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불교의 오교와 구산선문에 대하여

2017. 11. 30. 20:29경전 이야기




신라 불교의 오교와 구산선문에 대하여 1 불교상식

2017. 10. 2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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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교

신라에 불교의 종파가 성립된 시기는 문무왕에서 헌덕왕까지 약

150년간에 불교집대성기를 이룸으로서 시작되었다.

1), 법성종

진즉망 망즉진의 진망불이체인 일심을 주장하는 화엄사상을 성종

이라고 하는바 화엄종의 일파인 원효대사의 해동종을 법성종이라

고도 한다.

해동종(법성종)은 선덕여왕때 경주 분황사에서 원효가 처음 창종

하였다고 전해진다.

2), 계율종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양산 통도사에서 일으켰는데 율장의 십송

율, 사분율, 범망경을 소의경전으로 종지를 삼고 계율을 수행의

덕목으로 삼아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짓는 것으로 양산 통도사를

근본도량으로 삼았다.

3)열반종

보덕은 무열왕때 고구려에서 비래방장하여 전북 완주 경복사에서

열반경에 대한 일체중생 실유불성 무성천제 단근선자 실개성불을

목적으로 삼고 상락아정의 사덕을 겸비한 법신상주 무유번역을 종

지로 하였다.

4), 화엄종

삼계소유 개유일심 일초일목 함용법계 일순일초 포함영원이라는

일진법계 청정심을 종지로 한다.

한국 화엄경은 2파2조로서 1파는 원효이며 스승이 없이 자립한

종인데 의상과 함께 당에 가던 도중 깨친바 있어 돌아와 경주 분

황사에 거주하면서 "화엄의 사상은 일승원교의 통불교여서 총이요,

다른 경전사상은 별로서 동일한 지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한데 비

하여 또 다른 1파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당나라의 지엄대사로부터

법을 받아와서 경북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종풍을 휘날렸던

의상조사는 "화엄사상은 일체경사상의 왕이다"라고 주장한데서 같

은 화엄종이면서도 약간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5), 법상종

일명 이를 유가종이라고도 하는데 30유식론, 성유식론, 해밀심경

을 소의경전으로하고 유심론을 종지로 한다.

진표율사가 경덕왕때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미륵불을 조성하여 근

본도량으로 삼고 계법과 점찰법을 병행함을 종지로 하였다.


@, 이상 오교종파 이외에도 신라 말에 밀교계통으로 두 개의 종파

더 생겼다음과 같다.

1), 신인종

신인이란 인도 범어에 문두루를 번역한 말로서 신라의 명랑은 진덕

여왕때 당나라에 들어가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의 문두루품에

의한 신비의 비밀법을 배워 귀국하여 자기집을 금광사로 만들어 개

산도량을 만들었다.

신인종은 인자가 있으니 총지종과 함께 진언밀교종이지만 결인법을

주로하며 대신주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였다.

​특히 명랑은 당나라가 신라를 치려할때 경주에 사천왕사를 짓고 문

두루비법으로 당군을 격퇴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2), 총지종

진언과 다라니를 독송하는 밀교로서 혜통이 개조이다.

혜통은 젊었을때 수달을 잡아 먹고 뼈를 마당에 버렸더니 뼈가 제집

으로 돌아가 새끼 다섯마리를 품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고

출가하여 문무왕때 당나라에 들어가 선무외삼장에게 삼년을 시봉하며

구법하였으나 거절하므로 화로를 머리에 이고 있으니 정수리가 터져

뢰같은 소리가 나자 무외가 달려와 손으로 상처를 어루만졌는데 왕

자가 쓰여져 왕화상이라고 했다.

마침내 비법을 전수받아 문무왕때 귀국하여 총지종을 세웠다.

2편에 계속




       신라 불교의 오교와 구산선문에 대하여 2 불교상식

2017. 10. 26.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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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산선문

​구산선문이란 통일 신라시대에 9개의 산문이 있었는데 오교와는 달리

이들은 선을 중시하였으며 한국 불교의 선맥이 전해진것도 이 시기로

보아야 한다.​ 

1), 회양산문

@, 사조선

신라의 법랑은 선덕여왕때 당나라에 들어가 도신에게 선법맥을 받아

귀국하여 신행에게 전하였는데 이것이 사조선이다.

@, 북점선이 사조선을 흡수

신행은 법랑으로부터 전법후 당으로 들어가 북점선의 시조이신 신수의

계보를 이은 지공에게 수법후 귀국하였는데 신행은 도신의 사조선과

신수의 북점선을 겸한 선사로 법맥을 준범에게 준범은 혜은에게 혜은은

도헌에게로 승계되었다.

@, 남돈선이 북점선을 흡수

혜능의 제자 남악을 거쳐 마조에게 이어졌으며 마조에게는 창주라는 제

자가 있는데 신라의 진감혜소는 애장왕때 당나라에 들어가 창주의 제자

가 되었다.

그리고 혜소는 신라승 도의와 함께 다니다가 도의는 먼저 귀국하고 혜소

는 3년간 더 수선타가 830년에 귀국하였다.

특히 혜소는 경남 하동 옥천사(쌍계사)에서 범패를 최초로 전하였다.

