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 핀 서재에 앉아 그대를 생각하나니 外

2017. 7. 5. 03:43美學 이야기


화가들이 사랑한 그림 (10)  


3.매화꽃 핀 서재에 앉아 그대를 생각하나니

무진당 2009.08.16 17:41

     

<매화꽃 핀 서재에 앉아 그대를 생각하나니>


   이게 아닌데. 정말 이게 아닌데.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낯설게 중얼거릴 때가 있다. 지금 여기 허름한 의자에 앉아 있는 내가 진짜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모습 맞는가. 한 때는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이던 때가 있었다. 그 미래를 이미 지나왔는데도 여전히 삶은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거칠게 등을 떠다 민다. 엉겁결에 세월에 떠밀리다보니 낡은 가죽부대같이 헤어진 몸이 신작로에 잘못 떨어진 짐덩어리처럼 놓여져 있을 뿐이다. 정말 이렇게 살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내가 원했던 삶은 살지 못하고 어느 새 인생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1)고고하게 살고 싶었던 인생


 



                                                김명국, <탐매도>, 견본채색, 45.7×31.6cm, 국립광주박물관


   천지에 흰 눈이 가득 쌓인 날 한 선비가 산중에 들었다. 지팡이를 짚고 눈 속에 핀 매화꽃을 감상하는 선비 옆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시동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 복건을 쓴 선비의 모습은 간단한 윤곽선과 감필묘로 처리된 산과 어울려 선미(禪味)가 느껴진다. 김명국(金明國:17세기)이 그린 <탐매도(探梅圖)>는 경전이나 문자에 의지하기보다는 직관적인 정신적 체험을 중요시한 선종화를 보는 듯하다. 내면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감정을 추스르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붓질 속에 내맡겨버린 화가의 심정이 대충대충 그린 듯한 필선 속에서 살아 꿈틀거린다. 초서풍의 필치와 발묵적인 먹의 변화는 자유분방한 필선과 붓자국 그 자체의 개성적인 표정과 조형효과를 느끼게 해 준다. 굳이 김명국이 이런 주제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이며 왜 추위 속에 서서 매화를 감상하고 있는가.


   이 그림의 내용은 이러하다.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689-740)은 평생을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은거하며 살았다. 매화를 매우 좋아했던 그는 초봄 매화꽃이 필 무렵이면 장안 동쪽에 있는 파교를 건너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잔설이 남아 있는 산 속에서 처음 핀 매화를 찾아 다녔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매화는 겨울을 뚫고 나오는 꽃으로 강인함과 지조를 상징하여 많은 문인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여기에 고고한 품성을 지닌 은둔 처사의 사연이 가미되자 맹호연의 이야기는 ‘파교심매(灞橋尋梅)’ 혹은 ‘탐매도(探梅圖)’, ‘기려도(騎驢圖)’ 라는 화제(畵題)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귀를 탄 처사가 다리를 건너거나 산 속을 찾아 헤매이는 도상이 바로 그것이다. 문인사대부들은 맹호연을 추앙하고 흠모하는 단계를 넘어 그의 행동을 따라하기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맹호연처럼 눈 속의 매화를 찾아나서는 심매(尋梅)가 풍류객 선비들의 연중행사로 여겨졌다. 스타 따라잡기의 전통이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귀를 탄 인물이 반드시 어떤 특정한 인물을 묘사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시흥에 잠긴 초탈한 시인이나 고아한 선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김명국이 <탐매도>를 그린 것도 당시의 시대조류에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가난한 화원이었다. 맹호연 처럼 벼슬자리를 외면하고 매화나 찾아다니면서 초연하게 살만큼 한가롭거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편도 아니었다. 그가 곤궁하게 살았음은 일본에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갔을 때 인삼을 밀매하려다 들킨 사건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비록 맹호연처럼 현실을 무시한 채 초탈하게 살 수는 없었지만 본래 마음까지 그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은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 아니겠는가. 이 그림이 그가 좋아서 선택한 주제이든 주문자의 요구에 의해 그려졌든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 중에서 ‘기려도’ 그림이 여러 점인 것을 감안할 때 ‘탐매’의 행위가 그의 관심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눈 속에 핀 매화를 찾아


