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눈물 外

2018. 2. 5. 18:13차 이야기



       

공자의 눈물 역사를 본다

2008. 12. 31. 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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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니 내가 너무 말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이 면을 통해서 쓴 글이 1월1일 '새해 인수위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필두로 해서 어제 쓴 '다시 한 해라는 시간을 걸으며'까지 100여 편에 이르고 있다. 일 년이 열 두 달인 점을 감안하면 한 달에 평균 8편 이상을 쓴 셈이다. 그렇게 쓴 글이 이 칼럼을 찾아오는 분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너무 구업(口業)을 많이 쏟아낸 것은 아닐까 반성이 된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오늘 아침 한국 고전번역원에서 며칠 전 보내준 한 칼럼을 비로소 읽게 되면서부터이다. 그 칼럼은 공자의 삶의 자세를 설명하고 있다.공자는 어려운 시대에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하고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분석한 글인데 여러가지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다.

공자를 콩쯔라고 읽어야 한다고 어느 분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한국인에게 공자는 여전히 공자다. 그 공자의 삶이 우리에게 미치는 바는 지대하며, 시대가 변해도 그 말의 의미는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오늘날은 지식인들이 어려운 상황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바가 많기 때문일 것이며. 사회가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려 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또 지식인들이 얘기하는 것들이 우리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이 아니고 지식인들의 말잔치가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공자가 택한 삶의 방식이 고리타분하다고 느끼실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삶이 이 시대까지 의미가 있는 것은, 그 당대의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만 머무르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했고 그것이 이 시대에서도 유용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라면 공자가 그 시대에 흘린 눈물의 의미를 위가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글을 쓰신 분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이곳을 찾은 분들이 이 글을 함께 보며 함께 생각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은 것이다. 아래에 그 글을 전재해서 싣는다

 

 

공자의 삶에서 눈물을 느끼는 이유

( 고전칼럼 009.    2008.12.24)


《논어(論語)》의 기사들 중 가슴에 울려퍼지는 감격을 주는 장면들이 있다. 공자가 조롱을 당하면서도 세상을 향하고 세상을 위하는 자신의 신조를 꿋꿋이 지켜가는 장면들이다. 거기서 드러나는 공자의 모습은 근엄하고 권위에 찬 어른이라기보다는 여러 번의 좌절을 견디면서 버텨가는 사랑의 일꾼이다.

《논어》 권18 〈미자(微子)〉, 권14 〈헌문(憲問)〉 편에는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농군, 낭인, 하급관리로 숨어 사는 현자들이 여럿 등장한다. 접여(接輿), 장저(張沮), 걸닉(桀溺), 하조장인(荷조丈人), 하궤자(荷궤者), 석문(石門)의 관문지기 등이 그들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도는 공자에게 은자들은 우정 어린 충고를 보낸다.

“봉황아 봉황아, 어찌 덕을 쇠하게 하는가! 지나간 일은 나무랄 바 아니지만 다가올 일은 고쳐나갈 수 있는 것을! 그만두게 그만두어, 오늘날 정치에 나아가는 것은 위태할 뿐이니.”

“음악 소리에 마음이 너무 강하게 실렸어.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만두면 될 것을. 물이 깊으면 옷을 추어올리고 건널 것이고, 물이 얕으면 걷어올리고 건널 일이지.”

논어에 나오는 은자들은 대체로 공자와 비슷하거나 공자보다 높은 연배에 해당하는 인사들로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가 허망한 것임을 나름대로 깨달은 사람들이다. 원칙을 어기고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권모와 술수의 풍조가 천하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판에,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공자의 태도에 갑갑함을 느끼는 모습들이다. 타협 없이 꼿꼿하게 요ㆍ순ㆍ우ㆍ탕의 도(道),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로써 세상을 바꾸어내겠다는 공자의 의지가 가상하면서도 그 노력이 좌절될 것에 대해 연민의 정을 품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공자의 제자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농끼 어린 어투로 비판하면서 공자를 떠나 자신들과 함께하기를 권유하기도 한다. 이러한 권유는 물론 공자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당장의 일에 연연하여 성공하기를 기약하기보다 초야에 묻혀 도를 지키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다.

“팔다리로 노동하지도 않고 오곡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선생은 무슨 선생이여?”

“그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인 줄 알면서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가?”

“콸콸 흘러내리는 저 물살이 세상 어디서나 똑같은데, 누구와 더불어 그걸 바꿀 수 있으랴. 저렇게 사람을 피해다니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우리처럼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를 따르는 게 나을 걸세.”

이들의 충고와 권유에 대해 공자는 자신의 진정이 통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하지만 그 시도는 성공한 적이 없다. 한 마디씩 툭 던지고 사라지는 은둔자들의 조소나 권유에 대해 공자가 언급한 것으로 논어에 실린 말은 두 가지가 있다.

“과감하기도 하지. 어려울 게 없겠군.”

세상에 관해 싹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하고 속 편한 태도라는 것이다.

“길짐승, 날짐승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람들의 무리와 더불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와 더불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도가 있었다면 나는 바꾸고자 하는 일에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만나면 눈물이 핑그르 돈다. 공자는 이렇게 생각하였으리라. 권력관계에서 떠나 초야에 묻힌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피할 수는 없다. 인간사회를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도가 행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오히려, 그걸 알기 때문에 이렇게 돌아다니며 도를 살려보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도가 원활하게 펴질 전망이 있는 세상이라면 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몰두하여 옛날 도를 즐기며 살 것이다.


◁◀ 공자상


천자가 천자 노릇을 하는 통일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공자의 꿈은 13년간의 주유천하를 거치면서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기대했던 위나라에서 군사계책에 대해 묻자 마침내 떠나기로 작정한 것이다. “새가 나무를 택할 수 있는 법, 나무가 어찌 새를 택할 수 있을 것이냐.”(史記 孔子世家)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자는 떠돌아다니는 삶을 접었다. 고국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육예(詩ㆍ書ㆍ易ㆍ禮ㆍ樂ㆍ春秋)를 정비하는 일과 군자를 양성하는 교육에 시간을 바쳤다.

공자가 주유천하를 끝낸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은자들의 충고를 수용한 결과일 수 있다. 적어도, 세상사에 진력하다가 산으로 숲으로 들어간 선배들의 행적을 얼마쯤은 뒤따른 셈이다. 그러나 공자의 행로가 그들과 다른 점은 끝까지 세상사에 관한 관심과 개입정신을 놓지 않은 데 있다. 3천에 이르는 제자들의 육성을 통해 군자학(君子學)을 확산하고 그를 통해 미래를 기약하고자 한 것이다. 여러 주석들이 제시하는 해석들을 두루 고려할 때, 공자가 은자들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면 그 때 할 말은 이런 정도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대들처럼 이 인간세상을 버리거나 잊을 수 없다네. 그대들은 내가 아등바등 세상 일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겠지. 하지만 그것은 성공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닐세. 내게 지워진 이 시대의 짐을 벗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지.”

자기 시대의 학문과 이상적 정치의 포괄적 임무(德과 文)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확신한 그는 결과적 성공 여부와는 무관히, 하늘이 맡긴 그 짐[천명(天命)]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은자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원했던 공자는 그들을 내 편으로 끌어오지도 못하고 내가 그들의 편에 끌려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적어도 서로가 상대방의 관점과 입장을 이해하고 양해받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공자가, 보기에 따라 골몰스럽고 구차스럽게 재상의 자리를 구하러 다닌 데에는 두 가지 수준의 중요한 근거 내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세상 사람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 인(仁)의 덕이다. 모든 사람을 나와 똑같은 주체로 느끼고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 서(恕)의 자세이다. 이 철학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공자는 천하에 덕치를 펼치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둘째, 공자는 치열한 권력다툼과 비열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도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깃든 가능성을 믿었다.

