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 편람<6>발해와 일본

2018. 2. 16. 16:46우리 역사 바로알기


      


 발해인들이 문왕(文王)이라는 묘호를 올렸던 대흠무(大欽茂)는 자신이 즉위한 무인년(738년)의 새로운 연호를 대흥(大興) 원년으로 정했다. '크게 떨쳐 일어난다'는 뜻이다. 아버지이자 선대 가독부(황제) 무왕의 강력한 왕권을 이어받은 그가 선포한 이 연호처럼, 발해라는 나라는 흠무왕의 손에서 황금기를 맞이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대흥 원년에 해당하는 당 현종 개원 26년, 신라 효성왕 2년 태세 무인(738) 3월에 당은 등주(登州)의 뱃길을 따라 내시 단수간(段守簡)을 보내왔다. 무왕이 장문휴를 시켜 공격했던 등주에 당은 발해관이라는 것을 설치해 발해 사신들의 영접소로 삼았던 것이다. 5월에 도착한 그는 흠무왕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는 의례를 거쳤다. 당은 예전에 외교기밀(발해의 망명객 대문예를 빼돌렸다는)이 발해로 새는 바람에 쓴맛을 본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았고, 그래서인지 흠무왕 이후로는 시어사나 낭장 대신 내시를 보내서 화답했다. 지금이야 '내시'라고 하면 거세된 고자 즉 환관을 떠올리지만, '내시=환관'이라는 공식이 성립된 것은 고려조 이후부터이고, 당조에서 내시란 천자의 좌우에 드나들 수 있는 최측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해에 발해에서는 대대적인 사면령이 내려졌고, 거듭 흠무왕에게 정3품 좌금오위대장군(左金吾衛大將軍)의 직이 주어졌다. 《구당서》나 《당회요》에도 좌금오위대장군이라는 흠무왕의 직위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727년 9월에 데와에 온 발해의 사신들을 좌금오위대장군이라 불렀음을 일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것은 772년의 고닌 천황의 발언에서 나온 것이고 흠무왕이 즉위하고 30년은 족히 지난 뒤의 회고라서 현재 사실과 과거 사실이 서로 헷갈렸을 수도 있다. 흠무왕의 좌금오위대장군 책봉과 관련해서 대흥 원년 윤8월, 《책부원귀》는 윤8월에 발해에서 온 사신이 표서피(豹鼠皮) 1천 장과 함께 말린 문어(文魚) 100마리를 바쳤다고 전하고 있는데, 《구당서》에는 또 단수간이 귀국하면서 따라 들어온 발해의 사신이 당조의 법령인 《당례(唐禮)》 및 진수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晉書)》를 베껴가기를 청했고 이걸 허락해주었다고 했다(《해동역사》에서는 이것이 인안 말년에서 대흥 원년ㅡ서기 738년 사이에 있었던 사건임은 분명하지만 자세한 날짜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겠다고 적었다). 발해에서 당조의 법령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이웃한 신라에 비해 늦어도 꽤 늦은 축에 속했다. 신문왕 6년(686) 측천무후가 신라 조정의 요청으로 공문서양식 및 유교제례에 대한 《길흉요례(吉凶要禮)》와 《문관사림(文館詞林)》을 50권으로 축약해 베껴준 것이 벌써 50년이 다 되어가고, 《진서》는 한정판 초판본 두 본 가운데 하나를 김춘추가 받아왔으니까 (다른 하나는 당 태종의 황태자가 가졌고) 정치적인 이유로 유교를 본격적으로 도입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신라보다 발해가 좀 뒤처지긴 했다. 하긴 그때는 발해라는 나라가 서기도 전이니까.

