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13. 19:56ㆍ산 이야기
구한 말, 북한산성.,대서문.
.....................사적 162호.,북한산성........................
백제 개루왕 5년(132)에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그당시 백제는 수도를 하남 위례성(남한산성)으로 정했고
개루왕은 하북 위례성(북한산성)에 갇혀 고구려군에게 항전.
개루왕은 그곳에서 아차산성 밑
한강변까지 쫓기다가 잡혀 참수.
북한산성은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옮겨 왔던 곳인데
결국, 비봉능선까지 왕건의 관을 옮기면서 항전.
비봉능선 그곳을 "관봉(冠峯)" "불암(佛巖)"이라 한다.
북한산성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지.
고려시대 우왕 13년(1387)에 성(城)을 다시 고쳐 지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겪은 이후
축성론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백성을 동원해 북한산성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축성.
그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 중흥사를 비롯한 12개 사찰과 99개 우물,
26개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 토성이 약간 남아 있으나
대부분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 쟁탈전 격전처.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던 북한산성.
숙종 재위때 피난도성으로 왕이 거처할 행궁을 건축했다.
숙종이 국가가 전란의 위기에 처했을때
한양 도성을 버리지 않고 이곳에 머물며
'목숨을 다할 때까지 백성을 지키겠다.'는
군주로서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행궁(行宮)
북한산성 행궁(行宮)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북한산성.
백제 개로왕 5년(132)에,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한편
북방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처음 쌓았던 산성이다.
이후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
백제가 약 500년간 점령했고
고구려가 약 100년간 점령했고.
그후, 신라 25대 진흥왕이 점령했다.
비봉에 진흥왕 순수비는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건립.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
...........진흥왕 순수비(巡狩碑)..........
삼국통일 기초를 쌓은 진흥왕이 가야연맹체를 병탄하고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강 하류 일대와 동해안을 따라
함경남도까지 영토확장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4곳의 상징물
창녕비(경남 창녕군 창녕읍)
북한산비(서울 종로구 구기동 비봉)
마운령비(함남 이원군 동면 마운령)
황초령비(함남 함흥군 하기면 황초령),
....................................................
.
고려시대에는 11세기 초 거란이 친입하자
태조 왕건의 관을 이곳으로 옮긴뒤 성을 증축.
고종 19년(1232) 몽고군과 격전을 치르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겪은 조선은
북한산의 군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숙종 37년(1711)에 대대적인 축성공사.
1661(현종 2)~ 1720(숙종 46).
조선의 제19대 왕(1674~1720 재위).
.........................북한지(北漢誌).................................................
1745년(영조 21)에 승려 성능(聖能)이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책을
서윤에게 인계하면서 북한산성 사적을 지지(地誌) 형태로 편찬, 간행한 책.
책머리에 첨부된 북한도(北漢圖) 3장에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지형·윤곽·건물 등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져 안내도 역할을 하고 있다.
책끝에는 찬자인 성능의 발문이 있다.
성능은 1711년(숙종 37) 산성을 쌓을 때
그가 팔도도총섭이 되어 북한산성을 쌓고
30여 년간 산성을 지키다가 화엄사로 돌아갔다.
책의 내용은 도리(道里)·연혁(沿革)·산계(山谿)·성지(城池)·
사실(事實)·관원(官員)·장교(將校)·궁전(宮殿)·사찰(寺刹) 누관(樓觀)·
교량(橋梁)·창름(倉廩)·정계(定界)·고적(古蹟) 등 14개조로 되어 있다.
일반 지지와 달리 지형에 관한 산계조,
북한산성의 규모와 시설에 관한 성지조,
북한산성 축조 배경과 과정을 적은 사실조,
시설의 수비 인원을 기록한 관원·장교조,
18개의 절과 암자를 기재한 사찰조,
저장곡을 보관하는 창고에 관한 창름조,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관할구역 정계조 등
일반 지지에 설정되지 않거나
상세하게 나타나지 않은 항목들
기록은 성에 관한 특색을 보여준다.
또한 18세기초의 수도 방위에 대한 관심,
산성의 구조와 시설·운영 및 북한산의 지형과
고적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규장각·장서각·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승려들이 쌓고 보수하며 지킨.,북한산성.
13개 성문과 130칸 행궁, 140칸 군창,
우물 99개소, 저수지 26개소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6.25동란 중 시설물들이 파괴.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아
1990년부터 '북한산성 제 모습 찾기'
사업으로 성의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다.
