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6년 유두류산기행(遊頭流山記行) ,1745년 중유두류(重遊頭流) / 서계(西溪) 박태무(朴泰茂)

2017. 10. 25. 07:21산 이야기


지리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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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04 22:09
                      
1736, 박태무 <유두류산기행(遊頭流山記行)>
       
 글쓴이 : 엉겅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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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무(朴泰茂 1677~1756) 본관은 태안(泰安) 호는 서계(西溪).

그의 가문은 대대로 진주에 살면서 뛰어난 학자 집안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가 남긴 문집 《西溪先生集》은 그의 증손자 눌암(訥庵) 박지서(朴旨瑞 1754~1821)가 1812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 그는 60세(1736년 가을) 때 두류산을 유람하고 기행시 36수를 남겼는데 대략의 노정은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총 소요기간은 열흘 쯤이었던 것 같다.(㊱번 시 참조)

▷ 진주 → 하동 옥종(모한재·영귀대) → 덕산(도구대·입덕문·덕천서원) → 무위암·남대암 → 천왕봉 … (세석) → 불일암(향로봉·완폭대·비로봉) → 환학대·보조암 → 쌍계사(학사대·요학루·쌍계석문) → 신응사·세이암·녹반암 → 칠불암 → 화개·도탄·삽암·악양 → 섬진강 → 곤양 → 진주

 

○ 그는 특이하게도 두류산 기행시만 남겼을 뿐, 기행문은 남기지 않아 유람의 구체적 정황-누구와 함께, 어디서 어디로 갔는지, 길은 어떠했는지, 먹고 잔 곳은 어딘지 등 - 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연보에 의하면 ③ ⑧번 시에 등장하는 하덕망·김성운·조선적과 같이 갔다고 되어 있다.

○ 그는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인 60세에 지리산에 올랐는데, 그해 측실에게서 아들을 얻었다는 기록이 연보에 보여 노익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또 69세에 『다시 두류산을 유람하며(重遊頭流)』 기행시 18수를 남겼다.

 

○ 原文은 경상대 문천각에서 D/B化한 자료를 이용했지만, D/B화를 위해 타이핑하는 과정에서 더러 오탈자가 발생하기도 하여 원본(경인문화사 목판 영인본)을 대조해 가며 고쳤다. 시 제목 앞에 표시된 ①~㊱ 번호는 구분의 편의를 위하여 임의로 붙인 것임을 밝혀둔다.

 

 

遊頭流山記行/두류산 유람 기행시


 

①西望頭流山敬次曾王考凌虛先生韻(서망두류산경차증왕고능허선생운)/서쪽으로 두류산을 바라보며 삼가 증조부 능허선생의 시에 차운함

 

羽衣西入紫霞飛(우의서입자하비)/신선처럼 羽衣 입고 서쪽으로 드니 붉은 놀 흩날리고

淨洗靑山夕雨霏(정세청산석우비)/저녁 안개비는 청산을 깨끗이 씻어주네.

萬壑丹楓秋後勝(만학단풍추후승)/만 골짜기 붉은 단풍이 든 늦가을의 경치는

勝於春色上當歸(승어춘색상당귀)/봄 풍경보다 더 좋아 이를 거쳐 돌아가리.

 

註1) 차운(次韻)이란 다른 사람의 시에 화답하면서 앞사람의 韻字를 사용하여 시를 짓는 것. 여기서의 운자는 1,2,4구의 비(飛) 비(霏) 귀(歸)이다. 운자는 시 형식(절구, 율시 등)에 따라 달라진다.

2) 능허선생은 박태무의 증조부 박민(朴敏 1566~1630)을 말한다. 남명의 제자였던 최영경정구의 문인으로, 학식과 덕망으로 이름난 분이었다. 1616년 지리산을 유람하고 《頭流山仙遊記》를 남겼다(옛산행기방에 있다). 그의 문집《凌虛集(능허집)》은 증손자 태무가 편찬하고 박태무의 증손자 박지서가 간행했다 한다.

증조부 박민이 지리산을 유람한 해가 1616년 병진년(丙辰年)이었고, 박태무가 지리산을 유람한 해도 120년 후인 1736년 병진년이었다.


 

②到士谷(도사곡)/사곡에 이르러

 

靑藜來到水西村(청려래도수서촌)/청려장 짚고 강 서쪽 마을에 당도하니

寒竹蕭蕭晝掩門(한죽소소주엄문)/차가운 대나무 소리 쓸쓸하고 낮인데도 문은 닫혀 있네.

爲我主人催午飯(위아주인최오반)/나를 위해 주인은 점심밥을 재촉하지만

笑他煙火分猶存(소타연화분유존)/다른 집의 밥짓는 연기만 남아 있어 웃네.

 

註) 수곡면 사곡(士谷)은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1553~1612)의 정착 이후 진양 하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③慕寒齋呈養正齋河丈德望(모한재정양정재하장덕망)/모한재에서 양정재 하덕망 어른께 드리다

 

驢背崎嶇路(려배기구로)/나귀 타고 그 험한 길을

爲誰踏夕崖(위수답석애)/누굴 위해 저녁에 벼랑길을 가는지요?

淸高養正叟(청고양정수)/맑고 높은 기상의 양정 어른이 계신

蕭灑慕寒齋(소쇄모한재)/맑고 고요한 모한재로 간답니다.

志業圖書壁(지업도서벽)/학업에 뜻을 두어 도서가 벽에 가득하고

生涯花竹階(생애화죽계)/한 평생을 꽃과 대나무 우거진 섬돌 오르내리며 보내셨다네.

深燈勤琢切(심등근탁절)/깊은 밤 불 밝히고 부지런히 갈고 닦아

至樂在吾儕(지악재오제)/지극한 즐거움을 우리에게 주시네.

 

註1) 모한재(慕寒齋) : 하동 옥종 안계리에 위치. 남명 이후 제일인자로 일컬어지는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1593~1666)가 창건하여 강학(講學)하던 곳이다. 모한이란 명칭은 주자한천정사(寒泉精舍)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2) 하덕망(河德望 1664~1743) : 光影亭을 짓고 서재를 양정재라 이름하였다. 둘 다 나중에 그의 호가 되었다. 하홍도의 아우 하홍달의 손자이자 설창(雪牕) 하철(河澈)의 아들이다. 당시 태안 박씨-진양 하씨 두 집안은 학맥(강우학파,남명학파)과 혼인관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④詠歸臺/영귀대

 

眉翁手字石生輝(미옹수자석생휘)/미수 옹이 손수 쓴 글자 바위에 선명하고

我浴何妨節序非(아욕하방절서비)/냇가에서 목욕하고 싶은데 때가 아니면 어떠랴?

冠者三三童五五(관자삼삼동오오)/어른 서넛, 아이 대여섯 명과 함께

風乎石上(풍호석상영이귀)/바위 위에서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리.

 

註1) 영귀대 : 모한대 앞에 있는 바위. 하홍도가 이름 붙였는데, 지금의 각자(刻字)는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글씨라 한다.

2) 詠歸 : 출전은 논어 선진편이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는 “너희들은 평소에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만일 혹시 너희를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준다. 자로, 염유, 공서화가 나서 차례로 포부를 말해 보지만 공자의 반응은 시원찮다.

마지막으로 증점이 나서서 다소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늦은 봄철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어른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과 더불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 올라 바람쐬고 노래 부르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 風乎舞雩 /막춘자 춘복기성 관자오륙인 동자륙칠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 공자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도 증점과 함께 하겠노라.”(夫子喟然嘆曰 吾與/부자위연탄왈 오여점야)

이후 이 사연을 아름다게 여겨 유유자적한 삶을 꿈꾼 儒者들이 노닐 만한 곳에 그 이름을 많이도 갖다 붙였다. 영귀대 외에 무우대, 풍호대, 풍영대 등도 같은 뜻이다.

3) : 알다시피 시경(詩經)의 들은 그 시대의 노래 가사였다. 그래서 고대에 詠은 노래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후에 곡조를 잃어버리고 한시(漢詩)가 정형화되면서 음의 고저장단과 평측(平仄) 운(韻) 등으로 시를 읊는 것을 詠으로 부르게 되었다(뜻의 변이). 주로 그랬다는 얘기다.


