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7. 12:22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이야기 제1대 태조 에피소드 왕조에피소드 / 조선왕조실록
2013. 10. 27. 18:26
http://blog.naver.com/joseon_500/80200584016
예전 블로그에 쓴 글인데 통합하는 중입니다. 예전 꺼에 수정, 편집도 해서 좀 더 보강합니다.
※ 웃자고 하는 소리도 있으니 목숨 걸고 태클은 사양. 그러나 너무 뜻이 다르게 해석되는 부분이 있으면 댓글 피드백 감사~
※ 조선초기 직급체계는 정리가 잘 안됨, 하륜대감 때문임. 하륜대감이 거의 한달에 한번씩 관제개편하는 바람에 탄핵까지 받을 정도...
※ 시간 날 때마다 계속 자료는 업데이트함.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이야기 제1대 태조 에피소드
□ 처음 나라를 세울때 나라 이름 짓는 것도 큰일이었슴.
조선과 화령(和寧, 뒤에 영흥) 두가지의 안이 나옴.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작명해 달라고 함.
중국 황제... 조선(朝鮮) 땅은 예전에 기자(箕子)가 세운거 아님? 하며 당연히 조선으로 하는 것으로 결정남.
중국이 세운 나라 기자... 화령은 이성계가 태어난 곳의 지명을 빌려온 듯함.
□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이성계 편을 들기는 하였지만 벼슬도 하지 않고 시골 가서 살고 있었음.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벼슬을 주는데 이성계에게 충성해서 한자리 하던 문하시중 배극렴(裵克廉)을 보고
목은 이색이 일갈을 하며,
"야이! 말장사꾼 같은 놈(마고,馬賈)"
이라고 고려의 신하로써 충절을 꺽은 자들에게 훈훈하게 욕 시전.
□ 고려의 우왕과 창왕을 태조가 죽였다고 사초에 기재한 사관을 태조가 친히 국문함.
나중에 곤장 100대 때리고 재산도 몰수를 하고 울진으로 귀양 보냈으나 지은 죄가 있는 태조는 얼마 후 다시 이 사관을 다시 관직에 등용했다 함.
□ 개국초기 이성계는 신하들의 건의로 사관(史官)을 옆에 두고 사초(史草)를 기록하게 하였슴.
고려때 한가닥 하던 신하들이 우리도 임금 옆에 사관이 임금 말씀 기록 좀 해야 뽀대 나지 않겠음?이라고 이야기 함.
그때까지는 뭐 태조 이성계도 사관과의 트러블은 없었는 듯.
임금이 온천가는데도 사관이 따라가서 사초를 쓰기도 하였으니...
즉위 말년 이성계가 지금까지 모아둔 사초를 보자고 함.
위에 우왕, 창왕을 태조가 죽였다는 그런 이야기 막 다시 적어 놓은게 아닌지...
"이 쉥키들이 혹시 내 욕 많이 적어 놓은거 아냐?"
몹시 궁금 하신 듯.
사관들과 신하들 몇몇을 제외하고 일제히 반대함. 그래도 보자고 함.
또 반대함. 그로부터 얼마 후 정종 임금 즉위 초 경연자리에서 사관들, 정종 임금의 쿨한 명령으로 다 쫓겨남.
□ 하루는 임금이 온천으로 목욕 가는 길.
가만히 보니 임금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던 대간(臺諫)들이 많이 따라 왔어 심기가 불편함.
대간들 그냥 돌아가라고 하기는 뭣하니까 대간들 수행하는 서리들이 너무 많다고 서리들 다 돌아가라고 함.
"야! 니네들이 말타고 오면서 곡식 밟는거 때문에 백성들에게 미안하자나. 그냥 한줄로 다시 돌아 가거라!!!"
원래 수행 비서들이 없으면 이불 보따리며 타고 가던 말먹이 같은 거 줄 사람도 없고, 조선의 선비들은 시체나 다름 없으니..ㅎㅎㅎ
그때 대간들이
"수행 비서 없어도 우리는 임금을 따라 간다~!!!"
라고 어거지를 피움.
도승지가 태조 임금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하고 몇마디 하다가 욕도 얻어 먹고, 결국은 임금이 이김.
몇몇 제외하고는 다 도성으로 돌아가게됨.
□ 하루는 임금이 포도를 먹고 싶다하여 각처에 명을 내림.
발빠른 관리 하나가 잽싸게 포도를 임금께 바침, 그 관리 그날로 관직 2~3단계 레벨업 됨.
이틀 있다가 구해 바친 관리는 쌀 10석 하사... 동작 빠르면 생기는 것도 다름.
□ 태조때는 스님들이 거의 잉여 취급을 많이 받았슴.
궁궐 신축에 백성들을 동원하면 농사에 차질이 생긴다 하여 기술 좋은 스님들을 마구마구 동원하여 일을 시킴.
스님들 일시키며 일당으로 쌀도 주고 옷도 주고 하니 불교를 좋아하던 태조의 뜻과도 딱 맞아 떨어짐.
□ 경복궁 북쪽 북악산에 성벽을 쌓은 일에는 북쪽 변방 지역을 제외한 전국의 민간인 기술자 11만 8천명을 동원함.
궁궐짓는 것 보다는 단순노동이라 민간인들을 많이 동원한 듯.
이 성벽이 요즘 북악산의 '서울성벽'이라고 부르는 곳임.
북악산은 원래 백악(白岳)산으로 불렸슴.
일제시대때 쪽바리에이션 쉐끼들이 북쪽 북자로 북악산이라 개명 하였다함.
왜냐하면 북쪽 북(北)자의 뜻이 도망가다의 뜻도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함.
아무튼 쪽바리 쉐끼들 어디가도 그지 같은 짓만 골라하는 개쉥키들임.
□ 조선시대, 특히 초기 때 백성들을 동원하여 노역을 시킬 경우 전부 농한기인 겨울에 시킴.
여름과 가을은 농번기라 하여 가급적이면 국가의 노역을 시키지 않음.
겨울에도 눈이 오거나 아주 추울 경우 작업중지시킴.
농사철에는 임금도 성밖으로 잘 나가지 않음. 임금 행차 때문에 곡식을 훼손한다거나 농사일로 바쁜 백성과 고을 수령들이 영접을 나와야 한다는 이유임. 조선의 왕들은 진정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종결자였슴.