지금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37년(1711) 4월 3일에 착수
그당시 엄청난 대공사였기 때문에 축성할 구간을 나누고
3군문(三軍門) 군인이 분담, 노임을 주는 모역군을 두었다.
또한 각종 장인은 물론 도성의 가구를 대, 중, 소로 분류
3명, 2명, 1명씩을 동원해 도성민들을 축성에 참여시켰다.
이때 3 ~만 명에 달하는 노역자들이 부역에 동원되었다는데,
당시 도성의 남자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도성민 1/3에 해당.
그해, 10월 19일 축성 6개월 만에 석성을 완공하는 놀라운 성과.
축성 성곽의 길이 약 9.5km.
이 기간 동안 도성의 백성들은
자신이 먹을 것을 싸가지고 와서
축성하며 힘든 노동을 견뎌야 했다.
숙종 37년(1711년) 가을에 축성을 완료한 조선 조정.
산성 방어를 위해 설치한.,3군문 파견대의 유영을 설치
경리청 관할 아래.,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유영(留營).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임진왜란 당시
그 능력을 충분히 보였던 승려(僧侶)들을 주둔
평상시 승려로, 유사시 승군(僧軍)으로 산성방어.
1712년 성능(聖能)이 북한산성 도총섭이 된 이후에
산성 안 사찰들은 군영(軍營)으로서 창건되거나 중창.
승군 사찰은 산성 12성문 안 수비와 성곽 관리를 맡았다.
승영사찰은 승군을 주둔시키고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를 두었고
병영의 역활을 겸하는 승병 수행처.
임진왜란 때 국사., 사명대사
국녕사가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국녕사가 무너지면, 나라가 흔들린다."
임진왜란때 8도도총섭이었던 사명대사는
북한산 요소 요소에 10 사찰을 중창 및 창건
호국기도 도량 및 승병양성 도량으로 쓰여졌다.
1713년에 성능이 중창한.,국녕사
숙종37년(1711)에 산성 축성 당시 각성이
가사를 하사 받은 곳으로 추정되는.,국녕사.
가사당암문에서 가사당이란 국녕사로 여겨진다.
.........................가사(袈裟)............................·
가사를 만드는 재료를 의체(衣體)·의재(衣財)라 한다.
버린 옷, 죽은 사람의 옷, 등 낡은 옷을 조각조각 벤 뒤,
백팔번뇌 의미를 본따서 108개 천 조각을 꿰매어 만든다.
.
조선시대 국사(國師,) 도총섭이 입는.,가사(袈裟)
왼쪽 어깨 위에 걸쳐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 착용
조선시대 산성 승병 수비대는 흑의(黑衣)를 입었다.
....................................................................
8도 도총섭으로 약 30년간 산성에서 재직한.,성능.
국녕사는 산성 12성문 승병 수비대 12 수행처 중 하나.
현재, 가사당암문은 축성 때 <국녕사암문>이라 불리웠다.
1711년 중흥사에 도총섭 성능이
주석하며 북한산성 수리를 주도.
이듬해까지 기존 태고사와 중흥사를 제외한 8 승영사찰을 건축.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진국사(노적사), 국녕사,
상운사, 서암사, 봉성암, 원효암 등 8개 승영사찰이 이때 지어졌다.
그 결과 산성 내에 새로 창건한 절이 12개이며
기존 중흥사까지 13개 사찰에 350 승려가 상주.
북한산성 12성문 지킴이 승병대로서 역활을 수행.
본래 북한(北漢)은 한양 한강 북쪽을 일컫는 지명.
북한산성은 북한에 위치한 산성(山城)이란 뜻 이름.
성능이 쓴 북한지 기록 속.,북한산성 12 성문의 옛 이름
........북한지(1745년 영조 21년)........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봉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수문(총 : 15개)
........................................................................
....비변사등록(1711년 숙종 37년)........
북문, 대동문, 대서문,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수문 (13개)
중성 : 중성문, 수문, 암문 (3개) 모두 합하면 (1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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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7~1896. 2월 개화파 내각이 추진한 갑오경장(甲午更張)
그후 승병수비대 제도는 폐지되고 승영 사찰은 폐허화되었다.
북한산 정상 바위 바닥에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
삼일운동을 기념하는 정재용(鄭在鎔) 선생의 암각문
1919. 3.1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정재용.
직사각형 네 귀퉁이.,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이란 뜻.
본문에는 암각문으로 새겨져있는.,그날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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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宣言記事 己未年 二月十日
朝鮮獨立宣言書 作成 京城府淸進町 六堂崔南善也 庚寅生.
