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설악에 살다(2); 크로니팀 대장 박영배~권경업과 배종순

2018. 2. 14. 10:08산 이야기

크로니팀 대장 박영배

 

인수봉을 등반 중인 유동옥씨. 유씨는 안나푸르나 4봉 원정 때 동상을 입어 발가락을 잘랐다. 손재식 사진작가

 

 

 

1977년 1월 5일부터 박영배 대장과 송병민 대원은 비옷과 고무장갑까지 갖추고 토왕폭의 낙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포근한 날씨로 어느 정도 몸이 풀린 상태였다.

이들 공격대원이 떨어뜨린 얼음조각에 뒤에서 지원하던 김태성.이건호 대원의 헬멧이 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낙빙이 토왕폭 사나이들의 등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박대장과 송대원이 토왕폭 상단의 중간 지점에 이른 1월 7~8일 동국대팀과 에코팀, 그리고 부산합동대팀이 초등을 노리고 토왕골로 잇따라 들어왔다. 초등에 가장 강한 의욕을 보였던 유기수씨의 에코팀은 크로니팀에 합동등반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에코팀이 퇴장함에 따라 토왕폭 상단을 독차지하게 된 크로니팀의 박영배 대장은 등반을 속개해 그해 1월 12일 새벽 토왕을 완전히 넘어 첫 '토왕폭의 사나이'로 설악에서 다시 태어났다.

노루목에 누운 여러 고혼들을 위로하며 산세계로 나온 박대장은 등반 12일 만에 토왕폭 상단 정상을 밟았다. 그 사이 박대장은 모두 70여 회에 걸쳐 '바르트 혹' 아이스 하켄을 확보점으로 설치해야만 했다.

1월 12일 크로니팀의 등반 과정을 줄곧 지켜보고 있던 동국대팀은 박대장이 초등에 성공하자 며칠 전의 에코팀처럼 토왕골을 등졌다. 동국대팀에 토왕폭은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달아나버린 약혼녀에 다름없었다.

하단 초등으로 동국대팀은 처녀 토왕폭과 약혼한 사이가 됐었다. 그 약혼녀가 백년가약을 저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린 꼴이 된 것이다. 배신한 여자에게서 바로 등을 돌린 동국대팀의 하산은 설악을 사랑하는 산사나이들의 지순하고 투박한 애정표현의 하나였다.

부산합동대는 다른 팀이 없는 상태에서 1월 13일부터 토왕폭 등반에 들어갔다. 그들에게 토왕폭은 '돌아온 첫사랑의 여인'과 같았다. 운명의 장난으로 첫 인연을 맺은 남자에게서 버림받고 다시 돌아온 토왕폭이라는 첫사랑에 그들은 알피니즘의 동정을 내걸었다. 초등자에게 순결을 바쳤건 아니건, 그런 일에 개의치 않고 토왕폭에 도전한 부산 산사나이들의 등반도 설악을 사랑하는 산악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76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토왕폭의 사나이들에게 '바르트 혹'이라는 절묘한 장비를 알려준 어센트산악회의 김재근씨 집에 간 적이 있다.

나의 오랜 산친구인 대구 팔공산악회의 성익환(현 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씨는 한국산악회가 꾸린 히말라야 마칼루원정대의 학술대원으로 선발됐다. 그가 김재근씨에게서 도움 받을 일이 있어 김씨의 집을 함께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등산 장비가 너절하게 깔린 김재근씨의 방에 얼어붙은 폭포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I want the first ascender(내가 초등자가 되리라)'라는 영문이 씌어 있는 그 사진 밑에서 묵묵히 등반 장비를 추리고 있던 그에게서 묘한 감동을 받은 기억이 새롭다. 김씨가 처음 오르고자 했던 사진 속 폭포는 바로 설악의 토왕폭이었다.

김재근씨가 소속된 어센트산악회는 크로니산악회와 함께 78년 안나푸르나 4봉을 원정했다. 그때 등정에 성공한 크로니산악회의 유동옥씨가 동상에 걸려 한강성심병원에서 발가락 절단 수술을 받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 기사는 유씨를 전혀 몰랐던 나를 병원으로 찾아가게 만들었다. 문안이나 위로의 뜻으로 찾아간 게 아니라 발가락을 잃어가며 꿈을 이룬 유씨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였다. 병상 머리에서 나는 유씨의 친구인 한 산사나이와 악수를 하게 됐다.

