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이야기 한양 천도(遷都).01 -에피소드

2017. 11. 7. 12:04우리 역사 바로알기



       

조선왕조실록 이야기 한양 천도(遷都).01 -에피소드 이야기 / 조선왕조실록

2013. 11. 10. 10:54

복사 http://blog.naver.com/joseon_500/80201433978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천도(遷都) 이야기

  

 

□ 조선의 개국. 

그러나 개경에 오래도록 뿌리를 두고 있던 보수기득권 세력을 꺽어야만 이성계의 왕조가 제대로 자리를 잡음.

개경 말고 다른데로 수도 이전. 이 방법이 개경의 호족들 뿌리를 약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임.

조선 개국초기, 수도 이전은 보수와 진보, 신세력과 구세력, 호족과 신진사대부의 싸움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생각해 볼만한 것들이 아주 많음.

 

 

□ 서술형으로 써 볼려니까 정리가 너무 안됨.

그래서 표를 만듬. 그런데 표 만드는거도 복잡하다... 

 현재위치

 날짜

주요 기사

 천도 희망지역(관심지역)

 개경

 태조 1년(1392년 임신)

 8월 13일

 갑자기 예고 없이 도당에 한양 천도를 명하다 한양

 개경

 8월 15일

 삼사(三司) 우복야(右僕射, 정2품) 이염(李恬)을 

 한양부(漢陽府)에 보내 궁실을 수즙케 함.???

 한양

 개경※1

 9월 3일

 배극렴(裵克廉) 등이 한양의 궁궐과 성곽이 완성된 후 

 신도로 이전하자고 청하니 윤허하다

 일시정지

 개경※2

 9월 30일

 서운관(書雲觀)에서 조선의 종묘(宗廟)터는 고려 왕조의 

 종묘(宗廟)가 있던 옛터가 좋겠다고 하나 태조는 시큰둥함.

 개경은 아님

 개경

 10월 13일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헐고, 그자리에 새 종묘를 짓도록 하다

 개경. 한양으로 이사 안감?

 개경

 10월 21일

 종묘의 공사를 시찰하다

 개경. 이사 안가나 봄

 개경

 11월 10일

 개경의 옛궁궐의 화원(花園)을 수리하라고 함.

 개경

 개경※3

 11월 27일

 정당 문학 권중화를 보내 안태할 땅을 살피게 하다

 개경

 개경※4 

 태조 2년(1393년 계유) 

 1월 2일

 계룡산(鷄龍山)의 도읍 지도(都邑地圖)를 바침.

 계룡산

 개경

 1월 7일

 1월 18일에 계룡산(鷄龍山)으로 직접 갈 것이라고 선포 함.

 계룡산

 개경

 1월 21일

 무학 대사(無學大師)를 데려감.

 천도에 대한 자문을 얻고 싶은가 봄.

 계룡산

 개경 출발

 ※5

 2월 1일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요(鄭曜)가 임금이 계룡산으로 

 못가게 하려고 몇가지 허위보고를 함.

 계룡산

 계룡산 2월 9일

 신도 예정지의 산수와 형세를 돌아보고, 조운, 도로,  성곽터 등을

 조사케 함. 진짜 이전 할려는건가?

 계룡산

 계룡산 2월 10일 먹줄[繩]로써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 본격적인 실시설계 중 계룡산
  계룡산※6 2월 11일

 태조가 산에 올라가서 무학 대사(無學大師)에게 어떠냐고 물어봄

“능히 알 수 없습니다.”(아니 이생키가...)

 계룡산?
 계룡산에서  출발 2월 13일

 임금이 계룡산에서 길을 떠나면서 몇몇 신하들이 남아서 정리  

 좀 하라고 함.

 그런데 일을 맡긴 사람들이 실세가 아닌듯 한데...

 좀 수상함.

 계룡산
 개경 3월 8일 신도를 건설하던 백성들을 놓아 보냄. 농사철이라 그런가? 여전히 계룡산
 개경 3월 24일 계룡산의 신도를 중심으로 81개의 주·현·부곡 등을 획정. 확실히 서류상은 계룡산
 개경

 4월 1일

 신도를 건설에 참여하던 엔지니어들도 돌려 보냄.

 이 정도면 일단 건설 보류 수준임.

 계룡산 보류

 개경 8월 1일

 6도의 백성을 동원하여 개경의 성곽을 절반만 다시 쌓음.

 아무래도 잠정적으로 보수층의 천도반대 여론을 잠재우지

 못한듯 함.

 계룡산 보류, 개경
 개경 8월 6일 개경 남산에 몰래 올라가서 개경 성곽 공사를 순찰함. 개경
 개경

 8월 7일

 개경 성곽 공사의 진척을 감찰하고 제대로 시공 못하는  신하들을 

 귀향 보내거나 수군으로 보내 버림.  이거 장난 아닌데...

 개경

 개경

 8월 16일

 개경과 부근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여 각 관청과 신하들, 주변  백성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도록 등기부등본 정리시킴.

 확실히 개경

 개경

 12월 11일

 몇달 동안 풍수지리를 독학한 하륜(河崙)대감이 계룡산은 

 신도의 입지조건이 맞지 않다고 함. 

 임금이 계룡산의 신도 공사를 완전히 중지 시킴. 

 하륜은 그때 경기도 관찰사였음.

 계룡산 완전 포기

 개경

 태조 3년(1394년 갑술)

 1월 7일

 계룡산은 완전히 포기 하고 다른땅을 찾도록 함. 

 아울러 미적거리던 개경의 종묘공사를 대충대충 끝내라고  지시함.

 찾는중

 개경

 1월 14일

 경기도의 수령들이 성 쌓는 인부들을 거느리고 와서 개경 

 성곽 축조를 지원함.

 다시 개경?

 개경

 1월 16일

 각도의 장정을 징발하여 게경 성곽 축조에 조력함.

 개경?

 개경

 2월 4일

 성 쌓은 공사를 시찰함. 매일매일 시찰함.

 게경

 개경

 2월 12일

 서소문의 옹성이 부실공사로 무너지려 하자 공사감독관을 

 옹진으로 귀양.

 엔지니어인 중[僧]의 머리를 베어 문에 내다 걸어버림.

 개경

 개경

 2월 12일

 개경에 사는 신하들에게도 인부를 강제 징발함.

 명예직 신하들에게도 인부를 징발함. 개경을 떠나지 않을꺼면  

 니네집 노비들 계속 부려 먹을꺼얌^^

 개경

 개경

 2월 16일

 보수 기득권층들은 개경을 떠나기도, 떠나지 않기도 뭣해짐.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한 순간. 

 비록촬요라고 풍수지리책을 신하들이 만들어 바침.

 아무래도 중국 풍수설을 짜집기한 책인 것 같은데...

 아직 개경

 개경

 2월 18일

 이날 실록의 기사에서 처음으로 무악(毋岳)이라는 지명이  나옴.

 비록촬요의 영향인듯...신하들 무악으로 출동!

 찾는중

 개경

 2월 23일

 영삼사사 권중화, 죄시중 조준 당연히 무악은 자리가 좁아 

 신도로는 반대. 하륜은 찬성. 보수 VS 진보의 싸움인가?

 태조 영감님이 직접 가서 결정 하겠다고 함.

 찾는중

 개경

 4월 21일

 드디어 개경의 종묘 공사를 중지 시킴

 개경은 아님

 개경※7

 6월 27일

 서운관 관원이 무악이 수도로 좋지 않다고 하니, 

 임금은 흐믓하게 다른 곳도 알아 보라고 함.

  찾는중

 개경

 7월 2일

 무악(毋岳), 불일사(佛日寺), 선고개(鐥岾) 여러곳이 거론됨.

 그런데 여긴 어디임?

 이제 막 툭툭 던짐

 개경※8

 7월 4일

 불일사 퇴짜 맞음. 

 무악?

 개경

 7월 5일

 선고개 퇴짜 맞음. 

 무악?

 개경

 7월 11일

 음양 산정 도감을 설치하고 최고 권력 실세들은 배치함.

 이제 도감에서 이론적인 바탕에서 결론만 내면 됨.

 무악?

 개경

 7월 19일

 임금이 무악에 직접 가보려고 하나 비가 와서 못감

 무악?

 무악

 8월 8일

 임금이 직접 무악을 시찰함.

 무악?

 무악

 8월 11일

 무악은 아니라고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함.

 그럼 무악 말고 한양은?

 한양?

 무악※9

 8월 12일

 다시 무학대사 부름, 이번에는 마음 좀 잘 맞추자고... 

 아무튼 신하들 일제히 반대 성명 발표.

 하륜대감은 찬성 성명 서 발표함.

 한양?

 한양

 8월 13일

 무악은 안됀다니 그럼 한양으로...

 무학대사도 한양 콜!, 잠정적으로 한양으로 천도지 결정 

 한양

 임진강 근처

 8월 17일

 한양 말고 다른데도 알아봄. 

 고려의 신경(新京, 경기도 양주)도 둘러 봄.

 한양

 개경

 8월 18일

 도라산(都羅山) 근처가 좋다고 그쪽도 둘러 봄.

“이렇게 더럽고 습한 곳이 어찌 도읍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한양

 개경

 8월 24일

 도평의사사에서 한양으로 도읍 정할 것을 아뢰니 

 흐믓하게 결재도장 찍어줌.

 한양

 개경

 9월 1일

 신도 궁궐 조성 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한양 도시개발계획을 수립함. 

 한양

 개경

 9월 9일

 한양의 종묘·사직·궁궐·시장 등의 터를 정하도록  신하들에게 

 업무분장 시킴.

 한양

 한양

 9월 18일

 본격적으로 한양의 성곽 공사를 시찰하고 독려함.

 한양

 한양※10

 10월 25일

 개경의 신하들중 선발대를 한양으로 파견함.

 한양

 한양

 10월 28일

 한양의 기존 관청 부속건물을 임금의 임시 거처로 삼음.

 한양

 한양

 11월 2일

 태조 임금이 직저 종묘 신축공사 시찰함. 

 공사가 늦다고 독촉 무지하게 함.

 한양

 한양

 11월 25일

 신도 이전 계획에 아직까지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나 봄. 

 이걸 그냥 확 무악(毋岳)으로 다시 옮겨 버린다!!! 

 신하들 일제히 그냥 한양으로 합시다. 제발!!!

 한양

 한양

 12월 9일

 2월 9일 드디어 한양의 관청터를 분배해 주기 시작함. 

 도시개발 계획이 끝났나 봄.

 한양

 한양

 태조 4년(1395년 을해)

 1월 14일

 한양의 도시개발 계획을 확정 발표함함.

 한양

 한양※11

 2월 19일

 궁궐 조성에 각도의 인부를 돌려 보내고 대신 중을  쓰기로 함.

 한양

 한양※12

 3월 18일

 평주 온천에 거둥하려 하니 간관이 불가함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한양

 한양※13

 6월 6일

 한양부(漢陽府)를 고쳐서 한성부(漢城府)라 함. 

 드디어 서울특별시 탄생. 개경의 백성들도 강제 이주 시작함.  

 각 지방의 행정구역도 수도 한양을 기준으로 개편함.

 한양

 한양

 8월 12일 

 각 지방의 인부들을 동원하여 본격적인 한양의 궁궐 신축공사에

 돌입함. 이때 동원한 장정들이 1만 5천명임.

 한양

 한양

 8월 15일

 벌써부터 역세권이나 학군 좋은데에 부자들이 땅을 사놓거나  

 원래 한양에 있던 동네 사람들이 알박기를 시전함.

 한양

 한양

 9월 29일

 대묘(大廟)와 새 궁궐이 준공 됨. 이게 경복궁(景福宮)임.

 한양

 계속 한양

 윤9월 10일

 궁궐도 완성 되었고 본격적으로 성곽 공사를 준비함.

 정도전에게 총감독 시킴.

 계속 한양

 

 윤9월 26일

 개경에 있던 이성계 조상의 신주단지를 가지고 옴.

 

 

 12월 28일

 새집 증후군도 어느정도 없어진 새 궁궐에 임금이 드디어 

 입주를 함.

 

 

 5년(1396년 병자)

 1월 9일

 전국에서 11만 8천 70여 명을 징발하여 도성 축조 공사 돌입. 

 각 지역별로 담당구역을 정해서 경쟁 부추김.

 

 

 2월 15일

 농사철이 다가오기 때문에 농민들을 고향으로 돌려 보냄

 

 

 2월 22일

 주요 부분과 대문 일부를 제외하고는 도성 축조 완료됨.

 

 

 4월 19일

 한성부에 명하여 5부의 총 52방에 방명표를 세우게 함. 

 드디어 우리 동네 이름이 생김.^^

 

 

 

※1. 급박하게 한양으로 천도 한다던 태조 이성계.

이거 뭐 한양에는 지금 궁궐도 없고 성곽도 없고 관청건물도 없는 상태임.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이 임금이 온천에서 기분좋게 목욕하는 중에 살살 달랜다.

“가만히 보건대, 한양(漢陽)의 궁궐이 이룩되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하여서, 호종(扈從)하는 사람이 민가(民家)를 빼앗아 들어가게 됩니다. 기후는 점차 추워 오고 백성들은 돌아갈 데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사를 배치(配置)하기를 기다려서, 그 후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임금이 옳게 여겼다는데...

 

 

※2. 종묘(宗廟)의 터는 이성계의 조상 신주부터 앞으로 조선이 왕들의 신주를 모셔야 하는 정말 중요한 자리임.

서운관 직원들은 당연히 개경의 종묘터를 헐고 새로운 조선의 종묘를 짓자고 함.

대대로 개경에 뿌리를 두고 집도 있고 논밭도 있고 친척집도 있고 애인집도, 단골술집도 있던 개경인데 대소신료들이 당연히 이사가고 싶겠음?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 땅도 별로 없었음 “망한 나라의 옛터를 어찌 다시 쓰겠는가.”라고 함.
아무튼 종묘가 있는 곳이 바로 조선의 수도가 되는 거였음.


※3. 안태(安胎) : 왕자의 태(胎)를 묻는 일

 

 

※4. 태를 묻을 자리 찾으러 간 권중화(權仲和)가 갑자기 신도 후보지의 지도를 바침.

이건 임금의 명령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니 이성계가 개경의 종묘를 헐고 또 화원을 수리 했던 것이 보수층을 방심하게 한 후 한방 먹인것 같은데... 그것도 뜬금 없이 충청도 청주 옆의 계룡산(鷄龍山)임.

다짜고짜 태조 이성계가“이달 18일에 계룡산(鷄龍山)으로 거둥할 것이니 대성(臺省)에서 각기 한 사람씩과 의흥친군(義興親軍)이 시종(侍從)하도록 하라.”라고 던짐.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겠지만 태조 VS 보수기득권과의 한판 승부가 기다려짐.


 
(계룡산은 참으로 어의 없는 위치임.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진 계룡산 천도계획은 이성계의 시선끌기 작전인듯)


※5. 태조 임금이 개경을 떠나 계룡산으로 향하는 중인데,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요(鄭曜)가 도평의사사의가짜 공문을 가지고 서울에 와서, "임금님 마누라도 아프고, 평주(平州, 황해도 평산) 봉주(鳳州, 황해도 봉천) 등지에 떼도둑이 나타나서 개경 함락 직전임"이라고 알림. 
평주와 봉주면 개경을 북쪽에서 포위하는 형상인데 이곳에 때도둑이 나타 났으니 수도 개경을 비우지 말고 게룡산은 나중에 가라는, 약간 우회적으로 천도 반대의사임.
눈치 빠르게 태조가 한마디 한다.“누가 그러든데? 내 정보통에 따르면 그런 일 없는데?”
정요의 되지도 않은 거짓말이 뽀록남. 이거 평범한 시절이었으면 대역죄감임. 상황이 상황인 만큼...

거짓말을 미리 짐작하고 임금이 자세를 멋지게 잡고 일장연설을 함.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 대족(世家大族)들이 함께 싫어하는 바이므로, 구실(口實)로 삼아 이를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재상(宰相)은 송경(松京)에 오랫동안 살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도읍을 옮기는 일이 어찌 그들의 본뜻이겠는가?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역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王朝)가 바뀌고 천명(天命)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지금 내가 계룡산(鷄龍山)을 급히 보고자 하는 것은 내 자신 때에 친히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후사(後嗣) 될 적자(嫡子)가 비록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도읍을 옮기려고 하더라도, 대신(大臣)이 옳지 않다고 저지(沮止)시킨다면, 후사(後嗣) 될 적자(嫡子)가 어찌 이 일을 하겠는가?”
라고 주변의 신하들에게 분노의 돌직구를 날려 버림.
임금이 이야기 하다보니 화가 났나 봄. "애들아 다 때려 치우고 그냥 돌아갈까?"
어가(御駕)를 돌려 개경으로 가자고 떼를 씀.

신하들이 점 잘치는 관리에게 눈치를 팍팍 주면서 얼릉 점을 치게 하니, 
현비의 병환도 반드시 나을 것이요, 초적(草賊)도 또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함. 
이거 너무 짜고 치는 것 같은데...
신하들의 뻔히 보이는 생쑈에 화가 좀 풀린 태조 임금이 
"근데 아까 그 거짓말 했던 신하는 꼭 꿀밤 한대는 때리고 가야 쓰긋다. 평상시면 대역죄 밎지? ㅋㅋㅋ"
하니, 신하들이 "할배, 이쁘게 봐주시고 대충 하고 갑시다" 그리고는 평화로운 임금의 행차길이 다시 시작 됨.


※6. 무학대사도 개경 근방의 절이 자기의 주 활동 무대였음.
계룡산으로 수도를 옮겨 버리면 주지스님 포기하고 자기 절을 떠나 계룡산으로 가서 신도 근처에서 개척사찰을 만들던지 아니면 수도를 버리고 임금도 버리고 부귀영화도 버리고 그냥 자기 절을 지켜야 함.
당연히 계룡산으로 천도는 반대였을 것임. 계룡산에 대해서는 무학대사는 아주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

 

 

※. 7 작년도와는 신하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음.
작년에 신하들은 일단 그냥 반대, 태조 이성계는 개경은 안되는 무조건 계룡산.
이성계가 계룡산을 포기하는 순간 보수기득권 신하들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 했을듯 함.
그러나 이번에 한번 양보를 해준 이성계가 다시 수도를 옮기겠다고 하자 신하들은 반대 할 명분이 없음.
더군다나 이번 천도 예정지는 개경 바로 아래 무악임.

아마 당시 신하들(보수+신진)의 의견들을 추측해 보면
1. 죽어도 이사 못감. 학군 좋은 우리집에 우리 큰집, 우리 할배 무덤, 우리 애들 학원 다 개경에 있음.(보수파)
2. 거기 어딘지도 모르는 계룡산이 아니면 뭐 생각 좀 해보고... 거기 아직 개발 가능한 땅 좀 남았나?(중도보수)
3. 개경에는 우리집도 없고 전세값도 너무 비쌈. 혁신도시 찬성임!(중도진보)
4. 이번 기회에 보수파 정권 완전히 뭉게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함. 호족들의 근거지를 뿌리 뽑자. 사병 혁파!!!(진보)


※8. 선고개와 불일사는 임금이 특별히 퇴짜를 놓은 것도 아니고 신하들 사이에서 먼저 불합격 맞음.
이제 서운관 관료들은 페닉에 빠지고 나머지 신하들은 어째꺼나 개경에서 가까운 곳으로 좀 괜찮은 자리로 어서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분위기임. 빨리 땅 좀 사놓게...

 
※9. 태조 3년(1394년 갑술) 8월 12일
무악 천도에 대한 신하들의 성명서 발표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의 성명서(한양 천도 반대)
“1.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되는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1.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 〈주나라 성왕(成王) 겹욕(郟鄏)에 도읍을 정하니, 곧 관중(關中)으로 30대 8백 년을 전하였습니다. 11대손인 평왕(平王) 때에 이르러 주나라가 일어난지 4백 49년 만에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진(秦)나라 사람이 서주(西周) 옛땅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주나라는 30대 난왕(赧王)에 이르러 망하고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대신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30대 8백 년이라 하는 주나라의 운수는 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 고조(高祖) 항우(項羽)와 함께 진(秦)나라를 칠 때, 한생(韓生) 항우에게 관중(關中)에 도읍할 것을 권했으나, 항우가 궁궐이 다 타버리고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을 보고 좋아하지 아니하니, 어느 사람이 술수로 항우를 달래되, ‘벽(壁)을 사이에 두고 방울을 흔들면 그 소리는 듣기 좋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부귀(富貴)해진 뒤에는 고향 산천(山川)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니, 항우가 그 말을 믿고 동쪽 팽성(彭城)으로 돌아가고 한 고조 유경(劉敬)의 말에 의하여 그날로 서쪽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항우는 멸망했으나 한 나라의 덕은 하늘과 같았습니다. 이후로 우문씨(宇文氏) 주(周)나라 양견(楊堅) 수(隋)나라가 서로 이어가면서 관중에 도읍하고, 당나라도 역시 도읍하여 덕이 한나라와 같았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 중국에서 천자가 된 사람이 많되 도읍하는 곳은, 서쪽은 관중으로 신이 말한 바와 같고, 동쪽은 금릉(金陵)으로 진(晉)나라·송(宋)나라·제(齊)나라·양(梁)나라·진(陳)나라가 차례로 도읍하여 중앙에는 낙양(洛陽)으로 양나라·당나라·진(晉)나라·한나라·주나라가 계속 이곳에 도읍하였으며, 송나라도 인해 도읍을 하였는데 대송(大宋)의 덕이 한 나라·당 나라에 못지 않았으며, 북쪽에는 연경(燕京)으로서 대요(大遼)·대금(大金)·대원(大元)이 다 도읍을 하였습니다. 〈중국과 같은〉 천하의 큰 나라로서도 역대의 도읍한 곳이 수사처(數四處)에 지나지 못하니, 한 나라가 일어날 때, 어찌 술법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제왕의 도읍한 곳은 자연히 정해 좋은 곳이 있고,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1. 우리 나라는 삼한(三韓) 이래의 구도(舊都)로서, 동쪽에는 계림(鷄林)이 있고 남쪽에는 완산(完山)이 있으며, 북쪽에는 평양(平壤)이 있고 중앙에는 송경(松京)이 있는데, 계림 완산은 한쪽 구석에 있으니, 어찌 왕업을 편벽한 곳에 둘 수 있습니까? 평양은 북쪽이 너무 가까우니, 신은 도읍할 곳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1. 전하께서 〈기강이〉 무너진 전조의 뒤를 이어 처음으로 즉위하여 백성들이 소생되지 못하고 나라의 터전이 아직 굳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민력(民力)을 휴양하여, 위로 천시(天時)를 살피시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보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도읍터를 보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이며, 조선의 왕업이 무궁하고 신(臣)의 자손도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1. 지금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 옛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고서 하는 말이며, 신이 말한 바도 또한 옛날사람들이 이미 징험한 말입니다. 어찌 술수한 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인사를 참고해 보시고, 인사가 다한 뒤에 점을 상고하시어 자칫 불길함이 없도록 하소서.”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의 성명서(무악 천도 반대)
“이곳은 산과 물이 모여들고 조운(漕運)이 통할 수 있어 길지(吉地)라 할 수 있으나, 명당이 기울어지고 좁으며, 뒷산이 약하고 낮아서, 규모가 왕자의 도읍에 맞지 않습니다. 대저 천하의 큰 나라도 제왕의 도읍은 몇 곳에 불과한데, 하물며 한 나라 안에서 어찌 흔하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부소(扶蘇)의 산수(山水)는 혹 거슬려 놓인 데가 있으므로 선현들이 좌소(左蘇) 우소(右蘇)에 돌아가면서 거주하자는 말이 있으나, 그 근처에 터를 잡아서 순주(巡住)하는 곳을 삼고, 부소 명당으로 본 궁궐을 지으면 심히 다행일까 합니다. 어찌 부소 명당이 왕씨만을 위하여서 생겼고 뒷임금의 도읍이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민력을 휴양하여 두어 해 기다린 뒤에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을까 합니다.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의 성명서(무악 천도 반대)
“도읍을 정하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운 일입니다. 천하의 큰나라 〈중국 〉도 관중(關中)이니 변량(汴梁)이니 금릉(金陵)이니 하는 두어 곳 뿐인데, 어찌 우리 작은 나라로서 곳곳에 있겠습니까? 주나라 관중(關中)에 도읍하였고, 진(秦)나라가 대신하여 관중(關中)에 도읍하였으며, 진 나라가 망하고 한 나라가 대신해도 역시 거기에 도읍하였으며, 변량은 5대(代)가 도읍하고 금릉은 6조(朝)가 도읍한 곳입니다. 도선(道詵)이 말하기를, ‘만약 부소에 도읍하면 세 나라 강토를 통일해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조는 시조 왕건(王建) 이전 3국이 정립할 때부터 3국을 통일한 이후에 단지 개성에 도읍하였는데, 왕씨가 5백 년에 끝나는 것은 운수(運數)이며 지리에 관련시킬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주 나라·진 나라·한 나라가 서로 계속해 가면서 한 곳에 도읍한 것을 보면, 비록 개성이라도 해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구태여 여기를 버리고 다른 곳을 구하려면, 다시 널리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악의 터는 명당이 심히 좁고 뒷 주룡(主龍)이 낮으며, 수구(水口)가 쌓이지 않았으니, 길지(吉地)라면 어찌 옛사람이 쓰지 않았겠습니까?

중추원 학사 이직(李稷)의 성명서(무악 천도 반대)
“도읍을 옮기고 나라를 세우는 곳에 대하여 지리책을 상고해 보니, 대개 말하기를, ‘만갈래의 물과 천봉의 산이 한 곳으로 향한 큰 산과 큰 물이 있는 곳에 왕도와 궁궐을 정할 수 있는 땅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산의 기맥이 모이고 조운이 통하는 곳을 말한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지방 천리로써 임금이 된 사람은 〈수도를〉 4방 5백 리로 하고, 지방 5백 리로 임금이 된 자는 〈수도를〉 4방 각 50리로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4방〉 도로의 거리를 고르게 하기 위하여 말한 것이며, 우리 나라 비결에도 이르기를, ‘삼각산 남쪽으로 하라.’ 했고, ‘한강에 임하라.’ 했으며, 또, ‘무산(毋山)이라.’ 했으니, 이곳을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대저 터를 잡아서 도읍을 옮기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로서 한두 사람의 소견으로 정할 것이 아니며, 반드시 천명에 순응하고 인심을 따른 뒤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전》에 말하기를, ‘거북도 따르고 시초도 따르며 공경(公卿)과 사대부도 따르고 서민도 따라야 한다.’ 했으니,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도읍을〉 옮기고 안 옮김은 때와 운수가 있는 것이니, 신이 어찌 쉽게 의논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천도하려는 것은〉 천심에서 나오고 또 인심의 향하는 바를 살피시니, 곧 하늘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악의 명당은 신도 역시 좁다고 생각합니다."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하윤(河崙)의 성명서(무악 천도 찬성)
“우리 나라 옛 도읍으로 국가를 오래 유지한 것은 계림 평양 뿐입니다. 무악의 국세(局勢)가 비록 낮고 좁다 하더라도, 계림 평양에 비하여 궁궐의 터가 실로 넓고, 더구나 나라의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증빙할 만하여, 우리 나라 전현(前賢)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서로 부합되는 것입니다. 또 중국의 지리에 대한 제가(諸家)들의 산과 물이 안으로 모여든다는 설과도 서로 가까우므로, 전일 면대하여 물으실 때에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임금이 일어남에는 스스로 천명(天命)을 갖고 있는 것이나, 도읍을 정하는 일은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한때의 인심에 순응하여 민폐를 덜려면 송도에 그대로 있을 것이요, 전현(前賢)의 말씀에 의하여 만세의 터전을 세우려면 이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신하들이 무악 천도 반대로 피터지게 싸우는 동안 임금은... 그럼~ 한양?  


(지금의 서울시청 왼편의 붉은색 원안이 무악임. 지금의 은평구 갈현동 일대로 추측됨)

※.10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개경)에 머물러 있게 하고, 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음. 
분도(分都)라는 의미는 반을 나눈다는 뜻이므로 아직 한양을 완전한 신도로 여기지는 않음. 당연히 서울시장은 아직 선임하지 않았음.

 
※.11 궁궐을 조성(造成)하는 각도의 인부들을 돌려보내고 승도(僧徒)들로 대신하게 함.
당시 양반들의 스님들을 바라보는 시각.
일단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눔.
1등급. 배부르게 먹지 아니하고 일정한 곳에 거처하지 아니하며, 승당(僧堂)에서 마음을 수양하는 스님.
2등급. 불경을 강론하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스님
3등급. 재(齋) 올리는 데에 찾아가고 초상집에 달려가서 의식(衣食)을 엿보는 스님
신하들이 자기집 노비까지 징발 당하기 전에 묘책을 생각해 냄.
스님들 등급중에 3등급 스님들을 최저 시급으로 부려 먹자고 임금을 살살 꼬드낌. 
태조 임금은 스님들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고 또 거의 공짜로 일을 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즉각 콜!


※.12 임금이 장차 평주(平州) 온천(溫川)에 거둥하려 하므로, 간관(諫官) 한상환(韓尙桓)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신 등은 전하께서 장차 온천에 거둥하려 하신다는 말을 들었사온데, 병을 고치려고 하시는 것이오니 중지하시기를 바랄 수는 없사오나,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온천이 신도(新都)에서 3백여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산을 넘고 내를 건너며 황무한 들판에서 연(輦)을 멈추어야 하오니, 병을 고치는 방법에도 좋지 못할까 하오며, 더구나 농사철이 한창이온데, 거둥하시는 곳마다 아무리 간략하게 한다 하더라도 어찌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하소서.”
임금이 장무(掌務)인 보궐(補闕) 윤수(尹須)를 불러 말하였다.
“이번의 거둥은 병을 고치려고 하는 것인데, 다만 민폐만 말하고 내 병은 걱정하지 않으니, 무슨 말이냐?”
드디어 윤허하지 않았다.


※.13 한양부(漢陽府)를 고쳐서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함.
개성부(開城府)를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 양광도(楊廣道) 충청도(忠淸道), 서해도(西海道) 풍해도(豐海道), 강릉도(江陵道) 교주도(交州道)를 합하여 강원도(江原道)호 명칭 변경.
 성석린(成石璘)을 초대 서울 시장인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신의(鄭臣義)를 한성부 윤, 우인열(禹仁烈)을 개성 유후사 유후(留後), 노숭(盧崇) 정남진(鄭南晉)은 부유후를 삼음.


□ 대(大廟)와 새 궁궐의 규모와 구성 및 배치 상황
대묘(大廟)의 대실(大室)은 7간(間)이며 당(堂)은 같게 하고 실(室)은 따로 하였다. 안에 석실(石室) 5간을 만들고 좌우의 익랑(翼廊)은 각각 2간씩이며, 공신당(功臣堂)이 5간, 신문(神門)이 3간, 동문이 3간, 서문이 1간이었다. 빙둘러 담장을 쌓고 신주(神廚)가 7간, 향관청(享官廳)이 5간이고, 좌우 행랑이 각각 5간, 남쪽 행랑이 9간, 재궁(齋宮)이 5간이었다. 
새 궁궐은 연침(燕寢)이 7간이다. 동·서 이방(東西耳房)이 각각 2간씩이며, 북쪽으로 뚫린 행랑이 7간, 북쪽 행랑이 25간이다. 동쪽 구석에 연달아 있는 것이 3간, 서쪽에 연달아 있는 누방(樓房)이 5간이고, 남쪽으로 뚫린 행랑이 5간, 동쪽의 소침(小寢)이 3간이다.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 행랑에 닿았고,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동쪽 행랑에 닿았으며, 서쪽 소침(小寢) 3간과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의 남쪽 통하는 행랑에 닿았다.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서쪽 행랑에 닿았고, 보평청(報平廳)이 5간, 정사를 보는 곳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에 이방(耳房)이 각각 1간씩이며, 남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7간, 동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15간이다. 처음 남쪽에서 통행하는 행랑 5간이 동쪽 행랑에 닿고, 서쪽으로 통하는 행랑 15간도 역시 남쪽 행랑 5간에서 서쪽 행랑에 닿고, 연침 북쪽 행랑 동쪽 구석에서 정전(正殿)에 그치고 북쪽 행랑의 동쪽 23간이 동쪽 행랑, 서루(西樓)에서 정전(正殿)까지 가는 북쪽 행랑 서쪽 20간이 서쪽 행랑이 되어, 이상이 내전(內殿)이다.
정전(正殿)은 5간으로 조회를 받는 곳으로 보평청의 남쪽에 있다. 상하층의 월대(越臺)가 있는데, 들어가는 깊이가 50척, 넓이가 1백 12척 5촌(寸), 동계(東階)·서계(西階)·북계(北階)의 넓이가 각각 15척이다. 윗층계[上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石橋)가 5층[五級]인데 중계(中階)의 사면 넓이가 각각 15척, 아랫층계[下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가 5층이다. 북쪽 행랑 29간을 통하는 행랑은 북행랑에서 정전(正殿)의 북쪽에 닿았고, 수라간(水刺間) 4간과 동루(東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동쪽에 닿아서 내전의 동쪽 행랑과 연했으며, 그 남쪽 9간은 전문의 동각루(東角樓)에 닿았다. 서루(西樓) 3간도 상·하층이 있는데,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서쪽 구석에 닿아서 내전의 서쪽 행랑과 연하고, 그 남쪽 9간은 전문(殿門)의 서각루(西角樓) 전정(殿庭)에 닿았다. 넓이는 동서(東西)가 각각 80척, 남쪽이 1백 78척, 북쪽이 43척이며, 전문 3간은 전(殿)의 남쪽에 있고, 좌우 행랑 각각 11간과 동(東)·서각루(西角樓) 각각 2간과 오문(午門) 3간은 전문(殿門)의 남쪽에 있다. 동서의 행랑은 각각 17간씩이며, 수각(水閣)이 3간, 뜰 가운데에 석교(石橋)가 있으니 도랑물 흐르는 곳이다. 문(門)의 좌우의 행랑이 각각 17간씩이며, 동·서각루가 각각 2간씩이다. 동문을 일화문(日華門)이라 하고, 서문을 월화문(月華門)이라 한다.
그 밖에 주방(廚房)·등촉방(燈燭房)·인자방(引者房)·상의 원(尙衣院)이며, 양전(兩殿)의 사옹방(司饔房)·상서사(尙書司)·승지 방(承旨房)·내시 다방(內侍茶房)·경흥부(敬興府)·중추원(中樞院)·삼군부(三軍府)와 동·서루고(東西樓庫)가 무릇 3백 90여 간이다.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建春門)이라 하고,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하며,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樓] 3간이 상·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삼군부(三軍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의 각사(各司) 공청이 벌여 있었다.


□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정도전이 그 경복궁에 대하여 말하였다.
“신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것은 임금이 정사하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민(臣民)들이 다 조성(造成)한 바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성을 보이게 하고, 그 명칭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감동되게 하여야 합니다. 한(漢)나라 당(唐)나라 이래로 궁전의 이름을 혹 그대로 하기도 하고, 혹은 개혁하였으나, 그 존엄성을 보이고 감상을 일으키게 한 뜻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 만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여 먼저 종묘를 세우고, 다음에 궁궐을 경영하시더니, 다음 해 을미일에는 친히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쓰시고 선대의 왕과 왕후를 신묘(新廟)에서 제향을 올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새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셨으니, 대개 신(神)의 혜택을 넓히시고 뒷사람에게 복록을 주심이옵니다. 술이 세 순배 되어서, 신 정도전에게 분부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 하셨으므로, 신이 분부를 받자와 삼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그러나 《춘추(春秋)》에,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 했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백성만 괴롭혀 자봉(自奉)하라는 것이겠습니까? 넓은 방에서 한가히 거처할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되면 맑고 그늘진 것을 생각해 본 뒤에 거의 만백성의 봉양하는데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말씀드립니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세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네가 군자와 벗하는 것을 보니 너의 얼굴을 상냥하고 부드럽게 하고, 잘못이 있을까 삼가하는구나. 너의 방에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구나.’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합니다. 성인이 만백성에게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드시니,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므로 그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하므로, 동쪽의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여,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자로서 누가 높고 영화로운 것을 바라고 위태로운 것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사랍답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 하고 좋지 못한 일을 꾀하여서 화패(禍敗)에 이르게 되는 것은, 진실로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근정전(勤政殿)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 일이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떠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따라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며,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노리갯감으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은 ‘이것이 나를 사랑함이 두텁다.’ 하여, 자연으로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하기를 청하옵니다.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에 대해서 말하오면,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武)로써 난(亂)을 안정시킴이오니, 마치 사람의 두 팔이 있는 것과 같아서 하나라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예악과 문물이 빛나서 볼 만하고, 군병과 무비가 정연하게 갖추어지며, 사람을 쓴 데에 이르러서는 문장 도덕의 선비와 과감 용맹한 무부(武夫)들이 경외(京外)에 퍼져 있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높이게 한 것이며, 거의 전하께서 문무를 함께 써서 오래도록 다스림을 이룰 것입니다.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하오면, 천자와 제후(諸侯)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하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功緖]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 도성의 공사 구역 측량과 작업 구역 할당
경상·전라·강원도 서북면 안주(安州) 이남과 동북면의 함주(咸州) 이남의 민정(民丁) 11만 8천 70여 명을 징발하여 처음으로 도성을 쌓게 했다. 이미 성터를 측량하여 자호(字號)를 나누어 정하였는데, 백악(白岳)의 동쪽에서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백악의 서쪽으로 조자(弔字)에서 그치게 하였다. 서쪽 산 돌재[石嶺]까지 합해서 땅의 척수가 무릇 5만 9천 5백 척(尺)이요, 6백 척마다 한 자호(字號)를 붙였으니, 모두 97자(字)이며, 한 글자마다 6호(號)로 나누고, 두자(字)마다 감역(監役)을 두고, 판사(判事)·부판사(副判事)는 각 1원(員)을 두고, 사(使)·부사(副使)·판관(判官)은 12원(員)을 두었다. 각도 주군(州郡)의 민호(民戶)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천자(天字)로부터 일자(日字)까지는 동북면이, 월자(月字)에서 한자(寒字)까지는 강원도가, 내자(來字)에서 진자(珍字)까지는 경상도가, 이자(李字)에서 용자(龍字)까지는 전라도가, 사자(師字)에서 조자(弔字)까지는 서북면이 맡게 하였다. 역사를 감독하는 사람이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고 시키니, 임금이 날씨가 심히 춥다고 하여 밤의 역사는 못하게 하였다.


□ 도성의 규모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높이가 15척이나 되었으며, 길이가 1만 9천 2백 척이었다. 평탄한 산에는 토성(土城)을 쌓았는데, 아래의 넓이는 24척, 위의 넓이는 18척, 높이가 25척이며, 길이가 4만 3백 척이었다.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雲梯]를 쌓고 양쪽에다 석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6척, 길이가 1천 50척이요, 동대문(東大門)에는 지세가 낮으므로 밑에다가 돌을 포개어 올리고 그 뒤에 성을 쌓았으므로, 그 힘이 다른 곳보다 배나 되었다. 안동(安東) 성산부(星山府) 사람들이 그 역사를 맡았다고 함.


□ 태조 5년(1396년 병자) 4월 19일
한성부로 하여금 5부(五部)의 방명표(坊名標)를 세우게 하였다. 

