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 정태현 선생님의 회고록 / 전의식

2013. 7. 30. 15:16야생화, 식물 & 버섯 이야기

 

 

 

한국식물분류학자열전(1) "우리나라 식물연구의 선구자 정태현선생님"에 기술한바와 같이 선생님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식물을 채집하시고, 일제시대에 도감까지  출판하신 위대한 선각자시다. 그런데, 선생님이 쓰신 회고록이 발견되었는데,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 옮겨 싣는다. 이 옥고는 처음 1964년에 성균관대학 신문에 연재됐던 것으로, 내가 정기구독하던 "숲과 문화"지에 재록됐었는데, 내가 이사하면서 주소를 옮겨놓지 않아 배달되지 못해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야책(野冊)을 메고 50년
                                                                                                                             鄭台鉉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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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회고록(回顧錄)을 써보라고요. 이런 청탁은 자주 받습니다만 전란 중 수기(手記)를 모두 잃어버렸으므로 자신 있는 응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연(然)이나 끈덕진 기자의 조름에 못 이겨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엮어보려고 합니다.

  많은 동학(同學)들이 필자를 '산 표본(標本)'이라고 말하더군요. 아마도 구한국(舊韓國)시대로부터 일제 36년을 거쳐 군정(軍政), 대한민국에 이르는 한국의 생물학사(生物學史)를 한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데서 말하는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되도록 동학들의 참고가 될 수 있는 식물답사(植物踏査)를 중심으로 소재(素材)를 찾아보았습니다.

  생물학을 공부하게 된 동기를 말해보라고요? 글쎄, 애초 어떠한 뚜렷한 목적 하에 출발했던 것은 아니지요. 이야기의 실마리를 84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필자는 1882년에 경기도 용인군 용천리의 한촌농가(寒村農家)에서 출생하여 9세 때에 사숙(私塾;서당)에 입학하여 13세까지 통감(通鑑), 중용(中庸), 맹자(孟子), 시전(詩傳) 등의 한학을 배웠으며 대고풍(大古風), 표(表), 시(詩), 사율(四律) 등을 습득하였습니다. 이때의 기억으로는 시회(詩會)에서 안류장추 내일엽 암화우발 거년지'岸柳將抽來日葉 岩花又發去年枝'라는 시를 지어 장원을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14세 때 부친이 세상을 뜨시어 농사에 종사하다가 24세 때 마음에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상경하여 머리(상투)를 깎았습니다. 이때만 하여도 일진회(一進會)에 관계하는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머리를 깎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광무학교(光武學校)라는 일어야학(日語夜學)을 하는 동시에 일한통화(日韓通話)라는 책을 독송(讀誦)하여 가지고 양잠학교(養蠶學校) 또는 염색소(染色所)에 다니다가 26세 때 수원농림학교 임학속성과(1년)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구한국 농상공부 수원임업사무소(舊韓國 農商工部 水原林業事務所) 기수(技手)로 임명된 것이 오늘날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최초로 시작한 것이 1908년 봄에 소나무, 상수리나무, 낙엽송 등을 노량진 근처에 식수조림(植樹造林)한 것과 서울 백운동 근처 산에 사방조림(砂防造林)을 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임업의 효시였습니다. 오늘에 와서 현지를 돌아다 볼 때 회구지감(懷舊之感)이 없지 않습니다.

  필자가 식물표본(植物標本)을 채집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일인(日人) 石戶各 박사와 같이 산림과에 근무할 때부터였습니다. 이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식물이 최초로 외국에 소개된 것은 1854년 슈리펜바흐 남작(Baron Alexsander Schripenbach)이 버들을 비롯한 약 50여 종을 채집하여 구라파에 보낸 일입니다.

  당초 식물채취(植物採取)를 시작할 때에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나 점차 취미로 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자연애(自然愛)라고 할는지, 식물을 대하면 어쩐지 쾌감을 느끼게 되었고, 둘째로는 각각 특징에 따라 달라지는 식물의 종류를 아는데 흥미를 느꼈고, 셋째로는 표본을 만들어 두면 후학 및 동호인의 연구재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식물을 알 때마다 식물의 일부분을 노트에 붙여서 실물도감(實物圖鑑)을 만들어가며, 여러 가지 종류를 손쉽게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필자는 길을 갈 때나 산을 오를 때 눈동자만은 사방으로 움직여 무엇인가를 찾는 습성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료들에게 미치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지요. 식물을 채집하는데 새로운 식물을 잘 발견할 수 있는 특수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왜냐고요? 똑같은 길을 가더라도 이 같은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식물이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산림식물이라도 조사 연구해 보고자 생각하여 임업사무(林業事務)로 지방에 출장할 기회를 이용하여 수목의 표본을 수집하는 동시에 각 지방의 식물명(植物名, 방언)을 조사하였습니다.

  최초의 원거리 출장으로는 구한국농상공부 산림과에 근무시 평북 운산에 그 당시 미국인이 경영하던 금광의 임목도벌사건조사(林木盜伐事件調査)로 갔던 일이 있습니다. 이때의 구한국말기(舊韓國末期)의 미약한 국력의 틈을 이용한 외국인의 만행으로 당시의 많은 원시림이 파괴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그 길에 묘향산의 식물을 채집하였지요. 그때가 9월 하순이었는데 상봉(上峰)에 오르니 싸 가지고 간 도시락이 얼어서 먹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복장은 어떠했느냐고요? 필자는 탕건에 갓을 쓰고 권총을 찼지요. 그 후 1911년부터 일인 中井猛之進 박사와 함께 우리나라 야생식물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연구를 약 35년간 계속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모여진 자료는 조선삼림식물감요(朝鮮森林樹木鑑要, 1923), 조선산야생약용식물(朝鮮山野生藥用植物, 1936),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 1936), 만선실용임업편람(滿鮮實用林業便覽, 1941), 조선산야생식용식물(朝鮮山野生食用植物, 1942), 조선삼림식물도설(朝鮮森林植物圖說, 1944), 조림주요수종의 분포 및 적지(造林主要樹種의 分布 및 適地, 1949), 한국식물도감 상하(韓國植物圖鑑上·下, 1956∼57), 등등의 저서로서 발표하였습니다. 이때에 사용된 약 팔만여 점의 표본이 청량리 임업시험장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불행히도 6·25 동란시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고만 것은 전쟁이 가져온 막대한 문화재의 손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중 필자가 한국식물도감 초본편(草本編)을 만들기 위하여 초본 2천여 점(一種에 一枚)의 표본을 계농생약(生藥)에 이관해두었던 것만은 남아 있어 필자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국보(國寶)적인 존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로 말이암아 양단(兩斷)된 조국의 식물을 연구 조사하기 위해서는 이웃 일본의 신세를 져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당시에 채집한 표본의 일조(一組)씩이 일본동경대학식물표본실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년(去年) 필자가 하와이에서 귀로에 동대(東大)에 한국표본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대단히 감격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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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사는 비결이 있느냐고요? 생물(生物)을 하면 오래 사느냐고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물론 평소에 채집을 위해서 산을 많이 오르게 되니 심신의 단련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라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내 팔과 다리를 보시지요. 뼈만을 가지고 있건만 천, 2천 미터의 산을 두려워해 본 일이 없습니다. 재작년에만 해도 설악산을 무사히 넘었으니까요.

