館閣體)를 잘 지었다'고 달았다. 관각체란 예문관이나 홍문관 등의 관리들이 주로 쓰는 문체로 관각문학이라는 장르가 있을 정도였다. 당송 고문을 기본으로 하되 유장하고 통창(通暢)한 서술이 그 특징이다. 대책문(對策文), 사대교린(事大交鄰)의 외교문서(表箋) 따위에 널리 쓰이는 당대 일류 문체다. 이러한 성현의 문학은 이후 등장한 사림파(道學派)로부터 문장의 기교에만 치우친 ‘사장파(詞章派)’로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됐다.


   그가 남긴 시는 조선 초의 악부시(樂府詩)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나 항상 그대가 그리워(長想思)’라는 작품이다.

“늘 그대 상각하지만 생각해도 볼 수 없네요.

마음은 종이연처럼 바람에 떨리네요. 이 마음 돗자리라면 둘둘 말고 돌이라면 굴리기라도 하겠지만, 답답한 이 마음 언제나 사라질까요? 그리운 님 저멀리 하늘 끝에 계신데, 구름 덮인 하늘 아래 푸른 숲만 아득한 걸요. 아득하여 다함 없는 근심으로, 나홀로 이렇게 악기를 타고 있어요···.” 


   허백당의 가문은 작은아버지인 성봉조(成奉祖)가 성종 대에 좌리공신으로 참여하여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그 형제와 아랫대에 이르러 극성을 이루었다. 백씨인 안재(安齋) 성임(成任)이 쓴 글을 보면 ‘문과에 다섯 아들이 급제하고 부모가 살아 있으면 쌀 20석을 준다’는 것을 예로 들며, 자신의 집에도 자신이 문과 중시와 발영시에, 그리고 아우인 진일재(眞逸齋) 성간(成侃)이 문과에, 막내아우인 성현이 문과와 문과 중시, 발영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니, 그렇게 보면 3형제가 6번의 문과에 합격한 셈이라 그런 상을 받을 만하다고 농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현의 셋째아들은 문과에 올라 좌의정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부자 간에 대제학을 지낸 것을 두고 ‘국조(國朝)의 문형가(文衡家)’라고 세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성임의 아들 성세명(成世明) 역시 문과에 급제했다. 


   이 가문 사람들은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 대표자는 성임이다. 그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현판을 쓴 당사자다. 성임은 인왕산 자락에서 원림(園林)을 조성하고 신선처럼 살았다. 이들 형제들은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다. 허백당은 말할 필요도 없고 두 형제 모두 음률에 정통했고 거문고를 다루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진일재 성간은 독서광(讀書狂)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15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것도 독서 덕분이다. 다만 30세에 요절한 것이 못내 아쉽다. 성현의 셋째아들 성세창은 글씨, 그림, 음률에 모두 정통해 당시에 ‘삼절(三絶)’이라고 불렸다. 성세창이 시를 쓴 계회도가 보물(제868, 869호)로 지정되어 전한다. 


   성현이 편찬한 많은 저술 가운데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이란 책이 주목된다. 이 책은 일종의 정치비평서로, 부휴자라는 가공인물을 내세워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논설을 펴고 있다. 부휴자는 유가(儒家) 뿐만 아니라 도가 등 제자백가 사상을 거침없이 토해내는데, 이를 미루어 조선 전기 사회가 사상적인 면으로는 매우 역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2004년에 번역 출간됐다. 


   허백당의 저술 중 백미는 단연 용재총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 문장, 시, 그림, 인물, 역사적 사건 등과 관련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주옥 같은 수필이 있고 급소를 찌르는 삶의 지혜나 질펀한 남녀 간의 이야기까지 모두 담았다. 그래서 세상사로 지칠 때 그저 아무곳에서나 펼쳐 보다가 그만두어도 좋을 옛 친구 같은 책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성현의 졸기를 읽어보았다. 그 말미에 “성격이 허심탄회하여 수식을 하지 않으며, 생업을 일삼지 않고 오직 서적을 가지고 놀았다. 문장이 건실 익숙하여 오랫동안 문형(文衡, 대제학)을 맡았는데 허백당집 등 저서가 있다. 또 음률에 정통하여 늘 장악원(掌樂院) 제조(提調)를 겸하였는데, 다만 관리의 재간이 없고 사정에 소활(疎闊)하여 어디서나 큰 공적이 없었다.”

