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로금풍(體露金風)

2017. 11. 3. 10:33경전 이야기



       

체로금풍(體露金風) | 선사의 가르침
여운(如雲) | 조회 88 |추천 0 | 2017.08.26. 17:08
  

   12월에 들어서니, 한 장만 남은 달력이 눈이 들어옵니다. 광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저물어 가는 한 해를 차분하게 돌이켜 볼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차가운 날씨에도 어두운 밤을 밝히는 수많은 촛불은 아직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는 정치권에 대한 큰 죽비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를 뽑은 이도 바로 우리 자신임을 생각하면, 이 모든 일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 담겨야 합니다. 정치가들이 대통령의 퇴진과 그 시기를 두고 서로의 이해(利害)를 따져서는 앞날이 순탄해질 수 없습니다. 자기를 내려놓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수행자가 자기의 수행에 대해 애착을 내려놓지 않으면, 역순(順逆)에 따라 마음에 병(心病)이 일어납니다. 옛 선사들은 재물과 명예는 그래도 역경계라 버리기 쉽지만, 수행하면서 얻어지는 무심한 경계순경계라 참으로 벗어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한 학인이 운문(雲門)선사에게 자기의 수행에 대해 물었을 때 운문은 학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같은 병을 보았습니다.

운문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질 때는 어떠합니까?"
운문선사가 말하였다.
"온몸이 가을바람을 맞게 되지(체로금풍)."

雲門因僧問 樹凋葉落時如何(수조엽락시여하) 師云 體露金風(체로금풍)
- 선문염송 23권 수조(樹凋)

​   한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질 때는 어떠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나무가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은 몸과 마음이 무심(無心)한 경지를 상징합니다. 즉, 자기처럼 무심에 이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묻는 질문입니다. 스님의 질문 속에는 자기의 수행에 대한 자부가 대단합니다. 운문선사 "온몸이 가을 찬바람을 맞게 되지(체로금풍 體露金風)"라고 대답했습니다. ​금풍은 서쪽에서 부는 찬바람, 즉 가을 바람을 뜻합니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지면 가을이라 온몸이 찬바람에 노출되는 법입니다. 여기에 학인은 달리 더 물을 것이 있을까요? 체로금풍을 놓고 찬바람은 작용이며, 벌거벗은 나무는 적적한 본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운문선사의 뜻과는 벌써 어긋납니다. 

​   운문의 답변은 마치 통으로 된 쇠뭉치와 같아서 그동안 배운 지식과 앉은 힘을 다 모아도 밀어내지 못합니다. 운문선사는 '체로금풍' 한 마디로 단박에 묻는 스님의 입을 막아버리고 분별을 그치게 했습니다. 분별이 그쳐야, 비로소 무심도 또 하나의 장벽임을 깨닫게 됩니다.




   무심에 대한 애착은 참으로 수행자의 병통입니다. 무심에 집착하면, 잎이 떨어진 나무나 가을바람에 몸을 맡기는 일에 대해 온갖 알음알이를 지어냅니다. 육왕심 선사다음 게송 하나로 이 화두에 대한 온갖 물결을 일시에 끊었습니다.

무쇠나무에 꽃 핀 일 헛되지 않으니
가을바람 불어오자 인간 세상에 두루 떨어졌네.
이 꽃 한 송이를 누가 주울꼬?
절름발이 운문이 배짱이 산(山)만큼 크구나.

​鐵樹花開不等閑, 金風吹落遍人閒. 不知一 片是誰得, 跛腳雲門膽似山.
- 선문염송 23권 수조(樹凋)​

 ​

   육왕심 선사는 '온몸이 가을바람을 맞는다'는 말이 오히려 세간의 이런 저런 분별을 일으킨다고 비난합니다. 나아가 체로금풍을 두고, 절름발이 운문이 칼날 위에서 배짱 좋게 춤을 춘다고 한 방망이를 던졌습니다. 고요하고 적적한 경계를 붙잡는 것은 아직 마음이 무심에 묶여있기 떄문입니다. 무심(無心)이 눈 녹듯 무너져야 쇠꽃 한 송이를 얻습니다.

