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25. 19:22ㆍ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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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기 콘텐츠 유두류산기 - 김지백
유두류산기 - 김지백
호남과 영남이 교차하는 곳을 누르고 동남쪽으로 웅장하게 솟은 것은 두류산(頭流山)이 아닌가. 두류산은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니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 크기는 십이주(十二州)를 품에 안고 있는데, 뛰어난 경치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두류산의 남쪽은 바다와 가까워 더욱 맑은 기운이 쌓여 흩어지지 않았고, 산세가 굴곡지고 아름다운 기운이 충만하니 신선이 살던 곳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다.
학사(學士)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도 일찍이 이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쉬었는데, 그의 기이한 자취가 뚜렷한 것은 특히 쌍계사(雙溪寺)에서 드러난다. 쌍계사에서 십리쯤 되는 곳에 이른바 청학동(靑鶴洞)이 있다. 옛날에는 붉은 이마에 푸른 날개를 가진 학이 노닐었는데, 지금 오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어 언덕 구멍에 다만 빈 둥지만이 있다.
완폭대(翫瀑臺), 삼신동(三神洞), 세이암(洗耳巖), 무릉교(武陵橋), 홍류동(紅流洞)이라는 곳이 있는데, 또한 모두 최치원이 노닐던 곳이다. 골짜기가 기이하고 수석(水石)이 빼어나서 나보다 앞서 왕래하며 여기저기 두루 다닌 자들이 한둘이 아니요, 그 사람들이 기록하여 세상에 전해지는 것 또한 많으니, 내가 쓸데없이 덧붙이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집이 용성(龍城) 에 있고, 이 산이 용성을 차지하는 것이 십분의 일이다.
옛사람이 오랜 세월 바다를 건너느라 헛수고한 시절은 그대로 두더라도, 내가 일상생활에서 늘 접하는 곳 또한 많은데, 다만 속세의 속된 자취에 매인 바가 많아서, 오래도록 여러 승지(勝地)를 두루 찾지 못했다. 이전에 올라본 것은 겨우 반야봉(般若峯)의 일면에 그쳤을 뿐이라 속으로 불만스러웠다. 이번에 국익(國益) 서문상(徐文尙)이 서울에서 남원부로 어버이를 뵈러 왔다가 나에게 함께 쌍계에 놀러가자고 부탁했다. 이는 바로 내가 평소 마음속에 작정해 왔던 일이라 곧 떨쳐 일어나 남원부 동쪽 원천원(元川院)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바로 을미년(1655) 10월 8일 무오일이다.
자원(子遠) 이문재(李文載)와 한여근(韓汝謹) 또한 기약이나 한 듯 함께 왔고, 중도까지 전송한 자로 또 노운경(盧雲卿)이 있다. 이 네 벗은 모두 나와 같은 해에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서국익에게 서대숙(徐大叔)이라는 아우가 있는데, 또한 서국익과 함께 왔으니, 우리의 행차가 더욱 외롭지 않았다.
이에 용추(龍湫)를 거쳐 대흥사(大興寺)에서 묵고, 거세게 흘러내리는 폭포를 구경하고, 감로사(甘露寺)를 지나 화엄사(華嚴寺)에 이르러 웅대한 불당(佛堂)을 구경하였다.
다시 구불구불한 강 언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니 쌍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알게 되었다. 백번이나 굽이돌아 시내 건너 골짜기를 찾아 저물녘에 연곡사(燕谷寺)에 이르러 묵었다. 그곳에서 각왕(覺往) 노사(老師)를 만나 벽암당(碧巖堂)에서 한밤중까지 공(空)을 담론했는데, 맑고 깨끗하여 깨우침이 있었다. 그 법을 끌어다가 천기에 부합시키니 부르는 자들이 쌍계기(雙溪機)라고 한다. 승려의 시사(詩思)가 범상치 않고 매우 총명하여 아낄 만한 자이다.
이날 저녁에 드디어 화개동(花開洞)에 이르렀다. 골짜기에서 약간 남쪽으로 옛터가 있으니 바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선생이 집을 지었던 곳이다. 서성이며 감탄하고 떠나지 못하였다. 화개동으로부터 위쪽으로 올라가서 두 갈래 물길이 서로 만나는 곳에 이르니, 바로 쌍계라는 곳이었다. 과연 석문(石門)이 있고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네 개의 커다란 글자가 동구(洞口) 두 개의 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데, 강한 필치가 마모되지 않아, 여전히 어제 일처럼 최치원의 진면목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드디어 쌍계사(雙溪寺)에 들어가 그 곳에 사는 승려를 따라 옛 자취를 둘러보았다. 진감선사(眞鑑禪師)의 오래된 비를 어루만져 보았으니, 비문을 짓고 쓴 것이 또 모두 고운 최치원의 솜씨이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흥망을 겪고 인사가 백 번 바뀌어 묵은 자취를 물어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조각 돌일 뿐이나, 또한 충분히 옛 흥치를 느낄 수 있다.
다음날 비를 만나 그대로 머물며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가, 견여(肩輿) 를 타고 출발하였다. 타다가 걷다가 하면서 불일암(佛日庵)에 거의 다 도착하니, 바위 벼랑이 입을 벌린 듯 가운데가 찢어져 있고, 건너지른 나무〔架木〕가 사다리가 되어, 겨우 인적이 통할 만하였다. 아래로는 깊이가 만여 길이나 될 듯한데,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발만 믿고 걸으니, 혼이 떨리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붙잡고 올라 불일암에 이르니, 암자 밖에 작은 석대(石臺)가 있는데, 완폭대(翫瀑臺)라고 부르는 것이다. 천신(天紳) 수백 길이 향로봉(香爐峰)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그 형세가 마치 무지개가 일어나고 번개치는 듯하여, 다만 여산(廬山) 폭포와 박연(博淵) 폭포만이 서로 견줄 수 있다. 전날 용추를 구경했던 사람들 또한 이 완폭대 아래에서 바람을 쐬었다. 날리는 물방울이 찬 기운을 만들어 내고 그늘진 골짜기가 서늘한 기운을 불러일으켜 몹시 추워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산 막걸리를 두어 잔 데워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청학봉(靑鶴峯)에서 지팡이 잡고 쉬면서 학 둥지를 엿보고, 내려와 옥소암(玉簫菴)에 들어가 이름을 쓰고, 다시 쌍계사로 돌아와 묵었다.
