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24. 00:38ㆍ詩
파문/권혁웅 - 카톡 좋은 시 309 카독 좋은 시 ♠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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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권혁웅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2001년>
ㅡ일간『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8』(조선일보 연재, 2008)
파문 시 모음
http://blog.daum.net/threehornmountain/13742570
파문/엄원태-파문/이은봉-김경성-파문/이공 연상되는 시♠비교 시♠시 모음
파문
/엄원태
운부암 아래 물엉덩이에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허공에 걸쳐진 소나무에 쌓인 봄눈이 녹아떨어지며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수면에
와인잔 연주나 오르골 소리처럼 동그란 파문들을 탄주한다
저토록 영롱한 두드림은 일찍이 내 청춘에도 있었다
지금 이토록 생생하게,
그 심금心琴의 공명共鳴을 기억한다
내 이마는 미미하게 번져 오던 그 촉감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월간『현대시학』(20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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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이은봉
애초에 돌을 던지지 말아야 했다
돌에 맞은 호수는 이내 파문을 일으켰다
애써 마음 가다듬고 있는 호수를 향해
돌을 던진 것 자체가 문제였다
파문은 둥근 물결도 품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파도도 품고 있었다
파도는 세상을 떠도는 한 자루 칼!
칼을 품고 있는 파문이 문제였다
칼은 어떤 것이든 찌르기 마련!
아무데서나 상처를 만들기 일쑤였다
매번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한바탕 곪아 터지고 나서야 겨우 아물었다
누군들 아프지 않으랴
누군들 반란을 꿈꾸고 싶으랴
공들여 마음 가라앉히고 있는 호수를 향해
돌을 던진 것 자체가 문제였다
애초에 돌을 던지지 말아야 했다
돌을 맞고 어찌 파문을 일으키지 않으랴.
-『시안』(2009. 가을)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작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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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김경성
물길 솟는 우물 밑바닥
너무 깊은 곳까지 두레박 던져
물이끼 흔들며 퍼 올린 물
마실 수 없다
중심까지 파고드는 일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바다 밑에서 퍼져 올라오는
바랜 빛깔
푸른 기억으로 남는 것은
언제나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이었듯이
어쩌면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이
가장 깊은 중심일지도 모르는 일
가만히 퍼 올린 우물물,
너의 눈빛처럼
서늘하다
―시집 『와온』 (문학의전당,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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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 이공
돌의 날개를 본 적이 있다.
당신 생각만 해도 어둑해지던 강가
당신 생각으로 굳어져버린 돌 하나 다듬어서 물수제비 뜰 때
떠오를 뜻 가라앉을 듯 더 멀리 보내지 못한 채 멎은
자리.
미련처럼 가라앉아버린 그 자리에서
온통 당신 스치고 간 흔적밖에 없다고
둥근 날개 펴고 다시 내게로 돌아와 손등을 적시는
파문.
돌의 날개로 젖은 손등 말려본 적이 있다
-김남조, 이유경, 유재영, 정일근 選 - 『좋은 시 2011 』(삶과꿈, 2011)
강북구의 역사와 문화 - 삼각산(북한산)
산이 좋아요, 시도 좋아해요
사물에 고인 말의 파문을 뒤적이는 시 최서진 (시인. 문학박사)
1. 사물들의 얼굴 만들기 시인에게 시집은 시인의 집과 같다. 그곳에서 형형색색의 발화들이 모였다가 난분분 흩어지는 사이에 시적 진실이 시계처럼 작동한다. 마경덕 시의 시적 진실은 ‘사물’에 집중한다.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사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 바라보고 듣는다. 사물들에게 입과 귀를 달아 주는 것. 입은 과잉이거나 결핍이다. 귀는 진실이거나 허상이다. 사물들에 대한 치밀하고 깊이 있는 시인의 시선을 따라 상상력이 부딪치고 싸워나가야 할 새로운 입(현재)을 열어놓고 있으며, 그 입을 통해 사물들의 실체를 밝혀내고 있다. 따라서 이 시집은 ‘사물들의 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물들에 고인 기억과 감정이 파문을 부추겨 어느덧 근원에 가 닿으려는 뜨거운 유랑이 이 시집의 주조를 이룬다.