   그런데 김명국의 <탐매도>는 도상학적으로 그림 속 주인공이 맹호연인지 임포(林逋:965-1026)인지 정확하지가 않다. 그 의문점을 일시에 해결해 준 화가가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다. 1766년 초여름, 그의 나이 59살 되던 해에 그린 <파교심매>는 화제 뿐만 아니라 그림 내용에서도 맹호연의 고사를 충실히 재현한 작품이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그린 이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고씨화보』를 바탕으로 하였으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재해석한 데 성공한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심사정의 회화는 죽기 전 9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그만의 특색이 두드러진 작품을 완성한다. 이는 그가 신분이나 화풍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심사정, <파교심매도>, 1766년, 115×50.5cm, 견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을 보면, 불안정하면서도 구불구불한 겨울산과 갈필의 나무 사이로 이제 막 파교를 건너려는 나귀 탄 처사와 짐을 진 시동이 뒤따른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칠고 담담하면서도 깔깔한 느낌의 이 작품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무심히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동이 어깨에 걸친 장대 끝의 짐과 처사의 말안장에 붉은색을 엷게 칠했다. 그러나 그 색이 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절이 겨울이기 때문이다. 모든 물상들이 본래 색을 감추고 무채색의 껍질 속에서 잠자는 계절이 겨울이기 때문이다.


   심사정은 조부가 불미스런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후 평생을 그늘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억누르는 억울함과 한을 되받아치거나 거부하지 않고 안으로 삭였다. 삭인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여러 가지 분노를 누르고 승화시키는 것으로 예술적으로는 가슴의 한이나 원형의 한, 쓰라림, 신산고초, 삶의 애처로움을 승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한을 삭이기 위해 소리하는 사람이 폭포 앞에서 목이 터져라 독공을 하듯 심사정 또한 붓질을 거듭했다. 그는개자원화보』『고씨화보』『십죽재서화보』등 명청대 화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해 나갔다. 삭이는 과정을 거쳐 마치 판소리에서 최고로 치는 수리성을 얻듯 그 또한 남종문인화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었다. 시김새가 없는 깨끗하고 고운 천구성이 거친 삶의 애환을 포용할 수 없듯이 신산스런 삶의 고초를 겪어보지 못한 화가의 그림은 그가 걸어온 삶의 족적을 너무 쉽게 드러낸다. 심사정의 그림에서는 시김새가 담긴 깊은 아름다움이 배여 있다. 맹호연처럼 평생 출사하지 못했던 심사정이 겨울을 이기고 피어나는 매화를 찾아 나선다. 그러므로 그림 속 인물은 맹호연이 아니라 심사정 바로 그다.



(3)매화를 부인으로 학을 자식 삼아


   매화와 관련된 인물 중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추앙을 받았던 사람으로 맹호연 말고 한 사람이 더 있다. 임포라는 사람이다. 임포(林逋:965-1026)는 북송대 항주 사람이다. 천성이 온화했던 시인으로 격식에 얽매이기를 싫어했다. 은퇴 후에는 고산에 있는 서호(西湖)에 들어가 20여년간 은둔하며 살았다. 그냥 살았다면 그렇게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임포는 아주 특별하게 살았다. 맹호연보다도 더 특이한 방식이었다. 선비라면 누구나 한번쯤 살고 싶은 그런 삶의 모습. 매화를 심어 부인으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아 살았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향기로운 ‘부인’과 고고한 품격을 지닌 ‘자식’을 바라보며 취흥이 돋을 때 한 마디 읊었는데 그것이 또 기가 막히게 멋있었다.


‘성긴 그림자는 맑은 물에 비스듬히 비추는데   (疎影橫斜水淸淺)

그윽한 향기는 어스름 달빛에 떠다니네           (暗香浮動月黃昏)’


   그가 읊은 이 싯귀절의 ‘성긴 그림자(疎影)’ ‘그윽한 향기(暗香)’ 는 이후 먹물 든 사람들의 가슴과 손을 적셔 시와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매화는 사군자에 속할 뿐만 아니라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에도 속한다. 그 상징성으로 인해 고려시대 이후 끊임없이 문학과 회화의 주제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문인사대부들에 의해 매화의 성리학적 상징성이 심화되고 매화의 전형화도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매화의 미를 성리철학과 일치시켜 지고지선의 감흥을 표현하고자 했다.성삼문, 서거정, 정도전, 김종직, 김시습 등 조선을 대표하는 사대부들이 매화를 통해 군자지향적인 그들의 인생관을 노래했다.