 

⑤登陶邱臺(등도구대)/도구대에 올라

 

闍▼(門/屈)深深方丈幽(자굴심심방장유)/자굴산 깊고 깊으며 방장산 그윽한데

世人誰識陶邱子(세인수식도구자)/세상 사람 누가 도구자를 알까?

陶邱子有遊憩臺(도구자유유게대)/도구자가 놀고 쉬던 대(臺)가 있어

上依靑山下綠水(상의청산하록수)/위로는 청산이요, 아래로는 녹수라

一竹杖與一芒鞋(일죽장여일망혜)/대지팡이 하나와 짚신 한 켤레로

來往南冥夫子里(내왕남명부자리)/남명선생 살던 마을에 내왕하였다네.

顔淵舊巷臥曲肱(안연구항와곡침)/안연처럼 옛 동네에 팔을 베고 누웠으니

許由何川勞洗耳(허유하천노세이)/어찌 허유처럼 수고로이 냇물에 귀를 씻으리오?

亂礎頹垣餘廢墟(난초퇴원여폐허)/어지러운 주춧돌 무너진 담장, 폐허만 남았는데

冷落荒凉秋草裏(냉락황량추초리)/적막하고 황량한 가을 풀 속

我來登臨一喟然(아래등림일위연)/대에 올라 크게 탄식하건만

臺上淸風吹不已(대상청풍취불이)/대 위에는 맑은 바람만 그치지 않고 불 뿐이네.

 

註1) 도구대에 관해서는 지리박물관/문화유적명소《도구대 감회》참조, 許由《삼신동 이야기》참조

2) 顔淵舊巷臥曲肱의 출전 : 논어 //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개를 삼아도 즐거움은 그 가운데 있나니 옳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도다”(飯疏食飮水 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반소사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술이편(述而篇)]

“한 대광주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더러운 거리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一簞食一瓢飮 在陋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일단사일표음 재누항 인불감기우 회야불개기락 현재회야) [옹야편(雍也篇)]


 

⑥入德門/입덕문

 

初年失路路多岐(초년실로노다기)/초년에 길을 잃어 갈래길 많아

擿埴倀倀迷所之(적식창창미소지)/장님이 더듬듯 갈팡질팡 갈길 헤매었다오.

入德門前醒大寐(입덕문전성대매)/입덕문 앞에서 큰잠에서 깨어나 보니

也知吾道在於斯(야지오도재어사)/나의 길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겠네.


 

⑦謁德川書院(알덕천서원)/덕천서원에 참배하다

 

瞻仰先生像(첨앙선생상)/선생의 상(像) 우르러 보니

巖嚴千仞壁(암엄천인벽)/바위 같은 엄숙한 기상 천길 절벽 같고

緬想先生心(면상선생심)/선생의 마음 아득히 생각하니

亭亭歲寒栢(정정세한백)/추위 속에 우뚝한 잣나무 같네.

吾道屬誰邊(오도속위변)/우리의 道는 누구에게 부촉해야 할지

杏壇春寂寞(행단춘적막)/행단은 봄인데도 적막하구나.

方丈山德川長(방장산고덕천장)/방장산 높고 덕천강 길이 흐르니

先生之風永無極(선생지풍무영극)/선생의 기풍 영원히 끝이 없으리.

 

註) 행단(杏壇(亶)) :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 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여 학문을 닦는 곳, 강학하는 장소를 지칭함

 


⑧永慕齋喜金大集曺仲吉善迪來會(영모재희김대집조중길선적래회)/영모재에서 金聖運(대집)과 조선적(중길)이 와서 모인 것을 기뻐하며

 

幾夜吳州月(기야오주월)/몇 밤이나 오주의 달처럼

依依入夢頻(의의입몽빈)/그리워 꿈에 자주 보였구나.

白髮猶佳興(백발유가흥)/백발이지만 아직 좋은 흥취가 남아 있고

靑燈摠故人(청등총고인)/등잔불 아래에는 모두 옛 친구들이구려.

莫怕餘年短(막파여년단)/남은 인생 짧다고 두려워 말고

渾忘世味辛(혼망세미신)/세상 쓴맛 모두 잊게나.

秋深山似錦(추심산사금)/가을이 깊어 산은 비단 같으니

明日去尋眞(명일거심진)/밝은 날 진인(眞人=仙人) 찾아가세.

 

註1) 영모재는 하도 많아서(조상을 추모하는 재실이란 뜻) 어느 영모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2) 吳州月은 서로 그리워할 때 쓰는 용어 같은데 정확한 유래는 찾지 못하였다.

짐작컨대, “오(吳)나라의 소는 달을 보고도 헐떡인다(吳牛喘月/오우천월).”는 고사를 원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오나라는 몹시 더운 곳이기 때문에 더위에 지친 소가 달을 보고도 해인 줄 알고 숨을 헐떡거린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로, 공연한 일에 지레 겁먹고 허둥거리는 것을 뜻함.

   그것이 맞다면, 여기서는 몇날 밤을 달을 보고도 해가 떠서 서로 만나기로 한 날인 줄 착각할 정도로 손꼽아 기다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런 것을 한자 문화권에서는 '단장취의(斷章取義)'라 한다. 원래의 뜻이나 전체의 맥락과는 관계없이 자기가 필요한 구절만 떼어다가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하는 것을 말함.


 

⑨無爲庵/무위암

 

太古靑山老(태고청산로)/태곳적의 청산은 늙어

諸天慧日遲(제천혜일지)/하늘의 해도 더디게 뜨네.

禪心那有事(선심나유사)/선정에 든 마음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庵號本無爲(암호본무위)/그래서 암자도 본래부터 무위라 부른다네.

物我相忘裏(물아상망리)/무위란 사물과 내가 서로 잊은 가운데

鴻濛未判時(홍몽미판시)/천지가 나누어지기 전의 상태처럼 되는 것이라네.

自開還自落(자개환자락)/꽃은 저절로 피고 저절로 떨어지니

牕外桂花枝(창외계화지)/창 밖에 계수나무 꽃, 가지에 가득하네.


 

⑩行過石竇(행과석두)/가다가 바위구멍을 통과하며

 

石竇危棧三丈餘(석두위잔삼장여)/바위 구멍 사다리는 높아 삼장이나 되고

躋攀凜若薄氷於(제번름약박빙어)/살얼음을 밟듯 조심스레 기어오르네.

若把是心隨處用(약파시심수처용)/만약 이렇게 마음을 다잡아 처하는 데 따라 부린다면

可能無愧聖賢書(가능무괴성현서)/성현의 말씀에도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네.

 


⑪南臺庵/남대암

 

白雲紅樹岸(백운홍수안)/흰 구름 붉은 단풍 가득한 언덕에

峭絶一庵懸(초절일암현)/높고 가파르게 암자 하나 매달려 있네.

窈窕壺中界(요조호중계)/아름답기는 신선세계 같고

淸凉象外天(청량상외천)/맑고 서늘하기는 별천지 같네.

蓮牕深不世(연창심불세)/연꽃 창은 세상에서 보기 드물고

雪衲淡如仙(설납담여선)/눈빛 같은 장삼 깨끗하기가 신선 같네.

桑下能無戀(상하능무련)/절에서는 세상일 그리워하는 마음 없었는데

回筇却黯然(회공각암연)/지팡이 돌려 돌아오니 슬프고 침울해지네.


 

⑫望絶頂(망절정)/꼭대기를 바라보며

 

人言不可上(인언불가상)/사람들이 오를 수 없다고 말하더니

千丈接靑空(천장접청공)/천길 봉우리는 푸른 하늘에 닿아 있네.

中途莫回杖(중도막회장)/중도에 지팡이 돌려 돌아오지 마라

登登山自窮(등등산자궁)/오르고 오르면 산은 저절로 끝나리.


 

⑬登天王峯(등천왕봉)/천왕봉에 올라

 

回首人寰萬品低(회수인환만품저)/머리 돌려 인간세상 바라보니 만물이 아래로 보이고

燕秦吳楚一鷦棲(연진오초일초서)/연나라·진나라·오나라·초나라가 한 마리 뱁새 집 같네.

