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설악에 살다(4); 대표 산쟁이 윤대표~돌아온 사나이들

2018. 2. 14. 10:11산 이야기

 '대표 산쟁이' 윤대표

 

이진우(左).신성삼씨가 캠프에서 토왕성 빙폭을 등반하고 있는 윤대표.

손칠규씨를 지켜보고 있다. [백승기씨 제공]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설악의 토왕골로 달려간 손칠규씨는 1978년 2월 2일 악우회의 토왕폭 등반대와 합류했다.

신성삼.임근성.백승기.이진섭.이진우 대원의 지원을 받은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은 대구 왕골산악회의 손칠규 대원과 자일을 함께 묶고 다음날 오전 11시30분 토왕폭 하단에 붙었다.

하단의 동굴을 거치지 않는 왼쪽 루트를 통해 먼저 오르기 시작한 윤대장은 오후 1시 무렵 동대테라스에 올라섰다. 그는 77년 2월 악우회 후배인 유한규 대원과 토왕폭에 도전했을 때 동대테라스에서 심한 낙수(落水)를 만나 돌아서고 말았었다.

그때 유대원은 발톱을 여섯개나 뽑아야 하는 심한 동상에 걸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줄기가 동대테라스의 오른쪽으로 트여 다행히 등반루트에는 낙수가 심하지 않았다.

 

뒤따라 오르던 손대원은 오후 4시쯤 하단에 완전히 올아섰다. 4시간30분 만에 하단 등반을 끝냈다.

2월 4일 오전 11시40분. 윤대표 대장과 손칠규 대원은 상단 등반에 들어갔다.

토왕폭 상단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이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윤대표씨라면 대표라는 이름 그대로 국가 대표급 산악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이라도 따게 되면 낳고 이름 지어준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릴 수 있는 인기 스포츠 종목의 '대표'가 아니라, 도대체 밥이 나오길하나 돈이 되길하나 부른 배마저 쉽게 꺼져버리고 마는 그놈의 산에 미쳐버린 '등산대표'가 되고 말았을까.

아버지의 이 같은 탄식은 아들의 이름을 '대표'로 지은 자업자득인지도 모른다. 윤대표의 아버지 윤선씨는 윤대표라는 이름을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윤선씨가 알고 있는 윤대표라는 이름은 자랑스러운 대표적인 대장부였다. 아버지는 그런 대표적인 장부가 되라는 마음에서 아들의 이름을 대표라고 지었다. 아버지가 바랐던 '장부대표'와 지금의 산대표가 된 윤대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윤대표는 체격은 작은 편이나 '겁없는 산사나이'라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외모를 지녔다. 한눈에 야무진 외골수임을 느끼게 한다. 검고 반듯한 얼굴을 가로지르는 짙은 눈썹은 당겨진 활시위에 놓인 화살 같은 긴장감을 준다.

윤대표는 산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결벽증을 가진 '윤대표의 산'이다. 그에게는 오직 산만 산이다. 삶의 다른 국면을 산으로 대체하는 산쟁이들이 있지만 윤대표는 그마저 거부한다. 술도 담배도 모른다. 그에게 술과 담배는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수도 적다. 말도 그에게는 산이 아니다. 입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얄미울 수 없단다. 파트너란 어떤 벽을 겨누고 뜻을 같이 했을 때 함께 오르는 동료에 지나지 않는다.

친구도 산이 아닌 것이다. 그런 친구를 따라 가는 곳은 강남일 뿐, 산이 아니다.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자일을 함께 묶을 수 있고, 그만한 파트너가 없을 때는 혼자 오른다.

그런 윤대표씨를 산에 입문시킨 사람은 친형인 윤인표씨다. 대학에서 산악부원으로 활동하던 형은 70년 고교를 막 졸업한 동생을 데리고 서울 도봉산 선인봉의 남쪽 코스를 올랐다. '형제 산행'은 그후 3년간 계속됐다.

 

 

'시리우스' 윤대표

 

아이거 베이스캠프에서 베타호른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한 허욱.조윤희.윤대표씨(왼쪽부터).

[허욱씨 제공]

 

 

형과 자일을 묶고 지냈던 1973년 무렵 윤대표씨는 신문에 실린 회원모집 광고를 보고 엠포르산악회에 가입했다. 엠포르산악회에서 최고의 공격수로 떠오른 그는 어느 날 서울 합정동 로터리를 지나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스위스제 헹케 비브람(겨울용 중등산화)을 신고 있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다.

