華嚴一乘法界圖 화엄일승법계도 / 義湘

2017. 11. 30. 04:57경전 이야기


華嚴一乘法界圖 화엄일승법계도 | 화엄(華嚴) I

실론섬 2016.11.22 12:33

         

華嚴一乘法界圖 화엄일승법계도


1. 서문 [自]

2. 반시 (槃詩)

3. 본문 해석[釋文]

   1) 도인의 뜻을 통틀어 해석함[總釋印意]

   2) 도인의 모양을 나누어 풀이함[別解印相]

      (1) 도인의 모양을 설명함[說印文相]

      (2) 글자의 모양을 밝힘[明字相]

      (3) 글의 뜻을 해석함[釋文意]

4. 발문 (跋文)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1)

의상 지음 義湘 撰2)

1) 저본(底本)은『한국불교전서』제2책(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에 수록(pp.1-8)

   된『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이에 대한 교감본으로 갑본(甲本)은

  『고려대장경』제45권 중『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이하『총수록』)에

   수록된『일승법계도 합시일인』원문이고, 을본(乙本)은『만속장경』제103권에

   수록된『화엄일승법계도』이고, 병본(丙本)은『대정신수대장경』제45권에 수록

   된『화엄일승법계도』이다.『한국불교전서』에서는『속장경』제2편(篇) 8투(套) 4

   책(冊)의『화엄일승법계도』(이하『일승법계도』)를 저본으로 하였다.

2)『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의 저자가 의상임을 밝히는「義湘撰」이라는 문구는

   편찬자가 보충해서 넣은 것이라고 저본의 각주에서 밝히고 있다. 의상은「발문

   (跋文)」에서 ‘연(緣)으로 생겨나는 모든 법은 주인이 없음을 표시하려는 까닭’에

   지은이를 밝히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일승법계도』(韓2, p.8b10-11)]


1. 서문[自]


무릇 위대한 성인의 훌륭한 가르침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 근기에 응

하고 병에 따라서 하나가 아니다. 미혹한 자는 자취를 고수하여 본체를 잃

는 줄 알지 못해서 부지런히 하여도 근본[宗]으로 돌아갈 날이 없다. 그러

므로 이법[理]에 의지하고 가르침[敎]에 근거하여 간략히「반시(槃詩)」3)

를 지어서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가 이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기

를 바란다.


시를 읽는 법은 마땅히 가운데 ‘법(法)’으로부터 시작하여 번다하게 구

부러지고 굽어져서 ‘불(佛)’에 이르러 마치니 도인(圖印)4)의 길을 따라서

읽도록 한다.〈54각 210자이다.〉5)

夫大聖善敎無方, 應機隨病非一. 迷者守6)迹不知失體, 懃而歸

宗未7)日. 故依理據敎, 略制槃詩, 冀以執名之徒, 還歸無名眞

源. 讀詩之法, 宜從中法爲始, 繁廻屈曲, 乃至佛爲終, 隨印道

讀.〈五十四角二百一十字.〉8)

3)「반시(槃詩)」는「일승법계도 합시일인(一乘法界圖 合詩一印)」이라고도 하니[『총

   수록(叢髓錄)』(韓6, p.768a3; 高45, p.141a2)], 흰 종이 위에 붉은 줄로 된「법계도인

   (法界圖印)」과 검은 글씨로 된 7언 30구 210자의「법성게」를 합한 것이다.『일승

   법계도』의 전체 구성은「반시(槃詩)」와 이「반시」를 해석한「법계도기」로 이루어

   져 있으며,「법계도기」는 저술의 목적과 시를 읽는 방법을 밝히는「자서(自叙)」

   와「반시(槃詩)」의 해석인「석문(釋文)」, 그리고「발문(跋文)」으로 이루어져 있다.

4) 도인(圖印)은「법계도인(法界圖印)」을 의미한다.

5) 이와 같이 독시법에 의해 시를 따라 읽으면 7언 30구 210자가 된다.(法性圓融無

   二相~舊來不動名爲佛)

6) 저본에는「字」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守」로 바꾸었다. 을본과 병본은 저

   본과 동일하다. (이하 저본과 동일한 교감본은 별도로 표시하지 않는다.)

7) 저본에는「末」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未」로 바꾸었다.

8) 이를 포함한『일승법계도 합시일인 오십사각 이백일십자(一乘法界圖合詩一印

   五十四角二百一十字)』이『총수록』에 수록된 원문의 제목이다.


2. 반시(槃詩)9)

9)「반시」 아래의「법성게」30구와 그 번역문은 역자가「반시」중 시(詩)인「법성

   게」를 다시 소개한 것이다.


一微塵中含十初發心時便正覺

一量無是卽方成益寶雨議思不

卽劫遠劫念一別生佛普賢大人

多九量卽一切隔滿十海入能境

切 世無一念塵亂虛別印三昧中

一十是如亦中雜空分無然冥事

卽世互相卽仍不衆生隨器得利

一相二無融圓性法叵際本還者

一諸智所知非餘佛息盡寶莊嚴

中法證甚性眞境爲身無隨家歸

多不切 深極微妙名想尼分得資

切 動一絶相無不動必羅陀以糧

一本來寂無名守不不得無緣善

中一成緣隨性自來舊床道中際

生意如出繁理益行法意如捉巧實

死涅槃常共和是故界實寶殿窮坐


법성(法性)10)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고                          [法性圓融無二相]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다.                    [諸法不動本來寂]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모든 것이 끊어져                     [無名無相絶一切]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                    [證智所知非餘境]

진성(眞性)11)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                        [眞性甚深極微妙]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룬다.                     [不守自性隨緣成]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며,                 [一中一切多中一]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一卽一切多卽一]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十方)을 머금고                 [一微塵中含十方]

모든 티끌 중에도 또한 이와 같다.                                 [一切塵中亦如是]

한량없는 먼 겁이 곧 일념(一念)이고,                              [無量遠劫卽一念]

일념이 곧 한량없는 먼 겁이다.                                     [一念卽是無量劫]

구세(九世)와 십세(十世)가 서로 상즉하면서도                     [九世十世互相卽]

그로 인해 혼잡하지 않고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                   [仍不雜亂隔別成]

처음 발심할 때가 곧 정각이며                                      [初發心時便正覺]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                                      [生死涅槃常共和]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                         [理事冥然無分別]

열 부처님[十佛]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        [十佛普賢大人境]

능히 해인삼매 가운데 들어가                                       [能入海印三昧中]

여의(如意)를 번다하게 나타냄이 불가사의하다.                    [繁出如意不思議]

보배를 비내려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우니                          [雨寶益生滿虛空]

중생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다.                                   [衆生隨器得利益]

그러므로 수행자는 본래 자리에 돌아와                            [是故行者還本際]

망상 쉼을 반드시 얻지 않을 수 없고                                [叵息妄想必不得]

무연(無緣)의 선교(善巧)로 여의(如意)를 잡아서                   [無緣善巧捉如意]

집으로 돌아가 분수 따라 자량을 얻는다.                           [歸家隨分得資量]

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써                                       [以陀羅尼無盡寶]

법계의 진실한 보배 궁전을 장엄하여                               [莊嚴法界實寶殿]

마침내 실제의 중도(中道) 자리에 앉으니                           [窮坐實際中道床]

옛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舊來不動名爲佛]

10) 법성(法性, dharmatā)은 [모든] 법의 본성, 즉 깨달음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

    다. 구체적으로 초기불교에서는 삼법인, 연기법 등으로 표현되었고,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공(空)으로도 말해졌다.[용수(龍樹),『대지도론(大智度論)』(高14

    pp.825c1-826a14; 大25, p.297b22-c24)] 이처럼 법성에 대한 설명은 모든 법의 본성

    을 무엇으로 보고,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학파나 종파별로 입장이 달라

    진다.『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하『화엄경(華嚴經)』)에 있어서 법성

    은 특히 중요시되는데, 법성이 다만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부

    처님 그 자체로까지 표현된다.[80권본『화엄경(華嚴經)』(이하『팔십화엄(八十華

    嚴)』)「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高8, p.518b13; 大10, p.81c15)] 의상은 

    부처님 그 자체로서의 이 법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법성성기(法性性起),

    즉 부처님 그 자체의 출현으로 발전시킨다. 의상계 화엄에서는 모든 법이 원융

    함을 법성이라고 한다.

11) 진성(眞性)은 [모든 법의] 참된 성품이다.『화엄경(華嚴經)』에도 여러 곳에서 설

    해지고 있으나 법성과 진성을 대비하여 설하는 경향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다. 의상은 이 글에서 진성을 연기분(緣起分), 법성을 증분(證分)으로 구별하여

    진성을 통해서 법성에 이르게 하고 있다. (이하「법성게」에서 보이는 주요 용어에

    대해서는「법성게」를 해석하는「석문」의 해당 부분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3. 본문 해석[釋文]


이제 이 글을 해석하고자 함에 두 부문으로 나눈다. 첫째는 도인의 뜻을

통틀어 해석하고, 둘째는 도인의 모양을 나누어 풀이한다.

將欲釋文, 二門分別. 一總釋印意, 二別解印相.


1) 도인의 뜻을 통틀어 해석함[總釋印意]


묻는다. 어째서 도인에 의거하였는가?

답한다. 석가여래(釋迦如來)12)의 가르침의 그물에 포섭되는 세 가지 세

간[三種世間]13)이 해인삼매(海印三昧)14)로부터 번다하게 나타난 것임을 표

현하려고 한 때문이다. 세 가지 세간이라는 것은 첫째는 기세간(器世間)15)

이고, 둘째는 중생세간(衆生世間)이며, 셋째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

다. 지정각이란 부처와 보살이다. 세 가지 세간이 법을 다 포섭하기 때문

에 다른 것은 논하지 않는다. 자세한 뜻은『화엄경(華嚴經)』16)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問. 何以故依印?

答. 欲表釋迦如來敎網所攝三種世間, 從海印三昧, 繁17)出現

顯故. 所謂三種世間, 一器世間, 二衆生世間, 三智正覺世間.

智正覺者, 佛菩薩也. 三種世間, 攝盡法故, 不論餘者. 廣義者,

如華嚴經說.

12) 석가여래(釋迦如來)에서 ‘석가’는 석가모니(釋迦牟尼), 즉 산스크리트어 Śākyamuni

    의 음역으로 석가족(釋迦族)의 성자라는 뜻이며, 약 2500여년전 인도에서 불교

    를 일으킨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를 가리킨다. 또 ‘여래’는 부처님의 열 가

    지 호칭 중 하나로서 산스크리트어 tathāgata의 번역어이다. 이 산스크리트어는

    tathā-āgata, 즉 여실하게 오신 분[如來]과 함께 tathā-gata, 즉 여실하게 가신 분

    [如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석가여래는 역사상 실존인물의 존칭이기

    도 하지만 화엄에서는 그 뜻과 동시에 법신(法身) 비로자나불·보신(報身) 노사

    나불·화신(化身) 석가모니불이 원융한 삼불원융(三佛圓融)으로서의 석가여래

    이다.[60권본『화엄경(華嚴經)』(이하『육십화엄(六十華嚴)』)「여래명호품(如來名號

    品)」(高8, p.27c5-9; 大9 p.419a10-15 등)] 지엄(智儼, 602~668)은 일승에 의하면, 

    화신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법신인 비로자나 부처님 등이 모두 열 부처님[十佛]의

    화용(化用)이라고 설하고 있다.[『화엄경내장문등잡공목장(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

    章)』(이하『공목장』, 大45, p.587c7-9)]

13) 세 가지 세간[三種世間]은 모든 존재를 세 가지로 나누어 본 것으로『화엄경(華

    嚴經)』(高8, p.53c25; 大9 p.444b5-6 등)을 비롯하여 여러 경에 나타난다. 그 세 

    가지가 무엇인지는 경론에 따라 다르나 화엄교학에서는 기세간(器世間, bhajanaloka),

    중생세간(衆生世間, sattvaloka),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samyaksam buddhaloka)

    으로 설하고 있다.[지엄,『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

    齊通智方軌)』(이하『수현기』, 高47, p.9b6-8; 大35, p.22c23-25) 등 참조] 의상은 

    각각 이 세 가지 세간을 상징하는 흰 종이와 검은 글자, 붉은 줄로 이루어진「반시」를 

    통해 세 가지 세간이 원융함을 나타내고 있다.

14) 해인삼매(海印三昧, sāgaramudrāsamādhi 또는 sāgarasamrddhisamādhi)는 고요한

    바다에 모든 사물이 다 비춰지듯이, 이 삼매에 법계의 모든 존재가 드러남을 비

    유한다.『화엄경(華嚴經)』중「현수품」을 비롯한 여러 품에 나타나는데[高8,

    p.42c19; 大9 p.434c6 등 참조], 이 삼매는『화엄경』의 총정(總定)으로서『화엄경』

    전체가 이 해인삼매 속에서 설해진 것으로 말해진다.[법장(法藏),『화엄일승교의

    분제장(華嚴一乘敎義分齊章)』(大45, p.482b18-25 등)] 의상은 이 삼매에 들어가면

    법성을 완전히 증득하여 세 가지 세간이 모두 이 삼매 중에 나타난다고 해석하

    고 있다.[『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3c15)]

15) 기세간(器世間, bhajanaloka)은 모든 부처와 중생[正報]이 의지해 있는 국토세

    계[依報]를 의미한다. 의상에게 있어서 기세간은 다른 세간과 마찬가지로 자성

    (自性)으로 독립해 있는 세계가 아니라 해인삼매로부터 나타나 융삼세간 속에

    서 서로 연기되어 있는 세간을 의미한다.「반시」에서 기세간은 하얀 종이[白紙]

    로 상징되며 그 자체는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다고 후대 의상계 화엄에서는

    주석하고 있다.[『총수록(叢髓錄)』(韓6, p.790b3-4; 高45, p.164b8)]

16)『화엄경(華嚴經)』은『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줄임말로서, 불타발

    타라(佛馱跋陀羅, Buddhabhadra, 359~429)가 418년부터 420년에 걸쳐 번역한

    60권본(7처 8회 34품)을 가리킨다. 한역(漢譯) ‘화엄대경(華嚴大經)’으로는 불타

    발타라 역과 더불어 실차난타(實叉難陀, Śiks3 ānanda, 652~710)가 695년부터 699

    년에 걸쳐 역출한 80권본(7처 9회 39품)이 있다. 또한 Jinamitra가 9세기 말에 번

    역한 티벳역(Sans-rgyas phal-po-che shes-bya-ba śin-tu rgyaspa chen-pohi 

    mdo, 45품)이 현존한다. 의상의 『일승법계도』는『육십화엄(六十華嚴)』의 핵심 

    교의를 간추린 것이다.

17) 저본에는「槃」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繁」으로 바꾸었다.


2) 도인의 모양을 나누어 풀이함[別解印相]


둘째 [도인의] 모양을 나누어 [풀이하는] 문 가운데 세 부문으로 나눈다.

첫째는 도인[印文]의 모양을 설명하고, 둘째는 글자의 모양을 밝히고, 셋

째는 글의 뜻을 해석한다.

第二別相門中, 三門分別. 一說印文相, 二明字相, 三釋文意.


(1) 도인의 모양을 설명함[說印文相]

첫 번째로 묻는다. 어째서 도인에 오직 한 길[一道]만 있는가? 답한다.

여래의 한 음성[一音]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다.

어째서 번다하게 도는 굴곡이 많이 있는가? 중생의 근기와 욕망이 같지

않은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곧 삼승(三乘)18)의 가르침에 해당한다.

一問. 何故印文唯有一道? 答. 表如來一音故, 所謂一善巧方便.

何故多有繁廻屈曲? 以隨衆生機欲不同故, 卽是當三乘敎.

18) 삼승(三乘)의 ‘삼(三)’은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을 의미하며, ‘승

    (乘)’은 부처님의 교법, 수행, 수행자의 모임 등을 의미하고 여기에서는 부처님

    의 교법을 가리킨다. 의상은 삼승 이외에 따로 일승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불

    구불한 각[삼승]을 통해 원만한 도인[일승]이 이루어지듯이 삼승으로써 일승

    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한다. 균여(均如, 923~973)는『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

    法界圖圓通記)』에서 의상의 강의를 지통(智通, 655~?)이 기록한『지통기(智通

    記)』를 인용하고 있는데,『지통기』에서는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삼승이

    곧 일승이며,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삼승과 일승이 차별을 이룬다고 밝히고 있

    다.(韓4, p.4b24-11)


어째서 한 길에 시작과 끝이 없는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은 [일정

한] 방법이 없어서, 법계(法界)19)에 응하여 걸맞고, 십세(十世)에 상응하여

원융만족함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20) 곧 이 뜻은 원교(圓敎)21)에 해당

한다.

어째서 네 면과 네 모서리가 있는가? 사섭법(四攝法)22)과 사무량심(四無

量心)23)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뜻은 삼승을 의지하여 일승(一乘)24)을 나

타낸 것이다.

도인의 모양은 이와 같다.

何故一道無有始終? 顯示善巧無方, 應稱法界, 十世相應, 圓

融滿足故, 卽是義當圓敎.

何故有四面四角? 彰四攝四無量故, 此義依三乘顯一乘.

印相如是.

19) 법계(法界, dharmadhātu)는 화엄교학에서 우주만유의 영역을 의미하며, 일심

    (一心)을 그 체(體)로 한다.[『육십화엄(六十華嚴)』(高8, p.3c25, p.19a23; 大9,

    p.397b23, p.410b25 등)] 중국 화엄교학에서는 이 법계를 사법계(事法界), 이법계

    (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4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법계연기설을 펼치고 있다. 의상은 여기에 이이무애(理理 無

    礙)의 법계를 더하고 있다. 그런데 의상이 이 글에서 나타내고 있는 법계는 법계

    연기로서의 법계만이 아니라 여래출현으로서의 여래성기를 모두 포함하는 일

    승법계이다. 따라서 의상의 법계는 증분법성과 진성연기분을 모두 포함하는 법

    계인 것이다.

20) 균여는 이 구절을 풀이하면서, 일반적인 법계의 의미와 더불어 여기의 법계는

    공간적 측면[橫盡法界]으로, 뒤의 십세는 시간적 측면[竪窮劫海]으로 해석한 후

    선교방편(善巧方便)이 이 둘에 모두 원융만족하다고 설한다.[『일승법계도원통기

    (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14a5-7)]

21) 원교(圓敎)는 부족함이 없는 원만한 가르침을 뜻한다.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어

    느 종파의 교판(敎判)이냐에 따라 구체적인 경론은 다르더라도 자기의 소의경

    론을 가장 훌륭한 가르침인 원교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지엄은 화엄을 일승원

    교라고 칭하였으며, 의상 또한 화엄의 가르침을 별교일승원교(別敎一乘圓敎)에

    해당시키면서, 이를 한 길로 이루어졌으며, 시작과 끝이 없는 원만한「도인(圖

    印)」으로 상징하고 있다.

22) 사섭법(四攝法, catvāri sam3 garahavastūni)은 보살이 중생을 섭수하여 불도(佛道)

    로 나아가 깨닫게 하는 네 가지 방법으로 보시섭(布施攝)·애어섭(愛語攝)·이행

    섭(利行攝)·동사섭(同事攝)이다. 이것은『아함경』이래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

    인 선행(善行)으로서,『화엄경(華嚴經)』에서도 또한 설해지고 있으며, 특히「십

    지품(十地品)」에서는 초지인 환희지(歡喜地)부터 제4지인 염혜지(焰慧地)에 머

    무르는 보살의 대표적 수행법이다.

23) 사무량심(四無量心, catvāry apramān3 āni)은 모든 불보살(佛菩薩)이 한량없는 중

    생을 구제하기 위해 갖추는 네 가지 마음으로 자무량(慈無量)·비무량(悲無量)·

    희무량(喜無量)·사무량(捨無量)이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사무량심을 모든

    불보살이 나타내는 무량한 공덕 중의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高8, p.43b25; 大9,

    p.435b2 등)

24) 일승(一乘, ekayāna)은 오직 하나의 수레란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하

    나라는 의미이다. 화엄교학에서는 이 일승을 삼승과 일승이 융회해서 같다는

    상대적 견지의 동교일승(同敎一乘)과 삼승과 다르다는 의미, 즉 삼승을 초월한

    다는 절대적 견지의 별교일승(別敎一乘)으로 구별하여, 화엄교학을 별교일승에

    해당시킨다. 의상은『일승법계도』에서「도인」의 4면4각 내지 54각이 바로 일승

    을 상징하는 하나의 줄, 즉「도인」이며, 이 굴곡들을 떠나서 따로「도인」을 구할

    수 없음을 설하여 삼승의 가르침을 배제하고 따로 일승의 수행법이 있지 않음

    을 나타내고 있다.


(2) 글자의 모양을 밝힘[明字相]

두 번째로 묻는다. 어째서 글자 중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가? 답한다. 수

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하여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째서 글자 중에 굴곡이 많은가? 삼승의 근기와 욕망이 달라서 같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째서 시작과 끝의 두 글자를 한가운데에 두었는가? 원인과 결과의 두

자리가 법성의 집안에서 진실한 덕용(德用)25)이며, 성(性)이 중도(中道)26)

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글자의 모양은 이와 같다.

二問. 何故字中有始終耶? 答. 約脩27)行方便, 顯因果不同故.

何故字中多屈曲? 顯三乘根欲差別不同故.

何故始終兩字安置當中? 表因果兩位法性家內眞實德用, 性在

中道故.

字相如是.

25) 덕용(德用)은 원인에 즉하여 결과가 바로 있는, 원인 외에 따로 결과가 있지 않

    은 인과의 당체(當體)로서의 용(用)이므로 ‘체(體)’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의상은 인과의 덕용인 덕용자재문(德用自在門)을 상즉에 해당시키고 반면 상입

    은 인과의 도리인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에 배대시키고 있다.[『일승법

    계도』(韓2, p.8a20-22)]

26) 중도(中道, madhyamāpratipad)는 두 극단을 여읜 길을 의미한다. 석가모니 부처

    님의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는 욕망과 즐거움에만 집착하는 한 극단과 극도의

    고행(苦行)에만 몰입하는 다른 한 극단을 모두 여읠 때 중도가 있으며 이것이

    곧 팔정도(八正道)라고 설하고 있다.[『중아함경(中阿含經)』(高18, p.267a17-b10;

    大1, pp.777c25-778a10 등)] 중도는 모든 불교 경론에서 설하는 실천수행의 근간

    으로 자리잡아 왔으며 각 학파마다 중도의 의미에 대해서 고락중도(苦樂中道)·

    유무중도(有無中道)·허실중도(虛實中道)·팔부중도(八不中道) 등 다양한 해석

    을 내놓고 있다.『일승법계도』의 중도에 대해 균여는『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

    원인과 결과[因果]·일승과 삼승[一乘三乘]·바른 뜻과 바른 교설[正義正說]·이

    와 사[理事]·하나와 많음[一多]·일체법에 대한 일곱 가지의 중도설로 정리한

    다.(韓4, p.14b9-c22)

27) 갑본에는「修」로 되어 있으며,「脩」와「修」는 통용된다.


