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 편람<3>보덕국기(報德國記)

2018. 2. 16. 16:39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려 멸망 뒤인 668년 이후로도 일본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드문드문 등장하는 '고려 사신'의 첫 등장이 671년, 신라측에서 고려의 왕족인 안승을 고려왕으로 책봉한(670년 음력 8월 1일) 이듬해부터라는 점은 이들 '사신'을 일본에 파견한 주체가 어디인가를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이다. 안승의 부흥고려국이 거의 와해된다는 673년 이후로도 사신의 파견은 계속되지만, 일단 왜의 대왕(大王, 오키미) 천지(天智, 덴지) 10년(671년) 정월 정미(9일)에 고려의 사신을 자처하는 가루(可累)라는 사람이 왜국에 온 시점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일본서기》에는 그의 관직이 상부대상(上部大相)으로 되어 있다. 상부(북부), 하부(남부), 좌부(서부), 우부(동부), 그리고 중부. 고려에서 나라의 수도 안에 둔 행정구역이면서 동시에 온 나라를 편재한 행정구역. 대상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대사자'와 비슷하지 않을까 추정한다.

 

 고려의 상부대상 가루는 일곱 달을 왜에 머무르고 8월 을축 초하루 정유(3일)에 일을 마치고 돌아갔는데, 가루가 일을 마치고 돌아간 뒤, 왜에서는 내전이 터졌다. 왜왕 천지가 죽고, 그의 아들 대우황자(大友皇子, 오오토모노 미코)가 태정대신으로서 왜의 정치를 맡게 되었는데, 천지의 아우로 승려가 되어 길야(吉野, 요시노)로 내려가 있던 대해인황자(大海人皇子, 오오아마노 미코)가 현지 호족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난이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임신난(壬申亂, 진신란)'이라 부르는 이 내란은 고작 여섯 달만에, 대우황자가 패하여 자결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고, 승자로서 대해인황자는 즉위하여 왜왕이 되었다. 대왕 천무(天武, 덴무)이다.

 

 대왕 천무의 원년이라는 672년 여름 5월 무오(28일)에 고려(부흥고려국)에서는 전부부가변(前部富加抃) 등이 사신으로 파견되어 왔다. 그리고 두 달 뒤, 본국에서는 당에서 파견된 고간ㆍ이근행의 4만 당병이 평양에 도착했고, 백수산, 석문으로 이어지는 신라ㆍ고려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 윤5월의 호로하 전투에서 황해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고려 부흥세력은 거의 궤멸되었다.


 재미있게도 신라에서 호로하 싸움이 있은 직후부터 왜로 오는 고려의 사신들은 모두 신라의 사신을 수반해서 오고 있다. 호로하 싸움이 있고 석 달 뒤인 8월 계묘(20일)에 고려에서 온 상부위두대형(上部位頭大兄) 한자(邯子)와 전부대형(前部大兄) 碩干 등을 왜의 쓰쿠시(筑紫)까지 보낸 것이 신라의 사신인 한나마(韓奈末) 김이익(金利益)이었다고 한 《일본서기》기록이 그것이다. 


 고려의 사신이 왜로 간 다음 달에 신라는 북변의 성들을 증축하고, 대아찬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으로 서해를 지키게 했다. 이때 신라가 쌓은 성들은 국원성(國原城, 충주),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춘천),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 등이 기록에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겨울까지 신라와 당 사이에 벌어진 전투는 아홉 번. 2천여 명의 당병이 죽었고, 호로하와 왕봉하(王逢河)에 빠져 죽은 당병의 수는 이루 셀 수 없다.


[九月, 命義安法師爲大書省, 封安勝爲報德王.【十年, 封安勝高句麗王, 今再封. 不知報德之言, 若歸命等耶, 或地名耶.】]

9월에 의안법사(義安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고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했다.【10년(670년)에 안승을 고려왕으로 봉했다가 지금 다시 봉한 것이다. 보덕(報德)이란 말이 귀순[歸命]한다는 말과 같은 뜻인지 혹은 땅 이름인지 모르겠다.】

《삼국사》 권제7, 신라본기 , 문무왕 하(下), 문무왕 14년(674년)


 문무왕 14년에 신라 조정은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했다. 이른바 보덕국이다.


