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극한지 훈련
I중대는 캠프 펜들턴을 떠나기 전에 모든 중대원이 새로운 동계 장비를 보급받았다. 그 내용물은 바닥이 두터운 울 양말 3켤레, 긴 속옷 2벌, 펠트 라이너가 달린 슈팩 방한화 1켤레, 녹색 울 셔츠 2벌, 울 라이너가 달린 가죽 장갑 2켤레, 울 스커프 1개, 풀 사이즈의 알파카 안감이 달린 오버코트 겸 파카, 육군형 비옷, 흔히 ‘몽골리안 피스 커터’라고 우스개로 불리우는 양털이 달린 방한모 등이었다.
이들 새 옷은 모두 우리 분대장들의 철저한 검열을 받았다. 단순히 옷이 잘 맞는지 뿐 아니라, 이 옷들이 필요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기능성을 발휘하는지를 검사하였던 것이었다. 우리 소대장들과 분대장들은 이 옷들을 우선 입어보고, 사용해보고, 완전무장 안에 수납해 보라고 말했다. 우리의 완전무장의 무게는 약 70파운드가 넘었다.
0300시에 캠프 펜들턴을 떠나 캘리포니아 395번 고속도로를 따라 극한지 훈련소로 향하는 버스 여행은 내게 입이 딱 벌어지는 경험이었다. 우리가 탄 그레이하운드 버스가 비숍 마을 근처의 첫번째 휴게소로 향할 때 남부 캘리포니아의 사막 저지대 풍경은 점차로 거대한 시에라 산맥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 때 버스 차창을 통해 본 시에라 산맥이 이 경관 처럼 웅장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얼마나 웅대한 모습인지! 가을의 단풍빛으로 변해가는 그 산들은 마치 아름다운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우리 차가 그 산들을 지나쳐 갈 때 나는 눈을 감고 저 산 속에 얼마나 많은 사슴들과 맹수들이 살고 있는지를 상상해 보았다.
비숍 근교의 휴게소에서 우리는 버스에 주유를 하고 차를 청소하느라 여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점심, 저녁식사로 1인당 2세트의 C레이션을 지급받았다. 점심을 먹는 동안 우리는 고참 하사관들로부터, 앞으로 우리가 맞게 될 일들에 대해 도움이 될 만한 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산악 극한지 훈련소는 한국의 겨울 산 속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할 해병대원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서, 암벽 등반, 등산, 알파인 스키, 탈출 및 도피, 생존 훈련 등에 관한 초급, 상급 기술을 배우게 된다. 훈련소는 1년 내내 운영된다. 훈련소에 상주하는 해병대원들은 8명의 장교, 235명의 사병과 해군 군의관 1명, 해군 치과군의관 1명, 해군의무병 8명으로 구성된다. 사병 계급의 등산 교관들과는 별도로 1개 대항군 소대, 1개 주계분대, 1개 정비분대, 1개 수송분대, 1개 통신분대가 있다. 이들 해병대원들은 모두 이 훈련소에 배치되고 나서 완벽한 등산 기술을 익힌 자들이다. 체력훈련장은 64,000에이커의 넓이로서 남쪽으로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북방까지 뻗어 있고, 동쪽으로는 395번 고속도로, 서쪽으로는 소노라 패스, 북쪽으로는 마크리빌 소읍까지 뻗어 있었다.
우리가 피클 초원이라고 알려진 낮은 곳의 베이스 캠프에 도착해서 앞으로 열성적으로 훈련을 진행하게 될 교관들을 소개받은 것은 그 날 오후 늦게였다. 그들은 이 훈련소의 목적은 각개 해병대원들에게 고산지대와 극한지에서의 생존 및 전투 기술을 배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기본부터 시작하였다. 즉 각 개인의 극한지 생존법부터 배우고 나서 훈련을 차근차근 진행시켜 나갔다. 극한지 훈련은 5일간의 전술 훈련이 백미라고 할 수 있었다.
