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16. 16:26ㆍ우리 이웃의 역사
지상 최대의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1944년 6월 6일)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6월 6일 오전, 함선 1200척, 항공기 1만 대, 상륙주정(舟艇) 4,126척, 수송선 804척, 그리고 수륙(水陸)양용 특수장갑차 수백 대로 편성된 대부대가 악천후를 뚫고 프랑스 노르망디 앞바다에 나타났다. 드디어 작전명 ‘오버로드(Overlord: 대군주)’로 명명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이날 연합군은 미군 7만 3,000명, 영국·캐나다 합동군 8만 3,000명, 그리고 자유프랑스군, 호주군, 폴란드군, 노르웨이군 등 8개국에서 온 총 15만 6,000명의 병력을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켰다. 이 중 13만 2,500명은 선박 편으로 영국해협을 건넜고 2만 3,500명은 공중 수송되었다.
▲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 영화의 주인공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했다. |
상륙작전의 최고사령관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 지상군 총사령관은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맡았다. 프랑스를 비롯한 대서양 지역 방어를 책임진 독일군 방어총사령관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였고, 대서양 해안방어 총책임자는 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쳤던 에르빈 롬멜 원수였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여 처절한 싸움을 계속하던 스탈린은 영국과 미국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여 제2전선을 구축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1943년 11월 말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스탈린은 1944년 5월 1일까지 북프랑스에 연합군이 상륙하여 제2전선을 구축할 것을 확약했다.
연합군은 상륙지점으로 파 드 칼레, 노르망디, 브리타니, 네덜란드 해안 등을 검토했는데, 이 중에서 비교적 방어가 허술한 것으로 판단된 노르망디 해안이 최종 상륙지로 선정되었다. 원래 D 데이는 6월 5일이었으나 이틀 전부터 영국해협의 기상상태가 악화되자 작전이 24시간 연기되어 6월 6일 오전, 상륙이 감행된 것이다. 그러나 이날도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노르망디 해안가에 구축되어 있던 독일군의 벙커와 요새 시설을 항공 공격을 통해 무력화시키는 데 실패함으로써 상륙군이 큰 피해를 당하게 된다.
운명의 6월 6일
작전이 전개되기 전, 연합군은 목표 상륙지가 노르망디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 작전이 전개되었다. 연합군의 중폭격기들은 칼레 앞바다를 비행하면서 방대한 양의 금속 파편을 살포하여 이 지역에 대규모 연합군이 상륙하는 것처럼 독일군 레이더를 교란시켰다. 기만 작전에 속은 독일군은 기갑부대를 칼레 방면에 배치했는데, 이로써 노르망디 상륙군은 독일군 기갑부대의 강력한 저항을 피할 수 있었다.
1944년 6월 5일 자정부터 6월 6일 이른 새벽까지 2316대의 수송기와 수많은 글라이더를 이용하여 1만 7000여 명에 이르는 미군 제 82·101 공수사단과 영국군 공정대, 자유프랑스군 소속 병사들이 프랑스에 침투했다. 이어 아침 일찍 연합군 공격부대가 노르망디 해안 5곳을 향해 상륙을 감행했다. 80㎞에 달하는 노르망디 해안에 일사불란한 상륙을 하기 위해 연합군은 작전 구역을 다음과 같이 5곳으로 나누어 부대를 배치했다. 당시 노르망디에 상륙한 부대는 다음과 같다(해안에 붙여진 유타, 오마하,골드, 주노, 소드의 명칭은 연합군이 해당 지명을 은폐하기 위한 암호였다).
▲유타 해안: 미 7군단 휘하 4·90사단, 영국군 2군
▲오마하 해안: 미 5군단 휘하 1·29사단
▲골드 해안: 영국군 30군 휘하 3사단, 캐나다 기갑여단
▲주노 해안: 캐나다 1군단 휘하 3사단·2기갑여단, 영국군 제4코만도 부대
▲소드 해안: 영국군 코만도 2개 여단, 미 1군단 휘하 3사단·27기갑여단
미군은 셔먼 전차에 수륙양용 장비를 설치하여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투입했는데, 병사들은 물에 뜨는 셔먼 전차를 ‘DD(도날드 덕) 탱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런데 1차 공격에 투입된 743기갑대대 소속 3개 중대 중 1개 중대의 수륙양용 도날드 덕 탱크들은 해변에 도착하기 전에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고, 간신히 육지에 도착한 탱크들도 독일군으로부터 집중 포격을 당해 부서지는 바람에 간신히 14대의 탱크만 상륙에 성공하게 된다.