운문선사의 답변은 물음에 딱 맞는 답변이면서도 묻는 스님이 길을 잃고 헤매게 했으니, 참으로 탁월하고 교묘한 방편입니다. 천동정각 스님대혜종고와 함께 송나라의 대표적 선승입니다. 선사는 '체로금풍'에 대해 "파도를 따르고 물결을 좇아 이렇게 따라가다 보니, 배에 오르자 곧바로 집 문앞에 이르렀다."라고 찬탄했습니다.

천동각 선사가 법상에 올라 이 화두(체로금풍)를 들고 말했다.

"(과연 운문은) 설봉의 아들이요, 덕산의 손자로다. 한 마디 말을 끌어서 돌리니 뿌리를 찾아내기 어렵고, 뭇 견해를 딱 끊어버려 밑바닥을 보인다. 뚜껑과 입이 서로 맞는 것이 하늘과 땅이 서로 응하는 것과 같고, 긴 것은 긴 대로 짧은 것은 짧은 대로 자연스러워 끊어진 마디가 없으며, 빈틈없이 꽉 차서 통째로 한 덩어리로 변한다. 파도를 타고 물결을 따라 그렇게 갔더니, 배에 오르자 곧바로 집 문앞에 이르렀구나."

天童覺上堂,擧此話云:雪峯之子,德山之孫.葛藤牽轉難窮根, 截斷衆流見源底. 相應函蓋同乾坤, 長長短短無節奏, 緜緜密密忒鶻侖. 隨波逐浪恁麽去 上舩便到家前門.

- 선문염송 23권 수조(樹凋)​

  '체로금풍'은 파도를 따르고 물결을 가로질러 집에 이르게 하는 배입니다. 운문선사는 가을바람에 알몸을 맡긴다는 이 무심한 한 마디로 학인의 알음알이를 끊어 버리고는 이윽고 학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보게했습니다. 천동선사는 실로 이 화두의 천기를 누설했습니다. 승찬대사<신심명>에서 '애착과 증오만 버리면, 눈앞이 분명해진다(단막증애 통연명백 但莫憎愛 洞然明白)'고 했습니다. 애증과 간택이 있는 것은 눈앞의 명예와 부귀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뿐만 아니라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도 애증(愛憎)과 순역(順逆)에 담담해야 눈 앞이 탁 트입니다. 산을 넘으면 다시 강이 앞을 가로막는 법이니, 첫걸음을 내 디딜 때는 오직 발밑을 보아야 합니다.


(여운 2016. 12. 1.) ​ 

cafe.daum.net/buddhathink/8lFa/89   작은방법회




[대장경 명구] 22. 수조엽락 체로금풍(樹凋葉落 體露金風)| 불교교리
백우 | 조회 103 |추천 0 | 2014.10.01. 09:07
  

           22. 수조엽락 체로금풍(樹凋葉落 體露金風)

 

 

법보신문






승인 2013.12.03 13:55:00






수행을 다 마친 도인은
고대광실에 앉지 않고

자기 진면목 잘 드러내
중생에 기쁨과 이익 줘

 

 

 

원문 : 僧問雲門하기를  樹凋葉落時如何입니까  雲門云하기를  體露金風이다

         승문운문          수조엽락시여하         운문운          체로금풍

 

번역 :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묻기를

        “나무가 마르고 잎이 다 떨어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운문선사가 말하기를

        “가을바람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앙상한 나무 몸체가 그대로 드러나겠지”

        하였다. (벽암록 27칙)

 

 

 

   운문선사(864~949)는 중국 선종의 종파인 5가7종 가운데 운문종을 창종한 종조로서 선의 종장(宗匠)이다. 운문종은 운문선사의 기라성 같은 문하 제자들에 의해 당나라 말기와 오대를 거쳐 송나라 초기에 크게 활약하였다.


   일체의 분별 사량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그의 언어 사용은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 불리는 조주선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운문선사가 선문에서 언어 표현의 묘를 살린 선사로 평가받는 이유는, 불립문자라 하여 언어문자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언어의 한계를 이해하고 언어와 인식의 논리를 초월한데 있다. 그의 선문답과 선법문은 5가종 가운데 극치를 이루었다. 종풍의 법문은 독특하여 거칠고 심오하다.