是知坐處高然後(시지좌고고연후)/이렇게 앉아 있는 곳이 높다는 걸 안 뒤에는

列嶽群峯不敢齊(열악군봉불감제)/여러 늘어선 봉우리들 감히 나란하다고 할 수 없겠다.


 

⑭日月臺觀日出(일월대관일출)/일월대에서 일출을 보며

 

一萬四千丈(일만사천장)/일만 사천 장 높이 올라

俯壓馮夷宮(부압풍이궁)/풍이궁을 굽어보고

桃鷄五六唱(도계오륙창)/도원의 닭이 대여섯 번 울 제

縱目扶桑東(종목부상동)/부상의 동쪽으로 눈 크게 뜨고 바라보니

滄海浩茫茫(창해호망망)/창해는 넓고 아득하며

視天何夢夢(시천하몽몽)/하늘을 보니 어찌 그리 흐릿한가?

煙霧共掩靄(연무공엄애)/연기와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뒤덮혀

依黯更朦朧(의암갱몽롱)/어렴풋한데다 몽롱하고

乾坤混侖間(건곤혼륜간)/천지가 혼돈에 빠진 사이에

方未判鴻濛(방미판홍몽)/바야흐로 하늘과 땅이 갈리기 이전의 기운이 엉킨 것 같네.

俄然五雲闢(아연오운벽)/갑자기 5색 구름이 열리고

金莖聳虛空(금경용허공)/구리 기둥이 허공중에 솟아 올라

圓轉大如輪(원전대여륜)/수레바퀴처럼 둥글게 크게 굴러

直遵黃道中(직준황도중)/바로 황도 속으로 좇아 들어가네.

陰陽分一着(음양분일착)/음양이 한번에 나눠지고

豁然如發蒙(활연여발몽)/툭 틔어 시원한 것이 어리석음을 깨친 듯 하네.

掃除夜色黑(소제야색흑)/캄캄한 어둠 쓸어내고

揮拂朝暉紅(휘불조휘홍)/아침 해 떨치고 날아올라 붉게 빛나니

山河紛照曜(산하분조요)/산하가 엉켜 찬란하게 빛나고

宇宙倏玲瓏(우주숙영롱)/우주가 잠깐 사이에 영롱해지네.

朗開玉燭(황랑개옥촉)/해는 빛나 세상을 밝게 비추니

依俙堯舜功(의희요순공)/요순임금이 이룬 공과 비슷하네.

所貴乎君子(소귀호군자)/군자에게 귀한 것은

觀物反諸躬(관물제반궁)/사물을 보면 스스로를 돌아보아 반성하는 것,

我願明明德(아원명명덕)/내가 원하는 것은 밝은 덕을 밝혀

與汝同始終(여여동시종)/너와 함께 처음과 끝을 같이 하는 것,

何由畵出日(하유화출일)/어떻게 하면 해 뜨는 모습 표현하랴?

再拜獻四聰(재배헌사총)/거듭 절하고 사방의 소리 듣기 위해 귀를 열어야 하리.

 

註) 馮夷宮(풍이궁) : 전설 속 황하(黃河)의 神 하백(河伯)이 산다고 하는 물속 궁전


 

⑮轉向雙溪途中口占(전향쌍계도중구점)/쌍계사로 향하는 도중에 즉석에서 짓다

 

林深人跡絶(임심인적멸)/숲이 깊어 인적은 끊어지고

石路摠雲梯(석로총운제)/돌길은 모두 구름 속 사다리 같네.

無數磨天嶺(무수마천령)/하늘에 맞닿은 고개는 무수히 많고

有時絶壑溪(유시절학계)/때로는 끊어진 깊은 골짜기도 있어

緣崖身欲墜(연애신욕추)/벼랑에 붙어갈 땐 몸이 떨어질 것 같고

攀壁手相携(반벽수상휴)/절벽을 오를 때는 손을 서로 잡아주네.

日暮愁歸宿(일모수귀숙)/해는 저물어 돌아가 잘 곳이 걱정인데

可憐捷逕迷(가련첩경미)/가련하게도 지름길은 보이지 않네.


 

⑯佛日庵/불일암

 

孤庵明慧日(고암명혜일)/외로운 암자에 해 밝게 뜨고

迢遞碧峯巓(초체벽봉전)/멀고 먼 푸른 봉우리들

亂石淸流洞(난석청류동)/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돌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내

白雲紅樹天(백운홍수천)/하늘가엔 흰 구름과 붉은 단풍나무

居僧無世事(거승무세사)/그곳에 사는 스님은 세상사 없고

遊客亦仙緣(유객역선연)/유람객 역시 신선과 인연이 있어서 오는 곳

可惜名山勝(가석명산승)/아깝다, 명산의 좋은 경치는

任他釋氏專(임타석씨전)/스님들이 오로지 하도록 내버려뒀으니.


 

⑰登香爐峯古靈臺(등향로봉고령대)/향로봉 고령대에 올라

 

萬壑香煙起(만학향연기)/만 골짜기 향기로운 안개 일어나고

峯晴日照紅(봉청일조홍)/봉우리 맑게 개어 해 붉게 비치네.

地勢千尋兀(지세천심올)/땅은 천길이나 우뚝하고

天容一望空(천용일방공)/하늘은 한번 바라볼 공간만 허용하네.

脚下環蓬海(각하환봉해)/다리 아래에는 운해가 감싸고

頭邊接閬風(두변접랑풍)/머리 위엔 신선 사는 곳과 닿아 있네.

喬期杳消息(교기묘소식)/신선 왕교의 소식 아득하여

怊悵倚枯松(초창의고송)/울적한 마음으로 마른 소나무에 기대어 섰네.

 

註) 향로봉고령대와 아래 ⑲의 비로봉에 관해서는 ‘다우’님의 산행기 《향로봉과 비로봉 그리고 그 능선에 대한 고찰에 관하여》참조


 

⑱玩瀑臺/완폭대

 

香爐峯下鶴淵頭(향로봉하학연두)/향로봉 아래 학연 끝으로

斷崖千丈玉飛流(단애천장옥류비)/천장 단애를 옥처럼 흩날리는 폭포

流過雙溪寺外去(유과쌍계사외거)/흘러 쌍계사를 지나 밖으로 나갈 때는

消息應傳八詠樓(소식응전팔영루)/이곳 소식을 응당 팔영루에 전해 주겠지.


 

⑲登毗盧峯(등비로봉)/비로봉에 올라

 

尖峯突兀石棧高(첨봉돌올석잔고)/뾰족한 봉우리 오똑 솟고 돌 잔도는 높아

飛步凌空氣欲豪(비보능공기욕호)/나는 듯한 걸음으로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기운 호방해지네.

回首八仙何處去(회수팔선하처거)/머리 돌려보니 팔선은 어디로 갔나?

滿天斜日倚東皐(만천사일의동고)/하늘 가득 지는 해를 동쪽 언덕에 기대어 보네.

 

註) 八仙 : 중국 도교 및 민간전설에서 대표적으로 꼽는 8명의 仙人.


 

⑳喚鶴臺/환학대

 

玉簫仙子去茫然(옥소선자거망연)/옥퉁소 불던 선자(仙子) 떠난 지 아득하니

喚鶴虛臺幾百年(환학허대기백년)/환학대는 비어 있은 지 몇 백년인가?

惟有臺前紅桂樹(유유대전홍계수)/오직 대 앞에는 붉은 계수나무 뿐

花開花落夕陽天(화개화락석양천)/꽃이 피고 지는 저물녘, 하늘가에 서 있네.


 

㉑過普照庵(과보조암)/보조암을 지나며

 

釋氏家傳普照師(석씨가전보조사)/불가에서 보조국사 얘기 전하는데

師以甚明普照爲(사이심명보조위)/스승으로서 매우 밝기에 보조(普照)라 하였겠지.

普照衆生師莫說(보조중생사막설)/중생을 널리 비추는 스승이란 말 하지 마시오

恐不能於自照之(공불능어자조지)/스스로를 비추지 못할까 염려된다오.