묻는다. 위에서 이르기를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다고 하면서, 한 집의

참된 덕이며 성이 중도에 있다고 하니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그 뜻이 무

엇인가?

답한다. 이 뜻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그러하나, 천친(天親)28)

주(論主)가 육상(六相)29)의 방편으로써 뜻을 세운 분한[分齊]에 의거하면,

뜻의 도리에 준하여 분한 따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열 구절로써

육상을 변별하면 아래 설한 것과 같다.

問. 上云, 因果不同, 一家實德, 性在中道, 未知所由, 其義云何?

答. 此義其實難解. 雖然, 依天親論主, 以六相方便, 立義分齊,

准義道理, 隨分可解. 若約十句, 以弁六相, 如下說.

28) 천친(天親)은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십지경론(十地經論)』의 저자인 세친(世

    親, Vasubandhu)을 가리킨다. 4~5세기경(320~400, 또는 400~480)의 인도 논사

    이다.『십지경론』은 세친이『십지경』을 주석한 것으로 현재 산스크리트어본은

    전해지지 않고 티벳어역본과 한역본(漢譯本)만이 남아 있다. 한역본은 보리유

    지(菩提流支, Bodhiruci, ?~527)와 늑나마제(勒那摩提, Ratnamati, 5~6세기경)

    등이 번역한 12권본으로 이 논이 중국에 번역되자 이를 바탕으로 ‘지론종(地論

    宗)’이 성립되었다. 이후 이 논에서 논의되는 심식설에 대해 지론종 내부에 대립

    이 생기는데, 이 가운데 늑나마제는 정식설(淨識說)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혜광

    (慧光, 468~537)에 의하여 남도파로 형성되었고, 보리유지는 망식설(妄識說)을

    주장하였으며 도총(道寵)에 의하여 북도파로 계승되었다. 이 중 지론종 남도파

    는 뒷날 화엄종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의상은『일승법계도』의「발문(跋文)」에서

    『십지경론』 등에 의거하여 이『일승법계도』를 저술했다고 밝히고 있다.[『일승법

    계도(一乘法界圖)』(韓2, p.8b7-9)]

29) 육상(六相)은 총상(總相, sānga)·별상(別相 upānga)·동상(同相, salaksana)·

    이상(異相, vilaksana)·성상(成相, vivarta)·괴상(壞相, samvarta)으로 화엄교

    학에서는 이 육상이 원융하다는 육상원융이 십현연기와 함께 법계연기를 드러

    내는 주요한 방편으로 사용된다. 육상설의 경증은『화엄경(華嚴經)』과 그 지분

    경인『십지경』계통의 경전이지만, 경에는 단지 명목만이 나타난다. 세친은『십

    지경론』(高15, pp.3a22-3c13; 大26, pp.124c3-125a6)에서 육상의 의미를 자

    세하게 밝히고, 경에서 설해진 모든 열 구절에 이 육상의 뜻이 있다고 하면서도 

    음(陰)·계(界)·입(入)의 사(事)는 제외시키고 있다. 이후 지론종(地論宗)의 정영사

    (淨影寺) 혜원(慧遠, 523~592)은 세친의 육상설을 받아들이면서도 사상(事相)을 

    따르면 육상에서 사(事)는 제외되지만 체의 뜻[體義]을 따르면 모든 사법에 육상의

    문(門)을 갖춘다고 설하여 육상의 범주를 모든 법으로 확장시킨다.[『대승의장(大

    乘義章)』(大44, p.524a1-b16)] 이후 화엄종의 지엄은 세친의 육상설을 혜원의 입

    장에서 받아들인다.[『수현기』(高47, p.48a15-22; 大35, p.66b9-19)] 의상은

   『일승법계도』에서 도인의 비유를 통해 육상의 뜻을 설명하는데, 세친과 혜원과 

   지엄의 설에 의거하고 있으나 이 육상설을 무분별 부주(不住)의 중도의(中道義)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韓2, p.7c9-10)


지금은 우선 도인의 모양에 근거하여 육상을 밝혀서, 일승과 삼승이 주

(主)와 반(伴)을 서로 이루어 법을 드러내는 분한을 보인다.

이른바 육상이란,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

상(成相)·괴상(壞相)이다. 총상이란 근본의 인[根本印]이다. 별상이란 나

머지 굴곡들이니 별(別)이 인(印)을 의지하되 그 인(印)을 만족케 하기 때

문이다. 동상이란 한 가지 인[同印]이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굴곡은 다르

지만 한 가지 인(印)이기 때문이다. 이상이란 늘어나는 모양이기 때문이

니, 말하자면 첫 번째, 두 번째 등 굴곡들이 달라서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

다. 성상이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인(印)을 이루기 때문이

다. 괴상이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니, 번다하게 도는 굴곡들이 각각 스스로

달라서 본래 짓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연(緣)으로 생겨난 법이 육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今且約印像, 以明六相, 示一乘三乘主伴相成, 現法分齊.

所謂六相者, 總相, 別相, 同相, 異相, 成相, 壞相. 總相者根本

印. 別相者餘屈曲, 別依止印, 滿彼印故. 同相者同30)印故, 所

謂曲別而同印故. 異相者增相故, 所謂第一第二等曲別增數31)

故. 成相者略說故, 所謂成印故. 壞相者廣說故, 所謂繁廻屈

曲, 各各自別32)本來不作故. 一切緣生法, 無不六相成也.

30) 저본에는「者」다음에「□」로 표시되어 있으나, 동상을 해석한 다음 구절「曲別

    而同印故」로 보아「同」으로 추정한다.

31) 저본에는「安」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數」로 바꾸었다.

32) 저본에는「別」이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이른바 총상은 뜻이 원교(圓敎)에 해당하고, 별상은 뜻이 삼승교(三乘

敎)에 해당한다. 총상, 별상, 성상, 괴상 등이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여 항상 중도에 있듯이, 일승과 삼

승도 또한 이와 같다. 주(主)와 반(伴)이 서로 도와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

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비록 중생을 이롭게 하나 오

직 중도에 있어서 주(主)와 반(伴)을 서로 이루어 법을 드러냄이 이와 같

다. 일승의 별교(別敎)33)와 삼승의 별교도 뜻에 준하여 이해할 수 있다.

所謂總相者義當圓敎, 別相者義當三乘敎. 如總相別相成相壞

相等, 不卽不離, 不一不異, 常在中道, 一乘三乘亦復如是. 主

伴相資, 不卽不離, 不一不異, 雖利益衆生, 而唯在中道, 主伴

相成, 顯法如是. 一乘別敎, 三乘別敎, 准義可解.

33) 별교(別敎)는 함께 하지 않는 가르침이란 뜻이다. 중국 화엄종에서는 일승을 별

    교와 동교로 나누고, 삼승과 함께 하는 가르침인 동교일승에 대비하여 화엄을

    삼승과는 다른 최상의 가르침인 별교일승에 해당시키고 있다. 의상은 여기에서

    별교라는 용어를 일승만이 아니라 삼승에도 사용하고 있다.


그대가 문의한 것도 뜻이 또한 이와 같다. 처음의 굴곡은 원인과 같고,

내지 뒤의 굴곡은 결과와 같다. 처음과 뒤가 같지 아니하나 오직 한가운데

에 있는 것과 같이, 비록 원인과 결과의 뜻은 다르나 오직 스스로 그러함

[自如]에 머무른다. 삼승의 방편의 가르침에 의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으나, 일승의 원교(圓敎)에 의하므로 앞과 뒤가 없다.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은 경에서 이르기를, “또 모든 보살에게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의

광명을 설하여 지혜의 지(地)에 들어가게 하려는 까닭이다”34)라고 한 것

과 같다.

汝所問疑, 義亦如是. 初曲如因, 乃至後曲如果. 如初後不同而

唯在當中, 雖因果義別而唯住自如. 依三乘方便敎門, 故高下

不同, 依一乘圓敎, 故無有前後. 所以得知, 如經說,“ 又一切

菩薩, 不可思議諸佛法明說, 令入智慧地故.”

34) 세친의『십지경론』에서『십지경』원문 중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高15, p.3a8-9;

    大26, p.124b19-20) 이 경문은『십지경』의 설주인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보

    살대승광명삼매(菩薩大乘光明三昧)에 들자, 시방 세계에서 같은 이름의 금강장

    불(金剛藏佛)이 나타나 그 입정(入定)을 칭찬하시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육십

    화엄(六十華嚴)』에도 보이고 있다.(高8, p.162c23-25; 大9, p.542b21-22)『육십화엄

    (六十華嚴)』에서는 삼매의 이름이 보살대지혜광명삼매(菩薩大智慧光明三昧)로

    되어 있다.


논에서 말한다.35) “모든 보살[一切菩薩]이란 신(信)·행(行)·지(地)에 머무

르는 자를 말한다.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不可思議諸佛法]이란 출세

간도(出世間道)의 덕목이다. 광명[明]이란 봄[見]과 지혜[智]와 얻음[得]과

깨달음[證]이다.36) 설한다[說]는 것은 그 중에서 분별하는 것이다. 들어간다

[入]란 믿고 좋아하며 얻고 깨닫는 것이다. 지혜의 지(地)란 십지(十地)37)

지혜를 말하니 본문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것이 근본의 들어감[根本入]

이니, 경에서 ‘또 모든 보살에게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의 광명을 설

하여 지혜의 지(地)에 들어가게 하려는 까닭이다’38)라고 한 것과 같다.”

論曰.“ 一切菩薩者, 謂住信行地. 不可思議諸佛法者, 是出世

間道品. 明者, 見智得證. 說者, 於中分別. 入者, 信樂得證. 智

慧地者, 謂十地智, 如本分中說. 此是根本入, 如經,‘ 又一切

菩薩, 不可思議諸佛法明說, 令入智慧地故.’”

35) 이하의 인용문은 세친이『십지경론』에서 위의 경문을 포함하여 금강장불

    이 금강장보살의 입정(入定)을 칭찬하시는 열 가지 내용(高15, p.3a8-14; 大26,

    p.124b19-24)을 주석한 내용이다. 세친은 이 열 가지 내용을 근본입(根本入)과

    구입(九入)으로 나눈 뒤, 근본입과 구입의 총별원융(總別圓融)을 통하여 육상이

    원융함을 설명하고 있다.(高15, p.3b1-c13; 大26, pp.124c5-125a6)

36) 봄[見]과 지혜[智]와 얻음[得]과 깨달음[證]에 대해 지엄은 봄[見]을 관(觀)하는

    깨침[解]의 처음으로, 지혜[智]를 관(觀)하는 깨침[解]의 끝으로, 얻음[得]을 행

    하는 깨침[解]의 처음으로, 깨달음[證]을 행하는 깨침[解]의 끝으로 풀이하여,

    광명이 관행(觀行)을 모두 두루하는 것으로 설하고 있다.[『수현기』(高47, p.34a6;

    大35, p.50b8. 又見智得證者, 前二觀解, 後二行解. 見始智終, 得始證終也.)]

37) 십지(十地, daśabhūmi)는 열 가지의 지위(地位)로서 여기의 지(地)는 지혜[智]

    를 뜻한다. 경론에 따라 십지의 명목이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여기『십지경』의

    십지는 일승보살도의 십지를 가리킨다. 십지의 구체적인 명목을『십지경』을 기

    준으로 살펴보면, ①환희지(歡喜地, pramuditābhūmi), ②이구지(離垢地,

    vimalābhūmi), ③명지(明地, prabhākarībhūmi), ④염지(焰地, arcismatībhūmi),

    ⑤난승지(難勝地, sudurjayābhūmi), ⑥현전지(現前地, abhimukhībhūmi), ⑦원

    행지(遠行地, dūramgamābhūmi), ⑧부동지(不動地, acalābhūmi), ⑨선혜지(善

    慧地, sādhumatībhūmi), ⑩법운지(法雲地, dharmameghābhūmi)이다.(高15,

    p.6a19-22; 大26, p.126c5-7)『육십화엄(六十華嚴)』의 명목은『십지경』과 

    동일하다.(高8, p.163b10-12; 大9, pp.542c27-543a1) 의상은『일승법계도』

    에서『화엄경(華嚴經)』전체가 십지에 모두 포섭되며, 나아가 이 십지는 단지 

    일념에 있다고 한다.(韓2, p.2b24-c13)

38)『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b1-c13; 大26, pp.124c5-125a6).


“이 경[修多羅]39) 중에 근본의 들어감[根本入]에 의하여 아홉 가지의 들

어감[九種入]이 있음을 설하고 있다. 첫째는 포섭의 들어감[攝入]이다. 듣

는 지혜[聞慧]40) 가운데 모든 선근(善根)41)을 포섭하기 때문이니, 경에서

‘모든 선근을 포섭하[게 하려]는 까닭이다’42)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생

각하고 헤아림의 들어감[思議入]이다. 생각하는 지혜[思慧]가 모든 도의

덕목[道品] 중에 지혜의 방편이기 때문이니, 경에서 ‘모든 불법을 잘 분별

하여 선택하[게 하려]는 까닭이다’43)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법의 모양

의 들어감[法相入]이다. 저러저러한 뜻[義] 가운데 한량없이 갖가지로 알

기 때문이니,44) 경에서 ‘모든 법을 널리 알[게 하려]는 까닭이다’45)라고 한

것과 같다.”

“此修多羅中, 說依根本入有九種入. 一者攝入. 聞慧中攝一切

善根故, 如經, ‘攝一切善根故.’ 二者思議入. 思慧, 於一切道

品中, 智方便故, 如經,‘ 善分別選擇一切佛法故.’ 三者法相

入. 彼彼義中, 無量種種知46)故, 如經,‘ 廣知諸法故.’”

38)『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b1-c13; 大26, pp.124c5-125a6).

39) 이 경은『십지경(十地經)』을 가리킨다.『십지경론(十地經論)』에 수록된(高15,

    p.3a8-14; 大26, p.124b19-24) 『십지경』의 십입설(十入說)은 60권본『화엄경(華

    嚴經)』(高8, pp.162c24-163a4; 大9, p.542b22-26)과 80권본『화엄경(華嚴經)』

    (高8, p.634a3-6; 大10, p.179a17-20)의 내용과 유사하다.

40) 듣는 지혜[聞慧, śrutamayī prajñā]는 들어서 이루어진 지혜[聞所成慧]를 가리킨

    다. 이 지혜는 생각하여 이루어진 지혜[思所成慧]와 닦아서 이루어진 지혜[修所

    成慧]와 함께 세 지혜[三慧]를 이룬다. 세친은 『십지경론』(高15, p.11b12-23; 大

    26, p.130b17-18)에서 듣는 지혜를 물은 씹지 않아도 바로 마실 수 있는 것에 비

    유하여 들으면 바로 받아 지니는 지혜로, 생각하는 지혜를 음식을 씹어 먹어서

    몸에 도움을 주는 것에 비유하여 들은 법을 곱씹어서 증장하는 지혜로, 닦는 지

    혜를 꿀이 벌들이 좋아하는 의지처가 되는 것에 비유하여 듣는 지혜와 생각하

    는 지혜의 과보가 의지하는 곳으로 풀이하고 있다.

41) 선근(善根, kuśalamūla)은 모든 선법(善法)을 일으키는 근본으로,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의 세 선근이 대표적이다. 이 선근의 반대가 곧 불선근(不

    善根)으로서, 세 선근의 반대를 삼독(三毒)이라고 한다.[『불설장아함경(佛說長阿

    含經)』(高17, p.881b14-17; 大1, p.50a7-10 등)]『화엄경(華嚴經)』에서는 선

    근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는데 의상계 화엄에서는 불가사의한 일체법 가운데에는 

    본래 삼독이 없으므로,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세 선근이 항상 있지만 다만 중생이

    그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여 현전하지 못할 뿐이라고 풀이한다.[『총수록

    (叢髓錄)』 高45, p.179b17-21]

42)『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a9; 大26, p.124b20).

43)『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a10; 大26, p.124b20-21).

44) 이 글에서는 저본의「智」를 갑본과 을본에 따라「知」로 바꾸어 번역하였으나,

    저본(「智」)대로 번역하면, “저러저러한 뜻 가운데 한량없는 갖가지 지혜인 까닭

    이다”로 해석된다.

45)『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a10-11; 大26, p.124b21).

46) 저본에는「智」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과『십지경론』에 따라「知」로 바꾸었다.


“넷째는 교화의 들어감[敎化入]이다. 생각하고 헤아린 것을 따라서 말

[名字]이 갖추어져 법을 잘 설하기 때문이니, 경에서 ‘모든 법을 잘 설하

[게 하려]는 까닭이다’47)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깨달음의 들어감[證

入]이다. 모든 법에 평등한 지혜가 견도(見道)48)하는 때에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니, 경에서 ‘분별없는 지혜가 청정하여 잡되지 않[게 하려]는 까닭

이다’49)라고 한 것과 같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곧 스스로 불법

을 이루는 것이니, 그래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또한 자기를 이롭게 하

는 것이라고 한다. 여섯째는 게으르지 않음의 들어감[不放逸入]이다. 수도

(修道)50)하는 때에 모든 번뇌의 장애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니, 경에서 ‘모

든 마법(魔法)이 물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까닭이다’51)라고 한 것과 같다.”

“四者敎化入. 隨所思議52), 名字具足, 善說法故, 如經,‘ 善53)

說諸法故.’ 五者證入. 於一切法平等智, 見道時中, 善淸淨故,

如經, ‘無分別智, 淸淨不雜54)故.’ 菩薩敎化衆生, 卽是自成佛

法, 是故利他亦名自利. 六者不放逸入. 於修道時中, 遠離一切

煩惱障54)55)故, 如經,‘ 一切魔法不能染故.’”

47)『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a11; 大26, p.124b21-22).

48) 견도(見道, darśanamārga)는 처음으로 무루지(無漏智)를 얻어 사제(四諦)를 현

    관(現觀)하고 그 이치를 비추어 수행하는 지위로서, 세 가지 길인 견도(見道)·

    수도(修道, bhāvanāmārga)·무학도(無學道, aśaiks3 amārga) 중의 하나이다. 이는

    부파불교에서 수행의 계위를 크게 셋으로 나눈 것에서 유래한다. 앞의 견도와

    수도는 학도(學道, śaiks3 amārga), 즉 배움의 단계로서 성불의 인(因)이고, 뒤의

    무학도는 배울 것이 없는 단계로서 곧 수행의 과(果)이다.[세친,『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이하 『구사론』)(高27, pp.569c20-570a2; 大29, p.82c9-13 등)] 

    『십지경론』에서는 견도와 수도 등의 부파불교에서 비롯된 수행의 계위를 화엄의

    일승수행을 나타내는 일승보살도로서 수용하고 있다.

49)『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a11-12; 大26, p.124b22).

50) 수도(修道, bhāvanāmārga)는 견도(見道)한 후에 다시 구체적인 사상(事相)에

    대처하여 되풀이해서 수습하는 단계로서 세 가지 길 중의 하나이며, 견도와 함

    께 학도(學道)를 이룬다.[『구사론』(高27, pp.569c20-570a2; 大29, p.82c9-13 등)]

51)『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a12; 大26, p.124b22-23).

52) 저본에는 「義」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 「議」로 바꾸었다.

53)『십지경론(十地經論)』에는「善」다음에「決定」이 있다.(高15, p.3a11; 大26, p.124b21)

54) 저본에는「離」로 되어 있으나 갑본과『십지경론』에 따라「雜」으로 바꾸었다.

55) 저본에는「菩提鄣」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과『십지경론』에 따라「煩惱障」으로

    바꾸었다.


“일곱째는 지(地)에서 지(地)로 옮김의 들어감[地地轉入]이다. 세간을

벗어나는 도의 덕목인 무탐(無貪) 등의 선근56)이 청정하기 때문이니, 경에

서 ‘세간을 벗어나는 법인 선근을 청정하[게 하려]는 까닭이다’57)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선근이 있어 세간을 벗어나는 도의 덕목의 원인이 될 수 있

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보살로서 다함의 들어감[菩薩盡入]이다. 제10지에

서 모든 여래의 비밀스러운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니, 경에서 ‘불가사의

한 경계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58)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부처로

서 다함의 들어감[佛盡入]이다. 일체의 지혜에 들어가는 지혜이기 때문이

니, 경에서 ‘내지 일체의 지혜를 [갖춘] 사람의 지혜의 경계를 얻[게 하려]

는 까닭이다’59)라고 한 것과 같다.”

“七者地地轉入. 出世間道品無貪等善根淨故, 如經,‘ 出世間

法善根淸淨故.’ 復有善根, 能爲出世間道品因故. 八者菩薩盡

入. 於第十地, 入一切如來秘密智故, 如經,‘ 得不可思議境界

故.’ 九者佛盡入. 於一切智入智故, 如經, ‘乃至得一切智人60)

智境界故.’”

56) 무탐(無貪) 등의 선근이란 세 선근, 즉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癡)를 말

    한다.

57)『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a12-13; 大26, p.124b23).

58)『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a13-14; 大26, p.124b23-24).

59)『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a14; 大26, p.124b24).

60) 저본에는「入」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과『십지경론』에 따라「人」으로 바꾸었다.


“이 모든 들어감은 지혜의 뜻의 차별을 비교한 것으로 차례로 더욱 뛰

어나지만 근본의 들어감은 아니다. 모든 설해진 열 구절에는 모두 여섯 종

류의 차별의 모양으로 된 문이 있다. 이 언설의 해석에 마땅히 사(事)는

제외됨을 알아야 하니, 사(事)란 오온[陰]61)·십팔계[界]62)·십이처[入]63)

등이다. 여섯 종류의 차별의 모양은 총상·별상·동상·이상·성상·괴상이

다. 총상은 근본의 들어감이고 별상은 나머지 아홉 [가지 들어감]이니, 개

별[別]이 근본[本]에 의지하여 저 근본[本]을 만족시키는 까닭이다. 동상

은 들어감이기 때문이고, 이상은 늘어나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성상은 간

략히 설하는 까닭이고, 괴상은 널리 설하는 까닭이니,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같은 까닭이다. 나머지 모든 열 구절 가운데도 뜻을 따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64)

“是諸入爲挍量智義差別, 次第轉勝, 非根本入. 一切所說十句

中, 皆有六種差別相門. 此言說解釋, 應知除事, 事者謂陰界入

等. 六種差相者, 謂總相別相同相異相65)成相壞相. 總相者是

根本入, 別相者餘九, 別依止本, 滿彼本故. 同相者入故, 異相

者增相故. 成相者略說故, 壞相者廣說故, 如世界成壞故. 餘一

切十句中, 隨義類知.”

