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유학과 도참설의 한판 대결 外

2017. 11. 7. 13:54우리 역사 바로알기



       




2007/08/09 16:12 약수




역린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정도전

   선비와 대화가 통하는 무장을 선택해 혁명에 성공한 정도전은 야인생활의 한을 풀듯이 왕성하게 일을 추진했다. 오늘날에도 명문장으로 회자되는 혁명공약을 혁명 열흘 만에 발표했다. 조준과 함께 고려사 편찬 작업에 참여하는가 하면 신생국 조선의 기본 강령을 담고 있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집필에 착수했다.

   납씨곡(納氏曲)정동방곡(靖東方曲) 등 음악을 쓰고 사시사철 사냥하는 그림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를 그려 사냥을 좋아하는 주군을 기쁘게 했다. 병법에 능통한 임금에게 오군진도(五軍陣圖)를 제시해 깜짝 놀라게 했다.

   문무와 예(藝) 그리고, 군사를 넘나드는 만능에 팔방미인이었다. 한마디로 주군이 무엇을 좋아하고 역린(逆鱗)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성계 이후의 밑그림을 그려놓았다는 것이다. 방석의 세자책봉이다. 혁명가는 수명이 짧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혁명가는 신념과 열정으로 혁명을 성공시키면 역사의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모의 단계에서는 "실패하면 이 한 몸 죽어 희생 된다"라고 생각하지만 성공 이후에는 후대의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두렵기만 하다.

   때문에 많은 업적을 남기려 무리수를 두게되고 육체적으로도 혹사하게 된다. 더불어 환경의 변화는 주변에 주지육림(酒池肉林)이 대기상태다. 주색에 곯는다는 말이 남의 말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생명단축의 원인이 되어 수명이 짧다는 것은 고금의 통설이다. 이것을 정도전이 모를 리 없다.

혁명가는 외롭다

   혁명은 여러 사람이 하지만 진정한 혁명가는 단 한 사람이다. 혁명은 피라미드형이다. 정점에 두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한 사람이다. 실패하여 처형을 당할 때는 주범이라는 두름에 여러 사람이 엮이지만 그것은 처벌하기 위한 법률적인 수단일 뿐, 혁명가는 오로지 한 사람이다. 그래서 혁명의 과실은 여러 사람이 따먹지만 혁명가는 외롭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한 손에 쥔 실력자가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쾌속 질주할 때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그릇의 차이와 중량감의 차이가 난다. 현자(賢者)는 힘이 자신에게 모아졌을 때 더욱 겸손하고 처결의 완급을 조절한다. 덕(德)은 가진 자만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정도전에게는 출생의 의혹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이것으로 인하여 고려 조정에서도 냉대를 당했다. 이색 문생으로서 정몽주, 이숭인, 길재 등과 당당히 겨루어 실력이 부족함이 없었으나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 주류로부터 중심세력권의 진입을 거부당하는 비주류였다. 이것이 정도전의 울분이었고 비분의 원천이었다.

정도전의 출생의 비밀은?

   "우현보의 족인(族人) 김진이란 사람이 일찍이 중이 되어 그의 종 수이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김진이 후일에 속인(俗人)이 되어 종 수이를 내쫓고 그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그 딸을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어 딸 하나를 낳아 정운경에게 시집보냈다. 그 딸이 아들 셋을 낳았으니 맏아들이 정도전이다." (태조실록)

   다시 설명하면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노비의 딸이라는 것이다. 바람둥이 땡초 중이 노비를 건드려 정도전의 외할머니를 낳았다는 이야기다. 호적관계가 불분명하던 시대에 확인할 증거는 없다. 하지만 적서(嫡庶)를 분명하게 따지던 당시에 정도전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하는 악재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하여 죽고, 태종 조에 편찬된 태조실록이 진실인지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진실로 받아들인다.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록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역사의 일부분이고 자료일 뿐이다. 역사에는 사실이라는 껍질을 벗겨내면 진실이라는 속살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비록 문하시랑 찬성사라는 직책은 낮았지만 막강 권력을 손에 쥔 정도전이 칼을 뽑아들었다. 자신을 냉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성 칼이었다. 소문을 확대재생산한 우현보에게 원한이 컸다. 스승이지만 이색에게도 서운함이 컸다.

   도당(都評議使司)의 이름으로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을 제주도와 추자도로 귀양 보내자고 임금에게 청했다. 명분은 혁명을 반대하는 반혁명세력 척결이었지만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성계는 반대했다.

   “내가 이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했는데 지금 또 여러 섬으로 나누어 귀양 보낸다면 이는 신(信)을 잃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이 없는 땅에 귀양 보낸다면 의복과 음식을 어찌 얻겠는가? 반드시 모두 굶주림과 추위에 죽게 될 것이다.” (태조실록)

   그렇다면 이색자연도(紫燕島)로 귀양 보내자고 정도전이 다시 주청했다. 경기 계정사(京畿計程使)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를 어렵게 여겨 그 구처(區處)할 것을 물으니 정도전이 대답하였다.

“섬에 귀양 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 넣자는 것이다.”

   정도전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색장흥(張興)으로 귀양 보내라는 명령이 나오게 되니 정도전의 계획이 관철되지 못했다. 마침내 여러 주(州)에 나누어 귀양 보내니 우현보해양(海陽)으로, 설장수장기(長鬐)로 귀양 가고,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연변(沿邊)의 주군(州郡)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보복에 나선 정도전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중하위급 처결의 대상이어서 곤장 형으로 감형 받은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8명이나 되었다. 경상도에 귀양 간 이종학과 최을의, 전라도에 귀양 간 우홍수, 이숭인, 김진양, 우홍명 양광도(楊廣道)에 귀양 간 이확과 강원도에 귀양 간 우홍득 등 이었다.

   당대의 유학자 이숭인과 선죽교에서 격살당한 정몽주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준 우현보의 세 아들비명에 숨진 것이다. 우현보는 방원의 어렸을 적 스승이자 깐깐한 유학자였다. 음모에 의한 계획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장형을 집행당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정도전의 주청을 마지못하여 받아들인 것이 이와 같은 변을 불러 온 것이다. 정도전은 곤장을 치라는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남은과 황거정을 몰래 불렀다.

“곤장 1백 대를 맞은 사람은 마땅히 살지 못할 것이다.”

황거정 등이 우홍수 형제 3인과 이숭인 등 5인을 곤장으로 때려 죽여서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하고는 황거정 등이 돌아와서 곤장을 맞아 병들어 죽었다고 아뢰었다. 정도전이 임금의 총명을 속이고서 사감(私憾)을 갚았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뒤에 그들이 죽은 것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태조실록)


   ‘살지 못 할 것이다’“살아서는 안 된다” 는 또 다른 표현이다. 곤장 100대 라는 숫자는 무의미 하다. 형벌의 의미로 죽지 않도록 치는 100대와 죽도록 치는 100대는 그 농도와 강도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곤장을 맞은 죄인이 형장에서 죽게 되면 형리가 처벌받는 것이 당시의 법도였다.

   이색 문생으로 금릉에 있는 주원장에게 표문을 올려 황제의 마음을 흔들었던 당대의 문장가 이숭인은 이렇게 죽어라고 치는 매를 볼기가 아닌 등골에 맞고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훗날 부메랑이 되어 정도전의 발등을 찍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비화한다. 태종으로 등극한 이방원은 황거정과 손흥종 등이 임금을 속이고 제 마음대로 죽인 죄를 소급해 다스려서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주었다.

   “그때 정도전, 남은이 만일 곤장 1백 대를 때린 뒤에 죽지 않거든 교살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목 졸라 죽였습니다.”  (태종실록)

   정도전의 밀명을 받고 장형(杖刑)과 교살을 실행한 손흥종의 자복이다.

   “개국의 공은 남은이 많았으니,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 힘써 아뢴 일이 있었으나 정도전은 개국할 때에도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없었다. 그 뒤에 적서(嫡庶)를 분변할 때에도 한 마디 언급하지 않았다. 임금을 속여 이숭인 등을 함부로 죽여 그 몸의 허물을 없애려 하였으니 죄가 공보다 크다. 마땅히 전민을 적몰하고 자손을 금고(禁錮)하라.”  (태종실록)

계룡산 도읍지 공사 중단 사건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 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계룡의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갑니다.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 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 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태조실록>

   신생국 조선의 야심찬 신도 건설이 벽에 부딪쳤다. 경기도 도관찰사(京畿左右道都觀察使) 하륜이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으로서는 무학대사권중화 그리고 하륜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도 하륜이 도참설에 능통한 학자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외면 할 수 없었다. 계룡은 쇠하고 망하는 땅이라 하는데 어느 군주가 강행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흔들린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불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재 등으로 하여금 하륜과 더불어 의논하여 보고하라 명했다. 새로운 도읍지로 계룡산을 지정하고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는 신도건설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하는 재검토 작업이다.

   비로소 하륜이 중앙 정계에 얼굴을 내미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정통유학을 공부했지만 풍수지리와 도참설에 능하다는 이유로 이단아 취급을 당해 변방을 떠돌아야 했던 하륜이다. 하지만 정도전으로서는 붙여주고 싶지 않은 견제의 대상이었다. 불교와 도참설을 배척하고 정통 유학을 지양하는 정도전의 시각으로 볼 때 하륜은 이단이었다.

도참설은 망국의 온상이다

   정도전은 고려를 뒤엎어야 할 명분으로 기득권세력의 부패와 불교의 권력유착에서 찾았었다. 권문세족의 권력지향주의와 과도한 토지를 소유한 불교사찰의 부패를 방조하는 것이 도참설이라고 생각했다. 도참설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을 넘어 망국의 온상이라고 규정했다. 이제 신도안을 매개로 정통유학과 도참설이 한판 붙은 것이다.

   정도전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경제문제는 자신의 학문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경제문제조준에게 일임하고 나머지 문제에 매진했다. 정치, 외교, 국방, 법률 등 당대의 최고라고 자신했다. 이것이 어떨 때는 자만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하륜과 겹치는 학문이 많았다.

대장군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신생국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는 정도전은 혁명에 공을 세우지도 않은 하륜이 자신의 영역에 끼어드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정통유학과 풍수지리 그리고 도참설에 능통한 하륜은 조준과 정도전의 공동의 적이었다.

   하륜이 제시한 자료를 꼼꼼히 검토해보니 흠잡을 데가 없었다.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山陵)의 길흉(吉凶)을 다시 조사해보았으나 하륜의 주장이 맞았다. 봉상시(奉常寺)제산릉 형지안(諸山陵形止案)의 산수(山水)가 오고 간 것으로써 조사해 보니 길흉(吉凶)이 모두 틀림없었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공사를 중단하라."

   이성계의 신도공사 중지명령이 떨어졌다. 계룡의 땅은 쇠(衰)하고 패(敗)하는 땅이라 하는데 강행할 수 없었다. 신생국 조선을 개국하고 대대손손 권력을 이어갈 구상에 몰두하고 있는 이성계는 거두어들이고 싶은 땅이었다. 중지명령이 심효생을 통하여 계룡산 현지에 있는 김주에게 전해졌다.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이 대환영했다. 개경인들은 수도가 이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반겼고 부역에 동원된 경상도와 전라도 백성들은 중노동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기뻤다.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 때문에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었는데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도망자는 체포하여 극형에 처하는 단속에도 불구하고 부역꾼들의 탈주가 빈번하게 일어났었다.

   자손만대의 부귀영화를 꿈꾸고 있는 태조 이성계하륜의 논리에 탄복했다. 이성계 역시 풍수지리에 문외한이 아니었다. 전장의 장수는 천문과 풍수지리에 능통해야 전투에 승리할 수 있다. 날씨를 보아 기습과 공격을 감행하고 물길과 산세를 보아 진을 쳐야 군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장터에서 잔뼈가 굵은 이성계다.

   하륜을 즉각 지방관서에서 수도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경기 관찰사에서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로 임명하고 곁에 두기 시작했다. 정도전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주군 곁에 참모는 한 사람으로 족하다고 여기던 정도전이다. 2인자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 사람 이상의 참모는 갈등을 낳고 추진력의 속도가 떨어진다고 믿어왔다.

   이성계는 권중화에게 서운관(書雲觀)이 보관하고 있는 비록문서(秘錄文書)를 모두 하륜에게 공개하라고 명했다. 비장의 고서(古書)를 참고하여 천도(遷都)할 땅을 찾으라는 것이다. 천문 분야에서는 당대의 최고라고 자부하던 권중화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하륜으로서는 평생 접할 수 없는 비장의 문서를 들춰볼 기회를 잡은 것이다.

