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4세기초 유목민 투르크종족이 아나톨리아반도를 접수했을 때

2018. 2. 16. 16:17우리 이웃의 역사

 

14세기초 유목민 투르크종족이 아나톨리아반도를 접수했을 때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중앙아시아 초원에서: 투르크멘의 탄생, 세계사적 대변혁의 주인공 토구즈 오구즈(九姓 오구즈)

 

오구즈에게는6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이름은 쿤, 아이, 율두즈, 쿡, 탁, 딩기즈. 각각 日, 月, 星, 天, 山, 海의 뜻을 갖는 투르크어다. 오구즈는 이들과 함께 이란, 투란, 시리아, 이집트, 룸, 프랑코 및 다른 모든 지방을 정복했다. 모든 곳을 정복한 뒤 그는 자신의 목지가 있는 우르탁과 쿠르탁으로 돌아갔다.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

 

▲ 이시크 쿠르간 출토 황금 유물



“꿈결에 치자꽃 향기 코끝을 스치더라 / 깨어보니 베개머리 검은 머리카락 서늘해라 / 간밤에 사립문 닫는 것도 잊고 잠들었던가 / 산봉우리 사이로 지는 달빛 침상 위에 어리네.”―黃景仁(1749~1783년. 청나라 시인)의「醉醒」에서

오구즈(Oghuz)라고 적지만, Oguz, 경우에 따라서는 語初 모음이 탈락된 형태 Ghuzz로도 轉寫되는 부족 명칭이 있다. 러시아(Russia)라는 말의 바탕이 된 루스족(Rus)을 Urus로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대한제국 시기 우리나라에서도 러시아를 露西亞, 俄羅斯 등으로 異表記했다. 어쨌든 오구즈 이들은 또한 투르크멘(Turkmen)으로도 알려져 있다. 과연 이들의 정체는? 우선 돌궐족이다. 서부지역의 돌궐을 그렇게들 불렀다. Oghuz라는 명칭은 ‘tribe(부족, 종족)’를 가리키는 투르크어다.


이들 오구즈 부족 연맹이 먼저 살던 오늘날의 알마티 주에 속하는 제티수(Jeti-su) 지역에서 서쪽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24개 지파로 구성된 연맹체 내에서 위구르족, 카를룩족(Karluk, ‘눈의 사람’이라는 뜻)과의 분쟁에서 나머지 집단이 밀린 탓이다. 앞선 글에서 지도와 함께 살펴봤지만, ‘일곱 개의 강’이라는 의미의 제티수는 Jeti-su 외에 Zhetisu, Jetisuw, Jetysu, Jity-su, Жетысу, Джетысу, Zhetysu 등으로 전사된다. 러시아어로는 세미레치예(Semirechye) 등으로 표기된다.


셀주크 투르크를 이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창건한 주인공이 바로 오구즈 야브구국의 후손들이다. 이들 오구즈 투르크(Oghuz Turks)의 후예들은 오늘날 터키,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가가우지아(Gagauzia) 등의 주민이 돼 살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가가우지아는 몰도바 남부 부자크(Budjak or Budzhak)의 자치구로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몰도바 남쪽, 흑해 연안 다뉴브 강과 드니스테르(the Dniester) 강 사이 지역에 위치한 부자크는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주의 일부이다. 부자크라는 이름은 터키어 ‘부자크(Bucak)’에서 유래했는데, ‘구석’ 또는 ‘변방’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령이었을 때 현재의 지명으로 불리게 됐으며, 1차 세계 대전 이후 베사라비아(Bessarabia)의 일부로 루마니아 왕국에 편입됐다. 후일 소비에트 연방을 거쳐 현재는 우크라이나 령에 속한다.


라시드 앗 딘이 지은 『부족지』가 전하는 오구즈족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현재) 세상에 있는 모든 투르크만 사람들은 전술한 이 종족의 후손이고 오구즈의 24개 지파의 자손이다. 투르크만이라는 이름은 옛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투르크인의 외모를 지닌 유목민 종족 모두를 ‘일반 투르크(Turk-i mutlaq)’라 칭했고, 각 족속에게는 특별한 명칭이 정해져 있었다. 오구즈의 종족들이 자기 고장을 떠나 河中地方과 이란 땅으로 와 그 지방에서 출산하고 번식하게 되자, 물과 공기의 영향으로 그들의 외모가 점차 타직(Tazhik)인과 비슷하게 변해 갔다. (그러나 그들은) 온전한 (의미의) 타직이 아니였기 때문에 타직 종족들은 그들을 ‘투르크만’, 즉 ‘투르크와 비슷한 (사람)’이라 부른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 이름은 오구즈 종족의 지파들 전부에 대해서 적용됐고, 그것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투르크족의 일파인 투르크만(Turkmen어로는 Türkmen, 복수형은 Türkmenler) 즉 오구즈인은 앞서 말했듯 현재는 주로 중앙아시아 지역인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북부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제르바이잔을 위시한 코카서스 북부(스타프로폴 크라이(Stavropol Krai)) 등지에 산재해 있다.