 

㉒到雙溪寺(도쌍계사)/쌍계사에 당도하여

 

萬壑霜楓石逕藤(만학상풍석경등)/만 골짜기에 서리내려 단풍들고, 돌길엔 등나무 덩굴

超然蘭若壁層層(초연란야벽층층)/아름다운 절은 층층 절벽 속에 있네.

客來流水聲邊暮(객래유수성변모)/나그네 되어 흐르는 물소리 듣다 보니 날이 저물고

仙去靑山影裏曾(선거청산영리증)/신선은 청산 그림자 속에 일찍 떠나버렸네.

靈隱未能專勝槪(영은미능전승개)/영은사의 경치 다 좋을 수는 없고

天台何必願攀登(천태하필원반등)/천태산도 하필 부여잡고 올라야만 하랴?

嶽神亦解遊人意(악신역해유인의)/산신도 역시 유람객의 뜻을 알고서

分付丹霞到底凝(분부단하도저응)/붉은 노을에게 분부하여 산 아래에까지 엉기게 하네.

 

註) 영은사는 중국 항주 서호의 아름다운 절, 천태산은 절강성의 불교 성지. 쌍계사도 그에 못지 않다는 뜻.


 

㉓學士堂/학사당

 

孤雲宿虛堂(고운숙허당)/고운이 머물렀던 학사당은 비었으나

依俙眞面目(의희진면목)/어렴풋이 그의 진면목을 대하는 듯 하네.

仙歸餘故山(산귀여고산)/고운은 신선이 되어 떠나고 옛산만 남았는데

山靑磵水碧(산청간수벽)/산은 푸르고 계곡물도 푸르구나.


 

㉔題邀鶴樓(제요학루)/요학루에 붙여

 

剩賞名區勝(잉상명구승)/명승 구역 실컷 구경했으니

渾忘遠客愁(혼망원객수)/나그네 시름 멀찍이 다 잊었네.

方丈山中寺(방장산중사)/방장산 속의 절은

孤雲去後樓(고운거후루)/고운이 떠난 후로 누각만 남았는데

隱隱千峯月(은은천봉월)/은은히 일천 봉우리에 달이 뜨고

蕭蕭萬壑秋(소소만학추)/쓸쓸히 일만 골짜기에 가을이 들었네.

飄然邀鶴駕(표연요학가)/학을 불러 타고 표연히 떠날 수 있다면

更欲向瀛洲(갱욕향영주)/다시 영주(*신선이 사는 곳)로 향하려 하네.


 

㉕憩雙溪石門 : 有孤雲手字(게쌍계석문 : 유고운수자)/쌍계석문에서 쉬며 : 고운이 손수 쓴 글자가 있음

 

任他行且憩(임타행차게)/다른 사람 따라가다 또 쉬며

雲壑恣優遊(운학자우유)/구름 낀 골짜기에서 마음대로 놀았네.

石老千年字(석로천년자)/바위는 늙어 글자는 천년이나 되었고

林深九月秋(임심구월추)/숲은 깊어 9월의 가을날

逢僧問前路(봉승문전로)/스님을 만나 앞길을 물어

回馬渡澄流(회마도징류)/말을 돌려 맑은 물을 건넜네.

何處神凝寺(하처신응사)/어디가 신응사인가?

靑山影裏樓(청산영리루)/푸른 산그림자 속으로 누각 보이는 곳이라네.


 

㉖神凝寺敬次南冥先生韻(신응사경차남명선생운)/신응사에서 삼가 남명선생의 시에 차운함

 

層壁重屛面面(층벽중벽면면위)/층층 절벽은 병풍을 겹친 듯 면면이 둘렀고

白雲流水可棲(백운유수가서지)/흰 구름 흐르는 물, 느긋하게 쉴 만한데

翁已超然煙火外(옹이초연연화외)/늙은이는 이미 세상 밖의 일에 초연하니

滿天風露欲忘(만천풍로욕망귀)/여기 하늘 가득한 바람과 이슬에 돌아가길 잊겠네.

 

註) 남명原詩는 이렇다.

 

讀書神凝寺(독서신응사)/신응사에서 글을 읽다가


瑤草春山綠滿(요초춘산록만위)/아름다운 풀로 봄산에 푸르름 가득한데

爲憐溪玉坐來(위련계옥좌래지)/옥 같은 시냇물 사랑스러워 늦도록 앉아 있노라.

生世不能無世累(생세부능무세루)/세상 살면서 세상 얽매임 없을 수 없기에

水雲還付水雲(수운환부수운귀)/물과 구름은 도로 물과 구름에게 돌려주고 돌아오노라.


 

㉗洗耳巖/세이암

 

可笑巢翁多事者(가소소옹다사자)/우습다, 소부 노인 일 많은 사람인지

翩然出洞太無端(편연출동태무단)/훌쩍 동구 떠날 일이 까닭없이 많았구나.

塵喧遠隔山人耳(진훤원격산인이)/속세의 떠들썩한 말, 산에 사는 사람의 귀에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巖下淸川更不關(암하청천경불관)/바위 아래 맑은 시냇물은 더욱 세상사와 관련이 없다오.

 

註) 세이암소부에에 관해서는 지리박물관/문화유적명소《삼신동 이야기》참조

소부는 뭣 때문에 산 밖으로 나가 세속의 일에 연관되었느냐, 여기서는 그럴 일 없겠다는...


 

㉘綠磻巖/녹반암

 

白石淸流絶世紛(백석청류절세분)/흰 바위 맑은 물에 세상사 끊어지니

鹿門之洞武陵源(녹문지동무릉원)/녹문동과 무릉도원 같은 곳이라네.

往尋七佛庵歸路(왕심칠불암귀로)/칠불암 찾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巖上淸遊更一番(암상청유갱일번)/바위 위에서 다시 한번 깨끗하게 놀았네.

 

註) 녹문동 : 은거하기 좋은 이상향


 

㉙訪七佛庵(방칠불암)/칠불암을 찾아

 

步步山將暮(보보산장모)/걷고 걷는 동안 산은 어두워지려 하고

行行路不窮(행행로불궁)/가고 가도 길은 끝나지 않는데,

石老千年白(석로천년백)/바위는 천년이나 늙어 하얗고

林濃九月紅(임농구월홍)/숲에는 9월 단풍이 짙게 들었네.

慧日澄朗界(혜일징랑계)/밝은 해는 맑은 세상에 떠

曇雲隱映中(담운은영중)/흐린 하늘을 은은히 비추는데,

一聲驚客耳(일성경객이)/한 소리 나그네의 귀를 놀라게 하니

風便上方鐘(풍편상방종)/바람결에 울리는 상방의 종소리라네.

 

註) 上方 : 주지, 또는 주지가 거처하는 곳


 

㉚花開途中(화개도중)/화개로 가는 길에

 

山幾重重水幾回(산기중중수기회)/몇 번이나 겹치고 겹친 산과 몇 번이나 돌고 도는 물을 지났는지

夕陽前路已花開(석양전로이화개)/해는 저무는데 가야 할 앞길은 이미 화개에 닿아 있네.

也應落雁平沙外(야응낙안평사외)/응당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래밭가에

明月孤舟待我廻(명월고주대아회)/밝은 달 속의 외로운 배는 나를 기다려 돌아왔네.


 

㉛陶灘感古(도탄감고)/도탄에서 옛일을 느낀 바 있어

 

猗歟鄭一蠹(의여정일두)/아, 훌륭하다! 일두 정여창 선생이여

巍卓後人程(외탁후인정)/우뚝하여 후인들이 따라야 할 길

東方大處士(동방대처사)/동방의 위대한 처사요

南國老先生(남국노선생)/남국의 존경스러운 선생이다.

擧輿齎宿願(거여재숙원)/오랜 숙원을 가지고 같이 가려고

擿埴歎冥行(적식탄명행)/지팡이로 땅을 더듬어 어두운 길 가다가 탄식하였네.

行渡陶灘水(행도도탄수)/가다가 도탄을 건너며

停驂却愴情(정참각창정)/말을 멈추고 문득 슬픈 감정에 젖네.


 

㉜鍤巖懷古(삽암회고)/삽암에서의 회고

 

路多高蓋騖(노다고개무)/길에는 높은 수레 타고 달리는 이는 많고

人少角巾還(인소각건환)/은자들의 각건(角巾)을 쓰고 돌아오는 사람은 드물구나.