□ 태조 5년에 한양의 성벽이 어느정도 완성됨.
총길이는 18.5km 정도 되고 가장 낮은 곳의 높이가 4m, 가장 높은 곳이 8m 정도 되었다고 함.
□ 조선 초기 효녀 도리장.
한양의 성벽 쌓는 노역에 끌려 온 전남 장성의 한 촌부. 병이 들어 공사장 근처의 숙소에 들어 눕게됨.
임금이 농사철이라 하여 백성들을 돌려 보냈으나 이 촌부는 병 때문에 집에 못감.
고향에 있던 이 촌부의 딸이 한양에서 돌아온 고향 사람들에게서 이 소식을 들음.
"울 아부지 혼자 병들어 돌아가시는건 아닌가...ㅠㅠ"
이 용감하고 효성 지극한 딸이 무려 남장으로 변장하여 한양까지 아버지 찾으러 감.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와 상봉하여 극진한 병간호 끝에 아버지를 완쾌시켜서 고향으로 모시고 감.
임금이 효녀라 칭하고 무명 몇필을 하사하심. 조선왕조실록 최초의 효녀로 기록되는 영광을 거머짐.
□ 태조는 한양의 성벽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농번기인 음력8월에 전국에서 7만9천명을 축성 노역에 동원하기도 함.
물론 동원된 백성들은 유급임.
□ 태조는 성벽공사에 사활을 거는 모습이 자주 보임.
성벽공사를 담당하는 최하급 관리가 일꾼들과 함께 성벽공사에 쓰일 큰 돌을 옮기다가 어느 집 골목에서 골목이 비좁아 돌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슴. 할수 없이 골목의 집 담장을 약간 허물고 돌을 옮기는 중에 집주인 뛰어나옴.
이 집주인은 고려 말기 고급관리였슴.(퇴직 고위공무원)
"너 뭐하는 놈인데 우리집 담장을 허무냐?"
"성벽 쌓는 돌 나르는 중인데요... 주절주절..."
"어라. 이 놈봐라... "
하고는 퇴직 공무원이 돌 나르던 공무원을 줘 패버림.
눈탱이 맞은 하급관리는 졸라 열받지 않겠음. 다시 성벽 쌓는 관청의 상급관리에게 일러 바침.
분기탱천한 관리
"겨우 퇴직공무원 주제에 임금의 명을 받은 군사를 패?"
바로 임금에게 또 일러바침...
태조 임금. 고려때 한가닥 하던 퇴직 고급공무원이라 다른 처벌은 못내리고...
" 흠... 니네집 담장 고쳐줄께. 대신에 니네집 종 20명만 일단 보내라. 성벽 쌓는 일 마무리 하고 니네집도 고칠께..."
그래서 종 20명을 한양의 큰 대문 만드는 공사 끝날 때까지 무급으로 부려먹었다고 함. 물론 이 20명이 일하면서 생기는 숙박비와 밥값은 모두 퇴직 공무원 부담해야 함.
이 퇴직 고급관리는 얼마후 이 사건 때문에 괘씸죄로 감방에 갇혔다가 열흘만에 풀어줌.
그런데 이때 그 퇴직 공무원의 노비들이 만든 큰 대문이 남대문임...
□ 임금 명으로 수릉(임금이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의 비석을 옮기던 중 비석이 넘어지는 바람에 인부 89명이 골절, 타박상들을 입기도 함. 사고 규모로 봐선 피라미드 만드는 줄 알겠네...
□ 태조때는 지금의 태국과도 교류가 있었슴. 다만 맨날 쪽바리에이션 해적한테 중간에서 배 빼앗기고 사신 죽고 끌려가고 등...
□ 태조 5년(1396년) 6월. 모든 관청의 공무원들의 복장 규정을 통일하고 또 사모(紗帽)를 쓰고 다니라고 함.
이때부터 항상 공무수행 중에는 사모를 쓰고 다니는 역사와 전통이 생김.
사진출처 虎尾許居士의 블로그
□ 조선초기때 중국사신은 대부분 조선사람이었슴.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돌아갈 때 수행비서로 우리나라 내시(고자)를 몇사람 붙여서 보냄.
그러면 중국에서 중국말도 잘 배워서 다시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 보낼 때 우리가 보냈던 내시를 뽑아서 보냈고 이 사신이 몇 차례 우리나라와 중국을 왔다갔다 하여 늙어 정년 퇴임할 나이가 되면 이 고자 사신들이 조선으로 영구적으로 복귀시킴.
그런데 이 사신을 했던 내시들이 고향땅에서 행패가 엄청났다고 함.
"나 본토 물먹은 사람이야"
이 자식들이 행패 부리면 고을 수령은 물론 임금 조차도 크게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고 함.
□ 태조때 각 지방 군사의 수는 보병, 기병, 수군 등을 합하여 총 20만 8백명.
□ 무인 출신인 태조, 임금으로써 공부하는게 당연히 싫었을 터...
가끔 신하들이 태조한테
"공부 좀 하고 사셈"
이러고 욕먹고 다녔슴.
또 한 달에 대여섯차례 있던 조회시간에도 불참하기 일수였던 태조 임금.
신하들이
"나이에 안맞게 아침잠이 많으시구려~. 조회는 꼭 나오셔야 함요^^*"
이런 소리도 여러차례 들었음.
□ 임금이 아침 조회를 하고 있는데 신하 한 명이 무려 앉아서 코골며 잠들어 버림.
탄핵을 받았지만 개국공신이고 나이도 많다고 하여 없었던 일로,,,
□ 태조때 노비의 몸값(奴婢)
그 전까지는 품질(?) 좋은 노비의 몸값도 오승포 150필 정도임.(상급오승포 1필이 쌀2말정도임.)
질 좋은 말은 오승포 4~500필. 사람값이 말값보다 저렴하여 임금이 아예 노비의 가격을 일괄적으로 정함.
남,여 구분 없이 15~40세 사이는 오승포 400필, 14세 이하 41세 이상은 3백필.
노비가 도망가서 주인이게 노동을 제공하지 못한 경우 벌금 형식으로 1개월에 포3필. 이자 없었다고 함.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이야기 - 조선의 개국공신 뒷이야기들 이야기 / 조선왕조실록
2013. 10. 20.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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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도 회군과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 사람들 중 후손들 까지도 편안히 지낸 인물들은 몇 안됨.