己未年 三月一日 塔洞公園 獨立宣言書 萬歲導唱 海州首陽山人 鄭在鎔也 丙戌生.
기미독립선언의 일을 적음 : 기미년 2월 10일
조선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는 경성부 청진정 육당 최남선임 경인생,
기미년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 만세를 선도하여 외친 이는 해주 수양산 사람 정재용임 병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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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 때 민초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산성은
구한 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북한산성 성벽 만 남고 그안 시설물들은 사라지고
그후, 다시 잡목 속에 묻혀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
백제가 하남 위례성으로 도읍을 정했을 당시.,한강 북쪽의 산성.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졌고,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했을 때
고려 8대 현종이 고려 태조 왕건의 관을 북한산성으로 옮겨와 항전.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 지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토성을 석성으로 재건축.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 중흥사를 비롯한 12개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 토성 흔적이 있지만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졌고,
대서문, 장대지,·우물터,·건물터 방어시설 일부 흔적.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 격전지
조선시대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
"북한산은 그 줄기가 인수봉(仁壽峰)에서
남서쪽 백운봉(白雲峰 : 백운대)으로 이어지고,
백운봉에서 산성의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만경봉(萬景峰:국망봉), 노적봉(露積峰), 용암봉(龍巖峰),
일출봉(日出峰), 월출봉(月出峰), 기룡봉(起龍峰), 반룡봉(盤龍峰),
시단봉(柴丹峰), 덕장봉(德藏峰), 복덕봉(福德峰), 석가봉(釋迦峰),
성덕봉(聖德峰), 화룡봉(化龍峰), 잠용봉(潛龍峰),
보현봉(普賢峰), 문수봉(文殊峰)이 연이어 있으며,
나한봉(羅漢峰), 나월봉(蘿月峰), 증취봉(甑炊峰),
용혈봉(龍穴峰), 용출봉(龍出峰), 미륵봉(彌勒峰)
줄기가 대서문(大西門)을 향하고 있다." -북한지 -
또한 보현봉에서 남동쪽으로 형제봉(兄弟峰)을 거쳐
북악산으로 내달은 주맥이 보이는데, 이 줄기는 예부터
(한양 )도성과 연결된 용의 맥이라 하여 신성시하여 왔다.
대서문을 지나면
성내 계곡의 물을 흘려보내는
중흥수구(中興水口)에 닿는다.
이곳을 지나면
둥그렇게 능선이 휘어
원효봉(元曉峰), 영취봉(靈鷲峰),
시자봉(侍者峰)을 거쳐 백운봉과 만난다.
또한 능선안에는
기린봉(麒麟峰), 장군봉(將軍峰),
등안봉(登岸峰), 구암봉(龜巖峰), 상원봉(上元峰),
휴암봉( 巖峰) 등 높지않는 산들이 계곡 양쪽에 들어서 있다.
상원봉은 남장대가 있는 곳이며
나한봉이라도 불리우는.,봉우리.
........................................................
이 밖에 천룡강(天龍岡), 와룡강(臥龍岡),
주마강(走馬岡)이라고 불리우는 높은 산등성이.
주마강은 '와룡강에서 나눠지며 노적봉을 향한 언덕.
.
천룡강은 '원효봉~ 등안봉' 연락이 오고가는 언덕
와룡강은 '증취봉과 장군봉'이 마주보이는 산등성이.
증취봉과 장군봉이 대치되는 와룡강 위에 연못.,흥룡지.
천룡강(天龍岡),
와룡강(臥龍岡)
주마강(走馬岡)
세곳은 군사 작전 상, 전술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활.
조선시대 축성때 사용되었으나 그후 사용되지 않은듯.
오늘날, 세 언덕(천룡강, 와룡강, 주마강)은 잊혀진 지명.
문헌 속 기록을 찾아서 올라가 보면,
잡목이 우거져.,옛길은 이미 사라진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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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은 고려시대에 일명 부아봉(負兒峰)으로도 불리었으며,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쌓을 때 이를 지휘하고 『북한지』를 쓴
고승 성능(聖能)은 백제 건국 신화와 관련이 있는 산봉우리로 추정.
백운봉은 백운대라고도 하며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봉우리.
조선시대 여암 신경준(申景濬) 등은
백제 건국과 관련 깊은 곳으로 보았다.
만경봉은 그곳에 서면
눈 아래 산하(山河)가
만경(萬景)처럼 들어온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일명 국망봉이라고도 한다.
조선 건국 초에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한양을 조망하고
국도(國都)를 정했다는 유래.