  어떤 이들은 식물분류학자는 장수한다고 하더군요. 린네(Linne)는 72세, 벤담(Bentham)은 85세, 드 칸돌(De Candolle)은 82세, 후커(Hooker)는 96세, 엔글러(Engler)는 88세, 마키노(Markino)가 96세, 나카이(Nakai)는 74세 그리고 필자가 84세가 아니냐고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많은 산을 오르고 채집을 하자면 건강한 사람이 아니면 견디어 내지를 못하게 되니 자연도태의 결과가 아닐는지요.

  필자는 장수를 위하여 어떠한 의식적인 노력을 해본 일은 없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하(如何)한 음식이든 호오(好惡)를 불구하고 적당히 먹어 기아(飢餓)와 포식(飽食)만 없게 한다면 장수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필자의 소시적(少時的) 일입니다. 십여 명이 모여 한 달에 한 번 식(式) 술을 마시고 논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술을 지고 갈 수는 없지만 먹고는 갈 수 있다는 친구들과 적당히 먹으면 슬그머니 꺼지는 두 종류의 인간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중(其中)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에 불귀의 객이 되었지요. 오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지요.

  술을 잘 하느냐고요? 그저 좋아하지요. 언제나 채집이 끝나면 피로회복으로 술을 마시지요. 금강산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비로봉을 거쳐 선녀봉을 오르고 내려와서 주막에서의 한 병의 냉맥주 맛이야말로 경험한 이 아니고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흔히들 채집을 간다고 하면 유람이나 소풍을 가는 것으로 오인하는 이가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지요. 우리들이 하는 채집이야말로 참으로 중노동입니다. 어느 산을 하나 조사한다고 하면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넘고 그 주위를 한바퀴 돌아야 합니다. 매일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한 짐씩 채집을 하게 되고 밤이면 보통 밤 2시 전에는 정리작업이 완료되지를 않습니다. 이 같은 생활이 계속될 때는 술의 힘을 빌어 피로를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스운 일은 카메라를 목에 걸고 동(銅)란을 메고 산을 다닐 때면 소풍객들에게 얼음장사나 사진사로 오인을 받을 때는 몹시 불쾌합니다.

  그러나 2천 미터 이상의 높은 산을 염천(炎天)에 땀을 펄펄 흘리며 오를 때도 표고(標高)에 따라 달라지는 식물상(植物相)을 볼 때 노고는커녕 조금 더 그 산이 높았으면 실감이 날뿐입니다. 이리하여 상봉을 정복하고 올라온 발아래 군봉들을 굽어보며 구름 위에 앉아 동반주를 마시는 쾌감! 이것이 바로 신선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활의 산물(産物)로 나의 하루의 메뉴는 아침에 밥 한 공기, 점심에는 빵 한 개와 겨란 한 개, 커피 한 잔, 저녁이면 정종 두 홉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종의 질이 나뻐서 진로소주 한 컵으로 충당합니다.

  취미가 무엇이냐고요? 별다른 취미는 없습니다만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지요. 그러나 신경을 써서 두어본 일은 없습니다. 그저 여가를 보내는 방법으로 둡니다. 섬에는 자주 갑니다만 해수욕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왜냐고요? 수영에는 손방(損方)이니까요. 운동이나 영화는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담배는 원래부터 피우지 않았느냐고요? 아닙니다. 소시적에는 하루 한 갑 정도 피우는 애연가였습니다. 그러나 중년에 끊었지요. 왜냐하면 첫째로는 채집시에 비를 만나면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담배만은 적시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양말목이나 모자 속에 넣게 되지요. 그러나 폭우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이 같은 심적 고통이 있고요. 둘째로는 언제나 식물표본실에서 연구를 하게 되는데 표본실에서는 화재에 위험한 관계로 금연으로 되어 있어 일하다가 반드시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워야 하는 불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금연 선언을 한 이후 금일까지 한 까치도 입에 대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술만은 끊어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최근에 좀 과음하면 요도협착증으로 다소 고통을 받지만 기력이 좋으면 24시간을 각오하고 먹습니다(24시간 후면 괜찮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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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집생활 중에 좋은 경험담을 들려달라고요? 글쎄 무엇부터 할까요. 내가 앞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오래 전의 이야기인고로 이상한 점이 있지마는 모두가 거짓이 아닌 실화입니다.


  <제주도 식물 답사>

  필자는 제주도의 식물을 1912년, 1917년, 1954년 3차에 걸쳐 조사를 갔던 일이 있습니다. 이때에 있었던 몇 가지 일을 말하려고 합니다. 제주도는 원래 탐라국(耽羅國), 탐연라(耽年羅), 동영주(東瀛洲)라 하였는데 1953년 화란인 하밀(Henberie Hamil)에 의하여 퀄파에르트(Quelpaert)라 하여 서구에 소개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느 친구에게서 "어째서 가까운 곳에도 많은 식물이 있는데 막대한 경비를 써가며 제주도까지 갈 필요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물론 이 질문에는 식물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생물학도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해두려고 합니다.
  오늘까지 발표된 우리나라 식물의 종류는 목본(木本)이 1,100여 종, 초본(草本)이 2,200여 종으로 모두 3,300여 종입니다(하등은화식물(下等隱花植物)은 제외). 이 식물의 분포를 보면 제주도에 1,300종, 광릉에 649종, 금강산에 700종, 백두산에 400종으로 제주도의 분포 종수가 가장 많고 북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적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후관계입니다. 즉 남으로 갈수록 기온의 변화가 적은데 제주도는 우리나라 최남단(북위 33도 44도 동경 136도 55분)에 위치하며 한난류(寒暖流)의 해류가 교류하는 곳으로 사계절의 기온차가 적을 뿐 아니라 한라산은 남한에서 가장 높고 그 식물의 분포가 500미터 이하는 난대(暖帶), 500∼1500미터는 온대(溫帶), 1500미터 이상은 한대(寒帶)로 뚜렷한 수직적인 분포를 이루고 있는 점에서 식물지리학상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입지적인 조건에 놓여 있는 관계로 특수한 특산식물이 많습니다. 이곳의 특수한 식물로는 제주조리대(Sasa quelpeartensis), 암매(Diapensia obovata), 섬쥐똥나무(Eurya emarginata), 상동나무(Sageretia theezans), 녹나무(Cinnamomum Camphora), 구상나무(Abies Koreana), 문주화(Crinum maritimum), 담팔수(Elaeocarpus Zollingeri), 종가시나무(Cyclobalanopsis glauca), 사구라나무(왕벚나무)(Prunus yedoensis), 파초일엽(Neottopteris rigida), 비자나무(Torreya nucifera), 풍란(Epipactis falcata) 등의 많은 것이 있습니다.

