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7. 칠불사  

2017. 8. 26. 21:55산 이야기



       


 


작성일 : 05-12-19 21:45
1938년 <이은상>선생의 [지리산탐험기] - 7. 칠불사
 글쓴이 : 산돌림
조회 : 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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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칠불사

21. 玉寶高의 雲上院
 
   연곡사 - 칠불암(6km)
   칠불암 - 쌍계사(10km)
   금일 행정 16km(40리)

    * * *

   연곡사에서 자고난 7월31일의 아침.
   밤새도록 내리던 세우(細雨)가 아침도 연(連)하여 곱게 뿌린다. 비는 내려도 갈 길은 가야겠다. 칠불암을 들러서 쌍계에까지 가야 한다.
   어젯길에 다리를 상한 사람들이 일행 중에 반이나 되므로 그들은 부득이 쌍계사로 직행하라 하고, 건각자만이 칠불암 들러가는 길을 취하기로 한다.
   나는 다리 상한 건각단원(健脚團員)이 되어 칠불암 경유대에 따라 나섰다. 절의 동으로 풀길을 헤치고서 논두렁길로 나와 당(堂)재[현 농평마을 당재]를 향하여 올라간다.

 

   땅 좋고 물이 좋아 산 속에, 산 위에 밭을 이루고 논을 푼 것이 지리산의 특색 중 한 가지일 것이니,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지역이 남해에 가까우므로 기후가 따뜻하여 산 속에 대나무가 많고, 또 감나무와 밤나무도 매우 많아, 저절로 열렸다가 저절로 떨어진다. 기장이나 조를 높은 산봉우리 위에 뿌려두기만 해도 무성하게 자란다. 평지 밭에도 모두 심으므로, 산 속에선 촌 사람들이 중과 섞여 산다. 중이나 속인들이 대나무를 꺾고 감과 밤을 주워, 수고하지 않아도 생리가 넉넉하다. 농부와 공장(工匠)도 역시 힘써 일하지 않아도 살림이 넉넉하다. 이리하여 온 산에 사는 백성들이 풍년인지 흉년인지 모르므로, 부산(富山)이라고 부른다.” 운운이라 하였다. 가랑비 내리는 산길을 오르며 오르며, 군데군데 이루어진 촌락을 비 속에 지나가는 맛도 여기 와서야 받을 수 있는 청복(淸福)인가 한다.

 

   떠난 지 한 시간 남짓하여 당치(堂峙)에 오르니, 이 당치는 구례와 하동의 군경(郡境)이자 또 그대로 전남과 경상의 계선(界線)이다.
   명일충청도(明日忠淸道), 금일경상도(今日慶尙道)라더니, 이야말로 우각전라도(右脚全羅道), 좌각경상도(左脚慶尙道)다.
   여기서 골짜기를 타고 동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논에는 벼가 살이 찌고, 밭에는 담배잎, 콩잎이 가는 비에  젖은 채로 바람에 나부낀다.

   수차(水車) 돌리는 목통리 앞을 지나, 죽림을 헤치고 다시 오르니, 대숲 속 평활한 자리에 어느 분의 것인지는 알 수 없스나 한 기(基)의 부도와 수 편의 와전(瓦塼)이 남아 있어 전날에 암자 있던 자리인 것을 알려준다.

   죽림을 벗어나 돌아드니, 여기가 바로 동국(東國)의 제일선원 칠불암이다.
   사람 하나 없는 듯이 조용도 하다. 선원(禪院)의 풍미(風味)가 온몸에 곁들여짐을 깨닫겠다.

   이 절에 와 역사적으로 처음 찾을 곳이 운상원(雲上院) 터라, 거기가 어디냐 물었더니 주승(主僧)이 앞을 나서며 따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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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보대 터 / 사진제공 : <태산>님>

 

   암자의 뒤편 작은 언덕 위에 조그만한 빈 터가 있어 옥보대(玉寶臺)라 하는데, 저 초의(草衣) 의순선사의 <동다송주>에 ‘옥부대(玉浮臺)’라 한 곳이 바로 여기요, 좀더 들어가 우거진 풀밭 속에 복분자 한창 익은 열매를 따먹노라니 주승이 빙긋 웃으며 바로 여기가 운상원 터라 한다. 무언지 분간 못할 우거진 풀밭이다.