역사적으로 투르크만 혹은 투르크멘 즉 모든 오구즈 투르크인들 중 특히 T¨urkmen이나 Turkoman으로 불리는 집단이 있다. 전자는 투르크메니스탄 및 인접한 중앙아시아 지역의 투르크멘인들(Turkmen), 후자는 이라크와 시리아 거주 투르크멘 사람들(Turkomans)이 그들이다.


투르크멘에 대해 다른 식으로 설명해보자. 원래는 투르크 제국의 지배집단이 아니던 모든 투르크 종족들로, 오구즈라는 인물을 도와 오구즈 종족 연맹체의 구성원이 된 위구르, 캉글리, 킵착, 카를룩, 칼라차 및 삼림족 아가체리 부족과 오구즈의 후손으로 구성된 24개 투르크 지파 모두를 ‘투르크멘’이라고 불렀다. 후일 위구르, 카를룩과의 분쟁에서 패한 뒤 河中지방인 소그디아나로 이주해 간 오구즈 연맹체 구성 종족들을 특정해 투르크멘이라고 부르게 됐다.


투르크멘(Turkmen)이라는 종족명(ethnonym)은 T¨urk에 ‘유사, 닮음’ 이라는 의미를 갖는 소그디아어 접사 -myn, -men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로 ‘투르크인을 닮은’ 또는 ‘同種 투르크(co-Türk)’라는 뜻을 지닌다. 이름으로 보아 파미르 고원 이동의 첫 도시 카시가르 출신임이 분명한 11세기의 저명한 학자 마흐무드 카시가리(Mahmud Kashgari)도 그의 저술에서(1076년) 투르크만의 어원을 T¨urk에 ‘닮은, 비슷한(like)’이라는 이란어 mȃnünd가 합쳐진 것(like a Türk; Türk-like)으로 설명하고 있다. 덧붙여 이 말이 “I am a Turk.”라는 의미를 갖는 투르크멘어일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0세기 마크디시(Maqdisi)에 의해서인데, Oghuz 특히 카를룩(Qarluq)를 가리키는 데 사용됐다. 그러다 12세기에는 일리(Ili) 지역을 지배하던 카라한 왕조(Qarakhanid)를 지칭해 투르크멘이라고 했다. 13세기 중앙아시아를 여행한 뤼브룩(Rubrouck)과 그에 앞서 카르피니(Carpini)도 Turcomani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어느 집단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 14세기의 인물 마르코 폴로에게 있어서는 Türkmän[Turcomans]은 여전히 유목민이었으며, 그들의 주거지 Turcomanie는 아나톨리아 반도 중남부였다. 흥미로운 건 폴로가 투르코만을 카라만(Caramans)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무렵 투르코만 세력이 아나톨리아 반도 중남부 지역까지 진출해 있었고, 이들 중 누군가가 중심이 돼 카라만 왕조(The Karamanids or Karamanid dynasty)를 수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일까.


▲ 세계지도속의 아나톨리아 반도

한편 Pritsak은 T¨urkm¨an에 대해 T¨urk에 -m¨an이라는 집단형 접미사가 붙은 형태, 즉 ‘투르크인들’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1831년 말에서 1832년 초에 발흐, 부하라 등지를 여행하며 투르크멘인들을 직접 만난 영국인 육군 중위 알렉산더 번즈(Alexander Burnes)는 투르크멘인들이 투르크멘이라는 용어를 ‘wanderer(유랑자, 떠돌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로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왜 스스로를 유랑자라고 생각했을까. 때와 장소를 한반도 려말선초로 돌려보자. 바얀 테무르(伯顔 帖木兒, Bayan Tem¨ur)라는 몽골식 이름을 갖고 있던 왕이 있다. 22살 되던 해(1351년) 왕이 된 그는 원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꿈꾸던 고려 恭愍王이다. 그러나 1349년 원나라에서 결혼한 원나라 공주 魯國大長公主(보르지긴 보타슈리. 한자 표기는 兒只斤 寶塔實里다. 공민왕이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王佳珍)가 죽으면서(1365년) 자주의 뜻과 개혁의 의지를 상실하고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남색과 술 등 향락에 탐닉하다 홍륜, 최만생 등의 쿠데타로 시해 당한다. 1374년의 일이다. 후일 禑王이 된 공민왕의 아들 모니노(牟尼奴)는 辛旽의 시비였던 般若의 소생인 까닭에 이성계 일파가 신돈의 아들로 몰아붙인다.


아명이 ‘샤카족의 성자(muni)’라는 뜻의 석가모니(釋迦牟尼)에서 본 딴 모니노였던 고려 32대 우왕(1365~1389년, 재위: 1374~1389년)은 위화도 회군의 주역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의 수장인 정몽주, 정도전 등에 의해 1388년 6월 폐위돼 강화도에 유배된다. 이후 여주로 이배된 뒤 다시 강릉으로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1389년). 아들인 창왕 역시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 죽임을 당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년 역사의 신라가 종말을 고할 때도 그랬다. 신라 제 56대이면서 마지막 군주인 敬順王 金傅는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줬다. 자신의 사촌 누이(백부인 김억렴의 딸)와 왕건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녀는 신성왕후가 됐다. 그리고 고려 태조 왕건의 두 딸을 배필로 맞았다. 나라가 망한 뒤에도 새 여자와 살게 됐으니 그는 행복했을까.


