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14. 10:09ㆍ산 이야기
유기수와 토왕폭
산악인들이 꽁꽁 얼어붙은 토왕폭 하단부를 향해 올라가고 있다. 멀리 보이는 것이 상단부. [손재식 사진작가]
유기수는 아주 독특한 산쟁이다.
그는 하루 산행이면 한병, 두밤 자는 산행이면 두병, 열흘이면 열병의 인슐린병을 배낭에 챙겨 넣는다. 자신만의 등반장비이자 식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산에서 밤마다 팔뚝에 스스로 주사를 놓는다. 그는 약효가 떨어지면 치명적인 상태에 빠질 수도 있는 당뇨를 이겨내며 15년 이상 눈부신 등반 활동을 펼쳤다.
설악의 토왕폭 우벽과 울산암 중앙직상 크랙(바위가 갈라진 틈) 을 비롯해 국내 여러 곳의 높은 벽을 처음으로 올랐다. 게다가 일본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로 알려진 다니가와 다케(谷川嶽)를 겨울에 올랐으며, 프랑스 알프스의 난벽(難壁) 드류를 등반했다. 이들 등반 모두가 당뇨로 쓰러진 뒤에 인슐린을 주사하며 이뤄낸 것이다.
밤에, 그것도 달밤에, 아스라한 절벽에 매달려 하늘을 우러르며 자신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 괜히 섬뜩해진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복부 깊숙이 선불맞은 상처에서 배어나오는 선홍빛 피를 혀로 핥으며 하늘을 향해 으르렁대는 한 마리 들짐승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유기수의 클라이밍 인생에서 가장 높은 목표가 됐던 벽은 역시 설악의 토왕성 빙폭이었다. 그는 토왕폭에서 목숨을 잃은 송준호보다 6년이나 앞선 1967년부터 거의 매년 토왕폭 빙벽에 도전했다.
에코클럽의 동료인 이일영씨, 고령산악회의 허재영씨와 함께 처음으로 하늘에 걸린 듯한 3백m 길이의 얼음기둥에 붙었던 67년. 유기수는 하단부 12m를 오르고는 돌아서야 했다. 당시엔 아이스 하켄조차 구할 수 없어 암벽 등반 때 쓰는 짧은 록(rock) 하켄을 얼음에 박으며 빙벽을 오르려고 했던 기막힌 등반이었다.
이후 거듭된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당대 최고의 클라이머였던 송준호마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토왕폭에서 숨진 70년대 중반까지 '토왕폭은 등반이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을 산쟁이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을 좌우한다는 말처럼, 고드름질 빙벽 등반장비가 개발되면서 상황은 아주 달라졌다. 그 장비에 걸맞은 기술이 준 '몸의 자유'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이 불가능의 빙폭을 등반이 가능한 현실세계의 눈높이로 끌어내렸다.
유기수뿐만 아니라 당시 토왕폭 초등을 노리고 있던 모든 클라이머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던져준 장비가 하나 나타났다.
토왕폭 빙벽 등반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확보점(위급상황 때 몸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지점)을 설치할 만한 아이스 하켄이 없다는데 있었다. 75년 독일에서 개발된 '바르트 혹(wart hog)'이라는 아이스 하켄이 일본 산악인 하다케야마 산시로를 통해 국내 산악계에 소개된 일은 우리나라 면직공업사에 있어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대롱에 숨겨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비화에 견줄 만하다.
같은 해 2월 9일 어센트산악회의 김재근씨는 산시로가 가져온 바르트 혹 하켄으로 강촌 구곡폭포 빙벽을 초등했다. 등반을 마치고 귀국하며 산시로는 김재근씨에게 3개의 바르트 혹을 구곡폭 빙벽 초등의 기념선물로 주었다. 산친구 김재근씨를 통해 손에 쥐게 된 바르트 혹 하켄의 효율성은 고드름 투성이의 토왕폭 빙벽 초등을 벼르던 유기수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그는 '바로 이거다'하는 느낌을 받았다. 71년 겨울 요델산악회의 최용준씨가 토왕폭 상단에 도전한 적이 있다. 그때 최씨는 하켄 10여개를 설치하고 10m 가량 나아가다 추락했는데, 확보용 하켄이 추락 하중을 견뎌내지 못해 모두 빠져 버렸다. 그만큼 당시 빙벽 등반장비들은 부실했다.
그즈음 사용하던 하켄은 사실 토왕폭과 같이 단단한 청빙(淸氷)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장비였다. 실제로 이런 하켄들은 청빙용이 아니라 설벽(雪壁)용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런 하켄을 토왕폭과 같은 청빙에 박으면 주변 얼음이 온통 깨지고 만다. 하지만 바르트 혹은 그렇지 않았다. 이놈은 신기하게도 고드름질 빙질에서조차 빨려 들어가듯 쏙 박혀들어가곤 했다.