61) 오온[陰](五蘊, pañcaskandha)은 유위법의 구성요소를 다섯 가지로 나눈 것으

    로, 색(色, rūpa)·수(受, vedanā)·상(想, samjña)·행(行, samskāra)·식(識,

    vijñāna)이다.[『불설장아함경』(高17, p.883b8-11; 大1, p.51b6-9 등)] 음(陰)은 

    산스크리트어 skandha의 구역(舊譯)으로 신역(新譯)은 온(蘊)이며 집합, 쌓임이라

    는 뜻이다.『화엄경(華嚴經)』(高8, p.74b20-21; 大9, p.465c26-29)에서는 오온은 

    실체가 없지만 마음이 화가처럼 갖가지로 오온을 지어낸다고 하여 오온을 통해

    유심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62) 십팔계[界](十八界, astādaśadhātavah)는 열 여덟 종류, 또는 종족이라는 뜻으로,

    일체 모든 존재를 18가지 구성요소로 나누어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인식작

    용을 일컫는 6식(識)과 인식작용이 의지하는 감각기관으로서의 육근[根], 그리

    고 인식대상으로서의 육경[境]을 합하여 일컫는 것이다.[『구사론』(高27,

    p.458b23-c7; 大29, p.5a4-10 등)] 초기 아함경전에서부터 모든 법의 분류방법으

    로 이용되었으며[『중아함경』(高18, p.188b7-12; 大1 p.723b16-20 등)],『화엄경

    (華嚴經)』에서는 일체 모든 법을 의미하는 십팔계가 공하여 얻을 수 없음을 알아

    보리를 얻는다고 설한다.(高8, p.137a12-13; 大9, p.520b17-18 등)

63) 십이처[入](十二處, dvādaśāyatanāni)는 열두 가지의 장소, 문(門)이라는 뜻으로,

    일체 모든 존재를 열두 가지 구성요소로 나누어 본 것이다. 열두 가지는 감각기

    관인 눈·귀·코·혀·몸·뜻의 육근(六根)과 감각대상인 색(色)·소리·냄새·맛·닿음[觸]·

    법(法)의 육경(六境)이다.[『잡아함경』(高18, pp.833c20-834a3; 大2,p.91a27

    -b2 등)] 이 때 육근은 내육입(內六入), 육경은 외육입(外六入)이라고 한다. 입

    (入)이란 거두어들인다는 뜻으로 육근과 육경이 서로 거두어들여 육식(六識)을 

    내므로 입(入)이라고 한다.[『구사론』(高27, p.472a3, p.521c5-6; 大29, p.14b4,

    p.48b27-b28)]

64) ‘모든 보살이란’부터 ‘뜻을 따라 알 수 있을 것이다’까지는『십지경론』에서 인용

    한 부분이다.(高15, p.3b1-c13; 大26, pp.124c5-125a6)

65) 저본에는「同相異相」이 없으나 갑본과『십지경론』에 따라 삽입하였다.


논의 글이 이와 같으니, 오직 논주가 근본[宗]을 세운 도리이다. 그러므

로 알라. 비록 원인과 결과인 신(信)·해(解)·행(行)·회향(廻向)·지(地)·

불(佛)이 각자의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되 앞과 뒤가 없다. 무슨 까닭인

가? 모든 법이 각각 달라서 스스로 여여함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하나의

여여함과 많은 여여함에서도 여여함의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묻는다. 무엇이 부처님의 법을 깊이 믿는 것인

가? 답한다. 일체 모든 법이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바이고 나의 경계가

아니니, 만약 이와 같다면 부처님의 법을 깊이 믿는다고 한다”66)고 하였

다. 이것이 그 뜻이다.

論文如是. 唯是論主立宗道理. 故知. 雖因果信解行廻地佛, 自

位不動而無前後. 何故? 諸法各異, 住自如故, 一如多如, 如如

相不可得故. 是故, 經云,“ 問. 云何深信佛法? 答. 一切諸法,

唯佛所知, 非我境界, 若如是者, 名爲深信佛法.” 是其義也.

66)『총수록(叢髓錄)』(高45, p.184b9; 大45, p.742a22)에서는 이 구절을『승만경(勝鬘

    經)』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승만경』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모든 깊은 법을 스스로 깨닫지 못해서 세존을 우러러 생각하

    기를, 나의 경계가 아니고 오직 부처님만이 아실 바라고 하니, 이를 이름하여 선

    남자, 선여인이 여래를 우러러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高6, p.1369b5-7; 大12,

    p.222c23-25. 若善男子善女人, 於諸深法不自了知, 仰惟世尊, 非我境界, 唯佛所知, 

    是名善男子善女人仰惟如來.)


묻는다. 육상(六相)이란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가?

답한다. 연기(緣起)의 무분별한 도리를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다. 이 육

상의 뜻으로써 비록 한 부의 경전[一部經]67)이 일곱 장소와 여덟 번의 모

임과 품의 종류가 같지 않으나, 오직「십지품(十地品)」68)에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까닭이 무엇인가? 이 근본[是根本]69)이 법을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다.

問. 六相者爲顯何義?

答. 顯緣起無分別理故. 以此六相義故, 當知雖一部經, 七處八

會及品類不同, 而唯在地品. 所以者何? 是根本攝法盡故.

67) 한 부의 경전[一部經]은 7처(處) 8회(會) 34품(品)으로 이루어진『육십화엄(六十

    華嚴)』을 가리킨다.

68)「십지품(十地品)」은『육십화엄(六十華嚴)』의 제22번째 품에 해당한다. 지상에서

    부처님의 자내증(自內證) 경계를 나타낸 첫 회와 신(信)의 공덕을 설한 2회에 이

    어 천상(天上)에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과 함께 일승보살도

    의 실천행을 나타내는 부분이다.「십지품」에 해당하는 『십지경』은 화엄부 경전

    들이『화엄경(華嚴經)』으로 집대성되기 이전부터 인도에서 따로 유통되었으며,

    그 성립시기는 대략 1, 2세기경으로 추정된다.『십지경』( Daśabhūmikasūtra)은

    현재『화엄경(華嚴經)』중「입법계품」과 더불어 산스크리트어본이 남아 있다.

    한역(漢譯)의 경우『화엄경(華嚴經)』과 별도로 수차례 역출되었는데, 현존본으

    로는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점비일체지덕경(漸備一切智德經)』과 구마라집

    (鳩摩羅什)이 번역한『십주경(十住經)』과 시라달마(尸羅達磨譯)가 번역한『불설

    십지경(佛說十地經)』이 있으며,『십지경』의 주석서인 세친의『십지경론』에도

   『십지경』의 전문이 실려 있다. 또한 섭도진(聶道眞)에 의해『십주경(十住經)』이

    란 이름으로 번역되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69) 이 근본[是根本]은「십지품」을 가리킨다.


「십지품」중에 비록 십지(十地)가 같지 않으나 오직 첫째 지(地)에 있

다. 무슨 까닭인가? 한 지(地)에서 일어나지 않고 널리 일체 모든 지(地)의

공덕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한 지(地) 중에도 비록 많은 부분이 같지 않지

만 오직 일념(一念)에 있다. 무슨 까닭인가? 삼세(三世)와 구세(九世)가 곧

일념이기 때문이니, 일체가 곧 하나인 까닭이다. 일념처럼 다념(多念) 또

한 이와 같다. 하나가 곧 일체여서 일념이 곧 다념 등인 것이다. 앞과 반대

로 해도 곧 옳다.

地品中雖十地不同, 而唯在初地. 何以故? 不起一地, 普攝一

切諸地功德故. 一地中雖多分不同, 而唯在一念. 何以故? 三

世九世卽一念故, 一切卽一故. 如一念, 多念亦如是. 一卽一

切, 一念卽多念等, 反前卽是.


이러한 이법[理]으로써 다라니(陀羅尼)70)법은 주(主)와 반(伴)이 서로

이루어진다. 한 법을 듦에 따라서 일체를 다 포섭한다. 만약 모임[會]을 기

준으로 설하면, 모임·모임 가운데 일체를 다 포섭한다. 만약 품(品)을 기

준으로 설하면, 품·품이 일체를 다 포섭한다. 내지 문장을 기준으로 하면,

문장·문장과 구절·구절이 일체를 다 포섭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이

것이 없으면 저것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라니법이 본래 이러하

기 때문이니, 아래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以此理故, 陀羅尼法, 主伴相成. 隨擧一法, 盡攝一切. 若約會

說, 會會中盡攝一切. 若約品說, 品品盡攝一切. 乃至若約文

說, 文文句句盡攝一切. 何以故? 若無此, 彼不成故. 陀羅尼

法, 法如是故, 如下說.

70) 다라니(陀羅尼)는 산스크리트어 dhāranī의 음역으로 모두 지녀 놓치지 않음(總

    持)을 의미한다. 『화엄경(華嚴經)』에서도 여러 번 설해지며, 그 중「십지품」제9

    지 보살이 얻는 10종 다라니와「이세간품」에서 설해지는 10종 다라니가 대표적

    이다.(高8, p.189a9, p.257c12; 大9, p.569a28, p.634c2) 그 세부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부처님의 법을 듣고 지녀 잊지 않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의상 

    또한 다라니를 듣고 지녀 잊지 않는 구체적 행위를 뜻하는 총지(總持)라고 해석

    하면서도 동시에 일승의 다라니법이 바로 연기의 체(體), 즉 진성(眞性)임을 밝

    히고 있다.[『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3a3)]


(3) 글의 뜻을 해석함[釋文意]

셋째, 글의 뜻을 풀이한다. 글에 7언 30구가 있다. 이 중에 크게 나누면

셋이 있으니, 처음 18구71)는 자리행(自利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다음 4

72)는 이타행(利他行)며, 다음 8구73)는 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을 변별

한 것이다.

三釋文意. 文有七言三十句. 此中大分有三, 初十八, 句約自利

行, 次四句, 利他行, 次八句, 辨脩行者方便及得利益.

71) 처음 18구는「법성게」30구 중 제1구부터 제18구까지이다.

72) 다음 4구는「법성게」30구 중 제19구부터 제22구까지이다.

73) 다음 8구는「법성게」30구 중 제23구부터 마지막 30구까지이다. 이 가운데 앞 4

    구는 수행자의 방편에, 뒤 4구는 수행자의 이익 얻음에 해당한다.


가) 자리행(自利行)

처음 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 4구74)는 증분(證分)75)을 나타내고, 둘째

다음 14구76)는 연기분(緣起分)77)을 드러낸다. 이 중에 처음 2구78)는 연기의

체(體)를 가리킨다. 둘째 다음 2구79)는 다라니의 이법[理]과 작용[用]을 기

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한[分齊]을 변별한 것이다. 셋째 다음 2구80)

는 사법(事法)81)에 즉(卽)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한을 밝힌 것이다. 넷째 다

음 4구82)는 시간[世時]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한을 보인 것이

다. 다섯째 다음 2구83)는 계위를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분한을 밝

힌 것이다. 여섯째 다음 2구84)는 위의 뜻을 통틀어 논한 것이다. 비록 여섯

부문이 같지 않으나, 오직 연기 다라니법을 나타낸 것이다.

就初門中有二. 初四句現示證分, 二次十四句, 顯緣起分. 此中

初二句, 指緣起體. 二次二句, 約陀羅尼理用, 以辨攝法分齊.

三次二句, 卽事法明85)攝法分齊. 四次四句, 約世時示攝法分

齊. 五次二句, 約位以彰攝法分齊. 六次二句, 總論上意. 雖六

門不同, 而唯顯緣起陀羅尼法.

74) 처음 4구는「법성게」의 최초 4구로서, ‘법성(法性)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고[法

    性圓融無二相]’에서부터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證智所知

    非餘境]’까지이다.

75) 증분(證分)은 깨달음의 영역, 경지를 가리키며, 법성(法性)의 경계이다. 의상은

   「법성게」30구를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이 증분 부분을 풀이하지 않음으로써 증

    분이 말로 설명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단 뒤에서는 다른 부분과 연관하여

    증분의 경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76) 둘째 다음 14구는「법성게」중 제5구부터 제18구까지이다.

77) 연기분(緣起分)은 연(緣)을 따라서 이루어진 영역으로서, 진성(眞性)의 경계이

    다. 이 연기분은 중생을 위해 연과 상응하여 설한 것으로 교분(敎分)이라고도 한

    다. 의상은 증분과 연기분의 관계에 대해, 증분은 참 모습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

    였고 연기분은 중생을 위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다르지만, 또한 연기분은 자

    성이 없으므로 증분과 다르지 않기도 하다고 한다.[『일승법계도』(韓2, p.4c12-16)]

78) 처음 2구는 연기분 14구 가운데 처음 2구로서,「법성게」중 제5구 ‘진성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眞性甚深極微妙]’와 제6구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不守自性隨緣成]’의 2구이다.

79) 다음 2구는「법성게」중 제7구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

    며’[一中一切多中一]와 제8구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一卽

    一切多卽一]’의 2구이다.

80) 다음 2구는「법성게」중 제9구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十方)을 머금고

    [一微塵中含十方]’와 제10구 ‘모든 티끌 중에도 또한 이와 같다[一切塵中亦如是]’

    의 2구이다.

81) 사법(事法)은 여기에서 일체를 이(理)와 사(事)의 측면으로 나눌 때 법계의 일

    체현상으로서의 사(事)가 아니다. 균여는 이 사(事)를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티끌과 시방(十方)과 같은 사(事)로서 해석하고 있다.[『일승법계도원통기』(韓4,

    p.8a13)]

82) 다음 4구는「법성게」중 제11구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순간[一念]이고[無量遠

    劫卽一念]’에서부터 제14구 ‘그로 인해 혼잡하지 않고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仍

    不雜亂隔別成]’까지의 4구이다.

83) 다음 2구는「법성게」중 제15구 ‘처음 발심한 때가 곧 정각이며[初發心時便正

    覺]’와 제16구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生死涅槃常共和]’의 2구이다.

84) 다음 2구는「법성게」중 제17구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理

    事冥然無分別]’와 제18구 ‘열 부처님[十佛]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

    다[十佛普賢大人境]’의 2구이다.

85) 저본에는「法明」이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처음에 말한 ‘연기의 체(體)’는 곧 일승(一乘)의 다라니법(陀羅尼法)이

다. 하나가 곧 일체(一切)이고, 일체가 곧 하나인, 장애 없는 법계의 법이

다. 이제 우선 하나의 문에 의하여 연기의 뜻을 드러내겠다.

初言緣起體者, 卽是一乘陀羅尼法. 一卽一切, 一切卽一, 無障

礙法界法86)也. 今且約一門, 顯緣起義.

86) 저본에는「法法界」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法界法」으로 바꾸었다.


말하자면,87) 연기란 위대한 성인(聖人)이 중생을 섭수하여 이(理)에 계

합(契合)하고 사(事)88)를 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범부는 사(事)를 보면

곧 이(理)에 미혹하나, 성인은 이(理)를 얻어서 이미 사(事)가 없는 까닭

이다. 이제 참된 이(理)를 들어서 미혹한 중생[情]을 깨닫게 하여, 모든 유

정들로 하여금 사(事)가 곧 없으며 사(事)가 곧 이(理)에 들어맞음을 알게

하려는 까닭에 이 가르침을 일으킨 것이다.

所謂, 緣起者, 大聖攝生, 欲令契理捨事. 凡夫見事, 卽迷於理,

聖人得理, 旣無於事故, 今擧實理, 以會迷情, 令諸有情, 知事

卽無, 事卽會理, 故興此敎.

87) 이하 인용문, ‘연기란[緣起者]’에서 ‘일승을 목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一乘所目

    故]’까지는 지엄이『공목장』에서 서술한 것이다.(大45, p.563c9-29)


그러므로『십지경론[地論]』에서 말한다.89) “자상(自相)90)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과보의 상[報相]이니,90) 명색(名色)91)이 아리야식(阿梨耶識)92)

과 함께 생기는 것이다. 경에서 ‘삼계(三界)93)의 땅에 다시 싹이 생기니, 이

른바 명색(名色)이 함께 생긴다’94)라고 한 까닭이다. 명색(名色)이 함께 생

긴다는 것은 명색(名色)이 저 [아리야식과]과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둘째는 저것으로 인한 상[彼因相]이니, 이 명색(名色)이 저 [아리야식]을

여의지 않고, 저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경에서, ‘여

의지 않는다’95)라고 한 까닭이다.

셋째는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이니, 육입(六入)96)

에서부터 유(有)97)에 이르는 것이다.98) 경에서, ‘이 명색(名色)이 자라서는

육입(六入)의 무더기를 이루고 내지99) 유(有)의 인연인 까닭에, 태어남·늙

음·아픔·죽음·근심·슬픔·고통·번뇌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은

고통의 무더기를 키우지만, 이 중에는 나와 나의 것[我所]100)을 여의었으

며, 지(知)도 없고 각(覺)101)도 없으니, 풀과 나무와 같다’102)라고 한 것이

다. 이 중에 나와 나의 것을 여의었다는 것은 이 둘이 공(空)을 나타내 보

이는 것이다.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다는 것은 자체가 무아(無我)103)

이기 때문이다. 풀과 나무는 중생으로 헤아려지는 것이 아님을 보인 때

문이다.”104)

故地論言.“ 自相者有三種. 一者報相, 名色共阿梨耶識生. 如

經, ‘於三界地, 復有牙生, 所謂名色共生’故. 名色共生者, 名

色共彼生故. 二者彼因相, 是名色不離彼, 依彼共生故. 如經,

‘不離’故. 三者彼果次第相, 從六入乃至於有. 如經,‘ 此名色

增長已成六入聚, 乃至有因緣故, 有生老病死憂悲苦惱. 如是

衆生, 生長苦聚, 是中離我我所, 無知無覺, 如草木也.’ 此中

離我我所者, 此二示現空. 無知無覺者, 自體無我故. 草木者,

示非衆生數故.”

89) 이『십지경론』인용문은 지엄이『공목장』내에서 세친의『십지경론』을 인용

     한 부분이다.[『십지경론』(高15, p.28c6-19; 大26, p.142b12-23)] 여기 인

     용된『십지경론』내에서 또 인용된 경문은『십지경론』이 소의로 한 『십지

     경』의 구절이다.『십지경』의 이 부분은 십지(十地) 중 초지(初地) 환희지(歡

     喜地)에서 보살이 성취하는 모든 지를 청정하게 하는 열 가지의 법(十種淨諸地

     法) 중 두 번째 자비(慈悲)를 설하는 중에 나오는 십이연기(十二緣起)에 대한 

     설명이다. 이 내용의 경문 전체는 다음과 같다. “삼계(三界)의 땅에 다시 싹이 

     생기니, 이른바 명색(名色)이 함께 생겨 여의지 않는다. 이 명색이 자라서는 

     육입(六入)의 무더기를 이룬다. 육입을 이루고 나서는 안과 밖이 상대하여 촉

     (觸)을 발생시킨다. 촉(觸)의 인연 때문에 수(受)를 발생시킨다. 깊이 수(受)를 

     좋아하는 까닭에 갈애(渴愛)를 발생시킨다. 갈애가 증장하는 까닭에 취(取)를 

     발생시킨다. 취(取)가 증장하는 까닭에 다시 뒤의 유(有)를 일으킨다. 유(有)의 

     인연인 까닭에 태어남, 늙음, 죽음, 근심, 슬픔, 고통, 번뇌가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은 고통의 무더기를 키우지만, 이 중에는 모두 공(空)이며, 나와 나의 것

     [我所]을 여의었으며,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으니, 풀과 나무와 돌벽과 같

     으며, 또한 메아리와 같다. 그러나 모든 중생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고

     뇌를 받는다.”[『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28b18-c3; 大26 p.142b2-9. 

     於三界地, 復有芽生, 所謂名色共生不離. 此名色增長已, 成六入聚. 成六入已, 

     內外相對生觸. 觸因緣故, 生受. 深樂受故, 生渴愛. 渴愛增長故, 生取. 取增長故, 

     復起後有. 有因緣故, 有生老死憂悲苦惱. 如是衆生生長苦聚, 是中皆空離我我所, 

     無知無覺, 如草木石壁, 又亦如響. 然諸衆生不知不覺而受苦惱.)] 세친은 십이연

     기(十二緣起)에 대한 이『십지경』의 경문을 자상(自相), 동상(同相), 전도상

     (顚倒相)의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자상은 무명에서 유(有)까지, 

     상은 유의 인연으로 인한 태어남, 늙음, 죽음 등이며, 전도상은 이와 같은 고

     통의 무더기가 모두 공이고 나와 나의 것을 여의었지만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

     하는 것이다.[『십지경론』(高15, p.28c4-6; 大26, p.142b10-12)]

90) 자상(自相, svabhāva)은 다른 것과 차별되는 자기만의 특성을 가리킨다. 세친

     은 여기에서 연기의 자상을 과보의 상[報相], 저것으로 인한 상[彼因相],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한편 세친

     은『구사론』에서 자상을 공상(共相, sāmānyabhāva), 즉 동상에 대립되는 개념

     으로, 다른 법과 함께 하지 않는 자기만의 특성이라고 하고, 공상은 다른 법과

     함께 하는 공통된 특성이라고 설한다.(高27, p.621a12; 大29, p.118c21 등)

91) 명색(名色, nāmarūpa)에서 명(名)은 모든 유위법의 정신적[心的]인 측면을, 색

     (色)은 물질적인 측면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명색은 오온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으며, 십이연기 중 네 번째 항목이다.[세친,『구사론』(高27, p.521b20

     -c5; 大29, p.48b20-b27 등)]

92) 아리야식(阿梨耶識)은 산스크리트어 ālayavijñāna의 구역(舊譯)으로 신역(新譯)

     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이것은 저장의 식[藏識]이란 뜻으로 유식학파(唯

     識學派)에서 인간의 마음을 여덟 가지로 분석한 가운데 하나이다. 아리야식은

     세 가지의 의미와 기능을 지니는데, 첫째는 일체 중생의 모든 염오된 법이 현행

     (現行)한 결과가 이 식에 저장되고[果相], 둘째는 이 식이 일체 중생의 모든 염

     오된 법에 저장되어 뒷날 현행의 원인으로 작용하며[因相], 셋째는 모든 중생이

     이 식을 자기 자신으로 삼는 것[自相, 我愛執藏]이다.[무착,『섭대승론(攝大乘

     論)』(高16, p.1054a20; 大31, p.114a6); 『성유식론(成唯識論)』(高17, pp.