오늘날의 기상대, 서운관이 풍수지리까지?

   서운관은 기상관측 등을 관장하던 관서로서 절기와 날씨를 관측하고 기록했다. 개경에 천문을 관측하는 첨성대를 운용했으며 일식과 월식은 물론 혜성의 출현을 관측했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면 왕이 기우제를 지내던 시절, 왕은 하늘의 운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서운관 제조는 왕의 최측근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서운관은 왕실의 능실을 관장하는 부차적인 임무도 수행했다. 최근 만원 신권에 등장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제작한 곳이 서운관이며 세종 조에 혼천의(渾天儀)와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제작한 장영실도 서운관 관원이었다.

   관련서적을 뒤지고 심사숙고 끝에 하륜이 지목한 땅은 무악이었다. 무악(毋岳)은 오늘날의 연세대학교를 아우르는 신촌일대를 말한다. 하륜이 무악에 주목한 것은 조운(漕運)이었다. 국가의 재정을 뒷받침 할 세곡선 출입에 최우선 순위를 둔 것이다. 강화도 교동을 통과한 세곡선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화진에 접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관심 대상은 무역이었다. 당나라 이래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한 중국과 활발한 교역이 있어야 국토가 비좁은 한반도가 살아가는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의주에서 국경무역이 있었지만 그것은 조정의 통제를 받는 말 무역을 비롯한 전략물자 교역일 뿐, 백성들의 민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개경에도 국제무역이 통했지만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온 무역선이 벽란도에 짐을 부리면 선의문 고개를 넘어 개경에 진입해야 했다. 날씨가 좋지 않거나 예성강 물살이 세면 예성강 하구에 짐을 부렸다. 때문에 벽란도와 예성강 하구는 번창했다. 육상 운송수단이라곤 달구지 밖에 없던 시절에 왕도에 뱃길이 닿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인식했다. 운하와 무역.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이다.

수도 이전계획에 저항하는 수구세력

   하륜의 보고를 받은 태조 이성계는 좌시중 조준권중화 등 11인을 보내어 무악(毋岳)을 살펴 보고하라 명했다. 권중화에게 특별히 지시한 것이 있었으니 지리비록촬요(地理秘錄撮要)라는 책을 가지고 가서 살피라는 것이었다. 이 책은 하륜 자신이 무악을 지목하게 된 당위성을 주장하는 책이었다.

   무악(毋岳)을 현지 답사한 권중화와 조준이 개경으로 돌아와 무악산 남쪽은 땅이 좁아 도읍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했다. 이에 하륜이 반박하고 나섰다. "무악산 명당이 비록 협착한 듯 하지만 송도의 강안전(康安殿)과 평양의 장락궁(長樂宮)과 비교한다면 그래도 넓은 편이 될 것입니다. 또한 고려 왕조의 비록(秘錄)과 중국에서 통행하는 지리의 법에도 모두 부합(符合)합니다."

   당대의 도참설(圖讖說)의 대가 하륜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고려 왕실이 간직하고 있던 비록을 들이대는 논리도 정연했다. 무악이 비록 좁기는 하지만 강안전과 장락궁 보다 넓다는 하륜의 말이 귀에 번쩍 들어왔다. 계룡산 천도공사가 중지된 상태에서 태조 이성계는 시간이 없었다.

"새 도읍지는 무악으로 한다."

   왕의 결정이 떨어졌다. 왕의 결정은 곧 왕명이다. 왕명이 떨어졌는데도 신하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개경인들의 시선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이성계의 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개경에 눌러있고 싶어 하는 신하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수도 이전과 같은 대 역사(役事)는 수백 년을 내다보는 국가적인 장래를 생각해야 하는데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집과 대문 앞에 문전옥답만을 생각했다.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후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서운관원(書雲觀員) 유한우이양달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신이 배운 바로 보아서는 무악은 도읍으로 정할 곳이 아닙니다."
"나라의 큰 일이 이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좋지 않다' '좋다' 하니 지난번에 현지를 답사한 재상과 서운관 관원이 그 옳고 그른 것을 논의해서 보고하라."

   임금이 한발 물러섰다. 하륜이 추천한 무악이 물 건너 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권중화와 우시중 김사형이 무악은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했다. 개경을 탈출하고 싶은 태조 이성계는 고민에 빠졌다. 계룡산 천도공사가 중지된 상태에서 후보지가 결정되지 않고 표류하고 있으니 난감했다. 마음이 바빠졌다.

"다시 좋은 곳을 물색하여 보고하라."

   서운관 관원들에 의하여 불일사(佛日寺) 터가 등장하고 선고개(鐥岾)가 도당에 추천되었다. 선고개를 답사한 남은이 화를 벌컥 냈다.

"너희들이 지리의 술법을 안다는 자들인가?"

서운관 관원 이양달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계룡산 토목공사가 중지된 것도 6개월이 지났다. 태조 이성계는 신하들의 갑론을박이 짜증스러웠다.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하륜이 지목한 무악에 미련이 많았다. 한고조가 진나라의 흥덕궁을 고쳐 지은 장락궁을 그대로 본떠 평양에 지은 장락궁보다 더 큰 궁전이 들어설 자리라 하니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왕은 몸소 무악산을 답사하겠다고 나섰다.

무악산 현지 답사에 나선 태조 이성계

   임진강을 건넌 임금 일행이 무악에 도착했다. 때는 폭염이 내리쬐는 8월이었다. 임금이 당일에 환궁하지 못하는 원행은 신하들에게 어려운 수행이었다. 훗날 조선 왕조가 정착된 이후에는 행궁을 지어 왕이 유숙할 수 있었지만 건국초기에는 제도가 정비되지 않아 왕도 노숙했다. 허허벌판 야전에서 단련된 태조 이성계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대청 사랑방에서 목에 힘을 주고 살아왔던 사대부들은 곤혹스러웠다.

파주 고양과 연결된 구릉에서 바라보니 한강이 시야에 들어왔다. 삼남에서 거두어들인 세곡과 당화(唐貨)를 가득 실은 무역선이 드나들기에 아주 좋아보였다. 당화란 당나라시대 이후 중국의 고급상품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수출입 상품을 의미한다. 태조 이성계는 흡족한 웃음을 만면에 지었다. 이렇게 좋은 자리를 발굴한 하륜이 한결 미더웠다.

   개경도 명나라 화물이 드나들었다. 산동 반도에서 출발한 선박이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와 벽란도에서 짐을 부리고 고려의 특산물을 싣고 상해로 출발했다. 예성강의 수심이 깊어 큰 배도 드나들었지만 물살이 세어 벽란도를 기피하고 예성강 하구에 멈추는 경우가 많았다. 하구에 내린 화물을 개경까지 운반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무악산은 비록 높지는 않았지만 패기(覇氣)를 지니고 있었다. 옹골찬 기운(氣運)이었다. 오늘날 태고종 총본산 봉원사와 연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명지대학교,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아우르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흡족했다. 600년 전 왕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지금의 연희동 고개다. 서운관 윤신달유한우가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윤신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리의 법으로 보면 여기는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
"너희들이 함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데 여기가 만일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문서에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보아라."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반대하는 윤신달에게 면박을 주어 돌려보냈다. 윤신달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른 수행원들과 의논하기 위하여 물러가자 임금이 유한우를 불렀다.

"이곳이 끝내 좋지 못하냐?"
"신이 보는 바로는 실로 좋지 못합니다."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으냐?"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네가 서운관이 되어서 모른다고 하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이것은 도참(圖讖)으로 말한 바이며 신은 단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옛사람의 도참도 역시 지리로 인해서 말한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이 근거 없는 말을 했겠느냐? 그러면 너의 마음에 쓸 만한 곳을 말해 보아라."
"고려 태조송산명당(松山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

임금은 어이가 없었다. 좌시중 조준과 우시중 김사형을 불렀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모두 싫어하는 바이므로 구실을 삼아 이를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재상(宰相)은 송경(松京)에 오랫동안 살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도읍을 옮기는 일이 어찌 그들의 본뜻이겠는가?"  -<태조실록>

   태조 이성계는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민망한 듯 남은이 머리를 조아렸다.

"신 등이 외람히 공신(功臣)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은혜를 입었사오니 비록 새 도읍에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경(松京)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역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은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지금 내가 무악산을 급히 보고자 하는 것은 내 자신 때에 친히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후사(後嗣) 될 적자(嫡子)가 비록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도읍을 옮기려고 하더라도 대신이 옳지 않다고 저지시킨다면 후사될 적자가 어찌 이 일을 하겠는가?"

   신하들의 의중을 꿰뚫고 정곡을 찌르는 분석이다. 좌중의 신하들은 많았지만 유구무언이다.

"서운관이 전조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여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다.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백성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  -<태조실록>

   수구세력의 저항은 끈질겼다. 왕이 이미 천도하기로 작심했는데 그 마음을 돌리려고 완강하게 버티었다. 개경에 기득권을 공고히 한 수구세력은 천도를 반대했다. 우선 새로운 도읍지에 집을 마련하는 것이 번거로웠고 개경주변에 가지고 있는 토지를 비롯한 재산을 관리하는데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날 저녁에 임금이 돌아가지 않고 무악산 밑에서 유숙했다. 야영이다. 임금의 야영이지만 별다를 것이 없었다. 평소에 전장을 옮기며 군막을 치고 야영을 했던 야전군 출신 임금이기에 왕은 불편하지 않았지만 수행한 신하들은 전전긍긍했다.

태조 이성계의 야영은 천도 후보지를 결판 짓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임시로 마련된 군막으로 무학대사를 불러들여 식사를 같이하며 의논했다. 무악산 아래 군막에서 때 아닌 대토론이 벌어진 것이다.

무악산 대토론

   한가위가 가까워 오는 8월 열 이튿날 밤. 휘영청 달은 밝은데 군막에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무학대사와 함께 식사를 마친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들였다. 비좁은 좌중에 빙 둘러 앉았지만 누구 하나 입을 떼지 않았다. 천도는 모든 신하들에게 껄끄러운 문제였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볼 뿐 말이 없었다. 적막을 깨고 태조 이성계가 입을 열었다.

"충의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공신이 된 성석린을 이르는 말이다. 문신이었지만 승천부(昇天府)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전원수로 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운, 무인을 아는 문인이다. 훗날 함흥에 칩거하던 이성계가 함흥차사(咸興差使)를 양산하고 있을 때 이성계를 설득하여 태종 이방원과 화합을 이루게 한 인물이다.

"이곳은 산과 물이 모여들고 조운(漕運)이 통할 수 있어 길지(吉地)라 할 수 있으나 명당이 좁으며 뒷산이 약하고 낮아서 도읍에 맞지 않습니다. 어찌 부소 명당이 왕씨만을 위하여 생겼고 뒷 임금의 도읍이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민력을 휴식하게 한 다음 두어 해 기다린 뒤에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을까 합니다."

개경에 머물자는 얘기다. 성석린의 의견에 정당문학 정총이 가세하고 나섰다.

"도읍을 정하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운 일입니다. 천하의 큰 나라 중국도 관중(關中)이니 변량(汴梁)이니 금릉(金陵)이니 하는 두어 곳뿐인데 어찌 우리 작은 나라로서 여러 곳에 있겠습니까? 무악의 터는 명당이 좁고 뒷 주룡(主龍)이 낮으며 수구가 쌓이지 않았으니 좋지 않습니다. 길지(吉地)라면 어찌 옛사람이 쓰지 않았겠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하륜이 반박하고 나섰다.

"삼한시대부터 우리나라는 동쪽에 금강산, 서쪽에 묘향산, 남쪽에 지리산, 북쪽에 백두산, 중앙에 삼각산을 오악(五嶽)이라 하여 진산(鎭山)으로 숭상했습니다. 삼각산은 우리나라의 진산이자 남경(한양)의 진산입니다. 삼각산(三角山)이 가장 삼각산답게 보이는 곳이 무악 아래 한강변입니다. 무악에 도읍을 정하면 삼각산이 병풍처럼 북풍을 막아줄 것입니다."

새 도읍지를 논하는 이성계의 세 사람

   여기서 말하는 북풍은 중국의 바람이다. 하륜은 무악을 추천하기 위하여 사전 답사 나왔을 때 양화진에서 바라보았던 삼각산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윤곽이 뚜렷한 삼각(三角)은 신령스러웠다. 개경 송악산보다 격(格)이 있는 산세(山勢)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무악에서 뻗어 내린 능선이 금화산을 낳고 만리재를 넘어 용의 형상을 만들었으니 그 용이 입술을 한강에 대고 있는 모습은 천하의 명당이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한강이 마르지 않는 한 왕조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오늘날 마포 도화동 뒷산이 용산(龍山)이다.