조선 개국 후 정도전과 남은이 숙청된 1차 왕자의 난이 있었고 또 박포의 난인 2차 왕자의 난이 있었음.
그리고 태종이 집권하면서 외척 세력 견제 및 개국 공신 세력 견제 등으로 많은 인물들이 숙청을 당함.
그런저런 인물들 위주로 살펴봄.
□ 개국 공신(開國功臣) :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공신.
정사 공신(定社功臣) : 1398년(태조 7년)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공신. 이때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숙청됨.
좌명 공신(佐命功臣) : 1400년(정종 2년) 박포의 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
8년 동안 공신이 될 기회가 3번이나 됨.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등은 개국, 정사, 좌명 공신 트리플 크라운 달성함.
물론 선조~광해군 때 약 24년간 9차례나 공신이 책봉되었던 경우도 있었음.
태조 2년에는 1388년의 위화도 회군 당시 공을 인정 받아 회군공신 1등으로 오름.
심덕부의 아들 심종(沈淙)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딸 경선 공주(慶善公主)와 결혼도 해서 종친이 됨.
또 심덕부의 아들 심온(沈溫)은 태종과 사돈이 되는데 심온의 딸이 세종대왕의 부인인 소헌 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임.
그러나 세종 즉위년인 1418년. 태종의 외척 세력 배척을 통한 왕권 강화책에 따른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집안이 박살남.
□ 요즘 드라마 정도전에서 배장군으로 나오는 성산백(星山伯) 배극렴(裵克廉)
개국 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계급서열 3위 정도?)의 자리도 받았으며 좋은 세상 맞이했으나 조선이 개국하고 4개월만인 1392년 11월, 68세의 나이로 아들도 없이 사망함.
□ 배극렴과 같이 위화도 회군을 했던 변안열(邊安烈)
드라마 정도전에서 변장군으로 불리면서 조민수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출연.
오래 살았다면 이 양반도 조선 개국 후 떵떵거리면서 사셨을 분임.
1389년 말에 발생한 이성계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 당함. 다행히 나중에 회군 공신 2등에 책록되어 명예회복함.
중국에서 귀화하여 원주(原州) 변씨(邊氏)의 시조 할아버지임.
(좌측 변안렬, 우측 배극렴)
□ 고려말 신진 사대부들의 정신적인 멘토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드라마 정도전에서 상당히 비중있는 역활로 출연하던데...
윤이와 이초의 사건으로 귀양만 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공양왕 즉위 후 이성계 쪽으로 여론을 몰아줬다면 조선 개국에 동참해서 아마도 개국 공신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었던 인물인데 말년에 절에서 쓸쓸히 죽음.
정몽주가 살해당할 때 다행히 귀양 정도만 갔다가 풀려나고 전국 각지로 유람이나 하고 다님.
개국 당시 이성계가 부르지도 않았고 배극렴을 가장 높은 신하의 자리에 올려 놨던걸 뒤늦게 듣고는 "개국하던 날 어찌 저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저에게 만일 알렸다면 읍양(揖讓)하는 예를 베풀어서 더욱 빛났을 것인데, 어찌 마고(馬賈)로 하여금 〈추대하는〉 수석이 되게 하셨습니까?"라고 이성계에게 말함.
여기서 마고란 말장사꾼이란 뜻임. 벼슬하는 선비들 한테는 엄마욕 정도로 심한 욕임.
그런데 이 마고는 배극렴을 보고 하는 소리였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뒤라...
다행히 이색의 손자인 이계전(李季甸)은 단종~세조 시절 정난 공신(靖難功臣)과 좌익 공신(佐翼功臣)에 봉해지며 가문을 다시 부활 시킴. 역시 권력은 줄을 잘 서야 함.
□ 회군공신에 봉해진 병조 전서 지제교 동지춘추관사(兵曹典書知製敎同知春秋館事) 윤소종(尹紹宗)
요즘 드라마 정도전에서 좀 비중 있게 나오는 듯 한데...
조선 개국 1년 뒤인 1393년에 병을 얻어 49세의 나이로 사망. 좀 오래 살았다면 대대손손 잘 살았을 듯.
다행히 아들 윤회(尹淮)는 세종 임금때 당당히 과거시험을 통해 공무원이 되어 나중에 예문 대제학(藝文大提學)까지 하고 죽음.
□ 1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 세력에게 죽은 정도전, 심효생, 남은 등이 있음.
그중에서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의 동생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는 원래 형제간에 사이가 대단히 좋지 않았음.
그래서 1차 왕자의 난 당시에도 형과 같이 처형당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고 귀양 정도만 갔다가 돌아와서 태종 때는 우의정까지 했음. 이 남재의 손자인 남휘(南暉)는 태종의 네째딸 정선 공주(貞善公主)와 결혼하였고 정선 공주의 손자가 바로 예종 때 유자광 때문에 역모로 몰려 죽은 남이(南怡)임.
참고로 남이의 역모사건때 같이 주모자로 몰려 죽은 강순(康純)은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버지 강윤성의 증손자임.
□ 개국 1등 공신에 책록된 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
조인옥의 장남 조뇌(趙賚)의 딸이 나중에 태종 임금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가기도 했음.
조뇌는 공(工)·병(兵)·호(戶) 3조(曹)의 참판(參判)과 경기·강원·평안도 도관찰사(都觀察使), 죽기전에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까지 하는 등 잘 나갔음. 그러나 조뇌의 아들, 그러니까 조인옥의 손자들은 단종 임금 시절 계유정난때 안평대군 쪽으로 줄을 섰나 봄. 가문이 완전히 초토화됨.
□ 개국 공신 3등에 봉해진 민여익(閔汝翼)
민여익은 세종때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여천 부원군(驪川府院君)에 봉해지며 자손대대 잘 지낼수 있었음.
그런데 보통 어른이 되고 벼슬 좀 하면 이름 대신에 자(字)를 붙이는게 옛 관례임.
공자(孔子)의 자는 중니(仲尼). 민여익의 자는 아쉽게도(?) 도울 보(輔), 갈 지(之). 보지(輔之)임. 후손들에겐 좀 그럴 듯...
뭐 한가지 위안을 삼자면 세종 임금때 개성부 유후(개성 시장 정도?)까지 하시다가 죽은 김자지(金自知)란 할배도 있었으니...