 

   <삼국사기> 권32 악지(樂志)에 의하여 이 운상원이 조선음악사상에 얼마나 중대한 장소임을 알 것이니, 신라의 사찬 공영(恭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란 이가 이 운상원에 들어와 거문고를 오십년이나 연구한 곳임을 생각하매, 지금 여기 이 풀밭 속에 선 것이 바로 거문고 줄 위에나 올라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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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칠불사 운상선원(雲上禪院)>

 


   옥보고의 자제신곡(自製新曲) 30곡이 이 터에서 나왔고, 제자 속명득에게 전하여 또 그 제자 귀금선생에게 전하였으나, 그가 이 산을 나가지 아니하므로 때에 진흥왕이 금도(琴道)가 끊어질 것을 걱정하여 이찬 윤흥을 시켜 그 음을 전득(傳得)케 하였더니, 윤흥이 남원공사(南原公事)가 되어와 안장, 청장, 두 소년을 뽑아 데리고 아내와 같이 이곳을 찾아 귀금선생에게 예를 다하여 그 음곡을 배우게 하니, 표풍곡 등 3곡의 비전곡을 전하였고, 안장은 그 아들 극상, 극종에게 전하였는데, 극종이 또 일곱 곡을 지었으며, 그 후에는 학금자(學琴者)가 한, 둘에 그치지 않았다 하거니와, 평조(平調), 우조(羽調) 함께 1백87곡이 유전(流傳)되었다 하니, 당시 악계(樂界)의 정황을 짐작하기에 족하다.

 

   오늘은 비록 이 자리가 우거진 풀밭이로되, 여기가 조선음악의 노촉지(盧觸地)요, 또 화육지(化育地)이어서 그날의 운상원은 실로 음악의 전당이자 또 악사의 학원이었던 것은 물론이니, 예술 내지 문화발달사적으로 보더라도 이곳을 황무(荒蕪) 속에 이대로 버려둘 수는 없는 곳이라 생각한다.
   제 문화의 원류에 대한 금인(今人)의 무성무심(無誠無心)함이 이같으매, 무엇으로 제 문화의 장래를 기약할 것인가. 다만 나그네 막대를 세우고서 운상원 빈 터에 서서 옛일을 생각하고 처창(悽悵)[몹시 슬프고 원망스러움]한 마음을 품을 뿐이다.

 

   옥보고 옛 성인이

   세상을 버리고서
   운상원 구름 속에
   오십년을 보내면서
   거문고 무릎에 안고
   무슨 한을 푸시던고.

   봄 아침 가을 저녁
   죽암(竹庵)에 홀로 앉아
   원앙(鴛鴦) 옛 사랑을
   눈물로 그리다가
   귀 밑의 흰머리 만지며
   먼 산 바라 보더신가
                     (註 : 春朝, 秋夕, 竹庵, 鴛鴦, 老人, 遠峰 등의 곡이 그의 新製 30곡 중에 있음)

 

   저 악성 삼십곡을
   아는 이 누구신가
   타시던 거문고는
   어느 뉘게 전하신고
   바람과 물소리만이
   유곡(幽谷)에서 들리더라
                     (註 : 그의 30곡명 중에 幽谷, 淸聲曲이 있음)


 