   운문선사의 공안 고칙이 ‘벽암록’14회(조주선사 12회), ‘종용록’에 8회(조주선사 4회) 나온다. 역대조사 가운데 그가 만든 화두공안이 많이 수록된 것은 제자를 가르치는 수단과 내용, 언어 사용이 가장 독특하고 수승하다는 증거이다.


   ‘벽암록’ 27칙에 나오는 ‘운문체로금풍’은 표현이 문학적이고, 뜻이 심오하다. 늦가을 입동에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나무가 몸체만 드러내고 언덕에 홀로 서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참선 수행이 무르익어 나무와 낙엽처럼 감정과 관념의 진액이 모두 빠져나간 무심도인의 경지를 문답으로 담론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안목과 견처가 있는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를 찾아와 “수행자가 아집과 법집(法執: 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에 대한 집착이 모두 끊어진 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나무가 마르고 잎이 다 떨어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하고 들이댔다.


운문선사는 “당당하게 옷을 홀랑 벗고 언덕 위에 홀로 서서 겨울바람에 대적하여 추위를 견뎌내는 앙상한 나무이지”라고 대답했다. 수행을 마친 도인은 금으로 만든 가사를 두르고 고대광실에 앉아 있지 않는다. 앞니가 빠진 천진한 시골노인의 꾸밈이 없는 모습으로 시장바닥에 나타나 자신의 진면목을 진솔하게 드러내 중생에게 기쁨을 주고 용기를 주고 이익을 준다. 주관과 객관이 모두 사라져서 외부로부터 닥쳐오는 고통과 역경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인경구탈(人境俱奪)의 경지이다.


   봄·여름 키워냈던 나뭇잎이 가을이 되어 진액이 빠져나가고 홀가분하게 낙엽이 되었을 때 그것마저 떨어내고 홀로 남은 늦가을 나무는 찬란하게 찾아 올 봄을 기다리며 기꺼이 외로움과 추위를 감내(堪耐)한다.


가을날 낙엽을 밟으며 운문선사의 ‘체로금풍’의 화두를 생각한다. 슬픔을 떨어내자. 저 앙상한 나무처럼, 저 낙엽처럼 비우고 떠나자. 집착을 버리자. 그래야 내년 봄에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다. ‘낙엽’이란 시를 썼다.

 

 

▲김형중 법사

이별할 시간이 왔습니다/

지난여름 천둥소리에도 버텨왔던 질긴 끈을/

이제 놓아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노랑저고리 빨강치마 곱게 분바르고/

이별할 때를 기다립니다/

오늘은 초조해서 낮술까지 한 잔 했습니다/

휙 불고 지나가는 금풍(金風) 따라/

훌렁 벗고 떠나렵니다/

                               떠날 때는 버릴 것이 없어야 홀가분하답니다/

                               마지막 진액마저 빠져나가 한결 가볍습니다/

                               지금은 비우고 또 비울 때입니다.


김형중 동대부중 교감·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체로금풍 〉
  • 이은윤 주필
  • 승인 2010.09.16 10:56

밝은 달 앞마루
비추는 추석날 밤
江月에도 한 잔 권하자

학인 : 나무의 잎들이 시들어 낙엽져 떨어지면 어떠합니까?
운문 : 벌거벗은 나무줄기에 금빛 바람 분다[體露金風].


   선종 5가7종(五家七宗) 중 가풍이 가장 가파르고 천재적인 운문종 개산조 운문문언 선사(864~949)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금빛 바람(金風)’은 가을에 부는 결실의 바람이다. ‘체로(體露)’는 완전히 드러남, 벌거벗어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을 뜻한다. 운문선사는 가을이 되어 차가운 바람 불면 나뭇잎들이 떨어져 나무 줄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누구라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일상(日常)의 얘기다.