 보덕국의 본거지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ㅡ당시에는 금마저라 불렸던 그곳에 있다면, 오늘날 익산 이씨 집안이 선조로 모시는 고려의 태학박사 이문진이 이 익산을 식읍으로 받았다고 하는 익산 이씨 집안의 전승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문진이 이때까지 살아있었고 고려 부흥군에 가담해서 검모잠의 뒤를 따랐다가 다시 안승을 따라 내려왔다면, 틀림없이 다른 고려 유민들과 함께 이곳 익산에 정착해서 살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인 이문진의 이름을 떠올려 익산을 자신들의 본관으로 삼아서 조상 이문진의 이야기를 조금 윤색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때 안승이 왕으로 있던 보덕국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보덕성(報德城)은 지금의 익산군 서쪽 1리에 있다."라고 했고, 거기에 해당하는 곳은 지금 익산에 있는 익산토성인데, 현재 행정구역상 주소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50-3번지. 여기를 보덕국의 중심소재지라고 했지만 확실히 단정짓기에는 이것저것 의문투성이다. 백제 무왕이 수도를 옮기려고 쌓았을 것이라고도 하고 더 거슬러 올라가 마한 시대의 것이라고도 하고, 확실한 것이 없다.


[二月, 劉仁軌破我兵於七重城. 仁軌引兵還, 詔以李謹行爲安東鎭撫大使, 以經略之. 王乃遣使, 入貢且謝罪, 帝赦之, 復王官爵. 金仁問中路而還, 改封臨海郡公. 然多取百濟地, 遂抵高句麗南境爲州郡. 聞唐兵與契丹 · 靺鞨兵來侵, 出九軍待之.]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칙으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경략케 하였다. 그래서 왕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김인문은 중간에서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군공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마침내 고려 남쪽 경계지역까지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군이 거란 · 말갈 군사와 함께 침략해 온다는 말을 듣고 모든 군사를 내어 대비하였다.

《삼국사》 권제7,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675년)


 《일본서기》는 3월에 고려에서 대형(大兄) 부간(富干)과 대형 다무(多武)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사와 함께 신라의 사신으로 급찬(級飡) 박근수(朴勤修)와 대나마(大奈末) 김미하(金美賀)가 왔다고 적고 있다. 676년 11월에도 고려는 후부주부(後部主簿) 아우(阿于)를 대사(大使), 전부대형(前部大兄) 덕부(德富)를 부사(副使)로 하는 사신단을 왜국에 보냈는데, 이들을 츠쿠시까지 보낸 것도 신라의 사신인 대나마 김양원(金陽原)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괴뢰정부 치고는, 꽤나 빈번하게 사신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고려는 왜국, 즉 일본에게 나름 뭔가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마 고려의 사신을 츠쿠시까지 보냈다는 신라의 대나마 김양원을 통해서건 다른 소식을 통해서건, 당에서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먼 요동으로 옮겼다는 사실은 일본에 전해졌을 것이다. 요동으로 옮겼던 안동도호부는 이듬해 정축년(677년) 다시 신성(新城)으로 옮겨졌다. 평양에서 요동으로, 요동에서 신성으로. 당은 점차 고려의 중심지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당의 힘이 풀린 자리에 피드백이라도 하듯 신라군은 점차 잠식해 들어왔다. 안동도호부의 요동 이전과 함께 평양 일대에 남아있던 '빈약한' 고려 백성들, 고향으로의 귀국이 허락된 고려의 백성들도 (일부분이긴 하지만) 하나둘씩 신라로, 돌궐로, 그리고 일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당조가 고려의 옛 땅에 설치한 '식민지총독부' 안동도호부는 고려 유민들의 저항에 의해 한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쫓겨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점에 대해서는 책들이 다 다르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지을 때만 해도 안동도호부의 옮겨진 시점을 670년으로 보는 설과 676년으로 보는 설이 있었다. 《자치통감》보다 앞서 만들어진 《신당서》에도 

 "함형 원년(670년)에 고간이 도호부의 소재지를 요동주로 옮겼다."

고 했다. 고려의 고연무 태대형과 신라의 설오유 사찬이 압록강을 넘어 요동 땅에서 말갈족과 전투를 벌이던 해다. 사마광은 《신당서》보다 앞서 편찬된 《당회요(唐會要)》(961년)에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옛 성으로 옮긴 것이 함형 원년이 아닌 의봉 원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을 들어, 당조의 실록(實錄)에 기록된 “함형(咸亨) 원년(670)에 양방(楊昉)과 고간(高侃)이 안순(安舜)을 토벌하였다. 비로소 안동도호부를 함락시키고 평양성에서 요동주로 옮겼다. 의봉 원년(676년) 2월 갑술에 고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을 함형 원년에 안동도호부를 옮겼다는 것이 '결과'이고, 의봉 원년에 고려 유민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안동도호부를 옮기게 된 '원인'을 말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함형이나 의봉은 모두 당조에서 쓰던 연호다. 