22.  駕洛 七王子 說話


   옥보고의 운상원 터에 서서 그대로 다시 생각나는 것은 칠불암의 기원인 가락국 칠왕자 설화이다.
   이 칠왕자 설화는 각 문헌이 서로 달리 전하여 혼란케 되어 있어 분변(分辨)하기가 심히 어려웁거니와 먼저 그 설화의 경개(梗槪)[간추린 대략의 줄거리]를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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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열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왕위를 이어갈 이요, 둘째, 셋째는 “내 성이 동토(東土)에 부전(不傳)함이 슬프다” 하고 말하는 왕후 허씨의 성을 따르게 하고, 넷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일곱 왕자는 진세(塵世)에 뜻을 끊고 왕후 동생 보옥선사를 따라 가야산으로 들어가 수도하고, 3년 후에 의령의 수도산, 사천의 와룡사, 구룡사 등을 변행(遍行)하다가, 드디어 이곳으로 들어와 운상원을 결(結)하고 좌선한 지 2년, 가락국 태조 62년(신라 파사왕 24년, 서기 103) 팔월 십오일밤에 보옥선사의 주장(柱杖) 아래 칠왕자가 동시에 현지(玄旨)를 대철(大澈)하니, 제일금왕광불, 제이금왕당불, 제삼금왕상불, 제사금왕행불, 제오금왕향불, 제육금왕성불, 제칠금왕공불이 되었으므로 칠불암이라 부르게 된 것인데, 왕과 왕후가 그 일곱 아들이 그리워 찾아왔더니 일곱 아들이 부모께 전고(傳告)하되, “저희들이 이미 출가하였으니 상면하는 것이 불합(不合)하니이다”하고, 다시 “그러나 산 밑에 못이 있어 우리 그림자는 들여다보실 수가 있습니다”하므로 부모가 그 못 속을 들여다보매, 과연 대면한 듯이 일곱 아들의 그림자들이 다 나타난다.

   그래서 그 못을 영지(影池)라 하였다는 것으로, 그 영지라는 곳이 지금 이 암자 앞에 있다.

 

   그런데 여기 대하여 각 문헌의 서로 다른 점을 비교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가락국 수로왕사적고에는 “…기여칠자(其餘七子), 별지절타건(別志絶墮蹇), 종보옥선(從寶玉仙), 입가야산(入伽倻山), 학도승선(學道乘仙)”이라 하여 보옥선사라 부르는 이를 보옥선이라 하였고, 그래서 일곱 왕자도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둘째, <진양지>에는 “칠불암일명진금륜(七佛庵一名眞金輪), 유옥부선인은차(有玉浮仙人隱此), 취옥적(吹玉笛), 신라왕심기성내금륜사야(新羅王尋其聲乃金輪寺也), 어시솔칠자(於是率七子), 여선동유(與仙同遊), 칠자성불(七子成佛), 자위범왕(自爲梵王), 고신흥(사명)상유범왕촌(故神興(寺名)上有梵王村), 기하유천비촌(其下有天妃村), 비즉왕비(妃則王妃)”라 하여 신라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옥적 부는 옥부선인을 찾아온 것으로 적었다.

   그리고 셋째, 연담유일(蓮潭有一)[조선 후기의 승려. 1720~1799]의 칠불암 상량문에는 이를 신라 신문왕조의 일로 기록하고, 영지의 이야기도 그들의 일로 적었다.

   그리고 넷째, 김선신의 <두류전지>에는 “신문왕의 두 아들이 궁모 5인을 데리고 입차성도(入此成道)하였기로 칠불암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설도 있음을 수록하여 두었다.

   이같이 두서가 혼란하므로 어느 것이 정고(正稿)인지 알기에 힘들지 않은 바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 칠왕자 문제보다 ‘보옥’이란 이를 구명(究明)할 필요가 있거니와, 위에 말한 이 모든 문적을 대조하여 보면, <삼국사기>의 ‘옥보고’는 신라의 현금가(玄琴家)요, <수로왕사적고>의 ‘보옥선’은 허씨왕후의 동생이요, <진양지>의 ‘옥부선인’은 옥적 불던 신라인이요, <유일찬칠불암상량문>의 ‘옥부’는 신라 신문왕대의 옥적 대가니, 옥보고, 보옥선, 옥부선인, 보옥선사 등이 혹은 명자(名字)가 와도(訛倒)되고, 혹은 선사, 선인이 혼용되었을 따름이요(또 선사란 명칭은 후대 선교 발달 이후에 붙여진 이름일 것은 물론이나) 동일인임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리고 옥적가로, 현금가로, 도가로, 불가로 나타나 있으나, 역시 이것도 일인이 그를 다 겸전(兼全)하였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또 가락국 수로왕시대로, 신라 진흥왕 이전 미상년대(訥氏王代頃)로, 신라 신문왕대 등 시대의 차이가 생겨 있는 바, 이에 있어서 나는 옥보고를 신라인으로 보기보다는 가락국인으로 보는 바다.