                                              정선, <고산방학>, 견본담채, 29.2×23.5cm, 독일 성오틸리엔수도원


   이들 문인사대부들의 인생관을 확인해볼 수 있는 작품이 정선(鄭敾:1676-1759)의 <고산방학(孤山放鶴)>이다. 화제에 적힌 그대로 임포가 은거했던 고산의 서호에서 사랑하는 처(매화)의 등에 기대 자식(학)을 바라보는 임포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바탕에 색을 칠하지 않음으로써 눈 쌓인 풍경을 나타내었고, 인물과 학과 매화에만 하얀 호분을 칠하였다. 복건과 학창의의 푸르스름한 색은 임포의 고고함을 드러내는 듯 눈이 시리다. 정선의 작품 속에는 만족스럽게 인생을 보낸 자의 기품과 여유가 들어 있다. 평생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난 다음 은퇴 후 계획했던 대로 말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의 편안함. 넉넉한 연금으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노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의 넉넉함이 들어 있다. 임포처럼 사는 것이 당시 많은 문인사대부들이 지향했던 노년의 모습이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어쩔 수 없이 힘든 직장생활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한 평생을 보냈다. 그런 그들에게 은퇴 후 산과 강이 만나는 지점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마지막 소망은 얼마나 멋지고 근사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멋있는 노년. 만약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속절없이 보내버린 젊음에 대해 그다지 서운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임포같은 노년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퇴 후에도 떠나고 싶었던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런저런 이유로 살았던 장소에서 발목 잡혀 살기 때문이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임포를 생각했다. 매화. 학. 호수. 은거... 듣기만 해도 고고한 향기를 풍기는 단어들. 그를 생각하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임포의 신비스럽고 풍류에 넘치는 삶에 자신을 투영시킴으로써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임포의 모습은 ‘매처학자(梅妻鶴子)’ 라는 화제(畵題)로 자주 그려졌다.



(4)<매화꽃 핀 서재에 앉아 그대를 생각하나니>


   매화꽃과 관련된 인물을 그린 그림 중에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가 있다. 선비가 매화꽃이 핀 서재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특히 19세기에 갑작스럽게 유행하게 되었다. 중인들의 친목단체인 벽오사 동인들에 의해 많이 그려진 ‘매화서옥도’는 그 형식도 여러 가지였다. 강변에 집을 짓는 강변형이 그려지는가 하면 산중에 집을 짓는 산거형이 그려지기도 했다. 어느 형식이든 선비가 책을 읽고 있는 서재 밖으로 매화꽃이 피어있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김수철, <계산적적도(溪山寂寂圖)>, 119×46cm,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이렇게 변화된 미의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김수철(金秀哲:19세기)의 <계산적적도(溪山寂寂圖)>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매화서옥도>이다. 두 작품 모두 세로로 긴 화면에 매화꽃이 만발한 산 속 서재에서 선비가 책을 읽는 모습을 그렸다. 먼저 김수철의 작품을 살펴보자. 제시에 ‘계산은 고요하고 물어볼 사람 없는데 임(포)처사의 집을 잘도 찾아가네(溪山寂寂無人問 好訪林逋處士家)’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임포의 얘기를 그리고 있다. 높이 치솟은 산 아래 서재를 짓고 문 밖에 핀 매화를 감상하고 있는 임포에게 오늘은 손님이 찾아왔다. 호분점으로 찍은 매화꽃보다 산과 바위에 무수히 찍힌 태점이 오히려 매화꽃잎처럼 보이는 담백하면서도 청신한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이다.