다음날 길을 떠나 무릉교(武陵橋)로부터 신흥사(新興寺) 옛터를 찾아보고, 능파대(凌波臺)를 거닌 후 거센 물결을 지나 반석(盤石)에 이르렀다. 반석 위에 과연 ‘세이암(洗耳巖)’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글자체가 최치원의 필체와 비슷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다시 삼신동(三神洞)으로 내려와서 드디어 칠불암(七佛菴)에 올랐다. 두류산에 사관(寺觀) 이 삼백 칠십 개에 이르는데 기이하고 수려함이 특히 제일이니, 금벽(金碧)과 붉은 빛이 현란하여 사람의 이목을 빼앗았다. 누각 문으로부터 오른쪽으로 걸어가 옥부대(玉斧臺)에 오르니, 반야봉과의 거리가 한 자도 안 되는데 그 높이는 가히 뭇산을 압도했다. 이에 종자(從者)에게 퉁소 한 곡을 불게 하고 산언덕을 따라 내려오면서 홍류동(紅流洞) 입구에서 낭랑히 읊으니 시원하여 마치 바람을 몰고 우화등선(羽化登仙)할 듯하였다.
비록 천하의 승경(勝景)을 본 것이 내 남보다 그다지 뒤지지 않다 하더라도, 아, 인생이란 아득한 천지에서 하루살이 같을 뿐이다. 티끌 세상에서 벗어나 항아리 속의 초파리가 되지 않은 자 얼마나 되는가.
지난 번 산에 오르고 물가에 가서 하나의 작은 시내와 작은 언덕을 보고 일찍이 스스로 승경을 많이 봤다고 생각했다가,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30년의 신세가 허망하였음을 깨달았다. 아, 이 유람은 족히 즐거웠으나 한 달이 되려면 아직 그 반이 남았으니, 백 년 간의 한 순간에 불과한데, 여전히 또 스스로 높이 올라왔다고 여겨 세상을 슬퍼하는 뜻을 가지거늘, 하물며 물외(物外)에서 노닐며 사해에서 아침저녁을 맞는 참 신선〔眞仙〕임에랴! 내 이에 이르러 더욱 느끼는 바가 있다. 그러나 계절이 너무 늦어 산설(山雪)로 이미 길이 막혀서 천왕봉(天王峰) 꼭대기에 바로 오르지 못하고, 부상(扶桑)과 약수(弱水) 밖에서 눈의 힘이 닿는 데까지 대략 보면서, 공자가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긴 기상을 상상해 보았으니, 참으로 매우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년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여러 가지 꽃이 나무에 가득 피면 다시 산에 갈 짐을 꾸려 만날 날을 정하여 팔만 봉우리를 두루 구경할 것이다. 그날이 또한 멀지 않으니, 어찌 끝내 허전해하겠는가?
며칠 사이에 흥이 나서 주고받은 글이 또한 무려 백여 편이나 되니 수시로 기록하여 권축(卷軸) 이루자, 모두들,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면서, 나에게 책임을 맡겼다. 내가 글에 뛰어난 재주가 없으므로 진실로 감히 할 수 없음을 알았지만, 만약 서로 미루고 사양하다가는 좋은 일을 기록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또 생각건대 제현(諸賢)들의 글 속에 내 글이 들어가는 것은 나에게 영광된 일이다. 그래서 사양하지 않고 짓기로 했으니, 만약, ‘세상에 전할 불후의 작품을 지으라’고 한다면 나를 아는 자가 아니다.
을미년(1655) 양월(陽月, 10월) 상완(上浣, 상순)에 낭주(浪洲) 김지백(金之白)이 지(識)를 쓴다.
최치원(崔致遠) --최치원의 자는 고운, 해운(海雲)으로,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용성(龍城) -- 남원(南原)의 옛 이름.
서문상(徐文尙) -- 서문상의 자는 국익. 호는 송파(松坡), 나산(羅山), 본관은 달성(達城)임.
이문재(李文載) -- 이문재의 자는 자원. 호는 석동(石洞), 본관은 전주(全州)임.
감로사(甘露寺) -- 절에 감로천이 있어서 감로사로 불리다가 후에 천은사(泉隱寺)로 개명하였음.
공(空) -- 공(空)은 곧 불교(佛敎)의 교리인 공허(空虛)를 가리키는 말임.
정여창(鄭汝昌) -- 정여창의 호는 일두. 자는 백욱(伯勗), 본관은 하동(河東)임.
견여(肩輿) -- 사람 둘이 앞뒤에서 어깨에 메는 가마를 이름.
천신(天紳) --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띠로, 폭포를 말함.
사관(寺觀) -- 불사와 도관(道觀)
금벽(金碧) -- 금칠한 푸른 빛깔인데, 누각의 단청을 말함.
낭주(浪洲) -- 낭주는 부안(扶安)의 옛 이름으로 김지백의 관향이 부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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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기 콘텐츠 유두류산기 - 박장원
유두류산기 - 박장원
내가 일찍이 듣기에 남방의 산 중에서 높이 우뚝 솟아 거대한 것이 셀 수 없이 많지만 오직 지리산(智異山)이 으뜸인데, 대개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산(白頭山)이 제일이고, 백두산의 산세가 남쪽으로 흘러서〔流〕 이 산이 되었기에 그 이름을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류산이 우리나라에서 명산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리라. 두류산은 주위로 호남과 영남의 아홉 개 군에 걸쳐 있으니, 그 맑고 깨끗한 기세와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 웅장한 산세와 풍부한 볼거리는 아무리 뛰어나게 손으로 꼽아보더라도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한 번 두류산 속으로 들어가 정상에 올라서 내 평소의 시야를 탁 트이게 하고 내 좁은 마음과 답답한 가슴을 씻어내려고 생각했지만, 조정에 관리로 묶여 있어서 가볼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 지 오래였다.