幾箇風塵外(기개풍진외)/몇 사람이나 풍진세상의 밖에서

卓然名利間(탁연명리간)/명리를 벗어났을까?

淸眞韓錄事(청진한녹사)/깨끗하고 참된 한녹사

窈窕頭流山(요조두류산)/아름다운 두류산에 숨었네.

欲問踰垣跡(욕문유원적)/담 넘은 흔적 물어보려 해도

虛巖夕日寒(허암석일한)/빈 바위에 저녁 날씨만 차구나.

 

註) 삽암에 관해서는 탐구방/지명탐구의 《부춘동(富春洞)》및 박물관/문화유적명소의《은둔선비의 기개가 서려 있는 악양의 취적대 혹은 모한대 혹은 삽암》 (꼭대님,제목이 너무 깁니다^^) 참조


 

㉝行到岳陽(행도악양)/가다가 악양에 도착하여

 

秋風西上岳陽樓(추풍서상악양루)/가을바람 서쪽에서 불고 악양루에 오르니

樓在乾坤日夜浮(루재건곤일야부)/누각은 천지간에 밤낮으로 떠 있네.

回首鄕山何處是(회수향산하처시)/고향산이 어느 곳인지 머리 돌려보니

煙波歸計一孤舟(연파귀계일고주)/안개 낀 물결에 돌아갈 방법은 외로운 배 한척 뿐.

 

註) 이 시는 유명한 두보(杜甫)‘등악양루’를 본떠 지은 시라 할 수 있다. 학창 때 두시언해(杜詩諺解)에서 배웠을 것이다. 原詩는 이렇다.

 

登岳陽樓(등악양루)/악양루에 올라 


昔聞洞庭水(석문동정수)/옛날에 동정호에 대해서 들었는데

今上岳陽樓(금상악양루)/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는구나.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오나라와 초나라가 동과 남쪽으로 갈라져 있고,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호수 위에 떠 있구나.

親朋無一字(친붕무일자)/가까운 친구의 편지 한 장 없고

老去有孤舟(노거유고주)/늙어감에 외로운 배 뿐이로다.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싸움터의 말이 관산 북쪽에 있으니

憑軒涕泗流(빙헌체사류)/난간에 의지해 눈물만 흘리노라.


 

㉞蟾江舟中敬次一蠹先生韻(섬강주중경차일두선생운)/섬진강의 배에서 삼가 일두선생의 시에 차운함

 

搖蕩蘭舟(요탕목란계로유)/목란으로 만든 배 움직이려 계수나무 노 부드럽게 젓는데

笛聲寥亮遠天(적성요량원천추)/고요하고 맑은 피리소리 먼 가을하늘까지 울려퍼지네.

觀盡千峯江上汎(관진천봉강상범)/천 봉우리 다 구경하고 이제 강 위에 배를 띄우니

當年未必獨風(당년미필독풍류)/당년의 풍류가 일두선생 혼자만은 아니라네.

 

註1) 소동파적벽부에 나오는 구절  "계수나무 노와 목란 삿대로 물에 비친 달을 쳐서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네.(棹兮槳 擊空明兮泝流光/계도혜난장 격공명혜소류광)"

 

2) 정여창原詩는 이렇다.

 

岳陽/악양에서


風蒲泛泛弄輕(풍포범범롱경유)/부들 풀 바람을 맞아 가볍게 흔들리는데

四月花開麥已(사월화개맥이추)/사월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익어가네

看盡頭流千萬疊(간진두류천만첩)/두류산 천만봉 두루 다 구경하고

孤舟又下大江(고주우하대강류)/외로운 배로 또 큰 강을 내려오네


 

㉟和養正丈韻(화양정장운)/양정 어른의 韻字에 화답하여 지은 시

 

孤舟移泊荻花汀(고주이박적화정)/외로운 배를 옮겨 갈대꽃 핀 물가에 정박하니

九月秋江近五更(구월추강근오경)/9월의 가을 강은 5경 가까이 되었습니다.

禪鐘何處江楓外(선종하처강풍외)/절의 종소리 어디선가 강가의 단풍나무 밖에 들려오니

彷彿寒山半夜聲(방불한산반야성)/산사의 한밤중 종소리가 아닌가 합니다.

 

註) 이 시는 중국 당(唐)나라 시인 장계(張繼)의 대표작 ‘풍교야박’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풍교(楓橋)는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蘇州)와 항주(杭州)가 있다.”고 하는 그 소주에 있는 다리다. 워낙 유명한 시라 소개가 필요없다 싶긴 하지만…. 原詩는 이렇다.

 

楓橋夜泊(풍교야박)/밤에 풍교에 배를 대고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달은 지고 까마귀 울어 서리는 하늘에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강가의 단풍나무와 고기잡이배의 불빛 바라보다 시름 속에 잠드네.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울리는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한밤중의 종소리 나그네 뱃전에 부딪히네.


 

㊱昆山途中(곤산도중)/곤산(*지금의 곤양) 가는 길에

 

山明水潔去尋眞(산명수결거심진)/산 밝고 물 깨끗한 곳으로 진인(眞人)을 찾으러 가서

物外乾坤送一旬(물외건곤송일순)/세상 밖 천지에서 열흘을 보냈네.

萬壑煙霞收拾盡(만학연하수습진)/만 골짜기 안개와 놀을 거두어 시 짓는 데 다 써버렸으니

頭流風景想應貧(두류풍경상응빈)/두류산 풍경은 생각컨대 응당 빈약해졌으리라.

 

 

※ 애초에 가객님이 이 분의 두류기행 연작시 36 수를 보내면서 무위암과 남대암 시만 우선 번역해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가, 후에 완역하여 2013년 옛산행기방에 올렸는데 사라졌습니다. 별로 재미도 없는 거라 잘됐다 하고 내버려두고 있었는데, 가객님의 독촉으로 다시 올립니다.

 

 



가객 15-03-05 07:14
수정 삭제  
장문의 자료를 국역하신 수고도 모자라 삭제된 것 복원하는 노고까지.
      99가 이선생께 빚을 너무 많이 지는 것 같습니다.

본문 속의 "영모재"는 박태무의 당시의 동선으로 추정을 하면 현 남사마을의 성주이씨 재실입니다.
연전에 모한재를 가서도 영귀대는 보지를 못했는데 미수 어른의 친필을 영접하러 다시 한번 가보아야 겠습니다.

재미없는 자료가 아니라 웬만한 산행기보다 훨씬 가치있는 자료입니다.
세석청학동으로 인정하게 하는 행과석두,폐사지의 위치탐구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무위암남대암 등... 충격적인 글입니다.
     
엉겅퀴 15-03-05 08:21
수정 삭제  
가객님, 서계선생의 일정으로 볼 때
덕천서원에서 무위암으로 가는 도중에 영모재에 들른 것으로 되어 있어
영모재지촌이나 동당, 또는 곡점 그 어디메 쯤이 아닐까요?
          
가객 15-03-06 11:55
 
사실은 이선생의 국역 이전 나름 문장 속의 지명탐구를 열심히 했습니다.
 경치 좋은 곳에 세웠던 개인의 서실이나 정자와는 달리  재실은 주로 사대부 가문의 집성촌을 중심으로 세워진 까닭을
염두에 두고 추정을 해 보면 덕천서원 이후 동당 곡점 등은 재실이 들어서기에는 너무 궁항벽촌이었다고 보아집니다.
실제 당시 두류록의 기록을 보면 그쪽에는 재실은 보이지 않고 주담정사 무이정사 심진정 등 개인의 세거지가 보입니다.

추정컨대, 서계선생의 입장에서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상황이지만, 
당시 곡점의 주담정사 주인 김대집, 옥종 거주 조선적 두 지인들과의 만남을 위해서 당시 유학자들의 발길이 빈번했던
지근 거리의 영모재를 만남의 장소로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해석이 무척 자의적이지만 수 년 동안 덕산 부근 옛 지명에 통달(?)한 덕분에 얻은 결론입니다.ㅎㅎ
강호원 15-03-05 18:28
 
아따, 거 시가 억수로 많네예~~~~~

가객 누님 말씀대로 산행기인 산문보다 훨씬 품격이 높은 글입니다.
문외한인 제가 대충 보아도.