 670년부터 674년까지 함형(咸亨).

 674년부터 676년까지 상원(上元).

 676년부터 679년까지 쓴 연호가 의봉(儀鳳). 


 똑같이 당 고종 한 사람이 쓰던 연호로 사관들이 '함형 원년'을 '의봉 원년'으로 착각해 썼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래도 명색이 정사(正史)인데, 구양수 같은 문장가가 연호도 제대로 분간을 못했을까. 간지부터가 다른데(함형 원년은 경오년이고 의봉 원년은 병자년). 정말 그런 거라면 《신당서》는 정말 문제가 많은 책이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되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는데 이제 와서 골치아프게 잡고 늘어지는 것은 안동도호부의 요동 이전 시기가 670년이냐 676년이냐를 따라 고려 부흥운동 세력의 성쇠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670년과 676년은 고려 부흥운동의 최전성기와 쇠퇴기를 상징하는 연대인 것이다. 고연무 태대형과 설오유 사찬이 함께 압록강을 넘어 요동으로 진군하던 해에 당조가 안동도호부를 옮겼는지, 아니면 고려 부흥운동이 거의 막장에 다다른 마당에 안동도호부를 옮겼느냐에 따라, 고려 부흥운동의 여파가 당시 한반도와 만주, 중국 대륙에까지 뻗치던 상황을 자세하게 그려낼 수 있다. 하지만 보덕국이 과연 고려 부흥운동의 중추에 있었는가? 고려부흥운동을 주도하는 입장이었는지 아니면 고려 부흥운동세력의 수많은 갈래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을 뿐이었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가 없다.

 

 기록은 당대 사실의 '일부'에 불과하다. 기록이 되는 것도 있지만 안 되는 것도 있다. 보덕국만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보덕국 세력만이 고려부흥운동 세력이었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보덕국왕 안승이나 검모잠 대형 말고도 고려 부흥운동 세력이 더 있었는지 어땠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676년이 아니라 670년이 안동도호부의 한반도 축출 시점이고, 그것이 전적으로 보덕국(엄밀히 말하면 보덕국의 전신인 검모잠 집단)의 힘이었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청산리 대첩을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백야 김좌진 장군' 한 사람만 이루어낸 것이 아니듯. 신라 혹은 당 중심으로 기록된 것만 남아있는 지금은 그 시대 실제로 김좌진 장군 말고도 '여천 홍범도 장군'이라는 인물이 더 있었는지, 또 다른 제3의 인물이 있었는지를 확답하지 못한다. 그렇게 따지면 고려가 멸망하고도 30년이나 지나서 기어이 그 부흥을 이루고야 말았던 '발해'는 과연 보덕국과 무슨 상관이 얼마나 있었던 나라였던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고려인들의 부흥운동이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실패한 것도 아니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긴, 고려 땅의 '중추'였던 평양 일대는 물론 고려 전역을 완전 장악하는데 결국 실패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준다.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고, 보장왕을 요동 지역의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현지에 파견했던 중국인 관리들까지 모두 철수시켰으니.


[夏五月, 高句麗王使大將軍延武等, 上表曰. 『臣安勝言. 大阿湌金官長至奉宣敎旨, 幷賜敎書, 以外生公爲下邑內主. 仍以四月十五日至此, 喜懼交懷, 罔知攸寘. 竊以帝女降嬀, 王姬適齊, 本揚聖德, 匪關凡才. 臣本庸流, 行能無攥. 幸逢昌運, 沐浴聖化, 每荷殊澤, 欲報無堦. 重蒙天寵, 降此姻親. 遂卽穠華表慶, 肅雝成德, 吉月令辰, 言歸弊館, 億載難遇, 一朝獲申. 事非望始, 喜出意表. 豈惟一二父兄, 實受其賜? 其自先祖已下, 寔寵喜之. 臣未蒙敎旨, 不敢直朝, 無任悅豫之至, 謹遣臣大將軍太大兄延武, 奉表以聞.』]

여름 5월에 고려왕이 대장군 연무(延武) 등을 보내 표(表)를 올려 말하였다.