                                                  조희룡, <매화서옥도>, 지본담채, 45.4×106.0cm, 간송미술관


   이에 반해 조희룡<매화서옥도>는 형식이 김수철의 <계산적적도>와 비슷하면서도 그 느낌은 전혀 다르다. 금새라도 폭설이 쏟아질 듯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잔뜩 얼어붙은 산이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다.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선비의 서재 위로 눈송이인지 매화꽃잎이지 분간하기 힘든 꽃들이 분분히 흩날리고 있다. 유리창에 낀 성에처럼 찬 느낌의 붓터치는 격정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해서 흥이 올라오면 ‘미친 듯이 칠하고 어지럽게 그었다’는 그의 고백을 실감할 수 있다. 조희룡은 매화를 몹시 좋아하여 매화 벼루에 먹을 묻혀 스스로 그린 매화 병풍을 둘러치고 매화에 관한 시를 읊조렸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매화차를 마셨다고 한다. 김수철과 조희룡의 작품이 모두 임포의 고사를 주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임포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매화서옥’의 분위기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수철과 조희룡이 ‘매화서옥’을 멀리서 관망하는 형식으로 그렸다면 전기(田琦:1825-1854)의 작품은 그 반대다. 역매 오경석에게 주기 위해 그린 <매화서옥도>는 매화꽃과 집과 인물이 어울려 산뜻하면서도 참신한 느낌을 준다. 서옥 안에 있는 청록색 옷차림의 주인은 붉은 옷의 손님을 오랫동안 기다린 듯 주인과 손님의 무게가 비슷하게 그려졌다. 서옥 안의 인물은 전기이고 다리를 건너는 인물은 역매 오경석일 것이다. 여러 점의 ‘매화서옥도’를 남긴 전기는 안타깝게도 서른 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전기, <매화서옥도> ,종이에 채색, 29.4×33.2cm, 19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이 시기에 갑자기 ‘매화서옥도’가 부상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김정희에 의해 유입된 옹방강의 소동파와 황정견 숭배와 연관이 깊다. 이들 모두 매화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매화서옥도’를 즐겨 그렸기 때문이다. 조희룡, 김수철, 전기 등 ‘매화서옥도’를 그린 인물들 모두 중인이었다는 공통점 이외에도 스승 김정희를 극진히 따랐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매화서옥도’를 그리면서 지향했던 세계는 문인사대부들이 누렸던 도락적인 군자의 세계였지만 중인으로서는 결코 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현실상황과 유리된 채 시대성을 상실했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그것을 제약하는 중세적 이데올로기와 낡은 예술적 관행을 대타적 존재로 하여 비판적 의식 속에 획득되어야 하는데 매화서옥도를 그린 작가들에게는 그 제약에 대한 철저한 고민의 자취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이룩한 빛나는 성과는 기껏해야 ‘붓놀이’나 ‘붓장난’ 혹은 ‘먹장난’으로 인식될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회화사에서 유행처럼 번진 ‘매화서옥도’의 다양한 울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림 속 주인공처럼 살고 싶은데 살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 그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이고 안식이다.   (조정육)



blog.daum.net/sixgardn/15770123   조정육의 행복한 그.. 






한국적 현대 문인화의 세계를 접하다 -<오채묵향五彩墨香-송영방>| 전시&행사&공모

랑원-이의재 | 조회 123 |추천 0 | 2015.04.22. 15:42


  • 한국적 현대 문인화의 세계를 접하다 -<오채묵향五彩墨香-송영방>
  • 전시기간 : 2015.03.31.-06.28
    전시장소 :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글 : 최경현(홍익대학교 겸임교수)




       우현 송영방(又玄 宋榮邦, 1935- )은 서양화가 한국 화단을 빠르게 잠식해 갔던 시대 조류를 거스르며 현대적 한국 문인화의 세계를 구축한 대표적 원로화가이다.

     이번 전시회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 한국화 부문의 두 번째이며, 그에게 있어서는 1984년 현대화랑에서 개최했던 첫 개인전 이후 네 번째에 해당되는 개인전으로 50여 년의 작품세계를 총망라하는 회고전의 성격도 지닌다. 

    때문에 전시공간은 송영방 화백이 동시기 화단의 경향을 수용하면서도 평생 추구한 문인 정신이 유감없이 드러난 다양한 화목(畵目)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으며, 여행이나 일상에서의 습작이나 소품들도 전시되어 작가로서 성실했던 일상의 발자취까지 엿볼 수 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1960년 그는 제9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 묵림회(墨林會) 회원이 되어 한국화의 추상실험작업에 적극 동참했다. 