마경덕이 추구하는 시적 상상력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핍진한 언어와 사물들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인해 빛을 발하고 있다. 그곳에는 끝없이 분열하며 증식하는 자신의 삶과, 심연을 끌어안고 대치하는 뜨거운 각성이 존재한다. 시를 쓰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구원’으로 본다면, 시인이 사물의 세계를 언어를 통해서 ‘구원’해 준다. 그것은 아름다운 사물들의 세계에 스며있는 균열과 전율을 포착해 사물들의 내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방식이다. 시인의 새로운 발성법과 미학적 위력을 품은 시편들을 이 시집을 통해 목도할 수 있다. 도장, 오동나무, 톱밥, 콩, 책, 피리, 방, 시계, 커튼, 집, 얼음, 포스트잇, 티슈, 벼루 등에 은밀하게 스며들어 각각의 몸을 극진하게 살아낸다. 사물을 관통하면서 울리는 사물의 진실을 듣는다. 아드르노는 무상함을 통하지 않고 초월성에 대한 어떤 기억도 불가능하가다고 말한다. 마경덕 시인은 그 가능성을 무수한 사물들을 통해 발견해낸다. 예를 들면 “죽음이 스쳐간 아찔한 흔적” (「도장」)을 통해 새롭게 확장 된 사랑의 실체를 발굴해 낸다. “제 몸에 갇혀 빙빙 돌던 흔적들, 파장은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톱밥」)는 세상의 파장들을 자신의 몸에 오롯이 축적하는 모습을 그린다. “잔잔한 호수에 무엇이든 통째로 삼키는 거대한 식도食道가 있다.” (「물의 입」)는 아픈 성찰을, 잔잔하게만 보이는 물의 표정의 이면으로 아찔하게 우리를 안내한다. 헌옷가지를 싣고 온 노인이 눈물 괸 눈으로 오동나무를 올려다보면 가슴이 뛴다 고놈 참 곱네, 지나가는 한 마디에 하마터면 헐값으로 꽃을 떨이할 뻔 했다 한때 나도 저리 고왔지 저 놈으로 관이나 짰으면 좋겠네 옻칠까지 해놓으면 그보다 더 좋은 집이 없제 주고받는 웃음에도 가슴이 서늘해져 그때마다 나이를 꼽아보지만 아득하고 흐릿하다 누군가의 마지막집, 어쩌면 고물상과 함께 늙은 저 노인을 따라 순장 당할 지도 모른다
—「오동나무 계산법」부분 시인이 ‘오동나무’를 통해 발견한 죽음에 대한 인식의 풍경을 만나볼 수 있는 시이다. 시에 기대어 말하면, 우리 삶에 뿌리 내리고 있는 청춘, 죽음, 희망이 시간대 별로 변주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꽃이 피었을 때 심미적 가치관을 소유한 오동나무는 현실에서 매순간 곤경에 처한다. 늙은 오동나무에게는 보랏빛 꽃이 전부여서 꽃을 잃을까봐 숱한 번민과 방황의 날들을 지난다. “저 놈으로 관이나 짰으면 좋겠네”라는 노인의 말(곤경)에 무심하면서도 고물상과 함께 순장 당할지도 모른다는 표현으로 불안한 자아를 대변한다. 노인의 병색을 살피며 “조마조마한 오동나무”의 아픔은 고물상 주변을 누추하게 배회하고 있다.
그러나 오동나무에게 불안과 고통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동쪽으로 가지 하나 더 늘리겠다고 다짐하는” 열망이, 포기를 모르는 나무의 존재론적 깊이를 확인 시킨다. 오동나무의 현실인식은 현실을 살아내는 시인의 삶과 시적 태도에 투영된다. 사물을 통해서 드러나는 시인의 삶과 내면이 오동나무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다. 「오동나무 계산법」에서 오동나무의 고통은 계산되지 않는다. 시인은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다. 사물의 심연과 시인의 심연이 만나 악몽의 시간들조차 사랑해야 한다는 초월적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오동나무의 고통은 시인의 고통이며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고통이다. 시인은 오동나무의 고립과 고독을 담담하게 ‘계산해’ 주고 있다. 사물들의 계산법이다. 뒷목을 치는 전략에 돌풍과 우레를 허리에 두른 뱃심도 쿵, 고꾸라진다 초리까지 번진 통증에 허공을 붙잡은 팔뚝이 비틀거리고 한 그루 주소가 지워진다
제 몸에 갇혀 빙빙 돌던 흔적들, 파장은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이 산 저 산 떠돌며 톱자루를 쥐고 밥을 먹인 사내도 평생 나무밥을 먹었다
톱의 밥 굶으면 톱도 녹이 슨다
벌목공이 다녀간 곳곳에 잔반殘飯이 수북하다
—「톱밥」전문
현실에서 “급소를 물어뜯는 톱”을 인식하는 시인의 자아성찰이 두드러진다. 벌목공은 늘 뒷목을 치는 전략으로 온다. 여기서 톱과 벌목군은 신(절대자)일수도 있고, 타인일 수도 있고, 혹은 스스로 책임의식을 일깨우는 비판적 자아이자 자기 암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생의 골목에 배치되어 있다는 인식인데,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끝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뼈아픈 자각을 동반한다.