그때 서로 손아귀에 쥐었던 힘의 여운이 아직도 뻐근하다. 내가 손아귀에 그토록 힘을 준 이유는 그가 77년 1월 토왕폭의 상.하단을 초등한 박영배씨였기 때문이다. 토왕폭 초등자라는 사실 하나로 그는 나의 온몸을 뜨겁게 달궜다. 이후 박영배씨와는 가끔 북한산 인수봉이나 도봉산 선인봉에서 만나 함께 암벽 등반을 하며 가까워졌다.

 

 


 

토왕폭 초등 보고서

 

크로니산악회원들이 인수봉 대슬랩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둘째가 유동옥씨, 세째가 박영배씨, 다섯째가 남순철씨. [손재식 사진작가]

 

 

그러던 1980년 어느 날 박영배씨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긴밀히 만나자던 말과는 달리 여러 명의 산꾼들이 모여 있었다.

허욱(악우회).이찬영(보우회).허정식(은벽산악회).민병국(어센트).고윤석(중대산악회)씨 등 면면이 소속 산악회를 대표할 정도로 유명한 산꾼들이었다.

이들은 알프스 3대 북벽의 하나인 아이거 북벽을 겨울에 오르겠다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동지를 모으는 중이었다. 등반대장으로 내정된 박영배씨가 나를 등반대원으로 추천하는 바람에 나도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박영배씨의 아이거 북벽 겨울등반 동참 제안을 가까이 지내는 연세산악회의 한 후배에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아이거 북벽에서 박영배씨와 자일을 함께 묶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후배가 반대하는 이유는 토왕폭 초등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나는 환상의 얼음기둥 초등자인 박영배씨에 대해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져있음을 알게 됐다.

사상 첫 '토왕폭의 사나이'인 박영배.송병민씨가 속한 크로니산악회는 월간 '산' 77년 3월호에 토왕폭 초등 관련 등반보고서를 실었다.

'…이런 고도에서 헤드랜턴에 의지해 아이젠의 앞이빨을 빙벽에 박는 프런트 포인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영배 대장은 10여m를 프런트 포인팅한 후 드디어 12일(11일의 오기:필자註) 오후 6시30분 (실제로는 자정 무렵:필자註) 정상에 도달했다. 밑에서 확보를 보고 있던 송병민 대원은 박영배 대장과 의사소통하려고 큰 소리를 질렀지만 얼음벽에 가로막혀 잘 들리지 않았다. … 송대원은 한 지점에서 몇 시간이나 확보를 보았기 때문에 온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정상에 올라선 것은 12일 오전 2시쯤이었다'.

후배는 이 보고서의 내용이 실제와 상당히 차이가 난다며 박영배씨와 나의 아이거 북벽 동행을 반대했던 것이다.

토왕폭 정상에 먼저 오른 박영배씨가 밑에 있는 송병민씨의 확보를 봐주지도 못하고 정상 부근 설사면에 쓰러졌다는 게 후배의 얘기였다. 그 바람에 송병민씨는 확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토왕폭 상단을 올라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동국대팀.부산합동대팀의 산사나이들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산악계에는 웬만큼 알려진 진실이라고 후배는 덧붙였다.

그 후 서울 무교동의 어느 술자리에서 박영배씨에게 물었다.

"영배형! 형의 토왕폭 초등에 대해 말들이 많아요. 그때의 진실을 얘기해 주시오."

박영배씨는 즉석에서 토왕폭 초등에 얽힌 고해성사를 했다.


 

 

송병민의 탈출

 

1987년 4월 산서회 회원들이 도봉산 만장봉 초등 재현등반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허욱.허창성.신승모.이용대.허정식.이찬영씨.[손재식 사진작가]

 

 

'등반 시작 14일 만에 박영배씨가 토왕폭의 상단에 올라섰을 때, 이미 주위는 어두웠다. 밑에 있던 송병민 대원이 자일을 내려 달라고 해 그는 몸에 묶은 자일을 풀다가 얼어붙은 장갑에 미끌어진 자일을 그만 놓쳐 버렸다. 그 바람에 송대원은 홀로 고립되고 말았다. 박대장은 중단 설사면에 설치된 캠프 쪽으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절규는 세찬 바람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렸다. 이제 후배를 살리는 길은 우측 계곡으로 내려가 빨리 자일을 갖고 오는 것이었다. 험한 토왕폭 우측 계곡을 박대장은 자일도 없이 짐승처럼 기어 내려갔다. 하지만 도중에 길을 잃어 밤새 눈 골짜기를 헤매다 탈진해 텐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편 박영배 대장이 끌고 올라간 자일이 허망하게도 위쪽에서 흘러내리는 바람에 천길 낭떠러지 얼음 벼랑에 고립된 송대원은 한동안 얼이 빠져 매달려 있었다. 자일을 달라고 계속 고함을 질러보았으나 헛일이었다. 온통 물에 젖은 몸이 점점 굳어져 갔다. 송대원은 얼어죽느니 차라리 떨어져 죽겠다는 결심으로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송대원은 갖고 있던 예비 자일을 사용해 박대장이 촘촘히 박아둔 바르트 혹 하켄에 확보줄을 거는 인공등반을 강행,다음날 새벽 기적적으로 서릿발 선 토왕폭 정상에 무사히 올라섰다.'