 구역

 방(坊)

 방명(坊名)

 동부 12방(坊)

 연희(燕喜)·숭교(崇敎)·천달(泉達)·창선(彰善)·건덕(建德)·덕성(德成)·서운(瑞雲)

 연화(蓮花)·숭신(崇信)·인창(仁昌)·관덕(觀德)·흥성(興盛)

 남부

 11방(坊)

 광통(廣通)·호현(好賢)·명례(明禮)·태평(太平)·훈도(熏陶)·성명(誠明)·낙선(樂善)

 정심(貞心)·명철(明哲)·성신(誠身)·예성(禮成)

 서부

 11방(坊)

 영견(永堅)·인달(仁達)·적선(積善)·여경(餘慶)·인지(仁智)·황화(皇華)·취현(聚賢)

 양생(養生)·신화(神化)·반석(盤石)·반송(盤松)

 북부

 10방(坊)

 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嘉會)·안국(安國)·관광(觀光)·진정(鎭定)·순화(順化)

 명통(明通)·준수(俊秀)·의통(義通)이며, 중부가 8방이니, 정선(貞善)·경행(慶幸)

 관인(寬仁)·수진(壽進)·징청(澄淸)·장통(長通)·서린(瑞麟)·견평(堅平)



《조선성시도 朝鮮城市圖》서울특별시 지도전시관






태조강헌대왕실록/3년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이동: 둘러보기, 검색

목차

 [숨기기

三年 春正月[편집]

1月 1日[편집]

수창궁에서 황제 있는 곳을 향해 정조를 하례하다[편집]

○辛丑朔/幸壽昌宮, 率群臣賀帝正。


1月 2日[편집]

수창궁의 서쪽 침실을 헐어 2층 전각을 건축토록 명하고, 김사행에게 감독케 하다[편집]

○壬寅/命毁壽昌宮西寢室, 營二層殿, 以金師幸督役。


1月 4日[편집]

별의 괴변을 막기 위해 세자를 자운사에 보내 사대 연성 법회를 열게 하고 구경하다[편집]

○甲辰/遣世子于慈雲寺, 設四大緣成法席, 以禳星變, 上親幸觀之。


1月 7日[편집]

수창궁에서 하례를 받고, 종묘에 가서 감독관에게 공사를 간단히 하도록 명하다[편집]

○丁未/人日。 幸壽昌宮受賀禮, 遂如宗廟之地, 敎監督官曰: “凡事從簡, 毋使民勞。”


금주령을 내리다[편집]

○命憲司, 復行禁酒之令。


1月 11日[편집]

제사 지내는 사람에게는 돈을 받고 술을 주도록 사온서에 명하다[편집]

○辛亥/傳旨憲司曰: “凡欲祭祀者, 許令司醞署納價給酒。”


1月 12日[편집]

흠차 내사 노타내 등이 자문을 가지고 오니 임금이 선의문 밖에서 맞이하다[편집]

○壬子/欽差內史盧他乃、朴德龍、鄭澄等, 齎左軍都督府咨文來, 上率群臣, 出宣義門迎之。 其咨曰:

洪武二十六年十一月二十日, 據山東都司寧海衛解到高麗劫賊一名崔禿伊到府。 責據本人狀供, 係高麗肅州爐叱洞住人。 於洪武二十六年七月七日, 有高麗王【上諱。】差萬戶金寺彦、千戶車成富ㆍ李富壽ㆍ林原ㆍ林淸彦ㆍ李佛壽ㆍ洪忠彦、百戶鄭隆ㆍ洪原ㆍ林忠彦, 領船七隻, 每船裝人三十七名ㆍ布二綑, 共計人二百五十九名, 布五百六十匹。 假作買賣, 打聽消息, 說道: “若大軍不來時, 我起軍打遼東。” 續後再差船十隻, 每船裝人三十七名, 各帶軍器, 共計人(二)〔三〕百七十名。 又據解千戶金完貴供稱, “有女眞係百戶金光義, 卽金城判官任葛龍義、令史藜均皮力等所爲, 幷不干金完貴事, 各人見在畢屯口子住。” 得此, 本府左都督楊文等官將各人供詞具本, 於奉天門奏奉聖旨: “恁都督府將這緣故行文書去, 敎李【諱。】知道。 這等假造倭賊, 又是他一次生釁, 就敎他將誘女眞的官吏送來。” 欽此。


중군 군후소를 폐지하여 훈련관에 병합시키다[편집]

○罷中軍軍候所, 倂於訓鍊觀。


1月 13日[편집]

사헌부에서 금주를 과도하게 단속하니 완화하도록 명하다[편집]

○癸丑/憲司禁酒過嚴。 上召掌務雜端金九德, 敎曰: “凡人有疾者, 或以酒飮藥, 槪以犯令加罪可乎? 大抵禁酒, 毋得宴飮沈醉而已。”


1月 14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 수창궁에 가서 침전의 공사를 살펴보다[편집]

○甲寅/木稼。 上如壽昌宮, 觀寢殿役。


경기도의 수령들이 성 쌓는 인부들을 거느리고 오다[편집]

○京畿左右道守令, 領築城役徒以來。


1月 15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乙卯/木稼。


1月 16日[편집]

수창궁에 거동하다. 판문하부사 안종원 등이 경사로 가지고 간 표문[편집]

○丙辰/上如壽昌宮, 遣判門下府事安宗源、中樞院副使李承源, 赴京謝恩。 表曰:

使華荐至, 帝命是宣, 感極涕零, 愧深汗洽。 竊念自古, 殊俗之在遠, 皆知中國之當尊, 故懷惠而畏威, 必効忠而嚮化。 苟或違此, 無以自存, 歷代以來, 明効可驗。 況臣幸遭昭代, 屢奉德音, 俾臣知軍國之權, 許臣更朝鮮之號, 得藉天威之重, 以定衆心之歸。 常懷圖報之末由, 何敢生釁之不已? 今者, 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一款節該: “更國號一節, 遣人請之。 或祖朝鮮, 已許自爲, 卽合正名。 今旣更號朝鮮, 表文仍稱權知國事, 未審何謀?” 欽此。 國已更號, 臣未正名, 第緣典故之未諳, 實非姦侮之是肆。 譴責深切, 乃天地玉成之心; 誨諭丁寧, 實父母生育之惠。 玆有成命, 謹用欽遵。 玆蓋伏遇皇帝陛下視遠以明, 字小以德, 恕臣迷謬, 許臣自新。 臣謹當嘉與一方之民, 永祝萬年之壽。


각도의 장정을 징발하여 경성의 축조에 조력하다[편집]

○徵發各道丁壯, 助築京城。


왕씨의 모의에 연루된 참찬문하부사 박위를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囚參贊門下府事朴葳于巡軍獄。 初東萊縣令金可行、鹽場官朴仲質等, 以國家安危、王氏命運, 卜於密城盲人李興茂。 事覺, 執興茂來囚巡軍獄, 令省憲、刑曹, 同巡軍萬戶府, 案其事。 興茂伏之曰: “可行、仲質等, 以朴葳言來卜曰: ‘前朝恭讓之命, 與我主上殿下孰優? 且王氏之中, 誰是命貴者?’ 我以南平君王和之命爲貴, 其弟鈴平君王琚次之。” 於是囚葳, 命巡軍執可行、仲質于慶尙道。


1月 17日[편집]

왕씨를 거제도로 이배시키고, 왕화·왕거를 안동옥에 가두다[편집]

○丁巳/遣巡軍鎭撫金永和、千戶柳陽等, 還徙王氏于巨濟島, 又遣大將軍沈孝生, 繫王和、王琚于安東獄。


1月 18日[편집]

박위에게 술을 내려 주고 수갑을 풀어주며 타이르다[편집]

○戊午/上遣人賜酒于朴葳, 命解鎖, 諭之曰: “如此事, 卿豈爲之? 待仲質、可行等來辨論則出矣。 此事關係社稷, 非余所得私, 命卿就獄。 余於人, 雖大罪, 皆宥之, 況於卿乎? 卿勿動心。”


전 밀직 제학 권주의 졸기[편집]

○前密直提學權鑄卒。 鑄, 安東人, 玄復君廉之子, 吉昌君準之孫。 性端慤, 讀書登第, 歷官華要, 皆兼館職。 嘗出牧忠、黃二州, 皆有惠政。 入爲知申事, 試士成均, 人無間言。 官至密直提學。 二子壎、堡, 皆登第。


검교직의 녹봉을 본품보다 3등을 낮춰 정하다[편집]

○定檢校各品祿, 降本品科三等。


도당에서 공사 어량과 염분을 사재감에, 둔수군의 둔전 번염을 군자에 충당하기를 청하다[편집]

○都評議使司請以公私魚鹽梁, 盡屬司宰監, 復屯戍軍屯田燔鹽, 以充軍資。


경시서에서 판자에다 각 점포의 이름과 물품을 그려서 서로 섞이지 않게 하기를 청하다[편집]

○京市署請板寫各市名, 幷畫販物其下, 掛於各所, 俾不相雜。


1月 20日[편집]

왕씨의 모의에 연관된 김가행과 박중질을 잡아 국문하다[편집]

○庚申/執金可行、朴仲質等以來, 鞫之。


1月 21日[편집]

삼성에서 박위 등을 같이 국문하도록 청하니 박위는 용서하고 박중질 등은 귀양보내다[편집]

○辛酉/臺諫、刑曹同章上請曰: “臣等同巡軍萬戶府, 鞫問李興茂、金可行、朴仲質等, 其招辭關係大體, 不可易決。 乞將辭連人等, 一處憑問, 明正其罪。” 上不允。 宥朴葳復職, 乃曰: “葳雖素有異心, 今予授以好爵, 遇之以厚, 何變之敢圖? 人材如朴葳者, 未易得也。” 杖流仲質、可行、興茂等邊郡。


삼성에서 왕씨를 제거하자고 청하니 윤허치 않다[편집]

○臺諫、刑曹上書請去王氏, 不允。


1月 23日[편집]

성 쌓는 공사를 시찰하다[편집]

○癸亥/上觀城役。


1月 25日[편집]

토지를 받은 군관과 한량인 중에 왕실을 시위하지 않는 자를 점고하여 처벌토록 하다[편집]

○乙丑/上如壽昌宮, 命趙琦點考諸節制使所領軍官及閑良人受田者, 其在外不衛王室者, 罪之。


삼성에서 왕강 등을 외방 종편 시키자고 청하였으나 윤허치 않다[편집]

○臺諫、刑曹同章論王康、承寶、承貴、朴葳之罪, 不可居京, 不允。


1月 27日[편집]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과 장수들이 쇠 갑옷을 입고 둑에 제사지내다[편집]

○丁卯/遣判義興三軍府事鄭道傳, 以太牢祭纛。 道傳及與祭將士, 皆以鐵甲行祭。 祭畢, 千戶兪瑞鳳暴死。


1月 28日[편집]

둑 제사에 참여치 않은 여러 절제사의 장무, 진무에게 곤장을 치다[편집]

○戊辰/笞諸節制使掌務鎭撫。 以諸節制使不及與祭纛也。


곡산 부사 전이가 곡산 등의 요충지에 병기와 군량을 저장토록 청하니 윤허하다[편집]

○谷山府使田易上書于都評議使司曰:

竊聞鍊兵積穀, 以備不虞, 守國之常典也。 然而兵非據險, 不可以藏我之形, 穀若露積, 適足爲寇之資。 必也積糧於堅城, 置鎭於要害, 然後以逸待勞, 以飽待飢, 而能制敵之命也。 昔唐太宗攻安市城, 延壽、惠眞帥兵救之。 太宗謂將臣曰: “今爲延壽策, 引兵直前, 連城爲壘, 據險食粟, 坐困吾軍, 上策也。” 延壽、惠眞將發, 有對盧者, 年老習事, 謂之曰: “秦王, 命世之才, 擧海內之衆而來, 不可敵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運道。 糧食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也。” 延壽不從, 引兵直前, 大敗而降。 夫對盧之謀, 正太宗所謂上策也。 使延壽從之, 則太宗之班師, 不待草枯氷凍矣。 救兵雖敗於外, 安市一城, 獨堅守不下, 故太宗托以遼左早寒, 耀兵城下而歸。 夫以太宗之英果、李勣之勇智, 擧天下之師, 而不能攻取一城者, 豈非以城險而糧多, 兵精而固守歟! 今我國家創制立法, 纖悉備具, 至於養兵備敵之方, 講之尤詳, 而貯糧之所、鎭戍之地, 大率皆仍其舊。 此愚所以將寡聞淺見, 喋喋然以塵淸聽也。 前年冬, 因踏驗損實, 到州之北村, 觀其形勢, 山川險塞, 中有山城, 可儲資糧, 可藏兵甲。 東距和寧百五十里, 西連成州不過三四息程, 實東西北兩面往來之要衝也。 且吾聞之, 有備無患, 聖訓所傳; 若寇至, 兵家之勝。 萬一有安市之被攻, 當如對盧之策, 然後可以萬全而取勝。 若非畜積之有素, 烏能致此! 愚竊以謂州及伊川、俠溪、遂安、三登、成州、陽巖、樹德等八邑之田, 悉皆屬于軍糧。 每年八九月, 令軍資監員, 親到收稅, 皆入州之山城, 則不三四年而可畜數萬之衆, 數年之食矣。 當其用兵, 選精兵數萬, 藏於山城之下, 仰食其穀, 以待事機, 若有闌入我疆者, 則取路陽巖、樹德, 經由古孟、德州, 銜枚疾趨, 出其不意, 或擊其背, 或絶糧道, 此用兵之一奇也。 其或據險食粟, 以耀兵威, 爲平壤、和寧之聲援, 亦可也。

使司轉聞于上, 上嘉之, 命許施行。


1月 29日[편집]

삼성에서 왕강 등을 섬에 안치코자 하니, 윤허하지 않고 석방하여 효유하다[편집]

○己巳/臺諫、刑曹同章啓曰: “願徙王康、王承寶、王承貴、王鬲于海島。” 上召行首掌務, 令勿復言, 對曰: “此輩, 殿下雖待之甚厚, 必不懷恩。 且康智謀過人, 承寶、承貴勇力無敵, 在於京都, 必扇不測之變。 願允臣等之啓, 以防後患。” 上曰: “予豈不知?” 且令速解囚直。 召康等敎曰: “卿等皆可用之材, 故召置京都, 親信無疑。 今者諫官請徙海島, 予已宥之, 卿等宜勿驚懼, 出入如舊。”


1月 30日[편집]

수창궁에 거동하고, 성 쌓는 공사를 시찰하다[편집]

○庚午/上幸壽昌宮, 遂巡觀城役。


三年 二月[편집]

2月 1日[편집]

삼성에서 왕강 등을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편집]

○辛未朔/臺諫、刑曹又同章請流王康等, 上不允。


2月 4日[편집]

성 쌓은 공사를 시찰하다[편집]

○甲戌/上巡觀城役。


2月 6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丙子/木稼。


성균관 동쪽 행랑에 화재가 일어나다[편집]

○成均館東廊災。


삼성에서 모반에 연루된 왕화 등을 국문코자 하니, 수원부에 가두어 국문토록 하다[편집]

○臺諫、刑曹同章曰:

臣等竊觀金可行、朴仲質、盲人李興茂招辭, 關係大體。 前者連章, 請明其狀, 殿下布寬大之恩, 分配於外, 臣等爲宗社痛心。 今者, 王和、王琚、僧釋能招辭, 亦關係大體。 與興茂之招, 事同情異, 而潛謀不軌, 王法不赦之罪也。 大抵爲惡者, 必先植黨與, 而後肆焉, 故《春秋》誅亂臣賊子, 必先治其黨與, 而使爲惡者, 孤立無助, 《春秋》之法, 嚴矣。 殿下若以此等人, 不鞫問以昭國人耳目, 則臣等恐奸雄之徒, 接踵而起, 變生不測。 近者, 胥動浮言上國者, 未必不由此輩而然也。 願殿下斷以大義, 卽令臺諫、法官, 執上項人等, 一處鞫問, 明正其罪, 幷治黨與, 以杜禍萌。 臣等所言, 爲千萬世宗社之大計, 伏惟殿下留神深省。

命臺諫法官, 執仲質、王和等, 聚于水原府, 往鞫之。


삼성에서 봉장을 윤허하지 않는다고 출사하지 않으니, 출사토록 명하다[편집]

○臺諫、刑曹, 以封章不允, 俱不仕。 上召而敎之曰: “不允所言者, 但欲深思, 且宜視事。”


2月 8日[편집]

군현의 신, 구관 교대시 물품의 수량을 정확히 인수 인계한 후 해유토록 하다[편집]

○戊寅/都評議使司上言: “京畿左道都觀察使報: ‘州縣官交代之際, 倉庫錢穀, 未嘗計量其數, 止以文簿相傳, 妄費盜用, 及雨漏地濕, 鼠竊所耗, 不以爲己責。 積年旣久, 雖或按簿驗實, 不知何等官時所損。 其鼠竊雖非人力所及, 亦是用心不至, 其雨漏地濕, 全是不用心所致。 乞自今新舊官量數傳授後, 其妄費盜用則倍徵; 雨漏地濕, 鼠竊所損, 依數追償, 旣訖, 方許解由, 以爲恒式。’ 使司議得: “今後新舊穀, 各置一庫。 雖是一庫, 置隔於中, 出納之際, 先用舊穀。 其妄費盜用者, 倍償; 鼠竊者, 半徵; 雨漏地濕者, 準數改納, 各以律論。” 上從之。


시장의 행랑에 화재가 나다[편집]

○大市行廊火。


2月 9日[편집]

햇무리가 지다[편집]

○己卯/日暈。


2月 11日[편집]

연복사에서 문수 법회를 구경하고 정희계의 집에 들렸다가 수창궁으로 가다[편집]

○辛巳/幸演福寺, 觀文殊會, 遂如參贊門下府事鄭熙啓第, 乃幸壽昌宮。


삼성에서 왕화 등을 한 곳에서 대질 심문하기를 청하니 윤허하다[편집]

○臺諫、刑曹狀啓: “乞將王和、王琚、釋能、興茂、可行、仲質等, 一處對問。” 上命臺諫、刑曹、巡軍各一員, 同楊廣道觀察使, 會水原府對問。


삼성에서 왕씨 일족의 제거와 관련하여 사헌 시사 권문의, 기거주 정귀진 등을 탄핵하다[편집]

○司憲侍史權文毅ㆍ尹彰、起居注鄭龜晋、左拾遺崔士剛、監察李復禮等, 被臺諫、刑曹之劾。 蓋三官會議, 欲去恭讓君三父子、王瑀三父子及王康、王承寶、王承貴等曰: “昨以去王氏一事, 連章上請, 未卽蒙允。 今且以去王康、王承寶、王承貴, 上請如何?” 文毅等曰: “若欲去王氏, 必盡除去。 何獨去王康等?” 故劾之。


2月 12日[편집]

수창궁에 가다. 서소문의 옹성이 무너지려 하자 감역관을 옹진으로 귀양보내다[편집]

○壬午/上幸壽昌宮, 以西小門甕城將傾, 流監役官于瓮津戍。


각품의 문무관에게 인부를 내게 하여 경성의 축조를 조력케 하다[편집]

○令文武各品出夫有差, 助築京城。


2月 13日[편집]

경상도 수군 첨절제사 안처선이 왜적 12명을 죽이니 궁온 등을 하사하다[편집]

○癸未/慶尙道水軍僉節制使安處善斬倭十二級, 幷所獲兵器以獻, 上命賜宮醞綺絹。


2月 14日[편집]

중궁과 함께 연복사에 가서 문수 법회를 구경하다[편집]

○甲申/上與中宮幸演福寺, 觀文殊會。


산직자에게 인부를 내게 하여 경성의 축조를 조력케 하다[편집]

○令散職品官出夫有差, 助築京城。


하윤 등 11인에게 역대 현인들의 비결을 상고하여 요점을 뽑아 바치라고 명하다[편집]

○命領三司事權仲和、檢校門下侍中李茂方、判三司事鄭道傳、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大學士閔霽、參贊門下府事南誾、僉書中樞院事鄭摠、檢校太學士權近、中樞院學士李稷、大司憲李懃等十人, 同左道都觀察使河崙, 遍考東國歷代諸賢秘錄, 撮要以進。


2月 15日[편집]

내사 김인보의 본향인 밀양군을 밀양부로 승격시키다[편집]

○乙酉/陞密陽郡爲府。 使臣金仁甫以其鄕請之。


경산 부사 이황이 상서로운 영지 버섯을 캐서 바치다[편집]

○京山府使李滉得異草於河濱縣, 色赤三枝, 體如菌。 以爲瑞, 送于參贊門下府事南誾第, 誾謂靈芝以獻。


서소문을 개축하면서 석장인 중을 효수하여 경계시키다[편집]

○命改營西小門。 斬石匠僧, 梟首于其上, 以警其餘。


2月 16日[편집]

권중화 등이 《비록촬요》를 바치니 하윤·이직에게 진강케 하다[편집]

○丙戌/幸壽昌宮。 領三司事權仲和等進《秘錄撮要》, 上令河崙、李稷進講。


2月 17日[편집]

연복사에서 문수 법회를 구경하다. 왕사 자초가 죄수의 사면을 청하니 윤허하다[편집]

○丁亥/上幸演福寺, 觀文殊會。 王師自超請宥罪囚, 從之。


산기 상시 이거이 등을 수원부로 보내 왕화 등을 국문케 하다[편집]

○遣散騎常侍李居易、司憲中丞朴信、刑曹正郞田時、巡軍知事成溥等于水原府, 收王和、王琚、僧釋能、金可行、朴仲質、李興茂等, 鞫問。


2月 18日[편집]

수창궁에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은 등의 물품을 하사하다[편집]

○戊子/幸壽昌宮, 宴使臣, 遺銀各一錠、黑麻苧布各四十匹、鞍子各一面。


조준, 권중화 등에게 풍수에 관한 비결책을 가지고 무악의 천도지를 살펴보게 하다[편집]

○遣左侍中趙浚、領三司事權仲和等十一人, 率書雲觀員吏等, 齎《地理秘錄撮要》, 相遷都之地于毋岳南。


2月 19日[편집]

표전 문제 등 황제가 힐문한 10가지 조항에 대해 해명하는 주문[편집]

○己丑/朝廷使臣金仁甫、張夫介還。 上撰奏本一道, 就附以進, 率群臣送至宣義門。 其奏曰:

洪武二十六年十二月初八日, 欽差內史金仁甫等至, 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節該: “奈何高麗李【諱。】, 自生邊釁, 連年不已? 其量不過恃滄海以環疆, 負重山以爲險。 所以數逞兇頑, 視我朝調兵如漢、唐。 且漢、唐之將, 長騎射短舟楫, 故涉海艱辛, 兵行委曲。 朕自平華夏攘胡虜, 水陸通征。 舟師諸將, 豈比漢、唐之爲! 若不必師至三韓, 將前後所誘女眞大小送回, 及將誘引女眞守邊千戶發來。 是後毋造詐謀, 以生邊釁, 使彼國之民妥安, 方可爲東夷之主, 而後嗣亦昌。” 欽此竊惟, 小邦臣事天朝, 至誠無二, 安敢自生邊釁? 壤地褊狹, 人民鮮少, 區區山海, 何足負恃, 以逞兇頑? 前後女眞, 實無誘引。 今來欽奉前因, 兢惶殞越, 措身無地。 念臣先世, 本朝鮮遺種, 至臣二十二代祖翰, 仕新羅爲司空, 及新羅亡, 翰六代孫兢休入高麗。 兢休十三代孫安社仕于前原, 是臣高祖。 自後不受高麗官爵, 及原季兵興, 臣父子春, 率臣等避地東來。 當其時, 適有倭寇作耗, 又有毛原帥、關先生、納哈出相繼入侵。 以臣粗習武才, 置臣行伍, 然臣官未顯達。 自高麗恭愍王薨逝, 至僞姓辛禑十六年間, 權臣李仁任、林堅味、廉興邦等相繼用事, 流毒生民, 罪盈惡稔, 自取誅戮。 以臣素心謹愼, 無有他過, 擧臣爲門下守侍中, 方與國政, 不圖崔瑩反肆狂謀, 與辛禑興兵攻遼。 臣以小國不可侵犯上國之境, 諭衆以大義, 領兵回還, 辛禑知罪, 崔瑩伏誅。 國人以宗室王瑤, 權署國事, 以鄭夢周爲門下侍中。 夢周不誡崔瑩之覆轍, 與王瑤復謀攻遼, 國人以爲不可, 王瑤退歸私邸, 夢周伏誅。 國人以爲王氏之宗, 無有可當輿望者, 軍國之務, 不可一日無統。 於是大小臣僚、閑良、耆老等、以臣有事大之忠, 咸共推戴, 以權軍國, 隨卽奏聞, 欽蒙兪允。 臣本武夫, 實無知見, 且臣先世, 在於高麗, 全無憑藉之勢。 幸賴聖恩, 致有今日, 感戴之誠, 有如天日。 況崔瑩、夢周, 明鑑不遠, 臣若踵其邪謀, 聖恩雖欲恕臣, 國人豈肯恕之? 臣非木石, 何敢枉勞心力, 爲此無益之釁, 自速禍殃! 臣如欺罔, 天地鬼神, 臨之在上。 今將條款情由, 逐一開坐, 謹具奏聞。 一款節該: “朝廷每命將守遼, 彼卽遣人, 以布帛金銀之類, 假以行禮爲由, 意在誘我邊將。”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邦凡遣使赴京, 必須經由遼陽前去, 特以朝廷爲重, 或以土産布匹行禮。 此乃出於人情, 豈有相誘之理! 一款節該: “近遣人至齊王處行禮, 所遣之人, 假爲異詞, 自謗彼國, 意在覘王動靜。”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邦但凡遣使赴京, 經由齊府前去, 就於齊王殿下行禮。 且如其間或有言辭之失, 蓋是承差員人之過失, 非小國所知。 一款節該: “已前數請願聽, 約束旣久, 去後輒違前約。 暗誘女眞, 帶家小五百餘名, 潛渡鴨綠。 果是願聽約束乎? 罪之大者, 無出此釁。”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國軍民, 節續逃往遼東, 投充軍丁者, 或暫居住者, 本無誘引, 懷思鄕土, 還復逃來, 山谷之間潛住。 臣初不知, 近據遼東都司來文, 差人捉獲到小旗李閑你等幷妻子二十三名, 起解遼東都司去。 後洪武二十六年五月十三日, 欽奉手詔, 隨卽於槪管西北面各府州郡縣, 緝獲到原係本國人朴龍等, 帶家小三百八十八名, 幷把截千戶金完貴等, 責差前密直副使曹彦管押。 及將取勘到原居女眞人仇乙土等一百一十六名, 就付差來千戶王脫歡不花管領。 俱於洪武二十六年八月內, (根)〔眼〕同欽差內使黃永奇、崔淵等, 解付遼東都司交割了訖。 一款: “近日遼東來奏: ‘今年七月內, 獲到劫賊一名, 審係高麗海州靑山把截千戶哈都干下民名張葛買。 說稱: 「高麗王將黑布三十筒, 著落哈都干, 撥船一十七隻, 每船軍四十名, 搖櫓人十八名, 百戶一名, 差燕江吳千戶管領, 於七月初五日, 起程。 船上人都做倭賊打扮, 船都刷黑, 詐作買賣, 哨探聲息。 若遇官軍, 只說是倭船, 沿路劫掠, 捉去安置, 火者九名, 殺死一名, 放回六名, 存留二名引路。 於七月二十八夜, 到金州衛島(梢)〔稍〕泊, 吳千戶發放每船留軍一十名看守, 其餘軍人, 自引上岸, 燒劫新市軍屯, 擄去軍人幷家屬共四名, 殺死二名, 殺傷三名。」’” 一款: “又假作倭賊, 撑駕船隻, 於山東、寧海州登岸, 劫殺本州人民。 致被原拏去火者逃回, 說知前情。” 欽此前件事理, 竊念小邦臣事聖朝, 至誠不二, 何敢用遣小民, 撑鴐船隻, 假作倭賊, 往金州、山東等處, 登岸作賊, 殺傷人命? 其張葛買所稱詐作買賣, 哨探聲息, 臣實不知葛買是何等人。 且如作賊刦殺, 人情阻隔, 何緣得探事情? 其爲虛詐, 不辨自明。 前者尹彛、李初逃赴京師, 罔構是非, 欽蒙聖鑑明見萬里, 尹彛、李初已伏其罪。 臣恐張葛買亦係此等不逞之徒, 被捉到官, 却行虛捏。 小國遣使, 如此冤枉, 上有天日, 口難控訴。 伏望聖慈, 欽差朝官, 將見獲刦賊張葛買發來, 與國人辨對, 便見虛實。 一款節該: “表稱入貢, 每以馬至, 令豢馬者調之, 馬皆駑下及乘乏勞倦者。 今次所貢馬內, 瘸病無齒及不馴者居半。 其餘雖無節病, 亦皆駑下, 非至誠之物。 與其以此肆侮構禍, 孰若減少, 物精而意誠!”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國所産馬匹, 本來矮小駑下, 凡遇貢獻之時, 儘力選辦進獻, 蓋由道路窵遠, 慮恐瘸病疲弱者有之。 小邦安敢肆侮! 一款節該: “更國號一節, 遣人請旨, 或祖朝鮮, 已許自爲, 卽合正名。 今旣更號朝鮮, 表文仍稱權知國事, 未審何謀? 非但用奸肆謀, 實彼不祥之兆。” 欽此前件事理, 洪武二十六年二月十五日, 陪臣韓尙質回自京師, 齎捧到禮部咨, 欽奉聖旨: “東夷之號, 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矣,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 永昌後嗣。” 欽此, 國號欽依改稱朝鮮外, 臣愚以爲未蒙頒降國王名爵, 未敢擅便稱王, 實無奸侮之心。 今來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 “卽合正名。” 欽此, 又準都督府來咨內: “右咨朝鮮國王李。 準此, 除修撰謝恩表箋。” 依上欽遵施行。 一款節該: “旣許更國號, 使者回後, 杳無消息。 先遣人遼王、寧王處行禮, 稱朝鮮國權知國事。 一月之後, 方纔進表謝恩, 尊卑之分, 故意先後。” 欽此, 前件事理照得, 爲更國號謝恩事, 於洪武二十六年三月初九日, 差門下評理李恬, 齎擎表箋禮物, 赴京去後, 聞知遼王、寧王受封到來。 臣以小邦與遼、寧境壤相近, 特以朝廷爲重, 宜當行禮, 於當年四月初六日, 差前密直使朴原、前密直副使柳雲等, 赴遼王、寧王殿下行禮。 上項李恬, 蓋緣京師道路窵遠, 又兼將齎進獻鞍子禮物, 以致遷延到京。 何敢故意先後! 一款節該: “往歲, 請令王昌來朝, 不許, 其後以王瑤任國事, 又請來朝, 亦不許, 遂令瑤之子奭來朝。 及至朝廷遣還, 却稱其父子不道, 遂行弑逆。 觀其數請來朝者, 意恐中國征伐, 故假此以取信耳。” 欽此前件事理, 竊見前代辛昌、王瑤等, 數請親朝, 瑤乃遣子奭, 親覲天朝。 還國, 與其父恣行不道, 至謀叛逆, 國人厭之, 退歸私邸。 國人咸共推戴於臣, 奏達朝廷, 欽蒙聖慈, 灼知其情, 許臣權知國事。 其王瑤父子, 見令團圝完聚, 保養天年。 一款: “更國號謝恩表箋內, 雜以侵侮之辭。 以小事大之誠, 果如是乎?” 欽此, 前件事理照得, 小邦僻處荒遠, 言語不通, 聞見不博, 粗習文字, 僅達事情。 其於製作, 未諳體格, 以致錯誤, 非敢故爲侮慢。


2月 20日[편집]

왕사 자초를 내전에서 공양하다[편집]

○庚寅/飯王師自超於內殿。


왜적 13명을 죽인 경상도 수군 만호 차준에게 물품을 하사하다[편집]

○慶尙道水軍萬戶車俊捕倭一船, 斬首十三級, 幷所獲兵器以獻。 命賜宮醞綺絹。


권중화 등에게 술을 하사하다[편집]

〔○〕遣使賜酒于權仲和等。


2月 21日[편집]

수창궁에 거동하다[편집]

○辛卯/幸壽昌宮。


삼성에서 왕씨 일족을 섬에 안치하여 모반을 방지코자 했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臺諫刑曹上言: “竊聞防微杜漸, 《春秋》之義也。 臣等頃以恭讓君三父子, 請加天誅, 未獲兪允, 不勝隕越。 臣等竊謂莨莠不除, 則爲嘉穀之害; 奸雄不去, 則必爲社稷之禍。 殿下於王氏, 有屛諸海島者, 有安置外方者, 有召還京師者。 臣等未知屛諸海島者何辜? 安置與召還者, 獨何幸歟? 古人有言曰: ‘獸窮則搏, 人窮則謀。’ 而況王康、王鬲、承寶、承貴內懷奸險, 謀略過人, 雖殿下賞之以恩, 待之以厚, 其心必不知足, 升沈觀望, 必爲後患。 此朝鮮臣子長慮却顧, 爲殿下寒心者也。 願殿下回日月之明, 體《春秋》之義, 卽令攸司, 將上項人等幷其妻孥弟姪, 徙諸海島, 以防未然, 宗社幸甚。” 上不允。


2月 22日[편집]

삼성에서 왕씨 일족을 섬에 안치토록 청하자, 연명 상소하지 말도록 명하다[편집]

○壬辰/臺諫、刑曹同狀啓曰:

恭讓君及諸王氏, 宜置海島。

上召三官掌務諭之曰: “前者, 旣命雖有大事, 不宜同狀。 何不從命? 此事旣敎以深慮, 何急遽若是?” 對曰: “雖已奉敎, 然且同狀者, 以事之大也; 敎之深慮而復啓者, 恐有不虞之變也。”


삼성에서 성문 공사의 감독을 소홀히 한 조반 등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치 않다[편집]

○臺諫、刑曹同章上言趙胖、郭璇等監造城門不能之罪, 上不允。


2月 23日[편집]

삼성에서 왕씨 일족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치 않다[편집]

○癸巳/臺諫刑曹同章論前朝王氏及朴葳之罪, 上留中不下。 伏閤力爭之, 上不允。


권중화와 조준이 무악 천도를 반대하고, 하윤만이 찬성하다[편집]

○領三司事權仲和、左侍中趙浚等回自毋岳啓曰: “毋岳南, 地狹不可遷都。” 唯左道都觀察使河崙獨曰: “毋岳明堂, 雖似狹窄, 然以松都康安殿、平壤長樂宮觀之, 則稍爲寬廣。 且於前朝秘錄及中國通行地理之法, 皆合。” 上曰: “予欲親覽以定。”


2月 24日[편집]

햇무리가 지다. 의비의 기일이므로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다[편집]

○甲午/日暈。 以懿妃(忌晨)〔忌辰〕, 減膳停朝市。


2月 25日[편집]

삼성에서 왕씨의 모반에 연루된 박위 등을 국문토록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편집]

○乙未/臺諫刑曹同章請曰:

嘗聞大逆者不赦, 國之常典。 臣等所以連章不已者, 以此也。 臣等頃以盲人興茂之招, 關涉大體, 連章以聞, 請治其黨, 殿下卽令臺諫法官至水原府按問其狀。 今興茂、仲質招稱: “朴葳潛遣厮人, 卜國安危, 謀立王氏, 以犯大逆。” 願令攸司執送水原府, 與興茂等一處推明, 以杜禍萌。

不允。


2月 26日[편집]

성 쌓는 것을 시찰하다[편집]

○丙申/上觀築城。


삼성에서 왕씨 일족을 귀양보내도록 연명 상소하니 공주 등지로 유배시키다[편집]

○臺諫刑曹同章上言:

昨以去王氏一事, 連章上請, 卽未蒙允, 屢瀆聰聞, 不勝隕越。 竊惟至公無私者, 天也; 至愚而神者, 民也。 天道非禍王氏而福殿下, 乃禍無道而福有道也; 民心非惡王氏而愛殿下, 乃惡無道而愛有道也。 殿下應天順人, 革命開國, 誠宜聽於天而順於人也。 臺諫法官請至再三, 而殿下留章未下者, 獨何歟? 夫肆大眚, 《春秋》之戒也; 能愛人能惡人, 先儒之格言也。 今恭讓, 天命人心已絶, 自知不克, 退處于外, 妻孥之完聚, 朝夕之供億自若。 此則殿下昊天之德也。 不以是爲德, 反謀不軌, 自生釁端, 斯乃天討不易之定理也。 除惡而不務其本, 則奸雄豪俠, 其伏也無窮。 彼仲質、可行之卜, 以有恭讓君也。 其他王氏, 或於京師, 或於畿甸, 橫行無節者, 甚可慮也。 而況王康、王鬲謀略過人, 承寶、承貴驍勇出衆, 皆能挾才以倡禍亂者也。 其內懷不測, 以伺其隙者, 未嘗一日忘于懷, 特機不幸耳。 且光武之於劉氏, 南陽庶孽耳; 先主之於中山, 族屬踈遠矣。 奮臂一呼, 而天下響應, 此可謂明鑑矣。 前朝太祖垂戒後昆, 勿用百濟人。 向使後昆, 遵守其訓, 殿下亦安能有今日也! 此臣等所以敢言者也。 古之人主, 優游不斷, 以致禍亂者, 殿下之所嘗聞也。 願殿下念天道之靡常, 慮民心之難保, 斷以大義, 卽令臺諫法官, 就將恭讓三父子, 置之於法; 其王康、王鬲、承寶、承貴幷其同姓弟姪, 屛諸海島; 其江華付處王氏, 亦竄海島, 以絶中外虞疑之心。

上不允。 臺諫刑曹皆不視事。 上召康等曰: “卿等有功於國家, 不置貶例。 今臺諫上疏論之, 而予不從, 臺諫皆不視事, 不得已而從之。 卿等各歸貶所。 予亦不忘卿等之功”, 賜之酒。 乃流康于公州, 鬲于安邊, 承寶于永興, 承貴于合浦, 臺諫、刑曹乃視事。


왜선 2척을 포획한 수군 만호 차준에게 술을 하사하다[편집]

○慶尙道都節制使報: “水軍萬戶車俊捕倭船二艘。” 遣使賜酒。


왕씨의 모반 사건에 대한 이흥무, 왕화, 석능 등의 공초[편집]

○李居易等復鞫興茂、和、可行、釋能等。 興茂招曰: “去壬申年九月, 逢南平君於義昌貶所。 南平君先卜恭讓君復立可否, 次卜自己命運。 予卜之曰: ‘此命, 君臣慶會, 天地德合之命。 至四十七八歲時運入, 五十以後, 爲將領兵, 必爲大人矣。’ 又有名不知僧在側問卜, 予曰: ‘此爲王師之命。’” 王和招曰: “去壬申年九月, 自義昌貶所, 將入巨濟時, 與三寸叔僧釋能, 問卜於興茂, 卜之曰: ‘是命最好。 入島三年, 然後必出來。 至四十七八歲時, 爲將領兵。 且爲一人之命。’” 釋能招曰: “吾與王琚、王和等, 在義昌貶所, 問卜於興茂。 卜王和之命曰: ‘入島三年, 然後出來。 至四十七八歲時, 將兵, 爲君之命。’” 金可行招曰: “去壬申年十二月, 在東萊縣, 問卜於興茂。 卜之曰: ‘汝命有曰: 「也應金殿玉階行」, 可賀。’ 又前年春, 逢仲質於東萊客舍, 仲質與我言曰: ‘杆城君原子命吉。 吾已書其卜辭, 藏諸囊中矣。’”


2月 27日[편집]

사헌부에 명하여 강화도에 있는 왕씨 일족의 거취를 감시토록 명하다[편집]

○丁酉/命憲司, 點視王氏之老弱于江華以聞。


2月 28日[편집]

풍우가 쳐서 시장의 서쪽 행랑이 무너지고 사람과 말이 죽다[편집]

○戊戌/風雨暴至, 巿邊西廊頹, 人馬多死。


상의문하부사 최영지를 안주 등처 병마 도절제사 겸 안주 목사로 임명하다[편집]

○以商議門下府事崔永沚爲安州、義州、泥城、江界等處兵馬都節制使兼安州牧使。


2月 29日[편집]

경성을 축조하는 인부를 방면하고, 부역하다 죽은 사람의 집에 복호토록 하다[편집]

○己亥/放築城役徒。 敎曰: “前朝之季, 徭役寔繁, 民甚苦之。 予自卽位以來, 思欲安集以期蘇息。 城者, 國家之藩籬, 禦暴保民之所, 不可不備, 故前歲之秋, 徵發京畿、楊廣、西海、交州、江陵之民, 以修都城赴役之後, 或因木石, 或因疾病而殞命者有之, 予甚愍焉。 仰都評議使司, 令所在官司, 限三年復其家, 仍具名以聞。”


삼성에서 박위의 죄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臺諫、刑曹同狀上言曰: “參贊門下府事朴葳送人問卜於興茂, 是謀大逆, 罪在不赦。” 上曰: “卿等之言, 似矣, 然此人之才, 不可不惜。 豈可以難信之言, 遽加罪乎?”