    송영방 <천주지골> 1967년, 한지에 수묵담채, 110×101cm, 국립현대미술관



       1965년의 <뇌락(磊落)>과 1967년의 <천주지골(天柱地骨)>은 이 시기에 그린 것으로 작가가 자연의 근원인 바위를 중심으로 새로운 조형성을 모색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여기서 ‘뇌락’은 바위가 떨어지는 순간의 모습을 포착한 것이며, 농묵과 속도감이 돋보이는 2015년의 <뇌락>에서 바위에 대한 애착과 작가적 오랜 탐색의 여정을 엿볼 수 있다.

     

       하늘의 기둥이며 땅의 뼈를 뜻한 ‘천주지골’은 바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현미경을 통해서나 볼 수 있는 바위의 질감을 지필묵의 추상화 작업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는 문인화가의 주요 화목인 산수화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작가의 감성으로 추상화를 시도한 작품과 실경산수화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대별된다.

     

       전자는 대개 산과 구름의 리드미컬한 안배를 통해 추상적으로 그려낸 산수화 시리즈로 간결한 조형성은 자연을 통해 정화된 마음의 평온함이나 즐거운 상태를 연상시킨다. 




    송영방 <춤추는 산과 물> 2007년, 한지에 수묵담채, 75×142cm, 작가 



       1982년의 <춤추는 산과 물>은 작가가 추구한 수묵 추상작업의 하나로 단순, 간결, 평온 등 중용(中庸)의 상태를 지향한 문인 정신을 잘 보여준다.

    후자는 명승지나 특정 지역을 사실적으로 포착한 것으로 조선 후기에 성행한 진경산수화의 맥을 잇고 있다.


       이와 관련해 1985년의 <금강제색도(金剛霽色圖)>와 2011년의 <장백산도(長白山圖)>그의 사실주의적 산수화의 조형적 원천이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鄭敾)조선 후기 최고의 문인화가로 평가되는 이인상(李麟祥)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송영방 <장백산도(長白山圖> 2011년, 한지에 수묵, 25×108cm, 작가

       

       또한 여행과 스케치는 사실주의적 산수화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데, 중국 양자강을 여행하며 남긴 《장강삼협도: 장강 홍수선상 속필첩(長江三峽圖: 長江洪水船上速筆帖)》작가가 자신의 창작 토양을 최적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하지만 그의 산수화가 추상적이든 사실주의적이든 간에 즐거움이나 평온함 등 긍정적 에너지로 귀결되는 것은 작가의 일상에서 실천한 문인다운 삶의 행보와 남다른 인격적 성숙에서 기인된 결과일 것이다. 

       사군자의 경우는 각별한 애정을 기울였던 매화 그림에서 자신만의 개성적 화법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자신의 정원에 청매(靑梅)와 홍매(紅梅)를 심어 매일매일 생장과정을 관찰하였으며, 2014년에 그린 <청매><보춘(報春)> 8폭 병풍에서 보이는 정갈함은 관람자의 시선과 발길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하다. 




    송영방 <청매(靑梅)> 8폭 병풍, 2014년, 한지에 수묵담채, 80×308cm, 개인



       이처럼 커다란 화면에 한 그루의 매화나무가 좌우로 가지를 뻗으며 꽃을 피우고 있는 전수식(全樹式) 매화도는 조선 말기의 여항문인화가 조희룡(趙熙龍)을 비롯해 유숙(劉淑), 장승업(張承業) 등이 그린 매화도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하지만 송영방 화백은 전통시대 화가들이 매화꽃을 흐드러지게 그렸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몇몇 잔가지에만 매화꽃을 표현하여 과욕을 경계하며 과유불급(過猶不及)일상에서 실천했던 문인 정서를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어 주목된다. 