.
하여, 정해진 이름이나 국망봉이란 이름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므로 믿을 바가 못된다.
인수봉, 백운봉, 경봉을 합쳐 삼각산이라 불렀다.
.
보현봉은
조선 초기에
도성의 내맥(來脈)을
살펴보기 위하여
오르내린 봉우리.
'조선 세종때 규표(圭表 : 태양관측기구)를
바로 잡기 위해 수양대군이 출입한 일이 있고,
영의정 황희 등이 세종15년(1433)에 이 곳에 올라
도성의 내맥(來脈)을 살핀 일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단종때 수양대군이 강희맹,양성지 등 권위자들을 대동하여
보현봉에 올라, 도성도(都城圖)를 최초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비봉(碑峰)은 정상에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붙혀진 이름.
오늘날까지 전하는 '북한산 43봉' 옛 이름은
조선 숙종 재위 당시 북한산성을 축성하면서
도총섭 성능이 기록한 북한지에 의해 전해졌다.
도총섭 성능은 북한산에서 약 30년간 머물며
축성 기록은 물론 산성 내 지명을 자세히 기록.
계곡의 이름까지 구역 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
......... 북한지 기록 속., 43봉 옛이름............
백운대 (白雲臺) 835.6 : 인수봉 (仁壽峯) 810.5 :
만경봉 (萬景峯) 800.6 : 노적봉 (露積峯) 715.5 :
용암봉 (龍巖峯) : 일출봉 (日出峯) 617 :
월출봉 (月出峯) 600 : 기룡봉 (起龍峯) 588 :
반룡봉 (盤龍峯) 583 : 시단봉 (柴丹峯) 607 :
덕장봉 (德藏峯) 586 : 복덕봉 (福德峯) 594 :
석가봉 (釋迦峯) 598 : 성덕봉 (聖德峯) 631 :
화룡봉 (化龍峯) 644 : 잠룡봉 (潛龍峯) 701 :
문수봉 (文殊峯) 727 : 보현봉 (普賢峰) 714 :
716봉(구 나한봉 : 715.5m 삼각측량지점) :
나한봉(구 나월봉(蘿月峰) 688 :
나월봉(구 환희봉 (歡喜峯) 657 :
증취봉 (甑炊峯) 593 : 용혈봉 (龍穴峯) 581 :
용출봉 (龍出峯) 571 : 의상봉 (彌勒峯) 501.5 :
원효봉 (元曉峯) 510.3 : 염초봉 (廉峭峯) 662.2 :
시자봉 (侍者峯) 775 : 기린봉 (麒麟峯) 472.1 :
장군봉 (將軍峯) 431 : 등안봉 (登岸峯) 463 :
귀암봉 (龜巖峯) 520 : 상원봉 (上元峯) 684 :
휴암봉 (鵂巖峯) 594 : 형제봉(462.2m),
족두리봉(367.3m), 응봉(332.9m) 등.
.
- ...............원효능선(조선 숙종때 훈련도감.,담당 구역)....................
- 원효봉(元曉峰,510.3) : 북한산성 축성 후, 원효, 의상을 기리기 위한 지명.
- 염초봉(廉峭奉,662.2) : 북한산성 축성 후 지명, 고려시대 '영취봉(靈鷲峰)'.
- 시자봉(侍者奉,775.0) : '백운대를 모시는 봉우리', 정상부에 말바위가 있다.
- 백운대(白雲臺,835.6) : 고려시대 중봉, 이성계 잠구시 "백운(白雲)"에서 유래.
인수봉(仁壽峰,810.5) : 고려시대 負兒峰. 조선시대 仁者樂山 仁者壽)에서 유래.
만경대(萬景臺,800.6) : 고려시대 개성 천마산 국망봉에서 유래, 나중에 만경봉.
용암봉(龍巖峰, ) : 고려시대 미로봉이라 불렀는데. 용(龍)모양의 바위가 있는 봉.
노적봉(露積峰,715.5) : 고려시대 적석봉(積石峰), 그후 이슬이 쌓이는 봉.,노적봉.
이슬이 쌓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곡식을 한데에 쌓아 둔.,노적가리.
.................의상능선(어영청., 담당 구역)......................
의상능선(의상~ 용출~ 용혈~ 증취~ 나월~ 나한~ 문수)
의상봉(義相峰,501.5) : 신라 의상대사 수도처 전설에서 유래.
용출봉(龍出峰,571) : 용이 솟아 오르듯 뾰족하여 붙여진 지명.