□ 개국 3등 공신인 한상경(韓尙敬)
세종때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까지 하다 죽음.
한상경의 후대의 직계 자손중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라고 있음. 한준겸의 딸 한씨(韓氏)는 인조(仁祖) 임금과 결혼해서 소현세자와 효종(孝宗)의 친엄마가 되는 인렬왕후(仁烈王后) 한씨임.
□ 개국 공신 1등에 책록된 평원군(平原君) 조박(趙璞)
그는 태종 임금과 손위 동서지간임. 태종의 장인인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맏딸이 조박과 결혼하였고 여동생이 태종과 결혼한 원경왕후 민씨임.
예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좀 가볍고 무식하고 태종과 동서지간이라는 프리미엄으로 먹고 살았던 인물로 그려졌으나 사실은 조선 초기 유명했던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 대감 정도의 학식과 무게감이 있던 인물이었음. 주관도 뚜렷하여 민생 안정을 위해 임금의 잘못된 명령을 거스르다 귀양도 가곤 했던 인물이었음.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정종 임금이 밖에서 낳은 자식이라고 주장하던 불노(佛奴)와 가의 궁주(嘉懿宮主) 유씨(柳氏)의 사건으로 인해 조박이 죽고 난 뒤 탄핵 받고 녹권(祿券, 공신 책록 당시 받은 재산과 논밭, 그리고 퇴직 공직자로써 받는 연금 같은거)을 추탈(追奪) 당하고 자식들이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 남.
그리고 조박의 외아들 조신언(趙愼言).
아버지 조박 덕택에 2차 왕자의 난(박포의 난, 방간의 난) 직전에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의 딸에게 장가 듬.
그런데 뭐 난리날 줄 알고 결혼했을까...
2차 왕자의 난 이후 방간은 귀양을 간 상태. 이때 조신언이 장인 영감 적적할 것 같아서 이리저리 거짓말 좀 해서 충주에 살던 규수와 방간의 중매 역활을 해서 결혼하게 만듬. 역적질 하다가 귀양간 사람이 귀양지에서 결혼하는 음경같은 대참사가 발생함.
덕분에 조신언은 귀양을 가게됨. 공신으로써 누리던 혜택들도 전부 사라짐.
세종 임금때 조신언의 아들이 과거 시험 좀 치르자고 했나봄. 세종 임금이 역적의 자손이라 해서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해 버렸고 그후 후손들은 역사 속에 묻혀 버림.
□ 개국 공신 2등과 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정사 공신에도 2등이 책록된 장담(張湛).
개국 2등 공신에 정사 2등 공신이니 뭐 이제 벼슬 안하고 집에 누워만 지내도 자손대대로 먹고 살 걱정은 없는 상태임.
그러나 2차 왕자의 난 당시 장담의 집앞을 지나가던 이방간의 패거리에 붙들려 끌려 다니다가 이방간과 한패로 몰려 난이 진압된 후 반란군으로 몰려 곤장 맞다가 죽음.
세종때 복권 되기는 커녕 공신에서 완전히 제외되고 공신으로 책봉한 문서 등은 불살라 버림.
□ 개국 공신 2등에 책록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정용수(鄭龍壽)
태조 임금 시절 집무실 옆방에서 바둑두다가 들켜서 파직당했다가 복직.
태종 2년 조사의의 난 때 태조 이성계를 호위하여 동북면으로 다니다가 본의 아니게 반란군에 동참하게 된 듯.
공신록에서 삭탈당했다가 세종 19년에 복권됨. 물론 당사자가 죽은지 한참 지난 뒤임.
장담(張湛)과 비슷한 케이스였으나 복권되어서 그나마 다행...
□ 개국 공신 2등에 책록된 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
태조 7년에 죽었는데 그 아들은 이조판서까지 하다 죽은 홍여방(洪汝方)임.
홍여방의 딸이 청주(淸州) 한씨(韓氏) 한확(韓確)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 세종 대왕의 서자인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과 결혼한 청주 한씨이며 또 한 명의 딸자식은 바로 도원군(桃源君)에게 시집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임.
소혜왕후 한씨는 그 유명한 성종 임금의 엄마인 인수대비(仁粹大妃) 되겠음.
□ 회군 공신 3등에 책록된 개성 윤(開城尹) 남성리(南成理)
1398년 태조 7년 한양 성곽 공사 당시 감독관이었음.
태조 임금이 고생한다고 술상봐 줬는데 그날밤에 숙소에 불이남. 술에 취해서 자다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타죽었다고 함.
□ 개국 1등 공신에 봉해진 익화군(益和君) 김인찬(金仁贊)
조선 개국 후 불과 몇일만에 죽음. 아들도 없이...
개국 공신 중 곽충보(郭忠輔)라는 영감님이 있었는데 젊은 시절부터 이성계를 모셨고 위화도 회군 당시 개경에 선발대로써 대궐에 제일 먼저 진입하여 최영 장군을 잡아낸 할배임. 그런데 일찍 죽은 김인찬의 아내가 좀 미인이었나 봄. 곽충보와 눈도 맞고 배도 맞았다가 적발됨. 물론 곽충보는 공신이라는 이유로 간통 사건 후 파직되었다가 한달도 안되어서 복직함.
조선왕조계보(가계도).jpg 왕조가계도 / 조선왕조실록
2014. 7. 27. 21:10
http://blog.naver.com/joseon_500/220073521126
2014. 6. 16. 22:44
http://blog.naver.com/joseon_500/220032428471
꼬장왕(王) 태조 이성계
태조 1년(1392 임신) 12월
태조 임금이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 조박(趙璞)과 경상도 안렴사 심효생(沈孝生)이,
백성으로서 상복(喪服)을 입은 사람이 절에 가서 부처에게 공양(供養)함을 금지한다는 말을 듣고,
“이색(李穡)은 세상에서 큰 유학자인데 이도 또한 부처를 숭상하였지 않음? 그런데 저 자식들은 무슨 글을 읽었길래 부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은가?”하고는 어이 없어 하심.
태조 1년(1392 임신) 윤12월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정총(鄭摠)에게 명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새로 찍어 내고 그 서문을 지어 올리라고 함.
성리학자인 정총이 불만을 표하며,
“전하께서 어찌 불사(佛事)에 정성껏 하십니까? 청하옵건대, 믿지 마옵소서.”
