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공자의 역사성, 역사속의 공자

2018. 2. 5. 18:44차 이야기

공자(孔子, BC 551년 ~ BC 479년)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진채 마당을 거닐면서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들보가 허물어지려는가? 철인이 시들어 떨어지려는가?(歌曰泰山其頹乎아 梁木其壞乎아 哲人其萎乎아)” 노래를 다 부른 공자는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마주보고 앉았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자공(子貢)이 노래를 듣고 “태산이 무너진다면 나는 장차 무엇을 우러를 것이며, 들보가 허물어지고, 철인이 시들어 떨어진다면 나는 장차 무엇을 따를 것인가? 선생님께서 곧 큰 병이 나실 것 같구나(泰山其頹면 則吾將安仰고 梁木其壞하고 哲人其萎하면 則吾將安放고 夫子殆將病也라)”라고 탄식하며 빠른 걸음으로 선생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공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너는 왜 이리 늦게 왔는고? 구(丘, 공자의 이름)는 은(殷)나라 사람이다. 내가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제물을 받더구나. 세상에 밝은 임금이 일어나지 아니하셨으니 천하에 그 누가 나를 높여줄까? 나는 곧 죽을 것이다(賜아 爾來何遲也오…丘也는 殷人也라 予疇昔之夜에 夢坐奠於兩楹之間이라 夫明王不興하시니 而天下其孰能宗予오 予殆將死也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병상에 누우신지 7일 만에 돌아가셨다.

‘꿈속에서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제물을 받았다(夢坐奠於兩楹之間)’고 하여 공자의 죽음을 ‘몽전(夢奠)’이라고 하는데, 『예기』 단궁편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공자의 마지막 모습이다.

주(周)나라의 주공이 세운 노(魯)나라 곡부(曲阜)땅에서 태어나 재상까지 지낸 공자는 스스로가 주(周)나라보다 한 시대를 앞선 은나라의 후손임을 밝히며 동이족의 예법에 따라 장례가 치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꿈속에서 보았고, 민생안정을 우선시하는 덕치(德治)는 뒤로 한 채 개인의 영달과 천하통일을 목표로 오로지 약육강식을 일삼는 패권(覇權) 정치에 대해 눈을 감기 전까지 깊은 우려를 한 것이다.

철환주유(轍環周遊)를 하다가 과부로부터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도 무섭다(苛政은 猛於虎也라 / 『예기』 단궁편)’는 말을 들었던 터라 앞날의 정치에 희망을 걸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공자 사후 260여년 후 천하통일을 이룬 진시황제(秦始皇帝)는 강력한 체제정비를 위해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주대상자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주창하는 유가(儒家) 세력들이었다. 공자가 편찬한 책들을 불사르고 그의 학문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지식인들을 생매장하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질렀으나 그의 통일국가는 15년 만에 망하였다.

그러하였기에 앞날을 예견한 공자는 ‘천하에 그 누가 나를 높여줄까?’라고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이런 염려는 곧 불식된다. 새로 들어선 통일국가인 한(漢, BC 202∼AD 220)왕조는 덕치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 정치가 결코 오래갈 수가 없음을 깨닫고, 연속적으로 이어진 전쟁 속에서 백성들의 피폐해진 마음을 달랠 통치철학이 필요했다.

공자는 이미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위정자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정치를 하면서 법령과 제도를 통해 잘 따르도록 해야지 백성들이 잘 따르지 않는다고 형벌로 사회질서를 이룬다면, 모든 백성들은 그 형벌을 면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게 된다.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게 하면 부끄러움을 알고 또한 지극해진다(道之以政하고 齊之以刑이면 民免而無恥니라 道之以德하고 齊之以禮면 有恥且格이니라 /『논어』 위정편 제3장)’고 간파했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운 한 왕조는 그러한 공자의 위민사상(爲民思想)이 필요했다. 왕도정치의 바탕이 되는 유교세력들에게 눈을 돌린다. 국가를 오래도록 보전하려면 법치만이 능사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기에 유교 지식인들과의 정치적 타협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전시대에 분서갱유속에서 스러진 유생들을 사면 복권시키고, 칠서벽경(漆書壁經), 곧 진시황제의 탄압을 피해 옻칠해서 벽속에 감추어 두었던 유학경전들을 찾아내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유교를 국교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인근 모든 나라들이 유교의 통치철학에 따라 정사를 펼쳤고, 공자의 사당을 짓고 존숭하였다. 이후 공자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며 정치 사상가이자 만세사표((萬世師表)로 존숭되면서 ‘집대성(集大成)하신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았고, 신위를 모신 사당인 공묘(孔廟)는 당나라 때 문선왕묘(文宣王廟)로 추봉(追封)되었으며, 원나라 이후로는 문묘(文廟)로 부르고 중국의 역대 황제는 공묘를 방문하여 비석 세우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서구의 식민지침탈 이후 공자는 ‘타파’해야 할 봉건적 잔존 유물의 하나로 불편한 존재가 되었고, 1960년대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대대적인 공자타파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나 40년이 채 못 되어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어쨌든 공자 사후 25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공자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점이다. 어째서일까?