용혈봉(龍穴峰,581) : 북한산성 축성 후, 용에 관한 이름 중 하나.
증취봉(甑炊峰,593) : 증봉(甑峰:시루봉), '시루가 불타는 봉우리'.
나월봉(蘿月峰,688) : 고려 개성 천마산 나월봉 달모양에서 유래.
나한봉(羅漢峰,715.5) : 문수사 천연동굴 내 오백나한에서 유래.
문수봉(文殊峰,727) : 봉우리 아래 고려 예종때 문수사에서 유래.
보현봉(普賢峰,722) : 문수봉과 나란히 있어.,보현보살에서 유래.
..........산성 주능선 10봉(금위영 담당)..................
일출 월출 기룡 반룡 시단 덕장 복적 성덕 화룡 잠룡.
북한산성 축성(1711년) 이후 주로 "용"자를 붙혀.,명명.
일출봉(日出峯) 617 : 월출봉 (月出峯) 600 : 해와 달을 나란히 이름 붙힘
기룡봉(起龍峯) 588 : 반룡봉 (盤龍峯) 583 : 용틀임 & 웅트림 형상을 묘사.
시단봉(柴丹峰) 607 : 해돚이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해몰이(紫霞:자하)와 반대
덕장봉(德藏峯) 586 : 복덕봉 (福德峯) 594 : 모든 봉우리가 읍(인사)을 하는 형상.
석가봉(釋迦峯) 598 : 현재 칼바위 능선. 불교와 관련된 석가봉은 문수사에서 유래.
성덕봉(聖德峯) 631 : 불교용어와 관련된 봉우리 이름으로 북한산성 축성 직후.,지명.
화룡봉(化龍峯) 644 : 잠룡봉 (潛龍峯) 701 :
두 봉 사이에 구 대동문( 현재 대동문)이 있어
조선시대 북한산성 축성 후., 용(龍)을 넣은 지명.
..............................산성 내 6봉.....................................
기린봉 (麒麟峯) 472.1 : 산세가 기린을 닮은 봉(정상 : 북장대).
장군봉 (將軍峯) 431 : 고려 말, 최영장군 지휘소( 중흥사 서쪽).
등안봉 (登岸峯) 463 : 중흥사 후면에 있다.
귀암봉 (龜巖峯) 520 : 거북이 바위가 있다고 하여 명명.
그 곁에 태고대(천해대)가 있고 아래에는 태고사,
그리고 태고사 옆(傍)에는 봉성암이 있다.
상원봉 (上元峯) 684 : 아래에 행궁(行宮)이 있다.
임금이 머무르는 봉우리란 뜻의 상원봉이라 부른다.
휴암봉 (鵂巖峯) 594 : 올빼미 바위가 있어.,명명.
휴암봉 아래 부왕사(扶旺寺)지 저산시대 사찰터.
......................산성 밖 봉우리들.........................
족두리봉(鷲峰, 367.3) : 예전엔 수리봉(鷲峰:취봉)이라 부름.
멀리서 보면 마치 족두리 같다고 하여 최근에 붙혀짐
향로봉(香爐峰, 527.4) : 탕춘대성 방향에서 바라보면
향로처럼 생겨 붙혀짐(향림사 뒤에 있어 향림사 후봉)
관봉(冠峰) : '갓바위' 관봉 또는. 불암(佛巖:부처바위)
향림사 위에 있어 '향림사 후대'라고 부르기도 했던 곳.
비봉(碑峰,560.3) : 신라 진흥왕이 부아악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巡狩碑)가 있는 곳이라 명명된 비봉.
승가봉 : 신라 경덕왕 15년 '수태'가 세운 승가사에서 유래.
사모바위 : 사모관대의 사모(絲帽)에서 유래
석가봉(釋迦峰, 598) : 문수사에서 유래되었다.
석가모니 문수보살 보현보살 3불상을 의미하며
현재, 석가봉은 '갈바위능선'으로 불리우고 있다.
형제봉(兄弟峰,462.2 삼각측정지점) :
2봉 높이가 엇비슷 연이어 있어 형제봉.
영봉(靈峰,604) : 산에서 숨진 영혼을 기리는 곳.
즉, 산악인의 영(靈)이 머무는 봉우리라 하여 영봉.
영장봉(545m) : 망운봉(望雲峰)또는 염장봉이라고도 부름
사기막봉(555m) : 사기막능선 중간(정상에 산불감시카메라)
숨은봉(768m) : 1970년 고려대 OB 산악회가 숨은벽(Hidden Face)
암벽코스를 개발하여 숨은벽이라 명명. 그 정상을 숨은봉이라 한다.