“돌풍과 우레를 허리에 두른 뱃심도 쿵, 고꾸라진다” 슬픔은 가망 없이 절대화된다. 영혼은 날카로운 칼끝으로 손목을 몇 번이나 긋는 것처럼 처절한 순간에 직면해 있다. 차가운 바닥에 온 몸을 붙이고 가장 치열하게 산을 배우는 나무가 있다. “제 몸에 갇혀 빙빙 돌던 흔적들”을 무상하게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본다. 류짜이푸가 벽을 마주하고 홀로 생각에 잠기듯이. 하늘을 향해 자라던 나무가 바닥을 향해 쓰러져 우주와 인생의 깊이를 만지고 사색한다. 결론적으로 “파장은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라는 투시의 시선을 획득한다. 실은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넘어서야 자신을 건너갈 수 있다는 진리를 압축해 보여주는 시, 「톱밥」이다. 그러나 나무는 갈 길이 있다. 바닥에서 쓰러져 바닥을 딛고 일어나야 할 때이다. “톱의 밥/ 굶으면 톱도 녹이 슨다”는 “톱자루를 쥔 사내”를 투시하고 측은하게 여김으로 사랑은 희생으로 변주되고 드디어 완성된다. 사물의 진실을 관찰하고 언어를 절제하면서 본질을 잡아내어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사물의 입이 되는 방식!
2. 책의 귀가 태어나고
사물은 여러 가지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감정에서부터 은밀하고 역동적인 감정까지. 사물들은 시간의 무늬를 수렴한다. “날콩을 볶는다/ 비린 피가 고소해지도록” (「볶은 콩」)은 내면으로 향하는 시인의 상상력과 만나 빛을 생성한다. 시인의 내면으로 죽음이 관통되는 순간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피 흘림이 고소해진다는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인간의 피의 역사처럼 전율에 가 닿는다. 사물과 사물들 속에서 긴장이 팽팽할수록 사물의 미학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그것들에 대한 따뜻한 동경과 믿음이, 사물들 속에 편재해 있는 그늘을 건져 올리는 힘으로 작동한다.
귀 접힌 자리마다 쫑 메리 해피 도꾸 누렁이… 쥐약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눈빛이 생각나 눈에 든 문장에 밑줄을 긋네 쫑긋, 귀를 추켜들지 못하고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들고 가랑이에 바르르 눈치를 밀어 넣던 비굴한 이름들 흘러내린 두 귀를 실로 묶다가 본드를 발라본 적 있네
셰퍼드처럼 진돗개처럼 자존심을 세우지 못한 아비도 모르는 개들은 마루 밑 신발짝이나 물어뜯다가 복날에 하나 둘 사라졌네
—「책들의 귀」부분
사물이나 세계의 이면에 내재한 귀들이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책을 읽다가 무심코 손을 움직여 곱게 접히는 순간이 귀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귀로 들어오는 것들은 환한 정서와 축축한 정서를 같이 불러일으킨다. 오늘의 귀는 ‘축축한 귀’와 ‘폐허의 귀’로 귀결된다. 가장 불길한 붉은 달이 “귀 접힌 자리마다” 흘러내리는 비극적 삶의 실존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셰퍼드처럼 진돗개처럼 자존심을 세우지 못한” 개들은 “마루 밑 신발짝이나 물어뜯다가 복날에 하나 둘 사라졌네”라고 감각해낸다. 욕망과 욕망이 얽히고설킨 세계의 잔혹한 질서를 유머스럽게 드러낸다. 세계의 상처로부터 스스로 방어해야만 하는 책과 책속의 접힌 귀들을, 태생적 개의 귀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늘 뒤편이 있어 커튼의 주름은 사라지지만 접혀있을 때가 제 얼굴이다