 

   그러면 가락국 수로왕대에 불교가 전래되었던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바, 지금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불교전래의 연대인 서기 372년보다 앞 서기 270년이라 이를 가신(可信)키 어렵다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에도 그 이전에 벌써 불교가 있었던 자취가 증고(證考)될 뿐 아니라, 가락국의 불교는 삼국의 어느 것을 통한 것이 아니라 바다로부터 별도로 전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없지 않다.
   이는 후일의 또다른 논제가 되려니와, 현금과 옥적에 능하고 선도와 불교를 양전(兩全)하던 ‘옥보’ 명인과 그를 따라온 칠제자(즉 칠왕자)들은 다 가락국의 인물들이요, 또 설사 수로왕대까지는 못 올라간다 하더라도 이 지리산이 가락국 판도(判圖) 중에 있던 시대의 일로 보아 무방할 줄 안다.

 

   또 혹은 옥보(玉寶)도 저 가야금의 악성 우륵과 마찬가지로, 신라에 귀화한 사람이었던지도 모르려니와 그는 여하간, 당시 가야의 예술과 문화가 어떻게나 현란한 것이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고 본다.
   나는 대강 이만큼 생각하여 이 칠왕자 설화의 번란(煩亂)함을 정돈해두고 싶다.


 

23. 七佛庵의 亞字房
 
   운상원 빈터와 옥보대를 내려와 다시 우리는 칠불암의 대표적 명물이라 할 아자방(亞字房)을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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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자방>

 

   이 아자방이란 것은 이름자 그대로 아자(亞字)형으로 온돌방을 만든 것인데, 철획(凸劃)의 부분은 좌선처(坐禪處)요, 요획(凹劃)의 부분은 행경(行徑)으로 되어 있다.
   즉 이중온돌이니 높은 부분과 낮은 부분이 균온(均溫)하도록 되어 있고, 높은 부분의 사방 오처(奧處)[아랫목]에서 좌선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참으로 묘안이요, 특안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방은 화도(火道)가 막혀본 적이 없으므로 성인불사의(聖人不思議)의 유적인 소치(所致)라고까지 일컫는 것이어니와, 이 아자 선방(禪房)은 첫째 그 규모형식부터가 이양(異樣)으로 되어, 보는 자에게 무엇인지 이상한 감명을 주는 것이다.

 

   이 아자방은 전하기를, 신라 담공화상(曇空和尙)의 소조(所造)라 한다.
   칠불선원사적기를 따르면, “新羅祗摩王八年己未, 曇空禪師造此溫突”이라 하였는데, 이 ‘지마왕 8년 기미’라는 것은 서기 119년이니 불교전래 이전이라 가히 믿기 어려운 바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칠불암 전신인 운상원을 가락국인(駕洛國人) ‘옥보’의 정수탄금처(靜修彈琴處)라고 보느니만큼, 만일 담공화상이 그때 사람이라고 한다면 담공도 역시 신라인이 아니라 가락국인으로 볼 수 있지 않음도 아니다.

 

   그러나 담공이 어디 사람이냐고 하는 것을 밝히는 것보다, 그 시대에 조선에서 온돌이 있었겠느냐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조선의 온돌에 관하여는 구당서고려전(舊唐書高麗傳 : 고려는 고구려를 이름)의 “고(구)려인들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불을 지펴 방을 데웠다.”[冬月皆作長坑, 下燃火以取煖]라 한 기록이 최고(最古)한 기록인 바, 이에 의하여 북방고구려에서는 온돌이 진작부터 있던 것임을 알겠으나, 여기 같은 남방지대에는 언제부터 온돌이 시작된 것인지를 가고(可考)할 길이 없다.