윤씨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비브람의 주인이 악우회 회원 백승기씨였다. 그 인연으로 윤씨는 1976년 10월 악우회에 몸담게 됐다.

악우회 회원들과 77년 도봉산 선인봉의 모든 코스를 연결해 오르는 연장등반에 성공했고, 이듬해에는 설악산 선녀봉을 초등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손칠규씨와 자일을 함께 묶고 토왕폭 제3등에 도전한 것이다.

무예의 고수처럼 세 자루의 아이스 해머를 적절히 휘두른 윤씨는 78년 2월 4일 오후 4시쯤 토왕폭 상단 3분의 2 지점에 자리잡은 테라스에 올라섰다. 뒤이어 손칠규씨는 5시15분쯤 테라스에 닿았다.

 

그 테라스 위쪽의 이른바 '얼음 골짜기'에서 윤씨는 토왕폭 등반의 최대 고비를 맞았다. 얼음 골짜기는 암벽 위를 살얼음으로 살짝 도배해 놓은 듯했다. 그 얼음층이 너무 얇아 아이젠과 아이스 해머의 이빨을 제대로 물어주지 못했다. 그 골짜기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윤씨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피로와 허기로 지쳐가는 몸으로 사지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 치는 토왕폭의 사나이를 두고 해는 함지덕 머리 위로 훌쩍 넘어가 버렸다. 동시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두 손의 감각과 의식을 잃어가던 윤씨는 푸석푸석한 얼음에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순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위기 상황임을 몸에 일깨워주려고 윤대장은 자신의 손가락을 마구 깨물었다.

자꾸만 허물어져 내리는 도배 빙벽이어서 아이젠의 앞이빨을 박는 프런트 포인팅 기술이 통하지 않았다. 때문에 윤씨는 킥 스텝으로 억지 발디딤을 만들거나 양 무릎을 얼음벽에 바싹 붙이며 어둠 속의 얼음 골짜기를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야 했다.

오후 7시40분, 그렇게 사투를 벌여 얼음 골짜기를 무사히 빠져나온 윤씨는 뒤따라 올라온 손씨를 정상에서 뜨겁게 껴안았다. 1박2일에 걸쳐 12시간30분 만에 이룬 토왕폭 빙벽 제3등이었다.

이 등반에서 토왕폭 빙벽 3백m 구간을 앞장서 오른 윤씨는 1년 뒤인 79년과 80년 두차례에 걸쳐 당시 한국산악계 최대 과제였던 알프스 3대 북벽(아이거 북벽.마터호른 북벽.그랑드 조라스 북벽)을 한국 산악인으로는 처음으로 등정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 위업의 자일 파트너였던 허욱씨와 연계시켜 윤씨가 산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나는 겨울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시리우스라는 별에 비유한 적이 있다.

 

 

70~80년대 두 별

 

보우회 회원들이 1971년 여름 울산암 중앙벽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오른쪽 앉아 있는 사람부터 시계방향으로 홍석하.김진교.정종욱.최효중.이강오씨.

[홍석하씨 제공]

 

 

큰개자리의 으뜸 별인 시리우스는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력을 탄생시킨 기준 항성이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아킬레스같이 넓은 가슴을 지닌 청년들을 징집할 때 그들의 시력을 측정하는 별로 유명해졌다.

윤대표씨와 허욱씨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한국 산쟁이를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별로 떠오르게 했다는 점에서 찬란한 시리우스다.

그리고 세계적 클라이머의 모암(母巖)인 알프스 3대 북벽을 함께 오름으로써 한국 산꾼의 클라이밍 기량을 클라이머 수준을 평가하는 국제적인 잣대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분명 태양력의 기준이 된 시리우스다.

밝은 눈의 그리스 청년은 시리우스가 두 개의 별임을 볼 수 있었다. 시리우스가 연성(連星)인 까닭이다. 시리우스는 하나의 별에 또 다른 별이 끼고 돌아 더욱 빛나는 두 개의 별이다.

윤대표라는 별을 허욱이라는 별이, 또 허욱이라는 별의 둘레를 윤대표라는 별이 알피니즘을 축(軸)으로 삼아 설악과 알프스에서 미친 듯 돌아갈 때, 두 별은 시리우스처럼 하나의 별로 한국 산악계에 찬연히 빛났다.