올해(계미년, 1643년) 봄에 나는 옥당(玉堂) 에 있다가 부모님 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을 청하여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가게 되었다. 안음현의 관아는 덕유산(德裕山) 의 기슭에 있는데, 산수(山水)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이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저주(滁州) 와 나부산(羅浮山) 의 세 골짜기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지리산과의 거리가 겨우 며칠이면 갈 수 있었다. 이러하니 주 부자(朱夫子)께서 여부(廬阜)의 관리로 가신 행운과 또한 내가 비슷하여, 천년 뒤에 태어난 내가 주자를 경모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었다. 다만 금년은 고을이 가뭄과 기근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는데 위로할 방도가 없으니,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는데 음식을 마주한들 어찌 먹을 마음이 있겠는가? 비록 두보(杜甫)의 ‘ 흥이 있어 여산(廬山)과 곽산(霍山)에 들어가노라.[有興入廬霍]’ 의 시구를 읊조려보지만, 반맹양(潘孟陽)처럼 술 마시고 산수나 유람하는 것은 꺼려졌으니, 한낱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가을이 되어 크게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의 기운이 조금 나아지자, 비로소 사씨(謝氏)의 나막신은 준비하였지만, 소자(蘇子)의 객이 없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사근 찰방(沙斤察訪)인 이초로(李楚老)는 자가 도경(道卿)으로 나와는 대대로 본디부터 가까이 알고 지낸 자였다. 타향에서 만나 서로 왕래가 매우 익숙하였다. 하루는 편지를 보내 나를 초대하니, 그와 함께 두류산에 가기로 약속하였다. 또한 함께 약속한 사람은 예안(禮安)의 양원(梁榞) 으로, 자가 군실(君實)이고, 상사생(上舍生) 신찬연(申纘延)은 자가 영숙(永叔)이며 서울 사람이다. 세 사람의 동행도 오히려 예상하기 어려웠는데, 더욱이 네 사람이 가게 되었단 말인가? 운이 또한 매우 좋았다.
마침내 음력 8월 20일 신사일(辛巳日)에 길을 나섰다. 신찬연은 고현(古縣) 에 있는 교거(僑居)로부터 와서 합류하였으며, 함께 말을 타고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냇물을 따라 내려가다 한 산봉우리에 잠시 쉬었다. 마치 허리띠처럼 이어져 대고대(大孤臺)를 휘둘러 안고 흐르는 것이 남계(藍溪)였다. 남계 옆으로 몇 리쯤 떨어진 높다란 언덕 위에 건물 하나가 우뚝한데, 이것이 일두 서원(一蠹書院) 이었다. 남계가 동서로 갈라져 흐르고 가을 벼는 구름같이 넘실대니 참으로 호시절이었다. 겨우 장부나 문서를 떠나 이미 스스로 바람처럼 속세를 벗어나고픈 생각이 있었는데, 여기에 이르러서 바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날개가 없으니 어찌할 수 있겠는가?
저물녘 사근역정(沙斤驛亭)에 도착하였다. 주인이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나와 반갑게 맞아주며,
“어찌 이리도 늦은 저녁에야 도착하셨소? 양원 어른은 또한 벌써 와 계십니다.”
라고 하였다. 대개 양원이 사는 곳이 사근역에서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다. 네 사람은 좌정하여 저녁을 다 먹은 후에 또 술을 마셨다. 술자리에서의 담소는 한 밤이 돼서야 끝났다. 시 한 수를 지었다.
山驛夜留客(산역야유객) 산 속 역에 밤이 깊어 나그네가 머무는데
三更溪月明(삼경계월명) 삼경 시냇물에 비친 달이 밝기도하다.
酒杯深復淺(주배심부천) 술은 잔 속에 깊어졌다 얕아졌다 하니
斟酌異鄕情(짐작이향정) 타향에서 만난 정을 짐작하겠네.
8월 21일 임오일(壬午日) 맑음. 네 사람은 역정을 나와 앞의 시내를 건너고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서 20리쯤 가니 큰 천변(川邊)에 정자 하나가 있는데, 그 이름이 ‘함허정(涵虛亭)’ 이었다. 정유년(丁酉年) 진주성이 함락될 때 , 전투 중에 죽은 의병장 최변(崔忭)이 정자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정자에는 본래 노래하고 춤추는 누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쓰러진 풀과 황폐한 터 뿐이었다. 정자 정면으로는 산세가 이어져 있고 시내와 산이 겹겹이 쌓여 있으며, 사면으로 촌락이 있는데 감나무며 밤나무가 무성하니 완연히 한 폭의 그림 속 풍경같았다. 시 한 편을 지었다.
亭子何年廢(정자하년폐) 정자는 어느 해에 폐허가 되었는지
遊人是主人(유인시주인) 유람 오는 사람이 곧 주인이어라.
山連方丈麓(산연방장록) 산은 방장산 기슭과 이어져 있고
水接剡溪津(수접섬계진) 시내는 섬계의 나루와 근접해 있네.
聽笛魚時出(청적어시출) 피리소리 듣노라니 물고기 때때로 뛰어오르고
臨筵月自新(임연월자신) 자리에 임하니 달이 절로 새롭구나.
吾曺須盡醉(오조수진취) 우리가 필시 흠뻑 취해야 하는 것은
俱是旅遊身(구시여유신) 모두 유람 온 나그네 신세이기 때문.
정자의 옆에는 늙은 서얼 조팽수(曺彭壽)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집안이 매우 부유한데다가 또한 인색하지 않아 우리들을 위해 정자 위에다가 잔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술을 내오고 안주를 자꾸 내와 모두들 취기가 올라서 즐겁게 농담을 하며 즐기니 해가 장차 기우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초당에 들어가 잤다. 초당의 들보며 서까래는 마치 우산 같이 생겼는데, 하얀 띠로 덮었고 백토로 벽을 발라 창을 낸 벽이 매우 고왔다.
8월 22일 계미일(癸未日) 맑음. 늦게 연계(㳂溪)를 출발하여 바로 올라가니, 이곳이 바로 용유담(龍遊潭)의 하류였다. 용유담과는 거리가 20리쯤인데 그 사이에 종종 몇 개의 마을이 있었고 마을에는 반드시 논이 있으니 모두 비옥하여 살 만한 곳이었다. 물은 비록 발원하는 곳이긴 하지만 또한 물고기를 기를 만하니, 참으로 두보의 시에서 이른바 ‘귤주(橘洲)의 토양은 비옥하고[橘洲田土仍膏腴]’ ‘물은 맑은데 도리어 물고기가 많다.[水淸反多魚]’ 는 것이다.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또한 이러할지는 알지 못하겠으니, 이곳이 천하의 여러 산들이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시 한편을 지었다.