  특히 이중에서도 북제주군 구좌면 평대리에 있는 '비자림'은 천연기념물로 되어 있고, 약 30정보 가량 되는 비자나무 밭에는 아람드리 비자나무가 3,000여 본이 있고 그곳에서 매년 수십 석의 비자를 생산하므로 도의 귀중한 자원이 된다고 합니다. 필자가 1912년에 갔을 때는 제주읍에 녹나무의 대목(大木)이 있었는데 그 후에 가보니 베어 없어지고 삼성혈 부근에 자그만 묘목을 심는 것을 보았는데 1953년에 가보니 직경 약 5촌(寸) 정도로 자란 것을 보았습니다. 이 나무는 장뇌제조에 중요한 식물입니다.

  또 1917년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동행했던 윌슨(Wilson)박사가 분비나무 과실(果實)의 인편(鱗片)이 뒤로 제껴진 것을 발견하고 새로이 Aibes Koreana Wilson(구상나무)이라고 하는 신식물(新植物)로서 발표하게 되었는데 당시 한국식물에 조예가 깊었던 나카이(中井)박사가 선취권을 뺏기고 발을 구르며 억울해 하던 생각이 납니다.

  이 기회에 또 하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구라나무(왕벚나무)의 문제입니다. 이 식물의 원산지 문제로 많은 학자들이 오랫동안 논의해왔습니다. 일본의 국화(國花)인 사구라나무는 일찍이 고이즈미(小泉)박사가 본도(本島)에서 자생품(自生品)을 발견함으로서 우리나라 제주도가 그 원산지로 확정되었던 것인데, 그후에 고이즈미(小泉)박사가 발견한 절벽 위에 있던 두 것은 베어졌고, 재차 발견되지 않았던 관계로 부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필자도 어디엔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학술원의 알선으로 조사한바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P교수에 의해서 새로 발견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전기(前記) P교수의 표본을 필자가 감정한 견해에 의하면 사구라나무라고 보기에는 곤란할 뿐만 아니라 발강올벚나무(Pruns Jtosakura var. ascendens for. rosea)였던 것입니다. 앞으로 좀더 조사를 해보면 확실한 실물이 나타날는지 모르지만 현단계로서 천연기념으로 확정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필자가 최초로 제주도를 갔던 1912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시의 탐라국의 실정을 보자면 모든 도민(道民)들이 토색(土色)옷(감 '枾'으로 염색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신발은 모두 짚신이고, 남자들은 집에서 대광주리에 아이나 담아가지고 보며 모든 일은 여자가 하는 부권(婦權)사회였습니다. 여자들이 물동이를 지고 다니는 것도 이색적이었으며 시장에서 남자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여자가 남자의 상투를 쥐고 뱅뱅 돌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당시에는 남편을 일 시킨다는 것은 여자에게 큰 수치(羞恥)라고 합니다. 두 번째 갔을 때(1917)는 모두 백색(白色)옷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하나 기억되는 것은 변소에 대변을 보러가서 무심코 변을 보는데 밑에서 무엇이 척척하고 똥을 받아먹는 소리가 나서 소스라쳐 놀라 본즉 돼지가 인분을 받아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돼지우리의 상층을 변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풍속은 최근까지 있었는데 요지음은 모두 철거시켰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한라산을 오르기 위하여 안내인을 구하였으나 아무도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곳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자고로 한라산 상봉(上峰)에 오른 사람은 모두 신선이 되고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어느 한 사람이 신선이 되기 위하여 한라산을 오르겠다고 원님(오늘의 지방장관)에게 하직인사차 왔습니다. 원이 생각하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서 생각 끝에 당시 그곳에 용이 많았으므로 혹 천지에 있는 그 같은 동물에게 잡혀 먹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서궁황(용을 죽이는 약)을 종이봉지에다 잘 싸 가지고 주면서 이것은 신선이 되러 가는 너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니 신선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풀어보아서는 아니 된다고 주의를 시켜 보냈습니다. 이 사람은 신선이 되었는지 아니 되었는지 그 후(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또다시 다른 사람이 신선이 되러 가겠다고 하직인사를 다녀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이 사람은 신선이 되지를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그 까닭을 물은즉 천지가에 가 있어도 신선은 되지 않고 배가 고파 되돌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은 천지에 무엇이 없더냐고 물어 보았더니 물 위에 무언지 커다란 것이 떠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은 신선이 되기 위해서 올라간 사람들은 모두가 동물에게 잡혀 먹거나 조난 당해 굶어 죽은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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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청에 교섭하여 백방으로 설득한 결과 소시적에 한번 올라본 일이 있다는 노인 하나를 구하였습니다. 제주를 출발하여 도중에 노숙을 하고 다음날 상봉에 오른즉 야생우마(牛馬)는 떼를 지어 달리고, 사방은 구름으로 덮혔으며 번갯불이 번쩍이는데 과연 황홀한 광경이었습니다. 백록담 부근에는 여기저기 야생우마의 골격이 널려져 있고 아름다운 고산식물들이 만개해 있었습니다.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야생하는 말은 사람이 몰아와도 먹이를 먹지 않아 사육할 수가 없다고 하며 소는 몰아다 길을 들이면 되는데 고기는 나무껍질 씹는 것 같아 먹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곳의 특이한 현상은 집에서 사육하는 소도 고삐가 없고 그대로 방목을 한다고 합니다. 제대로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다 밤이면 집에서 찾아온다고 하며, 산에 갔다가 방목하는 것은 봄에 흩어놓고 가을에 주인이 높은 바위 위에 올라서서 부르면 몰려온다고 합니다. 참으로 알쏭달쏭한 일이지요. 현재에도 제주도 삼무(三無)의 하나로는 도둑이 없는 것을 들 수 있다하니 있을 법한 일입니다.