파랑새봉(710m) : 파랑새능선 정상(일명: 장군봉)
파랑새능선은 파랑새 산악회에서 코스 개척후 명명.
이 외, 시루봉, 상장봉, 문필봉, 응봉(332.9m)등이 있다.
...................북한산 계곡....................
장춘동 계곡 (長春洞) : 수문 에서 보리사까지
옥류동 계곡 (玉流洞) : 보리사에서 만경봉 아래까지
청계동 계곡 (淸溪洞) : 보리사에서 법용사 앞까지
노적동 계곡 (露積洞) : 법용사에서 노적사 아래까지(진국교)
영천동 계곡 (靈泉洞) : 진국교에서 노적봉 영천굴까지
백운동 계곡 (白雲洞) : 진국교~용학사 갈림길 / '백운동문'
중흥동 계곡 (重興洞) : 용학사 갈림길에서 중흥사 앞까지
규룡동 계곡 (叫龍洞) : 중흥동 계곡 위에서 월출봉 아래에 있음
용계동 계곡 (龍溪洞) : 중흥동 계곡 위에서 일출봉 아래에 있음
용암동 계곡 (龍巖洞) : 중흥동 계곡 위에서 용암봉 아래에 있음
은선동 계곡 (隱仙洞) : 중흥동 계곡 위에서 만경봉 아래에 있음
잠룡동 계곡 (潛龍洞) : 잠룡봉~ 중흥동(대남문~ 중흥사앞)
용유동 계곡 (龍遊洞) : 증취봉 아래에서 법용사 갈림길까지
자하동 계곡 (紫霞洞) : 유선대 아래. "저녁노을이 지는 계곡".
부왕동 계곡 (扶旺洞) : 부왕사(扶旺寺)~ 용학사. 현재 청하동.
부왕동 계곡 (扶王洞) :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에서 삼천사까지
청수동 계곡 (淸水洞) : 청수동암문(가사당암문)에서 백화사(중골).
청수동 계곡 (靑藪洞) : 석가현(보국문)~ 정릉천 / 현재 '청수장' 유원지.
청담동 계곡 (淸潭洞) : 사기막골 초입 계곡이며, 출렁다리에서 창릉천까지.
.....................................................................................................
산성 안 계곡에는 상당히 구체적인 이름이 전해온다.
계곡을 구간 별로 주소를 붙이듯 세분화시켜 놓았다.
그 설명이 모호해 현재 개념으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북한산에는
지금의 번지만큼
자세하게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사용.
현재, 북한산 계곡 옛지명이 사라져가고 있다.
하류에서부터 장춘동, 옥류동, 청계동, 백운동,
용계동, 구룡동, 잠룡동 구간 별., 불리우던 계곡.
계곡 구간마다 운치가 담긴 옛 지명.
지금도 '백운동문'이라는 각자(刻字)가
용화사에서 노적사 가는 바위에 남아있다.
.
..................북한산 교량........................
백운교(白雲橋) - 보리사 앞에 있다(현 새마을교)
청운교(靑雲橋) - 법용사 앞에 있다(현 법용교)
강선교(降仙橋) - 노적사 아래 있다(현 진국교)
봉황교(鳳凰橋) - 여기담 아래 있다 (없어짐)
환선교(喚仙橋) - 반룡담 아래 부왕동입구에 있다 (현 돌다리)
언룡교(偃龍橋) - 항해루[현 산영루] 아래에 있다 (없어짐)
...........'북한산'., 8대(臺)...........
의상대(義相臺) - 의상봉 아래에 있다.
원효대(元曉臺) - 원효봉 아래에 있다.
요초대(瑤草臺) - 원효대 아래에 있다.
태고대(太古臺) - 귀암봉 아래 (현재 천해대)
소요대(逍遙臺) - 동장대 옆 (시단봉 옆, 591.8m)
법왕대(法王臺) - 보국사 남쪽에 있다.
곡룡대(曲龍臺) - 보광사 왼쪽에 있다.
유선대(遊仙臺) - 부왕사 앞쪽 (휴암봉 아래)
.......................................................
상기, 지명 대부분은 조선 숙종때
북한산성 축성 당시 축성 책임자였던
도총섭 성능 스님이 쓴 '북한지'에서 인용.
아직도 북한산 43 봉의 이름과 위치는 혼란스럽다.
옛 문헌, 구전 등 현재의 지명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즉, 고려 말과 조선 숙종 재위 축성 당시 지명이 다른 때문.