선인들의 시를 차운하여 짓는 솜씨가 기막힙니다.

잘 봤습니다.






작성일 : 15-03-25 00:25
                      
1745, 박태무 <중유두류(重遊頭流)>
       
 글쓴이 : 엉겅퀴
조회 : 1,564  

 

【약간의 설명】

 

   서계 박태무는 60세(1736년 가을) 때 두류산을 유람하고 기행시 36수를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유두류산기행(遊頭流山記行)』이다. 다시 69세(1745년)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그 절반인 18수의 시를 남겼는데 여기 『중유두류(重遊頭流)』이다.

 

그의 유람 경로는 그가 쓴 詩로 보건대 「백운동 → 옥녀봉 → 불장암·만화담 → 송객정 → 삼장사 → 대원암 → 공전 → 오대사 → 가례암·백암 → 안계(옥종) → 진주」로 추정된다.

‘유두류산기행’의 계절은 가을이었고 ‘중유두류산’의 계절은 봄이다. 그의 시에, “화창한 봄날·연초록 산수유 잎·철쭉꽃(이상 ⑨번 시), 두견새(⑪), 봄놀이(⑭), 봄이 와도(⑯)…” 등의 구절을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2013년 그의 '유두류산기행'詩를 번역하면서 '중유두류'詩까지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얼마전 그의 사라진 글을 복구하면서 내친 김에 같이 번역하였는데, 그동안 경황이 없어 이제사 다듬어 올린다. 짐을 덜은 느낌이다.

 

 

① 白雲洞和河千期必淸(백운동화하천기필청)/백운동에서 하천기(이름은 필청)1)에게 화답하다


先生三入白雲洞(선생삼입백운동) 선생(*남명)이 세 번이나 들어간 백운동에는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

만 천년동안 유유히 오가는데

爲問白雲雲不語(위문백운운불어) 흰 구름에게 물어봐도 구름은 말이 없고

獨立斜陽小子愁(독립사양소자수) 석양에 홀로 서서 시름겨워 하노라.

 

註1) 하필청(河必淸 1701-1758) : 자 천기(千期), 호 태와(台窩), 본관 진양, 거주 진주. 태와문집(台窩文集)이 있다.

 

② 觀上下瀑敬次南冥先生韻(관상하폭경차남명선생운)/위아래 폭포를 구경하고 삼가 남명선생의 시1)에 차운하여


山自悠悠水自(산자유유수자유) 산은 저절로 한가하고 물 또한 한가하게 흐르는데

白雲淸瀑洞天(백운청폭동천유) 흰 구름 맑은 폭포, 골짜기는 깊고

先生一去無消息(선생일거무소식) 선생은 한번 간 뒤 소식이 없으니

誰是千年隱者(수시천년은자류) 그 누가 천년의 은자인가?

 

註1) 남명선생「유백운동(遊白雲洞)」시는 다음과 같다. 자세한 풀이는 문화유적명소/‘남명선생장구지소’를 참고하시라.


天下英雄所可(천하영웅소가수) 천하 영웅들이 부끄러워하는 바는

一生筋力在封(일생근력재봉류) 일생의 공이 유(留)땅에만 봉해진 것 때문

靑山無限春風面(청산무한춘풍면) 끝없는 청산에 봄바람이 부는데

西伐東征定未(서벌동정정미수) 서쪽을 치고 동쪽을 쳐도 평정하지 못하네.

 

여기서 남명의 운(韻)은 1,2,4구의 수(羞)·류(留)·수(收)이나 박태무의 운은 유(悠)·유(幽)·류(流)이다. 이처럼 차운(次韻)은 반드시 원시(原詩)와 똑 같은 글자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用韻], 같은 운에 속하는 다른 글자를 쓰기도[依韻] 한다.


 

③ 玉女峯(옥녀봉)/옥녀봉에서


川上亭亭玉女峯(천상정정옥녀봉) 시냇가에 우뚝 솟은 옥녀봉2)

依然浮在畵圖中(의연부재화도중) 의연하게 그림 속에 떠있는 듯 하구나!

有水流觴洄九曲(유수류상회구곡)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면1) 아홉 굽이나 돌 것 같고

臨風却憶武夷翁(임풍각억무이옹) 불어오는 바람에 문득 무이옹(*朱子)이 생각나네.

 

註1) 구불구불한 물길에 술잔을 띄워 술을 마시는 풍류를 유상곡수(流觴曲水)라 하며, 왕희지(307-365)의 난정집서(蘭亭集序)에 처음 등장한다. 흔히 경주 포석정도 그 놀이의 흔적으로 본다.

주자무이구곡(武夷九曲)을 연상하며 구곡·무이(옹)·옥녀봉이란 시어를 쓴 것 같다. 옥녀봉무이구곡 2번째이다.

 

2) 옥녀봉은 전국에 무수히 많다. 朱子(1130-1200)의 영향으로 구곡이라 이름 붙인 데는 거의 다 옥녀봉이 있다. 성리학 정착 이후 구곡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되었으며, “○○九曲”이라 이름붙인 곳은 전국에 100여 군데가 넘는다 한다.

 

또 풍수에서는 삼각형 모양의 단정하고 다소곳한 산을 옥녀봉이라 하여 길지(吉地)로 친다. 그래서 옥녀봉이 없는 고장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옥녀봉이 어느 곳인지 정확히 지칭할 수는 없지만, 추측컨대 단속사지 뒤, 청계저수지 앞 414.4m 봉우리가 아닌가 싶다. 운리 쯤에서 바라보면 영락없이 미녀가 치마로 몸을 감싸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물론 지금도 그 동네 사람들은 옥녀봉이라 부른다.

 

   옛기록을 좀 뒤적여봤더니, “대현촌(*청계저수지 부근) 아래에 옥녀봉이 있다, 안동 권씨(*입석이 집성촌이었다)의 선영으로 단속리에 있다, 봉우리 아래에 단속사터가 있다, 옥녀봉 아래에 정당매가 있다, 골을 雲谷(*지금의 운리)이라 하고 뒤의 봉우리를 옥녀봉이라 한다…” 등등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박태무백운동을 구경하고 내원사 계곡으로 향하면서 단속사지와 함께 들렀지 않나 싶다.


 

④ 訪佛莊庵和河觀夫大觀(방불장암화하관부대관)/불장암1)을 찾았을 때 하관부(이름은 대관)2)에게 화답하다


殘年無好事(잔년무호사) 남은 생애 좋은 일 없고

泉石最膏肓(천석최고황) 산수를 사랑하는 병3)이 최고로 깊었네.

落花看可愛(낙화간가애) 떨어지는 꽃도 사랑스럽고

芳草坐何妨(방초좌하방) 방초에 앉은들 무슨 상관이랴?

溪聲添宿雨(계성첨숙우) 시냇물 소리에 어젯밤 내린 비가 더해지고

山影帶斜陽(산영대사양) 산그림자는 석양 따라 길어지네.

雲壑迷歸路(운학미귀로) 구름 깊은 골짜기 돌아갈 길을 잃어

逢僧問佛莊(봉승문불장) 스님을 만나 불장암을 묻네.

 

註1) 불장암(佛庵)불장암(佛庵)으로 표기하는 게 맞을 것이다. 불장(佛藏)은 불경(佛經) 또는 부처의 가르침을 뜻하고, 또 다른 사람의 기록에도 다 불장암(佛藏庵)으로 되어 있으니까.

 

2) 하대관(河大觀 1698-1776) : 자 관부(寬夫), 호 괴와(愧窩), 본관 진양, 하동 안계 거주, 문집으로 괴와집(愧窩集)을 남겼다.

 

3) 천석고황(泉石膏肓) : 산수를 사랑하는 병이 깊어 고칠 수 없다는 뜻. 연하고질(煙霞痼疾)이라고도 한다. 고황(膏肓)은 심장과 횡격막 부위를 가리키며, 옛날에는 병이 여기까지 미치면 치유불가라 여겼다.