우선 우리는 COLD라는 약어를 통해 우리 체온을 보존하고, 몸의 열을 배출시키기 않는 방법을 배웠다. C는 우리의 의복과 장비를 청결하게(Clean)유지하라는 것이고, O는 몸의 고열(Overheating)을 피하라는 것이며, L은 옷을 헐렁하게(Loose)껴입으라는 것이며, D는 우리 몸을 건조하게(Dry)유지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날 오후의 남은 시간 동안 우리의 4인 사격팀의 다른 해병들과 함께 우리 각 사람이 가져온 캔버스들을 가지고 텐트를 치느라 바빴다. 6개의 텐트 펙, 2개의 뚱뚱한 목제 폴, 로프 2개가 있어야 우리의 2인용 텐트가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만드는 기술이 얼마나 좋느냐에 따라서 그 텐트는 우리에게 제대로 된 엄폐물 구실을 해 줄 수가 있었다. 2명의 해병대원의 체온만 있으면 우리가 원하는 온도를 유지시켜 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서쪽으로 적운이 몰려가는 것에 주의했다. 그러나 당시 일등병밖에 안되었던 나의 계급 때문에, 나는 눈이 오지 않을 거라는 우리 중사의 말을 믿기로 하였다.
점점 불어오는 찬바람에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나는 저녁식사로 C레이션을 먹어치운 후에, 따뜻한 내 슬리핑 백 속으로 기어들어가, 앞으로 배우게 될 내용들을 기대했다.
첫날 밤 날씨는 신속히 바뀌었고 눈이 엄청나게 오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자 우리는 수십개의 2인용 텐트가 약 10인치 이상 내린 눈에 덮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속에 잇던 해병들은 모두 젖어서 덜덜 떨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 도시 출신의 해병들에게는 그날밤이 인생 최악의 밤이었을 듯 싶다. 그들은 우리가 피클 초원에 오기 전에 배웠던 것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의 옷과 군화를 2인용 텐트 바깥에 놔둔 것이 분명하였다. 그들은 자기 몸을 따뜻하고 건조하게 하라는 규칙을 어긴 것이었다.
우리는 그 끔찍한 날로부터 많은 교훈을 배웠다. 그날 늦게까지 우리 2인용 텐트들은 좀더 확실히 세워지게 되고, 장비는 한기로부터 잘 보호되며, 신속히 찾아 쓸 수 있는 곳에 보관하게 되었다. 몇 시간 동안 작업하여 여러 개의 보온 텐트들도 만들었다. 눈에 젖어서 덜덜 떠는 해병대원들을 열로 말리는 곳이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교훈이었다. 우리의 각개 생존 기술 교육에서 배운 것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는 여러 날에 걸쳐 우리의 체력을 유지하면서 산악지형에서의 행군, 등산, 횡단을 하는 기술을 배웠다. 우리는 암벽등반 기술을 배우면서 등반 중에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여러 모양의 바위, 등반용 로프의 올바른 사용법, 우리 몸과 장비를 운반하기 위한 여러가지 매듭법 등에 대해서 교육받았다. 우리는 스냅링크, 마우어하켄, 망치 등의 장비를 다루는 법, 그리고 로프나 기타 장비 없이 등반하는 ‘프리 클라이밍’기술에도 익숙해졌다. 우리는 2명, 3명, 4명씩 조를 이루어 120피트 길이의 로프를 가지고 등반을 하였다. 다음 번에는 라펠링 기술 교육이 이루어졌다. 밧줄을 매고 낭떠러지에서 내려오는 방법, 장비나 부상병을 낭떠러지에서 내리는 방법 등을 배웠다. 우리는 추위에 대비한 병기 손질법 및 악천후 속에서도 장비를 정비유지하는 법도 배웠다.
우리는 우리가 실전에서 우리의 작전 기간을 늘려 줄 여러 가지 극한지 장비-주로 텐트와 스토브-에 대해서도 배웠다. 또한 추위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 몸의 수분과 열량을 보충할 특식 레이션 제조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우리의 C레이션 박스 하나에는 12인분의 레이션이 들어가고 액세서리 패키지에는 유명 상표의 담배나 껌, 그리고 제일 인기가 좋은 사탕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젤리형 연료, 고형연료, 혹은 캔 속에 든 목재알콜 등을 사용하여 우리 레이션을 데워 먹었다.
나는 이 훈련 중에 탈진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이 어려운 훈련을 반드시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고, 우리는 추위에 더욱 더 익숙해 져 갔다. 우리 교관들은 한국전에서의 귀환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예견하고, 우리의 훈련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추위 속에서 살아남는 것 뿐이 아닌, 극한지전에서의 승리였다.