     519c17-a9; 大31, pp.7c20-8a4)]

93) 삼계(三界, trayo dhātavah)는 중생이 윤회하는 세 종류의 세계로서, 욕망이 지

     배하는 욕계(欲界), 물질적 세계이지만 욕망이 배제된 색계(色界), 물질적 세계

     도 아닌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킨다.[『중아함경(中阿含經)』(高18, p.188b21; 

     大1, p.723b28); 세친,『구사론』(高27, p.511b22; 大29, p.41b22 등)] 십지

     (十地) 중 제6현전지(現前地)에서는 이 삼계를 단지 마음[心]이 지은 것일 뿐이

     라고 설한다.[세친,『십지경론』(高15, p.68a22-23; 大26, p.169a15);『육십

     화엄(六十華嚴)』(高8, p.178c24; 大9, p.558c10)] 화엄종에서는 이 마음을 

     여래장자성청정심(如來藏自性淸淨心) 또는 여래성기구덕심(如來性起具德心)의 

     진심(眞心)으로 이해하여 유심(唯心) 사상을 펼쳐나간다.[지엄,『수현기』(高47, 

     p.45b27-c3; 大35, p.63b17-21 등)]

94)『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28b18-19; 大26, p.142b2).

95)『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28b19; 大26, p.142b3).

96) 육입(六入, s3 ad3 āyatana)은 눈·귀·코·혀·몸·뜻의 육근(六根)을 의미하며 신역

     (新譯)에서는 육처(六處)라고 번역한다. 십이연기 중 다섯 번째 항목으로서, 감

     각대상인 육경(六境)과 함께 십이입(十二入)을 이룬다. 세친은 십이연기에서 육

     입은 눈 등의 육근이 생긴 후 이 감각기관과 식(識)과 대상이 화합하지 전까지

     를 일컫는다고 설한다.[『구사론』(高27, p472a3, p.521c5-6; 大29, p.14b4,

     p.48b27-b28)]

97) 유(有, bhava)는 십이연기 중 열 번째 항목으로서 세친의 『구사론』에 의하면

     미래의 존재[當有]인 생(生)을 이끄는 업을 쌓는 것이다.(高27, p.521c11-12; 

     大29, p.48c3-4)

98) ‘육입(六入)에서부터 유(有)에 이르는 것이다’는 십이연기 중 육입(六入)·촉

     (觸)·수(受)·애(愛)·취(取)·유(有)’의 여섯 지(支)를 가리킨다.

99) 내지(乃至)로 생략된 부분은 “육입을 이루고 나서는 안과 밖이 상대하여 촉(觸)

     을 발생시킨다. 촉(觸)의 인연 때문에 수(受)를 발생시킨다. 깊히 수(受)를 좋아

     하는 까닭에 갈애(渴愛)를 발생시킨다. 갈애가 증장하는 까닭에 취(取)를 발생

     시킨다. 취(取)가 증장하는 까닭에 다시 뒤의 유(有)를 일으킨다”이다.[『십지경

     론(十地經論)』(高15, p.28b20-22; 大26, p.142b18-20. 成六入已, 內外相對生

     觸. 觸因緣故生受. 深樂受故生渴愛. 渴愛增長故生取. 取增長故復起後有.)]

100) 나와 나의 것[我所]에서 나[我, ātman]는 자기자신을 가리키며 나의 것[我所,

     mamakāra]은 자기자신 이외의 사물에 집착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을 말

     한다.『육십화엄(六十華嚴)』에서는 나의 것이 바로 사성제 중의 고제(苦諦)이고

     나의 것이 없는 것이 멸제(滅諦)라고 하며, 나의 것을 번뇌라고 설한다.[『육십화

     엄(六十華嚴)』(高8, p.31a13, p.31b12-13; 大9, p.421c15-16, p.422a10-11)]

101) 지(知)와 각(覺)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나, 현존 범본 및 이역본들

     의 해당 구절과 비교해볼 때, 문맥상으로 일반적인 인식행위를 가리키는 것으

     로 생각된다.[Ryūkō Kondō ed. Daśabhūmīśvaro nāma mahāyānasūtram3 

     (p.24L6-7); Dr P.L. Vaidya ed. Daśabhūmikasūtra Buddhist Sanskrit Texts 

     No.7(p.11L30-31);『불설십지경(佛說十地經)』(高37, p.550b7-9; 大10, pp.

     539c28-540a1);『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28c1; 大26, p.142b7-8.)]

102)『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28b19-c2; 大26, p.142b3-8).

103) 무아(無我, anātman)란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자아(自我)는 없다는, 불교의 가

     장 근본적이고 특징적인 사상 중 하나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할 당시, 인도

     종래의 종교인 브라만교의 아트만설(ātman說)에 반대하여 주창된 것으로, 제법

     무아(諸法無我, nirātmānahsarvadharmāh)로 설해진다.『잡아함경』(高18,

     p.799b2-7; 大2, p.66c18-23) 등에서는 제법무아를 설한 후 그 이유를 모든 법이

     자아(自我)에 의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연(緣)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친은『십지경론』에서 중생이 키운 고통의 무더기 또한 연에 의해 이루

     어진 것이므로 무아라고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104) 인연의 자상(自相)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하고 있는 이 인용문은 지엄이『공목

     장』에서 인용한 세친의『십지경론(十地經論)』부분을 의상이 재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의상은『십지경론』(高15, p.28c6-21; 大26, p.142b12-24)이나『공목

     장』(大45, p.563c12-22)의 내용에 『십지경』 원문을 보충하여 인용함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십이인연(十二因緣)105) 등은 곧 체(體)의 자성이 공

(空)하여 저 아리야식을 의지하여 생겨난다. 아리야식은 미세하고, 자체가

무아(無我)이며, 십이인연을 낳는다. 십이인연도 다 무아(無我)이니, 따라

서 연(緣)으로 생겨난 것들은 별다른 법이 있지 않다. 부처님도 연기를 관

하는 문[緣起觀門]을 들어서 모든 법이 다 무분별이며 곧 참된 성품을 이

룸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십지경론[地論]』에서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第一義諦)106)에 들어간다”107)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뜻은 삼승(三乘)에 있으며, 또한 일승(一乘)에도 통한

다. 왜냐하면 일승을 목표로 한 것[所目]이기 때문이다.108)

當知. 十二因緣等, 卽體自性空, 依彼阿梨耶識生.108) 梨耶微細,

自體無我, 生十二因緣. 十二因緣, 亦109)皆無我, 故緣生等, 無

有別法. 佛擧緣起觀門, 以會諸法一切無分別卽成實性. 故地

論言,“ 隨順觀世諦, 卽入第一義諦,” 是其事也. 此義在三乘,

亦通一乘. 何以故? 一乘所目故.

105) 십이인연(十二因緣, dvādaśān gapratītyasamutpāda)은 유정(有情)의 생사윤회를

      열 두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으로, 십이연기(十二緣起)라고도 한다. 이 십이

     연기에 대해서는 각 경론에서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는데『불설장아함경』에서

     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열두 단계는 ①미혹함의 근본인 무명(無明,avidyā), 

     ②무명으로부터 다음의 의식 작용을 일으키는 업인 행(行, sam3 skāra), ③의식 

     작용인 식(識, vijñāna), ④마음과 물질을 가리키는 명색(名色,nāmarūpa), ⑤안

     (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 오관(五官)과 의근(意根)의 육처(六處, sad-

     āyatana), ⑥육근이 대상과 만나는 촉(觸, sparśa), ⑦육근과 대상의 접촉을 통

     해 받아들이는 감각인 수(受, vedanā), ⑧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구하는 애(愛,

      trsnā), ⑨자기가 욕구하는 것을 취하는 취(取,upādāna), ⑩다음 세상의 결과를 

     불러올 업인 유(有, bhava), ⑪이생에서 몸을 받아 태어나는 생(生, jāti), ⑫늙어

     서 죽는 노사(老死, jarāmaran3 a)이다.(高17, pp.896c6-897a7; 大1, p.60b8-

     29)『육십화엄(六十華嚴)』에서는 생사의 경계가 바로 깨달음의 경계라는 구절

     등을 통해 십이연기 자체가 바로 해탈문임을 밝히고 있다.(高8, p.274a16; 大9, 

     p.648b8-9 등)

106) 세제(世諦, samvrtisatya)와 제일의제(第一義諦, paramārthasatya)는 일체 모든

     법을 둘로 구분하여 보는 것으로, 일반적인 의미로서 세제는 세간의 법, 제일의

     제는 세간의 법을 뛰어넘는 최고의 경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육십화엄

     (六十華嚴)』에서는 모든 세간법이 언어에 이치에 따른 것임을 세제로, 하지만

     모든 세간법이 자성이 없으며 언어의 경계가 끊긴 것임을 제일의제로 설하면서

     동시에 보살은 이러한 이제(二諦)를 여실히 앎으로써 이제에도 집착하지 않음

     을 밝히고 있다.(高8, p.56c22-25, p.199c5-6; 大9, p.447a9-12, p.580a11-13)

107) 지엄이『공목장』에서 세친의『십지경론』(高15, p.68b2; 大26, p.169a17)을 

     인용한 부분이다.『십지경론』의 이 구절은『십지경』중 제6현전지의 “삼계

     (三界)가 허망하여 단지 한 마음이 지은 것이다”의 경문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육십화엄(六十華嚴)』에도 보인다.(高8, p.178c24-25; 大9, p.558

     c9-10)

108) 위의 ‘연기란[緣起者]’부터 여기 “일승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一乘所目故]”까

     지가 의상이 지엄의 『공목장』을 인용한 부분이다.(大45, p.563c9-29)

109) 저본에는「示」로 되어 있으나 갑본과『공목장』에 따라「亦」으로 바꾸었다.


만약 별교일승(別敎一乘)을 기준으로 하면, “간략히 열 가지 문을 설한

다. 말하자면 인연은 나뉘어 차례가 있는 까닭이며, 한 마음에 포섭되는

까닭이며, 자상과 업으로 이루기 때문이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

문이며, 세 길[三道]110)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과거와 미래를 관하기

때문이며, 세 고통[三苦]111)이 모인 것이기 때문이며, 인연으로 생기기 때

문이며, 인연의 생함과 멸함에 묶여 있기 때문이며, 있음과 다함을 따르

는 관(觀)이기 때문이다.112) 이와 같은 십이인연은 일승(一乘)의 뜻에 포

섭된다.”113)

若約別敎一乘,“ 略說十門. 所謂因緣有分次第故, 一心所攝

故, 自業成故, 不相捨離故, 三道不斷故, 觀前後際故, 三苦集

故, 因緣生故, 因緣生滅縛故, 隨順有盡觀故. 如是十二因緣,

一乘義攝.”

110) 세 길[三道]은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인과를 밝힌 것으로, 허망한 마음을 뜻하는

     번뇌도(煩惱道), 번뇌로 인해 생기는 몸과 입과 마음의 업인 업도(業道), 번뇌와

     업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통인 고도(苦道)를 의미한다. 십이연기지에서는 무명

     과 애(愛)와 취(取)는 번뇌도이고, 행(行)과 유(有)는 업도이며, 나머지는 고도이

     다.[『육십화엄(六十華嚴)』(高8, p.179b3-6; 大9, p.559a9-12)]

111) 세 고통[三苦]은 고고(苦苦)·괴고(壞苦)·행고(行苦)[『불설장아함경』(高17,

     p.882a7-8; 大1, p.50b12)]로서, 세친은『구사론』에서 이를 즐겁지 않은 

     것으로부터 생기는 고고(苦苦)와 즐거운 것이 없어지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괴고(壞苦), 모든 유위법이 즐거운 것이든, 즐겁지 않은 것이든 무상(無常)

     하기 때문에 오는 행고(行苦)로 설명한다.(高27, p.614b23-c21; 大29, p.

     114b5-23)『화엄경(華嚴經)』에서는 이것을 십이연기에 대응시켜, 무명

     부터 육입까지는 행고로, 촉(觸)과 수(受)는 고고로, 나머지는 괴고로 설하

     고 있다.[『육십화엄(六十華嚴)』(高8, p.179b9-12; 大9, p.559a15-19)]

112) 이상을 열 가지로 십이인연을 관하는 것[十重十二因緣觀]이라고 한다.『십지

     경』과『육십화엄(六十華嚴)』에서의 해당 위치는 다음과 같다.『십지경론』

     (高15, p.70b15-19; 大26, p.170c4-8);『육십화엄(六十華嚴)』(高8, p.179

     b17-b20; 大9, p.559a24-27). 이 가운데 열번째, 있음과 다함을 따르는 관

     [隨順有盡觀]은『육십화엄(六十華嚴)』에 없음과 다함의 관[無所有盡觀]으

     로 되어 있다. 이 차이에 대해 법장은 연(緣)을 기준으로 하면 없음[無所有]

     을 관하는 것이고, 모습[相]을 기준으로 하면 있음[有]에 수순하여 관하는 

     것이지만『십지경론』의 있음에 수순하여 관하는 것은 생겨남이 없음[無生]

     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경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회통시키고 있

     다.[『화엄경탐현기』(高47, p.687b25-c4; 大35, p.352a29-b9)]

113) 이 인용문은 지엄의『공목장(孔目章)』가운데「연생장(緣生章)」(大45, 

     p.568b3-7)에서「십지품」중 제6지 현전지(現前地)의 보살이 10중(重)

     으로 십이인연을 관하는 구절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의상이 인용한 것이다.


무슨 이유로 열 번을 헤아려 설하는가? 한량없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

문이다.

묻는다. 열 번의 인연은 앞과 뒤에 해당하는가, 동시[一時]에 해당하는

가? 답한다. 곧 앞과 뒤이기도 하고 곧 앞과 뒤가 없기도 하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문이 같지 않기 때문에 곧 앞과 뒤이고, 육상(六

相)으로 이루어진 까닭에 곧 앞과 뒤가 없다.

그 뜻은 무엇인가? 열 번이 비록 다르지만 한 가지로 무아(無我)를 이루

기 때문이다.

何故十番數說? 欲顯無量故.

問. 十番因緣, 爲當前後, 爲當一時耶? 答. 卽前後, 卽無前後.

何以得知? 門不同故, 卽前後, 六相成故, 卽無114)前後.

其義云何? 十番雖別, 而同成無我故.

114) 저본에는「無」가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영락경(瓔珞經)』115)의 열 번의 인연116)은 삼승(三乘)의 뜻에 포섭된다.

왜냐하면, 가르침에 따라서 차별되어 같지 않기 때문이다.”117)

자세히는『십지경론[地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118) 십이인연의 설과 같

이, 연(緣)으로 생겨난 다른 모든 법도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

“瓔珞經十番因緣, 三乘義攝. 何以故? 隨119)敎差別不同.” 廣

如地論說. 如十二因緣說, 餘緣生諸法, 准例可解.

115)『영락경(瓔珞經)』은『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의 줄임말이다. 현존본

     은 요진(姚秦)의 축불념(竺佛念)이 요진 건원(建元) 12년에서 14년(376~378)간

     에 번역한 것으로 2권본이다. 8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보살의 본업(本業)인 십

     신심(十信心), 십주심(十住心), 십행심(十行心), 십회향심(十廻向心), 십지심(十

     地心), 입법계심(入法界心), 적멸심(寂滅心)의 52계위와 대승의 삼취정계(三聚

     淨戒) 등에 대해 설하고 있다. ‘영락본업’이라는 화엄관계 용어의 경명(經名)과

     42위를 포함하는 보살계위, 제7품「대중수학품(大衆受學品)」에서『화엄경(華嚴

     經)』의 설법처와 내용을 싣고 있는 점 등을 볼 때『화엄경(華嚴經)』과 상당히 깊

     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또한『범망경』과 함께 동아시아불교의 대승계율에 있어

     서 중요 경전으로 여겨져 왔다.

116)『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현성학관품(賢聖學觀品)」에서 열 가지 관

     (觀)하는 마음으로 관(觀)하는 법[十觀心所觀法] 중 여섯번째 ‘법의 연기(緣起)에

     통달하는 지혜[達有法緣起智]’를 설하는 부분을 가리킨다.(高14, p.381a21-b5; 大

     24, p.1015a22-28) 『영락경』의 열 번의 인연관(因緣觀)은 다음과 같다. ①아견(我

     見)의 십이인연[我見十二緣], ②마음으로 삼는 십이인연[心爲十二緣], ③무명(無

     明)의 십이인연[無明十二緣], ④서로 연유하는 십이인연[相緣由十二緣], ⑤도와

     이루는 십이인연[助成十二緣], ⑥세 가지 업의 십이인연[三業十二緣], ⑦삼세(三

     世)의 십이인연[三世十二緣], ⑧세 가지 고통의 십이인연[三苦十二緣], ⑨성품이

     공한 십이인연[性空十二緣], ⑩얽매여 생겨나는 십이인연[縛生十二緣].

117) 지엄,『공목장(孔目章)』(大45, p.568b7-8)

118) 세친의『십지경론』에서『십지경』의 제6현전지 중 열 가지의 인연관(因緣觀)에

     대해 해석한 부분을 가리킨다.(高15, pp.70b15-71c4; 大26, pp.170c4-171b15)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인연이 나뉘어 차례가 있음[因緣分次第]은 십이

     인연은 앞의 것을 인연으로 하여 차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짓는 이가 있는 것

     이 아니며, 따라서 지어지는 것도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②한 마음에 포섭됨

     [一心所攝]은 삼계(三界)는 모두 한 마음이 지은 것이며, 여래께서 설하신 십이

     인연 또한 모두 한 마음에 의한 것임을 관하는 것이다. ③자상과 업으로 이룸

     [自業成]은 십이인연의 각 지(支)에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예를 들어 무명의

     경우 연 가운데 어리석음이 무명의 자상(自相)이고, 행(行)을 이루는 원인이 되

     는 것이 무명의 업임을 관하는 것이다. ④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不相捨離]

     은 십이인연 중 앞의 지가 뒤의 지를 일으키지만, 뒤가 없으면 앞도 없음을 관

     하는 것이다. ⑤세 길[三道]이 끊어지지 않음[三道不斷]은 십이인연을 번뇌도

     (煩惱道), 업도(業道), 고도(苦道)로 나누어, 이 세 길은 자성이 없으나 생멸을 계

     속하여 끊어짐이 없으니, 두 대나무가 서로 기대어 서 있는 것과 같음을 관하는

     것이다. ⑥과거와 미래를 관함[觀先後際]은 십이인연 중 무명과 행은 과거세이

     며, 식(識)부터 수(受)까지는 현재세이고, 애(愛)부터 노사(老死)까지는 미래세

     로서 이 삼세가 끊임 없이 계속 이어지나, 무명이 멸하면 삼세의 상속이 멸함을

     관하는 것이다. ⑦세 고통[三苦]이 모인 것임[三苦集]은 십이인연이 모두 고고

     (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의 세 고통에 속하여 모두 고통이지만, 만약 무명

     이 멸하면, 이 세 고통의 상속이 끊어짐을 관하는 것이다. ⑧인연으로 생김[因緣

     生]은 십이인연 모든 지(支)가 자신의 인(因)에 의해 생겨나므로 남에 의해 일어

     나는 것이 아니고, 앞의 지의 연으로부터 생겨나므로 자신에 의해 생겨나는 것

     이 아님을 관하는 것이다. ⑨인연의 생함과 멸함에 묶여 있음[因緣生滅縛]은 십

     이인연이 모두 짓는 이도 없고 생겨날 때 머무르지도 않아서 자신에 의해서도,

     남에 의해서도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순하여 서로 생과 멸에 묶여 있음

     을 관하는 것이다. ⑩있음과 다함을 따르는 관(觀)[隨順有盡觀]은 십이인연 중

     앞의 지를 연하여 뒤의 지가 있음을 관하는 것은 있음을 따르는 관이고, 앞의 지

     가 멸함에 뒤의 지가 멸함을 관하는 것은 다함을 따르는 관이다.

119) 저본에는「唯」로 되어 있으나『공목장』에 따라「隨」로 바꾸었다. 갑본에는

    「准」으로 되어 있다.


둘째, ‘다라니법(陀羅尼法)’은 아래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셋째, ‘사(事)에 즉하여 법을 포섭한다’는 것은 인다라니[因陀]120)와 미

세다라니[微細陀]121)를 나타내기 때문이니, 자세한 뜻은 경에서와 같다.

넷째, 말한 바 ‘구세(九世)’라는 것은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 미래의 과거, 미래의 현재,

미래의 미래세이다. 삼세(三世)가 상즉하고 상입하여122) 그 일념(一念)을

이룬다. 총과 별을 합하여 이름 붙인 까닭에 ‘십세(十世)’123)이다. ‘일념’은

현상으로서의 순간[事念]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二陀羅尼法者, 如下說. 三卽事攝法者, 顯因陀及微細陀故, 廣

義如經. 四所謂九世者, 過去過去, 過去現在, 過去未來, 現在

過去, 現在現在, 現在未來, 未來過去, 未來現在, 未來未來世.

三世相卽及與相入, 成其一念. 總別合名故十世. 一念者, 約事

念說也.

120) 인다라니[因陀]는 인드라망의 다라니로서, 지엄의 십현문 중 인다라망경계문을

     가리킨다.[『수현기』(高47, p.2b21-22; 大35, p.15b6-7)]

121) 미세다라니[微細陀]는 지엄의 십현문 중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을 가

     리킨다.[『수현기』(高47, p.2b21-22; 大35, p.15b6-7); 『화엄오십요문답(華

     嚴五十要問答)』(大45, p.520b26-c9)]『총수록(叢髓錄)』에서는 인다라니가 

     상즉을, 미세다라니는 상입을 표현하여 함께 일승법계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을 

     드러낸다고 설하고 있다.(韓6, p.829a8-17; 高45, p.208a13-19)

122)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에서 상즉은 법계의 수많은 연기된 존재[事]들의 체성

     (體性)이 모두 무자성(無自性)·공(空)이어서 같음을 의미하고 상입(相入)은 법

     계의 모든 연기된 존재가 무자성, 공이어서 서로서로 받아들이고 용납함을 일

     컫는다. 이 상즉과 상입은 화엄교학에 있어서 법계연기를 나타내는 주요한 용

     어이며, 상즉은 연기의 체(體), 상입은 연기의 용(用)의 측면에서 설명된다. 그

     경증(經證)은『육십화엄(六十華嚴)』의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곧 하나임

     을 안다”(高8, p.55c7; 大9, p.446a5)는 구절과 “한 국토로 시방을 가득 채우고, 

     시방의 국토가 한 국토에 들어가 남음이 없다”(高8, p.23c11; 大9, p.414 p.b21)

     는 구절 등이다. 의상은 상즉과 상입이 각각 연기실상다라니법(緣起實相陀羅尼法)의

     이법[理]과 작용[用]을 나타낸다고 하며[『일승법계도』(韓2, p.2c19)], 구체적으로

     수십전법(數十錢法)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123) 십세(十世)는 구세(九世)에 일념을 합한 것이다.『육십화엄(六十華嚴)』「이세간

     품(離世間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살이 열 가지로 삼세(三世)를 설한다고 밝히고

     있다. 열 가지는 “과거세에 과거세를 설하고, 과거세에 미래세를 설하고, 과거세

     에 현재세를 설하고, 미래세에 과거세를 설하고, 미래세에 현재세를 설하고, 미

     래세에 다함 없음을 설하고, 현재세에 미래세를 설하고, 현재세에 과거세를 설

     하고, 현재세에 평등을 설하고, 현재세에 삼세가 곧 일념임을 설한다”이다.(高

     8, p.257b4-b11; 大9, p.634a27-b5. 過去世說過去世, 過去世說未來世, 過去世

     說現在世, 未來世說過去世, 未來世說現在世, 未來世說無盡, 現在世說未來世, 現

     在世說過去世, 現在世說平等, 現在世說三世卽一念.) 지엄과 의상은 이 구세와 

     십세가 상즉상입하나 또한 각각 따로 이루어짐을 꿈의 비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총수록(叢髓錄)』(高45, p.156b6-b16)]



다섯째, ‘지위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육상(六相)의 방편으로써 뜻에

따라서 풀어나가면 곧 이해할 수 있다. 육상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묻는다. ‘연기’라는 한 마디 말 중에 모든 법이 둘이 아님이 곧 드러나

있는데 왜 많은 문이 필요한가? 답한다. 체(體)를 알면 곧 그러하여 멀리

서 구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음욕[婬]과 분노[怒]와 어리

석음[癡]의 성품이 곧 보리(菩提)이다”124)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

은 것들에서 어리석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부처님께서 일곱 가지

괴로움에 대한 진리125) 이외에 따로 보리(菩提)가 있어, 세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설하신 대로 수행하여야만 [피안(彼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가

르치신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을 위하여 많은 문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묻는다. 만약 그렇다면 법문이 수없을 것인데 왜 오직 여섯 문의 설명뿐

인가? 답한다. 여섯 문으로 설명한 것도 모든 법을 예에 준하여 마땅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간략히 이와 같이 설하였으니, 실은 말 그대로이다.