 

⑤ 敬次南冥先生聲字韻(경차남명선생성자운)/삼가 남명선생의 ‘성(聲)’字 운을 따라 짓다


洪鐘無大扣(홍종무대구) 거대한 종은 크게 치지 않으면

千古竟含(천고경함성) 천고에 끝내 소리만 품고 있울 뿐.

請看頭流山(청간두류산) 저 두류산을 보게나,

山豈學天鳴(산기학천명) 산이 어떻게 하늘이 우는 것을 배우는지.

 

註) 잘 알다시피 남명원시는 이렇다.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 덕산 시냇가 정자의 기둥에 쓰다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저 거대한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

非大扣無(비대구무)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 수 있을까?


 

⑥ 萬花潭(만화담)/만화담1)에서


天王峯薩川湄(천왕봉하살천미) 천왕봉 아래 살천가를

綠玉穿霞步步遲(녹옥천하보보지) 녹색 구슬이 노을을 뚫고 흐르는 모습 보며 천천히 걸어

潭名紅到新春驗(담명홍도신춘험) 이름처럼 붉게 변한 깊은 물[萬花潭]에 이르니 새봄이 온 것을 알겠고

山色蒼因霽景奇(산색창인제경기) 비 개인 산색은 푸르러 경치 더욱 기이하다.

無非絶勝挽吾輩(무비절승만오배) 뛰어나지 않은 곳이 없는 경치가 우리를 이끌어

何幸淸遊及此時(하행청유급차시) 때맞춰 노닐게 하니 얼마나 행운인가!

遙望白雲深處去(요망백운심처거) 멀리 흰 구름은 깊은 곳으로 흘러가고

東風吹送萬花飛(동풍취송만화비) 동풍이 불어와 만 송이 꽃잎을 흩날려 보내네.

 

註1) 내원사 계곡 명옹대(明翁臺) 바위 이랫쪽에 ‘만화담(萬花潭)’ 각자(刻字)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산유화님의 지리다방/지리산 나들이 2탄(구곡계곡) 참조.


 

⑦ 佛莊庵喜金上舍伯厚來會(불장암희김상사백후내회)/불장암에서 김상사1) 백후(이름은 돈墩)를 만나 기뻐하며


千峯錦照耀(천봉금조요) 천 봉우리는 비단처럼 밝게 빛나고

萬壑玉紛流(만학옥분류) 만 골짜기의 옥 같은 물 어지러이 흐르는 곳,

巖間歸路細(암간귀로세) 바위 사이 오솔길을 돌아가니

林下小庵幽(임하소암유) 숲속에 작은 암자 깊이 숨어 있네.

故人來白髮(고인래백발) 어떻게 하면, 백발이 된 고인을 오게 하고

仙子自丹邱(선자자단구) 신선을 별천지에서 불러와

題品慈恩興(제품자은흥) 이 좋은 경치를 품평하는 그런 고마운 기회를 만들어

何如此勝遊(하여차승유) 이 절승에서 놀 수 있을까?

 

註1) 상사(上舍)는 진사나 생원을 말함. 김돈(金墩 1702-1770)은 자가 백후(伯厚), 호가 묵재(黙齋)로 산청 법물 사람이며, 묵재문집(黙齋文集)을 남겼다.


 

⑧ 送客亭(송객정)/송객정1)에서


南冥曾送德溪歸(남명증송덕계귀) 남명이 일찌기 덕계를 보내고 돌아온 곳

亭樹含情遠別離(정수함정원별리) 정자 옆 나무는 먼 이별의 정을 품고 있으리.

分付兒曺須勿翦(분부아조수물전) 아이에게 이르노니, 저 나무는 자르지 마라

此翁俱是士林師(차옹구시사림사) 두 어른 모두 사림(士林)의 스승이거니.

 

註1) 《진양속지》에 “주(州 *진주)의 서쪽 삼장면 덕교리에 있다. 덕계 오건(德溪 吳健, 1521-1574)이 남명을 뵙고 돌아갈 때면 남명이 반드시 여기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얻었다.” 하였다. 이후 송객정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⑨ 宿三藏寺(숙삼장사)/삼장사에서 자며


萬疊孱顔裏(만첩잔안리) 만 겹이나 둘러싸인 높고 험한 산속에

三藏大耳基(삼장대이기) 삼장사삼장 대이1)가 터를 잡은 곳

本來幽邃勝(본래유수승) 본래부터 그윽하고 깊은 절경인데

方値艶陽時(방치염양시) 때마침 시절은 화창한 봄날이라

軟綠茱萸葉(연록수유엽) 연초록 산수유 잎 돋아나고

深紅躑躅枝(심홍정촉지) 철쭉꽃2)은 빨갛게 피었네.

胸中無世累(흉중무세루) 가슴 속엔 번잡한 세상사 없어

夜靜話厖眉(야정화방미) 고요한 밤 눈썹 긴 노승과 이야기 나누네.

 

註1) 삼장 대이(三藏大耳)스님은 서천(인도)에서 당나라로 와 타심통(他心通)에 통달했다고 자랑하다가 당시의 유명한 선승(禪僧) 혜충국사에게 혼이 난 스님인데, 그 스님이 삼장사를 세웠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아마 인도스님 연기조사화엄사를 세웠다는 설화처럼 그런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삼장사의 절이름 유래에 관해서는 지명탐구방의 「삼장사(三寺)인가, 삼장사(三寺)인가?」를 참조하시라.

 

2) 철쭉은 보통 소리 나는대로 척촉(躑躅)으로 표기하는데, 원전(原典)에서는 艸(艹)+鄭 艸(艹)+躅(척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인터넷에서는 이 한자를 표기할 방법이 없어 그냥 躑躅으로 고쳐 표시하였다.

독성이 있는 철쭉꽃을 염소가 먹으면 마비증상이 있어 다리를 쩔뚝거리며 맴돈다고 하여 꽃이름이 쩔뚝꽃>철쭉꽃이 되었다는 그럴싸한 설이 있다. <민간어원설>


 

⑩ 訪大源庵(방대원암)/대원암을 찾아


幾重山又幾重溪(기중산우기중계) 몇 겹의 산과 또 몇 겹의 시내를 지나

山盡溪窮又一溪(산진계궁우일계) 산이 끝나고 시내가 다한 곳에 또 하나의 시내가 있고

溪上有山山有室(계상유산산유실) 시내 위에 산이 있고 산속에 집이 있으니

莫向廬山訪虎溪(막향여산방호계) 구태여 여산의 호계1)를 찾을 것 없다.

 

註1) 중국 동진(東晋)의 慧遠스님(334-416)은 강서성 여산(廬山)동림사(東林寺)를 짓고 열반할 때까지 30여년 동안 벗어나지 않았다. 손님을 보낼 때에도 절앞 호계(虎溪)의 돌다리는 건너지 않았는데, 어느날 도연명(陶淵明)육수정(陸修靜) 두 사람이 방문했을 때 청담에 열중한 나머지 두 사람을 보내면서 무심코 호계(虎溪)를 건너고 말았다 한다. 범이 포효하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된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고사가 있다. [虎溪三笑]


 

⑪ 聞子規(문자규)/두견새 소리를 듣고


恣意煙霞久不歸(자의연하구불귀) 마음껏 산수에 놀며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더니

子規啼送不如歸(자규제송불여귀) 두견새 울면서 돌아가라고[不如歸]1) 하네.

不如歸坐書牀下(불여귀좌서상하)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收斂身心定所歸(수렴신심정소귀) 몸과 마음을 다잡아 돌아갈 곳을 정하였네.

 

註1) 고대 중국 촉(蜀)나라 임금 망제(望帝)는 임금 자리에서 쫒겨나 신세를 한탄하며 울다가 죽었는데, 그의 영혼은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 돌아가고 싶다)’하면서 목에 피가 나도록 울었다고 한다. 접동새·자규(子規, 蜀子規)·귀촉도(歸蜀途)·두우(杜宇)·망제혼(望帝魂) 등으로도 불린다.


 

⑫ 歸到公田省墓(귀도공전성묘)/돌아오다가 공전1)에 이르러 성묘하다


慟哭荒山雨露濡(통곡황산우로유) 황량한 산, 비와 이슬에 젖어 통곡하는데2)

斑衣兒已白頭鬚(반의아이백두수) 색동옷 입었던 아이는 어느덧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세었다네.