각도의 관찰사에게 수령의 치적을 보고토록 명하다[편집]

○命都評議使司, 移牒各道觀察使, 訪問壬寅以來州郡守令政績以聞。


왕씨의 모반 사건에 대한 왕거·박중질·이흥무 등의 공초[편집]

○李居易等復鞫琚、仲質、興茂等。 琚曰: “去壬申年九月, 在義昌貶所, 和與我言曰: ‘卜吾命於興茂, 曰:「將兵鎭戍之命。」’” 仲質曰: “前年三月, 逢可行於東萊客舍, 出示吾囊中杆城君原子卜命之辭, 且言朴葳欲立原子之事。” 興茂曰: “前年五月, 前知申事李詹先卜自己否泰, 且曰: ‘杆城君在平日, 卜者皆以命吉稱之。 其可復立乎?’ 予對曰: ‘運衰矣。’ 又問: ‘世子命運如何?’ 對曰: ‘本命淺薄。’ 詹曰: ‘原子之命, 何如?’ 對曰: ‘此是晩達之命, 削髮待時爲吉。’ 詹又問曰: ‘南平君之命, 何如?’ 對曰: ‘當時則運衰, 將大達。’”


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서문[편집]

○判義興三軍府事鄭道傳等上書曰:

自古爲國者, 文以致治, 武以(勘)〔戡〕亂, 文武兩職, 如人兩臂, 不可偏廢。 故本朝旣有百司庶府, 又有諸衛各領, 所以備文武之職也。 然府兵之制, 大抵承前朝之舊。 前朝盛時, 唯府兵外, 無他軍號。 北有大遼, 東有女眞, 日本, 侵掠於外, 又有草賊往往竊發於中。 小則中郞將以下, 大則遣上將軍、將軍禦之, 至於不得已而後發郡縣兵, 外攻內守, 傳至四百餘年, 當時府兵之盛, 可知。 無事則肄習兵法, 有事出軍則必爲五陣, 當時兵法之習, 亦可知也。 自忠烈王事元以來, 每因中朝宦寺婦女奉使者之請, 官爵汎濫, 皆以所托之人除衛職, 恃勢驕蹇, 莫肯宿衛。 由是府衛始毁, 始置忽只忠勇等愛馬, 姑備宿衛。 及僞朝法制大毁, 凡受府衛之職者, 徒食天祿, 不事其事, 遂至失國, 此殿下之所親見。 今殿下受天景命, 赫然有爲, 宜革舊弊, 重國勢弭天災, 以致維新之治, 然人見聞習熟, 積弊難改。 王者受命, 必變服色易徽號, 所以一視聽, 革弊而鼎新也。 是以宋太宗以美名, 改易禁軍舊號, 作新士氣。 今我殿下, 將東班官名職號, 一皆更定, 循名責實, 百官趨事赴功, 獨於府衛稱號仍舊, 弊亦如前。 臣等職掌三軍, 不可不慮。 謹將府衛合行事件, 條具于後。 一, 義興親軍左衛改義興侍衛司, 右衛改忠佐侍衛司, 鷹揚衛改雄武侍衛司, 金吾衛改神武侍衛司, 每一司各置中左右前後五領, 屬中軍。 左右衛改龍驤巡衛司, 神虎衛改龍騎巡衛司, 興威衛改龍武巡衛司, 每一司亦各置五領, 屬左軍。 備巡衛改虎賁巡衛司, 千牛衛改虎翼巡衛司, 監門衛改虎勇巡衛司, 每一司亦各置五領, 屬右軍。 右侍衛巡衛等十司, 每一司印信一顆鑄給, 都尉使掌之。 一, 上將軍改都尉使, 大將軍改都尉僉事, 都護諸衛將軍改中軍司馬、左軍司馬、右軍司馬。 將軍改司馬, 中郞將改司直, 郞將改副司直, 別將改司正, 散員改副司正, 尉改隊長, 正改隊副。 都府外改中軍, 司直一、副司直一、司正二、副司正三、隊長二十、隊副二十、左軍司直一、副司直一、司正二、副司正三、隊長二十、隊副二十。 右軍上同。 每一司都尉使一、都尉僉事二。 每一領司馬一、司直三、副司直五、司正五、副司正七、隊長二十、隊副四十。 每一道節制使, 宗室省宰。 副節制使, 中樞。 兵馬鈐轄使, 嘉善, 掌州郡兵一百。 兵馬團練使, 正從三品, 掌州郡兵一百。 以至團練判官, 掌兵有差。 中軍屬京畿左右道、東北面, 左軍屬江陵、交州、慶尙、全羅道, 右軍屬楊廣、西海道、西北面。 一, 今將侍衛, 分屬侍衛巡衛等諸司, 蓋法漢朝南北軍之遺制也。 漢南軍掌宮門侍衛, 北軍掌京城巡檢, 此內外相制, 長治久安, 禍亂不生, 已然明驗。 今將義興、忠佐、雄武、神武爲侍衛司屬中軍, 以寅申巳亥, 上、大將軍各率其領將軍以下, 闕門輪番, 以効漢南軍之制; 龍驤、龍騎、龍武及虎賁、虎勇、虎翼爲巡衛司屬左右軍, 上、大將軍使其領將軍以下, 於梁直更, 巡四門把截, 輪番上直巡綽, 以効漢北軍之制。 其當番各司上將軍以下義興三軍府, 以時知委, 毋致違忤。 凡入直, 不許無故出入, 違者, 罪之。 一, 司楯、司衣、司幕、司彝、司饔, 右件愛馬, 乃前朝之季添設, 宜在革去, 而各有差備, 似難卒革。 然都目爲頭者, 受諸領之職, 以本番事務無閑, 不得隨領, 因此以致侍衛虛踈。 今將各領削除祿官之數, 於司楯第一番, 置司直一、副司直一、司正二、副司正二、給事三、副給事三, 其餘三番及各愛馬, 皆用此例, 以都目爲頭員, 將次第遷轉去官。 如此則有其事者食其祿, 食其祿者事其事, 名實相稱, 不相侵亂, 庶乎平矣。 一, 前朝之季, 乳臭子弟及內僚工商雜隷, 充衛領之職, 猥微冗雜, 不堪其任, 或托權勢, 不事其事, 廩祿徒費, 侍衛虛踈。 今承其弊, 不早革之, 非初服貽謀之善也。 宜令本府及兵曹諸衛領見任者, 監身試藝, 其壯有才者, 復其職; 幼弱者、老病者、無才者、雜類者、托故不仕者, 一皆削之, 更將親軍衛屬原從侍衛員人、訓鍊觀習兵法員人、太乙習算員人, 各令所屬官保擧, 如前監身試聞差備。 一, 凡充衛領之職者及分屬衛領各成衆愛馬, 皆置名籍。 又當侍衛巡綽之番, 某司幾員人、某愛馬幾員人, 明書于籍。 有籍而不宿衛者、無籍而入者, 以時糾治。 除當番宿衛巡綽外, 預習兵陣之法, 能者賞之, 不能者罰之。 一, 軍事以嚴爲主。 其不從判旨, 凡於府衛之法, 有所犯者, 令義興三軍府問備, 重者啓聞, 下法司科斷; 其姦頑不革, 沮毁成法, 惑亂衆聽者, 置之邊方, 以充軍役。 一, 將兵者位卑, 則順從上命, 易於役使, 安守其分。 今朝廷雖有都督、指揮、千戶, 而掌兵者百戶也; 前朝雖有中樞、兵曹、上ㆍ大將軍, 而掌兵者將軍也, 此長治久安之策也。 本朝府兵之制, 已有此意, 使將軍掌五員十將六十尉正, 其大將軍以上, 無與焉。 各道州郡之兵, 亦命兵馬使以下掌之, 節制使以時糾察兵馬使之勤慢, 則體統相維, 兵雖聚, 而無不戢之患。 上從之。


三年 三月[편집]

3月 1日[편집]

수창궁에 거둥하다[편집]

○庚子朔/幸壽昌宮。


삼성에서 박위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치 않고, 석방하여 정무를 보게 하다[편집]

○臺諫刑曹偕進曰: “朴葳不可宥。” 上曰: “卿等之言雖是, 予亦豈不深慮乎? 令速解囚直。” 召朴葳曰: “視事如舊毋惑。 雖千萬人言之, 予不疑矣。”


예조에서 동경과 서경의 구정과 초례를 혁파하고 개경에만 남겨두기를 청하니 윤허하다[편집]

○禮曹狀啓曰: “前朝太祖巡住三京, 故於東西京, 皆設毬庭醮禮, 今更始之初, 不宜因循舊弊。 請除東西京, 只行本京。” 從之。


왕씨의 모반 사건에 대한 왕화, 김유의의 공초[편집]

○李居易、朴信、田時等復鞫王和、金由義等。 和曰: “去壬申年十一月, 定陽君送人于益川君曰: ‘勿以入島爲憂。 吾謀欲復立。’” 由義曰: “去壬申年九月, 見朴葳於峰城田舍。 葳問曰: ‘興茂以吾命爲何如?’ 對曰: ‘厄運。’ 且問以杆城君原子及定陽君之命爲何如, 對曰: ‘皆運衰。’ 葳又謂予曰: ‘更卜右件人等命運以來。’ 予於是年十一月, 還歸密城, 以葳之意告于仲質, 更卜於興茂。 卜之亦曰: ‘運衰。’”


3月 2日[편집]

허위 반란을 고한 김백을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辛丑/幸壽昌宮留宿。 判事張湛入告曰: “有李仁吉告九百餘人同謀爲亂。” 命巡軍萬戶趙琦, 同張湛問仁吉所從聞, 仁吉曰: “聞於隣人金白。” 遂囚金白于巡軍。


3月 3日[편집]

좌시중 조준을 5도 도총제사로, 판삼사사 정도전을 3도 도총제사로 삼다[편집]

○壬寅/上在壽昌宮。 以左侍中趙浚爲交州、江陵、西海、京畿左右五道都摠制使, 判三司事鄭道傳爲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


거센 바람과 눈이 내리고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大風雨雪。 木氷。


왕씨의 모반 사건에 연루된 박위에 대해 말하다[편집]

○田時自水原詣闕, 告于上曰: “臣等所鞫可行、仲質等謀逆黨與, 在於京中, 不可不慮。” 上曰: “朴葳之有異心於我, 非今日而始然, 去庚午年恭讓之遷于漢陽也, 曲聽鄭夢周之言, 而有異心於我矣。 然則其懷不測之心, 非一朝一夕, 而尙未能發焉, 至今日遽何爲哉! 且臨敵對陳, 而敵有來投, 則尙納以爲臣。 況葳, 其才有用, 不可輕絶乎! 或其事爲實, 則以其寵利未滿其心而然也。 待之以厚, 則何有異心? 知而預待, 則葳其如予何! 此特可行、仲質等謂葳可憑而爲亂也。”


3月 4日[편집]

김백을 국문하니 반란이 허위임이 드러나다[편집]

○癸卯/趙琦坐巡軍, 問金白, 白不伏。 召李仁吉, 憑問其事, 乃虛, 命皆放出。 臺諫、刑曹掌務進曰: “今囚巡軍之人, 事關大體, 臣等請按問。” 上曰: “予已審知其虛, 何必更問!”


왜적이 연안부 근처에 침구하다[편집]

○倭寇延安府境。


3月 5日[편집]

이승원을 양광도 도절제사로, 조견을 경상도 도절제사로 삼다[편집]

○甲辰/以李承源爲楊廣道都節制使, 趙狷爲慶尙道都節制使。


3月 6日[편집]

도절제사 휘하의 군관 수를 정하다[편집]

○乙巳/都評議使司狀啓曰: “各道都節制使率行軍官, 宜定其數。 兵馬使、知兵馬使、副使各一, 判官、伴黨各三。” 從之。


3月 7日[편집]

판문하부사 안종원 등이 연산참에 이르렀으나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오다[편집]

○丙午/判門下府事安宗源等至連山站, 不得入而還。


왕씨의 모반 사건에 관련된 이첨을 합포로 귀양보내다[편집]

○前朝知申事李詹以興茂辭連, 流合浦。


하양·수성·계성·안덕 등의 군현을 통폐합하다[편집]

○都評議使司具慶尙道都觀察使閔開報, 啓曰: “請以梨旨縣屬新寧, 安心所屬河陽, 守城屬大丘, 桂城屬靈山, 安德屬松生, 靑鳧屬甫城, 永善屬溟珍, 安康還屬雞林, 吉安屬安東。” 從之。


3月 9日[편집]

시좌궁으로 돌아오다[편집]

○戊申/上還時坐宮。


왜적을 격퇴시킨 창평 현령 신원절과 수군 만호 이지대 등에게 물품을 하사하다[편집]

○全羅道昌平縣令愼原節率軍官, 斬倭七級, 擒一名, 收兵器衣服以獻: 慶尙道水軍萬戶李之帶獲倭一船。 命判校書監事李文和, 齎宮醞綺絹, 往賜之帶、原節。


3月 10日[편집]

목왕의 기일이므로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다[편집]

○己酉/皇高祖穆王(忌晨)〔忌辰〕, 減膳停朝市。


3月 11日[편집]

수미포에서 《오군진도》대로 군사 훈련을 하다. 정도전과 사냥한 동물의 제향을 논의하다[편집]

○庚戌/幸臨津壽美浦, 命判三司事鄭道傳, 講《五軍陣圖》, 且曰: “明日, 吾將親覽焉。” 〔○〕以僉節制使陳忠貴、大將軍李貴齡爲中軍司馬。 召諸節制使敎曰: “前者, 旣命各習陣圖, 明日如有未習者、違令者, 予將罰之。” 又問鄭道傳曰: “古者蒐狩, 獻禽宗廟。 今予春蒐獲禽, 先獻宗廟何如?” 對曰: “獻禽之禮, 固宜。 大享已過, 請於望祭薦之。” 上以爲然。


이원계의 아들인 이조를 상장군으로 삼아 죽은 진안군의 군사를 관장케 하다[편집]

○以前少尹李朝爲上將軍, 掌卒鎭安君所領之軍。 朝, 完山君元桂之子也。


3月 12日[편집]

수미포로부터 수창궁에 갔다가 시좌소로 돌아오다[편집]

○辛亥/上至自壽美浦, 各司迎于崇仁門外。 上入壽昌宮, 至暮還時坐所。


3月 13日[편집]

수창궁에 거동하다[편집]

○壬子/幸壽昌宮。


모반 사건에 관련된 왕화·왕거·김가행 등을 참수하다[편집]

○中丞朴信自水原將各人招辭來啓, 召兩侍中議之。 誅王和、王琚、金可行、朴仲質、金由義、李興茂等; 特宥王瑀、朴葳; 置僧釋能于巨濟島。


3月 14日[편집]

공양군의 3부자를 삼척으로 옮기다[편집]

○癸丑/移置恭讓君三父子于三陟。


왕사 자초의 본향인 삼기 현사를 감무로 승격시키다[편집]

○陞三歧縣司爲監務, 王師自超鄕也。


3月 15日[편집]

환관 조순을 기복시키다[편집]

○甲寅/命宦官曺恂起復。


3月 16日[편집]

내사 노타내 등이 고향에서 돌아오니 잔치를 베풀다[편집]

○乙卯/使臣盧他乃等來自其鄕, 上設宴慰之。


3月 17日[편집]

왜선 3척을 섬멸한 수군 첨절제사 김빈길 등에게 물품을 하사하다[편집]

○丙辰/全羅道都觀察使安景恭報: “水軍僉節制使金贇吉、萬戶金允劒ㆍ金文發等獲倭三艘, 盡殲之。” 上遣使賜弓矢綺絹銀器有差。


3月 18日[편집]

의장과 호위를 갖추어 수창궁으로 옮겨가다[편집]

○丁巳/上備儀衛, 移于壽昌宮。


3月 19日[편집]

내사 노타내 등이 경사로 돌아가니 영빈관에 가서 전송하다[편집]

○戊午/使臣內(使)〔史〕盧他乃等還京師, 上率群臣, 送至迎賓館。


3月 20日[편집]

사헌부에서 사헌 잡단 박저생의 부임을 영접하지 않은 감찰 안이녕을 탄핵하다[편집]

○己未/司憲雜端朴抵生上臺, 監察安以寧等不迎。 以抵生朴葳之族也。 憲司劾以寧不迎之故。


3月 22日[편집]

간관이 박위를 탄핵하자 장무를 불러 꾸짖고, 박위에게 정사를 보도록 명하다[편집]

○辛酉/諫官劾參贊門下府事朴葳。 上召掌務讓之, 命葳視事。


3月 23日[편집]

왜선 1척을 섬멸한 전라도 수군 첨절제사 김빈길에게 물품을 하사하다[편집]

○壬戌/全羅道水軍僉節制使金贇吉, 獲倭一艘, 收兵器以獻, 遣使賜醞及綺絹。


3月 24日[편집]

판문하부사 안종원의 졸기[편집]

○癸亥/判門下府事安宗源卒。 宗源字嗣淸, 順興人, 僉議贊成事文貞公軸之子。 早登第, 入藝文爲檢閱供奉, 秩滿當遷, 以同僚沈東老年高讓之, 使先遷。 文貞聞之, 喜曰: “讓, 德之先也。 吾家殆益昌乎!” 後一年乃遷。 累遷至典法正郞, 出爲慶尙道按廉使。 歲辛丑, 以侍御史出按楊廣道。 紅賊陷京, 恭愍王南遷至竹州, 吏民皆散, 宗源罔知所措, 不能供頓。 恭愍怒, 欲誅之, 賴親臣柳淑營救得免。 甲辰, 拜典法摠郞, 辛旽當國, 以不附, 出爲江陵府使, 有惠政, 去後, 民立生祠以祭。 辛亥, 旽敗, 起拜司憲侍史, 歷左司議、右常侍, 拜大司憲, 入密直爲提學, 陞政堂文學, 又兼大司憲。 壬戌, 知貢擧, 取柳亮等三十三人。 官至門下贊成事、判三司事。 宗源性慈祥寡言語, 號所居亭曰雙淸。 接人以恭, 能與世推移, 以全其身。 然拙於應事, 所至無所建。 至國初, 上以其前朝耆老, 擢爲判門下府事。 以病卒, 年七十一。 上輟朝三日, 遣左政丞趙浚, 祭于殯, 官庇葬事。 諡文簡。 子仲溫、景良、景恭, 皆登第。 仲溫、景良, 官至中樞; 景恭與於開國功臣, 封興寧君: 景儉官至工曹典書。


3月 26日[편집]

명의 사신을 호송하던 요동 군사가 의주 사람 이견실 등을 잡아가다[편집]

○乙丑/西北面都巡問使報: “朝廷使臣至義州, 其護送遼東軍, 虜我義州人李堅實、姜寶鼎、金龍等以歸。”


3月 27日[편집]

남은·남재·조임·정총·하윤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박위를 파직시키다[편집]

○丙寅/以南誾爲三司右僕射, 南在參贊門下府事, 趙琳知門下府事, 鄭摠政堂文學, 河崙簽書中樞院事, 陳忠貴商議中樞院事兼義州等處都兵馬使, (李龜鑯)〔李龜鐵〕商議中樞院事兼定州等處都兵馬使, 趙英茂商議中樞院事兼江界等處都兵馬使, 曺彦商議中樞院事、兼泥城等處都兵馬使。 朴葳罷。


제주에 교수관을 두어 토관의 자제를 교육시키고, 상경시위자에게 천호 등의 관직을 주다[편집]

○都評議使司上言: “濟州未嘗置學校, 其子弟不入仕於國, 故不識字不知法制, 各所千戶, 率皆愚肆作弊。 乞自今置敎授官, 土官子弟十歲以上, 皆令入學, 養成其材, 許赴國試, 又以赴京侍衛從仕者, 許爲千戶百戶, 以給箚付。” 上從之。


三年 四月[편집]

4月 1日[편집]

서리가 내리다[편집]

○庚午朔/隕霜。


돌 던지는 놀이꾼들을 모집해 척석군이라 명명하다[편집]

○命募城中擲石戲者, 名擲石軍。


삼성에서 왕씨를 제거토록 청하니, 윤허치 않다[편집]

○臺諫、刑曹同狀, 請去王氏, 上曰: “諸王氏令聚一處完護。 其歸義君王瑀在麻田奉先祖祀, 勿幷論。”


4月 3日[편집]

척석군을 사열하고 조기에게 거느리게 하다[편집]

○壬申/上坐東涼廳, 召閱擲石軍, 命中樞趙琦領之。


사슴이 선의문에 들어오다[편집]

○麞入宣義門。


봄·가을로 무예를 강습하여 취재하고 훈련관에서 도시를 보아 녹용토록 하다[편집]

○司宰少監宋得師上書曰: “武藝不可不講。 願令中外, 每年春秋講習, 依文科鄕試例取才, 上訓鍊觀都試, 一等超等, 二等次第錄用, 則兵備之計, 得矣。 唐李抱眞爲澤潞節度使, 給民弓矢, 使農隙習射, 至歲暮都試行賞罰。 由是澤潞之兵, 爲諸道最。” 上命施行。


4月 4日[편집]

흠차 내사가 말 1만필과 환관의 가족들을 보내라는 선유와 자문을 가지고 오다[편집]

○癸酉/欽差內史崔淵、陳漢龍、金希裕、金禾等, 持左軍都督府咨來, 上率百官迎于宣義門外。 至闕, 淵等傳宣諭, 馬一萬匹、閹人及金完貴家小與將來。 上跪聽訖, 叩頭問聖躬萬福, 叩頭受左軍都督府咨。 其咨曰:

洪武二十七年二月二十四日, 本府左都督楊文等官, 於奉天門, 欽奉聖旨: “近日澉浦等處守禦官軍, 節次解到賊人胡德等五名供: ‘係高麗守把官差來, 沿海刦掠, 打聽消息。’ 恁左軍文書裏, 開寫各人姓名, 差人去, 說與朝鮮國王某知道, 敎照名解來。” 欽此, 本府今將賊人胡德等供出後項人數, 開寫移咨, 欽依一名名解來, 合取賊人二十五名。

上與使臣行禮訖, 設宴。 淵等, 皆本國閹人。


4月 6日[편집]

진헌 관마소를 설치하고 관리들에게 차등적으로 말을 바치도록 하다[편집]

○乙亥/置進獻官馬所, 令時散各品出馬有差。


4月 9日[편집]

내사 진한룡의 본향인 임주를 부로 승격시키다[편집]

○戊寅/陞林州爲府。 漢龍以鄕請也。


왜선 3척을 섬멸한 전라 수군 첨절제사 김빈길에게 물품을 하사하다[편집]

○全羅道水軍僉節制使金贇吉獲倭三艘, 遣使賜宮醞、綺絹、銀帶、銀盂。


4月 10日[편집]

삼성에서 남은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윤허치 않다[편집]

○己卯/臺諫、刑曹上疏曰:

臣等近以去王氏事, 屢煩聰聽, 未獲兪允, 各自隕越。 竊惟殿下之於王氏, 處之以至公至正, 無一毫嫌猜之心, 雖湯、武之德, 無以加矣, 而王氏乃不顧此, 反以生釁。 向者連章請罪, 支黨伏誅, 餘輩聚居各處, 如有緩急, 恐生不測之患。 《傳》曰: “人窮則謀。” 願殿下深慮之, 斷以大義, 卽令有司執恭讓君父子幷諸王氏, 一皆永絶, 宗社幸甚。

上曰: “三官同狀, 予已禁之, 何得復爾?” 遂留中。


4月 11日[편집]

도당에서 농사를 장려하는 방안을 아뢰니 윤허하다[편집]

○庚辰/都評議使司啓曰: “農者食之本, 軍國所需係焉。 田疇荒蕪, 倉廩虛竭, 則雖有金湯之固、兵革之精, 亦將何用! 乞供上祭祀賓客之用及京外不得已經費外, 祀典不載祭祀及雜汎費用, 一皆禁斷。 且前年早旱晩水, 禾穀大損, 加以築城之役, 民失秋耕。 今春又因其役, 流移失業者頗多, 京城雖所當築, 有妨於農。 乞當農隙, 雙丁則出一丁, 單丁則幷出一丁, 以畢其役。 今後農時則事干叛逆及防倭捕盜外, 如奴婢相爭、宿債追償等, 雜濫不緊之務, 一皆禁斷, 全務農事。 竊聞州縣守令, 不爲用心勸農, 以致公私俱乏。 乞令各道都觀察使以時考察, 游手者歸農, 無食者, 先給義倉之粟, 疾病不能耕種者, 令隣里及族人相助耕種, 勿令失時。 其多占田地, 互相陳荒, 禁他人耕作者, 十負笞一十, 每十負加一等, 罪止杖八十, 許於無田及田少者給耕, 凡可以勸課之事, 一皆擧行。 守令殿最, 以墾田多少, 分爲三等, 以憑黜陟。” 上從之。


4月 14日[편집]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관원들을 삼척, 강화, 거제도에 보내다[편집]

○癸未/臺諫、刑曹進曰: “臣等願允前日之請。” 上曰: “三官同章, 已曾禁之, 不從何耶?” 初臺諫、刑曹雖屢上疏請去王氏, 上心不忍, 不允其請。 至是, 伏閤力爭者累日, 上敎都評議使司曰: “去王氏, 予所不忍。 宜集大小各司、閑良、耆老, 各陳可否, 實封進呈。” 都評議使司會百司、耆老於壽昌宮, 告之曰: “前朝王氏, 天命已去, 人心已離, 自速天討。 殿下以好生之德, 保全性命, 恩德至重, 而王氏等反生疑貳, 潛謀不軌, 於法不容。 其區處王氏者, 實封啓聞。” 於是, 兩府、各司、耆老等皆以爲: “盡去王氏, 以防後患。” 惟書雲、典醫、料物庫員等數十人言: “宜流海島。” 命使司更議以聞。 使司啓曰: “宜從衆議。” 上從之。 傳旨曰: “王氏區處, 一依各司實封, 以王瑀三父子奉祀先祖, 特宥之。” 遣中樞院副使鄭南晋、刑曹議郞咸傅霖于三陟, 刑曹典書尹邦慶、大將軍吳蒙乙于江華, 刑曹典書孫興宗、僉節制使沈孝生于巨濟島。


왜선 1척을 섬멸한 경상도 수군 첨절제사 안처선에게 물품을 하사하다[편집]

○慶尙道水軍僉節制使安處善捕倭一艘, 遣使賜宮醞綺絹。


내사 최연 등이 근친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다[편집]

○使臣崔淵等歸覲其鄕。


4月 15日[편집]

윤방경 등이 강화에 있던 왕씨 일족을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이다[편집]

○甲申/尹邦慶等投王氏于江華渡。


도당에서 호조 급전사의 전제에 의거하여 아뢰니 윤허하다[편집]

○都評議使司具戶曹給田司田制, 狀申, 上允之。


4月 16日[편집]

경기 수군 절제사 이희충을 좌도에, 최칠석을 우도에 보내다[편집]

○乙酉/遣京畿水軍節制使李希忠于左道, 崔七夕于右道。


4月 17日[편집]

우박이 내리다[편집]

○丙戌/雨雹。


전 충주 절제사 황군서를 제주에 보내 선위케 하다[편집]

○遣前忠州節制使黃君瑞, 宣慰濟州。


삼척의 공양군에게 교지를 전하고, 그와 두 아들을 교살시키다[편집]

○鄭南晋等至三陟, 傳旨於恭讓君曰:

臣民推戴, 以予爲君, 實惟天數。 令君就居關東, 其餘同姓, 各歸便處, 保安生業。 今東萊縣令金可行、鹽場官朴仲質等欲圖不軌, 以君及親屬之命, 卜於盲人李興茂, 事覺伏罪。 君雖不知, 事至如此, 臺諫法官, 連章上請, 至于十二次, 累日固爭, 大小臣僚又上書爭之, 予不獲已, 勉從其請, 君其知悉。

遂絞之, 及其二子。


4月 19日[편집]

역대 부국 강병의 방법과 임적 응변의 계책을 상고하여 보고토록 하다[편집]

○戊子/命藝文館、成均館、校書監, 考諸歷代經史所載富國强兵之術, 與夫臨敵應變之策, 開寫以聞。


4月 20日[편집]

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다[편집]

○己丑/孫興宗等投王氏于巨濟之海。


중앙과 지방에 왕씨의 남은 일족을 찾아 모두 죽이다[편집]

○令中外大索王氏餘孼, 盡誅之。


감무를 두었던 삼기현을 군으로 승격시키다[편집]

○陞三歧監務爲郡。


4月 21日[편집]

종묘의 공사를 중지하다[편집]

○庚寅/罷宗廟之役。


4月 22日[편집]

도당에서 예조의 무관이 접견하는 예도에 의거하여 아뢰니 윤허하다[편집]

○辛卯/都評議使司具禮曹詳定諸衛上將軍至尉正相接禮度以聞, 上從之。


정도전이 임금에게 매일 장상들을 불러 군국의 일을 의논하기를 청하니 윤허하다[편집]

○判三司事鄭道傳上言: “昔在成周, 人心忠厚, 然武王有疾, 而周公以謂其勿穆卜, 身欲代死, 蓋恐新造之邦, 人心搖動也。 今殿下不出聽政, 臣庶以爲疾病彌留。 願殿下每早朝, 必坐正殿, 召諸將相, 共議軍國之事。” 上嘉納之。


4月 25日[편집]

변방을 침입한 사람들을 압송하라는 좌군 도독부의 자문[편집]

○甲午/欽差內史黃永奇等三人齎左軍都督府咨以來, 設綵棚儺禮, 上率百官, 出宣義門, 迎入壽昌宮。 其咨曰:

洪武二十七年三月二十日, 本府僉都督李增枝等官, 於奉天門欽奉聖旨: “近日澉浦等處守禦官軍, 節次解到賊人胡德等五名, 供: ‘係高麗各處守把官差來, 沿海刦掠, 打聽消息。’ 恁左軍文書裏, 將續供出來的人幷前日去的人姓名, 開寫去, 敎【上諱。】長男或次男, 親自解來。” 欽此, 本府除欽遵外, 今將後項合取人數開坐, 移咨照驗, 欽依照名解來。 一合取四十二名, 先次供出人二十五名, 今次續供出人一十七名。 總兵雲、萬戶原成、東寧誘引女眞人三名, 俱係西北面土城碧屯口子住, 百戶金成、品官林擧輪、外郞李君必、千戶金完貴家小一十三名。

右永奇等三人, 皆我國所遣閹人也。


4月 26日[편집]

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편집]

○乙未/令前朝賜姓王氏者, 皆從本姓。 凡姓王者, 雖非前朝之裔, 亦從母姓。


4月 28日[편집]

여흥군에 우박이 내리다[편집]

○丁酉/雨雹驪興郡。


내사 황영기 등이 근친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다[편집]

○黃永奇等三人歸覲其鄕。


정윤 이영의 졸기[편집]

○正尹英卒, 停朝巿三日。 英, 上庶弟也。 群臣會弔。


4月 29日[편집]

환왕의 기일이므로 왕비와 함께 경천사에 가서 재를 올리다[편집]

○戊戌/桓王(忌晨)〔忌辰〕。 上與中宮, 幸敬天寺, 安桓王眞, 仍設齋, 講《華嚴三昧懺》。


三年 五月[편집]

5月 1日[편집]

왕비와 함께 경천사에서 돌아오다[편집]

○己亥朔/上與中宮, 至自敬天寺。


5月 3日[편집]

곰 새끼를 후원에서 기르다[편집]

○辛丑/有獻熊兒者, 令畜後苑。


5月 5日[편집]

동량청에 앉아 척석희를 구경하다[편집]

○癸卯/上坐東涼廳, 觀擲石戲。


5月 6日[편집]

가뭄으로 종묘와 사직에 기우제를 지내다[편집]

○甲辰/以旱禱雨于宗廟、社稷。


5月 8日[편집]

가뭄으로 절과 신사에 기우제를 지내고, 시장을 옮기다[편집]

○丙午/以旱徧禱于佛宇、神祠, 徙巿。


5月 9日[편집]

가뭄으로 죄인을 사유시키다. 왕사를 청해 기우하고, 소격전에서 초제를 지내다[편집]

○丁未/以旱宥二罪以下囚。 上請王師祈雨, 醮太一于昭格殿, 祈雨。


5月 11日[편집]

비가 오다[편집]

○己酉/雨。


5月 12日[편집]

많은 비가 오다[편집]

○庚戌/大雨。


5月 14日[편집]

갈대 공급지인 조은도를 재상에게 절급한 급전사 장무를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壬子/命繕工監, 造涼廳補簷。 繕工啓曰: “古者, 助隱島屬監, 每秋刈薍, 以供國用。 今給田司屬之科田, 給參贊門下府事鄭熙啓, 涼廳遮陽, 難以薍蓋。” 上曰: “前朝恭讓以此地, 私與其子, 非美事也; 今給田司因屬科田, 不顧國用, 求媚宰相, 非義也。” 卽下給田司掌務李載于巡軍, 使繕工監丞朴子良踏驗。


5月 15日[편집]

효비의 기일이므로 감선하고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다[편집]

○癸丑/以皇曾祖妣孝妃(忌晨)〔忌辰〕, 減膳停朝巿。


5月 16日[편집]

이재를 사면하다[편집]

○甲寅/宥李載。


5月 20日[편집]

명나라 내사가 돌아가다. 본국 출신의 내사 진한룡이 행패부리다[편집]

○戊午/使臣崔淵、陳漢龍等還, 獻閹人五名于帝。 上率群臣送至宣義門外, 都評議使司餞于西普通樓。 漢龍醉而發狂, 乃曰: “前來使臣, 待之以厚, 今待我以薄, 何歟?” 遂裂衣踏之曰: “衣此麤衣, 入見於帝, 寧死於此”, 欲自刺, 諸相皆避。 接伴使金立堅進執其臂曰: “天使何爲至此?” 漢龍欲肆毒, 以立堅力强言恭, 乃止。 上遣中樞院事陳忠貴, 齎衣與之。 時帝遣使皆用我國閹人。 使臣到國傳命訖, 卽歸其鄕, 狂悖類此, 州郡苦之。


요동 도사가 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달라는 주문을 보내다[편집]

○遣司水監宋希靖, 管押金完貴家小赴京具奏曰:

洪武二十七年二月初七日, 有馬軍一十餘名, 到來鴨綠江邊馬山下。 義州萬戶呂稱謂是上國使臣到來, 卽遣州人金伯顔等三名, 過江迎接, 上項馬軍, 却將伯顔等捉去。 又於當年三月二十一日, 有欽差內史四員, 幷遼東百戶軍人三十名, 到來婆娑府江邊, 義州萬戶呂稱過江迎接, 上項護送軍, 却將通事金龍、鎭撫金寶鼎、千戶李堅實等三名捉去。 切念小邦, 臣事聖朝, 略無疑貳, 與遼東都司, 境壤連接, 只隔一江, 凡遇朝廷欽差使命及遼東差使到來, 義州官吏必先過江迎接。 今後邊境百姓, 於使命到來, 心生疑懼, 違忤迎接, 以致得罪。 伏望聖慈, 令遼東都司, 將前項二次捉去金伯顔、李堅實等, 推究放還, 以安小邦邊境民心。


5月 23日[편집]

왜적이 풍주에 침구하다[편집]

○辛酉/倭寇豐州。


궁중의 어린 내시들에게 《대학》을 읽게 하다[편집]

○使宮中小宦等, 讀《大學》書。


경기우도 수군 절제사 최칠석의 졸기[편집]

○京畿右道水軍節制使崔七夕病卒于軍。 七夕, 完山人。 身長大, 時人無與竝者。 每受命騎船, 以備倭寇, 未有獻功, 亦不至敗。 官至密直副使。 子億龍、萬龍。


5月 28日[편집]

일본 회례사 김거원이 포로되었던 569명을 데리고 오다[편집]

○丙寅/日本回禮使金巨原與僧梵明, 領被擄本國人五百六十九名以來。


5月 30日[편집]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여 바치다[편집]

○戊辰/判三司事鄭道傳撰進《朝鮮經國典》, 上觀覽嘆美, 賜廐馬、綺絹、白銀。


三年 夏六月[편집]

6月 1日[편집]

도평의사사에서 의복 기구 패물 등의 검소화에 대해 건의하다[편집]

○己巳朔/都評議使司上言:

今當卽位創始之初, 凡工作服飾器玩, 務從儉約, 垂法萬世。 紗羅、綾綺, 各色眞彩, 異方難繼之物, 金銀又每歲進貢上國, 尤爲難繼, 而乃上下通用, 人無定志, 況見利之徒, 因謀貿易, 潛行越境, 以生釁端, 其害不淺。 願自今紗羅、綾綺及金銀粧飾之物, 進上服用及各官品帶外, 兩府以下至於庶人, 一皆禁止; 公私家舍及寺院, 勿用眞彩; 承旨以上外, 不許用金玉纓子; 其油蜜果、絲花鳳、金銀著、彩花草, 上國使臣燕享外, 亦皆禁斷。

上曰: “紗羅、綾綺、金銀、珠玉, 各品官服鞍轡等級, 更議申聞。 其潛行越境興利者, 勿論錢物多少, 首從皆誅。”


김영렬을 경기우도 수군 첨절제사로 삼다[편집]

○以前典書金英烈爲京畿右道水軍僉節制使。


종친 상장군 이조가 간통죄를 범하여 그 처벌을 남은이 논하다[편집]

○上將軍李朝夜至前漢陽判官朴德彛家, 執奸其女。 上大怒, 命囚朝于巡軍。 朝逃, 令巡軍大索中外, 令曰: “有敢匿者, 罪之。” 右僕射南誾進曰: “今殿下大索李朝, 朝若出, 則殿下將若之何?” 上曰: “罪之以律。” 誾曰: “殿下若罪朝, 則親親之恩傷矣; 不罪朝, 則法令廢矣。 朝不出, 殿下親親之恩全, 而法令不廢矣。 何索之太甚耶?”


고려조 왕비와 족친들의 공상은 폐지하고 월봉을 주도록 하다[편집]

○憲司上言: “前朝之妃與母及族, 封爲宮主、翁主、國大夫人, 或供上或月俸, 請皆停罷。” 上曰: “除供上, 竝給月俸。”


정안군이 명나라에 입조하겠다 하니 남재가 따라가기를 자청하다[편집]

○上謂殿下曰: “天子若有所問, 非汝莫能對。” 殿下對曰: “臣爲宗社大計, 豈敢辭避!” 太祖揮淚曰: “汝體質羸瘦, 萬里之路, 其能保其無恙乎!” 朝臣皆爲殿下危之。 南在曰: “靖安君有萬里之行, 吾輩安可枕枕死於此乎!” 請自行。


6月 7日[편집]

국호 및 왕의 호칭 문제에 대한 표문을 정안군과 지중추원사 조반이 명나라에 가지고 가다[편집]

○乙亥/上遂命我殿下及知中樞院事趙胖進表, 參贊門下府事南在進箋。 表曰:

欽差內史黃永奇等至, 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節該: “將解到賊人胡德等供, 出來的人姓名開寫去, 敎某知道, 長男或次男親自解來。” 欽此。 誡命有嚴於自天, 述職莫親於遣子。 玆將卑懇, 庸瀆聰聞。 切念臣蒙上至恩, 致身今日。 謹修蕃宣之職貢, 每通行李之往來。 於洪武二十六年, 節次遣陪臣金立堅, 齎擎表箋, 謝賜馬價; 陪臣尹思德齎擎表文, 進賀聖節, 俱蒙遼東都司稱有聖旨, 阻當回還。 欽此, 卽遣陪臣李至, 請通道路, 又遣陪臣朴永忠進賀千秋, 陪臣慶儀進賀二十七年正朝, 俱到遼東, 仍蒙都司如前阻當回還。 欽此, 一國臣民兢惶無奈間, 當年十二月初八日, 欽差內史金仁甫等來至, 承準左軍都督府咨, 欽奉聖旨。 內一款, “朝鮮已許自爲, 卽合正名。 今更號朝鮮, 表文仍稱權知國事, 未審何謀?” 欽此。 臣愚以爲國號, 則旣已欽依明降, 更號朝鮮, 王爵則未蒙頒降, 國王名爵, 不敢稱王。 今來欽奉聖旨, “卽合正名。” 欽此。 又承準左軍都督府咨內, “右咨朝鮮國王。” 準此, 欽遵施行, 修撰表箋, 遣陪臣安宗源等赴京謝恩, 到遼東, 如前蒙都司阻當回還。 臣與國人, 尤增隕越, 仰皇天而永號, 冀聖心之克灼, 尙慮路阻, 未達旒聰。 何圖睿恩之忽霑, 許令賤息以入覲! 如窮子之投母, 若行者之赴家, 感與喜幷, 涕從言出。 所據劉肚兒等, 究求本邦之人氏, 竝無此等之姓名。 唯任葛龍義之爲林擧輪與藜均皮力之爲李君必, 或因職役之相似, 或因聲韻之偶同, 推類以求, 發解已去, 豈於劉肚兒等, 獨自占吝, 故令勒留! 臣又以爲胡德等所供打聽消息, 尤爲誣妄。 日月中天, 凡有耳目者, 莫不知見; 聖神御極, 凡有血氣者, 莫不尊親。 顧我小邦, 臣事聖代, 久諳人民甲兵之富, 深服禮樂刑政之修。 何至待小兒之行, 然後知中國之事! 況本無疑貳之心, 又安有覘窺之謀? 如此事情, 已曾具本奏達去訖。 伏望皇帝陛下, 推字小之仁, 擴包荒之量, 憐臣抱屈而無訴, 許臣効忠而自新。 臣謹當永爲蕃翰於一邦, 恒祝康寧於萬世。


6月 11日[편집]

도평의사사에서 개성부의 규율을 엄중히 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己卯/都評議使司上言:

開城府依漢、唐京兆府例, 專掌肅淸王都。 前朝之季, 法令廢弛, 群小之徒, 不孝於親, 不睦於族, 隣里不相助, 擅徵宿債, 抑買市物, 或有疾病不救, 死亡不藏, 人倫風俗, 甚爲不美。 今後開城府, 嚴加考察, 掛榜通曉禁止, 如前犯令者, 切隣及坊里色掌, 各告其部, 傳報開城府, 以行痛懲, 其不進告者, 以其罪罪之, 府及五部令不受治者, 依律論罪。” 上從之。


6月 16日[편집]

태조의 선대 종계를 변무하고 정탐군을 보낸 적이 없음을 말한 주본[편집]

○甲申/使臣黃永奇等還, 上撰奏本一道, 就附以進, 送至迎賓館。 奏曰:

洪武二十七年四月二十五日, 欽差內史黃永奇等至, 欽奉到告祭海岳山川等神祝文內節該: “爲昔高麗陪臣李仁任之嗣某今名某者, 或明遣人覘視, 或暗行窺伺, 誘我邊戍, 殺掠沿海居民, 及誘引爲非。 如此構禍, 卽欲興師問罪, 然大兵入境, 傷生必衆, 所以未敢輕擧。 且高麗, 三環海一負山, 地方數千里, 周回險阻, 天造地設, 其間主生民者, 非帝命不可。 今觀李某所爲, 似非奉帝命主生民者。 予欲昭告上帝, 又恐輕易, 有煩帝聽。 今遣人先告于神, 惟神察其所以, 達于上帝。 彼若肆侮不已, 問罪之師, 在所必擧。” 欽此, 臣不勝隕越。 切念臣先世, 本朝鮮遺種。 至臣二十二代祖翰仕新羅爲司空, 及新羅亡, 翰六代孫兢休入高麗, 兢休十三代孫安社仕于前元, 是臣高祖。 自後世不受高麗官爵。 及元季兵興, 臣父子春, 率臣等避地東來, 以臣粗習武才, 置身行伍, 然臣官未顯達。 自高麗恭愍王薨逝, 至僞姓辛禑十六年, 權臣李仁任、林堅味、廉興邦等, 相繼用事, 流毒生民, 罪盈惡稔, 自取誅戮。 以臣素心謹愼, 無有他過, 擧臣爲門下侍中, 方與國政。 前件事理, 臣已曾具本, 奏達去訖。 臣於仁任, 本非一李。 自臣與聞國政, 將仁任所爲不法, 一皆正之, 反爲其黨所惡, 至有尹彛、李初逃赴上國, 妄構是非, 尙賴陛下之明, 已伏厥罪。 然其黨與, 潛伏中外, 忌臣所爲, 至今紛紛不已。 臣又切念天人上下, 一理洞達, 陛下之心, 卽上帝之心。 臣蒙陛下之德, 爲陛下之臣, 而明遣窺覘, 暗行窺伺, 誘引邊戍, 殺掠居民, 罪莫大焉, 而曰無有, 則是罔上也。 爲臣之罪, 莫大於罔上, 無以生於聲敎之中矣。 苟如罔上, 是欺天也。 爲人之罪, 莫大於欺天, 無以容於覆燾之下矣。 山川鬼神, 森列左右, 若苟有欺天罔上之罪, 豈不以臣之罪, 告于上帝, 降禍於臣身? 臣不勝惶懼震越之至。 謹冒昧以言, 伏望聖慈俯加哀矜。


판봉상시사 김을상이 진헌마 오백필을 요동에서 교부하고 돌아오다[편집]

○以崔淵所傳宣諭, 遣判奉常寺事金乙祥, 押進獻馬五百匹, 至遼東交割而還。


6月 18日[편집]

남의 녹봉을 받아 썼다 탄로난 겸 상서 녹사 변혼이 달아나다[편집]

○丙戌/兼尙瑞錄事卞渾逃。 先是, 渾私薦二人, 俾受尉正, 受祿自用, 至是事覺, 憲司劾之。


6月 19日[편집]

지문하부사 조임을 보내 성절 축하 표문을 올리다[편집]

○丁亥/遣知門下府事趙琳, 表賀聖節。


6月 20日[편집]

기탄의 물이 붉게 되다[편집]

○戊子/歧灘水赤。


6月 21日[편집]

지중추원사 황보임의 졸기[편집]

○己丑/知中樞院事皇甫琳卒。 琳, 永州人, 晋州牧使安之子。 在前朝, 從舅平章事安祐, 屢更攻戰, 初授別將, 累遷至工部侍郞。 祐敗, 居閑數年。 恭愍王謂琳從祐久, 識達軍務, 起爲宗簿令, 遷判宗簿寺事, 從判三司事崔瑩伐濟州。 至僞朝, 陞典法判書、密直副使, 再爲全羅道都巡問使。 歲戊辰, 從上至威化島, 與議回軍, 功在一等。 出爲楊廣、慶尙、全羅道都體察使, 擊倭寇于南原。 及還, 又出爲西北面都節制使、平壤尹。 上卽位, 召拜知中樞院事, 至是病卒, 年六十二。 致賻以禮。 二子: 琠、仁。


6月 23日[편집]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양광도·강릉 교주도·서해도를 개칭하다[편집]

○辛卯/都評議使司請以京畿州縣殘盛廣狹, 改定左右道。 長湍、坡平、見州、沙川、抱州、豐壤、瑞原、幸州、深岳、漢陽、富原、果州、鐵原、永平、僧嶺、朔寧、赤城、臨江、麻田、松林、漣州、高峯、交河、衿州、陽川、南陽、安山、仁州、兔山、安峽屬左道, 開城、江陰、海豐、白州、延安府、平州、載寧、江華、鎭江、河陰、喬桐、瑞興、牛峯、新恩、俠溪、遂安、谷州、富平、童城、通津、守安、金浦、德水屬右道。 改楊廣道爲忠淸道, 江陵、交州道爲江原道, 西海道爲豐海道。


6月 24日[편집]

신하들의 보필을 당부하고 관찰사를 천거하게 하다[편집]

○壬辰/命都承旨韓尙敬, 傳旨于都評議使司曰:

王氏絶祀, 天乃俾予肇造邦家, 實爲斯民也。 若不敬天勤民, 天之降殃必矣。 自古以來, 世之所以未治者, 君臣未得相遇也。 予雖否德, 每謂卿等應時而出, 爲我股肱, 以創大業, 宜與夙夜礪精, 以答天意。 古人云: “未聞以千里畏人者也。” 我國地方二三千里, 苟明政令, 何畏於人! 予因老病, 倦於聽斷, 但保卿等耳。 願治之心, 豈敢忘於須臾! 卿等宜各盡心, 以補不逮。 觀察使必須愼簡。 得其人, 則一方受其賜; 不得其人, 則一方受其弊。 宜各擧所知, 具名以聞。

侍中趙浚、金士衡等感泣而對曰: “臣等俱以庸愚, 獲遭聖上, 敢不盡竭心力, 以補萬一! 擇遣觀察使, 誠如上敎。 請令臺諫薦擧。” 又曰: “今侍衛軍士, 夙夜効勞, 多未霑祿食; 近侍忠勇及諸衛受職者, 多不稱任。 願令侍衛軍士, 遞受其職。 其餘事理, 隨卽申聞。” 尙敬復命, 卽召臺省掌務曰: “承旨、典書以上可當觀察之任者, 不拘時散, 具名以聞。”


사헌부 이근 등이 금주령 해제를 철회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司憲府李懃等上言: “前者禁酒之令, 限以豐年, 今二十三日, 命罷禁令。 當創業之初, 凡有法令, 不可輕改。 願自今京外公私宴飮迎餞, 限豐年禁之。” 兪允。


정도전이 부병 시위 제도에 관한 저술을 하다[편집]

○判三司事鄭道傳撰歷代府兵侍衛之制, 論府衛之弊與今府兵沿革事宜, 爲圖以獻。


6月 25日[편집]

대간에서 천거한 사람들을 각도의 도관찰출척사로 임명하다[편집]

○癸巳/以臺諫所薦, 除各道都觀察黜陟使。 崔有慶于慶尙, 洪吉旼于豐海, 吳思忠于江原, 金希善于京畿右道。


전 삼사 우복야 윤사덕의 졸기[편집]

○前三司右僕射尹師德卒。 師德, 雞林杞溪人, 性醇厚無忤於人。 病卒。 無子。


6月 26日[편집]

도평의사사에서 직품에 따라 금·은·옥 등의 사용을 제한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甲午/都評議使司具禮曹詳定狀啓曰: “進上儀物外, 臣下毋得用金; 兩府外, 毋得服紗羅綾綺、玉纓子、環子; 嘉善以下六品以上, 酒器外, 毋得用銀; 七品以下, 酒器亦不許用銀。 品帶及臺省員頂子, 不在此限。 庶人及工商賤隷, 雖有職者, 毋得用銀絹斜皮; 婚姻者亦依職品, 毋得僭用。” 從之。


명나라에 압송되었던 임거륜과 이군필이 돌아오다[편집]

○林擧輪、李君必來。 初以五軍都督府咨, 責取人姓名相近解送, 帝遣還。


6月 27日[편집]

명나라에서 이견실·강보정·김용 등이 돌아오다[편집]

○乙未/李堅實、康寶鼎、金龍等來。 堅實等至, 帝引見問我邊境事, 還遣。


서운관 관원이 무악이 수도로 좋지 않다고 하니, 다른 곳을 물색하게 하다[편집]

○上敎都評議使司曰: “毋岳新都之地, 前旣命十餘宰相觀之, 今旣一定, 而書雲觀員劉旱雨、李陽達等乃曰: ‘以臣所學觀之, 非定都之地也。’ 國之大事, 莫重於此。 或可或否, 宜會前日往觀宰相與書雲觀員, 問其是非, 擬議以聞。” 領三司事權仲和、右侍中金士衡與諸宰相, 具書雲觀所言以進曰: “皆不可。” 上曰: “令此輩更相吉地。”


6月 29日[편집]

민제를 동북면에 보내어 4대 능소에 제향을 올리다[편집]

○丁酉/遣藝文春秋館太學士閔霽于東北面, 祭四代山陵。


三年 七月[편집]

7月 2日[편집]

서운관 관원이 새 도읍 후보지로 불일사와 선고개를 아뢰다[편집]

○己亥/書雲觀員進啓可都之地曰: “佛日寺爲首, 鐥岾次之。”


이견실 등을 석방시켜 준 것에 감사하는 주문[편집]

○以李堅實放回事, 具奏本謝恩于帝, 令節日使趙琳齎進。 其奏曰:

洪武二十七年三月二十一日, 遼東都司差人到鴨綠江, 千戶李堅實、鎭撫康寶鼎、通事金龍等三名過江迎接, 致被捉去。 邊境居民, 驚恐無奈, 具本奏達間, 洪武二十七年六月二十八日, 前項李堅實等三名前赴京師, 欽蒙宣諭放回, 具言重蒙聖恩, 賞賜回還。 臣與國人欣感罔極。


7月 3日[편집]

전 지밀직사사 안숙로의 졸기[편집]

○庚子/前知密直司事安叔老卒。 叔老, 順興人, 竹城君克仁之子。 性端謹, 稍讀書, 有志於事功, 以病卒。 子望之、敬之。


7月 4日[편집]

선고개가 천도지로 마땅치 않다 하여 남은이 서운관 관원을 꾸짖다[편집]

○辛丑/都評議使司相遷都之地于鐥岾, 其地不可。 右僕射南誾罵李陽達曰: “汝等挾地理之術, 屢以不稱之地爲可都, 以冒上聰, 宜痛懲戒後。”


7月 5日[편집]

불일사가 천도할 곳으로 마땅치 못하다[편집]

○壬寅/都評議使司, 相遷都之地于佛日寺, 其地亦不可。


귀국하던 섬라곡 사신이 일본에서 겁탈당하고 되돌아오다[편집]

○暹羅斛使人張思道等回來曰: “前年十二月, 與回禮使裵厚到日本, 被賊刦掠, 禮物資粧, 燒盡無餘。 乞許更粧船子, 待今年冬發還本國。” 乃獻刀甲、銅器、黑厮二人。 上視朝, 命禮曹引暹羅斛人就班。


연안과 배주에 황충이 일다[편집]

○延安、白州蝗。


성 안에 까마귀가 많이 모여들다[편집]

○城中多烏。


7月 7日[편집]

제주도인 고봉례 등이 말 백 필을 바치다[편집]

○甲辰/濟州人高鳳禮等來獻馬百匹, 賜米百斛。


7月 11日[편집]

차사올을 사금, 동산색을 상림원으로 고치다[편집]

○戊申/改車沙兀爲司禁, 東山色爲上林園。


도평의사사에서 음양 산정 도감의 설치를 건의하다[편집]

○都評議使司啓曰: “地理之學未明, 人人各執所見, 互相同異, 眞僞難辨。 前朝相傳秘錄, 亦有同異, 邪正難定。 請置陰陽刪定都監, 勘校一定。” 上從之。


7月 12日[편집]

음양 산정 도감을 설치하다[편집]

○己酉/置陰陽刪定都監。 令領三司事權仲和、判三司事鄭道傳、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三司右僕射南誾、政堂文學鄭摠、僉書中樞院事河崙、中樞院學士李稷、大司憲李懃、平原君李舒與書雲觀員, 集地理圖讖諸書, 參考刪定。


7月 13日[편집]

일본 구주 절도사가 왜구에게 잡혀갔던 659명을 돌려보내다[편집]

○庚戌/日本國九州節度使源了俊使者, 與我所遣僧梵明來, 歸我被擄男女六百五十九人。 梵明持猿子以獻, 命置司僕寺。


중국과 틈이 생기게 한다 하여 중들의 서북면 왕래를 금하다[편집]

○敎都評議使司曰: “予聞遼陽人謂我曰: ‘朝鮮所以生釁者, 僧徒爲之遊說耳。’ 自今僧徒往來西北面者, 令皆誅之。”


7月 14日[편집]

왜구가 해주에 침입하여 병선 1척을 빼앗아 달아나다[편집]

○辛亥/倭寇突入海州, 奪我兵船一艘以歸。 僉節制使金贇吉追之不獲。


7月 15日[편집]

명나라 사신에 의탁하여 폐단 끼치는 무리를 징계하다[편집]

○壬子/憲司啓曰: “近者, 姦兇之徒, 依托使臣, 作弊中外。 宜考迎接都監所錄, 一一痛懲。” 從之。


7月 17日[편집]

왕씨들의 복을 빌기 위해 금으로 《법화경》을 쓰고 읽게 하다[편집]

○甲寅/上以薦王氏, 命前禮儀判書韓理、前右尹鄭矩、奉常卿曹庶、前獻納權弘、前司僕注簿卞渾等, 金書《法華經》四部, 分置各寺, 以時披讀。 先時, 渾犯罪在逃, 上以渾善書, 幷命之。


백관들에게 무쇠를 내게 하여 무기를 만들다[편집]

○令百官各品, 出鐵有差, 納軍器監, 以造兵器。


7月 18日[편집]

사헌부에서 명나라 사신에게 의탁하여 작폐한 자를 문초하고 아뢰다[편집]

○乙卯/憲司劾問依托使臣作弊者, 開具姓名罪狀以聞。 上曰: “尤甚者, 置極刑; 欲受官職者, 皆充水軍。 黃永奇向國忠厚, 請亦不多, 其托永奇者, 勿竝論。”


호조 전서 이민도가 전폐 사용을 청하다[편집]

○戶曹典書李敏道請行錢幣。


7月 19日[편집]

장마철이며 농번기라 무악에 도읍 정하는 시기를 늦추다[편집]

○丙辰/上欲觀毋岳之地, 將以爲都。 門下府郞舍上書:

時尙炎霾, 動勞未便。 且農民亦未得暇, 待八月旣望, 亦未晩也。

從之。


7月 21日[편집]

숙위군 위령의 기강 확립에 대한 의흥 삼군부의 장계[편집]

○戊午/義興三軍府狀啓曰:

前朝之季, 府兵大毁。 今當更始之初, 釐革舊弊, 擧行成法。 嚴宿衛備非常, 尊主威重國勢, 關係甚重, 各宜盡心遵守。 其中無識之徒, 受衛領之職, 不思國家設官之義, 只以不便於己, 交口訕謗, 沮毁成法, 其爲不忠甚矣。 願自今有如前沮毁者, 令憲司啓聞論罪, 除名不敍, 其衛領掌務, 知情不告者, 與同罪。

從之。


도성 축조 부역의 기피에 대한 도평의사사의 장계[편집]

○都評議使司狀啓曰: “往者築城之役, 令坊里之人赴之, 壯實者百計窺免, 殘疾之戶, 乃出兒女, 甚爲非理。 自今凡有家者皆出壯丁, 大戶出二名, 中戶一名, 小戶幷三一名, 如有闕役者及兒女赴役者, 戶主論罪。” 從之。


경비의 기신(忌辰)이므로 감선하고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다[편집]

○以皇祖妣敬妃(忌晨)〔忌辰〕, 減膳停朝市。


7月 24日[편집]

도왕의 기신제를 행하다[편집]

○辛酉/皇祖度王(忌晨)〔忌辰〕, 如前例。


7月 25日[편집]

지중추원사 황희석이 병이 드니 왕이 부처에게 기도하게 하다[편집]

○壬戌/知中樞院事黃希碩疾病, 上爲之禱佛。


7月 28日[편집]

큰 바람에 곡식이 해를 입다[편집]

○乙丑/大風害穀。


7月 30日[편집]

도성 축조에 동원된 지방인을 두 번으로 나누기를 아뢰니 속히 마치게 하다[편집]

○丁卯/憲司狀啓曰: “京城修築, 外方之人, 分爲二番, 以寬民力。” 上曰: “與其分而久役, 何如合而速畢! 資糧難繼者, 量宜給之。”


경기도 해변의 경비 강화에 대한 도평의사사의 건의[편집]

○都評議使司上言: “京畿各浦守禦, 尤不可不重。 今後以大船分泊要路, 以備不虞; 以快船分載精銳, 窮搜諸島追捕。 節制使有故, 申聞取旨, 方許下陸, 違者論罪。 其節制使及萬戶千戶能否, 都觀察使無時考察糾理, 嘉靖以上, 申聞論罪。” 從之。


三年 八月[편집]

8月 1日[편집]

개성부의 호수를 조사하다[편집]

○戊辰朔/開城府檢括京中大小戶數。


8月 2日[편집]

왕이 구언하니, 전백영 등이 역사·병정 징발·노비 변정 등에 대해 상소하다[편집]

○己巳/諫官全伯英等上疏曰:

竊惟殿下, 以神武之資, 代王氏五百年之業, 坐受神器, 此豈人謀之所及哉! 前朝至恭愍王而無嗣, 此天所以有意於殿下也。 當時權臣妄以辛禑爲恭愍後, 禑乃多行不法, 妄興師旅, 欲犯上國之境, 殿下以大義諭諸將, 返旆而還, 奸雄自服, 國人擧悅, 此天又使殿下, 易王氏之機也。 殿下乃以曺敏修等之言, 立禑子昌, 昌暗弱尸位, 乃謀於國人, 立恭讓爲君, 則殿下之忠於王氏, 蓋亦至矣。 第以恭讓昏迷多忌, 將相離貳, 天命有歸, 乃有今日。 夫天之去王氏, 非惡王氏也, 惡無道也; 命殿下, 非愛殿下, 愛有德也。 若民不見德, 非皇天眷命之意也。 殿下卽位之初, 廣布德音, 以賜中外, 今又以治安之道, 講問於都評議使司, 此斯民之大幸, 而可以答上天之意也。 臣等感激之至, 敢陳卑抱, 以謝殿下求言之美意, 儻蒙兪允, 萬萬幸甚。 一, 《書》曰: “如保赤子。” 《記》曰: “用民之力, 歲不過三日。” 蓋其愛民之心切, 故用民之力少, 此聖人不忍人之政也。 《書》曰: “天聽自我民聽, 天視自我民視。” 近者, 乾象示變, 群烏翔集, 皆可爲恐懼者也。 今兩都之役, 一時而興, 則事重力分, 不止勞民, 恐工役之未易訖也。 伏望殿下, 審其緩急, 以省民力, 則民悅天喜而休徵至矣。 一, 《論語》曰: “節用而愛人。” 《易》曰: “節以制度, 不傷財不害民。”合觀此之, 愛人則不至於傷財, 傷財則必至於害民。 昔堯茅茨土階, 禹卑宮室, 漢文帝惜百金於露臺, 天下古今, 咸服其德。 願殿下以此爲法, 宮室之制, 務從儉約, 冗食者可省則省, 可幷則幷, 以贍國用。 一, 古者, 兵出井田, 周衰法廢, 至唐府衛之法, 稍近於古今。 內立三軍府, 外置侍衛各牌, 以屬於府, 分番上下, 此則府衛遺法也。 然以前朝之季, 戶籍不明, 徵發爲軍者, 勞逸不均, 一家之內, 或侍衛或船兵, 隨口爲軍, 役重難堪, 稍稍亡匿。 夫兵貴精不務多。 願令各道, 精選士卒, 改成軍額, 馬兵則五丁出一軍, 步卒則三丁出一軍, 以此爲制, 則行者免負戴之勞, 居者有治生之資, 如有緩急, 則居者亦當充軍矣。 方其無事, 兵散於農, 每於農隙, 各令管牌, 檢其兵具, 肄習武才, 以備都點, 及其有事, 命將統率, 則兵無不精, 而食無不足矣。 若居常宿衛之兵, 則將三軍各領各愛馬, 商略定制, 簡其驍勇者, 充其祿官, 更相遞受, 不許外人雜受, 又受田羸老有疾者, 亦令年壯子壻弟姪代之。 一, 前朝之季, 田制旣紊, 豪强兼幷, 戶籍亦廢, 良賤混淆, 詞訟日繁, 骨肉相毁。 或牢籠山野, 奪人土田, 或假勢枉法, 奪人臧獲, 以至壓良爲賤, 人怨神怒, 竟致滅亡。 殿下在潛邸, 慨然有念, 旣正田制, 其弊自息。 唯奴婢一事, 爭訟尙煩, 殿下命置都監, 擇定公正官吏, 嚴立斷例, 限年決折, 考其元卷, 各給公文一通, 而其原卷, 依田制例, 一皆燒毁, 以杜爭端。 一, 《傳》曰: “光武投戈, 講藝息馬, 論道其急。” 文治如此, 後世稱其盛德。 今殿下受命開國, 運値昇平, 宜敞經筵, 討論經史, 何者可法, 何者可戒, 事必師古, 以資治道。 夫朝鮮, 箕子之所封, 今上國復賜爲號。 《洪範》一篇, 箕子之所陳, 而帝王之所範, 乞於經筵首講, 以明其敎。 一, 人主聽斷, 日有萬機, 不可不勤。 願殿下御正殿, 各司啓事, 面加可否, 事之大者, 必與輔臣, 謀議施行。 一, 官爵, 人主之大柄, 不可不公。 今錄軍士久勞, 賞之以官, 然亦有無寸功而濫受者。 乞自今, 軍民官實有功績者, 不次擢用, 以增士風, 其無功徼倖者, 追奪告身, 痛懲戒後。 一, 《書》曰: “舜好察邇言。” 又曰: “禹拜昌言。” 舜、禹, 天下之大聖也。 智無不周, 理無不明, 然且若是者, 聖不自聖, 而廣聰明也。 唐德宗到民家, 得趙光奇敢言, 始知民瘼, 以其左右無正直, 而下情不達也。 今殿下訪群臣, 以求治道, 此則舜、禹之心也。 願殿下推此心, 下至芻蕘, 俾陳無隱, 可者用之, 其不可者, 亦不加罪。 一, 自古國祚之長短、治道之汚隆, 實原於始祖之一心, 譬如作舍者, 必正其基, 種樹者必培其根。 開國而不謹其初, 則何異於作舍種樹者之不用心於根基也? 伏願殿下, 念玆在玆, 親近正直, 恒聞善道, 政尙寬恤, 惠先困窮, 無嗜細玩而崇大儉, 無信不經而謹庸行, 勤儉以爲之基, 仁義以養其根, 則邦基益固, 本支百世矣。 一, 從諫納誨, 人主之德; 陳善閉邪, 人臣之職。 如以利害爲忌而不盡其職者, 徒取寵祿, 以欺君上而已。 臣等俱以不才, 叨蒙異渥, 職在言責, 何敢緘默, 以負殿下初政求治之美意乎? 昔賈誼痛哭於漢, 而有文帝之盛; 魏徵極言於唐, 而有貞觀之治。 伏惟殿下, 俯採臣等所上條件, 一皆施行, 萬世幸甚。


내구(內廐)를 홀적방동에 짓게 하다[편집]

○命判內侍府事金師幸, 作內廐于忽赤房洞。


8月 3日[편집]

지중추원사 평해군 황희석의 졸기[편집]

○庚午/知中樞院事平海君黃希碩卒。 希碩, 平海人。 自上潛邸, 常掌麾下兵有勞, 遂與開國功臣之列。 及寢疾, 上使國醫治之, 不離其側, 遣使問疾相續, 及卒, 上痛悼輟朝, 命義安伯和, 往祭柩前。 贈門下侍郞贊成事, 諡襄武。 官庇葬事, 賻以厚。 子象。


군기감 행랑채에 불이 나다[편집]

○軍器監廊火。


8月 6日[편집]

사간원 장무에게 용관자(冗官者) 등의 명단을 올리게 하다[편집]

○癸酉/召掌務補闕裵規曰: “前日上言冗食者、一家軍役竝行者、無功受職者, 錄名以聞。”


전백영 등이 정사에 부지런할 것을 상소하다[편집]

○全伯英等上疏曰:

臣等猥以庸愚, 幸際昌辰, 濫承言責, 不敢囁嚅, 昨以管見, 仰瀆天聰, 幸蒙垂察, 許令臣等更以條聞, 意欲施行, 此殿下求治之切, 而從諫之美意也。 臣等不勝感激, 謹取所及知者, 錄後以聞, 伏惟殿下推察焉, 幷餘條隨卽施行, 則朝鮮社稷之福也。 夫舜, 天下之大聖; 丹朱, 天下之不肖也。 禹戒舜曰: “無若丹朱傲。 惟慢遊是好, 傲虐是作。” 以禹之大明, 豈不知舜之大聖, 必不至於丹朱之傲乎? 忠誠之至, 猶恐其崇高之位, 一念之不謹, 或至於差, 故其儆戒如此。 殿下自潛邸, 游涉經史, 潛心於歷代之盛衰, 出入中外, 痛心於生民之疾苦, 豈假陳聞而後知乎? 然今日之獻言, 唐、虞君臣相戒之意耳。 伏惟殿下矜察焉。


8月 7日[편집]

도승지 한상경에게 《대학연의》를 강의하게 하다[편집]

○甲戌/召都承旨韓尙敬於淸心亭, 講《大學衍義》。


섬라곡 사람 장사도를 예빈 경, 진언상을 서운 부정으로 임명하다[편집]

○拜暹羅斛張思道爲禮賓卿, 陳彦祥爲書雲副正。


8月 8日[편집]

번개와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리다[편집]

○乙亥/震雷雨雹。


명나라가 도로를 통하게 해 준 것에 사례하는 표문[편집]

○遣開城尹李茂, 謝許通道路。 表曰:

臣言。 屢次遣陪臣金立堅、尹思德、李至、朴永忠、慶儀、安宗源等, 齎擎表箋, 前赴京師, 到遼東, 俱蒙都司阻當回還, 驚惶隕越間, 欽蒙聖慈令臣男【今上諱。】及陪臣南在、趙胖、趙琳等赴京, 臣與國人, 不勝感激者。 大聖之德, 惟在包荒, 遠人之心, 擧忻通路, 感深銘骨, 涕出交頤。 伏念臣叨守弊封, 幸逢昭代, 悠悠數載, 雖無補於絲毫, 耿耿孤忠, 庶罔愆於職貢, 故當歲時之朝聘, 必有行李之往來。 頃因貝錦之言, 遂阻梯杭之路, 罔知所以, 無可奈何。 今者, 賤息入覲於闕庭, 陪臣稱慶於聖節, 天不違於咫尺, 臣倍喜於尋常。 玆蓋伏遇皇帝陛下, 端拱九重之中, 明見萬里之外, 諒臣抱冤而無訴, 憐臣納款而靡他, 復令海邦, 獲瞻天日。 臣謹當之屛之翰, 修侯度而益虔; 載寢載興, 祝皇齡於有永。

仍獻良馬十六匹。


안주에 성을 쌓다[편집]

○城安州。


임금이 직접 천도할 무악 땅을 돌아보다[편집]

○上欲親覽毋岳遷都之地, 率都評議使司及臺省刑曹各一員、親軍衛以行。


달이 심성을 범하니 유배한 사람을 용서하다[편집]

○書雲觀啓曰: “月犯心星。” 宥流貶人等。


8月 11日[편집]

왕이 무악을 둘러보고 유숙하다. 천도할 장소에 대한 분분한 의론[편집]

○戊寅/上至毋岳, 相定都之地。 判書雲觀事尹莘達、書雲副正劉旱雨等進曰: “以地理之法觀之, 此地不可爲都。” 上曰: “汝等妄相是非。 此地若有不可, 則考諸本文以聞。” 莘達等退, 相與論議。 上召旱雨問之曰: “此地竟不可乎?” 對曰: “以臣所見, 實爲不可。” 上曰: “此地旣不可, 何地爲可?” 旱雨對曰: “臣不知。” 上怒曰: “汝爲書雲觀, 謂之不知, 欺誰歟? 松都地氣衰旺之說, 汝不聞乎?” 旱雨對曰: “此圖讖所說。 臣但學地理, 未知圖讖。” 上曰: “古人圖讖, 亦因地理而言, 豈憑虛無據而言之? 且言汝心所可者。” 旱雨對曰: “前朝太祖相松山明堂, 作宮闕, 而中葉已後, 明堂久廢, 君王屢徙離宮。 臣疑明堂, 地德不衰, 宜復作闕, 仍都松京。” 上曰: “予將決意遷都。 若曰近境之內, 更無吉地, 則三國所都, 亦爲吉地, 宜合議以聞。” 乃謂左侍中趙浚、右侍中金士衡曰: “書雲觀在前朝之季, 謂松都地德已衰, 數上書請遷漢陽, 近以雞龍爲可都, 動衆興役, 勞擾生民, 今又以此地爲可都, 及其來觀, 則旱雨等曰: 不可, 反以松都明堂爲可, 互相爭論, 以誣國家, 是曾無所懲故也。 卿等趣令書雲員吏, 各陳可都之地以聞。” 兼判書雲觀事崔融及尹莘達、劉旱雨等上書以爲: “一國之內, 扶蘇明堂爲上, 南京次之。” 是夕, 上次于毋岳下。


8月 12日[편집]

왕이 도읍터를 잡기 위해 왕사 자초를 부르다[편집]

○己卯/上飯王師自超於帳殿。 初, 上欲來相宅, 先遣人邀之。


도읍터에 관한 논의에 판삼사사 정도전이 국가 치란은 사람에 달려 있음을 역설하다[편집]

○上命諸宰相, 各上書議遷都之地。 判三司事鄭道傳曰:

一, 此地居國之中, 漕運所通。 所恨介於一洞之間, 內而宮寢, 外而朝市宗社之位, 無所容焉, 非王者居重御輕之所也。 一, 臣不學陰陽術數之說, 而今者衆多之論, 皆不出陰陽術數之外, 臣固不知所言。 孟子曰: “幼而學之, 壯而欲行之。” 請以平日所學言之。 武[成]王定鼎于郟鄏, 卽關中也。 卜年八百, 傳祚三十。 至十一代孫平王, 乃周興四百四十九年, 遷于洛陽, 而秦人都于西周舊地; 周至三十代赧王乃亡, 秦人代之。 由是觀之, 所謂三十代八百年周家之數, 無係於地也。 漢高祖與項羽同伐秦, 韓生勸羽留都關中, 羽見宮室焚燒、人民屠殺, 不樂。 有人以術數說羽曰: “隔壁揚鈴, 喜聽其聲, 不見其形, 曰是祖宗山川, 思欲見之。” 羽信之, 東還彭城; 漢高用劉敬之言, 卽日西都關中, 羽乃滅亡, 漢德配天。 自是宇文周、楊隋相繼都關中, 唐亦因之, 德與漢配。 由是言之, 人有治亂, 地無盛衰, 可知矣。 一, 中國之爲天子多矣。 所都之地, 西則關中, 如臣所言; 東則金陵, 而晋、宋、齊、梁、陳, 以次都之; 中則洛陽, 梁、唐、晋、漢、周繼都此地, 宋又因之, 而大宋之德, 不下漢、唐; 北則燕京, 而大遼、大金、大元皆都之。 且以天下之大, 歷代所都, 不過數四處, 其當一代之興, 豈無明術者乎? 誠以帝王都會之地, 自有定處, 非可以術數計度得之也。 一, 東方三韓舊都, 東有雞林, 南有完山, 北有平壤, 中有松京。 然雞林、完山, 僻處一隅, 豈可使王業偏安於此乎? 平壤逼近北方, 臣恐非所宜都也。 一, 殿下初卽位, 承前朝毁廢之餘, 生民未蘇, 邦本未固, 是宜鎭靜, 休養民力。 仰察天時, 俯察人事, 相地之宜, 待時而動, 則庶乎萬全。 朝鮮之業, 垂於無窮, 而臣之子孫, 亦與有永矣。 一, 今之言地氣盛衰者, 非其心自有覺處, 皆傳聞古人之說也, 臣之所言, 亦皆古人已驗之說也。 豈在術數者爲可信, 而在儒者爲不可信乎? 伏望殿下留意量度, 參之以人事。 人事盡, 然後稽之卜筮, 動罔不吉。


부소를 도읍으로 하자는 문하 시랑 찬성사 성석린의 논의[편집]

○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曰: “此地山水之會, 漕運之通則可謂吉矣。 然明堂傾窄, 後山低微, 規局不合王者之都。 夫以天下之大, 帝王之所都, 不過數處。 況於一國之內, 豈易多得? 扶蘇山水, 或有逆處, 故先賢有左右蘇巡住之說。 乞於近處卜地, 爲巡住之所, 以扶蘇明堂爲本闕, 則幸甚。 安有扶蘇獨爲王氏出, 而不可爲後王之都之理乎? 且休養民力, 以待數年, 然後議之, 未晩也。”


부소를 도읍으로 하자는 정당 문학 정총의 논의[편집]

○政堂文學鄭摠曰: “定都之所, 自古爲難。 且以天下之大, 曰關中、曰汴梁、曰金陵數地而已, 豈我小邦處處有之? 周都關中, 秦代之, 仍都關中, 秦亡漢代之, 亦都其地。 汴梁, 五代都之, 金陵則六朝所都。 道詵謂: ‘若都扶蘇, 統有三土。’ 前朝自始祖王建已前, 三國鼎峙, 統三以後, 只都開京。 王氏之終於五百年, 以其運數, 而不必係於地德。 若以周、秦、漢相繼而都一地觀之, 雖開京似無害也。 苟舍是而他求, 則更使廣覓之, 斯可矣。 毋岳之地, 明堂甚狹, 主山陷溺, 水口無關鏁。 夫豈吉地而古人不用之乎?”


비기로 볼 때 도읍지로 무악이 좋다는 첨서중추원사 하윤의 논의[편집]

○僉書中樞院事河崙曰: “東方古都享國長久者, 雞林、平壤而已。 毋岳, 形勢雖卑狹, 比之雞林、平壤, 宮闕之基, 實爲寬廣, 加以居國之中, 漕運所通, 表裏山河, 又有可憑, 東方前賢密說, 亦多相契。 又中國地理諸家, 山水朝聚之說, 擧皆相近, 故於前日對問具陳。 伏惟王者之興, 自有天命, 定都之事, 不可輕議。 若欲順一時人心, 以除民弊, 宜且安於松都, 若欲用前賢之說, 以立萬世之基, 無過於此。”


무악이 좁기는 하나 비결에서 말한 곳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한 중추원 학사 이직의 논의[편집]

○中樞院學士李稷曰: “遷都立國之地, 考之地理書, 其大槪曰: ‘萬水千山, 俱朝一神, 大山大水處, 爲王都帝闕之地。’ 此以氣脈所聚、漕運所通爲言也。 又曰: ‘方千里而王者, 四方各五百里; 方五百里而王者, 四方各五十里。’ 此以道里所均爲言也。 又東方密說曰: ‘三角南面。’ 又曰: ‘臨漢江。’ 又曰: ‘毋山。’ 此地所以擧論也。 大抵卜地遷都, 至爲重事, 非一二人所見能定也, 必應天順人, 而後可爲也。 是故《書》曰: ‘龜從, 筮從, 卿士從, 庶民從。’ 不如是則不可決也。 今之遷不遷, 自有時數, 臣安敢輕議! 殿下出自天心, 又視人心所向, 卽順天也。 毋岳明堂, 臣亦以爲狹矣。”


천도에 대한 재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양으로 행차하다[편집]

○上以諸宰相所上議論, 多以遷都爲不可, 故有不豫色曰: “予將還都, 決疑於昭格殿。” 旣而次于南京。


8月 13日[편집]

왕사 자초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다. 적성 광실원이 좋다는 의견도 나오다[편집]

○庚辰/上相宅于舊闕之基, 觀望山勢, 問尹莘達等曰: “此地何如?” 對曰: “我國境內, 松京爲上, 此地爲次。 所可恨者, 乾方低下, 水泉枯涸而已。” 上悅曰: “松京亦豈無不足處乎? 今觀此地形勢, 可爲王都。 況漕運通道里均, 於人事亦有所便乎?” 上問王師自超: “此地如何?” 超對曰: “此地, 四面高秀, 中央平衍, 宜爲城邑。 然從衆議乃定。” 上令諸宰相議之, 僉曰: “必欲遷都, 此處爲可。” 河崙獨曰: “山勢雖似可觀, 然以地法論之則不可。” 上以衆人之言, 定都漢陽。 前典書楊元植進曰: “臣之所藏密書, 前者承命已進。 積城廣實院東有山, 問其居人, 名曰雞足。 相其地, 密書所說, 似相近也。” 上曰: “漕運不通, 安敢爲都會之處乎?” 元植對曰: “自臨津至長湍, 水深可以行舟。” 上遂上輦, 相營宗廟之地, 次于盧原驛郊。


민정을 징발하여 옛 서울의 성 쌓는 공사를 마치게 하다[편집]

○命都評議使司, 徵發慶尙、全羅、忠淸、江原、豐海、京畿左右道民丁, 以畢舊京築城之役。


8月 15日[편집]

흰 무지개가 뜨다[편집]

○壬午/白虹見。


회암사에 거둥하고 풍천 서쪽에서 유숙하다[편집]

○幸檜巖寺, 飯僧, 次于楓川西邊。 左侍中趙浚有疾, 賜肩輿, 命先還京。


왜구가 충청도 안성에 침입하다. 수군 만호 장용검이 배 9척을 노획하다[편집]

○倭寇忠淸道。 安城水軍萬戶張龍劒, 獲倭船九艘。


8月 16日[편집]

흰 무지개가 뜨다[편집]

○癸未/白虹見。


광실원을 둘러 본 후 장단에서 다락배를 타고 놀다[편집]

○上至廣實院東, 相楊元植所言可都之地, 僉曰不可乃止。 至長湍渡, 乘樓船, 宰相耆老皆獻壽。 酒酣, 檢校侍中南乙蕃起舞, 上顧謂南誾曰: “卿父母俱存, 而身爲宰相。 我雖今日貴爲一國之君, 奚及於卿!” 因泣下。 順流而下, 次于下灘邊。


8月 17日[편집]

흰 무지개가 뜨다[편집]

○甲申/白虹見。


고려조의 신경(新京) 터를 둘러 보다[편집]

○次于臨津縣北, 觀前朝新京之地。


8月 18日[편집]

민중리가 말한 도라산 터를 둘러 보고, 송경으로 돌아오다[편집]

○乙酉/以閔中理所言, 相都羅山。 上曰: “此汚濕之地, 何以爲都?” 遂還松京。 王世子謁于道, 各司迎于天水寺前。


8月 21日[편집]

사수감 송희정이 말 천 필을 요동에서 교부하고 돌아오다[편집]

○戊子/遣司水監宋希靖, 獻馬一千匹, 至遼東交割而還。


원구단의 제사는 폐지하지 않고 이름만 원단으로 고치다[편집]

○禮曹啓曰: “吾東方自三國以來, 祀天于圓丘, 祈穀祈雨, 行之已久, 不可輕廢。 請載祀典, 以復其舊, 改號圓壇。” 上從之。


백관에게 품계에 따라 말을 바치게 하다[편집]

○令百官各品, 出馬有差。


8月 22日[편집]

왜구가 영광군에 침입하다. 염전의 인부들이 힘껏 싸워 쫓아내다[편집]

○己丑/倭寇靈光郡, 倭船十餘艘。 鹽夫三十餘人, 力戰斬三級, 寇敗走。


도량고와 내제석원을 혁파하고 복흥고를 두다[편집]

○罷道場庫、內帝釋院, 置福興庫。


8月 24日[편집]

도승지 한상경에게 《대학연의》를 강의하게 하다[편집]

○辛卯/上坐淸心亭, 命都承旨韓尙敬, 講《大學衍義》。


도평의사사에서 한양으로 도읍 정할 것을 아뢰니 가납하다[편집]

○都評議使司所申: “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等竊惟, 自古王者受命而興, 莫不定都, 以宅其民。 故堯都平陽, 夏都安邑, 商都亳, 周都豐鎬, 漢都咸陽, 唐都長安。 或因初起之地, 或擇形勢之便, 無非所以重根本而鎭四方也。 惟我東方, 檀君以來, 或合或分, 各有所都, 及前朝王氏統合之後, 都于松嶽, 子孫相傳, 殆五百年, 運祚旣終, 自底于亡。 恭惟殿下, 以盛德神功, 受天之命, 奄有一國, 旣更制度, 以建萬世之統, 宜定厥都, 以立萬世之基。 竊觀漢陽, 表裏山河, 形勢之勝, 自古所稱, 四方道里之均, 舟車所通。 定都于玆, 以永于後, 允合天人之意。” 王旨依申。


三年 九月[편집]

9月 1日[편집]

신도 궁궐 조성 도감을 설치하고 담당 관리를 임명하다[편집]

○戊戌朔/置新都宮闕造成都監。 以靑城伯沈德符、左僕射金湊、前政堂文學李恬、中樞院學士李稷爲判事。


9月 2日[편집]

얼음이 얼다[편집]

○己亥/氷。


9月 4日[편집]

상의중추원사 정남진을 천추사로 보내다[편집]

○辛丑/遣商議中樞院事鄭南晋, 賀千秋節。


9月 5日[편집]

전 공조 전서 임수가 말 5백 필을 요동에서 교부하고 돌아오다[편집]

○壬寅/遣前工曹典書任壽, 獻馬五百匹, 至遼東交割而還。


9月 6日[편집]

창고 전민사를 각도에 보내다[편집]

○癸卯/分遣倉庫田民使于各道。


9月 8日[편집]

권근·한이·이천우·황성·강계권·이서에게 새 관직을 제수하다[편집]

○乙巳/以權近爲僉書中樞院事, 韓理藝文春秋館學士, 李天祐、黃誠、康季權商議中樞院事, 李舒司憲府大司憲。 誠, 永奇之父。 永奇奉使而還, 稍恭謹不如諸宦橫暴, 故官其父。


천태승 조구를 국사로 삼다[편집]

○以天台宗僧祖丘爲國師。


9月 9日[편집]

유구국 중산왕이 망명한 산남왕의 아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다[편집]

○丙午/琉球國中山王察度遣使奉箋獻禮物, 發還被擄男女十二名, 請發回在逃山南王子承察度。 其國世子武寧, 亦於王世子, 奉書獻禮物。


정도전 등에게 한양의 종묘·사직·궁궐·시장 등의 터를 정하게 하다[편집]

○遣判門下府事權仲和、判三司事鄭道傳、靑城伯沈德符、參贊門下府事金湊、左僕射南誾、中樞院學士李稷等如漢陽, 定廟社宮闕朝市道路之基。 仲和等以前朝肅王時所營宮闕舊址狹隘, 更相其南亥山爲主壬座丙向, 平衍廣闊, 群龍朝揖, 乃得面勢之宜, 又相其東數里之地, 得坎山爲主壬座丙向, 以爲宗廟之基, 皆作圖以獻。


9月 10日[편집]

전 참찬문하부사 박위를 서북면 도순문사로 삼다[편집]

○丁未/以前參贊門下府事朴葳, 爲西北面都巡問使。


9月 11日[편집]

왕이 조회를 보다. 일본과 유구 사신들이 행례하다[편집]

○戊申/上視朝。 日本及琉球國使人隨班行禮。


9月 12日[편집]

화성이 여귀성과 적시성을 범하다[편집]

○己酉/火犯輿鬼積尸。


9月 15日[편집]

궁에서 금으로 쓴 《법화경》을 강의하니 왕과 중궁이 듣다[편집]

○壬子/講金字《法華經》于時座宮, 上與中宮聽講。


성변(星變) 때문에 죄수를 용서하고 재상들에게 정사의 잘잘못을 말하게 하다[편집]

○以星變宥二罪以下, 仍令宰相, 各陳時政得失、民間利害。


9月 16日[편집]

중군의 둑기를 강무당에 옮기다[편집]

○癸丑/移置中軍纛于講武堂, 軍士甲刃侍衛。


9月 17日[편집]

전함을 만들어 왜구를 막은 고 판개성부사 정지의 집을 정표하다[편집]

○甲寅/全羅道都觀察使趙璞報都評議使司曰: “到境來聞父老之言, 卒判開城府事鄭地, 始造戰艦, 能制倭寇, 長浦之捷、南原之勝, 功著一時, 卽今沿海之民, 復業如舊。 乞令旌表門閭, 以勸後世。” 使司轉聞, 允之。


9月 18日[편집]

백관을 거느리고 성절을 하례한 뒤, 성 쌓는 공사를 돌보다[편집]

○乙卯/率百官賀聖節, 遂巡觀城役。


9月 19日[편집]

김가행과 박중질의 옥사에 관련된 서북면 도순문사 박위를 파직시키다[편집]

○丙辰/罷西北面都巡問使朴葳。 憲司以葳嘗連可行、仲質獄辭, 請罷之。


안경량을 서북면 도순문사로 삼다[편집]

○以安景良爲西北面都巡問使。


동북면도 서북면처럼 일경(日耕)으로 답험하여 세곡을 받게 하다[편집]

○都評議使司啓曰: “東北面, 曾以大中小戶收租。 請依西北面例, 以日耕踏驗收租。” 從之。


9月 20日[편집]

노루가 숭인문으로 들어오다[편집]

○丁巳/鹿入崇仁門。


성 쌓는 공사를 돌아보다[편집]

○巡觀築城之役。


9月 21日[편집]

중추원부사 손흥종을 명나라에 보내어 종마 50필을 바치다[편집]

○戊午/遣中樞院副使孫興宗如京師, 獻種馬五十匹。


9月 22日[편집]

각 관청 관원에게 도읍 옮기는 시기를 의논하게 하니 금년이 좋다고 하다[편집]

○己未/命都評議使司, 集各司議遷都遲速, 皆曰: “今年可。”


9月 23日[편집]

한양에서 정도전 등은 돌아오고, 심덕부와 김주는 남아 관리하다[편집]

○庚申/判三司事鄭道傳等, 回自漢陽, 靑城伯沈德符、參贊門下府事金湊留管經營。


9月 25日[편집]

천구성이 땅에 떨어졌는데 소리가 우레 같았다[편집]

○壬戌/天狗墮地, 聲如雷。


9月 27日[편집]

평주에 진눈깨비가 내리다[편집]

○甲子/雨雪于平州。


죄수들의 죄상을 기록하게 하다[편집]

○慮囚。


9月 28日[편집]

교하·고봉 등의 군현을 통폐합하다[편집]

○乙丑/幷深岳、交河、石泉鄕, 號交河監務; 高峯、幸州、黃調鄕, 號高峯監務。


9月 29日[편집]

성 쌓는 인부들을 돌려보내다[편집]

○丙寅/放築城夫。


三年 冬十月[편집]

10月 3日[편집]

새벽에 거둥하여 서교에서 사냥하다[편집]

○己巳/夙駕, 獵于西郊。


유사에게 종묘 제사를 섭행하게 하다[편집]

○命有司攝事于宗廟。


10月 4日[편집]

대사헌 이서 등이 자주 법령을 고치거나 죄인을 놓아주지 말 것을 상소하다[편집]

○庚午/司憲府大司憲李舒等上疏, 請勿輕改法令, 數宥罪人。


10月 5日[편집]

대평소를 잘 부는 사람이 가족과 함께 투화해 오다[편집]

○辛未/西北面都節制使崔永沚, 執送挈家來投人一名, 善吹簫, 曰大平簫。


금·은·채단의 금령을 더욱 엄하게 하다[편집]