여섯째,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冥然無分別]’는 것은 연기의 법이 으레

그러하기 때문이니, 위에 준하여 생각할 수 있다.

五約位者, 以六相方便, 隨義消息, 卽可解也. 六相者, 如上說.

問. 緣起一言中, 諸法無二, 卽顯了手126), 何須多門? 答. 體解

卽是, 不須遠求. 是故經言, “婬怒127)癡性, 卽是菩提.” 如是等

迷極遠, 是故佛敎七種苦諦以外, 別有菩提, 三無數劫, 如說修

行, 乃可得度. 爲迷之者, 須多門說.

問. 若如是者, 法門無數, 何故唯六門說耶? 答. 以六門說, 諸

法准例, 應可解故, 略如是說, 其實如言.

六, 冥然無分別者, 緣起法法如是故, 准上可思.

124) 이와 같은 내용은 여러 경전에 보이며, 그 한 예로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성품이 곧 해탈이라고 설하셨다.”[『유마힐소설경(維

     摩詰所說經)』(高9, p.992c21; 大14, p.548a16-18. 佛說婬怒癡性卽是解脫.)]

125) 일곱 가지 괴로움에 대한 진리[七種苦諦]는 일곱 가지의 삶과 죽음[七種生死]이

     라고『총수록(叢髓錄)』에서 해석하고 있다.(韓6, p.822a18; 高45, p.199b8) 즉 

     삼계(三界)의 중생이 자신의 과보에 따라 받는 분단생사(分段生死)와 세 가지와 보

     살의 원력(願力)에 의한 방편, 인연, 유유(有有), 무유(無有)의 변역생사(變易生

     死) 네 가지를 가리킨다.

126) 저본에는「乎」로 되어 있으나 갑본과『총수록(叢髓錄)』의 주석에 따라「手」로

      바꾸었다.(高45, p.199a12)

127) 저본에는「惱」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怒」로 바꾸었다


나) 이타행(利他行)

둘째는 이타행 중에 나아감이니, ‘해인(海印)’이란 비유를 들어서 이름

붙인 것이다. 왜냐하면, 큰 바다는 매우 깊고 밝고 맑아 밑바닥까지 비치

니, 천제(天帝)와 아수라가 싸울 때 모든 병사들과 모든 무기들이 그 가운

데에 나타나 분명히 드러남이 마치 도장으로 글자를 찍은 것과 같기 때문

에 ‘해인’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능히 삼매에 들어가는 것 또한 이와 같

다. 법성을 완전히 증득하여 밑바닥이 없으므로 끝까지 청정하고 맑고 밝

아서, 세 가지 세간이 그 가운데 나타나므로 이름하여 ‘해인’이라고 한 것

이다.

二就利他行中, 海128)印者, 約喩得名. 何者, 是大海極深, 明淨

徹底, 天帝共阿脩羅鬪諍時, 一切兵衆, 一切兵具, 於中現129)現

了了分明, 如印顯文字, 故名海印. 能入三昧亦復如是. 窮證法

性, 無有源底, 以究竟淸淨, 湛然明白, 三種世間於中顯現, 名

曰海印.

128) 저본에는「海」가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129) 저본에는「離」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現」으로 바꾸었다.


‘번다하다[繁]’란 치성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타낸다[出]’는 것은

솟아나오는 것이 다함없기 때문이다. ‘여의(如意)’란 비유를 따라 이름 붙

인 것이다. 여의보왕(如意寶王)이 무심히 보배를 비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데 연을 따라 끝이 없다. 석가여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 또한 이와

같아서, 한 소리[一音]로 펼친 것이 중생계를 따라 악을 없애고 선을 일으

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데, 어디든 필요한 곳에 따라서 여의롭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여의’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繁者, 熾盛義故. 出者, 涌出無盡故. 如意者, 從喩得名. 如意

寶王, 無心而雨寶益生, 隨緣無窮. 釋迦如來善巧方便, 亦復如

是, 一音所暢, 應衆生界, 滅惡生善, 利益衆生, 隨何用處, 無

不如意, 故名如意.


다) 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脩行者方便及得利益]

셋째, 수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하면, 이 중에 둘이 있다. 첫째는 수행의

방편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이익 얻음을 변별한 것이다.

첫째 문에서 ‘행자(行者)’란 일승의 보법(普法)130)을 보고 들은 이후, 아

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이것은 별교일승을 기준

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방편일승(方便一乘)131)을 기준으로 하여 설

하면 오승(五乘)132)이 모두 일승에 들어가 포섭된다. 왜냐하면, 일승으로부

터 흘러나오는 것[一乘所流]이고, 일승을 목표로 하는 것[一乘所目]이고,

일승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면 오승을 모두 포섭

하니, 일승의 수행자도 또한 가능하다.

三約修行方便者, 此中有二. 一明修行方便, 二辨得利益.

初門行者者133), 謂見聞一乘普法已去, 未滿證普法已還. 是此

約別敎一乘說也. 若約方便一乘說, 五乘總是入一乘攝. 何以

故? 以一乘所流一乘所目一乘方便故. 若約此義, 總攝五乘,

一乘修行者亦得.

130) 보법(普法)은 널리 두루하여 원만하지 않음이 없는 법으로『화엄경(華嚴經)』

     여러 곳에서 널리 설해지고 있으며(高8, p.346b21-c3; 大9, p.713c20-26 등) 

     화엄교 전체를 보법으로 말하고 있다. 지엄은 보법을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

     의 체(體)라고 하면서, 별교일승(別敎一乘) 즉 화엄종이라고 설한다.[『화엄오십

     요문답』(大45, pp.532b10-534c10)] 의상 또한 이 구절에서 일승보법을 별교일승

     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다. 원효는 그의 교판에서 일승만교의 화엄을 보법으

     로 표현하고 있다.[표원(表員),『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韓2,

     p.385b10-16)]

131) 방편일승(方便一乘)은 앞에 나온 별교일승과 대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일승을

     방편과 진실로 나누면 방편일승은 동교일승으로 생각된다.

132) 오승(五乘)은 삼승(三乘)과 소승(小乘), 인천승(人天乘)을 말한다.[『총수록(叢髓

     錄)』(高45, p.203a1 등)] 여기의 삼승은 대승시교(大乘始敎), 대승종교(大乘終敎),

     돈교(頓敎)이다.[『공목장(孔目章)』(大45, p.537b13-19 등)]

133) 저본에는「者」가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흘러나오는 것[所流]’과 ‘목표로 하는 것[所目]’은 연기의 도리를 기준

으로 한 말이고, ‘방편(方便)’은 지혜를 기준으로 한 말이다. 무슨 까닭인

가? 나아가 머무르지 않는 것을 방편이라 이름하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

은 것을 방편이라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설

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훌륭한 방편으로 중생을 가까이 이끌어 맞아

들이기 때문이니, 오승의 설과 같다. 사람[人]과 법(法), 원인[因]과 결과

[果], 앎[解]과 행(行), 이법[理]과 현상[事], 가르침[敎]과 뜻[義] 등의 일

체 모든 법도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所流所目者, 約緣起道理語, 方便者, 約智語. 何以故? 進趣不

住, 名曰方便, 不廻心者, 不名方便故. 亦可約聖者意說. 何以

故? 以善方便, 引接衆生故, 如五乘說. 人法因果解行134)理事

敎義等一切諸法, 准例如是.

134) 저본에는「行」이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묻는다. 이른바 오승(五乘) 등의 법은 설하는 가르침[能詮敎法]인가, 설

해지는 뜻[所詮義]인가?

답한다. 설하고 설해지는 일체 모든 법은 다 말[言] 가운데 있다. 그 뜻

이 무엇인가? 설해지는 법은 말[言相]이 모두 끊어졌으나 모든 부처님 세

존께서는 큰 자비와 본래 서원의 힘으로 인한 까닭에, 모든 부처님 집의

법이 으레 그러한 까닭에 말로 된 가르침을 베풀어 중생을 위하여 설하신

것이다. 이러한 뜻 때문에 가르침의 그물에 포섭되는 일체 모든 법이 다

말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이 단지 이름

[名字]이 있을 뿐이다”135)라고 한 것이 곧 그 뜻이다.

問. 所謂五乘等法, 爲是能詮敎法耶, 爲是所詮義耶?

答. 能詮所詮一切諸法, 皆在言中. 其義如何136)? 所詮之法,

言137)相皆絶, 諸佛世尊, 以大慈悲本願力故, 諸佛家法法如是

故, 施設言敎, 爲衆生說. 以是義故, 敎網所攝一切諸法, 皆悉

在言. 是故經言,“ 一切諸法但有名字,” 卽其義也.

135) 이 내용과 상응하는 구절은 여러 경전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중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연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법이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다”[『대반

     야바라밀다경』(高1, pp.28b18-29a21; 大5, pp.17c17-18a29. 從緣所生諸法,

     但有名)]; “일체의 법은 문자이다”[『육십화엄(六十華嚴)』(高8, p.259b16; 大9, 

     p.636a15. 一切法文字)].

136) 저본에는「何」가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137) 저본에는「言」이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묻는다. 증분(證分)의 법은 말[言相]로 미치지 못하고, 언교의 법[言敎之

法]138)은 현상[事] 가운데 있다면, 증분과 교분(敎分)의 두 법이 항상 두 변

에 있게 되는 허물이 있다.

답한다. 만약 정(情)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항

상 두 변에 있게 된다. 만약 이법[理]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증분과 교

분의 두 법은 옛부터 중도이고, 하나로서 무분별이다. 알 수 있는 까닭은

변계(遍計)는 모양[相]이 없고 의타(依他)는 생겨남이 없으며 진실(眞實)

은 성품이 없어서 세 가지의 자성139)이 항상 중도에 있으니, 세 법 이외에

다시 증분과 교분이 없다.

問. 證分之法, 言相不及, 言敎之法, 在於事中者, 證敎兩法,

常在二邊過.

答. 若約情說, 證敎兩法, 常在二邊. 若約理云140), 證敎兩法,

舊來中道, 一無分別. 所以得知, 遍計無相, 依他無生, 眞實無

性, 三種自性, 常在中道, 三法以外, 更無證敎.

138) 언교(言敎)의 법은 언어문자로 시설하는 가르침이라는 뜻으로서 곧 교분(敎分)

     또는 연기분(緣起分)에 해당한다.

139) 세 가지의 자성[三種自性]은 일체 존재의 성품 또는 모양[性相]을 변계소집성

     (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원

     성실성(圓成實性, parinis3 pannasvabhāva)의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구역(舊譯)은 각각 분별성상(分別性相)·의타성상(依他性相)·진실성상(眞實性相)

     이다. 변계소집성의 ‘변계’란 주변계탁(周邊計度)의 의미로서 범부가 집착하여

     나타난 경계이다. 즉, 실유가 아닌 외계대상을 실체가 있다고 오인하는 것을 말

     한다. 의타기성은 타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가유(假有)의 법이다. 원성실성은

     진여를 의미하니, 모든 곳에 두루하고 삼세에 걸쳐 항상 머무르는 일체 제법의

     진실한 체성이다.『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는 의타기상을 아리야식이 종자가

     되어 망령되이 분별하여 섭수한 모든 식으로, 변계소집상을 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식만이 존재하여 대상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으로, 원성실상을 의타

     기상 가운데 대상 비슷한 모습이 완전히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高16,

     pp.1292c5-1293a2; 大31, pp.137c27-138a15) 지엄과 의상은 지론종과 

     섭론종의 교섭을 통해 이 삼성설을 받아들여 화엄교리 형성에 활용하고, 이어

     서 법장은 이를 삼성동이설(三性同異說)로 체계화하기에 이른다.

140) 저본에는「云」이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하나로서 무분별이니,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이

이법[理]을 얻은 까닭에 이름[名相]으로 미치지 못하나, 중생을 위하여 설

하기 때문에 말이 현상[事] 중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의 게(偈)에서 이

르기를, “일체 모든 여래께서 부처님의 법을 연설하실 것이 없지만 그 교

화에 응하는 바를 따라서 법을 설하신다141)라고 한 것이 그 뜻이다. 그러

므로 성자(聖者)가 변계(遍計)를 따르는 까닭에 세 가지 자성[三性]을 세

워서 우선 궁핍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점점 이후에 세 가지 자성이 없

음[三無性]142)을 나타내 꿈꾸는 사람을 깨우니, 이것이 곧 성자의 큰 훌륭

하고 교묘한 [방편]이다.

是故當知. 一無分別, 是故至人得此理故, 名相不及, 爲生說

故, 言在事中. 故經偈云,“ 一切諸如來, 無有說佛法, 隨其所

應化, 而爲演說法,” 卽其義也. 是故聖者, 隨遍計故, 建立三

性, 且安窮心, 漸漸已後, 現三無性, 覺悟夢人, 此卽聖者大善

巧也.

141)『육십화엄(六十華嚴)』(高8, p.74c12; 大9, p.466a27-28).

142) 세 가지의 자성 없음[三無性]은 세 가지 자성[三性]에 대해 공(空)의 의미를 더욱 적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첫째 변계소집성은 상무성(相無性, laks3 an3 anih3 svabhāvatā)

     이니, 모든 법은 범부가 집착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가상(假相)이므로 모든 법에

     고유의 상(相)이 있지 않아 상(相)에 자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 의타기성

     은 생무성(生無性, utpattinih3 svabhāvatā)이니, 연기의 제법이 모두 뭇 연에 의해

     생긴 것이어서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생(生)에는 자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셋째 원성실성은 승의무성(勝義無性, paramārthanih3 svabhāvatā)이니, 연기된 

     모든 법이 무자성이므로 이것을 승의(勝義)로서 무자성이라고 하는 것이다.[『해

     심밀경(解深密經)』「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高10, pp.716c14-722b15; 大16, 

     pp.693c15-697c6)]


묻는다.『섭대승론[攝論]』143)에서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을 범부의 경

계, 의타기(依他起)와 진실(眞實)을 성자(聖者)의 지혜의 경계라고 하였는

데,144) 무엇 때문에 성자가 변계를 따르는 것인가?

답한다. 변계소집의 모든 법은 잘못 거꾸로 되었기[顚倒] 때문에 있다.

그러므로 논(論)145)에서 범부의 경계라고 말한 것이다. 결국 공(空)인 까닭

에 상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논에서 성자의 경계가 아니라는 것은

공에 대한 지혜가 성자의 경계가 아니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자

는 자비의 방편으로 눈병을 따르는 까닭에 허공의 꽃[空華]을 말한 것이

니, 어떤 비방이나 논란이 있겠는가?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問. 如攝論云, 遍計所執凡夫境界, 依他眞實聖智境界, 何故聖

者隨遍計耶?

答. 遍計諸法, 顚倒故有. 是故論云, 凡夫境界. 畢竟空故, 無

所可對. 是故論中, 非聖境界, 非謂智空非聖境界. 是故聖者,

慈悲方便, 隨眼病故, 言說空華, 有何妨難? 意146)在於此.

143)『섭대승론(攝大乘論)』은 ‘대승(大乘)의 요의(了義)를 포괄하는 논’이라는 뜻으

     로, 인도의 논사 무착(無着, Asan3 ga 4~5세기경)이 대승의 수승한 점을 열 가지

     로 나누어 유식사상에 근거하여 저술한 논서이다. 이 논서는 현재 산스크리트

     어본은 전해지지 않고, 티벳어역 1종과 한역(漢譯) 3종, 즉 불타선다(佛陀扇多,

     Buddhaśānta) 역(2권본), 진제(眞諦, Paramārtha, 499~569) 역(3권본), 현장(玄

     奘, 602?~664) 역(3권본)이 남아 있다. 이 논서에 대한 주석서로는 인도의 경우

     세친과 무성(無性, Asvabhāva)의 주석이 대표적이며, 동아시아에서도 수많은

     주석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진제가『섭대승론』을 번역한 후 이를 바탕으로 섭

     론종이 성립된다. 섭론종은 지론종과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며, 초기 화엄종의

     교리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144)『섭대승론』에 이 구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으나,『섭대승론』(高16,

     p.1063c16-23; 大31, p.120b20-26)에서 변계소집성은 없는 것이고, 의타기성과 진

     실성은 있는 것이라고 설한다. 이에 대한 세친의 주석인『섭대승론석(攝大乘論

     釋)』(高16, p.1157a13-b7; 大31, p.195b19-b6)에서 변계소집성은 범부의 경계이고

     진실성은 성인(聖人)의 경계라고 해석한다. 무착과 세친의『섭대승론』 관련 저

     술을 보면 전체 맥락에서 의타기성이 성인의 경계라고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여러 곳 나타난다.

145) 세친,『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高16, p.1157a13-b7; 大31, p.195b19-b6).

146) 저본에는「竟」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意」로 바꾸었다.


의타기상(依他起相)은 인연을 따라 생겨난 것으로 자성이 없어서 두 변

의 잘못을 여의었으니 무아(無我)와 같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평등한

법성(法性)으로서, 이것과 저것을 원융하여 분별할 수 없으니 옛부터 한

맛이다. 이 뜻 때문에 분별이 미치지 못하니, 그러므로 논(論)147)에서 성자

의 지혜의 경계라고 한 것이다. 다른 의미는 이와 같다.

依他起相, 從因緣生, 無有自性, 離二邊過, 與無我同. 圓成實

性, 平等法性148), 圓融彼此, 不可分別, 舊來一味. 以此義故,

分別不及, 是故論言, 聖智境界. 別意如是.

147)『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高16, p.1157a13-b7; 大31, p.195b19-b6).

148) 저본에는「性」이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세 가지 자성은 모두 범부의 경계

이다. 왜냐하면, 중생[情]을 따라서 현상[事]을 설하여 세 가지를 세운 것

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 가지 자성은 곧 성자의 지혜의 경계이다. 왜냐하

면, 지혜를 따라서 이법(理法)를 드러내어,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경에서도 또한 어떤 곳에서는 세 가지 자성[三性]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三無性]을 세우지 않고,149) 또한 어떤 곳에서는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따로 세우는 것이다.150)

若約實說, 三種自性, 皆是凡夫境界. 何以故? 隨情151)說事, 安

立三故.152) 三種自性, 卽聖智境界. 何以故? 隨智顯理, 非安立

故. 是故經中亦有處三性以外, 不立三無性, 亦有處三性以外,

別立三無性.

149)『해심밀경(解深密經)』「일체법상품(一切法相品)」(高10, pp.715c3-716c13; 大16,

     p.693a5-c14).

150)『해심밀경(解深密經)』「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高10, pp.716c14-722b15; 大16,

     pp.693c15-697c6).

151) 저본에는「性」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情」으로 바꾸었다.

152) 저본에는「三故」가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을 따라서 세운 것은 이해의 문[解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따로 세운 것이고, 지혜를 따라서 이법(理

法)을 드러낸 것은 수행의 문[行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둘153) 이외에 진

실이 없는데, 하물며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이 따로 있겠

는가? 알 수 있는 까닭은 모양 없는 평등한 지혜가 앞에 나타나 끝내 상대

할 만한 법이 없으며, 오직 중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이 세

워지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所以者何? 隨情安立, 約解門故, 別立三無性, 隨智顯理, 約行

門故, 三性154)以外不立三無性. 尙二以外無有眞實, 何況三性

以外別有三無性? 所以得知, 無相等智現前, 畢竟無法可對,

唯在中道故. 是故須解敎立所由.

153) ‘둘’은 세 가지 자성 중에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을 의미한다.[『총수록(叢髓錄)』

     (韓6, p.827a14-17; 高45, p.205b14-16)]

154) 저본에는「性」이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묻는다. 위에서 말한 증분의 법과 연기분의 법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한다. 차별되기도 하고 차별되지 않기도 하다. 그 뜻은 무엇인가? 증

분의 법은 참 모양[實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에 오직 깨달은 이가

알 바이고 연기분의 법은 중생을 위해 설하여 연(緣)과 상응한다. 그러므

로 완전히 차별된다.155) 연기의 법은 뭇 연(緣)으로부터 생겨나 자성이 없

어서 근본[本]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차별되지 않는다.

問. 如上所言, 證分之法及緣起分法, 有何差別?

答. 別不別. 其義云何? 證分之法, 約實相說, 唯證所知,156) 緣

起分法, 爲157)衆生說, 與緣相應. 是故全別. 緣起之法, 從衆緣

生, 無有自性, 與本不異, 是故不別.

155) 증분과 연기분이 차별되는 이유를 밝히는 이 구절이 저본에는 없으나 갑본을

     따라 보충하여 해석하였다.

156) 저본에는「故」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知」로 바꾸었다.

157) 저본은「爲」아래에「衆生說 與緣相應 是故全別 緣起之法」이 빠져 있으나 갑본

     을 따라 보충하였다.[『총수록(叢髓錄)』(韓6, p.812b22-23; 高45, p.188b17-18)]


묻는다. 만약 이와 같다면, 자신이 깨달은 것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하

는 것은 지말[末]과 다르지 않다. 보통은 차별인가?

