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 그린 베레의 생존법 - <자유를 향한 5년간> / 닉 로우 중령

2013. 8. 1. 17:29산 이야기

 

 

   적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가 탈출에 성공한 로우 중위의 <자유를 향한 5년간>

 

이라는 책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은 적진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도피/생존/탈출이라는 SERE 프로그램의 야전교범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원하지 아니한 상황 - 실직, 강요된 명예퇴직, 사업실패,

 

범죄단체에 의한 피랍, 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인신구금,  예기하지 못한 재해나 사건사고,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 등의 여러가지 현실문제에 부딛혔을 때, 저자인 로우 중위가

 

북베트남의 호지명의 군대의 열악한 환경의 임시 간이포로수용소에서 어떻게 5년간 생존해 왔으며,

 

수없이 밀려오는 죽음의 그림자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였는지를 읽을 수 있다면,

 

위에서 예시한 것 외에도 우리가 현실 속에서 가끔 맞이하는 크고 작은 시련의 크기들은  당

 

시에 로우 중위가 처한 상황의 크기와 비교할 수 있을까?하고 자문자답해 봄으로써

 

자신의 마음의 평정과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데

 

소요되는 시간의 값어치는 충분히 얻은 것이다. 

 

 

    아래에 닉 로우 중위(나중에 중령으로 진급)의 저서 <자유를 향한 5년간>에 대한 안내글이

 

있어서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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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nel James "Nick" Rowe

 

(February 8, 1938 - April 21, 1989)


    닉 로우 중령은 그린베레의 아주 선도적인 장교였다.

그는 웨스트 포인트 출신이다. 그리고 그는 베트남에서

포로가 되었었다. 그는 5년간 북베트남에 갇혀 있었고,

탈출을 시도 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린베레에 복귀했다. 그리고 SERE(도피/

생존/탈출) 프로그램의 교관이 되었다.

   그 프로그램이 육군의 하나의 정식 학교가 되는 무렵이었다.

적을 회피하고 아군으로 복귀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적의 포획으로부터 저항하는 방법. 탈출을 계획하는

법 등을 가르쳤다. 그는 깊은 신앙심의 기독교신자였다.

그는 실제로 사지에서 살아나고 저항하고 탈출을 시도했던

그린베레의 영웅이었다. 그는 5년 동안의 월맹 포로생활을

“Five Years To Freedom"란 책으로 썼다. 그를 보지 않은

사람은 그를 존 웨인 타입으로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상당한 젠틀맨이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The Vietnam Years


   1963년 10월 29일, 록키 버세이스 대위, 닉 로우 중위,

그리고 다니엘 핏저 하사는 CIDG의 중대를 이끌고 수로

지역의 작전을 나섰다. 팀의 캠프는 Tan Phu였다.

 

그 일대에는 작은 규모의 베트공 부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전초 지휘소가 있었다. 그들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적은 물러서 있었고, 팀은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적하던 와중, 아침 10시쯤 적의 역매복에 걸려

들었다. 전투는 저녁 6시까지 계속되었다. 이 전투에서

결국 버세이스, 핏저, 로우 등 3 명 모두는 베트공에게

포로가 되었다. 


   62개월 동안 로우는 이질과 싸웠다. 그는 고통과 싸웠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다. 풀려날

희망은 없었다. 총살될 확률이 높았다. 그는 나무로 만든

감옥에 있었다.  3피트 곱하기 4피트 곱하기 6피트 크기의

감옥이었다. 이 모든 악조건에도 로우는 살아났다.

 

    그는 포로로 잡히는 순간부터 심문자에게 반항했고 탈출할

계획을 심사숙고했다. 그는 전에 정보장교를 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정보능력을 발휘하여 수용소의 방어

상태와 경계상태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주변의

지뢰밭의 위치도 파악했고 그들의 무장상태도 엄두에

두었다.


   로우는 자신이 전투병이 아닌 공병이며, 학교나 민간

시설을 짓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웨스트

포인트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다. (베트남에 올 때, 그는

부모님에게 맡기고 왔다) 로우는 입대 전에 작은 진보적인

대학을 다녔고 군대에 관해서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을 믿지 않은 베트콩은 그에게 고문을 가했다. 매번

고문 때마다 이야기들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베트콩 심문관

들은 그의 거짓을 판단하기 위하여 공병이라면 알아야 할

문제들을 그에게 풀어보라고 주었다.

 

그러나 로우는 웨스트포인트에서 공병과목을 배웠었고,

문제를 풀었으며, 그들은 그가 공병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제인 폰다가 북베트남을 방문하면서 산산조각 났다.

 

    제인 폰다는 미국의 반전운동의 증거로 필요하다면서

일부 미군 포로를 보고 싶다고 했다. 포로 명단에서

로우의 이름을 발견한 제인 폰다는, 그가 미 육군

특전단의 고문단이었고 정보장교라는 말을 하게 된다.