유기수는 바르트 혹을 신주 모시듯하며, 토왕폭에 맺힌 10년의 한을 풀기 위해 77년 1월 8일 설악의 토왕골로 들어갔다.
금강운수 버스를 타고 속초로 가서 물치와 설악동을 거쳐 설악의 토왕골로 들어선 유기수는 깜짝 놀라 돌장승처럼 그자리에 굳고 말았다. 토왕폭 초등을 노리고 전국에서 모여든 클라이머들로 토왕골이 장터처럼 북적댔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박영배씨가 이끄는 크로니산악회팀, 오영복.도창호씨의 동국대팀, 권경업.이정희.배종순.이종양씨 등의 부산합동대 등 무려 4개팀 30여명이 진을 치고 처녀 토왕폭을 시집보내기 위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토왕폭 초등 경쟁
유기수씨가 인수봉의 에코길 등반 도중 앞서 가는 등반자를 도와주고 있다. [손재식 사진작가]
맨 처음 도착한 팀은 '크로니'였다. 이 팀은 1976년 12월 29일 토왕골에 들어왔다. 그 다음은 77년 1월 7일 도착한 동국대팀이었다. 그리고 유기수의 에코클럽팀과 부산 합동대팀은 하루 뒤인 1월 8일 맨 마지막으로 토왕골에 들어왔다.
동국대팀 도창호 대원은 유기수보다 더 당혹감을 느꼈다. 그는 76년 겨울 토왕폭의 하단을 초등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동국대팀은 70년부터 매년 토왕폭 초등의 문을 두드려왔다. 그러다 6년 만에 토왕폭은, 비록 하단만이지만 토왕폭 사나이들인 동국대의 도창호.이동훈에게 처녀성을 허락했다.
신인섭 대장을 비롯한 이상선.김형태.강승모.김성배.안호근.안규섭.이종량.김용일.이동훈.도창호.오영복씨 등 12명의 대원은 7박8일간 고투 끝에 두 대원을 하단 위로 올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도씨가 어센트의 김재근씨에게서 받은 '바르트 혹'이다.
이처럼 하단 초등의 쾌거를 이룬 동국대팀은 상단 개척등반에도 성공해 토왕폭의 진정한 초등자가 되기 위해 전열을 재정비, 토왕골로 들어왔으나 일이 묘하게 꼬인 것이다.
유기수와 동국대팀은 먹지도 못할 젯밥에 지난 10년간 절만 한 꼴이 됐다.
전체 길이가 3백m에 이르는 토왕폭은 상단과 중단, 그리고 하단으로 나뉘어 있다고 이미 얘기한 바 있다.
유기수가 토왕골에 닿았을 때 크로니팀의 박영배는 하단 등반을 3박4일 만에 끝내고 상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단 초등으로 토왕폭에 대해선 나름대로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동국대팀은 '난리 난 해에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선비'처럼 어쩔 줄 몰라하며 박영배의 등반 모습을 허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유기수는 '닭 쫓던 개'처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0년 이상 자신과 에코클럽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온 토왕폭이기 때문이다.
박영배의 등반 방식도 유기수의 성미를 건드렸다. 박영배가 속한 크로니팀은 등반한 곳까지 일정한 높이로 줄을 설치해놓고 내려와 텐트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음날 줄을 타고 올라가서 (유마링) 등반을 계속하는 이른바 포위전술 (시지택틱스.siegtactics)방식을 쓰고 있었다.
유기수에게 포위전술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뜨뜻미지근하게 보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바로 치고 붙는-며칠이 걸리든 벽에서 자며 캠프의 온기(溫氣)를 떨쳐내야 하는-러시택틱스(rushtactics)방식으로 등반해야만 토왕폭을 진정한 자신의 산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게 유기수의 소신이었다.
그렇게 선선히 빙벽으로 나아가다 떨어져 죽더라도, 송준호처럼 사후에나마 토왕폭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유기수의 추월
토왕폭 하단부 왼쪽에 있는 동굴 입구에서 산악인들이 등반 준비를 하고 있다. [손재식 사진작가]
유기수는 토왕폭에 도착한 이튿날인 1977년 1월 9일 화끈한 속공법으로 토왕폭 하단을 7시간 만에 등반했다. 며칠 전 3박4일에 걸쳐 오른 크로니팀이나 전 해의 동국대팀 등반기록(7박8일)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다음 날 유기수는 후배 이봉우와 함께 4시간 만에 하단을 올랐다. 토왕폭 하단은 이제 유기수에겐 연습코스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유기수는 앞에서 오르고 있는 크로니팀에 개의치 않고 곧바로 상단을 등반하겠다고 결심했다.