그는 여러 장의 배경을 가지고 수시로 표정을 바꾼다 그는 안이면서 바깥에 민감하므로 누군가 허리를 잡아 묶을 때 안심한다
커튼의 힘은 하늘이 검은 휘장을 치는 것도 모두 주름의 힘 한 바퀴를 돌면 저녁이 된다 이처럼 부드러운 관절을 본 적이 없다
함부로 뛰어드는 바깥
커튼이 있어, 나는 대낮에 태어났다
—「커튼」부분 감추게 하거나 보여주게 하는 사물(커튼)의 속성을 통해 삶의 고단함과 쓸쓸함, 상실 그리고 사람과 삶의 난제들을 드러낸다. 시인이 사물을 들여다보는 몸부림은 존재 탐구의 시선에 닿아 있다. 사물의 심연을 자아의 거울로 들여다보는 것이 곧 시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늘 뒤편이 있어 커튼의 주름은 사라지지만/ 접혀있을 때가 제 얼굴이다”라는 뛰어난 시적 인식이 감각적 상상력이 빚어내는 내면의 세계에 닿아 있다. “안이면서 바깥에 민감”한 커튼의 속성을 통찰하고 “누군가 허리를 잡아 묶을 때 안심한다”는 숙명적 번민과 절망도 기록한다. 무엇보다 “커튼의 힘은/ 하늘이 검은 휘장을 치는 것도 모두 주름의 힘”이라는 사유로, 공허하게 주름(관계)의 실상을 드러낸다. 억압과 유연성의 현실적인 함의들에 의해 사물(커튼)의 상징성이 촉발된다. 커튼이 있어 역설적으로 ‘함부로 뛰어드는 바깥’ 이 있으며, ‘나는 대낮에 태어났다’ 고 커튼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3. 붉게 익어가는 사유와 사물
겨울의 발톱이 빠지고 뒤꼍에 잔풀이 돋아도 사람의 흔적은 폐허로 남았다 눈이 침침한 대추나무 절구통 밑으로 굴러간 묵은 대추 몇 알 더듬는 봄날 장대를 휘두르며 빈집을 다녀간 바람의 성대만 늙지 않았다 —「빈집」부분
적막이 고인 집이다. 사람이 집을 떠나 “단단한 고요의 매듭”으로 빈집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인의 세계인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적 자아가 추구해온 세계가 집약되어 나타난다. “사람의 흔적은 폐허로 남았다”는 “적막이 거름으로 쓰”일 수 있는 자기정화의 과정을 겪은 것이기도 하다. 이상과 현실의 양극단 사이에서 “눈이 침침한 대추나무”는 수많은 방황을 거듭했다. 그만큼 자유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바람의 성대만 늙지 않았다”는 존재와 세계에 치열하게 성찰하는 시적 담론은 늘 젊다는 이야기로 듣는다. 시인은 현역에 복무하며 ‘바람의 성대’ 같은 ‘늙지 않는’ 고요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함부로 나서지 않는 칼 칼집도 제게 꼭 맞는 몸만 모신다 둘은 혈연의 관계, 더러 길을 놓치는 천형天刑도 있어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늙은 어미처럼 빈 칼집은 불안하다 칼날끼리 불꽃을 토하는 칼 미쳐 날뛰던 기운도 집에 들면 온순하다 칼을 달랠 수 있는 건 칼집뿐이다.