南岳名方丈(남악명방장) 남쪽에 방장산이라 하는 산이 있으니
他山摠不如(타산총불여) 다른 산들은 모두 이만 못하구나.
崚嶒雄地理(능증웅지리) 첩첩 산봉우리는 땅의 형세를 웅장하게 하고
氣色近天居(기색근천거) 기색은 상제가 거처하는 천궁에 가깝네.
田土皆宜稻(전토개의도) 논밭은 모두 벼를 심기에 좋으며
泉源亦有魚(천원역유어) 샘에는 또한 물고기가 있구나.
何當謝簪緩(하당사잠완) 어찌하면 벼슬은 이제 그만하고서
於此結茅廬(어차결모려) 여기에다 띠집을 엮고 살아볼이거나.
정오에 용유담에 이르러 잠시 말을 쉬게 했다. 용유담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못가는 모두 하얀 돌이었는데 돌빛이 매끈매끈하니 어떤 것은 높고 어떤 것은 낮아 수백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네 사람은 바위 위에 앉아서 술 몇 잔을 따라 마시며 악사(樂士)에게 피리를 불게 하였다. 피리소리가 바위를 가르고 구름을 뚫으니 마치 깊은 소 아래에서 용이 읊조리는 것 같았다. 오래도록 있다가 출발하였다.
길옆에는 암천창(巖泉倉)이 있고 또 한 골짜기에는 무너진 성이 있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는 ‘방호성(防胡城)’이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박호성(朴虎城)’ 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초기에는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또한 박호(朴虎)가 장군이 되어 이 성을 쌓았기 때문에 두 가지 칭호가 생겼다고 하였다.
저녁에 군자사(君子寺)에 도착하였는데 절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이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이 여기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군자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대전(大殿)과 방옥(房屋)이 모두 매우 크고 화려하였다. 절 서편에는 새로 지은 별전이 하나 있었는데 금빛과 푸른빛으로 화려하게 단청을 칠하였으며 ‘삼영당(三影堂)’ 이라 하였다. 당 안에는 청허(淸虛) 사명(四溟) 청매(靑梅) 세 대사의 진상(眞像)이 있었는데, 촛불을 가져다가 우러러 보니 서로들 부드러운 말을 주고받는 듯하였다. 세 명의 진상 중에 사명대사는 수염을 자르지 않았는데 수염이 길고 아름다웠으니 참으로 미남이었다. 이날 밤 네 사람은 서로 마주하여 질탕하게 술을 마시며 한껏 즐기다가 파했다.
8월 23일 갑신일(甲申日) 맑음. 밥을 지어 먹었다. 며칠 동안 비록 날이 맑았지만 앞으로 연일 비가 올 듯하다. 날씨가 매우 따뜻하고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이날 천왕봉에 오르려고 하였는데, 늙은 승려들은 한결같이
“저희들은 유람객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비록 날씨가 청명한 날에도 중봉(中峰)까지 가지 못하였습니다. 갑자기 구름과 비가 방해를 하게 된다면 깊은 골짜기에서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은 이 절을 벗어나기도 전에 구름과 안개가 이미 사방에 자욱하게 모여들었습니다. 원컨대 공들은 헛걸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네 사람은 모두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번 산행은 결코 중간에서 멈출 수 없다네. 우리들에게 신선의 자질과 인연이 있고 없음은 오늘로 결판날 뿐이네.”
라고 하였다. 이에 말을 달을 10리를 가서 백무당(百巫堂)에 도착하였다.
백무당은 귀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무당〔巫覡〕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른바 당지기들이 유람객이나 그 시종들에게 여러 가지를 제공하는데, 이는 용유당(龍遊堂)에서부터 또한 이미 이렇게 하고 있었다. 잠시 당에서 쉬고 말에서 내려 가마〔藍輿〕로 갈아타고 하동암(河東巖)에 이르렀다. 승려들이 말하기를, 예전에 하동군수가 여기에서 비를 만나 길을 잃었기 때문에 하동암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여기서부터 산세가 더욱 험하고 길이 좁아서 네 사람은 생선 꿰듯 한 줄로 나아가 옛날 제석당(帝錫堂) 터에 이르렀다. 비로소 좌우 멀리까지 바라보이는데 천만 봉우리와 산들에 불타듯 단풍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간간히 푸르고 누런 잎이 보이며 소나무와 삼나무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를 뿜어내어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으니, 비록 귀신과 신령스럽고 기이한 사물이 음험하게 오는 모습이라 해도 좋을 것이었다.
제석당에 이르렀는데 당에서 정상까지는 겨우 10리 떨어져 있으니 이곳이 얼마나 높은 곳인지 알만했다. 잠깐 가마를 멈추고 쉬니 승려들이 백반(白飯)을 차려 왔는데 모두 당지기가 마련해 제공한 것이었다. 천왕봉에 이르러서도 또한 이렇게 하였다. 이 당에 이르자 안개와 구름이 모두 걷히고 하늘이 드높게 드러났는데, 바람이 매우 세차서 자못 견딜 수가 없었다. 승려들은 여기서 만약 바람을 걱정하신다면 천왕봉 정상에 오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에 굽어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가마를 재촉하고 걸어서 당 뒤에 올라 보니, 저 멀리 펼쳐진 남해가 보였다. 마치 남해군(南海郡) 과 연해군(沿海郡) 두 군현의 보루가 나열되어 있는 것을 셀 수 있을 듯했다. 주암(舟巖)을 지나가는데 승려가 이 산은 바다에 있을 때 배를 정박하던 곳이라 하였다. 문암(門巖)으로 들어가는데 바위에 석문(石門)이 있고 문에는 긴 나무가 가로질러 놓여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는 모두 이 문을 통해 들어가 여기에 있는 사닥다리를 건넌 후에 천왕봉 정상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문암’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끌어주며 기어서 천왕봉 정상에 바로 오르니 정상에도 또한 신사(神祠)가 있었다. 이곳 외에는 몸을 보호할 만한 곳이 없었다. 천왕봉은 위로 별을 딸 수 있을 듯하고 아래로는 사해(四海)가 굽어 보였다.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맞닿았는데 다만 하나의 운기(雲氣)가 하늘과 땅 사이에 넓게 펼쳐져 있으니 마치 흰 비단을 펼쳐놓은 듯했다. 아래의 산과 강을 보니 모두 흙덩이나 실 같아서 이루(離婁) 도 물러나게 할 수 있으며, 용면(龍眠) 의 재주도 끝내게 할 수 있으니, 말이나 글로는 그 만분의 일도 형용할 수 없었다.