“내가 남들에 대해 누구를 헐뜯어 낮추고 누구를 기리어 높이랴. 다만 기릴 만한 데가 있다면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에 걸쳐 도(道)가 왜곡되지 않고 시행된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인을 실현할 자질을 지녔다는 철학적 신념, 그리고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진다면 백성들은 그것을 수용해 낼 소양을 지녔다는 현실적 낙관, 이 두 가지가 공자의 고난 어린 생애를 위대한 것으로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한다.


글쓴이 / 유초하
*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 저술(공저)
『한국인의 생사관』, 2008, 태학사.
『우리 대학 절망에서 희망으로』, 2006, 전국교수노동조합.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2001, 예문서원

『한국사상사의 인식』, 1994, 한길사

 

[출처] 공자의 눈물|작성자 동산선생








모바일글 공자의 춘추 낙서장

2016. 8. 3.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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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의역사이야기

[동방의 주나라를 꿈꾼 큰 선비 공자(孔子)] 제5부

『춘추』로 나를 심판하라

공자가 한동안 위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위의 대부 공문자(孔文子)가 한 지방을 공격하고자 공자에게 계책을 문의했다. 비답을 내리면 중용할 태세였다.
이에 공자는 모른다고 사양하고 제자들에게 수레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양금택목(良禽擇木)이란 고사로 대답했다.
“현명한 새는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치는 법이다.
새는 나무를 선택하여 서식할 수 있지만 어찌 나무가 새를 택하겠느냐?”
공자의 이름은 이미 천하에 뜨르르하였다.
대부 정도에 중용될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딴은 다툼의 장에 끼여들고 싶지 않았는지,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고자 하였다.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일이었다.
오래 전부터 고국으로 가고자 거듭 노래하면서도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노나라가 제나라에 병탄당할 위기에 빠졌을 때, 공자는 유세가인 자공을 보냈다.
자공은 초, 오, 월의 역학 관계를 교묘히 이용하여 노나라의 사직을 유지시켰다.
그런 공로가 있음에도 공자는 귀국을 미루어 왔다.
천하를 경영할 뜻을 품고 주유하였건만, 차마 상갓집 개처럼 지친 꼴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행선지를 확정하지 못한 터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강자가 풍성한 예물과 수레까지 갖추어 공자를 초빙한 것이었다.
공자는 기꺼이 응했다.
천하를 떠돌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그나마 초빙을 받았으니 명분도 설더러 쓸쓸하지도 않았다.
이때 그의 나이 일흔, 동방 주나라 건설의 꿈을 안고 떠난 지 14년 만의 귀국이었다.

노나라는 애공(哀公)이 다스리고 있었다.
하루는 애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물었다.
“정치의 근본은 신하를 잘 뽑는데 있습니다.”
공자는 은근히 자신을 중용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애공에게는 신하를 뽑을 힘이 없었다.
실권은 여전히 계강자와 귀족들에게 있었다.

계강자도 공자에게 정치의 도에 대해 물었다.
“정직한 사람을 뽑아서 부정직한 사람 위에 놓으면 부정직한 사람도 정직해집니다.”
이번에도 공자는 학문과 덕을 넉넉히 갖춘 자신 같은 인물이 높이 천거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계강자는 그런 공자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는 신하이면서 실은 임금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부정직한 사람이었으니.
“나라 곳곳에 도적과 강도가 들끓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계강자는 화제를 돌렸다.
초빙을 해놓고도 등용하지 않으매 화가 났음인가.
공자는 계강자에게 비수와 같은 말을 내찔렀다.
“진실로 당신 스스로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나라에서 상을 준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을 것입니다.”
백발의 공자가 노기 띤 눈으로 젊은 계강자를 쏘아보았다.
내가 재상 직분을 수행할 때는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대가 도의를 벗어나 왕을 위압하고 국정을 전횡하니 백성의 성정도 흐트러짐이 아니겠느냐.
모든 악덕이 그대로 말미암아 솟아나거늘 누구를 탓하고자 도적이 들끓는다는 말을 하느냐는 엄정한 꾸짖음이었다.
계강자가 그런 공자를 중용할 턱이 없었다.
공자도 더 이상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고 학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손수 노나라의 역사를 바탕으로『춘추(春秋)』를 엮었다.
그리고 역(易)에 심취하여 주간을 꿴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열심히 탐독했다.
공자는 죽는 순간까지 제자 육성에 마지막 정열을 불태웠다.
그는 『시(詩)』,『서(書)』,『예(禮)』,『악(樂)』을 교재로 삼아 가르쳤는데, 제자가 모두 3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노나라는 물론 천하의 명유(名儒)들이 공자에게서 비롯되었다.
그 가운데 뛰어난 10철(十哲)이 있었고,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명이었다.
여기서 육예라 함은 시, 서, 예, 악, 역, 춘추를 묶어 일컫는다고 보는 설과,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수(數), 서(書)라고 보는 설이 있다.

말년의 공자는 말할 수 없는 허전함에 자주 눈물짓곤 하였다.
안연과 자로를 비롯한 애제자(愛弟子)를 먼저 저승으로 보내고는 더욱 비통해 하였다.
무엇보다도 천하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흐트러진 도의를 바로 세워 동방의 주나라를 건설하여 천하에 교화를 펼치고자 했던 공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무려 14년간을 풍찬노숙하며 유리(遊離)했던 그는 7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공자세가」에 전하는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 되어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유해를 동쪽 계단에 모셨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고,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제 밤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는 자신의 죽음을 꿈으로 목도하고 장례 예법을 제자들에게 지시했던 것이다.
그 7일 후, 천하의 큰 선비 공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때는 기원전 479년 4월이었다.

공구 중니의 삶은 이처럼 불운한 궤적이었다.
그는 산만한 학문과 사상을 정리하여 체계를 세웠고, 그것을 이용하여 천하를 교화하고자 하였지만 결국 아무 데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공자를 두고 그의 말년에 누군가는 “공자는 박학하면서도 단 한 가지 예(藝)에도 이름을 세우지 못했다”고 혹평하였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공자는 젊은 시절에 주나라로 가서 현자로 익히 알려진 노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때 노자는 공자와 환담하고 귀로에 다음과 같은 충고를 건넸다.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로운데 이는 남의 결점을 잘 지적해 내기 때문이오.
자녀 된 자는 아버지뻘 되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를 낮추고, 신하 된 자는 임금 앞에서 자기를 치켜세우지 않는 법이라오.
재능이 뛰어나도 겸손의 덕을 쌓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말이다.
이는 공자의 마음속에 오만함과 욕심이 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공자세가」에서는 이렇게 매우 완곡한 비판의 충고를 하나, 「노자. 한비 열전」의 기술은 훨씬 신랄하다.
노자는 공자에게 ‘교만과 욕심, 잘난 체하는 병’을 버리라고 질타한다.
『장자』는 노자의 입을 빌려 공자의 인의(仁義)가 오히려 사람들의 천성을 어지럽힌다고 꼬집기도 했다.

노자와 장자의 비판은 타당한 면이 있다.
공자는 생애를 통해 권력과 야합하려는 모습을 숱하게 보여주었다.
자신을 중용해 주기만 한다면 주군이 어떠한 모습이든 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의 제자들이 도의를 들어 만류할라치면, 자신의 심지만 굳으면 괜찮다는 투로 궤변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이를 후대의 학자 왕충(王充)은 저서『논형』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공자의 말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다.
말에 방향이 없으면 행동에도 일정한 목표가 없는 것이다.
천하를 주유했는데도 쓰이지 않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공자가 일흔이 넘어 관직을 포기하고서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못한 미련은 공명심이었다.
그는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남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청사에 남기기 위해 『춘추』를 엮는다고 스스로 밝혔다.
다른 책들은 제자들과 상의하여 엮었으나 『춘추』를 펴낼 때는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공자는 『춘추』「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춘추』때문일 것이다.
이만하면『춘추』에 대한 공자의 애착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불어 이름이 후대에 알려지기를 소망했는지도 알 수 있다.