"우리나라 옛 도읍으로 국가를 오래 유지한 것은 계림(鷄林-경주)과 평양뿐입니다. 무악의 국세(局勢)가 비록 낮고 좁다 하더라도 계림과 평양에 비하여 궁궐의 터가 넓고 나라의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우리나라 전현(前賢)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서로 부합되는 것입니다. 전현(前賢)의 말씀에 의하여 만세의 터전을 세우려면 이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하륜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중추원 학사 이직(李稷)이었다. 하지만 이직 역시 무악은 비좁다는 단서를 달았다.

"우리나라 비결에 이르기를 ‘삼각산 남쪽으로 하라’ 했고 ‘한강에 임하라’ 했으며 또 ‘무산(毋山)이라’ 했으니 이곳을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터를 잡아서 도읍을 옮기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로서 한 두 사람의 소견으로 정할 것이 아니며 반드시 천명에 순응하고 인심을 따른 뒤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악의 명당은 신도 역시 좁다고 생각합니다."

"왕사께서는 어디가 좋을 듯싶습니까?"
"제 소견으로는 인왕산이 좋을 듯싶습니다."

   무악산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인왕산이 튀어나왔다. 새로운 후보지다. 무학대사 자초가 누구인가? 임금의 스승 왕사(王師)다. 경상도 합천 태생으로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승려가 되어 임금의 스승이 된 고승이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에서 승려가 임금의 왕사노릇을 한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지만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이성계가 청년 장교 시절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어느 집에 잠들어 있는데 집이 무너져 서까래 셋에 깔리는 꿈이었다. 기분이 나쁘고 이상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이성계는 안변 설봉산 아래에 토굴을 파고 도를 닦던 스님을 찾아갔다. 노승은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서까래 셋이 가슴에 왔으니 그것은 임금 王자를 가리키는 것이오. 나라의 왕이 될 운명이니 천기를 누설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시오."

정도전을 위협하는 하륜과 무학대사

   그 스님이 무학대사다. 개경에서 무악으로 출발하기 전 양주 회암사로 사람을 보냈다. 새로운 도읍지로 무악산을 답사하니 고견을 듣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무학대사는 흔쾌히 응했다. 자초 무학은 비록 승려이지만 풍수지리와 도참설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아연 긴장했다. 정통유학자로서 도참설을 신봉하는 하륜을 털어내는 것이 당면한 문제인데 임금의 왕사가 인왕산을 들고 나온 것이다. 도참과 불교가 협공을 하는 격이었다. 하륜은 무악을 주장하고 왕사는 인왕산을 들고 나오는 형국에서 정도전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하지만 정도전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귀재였다.

"봉화군(君)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봉화는 정도전의 본관이다. 봉화군(君)은 정도전을 이르는 말이다. 직책은 낮았지만 좌명공신 문하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 봉화군(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奉化君)을 받았기에 임금도 존중하여 부르는 것이다.

새로운 왕국의 밑그림에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도덕정치가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 승려가 추천한 후보지가 새로운 도읍지가 된다는 것은 정도전으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륜과 무학 두 사람을 일거에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하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도참설의 대가요 하나는 임금의 왕사가 아닌가. 한 사람 한 사람 각개격파가 필요했다.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 되는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와 종사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에 머물러 있으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배운 바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조실록>

도참설을 음양술수로 몰아붙이며 공격의 칼끝이 도참설의 대가 하륜을 겨냥하고 있었다.


m.blog.ohmynews.com/js1029/186481   





2007/08/09 16:28 약수

나라의 성쇠는 지리에 있지 않습니다

"주나라 성왕이 겹욕(郟鄏)에 도읍을 정하여 관중으로 30대 8백 년을 이어왔습니다. 11대손인 평왕 때에 이르러 주나라가 일어난 지 4백 49년 만에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진나라 사람이 서주 옛 땅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주나라는 30대 난왕에 이르러 망하고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대신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30대 8백 년이라 하는 주나라의 운수는 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꿰뚫어 왕조의 성쇠는 지리적인 조건이 아니라고 설파하고 있다. 막사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사위는 고요하고 밤하늘에 별은 반짝이는데 막사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정도전이 말을 이어갔다.

" 고조항우와 함께 진나라를 칠 때 한생이 항우에게 관중에 도읍할 것을 권했으나 항우가 궁궐이 다 타버리고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을 보고 좋아하지 아니하니 어느 사람이 술수로 항우를 달래며 '벽을 사이에 두고 방울을 흔들면 그 소리는 듣기 좋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부귀해진 뒤에는 고향 산천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니 항우가 그 말을 믿고 동쪽 팽성으로 돌아가고 한 고조는 유경의 말에 의하여 그날로 서쪽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항우는 멸망했으나 한나라의 덕은 하늘과 같았습니다.

이후로 우문씨의 주나라와 양견의 수나라가 서로 이어가면서 관중에 도읍하고 당나라도 역시 도읍하여 덕이 한나라와 같았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천자가 된 사람이 많지만 도읍한 곳으로는 서쪽은 관중으로 신이 말한 바와 같고, 동쪽은 금릉(金陵)으로 진나라, 송나라, 제나라, 양나라, 진나라가 차례로 도읍하였습니다. 중앙에는 낙양(洛陽)으로 양나라, 당나라, 진나라, 한나라, 주나라가 계속 이곳에 도읍하였으며 송나라도 도읍을 하였는데 송나라의 덕이 한나라, 당나라에 못지않았습니다. 북쪽에는 연경(燕京)으로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가 도읍을 하였습니다.


술수한 자는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까?

중국과 같은 천하의 큰 나라도 역대의 도읍한 곳이 수사처(數四處)에 지나지 못하니 하나의 나라가 일어날 때 어찌 술법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제왕의 도읍한 곳은 자연히 정해 좋은 곳이 있고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삼한(三韓) 이래의 구도(舊都)로서 동쪽에는 계림(鷄林)이 있고 남쪽에는 완산(完山)이 있으며 북쪽에는 평양이 있고 중앙에는 송경(松京)이 있는데 계림과 완산은 나라의 한쪽 구석에 있으니 어찌 왕업을 편벽한 곳에 둘 수 있습니까? 평양은 북쪽이 너무 가까우니 신은 도읍할 곳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기강이 무너진 전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백성들이 소생되지 못하고 나라의 터전이 아직 굳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민력(民力)을 휴양하여 위로 천시(天時)를 살피시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보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도읍터를 보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이며 조선의 왕업이 무궁하고 신(臣)의 자손도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지금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옛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고서 하는 말이며 신의 말한 바도 또한 옛사람들의 이미 징험한 말입니다. 어찌 술수한 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자칫 불길함이 없도록 하소서."   - <태조실록>


모든 사람의 입을 얼어붙게 한 정도전

   역시 천하의 정도전다운 논리다. 역사관(觀)을 바탕으로 깊은 학문이 아니면 뽑아 올릴 수 없는 대단한 논증이다. 천하의 논객 정도전은 상대를 설복시키는 방법으로 설(說)보다는 역사가 더 주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도전이 말을 마치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학대사가 수염을 쓰다듬을 뿐 유구무언이다. 좌중의 모든 사람의 입이 얼어붙은 것이다.

밤하늘에 별빛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것 같기도 한 침묵이 흘렀다. 옆 사람의 숨소리가 들릴 듯한 적막 속에서 길게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륜이 내뿜는 호흡에 등불이 꺼질 듯이 살랑거린다.

   정도전의 설명을 듣는 순간 이성계의 의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도전이 누구인가? 지금은 군신(君臣)으로 상하가 구별되었지만 혁명호(革命號) 라는 배를 같이 타고 가는 동지가 아닌가? 정도전이 저토록 반대하는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려서 같이 타고 갈 수 있을까? 회의가 들었다.

그렇지만 권중화가 새로운 도읍지로 계룡산을 추천하고 토목공사를 벌일 때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던 정도전이 하륜이 추천한 무악산은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풀리지 않은 의문이었다.

게임은 끝났다. 다음 상대는 누구냐?

   밤은 깊어가고 군막은 조용했다. 정도전의 논리에 반박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휘둘러 본 정도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절반의 승리를 감지하고 있었다. 이성계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제 나머지 절반은 무학이다. 게임은 끝나지 않았지만 정도전은 이미 표적을 바꾸고 있었다.

무악을 새로운 도읍지 후보로 점지한 태조 이성계는 갈등을 느꼈다. 계룡산을 포기하고 무악을 선택했는데 또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개경을 한시 바삐 벗어나고 싶은데 갈 곳을 정하지 못했으니 답답했다. 갈등의 골은 무악을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을 때 잠자코 있던 서운관이 결정타를 날렸다.

"무악은 장래에 나라를 도둑질할 사람이 살 땅입니다."

이성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년은 커녕 눈앞에 닥친 천도 문제가 시급하지만 자신이 목숨걸고 세운 나라를 누가 도둑질해간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도 고려라는 나라를 도둑질한 사람이지만 자신 아닌 또 다른 사람이 자기가 세운 나라를 도둑질 할 것이라 말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나라를 도둑질 할 사람이 살 땅이란 말인가? 도둑질 한 자들이 살 땅이란 말인가? 나라를 도적질 할 괴수들이라면 구월산이나 지리산 같은 깊은 골짜기에 살아야지 이렇게 야트막한 야산에 살 일이 없을 것이고 나라를 도둑질한 자들이 대역무도 죄로 능지처참 당하지 않고 살 땅이라면 나라를 빼앗았다는 것이 아닌가?'

   서운관에게 도적질 할 사람이 살 땅이냐? 도둑질 한 자들이 살 땅이냐? 되묻고 싶었지만 자신이 고려를 도둑질한 처지에서 마음이 켕겼다. 좌중의 신하들이 비웃을까봐 입밖에 내지 못했다. 현재 이들이 막사에서 토론하고 있는 발치 아래 전, 노가 살고 있다. 이튿날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일행은 인왕산에 올랐다.

인왕산에 오르니 남경은 장관이었다

   서운관은 천문(天文)과 역수(曆數)그리고 날씨를 맡아보던 기관이다. 서운관이라 부르기 이전에는 태복감(太卜監), 사천대(司天臺), 관후서(觀候署)로 불리었다. 하늘을 관찰하던 기관이 천도 후보지를 물색하는 담당부서가 된 것이다. 서운관원들이 임금에게 인왕산을 안내하기 위하여 도착한 곳이 중앙관상대가 있던 뒷산이었다. 천도 후 서운관이 관상감(觀象監)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니 서운관원과 관상대 자리는 깊은 인연이 있나보다.

무악산 자락에서 연(輦)을 타고 출발한 태조 이성계는 사천(沙川)을 지나 무악과 인왕이 연결되는 고개를 넘어 연에서 내렸다. 언덕이 가파르기 때문에 수레가 달린 연이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하들이 견여(肩輿)를 타고 오르기를 주청했지만 왕은 걸었다. 야전에서 단련된 하체가 튼튼하기도 했지만 걸으면서 산세를 살피겠다는 뜻이었다. 한참을 오르던 임금이 멈추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장관이었다. 마주 보이는 용마산 뒤로 용문산이 아스라이 보이고 북쪽으로 삼각산을 병풍삼아 백악산이 우뚝 서 있었다. 남쪽으로는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목멱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멀리 관악산도 시야에 들어왔으며 은빛 물결이 부서지는 한강도 눈에 들어왔다.

   남경(南京-한양)을 처음 본 이성계의 소감은 병법에 통달한 야전군 지휘관 출신답게 군사요충이었다. 특히 목멱산 아래 1만 군사를 주둔 시키면 100만 대군을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용(踊-번데기)이 되지 않기 위하여 턱수염을 한강에 담그고 있는 묘()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목멱은 천하의 군사요충이었다. 산세를 관망하던 임금이 윤신달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떠냐?”
“우리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 되는 바는 건방(乾方)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 뿐입니다.”

천도 자체를 취소하게 하고 개경에 눌러앉기를 바라는 수구세력의 저항은 끈질겼다.

“송경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흐뭇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데 양원식(楊元植)이 나서며 머리를 조아렸다.

적성(積城) 광실원(廣實院) 동쪽에 산이 있어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계족산(雞足山)이라 하는데 그 곳을 보니 비결에 쓰여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조운할 배가 통할 수 없는데, 어찌 도읍 터가 되겠는가?”
“임진강에서 장단까지는 물이 깊어서 배가 다닐 수 있습니다.”
“장단에서 광실원은 뱃길이 없지 않은가?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이성계의 마음은 남경에 쏠리고 있었다. 도읍지의 조건이 조운이라는 것도 무악산 학습을 통하여 터득했다. 천하의 요새와도 같은 남경에 군사를 주둔시키면 왕조와 한반도를 지켜낼 자신감이 생겼다.