  동혈(洞穴, 바위 밑)에서 쉬는데 밤부터 폭우가 나리기 시작하여 바위 밑으로 물이 몰려 닥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오전 6시에 하산하기 시작하였으나 안내인이 길을 잃어 갈팡질팡하다보니 1,600미터의 초원에서 오후 7시가 되었습니다. 한라산의 산우(山雨)라는 것은 우리들이 보통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병의 물의 쏟는 것 같은 폭우이며 몇 시간 동안에 길이 모두 강으로 변하여 길을 잃게되며, 이곳의 바람이란 사람이 날려 갈 정도이고 운무(雲霧)가 끼면 2미터만 떨어져도 일행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이 흔히 있는 조난사고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공포심을 느끼며 한사코 방향도 없이 무릎 위를 넘나드는 물을 헤치며 밑으로만 내려갔습니다. 9시경에야 겨우 토막(土幕) 속에서 비쳐 나오는 불빛을 발견하고 함성을 올렸습니다. 이곳에서 횃불을 마련하여 목적지로 떠나는 도중 또 하나의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계곡에 물이 대창하여 건늘 길을 잃고 방황하던 끝에 천행으로 큰 나무가 쓸어져 도랑을 걸치고 칡과 다래넝쿨이 엉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까스로 도하작전에 성공하여 밤 12시경에야 목적지인 표고 재배하는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이때의 한라산 중턱의 표고재배란 유명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본산(本山)의 중턱(溫帶)의 삼림을 형성하고 있는 서-나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표고재배로 인하여 삼림은 완전히 절단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구사일생으로 표고장에 돌아와서 굶주린 창자를 채우던 밥맛이야말로 꿀맛 같았고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해방이후에 몰지각한 도민(島民)들이 계속하여 외화획득이라는 미명 하에 모조리 베어서 오늘에는 팔뚝만한 서-나무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제주도하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김녕(金寧)의 뱀굴(蛇窟)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1954년에 갔을 때 일입니다. 이때에는 6·25이후 4·3공비사건을 치른 후라 동리마다 현무암으로 성을 쌓고 문을 닫아 고대 로마의 도시국가에 온 것 같은 감을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당시 김녕중학교 교장 전문태(全文泰)씨의 호의로 뱀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앞에는 풍우침식(風雨侵蝕)된 초라한 비석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재미있는 전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씨의 설명에 의하면 옛날에 이 굴에 뱀이 한 마리 살고 있었는데 성주는 매년 처녀를 하나씩 갖다 바쳐야 풍년이 들고 도내(島內)가 평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비석은 이 뱀을 처치해준 성주를 기념하여 도민(島民)이 세운 것이랍니다. 굴에 들어스니 서늘한 공기가 온 몸에 스며들어 삼복에 달은 몸을 식혀주었고 박쥐들이 사방에서 공격해 왔습니다. 이 굴은 옛날 화산 당시 지진에 의해서 생겼다고 하는데 높이 20미터쯤 되고 벽은 인공으로 가공한 듯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었으며 끝까지 들어가려면 15분쯤 걸립니다. 얼마쯤 들어가면 굴이 좁아져 고개를 이루었다가 다시 넓어지며 벽이 마치 뱀비늘 같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우리들은 횃불을 준비하지 못했던 관계로 후라시불을 사용했으므로 곤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굴속은 공기가 적어서 등불은 밝지를 않아 반드시 석유 솜방망이어야 합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김녕지서에서는 구경 오는 손님에게 뱀굴 안내에 들어가는 솜방망이용으로 석유가 한 초롱씩 들어간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제주사람은 뱀을 대단히 신앙(信仰)했고 따라서 뱀을 사육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여자가 출가할 때는 뱀을 가지고 가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국경횡단 여행>

  다음은 1914년 백두산 식물조사시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본 조사는 1914년 5월∼동 9월의 5개월 간에 걸쳐서 신의주로부터 압록강을 끼고 올라서 백두산을 넘어 두만강을 따라 웅기(雄基)에 이르는 약 2천 킬로미터의 국경횡단여행이었습니다. 이 조사에는 일인 나카이(中井)박사와 필자 그리고 마쓰사끼(松崎直枝)(東大植物園)씨와 사진사 1명이 참가했고 장비로는 권총 일정씩을 휴대하고 말 세 필, 고정인부 2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경험한 최대의 채집여행이었고 이 결과는 백두산식물조사서 및 노봉(鷺峰)식물조사서로서 발표되었습니다. 이 동안에 체험한 여러 가지 일들이 많습니다만 기억되는 몇 가지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백두산은 한반도에 있어 식물지리학상 가장 흥미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동아(東亞)식물에 매력을 느끼는 많은 학자들은 백두산 일대 및 장백산맥의 식물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본산(本山)의 주체는 한국북부에서 만주에 걸친 태고기(太古紀)의 암석을 덮고 있는 현무암(玄武岩)으로 되어 있고 상봉(上峰)에는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덮혀 있어 허옇게 보입니다. 이에서 백두산이란 이름을 얻은 듯 합니다.

  본산의 식물침입(植物侵入)의 순서는 백두산이 성립되어 대부석원(大浮石原)으로 이루어진 나지(裸地)에 가장 먼저 침입한 것은 바람에 비산(飛散)하기에 가장 용이한 자작나무과 식물이었고 이어서 잎갈나무가 들어와서 현재는 잎갈나무의 대군락(大群落)을 이루고 있으나 종당(終當)에는 현재 수하(樹下)에 침입하고 있는 전나무와 종비나무 등의 음수(陰樹)의 삼림으로 갱신(更新)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조사에서 본산의 특산식물 16종, 한국 미기록(未記錄) 87종을 합하여 307종, 19변종(變種)을 채집하였습니다. 그 주요한 것을 보면 갈마사초(Carex concolor), 난쟁이패랭이꽃(Dianthus morii), 각씨투구꽃(Aconitum monanthum), 두메냉이(Cardamine resedifolia var. Morii), 왕제비꽃(Viola Websteri), 황백산차(Ledum palustre var. maximum), 톱잔대(Adenophora curvidens), 껄껄이풀(Hieracium coreanum), 뿔분취(Saussurea triangulata var. alpina), 유령란(Epipogon aphyllum), 구름범의귀(Saxifraga laciniata), 나도황기(Hedysarum setigerum), 두메방풍(Peucedanum Paishanense) 등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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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중에 평북 벽동군 비래봉을 답사할 때의 일입니다. 이 산은 표고 1470미터이며 인적부도처(人跡不到處)의 삼림지대로서 등산하는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산중복(山中腹)에는 가시가 많은 매발톱나무(Berberis amurensis)가 밀생(密生)하여 일보(一步)도 전진할 수 없고 비가 내려 인부들은 떨고 있을 뿐 현상금을 걸어도 한 사람도 앞을 서지 못하였습니다. 부득이 필자는 인부의 낫을 들고 선두에서 길을 치며 상봉(上峰)에 올라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는데 오늘날 회상하면 그 당시의 그와 같은 용기와 힘이 어디서 났던가 자신도 의심됩니다.