진실은 가슴이 먼저 알아보는 법이다. 내 가슴은 어느새 고백을 마친 박영배씨를 끌어안고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아이거 겨울 원정을 함께 추진하게 됐다.

한편 부산합동대의 권경업 대원은 아이스 해머 하나만으로 토왕폭의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당초 나무 피켈과 해머를 들고 토왕폭에 붙었으나 동대테라스에서 얼마 나아가지 못한 곳에서 피켈이 부러져 버렸다.

권대원은 개구리같이 옴츠렸다 뛰는 듯 몸을 펴서는 두손으로 모아 잡은 해머를 번개처럼 위쪽 빙벽에 거듭 찍었다. 그토록 아슬아슬하게 오르는 당사자보다 지켜보는 동료들이 손에 땀을 쥐어야 했다. 토왕폭도 등줄에 땀같은 물을 흘리고 있었다. 토왕폭을 개구리 타법으로 40m 가까이 침착하게 오른 그는 1977년 1월 14일 오후 하단을 마무리 지었다.

상단으로 들어선 이들은 김문식.권경업 대원을 투입해 얼마간의 고도를 올렸으나 등반 방식의 문제로 2~3일을 허송한 후 마지막 공격조로 김원겸.김문식 대원을 선발했다.

1월 25일 오전 8시10분쯤 두 대원은 동료 대원들의 뜨거운 격려 속에 상단의 출발점을 떠나 오후 늦게 상단 빙벽 위에 올라섰다.

이로써 두번째 토왕폭 등반은 깨끗하게 이뤄졌다. 하단에서 1박2일, 그리고 상단에서 4박5일이 걸린 부산합동대의 토왕폭 등반이었다.

 

 

'젊음의 용광로'

 

토왕폭을 등정한 부산합동대의 권경업씨.

 

 

토왕폭 상단을 마무리한 김원겸.김문식 대원은 마지막 테라스에서 크로니산악회의 박영배.송병민조가 미처 거두지 못한 자일이 하켄에 카라비너로 연결된 채 얼음 속 깊숙이 정상까지 파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불과 13일 전 토왕폭이 크로니팀의 '토왕폭 사나이'들에게 순결을 내주며 입었던 상흔 같기도 하고, 짝사랑하던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른 친구에게 던져준 부케같기도 했다.

토왕폭 제2등의 주역 중 한명인 권경업씨의 부산집에서 얼마간 묵은 적이 있다.

그가 히말라야 파빌봉 원정에 등반대장으로 갔다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즈음이니 1983년 초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방구석에 산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표구한 모양새라든가 걸려 있는 품새가 주인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물건임을 한눈에 짐직케 했다. 히말라야 등반 때의 사진이려니 하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토왕폭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아래쪽에 '토왕폭을 완등하고'라고 적혀 있었다.

토왕폭을 배경 삼아 자신의 얼굴을 크게 잡은 이런 사진은 산꾼들 집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대하자마자 나는 권경업씨가 왜 그 토왕폭 사진을 히말라야 원정사진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가를 알게 됐다. 그로부터 6년 전의 사진이긴 하지만 당시의 그를 보고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그 사진 속의 얼굴은 광채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젊음의 얼굴이었다. 그가 목숨까지 걸었던 토왕폭에서의 젊음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에 대해서는 시들하던 그에게 토왕폭 얘기를 건네자 눈빛과 얼굴빛이 사진에서 처럼 번쩍하는 빛을 발했다.

"정말이지, 그때는 너무도 젊었습니다."

토왕폭을 얘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김수영의 시 '폭포'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곧은 소리를 냈다.

"나를 키운 8할은 산이다. 그리고 나의 산을 키운 8할은 배종순형이다."

이것은 '나를 키운 8할은 바람이다'라던 미당 서정주의 유명한 금언을 패러디한 권경업씨의 금과옥조다.