“왕사(王師)께서는 어떻게 보시었소?”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

   토굴에서 면벽수행 하던 승려답게 여유 있는 자세다. 하지만 외향적인 표현과는 달리 새로운 도읍지는 인왕산으로 유치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천도공사를 중지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에게 천도 후보지에 대한 자문이 올 것이라 예상하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남경에 마음을 두고 있는 이성계의 의중을 파악한 무학대사는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인왕산을 여러 차례 올랐다. 삼각산 세 봉우리중의 하나인 국망봉에 올라 산세를 살펴봤다. 왕십리에서 삼각산과 도봉산을 바라보며 지세를 살피던 중 십리(十里) 앞으로 나가라는 도선국사의 현몽도 받았다.


▲ 인왕산 선바위
ⓒ 이정근

   무학대사 마음의 중심 추는 선바위에 있었다. 신라 천년, 고려 오백년을 이어온 구심점은 불교라고 믿고 있었다. 고려왕조 말, 탐욕에 물든 일부 승려들에 의하여 불교가 고려조정에 끼친 패악도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불교가 국가의 버팀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살생을 금하는 불타의 가르침이 도성 안에 살아 있어야 서로 죽고 죽이는 살생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호국불교정신이 도성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고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도성 안에 사찰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장삼을 걸치고 화평의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 무학의 염원이었고 계책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다. 건국이념으로 삼은 척불숭유(斥佛崇儒)라는 낱말이 말해 주듯이 불교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
남경에 기울고 있는 왕의 심중을 읽은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륜이 홀로 말했다.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못합니다.”
하륜무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시큰둥했다. 어제 조운을 앞세워 무악산을 예찬하던 하륜의 예기를 경청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산세가 빼어나구려. 이렇게 좋은 터를 추천한 왕사의 얘기를 더 듣고 싶소."
"일국의 도읍지는 천년사직을 기약해야 올을 줄 아뢰옵니다. 나라가 천년세세 태평성대를 구가하려면 나라 안의 혼란도 없어야 하겠지만 외침이 없어야 합니다."

나직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삼각산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은 무학대사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나라는 바다 건너 왜구로부터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쪽 바다 건너 왜국(倭國)의 발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인왕을 주산으로 하고 북악을 좌청룡, 목멱(남산)을 우백호 삼아 정전(正殿)을 동향으로 앉혀야 할 것이라 아뢰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무학대사의 능력이었을까? 우연의 일치였을까?

   무학대사의 눈은 예리했다. 남해안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이 왕도(王都) 코 앞 강화도까지 출몰하여 조운선을 약탈할 정도로 커버린 왜(倭)를 위협세력으로 보는 것은 현실감각이 있었다. 하지만 고려 왕국을 속국으로 취급하던 원나라와 명나라 즉, 대륙세력을 침략세력으로 보지 않고 당연시하는 사대(事大) 시각은 아쉬웠다.

또 하나 왜구쯤이야 대단치 않게 보는 이성계의 심중을 읽지 못했다. 지금은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새 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하였지만 고려의 청년장교 시절 이성계가 백성들로부터 박수를 받게 된 것은 남해안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한 것이었다. 이성계에게 왜구는 위협국가가 아니라 토벌의 대상이었다.

"동향(東向)이라…? 기이하군요. 이유를 말씀해 보시오"
북악산삼각산을 지긋이 바라보던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되물었다.

"동향으로 된 정전 옥좌에 성상께서 앉아계시면 문무백관들이 성상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게 됩니다. 왜국 역시 성상께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형국이 되는 것 입니다. 용트림하는 왜국의 기세를 꺾으면 천년세세 태평성대를 이룩할 것이오. 그 위세를 잠재우지 못하면 국난에 처하여 나라의 명운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무학대사의 목소리는 설법하듯 나직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훗날 임진년의 조선 침공과 국권찬탈. 그리고 오늘날의 일본을 생각해보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로부터 200년 후, 1592년 조일전쟁(임진왜란)이 터졌다.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生卽死 死必卽生)는 일념으로 고군분투 했지만 국토는 유린되었다. 선조 임금이 창덕궁을 탈출하여 의주로 몽진 떠나고 조국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걸렸을 때 백성들은 무학대사의 예지력에 탄복했고 아쉬움에 탄식했다. 앞날을 내다보는 무학대사의 능력이었을까? 우연의 일치였을까?

군신 간에 위계질서가 깨진다니 협박하는 것이냐?

   "동향이라 함은 천부당만부당 한 말씀이라 아뢰옵니다. 예로부터(중국을 칭함) 황제는 남면(南面)하여 신하의 알현을 받고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불변의 원칙입니다. 인왕을 주산으로 하여 궁궐을 동향으로 한다면 제왕과 신하의 질서를 이룰 수 없습니다. 군신(君臣)간의 위계질서가 깨지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없사옵니다."

정도전의 신념은 단호했다. 군신간의 위계질서가 깨지면 태평성대를 이룰 수 없다는 정도전의 말이 이성계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총애하는 정도전이 아니라면 협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500여년을 면면히 이어오던 고려왕조가 망하게 된 원인을 굳이 찾자면 군신간의 신뢰와 위계질서가 깨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성계였다.

   당시 조선인의 세계는 중국이었고 명나라가 곧 세계였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선진국이었다.

모든 문물과 제도가 그랬다. 정도전의 생각은 세계의 선진국 중국을 따르자는 것이다.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른 주원장이 앉아있는 금릉의 궁전이 남향이고 대륙의 역대 왕조가 도읍지로 정한 낙양과 연경의 궁궐이 모두 남향이라는 뜻이다.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백악을 주산으로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면 종묘사직이 200년을 넘기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이것은 또 웬 날벼락인가? 새로운 왕조를 세세손손 이어가려는데 200년을 버티지 못한다니 이런 망발이 있단 말인가? 왕사가 아니라면 괘씸죄로 다스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학대사의 혜안은 기막힌 예지력이다. 이로부터 딱 200년 후 1592년 조일전쟁(임진왜란)이 터져 조국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걸렸다.

"백악은 백골(白骨)을 의미합니다. 황토현(黃土峴-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서 백악산을 바라보면 산 모양이 비틀어져 있어 왕위 계승이 장자를 비켜갈까 염려스럽고 흰 바위가(白岩) 튀어나와 골육상쟁(骨肉相爭)이 있을까 두렵사옵니다."

무학대사의 귀신같은 통찰력이다. 백악산 아래 경복궁을 짓고 새 왕국을 건설한 조선왕조가 1910년 패망할 때까지 26명의 임금이 등극하였지만 장자계승은 단 일곱 명뿐. 전체의 26%에 불과하다. 그만큼 뭔가가 뒤틀렸다는 것을 방증한다.

비틀어진 백악,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광화문 사거리에서 바라본 백악산. 뒤에 보이는 것이 삼각산이다.
ⓒ 이정근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인왕산과 삼각산을 수차례 올랐고 목멱산에 올라 백악산을 정면으로 관찰했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백악산을 보았을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비극을 잉태한 핏빛 직감이었다. 흙냄새 맡으며 토굴에서 면벽수행한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백악을 주산으로 하였을 때 권좌를 놓고 형제와 숙질이 피를 흘릴 것만 같았다. 예방인왕이라고 확신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백악은 아니라고 말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뿐만 아니다. 왕십리와 답십리 그리고 장한평과 마들평을 답사하여 도읍지 백성들의 식량문제도 점검했었다.

이성계는 머리가 무거워졌다. 정도전은 군신간의 파멸을 거론하고 무학대사는 환란과 골육상쟁을 들고 나오니 모두가 경중을 가리기 어려운 난제였다. 그렇지만 천도 문제는 지체할 수 없었다.

"백악을 주산으로 하고 타락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 삼아 궁궐을 남향으로 앉혔을 때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현재의 자하문고개)에 바람이 거셀 것 같은데 서운관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성계도 반(半)풍수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는 반 풍수쟁이다. 수많은 장졸들의 생명을 지키며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공격과 방어로 전투에 승리하려면 풍수지리에 통달해야 한다. 수양제의 30만 대군을 무찌른 고구려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薩水大捷)이 대표적인 예다.

"협곡에 칼바람이 불어올 것 같습니다."

   바람은 중국 바람이다. 통일전쟁을 벌이고 있는 대륙이 안정되면 거센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것은 예고된 수순이다. 하지만 서운관원은 칼바람의 무게를 계량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개경에 눌러있고 싶어 하는 기득권 세력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삼각산은 백두산에 맞닿아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던 국토의 등허리가 추가령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단숨에 내달리다 황해바다를 관망하는 곳이 삼각산이다. 삼각산이 품고 있는 곳이 백악산이다. 삼각산을 그윽이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은 정도전이 말문을 열었다.

고구려는 요동벌판에서 말 달리며 대륙을 호령했습니다

"대사께서 왜국을 견제하자고 하시었는데 왜놈들이란 우리가 약해졌을 때 날뛰고 우리가 강해졌을 때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는 경박스럽고 야만스러운 종족입니다. 왜국은 우리의 적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북녘 땅입니다. 광활한 북녘 땅은 우리의 영토입니다. 고구려는 요동벌판에서 말 달리며 대륙을 호령했습니다."

   잔서(殘暑)가 기승을 부리는 8월의 오후, 따가운 폭염 아래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삼각산을 타고 내려오던 바람이 백악산 위에서 한 바탕 회오리 치더니만 가슴을 파고든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이다. 상쾌하다. 꽉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정도전의 입에서 요동과 고구려가 튀어나오자 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일본을 견제하자는 무학대사의 주장이 갑자기 작아 보이기 시작했다. 논리정연하게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 정도전의 얼굴도 홍조를 띠었지만 잠자코 듣고 있던 이성계와 무학대사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백악산을 바라보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정도전이 말을 이어갔다.

무학대사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정도전

"우리는 대륙민족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땅 대륙에서 기개를 펼치면 섬나라 왜놈은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게 됩니다. 백악과 인왕산 사이에 틈새가 있듯이 대륙의 패권을 놓고 원나라와 명나라가 쟁투를 벌이는 이때가 우리에겐 호기입니다. 대륙에 틈새가 있는 지금 이 때가 우리에게 기회입니다. 명나라는 천하의 한족(漢族)이라 자처하지만 중원을 변방민족에게 내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영토를 우리가 되찾아야 합니다."

   정도전의 말은 힘이 있었다. 신념에 꽉 차있었다. 인왕산에 호랑이던가? 호랑이가 정도전이던가? 인왕산 호랑이가 표효하듯이 정도전의 말은 울림이 있었다. 군주로 등극한 이성계에게 뭔가를 용솟음치게 했다. 정도전과 대립각을 세우던 무학대사 가슴마저 뛰게 하였다.

정도전은 불과 5개월 전. 명나라를 방문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왔다. 금릉은 평온했지만 변방은 어수선했다. 특히 요동지방은 질서가 문란하고 전쟁 냄새가 물씬 풍겼다. 군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수레가 길을 메웠고 동원된 군사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백성들은 20년 이상 지속된 전쟁에 지쳐 무기력했고 주원장은 전쟁피로에 젖어 있었다.

"의문은 송도에 돌아가 소격전에서 풀겠다. 종묘가 들어설 자리로 안내하라."

   이성계의 결심은 순간이었다. 계룡산에서 출발한 여정이 무악을 돌아 인왕을 거쳐 백악에 이른 과정은 험난했지만 결정은 단칼이었다. 소격전은 구실이었다. 소격전은 국가적인 재난이나 경사를 당하였을 때 효과적으로 재초를 집행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으나 미신스럽다는 성리학자들의 비판에 이성계도 공감하고 있었다.

서운관원은 어리둥절했다. 궁궐이 들어앉을 주산이 결정되지 않은 현 시점에서 어느 위치가 종묘 자리란 말인가? 정전(正殿) 왼쪽에 종묘가 들어서고 오른쪽에 사직이 들어서는 것은 서운관원의 기본 상식이었지만 주산(主山)이 결정되지 않았으니 어디를 말한단 말인가?