『신(臣) 안승은 말씀을 올립니다. 대아찬 김관장(金官長)이 이르러 교지를 받들어 선포하고 아울러 교서를 내려, 생질로써 저의 안주인[內主]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윽고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엇갈려 어찌한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컨대 요 임금이 딸을 규에게 시집보내고 주(周)의 왕이 공주를 제(齊)에 시집보낸 것은 본래 신성한 덕을 드러내어 평범한 사람이라도 관계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원래 용렬한 부류로 행동과 재능이 이렇다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좋은 운수를 만나 성인의 교화에 젖게 되었고 매번 특별한 은택을 받았으니, 은혜를 갚고자 해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거듭 대왕의 총애를 입어 대왕의 인척을 내려주었습니다. 마침내 무성한 꽃이 경사를 표하고 정숙하고 화목한 덕을 갖추어 좋은 달 좋은 때에 저의 집에 시집온다고 하니, 억년(億年)에 만나기 힘든 행운을 하루 아침에 얻었습니다. 처음에 바라지 못했던 일이고 뜻밖의 기쁨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부형(父兄)만이 실로 그러한 이 은혜를 받겠습니까? 선조 이하가 다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신은 아직 교지를 받지 못하여 직접 찾아 뵙지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을 어찌할 수 없어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를 보내 표(表)를 올려 아룁니다.』

《삼국사》 권제7, 신라본기7, 문무왕 하(下), 문무왕 20년(680년)


 679년 2월 임자(1일), 신라의 사신인 나마(奈末) 감물나(甘物那)에게 붙여, 고려(보덕국)의 사신인 상부대상(上部大相) 환부(桓父)와 하부대상(下部大相) 사수루(師需累) 등을 다시 일본으로 보냈다고 《일본서기》는 적고 있다.

 

 보덕국이라는 이 나라는 괴뢰정부이면서도 갖출 것은 웬만큼 갖추고 있었다. 고려 고유의 관직과 5부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이렇게 신라와 외교관계의 형식으로 국서까지 주고받고, 신라 사신을 따라 일본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미약하나마 외교권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한반도에서는 실상 '마지막' 고려국이었다고 봐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보덕국왕 안승의 혼인은 일본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 아니었을까. 신라에서 보덕국왕 안승에게 혼인을 요청하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 4월 15일, 그리고 그것에 화답한 것이 5월. 고려(보덕국)가 신라의 사신 대나마 고나(考那)에게 딸려 일본에 남부대사(南部大使) 묘간(卯問)과 서부대형(西部大兄) 준덕(俊德) 등을 보낸 것은 5월 13일. 이들이 보덕왕의 혼인 소식을 왜에 알리기 위한 임무를 띠었을 가능성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전과 다르게 고려(보덕국) 사신들의 귀국 이후, 쇼킨카(小錦下) 사에키노무라지(佐伯連) 히로타리(廣足)를 대사로, 오하리다노오미(小墾田臣) 마로(麻呂)를 소사로 하는 사신단을 고려에 보냈다. 천무 천황 10년(681년) 가을 7월 신미(4일)의 일이었다.


[八日, 蘇判金欽突, 波珍湌興元, 大阿湌眞功等, 謀叛伏誅. 十三日, 報德王遣使小兄首德皆, 賀平逆賊.]

8일에 소판 김흠돌(金欽突) · 파진찬 흥원(興元) · 대아찬 진공(眞功) 등이 모반하다 잡혀 죽었다. 13일에 보덕왕이 소형(小兄) 수덕개(首德皆)를 사신으로 보내 역적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삼국사》 권제8, 신라본기8, 신문왕 원년(681년) 8월


 일본에서 고려(보덕국)와 신라로 각기 보냈던 사신들이 귀국한 것은 두 달 뒤인 9월 을해(3일). 고려(보덕국)에 보냈던 견고려사(遣高麗使)는 이듬해인 천무 천황 11년(682년) 5월 무신(16일)에 '사신으로 간 요지'라는 것을 보고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보덕국이라는 나라의 건국과 국가제도(사실 괴뢰정부에게 갖다붙이기에는 너무도 과분하지만), 수도의 위치와 영토의 크기, 그리고 지금의 사정에 대한 것이겠지.


