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를 이기는 다양한 피서방법 가운데 시원한 과일만한 것도 없다. 여지란 열매는 아직 우리에게 친숙한 과실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중국집 후식으로 자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여행이 빈번해진 터라 시장에서 여지다발을 사본 경험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런 여지를 처음 만난 건 최근이 아니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고려시대 만들어진 상감청자에 여지가 문양으로 등장했다. 흥미로운 부분이기에 그와 연관된 몇 가지 고려시대 유물들을 살펴봄으로서 달콤한 여지향을 처음 접하게 된 사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원한 과일에 대한 이야기로 더위의 막바지를 기분좋게 넘어가보자.
◆ 여지(Lychee)란? 여지는 무환자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북위 24°선 이하에서 주로 생장하는 과일이다. 남중국에서는 과일의 왕으로 일컬어지며 중국의 경우, 한대(漢代)이전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다. 양귀비가 즐겨 먹어, 주요 생산지인 복건성에서 당(唐)의 수도였던 장안으로 여지를 옮기기 위한 병패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여지를 음양을 조절하는 기능을 갖는다하여 귀하게 여겼으며 그 씨앗은 간, 신장 및 폐의 기능을 향상시켜 기관지염, 천식 그리고 당뇨병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여지가 성질이 고르고 맛이 달며 독이 없고 얼굴색을 아름답게 한다’ 고 언급되어 있다. 신안해저유물(新安海底遺物) 가운데 여지씨가 일부 확인되고 있어 실제 여지가 14세기 동아시아의 교역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지는 약재 이외에 차를 마시는데도 활용되었다. 중국은 땅이 넓고 기후가 서로 달라 차가 재배되지 않는 지역이 많으므로 재배한 차를 각지로 운반하는 과정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 <열매가 달린 여지나무의 모습> |
이 때문에 발효차가 일찍부터 발전하였으며 발효 과정에 여지 등의 과실을 섞어 장기간 보관해야 하는 단차(團茶)에 향(Flavour)을 냈다. 송대(宋代)부터 이미 여지를 차에 섞는 풍습이 있었다. 1)
여지는 귀한 과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여지를 어선화(御仙化)라고도 하며 여러 공예품의 문양 소재로도 활용하였다. 또한 여지는 열매의 형태가 원형이므로, 그 모양을 나타내는 「원(圓)」이 으뜸을 뜻하는 「원(元)」을 상징한다 하여 공예품에 주로 길상문(吉祥紋)으로 쓰였다. 관복(官服)에 착용하는 대(帶)중에 여지금대라는 것도 이러한 의미를 내포한다. 2)
◆ 여지문의 등장 이런 여지문이 고려에서 제작된 공예품에 등장하는 최초의 편년자료는 청동은입사「대정18년금산사」명향완(靑銅銀入絲「大定18年金山寺」명향완)이다. 1178년 제작된 이 향완에 등장한 여지는 특유의 외피(外皮) 돌기를 물고기 비늘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하고 과일 끝에 세 갈레의 잎을 표현하였다. 이 세 잎의 표현은 상감청자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향완 이외에 고려불화에도 여지문이 나타난다. 여래(如來)나 보살(菩薩)의 법의(法衣)를 비롯하여 화폭에 함께 등장하는 시왕의 옷에도 여지문이 표현되었다. 불화에 표현된 대부분의 여지문은 보상화문이나 당초문 등의 다른 문양소재처럼 주변의 줄기와 함께 둥근 꽃(圓花)형태로 표현되는 예가 대부분이다. 이때 여지의 외형적 특징인 외피의 돌기는 사선을 교차시켜 망선 형태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일본 개인소장의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에 등장하는 여지는 꼭지에 잎이 달려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실제 나무에 달린 여지를 본적이 없던 고려의 장인들이 여지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딸기 같은 유사한 과일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본래 여지 꼭지에는 없는 잎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불화에 등장하는 시왕의 옷에도 여지문이 등장한다. 불화에 등장하는 옷들은 당시 고려귀족들이 입던 화려한 의상을 모델로 삼았을 것이므로 고려귀족들의 옷에 여지가 문양소재로 활용되었으리라는 것도 짐작해 볼 수 가 있다. 아래 표를 통해 고려 공예품과 회화에 등장하는 여지문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 <고려 공예품 및 회화에 등장하는 여지문 세부> |
◆ 여지문 象嵌靑瓷 이러한 여지가 상감청자에 문양소재로 적극 활용되는 것은 13세기이다. 명종(明宗, 1131-1202년) 지릉(智陵)에서 발견된 <청자상감여지문대접>은 1255년 지릉이 보수된 시점에 부장된 것으로 전성기 상감청자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굽 지름보다 작은 내저원각(內底圓刻) 안에 3개의 여지를 백상감 기법으로 표현하고 내측면에는 5개의 여지알맹이가 달린 가지를 다섯 군데에 배치하였다. 외면은 당초문을 시문하였다. 이와 같은 내면에 여지문, 외면에 당초문의 문양 조합 방식은 고려 상감청자 대접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형식으로 14세기후반까지 계속된다.
현재까지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고려청자 중에 여지문이 시문된 예는 아직 확인되고 있지 않다. 여지는 당시 고려의 토산물이 아니었으므로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만 접해 볼 수 있는 과실이었다. 그런 여지가 중국에서 유입되는 발효차에 향을 내기위한 수단으로 차와 함께 고려로 들어왔는지, 아니면 약재로서 고려에 유입되었는지에 대한 당시 정황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또 송(宋)과의 밀접한 교류를 통하여 여지나 여지를 문양 요소로 활용한 중국 자기가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다만 중국도자에서의 여지문은 주로 명(明)나라 이후 산화코발트안료로 백자에 그려지는 경우가 많고, 원(元)나라 이전의 중국 도자에 여지가 표현되는 예는 상감청자에 나타나는 경우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이처럼 중국 도자에서도 주요한 문양 소재로 선택되지 않았던 여지가 13세기이후 상감청자의 문양소재로 빈번하게 이용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상감청자에 표현된 여지의 모양이 매우 구체적인 것 또한 흥미롭다. 청자 이외에 여지를 문양 주제로 다수 활용한 금대(金帶)에도 작은 돌기들이 무수하게 표현되어 실제 여지의 피륙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외부에서 유입된 문양소재를 상감청자에 적극 활용한 것은 아마도 수요층의 요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지는 길상의 의미를 지니며 남방의 진귀한 과일로 다수의 도교(道敎)관련 기록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여지의 특성은 12세기 후반 의종(毅宗)의 화려하고 독특한 취향과 부합하는 점이 많다. 또한 이 시기는 고려청자의 제작에 상감기법이 적극 활용되는 등 고려 요업(窯業) 전통에 새로운 요소가 다양하게 유입되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때를 여지문의 유입 시기로 입증할 만한 정확한 고고학적인 유물이나 문헌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여지문의 정확한 유입 시기 및 배경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의 축적을 통해 밝혀 나가야할 과제이다.
-------------------------------- 1) 宋 도곡이 지은 『천명록』의 漏影春條에 차와 여지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金明培, 『中國의 茶道』(明文堂, 2001), 199쪽 재인용. 2) 李租定 주편, 『中國傳統吉祥圖案』(上海科學普及出版社, 1989); 左漢中 편저, 『中國吉祥圖像大觀』(湖南美術出版社,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