공자는 자신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학문을 집대성하여 체계를 세운 데에서 그의 이름은 큰 빛을 발했다.
『춘추』는 후세 중국 역사가들의 본이 되었고, 그는 유교의 비조가 되어 후세의 숭앙을 받게 된 것이다.
그의 교화는 그가 죽은 다음 더욱 풍성하게 일어나 절대적인 학문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 공을 높이 평가하여 사마천은 공자를 제후의 반열에 놓고「공자세가」를 엮었고, ‘최고의 성인’이라 극찬하였다.
그리고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그의 교화는 더욱 넓게 펼쳐져 중국 천하는 물론 동아시아를 덮었고 차차 서방까지 뻗쳤으니, 공자인들 이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공자는 무관의 제왕이 된 것이다.
어떤 제왕도 공자의 치교(治敎)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는 요순을 본받고 주나라를 따르고자 했으나, 정작 요순과 주나라의 어떤 천자도 그 이름이 공자만큼 빛나지 않았다.
이에 전한(前漢)의 대유(大儒) 동중서(董仲舒)는 공자를 일컬어 소왕(素王)이라 하였다.
관을 쓰지는 않았으나 그 공로가 황제와 다름없다는 뜻이다.
왜 그랬겠는가.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공자보다 순전한 마음으로 평생 학문에 정진한 공부자(工夫者)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삶이 아니라, 그가 남긴 책이 황제와 관을 씌워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는 ‘기록의 산물’이며, 책을 남기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도 두려운 일인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공자가 어떤 삶을 살았든, 학문적 성취가 어떠했든, 도의 참모습에 근접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그가 가려 뽑아 엮어 펴낸 6경으로 인해 공자는 평가받았고, 큰 이름의 탑을 쌓게 된 것도 그 책들로 인함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공자의 업적은 실로 위대한 면이 있다.
후세의 학문이 그의 업적을 기반으로 대하처럼 흘러왔기 때문이다.

이를 후세의 큰 선비 주자(朱子)는『중용』「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무릇 요.순.우는 천하의 대성(大聖)이다.
그 이래로 성인과 성인으로 이어져, 성탕, 문왕, 무왕 같은 이의 군주됨과, 고요, 이윤, 부열, 주공, 소공 같은 이는 신하됨으로써 도통의 전승을 접하였다.
우리 부자(夫子) 같은 분은 비록 그만한 지위는 얻지 못하였으나 왕성(往聖)을 잇고 내학(內學)의 길을 열어 주었으니, 그 공이 도리어 요, 순보다 현명한 바가 있다.
학문의 체계를 세운 공자의 업적이 태평성대를 이루어 군주의 전범을 보여준 요, 순보다 뛰어난 바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공과(功過)가 있다.
공자가 선현들의 자취를 선별함으로써 그의 안목에 들지 않는 법설(法說)은 난신적자 취급을 당해 명맥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나름대로 도의 모습을 체계화하고 그것으로 교화를 펼치고자 하였지만, 도의 실상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다.
말년에 이른 공자가 “대체 나의 도가 어디에 잘못이 있단 말이냐?” 하고 내뱉은 한탄은 그것을 반증한다.
체(體)는 어림짐작했으되, 용(用)에 다가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공자가 가려 엮은 책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도는 언어와 문자로 그 실체가 밝혀지거나 전수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리를 해버린 탓에 오히려 도의 실체는 심원(深源)을 떠나온 물줄기처럼 점점 근원에서 아득해지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후대의 학문은 더욱 난삽한 거미줄 같은 길을 낳은 게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생교과서] 공자 - 인, 세상을 구원할 따뜻한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Y3lF3CGzG7c

[출처] 공자의 춘추|작성자 상택생각











공자의 일대기 -3 공자이야기

2010. 9. 6. 10:28

복사 http://blog.naver.com/jkjhld4050/20113064207


  공자 나이 61세 때인 기원전 491년 노나라 애공 4년, 공자는 진나라에 있었는데, 진나라의 민공이 돌화살의 유래에 대한것을 물었고, 공자가 이에 대답하였다.  이는 <공자세기>에 설명되어 있다.  또한 노나라 대부인 계강자가 공자를 불러 노나라를 배반하고자 하였다.  애공 3년 가을 계환자가 죽고 계강자가 대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장사를 지낸후 공자를 부르고자 하였다.  이때<공야장>에도 공자가 진나라에 있을 떄"돌아가자, 돌아가자, 내고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지만 구체적인 일에는 세련미가 없고 외견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일을 이루어야 할 지 모른다"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 시기의 일이다.  또한 이해에 공자가 진나라를 떠나 채나라로 갔다.

 

62세때 공자가 다시 채나라를 떠나 섭지방으로 갔고, 여기에서 섭공과 문답이 이루어졌다. <자로>에는 섭공과의 두 가지 문답이 소개되어 있다. 먼저 섭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고 멀리 있는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다"<자로>라고 대답한 것이 그것이며 정직한 사람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논하기도 하였다. 즉 섭공은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이에 대해 증언하였다"라고 말하고 공자는 "우리 마을의 정직한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그런일이 있다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감추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감추는데, 정직함은 그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는데, 이를 통해 아마도 섭공이 법가적 관점의 소유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후 공자는 섭지방을 떠나 채나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장저,걸익,하조장인들의 은자들과 만났다. <미자>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걸익이 자로에게 "도도하게 물이 흘러가듯 천하가 모두 그러하거늘 누가 물의 흐름을 바꾸겠는가? 그리고 특정한 군주가 옮지 않다고 그러한 사람을 피해 다니는 사람을 따라다니기 보다는 차라리 세상 자체를 피해 다니는 사람을 따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공자는 "새나 짐승과 함께 무리지어 살 수 없으니,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 천하에 올바른 도리가 행해지고 있다면 나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은자들은 이미 공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공자 역시 그에 대해 감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해에 필힐이 중모 지방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부르니, 공자가 가고자 하였다고 젼해진다. <양화>에는 공자가 필힐에게 가려고 하자 자로가 "에전에 제가 선생님께'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직접 좋지 못한일을 하는 사람에게 군자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라고 들었습니다.  필힐이 중모 지방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선생님께서 가려고 하시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라는 구절이 보인다.  또한 청대의 유보남은 <논어정의>에서 "필힐이 공자를 부른일은 마땅히 애공 5년에 있었던 것으로 의심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시외전>등에서는 필힐이 중모땅으로써 배반한 일이 다른때라고 하였고 또 청대 고증학자 최술은 애공 20년때의 일이기 때문에 공자가 죽은지 5년뒤라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공자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명분도 없는 반란에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 근거한 주장인 듯하다,  그러나 이 당시 공자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고 또 그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욕구가 표출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음해인 63세때에는 초나라로 가는 도중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식량이 떨어져서 고생하였다. <순자,유좌>에는 "공자가 남쪽으로 초나라에 갈때, 진나라와 채나라의 사이에서 곤궁했다.  7일동안 식량이 없어서 보잘것 없는 음식에 쌀도 없었고 제자들은 모두 굶주린 기색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위령공>에도 "진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지고 수행하던 제자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오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했고 초나라는 진나라를 돕기 위해 출병한 일이 있는데, 이러한 전쟁의 와중에서 양식이 떨어져 고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해에 초나라에서 위나라로 돌아왔고, 도중에 초나라 은자인 미치광이 접여를 만났다.

 

애공 7년 공자나이 64세때 공자가 위나라에 있었는데, 자로에게"正名"에 대해 대답해주었다.  이는 <자로>에 자세히 보인다. <술어>에는 자공이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물음을 통해 공자가 위나라에서 벼슬할 뜻이 있는지 묻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역시 이 시기 즈음에 있었던 일이다.  다음해인 애공 8년에 공자가 위나라에 있었는데, 오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했다가 패하여 노나라와 맹약을 맺었다.  이때 제자인 유약이 이 전투에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67세까지 공자는 계속 위나라에 머물렀다.  공자가 외국에 나가있던 시기중 위나라에 있던 때가 가장 길다. 이는 노나라와의 지리적으로 가까운데에도 연유하며, 또한 자하와 자공이 모두 위나라 출신이고 안수유도 위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등 위나라 출신 제자들이 적지 않았던 때문으로 보인다.