○憲司申嚴金銀彩段之禁。


10月 6日[편집]

조회에 나아가다. 천변 때문에 풍악을 폐하다[편집]

○壬申/視朝, 以天變撤樂。


집 비둘기 세 쌍을 일본 구주 절도사에게 보내다[편집]

○上送鵓鴿三雙于日本國九州節度使源了俊。 從其請也。


10月 8日[편집]

채단 옷을 입은 이지숭을 파면시키고 김천구를 순군옥에 가두다[편집]

○甲戌/罷將軍李之崇職, 囚前典書金千具于巡軍。 憲司劾衣彩段也。


10月 9日[편집]

정당 문학 민제와 중추원 부사 유원지를 하정사로 보내다[편집]

○乙亥/遣政堂文學閔霽、中樞院副使柳源之, 如京師賀明年正。


10月 10日[편집]

시중을 정승으로 고치다. 성격이 강직한 대사헌 이서를 파직시키다[편집]

○丙子/改侍中爲政丞。 罷大司憲李舒爲安平君, 以前和寧尹朴經代之。 舒慷慨有志節, 必欲直言, 被召入對, 略無諛辭。 方罷職, 鄭道傳力救不得。


10月 11日[편집]

왕의 탄신이므로 죄수들을 용서하고, 이행 이인임 등의 직첩을 돌려주다[편집]

○丁丑/上以誕晨, 講《法華經》于殿內, 宥中外罪囚。 特宥李行ㆍ李詹流罪、李仁任ㆍ曺敏修禁錮, 皆還職貼。


일본 구주 절도사에게 포로를 보내 준 것에 사례하고 협력을 요청하는 글[편집]

○遣前工曹典書崔龍蘇于日本, 使都堂致書九州節度使源了俊。 其書曰:

朝鮮國門下政丞趙浚等奉復日本國節度使源公座下。 賤介之還, 得奉芳翰, 就審動履康裕, 爲慰。 玆者, 被擄人七百名, 俱蒙發遣, 獲還鄕里, 爲惠已極。 且云: “未得還者, 漸聚送之。” 又欲禁賊, 期於兩國永無間隙, 通好之誠, 至爲深篤, 喜感何涯! 比來, 本國水軍將帥累擒海賊, 請以舟師, 往捕餘黨, 朝議將許之, 適承來諭乃寢。 儻如尊敎, 嚴明號令, 討除兇盜, 永絶邊患, 豈不美哉! 珍貺之惠, 益以爲感。 今遣工曹典書崔龍蘇, 往修報禮。 不腆土宜, 具如別幅, 惟冀領納。


10月 12日[편집]

무지개가 뜨다[편집]

○戊寅/虹見西方。


10月 15日[편집]

사헌부에서 이인임 조민수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니 윤허하다[편집]

○辛巳/憲司上疏論李仁任、曺敏修罪在不宥, 允之。


10月 16日[편집]

이조 전서 심효생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다[편집]

○壬午/以吏曹典書沈孝生女爲世子嬪。


못으로 팠던 이인임의 집을 메우게 하다[편집]

○召司憲雜端曺致命, 塡李仁任瀦宅。


10月 17日[편집]

연이틀 무지개가 뜨다[편집]

○癸未/虹見西方, 甲申亦如之。


10月 19日[편집]

관음굴에 거둥하다[편집]

○乙酉/幸觀音堀。


10月 21日[편집]

내전에서 중들에게 밥을 먹이고 국사의 봉숭례를 행하다[편집]

○丁亥/飯僧百八于內殿; 行國師封崇禮, 仍賜鞍馬。


10月 25日[편집]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다[편집]

○辛卯/遷都漢陽, 留各司二員于松京。 以門下侍郞贊成事崔永沚、商議門下府事禹仁烈等, 爲分都評議使司。


10月 28日[편집]

옛 한양부의 객사를 이궁으로 삼다[편집]

○甲午/至新都, 以舊漢陽府客舍爲離宮。


三年 十一月[편집]

11月 2日[편집]

도평의사사와 서운관 서리들을 이끌고 종묘와 사직의 터를 살피다[편집]

○戊戌/上率都評議使司及書雲觀員吏, 相營宗廟、社稷之地。


11月 3日[편집]

처음으로 공작국을 설치하다[편집]

○己亥/始置工作局。


도평의사사에서 종묘와 궁궐과 성곽 공사를 독촉할 것을 장신하다[편집]

○都評議使司狀申:

寢廟所以奉祖宗而崇孝敬, 宮闕所以示尊嚴而出政令, 城郭所以嚴內外而固邦國, 此皆有國家者所當先也。 恭惟殿下, 受命啓統, 俯從輿望, 以定都于漢陽, 萬世無疆之業, 實基於此。 然而寢廟未成, 宮室未作, 城郭未築, 殆非所以尊京師而重根本也。 殿下雖重民力, 不欲興工, 然此三者, 皆不可不作。 宜命攸司, 董治其役, 以營寢廟, 作宮室, 築都城, 申孝敬於祖宗, 示尊嚴於臣民, 且使國勢永固, 然後一國之規模始備, 而萬世之貽謀, 益遠矣。 伏惟殿下施行焉。

王旨依申。


11月 4日[편집]

목사동에 거둥하여 능터를 보다[편집]

○庚子/如木寺洞, 相壽陵之地。


병권과 정권 장악한 조준·정도전을 비판한 변중량 등을 국문하다[편집]

○囚殿中卿卞仲良于巡軍獄, 命大司憲朴經、巡軍萬戶李稷等鞫之。 初仲良與兵曹正郞李薈曰: “自古政權兵權, 不可兼任一人。 兵權宜在宗室, 政權宜在宰輔。 今趙浚、鄭道傳、南誾等, 旣掌兵權, 又掌政權, 實爲不可。” 仲良以此言於義安伯和, 和告于上。 上召仲良問之, 仲良對以實, 且曰: “朴苞亦謂殿下失爲國之體, 屢致星變。” 上怒曰: “此數人, 皆我股肱之臣, 終始一心者也。 如或可疑, 則誰可信者! 爲此言者, 必有以也。” 卽命鞫仲良及苞、薈。 苞、薈與仲良相詰, 謀欲自免。


11月 5日[편집]

백관을 거느리고 천추절을 하례하다[편집]

○辛丑/上率群臣賀千秋。


11月 6日[편집]

변중량 등을 유배시키다[편집]

○壬寅/流仲良于寧海, 薈于順天, 皆削職。 置苞于竹州。


11月 8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甲辰/霧。


11月 10日[편집]

세자가 종친과 대신들에게 연회를 베풀다[편집]

○丙午/世子宴宗室大臣于其邸。


용산강에 거둥하여 종묘의 재목을 살펴보다[편집]

○如龍山江, 觀宗廟材。


11月 11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丁未/木稼。


11月 12日[편집]

통진 감무를 설치하고 동성과 수안을 합속시키다[편집]

○戊申/置通津監務, 以童城、守安合之。


11月 15日[편집]

크게 바람이 불고 천둥 치며 비가 내리다[편집]

○辛亥/大風雷雨。


11月 16日[편집]

각자 세곡을 재어 바치는 법을 엄중히 시행하게 하다[편집]

○壬子/申嚴納稅自量之令。


11月 17日[편집]

흥국사 구리부처가 땀을 흘리다[편집]

○癸丑/興國寺銅佛汗。


11月 19日[편집]

천둥 치고 무지개가 뜨다[편집]

○乙卯/雷虹見。


태종이 명나라 황제의 우대를 받고 돌아오다[편집]

○我殿下回自京師, 南在、趙胖隨至。 殿下至京, 帝引見再三, 殿下敷奏詳明, 帝優禮遣還。 初殿下之行也, 贊成事成石璘, 作詩以送殿下曰: “知子知臣睿鑑明, 畏天誠意爲生成。 皆言萬世朝鮮慶, 在此炎霖跋涉行。” 上國士人見殿下, 皆稱朝鮮世子, 甚敬之。 殿下過燕府, 燕王【卽太宗皇帝。】親見之, 旁無衛士, 唯一人侍立。 溫言禮接甚厚, 因使侍立者饋酒食, 極豐潔。 殿下離燕在道上, 燕王乘安轝朝京師, 驅馬疾行, 殿下下馬見於路側, 燕王停駕, 亟手開轝帷, 溫言良久乃過行。 後殿下見欽差內官黃儼, 問: “昔見帝于燕府之日, 侍立者爲誰?” 儼曰: “慶大人, 溫良人也。 帝最親信者, 今已亡矣。”


사역원 제조 설장수가 사역원의 시험 자격과 선발 액수 등에 대해 올린 글[편집]

○司譯院提調偰長壽等上書言:

臣等竊聞, 治國以人才爲本, 而人才以敎養爲先, 故學校之設, 乃爲政之要也。 我國家世事中國, 言語文字, 不可不習。 是以殿下肇國之初, 特設本院, 置祿官及敎官, 敎授生徒, 俾習中國言語、音訓、文字、體式, 上以盡事大之誠, 下以期易俗之効。 臣等今將擬議到習業、考試等項合行事務, 開寫于後。 一, 額設敎授三員內, 漢文二員、蒙古一員, 優給祿俸。 生徒額數, 分肄習業, 考其勤慢, 以憑賞罰, 幷及敎授之官。 一, 習業生徒, 鮮有自願來者。 令在京五部及各道界首府州, 擇良家子弟十五歲以下天資明敏者, 歲貢一人。 一, 每三年一次考試, 勿論是(無)〔否〕本院生徒, 七品以下人, 但能通曉四書、《小學》、吏文、漢ㆍ蒙語者, 俱得赴試。 習漢語者, 以四書、《小學》、吏文、漢語皆通者, 爲第一科, 與正七品出身; 通四書之半及《小學》、漢語者爲第二科, 與正八品出身。 止通《小學》漢語者爲第三科, 與正九品出身。 習蒙語者, 能譯文字, 能寫字樣, 兼寫偉兀字者爲第一科; 只能書寫偉兀文字, 幷通蒙語者爲第二科, 出身品級同前。 其原有官品者, 第一科升二等, 第二科三科各升一等。 漢語第一科一人, 第二科三人, 第三科八人; 蒙語第一科一人, 第二科二人, 通取一十五人, 以爲定額。 若無堪中第一科者, 只取第二科三科, 又無堪中第二科者, 只取第三科, 不拘定數。 一, 每年都目各望, 幷錄三人, 以漢語精通者爲頭。 雖差年、到數多餘, 亦不許錄於語音精通人員之上, 若三人俱通者, 聽以差年、到數爲頭。 一, (隷)〔肄〕業三年, 不能通曉漢、蒙語者, 斥遣充軍。 一, 考試中選者, 人給紅牌。 一, 通上寫“司譯院敬奉王旨, 某人可賜通事第幾科幾人出身者。” 年月上, 行使本院印信, 提調以下具銜署名。 下都評議使司, 擬議施行。


11月 25日[편집]

백관에게 무악 천도를 의논하게 하다. 모두 좁다 하니 그만두다[편집]

○辛酉/命都評議使司, 會百官于毋岳, 更相宅都之地, 僉曰狹隘, 乃止。


11月 26日[편집]

첨설직을 받은 사람들에게 말을 징발하고 직첩을 거두어 들이다[편집]

○壬戌/徵馬于超資受職者有差, 收其職牒。 先是, 添設職無定數, 多有冒濫者, 故都評議使司請令各道都觀察使, 考覈徵之。


三年 十二月[편집]

12月 3日[편집]

왕도 공사의 시작에 앞서 황천 후토와 산천의 신에게 고한 고유문[편집]

○戊辰/上齋宿。 命判三司事鄭道傳, 祭于皇天后土之神, 以告興役之事。 其文曰:

朝鮮國王臣【上諱。】率門下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判三司事鄭道傳等, 一心齋沐, 敢明告于皇天后土。 伏以乾覆坤載, 遂萬物之生成; 革古鼎新, 作四方之都會。 竊念臣【上諱。】, 猥以庸愚之質, 獲荷陰騭之休, 値高麗將亡之時, 受朝鮮維新之命。 顧以付畀之甚重, 常懷危懼而未寧, 永圖厥終, 不得其要。 日官告曰: “松都之地, 氣久而向衰; 華山之陽, 形勝而協吉, 宜就是處, 庸建新都。” 臣【上諱。】詢諸臣僚, 請于宗廟, 乃以十月二十五日, 遷于漢陽。 有司又告曰: “寢廟, 所以奉祖考而安其神; 宮室, 所以莅臣民而聽其政。 皆非獲已, 在所當營。” 爰命有司, 於今月初四日起役, 恐大役之方興, 致斯民之攸困。 仰惟皇鑑, 俯亮臣心, 雨暘以時, 功役効力, 于以作大邑, 于以奠厥居, 上配天命於無窮, 下庇民生於有永, 則臣【上諱】謹當對越奔走, 將禋祀而益虔, 戒勑時幾, 修政事而不懈, 與諸臣庶, 共享太平。

又遣參贊門下府事金立堅, 告于山川之神。 其文曰:

王若曰, 咨爾白岳ㆍ木覓之神、諸山之神、漢江ㆍ楊津之神、諸水之神! 蓋聞古之定都者, 必封山以爲鎭, 表水以爲紀。 故名山大川之在境內者, 載諸常祀之典, 所以祈神佑而答靈貺也。 顧惟不穀, 迫於臣民推戴之心, 卽朝鮮國王位, 兢業圖理, 于今三年。 迺者, 用日官之言, 定都漢陽, 將營于宗廟、宮室, 已定日矣, 尙慮大役之興, 民力不無所傷, 雨暘燠寒, 或失其時, 有妨工作。 玆率門下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判三司鄭道傳等, 齋沐一心, 以今月初三日, 遣參贊門下府事金立堅, 用禮幣奠物, 告爾諸神。 今玆興作, 非欲求一己之安, 其自是祀神, 人民以迓天命於無窮。 惟爾有神, 諒予至懷, 俾陰陽不愆, 疾疫不興, 變故不作, 以底成大役而定大業, 則予不穀, 亦不敢自暇自逸, 洎于後世, 以修時祀, 神亦永有所享食矣。 故玆敎示。


12月 4日[편집]

종묘와 궁궐 터의 오방신에게 제사지내고, 중들을 모아 공사하게 하다[편집]

○己巳/遣中樞院副使崔遠于營宗廟之地, 又遣僉書中樞院事權近于營宮室之所, 致祭五方地祇, 以開厥基。 不欲勞民, 募集諸山僧徒, 官支衣廩, 俾趨工役。 上觀太廟開基。


밤에 지진이 일어나다[편집]

○夜, 地震。


12月 5日[편집]

나무에 성에가 끼다[편집]

○庚午/木稼。


12月 9日[편집]

개성부에서 각 관청의 터를 분배해 주다[편집]

○甲戌/開城府始量給各司之基有差。


12月 10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보이다[편집]

○乙亥/太白晝見。


중국 황제의 선유(宣諭)에 사은하는 표문을 밀직 제학 이직의 편에 보내다[편집]

○遣密直提學李稷, 赴京謝恩。 表曰:

臣男【今上諱。】等, 回自京師, 欽奉宣諭聖旨, 誨誡切至, 臣不勝感激者。 聖訓昭明, 睿恩優渥, 撫躬知感, 擧國與榮。 臣於今年六月間, 欽奉聖旨, 遣臣男【今上諱。】、陪臣南在、趙胖等赴京。 幸瞻天日之光, 特奉絲綸之旨。 誨臣以民生之恤, 勑臣以天命之嚴。 聽受以還, 佩服無已。 玆蓋伏遇皇帝陛下仁敦字小, 度廓包荒, 遂令僻遠之邦, 獲被懷綏之德。 臣謹當永堅忠義之志, 倍祝壽考之祺。


도평의사사에서 태일산을 강습하고 고찰하며 시험도 보일 것을 건의하다[편집]

○都評議使司啓曰: “太一算, 兵家要務, 宜置局講習, 隷於訓鍊觀, 以時考察, 成才者, 武科內竝試擢用。” 上從之。


12月 11日[편집]

각도 군관의 매사냥을 금하다[편집]

○丙子/禁各道軍官放鷹。


부역인 중 연한이 찬 사람은 놓아 주다[편집]

○徒役之人, 年限已滿者, 放之。


12月 14日[편집]

다완인과 오도리인이 방물을 바치니 만호 직첩을 주게 하다[편집]

○己卯/多完人夫彦、吾都里人所吾等來獻方物。 上各賜衣一襲, 令中樞院給牒爲萬戶。


12月 15日[편집]

상서사에 분부하여 순자법에 따라 벼슬을 제수하게 하다[편집]

○庚辰/命尙瑞司, 行循資除授。


승려들이 담선하는 법의 복구를 청했으나 도평의사사에서 금단하도록 하다[편집]

○曹溪宗僧徒請復談禪之法, 上下于都評議使司擬議。 使司啓曰: “前朝談禪之法, 爲松都地理而設之。 今殿下旣遷新邑, 何用松都古事! 願殿下一切禁斷, 與民更始, 新其視聽, 一其心志。” 從之。


간관이 남의 집터를 뺏은 판개성부사 이거인을 탄핵하다[편집]

○諫官劾判開城府事李居仁奪人家基。


12月 16日[편집]

검교 시중 이숭의 졸기[편집]

○辛巳/檢校侍中李崇卒。 官庇葬事, 諡安靖。 崇, 固城人, 門下侍中巖之子, 性淳厚。 恭愍朝, 以善射稱。 子敏、峙、屹。


12月 19日[편집]

얼음을 타고 능터를 보러 과주에 행차하려다 장지화의 간언으로 중지하다[편집]

○甲申/上將幸果州, 觀壽陵之地, 諫官張至和等進曰: “大駕雖乘船, 尙且慮危。 況今氷未堅, 安可涉乎?” 乃止。


12月 20日[편집]

여울을 건너 과주에 행차하려다 이숙번의 간언으로 중지하다[편집]

○乙酉/霧。 上又欲涉灘幸果州, 乘輿已駕, 左拾遺李叔蕃啓曰: “前日上欲涉氷, 臣等昧死以聞, 獲蒙兪允, 不勝感激, 今乃欲涉灘。 當此冱寒, 灘水深廣, 馬或一蹶, 恐非萬全。 況乎僕從之人, 豈無赤身入水者乎? 願殿下垂察。” 上乃止。


12月 21日[편집]

이거인에게 정무를 보게 하다[편집]

○丙戌/上令李居仁視事。


나라에서 흰 닭과 개와 말을 기르지 못하게 한다는 소문이 떠돌다[편집]

○民間訛言: “國禁畜白色雞犬馬。”


12月 23日[편집]

사헌부에서 지형조사 최긍을 탄핵하다[편집]

○戊子/憲司劾知刑曹事崔兢。 初都官正郞朴仁乙將訟人文契, 陰改字樣, 兢劾仁乙。 仁乙憤, 詣兢家, 兢方聽訟, 仁乙辱之。 憲司劾仁乙, 竝劾兢。


12月 24日[편집]

대간의 도리 옥관자를 금하다[편집]

○己丑/命去臺諫員頂玉。


12月 26日[편집]

이조 전서 심효생이 임금을 접대하다[편집]

○辛卯/吏曹典書沈孝生享上。


대사헌 박경 등이 첨설직 제수 방안에 대해 올린 상소[편집]

○大司憲朴經等上疏曰:

官職公器, 宜先德望, 不可假濫。 國家因前朝之舊, 乃用循資之格, 苟非才德出衆, 固無超資之理。 殿下顧念宿衛之士, 有未霑恩命者, 以其功勞多少, 第其資級高卑, 授以添設官職。 諸將軍、節制使錄其職名以進, 其中奸黠者, 詐增前級, 躐取高官者, 蓋多有之。 此人心所同惡, 而國法所當懲也。 今已下令諸道, 搜索此輩, 徵之以馬, 仍收職牒。 臣等竊謂與其懲之於後, 曷若審之於初! 伏望自今, 嘉善已下四品已上受添職者, 皆於敎命, 錄其前職, 以防僞濫, 其敎命, 皆下本府, 考其前職之牒, 方許出給, 則人絶冒進之心, 國無濫賞之弊。

上允之。


일본국 진서 절도사 원요준이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을 구하다[편집]

○是月, 日本國鎭西節度使源了俊使人求《大藏經》。



ko.wikisource.org/wiki/태조강헌대왕실록/3년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사후(死後) 인물 / 조선왕조실록

2014. 3. 20. 19:31

복사 http://blog.naver.com/joseon_500/80209636071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 1342년(고려 충혜왕) ~ 1398년(태조 7년)

자(字)는 종지(宗之), 호(號)는 삼봉(三峰)이며,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봉화(奉化)

형부 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

□ 태조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숙청되다.

제1차 왕자의 난 자세히 보러가기☜​

​정도전의 아들인 정유(鄭游)와 정영(鄭泳)은 왕자의 난 당일 처형 당했고 또 다른 아들 정담(鄭湛)은 동기들의 처형 소식을 듣고

자살함.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였던 정도전의 장남 정진(鄭津)도 아버지 정도전이 죽은날 순군옥(巡軍獄, 나중의 의금부)에 구속 수감되었

다가 전라 수군(全羅水軍)에 충군(充軍) 됨. 그야말로 정도전 일가는 멸문지화(滅門之禍)당하는듯함.

  

□ 1398년 9월 12일

태조 이성계가 아들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9월 12일 이방과(정종 임금)가 즉위교서를 반포함.

즉위교서 내용중

...<전략>

“왕은 말하노라. 삼가 생각하건대, 상왕(上王)께서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에 순응하여 비로소 국가를 세우고 강기(綱紀)를 베풀

어 만세(萬世)에 모범을 보였는데, 불행히도 간신(奸臣) 정도전 남은 등이 연줄을 타서 권세를 부리고 몰래 권력을 마음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 이에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세워 후사(後嗣)로 삼고서 장유(長幼)의 차례를 빼앗고 적서(嫡庶)의 구분을 문란시키고자, 우리 형제를 이간시켜 서로 선동하여 변고를 발생시켜서 화(禍)가 불측할 지경에 있었는데, 다행히 천지와 종사(宗祀)의 신령이 몰래 도와주고 충신 의사(義士)들이 마음과 힘을 다함에 힘입어, 간악한 무리들이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斬刑)을 당하고 나라의 운명이 편안하게 되었다...<중략>...

지금 혁신(革新)하는 초기를 당하여 마땅히 새로운 교화(敎化)를 선포해야 될 것이니, 그 홍무(洪武) 31년 9월 15일 이른 새벽 이전

에 있었던 대역(大逆)·강도(强盜)·고독(蠱毒)·염매(魘魅)와 고의로 살인(殺人)한 것과, 정도전· 남은의 당여(黨與)를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던 것이든지 발각되지 않은 것이든지 모두 사유(赦宥) 면제하니,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로써 서로 고발해 말하는 사람은 그 고발한 죄로써 처벌하게 할 것이다...<후략>

새임금이 즉위하면 특별하게 중요한 범죄, 예를 들어 내란이나 대역죄, 고의살인이나 부모를 죽이는 등의 중죄 이외에는 모두 사면을 하는게 일반적임.​ 위의 실록 기사처럼 "정도전, 남은의 당여는 제외" 하는 특별 단서 조항을 붙이며 사면을 선포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사례임.

 

 

□ 태조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9월 17일

정사 공신의 등급을 정하여 내린 교지

임금이 우리 전하(태종)와 더불어 정사 공신(定社功臣)의 등급을 논하고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교지를 전하였는데, 그 교지는 이러하였다.
“국가에서 창업(創業)한 지가 오래 되지 않으니, 진실로 근본을 바루고 시초를 바로 잡아 천명(天命)에 안정하고 국조(國祚)를 만세(萬世)에 전해야 될 것임에도, 불행히 간신(奸臣) 정도전 남은 등이 상왕(上王)께서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낫지 않는 시기를 당하여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난을 일으켜 우리 여러 형제를 해치려 하고, 우리의 이미 이루어진 왕업(王業)을 전복(顚覆)하고자 하여 화(禍)가 불측한 지경에 있었는데...<후략>

 

□ 태조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9월 18일

사헌부에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가산 적몰을 청했으나 과전만 회수하게 하다

사헌부에서 정도전·남은·심효생·장지화(張至和)·이근(李懃) 등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기를 청하니, 우리 전하(殿下. 태종임금)께서 임금에게 말하여 다만 과전(科田)만 회수하게 하였다.

 

 

□ 정종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8월 3일

좌정승 조준이 전을 올려 사직하기를 비니 윤허하지 않다

신은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과 더불어 동공일체(同功一體)여서, 처음에는 털끝만한 간격도 없었습니다. 정도전이 천자에게 죄를 얻으면서부터 남은과 결탁하여 요동(遼東)을 치자고 꾀해서 한 몸의 화를 면하려 하였습니다. 신이 이때 와병(臥病)중에 있었는데, 태상께서 두 사람을 보내어 신에게 물으셨습니다. 신이 병을 무릅쓰고 기운을 내어 천문(天門)에 뵈옵고, 어리석은 충정을 분발하여 천의(天意)를 돌이키니, 간사한 꾀가 드디어 저지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사람과 신 사이에 시기하고 틈이 생겨, 형세가 서로 용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길 가는 사람도 아는 바입니다. 태상께서 병환이 나서 오래 끄는 때를 당하여, 오직 이 두 사람만은 그 욕망을 이룩하고자 하여 어린 얼자(孽子)를 세우기를 탐하였습니다. 외간(外奸) 내궤(內軌)가 이미 이루어져서 화가 조석에 있었는데, 다행히 천지(天地) 조종(祖宗)의 몰래 돕는 힘을 입어서, 제공(諸公)과 부마(駙馬)가 먼저 의거(義擧)를 일으켜, 흉한 무리가 복주(伏誅)되고, 나라의 운수가 다시 안정되었습니다...<후략>

- 정도전이 숙청되었던 주요 원인

1. 이성계의 후처 소생 자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

2. 진법 연습을 통해 사병 혁파를 ​도모하였음.(이방원파에서는 진법 연습의 취지를 중국에 도전하기 위한 군사훈련으로 변질 시킴)

 

□ 태종 3년(1403 계미 / 명 영락(永樂) 1년) 6월 5일

평양 부원군 조준이 병중에 있어 육선을 내려 주다

...<전략>조계(朝啓)하는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씨(李氏)가 개국(開國)한 공(功)은 오로지 조준(趙浚)과 남은(南誾)에게 있다. 정도전(鄭道傳)은 언사(言辭)를 잘하여 공신(功臣)의 열(列)에 있었는데, 그가 공신(功臣)이 된 것은 또한 당연하나, 공(功)으로 논하면 마땅히 5, 6등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미 간 사람들을 오늘에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남은이 만일 살아 있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부왕(父王) 때에 양정(兩鄭)이라고 일렀으니, 하나는 몽주(夢周)이고, 하나는 도전(道傳)이었다. 몽주는 왕씨(王氏)의 말년 시중(侍中)이 되어 충성을 다하였고, 도전은 부왕(父王)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하였으니, 두 사람의 도리가 모두 옳은 것이다.”...<후략>
- 이날은 정도전을 죽인 태종 이방원의 기분이 좋은 모양임.​
정도전을 칭찬함. 당연하지만 조선 개국에 정도전이 많은 역활을 한것은 사실임.​

 
□ 태종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8월 24일
길창군 권근이 전위의 불가함을 상서하다
...<전략> 우리 태상왕께서 상왕께 왕위를 전해 주실 때에는, 태상왕께서 병이 심하시었고, 또 정도전(鄭道傳)이 감히 황제의 명을 거역함이 있었으며, 또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고, 어린 서얼(庶孽)을 세우려고 탐내어 총적(冢嫡)을 죽이려고 도모해서, 화변(禍變)이 급(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에서도 고제(高帝)가 돌아 가고 건문제(建文帝)께서 새로 등극(登極)하여, 여러가지 일에 겨를이 없었던 까닭에, 묻지 아니한 것뿐입니다...<후략>
 
 
□ 태종 7년(1407 정해 / 명 영락(永樂) 5년) 10월 3일
정도전의 아들 정진(鄭津)을 판나주목사(判羅州牧事)로 임명함.
- 제1차 왕자의 난 당시에는 정도전 일가는 멸문지화를 당하는 듯 하나 정도전의 장남은 높은 벼슬을 받음.​

 
□ 태종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11월 9일
권근이 대간의 직책에 대한 사목을 상언
 일찍이 국초(國初)에 신(臣)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이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편수(編修)할 때에 대간의 직임에 대한 역대(歷代) 연혁(沿革)과 선유(先儒)의 격언(格言)을 갖추 싣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신이 그 당시에 함께 교정(校正)을 가(加)했사온데, 직임의 중함을 말한 것은 더 이상 심오(深奧)한 뜻이 없습니다. 지금 주상의 명령을 받고 다시 《문감(文鑑)》에 실리지 않은 송나라 제도[宋制]의 연혁과 송조(宋朝) 대간(臺諫)의 어진 신하의 언행(言行)·사적(事迹) 한두 조건(條件)을 상고해 참고하고, 선사(繕寫)하여 《경제문감(經濟文鑑)》 한 질(秩)과 함께 바치오니, 맑고 조용한 여가(餘暇)에 특별히 한 번 보시면 거의 간(諫)함을 좇는 미덕(美德)에 도움이 있으실 것입니다...<후략>
- 정도전이 만든 책을 아주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임.

 
□ 태종 9년(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3월 21일
유용생 등을 호조 판서로 하는 등 인사이동·대호군에 임명된 전보에게 진법 훈련을 지시하다
유용생(柳龍生)을 호조 판서로, 장사길(張思吉)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김로(金輅)를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유사눌(柳思訥)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전보(田甫)를 호용시위사 대호군(虎勇侍衛司大護軍)으로 삼았다.
임금이 전보(田甫)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정도전(鄭道傳)이 진법을 연습할 때에 네가 사마(司馬)가 되었다고 하니, 지금도 진법을 잊지 아니하였겠지?”
하니, 전보가 대답하기를,
“신이 스스로 능한 것이 아니고, 신은 다만 진법(陣法)에 의하여 행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삼군 갑사(三軍甲士)와 응양위(鷹揚衛)·별시위(別侍衛), 그리고 좌우(左右)의 인물들에게 진법을 훈련시켜 좌작직퇴(坐作進退)의 절차를 알게 하려고 하니, 네가 그것을 가르치도록 하라.”
 - 정도전이 사병 혁파와 요동 공격을 위해 하던 진법 훈련을 정도전 생존 당시 지휘관으로 참여한 사람을 다시 불러씀.

 
□ 태종 9년(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8월 19일
정도전의 동생 정도복을 인녕부 사윤으로 삼다
정도복(鄭道復)으로 인녕부 사윤(仁寧府司尹, 정3품)을 삼았다. 도복(道復)은 정도전(鄭道傳)의 아우인데, 바야흐로 정도전이 나라 일을 맡아 그 세력이 조야(朝野)를 누를 때에 도복을 불러 서울에 오게 하니, 도복이 사양하기를,
“세력과 지위는 오래 가기 어려우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한미(寒微)한 가문(家門)인데 영화(榮華)가 이미 지극합니다.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마땅히 낚시질하고 밭을 갈며 내 천년(天年)을 마치겠습니다. 청컨대, 형(兄)은 번거롭게 하지 마소서.”하였다.
뒤에 성주(星州)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이 되었는데, 7년이나 오래 되었으므로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 정도전의 동생도 벼슬을 받음.​

 
□ 태종 11년(1411 신묘 / 명 영락(永樂) 9년) 8월 2일
정도전의 전민을 적몰하고 자손을 금고하도록 명하다
임금이 남재를 불러 말하였다.
“개국(開國)에 대한 일을 경이 모르는 것이 없는데, 이종학(李種學) 등의 일을 어째서 모르는가? 임신년 이전의 일은 내가 모두 알지마는, 그 뒤는 나를 꺼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동북면(東北面)에 출사(出使)하였었다. 그런데 경이 어째서 모른다고 하는가?”
대답하였다.
“임신 연간의 일은 신이 그때 대언(代言)이었으니, 어찌 모르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은 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만일 이 일을 알았다면 어찌 이미 죽은 아우를 위해서라도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개국의 공은 남은(南誾)이 많았으니,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 힘써 아뢴 일이 있었으나, 정도전(鄭道傳)은 개국할 때에도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없었고, 그 뒤에 적서(嫡庶)를 분변할 때에도 한 마디 언급하지 않았고, 고 황제(高皇帝)에게 득죄(得罪)함에 이르러서는 굳이 피하고 가지 않고 사(私)를 끼고 임금을 속이었고, 흉포(凶暴)한 짓을 자행하여 그 몸의 허물을 없애고, 이숭인(李崇仁) 등을 함부로 죽이어 그 입을 멸하였으니, 죄가 공(功)보다 크다. 마땅히 전민(田民)을 적몰(籍沒)하고 자손을 금고(禁錮)하라.”

 
□ 태종 16년(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10일
정도전·황거정 자손의 금고를 해제하게 하다
명하여 정도전(鄭道傳)과 황거정(黃居正)의 자손의 금고(禁錮)를 해제하게 하였다.


 
□ 태종 16년(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26일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에게 직첩을 주라고 하다
정진(鄭津)에서 직첩(職牒)을 주라고 명하니, 정도전(鄭道傳)의 아들이었다.
□ 태종 17년(1417 정유 / 명 영락(永樂) 15년) 9월 17일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鄭津)을 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로 임명함.
□ 세종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윤12월 8일
공신 도감에서 죄지은 공신의 화상과 공권과 교서를 올리다
공신 도감(功臣都監)에서 죄를 지은 세 공신(功臣)들의 화상[影子]과 공권(功券)과 교서(敎書)를 올리니,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오몽을(吳蒙乙)·이근(李懃)·장지화(張志和)·손흥종(孫興宗)·이제(李濟)·이거이(李居易)·황거정(黃居正) 등의 화상은 그 자손에게 내어 주고, 장담(張湛)·조박(趙璞)·박포(朴苞)·이무(李茂)·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유기(柳沂)·조희민(趙希閔)·윤목(尹穆)·조기(趙綺)의 화상과 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의 교서(敎書)·공권(功券)과 장사정(張思靖)의 공권은 이를 모두 불사르라고 명하였다.
세종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월 25일 정도전의 아들 정진이 공조판서에 임명 되었다가 9월 29일 개성 유후(開城留後, 개성시장)으로 임명됨.
​□ 세종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10월 24일
정도전의 아들 정진이 ​형조판서(정2품)에 임명됨.

 

세종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4월 17일

명나라 사신의 접대자리에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鄭津)도 참석함.​

 

□ 세종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3월 6일

​정도전의 아들인 형조 판서 정진(鄭津)이 죽다.

 

□ ​세종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4월 16일

- 여러 공을 세운 높은 벼슬아치가 죽고 나면 나라에서 비석을 세워 주는데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鄭津)에게도 비석을 세워줌.

단종 1년(1453년)

- 그때까지도 궁궐의 큰 행사때 연주하던 음악 중의 하나인 정동방곡(靖東方曲)은 정도전이 만든것임.

□ 성종 23년(1492 임자 / 명 홍치(弘治) 5년) 2월 23일

역대 제왕의 일에 대해 정도전이 편집한 책을 인출하게 하다

우찬성(右贊成) 정문형(鄭文炯)이 그의 조부(祖父) 정도전(鄭道傳)이 찬정(撰定)한 책 1질(帙)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신이 빈객(賓客)으로서 일찍이 시강원(侍講院)에 이르니, 서연관(書筵官)이 신에게 이르기를, ‘역대 제왕(帝王)의 치란(治亂)과 득실(得失), 향년(享年)의 많고 적은 것을 대략 엮어서 강독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겠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선조(先祖)가 일찍이 역대 제왕의 일을 편집(編集)하여 한 책을 만들어서, 우리 집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뒤에 들으니 서연관이 이것을 세자(世子)께 아뢰었다고 하므로 신이 지금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의 취사(取捨)는 성상의 재결(裁決)에 달려 있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세자(世子)뿐만 아니라 나도 보고자 하니, 그것을 인출(印出)하도록 하라." 하였다.​
- 우리의 공부덕후 성종 임금은 체면이고 뭐고 좋은 책이 있으면 무조건 읽어야함.​

 

중종 11년(1516 병자 / 명 정덕(正德) 11년) 10월 15일

​- 태조 6년 정도전(鄭道傳)·하윤(河崙)·조준(趙浚) 등이 육전의 형식을 갖추어 만든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이 중종때까지도 경국대전과 함께 국가의 법률적인 판결에 중요하게 활용 되고 있었음.

​□ 명종 9년(1554 갑인 / 명 가정(嘉靖) 33년) 11월 24일

공조 판서 홍섬이 아뢰기를,

“선수 도감이 신을 시켜 경복궁을 중수한 일에 대해 시말(始末)을 기록하도록 청했습니다. 신이 선조 때부터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기는 했어도 제술에는 부족하여 한갓 허명(虛名)만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항상 마음에 부끄러웠습니다. 법궁(法宮)의 기록은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니 반드시 문장에 노련한 사람이라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당초에 이 궁을 창건하시고서 전각(殿閣)의 명칭과 창건한 시말을 모두 정도전(鄭道傳)을 시켜 기록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리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개 정도전의 문장이 전아(典雅)하면서도 정밀하고 고와 그 당시에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과 같은 사람이 어찌 공졸(工拙)을 헤아려보지도 않고서 뻔뻔스럽게 흉내를 내겠습니까. 보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을 뿐 아니라 또한 국가의 체통을 손상하게 될 것입니다. ...<후략>

​□ 선조수정 23년(1590 경인 / 명 만력(萬曆) 18년) 6월 1일

전 지평 최영경(崔永慶)을 하옥하였다. 정여립의 난이 일어난 초기에 적의 무리가 길삼봉(吉三峯)이 상장(上將), 정팔룡(鄭八龍)·정여립이 차장(次將)이라고 천명하였었다. 그래서 국청이 드디어 길삼봉의 행방을 심문하여 용의자가 많이 체포되었으나 다들 신원이 증명되어 석방되었다....<중략>... 최영경이 공초하기를,

삼봉이란 본디 저의 별호가 아닙니다. 정도전(鄭道傳)의 호가 삼봉이니 이것이 어찌 답습할 호이겠습니까. 서울에 있을 때 역적과 지면 관계가 있었지만 어느 해 이후론 서찰도 통하지 않았는데 어찌 상종할 리가 있겠습니까.”...<후략>

 

​□ 광해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2월 24일

예조 좌랑 기준격(奇俊格)이 비밀리에 상소하기를...<중략>..."허균은 한평생 정도전(鄭道傳)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인시문(東人詩文)》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고 우영의 시도 그 안에 뽑아 넣었습니다."

...<후략>​

- 아직까지는 정도전을 흠모하거나 정도전의 시(詩)를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탄핵을 받을 만한 죄임.​

​□ 현종 10년(1669 기유 / 청 강희(康熙) 8년) 1월 4일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심경》을 강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음석(音釋)을 읽으며 글의 뜻을 강하였고, 판부사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이 번갈아가며 나머지 뜻을 강하였다. 시열이 나아가 아뢰기를,...<중략>... 태조께서 개국하신 후

간신 정도전(鄭道傳) 태종 성조(聖祖)께 무함하여 끝내 신덕 왕후 소생인 소도공(昭悼公)이 비명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태종이 즉위하신 후 신덕 왕후의 능은 사한리(沙閑里)로 옮겨 묻고 여전히 태묘에 배향되지 않았습니다. 사체가 중대하니 대신과 유신들에게 널리 의논하여 태묘에 배향하고 능도 여러 능들과 똑같이 만들어야 합니다.”...<후략>

□ 숙종 7년(1681 신유 / 청 강희(康熙) 20년) 9월 14일

공정 대왕 묘호 추가에 대한 송시열의 대답

사관(史官)이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묘호(廟號)를 추가하여 올리는 일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에게 가서 물으니, 송시열이 대답하기를,
“국가를 처음 세우던 초기에 불행하게도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의 변란(變亂)이 있었고, 인해서 태조 대왕(太祖大王)이 한(漢)나라 고조[上皇]가 그의 고향인 풍패(豐沛)를 그리워했던 그런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잠시동안 북쪽에 있는 고향인 함흥(咸興)에 거둥하였으며, 마침내 보위(寶位)를 공정 대왕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후략>
□ 영조 8년(1732 임자 / 청 옹정(雍正) 10년) 1월 11일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당감(唐鑑)》을 강독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당(唐)나라 고조(高祖) 수(隋)나라 왕실의 자손을 죽이지 않고 또 녹용(錄用)하였으니, 이는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국초(國初)에 왕씨(王氏)의 자손을 배에다 싣고 바다에 빠뜨린 일은 바로 정도전(鄭道傳) 무리의 계책이며, 성조(聖祖)의 뜻은 아니었습니다.”...<후략>
고종 2권, 2년(1865 을축 / 청 동치(同治) 4년) 9월 10일
대왕대비(大王大妃, 신정왕후 조씨)가 전교하기를,
“법궁(法宮)의 전각(殿閣)들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이 전각의 이름을 정하고 송축한 문구를 생각해보니 천 년의 뛰어난 문장으로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학 국사(無學國師)가 그 당시 수고를 한 사실에 대해서는 국사(國史)나 야승(野乘)에 자주 보이는데, 나의 성의를 표시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에게는 특별히 훈봉(勳封)을 회복시키고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하라. 그리고 해조로 하여금 봉사손(奉祀孫)의 이름을 물어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으로 의망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 ​고종 8년(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3월 16일
​- 드디어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 문헌공(文憲公)이라는 시호를 받고 완전히 복권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사후(死後) 인물 / 조선왕조실록

2014. 3. 29. 0:08

복사 http://blog.naver.com/joseon_500/80210153243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정몽주(鄭夢周)

초명(初名)은 몽란(夢蘭)·두번째 이름이 이몽룡이 아닌 정몽룡(鄭夢龍)이고 세 번째 이름이 몽주(夢周)

자(字)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圃隱)

본관(本貫)은 영일(迎日)이며 고려 18대 의종(毅宗)때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11대 손이며,

정운관(鄭云瓘:日城府院君)의 큰아들임.

1337년(고려 충숙왕 6년) 음력 12월 22일 출생.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음력 4월 4일, 56세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사주를 받은 조영규(趙英珪), 고여(高呂), 조평(趙評) 등 에게 맞아 죽음.

(1880년대에 그린 포은의 초상. 국립 중앙박물관)

예부(禮部. 명나라의 예조)에 아뢰게 하기를,

"<전략>... 신하 정몽주(鄭夢周) 등이 간사한 계책을 몰래 이루어 난(亂)의 발단을 일으키고자 하여, 이에 훈신(勳臣) 이성계(李成桂)·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을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는 요(瑤)에게 참소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논핵(論劾)하여 해칠 것을 꾀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망하여 몽주(夢周)를 함께 목 베었습니다...<후략>"

​- 태조 1년(1392년) 7월. 조선을 개국한 대소 신료가 태조의 등극을 알리기 위해 중국 명나라 예부에 사신을 보내는 전문 中.