 

    조선의 문적으로는 고려 최자(崔滋)의 <보한집> 하권에 ‘돌(堗)’이란 것을 말한 것이 있고, 또 세종 때의 <구황촬요>에 ‘온돌(溫突)’이란 자면(字面)이 나오고, 명종조의 같은 책 역본에 ‘구들’이라 쓴 것이 있고, 김안로의 <용천담적기>에 ‘유전(油, 즉 기름 먹인 장판)을 말한 것이 있음 등을 본다.
   이러한 문헌으로 보면 고려 중엽으로부터는 전국적으로 온돌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 이 남방에도 진작부터 온돌이 있었던 증좌(證左)로는, <삼국유사> 2권 백제조에 ‘돌石’이란 자구(字句)가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남방에도 일찍부터 온돌제도가 있었던 자취를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아자방 같은 것은 온돌 중에서도 특히 신발명적(新發明的)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온돌제도가 시작된 이후로도 오랜 시험과 발달과 연구를 경과한 후대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아자방이 담공선사의 소조(所造)인 것은 믿을 수 있다손치더라도, 담공이 신라인이라 함과 또 신라시대에서도 지마왕대(2세기초)의 사람이라 함은 믿을 수가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또한 <호봉집(琥峰集)>에 의하면 호봉의 ‘제아자방(題啞字房)’ 시가 있는 바,

 

   담공수예문우당(曇空手藝聞于唐)

   자래금관축아방(自來金官築啞房)
   교제기공규부득(巧制奇功窺不得)

   영인천만비상량(令人千萬費商量)

 

이라 하였으니, 담공의 지마왕시대라는 것은 가락국 태조년간이요, 지나(支那)로는 동한안제(東漢安帝)의 시대에 당(當)함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에까지 담공의 특기가 들렸다” 한 것은 또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한대(漢代)를 일러 막연히 당(唐)이라 하였음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신라통일 이후(唐代)의 사람으로 말함인가. 역시 이를 다 구명할 길이 없다.

 

   다만 내가 보기는 이 아자방이 온돌 중에서도 유일무이한 제도요, 또 극히 발달된 과학적 산물이라 신라시대에서도 일통(一統) 이전으로는 올라가지 못할 것인 듯하다.

   그리고 아자방의 ‘亞’를 ‘啞’라고도 씀은, 표면적으로는 ‘연돌구(煙突口)’의 일구(一口)를 가한 것이라고 하고, 내면적으로는 선(禪)의 무언면벽(無言面壁)을 나타낸 것이라 하여, 산중 승려 간에서는 아(啞)자로써 통용하고 있음을 보는 것도 궤변적(詭辯的)인 점에 오히려 일종의 재미까지를 느낄 수가 있다.

 

 

24. 大隱의 律宗 수립

 

   아자방이 그 모형(模型)으로써 유명해진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아자방은 여기서 출신(出身)한 여러 고덕(高德)으로 말미암아 이름이 드러난 것으로 봄이 더 옳을 것이다.

   이조 중종년간에 벽송선사의 제자로 추월조능선사라는 이는, 낮이면 이 선실에서 ●足而參하고, 밤이면 큰 돌을 지고 20리 쌍계사로 내려가 육조탑에 예첨(禮瞻)하여 제수마참선(除睡魔參禪)을 하던 이니, 그 무서운 정성 앞에 어느 뉘가 머리를 숙이지 아니할 것이랴. 지금 암(庵)의 문전에 그의 부석(負石)이라 부르는 돌이 유물로 남아 있거니와 수도(修道)에 있어서나 다른 일에 있어서나 정성이 이만한 곳에 이를진댄, 각자의 소기(所企)가 헛된 곳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저 스님 누구신고
   어인 정성 저러한고
   돌 지고 예배(禮拜)하여
   크신 도를 이룬다네
   우리도 무거운 돌을 지고
   제 소원을 이루리라.