태조 임금이 또 이색(李穡)을 들먹이며,
“이색(李穡)은 유학(儒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는데도 불교를 믿었으니, 만약 믿을 것이 못된다면 이색이 어찌 이를 믿었겠는가?”
정총,
“이색은 세상에서 학식이 높은 선비가 되었는데도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입니다.”
태조 임금
“그렇다면 네가 이색보다 더 잘났다는 말이냐? 입 다물어라.”
쿨가이 태조 임금이심.
태조 임금의 학문에 대한 기준은 '이색(李穡)만큼 아는 사람"과 '이색보다 못한 사람' 두가지 기준이었나 봄.
태조 2년(1393 계유) 1월
태조 임금이 간만에 사냥 나가심. 한참을 돌아 다니시다가 그만 한강(漢江) 가에서 몸살이 나심.
무려 4일 동안을 머물렀다고 함. 그런데 그동안 경호원들이 주변의 인가(人家)에 가서 밥 내놔라, 니네 딸 많이 예쁘네~♥ 등등
일부 군사들이 민폐를 끼치고 다녔나 봄.
태조 임금이 그 군사들을 붙잡아서 동네 한복판에서 피해자들 다 구경하라 그러고 신나게 벗겨 놓고 곤장 때리심.
찰싹찰싹 제대로 데미지가 들어가는 볼기짝을 보며,
"오호~ 이 놈 궁둥이가 찰지구나~^^"
태조 2년(1393 계유) 3월
잠잠하던 남해안에 왜구들이 다시 개지랄을 떨고 다니기 시작했나 봄.
예전 같으면 태조 임금 본인이 출전해서 쪽바리 생퀴들 화살 한대에 꼬꾸러트리는 건데...
아무튼 삼도 절제사(三道節制使)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 전 문하 평리(門下評理) 박위(朴葳), 최운해(崔雲海)를 양광도(楊廣道)에 보내고,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을 경상도에 보내고, 태종 임금과 전 전주 절제사(全州節制使) 진을서(陳乙瑞)를 전라도에 보내어 왜구(倭寇)를 막으라고 하시면서 끝으로 두 주먹을 움켜 쥐시며 한마디 하심.
“니네들 나가서 왜구 못 때려 잡으면 두번 다시 나 볼 생각 말어라.”
태조 4년(1395 을해) 3월
태조 임금이 간만에 피로도 풀겸 평주(平州)의 온천(溫川)에 놀러 가실려고 함.
간관(諫官) 한상환(韓尙桓) 등이,
“신 등은 전하께서 장차 온천에 거둥하려 하신다는 말을 들었사온데, 병을 고치려고 하시는 것이오니 중지하시기를 바랄 수는 없사오나,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온천이 신도(新都)에서 3백여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산을 넘고 내를 건너며 황무한 들판에서 연(輦)을 멈추어야 하오니, 병을 고치는 방법에도 좋지 못할까 하오며, 더구나 농사철이 한창이온데, 거둥하시는 곳마다 아무리 간략하게 한다 하더라도 어찌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하소서.”정도로 아주 구구절절 반대를 함.
태조 임금이 짜증을 내시며,
“야이 생퀴들 웃기네? 민폐는 걱정되는데 내 병은 걱정하지 않냐? 열라 섭섭 하군”
결국 성질 내시며 온천으로 떠나심.
태조 6년(1397 정축) 1월
대사헌 민여익(閔汝翼)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견(趙狷)과 한성 윤(漢城尹) 신효창(申孝昌)을 어떤 일로 탄핵을 함.
그런데 조견의 형이 바로 조준(趙浚) 대감임. 대사헌 민여익의 입장에서는 그냥 탄핵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 몰래 조준을 만나서
"이거 임금님의 뜻인데 조견을 탄핵 좀 해야 겠어요. 내가 탄핵하면 조준 대감께서는 모른척 하시면 됩니다." 라고 구라를 침.
믿었던 임금에게 좀 섭섭했던 조준이 이 이야기를 태조 임금에게 전하자 태조 임금이 없는 이야기라 하여 노발대발함.
더군다나 조견은 조준과 함께 개국 공신임.
태조 임금이 민여익을 불러 놓고,
“네가 헌관이 되어 죄가 있는 자를 탄핵하면 되었지, 하필 말[辭]을 핑계할 것은 무엇이냐? 또 조견은 공신이라 경솔히 탄핵하는 것은 불가하다.”하고는 민여익을 옥에 가두고 처벌 하려고 함.
그때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임금에게,
“님. 민여익도 공신임."
태조 임금이 가만 생각해 보니 둘다 공신임. 아 괜히 공신을 너무 많이 찍어내서 누가 공신인지도 잘 모르겠음.ㅠㅠ
그래서 둘다 집으로 돌아가 쉬어라고 그러고 얼마 안 되어 못이긴채 하고는 모두 용서하여 풀어주었다고 함.
태조 6년(1397 정축) 5월
사헌부 감찰(監察) 김효렴(金孝廉)이 풍저창(豊儲倉) 정기점검 중 창고 관리인이 뭔가 실수가 보여 창고 관리인의 하급 직원을 매질하였다고 함. 김효렴이 매질을 하며 하급 직원에게
“그대는 왜 그대의 관원을 가르쳐 주지 못했는가?”하며 관리인 들으라고 소리 높여 면박을 줌.
그 이야기를 들은 창고 관리인 박상문(朴尙文)이 감찰에게,
“그러면 감찰(監察) 너님도 사헌부의 하급 직원에게 가르침을 받는 모양이지? ^^”
말문이 막혀버린 감찰이 사헌부에 가서 관리인을 탄핵함.
그 이야기를 들은 태조 임금이 이걸 누구 손을 들어 줘야 할지 고민이 됨.
그러다가 저번에 민여익과 조견의 사건이 떠오르신듯.
“야. 거기 둘다 파직!”이런 건 엄청 빨리 습득하시는 듯.
(원래 양반들끼리, 또 계급 차이가 나는 관리들 사이라도 절대로 직접적인 신체 접촉은 금지되어 있음.)
태조 6년(1397 정축) 6월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 하기를 수군 만호(水軍萬戶) 최원충(崔原忠)이 왜선 한 척을 온전하게 포획했다고 함.
당시 조선의 군인이 왜구의 배를 포획했다면 잘하면 1계급 특진, 못해도 엄청난 상품이 지급되는 최상위 레어템임.
