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21. 19:35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집안의 장군총은 고구려 장수왕릉이 아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압록강 너머 길림성 집안에 거의 모든 고구려왕들의 능이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상황을 전혀 모르는 엉터리 주장이다.
고구려는 지금의 요하 동쪽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최소한 북경을 지나 태행산맥 부근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서기 342년 8월에 평양성에서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평양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이었고, 환도성은 북경 창평이었다.
이때 고국원왕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은 중국이 통일왕조인 서진이 사라지고 5호16국으로 쪼개져 혼란스러워지자 고구려가 중국 쪽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평양성보다 중국에 가까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다.
☆ 우리는 지금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 하고, 국내성을 집안이라 하며, 환도성을 압록강 부근에서 찾고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고구려의 졸본은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 부근, 국내성은 북경 북쪽 유리묘가 있는 탕하구 부근, 환도성은 북경 창평, 평양성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열하행궁을 말하는 것이고, 평양동황성은 호태왕비가 서있는 집안, 장안성은 북한 평양이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의 서쪽에 위치해 있던 연나라도 중원으로 진출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강력한 세력인 고구려가 배후에 버티고 있으니 연나라로서는 마음놓고 남하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연나라의 모용황은 먼저 고구려를 공격해 세력을 약화시켜 놓은 다음에 남진하는 것이 작전상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342년 10월에 먼저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다.
연나라에서 고구려를 침공하는 길은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북쪽 길은 넓고 평탄했고, 남쪽 길은 좁고 험했다고 한다.
그런데 모용황은 정예군 4만을 이끌고 조용하게 남쪽 길로 향하고, 따로 1만 5천의 군사로 하여금 요란스럽게 떠들며 북쪽 길로 향하게 한다.
그러자 고구려는 연나라가 평탄한 북쪽 길로 침공해 온다고 생각하여, 주력군 5만을 북쪽 길에 배치하고, 왕은 소규모의 방어군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게 된다. 그리하여 모용황이 직접 이끄는 4만의 대군을 맞은 고국원왕이 이끄는 소규모의 고구려군은 패전하게 되고, 도읍인 환도성도 함락 당하게 되어 343년 7월 멀리 평양동황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이때 옮긴 평양동황성의 위치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북한 평양의 동쪽에 평양동황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는 북한 평양 동쪽에서 평양동황성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16대 고국원왕이 환도성으로부터 평양동황성으로 도읍을 옮긴 343년 이후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19대 광개토대왕을 지나 20대 장수왕 15년(A.D.427)에 이르러 84년 만에 도읍을 다시 평양성으로 옮기게 되고, 지금 집안에는 19대 광개토대왕의 능인 태왕릉과 호태왕비가 서 있고, 그 가까이에는 우리가 지금 장군총이라 부르는 사각 석조건축물도 있고, 부근에는 고구려식 적석분들이 즐비하다.
왕릉은 대개 당시의 도읍 부근에 조성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관례라고 볼 때
이를 감안하여 추정해 보면 광개토대왕은 지금의 집안에서 죽어 그 부근에 묻혔다고 볼 수 있고, 장수왕의 아버지인 광개토대왕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 평양동황성이었으므로 지금의 압록강 너머 집안은 평양동황성이지 국내성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집안에는 평양동황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죽은 16대, 17대, 18대, 19대 왕의 능이 조성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16대 고국원왕은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침공을 받고 평양성 전투 중에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되어 당시의 도읍 평양동황성이 아닌 평양성 부근에 묻히게 되고, 20대 장수왕 역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평양성에서 죽어 그 부근에 묻혔으므로 지금의 집안에 장수왕의 능은 있을 수 없다.
☆ 장수왕의 능의 위치는 현재 출간 과정 중에 있는 필자의 저서
"고구려 역사의 특급비밀"에서 밝힐 것이다.
따라서 지금 집안에는 왕릉으로는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19대 광개토대왕의 세 왕의 능만이 조성되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우리가 지금 장군총이라 부르는 피라밋형 계단식 사각 석조건축물이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 장군총이 바로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능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물론 장군총은 언뜻 보면 돌을 잘 다듬어 쌓았고, 규모도 크며, 호태왕비에서 약 1.5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왕릉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곳이 왕릉이라면 왕의 시신을 안치했을 현실에서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벽화 등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벽화를 그린 흔적도 없고 바닥도 웬지 좀 엉성하다.
이는 그곳에 벽화를 그리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왕릉을 조성하면서 왕이 아닌 귀족들도 무덤 안에 벽화를 화려하게 그려 생전의 영화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염원했는데, 하물며 왕릉을 조성하면서 호족들의 무덤보다도 구조가 엉성하고 또 벽화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매우 곤란하며 태왕릉에 비해 규모도 현격하게 작다.
따라서 그곳은 왕릉으로 보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고구려 사람들은 무슨 용도로 쓰려고 그렇게 웅장한 석조건축물을 만들었을까?
그 석조물이 호태왕릉과 호태왕비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과 관련 있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바로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2-3년 간 육탈을 시킨 후 뼈를 간추려 매장하는 절차를 거쳤다.
백제 무령왕의 경우 출토된 지석에 의하면 그가 서기 523년 5월 7일에 죽었으나 525년 8월 12일에 이르러서야 능을 만들어 안치했고, 왕비 역시 526년 12월에 죽었으나 529년 2월 12일에 이르러서야 무령왕릉에 합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고구려에서도 왕이나 왕비의 장례는 같은 절차를 거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왕이나 왕비의 시신을 육탈 시킬 장소가 필요한데, 신성한 존재인 왕이나 왕비의 시신을 아무 곳에 방치한 채 육탈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고, 궁중 안에 그 시신을 놓아 둘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장군총이라 부르는 그 석조건축물은 왕의 시신을 육탈 시키는 장소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그 석조건축물은 어느 특정한 왕의 시신만을 육탈 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 사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 본 블로그 "경주의 첨성대는 정말 천문대였을까?" 참조
그렇다면 그 건축물은 고구려 16대 고국원왕이 평양동황성으로 도읍을 옮긴 343년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17대 소수림왕과 그 왕비가 죽자 그곳에서 육탈 시킨 후 능을 만들어 안치했을 것이고, 18대 고국양왕과 왕비가 죽자 역시 그곳에서 육탈 시킨 후 능을 만들어 안치했을 것이며, 19대 광개토대왕이 죽자 역시 그곳에서 일단 육탈 시킨 후 그 곳으로부터 1.8km 떨어진 곳에 태왕릉을 만들어 안치했을 것이다.
즉 광개토대왕이 413년 10월에 죽자 그 아들인 장수왕은 그 석조건축물의 현실에 호태왕의 시신을 넣어 육탈을 시키고, 육탈을 기다리는 그 사이에 능을 만들고 414년 9월 29일에 호태왕비를 세웠으며, 그 다음 해인 을묘년(A.D.415)에는 육탈된 뼈를 간추려 호태왕릉에 안치하고 능 완공 기념으로 솥(경주에서 출토된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 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솥)을 만들어 호족들에게 나누어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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