 

 대흥 2년(739년)에 흠무왕은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매[鷹]를 바쳤고, 2월 정미에는 동생 대욱진(大勗進)을 당에 보내 조회하게 했다. 대욱진은 그 달 기사일부터 닷새 동안 황궁 내전에서 열렸던 특별한 연회에서 군신들이 현종에게 개원성문신무황제(開元聖文神武皇帝)라는 존호를 올리고 전역에 대사면령을 내리는 것과, 3품 이상 관료는 각기 작(爵) 1급씩을 하사받고, 4품 이상에게는 1계를 하사받는 자리를 지켜보았다. 천자가 존호를 받은 일과 관련해 백성들의 세금은 면제되었으며, 번신(藩臣)의 자격으로 참석했던 대욱진에게도 정3품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원외치동정(員外置同正)이라는 벼슬과 함께 자포(紫袍)와 금대(金帶) 및 백(帛) 100필이 하사되었다. 당 현종의 숙위(宿衛)가 된 것이다. 그리고 10월 을해(16일)에 흠무왕은 우복자(優福子)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 무엇인가를 사은(思恩), 즉 '은혜에 감사한' 일이 있는데,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는 그것이 흠무왕에게 좌금오위대장군 지위가 내려진 것에 대한 감사표시가 아니었을까 추측하였다. 즉 흠무왕이 좌금오위대장군이라는 3품의 지위를 받은 것은 왕제 대욱진의 파견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해동역사》에는 수복자(受福子)로도 기록된 발해의 사신 우복자는 당으로부터 과의(果毅) 벼슬과 함께 자주색 옷과 은색 허리띠를 하사받아 본국으로 돌아왔다.


 대흥 원년에 당에서 왔던 단수간의 수행원 중에는 일본의 입당사판관(入唐使判官) 외종5위하 헤구리노 히로나리(平郡廣成)라는 사람이 끼어 있었다. 아직 무왕이 다스리고 있었던 733년에 견당대사 다지히노 히로나리(多治比廣成)를 따라 당에 들어왔던 그는 1년 뒤 10월에 일을 마치고 일본으로 향했지만, 소주(蘇州)를 출발한 네 척의 견당사선은 갑작스런 악풍을 만나 흩어지고 말았고(이 시대의 일본 견당사들에게는 드문 일도 아니었다) 히로나리를 비롯해 115명이 타고 있던 견당사선은 가까스로 곤륜국(崑崙國)ㅡ지금의 동남아시아 지역 말레이 반도에 닿았다. 곤륜국은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모두 잡아 가두었고,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힌 이들 가운데 90여 명은 천연두에 걸려 죽는 와중에 히로나리를 비롯한 네 사람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곤륜국 왕의 눈에 들어 얼마 간의 양식을 받고 오지에 안치되는 처분을 받았다. 

 일본으로 향한 그들 견당사들이 곤륜국에 잡혀있음을 당의 흠주(欽州)에서 알게 된 것은 1년 만의 일이었다. 당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와 다시 당으로 들어간 히로나리는 마침 일본에서 와있던 또 한 명의 유학생,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滿)를 만났다. 나카마로의 호소로 발해로 가는 사신의 수행원으로서 일본으로 돌아갈 길이 트인 히로나리는 등주로 해서 바다로 들어가는 단수간의 사신단에 끼어 발해에 왔고, 기구한 사연을 들은 흠무왕은 배를 마련해 이듬해 봄에 돌려보낼 뜻을 비쳤지만, 히로나리는 기어이 올해 안에 돌아가겠다고 흠무왕에게 고집을 부렸다. 히로나리의 고집은 비해(沸海) 즉 동해 바다에서 발해 사신단의 대사(大使) 충무장군(忠武將軍) 서요덕(胥要徳) 등 4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히로나리 등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6년 만에, 동북쪽의 데와(出羽)에 닿음으로서 고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7월 계묘(13일)에야 발해의 사신인 부사(副使) 약홀주도독(若忽州都督) 기소몽(己珎蒙) 등은 일본에 들어왔다. 당의 무산계 45위 가운데 귀덕대장군과 함께 종3품상(上)의 관위에 해당하던 운휘장군(雲麾將軍)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기소몽은 석 달이 지난 10월 병술(27일)에야 데와에서 온 헤구리노 히로나리와 함께 일본의 수도로 갈 수 있었다. 11월 신묘(3일), 헤구리노 히로나리는 드디어 수도 헤이조쿄에 입성했다.