두 별 사이에 구심력과 그 반대 방향의 원심력이 팽팽히 맞설 때만 연성 현상이 나타난다. 그 당기는 힘과 미는 힘만큼이나 윤씨와 허씨의 개성은 판이했지만 서로의 힘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연성으로 공전하면서 공존할 수 있었다.

도시락 싸들고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 모두에게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반찬이 여러 가지 있을 때 어떤 것부터 먹느냐?"

순서없이 젓가락 놀리는 사람도 있지만 고집있는 친구는 도시락 비우는데도 나름대로 순서를 갖고 있다.

"그야 맛있는 것부터 먹지요."

허욱씨가 선뜻 답했다.

"…맛없는 것부터…."

윤대표씨의 조심스러운 대답이었다.

'까오기'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허씨는 여러 면에서 파트너 윤씨와 대조적이다.

윤씨 앞에서는 괜히 주눅들던 산악인들도 허씨를 만나면 봄바람에 녹는 눈처럼 부드러워진다.

허씨는 덩치가 큰 편인 데다 '완력등반의 1인자'라는 소문에 어울리는 체력을 가졌지만 얼굴 생김새는 그렇지 않다. 순한 느낌을 주는 이목구비가 검고 굵은 안경테 위로 부드럽게 그려지는 게 허씨의 초상이다.

윤씨가 고주파의 강렬한 성격을 지닌 데 비해 익살스러운 떠버리 허씨는 큰 진폭의 인간성을 지녔다. 설악을 좋아하기는 윤씨 못지않아, 설악의 여러 암릉과 암벽에는 초등자로서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허씨는 대학 입학 후 보우회(보성고 산악부 OB회)의 홍석하(현 월간 '사람과 산' 발행인).최효중.이강오 선배들과 함께 설악의 여러 암벽을 누비며 보우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72년에는 설악의 곰길을 초등했고 73년에는 설악의 공룡능선을 암릉릿지로 개척 등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설악의 울산암에 여러 개의 등산로를 열기도 했다.

 

 

아이거 북벽 등반

 

윤대표씨와 허욱씨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알프스의 아이거 정상을 밟았다.

사진은 아이거 정상의 허씨 모습.

 

 

 

허욱씨는 결코 계산하지 않는다.

먹을 게 있으면 맛있는 것부터 먹고, 술이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신다. 히말라야의 8천m급 거봉인 마칼루 원정 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 말썽을 일으킨 적도 있다.

바둑이나 음악감상 등 조용한 취미를 가진 윤대표씨에 비해 그는 스쿠버다이빙이나 윈드서핑 같은 모험 레포츠를 즐긴다.

1979년 아이거 북벽 등반 때 다른 대원들은 가부좌를 한 선승같은 자세로 좋은 날씨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도 그린델발트로 내려가 동네 술꾼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놀았다.

 

허씨는 큰 등반을 끝내고 돌아오면 석달간은 술을 퍼마시는 기간으로 정해놓았다. 다리 부러진 강아지처럼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석달 정도 매일 술을 마셔대야 고산증세로 이상해졌던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언제나 산만 생각하며 훈련하는 친구들과 술 마신 몸으로 등반해도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것이 신기해 가끔 누군가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어지기도 한단다.

그는 위축감을 주는 산은 가능하면 생각하지 않는다. 떠올리면 괜히 불편해지기 때문에 떠나기 얼마 전쯤, 어쩔 수 없을 때에야 가야 할 산을 떠올린다. 등반할 산의 사진들을 방에 붙여 놓고 루트의 구석구석까지 머리에 입력시켜두는 윤씨와는 이토록 다르다.

허씨는 실제로 벽에 붙을 때까지는 산을 잊으려고 애쓴다. 걱정한다고 구름이 벗겨지거나 오던 비가 멈출 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벽에서는 되도록 즐거운 일만 생각한다. 전쟁터에서도 그렇다는데, 그럴 때는 역시 여자를 생각하는 게 가장 즐겁단다.

윤씨와 '오월동주'식으로 함께 오른 아이거 북벽에서의 일이다.

오나라의 맹장 허욱이 월나라의 용장 윤대표에게 물었다. '죽음의 벽'이라는 아이거 북벽의 제2 설전에서다.