조금 후에 해가 바다로 잠기는 것을 보니 기괴한 자줏빛 적색 기운이 아득한 가운데 천태만상을 드러내었다.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놀라 달려가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경관이란 말인가? 어떻게 내가 이렇게 멋진 장관을 볼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라고 감탄하였다. 이윽고 당으로 들어가서 서로를 베개 삼아 누워서 잤다. 바람이 세차게 소리를 내며 불어서 사당이 날아갈 듯하니, 당지기가 와서 말하기를,
“놀라지 마십시오. 오늘 부는 이 정도의 바람은 바람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익숙한 까닭에 두렵지도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한 밤중이 되자 바람이 멎고 달이 떠올랐으며 북두성이 맑게 빛나서 촛불마냥 비추니 온통 은빛 세계가 되었다. 피리 부는 악공(樂工)이 당 뒤의 일월대(日月臺)로 나와 앉아서 즐거이 보허사(步虛詞) 한 곡을 연주하였다. 몸은 맑아지고 혼은 깨끗해져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들썩들썩하니, 명황(明皇)이 월궁(月宮)에서 노닐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들 놀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동빈(洞賓)이 악양(岳陽)에 들어가자 바람이 잦아들었다. 이에 앉은 채로 새벽까지 있으니 여명이 점점 밝아 오는데, 금빛 까마귀〔金鴉〕 가 날아오르자 온 세상이 비로소 밝아졌다. 가마를 매는 승려가 70여 명에 달했는데, 모두들 떠들썩하니 외치며 말하기를,
“저희들 중에 가마를 매고 전후로 이 봉우리에 이른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도 모르오나, 이렇게 일몰(日沒), 월출(月出), 일출(日出) 세 가지를 다 볼 수 있는 자는 자못 한둘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공들은 신선이 되는 방법을 터득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공들은 신선이 되는 방법을 터득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시 한 수를 지었다.
天王峯頂接天門(천왕봉정접천문) 천왕봉 정상은 하늘의 문과 맞닿아 있으니
頭上星辰手可捫(두상성신수가문) 머리 위의 별을 손으로 만질 것만 같네
兩眼力窮無所碍(양안력궁무소애) 두 눈으로 한없이 바라보아도 막힘이 없으니
不知何處是崑崙(부지하처시곤륜) 어느 곳이 곤륜산 인지 모르겠구나
또 한 수를 지었다.
峯上長吹太始風(봉상장취태시풍) 천왕봉 정상 위로는 태초의 바람이 부니
怪來呼吸與天通(괴래호흡여천통) 괴이하게도 내쉬고 들이마심이 하늘과 통하는구나
持杯放盡平生目(지배방진평생목) 술잔을 잡고 평소의 시야를 탁트어서 맘껏 바라보노니
九點秋烟夕照中(구점추연석조중) 아홉 개의 가을 구름 덩어리가 석양 속에 보이네
또 한 수를 지었다.
天王峯上觀日沒(천왕봉상관일몰) 천왕봉 정상에서 일몰(日沒)을 보고
月生日出三者兼(월생일출삼자겸) 월출(月出)에다 일출(日出)까지 셋을 겸했네.
僧言奇事曾無有(승언기사증무유) 일찍이 없었던 기이한 일이라 승려들도 말을 하니
天餉玆游固不廉(천향자유고불렴) 이번 유람에 하늘의 베푸심 참으로 박하지 않네.
또 한 수를 지었다.
一宿君子寺(일숙군자사) 하룻밤을 군자사에서 자고
遠上天王峯(원상천왕봉) 멀리 천왕봉에 올랐네.
月明吹玉笛(월명취옥적) 달이 밝아 옥피리를 불었더니
滄海舞羣龍(창해무군룡) 푸른 바다에서 뭇 용들이 춤을 추네.
8월 24일 을유일(乙酉日) 약간 흐림. 아침 일찍 돌아가려고 산을 내려갔다. 제석당과 백무당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저녁에 안국사(安國寺)에 도착하여 잤다. 이날 천왕봉을 내려올 때 싸락눈이 약간 뿌렸다.
8월 25일 병술일(丙戌日) 맑음. 밥을 지어 먹고는 늦게 출발했다. 가마를 타고 금대암(金臺菴)을 들렀는데, 암자는 안국사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지세가 홀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두류산의 면모가 조금도 가려지거나 이지러진 데가 없이 다 보였으니, 마치 금강산이 한 눈에 보이는 정양사(正陽寺)의 남루(南樓)와 같았다. 멀리 두류산 제일봉인 천왕봉의 잠잤던 곳을 바라보는데 하나의 기둥이 하늘에 꽂혀 있고 무지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니 참으로 옛 사람이 말한 ‘황홀하니 한바탕 꿈에 요대(瑤臺)에서 놀다 온 나그네[怳然一夢瑶臺客]’ 였다. 시 한 편을 지었다.
靑鞋踏破萬重山(청혜답파만중산) 지팡이 하나에 짚신을 신고 첩첩 산중을 다 밟고서
更向金臺古寺還(갱향금대고사환) 다시 오랜 사찰 금대사를 향해 돌아왔네.
第一峯頭昨宿處(제일봉두작숙처) 제일봉인 천왕봉 정상 어제 자던 그곳에는
白雲靑靄有無間(백운청애유무간) 흰 구름과 푸른 안개가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구나.
정오에 함허정에 도착하여 정자 뒤의 높은 누대에 오르니 산에 갈 때의 풍경과 같았다. 잠시 쉬었다가 지나갔다. 저녁에 사근역정에서 잤다.
8월 26일 정해일(丁亥日) 맑음. 이초로와 작별하고 일찍 출발하였다. 양안 어른, 신찬연과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가다가 운고정(雲皐亭)에 차례로 올라 술에 취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시 한 수를 지었다.
醉上沙斤馬(취상사근마) 취하여 사근 역정에 오르는데
臨流不用扶(임류불용부) 시내를 임하여 부축해 줄 필요 없다네
平生得意處(평생득의처) 평소 득의처이니
肯羨執金吾(긍선집금오) 기꺼이 집금오(執金吾)를 부러워하랴
읊조리기를 마치고 영각(鈴閣) 으로 돌아오니, 곧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쓸쓸하게 기러기 떼 행렬을 마주하니, 더러운 먼지가 마침내 이미 옷깃에 가득하였다.