아무튼 최원충이 왜적의 배와 빼앗은 군기와 의갑(衣甲)을 임금에게 전리품으로 보냈는데,
수십년간 전장을 누빈 태조 임금이
“최원충이 배를 송두리채 잡았다면서 어째 포로는 하나도 없냐? 이거 뭔가 냄새난다. 조사해봐라”
그날로 바로 조사를 하러 관리가 출발 했는데,
조사 결과 왜나라에서 온 사신을 최원충이 붙잡아서 모조리 죽여버리고는 해적이라고 거짓 보고를 한 사건이었음.
최원충 및 공모자 등 6명의 목이 달아났다고 함.
태조 7년(1398년 무인) 4월.
간관(諫官) 들이 임금에게,
"여섯 아일(衙日) 마다 조회 시간에 좀 나와서 조회 좀 받고 또 조회 끝나면 신하들이 한마디씩 하는거 좀 듣고 그러쇼.
왜 요즘은 자꾸 조회 빼먹고 그러심?"
태조 할배가 멋쩍게 변명을 하시는데,
“말한 바가 옳다. 그러나 조금 병(病)이 있고 천기(天氣)가 아직 차서 조회를 보지 못하였다. 장차 청(請)한 것과 같이 하겠다. ”
이에 예조(禮曹)에 명령하였다.
“이제부터 매양 조회하는 아일(衙日)에 전서(典書) 이하가 뜰에 들어와서 반열(班列)을 정한 연후에야, 내가 나가서 조회를 보겠다. 내가 먼저 나가서 너네들 기다릴려니까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냐 되잖냐. 나 5분만 좀 더 잘란다...”
태조 7년(1398 무인) 윤5월
태조 임금이 계속 조회를 빼먹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지(李至)가 상소를 올려서 조회 좀 참석하라고 잔소리 엄청함.
태조 임금이 썩 불쾌한 표정으로,
"알았다. 알았다고!!! 그래, 내가 병이 있어서 못나간다니까 계속 그러네... 알았어 이제부터 병이 있어도 조회 나갈께!!!
나가서 쓰러저도 조회 나갈께. 됐냐?!!!. 그리고 너 상소 내용에 그냥 사실을 똑바로 할 말만 하면 되지 뭘 은근히 비꼬는 표현 같은게 있는데... 너 조심 해라. 내가 지켜 본다"
태조 7년(1398 무인) 윤5월
한양의 도성 신축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임.
그런데 날도 더워지고 농사가 한창인 철이라 신하들이 신축 공사에 동원한 백성들을 돌려 보내자고 함.
임금이 "야 이제 이거 다 되가는데 이거 마저 하고 보내면 안되냐? 얼마 안남았어!"
그러자 신하들이 "안됨"이라고 그럼.
태조 임금이 어쩔수 없이 신하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을 다 돌려 보내라고 명하심.
며칠 후 태조 임금이 산책 나오셨다가 아직 공사를 하던 백성들의 모습을 봄.
태조 임금이 "어? 이거 하도 돌려 보내라고 졸라서 다 돌려 보내라고 했는데 아직 공사하는 백성은 뭐냐?"
신하들이 "거 아직 중요한 몇 군데 남은데가 있어서 몇사람 일 좀 더 시킬라고요..."
그러자 태조 임금이 "야 내가 이거 마저 조금만 더하면 된다니까 안된다고 지랄들 할 때는 언제고 이건 지금 무슨 시츄에이션?"
"이럴꺼면 처음부터 조금만 더 시키고 돌려 보내자고 하는게 맞지 않음? 지금 나 가지고 장난?"
짜증 엄청 나신 태조 임금이 뒤도 안돌아 보시고는 돌아서서 궁궐로 가버렸음.
모든 신하들이 전부 임금에게 몇차례 사과를 하고서야 화가 조금 풀리셨다고 함.
정종 2년(1400 경진) 1월 28일
2차 왕자의 난(박포의 난) 당시 이방간(李芳幹) 패거리가 태종 임금 죽이러 간다고 몰려 가는 길에 하필이면
태조 임금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됨.
태조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짜증 대폭발 하여 뛰쳐나와 진군하는 군사들을 보고,
“네가 정안(靖安,태종)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야이 소 같은 새끼야!”라고 자식에게 훈훈하게 욕 시전하셧다고 함.
(요즘으로 치자면 "님 부모님 출타중이심?" 뭐 그정도 되지 않나 생각됨.)
2014. 7. 17. 21:00
http://blog.naver.com/joseon_500/220063531571
꼬장왕(王) 태조 이성계(2편)
□ 태조 할배가 한양의 도성 신축공사에 사활을 걸고 있을 때임.
당시 도성 감역관(都城監役官)인 전 사재감(司宰監) 박이(朴理)가 군인(軍人)을 시켜서 도성 축조에 필요한 큰 돌을 운반하던 중임.
돌을 옮기다 골목의 담벼락 때문에 길이 좁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나는야 태조 임금의 명령을 받은 도성 축조 감독관임^^. 애들아~ 걸리는 거 다 때려 부시고 돌 옮기자!"
할 수 없이 담장 한켠을 좀 허물고 나서야 돌을 운반 할 수 있었음.
그런데 그 허문 담장의 집 주인이 마침 고려 말 고위직 관리를 지낸 이사위(李士渭) 란 사람임.
퇴임한 관리가 뛰어나와 "왜 너네들 멋데로 담장을 허무느냐?"고 화를 내며 박이에게 상큼하게 약 2,400rpm으로 꿀밤 세례를 줌.
열받은 박이가 상급자인 성문 제조(城門提調) 최유경(崔有慶) 에게 이 사실을 일러 바침.
이게 태조 할배의 귀에까지 들어감.
태조 할배 하시는 말씀이,
"오!!!^^ 너네 집 담장 무너트린거 내가 다 고쳐줄께. 그러나 임금의 명령을 받은 군사를 패다니... 그건 좀 아니라고 본다^^*
이 개념을 성벽 밑에 주추돌로 깔고 사는 놈을 봤나!!!"
하며 이사위의 집 가노(家奴,개인 노비) 20명을 무급으로 차출하여 도성 축조 공사가 끝날때까지 부려먹었음.
그런데 이 이사위네 집의 노비들이 무급으로 꾸역꾸역 일했던 곳이 바로 지금의 남대문(南大門)임.