앞에서 소개한 선풍도골의 인물평과 일맥상통하는 기록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이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제학, 우승지, 형조참판, 강원, 평안, 경상 관찰사, 한성부 판윤, 사헌부 대사헌, 예조, 공조 판서, 홍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등 직을 두루 역임한 바 있지만 관료로서 큰 공적이 없다는 평은 뜻밖이다. 성현이 54세(1492년, 성종23) 때 중국 사신 동월(董越)이 사신으로 왔을 때 시로써 창수한 일이 있었다. 이에 중국 사신은 그의 문재(文才)와 인간미에 반해 귀국 후 중국에서 조선 사신을 만날 때마다 안부를 물었다 한다. 여기서도 문학적 재질과 아울러 인간미가 함께 거론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어린 시절 풍광을 최고로 쳤던 인왕산 중턱에서 살았다. 그곳은 증조인 성석인 이래 성엄, 성념조를 이어 백형인 성임이 대를 이어 살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 이후 지금의 서울 남대문 서쪽 1리 정도인 약현(藥峴, 오늘의 서대문구 중림동 일대) 어귀에 살았다. 이곳은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길지임을 알고 성 씨에게 점지해준 곳이라 전한다. 성현은 이곳에서 밤에 홀로 언덕에 올라 시를 외웠고 눈 오는 달밤에는 거문고도 탔다. 그 후 이 집터는 200여 년을 대물림 되다가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 동복 오씨, 1689-1745)에게 전해졌고, 이를 약산의 제자인 번암 채제공(1720-1799)이 받아 맥을 이었다. 명기(名基)를 명인(名人)들이 수수(授受)해 터전을 더욱 빛나게 한 셈이다.

허백당의 생애는 그의 제자인 모재 김안국이 잘 정리해 두었다. 사후 그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의 삶이 온당하게 평가된 대목이다.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입력시간 : 2006/12/04 16:50
수정시간 : 2006/12/04 16:57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출처:http://blog.naver.com/sudony  

        http://blog.naver.com/sudony/100031629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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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
화대백과사

성현

동의어 경숙(磬叔), 용재(慵齋), 부휴자(浮休子), 허백당(虛白堂), 국오(菊塢), 문대(文戴) 다른 표기 언어 成俔



요약 테이블
시대 조선
출생 1439년(세종 21)
사망 1504년(연산군 10)
경력 경연관, 예문관수찬, 대사간, 첨지중추부사, 강원도관찰사, 대사헌, 공조판서
유형 인물
직업 학자
대표작 허백당집, 악학궤범, 용재총화, 부휴자담론
성별
분야 문학/한문학
본관 창녕(昌寧)

요약 1439(세종 21)∼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학자.


성현(1439-1504)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염조(成念祖)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성현은 1462년(세조 8) 23세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1466년 27세로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되었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待敎) 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1468년(예종 즉위년) 29세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리고 예문관수찬·승문원교검을 겸임하였다. 그는 형 성임(成任)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다. 그는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觀光錄)』이라 하였다.


   성현은 1474년(성종 5)에 지평을 거쳐서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이듬해에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왔다. 147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간·대사성·동부승지·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현은 1488년에 평안도관찰사로 있었다.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접대연에서 시를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이 해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에 대사헌이 되었다.


   성현은 1493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러나 성현은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았다. 그래서 한 달만에 예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이 해에 유자광(柳子光) 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였다.


   성현은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에서 「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북전(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한편으로는 관상감·사역원·전의감(殿醫監)·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곳에 딸린 관원들을 종전대로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성현은 연산군이 즉위한 후에 한성부판윤을 거쳐서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에 『용재총화(慵齋叢話)』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에 수 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그러나 그 뒤에 신원되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성현의 저서로는 『허백당집(虛白堂集)』·『악학궤범』·『용재총화』·『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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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성현의 문학론과 시세계」(김태안, 성균관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2)
  • 「허백당성현연구」(오춘택, 고려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0)
  • 「허백당집」(『이조명현집』2, 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77)
  • 「집현전연구」(최승희, 『역사학보』 32·33, 1966·1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