—「칼집」부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칼집은 고요하다. 칼을 빼기 전에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단칼에 어둠의 목까지 딸 수 있을 것”이므로. 칼의 집이 고요하다. 그렇게 집들은 삶의 보이지 않는 흉터들로 가득하다. 진리는 경험이며 각자가 스스로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루어 내야 한다. “함부로 나서지 않는 칼” 그러나 칼을 뺐을 때는 날카롭게 번득인다. 정확히 구름 너머의 허공을 가른다. “더러 길을 놓치는 천형天刑도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지만, 칼의 망설임은 없다. “칼날끼리 불꽃을 토하는 칼” 칼의 춤이 펼쳐진다. 칼을 뺀다는 것은 서로의 꿈을 헤집는 것처럼 슬픈 일. 아주 깊고 고요한 밤에 칼이 날개를 편다. “칼을 달랠 수 있는 건/ 칼집뿐이다” 칼집 속의 얼굴들은 모두 시대의 자화상처럼 고독과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다. 집으로 가는 우리들의 얼굴처럼……
얼음은 얼음끼리 뭉쳐야 사는 법 얼음공장에서 냉기로 꽁꽁 다진 물의 결심이 풀리는 시간, 한 몸으로 들러붙자는 약속마저 몽롱하다
서서히 조직이 와해되고 체념이 늘어난다 핏물처럼 고이는 물의 사체들 달려드는 파리 떼에 모기향이 향불처럼 타오르고 노점상은 파리채를 휘두른다
떨이로 남은 고등어, 갈치 곁에 누워버린 비리고 탁한 물
이곳에서 살아나간 얼음은 아직 없었다
노점상은 죽은 생선에 자꾸 죽은 물을 끼얹는다
—「얼음의 죽음」부분 자아의 실존에 대한 불확실성은 「얼음의 죽음」으로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노점상은 죽은 생선에 자꾸 죽은 물을 끼얹는다”는 죽음을 초월한 사물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얼음은 얼음끼리 뭉쳐야 사는 법”이다. 녹지 않기 위한 감정과 감정이 얼음을 만든다. “얼음공장에서 냉기로 꽁꽁 다진 물의 결심이 풀리는 시간”은 비극적인 공간이다. “조직이 와해되고 체념이 늘어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풍자와 해학성이 드러난 작품이다. “떨이로 남은 고등어, 갈치 곁에 누워버린/ 비리고 탁한 물”의 시간이 진술된다. 결심이 풀렸으므로 얼음의 몸은 비극적인 서사가 자리 잡는다. “이곳에서 살아나간 얼음은 아직 없었다” 는 순환론의 세계관을 통해 삶과 죽음은 하나이며 삶은 고통 그 자체임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4. 사물을 무늬를 수렴하는 방식은 운명처럼 배움은 육체와 정신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시인은 사물로 여행을 떠나는 방법을 택한 듯 보인다. 그리하여 텅 빈 사물의 민낯과 마주하고 사물의 진실과 마주할 수 있게 만들며, 사물의 상태와 존재와의 교감의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오감을 고요하게하고 관념의 순환을 잠깐 정지시킨다. 그리고 사물 스스로가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방식으로 사물의 말을 받아 적는다. 실존의 복판에서 “저절로 고아라는 말을 알게 되는 것처럼”(「나무고아원」) 詩가 자신의 주소를 찾아 나가는 과정임을 감각하고 자각한다.
200장의 약속이 상자 안에 접혀있다 한 장 한 장 뽑아 쓴 연애는 바닥이 났다 나를 다 써버린 애인, 200일을 못 넘기고 뽑혀졌다 사랑에 흠뻑 젖어 나는 찢어지기 쉬웠다 보름달이 마당 살구나무 가지에 발을 내려놓기 전, 친친 감긴 애인을 두루마리처럼 풀어버렸다 살구꽃 터지듯 만개한 그를 질질 흘렸다 나는 일회용이 아니야, 켜켜이 접힌 깊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코를 풀고 욕설을 닦고 지루한 연애를 요절낸 그 밤, 노랗게 살구는 익어가고 침이 고이는 그늘 아래 나를 기다리던 애인이 막무가내 뽑혀 나왔다 설익은 살구가 후드득 발등으로 떨어졌다 유효기간을 넘긴 애인이 쓰레기통에 흘러 넘쳤다 시큼한 애인이 눈에 고였다 이젠 끝이야 마지막 한 장으로 구석구석 그를 닦았다 그는 자꾸 솟았다 —「크리넥스 티슈」전문
“200장의 약속이 상자 안에 접혀있다”는 통찰은「크리넥스 티슈」의 본질을 단번에 읽어낸 것. 약속으로 점철된 우리의 삶을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그것을 단숨에 우리 앞에 보여준다. 그 시간의 허공에 의미가 자리 잡는다. “나는 일회용이 아니야,”우리 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진실한 부분이 “막무가내 뽑혀 나왔다” 티슈는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일 수 있다. 손을 닦기도 하고 눈을 닦기도 하지만 다른 쓰임을 가질 수 도 있다. 더 나아가 “사랑에 흠뻑 젖어 나는 찢어지기 쉬웠다”는 무시무시한 자기 체험을 표현한다. 그 때마다, 「크리넥스 티슈」의 하얀 침묵을 떠올린다. 이쯤에서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명제를 생각한다.