칠성봉, 가사봉, 상원봉, 장군봉, 휴암봉,석가봉. 등
비봉능선 '관봉(冠峯)과 불암(佛岩)'의 지명도., 모호.
관봉은 고몽전쟁때 왕건의 관을 모신 곳이라 일명 불암.
산,봉,악,대,덕,령,치,고개
(山,峰,岳,臺,德,嶺,峙,古介)
현재, 북한산에 관한 옛 문헌으로는
조선 숙종때 성능이 쓴 북한지가 유일.
현재까지 전하는 지명은 대부분., 북한지 지명.
그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뒤바뀐 지명의 흔적들.
그래서, 북한산의 지명은 아직도 베일 속 수수께끼.
북한산은 92%가 고양시
강북구는 8%를 차지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루왕 5년 (132)
“5월 2일에 북한산성을 쌓았다” 기록
고구려 본기 영양왕 14년 (603년).
“신라의 북한산성 공격이 있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다”. 라는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6년 (555년)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강역을 확정하다”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 세종조 및 숙종, 영조대
북한산 및 북한산성에 관한 약 200 여 기록이 표기.
1900년대 외국인 사진 자료 속에는 북한산이라고 표기.
2008년 7월 30일 문화일보 - 강북구청장 기고.
"일제 잔재 청산에 관심이 덜한 것 같아 아쉽다.
우리 산과 땅의 본래 이름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매년 1000만 등산객이 다녀가는 삼각산, 북한산을 포함.
1915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발표한
'경기도 고양군 북한산 유적조사 보고서'를 발표한 후부터.,북한산.
강북구는 삼각산 이름을 되찾으려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단지 북한산, 삼각산 이름이 단체 간 유불리와 관계없다면
이부분을 우선적으로 정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다.
만경봉, 백운봉 남쪽에 있다.
높고 빼어나며 기이하고 웅장함이
인수봉과 더불어 자웅을 다툰다.
노적봉, 만경봉 서쪽에 있다.
높이 우뚝 솟아 올라 노적 같다
고려 중흥동 옛 석성이 이곳에 있다.
용암봉은 만경봉 남쪽에 있다.
일출봉은 용암봉 앞에 있다.
월출봉은 일출봉과 더불어 나란히 우뚝 솟아 있다.
기룡봉은 월출봉 앞에 있다.
반룡봉은 기룡봉 옆에 있다.
시단봉은 반룡봉 남쪽에 있다.
위에 동장대가 있고,
아래에 어수재가 있다.
덕장봉은 시단봉 남쪽에 있다.
여러 봉우리들이 모두 둘러서서
인사하는 것 같아 그 이름 지어졌다.
복덕봉은 덕장봉 남쪽에 있다.
그 형세와 기상이 덕장봉과 더불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또한 이름 지어졌다.
석가봉은 동문 밖 청수동 위에 있다.
성덕봉은 석가봉 서쪽에 있다.
화룡봉은 성덕봉 옆에 있다.
잠룡봉은 화룡봉 근처 서쪽에 있다.
보현봉은 대남문 밖에 있다.
문수봉은 보현봉 서쪽에 있다.
봉우리 아래에 문수굴이 있고,
굴 안에는 물맛이 좋은 샘과
다듬어 만든 석상으로
문수와 더불어 오백나한이 있다.
나월봉은 환희봉 남쪽에 있다.
증취봉은 나월봉 서쪽에 있다.
용혈봉은 증취봉 서쪽에 있다.
용출봉은 용혈봉 서쪽에 있다.
미륵봉은 용출봉 서쪽에 있다.
원효봉은 수구 위에 있고, 원효암이 있다.
영취봉은 원효봉 위에 있다.
시자봉은 백운대 아래에 있다.
올라가 다다르면 넉넉히 북한의
한 성안의 형세를 다 살필 수 있다.
기린봉은 노적봉 아래에 있다.
장군봉은 중흥사 서쪽에 있다.
고려 때 최영이 머물렀던 곳이라.,장군봉.
등편봉은 장군봉의 위, 중흥사의 뒤에 있다.
구암봉은 동장대 아래에 있다.
상원봉은 문수봉 북쪽에 있다.
휴암봉은 남장대 북쪽에 있다.
...............
...............
마지막으로
정조 9년(1785)의
조선왕조실록 내용이다.
북한산성 안찰 어사., "신기(申耆)"
산성안의 민간인 및 승병의 생활,
북한산성 현상황 및 문제점 보고서
북한산 봉우리와 성문을 설명하는 대목.