    송영방 <보춘(報春)> 8폭 병풍, 2014년, 한지에 수묵담채, 81×316cm, 작가



       또한 연꽃 그림을 즐겨 그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종교적 색채를 지님과 동시에 전통시대의 군자, 즉 문인을 대변하는 꽃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애련설(愛蓮說)」에서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의 생태를 속세에 물들지 않는 문인의 고결함에 비유하면서 군자의 꽃이 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연꽃 그림은 불교와 연관시키기보다는 문인화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밖에 학(鶴) 그림도 전통시대에 은거한 문인들의 벗으로 군자나 현인과 같은 품성을 지녔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물화는 얼굴의 특징만을 부각하여 수묵의 선묘로 그린 소품(小品) 초상화가 전시되었는데 대부분 자화상이나 지인(知人)들로 한정되어 있다.


       이는 문인화가가 마음의 정표로 그림을 그려 주곤 했던 창작 양태를 계승하면서도 현대 캐리커처의 표현기법을 수용하여 초상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누드 습작을 모아 놓은 《간간호호(看看好好)》는 그의 탁월한 인물 묘사력을 보여주며, ‘보면 볼수록 좋다’는 화첩 제목은 작가의 진솔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송영방 <자화상> 2015년, 한지에 수묵, 38.5×25.5cm, 개인



       마지막에 전시된 불교 관련 그림들은 그가 재직했던 동국대학교와의 인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들은 보현보살이나 문수보살 등 종교적 주제를 다룬 일종의 불화이지만, 단아하면서 정갈한 문인적 감성이 짙게 배어 있는 것은 현대 문인화가로서 창작활동에 충실했던 작가의 면면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때문일 것이다. 


       이번 전시회는 그가 대학교 3학년 때 지필묵이 좋아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바꾼 다음부터 현재까지 50여 년에 걸쳐 현대적 한국 문인화의 근간을 단단하게 했던 대표적 원로화가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전시장의 곳곳에 녹아 있는

    단아하면서도 정갈한 작가의 문인적 감성은 보는 이의 시선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가슴에 잔잔한 울림을 남기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할 것이라 기대된다.







    [스크랩] [광주문화재단 상상칼럼] 매화향 그윽한 춘설헌에서 `광주정신`을 만나다| 옛집과 인물
    무심재 | 조회 158 |추천 0 | 2017.02.07. 11:12



    상상칼럼


    민문식

    민문식 _ 교육문화공동체 결 상임위원

     

     

       조선 성종 때 학자 성현이라는 분이 있다. 이 학자는 자연의 소리를 듣는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는데 이른 봄 매화꽃이 필 무렵, 눈이 내리면 매화나무 아래에 앉아 눈 내리는 소리를 듣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그 소리에서 암향(매화꽃 내음)이 풍길 때까지 앉아 있곤 했다고 한다. 눈 소리를 듣는 것도 신기한데 그 소리에서 향기까지 맡다니, 신묘한 경지가 아닌가.


     

    예향 광주의 뿌리 의재 허백련 선생

     


       옛 선비들은 이렇듯 자연과 인간이 융합되어 어느 만큼이 자연이고 어느 만큼이 인간인지 구분 못하는 그런 경지를 터득하고 산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선현의 섬세한 감성이 멋스럽다.

     

    춘설헌 매화향․먹내음은 예향 광주의 뿌리

       여기저기서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을 알리고 있다. 무등산 증심사 초입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춘설헌 매화향기도 더 짙어지고 있다.

     

       이곳 춘설헌은 예향 광주의 상징적 존재인 의재 허백련 선생이 머물렀던 곳으로 전국의 예인들과 사상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이들을 이끈 것은 성현과 같은 섬세한 감성과 자연을 사랑하는 선비이자 철학자이며 화가인 의재 선생이 무등산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예향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춘설헌은 “한 사발의 봄눈은 제호보다 뛰어나다”라는 낭만적인 시구에 바로 봄눈, 춘설(春雪)을 따와 의재 선생이 재배한 춘설차에 이름 붙였고 춘설헌까지 이어졌다.

