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 편람<4>개창(開創)

2018. 2. 16. 16:44우리 역사 바로알기



       


 《발해고》의 판본은 현재 우리 나라에 두 종류가 현존하고 있다. 지금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한권짜리와 네권짜리로 말할 것도 없이 네권짜리가 나중에 재편집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유통되는 《발해고》의 판본은 조선고서광문회 이래로 모두 한 권짜리 《발해고》를 갖고 번역된 것인데, 이건 《발해고》라는 이름으로 독립된 책으로 엮여있어서 그런 듯 하다. 네 권짜리 《발해고》는 《영재서종(泠齋書種)》이라는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둘다 필사본이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유득공의 저술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다(유득공의 다른 호로 영재가 있었음). 


 유득공은 《발해고》를 일단 완성한 다음, 나중에 자료를 더 모아 수정을 가했다. 남아있는 두 판본을 보면 네 권짜리 《발해고》의 본문 전체분량이 한 권짜리보다 35% 정도 늘어나 있는데, 특히 발해의 지리에 대해 고증한 지리고의 내용이 세부목차 설정까지 될 정도로 대폭 늘어나 있다. 목차구성도, 한 권짜리는 왕계도와 박제가ㆍ유득공의 서문 및 간단한 목록과 인용한 책의 목록이 실려있는데 네 권짜리는 다 빠지고 발해 5경에 대한 도표에 목록이 좀더 상세해졌다. 실린 내용이 달라졌고 의장고는 품복(品服)이 신설된 직관고에 편입되었으며 물산고ㆍ국어고는 빠졌고, 국서에 관한 국서고(國書考)는 네권짜리 《발해고》에는 예문고(藝文考)로 바뀌었고, 발해 후신들에 대한 속국고(屬國考)는 부정안국고(附定安國考)로 바뀌었는데 유득공 자신의 견해가 곁들여져 있다. 한 권짜리를 네 권짜리로 늘려 적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발해사에 대한 본인의 늘어난 자신감이 가미되지 않았을까. 아직 번역본은커녕 원본사진도 못 봤지만 나중에 공개가 된다면 꼭 먼저 읽어보고 싶다.


걸걸중상과 대조영 그리고 대씨

 

 서론이 길었고 아무튼 이 책을 갖고 일단 발해의 역사를 한번 가만히 짚어보자. 흔히 우리는 발해를 세운 사람 하면 대조영을 먼저 떠올리지만 《발해고》는 대조영의 아버지라는 걸걸중상이라는 자를 가장 먼저 꼽는다.


[震國公姓大氏, 名乞乞仲像, 粟末靺鞨人也. 粟末靺鞨者, 臣於高句麗者也. 或言大氏. 出自大庭氏. 東夷之有大氏自大連始也.]

진국공(震國公)의 성은 대씨,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像)이며, 속말말갈(粟末靺鞨) 사람이다. 속말말갈은 고려의 신하되었던 자들이다. 혹은 대(大)씨라고도 했다. 대정(大庭)씨에게서 나왔다. 동이에 대씨가 있은 것은 대연(大連)에서 시작되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진국공(震國公)


 제일 골치 아픈 구절이었다. 발해의 조상이 속말말갈이라는 것. 이것은 오늘날 발해사의 귀속 문제를 놓고 한국과 중국, 북한, 러시아 학자들이 서로 의견이 상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중국의 정사 기록으로서 발해의 계통에 대해 적어놓은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 두 책이 있는데, 이 두 책은 발해라는 나라에 대해서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高麗旣滅, 祚榮率家屬徙居營州]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 고려가 이미 멸망하였으나 조영은 가속을 이끌고 영주로 가서 살았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渤海, 本粟末靺鞨. 附高麗者. 姓大氏.]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이다. 고려에 더부살이하던 족속들이다. 성은 대씨이다.