 그들이 보고한 정보에는 신라 안에서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는 보덕국의 위치 변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문왕 대에는, 당에 기반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시대였다. 진골 귀척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에게 나눠주던 '녹읍'을 폐지하고 왕이 직접 봉급으로서 '관료전'을 내리며, 몽골의 쿠릴타이처럼 진골 귀척들이 중요한 국정, 심지어 왕위 계승까지도 좌지우지했던 '화백' 회의를 약화시키고, 국왕 직속의 집사부를 강화시켜 시중의 권한을 크게 키웠다. 당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시점에서 당에 대항하기 위해 후원했던 보덕국이라는 '고려인 공동체'도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천무 천황 11년(682년) 6월 임술(1일)에 고려(보덕국)에서 신라의 사신인 대나마 김석기(金釋起)을 따라 일본으로 온 하부(下部) 조유괘루(助有卦累) 모절(毛切)과 대고(大古) 앙가(昻加). 기록상 이들은 보덕국이 보낸 마지막 사절임과 동시에 보덕국에서 보낸 것으로 파악되는 사신들 가운데 유일하게, 보낸 주체가 '고려'가 아닌 '고려왕' 자신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보덕국왕 안승이 어째서 이때만은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때 보덕국에서 일본으로 갔던 사신들은 8월 임자(3일)에 츠쿠시에서 사신 대접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후 보덕국에서 일본으로 보낸 고려사인(高麗使人)의 기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요동에서 말갈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 공주(邛州), 지금의 중국 사천 성으로 유배당했던 보장왕도 이 해에 그곳에서 죽었다. 당의 연호로 영순(永淳) 초년에 해당하는, 평양성이 함락되고 14년 뒤의 일이었다. 보장왕이 죽은 뒤, 요동의 옛 고려 땅으로 보장왕과 함께 옮겨왔던 고려 유민들은 또 한 번 강제 이주 당한다. 이번에는 저 멀리 서쪽 실크로드가 있는 하남 그리고 농우의 땅이었다.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막 지대 말고도 지금의 중국 운남 성 서남부, 란찬 강과 미얀마, 타이 일대의 후덥지근한 땅으로도 옮겨진 것 같다. 그곳에는 현재 라후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있는데, 이 라후족이 당에 의해 사민된 고려 유민들의 후손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들의 풍속과 언어는 우리와 닮은 것이 아주 많다 한다. 이를테면 제사에 돼지머리를 올리는 것이나 아이가 태어난 집에 푸성귀를 꽂은 인줄을 문에 쳐 매다는 것, 그들은 우리말에서 '나'라고 하는 뜻을 가진 말을 '나', '너'는 '너', '우리'를 가리켜 '나흐'라고 하며, '너희'는 '너흐'라고 한다. '나는 매홍손에 갑니다'라는 말을 라후족들은 '나래 매홍손 가이메이'라고 하는데, 북한 사투리에서는 "내래 매홍손 가메"라고 하는 등, 비슷한 구석이 많이 있다. 물론 이들이 정말 고려 유민의 후손인가에 대해 확인된 정설은 아직 없다.


 안동도호부가 있던 요동의 옛 성에 남은 주민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신라나 돌궐, 말갈로 달아나버렸고, 기록은 이로써 "고씨의 군장이 마침내 끊어졌다[高氏君長遂絶]"고 적고 있다.


[冬十月, 徵報德王安勝爲蘇判, 賜姓金氏, 留京都, 賜甲第良田.]

겨울 10월에 보덕왕 안승(安勝)을 불러 소판(蘇判)으로 삼고 김씨 성을 내려 서울[京都]에 머무르게 하며, 저택[甲第]과 좋은 토지를 주었다.

《삼국사》 권제8, 신라본기8, 신문왕 3년(683년)


 신문왕 3년(683년), 옛 고려인으로 편성된 당(幢) 즉 부대가 신설되었는데, 신라 수도 서라벌의 방위를 맡았던 9서당의 하나로서, 옷깃의 금(衿)을 황적(黃赤)색으로 하는 황금서당(黃衿誓幢), 그리고 흑적(黑赤)색 금을 쓰는 흑금서당(黑衿誓幢)을, 말갈족을 모아 편성했다. 


 9서당의 군사 편제를 보면 일단 기본적으로 보병과 기병의 합동 편재였다.