우리의 극한지 훈련의 마지막 전술적 과정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중대가 필드에 나서기 전날 상사 계급의 교관이 혹한기 전투에 대한 그의 견해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기타 기후에서 사용하는 전술과 혹한기 전투의 전술은 매우 큰 차이가 있으며, 혹한기라는 기후에만 특유하게 쓰이는 전술도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우리의 혹한기 전술의 목적은, 적을 전멸시키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적의 연락수단을 파괴시킴으로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해병대가 한국과 같은, 수많은 계곡으로 인해 고산과 고원들이 나뉘어진 산악 국가를 공격하려면, 소부대 전술이 가장 적합하다고 설명하였다. 여기에 투입되는 소부대는 기동성이 뛰어나야 하며, 규모 대 전력 면에서 뛰어나야 한다. 바로 그것이 해병대 보병이 눈 속에서도 탁월한 기동성을 갖추도록 훈련받는 이유였다.
그 상사는 적의 연락선을 장악하는 것이야 말로 해병대의 극한지 전투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혹한기라는 기후조건과, 적의 통신선 및 보급선 붕괴가 수반된다면 적은 전멸하고 말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기습 공격이야말로 우리의 최강의 무기가 될 것이었다. 우리가 눈, 눈보라, 안개, 먹구름 등의 악천후를 역으로 활용할 때 우리는 기습공격을 가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었다. 지형을 이용한 은폐와 기도비닉은 우리의 우위를 보장해주고, 우리가 원하는 뛰어난 병력 대비 전투력을 실현시켜 준다.
우리의 전술 훈련의 전날밤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또 다시 엄청난 폭설을 겪었으나, 우리가 받은 훈련 덕택에 우리는 그 문제를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새벽이 된 직후 우리는 폴을 빼내라는 명령을 듣고, 눈신을 신고서 낮은 곳에 위치한 베이스캠프를 떠나 전술 훈련을 행할 멀리 떨어진 높은 산으로 걸어갔다.
그 후 나흘 동안 우리가 중대전술훈련을 행하는 동안 우리는 악천후와 변덕스러운 기온 속에서 산 속을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우리는 폭설과 차가운 빗줄기도 맞았으나 우리는 모두 거기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4일째의 오후 늦게, 나쁜 날씨는 걷히고 파란 하늘이 드러났고, 늦은 오후의 햇살이 흠뻑 젖어 떨고 있는 우리의 가련한 처지를 위로해 주고, 마지막 날 밤에 약간의 휴식을 취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위험한 실수였다. 그날 밤 보초근무를 서기로 되어 있던 중대원이 깊이 잠에 곯아떨어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자 대항군의 해병대원들은 신속히 움직여 우리 중대의 수십정의 M-1소총의 격발장치를 분해해 버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인명피해를 입혔다는 뜻으로 밝은 빨간색 립스틱을 사용하여 보초근무 중에 자고 있던 해병대원의 얼굴을 칠했다.
우리는 우리 소대 구역 내에서 발사되는 M-1소총의 사격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자던 해병대원들이 일어나서 병기를 손에 들었으나 곧 우리는 격발장치가 사라져버린 이 무기들로 적에게 반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격이 멈춘 후 대항군 소대장인 해병 중위가 난처한 상황에 빠진 우리 소대장들과 중대장들에게 혹독한 강평을 가했다.
“방아쇠 뭉치도 없는 소총을 들고 서 있는 여러분의 부대원들의 멋진 모습을 보십시오. 그리고, 얼굴에 빨간 줄무늬를 칠해 놓고 서 있는 저 해병대원들도 보십시오. 우리 대항군 대원들이 그려놓은 줄무늬입니다. 저 빨간 얼굴의 해병대원들은 보초 근무 중에 잠을 잤습니다. 그들은 아마 전쟁이 끝났으니 몇 분만 잠자도 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생각으로 인해 자기 자신들 뿐 아니라 동료 대원들마저도 죽이고 만 것입니다. 만약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여러분들은 아침에 기상해서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보초를 잠자게 해서는 안됩니다. 피곤하다면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절대로 보초 근무 중에 조는 일이 없게끔 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손 댄 것이 중국군이나 북한군이었다면 여러분들은 ‘난 죽었소’라고 복창해야 할 겁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해 쓰디쓴 교훈을 얻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야전에서 유용한 교훈이었다. 우리는 책에 써 있는 무언가를 읽거나, 다른 해병이 시범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인 스스로가 그것을 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배운 것이었다. 그것은 항상 우리가 일하는 방법이 되었다. 우리는 항상 믿을 수 있고 상황을 관찰하는 능력을 갖춘 우리 하사관들을 믿게 되었다.