답한다. 그 뜻도 가능하다. 만약 깨달은 것이 말[言]에 있다고 하면, 지

말[末]과 다르지 않다. 말이 깨달음에 있으면 근본과 다르지 않다. 근본과

다르지 않으므로 작용하면서도 항상 고요하고,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다. 지말과 다르지 않으므로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고, 말하지 않으면

서도 말한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므로 말하지 않는 것이 곧 말하지 않

는 것이 아니다.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으므로 말하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이므로 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말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둘 모두 없을 수 없으므로 둘이 모두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問. 若如是者, 以自所證, 爲衆生說, 與末不異, 尋常差別耶?

答. 得其義. 若爲所證在言, 與末不異. 言說在證. 與本不異.

與本不異故, 用而常寂, 說而不說. 與末不異故, 寂而常用, 不

說而說. 不說而說故, 不說卽非不說. 說而不說故, 說卽非說.

說卽非說故, 說卽不可得. 不說卽非不說故, 不說卽不可得. 二

俱不可得故, 二俱不相妨.


이 뜻 때문에 말함과 말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평

등하여 차별이 없다. 모든 차별의 상대하는 법문을 예에 준하면 이와 같

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유위와 무위의 일체 모든 법은 부처님이 계시

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성품과 모양이 항상 머물러서, 변하여 달라

짐이 없다”158)고 한 것이 그 뜻이다.

以是義故, 說與不說, 等無差別, 生與不生, 等無差別, 動與不

動, 等無差別. 一切差別相對法門, 准例如是. 故經云,“ 有爲

無爲一切諸法, 有佛無佛, 性相常住, 無有變異,” 是其義也.

158)『육십화엄(六十華嚴)』「십지품」에는 “일체 법의 성품과 일체 법의 모양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항상 머물러 달라지지 않는다”(高8,

     p.184c3-4; 大9, p.564c11-12. 一切法性, 一切法相, 有佛無佛, 常住不異.)라고 

     설하는 구절이 있다.『십지경』에서는 “이 일체법 중의 법성은 부처님이 계시거

     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무른다”(高15, p.85b17-18; 大26, 

     p.180c12-13. 此一切法中法性, 有佛無佛, 法界常住.)로 설하고 있다.


또한 바르게 말한 법 중에는 말[言說] 이외에 다시 다른 뜻이 없으니,

말로써 뜻을 삼는다. 바른 뜻의 법 중에는 바른 뜻 이외에 다시 다른 말이

없으니 뜻으로써 말을 삼는다. 뜻으로써 말을 삼으므로 말은 뜻 아님이 없

고, 말로써 뜻을 삼으므로 뜻은 말 아님이 없다. 뜻이 말 아님이 없으므로

뜻은 곧 뜻이 아니고, 말이 뜻 아님이 없으므로 말은 곧 말이 아니다. 말이

곧 말이 아니고, 뜻이 곧 뜻이 아니므로 둘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본래 중도(中道)에 있으니, 중도는 말과 말 아닌 것에 통한다.

亦可正說法中, 言說以外, 更無別義, 以言爲義. 正義法中, 正

義以外, 更無別言, 以義爲言. 以義爲言故, 言無非義, 以言爲

義故, 義無非言. 義無非言故, 義卽非義, 言無非義故, 言卽非159)

言. 言卽非言, 義卽160)非義故, 二俱不可得. 是故一切法, 本來

在中道, 中道者通言非言.

159) 저본에는「不」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非」로 바꾸었다.

160) 저본에는「非言義卽」이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의 참 모양[實相]은 말에 있지 않으니,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말의 법은 참된 성품[眞性]에 있지 않으니 근

기[機]의 이익에 있기 때문이다. 근기의 이익에 있으므로 이름에는 참된

성품이 없고,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으므로 이름을 붙이지만 이름이 없다.

이름을 붙이지만 이름이 없으므로 이름으로써 참됨[實]을 구하지만 참됨

을 구할 수 없다. 이름에 참된 성품이 없으므로 이름을 붙이지만 무아(無

我)와 같아서 이름의 성품은 얻을 수 없다. 이 뜻 때문에 둘 모두 얻을 수

없으니, 오직 증득한 자만이 알고 다른 이의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경

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것이고 나의 경

계가 아니다”161)라고 한 것이다.

何以故? 諸法實相, 不在言中, 離名性故. 言說法, 不在眞性,

在機益故. 在機益故,162) 名無眞性, 離名性故, 名而無名. 名而

無名故, 以名求實, 實不可得. 名無眞性故, 名而無我同故, 名

性不可得. 以此義故, 二俱不可得, 唯證所知, 非餘境界. 是故

經云,“ 一切諸法, 唯佛所知, 非我境界.”

161)『승만경』(高6, p.1369b5-7; 大12, p.222c23-25).

162) 저본에는「在機益故」가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묻는다. 앞과 뒤의 두 뜻이 어떻게 다른가?

답한다. 앞의 뜻은 근본과 지말이 상즉하고 상융(相融)함으로써 중도의

뜻을 드러내고, 뒤의 뜻은 이름[名]과 뜻[義]이 서로 객(客)이 됨으로써 무

아(無我)의 뜻을 드러낸다. 드러나는 도리는 다르지 않으나 설명하는 방

편이 다르다. 이는 곧 근본과 지말이 서로 돕고 이름과 뜻이 서로 객이 되

어서, 중생을 깨우쳐 인도하여 자체의 이름 없는 참된 근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니, 교화함과 교화됨의 핵심[宗要]이 여기에 있다.

問. 前後兩義, 何別?

答. 前義,163) 以本末相卽164)相融, 顯中道義,165) 後義, 以名義互

爲客, 顯無我義. 所顯道理不異,166) 能詮方便別. 此卽本末相

資, 名義互客, 開噵衆生, 令致自167)無名眞源, 能化所化宗要

在此.

163) 저본에는「義」다음에「可別」이 있으나 갑본에 따라 삭제하였다.

164) 저본에는「相卽」이 두 번 반복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 삭제하였다.

165) 저본에는「義」가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166) 저본에는「理」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異」로 바꾸었다.

167) 갑본에는「自体」로 되어 있다.


묻는다. 이 뜻은 돈교(頓敎)168)의 근본[宗]에 해당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서 설하는가?

답한다. 위에서 설한 것처럼 설함[說]과 설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

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모두 참된 덕이므로 비방하고 힐난할 것이 없으

며, 또 분별을 막기 위하여 삼승의 설에 따른 것이니, 대개 지혜로운 이의

수승하고 오묘한 능력이다. 위와 같은 증분과 연기분의 뜻은 논169) 중의

뜻이 큼[義大]과 가르침이 큼[敎大]170)에 해당한다.

問. 此義171)當頓敎宗, 何故此間說?

答. 如上說, 說與不說, 等無差別. 何以故? 總是實德故, 無有

妨難, 且護分別故, 順三乘說, 蓋是智者, 勝妙能也. 如上證分

及緣起分義, 當論中義大敎大也.

168) 돈교(頓敎)는 점차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언어와 사유분별을 떠나 단박에 깨

     닫는 가르침 또는 그것을 종지로 하는 교파(敎派)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점교

     는 낮은 경지에서 차례로 순서를 따라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가르침이나 교파

     를 가리킨다. 돈교와 점교에 구체적으로 어떤 경론이나 가르침을 해당시킬지에

     대해서는 각 종파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 화엄종의 지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점교(漸敎)·돈교(頓敎)·원교(圓敎)로 나눈 후,『화엄경(華嚴經)』을 돈교와 원교

     에 해당시켰는데[『수현기』(高47, pp.1a20-c25; 大35, pp.13c16-14c3); 

    『공목장』(大45, pp.558c16-559a24)], 법장은『화엄경(華嚴經)』을 원교에만 

     배대시킨다.[『화엄경탐현기』(高47, p.466a13-28; 大35, p.115c4-20)] 의상

     은『일승법계도』(韓2, p.8b2-5)에서 지엄의『수현기』를 인용하여, 십현문(十

     玄門)에 완전히 상응하는 가르침을 원교 또는 돈교에 해당한다고 설한다.

169)『공목장(孔目章)』(大45, p.562b5-c1).

170) 뜻이 큼[義大]과 가르침이 큼[敎大]에서 뜻이 큼은 증분을 가리키며, 가르침이

     큼은 교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뜻[義]은 증득하는 법의 뜻이기 때문이고, 가

     르침[敎]은 지목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또 큼[大]은 증교(證敎)의 덕이 작지

     않음을 나타낸다. 이 뜻이 큼과 가르침이 큼은 일승에 속하며 삼승에도 통하지

     만, 소승에서는 단지 가르침만을 설하고, 또한 그 덕이 크지 않기 때문에 통하지

     않는다. 일승원교에서 보고 들음[見聞]은 가르침이 큼에, 보현의 증득[普賢證]

     은 뜻이 큼에 배대된다.[『공목장(孔目章)』(大45, p.562b5-c1)]

171) 저본에는「義」가 두 번 반복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 삭제하였다.


분별을 반대로 되돌려 무분별을 얻는 것을 ‘연이 없다[無緣]’라고 이름

한다. 이법(理法)에 따라서 머무르지 않음을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라

고 이름한다. 말씀대로 수행하여 성자의 뜻을 얻으므로 ‘잡는다[捉]’라고

이름한다. ‘여의(如意)’는 앞과 같다.172) ‘집으로 돌아간다[歸家]’란 본성을

증득한 까닭이다. ‘집[家]’은 무슨 뜻인가? 그늘지게 덮는다는 뜻이며 머

무르는 곳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법성의 참된 공(空)은 깨달

은 이가 머무르는 곳이므로 ‘집[宅]’이라고 이름하고, 큰 자비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써 중생을 그늘지게 덮어주는 것을 이름하여 ‘집[舍]’이

라고 한다. 이 뜻은 삼승에 있으나 일승이라야 비로소 구경이 된다. 무슨

까닭인가? 법계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법계다라니의 집과 인[드

라]다라니의 집과 미세[다라니]의 집 등이다. 이것이 성자가 의지하여 머

무르는 곳이므로 이름하여 ‘집[家]’이라고 한다. ‘분수를 따른다[隨分]’란

원만하지 않은 뜻이기 때문이다. ‘자량(資糧)’이란 보리를 돕는 덕목[助菩

提分]173)이기 때문이다. 아래 경의「이세간품」가운데 2천 가지의 답174) 

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背反分別, 得無分別, 名曰無緣. 順理不住, 故名善巧. 如說

修175)行, 得聖者意故, 名爲捉. 如意如前. 歸家者, 證本性故.

家者何義? 陰覆義, 住處義故. 所謂法性眞空, 覺者所住故,

名爲宅, 大悲善巧, 蔭覆衆生, 名曰爲舍. 此義在三乘, 一乘

方究竟. 何以故? 應法界故. 所謂法界陀羅尼家, 及因陀羅家,

微細家等. 此是聖者所依住故, 名曰爲家. 隨分者, 未滿義故.

資粮者, 助菩提分故. 如下經離世間品中, 二千答等是也.

173) 보리를 돕는 덕목[助菩提分, bodhyan3 ga]은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

     을 의미하며, 조도법(助道法), 조도품(助道品), 도품(道品), 각지(覺支) 등으로 표

     현된다. 초기불교에서는 사념주(四念住),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를 합한 37보리분이 대

     표적이다.『화엄경(華嚴經)』에서는 제4지 보살의 구체적인 수행내용으로 설해

     지고 있으며(高8, pp.174a18-b19; 大9, pp.553c21-554a18), 또 보살이 십바

     라밀을 구족하면 사섭법(四攝法), 삼십칠품(三十七品), 삼해탈문(三解脫門) 등의 

     일체 보리분을 순간순간 구족한다고 설하고 있다.(高8, p.181b25-c4; 大9, p.561

     c7-9) 지엄은 이 보리분에 대해서 소승에서는 간략히 37가지를 들고 삼승에서도 

     같이 37가지를 세우지만 뜻이 다르며, 일승의 보리분은『화엄경(華嚴經)』「이세

     간품」의 2천 가지 문답이라고 해석한다.[『화엄오십요문답』(大45, p.523b13-

     21)] 의상 또한 이를 이용하여 자량(資糧)은 곧 보리분이고 이것은「이세간품」의 

     2천 가지 문답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174)「이세간품」가운데 2천 가지의 답이란『화엄경(華嚴經)』「이세간품」가운데 보

     광명전 부처님 처소에서 보현보살이 불화엄삼매(佛華嚴三昧)에 들었다가 일어

     나 보혜보살(普慧菩薩)의 2백가지 질문을 받고 한 물음에 열 가지씩 모두 2천가

     지로 대답한 것을 일컫는다.『화엄경(華嚴經)』「이세간품」은 화엄 수행계위로 

     볼 때 묘각(妙覺)에 해당하는 곳으로,『화엄경(華嚴經)』의 전체 보살도를 묘각의 

     입장에서 문답을 통해 펼치고 있다.

175) 저본에는「終」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修」로 바꾸었다.


둘째, 이익 얻음을 밝힌다. ‘다라니(陀羅尼)’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지니기

[總持] 때문이다. 아래의 수십전법(數十錢法)176) 가운데 설하는 것과 같다.

‘실제(實際)’란 법성을 끝까지 다하기 때문이다. ‘중도(中道)’란 두 변을 원

융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는다[坐床]’란 일체를 섭수하기 때문이

다. 법계의 열 가지 열반177)의 광대한 보배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체를

섭수하므로 ‘자리에 앉는다’라고 이름한 것이다. ‘보배’란 귀하기 때문이

며, ‘자리[床]’란 곧 섭수하여 지니는 뜻인 까닭이다. ‘열 가지 열반’은 아

래 경의 「이세간품(離世間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178)

二明得益. 謂陀羅尼者, 總持故. 如下數十錢法中說. 實際者,

窮法性故. 中道者, 融二邊故. 坐床者, 攝一切故. 安坐179)法界

十種涅槃廣大寶床, 攝一切故, 名曰坐床. 寶者, 可貴故. 床者,

卽攝持180)義故. 十種涅槃者, 如下經離世間品說.

176) 수십전법(數十錢法)은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으로 화엄법계를 나타내기 위해

     화엄가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비유이다. 이 비유의 경증으로서는『화엄경(華嚴

     經)』「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정진림보살이 읊는 ‘비

     유하면 열을 헤아리는 법과 같아서 하나를 더해 무량에 이르니 모두 다 본수이

     나 지혜인 까닭에 차별하다’(高8, p.74a10; 大9, p.465a22-23)는 게송 등과「광명

     각품(光明覺品)」(高8, p.32b5; 大9, p.423a1-2; 高8, p.34a24-25; 大9, p.425

     a13-14; 高8, p.33c19; 大9, p.424c9-10)과 「십주품」(高8, p.55c7-8; 大9, 

     p.446a5) 등도 함께 거론된다. 지엄은 이 경설에 주목하여「광명각품」가운데 

     문수보살이 읊는 게송을『수현기』에서 풀이하면서 수십법(數十法)을 교설하고 

     있다.(高47, p.13a24-b1; 大35, p.27b2-7) 이 설을 바탕으로 의상은 연기실상

     다라니법을 관하기 위해서는 ‘수십전법’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하면서 중문(中門)

     과 즉문(卽門)의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설명하기 위한 동전 세는 비유를 확립시키

     고 있다. 균여가『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鈔)』(韓4, p.448c14-

     20)와『일승법계도원통기』(韓4, p.25a10-18)에서 원효의『화엄종요』와『보

     법기』의 설을 인용하여 수십전법의 설을 지엄이 처음 시작했다고 하지만, 수십

     법의 설이 아닌 수십전법의 비유를 확립시킨 것은 의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77) 열반(涅槃)은 산스크리트어 nirvāna의 음역(音譯)으로서 적멸(寂滅), 멸도(滅度),

     무생(無生) 등으로 의역(意譯)하기도 한다.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하며, 모든 번

     뇌의 불이 소멸되어 소진된 상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를 비유한다. 초기

     불교의 최종목표로서 열반적정(涅槃寂靜, śāntam3 nirvānam)으로 표현된다.[『잡

     아함경(雜阿含經)』(高18, p.799b2-7; 大2, p.66c18-23 등)] 『화엄경(華嚴經)』

     에서는 생사와 열반이 모두 허깨비[幻]와 같아 얻을 수 없지만, 보살은 수승한 공

     덕에 의해 열반에 머무르면서 생사를 여의지 않고, 또한 생사의 세계에서 열반의 

     세계를 나타내 보인다고 설한다.[『육십화엄(六十華嚴)』(高8, p.73c19, p.274a

     13-17,p.275b12-19; 大9, p.464c23-24, p.648b5-9, p.649b17-25)]

178) 열 가지 열반은『화엄경(華嚴經)』「이세간품」의 “여래(如來)·응공(應供)·등정

     각(等正覺)이 불사(佛事)를 끝까지 마치시고 열 가지 뜻이 있어서 대반열반(大

     般涅槃)을 나타내 보이신다”는 구절(高8, p.299a18-b9; 大9, p.669a26-b12)의 

     내용으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일체의 행이 모두 무상(無常)함을 밝히

     려는 뜻, ②일체의 유위법이 편안하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 ③대반열반이 가장

     안온함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밝히려는 뜻, ④대반열반이 일체 모든 두려움을

     멀리 여의었음을 밝히려는 뜻, ⑤모든 천인(天人)이 색신(色身)에 탐착하기 때

     문에 색신이 무상하고 마멸법임을 밝혀 청정한 법신에 항상 머무르기를 구하게

     하려는 뜻, ⑥무상(無常)의 힘은 강해서 되돌릴 수 없음을 밝히려는 뜻, ⑦유위

     법은 좋아하는 대로 행해지지 않으며 자재롭지 못함을 밝히려는 뜻, ⑧삼계의

     법이 모두 질그릇과 같아 견고하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 ⑨대반열반이 최고의

     진실이며 무너지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 ⑩대반열반이 생사(生死)를 멀리 여의

     어 일어나지도 멸하지도 않음을 밝히려는 뜻이다. 이 열 가지 열반설은 이후 화

     엄가들에게 매우 중요시되었는데, 지엄은 『공목장』에서 열반을 소승의 열반, 

     삼승의 열반, 일승의 열반으로 나눈 뒤『화엄경(華嚴經)』「이세간품」의 열 

     가지 열반이 일승 중 별교의 열반이라고 해석한다.(大45, p.581b20-c1)

179) 저본에는「在」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坐」로 바꾸었다.

180) 저본에는「攝」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持」로 바꾸었다.


‘옛부터 움직이지 않는다[舊來不動]’란 옛부터 부처를 이루었다는 뜻이

기 때문이다. 곧 열 부처님이니『화엄경(華嚴經)』과 같다.181)

첫째는 무착불(無着佛)이니, 세간에 편안히 머물러 바른 깨달음을 이루

기 때문이다. 둘째는 원불(願佛)이니, 출생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업보불

(業報佛)이니, 믿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불(持佛)이니, 따라주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화불(化佛)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법계불(法

界佛)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심불(心佛)이니, 편

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삼매불(三昧佛)이니, 한량없이 집착 없

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성불(性佛)이니,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째는

여의불(如意佛)이니, 두루 덮기 때문이다.182)

舊來不動者, 舊來成183)佛義故. 所謂十佛, 如華嚴經.184)

一無著佛, 安住世間, 成正覺故. 二願佛, 出生故. 三業報佛,

信故. 四持佛,185) 隨順故. 五化佛, 永度故. 六法界佛, 無處不

至故. 七心佛, 安住故. 八三昧佛, 無量無著故. 九性佛, 決定

故. 十如意佛, 普覆故.

181) 열 부처님[十佛]은『화엄경(華嚴經)』의 여러 품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명칭

     이나 성격은 동일하지 않다.[『육십화엄(六十華嚴)』(高8, p.292a21, p.185b15; 

     大9, p.663b18, p.565b16 등)] 지엄은 이를 종합하여「이세간품」을 근거로 하

     는 행경(行境)과「십지품」제8지에 바탕한 해경(解境)의 이종십불설(二種十佛說)

     을 주장하였다.[『공목장(孔目章)』(大45, p.559c29)] 의상은 이 가운데 행경십

     불을 강조하면서도 융삼세간불을 상징하는「반시」를 통해서 해경십불 또한 드러

     내고 있다.

182) 열 부처님에 대한 의상의 더욱 자세한 설명이『총수록(叢髓錄)』에 수록되어 있

     다.(韓6, pp.834b11-835a22; 高45 pp.214a12-215a13)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무착불(無着佛) : 오늘 나의 오척되는 몸을 이름하여 세간이라 하고, 이 몸이 허공

     법계에 두루하여 이르지 못함이 없는 까닭에 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한다. 세

     간에 안주하므로 열반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정각을 이루기 때문에 생사에 대

     한 집착을 여읜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세 가지 세간이 원만히 밝

     고 자재하므로 무착불이라 한다. ②원불(願佛) : 140원·10회향원·초지원·성기

     원 등이 다 원불이다. 이 부처님은 머무름 없음[無住]을 몸으로 삼기 때문에 어

     느 한 물건도 부처님의 몸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른바 한 법을 듦에 따라서 일

     체를 다 포섭하여 법계에 두루 칭합함을 이름하여 원불이라 한다. 업보불(業

     報佛) : 이십이위(二十二位)의 법이 본래 움직이지 않으며 원만히 밝게 비춘다.