 

   이밖에 인허(印虛), 무가(無價) 같은 이도 이 선방의 출신이요, 특이한 자연석 부도(浮屠)의 주인인 월송당도 다 대덕 아님이 아니로되, 이 칠불암 아자방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찬송하지 않으면 안될 대인물은 누구보다도 대은선사(大隱禪師)라 할 것이다.
   그로 인하여 조선의 율종(律宗)이 그 명맥을 다시 잇고 서릿발 같은 계율로 불교 전반에 큰 발자취를 남기게 한 그 계행장(戒行場)이 바로 여기 이 선방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계라는 것은 삼학(三學) 중에서도 수위를 점령하는 것이어서, 제가 어떤 종파에 속하든지 참선을 하거나, 간경(看經)을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공통적으로 봉지(奉持)하는 것이 계인 것은 물론이다.

   백제의 겸익법사를 위시하여 일본에까지 건너가 계법을 전한 혜총법사 등이 백제의 율종을 설명하는 이들이요, 신라에 있어서는 진평왕대의 지명을 필두로 원효도 율부(律部)의 저서를 가졌거니와 승장, 의적, 태현, 원승, 도성, 경흥 등 모든 법사가 다 높은 저술(著述)을 가졌다.

 

   그러나 신라 내지 조선불교사상에 나타난 율종의 이대지표(二大指標)는 자장율사와 진표율사라 할 것이니, 자장의 계맥(系脈)은 <해동불조원류>에 의하여 승실, 조일곡성 등 10여명에게 전하였음을 알 수 있고, 진표의 파류(派流)는 <삼국유사>에 의하여 영심, 신방, 체진 등 아홉 제자에게 전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영취산의 지통이 이름 높은 율사이어서 그 스승 낭지선사가 오히려 정례(頂禮)한 이며, 고려에는 대각국사 같은 이가 계를 강의하였고, 이조에 있어서도 구암사 백파 문하와 패엽사 하은 문하와 용연사 만하 문하와 청화산 석교 문하 등이 다 이름난 율종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이들을 제켜두고 자립한 조선적 율종을 수립한 이가 곧 이 아자방의 대은선사인 것이니, 그는 일찍이 월출산에서 출가하여 모든 대덕을 변참(遍參)한 후 드디어 교(敎)를 버리고 선(禪)을 배우려 하여 순조 28년(1828)에 스승 김담과 함께 이 선원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가 함께 하안거를 마치고서 서로 먼저 기도의 서응(瑞應)[하늘을 감응시켜 나타난 복스러운 조짐]이 있는 이가 계사(戒師) 되기를 약속하더니, 7일만에 한 줄기 상서로운 빛이 대은의 정수리 위에 와닿으므로 어제까지 사전(師傳)[스승으로부터의 전수]이던 김담이 오늘은 도리어 제자이던 대은에게 계를 받은 것이다.

 

   장하지 아니하냐. 저 사제의 아울러 거룩함이여.
  

   대은의 자립한 계법이 그 스승 김담에게 전하고, 초의를 거쳐 범해에게 전하고, 그 이후로 제산, 호은, 금해, 만암 등에게도 전하여진 것이다.
   더구나 그리 멀지 아니한 순조년간에 이같은 법고행정(法高行淨)의 대덕이 나타났다는 것이 어떻게나 말세총림(末世叢林)을 놀라게 하는 대사실이 아닐까보냐.