《신당서》 발해전


 유득공은《발해고》를 쓸 때에 《구당서》와 《신당서》둘 중에서 《신당서》를 기본자료로 채택하고, 발해를 속말말갈로 서술했다. 발해라는 나라의 종족 구성이 상류층과 하류층으로 나뉘어 있고 두 종족이 서로 다른 종족이라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지만, 상류층의 종족구성에 대해 설명할 때 우리는 《구당서》,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에서는 《신당서》를 채택해 발해의 종족 구성을 설명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더욱이 중국에서는 발해를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기 때문에, 발해를 어떻게든 깎아내릴 만한 소지를 제공하는 《신당서》를 내세워 발해는 중국의 왕조라고 밀어붙이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동북공정.


 '고려의 별종'. '별종'이라는 말은 고려에 대해서도 《삼국지》에서 '부여의 별종'이라고 해서 이미 써먹은 바다. 고려의 건국조인 추모가 바로 부여 출신이었기에 부여의 별종이라고 부른 것이다. 기형이니 완전 다른 종류니 하는 의미로 쓴게 아니라, '다른 갈래', '떨어져 나간 집단'이라는 의미다. 백제에 대해서도, 마한의 속국이자 '부여의 별종'이라고,《양서(梁書)》에 적어놨다(백제도 따지고보면 졸본부여의 왕자가 세운 국가로 고려와는 동종이 아니던가).


'대조영'과 '대씨'


 그런데 《해동역사》를 보다가 《송막기문》에 실린 글을 읽게 되었다.


 발해국은 연경(燕京)이나 여진이 도읍한 곳에서 모두 1천 5백 리 떨어져 있는데, 돌로 성을 쌓았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까지 아울렀다. 왕의 성은 대씨(大氏)이며, 대성(大姓)으로는 고씨(高氏)ㆍ장씨(張氏)ㆍ두씨(竇氏)ㆍ오씨(烏氏)ㆍ이씨(李氏) 등 몇 개에 불과하다. 성씨가 없는 부곡(部曲)과 노비들은 모두그 주인을 따른다. 부인들은 모두 투기가 심하다. 이에 다른 성씨와 서로 결연을 맺어 10자매가 되어 번갈아 가면서 남편들을 기찰하여 측실(側室)을 두거나 유녀(游女)들과 놀지 못하게 하며, 그런 사실이 있다고 들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독살한다. 만약 어떤 남편이 이를 범하였는데도 그 아내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경우에는 나머지 아홉 사람이 함께 모여 욕설을 퍼붓는 등 투기하는 것을 서로 떠벌리면서 자랑한다. 이에 거란이나 여진에는 모두 여창(女娼)이 있고 남편들에게는 모두 작은 마누라나 시비(侍婢)가 있으나, 발해만은 그런 것이 없다. 발해의 남자들은 지모가 뛰어나며 날쌔고 용감하여 다른 나라보다 월등해서, ‘발해 사람 셋이면 호랑이도 당해낸다’는 말까지 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왕 대인선을 멸망시킨 뒤 발해의 명장(名帳) 1천여 호를 연(燕) 지방으로 옮기고는 토지를 나누어 주고 세금을 줄여 주었으며, 왕래하여 무역하면서 시장에서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이 선봉에 서게 하였다. 천조제(天祚帝)의 변란 때 발해의 무리들이 모여 예전에 발해의 도성이 있던 지역에서 대씨 성을 가진 자를 세워 왕이 되게 하였는데, 금 사람들이 이를 토벌하였다. 그때 금 군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고씨 성을 가진 발해의 귀족이 가족을 팽개치고 금에 가서 항복한 다음 발해의 허실에 대해 모두 말하였다. 성이 함락된 뒤 거란에서 연 지방으로 옮긴 발해 사람들의 숫자가 더욱 불어나 5천여 호나 되었으며, 군사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금 사람들이 이들을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자주 산동(山東) 지방에서 수자리를 살게 하였는데, 매년 수백 가를 옮기는 데 불과하여 신유년에 이르러서야 모두 옮겨 가게 하니, 발해 사람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이들은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편안하게 산 지가 2백 년이 넘어 왕왕 집에 정원을 만들고는 모란을 심었는데, 많은 경우에는 2, 3백 그루나 되었으며 어떤 모란은 수십 줄기가 빽빽하게 자라난 것도 있었는데, 이는 모두 연 지방에는 없는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런 정원들을 겨우 몇만 냥이나 혹은 5천 냥에 헐값으로 팔아버리고 떠나갔다. 옛 발해 지역에 살던 자들은 거란의 지역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옛날에 동경(東京)이 있었던 지역에 유수(留守)를 두었다. 소주(蘇州)와 부주(扶州) 등이 있었는데, 소주는 중국의 등주(登州)나 청주(靑州)와 아주 가깝게 서로 마주하여 있어서 바람이 잔잔한 날이면 개와 닭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이 책은 남송의 홍호(洪皓)라는 사람이 지은 책으로 정집 1권, 속집 1권으로 되어 있다. 1129년에 여진족 왕조인 금(金)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그가 사신으로 간 목적은예전 '정강의 변' 때에 금에게 잡혀간 북송의 휘종과 흠종의 송환 문제를 교섭하기 위한 것이었다.금은 앞서북송의 항복한 장수 유예에게 세워준 허수아비 괴뢰왕조인 제(齊)에서 일할 것을 그에게강요했지만 홍호는 그것을 거부했고, 때문에 그는 북만주로 끌려가 10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돌아와서 그는그 나라의사적(事迹)을 엮어 책으로 기록했고, 그의 장남이 1156년에 간행했다.