오마하 해안의 비극
그런데 유타, 골드, 소드 해안은 비교적 손쉽게 상륙에 성공했으나 오마하 해안은 상황이 심각했다. 오전 6시 45분 경 미 육군 1사단과 29사단 병력은 레인저 9개 중대와 함께 미국과 영국 해군의 함포 지원을 받으면서 노르망디 해안에 서쪽에 위치한 8㎞의 해안(암호명 오마하로 명명)에 상륙을 개시했다. 1사단은 잘 훈련된 정예 병력이었던 반면 29사단은 제대로 훈련 받지 못한 신병들로 채워진 상태였다.
오마하 해안 상륙부대는 거친 파도와 조류에 떠밀리고, 아군들의 엄호를 위해 연막을 터뜨리는 바람에 상륙정들이 당초 목표지점보다 훨씬 동쪽으로 떠밀려 상륙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미군이 상륙한 지점은 해안가에서 100~200m 떨어진 깊은 수심이었다. 게다가 독일군이 중기관총과 포대, 그리고 철제·목재 바리케이트, 지뢰를 대대적으로 구축해 놓은 코앞에 맨몸으로 상륙부대가 던져진 꼴이었다.
당시 노르망디 해안을 방어하는 독일군은 716보병사단과 352사단이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기 위해 프랑스 해안에 총 420만 개의 지뢰와 52만 개의 수중 장애물, 3만 1000개의 수중 기뢰를 설치했다. 특히 해안 방어를 위해 구경 406㎜의 초대형 대포를 비롯하여 4호 전차를 콘크리트로 고정시킨 후 포탑이 빙빙 돌아가는 전차포를 해안포로 사용했다.
당시 독일은 건장한 청년들을 징집하여 거의 대부분 소련과의 전쟁을 위해 동부전선에 투입했는데, 소련과의 전쟁이 소모전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가 야기되었다. 병력이 모자라자 히틀러의 나치는 독일은 10대 초반의 소년과 60대의 노인까지 동원해야 했다. 이것도 한계에 닥치자 자신들이 점령한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등에서 징집을 시행하여 독일 군복을 입혀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독일군들은 동부전선에서 항복하여 끌고 온 러시아인들까지 독일 군복을 입혀 전쟁터로 내몰았다. 노르망디를 방어하던 독일군 716·352사단 병력 중에는 2개 동방대대를 포함하여 폴란드인, 아시아인 등으로 구성된 외국인 부대원들이 많았다.
오마하 해변 방어를 담당한 독일군 352사단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과 격전을 벌였던 역전의 노장들이 다수 포함된 부대였다. 미군들은 바로 이 독일군 352사단 병력들의 집중 표적이 되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이 바로 6월 6일 오전 오마하 해안에 상륙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받는 미군들의 생지옥 같은 상륙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마하 해변 상륙부대의 선봉이었던 미 29보병사단 16연대 3대대 2중대원의 경우 198명이 상륙했으나, 불과 4분 30초 후 196명이 전사(戰死)하고 단 2명만 생존했다.