“<전략>... 정몽주 등이 국권(國權)을 마음대로 부려 대간(臺諫)을 몰래 부추겨 화란(禍亂)을 부채질하여 장차 내 몸에까지 화를 미치게 하려고 꾀했는데, 이에 항거하는 소장(疏章)을 올려 정몽주와 그 당여(黨與)들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간사한 계획을 와해(瓦解)시켜 오늘날이 있게 하였으니, 그 충성심은 칭찬할 만하다. 마땅히 모두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란 칭호를 내려야 할 것이다...<후략>" ​- 태조 1년(1392년) 10월. 태조 이성계가 개국 원종 공신의 포상에 대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내린 교지 中.

​"<전략>... 나라 사람들이 종실(宗室) 왕요(王瑤, 공양왕)로써 나라 일을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고, 정몽주(鄭夢周)를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는데, 몽주최영의 실패한 자취를 경계하지 아니하고 왕요와 더불어 다시 요동(遼東)을 공격하려고 모의하니, 나라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하므로, 왕요는 물러나 사제(私第)로 돌아가고, 몽주는 참형(斬刑)을 당하였습니다...<후략>"

​- 태조 3년(1394년) 2월. 명나라와 표전 문제 등으로 황제가 힐문한 10가지 조항에 대해 해명하는 주문(奏聞) 내용 中.

“<전략>... 몽주(鄭夢周)의 난에 만일 정안공(靖安公, 태종 이방원)이 없었다면, 큰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고, 정도전(鄭道傳)의 난에 만일 정안공이 없었다면, 또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또 어제 일로 보더라도 천의(天意)와 인심(人心)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정안공을 세워 세자(世子)를 삼으소서.”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의 말이 심히 옳다.”
​- 정종 2년(1400년) 2월.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윤(河崙) 등이 정안공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자고 청하는 내용 中.
태종 이방원이 왕권을 이어 받기 전까지 이방원 파에 의해 살해 당한 정몽주의 죽음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해야 함. ​
"<전략>... 가만히 보건대, 전조(前朝)의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가 본래 한미(寒微)한 선비로 오로지 태상왕의 천발(薦拔)의 은혜를 입어서 대배(大拜)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이 어찌 태상왕께 후히 갚으려고 하지 않았겠으며, 또 재주와 식견의 밝음으로써 어찌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돌아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겠으며, 어찌 왕씨(王氏)의 위태하고 망하는 형세를 알지 못하였겠으며, 어찌 자기 몸이 보전되지 못할 것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섬기던 곳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그 절조를 변하지 않아서 생명을 잃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절(大節)에 임(臨)하여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중략>... 정몽주고려(高麗)를 위하여 죽었는데, 오늘에 홀로 추증할 수 없겠습니까...<후략>"
​- 태종 1년(1401년) 1월.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권근(權近)의 치도 6조목 상소 중 정몽주를 추증(追贈) 하자는 내용.
※ ​추증(追贈) : 죽은 신하의 관직을 회복하거나 올려 주는 것.
​결국 그 해 11월. 권근의 요청을 태종 임금이 허락함.
태종의 등극 후 곧바로 유체 이탈을 시작하는 신하들과 태종.​
조선왕조​ 《태종실록》에는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권근(權近)의 요청으로 "고려 문하 시중(門下侍中) 정몽주(鄭夢周)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증직(贈職) 하다."는 내용 뿐임.
​영일 정씨(迎日鄭氏) 포은공파의 기록에 당시 증직(贈職)된 내용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 이란 여러가지 높은 벼슬을 증직(贈職) 하였고 이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린 것으로 기록됨.
조선왕조실록에 정몽주의 명예회복에 관한 기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적을 이유가 없음.
실록 기사가 간단한 이유는 태종 실록의 편찬자들이 고려조의 충신​이라는 것을 더 크게 표현 하기 위함이리라...
후에 정몽주의 묘비명에 조차도 조선시대에 내려준 관직 이름이나 시호 조차도 새겨 넣지 않았음.
※ 증직(贈職) :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죽은 뒤에 품계, 관직을 추증(追贈)하여 영예를 누리게 한 일.

<전략>... 임금이 말하기를,

정몽주(鄭夢周)는 향생(鄕生)으로서 장원이 되어 호방(豪放)함이 비길 데 없었다.”
하니, 이응(李膺)이 대답하였다.
정몽주 같은 분은 중국에도 드뭅니다.”...<후략>
- 태종 2년(1402년) 4월. 과거 시험의 장원을 뽑는 자리에서 임금과 대언(代言) 이응(李膺)의 대화 中.
자기 지시로 때려 죽인 정몽주 아니었던가? 유체 이탈이 점점 더 심해짐.​
이씨(李氏)가 개국(開國)한 공(功)은 오로지 조준(趙浚)남은(南誾)에게 있다. 정도전(鄭道傳)은 언사(言辭)를 잘하여 공신(功臣)의 열(列)에 있었는데, 그가 공신(功臣)이 된 것은 또한 당연하나, 공(功)으로 논하면 마땅히 5, 6등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미 간 사람들을 오늘에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남은이 만일 살아 있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부왕(父王) 때에 양정(兩鄭)이라고 일렀으니, 하나는 몽주(夢周)이고, 하나는 도전(道傳)이었다. 몽주왕씨(王氏)의 말년 시중(侍中)이 되어 충성을 다하였고, 도전은 부왕(父王)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하였으니, 두 사람의 도리가 모두 옳은 것이다.”...<후략>
- 태종 3년(1403년) 6월. 조계(朝啓, 오전 회의)하는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회의에서 임금이 한 말씀 하시는 中.
임금이 인덕궁(仁德宮)에 나아가 타구(打毬) 하니, 세자·종친이 참여하였다.
내자 소윤(內資少尹) 정종성(鄭宗誠)이 희롱삼아 대호군(大護軍) 이순몽(李順蒙)에게 말하였다.
“자네의 광증은 권희달(權希達)을 마땅히 이을 만하나, 자네의 후계는 누가 이을 것인가?”
권희달이 이를 듣고, 대노(大怒)하여 몹시 꾸짖어 욕하고는 또 말하기를,
너는 정몽주(鄭夢周)의 자식인데, 다행히 우리 주상의 덕을 입어 너의 목숨이 보전되었다.”
하고, 드디어 팔소매를 걷고, 이순몽이 쥐고 있는 주장(朱杖)을 빼앗아, 종아리를 때렸다. 임금이 이를 듣고,
권희달은 연로한 고관인데, 그 광증을 줄이지 아니하고 이러한 짓을 하였는가?”
하고, 인하여 권희달에게 명하였다.
너의 집으로 물러가 나오지 말라.”
사헌부에서 상언하기를,
권희달은 그전에도 자주 조사(朝士)를 욕보였는데, 이제 또 그의 사분(私忿)을 풀고자 금장(禁杖)으로 정종성의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정종성권희달을 기만(欺謾)하였으니, 모두 죄가 있습니다. 청컨대, 유사(攸司)에 내려 그들을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두 사람 모두가 죄는 있지만 내 그들을 화해(和解)시키겠다.”
- 태종 13년(1413년) 1월. 권희달은 박포의 난 때 도망가는 이방간을 추격하여 잡은 인물임.
권희달이나 이순몽은 태종이 아까던 무사들이었는데 오히려 정몽주의 아들​에게 태종은 작아진 모습을 비춰짐.
​...<전략> "또 근자에 구언(求言) 했을 때, 재신(宰臣) 남실(南實)이 강무의 폐단을 극언(極言)하였는데, 그 말이 임금을 업신여겼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여겼기에 내가 그 이유를 묻고자 하다가, 구언(求言)하고서 도리어 그 말이 적중하지 못함을 책망할 수 없는 까닭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전조(前朝, 고려)의 말년에 구언하였더니, 어떤 사람이 부처[佛]를 헐뜯어 말하므로 조정의 의논이 그를 국문(鞫問)하려 하였다.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가 말하기를, ‘구언하고서 그에게 죄 줄 수는 없습니다.’ 하여, 곧 죄를 면한 일이 있었기에, 사실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그를 내버려두고 묻지 않은 것은 또한 이런 뜻에서였다. ...<후략>"
​- 태종 17년(1417년) 2월. 강무장 문제로 화기 머리 끝까지난 태종 임금이 잘못하 신하들을 책망하며.
정몽주 덕분에 너네들 처벌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같음.
※ ​구언(求言) : 나라에 재변(災變)이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의미에서 시정(時政)의 잘못과 민폐(民弊)에 대한 바른 말을 구하던 제도

 

...<전략>“원왕(元王) 이하는 비기어 참람하게 쓴 것이 많다" 하여, 종(宗)이라고 일컬은 것을 왕이라 쓰고, 절일(節日)이라고 호칭한 것을 생일(生日)이라 썼으며, 짐(朕)은 나[予]로 쓰고, 조(詔)를 교(敎)라 썼으니, 고친 것이 많아서 그 실상이 인멸된 것이 있고, 또 운경(云敬)도전의 부친으로, 별다른 재능과 덕행도 없었는데도 전(傳) 을 지어 드러내고, 정몽주(鄭夢周)·김진양(金震陽)은 충신(忠臣)인 것을 가차없이 깎고 몰았으며, 오직 자기의 일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하여, 그 옳고 그른 것을 정한 것이 〈그네들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서 나왔고, 착하다고 한 것과 악하다고 한 것이 예 역사를 그르쳐 놓았다....<후략>
- 세종 5년(1423년) 12월. 임금이 지관사(知館事) 유관(柳觀)동지관사(同知館事)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정도전 등이 처음에 만든《고려사(高麗史)》를 다시 개수(改修)하게 하는 것에 대한 사관(史官)의 논평.
정도전을 깍아 내리는 이야기애도 정몽주가 비교 대상으로 나타남.​
...<전략> (임금이) 또 말하기를, 길재(吉再)의 절조는 포창할 만하다. 정몽주(鄭夢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하니,
시강관 설순(偰循)이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신이 그가 충신이란 말은 들었습니다마는, 춘추관(春秋館)에서 이에 대한 공문을 보내 온 것이 없고, 성상께서도 명령하시지 아니하여, 신은 감히 청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몽주(夢周)의 일은 태종께서 그가 충의를 위하여 죽은 줄을 아시고 벌써 포창하고 상을 내리셨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있느냐. 충신의 대열에 기록함이 옳다.”
​- 세종 12년(1430년) 11월. 경연 자리에서 고려 때 충신으로 내세울 사람에 대한 ㅔ종 대마왕의 인물의 평가 中.
"​송(宋)나라중국으로서 금(金)나라의 제재를 받았거니와, 금나라가 비록 이적(夷狄)이긴 해도 그 풍속이 순후하였고, 나라가 쇠망함에 이르러서도 절의에 죽은 자가 많았는데, 전조(前朝) 말기에는 충신(忠臣)·의사(義士)가 몹시 적었다. 이색(李穡) 같은 사람도 역시 절의를 다하지 못하였고, 유독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가 능히 옛 임금을 위하여 절개를 굳게 지키고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 벼슬을 추증(追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는 순실(淳實. 순박하고 참됨)하지만 길재는 모[圭角]가 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의 생각으로는 길재몽주에 비하면 약간의 간격(수준 차이)이 있을 것이다."
하니, 검토관(檢討官) 권채(權採)가 대답하기를,
권근(權近)정몽주에게는 한층 경복(敬服)을 더했사오며, 정몽주의 일이 순실하였던 것은 과연 성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권근정몽주에게는 과연 탄복했었다.”...<후략>
- ​세종 13년(1431년) 3월. 경연 자리에서 송(宋)나라 시대와 고려 시대 충신과 학자들의 인물을 비교 하며.
 
 
...<전략> 임금이 설순에게 이르기를,
시중 정몽주(鄭夢周)는 죽기까지 절개를 지키고 변하지 않았으며, 주서 길재(吉再)는 절개를 지켜 마음을 변하지 않고 상소해서 물러가기를 청했으니, 찬술(撰述)한 《충신도(忠臣圖)》안에 모두 얼굴을 그리고 찬(贊)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 세종 13년(1431년) 11월. 경연 자리에서 집현전부제학 설순(偰循)과 당시 사대부들의 효(孝)와 충(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中.
 
 
"...<전략> 가만히 생각하오니, 겸 대사성은 한 나라 학자의 사표(師表)가 되는 것입니다. 신의 선조(先祖) 신(臣) 색(穡)이 처음 〈이 벼슬을〉 하였으며, 그 뒤를 서로 이은 자로는 정몽주(鄭夢周)·박의중(朴宜中)·이첨(李詹)·권근(權近)·조용(趙庸)·변계량 같은 이가 있어서 다 경술(經術)과 문장이 세상에서 존중을 받는 자들입니다. 돌아보건대, 신과 같은 자는 경서(經書)에 있어서 훈고(訓詁) 의 말절(末節)에도 오히려 통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어찌 감히 위의 여러 군자(君子)들을 계승(繼承)하여 함부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후략>
​- 세종 14년(1432년) 3월. 겸 성균 대사성(兼成均大司成)으로 임명된 의정부 참찬(參贊) 이맹균(李孟畇)의 대사성 직위의 사직 상소문에서 이맹균은 자신을 정몽주 등 과 비교 하여 감히 대사성의 자리에 함부러 오를수 없다며. 
 
 
<전략>...“본조의 개국 초기를 당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일지라도 천명과 인심의 향배(向背)를 모두 알았사온데, 정몽주같이 어질고 밝은 사람으로서 어찌 이를 모르리오마는, 그 지조를 고치지 않고 끝내 신자(臣子)의 절의를 지켰던 것이니, 만약 조정에 있는 자들이모두가 몽주의 그 마음을 가진다면 충의로운 신하라고 일컬어야 옳을 것입니다. 정몽주의 후예를 특별히 탁용하여 그 절의를 권장케 하옵소서.”...<후략>
- 세종 17년(1435년) 1월. 회의 시간. 판중추원사 허조(許稠)가 정몽주의 후손에게 벼슬을 주자는 상언(上言) 中.

임금이 전대(前代)의 문신(文臣)인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의 경학(經學)의 아름다움을 고루고루 들면서 탄식하기를,

“지금은 어찌하여 훈고(訓詁)를 바르게 하는 사람도 없는가. 유생(儒生)들이 시학(詩學)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내가 시학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다.”...<후략>
세종 17년(1435년) 6월. 《통감훈의》의 찬집관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한 말씀 하시는 中

...<전략>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 등이 아뢰기를,

“정종성(鄭宗誠)이 전함(前銜)으로 여러 해 근무하면서 생도를 교훈하여 공적이 제법 있었습니다. 또 그의 아비 정몽주고려 충신으로서 명교에 공이 있었습니다. 우리 태종께서 그의 절의를 아름답게 여겨서 문충이라는 시호까지 내리셨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또 유신에게 명하여 그의 행실을 기록하여 충신도(忠臣圖)에 기재하였으니, 포상하신 법은 훌륭하였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종성은 명신의 아들로서 쓸 만한 인재인데, 나이 60이 넘은 지금에 산질(散秩)에 있음은 나라의 법에 모자라는 점인가 합니다. 차례는 무시하고서라도 발탁하여 써서 사책을 빛나게 하고 후인을 권장하시어, 우리 조정에서 절의를 포상하는 법도를 더욱 드러나게 하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하여 정몽주이 아들 정종성(鄭宗誠)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 임명함.
​- 세종 19년(1437년) 12월. 전농시(典農寺) : 나라의 제사에 쓰이는 곡물의 출납을 맡아보던 부서. 전농시 판사는 정3품.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적출(嫡出) 증손(曾孫)인 정윤정(鄭允貞)에게 관직을 제수(除授)하고, 길재(吉再)의 손자인 길인종(吉仁種)에게도 나이가 20살이 차기를 기다려서 또한 관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 문종 즉위년(1450년) 12월. 이조(吏曹)에 정몽주의 손자에 대하여 벼슬을 주라는 전지(傳旨) 내용.
...<전략>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본조의 문충공 권근(權近)에 이르러서는 그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사람마다 모두 만세(萬世)의 수범(垂範)이 될 만하다고 하였으니, 빌건대 모두 선성(先聖)에 배향(配享)하여 후인(後人)을 권장하게 하소서. 만약 ‘동방의 현자(賢者)가 어찌 옛사람과 같을 수가 있느냐?’고 한다면, 공자·맹자의 뒤에도 또한 정(程)·주(朱) 가 있었고, 또 어진 자 되기가 이같이 어려우면 후인이 어찌 성현(聖賢)을 배우겠습니까? 중국의 배향자(配享者)는 과연 모두 공자·맹자, 정(程)·주(朱)와 같으며 동방의 선비는 모두 중국 사람만 같지 못하겠습니까? 대저 임금[人主]은 모름지기 일대 정사를 시행하여 권징(權懲)하는 뜻을 보인 뒤라야 사람이 보고 들으며 동(動)하고, 풍속(風俗)을 옮겨 고칠 것입니다....<후략>"
- 세조 2년(1456년) 3월.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가 정몽주 등을 후대 사람들이 오래동안 존경하고 기억 할 수 있도록 사당에 모시어 제사를 지내자는 상소(上疏).
...<전략>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圭)가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인주(人主)의 이목(耳目)이므로 마땅히 강명(剛明)한 자를 선택해서 임용해야 합니다...<중략>... 고려[前朝] 말기의 정몽주(鄭夢周)태조(太祖)에게 간택되어서 지위가 정승(政丞)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 당시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한 번 마음만 바꾼다면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될 것이니, 누가 그를 앞설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정몽주는 끝내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義)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길재(吉再)는 주서(注書)를 사직(辭職)하고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손을 이미 서용(敍用)하도록 하였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등용하지 않은 것은 전조(銓曹, 이조와 병조) 의 과실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손이 있는가?”
하므로, 현석규가 말하기를,
정몽주의 자손은 지금 서반직(西班職)에 제수되었는데 자못 영오(穎悟)하고, 길재의 자손은 어머니가 늙었다고 하여 사직(辭職)하고서 집으로 돌아가 봉양하고 있으니, 모두 쓸 만한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높은 벼슬에 발탁하여 절의(節義)를 장려하게 하소서.”
하였다...<중략>... 임금이 매우 옳게 여겼다.
​- 성종 7년(1476 년) 8월. 석강(夕講. 임금의 오후 수업시간)에서 충의와 절의에 대해 논하던 中.

 

...<전략> 동부승지(同副承旨) 김계창(金季昌)이 아뢰기를,

“임금은 절의(節義) 있는 선비를 소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평시에 의임(倚任)하지 않으면 위란(危亂)할 때에 수용(收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임금이 소식(蘇軾)에게 묻기를, ‘절의 있는 선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니, 소식이 대답하기를, ‘평시에 할 말을 다하고 극간(極諫)하는 자는 절의 있는 선비이고, 아부하며 순종하는 자는 간신(奸臣)입니다.’ 하였는데, 이 말은 진실로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절의 있는 선비는 세상에 많지가 않습니다. 고려(高麗) 5백 년에 오직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두 사람뿐이었습니다.”하였다.

- 성종 9년(1478년) 6월. 석강(夕講) 시간, 동부승지(同副承旨) 김계창(金季昌)과 《강목(綱目)》에 대해 토론을 하던 中.

...<전략> 대사간(大司諫) 김수손(金首孫)이 아뢰기를,
전조(前朝, 고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절의(節義)는 한(漢)나라당(唐)나라 이래에 보기 드문 것인데, 국가에서 절의를 숭상하고 권장하면서도 그 자손들이 모두 녹용(錄用)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결함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절의를 숭상하고 권장함에 있어서는 이미 그에 대한 법이 있으니, 그 자손들을 빠짐없이 서계(書啓)하라.” 하였다...<후략>
​- 성종 18년(1487년) 4월. 오전 회의 시간, 대사간(大司諫) 김수손(金首孫)이 정몽주의 후손들에게 벼슬을 주자는 상언(上言).
당시 정몽주의 후손으로 특별한 하자가 없다면 무조건 공무원 특채가 가능함.​
​"...<전략> 조광조의 학문이 바른 것은 전해온 데에 유래가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개연히 도(道)를 찾는 뜻이 있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수업(受業)하였습니다.
김굉필김종직(金宗直)에게서 수업하고 김종직의 학문은 그 아비 사예(司藝) 숙자(叔滋)에게서 전해졌고 숙자의 학문은 고려의 신하 길재(吉再)에게서 전해졌고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鄭夢周)에게서 전해졌는데 정몽주의 학문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그 학문의 연원(淵源)이 이러합니다...<후략>"
​- 인종 1년(1545년) 3월. 성균관 진사(進士) 박근(朴謹) 등 이 조광조(趙光祖) 사면을 청하는 상소 中.
정몽주가 죽은 후 세월이 많이 지난 이유 때문인지 슬슬 정몽주를 조선 성리학의 대부(大父)가 되어 가는 느낌.​
​"...<전략> 문충공의 문장과 도학(道學), 덕업(德業)과 문망(聞望)은 결코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에 지지 않으며 또한 충렬(忠烈)은 더하다. 그런데도 지금껏 가묘와 제향(祭享)하는 곳이 없다는 것은 한 고을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실로 한 도의 결점이다.’ 하였습니다...<중략>...

예조가 아뢰기를, “...<중략>... 그리고 정몽주의 문장과 절행(節行)은 안유(安裕, 안향)에 못지 않습니다. 사전(祀典)과 학규(學規)는 나라 제도에 있어 막대한 일이니 정언각의 계청(啓請)에 응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여 정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사신(史臣)의 논평, 충공은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시조이니 그의 문장과 충렬은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 이제 사우를 세우고 서원을 설치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 명종 9년(1554년) 6월, 경상도 관찰사 정언각(鄭彦慤)지방 유생들의 정몽주 서원을 건립하려는 일에 대한 장계(狀啓) 中.
이제는 고려 말기 주자학을 들여온 안향 보다 정몽주를 더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
사신(史臣)의 논평, 정몽주의 충절은 완악한 사람을 감격시키고 야박한 사람을 도타와지게 할 수 있으므로 뒷사람들의 사표(師表)가 될 것이다. 서책을 하사하고 편액을 큰 글자로 써서 내린 것은 충절을 장려하여 후학들을 흥기시키는 훌륭한 뜻이다.
​- 명종 9년(1554년) 11월, 정몽주를 기리는 임고 서원에 서책과 편액을 내릴 것을 예조가 아뢰는 기사에 대한 사신(史臣)의 논평.
“그 논설이 매우 정밀하다. 도(道)를 들은 대유(大儒)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한 지경에 이를 수 있겠는가. 참으로 우리 동방(東方)에 정포은(鄭圃隱, 정몽주) 뒤의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 선조 4년(1571년) 6월.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 유희춘(柳希春)이황(李滉)《심경(心經)》을 읽고 논하던 中.
개성부(開城府)의 진사 장예근(張禮謹)의 상소를 입계하니, 상이 비망기(備忘記)로 답하였다.
서경덕(徐敬德)을 우의정으로 추증(追贈)한 것도 이미 과한 일인데, 더구나 감히 정몽주(鄭夢周)와 나란히 할 수가 있겠는가? 시행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해조(該曹, 해당 부서. 여기서는 예조)에 이르라.”
​- 선조 9년(1576년) 2월. 개성부(開城府)의 진사 장예근(張禮謹) 의 상소에 대한 임금의 답변.

​※ 서경덕(徐敬德) : 박연폭포(朴淵瀑布)·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는 그 유명한 서화담(花潭).

서화단 따위가 어디 정몽주와 나란히 제사밥 얻어 먹을라고 그래?​

영화 '전우치'에 나오는 악당 요괴도사 화담 선생이 바로 이 서화담을 카피한 케릭임.​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조그마한 연못에서 자란 고기와 같아 중국 사람과 같지 않으니 참으로 풍기(風氣)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다만 김유신(金庾信)정몽주(鄭夢周)가 있을 따름이다.”...<후략>
​- 선조 27년(1594년) 2월, 대신과 비변사 당상 등을 인견하여 군량 마련, 납속한 자에 대한 시상 등을 논의 하는 자리.

“...<전략>  그리고 전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김양(金陽), 백제성충(成忠)·계백(階伯), 고려강감찬(姜邯贊)·정몽주(鄭夢周) 등과 같은 이에 대해서는 그 묘를 봉분해 주고 나무를 심고서 불을 금하고 벌채를 금하게 하라...<후략>” - 광해 2년(1610년) 2월. 전대 제왕(前代諸王)·충신 등의 능묘 수리에 대해 전교하며.
“...<전략> 우리 태종 대왕께서는 정몽주(鄭夢周)를 문묘에 종사하게 하셨으니 국가 억만년의 토대가 되는 정신의 명맥이 오로지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유들을 드러내어 표장하는 일은 이학(理學. 성리학)의 흥폐와 관계되며, 이학의 흥폐는 세상의 도가 쇠하고 융성하는 데에 이와 같이 관계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동방 이학(理學. 성리학)의 원류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후 정몽주의 계통을 이은 이로는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이 다섯 현인은 조종조로부터 이미 높은 관직으로 증직되었으며 또 아름다운 시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후략>"
​- 광해 2년(1610년) 5월, 부제학 남이공(南以恭), 직제학 윤효선(尹孝先), 응교 이성(李惺), 부응교 김광엽(金光燁), 교리 김지남(金止男), 부교리 정립(鄭岦) 등이 5현(五賢)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 中. 정몽주의 묘를 관리 하는 것만으로도 국가의 억만년릐 토대가 지켜 진다는 오버스런 내용.
전 전첨(典籤) 정준(鄭儁)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의 선조인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는 동방 이학(理學.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인륜과 사표(師表)의 표준이 되기 때문에 아조(我朝)의 열성(列聖)들께서 이미 시호의 전례(典禮)를 거행하고 또 포장(褒奬)하는 은전을 내렸습니다. 영천(永川)은 바로 선조가 사시던 곳이라 하여 묘우(廟宇)를 창건하고 중묘(中廟)께서 임고(臨皐)라고 사액하셨는데...<중략>...
예조가 회계하기를, 정몽주는 동방 이학의 모범으로 후학이 모두 받들어 스승으로 삼는 분이며...<후략>"
​- 인조 21년(1643년) 4월, 임고 서원의 배향 문제로 전 전첨(典籤) 정준(鄭儁) 의 상소문과 예조의 답변 中.
​"우리 나라가 처음에는 비루하다고 불렸는데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이 비로소 문자(文字)를 알았고, 우리의 도(道)가 동쪽으로 오기에 미쳐서 안향(安珦)·정몽주(鄭夢周)가 크게 사문(斯文)을 천명(闡明)하였으니, 그들을 우리 나라 학궁에서 향사함은 본디 마땅합니다." - 효종 즉위년(1649년) 11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문 中.
거의 오랑캐 산적 꼴이던 한반도 사람들이 정몽주 등의 노력으로 이만큼 사람답게 ​살아 간다는 뜻.

​...<전략> 임금이 이어서 충신이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논하여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려) 말엽의 정몽주(鄭夢周)는 참으로 충신이라 하겠다.”
하니,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인 참찬관(參贊官)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정몽주백이(伯夷)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옛사람이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 것은 그 어버이에게 불효하면서 그 임금에게 충성한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하였다...<후략>
- 효종 6년(1655년) 4월. 석강에서 《대학연의》를 강하고 충신이 임금을 섬기는 도리 등을 대신들과 논하던 中.
백이(伯夷) :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로 숙제(叔齊)의 형으로 은 나라가 멸망한 뒤 주(周)나라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다는 유명한 고사에 나오는 그 백이임.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로부터 고려(高麗) 말에 이르기까지 도학(道學)을 널리 열어 왔는데, 사문(斯門)에 공(功)이 있는 사람으로서 정몽주(鄭夢周)만한 이가 없었으니,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윤리(倫理)와 안팎으로 중국과 오랑캐의 뜻을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열성(列聖)께서 모두 존숭(尊崇)하여 보답(報答)하는 은전(恩典)을 더하셨고, 제사를 받드는 자손(子孫)은 대대로 관위(官位)와 봉록(俸祿)을 받아 왔습니다...<후략>"
​- 숙종 7년(1681년) 1월, 소대(召對, 임금과 정책 현안 의논) 중 영부사(領府事) 송시열(宋時烈)의 발언.
​"...<전략> 고려(高麗) 말엽에 와서는 정몽주(鄭夢周)가 나와서 용하 변이(用夏變夷) 하여 대의(大義)를 밝게 내걸었었고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는 더욱 존주(尊周) 는 대의(大義)를 주창하시어 온화 낙맥(溫禾洛麥) 같은 것도 오히려 감히 손대지 않으셨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피발 좌임(被髮左衽)을 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숙종 13년(1687년) 2월,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의 상소 中.
※ ​용하 변이(用夏變夷) : 오랑캐의 풍속을 교화 시킴.
​   피발 좌임(被髮左衽) : 꼬라지가 오랑캐 같다는 말.
결국 짐승 꼬라지였던 조선 사람들이 정몽주 덕분에 인간으로 변신 하였다는... 정몽주 인간 창제설.​
​"...<전략>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는 도덕(道德)과 절의(節義)가 고금에 탁절(卓絶)했습니다. 그런데도 작년에 묘하(墓下)의 서원(書院)을 이건(移建)할 적에 재력(財力)을 판출(辦出)하기가 어려워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에 빚을 쓰기를 청하였는데, 올 가을 이래로 여러 차례 독촉 징수하였으나, 원유(院儒)가 힘써 갚을 길이 없으므로 장차 재목(材木)과 개와(蓋瓦)를 싼값으로 마구 팔아서 빚 갚는데에 마련하려고 합니다. 전하(殿下)께서 만약 호조와 병조에 명하여 특별히 그 채전(債錢)을 탕감(蕩減)하게 하시면, 전하께서 존현(尊賢)하는 덕이 어찌 빛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 숙종 34년(1708년) 12월. 부교리(副校理) 이정신(李正臣)의 상소(上疏) 中.
​"...<전략> 고려조의 정치가 문란할 때를 당하여 벼슬이 지신(知申)에 이르렀으며,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심력을 같이하여 왕실을 도왔습니다. 자기의 형인 조준이 새 왕조를 추대하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이 나라의 교목세가로서 나라가 보존되면 같이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같이 망할 것입니다. 달가(達可, 정몽주의 字) 는 이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인만큼 만약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달가와 달리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국사를 해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고 하자, 조준은 그 뜻을 알고 다시 영남의 안렴사로 내보냈던 것입니다...<후략>
​- 정조 14년(1790년) 10월, 경기 유생 김상목(金相穆) 등이 고려조의 안렴사(按廉使) 조견(趙狷)을 숭양 서원(崧陽書院)에서 제사지내도록 해달라는 상소 中. 거의 정몽주가 조선을 개국한 사람으로 오해 할 정도임.
“내가 선정(先正)들을 배향하는 문제에 대하여 나름대로 오래 전부터 생각을 해왔었다.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안 문성공(安文成公, 안향)·정 포은(鄭圃隱) 이 네 현인 가운데에서 정 포은은, 고려 말에 태어나서 도학을 처음으로 일으켜 우리 동방의 기자(箕子) 이후의 제 일인자가 되었다. 그 공이 매우 크니 공자의 사당에 배향하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후략>"
​- 정조 20년(1796년) 9월, 임금이 상소문을 올린 유생 홍준원(洪準源)을 불러 만나보며.

경상도 유생 김양섭(金陽燮) 등이 상언하기를,

고려 시대 예의 판서(禮儀判書) 김주(金澍)의 충절에 대하여 시호를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절의를 세웠고,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절의를 온전히 하였으니, 죽어서도 진실로 광영이거니와 살아서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두 사람에게 모두 충절을 정표하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다. 생각건대, 농암(籠巖) 김주명(明)나라에 사신갔다 돌아오다가 압록강 가에 이르러 우리 태조(太祖)께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오지 않고 그곳에서 의관만 벗어서 부쳐주고 다시 명나라로 돌아가 형초(荊楚) 지방에 은거하였다...<후략>"
​- 정조 22년(1798년) 2월. 고려조 예조 판서 김주(金澍)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청하는 유생 김양섭의 상언에 대한 임금의 답변 中.
​"...<전략> 우리 동방은 풍속이 미개한 상태로 있다가 기사(箕師, 기자) 께서 오신 뒤로 인륜(人倫)에 관한 일을 얻어 듣게 되었었다. 그러다가 정 문충(鄭文忠, 정몽주) 등 제현(諸賢)에 이르러 제대로 그 뜻이 밝혀졌는데...<후략>
정조 22년(1798년) 9월. 고려 충신인 김주(金澍)·김제(金濟)에게 시호를 내리게 하며 한 말씀.

 

 

“...<중략>... 옛날 선조(先朝) 때에 도신(道臣)이 진달한 데 따라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은 정몽주(鄭夢周)길재에 의해 창도(唱導)되었고 그 문하에 이르러서 천명(闡明)되었습니다.
​- 정조 22년(1798년) 10월. 길재의 시호를 바꾸는 등을 논의 하는 자리에서 승지(承旨) 이익운(李益運)의 발언 中.
“...<전략> 포은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호이고 야은은 문하 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의 호입니다. 야은의 행의(行義)와 명절(名節)을 어려움 없이 들어서 부도(不道)한 무리에게 비유하였으니, 이것만도 극도로 미워하고 비방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포은 선생은 숙덕(宿德) 대로(大老)로서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정학(正學)을 맨 먼저 제창하여 곧바로 낙민(洛閩) 의 전통과 접함으로써 도덕이 빛나 우뚝이 우리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충성과 지조에 있어서는 해와 별처럼 밝게 드러났고 보면, 백세 아래에 비록 부인(婦人)과 어린아이도 모두 듣고 칭송하고 있습니다...<후략>"
순조 22년(1822년) 4월. 성균관 유생들의 권당(捲堂, 집단 농성)에서 나온 대자보 내용 中.
공부 좀 한다는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정몽주 = 예수.​ 정몽주 예수설.
​임금이 영(令)하기를,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정충(精忠)과 열절(烈節)은 백세(百世) 아래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감동되게 한다. 그래서 옛날 열성조(列聖朝)에서와 우리 대조(大朝)께서 포장(褒奬)하고 숭상한 전례(典禮)가 극도로 하지 않음이 없었다. 나 소자(小子)가 계승하는 도리로 영혼(靈魂)을 권면하는 거사가 있어야 마땅하니,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제문(祭文)은 의당 직접 지어서 내리겠다. 그리고 봉사(奉祀)하는 후손의 이름을 물어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 조 30년(1830년) 윤4월. 정몽주의 제사에 특별히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하며.

□ <전략>... “정 문충공(鄭文忠公:정몽주,鄭夢周)은 바로 우리 동국(東國)의 유종(儒宗)이며 더구나 그의 절개와 의리는 해와 달을 꿰뚫을 정도였다. 이번에 여기에 온 이상 어찌 뜻을 표하지 않겠는가? ...<후략>
​- 고종 9년(1872년) 3월. 정몽주의 뜻을 기리며 개성 숭양 서원(崧陽書院)에 치제(致祭)하며.
결국 정몽주 만물 창제설. 곧 정몽주 = 신(神)​
​※ 유종(儒宗) : 유학(儒學)의 뿌리.




조선국(1393-1897),대한국 도읍 명칭은 한성(漢城)이며 한양은 고려국 지명이다 조선국 대한국 역사

2016. 12. 8. 9:12

복사 http://blog.naver.com/msk7613/220880768125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조선국(1393-1897),대한국 도읍 명칭은 한성(漢城)이며 한양은 고려국 지명이다

 

1395년 6 6한성(漢城) 개칭 이후 한성(漢城),경복궁,태묘,사직단 낙성(落成)    

 

1395년 6월 6일 고려국 한양을 한성(漢城)으로,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

 

 

 http://blog.naver.com/msk7613 

 

 

1394년 7월 2일 서운 관원이 와서 도읍될 만한 곳을 태조 이단(李旦)에게 아뢰기를 “불일사(佛日寺)가 으뜸이고 선고개 선점(鐥岾)이 다음은 됩니다.”하였다.(1392년 7월 17일 송도(松都:개성)에서 고려국 35대 국왕에 즉위한 이성계(李成桂:고려시대의 휘)는 1393년 2월 15일 조선국(1393-1897)을 건국한  후 휘를 이단(李旦)으로 고쳤다.)7월 4일 도평의사사에서 선고개인 선점(鐥岾)에 가 천도할 땅을 보니 그 곳이 좋지 못했다. 이에 우복야 남은(南誾)이양달을 꾸짖기를 “너희들이 지리의 술법을 안다는 것으로써 여러 번 맞지 않은 곳을 도읍할 만하다고 하여 임금의 상총(上聰)을 번거롭게 하니 마땅히 호되게 징계하여 뒷 날을 경계해야겠다.”하였다.8월 11일 고려국 도읍인 송도(松都:개성)1393년 2월 15일 조선국 건국한 태조 이단(李旦)이 무악(毋岳)에 이르러서 조선국 도읍을 정할 땅을 물색하는데 판서운관사 윤신달(尹莘達)과 서운 부정 유한우(劉旱雨등이 태조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지리의 법으로 보면 여기 무악(毋岳)은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하니 이에 태조 이단(李旦)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함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데 여기가 만일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문서에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보아라.”하니 윤신달 등이 물러가서 서로 의논하였는데 태조가 유한우를 불러서 묻기를 이 무악(毋岳)이 끝내 좋지 못한가?”하니 유한우가 대답하기를 신이 보는 바로는 실로 좋지 못합니다.”하니 태조가 또 말하기를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은가?”하니 유한우가 대답하기를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하니 태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서운관이 되어서 모른다고 하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는가?”하였다.

 


유한우가 대답하기를 “이 것은 도참(圖讖)으로 말한 바이며 신은 단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옛 사람의 도참도 역시 지리로 인해서 말한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이 근거없는 말을 했겠는가그러면 너의 마음에 쓸만한 곳을 말해 보아라.”하였다.유한우가 대답하기를 “고려국 태조 왕건이 송산(松山명당(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 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개성인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만약 가까운 지경에 다시 길지(吉地)가 없다면 고례백제신라인 3한국시대의 도읍도 또한 길지가 됨직하니 합의해서 알리라.”하였다태조가 좌시중 조준(趙浚우시중 김사형(金士衡)에게 이르기를 “서운관이 고려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고 여러 번 상서하여 고려국 지명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었다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민중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 무악(毋岳)이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유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 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경 등이 서운관 관리로 하여금 각각 도읍될 만한 곳을 말해서 알리게 하라.”하니 이에 겸판서운관사 최융(崔融)과 윤신달·유한우 등이 상서하기를 “우리나라 내에서는 개성인 부소(扶蘇명당이 첫째요한성인 남경(南京)이 다음입니다.”하니 이 날 저녁에 태조가 무악 밑에서 유숙하는 차()하였다.

 

8월 12일 태조가 여러 재상들의 제시한 의논이 대개 천도(遷都)를 옳지 않다고 한 까닭에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기를 “내가 송도로 돌아가 소격전(昭格殿)에서 의심을 해결하리라.”하고 이에 남경으로 행차하였다. 8월 13일 태조가 고려 남경의 옛 궁궐 터에 집 터를 살피었는데 산세를 관망(觀望)하다가 윤신달 등에게 묻기를 “여기가 어떠냐?”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경내에서는 송경(松京)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되는 바는 북쪽인 건방(乾方)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뿐입니다.”하니 태조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송경(松京)은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이제 이 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4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하였다. 태조가 또 왕사(王師자초(自超)에게 묻기를 “어떠한가?” 하니 자초가 대답하기를 “여기는 4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하니 태조가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 곳이 좋습니다.”하니  하윤이 홀로 말하기를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못합니다.”하였다. 태조가 여러 사람의 말로써 고려국 한양(漢陽)신도(新都) 터로 결정하였다그런데 전 전서 양원식(楊元植)이 나와서 말하기를 신이 가지고 있던 비결은 앞서 이미 명령을 받아서 올렸거니와 적성(積城광실원(廣實院동쪽에 산이 있어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계족산(雞足山)이라 하는데 그 곳을 보니 비결에 쓰여 있는 것과 근사합니다.”하니 이에 태조가 말하기를 “조운할 배가 통할 수 없는데 어찌 도읍 터가 되겠는가?”하니 양원식이 대답하기를 “임진강에서 장단 까지는 물이 깊어서 배가 다닐 수 있습니다.”하니 태조가 그만 연()을 타고 태묘 지을 터를 보고는 노원역(盧原驛들판에 이르러 유숙하는 차()하였다.

 

8월 24일 도평의사사에서 태조에게 상신(上申)하기를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등은 생각하건대 옛 날부터 임금이 천명을 받고 일어나면 도읍을 정하여 백성을 안주시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그러므로 요()는 평양(平陽)에 도읍하고하국(夏國)은 안읍(安邑)에 도읍하였으며상국(商國)은()주국(周國)은 풍호(豊鎬)한국(漢國)은 함양(咸陽)당국은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는데 혹은 처음 일어난 땅에 정하기도 하고혹은 지세(地勢)의 편리한 곳을 골랐으나 모두 근본되는 곳을 소중히 여기고 사방을 지정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고려국 태조 왕건이 고례,백제,신라 3한국을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시어 이미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國統)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그윽이 신도(新都) 터를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 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4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하니 태조가 왕지(王旨)로 아뢴 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9월 9일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3사사 정도전·청성 백 심덕부·참찬 문하부사 김주·좌복야 남은·중추원 학사 이직 등을 신도(新都) 터에 보내서 태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권중화 등은 고려 숙왕(肅王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 터가 너무 좁다 하고 다시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壬座丙向)이 평탄하고 넓으며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 터로 정하고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에 태묘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을 그려서 바치었다. 9월 23일 판3사사 정도전 등은 신도(新都) 터로부터 돌아왔으나 청성 백(靑城 伯심덕부(沈德符)와 참찬문하부사 김주(金湊)는 남아서 궁궐과 기타 도시의 경영을 관리하였다. 10월 25일 태조가 신도(新都) 터로 이어하였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松京)에 머물러 있게 하고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다. 10월 28일 태조가 신도(新都)에 이르러 옛 한양부의 객사(客舍)를 이궁(離宮)으로 삼았다.이궁(離宮)에서 조선국 왕도의 공사를 추진하였다.

 

11월 3일 도평의사사에서 장신(狀申)하기를 “태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城郭)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천명(天命)을 받아 국통(國統)을 개시하고 여론을 따라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였으니 만세에 한없는 왕업의 기초는 실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아직 태묘를 세우지 못하고 궁궐을 짓지 못했으며 성곽도 쌓지 못하였으니 이 것은 도읍을 존중하고 나라의 근본을 무겁게 한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전하께서 비록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고 공사를 일으키려고 하지 않으나 이 세 가지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담당한 관청에 명령하여 공사를 독촉하여서 태묘와 궁궐을 짓고 성곽을 쌓아서 효성과 공경을 조종에게 바치고신하와 백성들에게 존엄성을 보이며또 국가의 세력을 길이 굳건하도록 해야 한 나라의 규모가 짜여지고 만세에 길이 전할 계책이 서게 될 것입니다삼가 아뢰옵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행하시도록 하소서.”하니 태조가 그대로 따랐다.