  또 하나 흥미 있던 이야기는 강계군 종서면의 고산(高山)을 답사코자 외딴집에서 유숙할 때의 일입니다. 그 날 저녁에 가지고 갔던 '빠나나풀'을 먹다가 안주인에게 한쪽을 주었더니 무엇이냐고 묻기에 평소에 잘 않던 농담으로 이것은 천도복사로 만든 것인데 이것을 먹으면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신문을 얻어 그것을 꼭꼭 싸기에 그 이유를 물은즉 이와 같이 귀한 것을 어찌 자기가 먹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노부모가 계시는데 이 밤중에 그곳을 갔다온다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놀랬을 뿐 아니라 그녀의 효성에 감복하여 조금 전에 한 말을 농담이라 자백하고 다시 한 통 주어 다음에 아버지를 대접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까닭은 그녀가 밤에 30리 길을 왕복하고 보면 그 다음날 조반(朝飯)에 지장이 있어 우리의 행동에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북한산촌의 실정을 좀 들어보실까요? 이때의 산골 사람들은 겨울의 그 혹한에도 삼베옷을 입고 살았으며 남자는 짚신이라도 신었지만 여자들은 겨울에도 모두 맨발로 고기 광주리나 나무(火木)를 이고 시장을 다녔습니다. 맨발로 얼음을 밟아도 얼음이 바작바작 깨어질 정도로 발바닥이 그대로 신으로 된 셈이지요. 어린아이들은 옷 입은 것을 보지 못했고 그저 흙에 굴러서 뽀얗더군요. 이들의 식량은 주로 귀리, 강냉이, 감자 등이고 쌀은 제사용으로 구해서 제사 회수대로 봉다리를 지어 매달아 둘 정도입니다. 오히려 귀리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쌀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더군요. 시장에서 꼭 사와야 하는 것은 소금뿐입니다. 소금이 떨어졌을 때는 왕머루를 삶은 물에 그 순을 담가놓고 삶은 강냉이를 한 주먹 건져 먹고 담가놓은 왕머루순을 건져서 쭉- 빨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곳의 음식으로 맛있던 것은 냉김치입니다. 열무에 소금과 파를 넣고 담가서 도랑물에 채워서 익힌 것입니다. 참 싱싱하고 맛이 있더군요. 이곳의 집 구조를 보면 반드시 부뚜막에 직접 붙은 방이 하나씩 있고 손님이 와도 그곳에서 그대로 남녀 같이 잡니다. 그러나 서울 손님은 풍습이 다를 줄 알고 따로 방을 정해줍니다. 그 맞은 편이 바로 소외양간으로 되어 있어 식수에서도 쇠똥냄새가 나더군요.

  이곳에서 곤란한 것은 빈대인데 어느 방이고 벽에 빈대가 우글우글합니다. 우리들은 밤이면 방 가장자리에다 빈대약으로 성을 쌓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거짓말 좀 보태면 한 대접은 죽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의 문제는 모기와 등에인데 이곳 모기는 모기장도 뚫고 들어오며 낮에도 산에 가면 모기가 달려들어 물기 때문에 모자 쓴 바로 밑의 머리가 퉁퉁 부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산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불을 놓아 연기를 내고 그쪽으로 머리를 박고라야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필자는 커단 자루를 져가지고 다니며 그 속에 들어가서 잤습니다. 또 하나 잠을 못 자게 하는 것은 바퀴지요. 물지는 않으나 어찌나 소란하게 구는지 잠을 이룰 수가 없댔습니다.

  또 하나의 기적적인 일은 두만강을 끼고 내려갈 때의 일입니다. 호기심에서 강을 건너 만주땅을 약 4키로 걸어본 일이 있는데 그 후(其後)에 알고 보니 이것이 피난길이었으며 활로(活路)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만주의 마적들이 우리 일행을 추격하다가 길이 어긋났기 때문에 우리는 다행히 화를 모면하였으나 그때 마침 출장 중이던 토지조사국원들이 봉변을 당하고 한 사람이 피살까지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지요.

  다음은 노봉(2210미터) 답사 때의 일입니다. 이 산중복(山中腹)에 찝빵나무(Thuja koraiensis)가 약 200∼300미터 쭉 깔려 내려와 있고 그 위에는 눈잣나무(Pinus pumila)가 덮고 있으며, 그 위에는 초원입니다. 찝빵나무 밑은 수십 척 되는 절벽이었습니다.

  이 때의 나무를 거슬러 타고 올라가는 일이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지요. 한발만 실수하면 그대로 가는 것입니다. 한 시간에 불과 수십 미터밖에 못 올라가고 이 같이 하여 상봉(上峰)에 오르니 오후 4시가 넘었습니다. 이곳에서 또 한가지 곤란은 벌들의 피습이었습니다. 천막 속으로 벌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어 애를 먹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꽃밭을 구경하신 분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본산의 2050미터 이상은 준고산초목대(準高山草木帶)로서 초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초원의 꽃밭이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약 10센티미터 내외의 식물들이 일시에 개화합니다. 고산의 꽃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생육기간이 짧은데 있습니다. 북쪽의 고산(高山)은 벌써 8월 하순이면 서리가 내립니다.