아! 무릇 산을 유람하는 데에 사람들이 모두 마음이 맞아 잡스러움이 없게 하기는 어려운 것이며, 일이 모두 뜻에 맞아 흠이 없게 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남쪽으로 떨어져 나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로, 나이는 비록 같지 않지만 서로 매우 즐거워하였다. 함께 유람한 7일 동안 서로의 마음을 기탄없이 드러내고 형식적 구속 따위는 다 벗어버리며 농담하고 웃으며 즐김에 밤낮이 없었으니, 이는 실로 세상에서 두 번 다시없는 좋은 모임이었다. 심지어 두류산 유람은 조화아(造化兒) 의 시기를 받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는데, 우리들은 그곳에 가서 그윽하고 기괴한 경관을 다 보아 형악(衡岳) 의 구름을 열어 걷어낼 수 있었다. 또한 하늘 기둥에 걸린 달을 보았는데, 우리가 가보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것은 조금도 남김없이 다 해보았으니, 이 또한 처음 바라보는 것이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간재(簡齋) 진여의(陳與義) 어른은 ‘올해 나그네가 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기관을 유람할 수 있었겠는가?[不作今年客, 爭成此段奇.]’ 라 하였는데, 참으로 내 마음을 얻은 것이다. 여러 공들은 모두 이번 유람의 기이함을 기록하는 한 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며, 나에게 유기(遊記)를 쓰기라고 하였다. 유기를 짓는 것은 나처럼 글을 잘 못하는 사람이 할 일은 아니지만, 짐짓 여러 공들이 말씀해 주신 나머지를 엮어서 훗날 와유(臥遊) 의 도구로 삼고자 할 뿐이다.
계미년(癸未年 1643년, 인조 21년) 음력 8월 29일 그믐 경인일(庚寅日)에 고령 박장원(朴長遠) 중구(仲久) 가 쓰다.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홍문관 부제학 이하 교리, 부교리, 수찬, 부수찬 등의 호칭.
안음현 --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옛 지명
덕유산(德裕山) --경상남도 거창군, 함양군에 걸쳐 있는 산.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저주(滁州) -- 원문의 ‘環滁皆山’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송(宋)나라의 구양수(歐陽脩)가 쓴 <취옹정기(醉翁亭記)>의 첫 구절. <취옹정기>는 구양수가 저주에 태수(太守)로 갔을 때 취옹정에 놀면서 지은 글. 저주는 지금의 중국 안휘성(安徽省) 저주현(滁州縣).
나부산(羅浮山) --나부산은 지금의 중국 광동성(廣東省)의 동강(東江) 북안(北岸)에 있는 산으로, 수(隋)나라 때 조사웅(趙師雄)이 꿈속에서 매화 선녀(梅花仙女)를 만났다고 전하므로, 후대에는 매화에 대해 시를 읊을 때 흔히 인용함.
주 부자(朱夫子)께서 여부(廬阜)의 관리 --주 부자는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남송의 주희(朱熹)이며, 여부에 관리로 갔다는 것은 주희가 여산(廬山)이 있는 남강군(南康軍)에 관리로 간 것을 뜻함.
흥이 있어 여산(廬山)과 곽산(霍山)에 들어가노라.[有興入廬霍]’ --두보의 <석유(昔游)> 시의 마지막 구절. 저자 박장원이 두보가 여산과 곽산에 간 것처럼 두류산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많음을 뜻함.
반맹양(潘孟陽) -- 반맹양은 당나라 사람으로 박학홍사과(博學弘詞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지만, 헌종 때 강회(江淮)의 재정과 세금을 시찰하면서 뇌물을 받고 매번 술을 마시고 유람을 즐겨 명성을 잃었음.
사씨(謝氏)의 나막신 --사씨는 사령운(謝靈運)을 말하는데, 자는 강락(康樂)이며 사안(謝安)의 손자. 항상 나막신을 신었고, 산에 올라갈 때는 전치(前齒)를 버리고 내려올 때는 후치(後齒)를 버렸으므로 세상에서 사공극(謝公屐)이라 칭하였음.
소자(蘇子)의 객 -- 소자는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식(蘇軾)이며, 그의 객이란 <적벽부(赤壁賦)>에서 소식과 함께 배를 띄우고 놀았던 객을 가리킴.
사근 찰방(沙斤察訪) -- 사근은 경상도 함양의 지명으로, 조선시대 때 여기에 역(驛)이 있었는데, 그 책임자로 찰방을 두었음.
양원(梁榞) --양원(1590-1650)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순수(順受), 임천(任天). 함양 출신으로, 1623년 인조 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효릉 참봉에 등용되고 곧이어 호조 좌랑을 거쳐, 의령 현감을 지냈음.
상사생(上舍生) -- 상사는 태학(太學)의 숙사 중 하나로 여기서는 성균관을 뜻함.
고현(古縣) --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 신현면 고현리.
일두 서원(一蠹書院) -- 일명 ‘남계서원’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일두 정여창(鄭汝昌)을 배향한 서원임.
정유년(丁酉年) 진주성이 함락될 때 --정유재란 때 있었던 진주성 전투를 말함.
‘귤주(橘洲)의 토양은 비옥하고[橘洲田土仍膏腴]’ -- 두보의 <악록산도림이사행(岳麓山道林二寺行)>이란 시의 한 구절
‘물은 맑은데 도리어 물고기가 많다.[水淸反多魚]’ -- 두보의 <오반(五盤)>이란 시의 한 구절
진평왕(眞平王) -- 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년. 진흥왕의 손자.
청허(淸虛) --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군장(僧軍將)이었던 휴정(休靜, 1520-1604)을 말함. 완산 최씨(完山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 풍악산인(楓岳山人), 두류산인(頭流山人), 묘향산인(妙香山人), 조계퇴은(曹溪退隱), 병로(病老) 등임.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4권 2책과 《선교결(禪敎訣)》․《심법요초(心法要抄)》 등이 있음 ,
사명(四溟) --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병장인 유정(惟政, 1544-1610). 풍천 임씨(豊川任氏).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경상남도 밀양 출신.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蔞難錄)》 1권 등이 있음 ,
청매(靑梅) -- 조선 후기의 선승(禪僧) 인오(印悟). 저서에 《청매집》이 있음.