 최고위가 장군(將軍)ㅡ정원은 두 명이고,

 그 아래가 대관대감(大官大監)ㅡ정원은 네 명,

 그 아래는 대대감(隊大監)ㅡ정원은 다섯 명으로 세 명은 기병, 두 명은 보병을 맡고,

 그 아래는 제감(弟監)ㅡ정원은 네 명,

 그 아래는 감사지(監舍知)ㅡ정원은 한 명,

 그 아래는 소감(少監)ㅡ정원은 열세 명인데 여섯 명은 기병, 네 명은 보병을 통솔했으며,

 마지막으로 화척(火尺)으로, 대관대감의 명령을 받으며, 정원은 열세 명으로 여섯 명은 기병, 네 명은 보병을 통솔했다.


 그리고 예하에 군사당(軍師幢) · 대장척당(大匠尺幢) · 보기당(步騎幢) · 착금기당(著衿騎幢) · 흑의장창말보당(黑衣長槍末步幢) 등이 배속되었다. 이전의 귀척들이 장악하던 군권과는 달리 국왕에게 직접 속한 부대로서 수도를 방호하는 자들이었다.


[十一月, 安勝族子將軍大文, 在金馬渚謀叛, 事發伏誅. 餘人見大文誅死, 殺害官吏, 據邑叛. 王命將士討之, 逆鬪幢主逼實死之. 陷其城, 徙其人於國南州郡, 以其地爲金馬郡.【大文或云悉伏】]

11월에 안승의 조카뻘[族子]되는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 있으면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잡혀 죽었다. 남은 무리들은 대문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서 관리들을 죽이고 읍(邑)을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군사들에게 명해 이를 토벌하였다. 맞서 싸우던 당주(幢主) 핍실(逼實)이 전사하였다. 그 성을 함락시키고 그곳 사람들을 나라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기며,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대문을 혹은 실복(悉伏)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 권제8, 신라본기8, 신문왕 4년(684년)


 보덕국의 고려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자신들의 나라를 부흥시켜주기는커녕, 신라의 일개 군으로 자신들을 편입시키려는 신라인들에게 고려인들은 반기를 들었고, 이를 눈치챈 신라는 안승을 대신해 보덕국 안에 남아있던 고려인들의 지도자 대문을 붙잡아 죽임으로서 고려인들의 저항의지를 꺾으려 했다. 하지만 대문의 처형은 보덕국 안의 고려인들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결과만 초래하고 말았다. 《삼국사》에서는 이때 보덕국의 고려인들을 이끈 것이 대문, 혹은 실복이라고 했는데, 《삼국사》 김영윤열전에 기록된 바 대문의 뒤를 이어 실복이 고려인들을 이끌고 보덕국 안에 남아있던 신라 관리들을 죽여버리고 반란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때의 보덕국 쟁란은 신라가 그들을 진압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 전투의 실상은 알려지지 않고 지금의 빈약한 내 글솜씨로는 그때의 전투를 되살릴만한 능력도 없다. 다른 반란이 늘 그렇듯, 그 이면은 처절한 항쟁과 치열한 싸움, 그리고 숱한 이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김영윤열전에는 김영윤이 황금서당(黃衿誓幢)의 보기감(步騎監)으로서 출전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황금서당은 앞서 말한 것처럼 고려인들로 편재된 부대다. 전형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가잠성(椵岑城)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이르러 김영윤이 이끄는 황금서당의 보병들은 보덕국 고려인들에게 궤멸당한 듯 보이지만, 일단 조정에서는 보덕국에 대한 사면포위전략을 구사했고, 항쟁 끝에 보덕국의 치소였던 금마저성은 함락되었다. 