     만약 모든 수행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믿을 수 있으면 곧 믿는다라고 이른다. 만

     약 실제 도리를 들어서 말하면 위로는 묘각(妙覺)에서부터 아래로 지옥에 이르

     기까지 모두 부처님의 일이니, 이로써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일을 공경하고 믿으

     면 업보불이라 이를 만하다. ④지불(持佛) : 법계의 삼라 모든 법이 비록 다함이

     없더라도 만약 해인으로 도장 찍듯 정한다면 곧 오직 하나의 해인삼매의 법일

     뿐이다. 저것은 나를 지니고, 나는 저것을 지니는 까닭에 수순한다고 한다. 그러

     므로 세계로써 부처님을 지니고, 부처님으로 세계를 지니니, 이를 이름하여 지

     불이라고 한다. ⑤화불(化佛) 또는 열반불(涅槃佛) : 삶과 죽음과 열반이 본래

     평등함을 증득하여 보는 까닭에 영원히 건너갔다고 이른다. 이른바 삶과 죽음

     이 시끄럽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열반이 적정한 것이 아니니 이 뜻이다. ⑥법

     계불(法界佛) : 하나의 티끌법계, 소나무법계, 밤나무법계 내지 시방삼세의 허

     공법계가 모두 부처님의 몸이다. 이른바 진여가 과거에 없어지지 않으며 미래

     에 생겨나지 않으며 현재에 움직이지 않는다. 여래 또한 그러하여 과거에 없어

     짐이 없고, 미래에 생겨남이 없으며, 현재에 움직임이 없다.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어 허공계와 같으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백천만겁 동안 이미 설했고 지

     금도 설하고 앞으로도 설하겠지만 끝내 다할 수 없으니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

     를] 법계불이라고 일컫는다. ⑦심불(心佛) : 마음을 쉬면 곧 부처님이고 마음을

     일으키면 곧 부처님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물로 그릇을 깨끗하게 하나 흐린 물

     을 깨끗하게 할 줄 모르니, 물이 맑으면 그림자가 밝고 물이 흐리면 그림자가 어

     두운 것과 같다. 마음의 법 또한 그러하여 마음을 쉬면 법계가 원만히 밝고 마음

     을 일으키면 법계가 차별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면 곧 법계의 모

     든 법이 나의 오척되는 몸에 나타난다. ⑧삼매불(三昧佛) : 해인삼매의 법이 의

     거하는 것마다 기준으로 삼는 것마다 머물러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이

     집착없는 삼매불이라고 일컫는다. ⑨성불(性佛) : 법성에 둘이 있다. 이른바 큰

     성품[大性]과 작은 성품[小性]이다. 무엇인가? 만약 한 법이 일어나면 삼세에 안

     도 없고 밖도 없기 때문에 큰 성품이라고 한다. 한 법의 지위가 일체에 두루한

     가운데 바야흐로 이루어지는 것을 작은 성품이라고 한다. 이른바 한 기둥이 법

     계의 경계를 다하니 단지 이 기둥을 이름하여 큰 성품이라고 한다. 이 하나의 기

     둥 가운데 서까래와 들보와 기와 등의 모든 지위가 나타나는 것을 이름하여 작

     은 성품이라고 한다. ⑩여의불(如意佛) : 마치 대용왕에게 대보왕(大寶王)이 있

     으니, 만약 이 보배가 없으면 일체 중생이 입고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

     가지 곡식과 아홉가지 곡식,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이

     보배왕의 덕인 것과 같다. 여의불의 은혜 또한 이와 같다.

183) 저본에는「成」이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184) 갑본에는「經」다음에「說」이 있다.

185) 갑본과『화엄경(華嚴經)』에는「涅槃佛」로 되어 있다.


무엇 때문에 열의 수로 설하는가? 많은 부처님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이

다. 이 뜻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며, 구경의 오묘한 핵심[宗]이어서 매우

깊고 난해하니,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한다.

何故十數說? 欲顯多佛故. 此義諸法之眞源, 究竟之玄宗, 甚

深難解, 宜可深思.


묻는다. 얽매여 있는 중생[有情]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고 아직 복덕

과 지혜를 이루지 못했는데 무슨 뜻으로 옛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는

가? 답한다.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으면 부처를 이루었다고 이름하지 않

는다. 번뇌를 끊어 버리고 복덕과 지혜를 이루어 마쳐야, 이로부터 이후로

이름하여 ‘옛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한다.

묻는다.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답한다.『십지경론[地論]』에서

설한 것과 같이,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나중도 아니니, 앞과 가운데와 뒤

에서 취하기 때문이다.186)

問. 具縛有情, 未斷煩惱,187) 未成福智, 以何義故, 舊來成佛

也? 答. 煩惱188)未斷, 不名成佛. 煩惱189)斷盡, 福智成竟, 自此

已去, 名爲舊來成佛.

問. 斷惑云何? 答. 如地論說, 非初非中後, 前中後取故.

186) 이 구절은『십지경』가운데 금강장보살이 각 지(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하기

     전에 앞으로 설할 도(道)의 수승함을 찬탄하는 내용 가운데, “[성스러운 도는] 모

     든 갈래를 멀리 여의었으며 열반의 모습과 같아 처음도 중간·나중도 아니니 말

     로 설할 바가 아니다.”[『십지경론』(高15, p.15b16-b17; 大26, p.133b11-b12)]라는

     게송을 세친이 주석한 부분에서 취한 것이다.[『십지경론』(高15, p.15a4-b17; 大26,

     p.133a8-b12)] 지엄은 이 게송이 해탈의 자체무애를 설한 것으로서, 지혜가 일어

     난 후 번뇌가 멸하거나[初], 지혜의 일어남과 번뇌의 멸함이 동시이거나[中], 번

     뇌가 멸한 후 지혜가 일어나는 것[後] 모두 아니고 앞과 중간과 뒤가 연하여 일

     어나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수현기』(高47, p.36c1-6; 大35, p.53b9-14)] 또한 

    『총수록(叢髓錄)』에 인용된『도신장』에서는 이를 해석하여 삼세 중에 끊을 것이 없

     지만[非初非中後], 깨닫고 나서는 삼세의 장애가 없다[前中後取故]고 설한다.(韓

     6, p.789a10-b11; 高45, p.163a15-b9)

187) 저본에는「永斷菩薩」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未斷煩惱」로 바꾸었다.

188) 저본에는「菩薩」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煩惱」로 바꾸었다.

189) 저본에는「菩薩」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煩惱」로 바꾸었다.


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다. 이와 같이 끊으므로 아직 끊기 이전에는

끊었다고 이름하지 않으며, 지금 끊은 이후로 옛부터 끊었다[舊來斷]고 이

름한다. 마치 꿈을 깸[覺]과 꿈을 꿈[夢], 잠을 잠[睡]과 잠을 깸[悟]이 같

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룸[成]과 이루지 않음, 끊음과 끊지 않음

등을 세우지만, 그 참된 도리는 모든 법의 참 모양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본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번뇌의

법 가운데 한 법도 줄어드는 것을 보지 못하며, 청정한 법 가운데 한 법도

늘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190)라고 한 것이 그 일이다.

云何斷? 如虛空. 如是斷故, 未斷已還, 不名爲斷, 現斷已去,

名爲舊來斷也. 猶如覺夢睡悟不同. 故建立成不成斷不斷等,

其實道理, 諸法實相, 不增不減, 本來不動. 是故經言, “煩惱191)

法中, 不見一法減, 淸淨法中, 不見一法增,” 是其事也.

190)『십지경』제3발광지(發光地)의 “보살이 모든 법이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

     며 인연으로 있다고 본다”[『십지경론』(高15, p.52b5-6; 大26, p.158b21-22)]

     는 구절을 세친은『십지경론』에서 주석하여, “청정한 법 가운데 늘어나는 것을 

     보지 않으며 번뇌망상 가운데 줄어드는 것을 보지 않으니, 인연이 모여 생겨난다”

     (高15, p.52b7-9; 大26, p.158b23-25. 一切法不生不滅者 於淸淨法中, 不見增, 

     於煩惱妄想中, 不見減, 因緣集生故.)고 하고 있다. 이 경문의『화엄경(華嚴經)』

     에서의 해당 위치는 다음과 같다.『육십화엄(六十華嚴)』(高8, p.173a11-12; 

     大9, p.552b13).

191) 저본에는「菩薩」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煩惱」로 바꾸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같은 등의 경문(經文)은 이법[理]에 즉함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고 현상[事]에 즉하여 설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만약 삼승의 방편 가르침의 부문을 기준으로 하면 합당히 이 뜻이 있으나,

만약 일승의 참다운 가르침의 부문을 의거하면 그 이법(理法)을 다하지

못한다. 이법과 현상이 그윽하여 하나로서 분별이 없으며, 체(體)와 작용

[用]이 원융하여 항상 중도에 있으니, 자기의 일 이외에 어디에서 이법을

얻겠는가?

有人說言, 如是等經文, 約卽理說, 非卽事說. 若約三乘方便敎

門, 合有此義, 若依一乘如實敎門, 不盡其理. 理事冥然, 一無

分別, 體用圓融, 常在中道, 自事以外, 何處得理?


묻는다. 삼승의 가르침 가운데 또한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고, 작용하

면서도 항상 고요함이 있는데, 이와 같은 뜻을 무슨 까닭에 이법에 즉한 문

에 치우치고 현상에 즉하지 않아서 자재롭지 않다고 위에서 말하였는가?

답한다. 이법과 현상이 상즉하므로 이와 같은 뜻이 있다. 현상과 현상의

상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삼승의 가르침에서는 분별하

는 병을 다스리고자 현상을 모아서 이법에 들어가는 것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별교일승에 의하면, 이법과 이법의 상즉 또한 가능하고 현

상과 현상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이법과 현상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각각

상즉하지 않음 또한 가능하다. 무슨 까닭인가? 중(中)과 즉(卽)192)이 같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이법의 인다라니(因陀羅尼)193)와 현상의 인다라니 등

의 법문을 구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열 부처님과 보현(普賢)194)[보살]의 법

계의 집 가운데 이 같은 등의 장애 없는 법계의 법문이 있어서 매우 자재

하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거스름[逆]과 따름[順], 주(主)와 반(伴)의 서로

이루는 등의 법문은 예에 준하여 서로 포섭하면 뜻에 따라 이해할 수 있다.

問. 三乘敎中, 亦有寂而常用, 用而常寂, 如是等義, 何故上言

偏卽理門, 不卽事中, 不自在耶?195)

答. 理事相卽故, 有如是義. 非謂事事相卽. 何以故? 三乘敎

中, 欲治分別病, 會事入理爲宗故. 若依別敎一乘, 理理相卽

亦得, 事事相卽亦得, 理事相卽亦得, 各各不相卽亦得.196) 何以

故? 中卽不同故, 亦有具足理因陀羅尼, 及事因陀羅尼等法門

故. 十佛普賢法界宅中, 有如是等無障礙法界法門, 極自在故.

其餘逆順主伴197)相成等法門, 准例相攝, 隨義消息.

192) 중(中)은 중문(中門)으로서 상입(相入)을, 즉(卽)은 즉문(卽門)으로서 상즉(相

     卽)을 의미한다.

193) 인다라니(因陀羅尼)는 인드라다라니를 의미한다.

194) 보현(普賢, Samantabhadra)은 문수(文殊, Mañjuśri)와 함께『화엄경(華嚴經)』

     의 양대 보살로서 대행(大行)으로 상징되니,『화엄경(華嚴經)』의 보살도를 대표

     해서 보현행이라고도 한다.『화엄경(華嚴經)』의 전체 구성과 관련하여, 여래의

     과해(果海)를 보이는 보현경전계, 중생을 발심하게 하는 신(信)을 설하는 문수

     경전계, 그리고 일승보살도를 나타내는 십지 경전계를 여래출현의 입장에서 체

     계적으로 조직, 구성한 것이『화엄경(華嚴經)』이라고 해석할 만큼 보현보살은

    『화엄경(華嚴經)』의 사상을 나타내는 주요한 방편으로 표현되고 있다. 의상 또

     한『화엄경(華嚴經)』에서의 보현보살의 중요성에 주목하여, 지정각세간(智正覺

     世間)을 대표하는 대인(大人)으로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을 들고 있다.

195) 저본에는「也」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耶」로 바꾸었다.

196) 저본에는「得」다음에「相卽」이 있으나 갑본에 따라 삭제하였다.

197) 저본에는「半」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伴」으로 바꾸었다.


만약 연기의 참 모양[實相]인 다라니법을 관(觀)하고자 한다면 먼저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을 깨달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일전(一錢)

에서부터 십전(十錢)까지이다. 열[十]을 말한 까닭은 한량없음을 나타내

려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둘이 있다. 첫째는 하나 가운데 열이고, 열 가운

데 하나이다. 둘째는 하나가 곧 열이고, 열이 곧 하나이다.

若欲觀緣起實相陀羅尼法者, 先應覺數十錢法. 所謂一錢乃至

十錢. 所以說十者, 欲顯無量故. 此中有二. 一者, 一中198)十,

十中一. 二者, 一卽十, 十卽一.

198) 저본에는「卽」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中」으로 바꾸었다.


첫째 문 가운데 둘이 있으니, 하나는 위로 향하여 오고[向上來], 둘은 아

래로 향하여 간다[向下去]. 위로 향하여 온다고 말한 가운데 열 가지 문이

있어 같지 않다. 첫째는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니, 곧 근본수이다. 내지 열째는 하나 가운데 열이다. 무슨 까닭인

가? 만약 하나가 없으면 열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열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머지 문 또한 이와 같으니 예에 준하면 알 수 있다.

初門中有二, 一者向上來, 二者向下去. 言向上來中, 有十門不

同. 一者一. 何以故? 緣成故, 卽是本數. 乃至十者, 一中十. 何

以故? 若無一, 十卽不成, 仍十非一故. 餘門亦如是, 准例可知.


아래로 향하여 간다고 말한 가운데 또한 열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열

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열 가

운데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열이 없으면 하나는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는 곧 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머지 또한 이와 같다.

이 같이 변화가 생기는 것을199) 견주어 맞추어 보면, 낱낱의 동전 가운데

열 문이 갖추어져 있음을 안다. 근본과 지말의 두 동전 가운데 열 문이 갖

추어져 있는 것처럼 나머지 여덟 동전 가운데도 예에 준하면 알 수 있다.

言向下去中, 亦有十門. 一者十. 何以故? 緣成故. 乃至十者,

十中一. 何以故? 若無十, 一卽不成, 仍一非十故. 餘亦如是.

生變如是, 勘當卽知一一錢中, 具足十門. 如本末兩錢中, 具足

十門, 餘八錢中, 准例可解.

199) 갑본에는 ‘이와 같이 가고 와서[如是往反]’로 되어 있다.


묻는다. 이미 하나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하나 가운데 열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

답한다. 대연기의 다라니법에는 만약 하나가 없으면, 일체가 곧 이루어

지지 않는다.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모양이 어떠한 지 알아야 한다. 하나란

자성(自性)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하나이

며, 내지 열이란 자성으로서의 열이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

에 열이다. 일체의 연으로 이루어지는 법은 한 법도 일정한 모양으로서 성

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곧 자재(自在)하지 않다.

자재하지 않다란 생겨나지만 생겨나지 않음으로서의 생겨남이다. 생겨나

지 않음으로서의 생겨남이란 곧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다. 머무르지 않음

의 뜻이란 곧 중도(中道)의 뜻이다. 중도의 뜻이란 곧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에 통한다. 그러므로 용수(龍樹)가 말하기를,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곧 공하다고 설하며,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설하며, 또한 곧 중도의

뜻이라고 한다”200)는 것이 곧 그 뜻이다. 중도의 뜻이란 무분별의 뜻이다.

무분별의 법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연을 따라 다함이 없으며 또

한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하나 가운데 열과 열 가운데

하나는 서로 용납하여 걸림 없으나 상즉[相是]은 아니다. 이제 하나의 문

가운데 열 문을 갖추므로 하나의 문 가운데 다함 없는 뜻이 있음을 명확

하게 안다. 하나의 문에서처럼 나머지 또한 이와 같다.

問. 旣201)言一者, 何得一中名爲十耶?202)

答. 大緣起陀羅尼法, 若無一, 一切卽不成. 定知如是其相

如.203) 所言一者, 非自性一, 緣成故一, 乃至十者, 非自性十,

緣成故十. 一切緣生法, 無有一法定相有性. 無自性故, 卽不

自在.204) 不自在者, 卽生不生生. 不生生者, 卽是不住義. 不

住義者, 卽是中道義.205) 中206)道義者, 卽通生不生. 故龍樹云,

“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亦說爲是假名, 亦是中道義,” 卽

其義也. 中道義者, 是無分別義. 無分別法, 不守自性故, 隨緣

無盡, 亦是不住. 是故當知, 一中十, 十中一, 相容無礙, 仍不

相是. 現一門中具足十門, 故明知207)一門中有無盡義. 如一門,

餘亦如是.

200) 용수(龍樹)의『중론(中論)』「관사제품(觀四諦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뭇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 나는 곧 무(無)라고 설한다. 또한 가명(假名)이 되고

     또한 중도의 뜻이다.”(高16, p392b14; 大30, p.33b11-12. 衆因緣生法, 我說即

     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공이면서 가(假)이기도 한 모든 인연법이 바로 

     중도라는 이 게송은 공가중(空假中)의 삼제게(三諦偈)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중국의 삼론학과 천태교학 등에서 인연법의 중도의를 밝히는데 있어서 크게 

     중요시되었다.

201) 저본에는「現」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旣」로 바꾸었다.

202) 저본에는「也」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耶」로 바꾸었다.

203) 갑본에는「如」 다음에「何」가 있다.

204) 저본에는「不自在」가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205) 저본에는「義」가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206) 저본에는「中」이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207) 저본에는「中智」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知」로 바꾸었다


묻는다. 하나의 문 가운데 열을 포섭하여 다하는가, 다하지 않는가?

답한다. 다하기도 하고 다하지 않기도 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다함

을 구하면[須] 곧 다하고, 다하지 않음을 구하면 곧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뜻은 무엇인가? 하나의 현상[一事]으로써 하나와 많음을 변별하는 까

닭에 곧 다하고, 다른 현상[異事]으로써 하나와 많음을 변별하는 까닭에

곧 다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현상 가운데 하나와 많음의 뜻은 상즉[相是]

하지 않으니, 곧 많음이다. 하나의 현상인 까닭에 곧 하나이다. 네 구절로

잘못을 막고 틀림을 제거하여 덕을 나타내니, 이것에 준하면 이해할 수 있

다. 다른 현상 또한 준하여 같다.

묻는다. 구한다[須]란 무슨 뜻인가?

답한다. 구한다란 연(緣)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무슨 까닭인가? 인

연법은 하나로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르고 다른 모든 현상[事]의 부

문 가운데도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연기의 오묘한 이법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문을 마친다.

問. 一門中攝十盡不? 答. 盡不盡. 所以者何? 須盡卽盡, 須

不盡卽不盡故. 其義云何? 以一事辨一多故, 卽盡. 以異事辨

一多故, 卽不盡. 又208)一事中一多義不相是, 卽是多. 一事故

卽209)是一. 四句護過去非現210)德, 准之可解. 異事亦准同.

問. 須何義? 答. 須者, 緣成義. 何以故? 因緣法一不差故.

別別諸事門中, 准例如是. 緣起妙理, 應如是可知故. 第一

門訖.

208) 저본에는「文」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又」로 바꾸었다.

209) 저본에는「卽」다음에「多」가 있으나 갑본에 따라 삭제하였다.

210) 저본에는「失非離」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去非現」으로 바꾸었다.


두 번째 문은 이 가운데 두 가지 문이 있다. 하나는 위로 향하여 가고[向

上去], 둘은 아래로 향하여 온다[向下來]. 첫 문 가운데 열 가지 문이 같지

않다. 첫째는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하나가 곧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하나가 없으면 열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第二門, 此中二門. 一者向上去,211) 二者向下來. 初門中, 十門

不同. 一者一. 何以故? 緣成故. 乃至十者一卽十. 何以故? 若

無一, 十卽不成故, 緣成故.

211) 저본에는「去」 다음에「之」가 있으나 갑본에 따라 삭제하였다.


둘째 문 가운데 또한 열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열이다. 무슨 까닭인

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열이 곧 하나이다. 만

약 열이 없으면 하나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예에 준한

다. 이 뜻으로 인한 까닭에 마땅히 알라. 하나하나의 동전 가운데 열 가지

문을 갖춘다.

第二門中亦有十門. 一者十. 何以故? 緣成故. 乃至十者十卽

一. 若無十, 一卽不成故. 餘者准例. 以此義故, 當知一一錢中,

具足十門.


묻는다. 위와 같은 많은 문이 일시에 함께 원만한가, 앞과 뒤가 같지 않

은가?

답한다. 곧 원만하기도 하고 곧 앞과 뒤가 같지 않기도 하다. 무슨 까닭

에 이와 같은가? 원만함을 구하면 곧 원만하고, 앞과 뒤를 구하면 곧 앞과

뒤이다. 무슨 까닭인가? 법성의 집 안에 덕용(德用)이 자재하여 걸림이 없

기 때문이니, 연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모두 이와 같을 수 있다.

問. 如上多門, 一時俱圓耶, 前後不同耶?

答. 卽圓卽前後不同. 何故如是? 須圓卽圓, 須前後卽前後. 何

以故? 法性家內, 德用自在無障礙故, 由緣成故, 皆得如是.


묻는다. 위에서 설한 것과 같은 오고 감의 뜻은 그 모양이 어떠한가?

답한다. 자신의 위치를 움직이고 않고서 항상 오고 간다. 무슨 까닭인

가? ‘오고 감[來去]’이란 연(緣)을 따르는 뜻으로 곧 인연의 뜻이다. ‘움직

이지 않음[不動]’이란 근본을 향하는 뜻이니 곧 연기의 뜻이다.

問. 如上所說來去義, 其相云何?

答. 自位不動, 而恒來去. 何以故? 來去者隨緣義, 卽是因緣

義. 不動者向本義, 卽是緣起義.


묻는다. 인연과 연기는 어떻게 다른가?

답한다.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말한 바 다르다는 뜻은, 인연이란

속제(俗諦)를 따라서 뜻이 다르다. 곧 인(因)과 연(緣)이 서로 바라보아 자

성이 없는 뜻을 드러내니, 바로 속제의 체(體)이다. 연기란 성품을 따라 분

별이 없다. 곧 상즉(相卽)하고 상융(相融)하여 평등의 뜻을 드러내니, 바로

제일의제(第一義諦)의 체(體)를 따른다. 속제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제일

의제를 따른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

여 곧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간다”212)고 한 것이 곧 그것이다. 다른 뜻

은 이와 같다. 같은 뜻은 앞의 용수의 해석213)과 같다. 낱낱의 동전에 나아

가 동시에 구족함[同時具足] 등의 열 가지 문[十門]’214)으로써 돌려보면 그

것에 준하여 이해할 수 있다. 열 가지 문은 아래에 설하는 것과 같다.215)

問. 因緣與緣起, 何別?

答. 亦別亦同. 所謂別義者, 因緣者隨216)俗義別. 卽是因緣相

望, 顯無自性義, 正俗諦體也. 緣起者隨性無分別, 卽是相卽相

融, 顯平等義, 正隨第一義體也. 俗諦無自性故, 順第一義. 是

故經云, “隨順觀世諦, 卽入第一義諦,” 卽其也. 別義如是. 同

義如前龍樹釋. 就一一錢中, 於同時具足等十217)門, 以廻轉者,

准之可解. 十門如下218)說.

212)『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68b2; 大26, p.169a17)

213) 앞의 동전을 세는 법 중 중문(中門)을 설하는 가운데 용수(龍樹)의『중론(中論)』

     게송을 인용하여 중도(中道)의 뜻을 풀이하는 부분을 가리킨다.(韓2 p.6b20-22)

214) 열 가지 문[十門]은 십현문(十玄門)을 가리키며 십현연기(十玄緣起)라고도 한

     다. 화엄교학에서 상즉・상입의 사사무애(事事無礙) 법계연기를 10가지로 설명

     한 것이다.[지엄,『수현기』(高47, p.2b16-c9; 大45, p.15a29-b24 등)] 여기

     에서 십(十)은 원만구족의 만수(滿數)이고, 현(玄)은 이것을 통해 『화엄경(華嚴

     經)』의 현묘한 바다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문(門)은 사사무애법문을 가리킨다. 