   로우를 심문했던 월맹군 장교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에 격노했다. 월맹군은 그를 죽도록 구타한 뒤, 늪지에

말뚝을 박고 그곳에 알몸을 묶어 놓았다.

 

   그는 묶인 상태에서 모기, 거머리에게 수도 없이 물렸다.

 

   2일 뒤 그는 모기와 거머리에 담요처럼 말린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로우는 과거에 했던 말만을

반복했다.


   로우는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고, 한번은 부상당한 포로와

같이 시도했었다. 결국 그들은 추적자에게 다시 잡혔다.

 

   부상당한 미군 포로는 자신을 버리고 가라고 로우에게

말했고 로우는 떠났다. 로우는 동료가 다시 잡히는 소리를

들었고, 베트콩들은 돌아오지 않으면 당장 그 동료를

죽이겠다고 소리쳤다. 결국 로우는 그 소리를 듣고

자진해서 돌아와 잡혔다. 


    로우는 1968년 12월 말에 처형될 예정이었다. 수도 없이

이어진 공산주의 이론교육을 거부했고 탈출을 계속 시도

했기 때문이다. U민 숲의 수용소를 떠나고 있을 때, 로우는

갑자기 날고 있던 미군 헬리콥터를 보았다. 그는 감시병을

때려 눞히고 개활지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는 검은색

파자마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71년 5년 만에 풀려나 베트콩 치하에서의 고통과 탈출에

관해서 책을 썼다. 이 책은 독일어, 스페인어, 중국어로도

번역되었다. 이 책은 포로의 심문 기만술의 교범으로 채택

되기도 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생존법,’이라는 책도 썼다.


(그는 포로에서 풀려난 뒤에, 자신이 5년 동안

소령으로  진급되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1974년 그는 군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Fort Bragg and The Philippines

 

 

   미 육군의 특수전 학교는 생존탈출법이 필요한 과목으로

생각하여 SERE (도피/생존/탈출) 훈련을 시작한다. 그

때에 모두가 닉 로우를 교관으로 추천했다. 퇴역했던

로우는 1981년 특수전 학교 생존교관으로 복귀한다.

 

   그의 노력으로 이 생존훈련은 포트 브레그의 명성 있는

귀중한 훈련으로 자리잡는다. 교관 생활 이후, 닉은 5특전단

대대장으로 부임한다.


   1987년 그는 중령 계급으로 필리핀으로 가서 대게릴라전을

훈련시킨다. 이 기간 동안 그는 CIA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군으로부터 전역해서 나와 필리핀 게릴라 부대를

근절하는 프로그램에 관여하게 된다.

 

   그는 빠르고 효과적인 조언들로 인해서 필리핀 정부의

존경을 받게 된다. 또한 필리핀 공산주의 게릴라들에게는

증오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필리핀 아키노 정부를

전복하려고 하고 있었다.


   1989년 2월, 그는 정보를 통해서 필리핀 공산게릴라들이

굉장히 큰 테러를 저지를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워싱턴에

긴급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거해야 할 테러리스트 명단을

넘버를 붙여서 올렸다.

 

   닉은 공산게릴라의 선전물에 자신의 목에 현상금이 걸린

것을 알고 있었다. 이 현상금에 필리핀 정부를 당혹감을

느꼈다. 89년 4월 중순, 그는 자신의 그린베레 대원들을

자신의 미국 집으로 보냈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필리핀

공산게릴라의 명단과 작전계획 등 중요한 정보를 아내에게

편지와 동봉해서 맡겼다.


   1989년 4월 21일 무장 리무진을 타고 미국 대사관으로

돌아오던 로우는 두건을 쓴 공산게릴라들로부터 자동화기

공격을 받았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는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었다.

 

   방탄 유리를 장착한 리무진은 그날따라 에어컨이 고장이

나서 필리린의 폭염을 피해 창문을 조금 내리고 있었다.

게릴라들은 이 창문 틈으로 총구를 넣어 총을 쏘았다.

서너 발이 로우에게 적중했고 로우는 즉사했다.


   게릴라 측은 이 살해가 ‘미국인에게 보내는 경고,’라고

공표했다.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그의 행로는 미

대사관 밖에는 몰랐고, 로우는 항상 다니던 길을 바꾸면서

다니는 치밀함이 있었다.

 

   그리고 로우는 죽기 얼마 전에 필리핀 정부로부터 무장을

하고 다니지 말라는 요청을 받고 그렇게 했다.  그 이후

아키노 대통령은 공산게릴라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로우를 죽였던 체포된 게릴라들은 이 협정 이후 바로

대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로우는 알링턴 국립묘지의 한 무명용사 묘지

옆에 안장되었고, 그의 묘석에는 그가 1964년,

포로생활 시절에 쓴 시가 쓰여졌다.

 

 


"얼굴을 들고 시간이 오는 것을 보라......

 

절망은 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더 볼 세계가 있다......

 

그것이 너의 등 뒤에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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