 

12월 3일 태조가 하루밤을 재계(齋戒)하고3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告由文)에 “조선 국왕 신(태조의 휘인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및 판3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감히 밝게 황천 후토에 고하나이다엎드려 아뢰건대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어 만물이 생성(生成)하고옛 것을 개혁하고 새 것을 이루어서 사방의 도회(都會)를 만드는 것입니다그윽이 생각하니 (이단은 외람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질로서 음즐(陰騭)의 기쁨을 얻어 고려가 장차 망하는 때를 당하여 1393년 2월 15일 조선(朝鮮유신(維新)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돌아보건대 너무나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어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편히 지내지 못하고영원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했더니 일관(日官)이 고하기를 ‘고려 도읍 송도의 터는 지기(地氣)가 오래 되어 쇠해 가고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地勢)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 이 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하므로 (이단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태묘에 고유하여 10월 25일에 신도(新都) 터로 이어한 것인데 유사(有司)가 또 고하기를태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 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하므로 유사에게 분부하여 이 달 초4일에 기공하게 하였습니다크나큰 역사를 일으키니 이 백성의 괴로움이 많을 것이 염려되니 우러러 아뢰옵건대 황천께서는 신()의 마음을 굽어 보살피사 비 오고 개는 날을 때 맞추어 주시고 공사가 잘되게 하여 큰 도읍을 만들고 편안히 살게 해서 위로 천명(天命)을 무궁하게 도우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길이 보호해 주시면 (이단은 황천을 정성껏 받들어서 제사를 더욱 경건히 올릴 것이며 때와 기회를 경계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하와 백성과 더불어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하였다.

 

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에게 고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에 왕은 이르노라!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楊津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대개 옛 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을 봉하여 진()이라 하고물을 표()하여 기()라 하였다. 명산(名山대천(大川)으로 경내(境內)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그 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돌이켜 보건대 변변치 못한 내가 신민의 추대에 부대끼어 고려 국왕의 자리에 앉아 사업을 삼가면서 나라를 다스린 지 이미 3년이라이 번에 일관의 말에 따라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태묘와 궁궐을 경영하기 위하여 이미 날짜를 정했으나 크나큰 공사를 일으키는 데 백성들의 힘이 상하지나 아니할까 또는 비와 추위와 더위가 혹시나 그 때를 잃어버려 공사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제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과 판3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목욕하여 이 달 초3일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을 보내서 폐백과 전물(奠物)을 갖추어 여러 신령에게 고하노니 이 번에 이 공사를 일으킨 것은 내 한 몸의 안일(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 제사를 지내서 백성들이 천명을 한없이 맞아들이자는 것이니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陰陽)을 탈 없이 하고 병이 생기지 않게 하며 변고가 일지 않게 하여 큰 공사를 성취하고 큰 업적을 정하도록 하면 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도 감히 나 혼자만 편안히 지내지 않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때를 따라서 제사를 지낼 것이니 ()도 또한 영원히 제사밥인 향식(享食)을 가지리라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하였다.

 

 

한성(漢城:문화재보호구역 500m 안 현상변경 불허가 기본 원칙)을 축조하기 시작한 직후인 1395년 6월 6일 태조(太祖) 이단(李旦)이 고려시대 지명인 한양부(漢陽府)를 고쳐서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쳤다. 1396년 9월 태조가 태묘와 경복궁을 낙성(落成)하였다.1396년 9월 24일 태조 이단이 한성(漢城)을 건축하는 축성역(築城役)이 끝나자 역(役)을 하는 장정(壯丁)인 정부(丁夫)를 돌려보냈다.1399년 3월 7일 정종이 개성 유후사(留後司)로 환도(還都)하였다. 1400년 12월 22일 한성(漢城)에 환도하기를 의논하는데 평양 백(平壤 伯) 조준(趙浚)·창녕 백(昌寧 伯) 성석인(成石璘) 이하 문신(文臣) 10여 인에게 이르기를 “불행히 수창궁에 화재가 있었으니 경 등은 서운관(書雲觀)의 비밀 도적(祕密 圖籍)을 상고하여 천도(遷都)의 이해를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하니 이 때에 의논이 분운(紛紜)하여 정해지지 못하였는데 우정승 하윤(河崙)이 건의하기를 “마땅히 무악(毋岳)에 도읍하여야 합니다.”하였다. 정종이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참위(讖緯) 술수(術數)의 말이 이러쿵저러쿵 그치지 않아 인심을 현혹(眩惑)하게 하니 어떻게 처리할까?”하니 여러 재상이 모두 말하기를 “따를 수 없습니다.”하였으나 대사헌(大司憲) 김약채(金若采)는 홀로 그대로 따라야 된다고 하였다. 정종이 말하기를 “신도(新都) 한성(漢城)은 부왕 태조께서 창건하신 것이니 어찌 반드시 따로 도읍을 세워서 백성을 수고롭게 하겠는가?” 하였다.

 


1404년 1월 9일 태종이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기곡(祈穀원단제(圓壇祭)를 한성(漢城)인 한경(漢京)에서 행하였으니 해마다 행하는 일이었다. 9월 1일 성산군(星山君이직(李稷취산군(鷲山君신극례(辛克禮)로 한경(漢京)의 이궁 조성도감 제조(離宮 造成都監 提調)를 삼았다태상왕(太上王)이 지신사(知申事박석명(朴錫命)을 불러 태종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천도(遷都)하는 번거로움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송도(松都)는 왕씨(王氏)의 구도(舊都)이니 그대로 거주(居住)할 수는 없다.”하니 태종이 의정부에 하지(下旨)하기를한성(漢城)은 우리 태상왕이 창건한 땅이고 사직과 태묘가 있으니 오래 비워 두고 거주하지 않으면 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효도가 아닐까 한다명년 겨울에는 내가 마땅히 옮겨 거주할 터이니 응당 궁실을 수즙(修葺)하게 해야할 것이다.”하고 드디어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9월 9일 한경(漢京)에 이궁(離宮)을 지을 자리를 상지(相地)하도록 명하고 유한우(劉旱雨윤신달(尹莘達이양달(李陽達)을 보내어 상지(相地)하였다.

 

1405년 10월 11일 태종의 거가(車駕)가 한성(漢城)인 한경(漢京)에 이르러 태묘(太廟)에 알현(謁見)하고이궁(離宮)이 아직 완성되기 않아 연화방(蓮花坊)의 고(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조준(趙浚)의 사제에 임어하였다. 1406년 1월 7일 태종이 백악(白嶽)의 성황신(城隍神)에게 녹(祿)을 주었다. 1407년 4월 20일 태종이 한성부(漢城府)에서 한성(漢城)에 대한 사의(事宜두어 조목을 올리기를 “한성(漢城) 5()의 각 방()이 전()에 방의 이름인 방명(坊名)을 세워서 변별(辨別)하여 보게 하였는데 지금 이 것이 모두 퇴락(頹落)하였으니 ()의 이름·다리의 이름·거리의 이름을 다시 세우도록 허락하소서한성(漢城안의 큰 길 이외에 여리(閭里)의 각 길도 본래는 모두 평평하고 곧아서 거량(車兩)의 출입(出入)을 편리하게 하였었는데 지금 무식(無識)한 사람들이 자기의 주거(住居)를 넓히려고 하여 길을 침로해 울타리를 만들어서 길이 좁고 구불구불해졌으며 혹은 툭 튀어나오게 집을 짓고 심한 자는 길을 막아서 다니기에 불편하고 화기(火氣)가 두렵사오니 도로(道路)를 다시 살펴보아서 전과 같이 닦아 넓히소서한성(漢城)의 가사(家舍)가 모두 띠로 덮었고민가(民家)가 조밀하여 화재가 두려우니 각 방()에 한 관령(管領)마다 물독인 수옹(水甕) 2 곳을 설치하여 화재에 대비하소서길 옆의 각 호()는 모두 나무를 심게 하고냇가의 각 호는 각각 두 양안(兩岸)에 제방(堤防)을 쌓고 나무를 심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한성(漢城 문화재보호구역 500m 안 현상변경 불허가 기본 원칙)의 둘레가 9천 9백 75()인데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정서(正西)를 돈의문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동소문(東小門)인 홍화문(弘化門), 동남(東南)을 수구문(水口門)인 광희문(光熙門), 서남(西南)을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소북(小北)을 서소문(西小門)인 소덕문(昭德門),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 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한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1422(세종 4)년 임인에 상왕 태종의 명으로 토성(土城)을 모두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한성(漢城) 동쪽에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1422(세종 4)년 석성(石城)으로 축조한 한성(漢城)이 낙성(落成)되었다.

 

동부(東部) 12()은 숭신(崇信연화(蓮花서운(瑞雲덕성(德成숭교(崇敎연희(燕喜관덕(觀德천달(泉達흥성(興盛창선(彰善건덕(建德인창(仁昌)이다남부(南部) 11()은 광통(廣通호현(好賢명례(明禮대평(大平훈도(薰陶성명(誠明)·요(樂善정심(貞心명철(明哲성신(誠身예성(禮成)이다서부(西部) 8()은 인달(仁達적선(積善여경(餘慶황화(皇華양생(養生신화(神化반석(盤石반송(盤松)이다북부(北部) 10()은 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嘉會안국(安國관광(觀光진장(鎭長명통(明通준수(俊秀순화(順化의통(義通)이다중부(中部) 8()은 징청(澄淸서인(瑞麟수진(壽進견평(堅平관인(寬仁경행(慶幸정선(貞善장통(長通)이다태묘(太廟)는 중부 정선방(貞善坊)과 동부 연화방(蓮花坊중앙에 있으니 담 둘레에 소나무를 심었다영녕전(永寧殿)은 태묘의 담 안 서쪽에 있다태조(太祖)가 하늘의 천명(天命)을 받아 왕이 되니 왕()으로 목(((()의 네 조상을 추존하고 태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다가 태종(太宗)을 부묘(祔廟)하게 되니 목조(穆祖)를 체천(遞遷)해야 하므로 따로 이 전각을 세우고 목조의 신주를 옮겨 모시었으며 ((()의 세 조상도 또한 이 곳에 차례로 옮겨 모시었다.

 

사직(社稷)은 인달방(仁達坊)에 있으니 둘레의 담에 소나무를 심었다문소전(文昭殿)은 처음에 문소전을 창덕궁 서북쪽에 세우고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憲大王)과 신의왕후(神懿王后)의 화상신어(神御)을 모시고또 광효전(廣孝殿)을 창덕궁 동북쪽에 세우고 태종 공정대왕(太宗 恭定大王)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화상을 모시었다가 그 후에 송() 경령궁(景靈宮)의 제도에 의하여 원묘(原廟)를 경복궁 한성 안 동북쪽에 고쳐 지었는데 앞에는 묘(), 뒤에는 침()으로 하여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르고 이름을 문소전이라 하여 두 임금(태조·태종)의 화상을 옮겨 모시었다문묘(文廟)는 숭교방(崇敎坊)에 있고뜰에 비()가 있다성균관 학관(成均館 學官)을 두어 선비를 가르치는데, 2백 사람으로써 액수를 정하였다옆에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섬학전(贍學田) 1천 35()을 주었고, 1431(세종 13) 신해에 9백 65결을 더 주었다.

 

경복궁(景福宮)은 백악산(白岳山남쪽에 있다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 동쪽 작은 침전(寢殿)을 연생전(延生殿), 서쪽 작은 침전을 경성전(慶成殿), 또 그 남쪽을 정사를 보는 사정전(思政殿), 또 그 남쪽을 조회를 받는 근정전(勤政殿), 내문(內門)을 근정(勤政), 안 동문(東門)을 일화(日華), 동각루(東閣樓)를 융문(隆文), 서각루(西閣樓)를 융무(隆武)라 한다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밖에 있다홍례문(弘禮門)은 영제교 남쪽에 있다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 서쪽 담안에 있는데둘레가 못으로 되어 있다동궁(東宮)은 건춘문(建春門안에 있다궁성(宮城)은 둘레가 1천 8백 13()이다동문(東門)을 건춘(建春), 서문(西門)을 영추(迎秋), 남문(南門)을 광화(光化)라 한다.문루(門樓)가 2층이요누 위에 종고(鍾鼓)를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리어 시각을 알리는 시보를 엄하게 한다문 남쪽 좌우에 의정부(議政府중추원(中樞院)·6(六曹사헌부(司憲府등 각 사()의 공해(公廨)를 벌려 놓았다창덕궁(昌德宮)은 정선방(貞善坊)에 있다. 1405(태종(太宗) 5) 을유에 세워서 이궁(離宮)으로 삼았다조회를 받는 인정전(仁政殿), 안문을 인정(仁政), 중문을 진선(進善), 바깥문을 돈화(敦化)라 한다광연루(廣延樓)는 창덕궁 동쪽에 있다수강궁(壽康宮)은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1418(태종(太宗) 18) 무술에 왕위를 물려주고따로 이 궁을 지어 거처하였다선양정(善養亭)은 창덕궁 남쪽 언덕에 있다.

 

혜정교(惠政橋)는 중부 서인방(瑞麟坊북쪽에 있다운종가(雲從街)는 곧 서인방과 수진방(壽進坊)의 중앙이다통운교(通雲橋)는 관인방(寬仁坊남쪽에 있다북광통교(北廣通橋)는 광통방 북쪽에 있다남광통교(南廣通橋)는 태평방(太平防)에 있다큰 저자인 대시(大市)는 중부 장통방(長通坊)과 경행방(慶幸坊중앙에 있다종루(鍾樓)는 한성(漢城)의 중앙에 있다. 2층으로 되어 있고누 위에 종을 달아서 한성(漢城)의 안팎에 새벽과 저녁을 깨우쳐 준다한성 좌우 행랑(行廊)은 대략 2천 27간이다태평관(太平館)은 숭례문(崇禮門안 황화방(皇華坊)에 있다이 곳에서 명국 사신(使臣)을 접대하는데 옆에다 별전(別殿)을 지어서 임금이 쉬는 곳으로 삼았다모화관(慕華館)은 돈의문(敦義門밖 서북쪽에 있다본 이름은 모화루(慕華樓)이니 명국 사신(使臣)을 영접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1430(세종 12) 경술에 고쳐 짓고 관()으로 하였다남쪽에 네모진 못이 있는데낮은 담을 쌓고 버들을 심었다. 5(五部)의 호()의 ()는 1만 7천 15성저십리(城底十里)의 동쪽은 양주(楊州송계원(松溪院및 대현(大峴)에 이르고서쪽은 양화도(楊花渡및 고양(高陽덕수원(德水院)에 이르고남쪽은 한강 및 노도(露渡)에 이른다호 수는 1천 7백 79호이다간전(墾田)은 1천 4백 15()이다.

 

삼각산(三角山)은 한성 밖 정북(正北)에 있으니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다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일컬었다한성의 진산(鎭山)은 백악(白岳)이다산정(山頂)에 사우(祠宇)가 있어서 삼각산의 신을 제사 지내는데백악을 붙여서 지낸다중사(中祀)로 한다목멱사(木覓祠)는 한성 목멱산 꼭대기에 있으니 소사(小祀)이다봉화(烽火)가 5곳이 있으니 1()은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온 양주(楊州아차산(峨嵯山봉화에 응하고, 2()는 경상도로부터 온 광주(廣州천천산(穿川山봉화에 응하고, 3()은 평안도·황해도로부터 육로(陸路)로 온 무악(毋岳동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4()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海路)로 온 무악 서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5()는 전라도와 충청도로부터 온 양천(陽川개화산(開花山봉화와 아차산(峨嵯山봉화에 응하고또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로부터 온 풍양(豐壤대이산(大伊山봉화에 응한다무악(毋岳)은 모화관 서쪽에 있다위에 봉화가 두 곳이 있으니 동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육로로 온 고양(高陽소달산(所達山봉화에 응하고서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로 온 영서역(迎曙驛서산(西山봉화에 응한다.

 

연희궁(衍禧宮)은 무악(毋岳)의 남쪽에 있다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하윤(河崙)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땅이 무악의 명당(明堂)이 되어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고 하였는데 1421(세종 3) 신축에 태종이 그 말을 생각하고 이궁(離宮)을 짓게 하였다우사단(雩祀壇동방 토룡단(東方土龍壇선농단(先農壇)은 모두 흥인문(興仁門밖 평촌(坪村)에 있다마보단(馬步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사단(馬社壇)은 모두 흥인문 밖 사근사리(沙斤寺里)에 있다선잠단(先蠶壇)은 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은 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에 있다남방 토룡단(南方土龍壇)은 한강 북쪽에 있다서방 토룡단(西方土龍壇)은 가을두(加乙頭)에 있다북교단(北郊壇북방 토룡단(北方土龍壇여제단(厲祭壇)은 모두 창의문(彰義門밖에 있다동적전(東籍田)은 흥인문 밖에 있다태묘·사직·산천(山川백신(百神)의 제미인 자성(棄盛)을 제공한다또 구도(舊都개성의 문교(門郊)에 서적전(西籍田)이 있다.

 

한강도(漢江渡)는 목멱산 남쪽에 있고 너비 2백 보이다예전에는 사평도(沙平渡또는 사리진도(沙里津渡)라 하였다북쪽에 단()이 있는데 ·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 중사(中祀)로 한다도승(渡丞) 1인을 두어서 드나드는 사람을 조사한다나루 머리에 제천정(濟川亭)이 있다용산강(龍山江)은 숭례문 밖 서남쪽 9리에 있다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군자강감(軍資江監)과 풍저강창(豐儲江倉)이 있다서강(西江)은 서소문 밖 11리에 있다또한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광흥강창(廣興江倉)과 풍저강창(豐儲江倉)이 있다가을두(加乙頭)는 서소문 밖 12리에 있다오똑하고 기이하게 빼어났고 남쪽으로 큰 강을 임하여 벽처럼 서서 백 길이나 되는데 나무를 휘어잡고 아래를 굽어보면 터럭끝이 오싹해진다빙고(氷庫)는 곧 예전의 얼음집인 능음(淩陰)이다하나는 두모포(豆毛浦)에 있으니 나라 제향에 쓸 얼음을 바치고 하나는 한강 아래 백목동(栢木洞)에 있으니 어선(御膳), 나라 손님 접대 또는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바친다.

 

조지소(造紙所)는 장의사동(壯義寺洞)에 있다처음에는 사대(事大)의 표((((자문(咨文)에 쓸 종이를전라도 전주(全州)와 남원부(南原府)에서 해마다 세밑에 바쳤는데 많이 쓰는 것을 대지 못하였다세종 2년에 특명으로 조지소를 두어 종이를 만들었는데 품질이 옛 것에 견주어 훨씬 곱고 좋았다이로 말미암아 전주부와 남원부의 세공(歲貢독촉의 폐단이 비로소 없어졌다물방아인 수전(水輾)은 장의사(壯義寺동구(洞口)에 있다동활인원(東活人院)은 동소문 밖에 있다서활인원(西活人院)은 서소문 밖에 있다옛 이름은 대비원(大悲院)이다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의원과 무당을 두어서 한성 안에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이 곳에 모아 놓고 ···약을 주며 아울러 옷·이불·자리를 주어 편하도록 보호해 주고 만일 죽는 이가 있으면 잘 묻어 준다.

 

(()을 제조하는 귀후소(歸厚所)는 용산강 가에 있고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며 승려들로 일을 주장하게 하여 (()을 만들어 팔아서 초상집의 급작스럽게 당한 일을 예비하게 한다흥천사(興天寺)는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선종(禪宗)에 속한다. 3층 탑이 있고 그 속에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사리(舍利)를 안치하였다태조 이단이 세우고 밭 2백 50()을 주었다흥덕사(興德寺)는 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태조가 궁()을 버리고 절을 만들어서 밭 2백 50()을 주었다장의사(壯義寺)는 창의문(彰義門밖 여제단 서쪽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밭 2백 50결을 주었다봉경(封境)은 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5백 40서쪽으로 풍천(豐川)에 이르기 6백 리남쪽으로 해진(海珍)에 이르기 9백 80북쪽으로 여연(閭延)에 이르기 1천 4백 70동북쪽으로 경원(慶源)에 이르기 2천 1백 90동남쪽으로 동래(東萊)에 이르기 8백 70서남쪽으로 태안(泰安)에 이르기 3백 90서북쪽으로 의주(義州)에 이르기 1천 1백 40리이다.

 

 




 역사를 찾아서 409편-4부 : 무악(毋岳)천도 도 무산되다
sololife 2016.09.03 00:00
http://blog.daum.net/sheshow/717
역사를 찾아서 



<409>

한양 천도
방송 : 2012년 8월 26일(일) 00:05~01:00 (한민족방송)
8월 25일() 00:05~01:00 (1라디오)
극본-이상락 연출-임종성
□ 목차
1부 : 한양천도는 보류되고
2부 : 왕실 안태지를 찾아서 계룡산으로…
3부 : 계룡산 천도는 무산되고
4부 : 무악(毋岳)천도 도 무산되다
5부 : 한양천도, 전격적으로 결정되다.
      
(409편 한양천도)
4부 : 무악(毋岳)천도 도 무산되다
   ◇ 조준, 권중화 등에게
      ▷ 천도할 땅을 무악 남쪽에서 살펴보게 하였다.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2월 18일(무자) 2번째기사
조준, 권중화 등에게 풍수에 관한 비결책을 가지고 무악의 천도지를 살펴보게 하다
좌시중 조준과 영삼사사 권중화 등 11인을 보내어 서운관(書雲觀)의 원리(員吏) 등을 거느리고 《지리비록촬요(地理秘錄撮要)》를 가지고 가서 천도할 땅을 무악(毋岳) 남쪽에서 살펴보게 하였다.
 
   ◇ 여기 나오는 '무악(毋岳)의 남쪽'이란
      ▷ 지금의 서대문구 신촌동과 연희동 일대를 일컫는다.
      ▷ 무악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양과는 별도의 지역이다.
      ▷ 지금이야 신촌일대나 경복궁이 자리한 지역이나 모두 서울특별시에 해당하지만
          당시에는 경복이 위치한 지역, 즉 고려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그곳을 '한양'이라
          하였고, 무악은 전혀 다른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이성계가 즉위하자마자 천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 배경을 살펴보자
      ▷ 성신여대 오종록 교수는 
      ▷ 이성계가 자기 아들딸의 혼인을 어떤 집안과 맺어왔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얘기한다.
 
(오종록)
   ◇ 첫 단계는
      ▷ 대체로 자기와 수준이 유사한 지방 출신의 신흥무장 가문과 혼사가 이루어진다.
      ▷ 그런데 조금 지나면 철원 최씨 최영같은 전통이 있는 그런 중요한 가문 출신의
          무장과 혼사가 이루어진다.
      ▷ 그러다가 중앙정계에서 확고하게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장인은 민재라고 영민시 집안이고
          과거시험을 관할하는 지공거도 맡은 대표적인 문신이었다.
      ▷ 유력한 전통적인 귀족과도 혼사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한단계 더 올라가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는 상황이 되면 
      ▷왕실과의 혼사가 이루어져서 공양왕의 형이 사돈지간이 되었다.
 
   ◇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 이렇다 할 세력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던 이성계가
      ▷ 중앙에서의 권력을 장악하는 수단의 하나로 혼맥을 이용한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 그렇게 해서 드디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그 자신이 왕이 되는데에는 성공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에 뿌리를 둔 귀족세력이 그를 고분고분 따라줄
          것이냐, 하는 점에서 불안과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장지연)
   ◇ 이성계가 서두르는 모습은
      ▷ 첫 번째로 그가 굉장히 태조 왕건을 의식했다라고 볼 수있다.
      ▷ 개경이라는 땅 자체가 고려의 풍수에서 왕건의 삼한 통합을 예견하고 그게 가능
          하게 한 일종의 성지이다.
      ▷ 개성 전체가 태조 왕건이나 여러가지 설화들로 가득 찬 그런 성지이다.
      ▷ 그런 왕씨의 땅을 벗어나서 새로운 땅을 찾고 싶어하고 자신에게 걸 맞는 자신만의
          상징을 갖고 싶어하는 의도가 당연히 컸을 것이다.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2월 23일(계사) 2번째기사
권중화와 조준이 무악 천도를 반대하고, 하윤만이 찬성하다
영삼사사(領三司事) 권중화(權仲和)와 좌시중(左侍中) 조준(趙浚) 등이 무악(毋岳)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
“무악(毋岳) 남쪽은 땅이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없습니다.”
좌도 도관찰사(左道都觀察使) 하윤(河崙)만이 홀로 아뢰기를,
“무악(毋岳)의 명당(明堂)이 비록 협착(狹窄)한 듯하지마는, 송도(松都)의 강안전(康安殿)과 평양(平壤)의 장락궁(長樂宮)으로써 이를 관찰한다면 조금 넓은 편이 될 것입니다. 또한 고려 왕조의 비록(秘錄)과 중국에서 통행(通行)하는 지리(地理)의 법에도 모두 부합(符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친히 보고 정하고자 한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6월 27일(을미) 2번째기사
서운관 관원이 무악이 수도로 좋지 않다고 하니, 다른 곳을 물색하게 하다
임금이 도평의사사에 교유(敎諭)하였다.
“무악(毋岳) 신도(新都)의 땅은 앞서 10여 재상들에게 명하여 이것을 보고 지금은 이미 결정하였는데, 서운 관원(書雲觀員) 유한우(劉旱雨)와 이양달(李陽達) 등이 말하기를, ‘신의 배운 바로 보아서는 도읍으로 정할 곳이 아닙니다.’ 하니, 나라의 큰 일이 이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혹은 좋다 하고 혹은 좋지 않다 하니, 전일에 가 본 재상 및 서운관 관원과 더불어 그 옳고 그른 것을 논의해서 알리라.”
영삼사사 권중화(權仲和)와 우시중 김사형(金士衡)이 여러 재상들과 더불어 서운관의 말한 바를 기록하여 아뢰었다.
“다 옳지 못하다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들로 하여금 다시 좋은 곳을 물색하게 하라.”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7월 2일(기해) 1번째기사
서운관 관원이 새 도읍 후보지로 불일사와 선고개를 아뢰다
서운 관원이 와서 도읍될 만한 곳을 아뢰었다.
“불일사(佛日寺)가 제일이고 선고개[鐥岾]가 다음은 됩니다.”
   ◇ 불일사는 경기도 장단에 있던 사찰이며
      ▷ 선고개는 경기도 파주지역에 해당된다.
      ▷ 천문을 안 다는 서운관에서 평소에 거론된 적이 없던 전혀 새로운 곳을 들고나온것이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7월 4일(신축) 1번째기사
선고개가 천도지로 마땅치 않다 하여 남은이 서운관 관원을 꾸짖다
도평의사사에서 선고개[鐥岾]에 가 천도할 땅을 보니, 그곳이 좋지 못했다. 이에 우복야 남은(南誾)은 이양달을 꾸짖었다.
“너희들이 지리의 술법을 안다는 것으로써 여러 번 맞지 않은 곳을 도읍할 만하다고 하여 상총(上聰)을 번거롭게 하니, 마땅히 호되게 징계하여 뒷날을 경계해야겠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7월 5일(임인) 1번째기사
불일사가 천도할 곳으로 마땅치 못하다
도평의사사가 불일사에 가서 천도할 곳을 보니, 그곳도 역시 좋지 못하였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7월 11일(무신) 2번째기사
도평의사사에서 음양 산정 도감의 설치를 건의하다
도평의사사에서 아뢰었다.
“지리의 학설이 분명치 못하므로 사람마다 각각 자기의 의견을 내세워, 서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어느 것이 참말이며 거짓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고려조에서 전해 오는 비록(秘錄)도 역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여, 사(邪)와 정(正)을 정하기 어려우니, 청하옵건대 음양 산정 도감(陰陽刪定都監)을 두어 일정하게 교정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7월 12일(기유) 1번째기사
음양 산정 도감을 설치하다
음양 산정 도감을 두었다. 영삼사사(領三司事) 권중화(權仲和)와 판삼사사 정도전,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삼사 우복야 남은(南誾)·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하륜(河崙)·중추원 학사 이직(李稷)·대사헌 이근(李懃)·평원군(平原君) 이서(李舒)로 하여금 서운 관원과 함께 지리와 도참(圖讖)에 관한 여러 책을 모아서 참고하여 교정하게 하였다.
   ◇ 7월12일에 음양산정도감을 두었는데
      ▷ 각종 이설(異說)이 남무하는 풍수지리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임시기구였던 셈이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7월 19일(병진) 1번째기사
장마철이며 농번기라 무악에 도읍 정하는 시기를 늦추다
임금이 장차 무악의 터를 보고 도읍을 정하려 하는데, 문하부 낭사(郞舍)가 상서(上書)하였다.
“시기가 아직 덥고 흙비가 끼어 동가(動鴐)하기 불편하며, 또 농민들은 여가가 없으니, 8월 보름이 지나기를 기다려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대로 따랐다.
 
   ◇ 개경에 세력기반을 둔 귀족들은 움직이지 않으려고 버티고
      ▷ 국왕인 이성계는 어떻게든 천도를 밀어붙이려고 서두르는 형국이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8일(을해) 4번째기사
임금이 직접 천도할 무악 땅을 돌아보다
임금이 친히 무악(毋岳)의 천도(遷都)할 땅을 보려고 도평의사사와 대성(臺省)·형조의 관원 각각 한 사람씩과 친군위(親軍衛)를 데리고 갔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11일(무인) 1번째기사
왕이 무악을 둘러보고 유숙하다. 천도할 장소에 대한 분분한 의론
임금이 무악(毋岳)에 이르러서 도읍을 정할 땅을 물색하는데, 판서운관사 윤신달(尹莘達)과 서운 부정 유한우(劉旱雨) 등이 임금 앞에 나와서 말하였다.
“지리의 법으로 보면 여기는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너희들이 함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데, 여기가 만일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문서에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보아라.”
신달 등이 물러가서 서로 의논하였는데, 임금이 한우를 불러서 물었다.
“이곳이 끝내 좋지 못하냐?”
한우가 대답하였다.
“신의 보는 바로는 실로 좋지 못합니다.”
임금이 또 말하였다.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으냐?”
한우가 대답하였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서운관이 되어서 모른다고 하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한우가 대답하였다.
“이것은 도참(圖讖)으로 말한 바이며, 신은 단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옛사람의 도참도 역시 지리로 인해서 말한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이 근거 없는 말을 했겠느냐? 그러면 너의 마음에 쓸만한 곳을 말해 보아라.”
한우가 대답하였다.
“고려 태조가 송산(松山) 명당(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 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만약 가까운 지경에 다시 길지(吉地)가 없다면, 삼국 시대의 도읍도 또한 길지가 됨직하니 합의해서 알리라.”
하고, 좌시중 조준(趙浚)·우시중 김사형(金士衡)에게 일렀다.
“서운관이 전조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고 여러 번 상서하여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었다.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민중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 경 등이 서운관 관리로 하여금 각각 도읍될 만한 곳을 말해서 알리게 하라.”
이에 겸판서운관사 최융(崔融)과 윤신달·유한우 등이 상서하였다.
우리 나라 내에서는 부소(扶蘇) 명당이 첫째요, 남경(南京)이 다음입니다.”
이날 저녁에 임금이 무악 밑에서 유숙하였다.
   ◇ 개성, 즉 송악의 옛 이름이 부소갑(扶蘇岬)이다
      ▷ 그러니까 개성이 풍수지리적으로 첫째가는 명당이고
      ▷ 그 다음이 남경, 즉 지금의 경복궁 일대가 두번 째 명당을 거론된 것이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12일(기묘) 1번째기사
왕이 도읍터를 잡기 위해 왕사 자초를 부르다
임금이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밥을 먹이었다. 처음에 임금이 여기 와서 터를 잡으려고 할 때 먼저 사람을 보내서 맞아온 것이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12일(기묘) 2번째기사
도읍터에 관한 논의에 판삼사사 정도전이 국가 치란은 사람에 달려 있음을 역설하다
임금이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각각 도읍을 옮길 만한 터를 글월로 올리게 하니,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말하였다.
“1.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 되는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1.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 〈주나라〉 성왕(成王)이 겹욕(郟鄏)에 도읍을 정하니, 곧 관중(關中)으로 30대 8백 년을 전하였습니다. 11대손인 평왕(平王) 때에 이르러 주나라가 일어난지 4백 49년 만에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진(秦)나라 사람이 서주(西周) 옛땅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주나라는 30대 난왕(赧王)에 이르러 망하고 진나라 사람들이 이를 대신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30대 8백 년이라 하는 주나라의 운수는 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 고조(高祖)가 항우(項羽)와 함께 진(秦)나라를 칠 때, 한생(韓生)이 항우에게 관중(關中)에 도읍할 것을 권했으나, 항우가 궁궐이 다 타버리고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을 보고 좋아하지 아니하니, 어느 사람이 술수로 항우를 달래되, ‘벽(壁)을 사이에 두고 방울을 흔들면 그 소리는 듣기 좋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 부귀(富貴)해진 뒤에는 고향 산천(山川)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니, 항우가 그 말을 믿고 동쪽 팽성(彭城)으로 돌아가고 한 고조는 유경(劉敬)의 말에 의하여 그날로 서쪽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항우는 멸망했으나 한 나라의 덕은 하늘과 같았습니다. 이후로 우문씨(宇文氏)의 주(周)나라와 양견(楊堅)의 수(隋)나라가 서로 이어가면서 관중에 도읍하고, 당나라도 역시 도읍하여 덕이 한나라와 같았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 중국에서 천자가 된 사람이 많되 도읍하는 곳은, 서쪽은 관중으로 신이 말한 바와 같고, 동쪽은 금릉(金陵)으로 진(晉)나라·송(宋)나라·제(齊)나라·양(梁)나라·진(陳)나라가 차례로 도읍하여 중앙에는 낙양(洛陽)으로 양나라·당나라·진(晉)나라·한나라·주나라가 계속 이곳에 도읍하였으며, 송나라도 인해 도읍을 하였는데 대송(大宋)의 덕이 한 나라·당 나라에 못지 않았으며, 북쪽에는 연경(燕京)으로서 대요(大遼)·대금(大金)·대원(大元)이 다 도읍을 하였습니다. 〈중국과 같은〉 천하의 큰 나라로서도 역대의 도읍한 곳이 수사처(數四處)에 지나지 못하니, 한 나라가 일어날 때, 어찌 술법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제왕의 도읍한 곳은 자연히 정해 좋은 곳이 있고,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1. 우리 나라는 삼한(三韓) 이래의 구도(舊都)로서, 동쪽에는 계림(鷄林)이 있고 남쪽에는 완산(完山)이 있으며, 북쪽에는 평양(平壤)이 있고 중앙에는 송경(松京)이 있는데, 계림과 완산은 한쪽 구석에 있으니, 어찌 왕업을 편벽한 곳에 둘 수 있습니까? 평양은 북쪽이 너무 가까우니, 신은 도읍할 곳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1. 전하께서 〈기강이〉 무너진 전조의 뒤를 이어 처음으로 즉위하여 백성들이 소생되지 못하고 나라의 터전이 아직 굳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민력(民力)을 휴양하여, 위로 천시(天時)를 살피시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보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도읍터를 보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이며, 조선의 왕업이 무궁하고 신(臣)의 자손도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1. 지금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 옛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고서 하는 말이며, 신이 말한 바도 또한 옛날사람들이 이미 징험한 말입니다. 어찌 술수한 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인사를 참고해 보시고, 인사가 다한 뒤에 점을 상고하시어 자칫 불길함이 없도록 하소서.”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12일(기묘) 3번째기사
부소를 도읍으로 하자는 문하 시랑 찬성사 성석린의 논의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이 말하였다.
“이곳은 산과 물이 모여들고 조운(漕運)이 통할 수 있어 길지(吉地)라 할 수 있으나, 명당이 기울어지고 좁으며, 뒷산이 약하고 낮아서, 규모가 왕자의 도읍에 맞지 않습니다. 대저 천하의 큰 나라도 제왕의 도읍은 몇 곳에 불과한데, 하물며 한 나라 안에서 어찌 흔하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부소(扶蘇)의 산수(山水)는 혹 거슬려 놓인 데가 있으므로 선현들이 좌소(左蘇)와 우소(右蘇)에 돌아가면서 거주하자는 말이 있으나, 그 근처에 터를 잡아서 순주(巡住)하는 곳을 삼고, 부소 명당으로 본 궁궐을 지으면 심히 다행일까 합니다. 어찌 부소 명당이 왕씨만을 위하여서 생겼고 뒷임금의 도읍이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민력을 휴양하여 두어 해 기다린 뒤에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을까 합니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12일(기묘) 4번째기사
부소를 도읍으로 하자는 정당 문학 정총의 논의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이 말하였다.
“도읍을 정하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운 일입니다. 천하의 큰나라 〈중국 〉도 관중(關中)이니 변량(汴梁)이니 금릉(金陵)이니 하는 두어 곳 뿐인데, 어찌 우리 작은 나라로서 곳곳에 있겠습니까? 주나라가 관중(關中)에 도읍하였고, 진(秦)나라가 대신하여 관중(關中)에 도읍하였으며, 진 나라가 망하고 한 나라가 대신해도 역시 거기에 도읍하였으며, 변량은 5대(代)가 도읍하고 금릉은 6조(朝)가 도읍한 곳입니다. 도선(道詵)이 말하기를, ‘만약 부소에 도읍하면 세 나라 강토를 통일해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조는 시조 왕건(王建) 이전 3국이 정립할 때부터 3국을 통일한 이후에 단지 개성에 도읍하였는데, 왕씨가 5백 년에 끝나는 것은 운수(運數)이며 지리에 관련시킬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주 나라·진 나라·한 나라가 서로 계속해 가면서 한 곳에 도읍한 것을 보면, 비록 개성이라도 해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구태여 여기를 버리고 다른 곳을 구하려면, 다시 널리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악의 터는 명당이 심히 좁고 뒷 주룡(主龍)이 낮으며, 수구(水口)가 쌓이지 않았으니, 길지(吉地)라면 어찌 옛사람이 쓰지 않았겠습니까?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12일(기묘) 5번째기사
비기로 볼 때 도읍지로 무악이 좋다는 첨서중추원사 하윤의 논의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하윤(河崙)이 말하였다.
“우리 나라 옛 도읍으로 국가를 오래 유지한 것은 계림과 평양 뿐입니다. 무악의 국세(局勢)가 비록 낮고 좁다 하더라도, 계림과 평양에 비하여 궁궐의 터가 실로 넓고, 더구나 나라의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증빙할 만하여, 우리 나라 전현(前賢)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서로 부합되는 것입니다. 또 중국의 지리에 대한 제가(諸家)들의 산과 물이 안으로 모여든다는 설과도 서로 가까우므로, 전일 면대하여 물으실 때에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임금이 일어남에는 스스로 천명(天命)을 갖고 있는 것이나, 도읍을 정하는 일은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한때의 인심에 순응하여 민폐를 덜려면 송도에 그대로 있을 것이요, 전현(前賢)의 말씀에 의하여 만세의 터전을 세우려면 이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8월 12일(기묘) 6번째기사
무악이 좁기는 하나 비결에서 말한 곳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한 중추원 학사 이직의 논의
중추원 학사 이직(李稷)이 말하였다.
“도읍을 옮기고 나라를 세우는 곳에 대하여 지리책을 상고해 보니, 대개 말하기를, ‘만갈래의 물과 천봉의 산이 한 곳으로 향한 큰 산과 큰 물이 있는 곳에 왕도와 궁궐을 정할 수 있는 땅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산의 기맥이 모이고 조운이 통하는 곳을 말한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지방 천리로써 임금이 된 사람은 〈수도를〉 4방 5백 리로 하고, 지방 5백 리로 임금이 된 자는 〈수도를〉 4방 각 50리로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4방〉 도로의 거리를 고르게 하기 위하여 말한 것이며, 우리 나라 비결에도 이르기를, ‘삼각산 남쪽으로 하라.’ 했고, ‘한강에 임하라.’ 했으며, 또, ‘무산(毋山)이라.’ 했으니, 이곳을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대저 터를 잡아서 도읍을 옮기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로서 한두 사람의 소견으로 정할 것이 아니며, 반드시 천명에 순응하고 인심을 따른 뒤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전》에 말하기를, ‘거북도 따르고 시초도 따르며 공경(公卿)과 사대부도 따르고 서민도 따라야 한다.’ 했으니,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도읍을〉 옮기고 안 옮김은 때와 운수가 있는 것이니, 신이 어찌 쉽게 의논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천도하려는 것은〉 천심에서 나오고 또 인심의 향하는 바를 살피시니, 곧 하늘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악의 명당은 신도 역시 좁다고 생각합니다





한양 천도[漢陽遷都, 1392(공양왕 3)년∼1394(태조 2)년] "조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다" | 우리歷史 이야기
관운 | 조회 41 |추천 0 | 2017.02.24. 22:41


한양 천도[漢陽遷都, 1392(공양왕 3)1394(태조 2)] "조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다"

 

 

 

 

 

 

고려말 천도 논의와 한양의 부각

 

 

고려 전반에는 문종· 숙종(고려)(肅宗)대 남경(南京)(南京) 경영, 명종대 삼소(三蘇)(三蘇) 경영처럼 천도 혹은 순주론(巡駐論)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원간섭기 이후에는 특별한 논의가 없어서 삼경(三京삼소 등에 대한 관념도 희박해졌다.

공민왕(恭愍王)대 들어서 다시 천도논의가 제기되어 1356(공민왕 5)에 남경 천도논의가 있었다. 이때의 천도논의는 원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노력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6월에 기철 등 부원세력이 처단되고, 원의 연호 사용이 정지되었으며, 정동행성(征東行省) 이문소(理問所)(理問所)가 폐지되었는데, 이에 대한 교서를 반포한 이틀 후에 남경을 상지(相地)하게 하였다. 천도논의는 정국을 쇄신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1360(공민왕 9) 1월에 태묘에서 천도가 불길하다는 점괘를 얻었다는 이유로 중지하였다.