 

(4)귀국하여 지낸 만년의 생활

애공 11년 기원전 484년 공자가 68세 되던해에 제자 염유가 계씨의 가신이 되었는데 이 때 제나라와의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하는데 공을 세웠다. 염유는 군사에 관한일을 공자에게서 배웠다고 대답하였는데, 계강자는 염유의 소망을 들어주어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는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지 14년만의 귀국이다. 이 해에 계씨가 토지 세금에 대한 제도를 고쳐 백성들이 세금을 많이 내도록 만들고자 하여 염유를 통해 공자에게 의견을 구하였는데 공자가 이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나타내었다.

 

69세때에 공자가 음악을 바로 잡았다. <팔일>에는 공자가 노나라의 음악을 관장하는 악사에게 음악에 대해 "음악에 대해서는 알만합니다. 음악을 시작할 때는 여러소리가 합하여나오지만, 연주가 진행됨에 따라 조화로운 소리가 나오면서 동시에 각 소리가 분명해지고 이렇게 계속 이어져서 한곡이 완성된다"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  또<자한>에는 공자가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후  음악이 바로잡혔고 조정이나 종묘에 쓰이는 음악인 雅와 頌의 악곡이 제자리를 찾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의 일인 듯하다.  이 해에 공자의 아들인 공리가 죽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50세였다.

 

70세 되던 해에 제자인 안회가 죽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32세였다. 안연이 죽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선진>라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탄식하였다고 한다.  또 당시 공자가 비통하게 우는 것에 대해 지나친 것이 아닌지 제자들의 의문을 제기하였을 때 "내가 그렇게 슬펴했는가? 내가 안연같은 제자를 위하여 슬퍼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하여 슬퍼하겠는가><술이>라고 하면서, 안연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슬픔을 표출하였다. 안연은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로서, 공자가 배움을 가장 좋아했다고 평가하였다. <옹야>에는 애공이 "제자 중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안회라는 제자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노여움을 남에게 화풀이로 하지 않으며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는데, 불행스럽게 명이 짧아 죽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으니,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답하는 구절이 보인다. 스승보다 먼저 죽은 제자에 대해 얼마나 좌절감을 맛보았을 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당시 공자는 노나라가 끝내 자신을 등용하지 않을 것을 알았고,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을 그만두고 교육과 문헌정리에 몰두하게 된다<공자세가>에 의하면 이 당시 공자는 하은주 3대의 예를 탐구하고 <서경>의 차례를 잡고, 위로는 요순의 시대로부터 아래로는 진나라 목공때까지의 일을 순서대로 정리하였다고 한다. 또한 공자는 詩,.書,禮,樂을 가르쳤는데, 제자들이 대략 3000명에 달했고, 그중 육예에 통달한 제자만 72명이었다고 한다.,

 

71세때인 채공 14년 봄에 서쪽에서 기린을 잡았다. 그러자 공자는 상서로움의 상징인 기린이 나올 때가 아닌데 나타나고 또 그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잡은것에 대해 세상이 더 이상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노나라의 역사책인 <춘추>를 지었다고 한다.  또 이해에 제나라 대부인 진성자가 군주인 간공을 시해하였는데 공자는 목욕재계하고 노나라 군주인 애공에게 가서 진성자를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헌문>

 

72세때에는 역시 공자가 사랑하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에서 벼슬하다가 내란에 휘말려 죽었다. <좌전>의 애공 15년 조목을 보면"공자가 위나라의 난리가 일어난 것을 듣고서 제자 자로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이야기하였다.  또<예기,단궁상>에는 "공자가 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여 뜰에서 곡하고 있는데 조문하는 사람이 있었다.  공자는 그에게 절하였다.  곡을 마치고 시신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자로의 죽은 까닭을 물으니, 사자는 위나라의 군주가 자로의 유해를 젖담갔다고 말하였다.  이에 공자는 즉시 명하여 집에 있는 젖을 모두 엎어 버리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자로가 비록 성격이 급하고 과격하기는 하지만 "내가 뜻하는 도가 이 세상에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띄워 바다로 떠나간다면 나를 뒤따를 사람은 아마도 자로일 것이다<공야장>라고 말하여 자로의 의기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또 노나라 대부 계강자가 자로에게 정치를  맡길 만한지를 물었을 때에도 "자로는 과감하게 결단하는 능력이 있으니 정치를 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옹야>라고 칭찬한 바 있다.  물론 자로가 급한 성격 때문에 "자로와 같은 사람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선진>라는 공자의 언급이 전해진다. 하지만 공자가 제자에 대해 교육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단순한 악담에 가까운 말을 했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이 정말 공자가 한 말이라고 믿기 어려운 면이 있다. <공야장>에 보이는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서 아직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을 때에는 오직 또 다른 가르침을 들을까 두려워하였다"라는 말처럼 공자의 가르침에 대한 절대적 신봉자인 자로의 죽음은 노년의 공자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73세때인 기원전 479년 애공 16년 조목에는 "여름 4월 기축에 공자가 죽었다.  애공이 조사를 내렸는데"하늘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구나, 이 노인 한 사람마저 나에게 남겨주지 않다니, 나를 도와 군주 자리에 있게 하지 않았도다,  외로운 나는 병중에 있는 듯하다.  아아! 슬프구나! 공자여!  나는 어찌 할줄을 모르겠구나"라고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공자세가>에 의하면 "공자는 노나라수도 북쪽 사수 언덕에 묻혔다"라고 하였는데, 공자의 무덤은 지금의 산동성 곡부의 孔林안에 있다

 

설명-이상의 공자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사기,공자세가>증자오평의 <孔子繫年>량타오의<孔子行年考>세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공자의 생애와 사상 낙서장

2007. 3. 9.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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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는 중국 주(周)나라 말기인 기원전 551년부터 기원전 479년까지 살았던 실존인물(향년 73세)이다. 당시 중국은 매우 혼란했던 시기로 흔히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약소국이었던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鄒)라는 마을(지금의 산동성 곡부)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조상은 은(殷)의 후예인 민공(湣公)으로 은의 마지막 군주 주(紂)의 이복형 미자계(微子棨)의 후손이다. 미자계는 현자로 이름난 은의 이른바 삼인(三仁)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공자의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로 노나라의 하급무사였다. 몰락한 귀족이었던 숙량흘에게는 딸이 아홉과 몸이 성치 못한 아들이 있었고, 성치않은 아들에게 후계자로 마음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숙량흘은  70이 가까운 나이에 15,6세의 안징재(安徵在)와 사이에 공자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출생과 관련 “야합해서 낳았다(野合而生)”라고 하였다.

 

 야합이란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들에서 합쳐졌다는 뜻으로 이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누가 보아도 50여세의 차이의 늙은 하급 관리와 정식 식을 올리지 않은 부부의 모습이라면 야합이란 표현을 할 수 밖에 없다. 들판에서 교합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는데 비정상적인 관계를 말한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공자를 사생아라는 표현을 씀에 주저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안씨는 이산(尼山)에 기도를 드려 노나라 양공 22년(B.C 551)경술 11년 경자일(21일)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머리의 중앙이 들어가고 나온데가 있어 언덕길이 생겼다고 해서 이름을 “언덕(丘)”라고 했고 이산에 기도를 드려 낳았다고 하여 둘째 항렬을 표시하는 중(仲)을 붙여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다.