"성첩의 주위(周圍)는 백운봉(白雲峰)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돌아 영취봉(靈鷲峰)에 이르기까지
산세가 높고 험준하여 본래 성을 쌓지 않았으나
백운봉과 영취봉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에는 두 건성(乾城)이 있고,
영취봉 산허리에서 비로소 성이 시작되어 북문(北門)에 이르렀는데
문루(門樓)는 갑오년의 재변(災變)을 치른 뒤에도 중건(重建)되지 않은 채
문의 자물쇠는 오랫 동안 잠겨져 있고, 홍예문(虹예門)은 아직도 완전합니다.
북문에서부터 솟아 올라가 원효봉(元曉峰)을 이루었는데,
높고 뾰족하여 성이 끊어졌으며, 돌을 깎아 계단을 이루었습니다.
원효봉의 오른쪽은 단애(斷崖)로서 깎아지르듯이 내려갔고
곁에 층성(層城)을 끼고 있으며,층성 아래에 암문(暗門)이 있습니다.
암문에서 돌아 내려가 평지(平地)를 이루었는데,
곧 북한 산성의 도수구(都水口)입니다.
양쪽 바위가 깎아 세운 듯하고,
좌우에 있는 성(城)의 모퉁이는
바위에 이르러 그쳤으며,
물은 그 사이로부터 나옵니다.
수구(水口)에서 대서문(大西門)으로 돌아 솟아올라 의상봉(義相峰)이 되었고,
의상봉에서 용출봉(龍出峰)· 용혈봉(龍穴峰)· 시루봉(甑峰)· 나한봉(羅漢峰)· 가사봉(袈裟峰)을 거쳐
문수봉(文殊峰)의 높고 깎아지른 곳에 이르러 성이 끊겼으며,
협곡(峽谷)을 지나간 곳에 성을 쌓았습니다.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는 국령사(國靈寺)의 암문(暗門)이요,
시루봉과 나한봉 사이는 원각사(圓覺寺)의 암문(暗門)이며,
가사봉과 문수봉 사이는 가사암문(袈裟暗門)이요,
문수봉 오른쪽에 문수봉 암문이 있는데,
지금은 대남문(大南門)이 되었으며,
문선(門扇)의 대접철(大접鐵)은
탈락(脫落)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대남문 오른쪽은 보현봉(普賢峰)이요,
보현봉 아래에 대성문(大城門)이 있는데
경진년(1760년)에 영구히 폐쇄(閉鎖)한 뒤부터
문루(門樓)와 처마가 퇴락(頹落)하였습니다.
석가봉(釋迦峰)에 이르기 전에
암문 한 곳이 있고,...(현재 : 보국문)
석가봉의 동쪽이 대동문(大東門)이 됩니다.
.
용암봉(龍巖峰)과 만경봉(萬景峰)이 이어서
만경봉과 백운봉 사이에 또 암문이
용암봉의 중간층에서 그대로
성첩의 형체는 백운봉에서 대성문에 이르기까지
성벽의 회도 모두 떨어져 안팎 타첩(타堞)이 거의 벌집과 같으며,
또 그 무너진 곳은 대성문 이남(以南)에 비해서 10배 이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신축년(1781) 무렵에 간간이 보수한 뒤에
지금까지 5년 동안에 애당초 한줌 흙이나
한 조각 돌의 역사(役事)가 없었고,
치첩(稚堞)의 무너진 곳에 대해서는
관할(管轄) 안의 승도(僧徒)가
감히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없어
돌을 쌓아 가려서 임시 변통을 했습니다.
체성(體城) · 여성(女城) · 성랑(城廊)· 문루(門樓)의
무너진 곳 및 성문의 철물(鐵物)이 탈락한 수효도
역시 별단(別單)에 기록하였습니다.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중요한 곳이 장차 쓸모 없이 될 터이니,
전란에 대한 대비를 위하여 마땅히 지금
고쳐 개혁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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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중흥산성의 현지조사를 다녀온 병조판서 이덕형.
.
“성이 무너진 것이 열에 일곱 여덟인데,
수리를 한다 해도 높은 봉우리 꼭대기는
인력 소비가 커서 쉽게 해내기 어려울 것”
.
“혹시 각도의 승려들을 소집
중요한 곳에 집을 짓게 하고서
지역별 공역을 맡겨 산성을 수리하면
인심도 믿고 의지하는 곳이 있게 되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 -1593년 이덕형 -
.
그후 1711년 숙종 때 축성 복원된.,북한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