   그가 능히 저 자장, 진표, 지통 등의 대도(大道)를 이어 밟아 조선불교사에 큰 탑을 쌓았던 것이니 쇠미(衰微)와 민멸(泯滅)이 보는 바와 같은 오늘에 있어서는 더 한층 그의 자취를 고평(高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더구나 고대의 율사들은 입당수법(入唐修法)[당나라에 가서 佛法을 배움]하였던 것이로되, 이 대은선사야말로 스스로 계법을 받았으니, 가장 엄극(嚴極)한 의미에서 조선율사의 참된 초조(初祖)라 할 것이요, 조선율종(朝鮮律宗)의 참된 수립(樹立)이라 할 것이니 이 점에 그의 위대함이 있고, 이 선원의 자랑이 있는 것이다.

 

   禁制의 큰 힘으로
   衆善奉行 하오시니
   거룩한 머리 위에
   祥光이 내리시다
   東方에 밝으신 빛을
   님이 다시 펴시니라.

 

 

25. 竹露茶의 본원지

 

   아자선방에 잠깐 앉아 제제고덕(濟濟古德)[많고 많은 옛날의 대덕스님들]을 헤아리며 다리를 쉬노라니 주승(主僧)이 문득 다구(茶具)를 들고와 끽다(喫茶)를 권하기로, 나는 시중의 쓴 차에도 맛을 붙인 다당(茶黨)이라 놀란 듯 받아드니 향기가 먼저 사람을 취하게 한다. 유명한 지리산의 죽로차요, 겸하여 조주(趙州)의 권다(勸茶)[당나라 조주화상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마다 “차 한 잔 들게!”하고 권했다는 禪家의 얘기]라 일끽(一喫)을 어찌 사양하랴.

 

   신라사에 적힌 바대로 흥덕왕 3년(828)에 입당사(入唐使) 김대렴이 당으로부터 차 씨앗을 수입하여,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어 번식시킨 것이 조선다사(朝鮮茶史)의 첫 페이지라, 우리는 소위 기분상으로 이 산에 와 이 산 소산(所産)의 죽로차를 마신다는 것이 어떻게나 유쾌한지 모르겠다.

   더구나 이 산에서도 칠불암에서, 칠불암에서도 선방에서 일끽하는 맛이란 어느 곳에서 어떠한 고가차를 마심보다 더 귀하고 맛있는 것임을 나로서는 깨닫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초의의순의 <동다송주>에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사,오십리에 걸쳐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이보다 더 넓은 차밭은 없다. 화개동에 옥부대가 있고, 그 아래 칠불선원이 있다. 그곳 중들은 차나무의 늙은 잎을 때늦게 따서…”[智異山花開洞, 茶樹羅生四五十里, 東土茶田地廣, 料無過此者, 洞有玉浮臺, 臺下有七佛禪院,坐禪者常晩取老葉]라 하였으니, 이 산중에서도 이 근처가 제일다산(第一多産)이요, 이 선원이 바로 끽다도(喫茶道)의 최고령장(最高靈場)이요, 또 본원지라 할 것이다.

 

   육안(陸安)[중국의 지명]의 차는 맛으로 승(勝)하고, 몽산(蒙山)[중국의 지명]의 차는 약(藥)으로 승하다 하지마는, 동다(東茶)는 이들을 겸하였다 함이 초의의 다평(茶評)이어니와, 그의 <봉화산천도인시(奉和山泉道人詩)> 중에 말한

 

알가진체궁묘원(閼伽眞體窮妙源)
묘원무착바라밀(妙源無着波羅蜜)

 

이라 한 그대로 알가(argha, 茶의 범어)[부처나 보살에게 공양하는 물] 일완(一椀)으로써 무소집착의 지경을 잠깐이나마 맛보자 하며 다완을 들고 장조(長調) 한 수를 읊는다.

 

   맑은 밤 이슬 아래
   竹露茶葉 따와 두고
   바윗길 돌아올라
   玉泉水 떠오더니
   老僧의 三昧手로
   돌솥 열고 넣을 적에
   처마끝 風磬 소리
   솥 속으로 떨어졌네

  

    靑솔불로 끓여내여
   茶●에 부어 들고
   걸음도 조용할사
   禪室로 드시더니
   하늘빛 靑磁椀에
   따르나니 瑪瑠水라
   길 가는 먼 나그네
   마시라 권하시네

 

   감돌고 입 안으로 외이노니
   七佛禪院竹露茶 波羅蜜.