도참을 물리치고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다

   조아리고 있던 머리를 살짝 들어 이성계를 바라보니 맞은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종묘자리다. 정도전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인왕산과 백악산을 놓고 대결을 벌렸던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승부는 정도전의 판정승이었다. 이로서 무악산을 들고 나와 왕의 측근으로 부상하려던 하륜은 주저앉았고 무학대사는 국정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인왕산에서 내려와 종묘자리를 살피던 이성계는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무학대사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인왕산이 물 건너갔음을 의식한 것이다. 이성계는 가벼운 마음으로 남경을 떠났다. 수수팥떡을 꽂이에 꿰어놓은 듯 하다하여 돌곶이라는 이름을 얻은 돌곶이 마을을 지나 마들평에서 하룻밤 유숙했다.

"마들평에 말을 먹이면 만마(萬馬)를 먹일 수 있겠구나."

다음날 아침 인수봉도봉산을 바라보던 이성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馬)은 기동력의 상징이다. 원나라가 세계의 정복자로 나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말이다. 금릉에 근거지를 마련한 명나라가 원나라를 북쪽 변방으로 몰아넣는데도 말이 공헌했다. 말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당시 최대의 군수물자였다. 이러한 말 때문에 이성계가 명나라로부터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노원을 출발한 태조 이성계는 양주 회암사에 들러 승려들에게 푸짐한 식사를 공양했다. 노구를 이끌고 천도 후보지에 대한 자문에 응해준 무학대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것은 왕사가 천거해준 후보지를 채택하지 못한 미안함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회암사를 떠난 임금일행이 풍천(楓川)에서 유숙하는데 좌시중 조준이 과로로 쓰러졌다. 이성계는 전장에서 단련된 체력이었지만 신하들에겐 무리한 강행군이었다. 임금이 타는 견여(肩輿)를 내주어 조준을 먼저 개경으로 보내고 뒤따라 개경에 돌아왔다. 돌아온 임금에게 도평의사사에서 상신의 글이 올라왔다. 오늘날의 현장답사 보고서다.

"옛날부터 임금이 천명을 받고 일어나면 도읍을 정하여 백성을 안주시켰습니다. 요나라는 평양(平陽)에 도읍하고, 하나라는 안읍(安邑)에 도읍하였으며, 상나라는 박(亳)에, 주나라는 풍호(豊鎬)에, 한나라는 함양(咸陽)에, 당나라는 장안(長安)에 도읍하였습니다. 도읍지는 처음 일어난 땅에 정하기도 하고 지세(地勢)의 편리한 곳을 골랐습니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전조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온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나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의젓하게 한 나라를 두시고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태조실록>


도당을 접수한 정도전, 자신의 정책을 반영시키다


▲ 경복궁 경회루


   도당(都評議使司)의 뜻이었지만 정도전의 뜻이었다. 도당은 고려조에 연민의 정을 갖고 있는 수구세력과 혁명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한양천도 문제를 기화로 정도전이 평정한 셈이다. 재상정치를 꿈꾸는 정도전이 도당을 접수한 것이다.

한양천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와 좌복야(左僕射) 김주, 전 정당문학 이염, 중추원학사 이직 판사(判事)로 임명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인왕산에서 돌아 온지 보름만이다.

   이성계가 천도문제를 서두른 것은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개경인들의 시선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지만 핵심은 차기였다. 새로운 왕조가 태어나면 새로운 도읍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고려를 뒤엎어 서슬이 퍼런 자신도 신하들의 저항에 부딪혀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데 권위가 떨어진 세자 방석이 천도문제를 추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성질이 급한 이성계는 판문하부사 권중화, 판삼사사 정도전, 청성백 심덕부, 참찬문하부사 김주, 좌복야 남은, 중추원 학사 이직 등에게 한양을 답사하여 종묘사직과 궁궐, 시장, 도로의 터를 살펴 보고하라고 명했다.

   권중화가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여 도면과 함께 바쳤다. ‘전조 숙왕(肅王) 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현 청와대자리)가 너무 좁아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壬座丙向)을 궁궐터로 정하였습니다. 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여 임좌병향에 종묘의 터를 정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경복궁과 종묘 밑그림이다.

고려의 패망원인을 불교에서 찾은 정도전은 성리학적 입장에서 철저하게 척불숭유(斥佛崇儒)정책을 신도에 관철시켰다. 종묘사직(宗廟社稷)과 궁궐을 지은 다음에 손수 정전 이름을 지어 헌액하였다.

성곽을 쌓고 4대문을 건립하면서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4대문 이름(興仁門, 敦義門, 崇禮門, 弘智門)에 원용하였고 보신각(普信閣)을 세웠으나 선바위는 성(城)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정도전의 배불정책은 철저하여 승려들의 도성 출입마저 금지시켰다.






2007/08/10 13:25 약수

사저에 칩거하며 울분을 삭이는 이방원

   도당을 접수한 정도전은 훨훨 날아가는데 혁명의 일등공신 이방원은 울분을 삭이며 추동에 칩거하고 있었다. 하이 전해준 '대학연의'를 읽어도 깨우침은 있었지만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지 않았다.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는 장인 민제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이지란과 작은 아버지 이화가 가끔 들러 위로의 말을 남겼다. 문전성시를 이루던 사랑방은 썰렁했다. 훗날 서로의 가슴에 칼을 겨누게 된 넷째 형 이방간박포를 데리고 찾아와 아버지와 정도전을 성토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위로는 위로이고 성토는 성토일 뿐 대책이 없었다. 선죽교의 거사를 주도했던 조영무는 끊임없이 추동을 맴돌았다.

  해바라기는 해를 쫓는다던가? 추동 이방원의 사랑채 문지방을 번질나게 드나들던 발길들이 정도전의 사랑채로 향했다. 권력은 잡는 순간부터 부패한다던가? 권력을 쫓는 발길이 세자 으로 쏠렸다. 쏠리면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세자 방석이 문제를 일으켰다.

"나의 거처가 낮고 좁으니 어찌 더위를 견딜 수 있느냐?"

   방석의 말이었지만 현비 강씨의 뜻이었다. 도당에서 임금의 제가 없이 '세자전의 양청을 지으라' 는 명이 선공감에 내려왔다. 양청은 여름별장이다. 공사가 한 참 진행 중일 무렵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성계는 대노했다. 민심이 흉흉하고 임금인 자신도 양청이 없는데 세자가 무슨 양청이냐는 것이다. 즉시 공사가 중단되었고 선공감은 징계를 받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내사(내시)들이 세자를 감싸고 문제를 일으켰다. 말썽을 부린 세자빈 현빈 유씨를 내치고 내사 이만을 처형했다. 또한 탁발승들이 이성계의 수결이 있는 발원문을 들고 다니며 사대부들과 백성들을 현혹하여 거금을 갈취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반혁명세력 척결차원에서 왕씨를 탄압하여 씨(氏)를 말렸다. 저항하는 고려 유신들에게 강온양면작전을 구사했다. 조정의 문을 열어놓고 회유하여 조선에 참여한 선비도 있었으나 완강히 저항하며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선비도 많았다. 두문동 사건이다.

조선을 한반도에 묶어라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양천도 문제를 일단락 지은 이성계는 편할 날이 없었다. 명나라 문제가 가슴을 옥죄어 왔다. 흠치내사(황제의 명을 받든 조선인) 황영기가 조선의 국왕을 협박하는 조서를 가지고 온 이래 대명관계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입으로는 신하라 일컬으며 들어와 조공한다 하면서도 매양 말을 가져올 때마다 말 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길들여 보게 하니 말은 모두 느리고 또한 모두 타서 피로한 것들이니 업신여기는 것이다. 또한 국호를 고치는 일을 그대가 원하는 대로 조선으로 허용하였는바 사자(使者)가 이미 돌아간 후에는 오래도록 소식이 없으니 업신여기는 것이다.”  -<태조실록>

   명나라의 트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부랴부랴 중추원학사 남재를 금릉에 파견하여 해명했으나 명나라는 강경했다. 1년 3사마저 거절하고 부르면 들어오라는 것이다.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은 새해가 되면 황제에게 하례를 올리는 하정사(賀正使). 황제의 생일을 경하하는 성절사(聖節使), 황태자의 생신을 축하하는 천추사(千秋使)가 관례였다.

급기야 성절사 김입겸이 요동에서 입국을 거절 당하는가 하면, 먼저 떠난 사은사 이염이 황제에게 매질 당하여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는 사태까지 발전하였다. 명나라는 조선 길들이기에 나섰고 조선은 전전긍긍했다. 역마를 내주지 않아 매 맞은 몸으로 요동에서부터 걸어온 이염의 모습은 약소국 외교사절의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몸을 낮췄다. 황태자를 잃고 손자를 황태손으로 책봉한 주원장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다. 중추원 학사 이직을 파견하여 예전대로 조공을 드리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는 표문을 올렸으나 거절당했다. 행패에 가까운 명나라의 태도는 저급한 트집인 것 같았지만 핵심은 정도전'요동정벌론'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정치적인 변혁을 겪고 있었다. 원나라를 북쪽 변방으로 몰아붙였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20년 이상 지속된 통일전쟁은 백성들로 하여금 전쟁피로에 젖게 했다. 황태자가 사망하고 황태손이 책봉되었지만 금릉이 요동쳤다. 연경(북경)에 야심만만한 주원장의 아들 연왕(훗날 영락제)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강하게 저항하는 원나라 잔존세력을 맞아 북방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데 조선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명나라는 허리를 찔리는 형국이었다. 원나라와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명나라는 원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요동을 일시적으로 내주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조선군은 격퇴할 수 있다고 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북방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명나라는 2개의 전선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한쪽 전선의 전황이 다른 쪽 전선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준비된 조선군이 요동을 점령했을 때 원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북방전선이 균열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전략가들이 피하고 싶은 그림이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 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이러한 국제정세 하에서 조선의 ‘요동정벌론’은 좋은 빌미가 되었다. 명나라는 차제에 조선을 한반도에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강력한 외교 공세로 부전이굴을 택한 것이다. 부전이굴(不戰而屈)손자(孫子)가 그의 병서 모공편(謀攻篇)에서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 시키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설파한 병법이다.

명나라 병부는 조선군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고려 말 최영군과 이성계군으로 양분되기 시작한 군(軍)은 조선개국과 함께 사병으로 분화되면서 조직적인 전투력은 떨어진 것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의 기동력은 무섭게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군의 기병(騎兵)은 두려운 존재였다.

   중국의 외교 공세는 명료했다. 말(馬) 1만 마리를 바칠 것. 명나라 해안에서 해적질을 한 자들을 잡아 압송할 것. 임무를 수행하러 들어오는 자는 조선의 실력자나 왕의 아들일 것. 등이었다. 해적은 덤으로 붙어온 것이고 핵심은 말과 실력자였다.

말은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전략물자다. 현대 전투력으로 말하면 전차나 장갑차 이상의 기동력의 상징이다. 숫자도 만만치 않다. 말 1만 마리를 현대전으로 해석하면 일시에 1만대의 장갑차를 빼내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나라의 요구는 조공도 아니고 상거래도 아닌 묘한 명분을 붙여 조선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다.
실력자는 '요동정벌론'의 진원지 정도전을 지칭하고 있다. 초강대국 미국이 어떤 나라를 들어 악의 축이라고 선언하듯이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미 정도전을 화(禍)의 근원이라고 규정해놓은 바 있다. 사신으로 아들을 요구한 것도 조선국왕 이성계를 심정적으로 묶어두려는 전략이다.

   명나라 중압감에 시달리던 태조 이성계는 결국 몸이 병나 눕고 말았다. 깜짝 놀란 왕실은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왕이 피접할 곳을 물색하여 보고하라 명했다. 불일사가 천거되었다. 이성계는 마땅하지 않다고 물리쳤다. 다급한 도당은 선운관 관원에게 어디가 길지(吉地)인지 알아서 보고하라 명했다.

현비 강씨는 자신이 5층 석탑을 시주한 연복사에서 휴양할 것을 권했다. 현비가 석탑을 시주할 때 회암사에 있는 무학대사가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법회를 열어 주었던 곳이다. 현비 강씨는 연복사에 쏟아 부은 자신의 치성 덕분에 아들 방석이 여러 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한없이 작아지는 조선국왕 이성계

   이성계는 경천사를 택했다. 경천사는 처음이 아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찾는 곳이다. 개경시내에 있는 연복사보다도 깊은 산속에 있는 경천사가 마음에 끌렸다. 부소산 자락에 자리 잡은 경천사를 찾으면 심란하던 마음이 평온을 되찾았다. 적송에 둘러싸인 경천사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 들으면 시름을 잊었다.

경천사 경내를 산책하던 이성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결단을 미루어 둘 사안도 아니었다. 대웅전 앞뜰에 있는 10층 석탑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옛 조상들은 이렇게 우람한 돌덩이도 갈고 다듬어서 훌륭한 석탑을 만들었는데 나는 명나라를 갈고 다듬을 수 없을까?"