 신라 조정은 보덕국 유민들을 다시 신라 남쪽의 주와 군으로 뿔뿔이 흩어 놓았다. 보덕국 주민들 가운데는 신라 9서당의 한 부대로 편재되는 일도 있었는데, 벽황(碧黃)색 금(衿)을 쓰는 벽금서당(碧衿誓幢)과 적흑(赤黑)색 금을 쓰는 적금서당(赤衿誓幢)이 그것인데, 설치 자체는 신문왕 6년(686년) 옛 고려의 관인들에게 신라의 관등을 수여하던 때의 일이다. 요동에서도 한반도에서도 '망국' 고려의 유민들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옮겨다니는 부평초와도 같은 신세였다. 당에 끌려간 유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라로 온 이들의 삶도 신라라는 거대한 국가의 질서에 순응해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 천무 천황 14년(685년) 9월 계해(20일)에 4개월의 사행(使行)을 마치고 신라로부터 돌아온 견고려사 미와노 히키타노기미(三輪引田君) 나니와마로(難波麻呂)와 쿠와바라노무라지(桑原連) 히토타리(人足)는 자신들이 신라에서 지켜본 모든 것을 보고했다. 그것은 고려 유민들의 마지막 구심점이었던 보덕국의 완전한 종말이었다. 이로부터 7일 뒤에 일본 조정은 귀화한 고려인들에게 차등있게 녹을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보덕국에서 귀화한 사람들일 것이다. 보덕국을 신라의 일개 군현으로 편재하려는 신문왕에게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좌절하고 말았던 고려 유민들은, 또 한번 망국의 울분을 삼키며 옆나라 일본으로 떠났다.


 보덕국의 종말과 관련이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삼국사》 및 《당서》는 수공(垂拱) 2년(686년)에 보장왕의 손자인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보원은 성력(聖曆) 초년(698년)에 다시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을 거쳐 충성국왕(忠誠國王)이라는 이름으로 안동의 옛 부를 통치하게 되었지만 실제 부임지에는 가지도 않았다. 대신 이듬해에 당 조정이 다시 보장왕의 아들인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점차 나라를 이루었다고만 되어 있다. 고보원의 조선군왕 임명이 하필 보덕국 멸망 이후로 되어 있는 점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보덕국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허수아비같은 나라는 아니었다는 반증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고려'라는 이름을 가지고 '고려인'들이 주축이 된 유일한 '나라'였다는 점에서는.


[神文王六年, 以高句麗人授京官, 量本國官品授之. 一吉湌本主簿. 沙湌本大相. 級湌本位頭大兄 · 從大相. 奈麻本小相 · 狄相. 大舍本小兄. 舍知本諸兄. 吉次本先人. 烏知本自位.]

신문왕 6년(686)에 고려 사람에게 경관(京官)을 주었는데, 본국에서의 관품을 헤아려 주었다. 일길찬은 본국의 주부(主簿)였다. 사찬은 본국의 대상(大相)이었다. 급찬은 본국의 위두대형(位頭大兄) · 종대상(從大相)이었다. 나마는 본국의 소상(小相) · 적상(狄相)이었다. 대사는 본국의 소형(小兄)이었다. 사지는 본국의 제형(諸兄)이었다. 길차는 본국의 선인(先人)이었다. 오지는 본국의 자위(自位)였다.

《삼국사》 권제40, 잡지9, 직관, 신라조, 고구려인위(高句麗人位)


 옛 고려 관료들이 신라로부터 받은 관직을 정리해보자면,


고려 주부(主簿)→신라 일길찬(7위)

고려 대상(大相)→신라 사찬(8위)

고려 위두대형 및 종대상→신라 급찬(9위)

고려 소상 및 적상→신라 나마(11위)

고려 소형(小兄)→신라 대사(12위)

고려 제형(諸兄)→신라 사지(13위)

고려 선인(仙人)→신라 길차(14위)

고려 자위(自位)→신라 오지(15위)


 신라 10위 대나마를 빼고 보자면 순서대로 내려간 것을 봐서 뭔가 나름의 법칙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는지는 내 머리로는 분명하게 이해를 잘 못하겠다. 하지만 7위 일길찬이나 15위 오지까지의 관직들을 보자면, 대개 신라에서 6두품부터 4두품까지의 귀척들이 맡았던 벼슬이니만큼, 신라에서 그들에게 최고 6두품까지의 대우를 해주었다는 의미로 봐도 될듯 싶다.


 하지만 신라인들이 보덕국인들과 고려인들에게 내려준 관직은 아무리 높아도 7위 일길찬, 낮으면 15위 오지. 백제보다 우대가 좋았다고는 해도 6두품 정도다. 최치원이나 설총과 맞먹는 지위. 고려인과 보덕성민, 그리고 말갈인으로 만든 부대의 장교직들의 벼슬도 골품에 따라 제한이 있었는데,


 최고 사령관격인 장군은 최소 9위 급찬부터 최대 1품 각간까지,

 부사령관격인 대관대감은 13위 사지부터 6위 아찬까지,

 그 아래인 대대감은 11위 나마부터 아찬까지,

 그 아래 제감은사지부터 10위 대나마까지,

 감사지는 13위 사지부터 12위 대사까지,

 소감과 화척은 대사 이하의 관품을 가진 자들로 임명했다.