 

 사마천의 세가에 의하면 “머리 꼭대기 부분이 좀 움푹 파이고 주변으로 두상이 퍼져있는 모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한국의 동양 철학자 도올 김용옥은 순 우리말로 “짱구“라고 표현하고 있다. 공자의 아버지와 어머니 안씨와 만날 당시 70을 바라보는 노인인지라 세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일본인 학자 시라가와는 공자의 어머니와 관련 “무당 아니면 잔치자리에서 춤추는 무녀였고, 게다가 맹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잔치가 있는 곳을 찾아 다녀야 했는데, 어려서부터 공자가 맹인인 어머니 손을 잡고 잔치자리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일찍부터 예절에 밝았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무녀와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세가(世家)에 공자가 17세때, 노(魯)나라의 大夫인 맹이자가 병으로 죽게되어 그의 후계자인 맹의자에게 훈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구(丘)라는 아이는 성인의 후예다. 그 가계는 송(宋)나라에서 망하여 노(魯)나라로 옮긴 집안이다’(孔丘는 聖人之後)라는 표현에서 聖人은 공자의 7대조인 정고보라는 인물이며 당시 성인이란 말은 지금과 같이 ‘지혜와 덕이 뛰어나게 높아 길이길이 스승이 될만한 사람’을 의미하기 보다 성인(聖人)은 성인(聲人)으로 모두 소리(聲)를 귀(耳)로 듣는다(聽)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소리”란  “신의 소리” 곧 “신의 소리를 들음”으로 성인(聖人)이란 곧 신탁의 소리를 듣는 “무당”을 의미하게 된다. 공자가 성인(聖人)의 후예란 말은 곧 “무당집 자손”이란 뜻이다. 무녀 안씨와 무속인의 자손과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수 있었다고 보면된다.

 

 사마천은 공자의 어린시절의 모습을 “공자는 어릴 때 소꼽 장난하기 좋아했는데, 항상 도마와 목기 등의 제사그릇을 벌려놓고 예(禮)에 맞는 복장을 입고 놀았다” 이 모습은 지금도 세습무, 학습무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학습모습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곡부성내(曲阜城內) 글 쓸줄 알고 예에 통달한 언양(諺襄)이라는 훌륭한 노인이 있었는데 그에게 세 딸이 있었고, 그 막내가 공자의 어머니라고 한다. 두 분의 관계는 원만한 부부생활을 영위한 것 같지는 않다. 공자 나이 3살에 세상을 떠나 아버지를 잘 모르고 자랐으며 자라서도 방산(防山)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몰랐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마을의 노파에게 아버지의 묘소를 들어 알고는 오부(五父)의 길가에 가매장했던 어머니를 방산의 아버지 묘소에 합장했다는 것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공자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래서 남의 집 창고나 정원을 관라하기도 하고, 가축을 돌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나는 어렸을때 미천하였기 비천한 일들을 많이 할 줄 안다”<논어:자한>고 말하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가 가축을 돌보는 일을 했을때 가축들이 살지게 잘 자랐고, 창고 출납을 맡았을때 셈이 정확했다고 했다. 공자가 평범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통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아니다. 공자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 인간으로 완성된 분이다. 이런 경험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으나 특별한 스승은 없었고, 19세에 기관씨(丌官氏)의 딸과 혼인하고, 20세에는 창고지기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갔지만 곧 물러났다. 당시 노나라는 정치상황이 매우 혼란하여 좀 더 안정적으로 학문에 매진하며 뜻을 펼치기 위해 35세되던 해 비교적 안정된 제(齊)나라로 떠났다. 그러나 제나라 역시 뜻을 펼치기에는 불안하여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40세 무렵에는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른바 불혹(不惑)의 경지에 도달하였고, 50세에는 세상의 모든 진리와 우주만물의 근원까지 이해하는 지천명(知天命)의 학문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이후 현실정치에 적극적인 뜻을 갖게된 공자는 51세 무렵에 아직 익지도 않은 생쌀을 챙겨서 급히 노나라로 돌아왔다. 아마도 노나라가 어느정도 질서를 회복하는 기미가 보였을 것이란 주측이 우세하다. 고향에 돌아온 공자에게 계손씨는 지금의 법무부 장관이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대사구라는 높은 벼슬을 맡겼다. 공자의 활약으로 노나라의 정치와 사회기강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되자 이웃 제나라는 불안감으로 느겼고 그 결과  가무에 능한 여자 80명과 치장을 한 말 120여필을 보냈다. 향락에 빠진 노나라 정공과 재상 계환자는 매일 잔치만 열뿐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임금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어진 정치를 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공자는 할 수 없이 다시 고향을 떠나 여러나라를 떠돌다. 68세 무렵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제자들에게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교과목으로 가르쳤는데 이를 육예(六藝)라고 한다. 또 주요 유교경전인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를 편찬하였으며, 악(樂)을 바로잡고, 당시 242년간의 역사를 ‘옳고 그름’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기록한 춘추(春秋)를 저술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기관들이 “춘추필법‘이나 ’춘추정필‘을 회사의 사훈으로 내걸고 있는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공자가 ’옳고 그름‘의 잣대로 역사를 기록했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뜻이 그 속에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을 도입한 ’연세춘추‘나 최근 사계를 한번 뒤흔들었던 ’역학춘추‘ 역시 역학계의 시비를 정확하게 논하겠다는 취지로 출발, 가짜박사들을 추려내는 작업을 통해 투명한 사계발전을 위한 노력해 왔지만 최근 휴간을 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공자의 삶은 순탄했나

결론적으로 말해 공자 개인적으로는 유교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3,000여명의 제자를 양성했지만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본다.

공자는 무려 30여 년 동안 72명의 임금을 만나 자신의 사상을 피력했지만 아무도 받아들여 주지않았다. 오죽하면 중국에서는 도가 실현되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를 나가겠다고까지 했겠는가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죽을 고비를 만나기도 했고, 굶주림을 겪기도 했다. 이런 공자를 보고 당시 어떤 사람들은 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애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조롱을 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생아였는지 모르고, 그의 어머니는 무당이거나 춤추는 여자, 거기다 맹인이었는지도 모르고, 어려서는 집이 가난하여 하찮은 직업에 전전해야 했다. 외아들이었던 이(鯉 자는 伯魚)와 매우 아꼈던 제자인 안희(안회, 공자의 나이 70세에 사망)와 자로(공자의 나이 72세에 사망)도 스승 보다 먼저 떠낫다.

아들 이는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이가 낳은 아들이 급(伋)인데 자는 자사(子思)이다. 자사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중용(中庸)을 지었으며 맹자(孟子)에게 유학(儒學)을 전승했다고 한다.는 말이있는데 자사가 중용을  지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작가 미상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자사는 노나라 사람이다. 자사가 산을 이야기 한다면 태산을 말해야하는데 중용에는 태산이 안나오고 진나라 화산이 나오고 있다. 공자의 부인이 도망갔다는 얘기도 있다.

 

 <논어>(향당)편에는 공자의 평소 생활 모습이 묘사되고 있는데 “밥은 흰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고, 회는 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밥이 쉬거나 생선이 상하거나 고기가 썩은 것은 먹지 않으셨고, 빛깔이 나쁜 것은 먹지 않으셨고, 냄새가 나쁜 것은 먹지 않으셨고..... 반듯하게 썰지 않으면 먹지 않으셨고, 간이 맞지 않으면 먹지 않으셨다....잡수실 때에는 이야기하지 않으셨고, 잠자리에 드시어서는 말씀을 안하셨다. ”는데 상하거나, 썩고, 빛깔이 나쁜 것은 그런데로 이해하겠는데  반듯하게 썰지않은것, 잠자리에서 침묵 등 성격적으로 상대하기가 무척 힘들어 도망갔다는 말도 이해가 된다.

 

 개인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일생을 보냈을 공자는 죽은 뒤에 지금은 산동성 곡부시 북부에 있는 사상(泗上)에 장사 지냈는데, 이를 공림(孔林)이라 부르며 지금도 공자의 후손들은 이곳에 장사를 지낸다.