답은 없었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명나라는 넘을 수 없는 태산이었다. 요동을 정벌하고 여진족을 쳐부수며 지리산에 침투한 왜구를 소탕하던 장수는 한낱 반도의 무장이었을 뿐, 현재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조선을 다스리는 권지국사(權知國事)일 뿐이었다.


▲ 경천사 10층 석탑. 개성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 일본 궁내대신 다나까 미쓰아끼(田中光顯)가 해체하여 일본으로 반출한 후 반환되었다. 경복궁에 방치하다 보존 처리하여 현재 중앙박물관에 있다.

   이성계는 고민에 쌓였다. 맏아들 이방우는 이미 사망하였고 정도전은 내줄 수 없었다. 요동정벌을 주장한 정도전은 명나라 조정에서 동이화원(東夷禍源)으로 점찍어놓고 있어 금릉에 들어가면 처형되거나 구금될 수 있었다. 또 하나 이성계가 정도전 파견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정도전 없는 혁명과업 수행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있는 금릉을 방문하여 실타래처럼 꼬인 명나라와의 관계를 풀어낼 수 있는 적임자로 방원이 딱 인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방원의 신분은 명나라가 요구한 조선국왕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명나라를 방문하여 사신임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성계는 혁명 일등공신을 홀대하고 있는 현실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형들을 제쳐두고 막내 방석을 세자로 삼은 자신의 과오를 표현은 안하지만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경천사에서 휴식을 끝내고 돌아온 이성계가 방원을 불렀다.

"명나라 황제가 만일 묻는 일이 있다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

명나라를 다녀와 달라는 얘기다. 이성계와 이방원은 사(私)적으로 부자지간이고 공(公)적으로 군신관계지만 이것은 군신관계에서 왕이 신하에게 명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지간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조심스러운 의사타진인 것 같지만 임금이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곧 명(命)이 될 수도 있다.

정에 약한 이방원/아버지의 눈물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이방원이 부자지간의 정으로 화답했다. 군왕의 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핏줄, 즉 종묘를 위해서 나서겠다는 뜻이다. 명나라를 방문하는 자신의 임무가 막중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돌아오지 못하는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추동에 칩거하고 있었지만 명나라와 조선과의 긴장관계를 모르는 이방원이 아니었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이성계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왕이 아니라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그것은 진실로 뜨거운 눈물이었다. 애비로서 다하지 못한 죄책감과 자식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무기력한 회한에서 흘러내리는 가슴 뜨거운 눈물이었다.

나직이 말하는 이성계의 목소리에는 끈끈한 핏줄의 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 정속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혁명에 뛰어들게 한 아들. 그 아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고 홀대하고 있는 아버지의 착잡한 심정이 녹아있었다.

   이러한 순간도 잠시, 조정 신하들이 모두 정안군이 위험하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는 명나라 사신 길에 왕자가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는 신하는 없었다.

"정안군이 만 리의 먼 길을 떠나는데 어찌 우리들이 여기에서 베개를 베고 눕겠습니까?"

남재(南在)가 나섰다. 이방원을 수행하여 스스로 따라가기를 청하였다. 명나라와 갈등을 빚고 있는 시점에서 사신은 물론 수행원도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방원을 위하여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남재는 훗날 태종 조에서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남재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을 세웠으나 포상을 피하여 산으로 은거했다 끌려오듯이 내려와 1등 공신에 책록된 강직한 선비다. 한마디로 벼슬이 싫어 도망갔다 잡혀와 타의에 의해 관직에 있는 사람이다. 산술(算術)에 능하여 남산(南算)이라 불리만큼 계산이 빨랐던 인물이다.

승리감을 안겨주고 실리를 취하라

   명나라 사신단이 결정되었다. 정안공 이방원과 지중추원사 조반, 그리고 수행을 자청한 남재였다. 사신단에 이방원이 포함된 것은 이성계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부전이굴(不戰而屈) 전법으로 공세의 고삐를 죄고 있는 명나라에 무전이승(無戰而勝)으로 응수한 것이다.

굴종을 요구하는 명나라에 왕자를 보내어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는 승리감을 안겨주고 실리를 얻자는 것이다. 싸움 없이 승점을 따자는 것이다. 이러한 지략은 이성계의 발상이 아니라 이성계를 움직이는 책사의 전략일런지 모른다.

이성계가 노리는 실리는 권지국사(權知國事) 꼬리표를 떼는 것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이성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변방을 다스리는 권지국사(權知國事) 취급이었다. 이것이 이성계의 치욕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훗날, 이성계는 조선반도를 담을 그릇이었지만 이방원은 대륙을 담을 그릇이었다고 회자되었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무렵, 이방원에게 이성계와 같은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병권이 쥐어졌다면 말머리를 남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북으로 향하여 요동을 정벌할 배포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다.

명나라로 떠나는 날. 추동 이방원의 저택에 배웅하는 사람들이 운집했다. 밝은 모습만은 아니었다. 장인 민제는 근심어린 눈으로 방원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박감이 추동을 감싸고 있었다. 이방원을 따르던 조영규와 조영무는 눈물을 흘렸다.

"다녀 오리다."
"건강하게 잘 다녀 오세요."

부인 민씨가 눈물을 글썽였다. 방원이 어떠한 길을 떠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생에 마지막 작별일 수도 있었다. 그의 뱃속에는 태아가 자라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회임한 아기였다. 열일곱 새색시가 열다섯 신랑을 맞아 12년 만에 임신한 아기였다. 이렇게 귀한 아기가 유복자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잘 있거라 송악산아 다시 보마 숭산아

  개경송악을 주산으로 하고 용수산을 안산으로 한 아담한 도읍지다. 좌청룡 부흥산과 우백호 오공산을 감싸 안고 용수산을 바라보며 오천(烏川)백천(白川)을 얻었으니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장풍득수(藏風得水)형 천하의 명당이다. 장풍득수란 바람을 잘 갈무리하여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까마귀(烏川)가 알을 낳으면 검정색일까? 하얀색일까?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경하해야 할 일일까? 조종을 울려야 할까? 고려를 뒤엎은 새 왕조가 웅비를 준비하고 있으니 명당일까? 흉당일까? 아무튼 또 하나의 왕조를 낳았으니 생산성은 높다.

   개경의 동대문은 숭인문이다. 한양과 삼남지방으로 연결되어 일본으로 통하는 문이다. 개경의 서대문은 선의문이다. 평양과 의주를 거쳐 대륙으로 통하는 문이다. 회임한 아내와 작별하고 대궐에서 임금에게 예를 갖춘 사신 일행은 선의문에 잠시 멈추어 섰다. 대궐에서 배웅나온 환송객을 돌려보내야 할 지점이다.

개경은 북으로 송악과 남으로 용수산을 축으로 궁성(宮城)과 황성(皇城) 그리고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겹겹이 싸인 요새다. 선의문은 외성의 성문이다. 선의문을 지나면 개경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궁성이 눈에 들어왔다. 임금이 있는 곳이다. 궁성을 바라보며 목례를 올린 방원은 고개를 들었다.


▲ 개성 송악산. 북한 화가 서순천의 작품이다.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의문이다.

   송악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령한 산이라 하여 개경인들이 숭상하는 송악산은 방원에게 고향과도 같은 산이다. 개경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자라서 혼인하고 청운의 꿈을 펼치던 곳이다. 그러한 송악산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꼭 다시 볼 수 있다'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또 하나 이방원을 짓누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으니 암살음모였다. 고려 패망에 분노한 고려의 유민들이 사신단 여정의 길목에서 방원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첩보였다. 방원은 추동에 칩거하면서도 사설 정보팀은 가동하고 있었다. 사설 정보팀에 접수된 첩보에 의하면 정몽주를 격살한 방원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돌아오면 아기가 태어나 있겠지? 사내 녀석일까? 계집아이일까?"

   개경에서 금릉까지 8천리 길. 왕복 1만6천리 길. 다녀오는데 장장 6개월이 걸리는 머나먼 길이다. 항공기나 자동차와 같은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등 관리들은 견마잡이가 이끄는 말을 타고 가지만 마부는 걸었다. 걷는 속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다.

벽란도에서 나룻배를 타고 예성강을 건넌 사신일행은 평양을 거쳐 의주관에서 묵었다. 의주목사의 대접이 융숭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신단 일행에 왕의 아들이 포함되어있으니 지방 관리가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의주목사의 환송을 받으며 압록강을 건넜다.

   6년 전. 이색(李穡)을 수행하여 서장관으로 난생처음 국경을 넘을 때와 같은 설렘은 없었다.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 푸른 물을 보며 "압록(鴨綠)빛 저 강물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겠지?"라는 조바심은 가시지 않았다. 압록강은 물빛이 오리의 머리 색깔을 닮았다 하여 압록(鴨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명나라 방문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긍지도 있었다. 그때는 고려가 독립국임을 포기하고 감국(監國-신탁통치)을 요청하러 가는 고려의 사신이었고 오늘날에는 신생국 조선의 사신단을 이끌고 가는 정사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하는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도 잠시, 자신의 임무가 조공국임을 확인하여 달라는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한다는 사실을 상기했을 때 조국이 왜소해 보였고 자신이 처량해 보였다. 그것은 약소국 외교사절의 비통한 감정이었다. 머리를 조아리지만 비굴하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권력은 칼 끝에서 나온다

   요동에서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요동도사가 성문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던 요동 성주였다. 조선국 사신을 황제가 매질하여 보내던 명나라였다. 이러한 명나라의 태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였다.

명나라 예부에서는 조선 사신단의 명단을 받아보고 자신들이 의도한바 대로 조선이 굴종했다고 받아들였다. 조선 국왕의 아들 이방원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신의 임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임무 그 자체는 요식행위일 수 있었다. 누가 오느냐가 관건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이성계 이후의 조선을 면밀히 분석해놓고 있었다. 조선이 나이 어린 방석을 세자 책봉해놓고 있었지만 즉위까지는 머나먼 길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실력자 정도전이 부상하고 있지만 세자 방석이 무너지면 와해될 수밖에 없는 취약한 기반이라는 진단을 내려놓고 있었다.

   정도전병권을 쥐고 있었지만 군권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군권 없는 병권은 한낱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마오"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처음 말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중국인들의 의식세계에서 "권력은 칼끝에서 나온다"는 믿음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중국의 역사가 그렇다.

지금은 수면 아래서 몸을 낮추고 있지만 혁명의 일등공신 이방원의 저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정치란 과거를 오늘에 평가하여 내일을 치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방원이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위하여 입국했으니 이성계 이후의 조선을 손아귀에 넣는 셈이었다.

   요동도사가 마련해준 객사에서 노독을 풀었다. 지난번 사신 길에서 뒷골목 허름한 여관에서 묵었을 때와는 격이 달랐다. 요동도사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금릉을 향하여 떠나려는데 요동도사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연경에 있는 연왕께서 들려 가시라는 분부입니다."

연왕의 초대였지만 명이었다. 연왕이 누구인가. 명나라 황제 주원장 넷째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연경(북경)을 분봉(分封)받아 통치하고 있는 왕이지 않은가. 황태자로 책봉된 큰형이 죽고 조카가 황태손에 책봉되었지만 변혁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잠룡(潛龍)이었다. 훗날 정난(靖難)의 을 일으켜 조카 윤문(允炆-건문제)을 불태워 죽이고 황제에 오른 영락제다.

요동에서 황제가 있는 금릉이 직선코스라면 연경은 우회코스다. 갈 길이 바쁜 사신일행은 단 하루가 아쉬웠지만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연왕(燕王)의 초대를 무시한다는 것은 천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원은 연왕의 부름을 명(命)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명나라의 막강한 실력자 연왕을 알현한다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 생각했다. 찬스 포착의 귀재 이방원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명나라의 실력자 연왕의 눈도장을 받아둔다는 것은 조선을 압박하는 명나라에 우군을 심어두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요동을 떠나 심양을 지날 때 비로소 이 땅이 전쟁을 치르는 나라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백성들은 20년 이상 지속된 전쟁에 지쳐있었다. 전쟁피로가 역력했다. 수시로 발동되는 총동원령에 싫증을 내고 있는 모습이 확연했다. 전쟁은 백성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권력자를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대는 달랐다.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수레와 이동하는 장졸들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원나라와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는 명나라는 전력을 북방전선에 집중하고 있었다.