  본산식물(本山植物)에 흥미가 있는 사실은 첫째 참나무과(Fagaceae) 식물이 없고 식물의 종류수는 적으나 개체수가 많고, 백두산에 있는 대부분의 식물이 이 산맥에 있습니다. 즉 북만주 흑룡강의 식물대(植物帶)는 이 산맥이 대표적이라는 것, 둘째로는 미루스 씨가 말하듯이 본 산맥의 식물분포가 구획(區劃)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본산의 식물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지질(地質)로 보아 빙하기 이전의 분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 조사의 결과 한국 미발표식물(未發表植物) 15종과 11변종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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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년 낭림산 식물조사시의 한 토막의 기억이 나는군요. 당시의 일행은 일인 무라야마(村山) 박사 외 1명과 필자의 3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원산을 거쳐 함남정평(咸南定平) 검산령의 산촌에서 화전민이 사는 외딴집에서 유숙할 때의 일입니다. 밤 12시경 곤히 잠이 들어 있을 무렵에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5정의 총구가 쑥 들어오며 손들라고 고함을 치지 않겠습니까? 일행은 돌연한 습격에 당황하였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모기와 빈대의 공습에 대비하여 자루(침낭) 속에 들어가서 안으로 잔뜩 동여매고 자고 있던 중이라 급해지고 보니 속히 일어나지지를 않았습니다. 이러다 보니 빨리 손들라고 재차 고함을 치더군요. 가까스로 자루 속에서 나와 부들부들 떨며 손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다음부터는 심문하기 시작하더군요. 우리들은 낭림산에 식물조사를 가는 임업시험장의 직원임을 이실직고한 후, 그제서야 들어와서 그 동안의 경위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약 40리 떨어져 있는 곳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수비경관(日本守備警官)들이었으며 우리들이 권총을 차고 배낭에 여러 가지 이상한 것을 담아 메고 유숙을 하자고 하니 바깥주인이 겁이 나서 그 길로 수비대에게 달려가 무장한 3명의 괴한이 와서 자고 있다고 연락을 해서 급거 출동해 온 것이라고 합니다. 애초에 상대편에서 무장을 하고 있다고 하여 그대로 밖에서 사격을 하려고 하였는데 인원이 적다하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생각만 하면 아찔해집니다.

  이때에 하나 흥미 있던 일은 낭림산 중턱 눈잣나무(Pinus pumila)가 분포해 있는 밑까지 계곡을 따라 참당귀(Angelica gigas)가 군생하고 있던 사실입니다. 참당귀는 귀중한 보약재료이며 생육에는 특이한 천연적 조건이 필요합니다. 즉 낙엽활엽수(落葉葉樹)가 울창한 밑에 부식토가 쌓여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평지에서는 인공적인 재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금강산 식물 답사>

  금강산은 누구나가 잘 알고 있는 우리나라 명승지가 아닙니까? 필자가 처음으로 본 산의 조사를 갔던 것은 1916년의 일입니다. 이때도 역시 나카이(中井)박사와 같이 동행하였습니다.

  이 당시만 하여도 본 산의 식물이 잘 소개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본 산의 식물은 일본 동대부속식물원(東大附屬植物園)에 있던 우찌야마 (內山富次郞)씨가 1902년에 갔던 것이 최초이었고 그 후 파우리(Urbain Faurie, 1906), 우에키(植木秀幹), 모리(森爲三), 이시도야(石戶谷勉) 등에 의하여 58과(科) 208종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조사결과 동산(同山)식물에 33과 502종을 추가하였고 그 중(其中) 한국미기록이 1속(屬) 41종 21변종이었으며 새로 개명한 것이 1속(屬) 17종(種) 17변종(變種)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막대한 수확이었지요. 이 결과는 1918년 금강산 식물조사서(金剛山植物調査書)로서 발표되었습니다.

  그 중(其中) 중요한 것을 들면 금강인가목(Pentactina rupicola), 금강초롱꽃(Hanabusaya asiatica), 그늘돌쩌기(Aconitum Uchiyamai), 당딱지꽃(Potentilla chinensis var. pseudo-chinensis), 산갈매나무(Rhamnus diamantiaca), 연밥피나무(Tilia Koreana), 금강봄맞이(Androsace cortusaefolia), 만리화(Forsythia ovata), 칼잎용담(Gentiana Uchiyamana), 봉래꼬리풀(Veronica diamantiaca var. typica), 솜분취(Saussurea eriophylla), 흰솔나리(Lilium cernum var. candidum), 흰물봉선(Impatiens Textori var. Koreana), 큰애기며느리밥풀(Melampyrum setaceum var. latifolium), 수송이풀(Pedicularis resupinata var. gigantea), 나래미역취(Solidago virgaurea var. coreana), 등입니다.

  본산의 식물은 그 후(其後)에 많은 학자들과 관광객들에 의하여 채집되었습니다. 관광객들에 의해서 채집된 것 중에 좋은 예는 금강초롱꽃(Hanabusaya asiatica)입니다. 이 식물은 최초로 하나부사(Hanabusa)라고 하는 사람(당시 조선총독, 花房義質)이 본 산을 구경하러 가서 채집했던 것인데 나카이(中井)박사가 한국식물을 조사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라 하여 이를 기억하기 위하여 하나부사야(Hanabusaya)라고 하는 속명(屬名)을 붙여서 1911년에 일본식물학회지(日本植物學會誌) 25권에 본산의 특산식물로서 발표한 것입니다.
  신속(新屬)으로 확정한 것은 1909년에 전기(前記) 우찌야마(內山)씨가 1902년에 채집한 표본에 의하여 고정(考定)했던 것입니다. 본 식물은 그 후에 설악산과 명지산(明智山)에서도 채집되었습니다.

  필자는 본 산을 12회나 갔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다녀왔는지 모릅니다. 어찌하여 그리 자주 갈 수 있느냐고요? 내가 본 산을 간 것은 식물채집을 하기 위하여 간 일도 있지만 주로 정부 요인이나 임업관계의 외국 손님을 안내하기 위하여 많이 갔었습니다. 금강산을 일주하는 코스는 온정리에서 만물상, 온정령을 거쳐 내금강으로 들어가 말휘리(末輝里) 장안사를 들러 비로봉을 구경하고 유점사 개재령(介在嶺)을 넘어 해금강을 구경하고 온정리로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고 해금강을 보지 않고는 한국의 금수강산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도 총석정의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같은 아름다운 조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본 산에서 필자가 흥미 있게 느꼈던 일은 내금강 금강원 앞의 새양버들(Chosenia bracteosa) 군락의 발견입니다. 이 식물은 최초로 함남(咸南) 풍산(豊山) 황수원(黃水院)에서 채집되어 1920년에 나카이(中井)박사에 의해서 특산속(特産屬)으로 발표되었던 것인데 껑충 뛰어 이곳에 와서 군생(群生)하고 있다는 것은 식물분포지리학상으로 대단히 흥미 있는 일입니다. 이곳이 본 식물의 남한(南限)으로 생각했는데 그 후 설악산에서 보고되어 있으나 이 식물은 꽃을 보지 않고서는 분별하기 곤란하므로 필자는 이직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 식물은 동아(東亞)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 보고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재미있는 것은 선녀봉 위에 있는 잎갈나무(Larix olgensis var. koreana)의 대삼림(大森林)입니다. 처음에 유점사 앞에서 약 30년 생의 잎갈나무를 발견할 때에는 북한에서 이식(移植)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백두산 평원에 대삼림을 형성하고 있는 잎갈나무는 금강산이 분포상 남한(南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던 것은 온정령의 900미터 지점에 눈잣나무(Pinus pumila)입니다. 이 식물은 설악산을 남한(南限)으로 하여 분포되어 있는 식물인데 수직적으로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울릉도(鬱陵島) 식물 답사>