□ 태조 7년(1398년) 3월. 뭐 이제 임금 노릇도 슬슬 지겨워진 태조 할배.
날씨도 화창하니 온천에나 한번 다녀 와야지. 하고는 온천으로 출발함.
그런데 사간원 쪽의 관리들이 너무 많이 따라 오는게 맘에 걸림. 이 쉥키들도 온천에 때 불리러 가는건가...???
"저 자식들 온천에 도착 할 때까지 이거해라. 저거하지마라. 또 온천에 오래 있으면 잔소리 또 할꺼 아냐...?"
태조 임금이 괜히 심술이 나신듯.
사간원 관리들 그냥 돌아가라고 하기는 좀 뭣해서인지,
"야! 니네들 수행하는 비서며 몸종이 왜 그렇게 많냐? 그러다가 보리 익고 있는데 다 밟고 지나가겠다. 다 돌려 보내!"
원래 벼슬을 하던 관리들에게 몸종이 없으면 시체나 다름 없음.
이 관리들 온천까지 가면서 먹고 자고 하려면 관리들 이불 보따리나 갈아 입을 팬티 같은 거 담을 가방이며...
이 거를 몸종들이 들고 다녀야 하고 타고 가던 말 사료도 줘야 하고... 이걸 관리들이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님?
코너에 몰린 사간원 관리들이 도승지를 째려봄. 그러자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가 태조 임금에게,
“대간(臺諫)은 번다(煩多)하다고 하여 돌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자
태조 임금이 살짝 삐지면서, "비록 너네가 나를 따라 온다해도 너네들 온천에 몸 담글 생각은 말어라!"
이러쿵 저러쿵 임금과 관리들이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다가 관리들의 일부 몸종들이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게 하는 걸로 결정이 남.
그래도 만족하지 못한 태조 임금이 싹 다 돌아가라고 그러심.
그러자 몇몇 관리들이 임금에게 자기네들끼리는 그나마 최후의 일격이라는 것을 날림.
"몸종들이 없어도 우리는 따라감!!! 솥이며 이불 보따리는 우리가 이고지고 갈꺼임!!!"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가 다시 임금께,
"임금님 행차에 대간(臺諫)과 몸종들이 없을 수 없사오니 다 돌려보내는 것은 불가합니다."
태조 임금이 행차 인원을 쭈욱 들러 보시다가 이문화를 처다보며,
"야! 너 부터 몸종 다 줄여야 겠다. 네가 몸종이 많으니까 밑에 애들이 다 따라하는거 아니냐!"
□ 온천에도 잘 다녀 오신 태조 할배. 그러나 그때 온천물에 목욕을 못한 신하들은 심술이 났음. 많이많이...
뭐 하나 걸리면 바로 상소 올려야지 하고 벼르고 있는 와중에 태조 할배가 나이가 많이 들어 조회를 자주 빼먹게 됨.
이것을 놓칠리 없는 신하들...
조회에 빠질 때마다 매일매일 잔소리를 함.
태조 임금이 어쩔수 없이 조회에 억지로 나가시게 됨.(이거 1부에서 상소 올리자 태조 임금께서 삐져서 조회 나간 그 이야기임.)
신하들이 조회 순서에 따라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 등 을 하고는 다음 순서로 임금에게 절을 하는 차례가 됨.
막 절을 하려는데 태조 임금께서
"잠깐 스톱!!!. 나 3점 났어^^; 아 이게 아니고 아무튼 일단 스톱!!!"
태조 할배께서
"내가 조회날 참석하는 건 절 받기 위한게 아님"
예조의 조회 사회자를 보던 신하에게 명하여,
“각 부서별 자질구레한 사무는 니네들이 알아서 처리해라. 그런거까지 내가 알 필요도 없고 또 그런거 미주알 고주알하면 가오 상하지 않느냐? 대신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말할 만한 일은 마땅히 각기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얼굴 처다보며 아뢰게 하라.”
라고 말씀을 하심. 원래 이 때까지 조회는 그냥 형식적인 행사 절차였을 뿐이었나 봄.
신하들이 갑작스런 임금의 지시에 전혀 준비가 안된 눈치임.
태조 임금이 옆에 서 있던 정도전에게,
“내가 뭐 말한게 잘못됐냐? 왜 아무도 뭐라 말을 안하네?”
정도전도
"아, 뭐, 그, 저, 어흠..."
하고 말을 얼버무리자,
태조 할배가 짜증 폭발 하시며
“여러 신하들이 일찍이 내가 조회를 보지 않는다고 지랄들을 하더니, 오늘은 어찌 한 사람도 면전(面前)에서 아뢰는 이가 없는가?"
태조 할배가 좀 더 짜증이 유지되면 또 이거 뭔가 사건이 생길것은 뻔한 이야기임. 정도전이 재빠르게,
“속된 말로써 이를 비유한다면, 말 많은 놈들 멍석 깔아 주면 오히려 먼저 나서는 놈 없다는 이치와 같은겁니다.^^ 하물며 임금 앞에서 정사를 아뢰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라고 궁색하지만 그나마 타이밍빨은 끝내주는 이야기를 함.
태조 임금께서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라
“그렇다.”
하고 신하들의 말을 기다리심.
이에 대사헌 성석용(成石瑢), 형조 전서(刑曹典書) 유관(柳觀) 등이 좀 뜬금없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꺼내 놓음.
주제야 뭐 어떻든 태조 할배가 대충 신하들 하는거 보니 모양새도 어느 정도 나는 것 같고 해서 앞으로 조회는 항상 이런 식으로 진행하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하심.
이게 매 육아일(六衙日)마다 하던 조회, 혹은 조참(朝參)의 시작임. 세종 대마왕 때 이 조회의 형식이 법제화되긴 하지만...
□ 이런저런 많은 사건이 있은 후 태조 할배도 임금 자리를 정종에게 물려 준 어느날.
태조 할배는 태상왕(太上王)이라는 존호(尊號)도 받으셨는데 태조 할배가 가만 보니 자기만의 궁궐이 따로 없음
(이때는 1차 왕자의 난 이후 개경으로 다시 환도를 한 후임.)
짜증이 슬금슬금 나신 태조 할배가 이곳저곳 절간이며 고려때 친하게 지내던 관료들 집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시게 됨.