고려촌에서 생긴 일

   사신 일행은 남행을 계속했다. 산해관(山海關)을 지나고 청룡하를 건너 풍륜성을 통과하니 낯익은 집들이 나타났다. 초가집이었다. 고려보(高麗保)라는 중국속의 고려촌(高麗村)이었다. 고구려 패망 이후 조국에서 끌려온 유민들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집단 촌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고국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고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중국인들과 달리 흰옷에 벼농사 지으며 우리네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촌락의 고려인들이 쌀밥과 김치를 내왔다. 막걸리도 곁들였다. 오랜만에 쌀밥과 된장국을 먹었다. 조국의 향수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같은 민족을 만난다는 것이 너무나 반가웠고 그들로부터 우리의 음식을 대접받는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저녁 무렵, 손님이 찾아왔다. 정사 방원을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다. 고려촌의 학사(學士)라고 했다. 체격이 우람한 젊은이를 대동하고 찾아왔다. 젊은이가 포함되어 있어 수행원들은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고국에서 출발하기 전 암살 음모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네가 선물 꾸러미를 풀었다. 떡이었다.

"이곳에 수수는 찰지지 않아 떡을 해도 맛이 없지요. 그래서 고국에서 종자를 들여와 수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도 우리네 수수떡 맛을 보면 좋아한답니다."

팥으로 모양을 낸 경단이었다. 한입 맛을 보았다. 찰진 맛이 예전 함흥에서 먹어보았던 고향의 맛이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국의 지체 높으신 분을 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이르다 말씀입니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정중한 예의에 방원도 중후한 범절로 답했다. 그렇지만 지체 높으신 분이라 하니 몸 둘 바를 몰랐다. 임금의 아들이라 하지만 아무런 직책을 갖지 못하고 추동 사저에서 칩거하고 있지 않은가. 사신이라 하지만 잘못한 것도 없이 황제에게 용서를 빌러 가는 신세가 아닌가.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우리말과 한문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하, 훈장 선생님이시군요."

고려촌의 아이들에게 한문과 우리말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환갑을 넘긴 듯한 나이에 하얀 턱수염이 풍채를 갖추고 있었다. 훈장 냄새가 물씬 풍겼다.

"선생님이라 할 것 까지는 없고 이 늙은이가 어렸을 때 어르신들에게 우리말을 배웠기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읍지요."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나으리로부터 과찬의 말씀을 들으니 송구스러워 민망할 따름입니다."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인가 할 듯 말듯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방원도 노인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이른 아침 연경을 향하여 출발하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찾아온 손님을 강제로 내보낼 수 없었다.

"황공한 말씀이오나 이렇게 뵙게 되었으니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어서 말씀해보시구려"

답답했다. 성격이 급한 방원이 방방 뛸 일이었다. 이러한 방원의 조급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꾸물대던 노인네가 우물쭈물하더니만 입을 열었다.

"얘, 칠복아 어서 나으리께 절을 올려라."
노인네를 따라왔던 젊은이가 방원 앞에 넙죽 엎드렸다. 절하는 품새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기골이 장대한 무골풍의 젊은이였다. 방원은 뜻밖의 절을 받느라 당황스러웠다.

"실은 사신 일행이 우리 고려촌에서 묵고 연경으로 가는 길목 파리보(巴里堡) 다리위에서 나으리를 도모하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한사람이 이 젊은이지요."

노인네가 조금 전 방원 앞에 절을 올린 젊은이를 가리켰다. 젊은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방원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마터면 파리(巴里)에서 파리 목숨이 될 뻔 하지 않았는가. 동포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니 경계가 느슨해질 지점이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한 젊은이들을 이 늙은이가 말렸습니다. '너희들이 방원이를 죽인다고 선죽교에서 죽은 정몽주가 살아오지 않지 않느냐' 고 설득했지요. 그리고 또 하나 이국땅에서 우리끼리 죽고 죽이는 일은 민족의 추태라고 생각했습니다."

휴우, 방원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국에서 출발하기 전, 암살음모가 있다는 사설정보팀의 보고를 받았을 때 설마 했었다. 운명은 제천이라 생각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명나라 땅을 밟으면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한 음모세력과 이렇게 부딪칠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이렇게 고백의 말씀을 올리고 나니 후련합니다. 잠시라도 흉측한 생각을 했던 무지랭이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다만 그러한 생각을 했던 마음을 용서해 주시라는 말씀이고 우리가 나으리를 용서해드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노인네가 젊은이 손을 잡고 방원 앞에 엎드렸다. 목에 힘을 주고 절을 받아야 할 신분 차이지만 가벼운 맞절로 화답했다. 갈수록 태산이다. 누가 누구를 용서해준단 말인가. 이곳이 중국 땅이 아니고 조선 땅이라면 당장 목을 날릴 망발이었지만 여기는 중국 땅이지 않은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수떡을 담았던 함지박이 나가고 찻잔이 들어왔다. 중국본토의 홍차가 아니라 고국의 녹차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셔보는 녹차였다. 은은한 다향(茶香)에 잠시 취했다. 차를 마시는 동안 격앙되었던 서로의 감정이 평온을 되찾았다. 지게문 밖에서 별빛이 졸고 있다. 밤은 깊어갔다.

정몽주가 살아 있었다면 정도전의 독주를 견제했을 것이다

"포은의 덕망은 계속 이어졌어야 했는데 나으리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조국의 정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내용이었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방원의 정곡을 찔렀다. 답변하기 껄끄러운 질문이었다. 이국땅에서 청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정몽주를 왜 죽였느냐고 힐난하는 물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역린(逆鱗)이다. 군주는 자신의 과오를 자기 스스로에게는 인정하면서도 신하가 추궁하면 용의 비늘이 거꾸로 서는 것이다. 하지만 방원이 군주가 아니었기에 비늘이 거꾸로 서지는 않았다. 질문하는 노인네 역시 방원에게 거꾸로 설 비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엄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방원은 뜨끔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이곳이 치외 법권 이국땅이 아니고 조선이라면 괘씸죄를 걸어 즉시 하옥할 발칙한 망동이었다. 그렇지만 여기는 조선의 법률이 통하지 않는 중국 땅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물러설 방원이 아니었다.

"인간사,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사는 게 인간입니다. 고고하게 사시려고 먼 길 떠나신 게지요."

역시 방원다운 여유로운 답변이었다. 하여가(何如歌)로 회유하자 단심가(丹心歌)로 응수하던 그 때를 생각하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환갑을 넘긴 노인을 상대하면서 27세 청년이 이러한 답변을 한다는 것이 방원 자신도 놀라웠다.

"하하하, 역시 나으리다운 답변이십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씀을 드려 심기에 불편을 드렸다면 용서하십시오. 포의 인물이 너무나 아까워서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방원도 공감하고 있었다. 정몽주를 격살할 당시엔 젊은 혈기가 앞섰지만 한 박자 늦췄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지금쯤 정몽주가 살아있었다면 정도전이 저렇게 독주하도록 방관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제(齊)나라를 세워 당나라와 겨룬 이정기

   지게문 사이로 달빛이 흐른다. 밤하늘에 별들도 졸고 있는 야심한 밤. 오랜만에 고국의 손님을 맞이한 학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노인네를 맞아 곤혹을 치렀지만 방원도 싫지만은 않았다. 송곳처럼 날카로웠지만 대화가 통하는 노인이었다.

"당서를 읽어보셨는지요?"

당서(唐書)는 당나라 건국에서 패망까지 290년을 기록한 역사책이다. 방원도 읽어본 기억이 있는 책이었다. 선비는 당서는 물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기본적으로 읽는 역사책이다. 당서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가 있다. 구당서는 중국의 정사(正史)라는 것에 이의가 없었지만 신당서(新唐書)는 송(宋)대에 고쳐 지었기 때문에 조선 선비들은 신당서의 신뢰도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은 책이었다.

"읽어 봤습니다만…."
학사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묻는지 알 수 없어 말끝을 흐렸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정기(李正己)제(齊)나라를 세워 당나라와 당당히 겨뤘다고 '구당서. '이정기 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힘이 달려 4대 55년 만에 망하고 말았지만 중국 땅에서 독립국을 유지했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를 고국에서 몰라주니 안타깝습니다."

중국 땅에 독립국을 세운 이정기를 아시나요?

   놀라운 발견이었다. 칠웅(七雄)이 할거하던 춘추 전국시대의 제(濟)나라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람 이정기가 당나라와 당당히 겨뤄 중국 땅에 제(齊)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유학을 공부했고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선비라고 자부하던 자신이 이정기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이정기가 산둥성과 허난성에 세운 제나라는 신라보다 더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국호와 연호를 스스로 정해 독립국임을 천명했으니까요. 신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었지만 제나라는 통일신라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하며 당나라와 당당히 겨뤘습니다."

노인네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다. 학사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 그 때 신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명나라가 철령 이북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정기 장군이 고구려 장졸출신과 유민들로 구성된 정예군 2만 명을 이끌고 산동성에 상륙했을 때 이곳 고구려 유민들은 열광했습니다. 북방 지린성에 근거지를 마련한 대조영보다도 당나라의 수도를 공략하려는 장군에게 고구려의 영광이 재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가 컸지요.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이 풀릴 것이라는 희망이 넘쳐났습니다. 금가락지 은비녀 다 팔아서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지요."

"유민들의 성원을 한 몸에 받은 이정기 장군은 이곳 유민들을 규합하여 대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저희 윗대 할아버지도 자발적으로 군사가 되었지요. 그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이정기 장군의 휘하에 들어갔지요."

"장안으로 가는 길목 조주와 서주 등 15개주를 평정했습니다. 하북과 안휘성도 물론이구요. 15개주라면 조선반도 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큰 땅덩어리이지요. 고구려를 패망시킨 당나라를 궤멸시키기 위하여 당나라 목줄인 대운하 영제거를 손아귀에 넣고 낙양과 장안을 공략하다 49세의 나이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고구려의 영웅이지요."

중원을 호령하다 49세에 죽은 고구려의 영웅

   고구려의 영웅이라는 노인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목울대에서 더운 김이 솟구쳐 올라왔다. 형언할 수없는 감동의 파도가 밀려왔다. 중원을 호령하던 이정기 장군의 환상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말발굽 소리와 피워 오르는 흙먼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틈사이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호롱불이 살랑거린다. 꺼질 듯이 꺼질듯이 흔들리지만 꺼지지 않았다. 꺼져버리고 사라져 버린 줄만 알았던 고구려의 혼이 여기 이곳에 살아있다니 경이로웠다. 잊혀진 제국 고구려가 이곳에서 숨을 쉬고 있다니 놀라웠다. 밤공기를 가르는 바람이 시원하다.

"고선지는 당나라 휘하의 장수가 되었지만 제나라를 세운 이정기는 독립국을 경영했습니다. 나으리와 내가 앉아 있는 이 땅에 나라를 세워 당나라와 당당히 겨뤘던 이정기를 모른다면 후손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랬다. 통일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선비들은 사대국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당서에 기록된 고구려 유민들을 애써 외면했다. 당서만이 아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책부원구(冊府元龜) 그리고 문헌통고(文獻通考)에도 기록되어있다.

야사(野史)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하드라도 중국의 정사(正史) 당서에 기록된 이정기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거론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거론 자체를 스스로 금기시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도 마찬가지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도 그랬고 5백년 조선시대 선비들도 그랬다. 공자 맹자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학문을 창조한 훌륭한 학자들은 많았지만 중국 역사 속에 기록된 고구려인을 끄집어 내지 않았다. 그것은 사대하는 나라의 선비로서 사대국에 도전하는 행위이며 황제에게 불경 한다는 정서였다. 이것이 바로 사대주의의 한계다.

고구려의 혼을 모르면 부끄러운 후손

조선시대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많았지만 이정기를 담론화 한 학자는 없었다. 몰랐는지 알고도 모른척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 이정기를 최초로 거론한 인물이 육 최남선이다. 그것도 '이정기는 북 지나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고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조선이 패망한 이후다.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잠식하는 오늘날에도 고구려와 고려를 계승했다는 집단도 함구무언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 정사 속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을 되살려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후손들이다.

"당나라가 제나라를 멸망시킬 때 천여 명을 학살했다고 당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씨를 말린 것이지요. 똘똘 뭉치는 고구려 유민들의 결집력을 두렵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남아서 이렇게 뭉쳐 살고 있습니다. 조국이 중국 속의 고구려 유민을 외면해도 우리는 고구려의 혼(魂)을 간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학사의 잔잔한 외침이 밤공기를 갈랐다. 허공에 메아리쳤지만 울림이 있었다. 학사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절규가 흐르고 있었다. 방원은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고 학사의 말이 방원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충격이었다. 학사가 돌아간 이후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6백 년 전. 죽음과 함께 역사에 묻힌 인물 이정기가 환생하여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반도(半島)에 갇혀 아귀다툼 하지 말고 대륙을 보아라' 고 꾸짖는 것만 같았다.




