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달 앞마루
비추는 추석날 밤
江月에도 한 잔 권하자
학인 : 나무의 잎들이 시들어 낙엽져 떨어지면 어떠합니까?
운문 : 벌거벗은 나무줄기에 금빛 바람 분다[體露金風].
선종 5가7종(五家七宗) 중 가풍이 가장 가파르고 천재적인 운문종 개산조 운문문언 선사(864~949)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금빛 바람(金風)’은 가을에 부는 결실의 바람이다. ‘체로(體露)’는 완전히 드러남, 벌거벗어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을 뜻한다. 운문선사는 가을이 되어 차가운 바람 불면 나뭇잎들이 떨어져 나무 줄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누구라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일상(日常)의 얘기다.
이 평범한 일상생활속의 가을 풍광에 비유해 설한 선지(禪旨)는 아주 명쾌하고 깊다. 금풍은 가을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 위로 물결치며 벼알을 여물게 하는 황금빛 바람 같은 수행의 ‘결실’을 재촉하는 바람이다. 잎이 다 떨어져 알몸이 된 나무 줄기(體露)는 ‘본래면목’ 또는 ‘일심청정의 심령’을 상징한다. 여름철 나뭇가지들을 무겁게 늘어뜨렸던 우거진 녹음의 나뭇잎은 덕지덕지한 ‘번뇌 망상’의 상징이다. 잎들이 낙엽져 떨어짐은 곧 번뇌 망상을 떨구는 것이기도 하다. 번뇌 망상을 떨구는 수행이 가을 결실의 황금빛 바람에 무르익어 깨침의 열매를 맺게 되면 청정한 본래면목을 드러낸 해탈 도인(道人)이 된다는 법문이다.
운문의 화두 ‘체로금풍’은 추석 명절 귀향길 익어가는 벼이삭 출렁이는 황금빛 들녘에 불어오는 가을 바람을 맞는 환희심 속에 묻어둘만 하다. 짙푸른 나뭇잎들 낙엽져 떨구듯이 가슴속 마음을 공허하게 비우면 올 추석 명절은 다시 없이 즐거울 수 있다. 옛 사람들은 한 잎의 떨어지는 낙엽으로 천하의 가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곧 단풍 들고 낙엽 진다. 낙엽은 ‘체념’이기도 하다. 위대한 체념은 해탈 오도(悟道)에 통한다. 불교는 ‘신(神)’을 찾아 성취 불가능한 원리적 질서나 생활방식의 근거로 삼고자 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의 운행질서를 따라 황금빛 바람을 기분 좋게 쏘이며 낙엽 지면 체념하고 졸리면 자고, 슬프면 운다. 이것이 천명을 즐기는 삶이고 깨달은 사람의 삶이다. “전생에는 필시 시를 쓰는 중”이었을 것이라며 향산거사(香山居士)라는 자호를 지어 말년을 절에서 보내기도 했던 백낙천(772~847)은 다음과 같이 읊조린 바 있다.
낙천, 낙천아! 크게 슬퍼하지 마라!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낮에는 일어나고 밤에는 자고, 터무니 없이 좋아하거나 허망하게 슬퍼하지도 말고, 병들면 눕고 죽으면 편히 쉬어라. (樂天 樂天! 可不大哀! 而今以后 汝宜餓而食 渴而飮 晝而興 夜而寢 無浪喜 無忘憂 病則臥死則休!)
백거이의 자(字)인 ‘낙천(樂天)’은 천명을 따라 즐겁게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낙천가·낙천주의라는 말도 있지만 당대(唐代) 3大 시인의 한 사람이며 사대부였고 독실한 불자이기도 했던 그는 임운자연(任運自然)하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앞의 인용 시구는 그의 〈자회시(自誨詩)〉 중의 일부다. 백낙천은 〈모립(暮立:황혼에 서다)〉과 〈문충(聞:벌레소리를 듣다)〉이라는 시에서 각각 “대저 사계절이 늘 마음 괴롭거늘 가을철엔 더욱 창자가 끊어질 듯 아프구나”, “길고 긴 밤 찌륵찌륵 우는 벌레소리 비를 내릴 듯한 가을 하늘 스산하네”라고 가을의 우수를 읊조렸다.
밝은 달 앞마루에 비추는 추석날 밤 술잔 앞에 놓고 먼 친척들, 평생의 친한 벗들 생각하느라 훌쩍 마시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참으로 그 같은 좋은 밤 얻기 어렵다. 명월이 걸음 멈추지 않고 서남쪽으로 기울어 가더라도 후일 만날 날 기다리며 맑고 밝은 달밤의 추석날 술잔을 비우자. 탁 트인 마음으로 저 강물에 뜬 달에게도 술 한잔을 권하면서.
이은윤 주필 ggbn@ggbn.co.kr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