극도의 치욕과 고난 속에서 『사기(史記)』를 펴낸 사마천(司馬遷, BC 145 ~ BC 86)은 제후들의 연대기인 세가(世家)에 공자를 올려놓고(공자세가), 마지막에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붙였다.

“천하에 임금으로부터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살아생전에는 영화를 누렸으나 죽으면 그 뿐이었다. 공자는 벼슬 없이 살았으나 3백여 년이 지난 지금, 학자들의 종주가 되었다. 천자와 왕후로부터 나라 안에서 육예(六藝)를 말하는 자들은 공자를 절충하였으니 가히 지극한 성인이시다(天下君王으로 至于賢人이 衆矣여 當時則榮호대 沒則已焉이라 孔子布衣나 傳十餘世에 學者宗之하시다 自天子王侯로 中國言六藝者는 折中於夫子하니 可謂至聖矣로라).”

사마천이 말하고 있듯이 공자가 후대에 들어 학문의 종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긴 저작물(著作物)들 때문이다. 역대로 공자를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 앞서 가신 성인을 잇고 후학들을 위해 문을 열어줌)이라고 하여 오히려 요순임금보다 낫다고 평가하는 것도 모두 저작물들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의 일부 학자들은 공자가 지은 글들은 아예 없다거나 위서(僞書)이기에 볼 가치가 없고, 심한 경우는 공자를 알 수 있는 것은 재전제자(再傳弟子)들이 쓴 『논어』 한 편만이 유일할 뿐이라고까지 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뜻글자로 이루어진 전적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이치가 통하지 못하는데서 생겨나는 문제들인 듯하다.

공자 스스로가 “전술은 하되 창작은 아니하며, 믿고 옛 것을 좋아함을 그윽이 우리 노팽과 견주노라(述而不作하며 信而好古를 竊比於我老彭하노라 /『논어』술이편 제1장)”고 하였다. 공자는 성현들의 훌륭한 옛 내용이 많기에 스스로가 더 쓸 것은 없고, 다만 새롭게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피력하시면서 은나라의 어진 대부였던 노팽을 비유하여 매우 겸손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의 선비는 국가로부터 녹을 받아서 살림을 꾸렸기에 벼슬이 없다면 살기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자는 젊어서 미관말직인 위리(委吏)라는 창고지기 벼슬과 사직리(司職吏)라는 종묘제사에 쓸 가축을 기르는 축사 일을 맡아보기도 했는데, 언제 어디서나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법에 관해 공부하다가 미진한 점이 있자, 주나라에서 도서관 사서 직책인 주하사(柱下史)를 맡고 있는 노자를 찾아가 묻기도 하고 문헌을 수집해왔다. 우리는 고증에 철저했던 공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논어』에는 고증에 충실한 공자의 모습이 나온다. “하나라 예를 내 말할 수 있으나, 후예인 기나라가 족히 증거대지 못하며, 은나라 예를 내 말할 수 있으나 후예인 송나라가 족히 증거를 대지 못함은 문헌이 부족한 까닭이니 족하면 내 능히 증거를 대리라(夏禮를 吾能言之나 杞不足徵也며 殷禮를 吾能言之나 宋不足徵也는 文獻이 不足故也니 足則吾能徵之矣로리라 / 팔일편 제9장)”고 하였다.

이 말 뜻은 무엇일까? 문헌으로 정리하려면 구전되는 말만 갖고는 어렵다는 것이다. 공자가 평생을 두고 문헌을 정리하였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 당시에 공부는 대부분이 구전이었다. 종이로 된 책은 한나라 이후부터 있었고, 그전에는 일일이 필사한 죽책이 전부였기에 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에는 이미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시서예악(詩書禮樂)이 제대로 정리될 수가 없었다. 이것은 결국 국가가 백성들에게 제시할 예법체계가 무너져 있다는 뜻이다. “천자가 아니면 예를 의논하지 못하며, 법도를 짓지 못하며, 글을 상고하지 못한다(非天子면 不議禮하며 不制度하며 不考文이니라 / 『중용』제28장)”라는 것을 알고 있던 공자였기에 나라 임금과 더불어 정사를 펼치기를 기대하며 문헌을 모아나갔다.