유기수는 이미 상단의 절반 정도까지 올라가 있는 박영배를 앞지를 자신이 있었다.
비박(야외에서 텐트 없이 자는 것)장비를 지고 하단을 4시간 만에 오른 그는 중단을 거의 뛰듯이 올랐다. 그리고 상단 밑부리의 얼음을 파내고 그곳에 침낭을 폈다. 그 얼음동굴에서 비박한 뒤 동해에 얼굴을 씻은 아침해가 토왕폭 머리 위 함지덕으로 비쳐들기 전에 상단으로 올라갈 작정이었다.
크로니팀은 야간등반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밤이 되면 빙폭에 자일을 고정해두고는 하단 아래쪽에 설치한 베이스캠프로 내려가서 쉬곤 했다.
그런데 이날 밤 박영배의 크로니팀은 베이스로 돌아가지 않고 중단 아래쪽 설사면(雪斜面)에 캠프를 쳤다.
77년 1월 10일 오후 11시 무렵, 토왕폭 상단 밑동 얼음동굴에서 비박하던 에코팀의 유기수는 침낭에서 빠져나와 등반 채비를 했다. 그는 아려오는 오른쪽 무릎을 문지르며 팔뚝에 인슐린을 주사했다. 으스름한 달빛에 더욱 흰빛을 드러낸 토왕폭과 그 위에 드리워진 크로니팀의 고정자일을 바라보며 그는 주사바늘을 팔뚝에 힘껏 찔러 넣었다.
유기수는 헤드랜턴을 켰다. 동시에 중단 설사면에 설치된 크로니팀의 캠프에도 불이 들어왔다. 그들도 자지 않고 에코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기수가 등반을 시작했다. 토왕폭의 가장 밑동의 얼음기둥에 힘껏 피켈을 찍었다. 그리고 4년 전의 송준호처럼 한마리 날쌘 표범이 돼 토왕폭 빙벽을 치고 올랐다.
박영배가 그냥 보고 있을 리 없었다. 박영배의 크로니팀도 텐트에서 곧바로 뛰쳐나와 고정시켜 놓은 줄을 타고 유마링을 시작했다. 유기수가 아무리 날쌔다해도 줄을 타고 오르는 유마링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유마링으로 쑥쑥 올라오는 박영배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를 보고 유기수가 물었다.
"너희는 오늘 따라 왜 밤중에 등반하나?"
"원래 오늘은 야간 등반 예정이었다."
박영배는 그렇게 응수했다.
깨진 토왕폭 협상
동국대 산악부의 김경호.최영식.김종섭씨(사진 왼쪽부터)가 1959년 대청봉 초등에 성공한 후 정상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유창서씨 제공]
토왕폭에 두 팀이 한꺼번에 오르는 것은 조난을 자초하는 일이다. 더구나 한밤에 함께 등반하는 것은 당시 장비로는 한 팀에는 자살행위이며, 동시에 다른 팀에는 살인행위가 될 수 있다. 당시의 피켈과 아이젠.하켄 등은 엄청난 낙빙(落氷)을 일으키는 주범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협상'이라는 말이 나왔다. 유기수와 박영배는 두 팀 모두의 파국을 막기 위해 협상을 택했다. 두 사람은 빙벽에서 내려와 크로니팀 텐트에 모였다.
크로니팀 캠프에서 협상이 시작됐다. 협상의 흐름은 유기수가 제안하고, 박영배가 결정권을 쥔 형국이었다. 한발 앞서 등반에 나선 크로니팀의 대장인 박영배가 협상의 주도권을 가진 것이다.
에코클럽이 지난 10년간 토왕폭에 바친 열정을 내세워 유기수는 '에코팀에서 한명, 크로니팀에서 한명, 그리고 지난해 하단 등반에 성공한 동국대팀에서 한명씩 모두 세명으로 합동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박영배는 텐트 밖으로 나와 크로니팀의 후배 대원들과 상의했다. 얼마 후 텐트로 돌아온 박영배는 크로니팀 모든 대원들의 뜻이라며 합동등반을 거절했다.
박영배는 개인적으로는 발군의 산사나이 유기수와 악수할 수 있어도 크로니팀의 리더로서는 에코팀의 리더와 자일을 함께 묶는 파트너가 될 수 없었다. 크로니팀이 원하지 않았고, 에코팀도 못마땅하게 여긴 때문이었다.