남해군(南海郡) --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시
연해군(沿海郡) --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
이루(離婁) -- 이루는《맹자(孟子)》 이루상(離婁上)에 나오는데, 중국 전설상의 인물로 시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함.
용면(龍眠) -- 용면은 중국 송(宋)나라의 대표적인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별호. 이공린은 관직을 마친 후 용면산에 은퇴하여 자호를 ‘용면거사’라 하였음.
보허사(步虛詞) -- 악부(樂府) 잡곡(雜曲) 가사의 이름. 여러 신선들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임.
[전재자 註 : 唐樂.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유입된 당나라의 음악과 송나라의 음악으로 원래부터 있었던 우리 고유의 음악 향악과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 '唐'자가 들어가지만 한국의 당악은 당나라에서 들어온 음악은 거의 없고 북송에서 들어온 사악(詞樂)이 대부분이다. 현전하는 당악은 보허자, 낙양춘 두 곡 뿐이다.
원이름은 「보허자(步虛子)」이며, 아명(雅名)은 관악 보허자가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 현악 보허자가「황하청(黃河淸)」, 밑도드리를 수연장지곡(壽延長之曲)이라 하고 웃도드리를 송구여지곡(頌九如之曲) 등등 이라 하여 풍류음악으로 향악화되면서 여러 악곡으로 파생되었다. 「보허사」라는 이름은 조선 영조 때부터 쓰였고 순조 때의 옛 악보인『유예지(遊藝志)』에는「보허사」의 이름으로 거문고악보가 전한다
제례악은 좁은 뜻으로는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만을 말하며, 넓은 뜻으로는 궁중 의식에 쓰던 당악, 향악, 등을 총칭하며, 아악(雅樂)이라고도 한다. 원래의 아악은 중국 고대 음악으로 고려 예종 때 송나라에서 들여와 왕실 행사용 음악으로 사용했다.
조선 세종대왕이 이 아악을 바탕으로 우리 고유 궁궐 행사 음악인 역대 왕들의 문덕(文德)을 찬미하는 내용의 보태평과 역대 왕들의 무공(武功)을 기리는 내용의 정대업(定大業)을 만들어 궁중 내에서의 각종 의식과 잔치 등에서 연주되다가 세조 때 다시 개편하여 종묘제례악으로 만들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하늘을 걷는 사람(步虛子)이라는 뜻을 가진 당악 <보허자>는 하늘(上帝)이 선기옥형(璇璣玉衡)을 통하여 항성과 행성들의 탄생과 소멸을 주관하듯이 생명의 탄생과 적멸을 주관하고, 북두칠성의 자루(玉衡)가 저울추 역활을 하며 하늘의 극점인 북극성을 중심으로 우주를 순회하여 칠정(七政)을 바로잡아 하늘의 질서를 유지하듯이 천자가 제후국을 순수(巡狩)하여 땅위의 질서를 바로잡아 보태평(保太平 : 平天下)하여 정대업(定大業)을 이루기를 바라며 연주하는 악곡(樂曲)으로 이 곡의 율려(律呂)들은 하늘의 칠정(七政)인 해와 달, 오행성( 水,火, 金, 木, 土星)의 운행질서와 음양(陰陽)과 오행(五行)간 변전(變轉)의 수레바퀴(時空輪)을 본따서 만든 곡이라고 전해진다.
세종께서 1445년 1447년 사이에 향악과 당악에 바탕을 두고 봉래의, 발상, 보태평, 정대업 등 악곡들을 창제하여 연향에서 연주하였는데, 고려 때 도입 당시 송사(宋詞)였던 <보허자>는 조선조 초에 향악화되어 보허자의 가사와 선율이 세종이 새로이 창제한 신악(新樂)에 스며들었다. 종묘에서는 처음에는 아악이 연주되었는데, 1464년(세조 10) 이후 신악인 정대업(定大業)과 보태평(保太平)이 연주되기 시작했으며, 현재까지도 종묘 제사에 연주되고 있다. 정대업ㆍ보태평은 세종대에 연향에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제사에 적합하도록 세조대(1455∼1468)에 재구성하였다.
《보태평》은 선왕의 문덕(文德)을, 《정대업》은 그 무공을 각각 한문으로 칭송한 것이고 음악은 고취악에 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정대업》 중의 화태(和泰)와 순응(順應)의 음악은 각각 고려 때의 〈서경별곡〉과 〈만전춘〉의 곡에서 차용된 것이다. 《보태평》 11곡은 모두 임종궁(林鍾宮)의 평조(平調)이고, 《정대업》 15곡은 모두 남려궁(南呂宮)의 계면조(界面調)이다. 원래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 때 연례(宴禮)에 연주되었는데, 세조 9년(1464)에 이르러 향악이 아악 대신에 종묘제향악으로 채용되었다. 이에 따라서 짧은 제향(祭享) 절차에 맞게 《정대업》 15곡이 《보태평》과 균일하게 11곡으로 감소되었고, 또 각 곡의 가사와 음악도 단축되었다. 그리고 《보태평》의 임종궁 평조와 《정대업》의 남려궁 계면조가 각각 황종궁(黃鍾宮)의 평조와 황종궁 계면조로 고쳐졌다. 이같이 개혁된 《보태평》과 《정대업》의 악보는 《세조실록》에 게재되었다. 이 개혁된 종묘악이 비록 후세에 그 리듬은 변개되었지만 조선 말까지 약 500년간 계속되었다.[5]
도교 음악 : 보허운(步虛韻)
'세조실록' 소재 <영신희문> (오음약보)
*** 참고사항
향악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조를 거쳐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한국 고유의 음악 중 궁중음악의 한 갈래로, 일명 속악(俗樂)이라고도 한다. 삼국시대에 당악이 유입된 뒤 외래의 당악과 우리 토착 궁중음악을 구분하기 위하여 상대적 의미로 명명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향악(속악)은 현대 국악에서 말하는 민속악(民俗樂=향악鄕樂)과는 의미가 다르다.
이후 중국과 계속되는 음악교류를 통하여 송나라의 사악(詞樂)이 들어와 기존의 당악에 수용되고, 의식(儀式)음악인 아악(雅樂)이 수입된 뒤로 궁중음악의 갈래는 아악, 당악, 향악으로 나뉘어져 전승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한국 전래의 궁중음악을 ‘속악’이라고 더 많이 칭하였다, 한다.