제자인 자공(子貢)이 공자처럼 훌륭한 선생이 재야에 묻혀 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으니 궤에 넣어 감춰둘까요? 좋은 값을 흥정해 팔까요?(有美玉於斯하니 韞匵而藏諸잇가 求善賈而沽諸잇가)”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팔아야 할까, 팔아야 할까? 나는 값을 기다리는 자로다(沽之哉沽之哉나 我는 待賈者也로라 / 『논어』자한편 제12장)”라고 답변한 것은 시세에 아부하며 벼슬자리를 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신 같은 사람을 알아보고 등용하여 쓸 밝은 임금이 아니라면 함께 더불어 정치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더 이상 도가 전파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공자는 철환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와 육예(六藝)인 『시경』『서경』『역경』『예기』『악경』(현재 전하지 않음)『춘추』등의 문헌을 정리 찬술하였다. 하지만 공자가 벼슬자리에 올라 시행하면서 정리한 글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쓴 글을 빈말, 곧 ‘공언(空言)’이자 ‘공문(空文)’라고 낮추어 겸손히 말하였다.

육예에 대해 공자는 “그 사람됨이 온유하고 돈후하면서도 어리석지 않다면 시(詩)에 이해가 깊은 자요, 소통하고 먼 것까지를 알면서도 꾸미지 않는다면 서(書)에 깊은 자요, 도량이 넓고 성정이 조화로우면서 순하고 어질면서도 사치하지 않는다면 악(樂)에 깊은 자요, 정결하고 정미하면서도 구실을 붙이지 않는다면 역(易)에 깊은 자요, 공손하고 검소하며 장엄하고 공경하면서도 번거롭지 않다면 예(禮)에 깊은 자요, 말을 붙임에 사물을 비교하여 판단할 줄 알면서도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춘추(春秋)에 깊은 자라(其爲人也 溫柔敦厚而不愚면 則深於詩者也오 疏通知遠而不誣면 則深於書者也오 廣博易良而不奢면 則深於樂者也오 潔淨精微而不賦면 則深於易者也오 恭儉莊敬而不煩이면 則深於禮者也오 屬辭比事而不亂이면 則深於春秋者也니라 /『예기』 經解편 제1장)”고 하였다.

특히 『춘추』는 공자의 마지막 저술로, 맹자가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미하여 삿된 말과 폭행이 또 일어나 신하가 그 인군을 죽이는 자 있으며, 자식이 그 아비를 죽이는 자 있으니 공자가 두려워하시어 『춘추』를 지으셨으니 『춘추』는 천자의 일이라(世衰道微하여 邪說暴行이 有作하여 臣弑其君者 有之하며 子弑其父者 有之하니라 孔子 懼하시어 作春秋하시니 春秋는 天子之事也라 / 『맹자』등문공하편 제9장)”라고 하였다.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위정자들의 일을 재단하여 적었기에 공자는 “나를 아는 자도 그 오직 춘추이며 나를 죄주는 자도 그 오직 춘추라(知我者도 其惟春秋乎며 罪我者도 其惟春秋乎인저)”라고 하였다.

유학경전은 송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육예를 중심으로 공부해갔는데 사서삼경체계가 완성된 것은 남송(남송) 때 주자(朱子, 1130~1200)에 의해서였다.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로 『중용』을 지음) 이후 도맥이 끊어졌다고 판단한 주자는 정자의 뒤를 이어 공자의 학문을 연구하여 『예기』속에 들어있던 『大學』과 『中庸』을 독립시켜 『맹자』와 『논어』와 함께 四書로 묶고, 『詩經』『書經』『易經』을 三經으로 묶어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익혀야 할 과정으로 두고, 『書經』을 제외한 6서에 주석을 붙였다.

유교는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서구문화를 만나면서 좀 더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나 군대를 앞세운 서구문물에 무릎을 꿇게 되면서, 2천여 년 동안 국교로 숭상되었던 유교는 단절되고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그 속에서 공자 역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가 다시 부활되고는 있으나 중국이 지나치게 자국내의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어 우려스러울 뿐이다.

철환주유 시절 공자가 시를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물었던 ‘뿔소도 아니며 범도 아닌 것이 저 광야를 헤맨다하니 우리의 도가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詩云匪兕匪虎이어늘 率彼曠野아하니 吾道非邪아 吾何爲於此리오 / 『사기』공자세가)’라고 한 구절이 생각난다.

출처 : hoada
글쓴이 : 해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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