   이 평범한 일상생활속의 가을 풍광에 비유해 설한 선지(禪旨)는 아주 명쾌하고 깊다. 금풍은 가을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 위로 물결치며 벼알을 여물게 하는 황금빛 바람 같은 수행의 ‘결실’을 재촉하는 바람이다. 잎이 다 떨어져 알몸이 된 나무 줄기(體露)는 ‘본래면목’ 또는 ‘일심청정의 심령’을 상징한다. 여름철 나뭇가지들을 무겁게 늘어뜨렸던 우거진 녹음의 나뭇잎은 덕지덕지한 ‘번뇌 망상’의 상징이다. 잎들이 낙엽져 떨어짐은 곧 번뇌 망상을 떨구는 것이기도 하다. 번뇌 망상을 떨구는 수행이 가을 결실의 황금빛 바람에 무르익어 깨침의 열매를 맺게 되면 청정한 본래면목을 드러낸 해탈 도인(道人)이 된다는 법문이다.

   운문의 화두 ‘체로금풍’은 추석 명절 귀향길 익어가는 벼이삭 출렁이는 황금빛 들녘에 불어오는 가을 바람을 맞는 환희심 속에 묻어둘만 하다. 짙푸른 나뭇잎들 낙엽져 떨구듯이 가슴속 마음을 공허하게 비우면 올 추석 명절은 다시 없이 즐거울 수 있다. 옛 사람들은 한 잎의 떨어지는 낙엽으로 천하의 가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곧 단풍 들고 낙엽 진다. 낙엽은 ‘체념’이기도 하다. 위대한 체념은 해탈 오도(悟道)에 통한다. 불교는 ‘신(神)’을 찾아 성취 불가능한 원리적 질서나 생활방식의 근거로 삼고자 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의 운행질서를 따라 황금빛 바람을 기분 좋게 쏘이며 낙엽 지면 체념하고 졸리면 자고, 슬프면 운다. 이것이 천명을 즐기는 삶이고 깨달은 사람의 삶이다. “전생에는 필시 시를 쓰는 중”이었을 것이라며 향산거사(香山居士)라는 자호를 지어 말년을 절에서 보내기도 했던 백낙천(772~847)은 다음과 같이 읊조린 바 있다.


   낙천, 낙천아! 크게 슬퍼하지 마라!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낮에는 일어나고 밤에는 자고, 터무니 없이 좋아하거나 허망하게 슬퍼하지도 말고, 병들면 눕고 죽으면 편히 쉬어라. (樂天 樂天! 可不大哀! 而今以后 汝宜餓而食 渴而飮 晝而興 夜而寢 無浪喜 無忘憂 病則臥死則休!)


   백거이의 자(字)인 ‘낙천(樂天)’은 천명을 따라 즐겁게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낙천가·낙천주의라는 말도 있지만 당대(唐代) 3大 시인의 한 사람이며 사대부였고 독실한 불자이기도 했던 그는 임운자연(任運自然)하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앞의 인용 시구는 그의 〈자회시(自誨詩)〉 중의 일부다. 백낙천은 〈모립(暮立:황혼에 서다)〉〈문충(聞:벌레소리를 듣다)〉이라는 시에서 각각 “대저 사계절이 늘 마음 괴롭거늘 가을철엔 더욱 창자가 끊어질 듯 아프구나”, “길고 긴 밤 찌륵찌륵 우는 벌레소리 비를 내릴 듯한 가을 하늘 스산하네”라고 가을의 우수를 읊조렸다.

   밝은 달 앞마루에 비추는 추석날 밤 술잔 앞에 놓고 먼 친척들, 평생의 친한 벗들 생각하느라 훌쩍 마시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참으로 그 같은 좋은 밤 얻기 어렵다. 명월이 걸음 멈추지 않고 서남쪽으로 기울어 가더라도 후일 만날 날 기다리며 맑고 밝은 달밤의 추석날 술잔을 비우자. 탁 트인 마음으로 저 강물에 뜬 달에게도 술 한잔을 권하면서.