     

       선생은 올곧은 정신과 비범한 예술혼으로 1920년대에 최고의 남화가로 인정받는다. 선생은 일찍 이룬 예술가로서의 성공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등산 계곡에 은거하며 겸허하고 청빈한 사상가, 실천적 교육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자는 삼애사상의 실천이 그것인데, 차와 그 정신을 알리고, 우리나라가 잘 사는 길은 농업 부흥에 있다는 믿음에서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해 어려운 청소년에게 무상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근대 광주정신의 태실 춘설헌

       이렇듯 춘설헌은 한국의 고전 풍류가 모두 갖춰져 있고 정신세계를 담은 전통차인 춘설차가 있고 한국화와 글씨, 시, 그리고 민족 사상,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근대 광주정신의 태실과 같은 곳이다. 향기로운 춘설헌 매화와 남종문인화의 그윽한 먹 내음, 그리고 무등산이 깃든 춘설차가 만든 향기로움이 예향 광주의 토대를 만들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광주 인물 ‘의재 선생’과 만나는 문화 마당 필요

       호남은 옛 부터 학포 양팽손, 공재 윤두서, 소치 허련, 의재 허백련으로 이어지는 남종문인화의 산실이다. 이들은 자연주의에 터전하며, 차와 함께 예술세계를 맑고 깊게 했다. 활달하면서도 힘찬 필묵과 깊이 있는 동양사상, 부드러운 남도의 풍취와 시적인 흥취, 이런 모든 것이 의재 선생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이는 무등산을 통해 맺은 결실이라 할만하다.

     

       이러한 전통은 1960~1970년대 광주가 예향으로 자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러한 예향의 현재적 구현이 광주를 문화로 국가균형발전을 이루고 창의 한국을 실현하며 창조도시를 만들어가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대한 계획을 추진 중이지만 광주의 현실은 문화생산자라기보다 문화소비자에 머물러 있고 광주의 역사와 문화에 자긍심을 갖기보단 중앙을 향하는 자세로 스스로 초라한 지방으로 격하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광주가 갖는 다양한 문화적 자산을 현재에 재창조할 정당성은 충분하고도 온당하다.



    의재 선생과 친근하게 만날
    어린이 교육 가이드북

       이러한 지역민의 광주에 대한 외면은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 단순히 시민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광주의 인물과 친근하게 만날 교육프로그램이나 콘텐츠가 부족한 점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일반 시민과 어린이들에게 의재 선생이 역사 속 박제화 된 인물이 아닌 친근한 할아버지로 인식될 수 있는 문화적 마당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필요성을 느끼고 교육문화공동체 결은 2006년부터 광주의 문화적 자산을 발굴해서 활성화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의재문화재단과 함께 의재 선생의 예술혼을 쉽게 만날 수 있도록 청소년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 ‘디자인 바이 수묵’, ‘저왔어요 의재쌤’, ‘다함께 의재로’ ‘의재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어린이도슨트놀이’ 같은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운영 중이다. 얼마 전엔 초등학생을 위한 의재문화 체험가이드북인 <같이가요 의재쌤>을 발간하기도 했다.


    문화의 숲 가꾸는 여정, 무등산 춘설헌에서

       “남보다 더 많이 살았고 남보다 더 많이 그렸다. 요 몇해 동안 줄곧 건강이 나빠져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나를 따르던 제자들은 철을 가리지 않고 무등산 그늘로 병든 나를 찾아와 준다. 나는 그들에게 춘설차 한 잔을 권한다. 차를 마시고 앉아 있는 그들을 보며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로웠던가를 생각하고 얼굴을 붉히곤 한다. 50년 동안 원 없이 그리고 갈 때도 되었다. 죽어서도 화가로 태어나고 싶다.”

     

       의재 선생 말년의 자기 삶에 대한 고백이다. 문인화의 기품과 정신을 잇고 차문화 보급운동을 펼치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한 의재 허백련 선생. 그는 한국화가이자 차문화 보급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사상가였다. 이러한 선생의 다양한 삶의 궤적을 하나로 묶기는 간단치 않다. 하지만 이를 아우르며 관통하는 것은 무등산을 사랑하고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롭기 원했던 의재 선생의 삶에 대한 지향과 태도인 듯하다.

     

       창조도시 광주를 문화의 숲으로 가꾸기 위해 갓 출범한 광주문화재단에 거는 시민의 기대가 자못 크다. 문화의 숲을 가꾸는 위대한 여정을 무등산 춘설헌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제안하고 싶다. 매화 꽃잎 지기 전에 광주정신이 응축된 춘설헌을 찾아 매화처럼 향기롭던 의재 선생의 정신을 만나길 많은 분들에게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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