이렇게 산 자가 있는가 하면 나라가 망했으니 목숨 부지가 어렵다고 느낀 경순왕의 황자 마의태자와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그들은 탈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여진족의 땅 만주에 정착했다. 지금 이 이야기는 망국의 슬픔에 베옷을 입고 皆骨山(금강산)에 들어가 은자의 삶을 살았다는 등의 설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백제 멸망 후 흑치상지, 복신 등의 부흥운동이 있었음에 비춰 신라 왕족과 주변 세력들의 저항과 실패, 그 후의 離散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여진족의 나라 金國의 태조 完顔阿骨打(1068-1123년)의 8대조가 바로 신라에서 온 김씨 성의 함보(函普)라고 하기에 더욱 그렇다. 참고로 아골타의 姓 완안(完顔)은 여진어(현재의 만주어) 왕기얀(Wanggiyan)을 假借한 것으로 漢語로 번역하면 ‘王’이라는 뜻이며, 阿骨打는 여진어 Aguda의 音借字로 ‘관활(寬闊: 너그럽고 넓은 아량)’의 의미라고 한다.


비슷한 일이 오구즈족과 관련해서도 일어났다. 오구즈족이 종족 전체로는 투르크만이라고 불리지만 위구르, 킵착, 칼라치, 캉글리, 카를룩 및 이들로부터 파생된 다른 지파들로 나뉘어져 있다. 이들이 어떻게 하나가 되고 어떻게 분리되는 가를 살펴보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근간으로 하는 인문학의 관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카자흐스탄의 아킨(akyn: 즉흥 음유시인)처럼 오구즈 종족의 탄생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풀어보겠다.
유목민 아불제 칸의 아들 딥 야쿠이에게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카라 칸, 오르 칸, 쿠즈 칸, 쿠르 칸이 그들이다. 큰 아들 카라 칸이 후계자가 됐다. 그에게 귀한 아들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종족 사람들과 상의했는데, 한 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제 이름을 오구즈라고 지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이름이 됐다. 그리고 나중에는 종족 명칭이 됐다.


어느 날 오구즈는 누케르(nuker: 벗 또는 심복)들을 거느리고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 이때 아버지 카라 칸은 형제와 조카, 친족 및 아미르(Amir or emir: 族長, 大公, 土侯)들을 불러 모아 “내 아들 오구즈를 나는 온 마음으로 사랑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석이 나쁜 일을 저지르고, 신앙을 저버렸으니 살려둘 수 없다.” 늙은 아버지 카라 칸과 젊은 아들 오구즈는 서로 反目했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 카라 칸이 칼에 맞아 그 상처로 인해 죽었다. 오구즈의 숙부와 종족들 가운데 많은 무리가 오구즈의 편이 됐다. 결국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오구즈가 승리를 거뒀고 탈라스와 사이람에서 부하라까지를 자신의 영토로 삼고 현지 사람들을 복속시켰다. 위구르는 투르크어로 ‘연합하다’는 뜻이다.


오구즈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이름은 쿤, 아이, 율두즈, 쿡, 탁, 딩기즈. 각각 日, 月, 星, 天, 山, 海의 뜻을 갖는 투르크어다. 오구즈는 이들과 함께 이란, 투란, 시리아, 이집트, 룸, 프랑코 및 다른 모든 지방을 정복했다. 모든 곳을 정복한 뒤 그는 자신의 목지가 있는 우르탁과 쿠르탁으로 돌아갔다.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


오구즈, 달리 말해 투르크만이라 불리는 유목민 투르크 종족들이 1300년대 초반 아나톨리아 반도를 접수하고 그곳에 부족별로 투르크멘 독립 왕국(beyliks)을 수립한다. 이로 인해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카라만 公國(the Principality of Karaman; Beylik of Karaman )으로 알려진 카라만 왕조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세워진 수많은 소왕국 증 하나로 오늘날의 터키 남동부 카라만주 일대를 통치했다. 13세기부터 1483년 멸망할 때까지 카라만 왕조는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유서 깊고 강력한 국가였다. 이들이 아나톨리아 반도와 코카서스 방향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1230년 ‘푸른 이리’ 칭기즈 칸의 몽골군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서쪽으로, 유럽으로 돌진했기 때문이다.


카라만 왕조는 오구즈 투르크의 살루르(Salur) 부족의 구성원이었다. 살루르는 오구즈 종족에게 자신의 이름을 준 오구즈의 다섯째 아들 타그 칸(Tagh Khan)의 네 아들 중 첫째 아들이다. 그 말뜻이 ‘어디를 가나 칼과 몽둥이를 휘두름’이라고 하니 사납거나 용맹한 인물이었던 듯하다. 살루르의 이름을 듣고 전쟁터가 떠오르고, 인간 잔혹사가 느껴진다면 과도한 일일까.

출처 :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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