우리나라에서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경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까지 부상한 적이 있는데 이는 공자 사상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아직도 우리사회에 막대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이 나온지 1년동안 무려 30여종이 넘는 번역서와 해설서가 나왔다는 것이다. 21세기 우리인류에게 새로운 삶의 좌표를 만들고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다. <죽어야>에 반발하여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최병철)가 출판되었는데 유학계의 위기의식이지만 성급한 면도 없지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孔子는 東夷族인가.

춘추좌씨 전에는 공자의 6대조인 공보가는 송나라에서 군정의 일을 맡아보는 사마벼슬을 하고 있는데 당시 송나라의 총독 벼슬쯤되는 태재 벼슬을 하고있는 화보독과 권력싸움에서 밀려나면서 공부가의 손자인 방숙은 송나라로부터 노나라에 피신하여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하나 노나라로 피신한 동기에 대해서는 공자의 6대조 할머니의 미모에 반한 화보덕이 공보가를 모함하여 죽이고 그의 부인을 취하면서 그 후환을 두려워하여 공자집안을 몰살 시키려 할때 피신 했다는 설도 있다.

공자는 죽기전 “나는 은(殷)나라 사람이다”고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말한바 있고 다른 여러 전적에서도 공자는 은(殷)의 후예라고 전하고 있는 은 나라는 춘추좌씨전 정공 4년 조를 살펴보면 은족은 단일민족이 아니고 무려 13개 부족이나 되는 다양한 소수부족들을 포용해서 통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사학자 서중서는 청하대학의 국학론총에서 ‘은(殷)과 주(周)는 동일계통의 민족이 아닐뿐 아니라 은(殷)은 동이민족(東夷民族)이었다고 하였고, 또 다른 중국의 사학자 전사두는 그의 저서인 “동북사강”이라는 책에서 자기는 중국의 고대사를 다시 상고해 본 결과 은(殷)은 동이민족임 단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은족과 동이족 간에 알려져 있는 난생설화도 그 내용이 같다고 밝히고 있다. 그 외 진몽가, 강량부, 임혜상 등등 금세기 초에 중국 고대사에 관하여 논문과 책을 발표한 내용마다 은(殷) 동계(東系) 혹은 동이족(東夷族)이였다고 서술해 놓고있다. 국내학자로는 유승국 교수의 “유교사상 형성의 연원적 탐구”라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공자는 그 선조가 송인(宋人)이요, 宋(송)은 殷(은)의 후예다. 은이 동부족(東部族)임을 갑골학(甲骨學)과 고고학(古考學)에서 논증(論證)하게 되었으니 공자는 혈연적으로 동이족임을 알 수 있다”고 써놓았다.

동이족이 한국을 말한다면 공자는 한국인, 우리의 조상이란 주장은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孔子와 論語

‘논어’는 공자의 언행록이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공자가 제자들이나 당시의 위정자들 혹은 은자(隱者)들과 나눈 단편적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공자 스스로 기록한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전기 작가의 작품처럼 한 작가가 일관되게 쓴 것도 아니다.

‘논어’의 논(論)은 편집의, 어(語)는 어록의 의미가 담겨 있다.

반고가 지은 <한서예문지>에 따르면 ‘논어’는 ‘의논해서 편찬한 말’이라는 뜻이며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거친 한나라 초기에는 세 종류의 ‘논어’가 있다.

 제나라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온 것이고,

 노나라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온것이며

 공자가 살던 옛 집의 벽속에서 찾아 낸 것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논어’는 그 가운데 제나라 본과 노 나라 본을 합쳐 만든것이다.

지금의 ‘논어’는 모두 20여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후반으로 나누어 전반 10편을 상론(上論), 후반 10편을 하론(下論)이라고 한다. 각편 첫장에서 두 글자 또는 세글자를 따다가

편명을 삼았다. 각 편마다 단편적인 여러 가지 내용이 언급되어 있으나, 사람은 반드시 배워야 함을 밝히는 학이편(學而篇)에서 시작하여 팔일편(八佾篇)에서는 예(禮), 이인편(里仁篇)에서는 인(仁), 공야장편(公冶長篇)・옹야편(雍也篇)에서는 제자의 인물, 향당편(鄕黨篇)에서는 공자의 용의(容儀)・행동・음식・의례, 자로편(子路篇)에서는 정치, 마지막 요왈편(堯曰篇)에서는 역대 성인(聖人)의 정치적 이상을 주로 설명하고 있다. 각 편은 서로 연결이 없는 것 같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공자의 인(仁) 구현하고자 하는 정신과 그의 인격이 맥을 잇고 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논어’는 송나라 때 이르러 <대학>, <중용>, <맹자>와 더불어 사서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 책의 영향으로는 우리가 많이쓰는 ‘살신성인’이라든가 ‘극기복례’ 같은 교훈적인 말들이 나왔으며 ‘논어’는 도가 사상이 휩쓸던 위진 남북조 시대에도 <노장>, <주역>과 더불어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혔고, 우리나라 불교계 교육기관인 강원에서도 스님들이 <논어>를 필독했다. 

김승혜 수녀교수(서강대)는 수녀회에 들어갈때도 성서와 함께 가지고 들어갔으며 자신의 삶 속에서 숨쉬고 내 영혼에 영감을 제공해주었다고 ‘논어의 그리스도교적 이해’(도서출판 영성생활)에서 밝히고 있다. ‘논어’는 종교와 계층을 떠나 보편타당성 있는 책으로 우리지식 사회에 넓게 퍼져있었다고 본다. 


*공자와 노자는 진짜 만났을까

공자의 일생이 기술된 논어에서 발견되지 않은 공자와 노자의 만남이 사마천의 사기 ‘노장신한열전’에는 “공자가 주나라에 갔을때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고 사마천은 유가의 사람이 아니며 도가이다. 노자는 실존여부를 알수 없는 사람이며 공자와 노자의 만남은 사마천에 나왔을 뿐이다. 양주라는 황노학자가 자기의 스승을 높이기 위하여 행세할 수 있다는 생각을 쓴 것을 사마천은 앞뒤 분간없이 쓰게된 것이다. 이것 하나만 놓고 볼때 사마천의 사기도 한번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자가 주나라 도읍지인 낙읍에 가서 노자를 만나 주례를 물었다고만 할 뿐 언제 주나라에 가서 노자를 만났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급은 없다.

고대의 전적과 사서를 살펴보면 공자가 노자를 만났다는 몇 개의 기록이 있는데 사기의 ‘공자세가’ 양백준의‘춘추좌전’ 장자의 ‘천운’ 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논어에는 일체 노자와 만남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만났다는 설들의 진정성을 생각해 봐야한다.

사가의 ‘노장신한열전’에 공자가 죽은 뒤129년 되던 해에, 주나라의 사관인 태사 담이  진헌공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처음에 주나라와 합쳐져 있다가 500년 뒤에 갈라질 것이며, 갈라진지 70년이 지나면 패왕이란 자가 나타나리라” 어떤 사람은 이 담이란 자가 노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세상에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노자는 숨어 지내는 군자이기 때문이다.