"애인 있어?"

전쟁터 같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북벽의 사지에서, 더욱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애인'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오나라 장수가 사뭇 인간적인 목소리로 분위기를 풀려고 했던 것이다.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월나라 장수도 인간인 이상, 이런 상황에서는 애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만약 애인이 없더라도 애인 비슷한 울림을 주는 인간적인 말로 응수해 올 것이라고 오나라 장수는 기대하고 있었다.

"없어!"

월나라 대표장수의 대답은 뜻밖에 너무도 간단했다. 그 짧은 답에 흠칫 놀란 나머지 오나라의 허장수는 적의 기습으로부터 공주를 보호하려는 호위대장처럼 인간적으로 풀어놓았던 분위기를 곧바로 수습하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서로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그저 자벌레의 머리와 꼬리처럼 헤어졌다 만날 때마다 대화를 하는 대신, 거둬들인 카라비너와 하켄 등을 전해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이뤄진 허씨와 윤씨의 아이거 북벽 등반이었다.

 

 

돌아온 사나이들

 

1970년대엔 겨울 빙벽등반 장비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사진은 부산합동대의 권경업(左).이정호씨가 스케이트날을 갈 듯 휴대용 브라인더로 아이젠을 갈고 있는 모습

 

 

서울고 산악부 OB회인 마운틴빌라의 장경덕 대장과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은 돌아온 토왕폭 사나이들이다.

1978년 토왕폭을 며칠 앞뒤로 등반했던 두 리더는 79년 2월 각자 등반대를 이끌고 다시 토왕골로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1년 전처럼 등반시기가 겹쳤다.

마운틴빌라는 78년 1월 토왕폭 도전 때 최영규.김기환 대원을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았던 토왕폭 빙벽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이번에는 우측 벽을 노리고 다시 토왕골로 들어온 것이다. 당시 최.김 대원은 토왕폭 상단의 정상을 불과 7m 가량 남겨두고 후퇴했었다.

장경덕 대장은 79년 2월 3일 김상택.김상규.이지원.송원기.이해관.신용민.김명선 대원과 함께 서울 동마장터미널에서 속초행 버스에 올랐다. 10년 만의 폭설로 설악동에는 어른 키가 잠길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다. 주민들은 1백80cm는 쌓였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토왕골로 들어서니 그들이 오르려는 토왕폭 우측 벽에는 뜻밖에 개미처럼 보이는 산꾼들이 붙어 있었다.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이 백승기.유한규 대원과 함께 78년에 이어 다시 빌라팀의 목표인 토왕폭 우측 벽을 등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악우회의 세 명장은 우측 벽 하단의 정상을 40여m 앞두고 맹렬한 기세로 오르고 있었다. 장대장이 보기에 악우회팀은 4~5일 전에 등반을 시작한 것 같았다.

토왕폭의 빙벽과는 달리 암벽인 우측 벽은 팀 간에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다면 여러 팀이 동시에 붙을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장대장은 앞에서 오르고 있는 악우회팀에 개의치 않고 등반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장대장이 택한 루트는 토왕성 빙벽과 악우회팀이 등반하고 있는 코스 사이의 중간 위치에서 하늘을 향해 곧장 뻗어 있었다. 마침 토왕폭에는 서울의 서강대 산악부팀도 등반 중이었다.

그래서 세팀의 토왕폭 사나이들은 자신들이 오르고 있는 얼음과 눈과 바위만으로 이뤄진 수직세계를 알프스의 북벽이라고 생각하며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빌라팀은 2월 5일부터 본 등반에 들어갔다. 빌라팀이 자랑하는 톱장이 김성택 대원이 송원기 대원을 데리고 이날 50여m까지 올랐다. 그날 두 대원은 70여m 아래쪽에 설치된 베이스캠프로 내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비박(야외에서 텐트 없이 잠자는 것)했다.

이들이 밤을 보내기로 한 곳은 엉덩이도 편안하게 붙일 바위턱 하나 튀어나와 있지 않은 바위 절벽의 한 가운데였다. 30분 정도만 내려가면 따뜻한 텐트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이거 북벽과 같은 해외 거벽 원정을 위한 훈련으로 비박을 택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낭만을 선택한 것이다.

선배인 김대원은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는 25세의 예비의사이고, 송대원은 22세의 대학 3년생이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출처 : 우.리.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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