77년 1월 토왕폭 제2등의 자일 파트너였던 배종순씨를 권씨는 이토록 섬기고 또 따랐다.

권씨가 히말라야 원정에서 돌아온 후 오랜 백수 생활을 접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을 때였다. 그가 부산 시외버스터미널에 분식집을 차리고는 개업식에 나를 불렀다.

"사람은 머리로 말하고 우동은 국물로 말한다."

"30년 전통의 한솔 우동으로 속을 푸세요."

그런 광고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내건 '한솔우동'집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권씨에게 "지금 개업하면서 30년 전통을 내세운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야, 이기 다 종순이형한테서 배운거 아이가. 그 형이 산에 데불고 다니며 우동 국물 빼는 거서부터 머리로 말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갈 알켜준기라."

 

 

 

'권경업과 배종순'

 

부산합동대 베이스캠프였던 군용텐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권경업.김문식.강창호.배종순.이종양, 이정희씨.(왼쪽부터) [권경업씨 제공]

 

 

그는 오랫동안 말도 안되는 짓을 일삼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그의 사형(師兄) 배종순씨가 그런 행동의 원조였다.

대구 팔공산악회의 오상균씨가 언젠가 '별 해괴한 친구'를 산에서 만났다며 혀를 껄껄 찬 적이 있다.

"부산 산악인들과 대구 팔공산에서 합동산행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부산에서 온 어떤 산꾼이 모닥불 곁에서 반바지에 반팔 옷차림으로 밤늦도록 앉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정말 추위에 강한 체질인가보다 하고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가까이 가봤어요. 그러나 웬걸. 얼굴이 청동빛으로 얼어 붙은 데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물어봤죠. 안 춥냐고요. 그랬더니 이 양반 대답이 걸작이더라고요."

"보면 모르냐. 이렇게 떨고 있는 걸."

"그럼 옷이 없는 모양이군요. 빌려줄까요."

"옷은 나도 많구마."

"그런데 왜 이런 겨울산에서 반바지만 입고 떨고 있나요."

"귀찮게시리 자꾸 물어보네. 이건 어떤 산선배의 가르침을 따르는거구마. 그 선배 말이 토왕폭을 오르거나 알프스의 아이거북벽을 등반할라카마 이 정도 추위는 알몸으로 견뎌내야 한다고 했구마는. 지금 나는 토왕폭과 아이거북벽 등반 훈련 중인기라."

그 다음날 오상균씨는 부산에서 온 이 괴짜와 함께 팔공산 병풍암을 등반했다. 꽤 까다로운 코스를 오르는데, 그 괴짜는 여전히 반바지차림으로 손에는 속칭 고구마장갑이라는 면장갑을 두 개씩이나 끼고 있어 바위틈 사이를 제대로 잡지 못해 쩔쩔 맸다.

전날 밤처럼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오씨는 "장갑을 벗고 오르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참, 또 귀찮게 하는구마. 내가 지금 팔공산 병풍암을 오르고 있는 줄 아능교. 천만에! 나는 지금 아이거북벽에 붙어있는기라. 그런 곳에서 맨손으로 등반하다가는 손가락 모두 동상 걸려 잘려버릴 꺼구마는. 이런 지혜 모두들 그 위대한 산선배한테서 배웠구마는."

오씨가 팔공산에서 만났다는 그 부산 괴짜가 권경업씨였으며, 그에게 그런 산행법을 가르쳐준 이가 바로 권씨의 토왕폭 자일 파트너였던 배종순씨였다.

토왕폭 제2등에 성공한 부산 엑셀시오산악회의 배종순씨가 1986년 어느 봄날 서울로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배씨는 토왕폭 등반 때의 또 다른 자일 파트너였던 김원겸씨와 아이거북벽 겨울 원정에 나설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82년과 83년 이태에 걸쳐 두 번의 알프스 등반 경험이 있는 내게 알프스 현지 사정에 대해 자문하고 싶었던 것이다.

광화문의 어느 술집에서 우리는 알프스는 건성으로 건너 뛰어넘고 토왕폭 얘기를 안주삼아 강소주를 마구 들이켰다. 배종순씨는 77년 1월 토왕폭을 두 번째로 오를 때 소토왕골에서 훈련 산행을 가진 뒤 비룡폭포 위에 설치한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다가 토왕폭 쪽에서 들려왔다는 어떤 비명 소리에 대한 궁금증을 털어놨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출처 : 우.리.들.산
글쓴이 : 오로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