에코팀의 피끓는 젊은이들은 협상이 깨지자 곧바로 하산했다. 1977년 1월 11일 오전 3시. 유기수를 앞세운 에코팀의 토왕폭 사나이들은 저마다 이마에 단 빨간 불빛을 반딧불처럼 흔들며 토왕골을 흐르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고 말았다.
이날 오전 5시쯤 토왕폭 빙폭 상단에 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반딧불이나 도깨비불처럼 보이는 그 불빛은 토왕폭의 이마께로 흔들흔들 올라가고 있었다.
그 불빛의 상승이 무엇을 뜻하는지 동국대팀.부산합동대팀은 물론 하산한 에코팀의 대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토왕폭 사나이들의 가슴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장독대로 떨어지는 첫눈처럼 차곡차곡 쌓였다.
한편 동국대팀은 에코팀처럼 중도에 하산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들은 70년 1월 유창서(현 설악산 권금성산장 관리인)씨가 토왕폭에 첫 도전한 그 의지를 이어받아 6년 만에 하단 초등에 성공했다. 76년 1월 7일신인섭 대장과 이상선.김형태.강승모.김성배.안호근.안규섭.이종량.김용일.이동훈.도창호.오영복 대원은 토왕폭 등반에 나섰다.
'동대 호랑이' 도창호
1976년 1월 14일 토왕폭 하단 등정에 앞서 빙폭에서 포즈를 취한 동국대팀의 도창호씨.
도씨는 7박8일 만에 하단 정상을 밟았다. [동국대산악회 제공]
그들은 토왕폭 하단 얼음동굴로 들어간 뒤 왼쪽의 고드름지대를 가로질러 토왕폭 왼쪽 암벽에 있는 약간 턱진 테라스로 올라갔다. 요즘 '동대 테라스'로 불리는 곳이다. '동국대의 호랑이' 도창호는 이동훈의 지원을 믿고 동대 테라스에서 빠져나와 빙벽 한가운데로 과감히 들어섰다.
그곳에서도 토왕폭 하단의 빙벽은 수직으로 50m 이상 뻗어 있었다. 도창호는 3년 전의 송준호처럼 목숨까지 내건 하얀 얼음기둥에 아이젠의 앞이빨을 힘차게 내질렀다. 그렇게 빙벽 한가운데로 곧장 오른 도창호와 이동훈은 1월 14일 오후 하단 정수리에 올랐다. 하단 등반에만 7박8일이 걸린 긴 투쟁이었다.
토왕폭 하단의 하얀 허리에 첫길을 낼 때 그들은 아침마다 아이젠 밴드를 묶으며 '왜 이 짓을 해야 하는가'하고 회의도 했지만 환상의 얼음기둥에 목숨을 거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왜?'
초등에 성공해 빙벽의 꼭대기에 깃발을 꽂는다 하더라도 그 깃발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용한 정열!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곧바로 전염되는 맹목적인 정열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다. 산사람들의 가슴 속에 가득찬 산을 향한 열정의 에너지는 행위의 동기를 묻는 의구심마저 불태워 버린다. 도창호와 이동훈이 등반을 마무리짓는 날, 서울에서 달려온 이인정(현 한국등산학교장)씨가 두 대원의 등반 자일을 손수 묶어주는 의식을 베풀었다.
그 선배들의 열정을 가슴으로 기억했기에 도창호와 이동훈은 이듬해 상단까지 초등, 진정한 '토왕폭의 사나이'로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런 까닭에 동국대팀은 비록 크로니팀에 선수를 뺏겼다 하더라도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크로니팀의 등반 상황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박영배씨를 대장으로 김태성.남순철.서정학.이건호.송병민.임상섭 대원으로 짜인 크로니산악회의 토왕폭 등반대는 76년 12월 29일 서울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을 출발했다.
크로니팀은 76년 1월 토왕폭 정찰등반 이후 토왕폭만을 생각했다. 그들은 어센트산악회의 김재근씨에게서 얻은 '바르트 혹' 아이스 하켄을 서울 모래내 금강대장간의 김수길씨에게 의뢰해 같은 모형으로 23개, 그보다 조금 작게 변형시킨 소형의 바르트 혹을 10개 제작했다. 77년 첫날부터 토왕폭 하단을 공략한 크로니팀은 76년의 동국대 루트와는 달리 동굴로 들어가지 않고 왼쪽으로 바로 올라 붙는 루트를 택했다.
1월 3일 오후 5시40분 박대장은 송병민 대원과 함께 하단 정상에 올라섰다. 한해 전 동국대팀이 7박8일 걸렸던 하단 등정을 2박3일 만에 끝낸 것이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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