 고려인들에게 내려진 최고 관위가 7위 일길찬이니 고려인으로서 최고 사령관격인 장군직에 오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 싶지만, 골품주의의 신라에서 1품 각간들이 7품 일길찬을 장군으로 대하기야 할까? 같은 장군이라고 해도 신라 귀척, 그것도 진골 각간 출신의 장군과 고려계 유민 출신의 7품 일길찬은 같은 대우를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신라계 귀척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을 수도 있다. 가야계라는 이유로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혼인할 때에 반대받았던 일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신라 왕실은 고려나 백제의 유민들에게도, 가야 유민들에게 그랬던 것과 같은 왕실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다. 진골 귀척들을 배제하고 어떻게든 왕에게 다가가 그들의 권리를 최대한 넓히기 위해서는 왕실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금관가야계 김유신의 3대에 걸친 신라 조정에 대한 충성과 그에 대한 대가가 그것을 보여준다. 왕에게 있어 자신의 권한을 어떻게든 누르고 제동 걸려는 진골 귀척들은 눈엣가시같은 존재이면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골품을 내세우며 외래귀척들에게 배타적인 그들과 고려, 백제 및 가야 유민들은 상호간에 별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것이 없으니 혹여 그들과 유착할 우려도 없고, 더구나 이국 안에서 그들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집안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못 할 것이 없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을 잘만 이용하면 왕에게만 충성하는 우수한 군사 조직을 갖출 수 있고, 진골 귀척들의 득세를 막아 왕의 힘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 


 보덕국 유민들은 그들의 꼭두각시 나라가 존재할 때는 외세를 막는 총알받이였고, 나라가 없어진 뒤에는 체제를 유지하는 홍위병 신세가 되었다. 일본으로 떠나간 자들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덕국이 멸망한 뒤에 일본의 사신을 따라 일본으로 간 사람들 말고도, 《일본서기》에는 지통 천황(持統天皇) 주조(朱鳥) 원년(686년) 윤12월에 츠쿠시다자이(筑紫大宰)에서 고려, 백제, 신라의 백성, 남녀와 승니 합쳐 62명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꾸역꾸역 이주해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일도 아니다. 땅은 한정되어 있고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른다. 많은 사람들을 관리할 수 있을 만큼 일본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정국이 안정되었다거나 중앙집권제가 완벽하게 정비된 것도 아니다. 일본 조정은 점차, 저들을 어떻게든 돌려보내기보다는 어떻게든 써먹을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황무지, 개간이 필요한 땅만 골라서 그들을 보내는 것이었다. 지통 천황 원년(687년) 3월 기묘(15일)조에는 귀화한 고려인 56명을 히타치노쿠니(常陸國)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의 일본 관동 동북쪽의 이바라키 현에 해당하는 히타치는 지금은 도쿄 근교에 위치해 있어 수도권에 속하지만, 7세기만 하더라도 척박하기 그지없는 황무지였다.


 남의 나라 땅에서 산다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곳에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말도 다르고, 살아온 풍속도 다른 그들이 낯선 땅에서 정착하는 방법은 그곳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하는 일이었다. 일본 조정이 원하는 것은 동쪽 땅에 대한 개척. 그리고 그곳의 비옥한 농토화였다. 고려인들은 일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하라는 대로 낯선 땅에서 살며 척박한 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드는 일을 자원하고 앞장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六月己未朔, 詔高麗沙門福嘉還俗.]

6월 기미 초하루에 조하여 고려의 승려[沙門] 복가(福嘉)를 환속시켰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제30, 지통기(持統紀) 7년(693년)


 《일본서기》에서 '고려'라는 나라와 관련해 나오는 최후의 기록. 이후 일본의 사료에서는 고려라는 나라의 이름이 나오지 않다가, 불과 5년 만에 발해의 건국 및 사신 파견과 함께 다시 고려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발해의 건국, 고려의 후계를 자처하는 새로운 나라의 존재는 아마 척박한 땅을 일구며 고향을 그리워하던 고려인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무너진 줄 알았던 나라가 다시 일어섰으니까. 힘들면 언제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그리고 마음 먹으면 언제든 쉴 수 있다는 건, 소박해보이지만 얼마나 중요한 꿈이자 소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