정종 임금과 태종이 할배가 자꾸 밖으로 나돌자 아예 개경에도 아버지 태상왕이 살 수 있도록 번듯한 궁궐을 따로 지어드리게 됨.
궁궐 뿐만 아니라 태상왕의 경호 및 의전 담당 전용 부서도 확대 개편하여 승녕부(承寧府)라는 부서를 신설함.
승녕부에는 태조 임금과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우인렬(禹仁烈)을 판사(判事)를 삼고, 손흥종(孫興宗)·정용수(鄭龍壽)로 윤(尹)을 삼고, 소윤(少尹)·판관(判官)·승(丞)·주부(注簿) 각각 2원(員)을 배치함.
그러나 태상왕이 너무 늦게 자기 궁궐을 지어준 것 때문에 꼬장이 풀리지 않으셨나 봄.
"내가 왕위를 물러난지 3년이 다 되가는데 인제 이런거 해주냐? 다 필요 없다!"
우인렬이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인사도 드리고 앞으로 잘 모시겠다고 어르고 달래다 보니 태상왕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고 함.
그런데 잠시 후 다시 태조 할배의 꼬장이 폭발함.
“지금 이미 내 부(府)를 세웠으니, 왜 인장(印章)을 만들지 않는가? 내가 일찍이 보니, 공민왕(恭愍王)이 그 어머니 홍씨(洪氏)를 태후(太后)로 봉하고, 인장을 만들어서 양(兩) 시중(侍中)으로 하여금 조복을 갖추고 바쳤었다. 옛 예(禮)인데,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는가?”
결제 도장 안 만들어 줬다고 노발대발하심.
정종 임금이 화달짝 놀라 다급하게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태상전(太上殿)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갖추어 바쳤다고 함.
이때 지어진 태조 할배 전용 궁궐의 이름이 ‘덕수궁(德壽宮)’이라 하였는데 지금 서울에 있는 덕수궁이 아님.
이 덕수궁은 개경에 있었던 덕수궁임.
□ 태조 할배의 궁궐도 완성되고 하니 많은 신하들이 알아서들 집들이 인사하러 가고 그럼.
태조 할배가 한달 동안 인사하러 오는 관리들 이름 적은 거 쭉~ 읽어 보다가 예전에 자기가 키워줬던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온(趙溫)이 아직 집들이 하러 오지 않은 것이 떠오르심.
마침 태종 이방원이 임금에게 문안인사를 하러 왔는데 태종을 앞에 세워 놓고 일장 연설을 하심.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고 하여 존호를 가(加)하고자 하니 참으로 가상하다. 그러나, 내가 할 말이 있으니, 너희는 들어라!
조온(趙溫)은 본래 내 휘하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발탁하여 지위가 재보(宰輔,재상)에 이르렀는데, 내가 손위(遜位,임금 자리를 물려줌)한 이래로 한번도 와서 보지 않으니, 사람이 은혜를 배반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있겠는가! 신하로서 두 마음이 있는 자는 예전부터 죄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에헴!”
태종 임금이 덕수궁을 나서시며
"아놔 조온 이양반은 좀 알아서 인사 하러 좀 오고 그러지... ㅠ"
얼릉 아버지 태조 할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형님인 정종에게 이 이야기를 알리러 가는 찰나.
다시 태조 할배가 이방원을 불러세움,
"아들아~~ 이거 인사 하러 오지 않은 놈들 명단 보니 이무(李茂)랑 조영무(趙英茂)도 있구나~~~^^* 조영무랑 이무는 말야 애네들 콧물 질질 흘리며 다닐때 부터 내가 거두어서 옷도 주고 밥도 주고 키우워준 애들인데 이거 너무들 하는거 아니냐?^^"
당시 이무(李茂)는 동북면 도순문사 영흥 윤(東北面都巡問使 永興 尹)이었고 조영무(趙英茂)는 서북면 도순문사 평양 윤(西北面都巡問使 平壤尹) 이었음. 이 양반들이 너무 먼 곳에 있어서 함부러 인사하러 못오는 처지였지만 어쩔 수 없음.
태종이 추가된 괘심죄에 걸린 관리들 명단을 가지고 형님인 정종 임금에게 알리게됨.
뭐 당연히 그날로
"조온 대감. 완산부(完山府)로 일단 귀양 가셔서 목숨을 보전 하시오"
"이무(李茂) 대감, 일단 강릉부(江陵府)로 가서서 좀 쉬다 오세요"
"조영무(趙英茂) 대감, 곡산부(谷山府)에 가면 거 새로 개업한 주점 있답니다. 가셔서 물관리 좀 하다 오세요"
이러고 전부 귀양 가게 됨.
□ 태종 임금이 왕위에 오른 어느날.
태조 할배가 별장을 하나 지으실라고 마음을 먹으심.
별장 지을 인부들이야 뭐 못구하면 스님들 콜 하면 언제라도 달려와주니 걱정이 없지만 기둥을 세울 나무 같은 질 좋은 재료는 쉽게 구하지 못함. 태조 할배가 질 좋은 나무를 어디서 구할까 고민 중이신데 그때 태종 임금이 우리도 이제 공자도 모시고 맹자도 모시고 뭐 그런 삐까번쩍한 사당 같은거 좀 지어볼까~ 하시며 질 좋은 나무며 재료들을 궁궐 옆 공터에 쌓아 놓으셔나 봄,
이걸 확인한 태조 할배가 자기 별장 짓는데 이 나무들을 다 갖다 써버림,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말릴 수 있는 사람), 혹은 말리고 싶은 사람(죽고 싶은 사람) 하나 없기 때문에 그 나무들이며 질 좋은 재료들은 태조 임금이 홀라당 다 가지고 가버림.
태종 임금도 다른 신하들 처럼 아버지 꼬장 보기도 싫고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심(못하심?).
2013. 11. 8. 18:03
http://blog.naver.com/joseon_500/80201346382
1.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한 조민수.
창녕 조씨임.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에게 권력싸움에서 패배한 이인임은 조민수에게 외재종형제. 6촌간임.
2. 우왕의 장인인 이임과 이인임과는 내종형제로써 4촌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외4촌임.
이임은 고성 이씨. 이인임은 성주 이씨임.
3. 여담이지만 이인임과 형제인 이인민의 손녀는 태종 임금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인 민무휼과 결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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