그런데 도헌은 먼저 혜은의 법제자가 되었으므로 도신의 법통과 신수의

북점선을 겸한 양법통을 받은 것이다.

그후에 도헌은 남돈선 법손인 진감혜소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도헌의 법맥은 도신의 법맥과 북점선의 신수의 법맥과 남돈선

의 혜능 법맥을 3중으로 겸한 특수한 법통제자이다.

이리하여 도헌은 헌강왕때 경북 문경 회양산에 봉암사를 세우고 종풍을

떠치니 남돈선의 회양산문이라고 한다.

2), 실상산문

마조의 제자중에 사당지장의 제자가 있다.

신라의 홍척은 당나라에 들어가 서당지장에게 법을 받아 흥덕왕때 귀국

후 전북 남원에 실상사를 세우고 종풍을 휘날리니 이를 실상산문이고

한다.

홍척은 당나라에서 법을 전해온 것은 도의보다 나중이나 선문파를 이룬

것은 구산선문중에서 가장 먼저이다.

흥덕왕과 그의 태자도 홍척에게 귀의했다고 전해진다.

3), 가지산문

당나라의 서당지장으로부터 신라의 도의는 선덕왕때 입당하여 수법하고

헌덕왕때 귀국하여 선법을 펼치려 하였으나 선에 익숙치 못한 신라인들

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강원도 설악산 진전사에 들어가 은거하며

염거에게 법을 전하고 다시 보조체징에게 전하였다.

체징은 837년에 입당하여 문성왕때 귀국하여 전남 장흥 가지산에 보림

사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휘날리니 이것이 가지산문이다.

4), 사굴산문

중국의 마조에게 감관제안의 제자가 있었다.

신라 승려 범일은 14세에 출가하여 흥덕왕때 당나라에 들어가 감관의 법

을 받아 문성왕때 귀국하여 강원도 강릉 사굴산에 굴산사를 창건하고 경

문왕, 헌강왕, 정강왕 등의 귀의를 받고 진성여왕때 입적할 때까지 종풍

을 휘날리니 이를 사굴산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범일통효의 특이한 발언은 석가모니불이 깨친후 다시 설산에서

진귀조사의 교시로 무상정각을 얻었다고 하니 부처님께 진귀조사라는 스

승이 있었다는 것은 처음 듣는 발언이다.

5), 동리산문

신라의 혜철은 814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마조으 제자 서당지장으로부터

법을 전수받아 문성왕때 839년에 귀국하여 전남 곡성 동리산에 태안사에

서 선풍을 휘날리다가 861년에 입적하니 이를 동리산문이라고 한다.

6),성주산문

신라의 무염은 헌덕왕 821년에 당으로 건너가 마조의 제자 마곡보철의

법을 전수받아 문성왕 845년에 귀국하여 충남 보령 성주산에 성주사를

창건하고 경문왕과 헌강왕의 국사로서 종풍을 휘날리다가 888년에 입적

하니 이를 성주산문이라고 한다.

7), 사자산문

신라의 도윤은 헌덕왕 825년에 당나라로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남전보

원에게 법을 전수받고 문성왕 847년에 귀국하여 금강산과 전남 쌍봉산

에서 종풍을 휘날리다가 868년에 입적하고 그의 수제자 절중은 헌강왕

때 강원도 영월 사자산에 영흥사(지금의 법흥사)를 세우고 도윤의 선풍

을 선양하니 이것이 사자산문이다.

8), 봉림산문

신라의 현욱은 824년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의 제자 장경회휘에게 법을

전수받고 837년에 귀국하여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의

귀의를 받으며 선풍을 떨치다 82세에 입적하니 그의 고제자 심희가 경

남 창원 봉림산에 봉림사를 창건하고 현욱의 종풍을 드높이니 이것이 봉

림산문이다.

@, 이상은 신라 선종의 구산선문에 대하여 도신의 법맥이 가장 먼저 신

라의 법랑에 의해 들어왔고 홍인의 제자 신수의 북점선맥이 도신의 선맥

을 흡수하여 내려오던 것을 도헌이 혜능의 남돈선맥을 받으므로서 북점

선맥을 흡수하여 회양산문으로 정착을 하였으며 그외에 실상산문, 가지

산문, 사굴산문, 동리산문, 성주산문, 사자산문, 봉림산문 등이 마조의

법맥을 이어 남돈선맥으로 통일이 되었다.

그런데 구산선문 중에서 제일 나중에 받아들여진 수미산문은 마조의 남

돈선맥이 아니라 동산양개의 묵조선맥이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9), 수미산문

이엄진철은 895년에 당나라로 들어가 동산양개의 수제자인 운거도웅에

게 6년간 수선후 묵조선 법맥을 이어받아 당나라의 각처를 다니며 선지

식을 만나고 효공왕 911년에 귀국한후 묵조선법을 펼치던중 신라가 망

하고 고려왕조가 들어서니 고려 태조 왕건이 932년에 황해도 해주 수미

산에 광조사를 창건하고 주지로 모신바 이에 이엄진철은 묵조선풍을 떨

치니 이것이 수미산문이다.

구산선문중 가장 늦게 개창되었으며 이엄진철은 여염, 경유, 형미와 더

불어 4무외사라고 한다.


지금까지 구산선문에 대하여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조금이나마 ㄷ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행복의 향기가 가득한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