 

‘주본기’에 따르면 열왕(烈王)2편에 주나라의 태사 담이 진헌공을 만났다고 하고 ‘진본기’에서는 진헌공 11년에 주 나라의 태사 담이 진헌공을 만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6국 연표를 보면 주열왕 2년은 바로 진헌공 11년이며, 기원전 374년이다. 이때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지 105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사기의 ‘노장신한열전’에 “공자가 죽은 뒤 129년에, 주나라의 사관인 태사 담이 진헌공(秦獻公)을 만났다”는 기록은 시간상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태사 담이 노담이라고 한다면 노자는 160세 혹은 200세까지 살았다는 것이 되는데 그러나 그렇게 장수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노자와 관련된 자료에는 ‘연장자인 노자에게 예를 묻는 공자’란 사진들이 많이 등장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를 물은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있다. 그러나 정작 유학자 측에서는 워낙 점잖은 탓인지 이렇다할 반발을 하기보다는 일부 번역서에는 공자가 주나라를 떠나려하자 노자는 그를 전송하면서 ‘부유한 자는 금전을 주고 친절한 자는 충고를 보낸다고 나는 듣고 있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한 마디 충고를 하고자 한다. 재기가 넘치고 추진력이 풍부한 자는 흔히 생명의 위험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남을 비평하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학문이 있고 책 읽기를 즐기며 논쟁을 잘하는 자는 몸을 위태롭게 하기쉽다. 왜냐하면 그는 남의 결점을 꼬집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을 다만 한 사람의 아들이나 한 신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돤다“는 긴 충고(?)인데 우리가 앞으로 한 한기동안 배우게 되는 ’논어 1편 학이를 시작으로 20편 요왈까지 어느 곳에도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후기 학자들 특히 노장계열의 사람들에 의해 첨가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논어는 정직한 책이다.

이런 주장의 증거로는 안회가 공자를 위하여 밥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안에 먼지가 한 웅큼 푹 떨어졌다. 다시 지을 수도 없는 일. 안회는 안절부절했다. 그렇다고 모처럼 지은 귀한 밥을 내 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안회는 생각다 못해 먼지 떨어진 부분의 밥을 떠서 자신이 먹어 버렸다. 이때 공자는 멀리서 바라보고는 내심 안회가 배가 고파서 남몰래 밥을 먼저 훔쳐먹는 것으로 생각했다. 안연이 밥을 지어 공자에게 정성스럽게 들고 왔을때 공자는 모른는 체 하면서, “먹는 것은 청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에둘러 말했다. 그러나 안회는 공자가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금방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자기가 먼지 떨어진 부분을 먹어치운 사정을 이야기 했다. 공자는 오해임을 깨닫고 부끄러워 할 뿐이었다.(論衡, 「知實」)편에 기록된 부분이다.

 

 공자 개인적으로 숨기고 싶은 부분일 수 있는데, 이 장면은 공자, 안회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으로 남기도 있다는 사실에서 당시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 불리한 부분이란 기준이 없이 솔직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공자와 노자의 만남이 있었다면 논어뿐 아니라 그 외 공자와 관련 기록속에 언급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결국 논어에는 없는 기록이 다른 일방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면 이것은 한번 되 집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요즈음 말하는 해석학이고 신문에서 말하는 행간읽기라고 생각한다. 우리언론 특히 활자언론이 외부세력, 권력으로부터 통제를 받을때 지식인들 사이에는 신문 속에 숨겨진 행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파악한 적이 있다. 지금도 단순히 자료에 근거하여 일방의 주장을 듣기보다. 숨겨진, 의도하고 있는 글들을 읽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다고 본다.       







공자(孔子)|
황발(黃髮) 2017.06.28 17:18

공자(孔子)의 유교 사상(思想)

 

인불지(人不知) 이불(而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 중국(中國)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사상가 유교의 시조(始祖) 이름은 구()자는

중니(仲尼) ()나라 산동성(山東省) 곡부(曲尃)

사람. (창평향 추읍에서 탄생) (BC 551~ 499)

 

() : 숙양홀(70세때 공자를 낳았다.)

() : 안정재(18세때 결혼)

() : 계과씨의 땅(19세때 결혼)

() : 공리(孔鯉) (잉어리, 공리의 뜻 : 백어, 백자, 임금이 준 선물

잉어의 딸 이름) 손자 - 자사(子思)

 

공자 3세 때 부친 별세, 24세 때 모친 여윔.

15: 입지(立志)

30: 자립(自立)

40: 불혹(不惑)

50: 지천명(知天命)

60: 모든 것을 이해 이순.

70: 고희 뜻대로 하여도 허물이 없음.

 

공자의 도통법

상류(上流) : () ()

중류(中流) : () ()

하류(下流) : () ()

공자가 이르시되

그 사람 됨됨이 온유하고 도타운 것이 ()敎化(교화)

사리에 밝아 막히지 않고 멀리 아는 건 ()敎化(교화)

학문과 식견이 넓어 편안하고 어진 건 ()敎化(교화)

고요하고 정밀한건 ()敎化(교화)

공손하고 검소하며 단정하고 엄숙한건 ()敎化(교화)

비슷한 말이나 일을 견주어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건 春秋(춘추)

敎化(교화)

 

공자의 정치사상

 

1. 덕치주의(德治主義)

() () () () () ()

경자(敬者)는 예지본(禮之本)

예자(禮者)는 복녹지본(福綠之本)

덕자(德者)는 길녹지원(吉綠之源)

 

큰 덕()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게 되고 녹을 얻게 되며 이름을

얻게 하며 그 수명도 얻는 것이다.

 

2. 예치주의(禮治主義)

예로써 다스린다.

 

() + ()(사람이 신에게 갖추는 몸가짐)

東方禮義之國(동방예의지국)

 

= () + () (양위 상제님의 뜻을 따름)

 

3. 정명주의(正名主義)

도지이덕(道之以德)하고 제지이예(齊之以禮)하면 유이심격(有耳心格)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다스린다면 백성이 잘못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 바른길로 나갈 것이다.

 

사서(四瑞)

 

() () () ()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

: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하고 가엾음을 아는 마음.

: 사양지심(辭讓之心) ...사양할 줄 아는 마음.

: 수오지심(羞惡之心) ...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

할 줄 알며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 시비지심(是非之心)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

 

공자의 교육면

3000제자 중 72제자 육예(六藝)에 완전 통달(通達)

(일명 72현인(賢人))

 

육예(六藝) - () () () () () ()

 

교육내용

 

학문(學文)과 덕행(德行)

: 학문을 가르치고

: 실천하게 하고

: 성질 성품을 바르게 하고

: 신의를 잃지 않게 함.

 

윤리사상

()와 덕()

():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실천.

() () ()

德目(덕목): 실천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言行(언행) ()

하늘에 대한 신앙 인간주의사상

 

중용사상(中庸思想)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이며 언제나

변함없는 것이 용()이다.

 

이란: 천하의 올바른 도()이며 치우치지도 기울어지지도

지나치지도 미치지도 못하는 것이 없는 것.

 

이란 : 천하의 일정한 원리이다. 언제나 그러하다.

 

불교 인과의 끊음이 어려움.

유교 중용의 지킴이 어려움.

() = 대자대비 = 사랑.

 

공자 : 73세로 일생을 마침(BC 4794월 기축일)

자왈(子曰) : 加我數年(가아수년)하야 五十以學易)하면 可以無大遇失(가이무대우실)

나 에 게 몇 만 년 더 살 게 해 주어서 오십(五十)의역학을 알아낼 수 있다면 원이 없을 텐데

 

춘주시대(春秋時代)

노나라 : 공자 유가(儒家)

송나라 : 묵자(墨子) 묵가(墨家)(근검. 겸애)

초나라 : 노자 도가(道家)(무위자연(無爲自然)

 

사서 삼경 또는 서서 오경

서서(四書)

공자(孔子) : 논어 (論語)

증자 : 대학(大學) -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공부.

자사 : 중용(中庸) - 인간의 마음을 잡으라는 뜻.

맹자 : 맹자

 

 오 경(五經)

시경(詩經): 시에 관한 것.

서경(書經): 글에 관한 것.

주역(周易): 역에 관한 것.

예기(禮記): 예에 관한 것.

춘추(春秋): ()나라의 역사.

 

공자(孔子)의 도통(道通)방법

신통육예(神通六禮) - (), (), (),

(), (), ()

 

(): 모든 예법(禮法)은 조리(調理)에 맞게 갖추어야 한다.

(): 모든 악기는 다 다루어야 되며 (나아가는 새가 춤을 출 정도다.)