13601차 홍건적의 침입이 일단락된 후 7월에는 삼소 중 좌소였던 백악(白岳) 천도를 논의하여 11월에 백악 신궁(新宮)으로 잠시 이어하였다. 이후 강화가 천도지로 언급되기도 하였고, 신돈(辛旽)(辛旽) 등장 이후에는 그의 건의로 평양과 충주가 부각되기도 하였다. 이는 천도를 통해 신돈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공민왕대 천도론은 천도대상지가 고려 전반기 논의된 지역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이전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우왕대 천도론은 이러한 공민왕대의 경험 위에 왜구의 위협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더해짐으로써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당시 왜구는 연해의 조창과 조운선을 목표로 공격하여 국가의 조운체계를 마비시켰으며, 공민왕 후반부터는 교동(喬桐), 강화 등지를 습격하여 수도인 개경(開京)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내륙 지역으로 천도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우왕(禑王)이 재위 초반에 지세를 살핀 지역은 철원과 연주(漣州)로 모두 임진강 상류에 위치한 내지였다. 1378(우왕 4)에 이르면 내지이면서도 공민왕대 유행한 삼소론과 관련있는 북소 기달산(箕達山)과 좌소 백악이 거론된다.

그리고 우왕대 천도논의의 또다른 특징으로 순탄치 못한 즉위과정과 연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13775월과 7월의 철원, 연주 천도논의도 3월에 지윤(池奫) 일파를 숙청한 후에 제기한 것이었다. 1379(우왕 5) 7월에 양백연(楊伯淵)을 숙청하고, 9월 유모 장씨(張氏) 일파를 숙청한 후에는 바로 회암(檜岩)을 상지(相地)하였다. 이렇듯 논의의 시점이 대부분 우왕이 정국운영에서 위기에 몰린 상황으로, 천도논의를 통해 정국돌파를 꾀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점은 1382(우왕 8) 한양천도 때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논의는 13822월에 들어 서운관에서 한양 천도를 건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장보지(張補之)와 부정(副正) 오사충(吳思忠) 등이 도선비기에 근거를 두고 천도를 건의하였으며, 삼소가 아닌 삼경을, 그 중에서도 남경을 염두에 두고 천도를 청하였다. 이때 이인임은 반대하였으나 최영은 참서(讖書)에 실린 지난 일이 모두 입증되니 믿지 않을 수 없다. 속히 서울을 옮겨야 한다.”라며 찬성하였다.

최영은 원래 천도를 반대하는 데 선두에 섰던 인물이었다. 철원으로의 천도를 반대할 때 그는 농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소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왜구가 엿보는 마음을 열어 나라가 장차 날로 수세에 몰릴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위에서 이인임이 한양 천도를 반대했던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으며, 최영의 반대는 이인임과 결별하려는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더구나 13822월에 이인임의 반대로 일단 중지되었던 천도는 6개월 후 우왕이 전격적으로 한양천도를 명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이것은 이인임에 반하는 우왕의 적극적인 의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천도를 통해서 대내정국을 전환시키려는 시도는 공양왕대에도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 1390(공양왕 2)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양으로 천도한 적이 있었다. 이는 1390(공양왕 2) 5월 이초의 옥으로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권중화(權仲和) 등이 원지(遠地)에 유배되고 이성계 일파의 세력이 커지자 공양왕이 한양 천도를 통해 정국의 변화를 도모하려 한 데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때 한양천도론이 우왕대와 다른 점은 공양왕이 도읍을 옮기지 않으면 군신을 폐하게 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는 점이다. 도선비기의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은 이전부터 언급되었지만 군신을 폐하게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 말은 공민왕 시해를 시작으로 우왕·창왕이 줄줄이 폐위되는 상황과 관련하여, 입지가 불안했던 공양왕에게 심리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 틀림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천도에 반대하는 세력에게 명분상 반박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천도 중이었던 1390(공양왕 2) 11월에는 김종연(金宗衍조유(趙裕) 등 여러 명이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계획하던 사건이 탄로나는 등 이 기간은 이성계 세력에게 위협적이었다.

이상과 같이 고려말에 대외정세가 불안하여 수도 방비의 허점이 드러나자 천도론이 제기되어 여러 지역이 물망에 올랐으나 실제 천도가 이루어진 지역은 백악과 한양밖에 없었다. 특히 1382(우왕 8) 이후로는 천도지로 한양만이 거론되었고 이는 조선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천도론이 제기되는 한편에서는 폐허가 된 개경을 복구하고 방어를 정비하려는 노력도 지속적으로 취해지고 있었다. 실제 천도가 행해진 곳이 한양밖에 없었다는 점과 개경 복구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는 두 가지 점은 조선 건국 후 천도 대상지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태조대 천도논의와 한양천도

 

 

조선건국 후 약 4년 동안의 논의를 통해 태조의 적극적인 주도로 한양 천도가 결정되었다. ‘예로부터 왕조(王朝)가 바뀌고 천명(天命)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이다라고 주장한 태조는 개경에서의 취약한 기반을 극복하고 민심을 잡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풍수도참에 부응하여 자신의 건국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반면 태조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여타의 공신세력들은 기본적으로 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양자의 이런 대립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1392(태조 1) 813일 태조는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라고 명령한다. 건국 직후였던 만큼 태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염(李恬)(李恬)을 한양으로 보내서 궁실(宮室)을 수리하게 하였다. 하지만 배극렴과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한양 천도가 번복되는데, 궁궐과 성곽도 갖추지 못하고 천도할 경우 민가(民家)를 빼앗는 일이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는 개국 직후 대규모 토목공사 실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입장에서 천도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듬해인 1393(태조 2) 1월에 태 묻을 곳을 찾기 위하여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던 권중화가 돌아와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의 도읍 지도를 바쳤다. 이를 계기로 계룡산이 새 도읍의 후보지로 대두되었고, 풍수지리가 주요한 판단근거가 되었다. 2월이 되자 계룡산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거둥하였다. 새 도읍의 산수(山水)의 형세(形勢)를 관찰하고 성석린(成石璘)(成石璘김주(金湊이염에게는 조운과 도로의 측면을 살피게 하고 이화(李和)(李和)와 남은(南誾)에게 성곽을 축조할 곳을 살피게 하였다. 종묘·사직·궁전·시장을 조성할 장소를 그림으로 그리고, 실제로 땅을 측량해 보기도 하였다. 다 둘러본 뒤에는 떠나면서 김주와 박영충(朴永忠최칠석(崔七夕)을 남겨서 새 도읍의 건설을 감독하게 하고 324일에는 계룡산 새 도읍을 중심으로 기내(畿內)의 행정구역도 설정함으로써 천도가 확정적으로 추진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12월에 하륜(河崙)의 상언으로 이 또한 중지되고 천도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하륜은 호순신의 지리서를 근거로 계룡산이 도읍에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고려 왕조의 산릉(山陵)의 길흉과 대조한 결과 호순신 지리서의 효험이 인정된다 하여 계룡산 천도가 철회된 것이었다. 이에 태조는 하륜에게 서운관(書雲觀)의 비록문서(秘錄文書)를 모두 주어서 검토하게 하고 천도할 후보지를 고르게 하였다. 결국 계룡산 천도시도는 시작과 중단 모두 풍수지리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다만 건국 이후 두 번의 천도 시도가 전부 태조의 일방적인 결정을 밀어붙이는 방식이었다면, 계룡산 천도 중지 이후로는 비로소 천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하륜에게 비록문서를 검토하게 한 얼마 뒤인 1394(태조 3) 214, 태조는 권중화· 이무방(李茂芳)(李茂方정도전·성석린(成石璘민제(閔霽남은·정총(鄭摠권근(權近이직(李稷이근(李懃)(李懃) 10인에게 명하여, 하륜과 함께 우리나라 역대 여러 현인들의 비록(秘錄)을 두루 상고하여 요점을 추려서 바치게 하였다. 천도지 선정을 위한 풍수지리나 도참설 검토를 하륜만의 일이 아닌 조정의 대신들이 참여하는 일로 만든 것이다.

곧바로 비록촬요(秘錄撮要)이라는 이름의 책을 완성하였고, 이직과 하륜으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다. 태조는 앞서의 대신들과 하륜까지 11명으로 하여금 서운관 관원과 함께 완성된 책을 가지고 가서 무악 지역을 살펴보게 하였다. 대신들은 무악은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없다고 반대하였고, 하륜은 풍수지리와 도참을 근거로 무악이 적합함을 강조하였다. 비록촬요(秘錄撮要)라는 매개체를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신들과 하륜의 판단은 기준 자체가 달랐다. 결국 태조는 직접 가서 보고 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태조가 직접 무악을 살펴보기로 결정한 후 서운관원 유한우(劉旱雨)와 이양달(李陽達) 등이 무악이 도읍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불일사(佛日寺)(佛日寺)와 선고개[鐥岾]를 추천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는 선고개와 불일사를 각각 답사하였으나 천도에 적합하지 않았고, 남은은 이들이 풍수지리를 앞세워 후보지 선정을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꾸짖었다. 그리고 이런 혼동을 없애고자 풍수지리에 대한 학설상 차이와 비록의 옳고 그름을 교정할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 도평의사사의 건의로 두게 된다. 이 도감의 구체적인 활동은 파악이 어렵지만 독단적인 결정방식이 아닌 다자의 논의에 의해 결과를 내려고 했다는 취지가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마철과 농번기를 지나 1394(태조 3) 88일에 태조는 도평의사사와 대간·형조의 관원 각각 한 사람씩과 친군위를 데리고 무악의 천도지로 출발하였고 811일에 무악에 이르러 지세를 살폈다. 윤신달(尹莘達)과 유한우 등 서운관원들은 모두 무악이 지리법 상으로 도읍에 적합하지 않으며 개성에 지금대로 도읍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태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고려 말에 서운관이 주도적으로 개성의 지덕이 모두 쇠하였다고 주장했던 것과 배치되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조가 직접 무악을 살펴보기 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악이 도읍 후보지로서 반대에 부딪히자, 답사는 무악만이 아니라 검토 가능한 후보지를 전부 둘러보는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왕사(王師) 자초(무학대사)(自超(無學大師))(自超)를 불러들였고, 대신들에게 도읍할 만한 후보지를 글로 써서 올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성석린은 부소(扶蘇)의 명당이 고려왕조만을 위한 것일 수 없으니 개성에 그대로 있자는 입장을 제시하였고 정총도 같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하륜은 이전과 다름없이 지리와 도참의 측면에서 무악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고, 이직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정도전은 국가가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서 풍수의 설에 의한 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오히려 새 수도의 건설보다는 민생 안정이 더 시급하니 천도는 천천히 하자는 입장이었다. 결국 재상들의 의견이 대체로 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이었고, 이미 살펴본 무악과 현 수도인 개성 이외의 다른 지역을 언급하지도 않았기에 태조를 불쾌하게 하였다.

태조는 한양 답사를 강행하여 13일에 옛 궁궐터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서 동행한 신하들 중 무악을 줄기차게 주장해 온 하륜을 제외한 나머지 신하들이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라고 하여 근본적으로 천도에 동의하지 않으나 굳이 천도를 해야 한다면 한양이 가장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16일에는 한양을 둘러볼 때 양원식(楊元植)이 제안한 적성 광실원(廣實院) 동쪽, 17일에 백악의 신경(新京), 18일에 도라산터를 경유하여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천도 후보지를 추가적으로 둘러보았지만 한양은 커녕 무악만큼의 평가를 받은 곳도 없었다.

드디어 824일에 도평의사사에서 건의를 하는 형식을 빌어 한양을 새 수도로 결정하였다. 곧바로 91일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심덕부(沈德符김주·이염·이직을 판사(判事)로 임명하여 임무를 맡겼다. 99일에는 이들과 권중화·정도전을 한양으로 보내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112일에는 태조가 직접 내려와 종묘와 사직의 터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123일에 정도전에게 제문을 짓게 해서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에게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고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에게 고유하게 하였다. 124일에 최원(崔遠)(崔遠)을 종묘를 세우려는 터에 보내고 권근을 궁궐 지을 터에 보내서 오방지신(五方祗神)에게 제사지내고, 태조가 직접 지켜보는 속에서 종묘의 터를 닦는 것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929일에 마침내 종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준공 직후인 윤913일에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두고 정도전에게 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하였고, 10월에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여 궁궐의 이름은 경복궁(景福宮), 전각의 이름은 강녕전(康寧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사정전(思政殿근정전(勤政殿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근정문(勤政門정문(正門)으로 정해졌다. 이 이름들은 시경서경등 유교 경전에서 인용한 것은 새로운 국가의 이념적 기준이 어떠한 가를 내외에 분명히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해를 넘겨 1396(태조 5) 1월부터 도성을 쌓는 일이 시작되어 2월까지 공사를 한 후, 8월에 다시 인부를 징발하여 9월까지 공사를 더 해서 성 쌓는 일을 마무리 하였다. 그 사이인 419일에는 한성부의 5부 아래에 52개의 방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붙여서 수도의 행정구역과 체제를 정비했다. 도성의 완성과 함께 숙청문(肅淸門흥인문(興仁門숭례문(崇禮門돈의문(敦義門)4대문과 홍화문(弘化門광희문(光熙門소덕문(昭德門창의문(彰義門)4소문도 만들어 졌다.

 

 

정종대 개경 환도와 태종대 한양 재천도

 

 

태조대의 천도는 광범위한 동의 아래 단행된 것이 아니어서 관료층 내부에서는 물론 도성민, 특히 도성의 상인층으로부터 반발이 심하였다. 이들은 여전히 개경이 수도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양천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제거되고,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정국의 혼란을 무마할 대책으로 개경으로 환도가 결정되었다. 13992월에 제릉(齊陵)(齊陵) 참배로 개성을 방문했을 때 환도 의사를 내비친 후 37일에 곧바로 태조와 함께 개성으로의 환도를 단행하였다. 환도에 대해서는 관료와 백성들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듬해 128일에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 번 정국이 요동쳤다. 24일에 정안군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고, 1111일에 정종이 선위하면서 13일에 태종이 즉위한다. 이 때 태상왕인 태조가 새로 즉위한 태종에게 한양으로 재천도할 것을 요구하였고, 즉위 명분이 취약했던 태종으로서는 따르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양천도에 대한 논의는 이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천도 반대의 입장이 그만큼 강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402년에 가서야 한양천도가 다시 언급되는데 관민의 반대가 여전한 상황에서 양자의 입장을 절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태조가 제기한 것이 양경제(兩京制)’였다. ‘양경제란 자신이 있는 구도(舊都) 개경(開京)과 종묘가 있는 신도(新都) 한양 두 곳을 모두 폐하지 않고 수도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신하들은 오히려 이듬해인 1403(태종 3)에는 종묘와 사직을 아예 구경(舊京)인 개경으로 옮기자는 건의를 하였다. 결국 개경을 수도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태종은 뒤집고 1년 후인 1404(태종 4) 710일에 삼부(三府)의 기로(耆老)는 물론이고 종친의 여러 군()들까지 모아서 다시 도읍에 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당시에도 일반 관료들의 논의 분위기는 여전히 개경으로의 천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이때 태종의 심중을 대변한 남재(南在)와 조준에 의해 양경제가 다시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관료들의 논의는 번복되지 않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결국 태종의 일방적인 명령으로 양경제를 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약 2개월 만에 이런 명령은 번복되어 한양 천도가 결정되었다. 당시 태조는 다시금 한양천도를 요구하였는데 태종이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추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논의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궁 건설을 언급하면서 태종의 입장이 보다 강화되었다는 것이었다.

천도명령이 나온 다음 달인 1404919일에 처음 한양이 새 수도로 결정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륜이 무악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자, 태종은 102일에 조준·하륜·권근 등과 여러 종친을 데리고 무악으로 거동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무악이 아닌 한양으로 천도지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태조대와 달리 태종은 무악과 한양을 놓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풍수지리를 가지고 도읍지를 선정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였다. 이로써 신도(新都)에 대해서 이설(異說)이 나오는 것을 적극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양 천도를 확정함과 함께 이궁 건설을 지시함으로써 천도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는 것을 정한 지 1년 만인 1405(태종 5) 108일에 개경을 떠나 11일에 한양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궁도 19일에 완성을 보았으며, 25일에는 창덕궁(昌德宮)으로 이름지었다. 이렇듯 태조의 한양천도, 정종의 개경환도, 태종의 한양 재천도의 과정을 겪었다. 하지만 태종대에는 1411(태종 11) 1214일에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여, 이듬해 115일부터 1달 동안 충청·전라·경상도 528백 명의 군인을 동원해서 청계천(당시 개천)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 기존 도감을 행랑조성도감(行廊造成都監)으로 삼아 정비된 청계천을 바탕으로 행랑을 만들어 시전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양은 보다 확고한 조선의 새로운 수도가 될 수 있었다.

 


 





[스크랩] 경복궁 명당 논쟁| 동네방네 이야기마당
포카페이스 | 조회 4 |추천 0 | 2006.09.15. 19:21

 

최양선이 경복궁 터에 대한 관심을 보인 것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였다.(*註)

경복궁이 명당이 아니라는 의견을 최양선이 최초로 주장한 것은 1433년(세종15년)이다. 최양선이‘경복궁의 북쪽 산이 주산이 아니라, 목멱산(남산)에서 바라보면 향교동(현재의 운니동 부근)의 연한 줄기, 지금 승문원의 자리가 실로 주산이 되는데, 도읍을 정할 때에 어째서 거기다가 궁궐을 짓지 아니하고 북악산 아래에다 하였을까요. 지리서에 이르기를, '개인의 집이 주산의 혈(穴) 자리에 있으면 자손이 쇠잔해진다' 하였으니, 만약 창덕궁을 승문원 자리로 옮기면 만대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라고 임금에게 아뢴다. 이에 임금은 지신사 안숭선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경복궁 명당 여부에 대해 대신들과 함께 직접 살피라는 지시를 내린다:

“최양선은 미치고 망령된 사람이라 실로 믿을 것이 못된다. 그러나 무식한 나무꾼의 말도 성인이 가려 듣는다 하는데, 나무꾼보다는 최양선이 나을 것이기에 전 청주목사이었던 이진을 시켜 최양선과 함께 목멱산에 올라가서 바라보게 하였더니, 이진도 역시 최양선의 말이 옳다고 한다. 대체로 지리서란 속이 깊고 멀어서 다 알기 어렵지만 높은 데 올라서 보면 주산의 혈맥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청명한 날을 가려서 영의정 황희, 예조판서 신상과 함께 이진·이양달·고중안·최양선·정앙 등을 데리고 목멱산에 올라가서 주산의 혈맥을 바라보도록 하라. 과연 잘못 되었으면 창덕궁은 진실로 옮기기 어려우니, 한 백여 간되는 별궁 지는 것이 가할 것이다. 근래에 흔히 토목 역사를 일으키는 일이 있지만 놀고 구경하기 위함은 아닌 것이다.”

동시에 세종은 승정원에 지시하여 풍수지리에 능한 자를 찾아 보고하라고 한다. 임금의 명을 받은 안숭선은 황희, 신상 등과 함께 직접 남산(목멱산)에 올라가 경복궁 뒷산인 북악(백악)산 산능선(내맥)을 살피면서 동시에 풍수학인 최양선, 이양달, 고중안, 정앙, 풍수에 능한 문신 이진, 신효창 등으로 하여금 최양선의 주장에 대해 변론을 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들의 의견은 두 가지로 갈린다. 한쪽으로는 그 이양달·고중안·정앙 등의 의견이 다른 한쪽으로는 최양선, 이진 등의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우선 이양달, 고중안, 정앙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백악은 삼각산 봉우리에서 내려와 보현봉이 되고, 보현봉에서 내려와 평평한 언덕 두어 리가 되었다가 우뚝 솟아 일어난 높은 봉우리가 곧 백악이다. 그 아래에 명당을 이루어 널찍하게 바둑판 같이 되어서 1만 명의 군사가 들어설 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명당이고, 여기가 곧 명당 앞뒤로의 한복판 되는 땅이며, 주산의 북쪽 바깥 협곡은 삼각산에서 서남쪽으로 둘러서 큰 가지가 되어 나암사(羅岩寺)의 남쪽 끝으로 돌아 닿고, 그 갈림 가지 하나가 역시 서남으로 돌아서 무악재의 서편 가에 이르렀다. 이것이 명당 서북 언덕의 여러 갈래 물줄기가 돌아 흐르는 대략이다. 또 주산의 동북쪽은 그 하나의 큰 가지가 청량동 물근원 등처로부터 동북으로 둘러 동남쪽으로 돌아서 큰 들에 이르러 멈추고, 한 가지는 청량동의 물근원으로부터 동남으로 둘러서 벽돌가마 아래 큰 들에 이르러서 그치고, 그 갈림 가지 하나가 사한동 물근원으로부터 둘러서 그치고, 또 한 가지가 사한동 근원으로부터 남동쪽으로 돌아서 동대문에 이르러 그쳤다. 이것이 명당 동남 언덕 여러 갈래 물줄기의 대략이다. 백악 명당의 좌우로써 말하면 왼편 팔은 주산의 서쪽 가에서 나와서 서남으로 둘러서 동대문 수구에 이르렀고, 그 오른편 팔은 역시 동남으로 둘러 가지고 역시 동대문 수구에 이르렀다. 그런즉 명당의 전후 좌우가 균제하고 방정하여 기운 것이 없다. 또 주산의 정통되는 큰 내맥이 남방으로 직행하여 그 기운이 힘차게 왕성하기 때문에, 백악산과 인왕산·무악산·남산이 모두 우뚝 솟아서 봉우리를 이룬 것이다. 이제 말하는 자들이 내맥이라 하는 것은 그 기운이 작아서 단지 정업원 뒤에 작은 봉우리 하나가 일어나서 오직 종묘의 자리를 이루었을 뿐이요 다른 혈자리를 이루지 못했다. 만약 이 봉우리가 아니었으면 종묘의 자리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며, 이 봉우리 밖에는 다시는 왕성한 기운이 없기 때문에 종묘 자리가 되고서는 다시 일어난 봉우리가 더 없는 것이다. 곁갈래 맥과 정통의 맥으로서 본다면 종묘는 그것이 곁갈래 맥에서의 정통맥이요, 지금 말하는 자들의 말은 실로 곁갈래 맥에서의 곁갈래 맥인 것이다. 옛사람은 산맥의 크고 작고 왕성하고 쇠약한 것을 초목의 가지와 줄기의 크고 작고 성하고 마른 데에 비하는 것이다.”

반면 경복궁 명당설을 부정하는 이진·최양선 등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삼각산의 내맥이 보현봉이 되고, 보현봉이 우람하게 높고 낮은 언덕땅으로 퍼져 가지고 거기서 양편으로 갈라져서, 왼편 가닥[峽]은 울툭불툭 길게 내려가다가, 이것도 좁은 목을 이루어 안암 땅에 이르고, 오른편 가닥은 반 리쯤 내려오다가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으니, 이것이 백악이다. 백악에서 반 리쯤 내려와서 한 산줄기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인왕산이다. 인왕산에서 2리쯤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회돌아서 주산에 절을 하고 섰으니, 이것은 가위 조회 인사하는 정식이라 할 만하여, 가운데에 바른 맥이 머리를 동남간으로 들이밀어 2리쯤 가다가 남쪽으로 회돌아서 주산에 절하고 썼으니 조회 인사의 정식이라 할 만하며, 가운데에 바른 맥이 머리를 동남간으로 들이밀어 2리를 가서는 언덕을 이루었으니 주산이 된 것이다. 주산의 떨어진 맥이 마치 달아맨 실이 다시 일어나고 벌의 허리가 끊어진 듯 이어진 기이한 형상과 같은 것이 이른바 현무가 머리 숙인 형이란 것이다. 왼편 팔이 구붓하게 혈자리 앞으로 돌아 닿고, 오른편 팔이 활과 같이 명당에 절을 하며 세 겹으로 가지와 잎들처럼 좌우로 감싸안고, 산과 물이 정이 있게 천지를 배포하여 하늘의 관문이 되고 땅의 중축이 되는 곳에 두 편이 가운데를 맞아서 명당이 된 것이니, 바로 존귀한 형국 가운데 모든 물 흐름도 하늘 뜻에 합치되니, 이것이 가위 기운의 모인 곳이라 귀하기가 더 말할 수 없다. [경]에‘두 물이 껴있는 곳이 곧 명당이다’고 하였는데, 가지와 잎새가 중앙을 둘러 회돌아 있는 것이 그것이다.”

경복궁의 명당 여부에 대한 논쟁이 양쪽으로 나뉘어져 진행되는 동안 예조좌참판 권도는 그러한 논쟁 자체가 풍수지리라는 한갓 망령된 술수에서 나온 것이니 배척해야한다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임금의 노여움을 산다. 겨우 도승지 안숭선의 간청으로 권도에 대한 처벌이 면해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며칠 후 이조판서인 허조 역시 최양선을 처벌해야한다고 임금에게 아뢰나 임금은 허조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출전: 김두규,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이양달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풍수학 관료
이양달(李陽達)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조선 개국 초기부터 도읍지 선정에 관여한 것으로 보아(1393년, 태조 2년) 이미 고려 왕조에서 지관으로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1432년(세종14년) 나이 80이 된 이양달이 조선개국이래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세종 임금으로부터 서운관판사를 제수 받는다. 직업 술사로서 1품 벼슬을 받았으니 최고의 영예였다.

"임금이 맹사성·조계생·안숭선 등에게 말하기를,
'지리학인 이양달은 개국 당시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공적이 있으며, 나이도 이미 80이 되었으므로 내가 그에게 판사의 벼슬을 주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왕명이 지당하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에게 서운관판사를 주라.'
고 하였다."

이로 보아 1350년대에 태어나 나이 40세 즈음에 조선개국과 함께 도읍지 선정에 관여하였고 또 그로부터 40년 동안 지관으로 활약하여 세종 임금으로부터 공을 인정받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에도 서거정이 어려서 나이가 85/6세 된 이양달과 한 동네에 살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양달은 1430년대 후반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는 이미 고려 말엽에 지리학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고려 정권에서서 지관으로 활동한 것이 확실하다. 그는 고려 풍수와 조선 풍수의 중간 매개자로서 역할을 한 셈이다. 참고로 고려 때의 지리학(풍수학)과거 시험을 치루는 격식은 다음과 같았다:

"初日에는 [新集地理經] 10條를 시험하고, 그 다음 날에는 [劉氏書] 10條를 시험하여 兩日에 모두 6條이상 통해야 하고, [地理決經]8권과 [經緯令] 2권을 합한 10권 중 글자해석과 뜻 6권을 알아야 하며 해석은 4권을 알아야 한다. [地鏡經] 4권과 [口示決] 4권, [胎藏經] 1권과 [訶決] 1권 등 도합 10권 중에 해석과 뜻 6궤(机)를 통해야 하고 해석 4궤를 알아야 하며, 또한 [蕭氏書] 10권을 읽고 그 안에서 해석 1궤를 알아야 하였다."

고려풍수를 그대로 안고 조선 개국 초부터 활동한 이양달이 맨 처음 관여한 일은 태조 이성계의 도읍지 선정이었다.

한양 도읍지 선정
조선 개국 초 새로운 도읍지로서 계룡산, 한양, 무악, 개경 등이 구체적인 후보지로서 논의되었을 때 권중화가 계룡산을 천거한다. 그러나 계룡산은 대신 하륜이 부적절하다고 하여 천도를 위한 공사가 중단되고 도읍지 후보에서 탈락된다. 이어 하륜은 연희동과 신촌 일대인 무악을 주장한다. 그러나 풍수학관료 이양달은 동료 유한우와 함께 무악 천도 불가론을 주장한다. 그 이유가 자신들이 배웠던 풍수술로 비추어 보아 도읍으로 정할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에 태조는 이양달과 유한우의 의견을 받아 들여 이들로 하여금 다른 곳을 물색하게 한다.
이양달은 동료 유한우와 함께 도읍지 후보로서 선고개(선점; 鐥岾)을 추천한다. 그러나 대신들이 이곳을 살펴보고는 도읍지로서 불가하다고 판단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양달은 동료 유한우와 함께 당시 조정 대신인 남은(南誾)으로부터 꾸중을 듣는다:

“너희들이 지리의 술법을 안다는 것으로써 여러 번 맞지 않은 곳을 도읍지로 추천하여 상총(上聰)을 번거롭게 하니 호되게 징계하여 뒷날을 경계해야겠다.”

비록 남은에 의해 이양달이 동료 유한우와 함께 비판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하여 이양달의 풍수와 유한우의 풍수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한양을 보는 그들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한양에 대한 풍수지리적 견해는 현존 풍수사들까지도 그 견해가 다르다. 즉 한양이 도읍지로서 적절한 명당이라는 견해와 도읍지가 될 수 없다는 견해가 서로 대립된다. 이때도 이미 한양의 명당여부에 대해서 찬반 논의가 있었으나 이양달은 한양이 도읍지로서 적절한 명당임을 주장한다.
한양이 도읍지로서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는 풍수학인들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은 현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 돌산으로 험악하고, 청와대와 경복궁 좌우로 흐르는 개천의 물(명당수)이 적은데다가 북서쪽(현 자하문 쪽)이 함몰되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풍수학인으로서 윤신달, 유한우 등이 대표적인 한양도읍지 불가론자이다.
반면 이양달은 '한양이 비록 명당에 물이 없다고 말하나, 광통교 이상에서는 물이 흐르는 곳이 있으며, 전면에는 물이 사방으로 빙 둘러싸고 있으므로, 도읍할 만하다'라고 하여 한양 불가론을 반박한다. 결국 이양달의 한양 명당론이 채택된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세종 임금 때 한양 명당 논쟁이 재연되나 이때에도 이양달은 일관되게 한양명당론을 주장한다. 한양에 명당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종 임금 때 연못을 파는 역사를 벌일 때에도 이양달은 명당수에 문제가 없음을 주장한다:

“경복궁 명당의 물은 왼편 물이 소격전 골짜기 근처에서부터 나오고, 오른편 물이 북악산과 인왕산 기슭에서부터 나와서 혜정교 아래에 이르러 좌우의 물이 합류하여 돌아 싸고 내려갑니다. 따라서 등지고 흐른다고 말할 수 없으며, 궁성 서문 밖의 작은 냇물이 도관(都官) 북쪽에 이르러 오른편 물과 합류하여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내려갑니다. 이것은 옛사람의 명당 상류수 이론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하필 공교하게 파서 비뚜로 흐르게 하겠습니까. 신은 예전대로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리서에 이르기를, ‘왼편 물과 왼편 산은 재물을 쉽게 생기게 하고, 오른쪽이 활처럼 굽어있고 오른쪽을 안은 것은 그 다음이며, 음택 양택 모두 그러하되 왼편의 산에서 기울어져 흐르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습니다.”

또한 후배 풍수학인 최양선이 경복궁이 진혈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 때에도 이양달은 경복궁이 진혈임을 주장하여 한양 명당론을 일관되게 견지한다.

태종의 왕릉 소점

이양달이 조선 도읍지 선정에 직접 참여를 하긴 하였으나 도읍지 선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전문 풍수학 관료보다는 조정의 대신들이었다. 까닭은 조정 대신들 가운데 풍수학관료 못지 않게 풍수지리를 터득한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풍수학 관료들의 풍수적 안목이 왕릉과 같은 묘지 풍수, 즉 미시적인 부분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양달의 풍수지리 역시 묘지풍수에 한정된 것이었다.
이양달이 지관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된 것은 태종 이방원의 무덤자리(현재 서울 내곡동 소재의 헌릉)를 잡은 데서이다. 서기 1420년(세종 2년) 태종의 부인이자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가 죽자 현재의 능에 묻힌다. 이 자리는 이양달이 잡은 뒤 하륜이 길지로 판명하여 왕릉으로 쓰게 된 자리이다.(사진 이양달 -1)
물론 이 자리가 그 때부터 완전한 명당으로 모든 지관들이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양달의 동료 지관 이용(李庸)이 왕릉이 조성된 뒤 몇 달 뒤 아뢰기를 왕릉의 왼쪽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지금 헌릉의 형세는 회룡고조(回龍顧祖)로서 진실로 대지입니다. 그러나 왼편 산 안에 조금 밖으로 향한 줄기가 있어 상하고 헤쳐진 언덕이 매우 좋지 못한 것이 되옵니다. 예전에 곽경순이 말하기를,‘청룡이 꿈틀거리며 나아간다’하였고, 범월봉도 말하기를,‘용처럼 서리었고 코끼리의 코처럼 말렸구나. 안고 돈 것이 정이 있는 듯하여 멀고 가까운 것 없다. 돌고 안은 것이 분명하게 먼저 보여 오므린 발톱과 감추어진 어금니에 배반함이 없다’하였습니다. 또‘비뚤어지고 기울어진 것이 왼편에 있으면 좋지 못한 것이 된다’하였습니다. 모두 마땅히 분변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현론]에 말하기를,‘산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귀격을 본 따 첨가시키는 것이다’하였습니다. 밖으로 향한 줄기에 대해 특히 유사에게 명하여 손질을 하도록 하시고, 산 안쪽으로 향한 곳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어 좋은 기를 배양하게 하십시오.”
이 자리를 잡았던 이양달 역시 능의 왼쪽에 문제가 있음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이용의 주장을 따르도록 임금에게 아뢴다:

“수구에 큰산이 눌러 막으면, 작은 산은 비록 돌아다보지 않아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서전]에 말하기를,‘혹이 있으면 떼어 버리라’하였습니다. 이 작은 산은 연한 가지와 남은 생기가 바깥으로 향한 것이니, 마땅히 한식에 파헤쳐 버리고 소나무를 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나 이양달이 잡은 헌릉 자리가 본질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여 30여 년 동안 논쟁을 유발시킨 것은 이양달의 후배 풍수학인 최양선이다.

이양달의 한계
고려와 조선 양조에 걸쳐 천수를 누리면서 국가의 상지사로 활동하면서 서운관 판사직까지 오른 이양달의 개인적 삶은 영예로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풍수지리는 묘지 풍수에 한정된데다가 이론 풍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는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고 자기소리를 전혀 내지 못하여 자기식 풍수관을 견지하던 후배풍수 최양선이나 목효지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  註 : 조선 태종 때의 풍수학자, 서울의 북문인 숙정문을 지맥손상을 이유로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시킨  장본인이다.

출전: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에서 축약

    http://fahl.hanyang.ac.kr/zb41/bbs/

 
관련


cafe.daum.net/pumassy/2MUq/162   집짓기 품앗이






www.dtnews24.com/news/article.html?no=275307    디트뉴스24

한양, 조선 최고의 명당이 되다                                 대전·충청 1등 신문 디트뉴스24

[권선정의 풍수스케치]신도안, 조선 최초의 수도 ④

권선정2007.10.11 12:39:41

  
사진 1. 도성도(동국여도 19세기)

신행정수도를 둘러싼 논란 조선 개국 초와 닮은 꼴

조선 개국 이듬해인 1393년 12월 신도안에 대한 하륜의 도읍 불가 상소가 받아들여짐으로써 조선의 국도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륜이 신도안의 대안처로 제시한 현재의 신촌 일대 ‘모악(母岳, 무악)’마저도 국도로 적절치 않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 사이 국도 후보지로 거론되었거나 정해졌던 장소만 하더라도 한두 군데가 아닌데, 처음 거론된 한양(현 4대문 안)에서부터 개경, 신도안, 모악 등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국도가 될 만한 장소들은 거의 등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장소 중 어느 한 곳도 국도로 정해질 정도의 풍수적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최초의 국도로 정해졌었던 신도안이 폐기되고 하륜이 제시한 모악 마저 국도로 정해지지 못한 상황에서 여러 신하들이 심지어 황해도나 강원도 등지에서 국도 후보지를 찾는 웃지못할 해프닝까지 만들게 된다.

서운관원이 와서 도읍될 만한 곳을 아뢰었다. “불일사(佛日寺)가 제일이고 선고개[鐥岾]가 다음은 됩니다.”(『태조실록』 3년 7월 2일 기해조)

도평의사사에서 선고개에 가 천도할 땅을 보니, 그곳이 좋지 못했다. 이에 우복야 남은은 이양달을 꾸짖었다. “너희들이 지리의 술법을 안다는 것으로써 여러 번 맞지 않은 곳을 도읍할 만하다고 하여 상총을 번거롭게 하니, 마땅히 호되게 징계하여 뒷날을 경계해야겠다.”(『태조실록』 3년 7월 4일 신축조)

기존 후보지 폐기, 황해도 강원도에서까지 후보지 찾아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수 있었겠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국 직후 옮기려 했던 한양도 개경만 못하다하여 포기되었고, 그런 개경조차 뛰어넘는 막강한 풍수적 길지로 등장한 신도안마저 공사가 진행되다 폐기되었으며,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모악에서부터 기타 후보지들도 국도로 적절치 못하다는 결론이 난 상황에서 과연 어떤 길을 제시하고 선택할 수 있었겠는지 말이다.

이미 최초의 국도로 정해졌었던 신도안의 등장으로 인해 한양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던 개경조차 더 이상 국도로 유지될 장소는 못된다는, 즉 개경으로부터의 천도가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개경이 아닌 어디로든 반드시 국도는 옮겨져야 한다. 말하자면 풍수상 ‘한양도 안 되고 개경도 안 되며 신도안도 안 되는’ 상황에서 개경이 아닌 다른 장소로 반드시 천도는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쉽게 떠 올릴 수 있는 방안은 크게 두 가지 일 것이다. 우선 지금까지 살핀 후보지를 뛰어넘는 이상적인 장소를 찾는 방법이 하나일 테고, 아니면 기존에 언급된 장소 중에 어떤 식으로든 한 곳을 다시 정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전자의 방법은 더 이상 나올 후보지조차 없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기존에 거론된 장소 중에서 새로이 선택하는 방법뿐인데, 이것 또한 문제가 적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한 나라의 국도는 곧 그 나라 전체 땅 중 최고의 명당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풍수상 한양도 안되고 개경도 안되며 신도안도 안돼 

당시는 국도를 포함한 도시나 마을, 주택, 서원, 사찰, 묏자리 등의 입지를 결정할 때, 풍수를 하나의 공통된 약속(인식체계)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풍수를 인간의 공간적 행위와 관련된 하나의 코드(code), 즉 공통의 약속체계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제시했었다.(「풍수는 코드다」편 참조)

마치 현재의 입장에서 공간적 의사결정을 할 때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작동시키는 공통의 약속체계처럼 말이다. 현재는 흔한 것이 인간과 관련된 땅이나 편한 쉼터가 되어야 할 집,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심지어 조상의 묏자리나 납골당까지 ‘부동산(不動産)’이라 하여 주로 경제적 관심의 대상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한양, 개경, 신도안 등의 국도 후보지들이(신도안 이후 등장하는 땅들은 둘째 치고) 도읍으로 정해지지 못했거나 폐기되고 하는 것은 이들 장소가 풍수상 조선 최고의 명당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든 명목적으로든 말이다.

그럴 때 이미 거론된 장소 중 하나를 국도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풍수적 의미를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 1394년(태조 3) 8월 한양이 국도로 최종 결정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를 반증해준다. 이는 한양이 조선 최고의 명당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미 조선 개국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시도된 태조의 한양 천도계획이 포기되고 말았던 사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한양은 전 왕조의 국도였던 개경보다도 풍수상 떨어지는 땅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개경을 능가한다 하여 조선 최초의 국도로 정해졌던 계룡산의 신도안까지 있었다.

천도는 기정사실, 풍수적 의미 입혀 명당으로 만들다

여기서 잠깐 아주 간단한 수학적 추리를 시도해 보자. 어려운 수학적 계산을 할 필요도 없이, 간단히 등호(=)나 부등호(<, >)를 통한 크고 작음을 구별하는 수준에서 한양, 개경, 신도안의 풍수적 등급을 따져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옴을 알 수 있다. 한양 결정 전후 시기『태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성립될 수 있는 명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A. 개국 직후 조선 최초의 천도후보지였던 한양보다는 전 왕조의 국도인 개경이 낫다하여 개경으로 국도를 유지했었다.
B. 그러던 것이 개국 이듬해 신도안이 등장하고 곧 조선 최초의 국도로 정해져 일 년 남짓 도읍역사가 진행되다 폐기되었다.
C. 신도안 도읍 결정은 같은 장풍국(藏風局)의 명당으로 신도안이 개경을 능가함을 의미하며, 이후 개경으로부터의 천도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우선 개경과 한양간은 ‘개경>한양’으로, 그리고 신도안과 개경간은 ‘신도안>개경’의 부등호 관계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럴 때 이 세 장소를 함께 관계 짓는다면 ‘신도안>개경>한양’이 된다.

 다시 말해 그 사이 국도로 유지되었거나 거론되었다가 포기된 신도안, 개경, 한양을 놓고 볼 때 신도안이 제일의 명당이고 그 다음이 개경, 그리고 한양이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3등이었던 한양이 다시 조선 최고의 명당이 되어 국도로 정해진 것이다. 즉, 3등이었던 한양이 포기된 지 만 2년 만에 다시 1등의 명당으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그 사이 한양의 산수조건이 지진이나 대규모 지형 변화 작용에 의해 이전과 엄청나게 다를 정도로 바뀐 것도 아니다. 결국 한양의 물리적 입지조건은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한양을 최고의 명당으로 만들어 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한양에 대한 풍수적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쉽게 말해 하나의 코드(약속체계)로 풍수를 공유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풍수와 관련된 ‘말 바꾸기’, ‘입장 바꾸기’를 통해 한양을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잠깐 실록을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림 2. 국회의사당                                              그림 3. 헌법재판소

장소 변함없는데 말 뒤집기는 과거만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이어져야 할 관심이 이러한 ‘바꾸기’, ‘뒤집기’의 과정을 통해 왜 한양을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경과 신도안 이후 새로운 국도 대안처가 없는 상황에서 태조 이성계(또는 천도세력)의 궁극적 의도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살핀 결과가 아닌가 싶다.

즉, 태조는 이미 개국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한양 천도를 명했었다. 비록 그것이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 세력과 한양 천도를 시도한 신흥 세력 간의 현실적인 힘 관계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는 태조가 원했던 천도 대상지가 결국 어디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럴 때, 이제 개국 초와는 달리 개경으로부터의 천도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태조가 처음 제기했었던 한양을 다시 주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한다. 따라서 제 3위의 명당이었던 한양을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만들어 국도로 정하기 위해서는 한양의 주어진 산수 조건보다는 기존에 표현되었던 말이나 입장을 바꾸는 작업이 실제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 바꾸기, 입장 바꾸기를 통해 자신들이 판단하고 결정했던 것을 언제 그랬냐는 듯 뒤집어 버리거나 포기하는 모습이 비단 조선 초 국도문제와 같은 과거 어느 사건에서만 확인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시간상으로 볼 때 조선 초 국도 이전 상황과 거의 유사하게 전개된 몇 해 전 신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사람들이 떠오른다. 특별법이란 지위까지 부여되었던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의 제정, 폐기와 관련된 여러 과정들, 사람들이 분명하게 있지 않은가?

신행정수도 이전 계획의 폐기 이후 등장한 행복도시(행정복합도시)란 이름의 뭉게구름이 그나마 얼마 남아있지 않은 기억조차 삼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권선정 : 서울대학교 및 동대학원,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지리학 전공(교육학박사). 현재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저서로 '풍수 그 삶의 지리, 생명의 지리'(공동), '대덕의 풍수', '풍수로 금산을 읽는다'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