오마이뉴스

새로운 도읍지를 반대하는 수구세력

입력 2007.03.10. 15:13 수정 2007.03.10. 15:13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수도 이전과 같은 대 역사(役事)는 수백 년을 내다보는 국가적인 장래를 생각해야 하는데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집과 대문 앞에 문전옥답만을 생각했다.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후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서운관원(書雲觀員) 유한우이양달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신이 배운 바로 보아서는 무악은 도읍으로 정할 곳이 아닙니다."

"나라의 큰 일이 이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좋지 않다' '좋다' 하니 지난번에 현지를 답사한 재상과 서운관 관원이 그 옳고 그른 것을 논의해서 보고하라."

임금이 한발 물러섰다. 하륜이 추천한 무악이 물 건너 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권중화와 우시중 김사형이 무악은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했다. 개경을 탈출하고 싶은 태조 이성계는 고민에 빠졌다. 계룡산 천도공사가 중지된 상태에서 후보지가 결정되지 않고 표류하고 있으니 난감했다. 마음이 바빠졌다.

"다시 좋은 곳을 물색하여 보고하라."

서운관 관원들에 의하여 불일사(佛日寺) 터가 등장하고 선고개(鐥岾)가 도당에 추천되었다. 선고개를 답사한 남은이 화를 벌컥 냈다.

"너희들이 지리의 술법을 안다는 자들인가?"

서운관 관원 이양달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계룡산 토목공사가 중지된 것도 6개월이 지났다. 태조 이성계는 신하들의 갑론을박이 짜증스러웠다.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하륜이 지목한 무악에 미련이 많았다. 한고조가 진나라의 흥덕궁을 고쳐 지은 장락궁을 그대로 본떠 평양에 지은 장락궁보다 더 큰 궁전이 들어설 자리라 하니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왕은 몸소 무악산을 답사하겠다고 나섰다.


무악산 현지 답사에 나선 태조 이성계


   임진강을 건넌 임금 일행이 무악에 도착했다. 때는 폭염이 내리쬐는 8월이었다. 임금이 당일에 환궁하지 못하는 원행은 신하들에게 어려운 수행이었다. 훗날 조선 왕조가 정착된 이후에는 행궁을 지어 왕이 유숙할 수 있었지만 건국초기에는 제도가 정비되지 않아 왕도 노숙했다. 허허벌판 야전에서 단련된 태조 이성계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대청 사랑방에서 목에 힘을 주고 살아왔던 사대부들은 곤혹스러웠다.

파주 고양과 연결된 구릉에서 바라보니 한강이 시야에 들어왔다. 삼남에서 거두어들인 세곡과 당화(唐貨)를 가득 실은 무역선이 드나들기에 아주 좋아보였다. 당화란 당나라시대 이후 중국의 고급상품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수출입 상품을 의미한다. 태조 이성계는 흡족한 웃음을 만면에 지었다. 이렇게 좋은 자리를 발굴한 하륜이 한결 미더웠다.


   개경도 명나라 화물이 드나들었다. 산동 반도에서 출발한 선박이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와 벽란도에서 짐을 부리고 고려의 특산물을 싣고 상해로 출발했다. 예성강의 수심이 깊어 큰 배도 드나들었지만 물살이 세어 벽란도를 기피하고 예성강 하구에 멈추는 경우가 많았다. 하구에 내린 화물을 개경까지 운반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무악산은 비록 높지는 않았지만 패기(覇氣)를 지니고 있었다. 옹골찬 기운(氣運)이었다. 오늘날 태고종 총본산 봉원사연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명지대학교,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아우르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흡족했다. 600년 전 왕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지금의 연희동 고개다. 서운관 윤신달한우가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윤신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리의 법으로 보면 여기는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

"너희들이 함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데 여기가 만일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문서에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보아라."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반대하는 윤신달에게 면박을 주어 돌려보냈다. 윤신달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른 수행원들과 의논하기 위하여 물러가자 임금이 유한우를 불렀다.

"이곳이 끝내 좋지 못하냐?"

"신이 보는 바로는 실로 좋지 못합니다."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으냐?"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네가 서운관이 되어서 모른다고 하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이것은 도참(圖讖)으로 말한 바이며 신은 단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옛사람의 도참도 역시 지리로 인해서 말한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이 근거 없는 말을 했겠느냐? 그러면 너의 마음에 쓸 만한 곳을 말해 보아라."

"고려 태조가 송산명당(松山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

임금은 어이가 없었다. 좌시중 조준과 우시중 김사형을 불렀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모두 싫어하는 바이므로 구실을 삼아 이를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재상(宰相)은 송경(松京)에 오랫동안 살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도읍을 옮기는 일이 어찌 그들의 본뜻이겠는가?" -<태조실록>

태조 이성계는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민망한 듯 남은이 머리를 조아렸다.

"신 등이 외람히 공신(功臣)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은혜를 입었사오니 비록 새 도읍에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경(松京)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역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은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지금 내가 무악산을 급히 보고자 하는 것은 내 자신 때에 친히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후사(後嗣) 될 적자(嫡子)가 비록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도읍을 옮기려고 하더라도 대신이 옳지 않다고 저지시킨다면 후사될 적자가 어찌 이 일을 하겠는가?"

신하들의 의중을 꿰뚫고 정곡을 찌르는 분석이다. 좌중의 신하들은 많았지만 유구무언이다.

"서운관이 전조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여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다.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백성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 -<태조실록>


   수구세력의 저항은 끈질겼다. 왕이 이미 천도하기로 작심했는데 그 마음을 돌리려고 완강하게 버티었다. 개경에 기득권을 공고히 한 수구세력은 천도를 반대했다. 우선 새로운 도읍지에 집을 마련하는 것이 번거로웠고 개경주변에 가지고 있는 토지를 비롯한 재산을 관리하는데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날 저녁에 임금이 돌아가지 않고 무악산 밑에서 유숙했다. 야영이다. 임금의 야영이지만 별다를 것이 없었다. 평소에 전장을 옮기며 군막을 치고 야영을 했던 야전군 출신 임금이기에 왕은 불편하지 않았지만 수행한 신하들은 전전긍긍했다.

태조 이성계의 야영은 천도 후보지를 결판 짓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임시로 마련된 군막으로 무학대사를 불러들여 식사를 같이하며 의논했다. 무악산 아래 군막에서 때 아닌 대토론이 벌어진 것이다.

/이정근 기자


덧붙이는 글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 ⓒ 2007 오마이뉴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국조오례의

동의어 오례의 다른 표기 언어 國朝五禮儀 

요약 테이블
시대 조선
저작자 신숙주, 정척
창작/발표시기 1474년(성종 5)
성격 예전
유형 문헌
권수/책수 8건 6책
분야 종교·철학/유학

요약 조선 전기 신숙주(申叔舟)·정척(鄭陟) 등이 왕명을 받아 오례의 예법과 절차 등을 그림을 곁들여 편찬한 책.

국조오례의

서지적 사항

8권 6책. 목판본.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국가의 기본예식인 오례, 즉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에 대해 규정한 예전(禮典)이다.

편찬경위는 처음 세종이 허조(許稠) 등에게 오례에 관한 것을 저작하도록 명했는데, 허조 등은 고금의 예서(禮書)와 ≪홍무예제 洪武禮制≫를 참작하고 ≪두씨통전 杜氏通典≫을 모방하여 편찬에 착수했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다시 세조가 강희맹(姜希孟) 등에 명하여 오례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고, 또 도식(圖式)을 붙여 편찬하게 했으나 탈고하지 못하다가 1474년(성종 5)에 신숙주와 정척 등에 의해 완성되었다. 권두에 강희맹의 서문과 신숙주의 <진국조오례의전 進國朝五禮儀箋>이 있다.

내용

이 책은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기본예식이 되어왔으며, 고대 중국에서부터 황실이나 제후와 관련된 행사의 기본이 되는 의식절차이다.

편찬 배경은 조선조에 들어와 유교의식이 주류를 이루어 처음에 정도전(鄭道傳)이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을 제정했으나, 부족한 점이 많아 새로운 예제(禮制)의 제정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편찬 경위는 강희맹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오례의서(五禮儀序)에 의하면 “≪두씨통전≫과 중국의 여러 예제와 우리 나라 전래의 속례(俗禮)를 가감하여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시행되기 전에 세종이 승하하고 그 뒤에 세조가 이를 편찬하였던 바, 그 조문이 너무 번거롭고 앞뒤에 어긋난 것이 있으니 법을 삼을 수가 없다.”고 하고, “다시 수정 찬술하게 했으나, 탈고하기 전에 세조 또한 승하하고 예종을 거쳐 성종이 뒤를 이어 완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책은 ≪경국대전≫과 더불어 국가의 기본 예전이 되었다.

구성은 예종별(禮種別)로 되어 있는데, 길례는 권1에 30개조, 권2에 26개조로 되어 있고, 가례는 권3에 21개조, 권4에 29개조로 되어 있으며, 빈례는 권5에 6개조로 구성되었고, 군례는 권6에 7개조로, 흉례는 권7에 59개조, 권8에 32개조로 되어 있다.

① 길례 : 권1의 30개조에서 사직·종묘와 각 전(殿) 및 산천 등 국가에서 제사드리는 의식을 기재하였고, 권2의 26개조에서는 주로 농사와 관계되는 것이 많은데, 선농(先農)·선잠(先蠶)·기우(祈雨)·석전(釋奠)·사한(司寒) 등을 중심으로 기술한 국가의식 절차를 규정한 것이며, ‘대부사서인사중월시향의(大夫士庶人四仲月時享儀)’는 관료나 일반 백성의 시향행사(時享: 해마다 음력 2월, 5월, 8월, 11월에 지내는 사당제사)를 규정한 것이다.

② 가례 : 권3의 21개조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례(事大禮)와 명절과 조하(朝賀), 그리고 납비(納妃)·책비(冊妃) 등 궁중의 가례절차와 의식을 적고, 권4의 29개조에서는 주로 세자·왕녀·종친·과거·사신·외관(外官) 등에 관한 의식인데, 그 중에서 양로연은 왕이 직접 참석하는 연의로서, 예조의 주관으로 노인을 블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는 의식이다. 혼례는 ≪사례편람 四禮便覽≫의 기재 내용과 비슷하다.

③ 빈례 : 권5의 6개조로서 중국사신을 접대하는 사대의식과 일본·유구 등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의식이 기재되어 있다.

④ 군례 : 권6의 7개조로서 친사(親射)·열병(閱兵)·강무(講武)에 관한 군사의식 절차에 대한 것이다.

⑤ 흉례 : 권7의 59개조로서 국장의식의 모든 절차를 기재했고, 권8의 32개조에서는 국왕 이하 궁중의 초장(初葬) 이후의 모든 의식절차를 적은 것이며, 권말의 대부사서인상의(大夫士庶人喪儀)만이 관료와 일반 백성의 의식을 기록하였다.

이를 종합해보면 고조선시대·삼국시대·고려시대까지는 일정한 준칙이 없이 우리 고유의 것과 불교·유교적인 것이 혼합된 의식이었지만, 조선조에 와서는 유교를 바탕으로 한 의식, 즉 예교질서(禮敎秩序)가 정립되었다.

이런 점에서 ≪국조오례의≫는 궁정왕실을 중심으로 한 관료주도의 예제로 일반 백성의 시행의식은 부수적이었다. 지금은 산천·기우 등 제의식(祭儀式)은 민간의식으로 변했으나, 조선조의 통치이념은 유교로서 ≪경국대전≫ 등의 법전과 ≪국조오례의≫ 등의 예전이 그 시행의 근간이 되었다.

예전은 하나의 기본법과 같은 성격으로 예가 사회생활의 기본질서로 인식되었던 유교사회에서는 일종의 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어서 마땅히 준수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과 더불어 의례의 기본 예전으로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또한 이 책을 기본으로 하여 ≪서례 序禮≫·≪국조속오례의 國朝續五禮儀≫·≪국조속오례의보 國朝續五禮儀補≫ 등이 계속 편찬되었다.

의의와 평가

≪국조오례의≫는 국가의 예식을 주로 규정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정치문화, 특히 사회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체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
  • 『국조오례의』
  • 『국조속오례의』(서울대학교규장각도서)
  • 『춘관통고(春官通考)』

국조오례의
확대보기


국조오례의
확대보기
국조오례의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 이미지 사이즈 570x960 |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체항목 도서 소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