※ 사악(詞樂) - 중국 송나라 때 성행하였던 한시(漢詩)가 내용인 사(詞)의 음악. 고려 문종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중기 이후에 향악화되어 가사는 없어지고 기악으로만 연주된다. 중국의 사악은 음악이 없이 문헌으로만 전해진 반면, 한국에서는 ‘낙양춘’과 ‘보허자’가 음악을 기록한 악보로 남아있다. 이 두 악보는 모두 령(令:산사의 곡명에 나오는 말)곡의 범주이다. 이 두 곡이 ‘정간보’로 기보되어 령곡의 리듬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두 곡과 그 악보는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이 두 곡을 연주하는 연주법도 보존되어 있어 중국음악인 사악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 보허자(步虛子) - 고려사 악지, 당악곡 48곡 중 하나인 오양선(五羊仙)의 창사(唱詞 :궁중무용을 출 때 춤추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였으나 관현악곡으로 독립하여 조선후기에 수많은 파생곡을 만들어 내면서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다.
노래의 가사를 미전사와 미후사로 나누어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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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양춘(洛陽春) - 고려 때 송나라에서 들어 온 성악곡으로 조선시대 궁중의식에서 당피리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관악곡이다. 그러나 보허자와 함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한국의 전통악기가 가지는 특성과 어우러져 한국화되어 현재는 예전의 특성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한국적인 음악으로 변하였다.
※ 산사(散詞) - 독립된 한시로 구성된 송사(宋詞) ]
명황(明皇)이 월궁(月宮)에서 노닐었다는 것은 -- 명황은 당(唐)나라 현종(玄宗)으로 시호가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인데 후대에 시문에서는 명황이라 칭했음. 당의 도사(道士) 나공원(羅公遠)이 추석날 밤에 현종(玄宗)을 모시고 궁중에서 달을 구경하다가, 계수나무 지팡이를 공중에 던지니 큰 다리가 되는지라, 현종을 청하여 함께 올라 월궁(月宮)에 이르렀다는 고사가 전함.
동빈(洞賓)이 악양(岳陽)에 들어가자 -- 동빈은 당나라 때 도사인 여동빈(呂洞賓)이며, 악양은 동정호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를 말함. 그의 시에 “악양루에서 세 번 취하여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맑게 읊조리며 동정호를 날아 지나네.[三醉岳陽人不識, 朗吟飛過洞庭湖]”라는 구절이 전함.
금빛 까마귀〔金鴉〕 -- 여기서는 태양을 가리킴.
곤륜산 --중국의 전설에서 멀리 서쪽에 있어 황하(黃河)의 발원점으로 믿어지는 성산(聖山)
아홉 개의 가을 구름 덩어리가 석양 속에 보이네 --당(唐)나라 이하(李賀)의 <몽천(夢天>이란 시에 “멀리 바라보니 제주가 아홉 개의 운무 덩어리로다.[遙望齊州九點煙]”라는 구절이 있음. 제주(齊州)는 중주(中州) 곧 중국으로, 중국의 구주(九州)도 높은 곳에서 바라다보면 아홉 개의 운무 덩어리로 보인다는 말. 여기서는 천왕봉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아래의 땅이 아홉 개의 가을 안개 덩어리로 보인다는 뜻.
정양사(正陽寺)의 남루(南樓) -- 정양사는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 금강산에 있는 사찰로, 경내 오른쪽에 있는 혈성루는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소로 알려져 있음.
‘황홀하니 한바탕 꿈에 요대(瑤臺)에서 놀다 온 나그네[怳然一夢瑶臺客]’ --송나라의 소식이 지은 <화자유중추견월(和子由中秋見月)>이란 시의 마지막 구절. 요대는 신선이 산다는 곳을 말함.
집금오(執金吾) -- 관직명. 한나라 때 천자의 호위를 담당. 줄여서 금오라고도 함.
영각(鈴閣) -- 한림원(翰林院)이나 장수 혹은 주군(州郡)의 수령들이 업무를 보던 곳. 여기서는 저자 박장원이 다스리는 안음현 관아를 말함.
조화아(造化兒) -- 곧 조화소아(造化小兒). 운명을 담당하는 신으로 운명에 대한 비유로 쓰임.
형악(衡岳) --중국의 오악(五岳)의 하나인 남악(南岳)으로 곧 형산(衡山)을 말함. 형산은 지금의 중국 호남성(湖南省) 형양시(衡陽市) 북쪽 40km 지점에 있는데, 남․동․북쪽을 상강(湘江)이 둘러싸듯이 흐르며 주위는 400km나 됨.
간재(簡齋) 진여의(陳與義) -- 송(宋)나라 시인으로 자는 거비(去非)이며 간재(簡齋)는 그의 호.
‘올해 나그네가 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기관을 유람할 수 있었겠는가?[不作今年客, 爭成此段奇.]’ -- 진여의가 지은 <유팔관사후지상(遊八關寺後池上)>란 시에 나오는 구절로 지방에 쫓겨나 있기에 팔관사를 유람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의미. 여기서는 저자인 박장원이 안음현의 외직으로 나왔기에 두류산을 유람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는 뜻
와유(臥遊) -- 와유는 누워서 노닌다는 뜻으로, 산수화나 유기 등을 감상함으로써 유람을 대신하는 것을 말함. 《송서(宋書)》 <종병전(宗炳傳)>에 금(琴), 서(書), 화(畫) 삼절(三絶)로 유명한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은자 종병(宗炳)이 노년에 병이 들어 명산을 유람하지 못하게 되자, 그동안 다녔던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 걸어 놓고는 누워서 감상하며 노닐었던[臥以游之] 고사가 전함.
고령 박장원(朴長遠) 중구(仲久) -- 박장원(1612-1671)은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 습천(輞川). 1627년(인조 5) 생원, 1636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1639년 검열(檢閱)이 되고 1640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음. 1653년(효종4) 승지로 있을 때에 남인의 탄핵으로 흥해(興海)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음. 1658년 상주 목사에 이어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1664년(현종5) 이조 판서가 되고, 공조 판서에 이어 이듬해 대사헌이 되고 예조 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뒤 자청하여 개성부 유수에 부임하여 재직 중에 죽었음. 저서로는 《구당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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