  우리나라 동해의 고도(孤島)인 울릉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필자는 1917년과 1961년 2회에 걸쳐 답사한 일이 있습니다. 본도(本島)는 주위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고 축항(築港) 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해의 파도가 심하여 선편(船便)이 곤란하여 내왕이 몹시 불편합니다. 파도가 심할 때는 갔다가도 하륙(下陸)을 못하고 되돌아오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본 도는 일찍이 일인(日人에 의하여 Dagelet(죽도, 竹島)란 이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일본 경도에 있는 큰 절을 지을 때 울릉도의 느티나무를 가져다 기둥을 하였다고 합니다.

  필자가 본 도를 최초로 갔을 때는 나카이(中井)박사와 미국식물학자 읠슨(Wilson)박사와 동행을 했습니다. 본 도의 식물은 1912년에 오까모도(岡本金藏)씨에 의하여 최초로 채집되었고 그 후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답사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답사결과는 1914년에 울릉도식물조사서(鬱陵島植物調査書)로 발표되었습니다.

  본 도의 식물 특히 수목은 해발 600미터를 경계로 하여 현저히 다릅니다. 600미터 이하에는 후박나무(Machilus rimosa var. Thunbergii), 굴거리나무(Daphniphyllum macropodum), 감탕나무(Ilex integra var. typica), 동백나무(Camellia japonica), 보리밥나무(Elaeagnus macrophylla), 송악(Hedera Tobleri), 식나무(Aucuba japonica var. typica), 순비기나무(Vitex rotundifolia), 꾸지나무(Broussonetia papyrifera), 솔송나무(Tsuga Sieboldii), 섬잣나무(Pinus parviflora), 바위수국(Schizophragma hydrangeoides) 같은 온대식물이 있고, 600미터 이상에는 너도밤나무(Fagus multinervis), 털고로쇠(Acer mono var. paxii), 홍만병초(Rhododendeum Fauriei var. roseum), 두메오리나무(Alnus maximowiczii), 섬대(Sasa kurilensis) 같은 것이 있고, 난지성 상록활엽수(暖地性常綠闊葉樹)는 전연 볼 수 없습니다.

  본도 식물의 특색은 ①식물의 종류가 가장 적은데 특산식물이 극히 풍부한 것 ②산지식물과 해안식물이 해안지방에 한하여 600미터 이하의 어느 곳에나 혼생하며 ③특산 식물인 너도밤나무, 섬피나무, 털고로쇠 등이 정상에 거의 순림(純林)을 이루어 군생한다는 것 등이다. ④솔송나무, 섬잣나무, 왕호장근, 섬대 등은 우리나라 딴 곳에서는 볼 수 없으나 이곳에는 번성하고 있다는 것 ⑤본토의 동위도(同緯度)인 다른 곳에 비하여 현저히 남방계의 상록활엽수가 많다는 것 ⑥순해안식물(純海岸植物)이 적으며 ⑦넌출성인 목본(木本)이 많아 수간(樹幹)이나 암면(岩面)을 덮고 있다는 등을 들 수 있으며,
  특산 식물로는 섬버들(Salix Ishidoyana), 섬국수나무(Physocarpus insularis), 섬개야광나무(Cotoneaster Wilsonii), 섬나무딸기(Rubus takesimensis), 섬벚나무(Prunus takesimensnsis), 섬황경피나무(Phellodendron insulare), 섬댕강나무(Abelia insularis), 섬피나무(Tilia insularis), 울릉말오좀대(Sambucus pendula), 섬괴불나무(Lonicera insularis), 섬쥐똥나무(Ligustrum foliosum), 섬개회나무(Syringa venosa), 섬말나리(Lilium Hansonii), 섬자리공(Phytolacca insularis), 큰노루귀(Hepatica maxima), 섬현호색(Corydalis filistipes), 섬장대(Arabis takesimana), 섬기린초(Sedum takesimense), 섬제비꽃(Viola takesimana), 섬바디(Cystaenia takesimana), 섬시호(Bupleurum Latissimum) 등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식물상(Forla)과 본 도의 성인문제(成因問題)를 관련시켜 논의하려는 학자들이 있으며 이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두 의견을 간단히 소개하면, 첫째 나카이(中井)박사의 의견입니다. 이에 의하면 울릉도는 본래 본토와 일본이 연결된 한 대륙이었던 것이 주위가 가라앉아서 분리된 섬으로 이 같은 사실을 지리학 또는 고생물학의 사실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①목본식물(木本植物)의 공유분자수(共有分子數)가 본토와 일본에 비슷함은 일본과 한국이 본래동일대(本來同一帶)의 식물구(植物區)에 있었음을 말하고 본 도의 난지성 수목(暖地性樹木)중에는 종자가 커서 이동하기 곤란한 것이 있다는 것 ②본 도에는 순해안식물(純海岸植物)이 전(全)식물의 6%밖에 안 된다는 것은 사위(四圍)의 땅이 가라앉은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보고 있으며 ③또 일본과 한국 영일군(迎日郡)에서 나온 너도밤나무(Fagus)의 화석(化石)은 모두 제삼기전반(第三紀前半)에 속하는 지층(地層)에서 나온 것으로 화석잎의 외연(外緣), 엽맥(葉脈)의 배치, 기각(基脚) 등의 특징이 본 도의 너도밤나무(Fagus)와 일치한다. 이것은 과거 연속된 대륙으로 동시대에 분포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시도야(石戶谷)박사의 의견은 전기(前記) 나카이(中井)씨와는 달리 본 도는 화산도(火山島)로서 지중에서 독립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논거로는 ①울릉도는 제주도나 백두산과 같이 알칼리(Alkali) 조면암(粗面岩)이 산체(山體)를 이루고 그것이 현무암을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시대에 형성된 화산도이다. ②본 도에 있는 포유동물은 뱀, 개구리, 쥐, 산고양이가 있는데 이 모두가 육지에서 옮겨간 역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본 도의 동식물은 모두 섬이 생긴 뒤에 옮겨진 것이며, 대륙에서 분리되었다고 해도 대분화(大噴火)가 일어나 당시의 모든 생물은 전멸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후자에 동의하고 싶습니다.