年來久曠晨昏拜(년래구광신혼배) 근래 오랫동안 아침 저녁3)으로 성묘해야 하는 도리를 빠뜨렸으니

慙愧人間不孝吾(참괴인간불효오) 참으로 인간으로서 불효한 내가 부끄럽구나.

 

註1) 공전(公田)은 지금의 내공·외공을 가리킨다.

2) 조상의 무덤을 모신 산이 찾는 이 없어 황량하고 게다가 비와 이슬에 젖은 것을 보고 통곡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3) 신혼(晨昏)혼정신성(昏定晨省)으로, 저녁에는 잠자리를 살피고 아침 일찍 문안을 드린다는 뜻. 효도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는 자주 조상묘를 찾아뵈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⑬ 五臺寺老杏(오대사노행)/오대사의 늙은 은행나무


擇不處仁焉得智(택불처인언득지) 어진 곳을 가려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1)

昌平門外講壇高(창평문외강단고) 창평2)의 문 밖 강단은 높은데

何事蔥林無味地(하사총림무미지) 무슨 일로 무성한 나무가 의미 없는 땅에서3)

等閒生長倚空皐(등한생장의공고) 아무렇게나 자라 빈 언덕에 기대어 섰나?

 

註1) 출전은 《논어》 「이인(里仁)」편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智? (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이다.

옛날부터 이 문장의 해석에는 논란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2가지 해석만 보자. 먼저 주자의 해석은 이렇다. “마을은 인후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다우니, 마을을 택하여 인후한 곳에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다산 “仁에 거처하는 것이 아름답다. 거처할 곳을 택하되 仁에 거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라 하였다. 맹자가 공자의 말을 풀이하여 “仁이란 사람의 편안한 집(仁者人之安宅也)”이라 한 것을 근거로 삼고, 군자의 도는 어디서든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 사는 곳 탓을 할 게 아니라는 뜻에서 그렇게 해석하였다.

다산의 해석이 훨씬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만 여기서는 전자의 뜻으로 쓰였다.

 

2) 창평공자가 태어난 노나라 추읍창평이다. 서너 살 때 인근의 곡부로 이사하여 자랐다고 한다. 강단(講壇)은 학문하는 장소를 말한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 단(壇)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하여 행단(杏壇)도 강단의 뜻으로 쓰인다.

 

3) 그래서 서원이나 향교의 문 앞에는 붓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나무를 심었는데 학자수(學者樹)라 하며, 주로 은행나무회화나무를 심었다. 따라서 공자의 고향 창평의 강단에나 있어야 할 오래된 은행나무가 쓸데없이 절에 있는 것을 탄식한다는 뜻이다. 성리학자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⑭ 家禮巖(가례암)/가례암에서


人而無禮死其宜(인의무례사기의) 사람으로 예(禮)가 없으면 죽어야 마땅한데

知禮之家此世稀(지례지가차세희) 예를 아는 집안은 지금 세상에 드물다오.

方丈有巖巖有號(방장유암암유호) 방장산에 바위가 있고, 그 바위를 예암(禮巖)이라 부르니

春遊非爲訪林菲(춘유비위방림비) 봄놀이는 숲 우거진 곳 찾을 것 아니다.

 

※ 2013년 초 ‘부춘동’이란 글에서 가례암에 대하여 제법 상세히 언급했는데 사고 때 사라졌다. 나한테도 원고가 남아 있지 않아 다시 살릴 수도 없고 2탄을 쓸 수도 없어 아쉽다. 


 

⑮ 白巖(백암)/백암에서


澄波洗復洗(징파세부세) 깨끗한 물결에 씻기고 또 씻겨

曾不點塵留(증부점진류) 일찌기 먼지 한점 남지 않았네.

深䆳頭流麓(심수두류록) 깊고 깊은 두류산 기슭

淸高錄事遊(청고녹사유) 맑고 높은 한녹사 거닐던 곳,

有懷空谷暮(유회공곡모) 해질녘 빈 골짜기에 감회가 일어

無語遠山愁(무어원산수) 말없는 먼 산을 바라보니 시름겹구나.

事與巖俱白(사여암구백) 녹사와 바위 모두 깨끗한데

巖前雲水悠(암전운수유) 바위 앞엔 구름과 물만 유유히 흐르네.

 

백암(백암동천)에 관하여는 산행기/‘맹세이골과 백암동천(산유화)’과 ‘고기~묵계마을~장재기~백암동천(해영)’ 을 참조하시라.


 

⑯ 安溪感懷(안계감회)/안계에서의 감회


不忍春來獨自哦(불인춘래독자아) 봄이 와도 차마 홀로 읊조리지 못해

安溪無主尙淸波(안계무주상청파) 안계에는 주인1)이 없는데 맑은 물만 여전하구나.

一聲悽愴山陽笛(일성처창산양적) 산 남쪽에서 들리는 한가락 구슬픈 피리소리에

萬事悠悠夕日斜(만사유유석일사) 만사는 아득히 멀어지고 저녁 해 기우네.

 

註1) 여기서 주인은 양정재 하덕망(河德望 1664~1743)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덕망은 그가 존경하던 선배로 안계광영정을 짓고 모한재를 지키며 평생을 보냈다. 박태무와 1736년 지리산 유람에 동행하였고, 많은 시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이때는 하덕망이 죽은(1743)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다. 그래서 ‘봄이 왔어도 차마 홀로 읊조리지 못한다’ 고 풀이하였다.

 


⑰ 別安溪諸益(별안계제익)/안계에서 여러 벗들과 헤어지며


人間多別路(인간다별로) 인간 세상에는 이별의 길 많은데

溪上去留懷(계상거류회) 시냇가에서 떠나고 머무는 회포를 나누네.

好會重有約(호회중유약) 좋은 만남 다시 약속하기를

淸秋慕寒齋(청추모한재) 맑은 가을날 모한재1)에서 모이기로 하였네.

 

註1) 모한재(慕寒齋) : 하동 옥종 안계리에 위치. 남명 이후 제일인자로 일컬어지는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1593-1666)가 창건하여 강학(講學)하던 곳이다. 모한이란 명칭은 주자한천정사(寒泉精舍)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모한대 앞 바위에 새겨 놓은 영귀대(詠歸臺)란 글씨는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글씨라 한다.


 

⑱ 歸園(귀원)/동산으로 돌아와서


萬壑煙霞宿債酬(만학연하숙채수) 만 골짜기 안개와 노을에 놀겠다는 묵은 빚을 갚았으니

殘年活計便休休(잔년활계편휴휴) 남은 날의 살아갈 계획은 편히 쉬고 쉬는 것

頭流山在詩篇裏(두류산재시편리) 두류산을 시편 속에 담아 왔으니

從此松牕足臥遊(종차송창족와유) 이제부터 소나무 창 아래 누워 노닐기[臥遊] 족하리.

 

<원문 : 경상대학교 문천각, 영인본에 따라 일부 수정함>




가객 15-03-27 13:12
 
1745년 이라면 200년 조금 지난 시절의 불장암삼장사의 역사가 저렇게 건재한데.
과연 불장암의 위치는 어디인지...
박태무선생의 작품을 위주로 동선을 따라가 보면 불장암만화담 이전이거나 아니면 바로 인근인 듯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원사가 불장암 유력 후보지 같기도 한데... 당시 동시대의 기록들에 내원사(덕산사)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염두에 두어지고,

 창건 이래 수 백년동안 오대사의 상징은 은행나무인 것 같습니다.
절집 앞에 뜬금없이 서 있는 은행나무를 보고 의미없다고 한 작가의 감정이 솔직하기 그지 없군요

귀원(동산으로 돌아와서)....내 이야기입니다.ㅋ
객꾼 15-05-30 23:27
 
엉겅퀴님은 누구시옵니까
굳이 다른 사람을 통하여 알아도 될 일을 성급히 여쭙는 것은 과시 스승으로 삼고 싶습니다
다만 한가지 단점이 있다면^^
너무나 지나치게 겸손하여 독자가 오히려 민망합니다^^



ㅡ 지리산 99 아흔아홉골 자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