<헤이조쿄가 있었던 일본 나라 시의 주작문(복원)>

 

 헤구리노 히로나리의 이야기는 이 시대 일본 견당사들이 겪었던 고난을 상징한다. 나카마로를 비롯한 대부분의 견당사들은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넜다. 일본의 배는 거대한 바다를 헤치고 중국까지 가기에는 기술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너무도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의 문물을 들여와 자신들의 나라에 전하고, 아울러 자신의 지위를 높여 출세해 보겠다는 마음을 품은 호족 자제들, 먼 길을 거쳐 서역에서 범어로 된 불교경전을 가져와 당에 퍼뜨린 현장법사처럼 소위 '구법(求法)'의 뜻을 높이 세운 승려들은 목숨을 걸고 그 조각배보다도 못한 배에 자신들의 몸을 실었다. 일본의 배로 당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당에 가고자 했고, 실제로 당으로 가는 일본의 호족 자제나 승려들, 특히 승려들이 가장 많이 택한 대당항로는 신라나 발해의 길을 경유하는 것이었고, 사이가 좋지 못했던 신라를 차치하고, 우호국이었던 발해의 뱃길을 따라 당으로 가는 것이 일본의 허술한 배를 타고 목숨 건 도박항해를 하는 것보다는 더 안전한 방법이었다.

 

 12월 무진(10일), 기진몽 등은 발해에서 가져온 범가죽[大蟲皮]와 큰곰가죽[羆皮] 각 일곱 장, 표범가죽[豹皮] 여섯 장, 인삼(人蔘) 서른 근, 꿀[蜜] 세 말[斛]이라는 방물과 함께 흠무왕의 계문을 올렸는데, 아버지가 보냈던 국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아버지 무왕이 왜왕을 '대왕'이라고 부른 것과는 달리 흠무왕은 번듯하게 '천황(天皇)'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듬해인 대흥 3년(740년) 정월 무자(1일). 대극전에 행차한 천황은 발해에서 온 사신 기진몽이 신라학어(新羅學語), 즉 신라에서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온 통역관지망생이 나란히 서있는 것을 보았다. 정월 조회의 정식 참석자로는 보기 어려운 지위임에도 마침 정월 조회에서 발해의 사신 옆에 가서 서있었던 것이 발해 사신의 말을 통역해주기 위해서였다면 두 나라 사람들은 통역도 필요없을 정도로 언어가 비슷했다는 반증일까 싶지만, 속단할 수는 없다. 명색이 통역관을 꿈꾸는 학생이 설마 일본어 하나만 알고 있었을까.

 

 헤구리노 히로나리를 데려온 발해의 사신들에게 일본 조정은 몹시 융숭한 대접을 행했다. 갑오(7일)에 기진몽 등은 관위를 받고 조당(朝堂)에서 잔치도 받았으며, 기진몽에게는 미노의 시(絁) 20정과 면 10정, 실 50궤, 조면 2백 둔이 내려졌다. 흠무왕에게는 미노(美濃)의 시(絁) 30정, 견(絹) 30정, 실[絲] 150궤, 조면(調綿) 3백 둔이 선물로 보내졌다. 아흐레 뒤인 16일에 사신들은 다시 조당에서 대접받았고, 17일에는 대극전(大極殿) 남문에서 열린 5위 이상만이 모이는 활쏘기 경합에도 참가했다. 동해에서 죽은 서요덕에게도 종2위가 내려졌을 뿐 아니라, 관위도 없는 일개 수령에 불과했던 기알기몽(己閼棄蒙)에게도 종5위하(下)라는 벼슬과 함께 조포(調布) 115단과 용포(庸布) 60단이 주어졌다. 정사(30일)에는 중궁 각문(閤門)에 행차한 천황 앞에서 기진몽 등이 본국악 즉 발해악을 연주하고서 천황으로부터 포백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발해의 음악은 지금 전하는 것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몇몇 기록을 보면 발해의 음악은 무곡(巫曲) 즉 무속과 관련한 노래가 많았다고. 2006년인가 그때 인천방송에서 발해 역사를 추적한 다큐멘터리 <한·중·일·러 추적 보고-왕국의 부활>에서 일본에 전해진 발해악 네 소절을 복원해 배경음악으로 썼다던데, 방송국이 폐지가 되는 바람에.

 

 대흥 3년 2월 을미(2일), 기진몽 등은 일본의 견발해대사(遣渤海大使) 외종5위하(下) 오오토모노 이누카이(大伴犬養)와 함께 본국으로 떠났다.


출처: http://outsiderhistory.tistory.com/46?category=478429 [버려진 역사의 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