     또 십현연기에서의 연기는 일체 모든 법과 마찬가지로 이 열 가지 문 또한 독립

     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 연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엄의 

     십현문은 육상설(六相說)과 함께 화엄종에서 법계연기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편

     으로 이용되었다. 지엄 이후 의상, 법장, 징관, 종밀 등 거의 모든 화엄가들도 이

     십현문설을 중요시하였다. 그 중 법장은『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大45,

     pp.505a-507b)에서 지엄의 십현문을 계승하였으나 변용한 부분이 있으며 그 이

     후 화엄교가들은 이를 계승하고 있다. 이를 구분하여 지엄과 의상, 그리고 법장

     의『오교장』에서의 십현문을 고십현(古十玄), 이후 법장에 의해 변경된 것을 신

     십현(新十玄)이라고 부른다. 이 글에서의 십현문은 고십현에 해당한다. 구체적

     으로 고십현의 열 가지 문은 ①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②인다라망경

     계문(因陀羅網境界門), ③비밀은현구성문(袐密隱顯俱成門), ④미세상용안립문

     (微細相容安立門), ⑤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⑥제장순잡구덕문(諸藏

     純雜具德門), ⑦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⑧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

     自在門), ⑨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 ⑩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

     門)이다. 신십현은 이 가운데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을 ‘광협자재무

     애문(廣狹自在無礙門)’으로,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은 ‘주반원명구덕

     문(主伴圓明具德門)’으로 변경하고 차례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215) 韓2, p.8a10-b7.

216) 저본에는「隨隨」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隨」로 바꾸었다.

217) 저본에는「一」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十」으로 바꾸었다.

218) 저본에는「上」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下」로 바꾸었다.


동전 가운데 첫 번째 내지 열 번째가 같지 않으나 상즉하고 상입하여

걸림 없이 서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비록 원인[因]과 결과[果], 이법

[理]과 현상[事], 사람[人]과 법(法), 앎[解]과 행(行), 가르침[敎]과 뜻[義],

주(主)와 반(伴) 등의 여러 많은 문이 다르나 한 문을 설함에 따라 일체를

다 포섭한다. 나머지 뜻도 이에 준한다. 위에서의 동전을 세는 법이란 우

선 변계(遍計)인 현상[事]의 동전에 의지하여 의타(依他)인 인연과 연기의

동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한 가리킴에 의지하여 생겨남을 나타내어

보일 수는 있지만 일체 모든 법은 끝내 얻을 수 없다. 변계의 사물에 집착

하여 연기의 법에 미혹하면 법을 나타내어 머무름이 전혀 다르다.

如錢中第一, 乃至第十不同, 而相卽相入, 無礙相成,219) 雖因果

理事人法解行敎義主伴等, 衆多門別, 而隨說一門, 盡攝一切.

餘義准之. 上來數錢法者, 且依遍計事錢, 顯示依他因緣緣起

錢也. 亦可依指示顯生, 一切諸法, 終不可得. 執遍計物, 迷緣

起法, 顯法逗留全別.

219) 저본에는「成」이 없으나 갑본에 따라 삽입하였다.


경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發心)한 보살의 일념(一念) 공덕이 다할 수

없다”220)란 첫째 동전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없음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하물며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221)란 둘째 동전 이후와 같다. 무슨 까닭인가?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처음 발심한 때에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

룬다”222)란 하나의 동전이 곧 열 [동전]인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

인가? 수행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經云,“ 初發心菩薩一念功德, 不可盡”者, 如第一錢. 何以故?

約一門, 顯無盡故.“ 何況無量無邊諸地功德”者, 如第二錢已

去. 何以故? 約異門說故.“ 初發心時便成正覺”者, 如一錢卽

十故. 何以故? 約行體說故.

220)『육십화엄(六十華嚴)』「초발심보살공덕품(初發心菩薩功德品」의 전체 내용을 취

     한 것으로 보이며,「현수보살품(賢首菩薩品)」에 있는 구절도 이에 대해 설하고 있

     다. “보살이 생사(生死)에서 최초로 발심할 때에 한결같이 보리를 구함에 견고

     하여 움직이지 않으니 그 한 순간의 공덕은 깊고 넓어 가 없으니 여래께서 분별

     하여 설하셔도 겁을 마치도록 오히려 다하지 않네”(高8, p.40c23; 大9, pp.432c29-

     433a3. 菩薩於生死, 最初發心時, 一向求菩提, 堅固不可動. 彼一念功德, 深廣無邊際, 

     如來分別說, 窮劫猶不盡.)

221)『육십화엄(六十華嚴)』「현수보살품(賢首菩薩品)」에 있는 다음 구절이 참조된다.

     “어찌 하물며 한량 없고 무수한 가 없는 겁에 모든 바라밀을 갖추어 닦은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高8, p.40c25; 大9, p.433a4-5. 何況於無量, 無數無邊劫, 

     具足修諸度, 諸地功德行.)

222)『육십화엄(六十華嚴)』「범행품(梵行品)」(高8, p.60a16; 大9, p.449c14).


묻는다. ‘처음 발심한 보살’이란 믿음의 지위[信地]의 보살이니, 곧 제자

의 지위이다.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란 부처님의 지위[佛地]이니, 곧 대사

(大師)의 지위이다. 높고 낮음이 같지 않고 지위도 전혀 다르다. 무엇 때문

에 같은 곳에 머리와 다리를 함께 두는가?

답한다. 삼승의 방편법과 원교일승(圓敎一乘)의 법은 법의 작용과 머무

름이 각각 달라서 섞어 쓸 수 없다. 그 뜻이 어떠한가? 삼승의 법은 머리

와 다리가 각각 다르고 아버지와 아들의 [태어난] 해와 달[年月]이 같지

않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모양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고, 믿

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다. 원교일승의 법이란 머리와 다리가 모두

하나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태어난] 해와 달이 모두 같다. 무슨 까닭인

가? 연으로 이루어짐을 말미암은 까닭이고,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問. 初發心菩薩者, 信地菩薩, 卽是弟子位. 成正覺者, 佛地,

卽是大師位. 高下不同, 位地全223)別. 何以故, 同處並頭脚耶?

答. 三乘方便法與圓敎一乘法, 法用逗留各別, 不得雜用. 其224)

義云何? 三乘法, 頭脚各別, 阿225)耶兒子年月不同. 何故如是?

約相說故, 生信心故. 圓敎一乘法者, 頭脚總一, 阿耶兒子年月

皆同226). 何以故? 由緣成故, 約道理說故.

223) 저본에는「今一」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全」으로 바꾸었다.

224) 저본에는「其其」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其」로 바꾸었다.

225) 저본에는「何」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阿」로 바꾸었다.

226) 저본에는「同」 다음에「總」이 있으나 갑본에 따라 삭제하였다.


묻는다. 하나[一]란 무슨 뜻인가? 답한다. 하나란 하나로서 분별이 없다

는 뜻이다.

또 묻는다. 같다[同]란 무슨 뜻인가? 답한다. 같다란 같이 머무르지 않

는다는 뜻이다. 분별이 없고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처음과 끝이 같은 곳이

며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나란히 한다.

묻는다. 같은 곳[同處]과 머리를 나란히 한다[並頭]란 무슨 뜻인가? 답

한다. 같은 곳과 머리를 나란히 한다란 서로 알지 못하는 뜻이다. 무슨 까

닭인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問. 一者何義? 答. 一者, 一無分別義.

又問. 同者何義? 答. 同者, 同不住義. 無分別不住故, 始終同

處, 師弟子並頭.

問. 同處並頭者何義? 答. 同處並頭者, 不相知義. 何以故? 無

分別故.


또 묻는다. 분별이 없다[無分別]란 무슨 뜻인가?

답한다. 분별이 없다란 연(緣)으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곧 처음과 끝 등

이 둘로서 다름이 없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일체 연(緣)으로 생겨

나는 법은 짓는 자도 없으며, 이루는 자도 없으며, 아는 자도 없다. 고요함

과 작용함이 한 모양이고 높고 낮음이 한 맛이니, 마치 허공과 같다. 모든

법이 으레 옛부터 이와 같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법이 생겨

남도 없으며 없어짐도 없으나 인연으로 있음을 관한다”227)고 한, 이와 같

은 등의 문장이 곧 그 뜻이다.

又問. 無分別者何義?

答. 無分別者, 緣生義. 卽是始終等, 是無二別. 何故如是? 一

切緣生法, 無有作者, 無有成者, 無有知者. 寂用一相, 高下一

味, 猶如虛空. 諸法法爾, 舊來如是. 是故經云,“ 觀一切法無

生無滅, 因緣而有,” 如是等文, 卽其義也.

227) 세친,『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52b5-6; 大26, p.158b21-22).


묻는다. 믿음의 지위[信位]의 보살 내지 부처님이 같은 곳에 머리를 나

란히 두는 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답한다.] 아래의 경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할 때 문득 바른 깨달음

을 이룬다”228)고 하고, 또한 『십지경론[地論]』에서 믿음의 지위의 보살 내

지 부처님이 육상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229)라고 해석한 것과 같기 때문

에 이와 같은 뜻이 있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 육상은 위와 같으니, 이 말은

법성의 집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중요한 문이고, 다라니의 곳집[藏]을 여

는 좋은 열쇠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밝힌 것은 오직 일승다라니의 대연기

법을 드러내 보인 것이며, 또한 일승의 걸림 없음을 논하여 큰 체[大體]를

변별한 것이니, 삼승의 분한[分際]은 아니다.

問. 所以得知信位菩薩乃至佛, 同處並頭?

如下經云,“ 初發心時, 便成正覺,” 亦如地論釋,“ 信地菩薩乃

至佛, 六相成故,” 明知有如是義. 六相如上. 此語欲入法性家

要門, 開陀羅尼藏好鑰匙230)故. 上來所明者, 唯顯示一乘陀羅

尼大緣起法, 亦可論一乘無礙, 辨大體, 非三乘分齊.

228)『육십화엄(六十華嚴)』「범행품(梵行品)」(高8, p.60a16; 大09, p.449c14).

229) 이 구절은『십지경론』의 다음 부분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세친(世親),

    『십지경론(十地經論)』(高15, p.3a-c; 大26, pp.124c-125a).

230) 저본은「」이나 갑본에 따라「鑰匙」로 바꾸었다.


묻는다. 초교(初敎) 이후는 일체 모든 법이 곧 공(空)하고 곧 여여[如]하

여 하나로서 분별이 없는데, 무슨 까닭에 머리와 다리가 각각 다르다고 위

에서 말했는가?

답한다. 이 뜻이 없지는 않으나 아직 원만하지 않은 까닭에 [그] 아래로

부터 말한 것이다.

問. 初敎已去, 一切諸法, 卽空卽如, 一無分別, 何故上言頭脚

各別耶?

答. 非無此義, 未滿故, 從下爲言.


묻는다. 삼승 자체 이외에 따로 원교일승의 분한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답한다.] 아래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세계의 많은 중생[群生]들의 무

리에 성문(聲聞)의 길을 구하려고 하는 자가 적고, 연각(緣覺)을 구하는

자는 더욱 적으며, 대승을 구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대승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쉬우나, 이 법을 믿을 수 있는 것이 매우 어렵다”231)고 하며, “만약

중생이 하열(下劣)하여 그 마음에 싫어하는 자에게는 성문도(聲聞道)로써

보여주어 뭇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만약 다시 어떤 중생이 모든 근기가

조금 밝고 예리하여 인연법을 좋아하면 [그를] 위하여 벽지불을 설한다.

만약 어떤 이가 근기가 밝고 예리하여 큰 자비심이 있어서 중생을 이롭게

[饒益] 한다면 [그를] 위하여 보살도(菩薩道)를 설한다. 만약 위없는 마음

이 있어서 결정코 큰 일을 좋아하면 [그를] 위하여 부처님 몸을 보여서 다

함없는 부처님의 법을 설한232)고 한 것과 같다. 성스러운 말씀이 손바닥

의 밝은 구슬과 같으니, 놀라고 의심할 필요가 없다.

問. 所以得知自三乘以外, 別有圓敎一乘分齊?

如下經言, “一切世界群生類, 尠有欲求聲聞道, 求緣覺者轉復

少, 求大乘者甚希有. 求大乘者猶爲易, 能信是法甚爲難,”“ 若

衆生下劣, 其心厭沒者, 示以聲聞道, 令出於衆苦. 若復有衆

生, 諸根小明利, 樂於因緣法, 爲說辟支佛. 若有根明利, 有大

慈悲心, 饒233)益於衆生, 爲說菩薩道. 若有無上心, 決定樂大事,

爲示於佛身, 說無盡佛法.” 聖言如掌234)明珠, 不須驚恠.

231)『육십화엄(六十華嚴)』「현수보살품(賢首菩薩品)」(高8, p.51a14-16; 大9 p.441a14-16).

232)『육십화엄(六十華嚴)』「십지품(十地品)」(高8, p.187b12-15; 大9 p.567c13-20).

233) 저본에는「余」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饒」로 바꾸었다.

234) 저본에는「常」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掌」으로 바꾸었다.


묻는다. 일승과 삼승의 분한이 다른 뜻을 무엇으로 인하여 알 수 있는가?

답한다. 우선 열 가지 문에 의거하면 곧 알 수 있다.

問. 一乘三乘分齊別義, 因何得知?

答. 且依十門, 卽知也.


첫째,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同時具足相應門]이다. 그 가운데 열

가지 모양이 있으니, 말하자면 사람[人]과 법(法), 이법[理]과 현상[事], 가

르침[敎]과 뜻[義], 앎[解]과 행(行), 원인[因]과 결과[果]의 이들 열 가지

문이 상응하여 앞과 뒤가 없다.

둘째, 인다라 그물의 경계인 문[因陀羅網境界門]이다. 이 가운데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비유를 따라서 다를 뿐이다. 나머지도

이에 준할 수 있다.

셋째, 비밀스럽게 숨은 것과 나타난 것이 함께 이루는 문[袐密隱顯俱成

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연(緣)을 따라

다를 뿐이다.

넷째, 미세한 것도 서로 용납하여 안립하는 문[微細相容安立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모양을 따라 다를 뿐이다.

다섯째, 십세(十世)가 법과 나눠져서 달리 이루는 문[十世隔法異成門]이

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때[世]를 따라 다를

뿐이다.

一同時具足相應門. 於中有十相, 謂人法理事敎義解行因果,

此等十門, 相應無有前後. 二因陀羅網境界門. 此中具前十門,

但235)義從喩異耳. 餘可准之. 三袐密隱顯俱成門. 此亦具前十

門, 但*義從緣異耳. 四微細相容安立門. 此亦具前十門, 但*

義從236)相異耳. 五十世隔法異成門. 此亦具前十門, 但*義從世

異耳.

235) 저본에는「俱」로 되어 있으나 갑본에 따라「但」으로 바꾸었다.(이하 동일한 경우

     *로 표기)

236) 저본에는「從」 다음에「緣」이 있으나 갑본에 따라 삭제하였다.


여섯째, 모든 장(藏)에 순수[純]하고 잡박한 것이 덕을 갖춘 문[諸藏純

雜具德門]이다.237)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현상

[事]을 따라 다를 뿐이다.

일곱째,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나 같지 않은 문[一多相容不同門]이

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이법[理]을 따라 다

를 뿐이다.

여덟째,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는 문[諸法相卽自在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작용[用]을 따라 다를 뿐이며,

또한 성품을 의지한 것이기도 하다.

아홉째, 마음을 따라 회전하여 잘 이루는 문[隨心廻轉善成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마음[心]을 따라 다를 뿐이다.

열째,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문[託事顯法生解

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지혜[智]를 따

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이에 준할 수 있다.

위의 열 가지 현묘한 문은 아울러 다 다르다. 만약 가르침과 뜻의 분한

이 이것과 상응한다면 곧 일승원교와 돈교(頓敎)에 포섭된다. 만약 모든

가르침과 뜻의 분한[分]이 이와 상응하나 충분히 갖추지 못한다면 곧 삼

승의 점교(漸敎)238)이다.239)

六諸藏純雜具德門. 此亦具前十門, 但*義從事異耳. 七一多相

容不同門. 此亦具前十門, 但*義從理異耳. 八諸法相卽自在

門. 此亦具前十門, 但*義從用異耳, 亦可依性. 九隨心廻轉善

成門. 此亦具前十門, 但*義從心異耳. 十託事顯法生解門. 此

亦具前, 但*義從智異耳. 餘可准之. 上十玄門, 並皆別異. 若

敎義分齊, 與此相應者, 卽是一乘圓敎及頓敎攝. 若諸敎義分,

與此相應而不具足者, 卽是三乘漸敎.

237) 갑본에는「隨心」이「唯心」으로 되어 있다. 지엄의『수현기』에도 ‘오직 마음이 회

     전하여 잘 이루는 문(唯心迴轉善成門)’으로 되어 있다.(高47, p.2c3; 大35, p.15b17)

238) 점교(漸敎)는 낮은 경지에서 차례로 순서를 따라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가르침

     이나 교파를 가리킨다.

239) ‘첫째,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一同時具足相應門]’에서 ‘곧 삼승의 점교(漸

     敎)이다[卽是三乘漸敎]’까지는 지엄의『수현기』중 다섯 번째, 글을 따라 해석함

     [隨文解釋]에서 설명된 뜻을 기준으로 하여 그 분제를 밝힘[約所詮義明其分齊]

     의 십현문 구절(高47, p.2b11-c8; 大35, p.15a22-b24)과 유사하다.


이와 같이 안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문이 구족하여 원만한 것은『화엄경

(華嚴經)』의 설과 같다. 나머지 넓은 뜻은 경(經)240)과 논(論)과 소(疏)와

초(抄)241)와『공목(孔目)』242)과『문답(問答)』243) 등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如是知也. 如是十門具足圓者, 如華嚴經說. 餘廣義者, 如經論

疏抄孔目問答等分別也.

240) 의상은『일승법계도』에서『육십화엄(六十華嚴)』과『십지경론』의『십지경』, 

     『승만경』,『해심밀경』,『보살영락본업경』등을 인용하고 있다.

241) 의상이『일승법계도』에서 인용하고 있는 논·소·초로는『중론』,『섭대승론』,

    『섭대승론석』,『십지경론』,『공목장』,『수현기』등이 있다.

242)『공목(孔目)』은『화엄경내장문등잡공목장(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章)』4권(大45,

     p.536-589)이다. 지엄이 62세 이후 만년에 저술한 것이다.『공목장』은『육십화엄

     (六十華嚴)』에 대해 144장으로 나누어 주제별로 소승과 삼승에 대비하여 무진

     일승(無盡一乘)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243)『문답(問答)』은 지엄의『화엄오십요문답(華嚴五十要問答)』2권(大45, p.519-536)

     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화엄교의 중요한 이치를 53가지 문답형식

     을 통해서 소승·삼승과 일승화엄의 교설을 비교하고 화엄이 구경일승임을 설

     명하고 있다. 지엄의 58세 이후 저술로 보이며 『공목장』에서 이『화엄오십요문

     답』을 인용하고 있다.


4. 발문(跋文)


일승법계도의 시(詩)와 하나의 도인(圖印)을 합한 것은 『화엄경(華嚴

經)』과 『십지론(十地論)』에 의거하여 원교의 핵심[宗要]을 나타낸 것이다.

총장(總章)244) 원년(元年) 7월 15일에 기록하다.

一乘法界圖合詩一印, 依華嚴經及十地論, 表圓敎宗要. 總章

元年, 七月十五日記.

244) 총장(總章)은 당(唐) 고종(高宗)의 연호로서, 원년(元年)은 서기 668년이다.


묻는다. 무엇 때문에 지은 사람[集者]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가? 답한다.

연(緣)으로 생겨나는 모든 법은 주인이 없음을 나타내는 까닭이다.

또 묻는다. 무슨 까닭에 해와 달[年月]의 이름이 있는가?

답한다. 일체 모든 법은 연에 의거하여 생겨남을 보이는 까닭이다.

또 묻는다. 연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답한다. 전도(顚倒)된 마음 가운데로부터 온다.

전도(顚倒)된 마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비롯함이 없는 무명(無明)으로부터 온다.

비롯함이 없는 무명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여여(如如)로부터 온다.

여여는 어느 곳에 있는가?

여여는 스스로의 법성(法性)에 있다.

問. 何故不看集者名字? 答. 表緣生諸法無有主者故.

又問. 何故在年月名? 答. 示一切諸法, 依緣生故.

又問. 緣從何處來? 答. 從顚倒心中來.

顚倒心從何處來? 從無始無明來.

無始無明, 從何處來? 從如如來.

如如在何處? 如如在自法性.


법성은 무엇으로 모양을 삼는가?

분별이 없음을 모양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일체는 보통 중도에 있으니 무분별 아님이 없다.

이 뜻인 까닭에 글 첫머리의 시(詩)에서, “법성(法性)은 원융하여 두 모

양 없고”245) 내지 “옛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246)고

하였으니, 뜻이 여기에 있다. 시(詩)에 의지한 까닭은 헛됨[虛]에 즉하여

참됨[實]을 나타낸 것이다.

法性以何爲相? 以無分別爲相.

是故一切尋常在中道, 無非無分別.

以此義故, 文首詩,“ 法性圓融無二相”, 乃至,“ 舊來不動名爲

佛”, 意在於此. 所以依詩, 卽虛顯實.

245)『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1a).

246)『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1a).


그러므로 서원한다. 일승의 보법(普法)의 이름과 뜻을 보고 듣고 닦아

모아서 이 선근으로 일체 중생에게 돌려 베푸니, 널리 거듭 닦아서 온 중

생계가 일시에 성불하여지이다.

『법계도』의 글[章]

『일승법계도』 끝.

故誓願. 見聞修集一乘普法名字及義, 以斯善根, 廻施一切衆

生, 普重修, 盡衆生界, 一時成佛.

法界圖章.

一乘法界圖 終.247)

247) 저본에는 이 이후에 속장경에 수록되어 있는『일승법계도』의 필사 장소와 필사

     자, 필사 연월에 대한 다음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화엄종 향조대사(香鳥大師)

     는 말엽의 뛰어난 분으로서 제목을 해석하였고 두법사(頭法師)가 집필하였다.

     건력(建曆) 2년(1212년) 3월3일에 고산(高山)에서 법승사(法勝寺)의 동본(同本)

     으로서 한 번 교감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현혈팔우(賢穴八吁)”(韓2, p.8c1-4. 華嚴

     宗香鳥大師末葉非人, 釋題, 頭法師之執筆也. 建曆二年三月三日子, 始許於高山以法

     勝寺同本一校. 賢穴八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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