이은윤 주필  ggbn@ggbn.co.kr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99    금강신문


금강신문






⑨ 체로금풍(體露金風)
가을바람에 앙상한 가지 드러나고
2009년 11월 24일 (화) 16:56:02고명석 kmss59@buddhism.or.kr

   형형색색 물들던 단풍잎들이 바람에 부스럭거린다. 한적한 산속을 달리는 차량 뒤로 낙엽들이 또르르 무리지어 뒹군다. 산사에 도착하니 낙엽 태우는 냄새로 가득하다. 저 찬란한 가을이 간다. 여기저기 서 있는 나무의 군상은 그동안 이고 있던 단풍잎들을 벗어버리고 빈가지만 앙상하다. 그 빈 가지들이 허공에 뚜렷하게 자리를 튼다.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바람이 인다. 이제 가을을 지나 겨울로 다가선다.

한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묻는다.
“나무가 매 마르고 낙옆이 지면 어디로 갑니까?”
운문스님이 답한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매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 구나.”

   이것은 《벽암록》 27측에 나오는 구절이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매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 구나”의 한문 구절은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다. 체로는 몸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금풍은 소슬한 가을바람이다.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낙엽들은 힘없이 떨어진다. 나무들은 앙상한 빈 가지를 드러낸다.

   그 동안 햇빛을 받으며 자연과 호흡했던 새파란 시절의 나뭇잎들, 가을이 오매 형형색색으로 불타오르던 나뭇잎들이 사라지고 나무는 본래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다. 이제 치장된 아무것도 없다. 부귀와 공명,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만남과 헤어짐, 이기심과 질투심, 격정과 증오, 사랑과 좌절이 모두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을 숲과 단풍잎은 나를 설레게 하지만, 이렇게 빈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의 모습은 나를 차분하게 가라앉게 만든다. 고요하고 적막하다. 그런 고요와 적막 속에서 나의 고독과 직면한다. 발가벗은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하나의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적나나한 모습이다. 그것은 그저 쓸쓸한 허무가 아니다. 어떤 가식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와 관련된 또 따른 선어가 《벽암록》 90측과 그 밖의 선어록에 등장한다. 그 구절이 ‘정나나(淨裸裸) 적쇄쇄(赤灑灑)’이다. 혹은 ‘적나나(赤裸裸) 정쇄쇄(淨灑灑)’라고도 한다. 적(赤)이라는 말은 붉다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공을 뜻한다. 아기와 같은 순수하고 천진스러움을 의미한다. 청빈의 뜻도 있다. 청빈이나 적빈은 같은 의미다. 티 없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赤) 대신 깨끗한 정(淨)자를 쓰기도 한다. 따라서 적나나란 거짓 없는 모습이며 밝은 모습이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도 하다. 쇄는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정쇄쇄란 아주 청정하여 일체의 오염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나나 적쇄쇄’ 혹은 ‘정나나 적쇄쇄’ 우리들의 발가벗은 본디모습, 아주 맑고 투명한 모습을 일컫는다. 나무를 치자면 모든 이파리가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모습이다.

우리 본래모습, 삼라만상의 참 모습은 이렇게 티 없이 맑고 투명한 모습이다. 이러한 본모습 앞에 직면하면 사실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과 질풍노도는 가벼운 숨소리, 소솔한 바람소리에 속절없이 사라져 버리는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

   만추를 보낸 이 초겨울은 본래 모습이 저절로 드러나는 계절이다. 빈가지만 앙상한 겨울 숲을 걷노라면 명징한 하늘에 빈가지가 고스란히 박혀 있다. 바람이 차긴 하지만 오히려 시원하다는 느낌이다. 그러게 맑고 투명하다. 산 속을 흐르는 시냇물도 차디차지만 티 없이 깨끗하고 정갈하다. 그러한 명징함 속에서 드러나는 나무의 빈 가지들은 허공 속으로 부채살처럼 퍼져 나간다. 바로 이러한 빈자리에서 어제 직장동료부터 들었던 자존심상하는 얘기는 사실 자질구레한 사치에 불과하다. 사소한 일로 부딪혔던 아내와의 말다툼과 부끄러운 기억도 피식 너털웃음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겨울 숲을 거닐어 볼 일이다. 그런데 그 많은 낙엽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 했을 진데 낙엽 역시 본래 자리로 돌아간 것일까? 어디로 돌아간 것일까? 바람이 휑하니 지나간다. 낙엽 하나가 허공을 떠돈다. 맑은 겨울 하늘이다.


고명석/조계종 포교연구실 선임연구원



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746    불교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