흰 구름이 되어 돌 위를 떠다닌 아름다운 문양도 다 묻어나가고 파인 가슴만 남았다
먹을 가는 소리를 삼키고 쏟아낸 묵서墨書의 흔적은 붓발에 말려 어디론가 흘러갔다
차가운 벼룻돌을 어루만지면 삼켰던 꼬리가 비백飛白으로 다시 솟을까 명을 다한 벼루가 날아갈 듯 가볍다 —「벼루」전문
“흰 구름이 되어 돌 위를 떠다닌 아름다운 문양도/ 다 묻어나가고 파인 가슴만 남았다”(「벼루」)는 사물에 대한 세밀한 통찰로, 이상은 높지만 결국 신산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비유가 돋보인다. 구름과 돌과 붓의 묘한 조화가 이채롭다. 드디어 벼루가 날아간다. 5. 사물은 그렇게 다른 손을 거쳐서 다시 태어난다 사물의 본질이 색을 선명하게 끌어내는 시인이 있다. 사물의 갖가지 균열을 조명하여 드러내고 표현해내는 시인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물에 대한 정서적 교감과 해석적 통찰을 이 시집에 담았다. 그런데 감각적이다. 이 점에서 마경덕을 ‘사물 전문가’시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물들의 쓸쓸한 독백을 기록하는 일은, 멀리 걸어간 삶의 실체들을 ‘사물’을 통해 느끼고 사유하는 것. 그것은 다른 곳으로 흘러가 새롭게 증식된다.
꽃게는 발을 높이 치켜든다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인간의 세계에서 두 손을 드는 건 맨 마지막 방법인데 게들의 법칙은 그 방법이 우선이다 최선은 최후가 될 수 있다 저항은 마치 항복처럼 보여 두 발이 두 팔로 읽힌다
물샐틈없이 단단히 조인 모래펄의 시간들 열리면 끝장이다 목숨을 병뚜껑처럼 따버리는 뭍의 세상에게 다리도 뚝 떼어주고 게구멍을 향해 옆걸음질 쳐야한다
—「뚜껑」부분
마경덕 시인의 인식 전환은 “ 최선은 최후가 될 수 있다/ 저항은 마치 항복처럼 보여 두 발이 두 팔로 읽힌다”로 발견되면서 이루어진다. 시에 항복하지 않는 시인의 말이다. 한 번도 자신의 삶을 포기 않는 사물의 말이다. 여전히 힘든 시간에도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자신을 단단하게 만든다. “열리면 끝장이다” 그 삶은 열리지 않기 위해 “다리도 뚝 떼어주고 게구멍을 향해 옆걸음질 쳐야”하는 삶이기도 하다.
첫 가방은 비밀번호도 쉽게 풀었다 그때마다 고집 센 가방이 열렸다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대신 가방을 보냈다 일이 꼬일 때도 가방이 곁에 있었다 든든한 어머니를 메고 커다란 아버지를 들고 유학을 갔다 가방을 털어 아파트를 사고 명품가방 덕에 어른이 되고 아들을 낳은 첫 가방, 그런데 어느 날, 두 개의 가방이 텅 비었다 가방의 배를 찢고 나온 첫 가방과 출처가 모호한 작은 가방들, 빈 가방을 놓고 모처럼 머리를 맞대고 궁리중이다 —「가방들」부분
사물들이 말하고 있는 어떤 기분을 감지한다. 가방은 환유의 회로를 통해 인간의 삶과 함께한다. “첫 가방은 비밀번호도 쉽게 풀었다 ”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을 제시한다. 가방을 읽는 일은 열린 경험이며 역주행하는 시간이다. 이 잔혹한 시간성 위에 가방과 가방들이 우리를 이룬다.
“우리는 망고를 꿈꾸지// 하지만 망고를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 절반을 차지한 씨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까”(「망고는 뻔뻔해」)를 통해 삶의 이중성에 대해 그는 가혹한 의사처럼 진단을 내리고 있다. 진정한 예술은 쌓여 있는 무언의 고통에 대한 표현이라고 아드로느는 말한다. 마경덕의 시는 ‘사물의 고통’을 자각하는 자기 성찰적 자세로 응집된다. 입은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이어주며 함께 공존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사물들의 입>을 통해 안과 밖을 바라보며 삶이 어떻게 쌓이는지, 어떻게 흩어지는지, 아픈 듯 아프지 않은 듯 노래하고 있다. 조용한 사물들 사이에서 고요한 새가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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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진, 시인
충남보령 출생, 한양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2004년 심상으로 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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