 

   일완(一椀) 신차(新茶)로 세미(世味)[세상의 맛]를 다시 씻고, 점심이 될 동안을 틈타서 나는 다시 암자의 서쪽 산기슭에 있는 칠불암 유연제덕(有緣諸德) 중에서도 사상(史上)의 인물이라 할 부휴선수당의 부도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열반한 저 서산휴정선사의 법제(法弟) 되는 분으로, 나는 일찍이 백곡처능의 홍각등계[광해군이 부휴에게 내린 시호] 비명(弘覺登階碑銘)을 읽어, 부휴선수의 일생을 알고, 고제(高弟) 각성이 편집한 <부휴당집>을 뒤져 그의 사상과 감회를 들을 때에, 실로 마음에 그리운 바 많았었더니 이제 이 칠불암에 와 초수(草藪) 사이에서 그의 부도를 만남에 한층 더 심각한 인상을 받는 것이다.

 

   그는 광해년간의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이 산으로 들어와 신명(信明)에게서 연식(蓮飾)하고, 부용영관을 찾아 법을 배우고, 상국(相國)[정승의 벼슬]노수신의 장서를 차람(借覽)[당시의 재상이던 노수진에게서 7년간이나 책을 빌려 읽었다 함]하여 경서에도 통한 것이었다.

   혹은 덕유산에서 임난(壬亂)의 병과(兵戈)를 치르고, 혹은 지리산에서 광승(狂僧)의 무소(誣訴)를 입어 옥에 갇히고, 때로는 가야산을 배회하며, 때로는 조계산을 소요하고, 마침내 이 칠불암에 와서 머물다가 73의 보년(報年)을 여기 남기고 초원으로 돌아가기까지 그는 다만 흉차청백(胸次淸白), 식기망심(息機忘心)으로 지냈던 것이니 여기에 시를 남기되,

 

   浮休一老翁 活計淸無物
   日暮弄松風 夜深●山月
   機息絶營謀 心灰無所別
   避世入深居 何人寄問說
   吾法有自來 一言具殺活

 

이라 하였다.(부휴당집)

 

   홀로 심산에 앉아 만사를 가벼이 하고 한 사발 신차와 한 권의 경으로써 무사한적(無事閑寂)을 맛보던 이다.
   춘화추국(春花秋菊)을 대하여 고학한원(孤鶴閑猿)을 불러 ●中事를 연담(演談)하려던 심경을 더듬어보고, 일신다병(一身多病)으로 상(床) 위에 누워 연년불사(延年不死)를 근심하던 일들을 생각하면, 혹 생사에 우유(優遊)하지 못하였음을 흠(欠)할는지는 모르나, 그의 고상한 고민은 심회(心會)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서산선사도 부휴자(浮休子)를 노래하되

 

   臨行情脈脈, 桂子落紛紛   떠날 때 말없이 서로 보나니, 계수열매 어지러이 지고 있네
   拂袖忽歸去, 萬山空白雲   소매를 날리며 문득 돌아가니, 온산엔 속절없이 흰구름만 이네.

 

이라 하였거니와, 과연 그 위인의 청고(淸高)함을 이로써도 알 것이다.

 

   산창(山窓) 아래에 취심정좌(取心靜坐)하여 도의 어디 있음을 생각하다, 구원(求遠)할 것도 아니요, 구천(求天)할 것도 아니요, 오직 내게 있음을 갈파한 이라, 고선(古禪)의 신보행(信步行)을 느꺼이 추모하지 않을 수 없다.

 

   풀 속에 묻힌 길이
   어드러로 뚫렸는고
   謎頭 狂客이
   길 찾기 어려워라
   헤매어 이 산속이리니
   발 따라만 가오리라.



jiri99.com/bbs/board.php?bo_table=jiri33&wr_id=47    지리산 아흔아홉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