로버트 카파의 기록
당시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은 독일군이 자랑하는 MG 42 기관총이었는데, 이 기관총 때문에 혼쭐이 난 미군들은 ‘히틀러의 전기톱’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당시 오마하 해변의 독일군 방어진지에서 MG 42 기관총 사수로 근무했던 21세의 하인리히 세블로흐 하사는 약 9시간 동안 2,000여 명의 미군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혀 ‘오마하의 야수(野獸)’(Beast of Omaha)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는 전투 과정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5만여 명이 상륙한 오마하 해변에서 단 하루 동안 3,000여 명의 미군들이 독일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전사했는데, 그것은 집중 공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대학살’이나 다름없었다. 오전 내내 상륙지에 꼼짝없이 갇혀 있던 오마하 상륙부대는 연합군 해군의 전함과 구축함들의 함포사격에 의해 겨우 숨통이 트였고, 함포 지원을 받으며 상륙한 미군들에 의해 1200명의 독일군이 사살되고, 기관총 진지들을 하나하나 파괴하면서 오마하 해변은 저녁 무렵 완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병사들과 함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면서 사진을 촬영한 로버트 카파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엄호물 뒤에서 혼자가 됐을 때 비로소 병사들이 전진을 못하고 나와 같은 모습으로 움츠리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들을 찍기에 충분한 30미터 이상의 거리였다. 아직도 새벽이기 때문에 좋은 사진을 찍기에는 좀 회색빛이 많았지만, 잿빛 바다와 잿빛 하늘 사이에서 배의 상륙 저지를 위해 히틀러의 작전참모가 조형해 놓은, 쉬르레알리즘과 같은 장애물과 그 밑에 더욱 작게 움추린 군인들의 모습은 사진으로 잡기에 아주 훌륭한 장면이었다.…
하늘에서 본 이지렛드의 해변은 아마도 정어리 통조림을 따놓은 것 같이 보였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정어리 같은 꼴로 엎드린 채 촬영을 하게 되니 그 사진의 근경은 모두 흠뻑 젖은 군화와 창백한 얼굴뿐이었다. 그 군화와 얼굴을 둘러싼 파인더 안으로는 박격포탄의 포연과, 원경에는 불타는 탱크와 침몰하는 배도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장전된 필름을 모두 찍어 버렸다. 백에서 새 필름을 꺼냈으나 이미 젖어 있었고, 설령 젖지 않은 필름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손이 떨려 필름을 사진기에 넣을 수가 없었다. 잠시 쉬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이었다. 필름이 없는 빈 사진기가 손에서 떨고 있었다. 예기치 않은 새로운 공포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떨게 하고 있었다. 얼굴마저 일그러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배낭에 붙어 있던 야전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삽 끝에 돌이 걸렸다. 서둘러 돌을 파냈다. 주위엔 죽은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옆으로 누운 채 꼼작 않고 있었다. 다만 바닷가의 시체가 밀리는 파도에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중에서)
주노 해안에 상륙한 캐나다군 3사단도 강력한 방어벽에 막혀 최초 상륙부대원의 50%나 희생되는 등 큰 피해를 당했다. 그러나 보병과 함께 상륙에 성공한 전차 덕분에 벙어진지들을 무력화시키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노르망디에서 포로로 붙잡힌 한국인
오마하와 주노 해안의 참극에 비하면 유타 해안 상륙부대는 천우신조(天佑神助)를 만났다. 유타 상륙부대도 거친 파도와 조류에 떠밀려 목표 지점보다 훨씬 동쪽에 상륙했는데, 마침 상륙지점이 독일군의 방어가 허술한 곳이었다. 덕분에 미 7군단 휘하의 4사단과 90사단, 영국군 2군은 불과 197명의 희생자만을 낸 채 손쉽게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소드 해안에 상륙한 영국군과 미군 3사단도 경미한 저항을 퇴치하고 손쉽게 상륙하여 첫날 내륙으로 8㎞ 전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노르망디 상륙지에 교두보가 확보되자 연합군 지휘부는 이곳에 인공 항구를 건설한 다음 7월 2일까지 병력 100만 명, 물자 57 만 톤, 각종 차량 17만 대를 양륙시켰다.
흥미로운 사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유타 해변에 상륙한 미군이 독일군 포로를 잡았는데, 그 중 4명이 한국인이었다는 점이다. 미 101공수사단 소속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역사저술가 스티븐 E 엠브로스는 자신의 저서 ‘디 데이(D-day)’에서 “유타 해안에서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동양인 4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들은 나중에 한국인으로 확인됐다”고 기록했다.
그 당시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던 네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양근정 씨는 1920년 5월 3일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1938년 18세 때 일제 관동군에 징집된 그는 노몬한 전투에 참전했다가 소련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조선에서 끌려온 신분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소련군으로 입대를 하게 된다. 1941년에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군으로 참전, 모스크바 방어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이번에는 독일군에게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독일 베를린까지 ‘죽음의 포로 행진’ 속에서 목숨을 건졌고, 병력이 부족해진 독일군은 이들을 ‘동방부대’에 편입시켜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타 해변에 주둔하던 중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히는 기구한 신세가 되었다. 양근수 씨는 영국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여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석방되어 1947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시카고 인근에서 살다가 1992년 사망했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마이웨이’는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소련군, 독일군으로 끌려가야 했던 한국인들의 기구한 운명을 영화화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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