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의 묘소

2017. 11. 16. 09:02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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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의 묘소

남연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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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묘


   안동 김씨 세도에 숨죽이며 살던 흥선군은 가야사를 불태우면서까지 2대 천자지지에 아버지의 묘를 썼다. 1868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두 차례 도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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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흥선군의 형제들은 왕실의 친척으로 한직(閑職)에 있었으며, 흥선군은 안동 김씨의 세력에 몸을 사리고 파락호 생활을 했다. 1846년 남연군묘를 이장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는데 《매천야록》에 따르면 흥선군이 지관을 따라 덕산 대덕사(가야사)에 가서 고탑(古塔)이 앉은 자리를 보고는 돌아와 재산을 처분하여 돈을 마련하는데, 그 돈의 절반을 승려에게 주고 절을 불사르게 해 이 터를 얻었다고 한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웠던 죄책감에 가야사의 동쪽 산에 새 절을 창건하고 ‘부처님 은덕에 보답하고 속죄한다’는 뜻으로 보덕사(報德寺)를 지었다.



                                        보덕사
보덕사





   이때 효명세자의 빈이며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낼 방법을 찾고 있었고 마침 흥선군이 신정왕후의 조카 조성하와 교류하고 있었다. 당시 신정왕후의 친정은 한성부 북부 가회방(종로구 재동)에 있었는데 이 집 옆에는 백송이 한 그루 있었다. 이 백송은 가꾸는 이의 영화(榮華)에 따라 그 껍질이 하얘지는 정도가 달랐다고 한다. 이 무렵 흥선군은 이곳에서 조성하를 만나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백송 밑동이 유독 하얘진 것을 보고 계획이 성공하리라 확신했다고 한다.


재동 백송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로 밑동이 하얗고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진 것이 특징이다. 현재 헌법재판소와 윤보선가 사이에 있다. 천연기념물 제8호.






노락당 편액은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고

대원군 시절 형조, 병조, 공조판서를 역임한

신헌의 글씨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