  당시에 느낀 한 가지의 이야기는 우리들이 본 도의 주봉(主峰)인 성인봉(聖人峰, 900미터)을 조사할 때의 일입니다. 올라가던 도중 높이 약 20미터 직경 60센티미터 가량의 너도밤나무(特産種)의 대목(大木) 한 그루가 절벽 위에 비스듬히 서 있고 그 위에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 꽃을 채집하기 위하여 5 원(圓)(당시 白米 一石價)의 현상금을 걸어도 따라간 5, 6명의 인부 중 한사람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윌슨 박사가 구두를 신은 채로 올라가서 그 꽃을 채집하여 모자 속에 넣어 가지고 내려온 뒤에 본 즉 그의 앞가슴이 벗겨져 피가 맺힌 것을 보고 일행은 경탄한바 있습니다. 그 후에 물으니 '윌슨'씨는 남미 어느 곳에서 채집 도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필자는 저녁에 들어와서 그 날 채집한 약 2,000여 점의 표본을 새벽 3시까지 완전히 정리했더니 다음날 '윌슨'씨가 다른 곳으로 채집 가던 도중 나의 숙소에 들러 산더미같이 정리되어 있는 표본을 보고 한국에도 이런 사람이 있느냐고 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1916년 전남 매가도(梅加島)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백십일 바람(태풍)을 맞아 하룻밤 고생을 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때 石戶谷 박사와 같이 갔는데 태풍을 만나서 3일간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그 날 밤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부는지 집이 흔들려 겁이 나서 우리는 집밖에 나와 나무 끝을 붙잡고 엎드려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물론 일어서면 사람도 날려갑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전 마을의 지붕은 모조리 날아갔고 해변가 전답에 파종한 곡식들은 바람과 해일에 의하여 모조리 날아갔습니다.

  끝으로 전북 어청도(魚靑島)에 갔을 때의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이때가 1933년이었습니다. 당시 이곳에는 3정보 가량의 상록활엽수림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본 도에 최초로 도래한 사람의 무덤이 있는데 자고로 이 삼림에서 가랑잎 하나만 가져도 병이 난다는 전설이 있어서 이 같이 금양(禁養)되어 왔던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기 전 해 즉 1932년에 그곳 국민학교 교장이 교사(校舍) 신축을 위해 대목(大木)을 한 그루 베어다가 대들보를 하였는데 무사하였다고 합니다. 이후부터는 이 같은 미신이 파괴되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삼림이 파괴되기 시작했지요. 산림보호를 위하여는 이 같은 미신도 필요할 경우가 있습니다.

  앞으로의 여생에 계획이 없느냐고요? 이제부터 출발입니다. 오늘까지 내가 해온 모든 것을 총정리 해야 할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의 여생이 얼마나 남았을는지, 그동안에 과연 이 같은 일을 할 수 있을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실은 이 같은 계획 하에 1년 전부터 필자가 본교(成大)에 온 이래 수집한 모든 표본들의 재정리에 착수했습니다. 내가 이 같은 일을 하는데는 현 총장(總長) 이정규(李丁奎)박사의 물심양면의 협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지상(紙上)을 빌어 감사하는 바입니다. 이 정리가 끝나게 되면 약 2만여 점의 식물표본을 누구나가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대장 및 카드가 정리되어 식물표본 센터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필자가 임업시험장에서 대표본실을 완성했던 이래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도 우리나라에는 미답사지(未踏査地)가 대단히 많습니다. 이와 같은 식물자원을 개발하고 국제무대에서 선진제국들과 같이 연구를 하자면 이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연구기관이 필요합니다. 이 같은 생각에서 필자는 학교당국에 '생물자원연구소'의 설치를 제안했던 것입니다. 연(然)이나 불행히도 금년 계획에 예산관계로 좌절당한 것은 무척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생물자원연구소의 할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만 몇 가지만을 들어 보자면 ①자원생물의 발굴 ②생물자원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표본 센터의 완성 ③각 분야의 생물지(生物誌)의 완성 ④외국과의 표본 교환 ⑤전문 학술지의 발간 등 많은 것이 있습니다.

  우선 필자가 꼭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한국식물지(韓國植物誌)'도 이 같은 기관이 없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나라 국토가 양단(兩斷)되어 있는 관계로 자료수집을 위해서는 일본에 연구원을 파견하여 동경대학에 있는 한국식물표본과 동아(東亞)의 표본을 조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편집자 주
「숲과 문화」에 게재하는 하은(霞隱) 선생의 이 회고록은 1964년 성균관대학교 신문에 분재하였던 것인데, 강원대학교 명예교수임과 동시에 하은 선생의 직제자인 이우철 교수가 스크랩하여 보관하고 있던 기사를 다시 소개하는 것이다.
  금번 소개하는 회고록은 신문 기사 중 오자를 바로 잡는 정도로만 수정하였다. 수정에 참고한 자료는 역시 이우철 교수가 보관하고 있는 회고록 초고에 의하였고, 신문 혹은 원고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발표 당시의 예전 문체가 그대로 전달되도록 하였다.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식물의 학명은 신문 기사에 오자가 많아 하은 선생의 『한국 식물도감』에 따랐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학명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원문 그대로 게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귀한 자료를 선뜻 내 주신 죽파 이우철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하은 정태현 박사님의 약력을 간략히 소개한다.
  고 정태현 박사님(1833-1971)은 1833년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시어, 1908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임업권농모범장에 기수(技手)로 첫 발을 내디딘 이래 백두산에서 금강산,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전역을 답사하시면서 평생을 식물 채집과 분류, 표본 작성과 관련 도서 발간 등으로 헌신하시면서 우리나라 식물 분류학의 초석을 놓으셨다. 1952년부터는 전남대 교수로 재직하셨고, 1954년부터 1969년 정년퇴직 하시기까지는 성균관 대학교에서 식물 분류학 분야의 후학을 양성하시었다.
  고 정태현 박사님은 식물 채집, 분류 및 표본을 만들면서 수 권의 도감류와 식물지를 저술한바 있고, 1956-57년에는 "한국 식물도감" 목본부와 초본부를 상하 2책으로 출판하시어 우리말로 된 체계적인 도감을 갖게 해 주셨다. 1968년에는 5.16민족상 학술부분 본상을 수상하였고, 그 상금을 기금으로 1969년 자신의 아호인 하은(霞隱)을 따서 하은 생물학상 재단을 창립하시어 그 10월에 박만규 교수를 1호 수상자로 배출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료출처「숲과 문화」: http://www.humantree.or.kr/active/journal/2002-5-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