(): 교신(敎神) - 도각주판(道覺珠板)에 화살을 당기듯 정신일도 하라.

(): 왕명, 천명, 천존님, 받들어 모시는 것.

(): 글이란 글은 다 통달해야 한다.

(): 수란 숫자는 모두 다 통달해야 한다.

 

* 공자(孔子)의 이웃집에서 구슬피 우는 울음소리가 들려 "누구 집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냐"고 물으니 옆에 있던 안회가 "생이별하는 울음소리"라 했다. "너가 어찌 아느냐" 하니 "제가 아침에 집 앞을 지나오는데 어미 새와 새끼 새가 이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로 그 울음소리와

똑같습니다."라 했다. "그래 너가 갔다 와 보라"하니 정말 어미와 딸이 이별하는 울음 소리였다. 딸을 결혼시키려 하니 섭섭해서 두 모녀(母女)는 울고 있었다.

 

정명도(程明道) - 격물(格物)치지 - 물질을 꿰뚫어 봄(형님)

정리천(程利天) -교리학(敎理學)치지 - 숫자를 꿰뚫어 봄(동생)

두승입실(斗升入室) - 72현인(賢人)만 신통(神通)능력.

공자(孔子)-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졌을 때 나의 도()가 끝이라 했다.

성웅(聖雄)- 성인 같은 바탕과 장군 같은 기질이 있어야 한다.

도의 근본 자체는 하나다.

 

<삼강>

부위자강(父爲子綱):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근본이고

부위부강(父爲婦綱):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근본이고

군위신강(君爲臣綱):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근본이고

 

<오륜>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는 의가 있어야 하고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와 아들은 친함이 있어야 하며

부부유별(夫婦有別): 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하며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어린이는 차례가 있어야 하고

붕우유신(朋友有信): 벗과 벗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생성친(爾生性親)이요: 나의 생은 오직 부모로부터요

친강자천(親降自天)이라: 부모는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니

유경이친(惟敬爾親)이라: 오직 너의 조상을 잘 섬긴 연후에야

내 경천 (及 敬天)이니라: 하느님을 경배할 수 있느니라.

 

*물질(物質)은 과학(科學)이요 생각(生覺)은 철학(哲學)이요 정신(精神)은 진리(眞理)

뜻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삼합(三合)을 빼고는 모든 것이 성립(成立)될 수가 없습니다

즉 정신(精神)이 없으면 생각(生覺)을 이룰 수 없고 생각(生覺)없이 생겨난 물건은

보증할 수 없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理致)이기 때문이다.

 









[펌] 육예와 활쏘기 궁시

2005. 3. 12. 23:34

복사 http://blog.naver.com/bluekb/40011218881


출처 칼찬선비정도령 | 정도령
원문 http://blog.naver.com/jdoryeong/40010947473

六藝와 활쏘기

          

                                                                                                            정  동  진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며, 어진 것에 의지하고, 예에서 노닐어야 한다."(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뜻(志)'이란 '마음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도(道)'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을 바로 세우면 가는 길이 바르다는 말입니다. 또 '덕(德)'은 '도(道)'를 실천해서 마음으로 얻어진 것'을 말하는데, 마음으로 얻어서 지켜지면 끝과 시작이 한가지여서 흩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의지한다(依)'는 것은 '어기지 않는다'는 뜻이며, '인(仁)'은 '사사로운 욕심을 버려서 마음의 덕이 온전한 것'을 말하는데, 폭넓은 의미로 '이해한다'는 말이 가까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서 죽을 때까지 어김이 없으면 천리(天理)가 세상에 넓게 퍼진다.'는 뜻입니다. '노닌다(游)'는 것은 '가지고 있는 물건에 '정(情)'이 가는 것'을 말하고, '예(藝)'는 '육예(六藝)' 즉 <예(藝)·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말하는데, 당시에는 모두가 생활 속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의미는 '아침저녁으로 육예를 행하며 놀면서도 의리와 취지를 넓히고 밝혀서 힘써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육예'는 공자의 군자교육론의 바탕이 되는 교과목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禮)와 악(樂)은 동전의 앞과 뒤처럼 서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공자는 군자의 외면적 자질을 예(禮)에서 찾고 있는데, 그것은 공자가 찬술한 『시경』 자체는 '육예'에 들지 않지만, 『시경』을 통해서 일어나는 정서적 감흥을 절제하는 것 그것을 예(禮)로 보았고, 절제된 예(禮)를 음악으로 조화시키려 했습니다. 곧 "시(詩)로써 일어나서 예(禮)로써 서며 악(樂)으로써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태백(泰伯)>)고 해서 예악(禮樂)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시에 의해서 정서를 북돋우고 예에 의해서 품위를 세우며 악을 통하여 군자의 도덕을 완성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글씨 쓰고(書) 수리 공부(數)하는 것은 당시의 귀족 자녀들이 배워야 하는 것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습니다. 활쏘기(射)와 말타기(御)는 본래 전쟁시에 필요한 것이었는데 단순히 그런 목적으로만 가르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체육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통하여 예의와 절도를 배운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습니다. 공자 자신도 활쏘기를 언급하면서 예의를 말한 바가 있습니다. 『논어』<팔일(八佾)>에 "군자는 다툼이 없으나 반드시 활을 쏠 때에는 승부를 다툰다. 읍하고 겸양하여 오르고 내려와서 마시니, 그런 다툼이 군자가 하는 것이다."(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사례(大射禮)를 행할 때 발을 맞추어 나가면서 세 번 절한 뒤에 당(堂)에 오르고 활쏘기를 다 마친 뒤에 내려와 모든 사람이 다 내려오는 것을 기다려서 이긴 사람은 읍하고 이기지 못한 사람은 올라가서 벌 술잔을 잡고 서서 마시는 것을 말합니다. 군자는 공손하여 사람과 다투지 않고 다만 활쏘는 데 있어서는 다투지만 그러나 그 다툼이 이처럼 온화하고 또 읍하는 것처럼 겸손했던 것이 소인배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절제와 조화를 통해서 사람의 성정(性情)을 균형있게 세우려는 의도가 활쏘기에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좀 더 오래된 얘기겠지만, 『서경(書經)』「우서(虞書)」<익직(益稷)>에 보면, 순임금이 정사(政事)를 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대들은 들으라. 내가 도에 어긋날 때 나를 도우라. 그대들은 내 앞에서 순종하는 척하고 뒤에서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라. 내 측근에 있는 자는 직무에 충실할 것이며, 완악한 행위와 참설(讒說)이 올바르지 않으면 사후(射侯)의 예(禮)로써 그 악함을 밝히고 매질을 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도록 하라."(汝聽 予違汝弼 汝無面從 退有後言 欽四隣 庶頑讒說 若不在時 侯而明之 撻而記之)
  여기서 '사후의 예'라는 것은 활쏘기를 말합니다. 옳지 못한 자들의 죄를 밝히는 데에는 그들에게 활쏘기를 시켜서 죄상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활쏘기는 사람의 성정을 밝히고 심성을 도야하는 데 중요한 하나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처음에는 사냥 수단으로서의 활쏘기가 전쟁의 수단으로서 발전되었고, 다시 총포의 발달로 인해 살상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오히려 문무(文武)를 겸하며 내·외적으로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수단으로 또는 더욱 본질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성정을 밝혀주는 데 중요한 방법이었다는 점은 분명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활쏘기가 육예(六藝)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너무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논어(論語)』<술이(述而)>의 다음 한마디는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경계삼아도 좋을 듯 합니다.
  "배우는 사람이 발분하지 않으면 그를 열어주지 않고, 다소 깨달은 이치를 말로 표현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그를 표현하게 해주지 않으며, 네모난 물건의 한 모퉁이를 들어 가르쳐 주었는데 세 모퉁이로 증명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子曰 不憤不啓 不비不發 擧一隅不而三隅反 則不復也)         (2001.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