우리는 추위 속에서의 생존 및, 눈 속에서 무거운 배낭을 매고 행군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본대열이건, 아니면 측면 경계조(해병대는 항상 본대의 외곽에, 더 깊은 눈 속을 행군하는 측면 경계조를 두어, 본대를 보호하였다)이건 간에 말이다. 한 부대로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 법을 배웠고, 그러려면 무척 힘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힘든 훈련은 앞으로 벌어질 실전에서도 그대로 쓰일 것이었다.
피클 초원에 제16 보충병대대가 도착했을 때 우리들의 불운도 드디어 끝났다. 어떤 폭설도 따뜻한 캠프 펜들턴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길을 막을 수 없었다. 새로 훈련소에 입소하는 해병들이 타고 온 그레이하운드 버스 뒤에는 수정같이 맑고 싸늘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전 병력이 하산하는 대로 새로 온 사람들이 타고 온 버스를 타고 캠프 펜들턴으로 향할 것이었다. 새로 온 이들과 우리는 인사를 교환했으나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아는 어떤 비밀이나 교훈도 전수해 주지 않았다. 우리는 이 훈련소를 막 수료한 따끈따끈한 베테랑 교육생들이었고, 새로 온 사람들은 우리가 그랬듯이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알아서 배워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캠프 펜들턴에 도착하자 우리는 4일 내로 우리가 한국으로 떠날 것임을 알았다. 미국 본국에 머무르는 얼마 안되는 시간 동안 지혜로운 우리 하사관들은 우리에게 전투 준비를 시켰다. 어느 날 저녁, 우리 중대원 전원은 현재 베이스 골프 코스로 쓰이는 어느 훈련장으로 행군해 갔다. 거기서 한 상병이 우리에게 소음과 빛 반사에 대한 강의를 했으며, 나는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수풀이 무성한 능선에 앉자 그 상병은 강의를 시작하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베스트 상병입니다. 저는 아직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제5해병연대의 중대에서 1년동안 복무하다가 막 귀국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가장 관심있어 하는 것은 어떻게 하여야 살아남을까 하는 것일 겁니다. 앞으로 몇 시간에 걸쳐서 저는 여러분에게 저쪽 능선에서도 식별할 수 있는 여러 흔적들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 주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능선에서 저쪽 앞의 능선까지는 약 400야드 거리입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몇 가지 것들을 보거나 듣고, 여러분이 경험한 것을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강의가 시작되자 우리는 100야드 떨어진 해병대원이 숲 속에 숨어서 담뱃불을 붙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 다음에는 300야드 거리에서 다른 해병대원이 똑 같은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다른 해병대원이 400야드 떨어진 저쪽 능선에서 담뱃불을 붙였으나, 모두 그 불빛이 똑똑히 보였다.
“만약 여러분이 밤에 이러다가 적에게 발각되었다면, 여러분들은 사격을 당했을 것입니다. 북한군에는 매우 뛰어난 저격수들이 있는데, 그들은 오직 멍청하게 담뱃불을 붙이는 해병대원의 머리를 쏘아 날려버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적에게 제공할 수 있는 표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본 시범은 M-1개런드 소총을 사격자세로 들고 적을 추적하는 해병대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깨에 걸쳐진 30구경 기관총탄 탄띠가 흔들리면서 M-1소총 개머리판에 부딪쳐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금속제 탄약 벨트가 그의 총기에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야기를 듣지 않고도 알게 되었다. 해가 저물고 밤이 되자 밤에는 속삭이는 것 같은 작은 소리도 꽤 크게 들린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우리는 물이 꽉 채워진 수통을 장비하고 어두워진 길을 달리는 해병대원들도 보았다. 알루미늄 수통은 알루미늄 본체와 금속제 뚜껑이 금속제 체인을 통해 연결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 수통에 대한 것이 다음 강의의 주제가 되었다.
“여러분의 금속제 수통은 끊임없이 소음을 발생시키는 위험한 물건이 될 수 있습니다. 수통을 수통피에 수납할 때 수통 컵과 부딪쳐 소음이 발생합니다. 수납한 상태에서 부주의하게 다루어도 수통 컵과 수통이 부딪쳐 소음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수통의 플라스틱 뚜껑은 열 때 삑삑 소리를 냅니다. 여러분의 분대의 목마른 병사들이 일으키는 이런 소음은 잘 훈련된 적병의 귀에는 아주 잘 들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 다음에 우리 귀에 친숙한 해병대 인식표의 두 금속판이 부딪칠 때 내는 짤랑거리는 소리도 들었고, 여러 거리에 포진한 해병대원들이 내는 기침소리, 트림 소리, 방구 끼는 소리를 들었다.
“단 한명의 부주의한 해병대원이 내는 쓸데없는 소음도 여러 명의 다른 해병대원들을 죽거나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야간 침투의 달인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떤 소리라도 나는 곳에 수류탄 2발씩을 던져대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 다음에 몇 명의 해병대원들이 암구어를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고, 베스트 상병으로부터 그들이 서로 약 100야드 가량 떨어져 있으며, 우리가 앉아있는 위치와도 100야드나 떨어져 있다는 내용을 전달받고 놀랐다. 우리 대부분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불과 20피트 떨어져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강의가 계속되면서, 우리는 손목시계의 빛나는 문자판이나 어설프게 숨겨진 플래쉬에서 나오는 빛이 우리의 위치를 얼마나 잘 폭로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베스트 상병은 우리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여러분이 들은 소리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주의를 기울여 약한 쓱, 쓱, 쓱 소리를 들었다. 야전삽으로 건조한 땅을 파내는 소리였다.
“몇 명이 땅을 파고 잇는지 알아맞추신 분 계십니까? 북한군들은 저렇게 참호를 파고 자신들이 획득한 땅을 지키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혹은 세 사람 이상이 땅을 파는 소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분간해 내실 수 있어야 합니다. 방금 여러분들이 들으신 소리는 200야드 거리에서 3명이 땅을 파는 소리였습니다.”
베스트는 몇 분 동안 계속 땅을 파도록 하여 그 소리가 우리들 마음 속에 남게끔 하였다.
그 다음 강의는 조명탄에 대한 교육이었다.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조명탄의 소리를 알아듣는 방법과, 조명탄 낙하시 바로 땅에 엎드릴 것을 배웠다. 그렇지 않으면 적의 조명탄에 바로 노출될 것이었다.
마지막 야간 수업으로서 불타는 조명탄을 직시하지 말 것을 교육받았다. 불타는 조명탄을 직시하게 되면 우리는 곧장 야간 투시력을 잃어버리고, 일시적으로 맹인이 되며, 그럴 경우 우리가 할 일은 적의 표적 노릇 뿐이었다.
우리가 우리 캠프로 행군하여 돌아올 때 베스트 상병과 그의 조수들은 수십발의 조명탄을 쏘아 대면서 우리가 새로 배운 것을 얼마나 잘 써먹고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 상병의 강의는 그 후로 여러 날 동안 화제가 되었고, 몇 주 내로 그가 가르쳐 준 것 덕택에 우리는 나중에 우리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캠프 펜들턴에 머무른 마지막 시간 동안 우리는 승선 준비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함상 생활의 복잡성과 여러 해군의 전통에 대해서 짧은 강의를 들었다. 우리 대대는 ‘포프 장군’이라는 상선에 탑승했는데, 남북전쟁 때의 유명한 북군 장군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었다. 우리는 그 배에 타자마자 즉시 이물과 고물이 뭔지 배우게 되었고, 하루의 시각을 종을 8번 타종해서 울리는, 모든 배에서 사용하는 시보 방법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에서 보낸 늙은 신사들인 우리의 고참 하사관들은 우리 젊은 해병들에게 해군과 해병의 차이를 가르쳐주는 데 가장 적합한 사람처럼 보였다. 지상에서는 우리는 ‘가죽 목받침’이나 ‘마견’등으로 불리는 조국의 방패였으며, 우리 해병대의 간성들이었으나, 배 위에서는 선원들에 의해 그저 짐짝 취급 당할 뿐이었다.
우리는 1951년 11월 1일에 한국으로 출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