 《신당서》가 1044년에 편찬을 시작해 1060년에 완성했으니 《송막기문》이 좀더 늦게 편찬되긴 했지만, 《송막기문》이라는 이 책이 볼만한 것은 저자 본인이 직접 현지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는 것에 있다. 《신당서》는 《구당서》를 모본으로 하되 다른 자료를 수집해서 살을 더 불린 것으로 현지답사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뭐냐면 이 구절.



[部曲奴卑無姓者, 皆從其主.]

성씨가 없는 부곡(部曲)과 노비들은 모두 그 주인을 따른다.


 발해에서는 성씨가 없는 부곡민이나 노비들이 모두 주인의 성씨를 그대로 따라서 쓴다는 것이 저 기록의 요체다.


 발해라는 나라의 상류 지배층은 대개 고려계의 고(高)씨, 장(張)씨, 양(楊)씨, 오(烏)씨, 이(李)씨, 그리고 왕족인 대(大)씨 등이고,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말갈'이라 불리는 종족들이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석. 일본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지은 《유취국사》에 따른 것 같다. 

 "발해의 백성에는 말갈인이 많고 토인(土人)이 적다." 

 여기서 '토인(土人)'은 원주민, 즉 발해 땅에 살던 옛 고려인들을 가리킨다고 본 것이다.


 <새롭게 쓴 발해사>에 보니까, 《유취국사》의 다른 판본 가운데는 토인(土人)을 사인(士人)으로 적은 것도 있단다. 한국에서 발해사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경성대학교 한규철 교수에 의하면 사인(士人)이라는 단어는 '토인'에 비해 지배층의 의미가 있고, '토인'은 토착인이라는 의미가 강해서 오히려 피지배층을 의미하는 단어로 더 많이 쓰는 게 자연스럽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부곡이나 노비들이 사회의 피지배층을 차지한다고 했을 때 그들 대부분은 말갈인이 될 수밖에 없다. 말갈인 부곡민과 노비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주인(고려인)들의 성씨를 그대로 따라서 쓴다고 했으니, 《송막기문》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말갈인들 가운데 발해 황족의 성씨인 대(大)씨를 썼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더구나 속말말갈은 송화강 상류에서 거주하다가 대조영 일가와 함께 영주로 옮겨와 살았고, 송화강 근교에는 발해의 수도인 상경이나 중경, 동경 같은 도심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발해의 지배층, 옛 고려계 귀척들과 발해의 종실들이 많이 살았을 것이다. 그들이 거느린 노비ㅡ말갈인들이 자신들이 섬기던 주인인 고려계 귀인들의 성씨를 따랐다면 분명히 종실인 대씨의 노비로서 주인의 성씨를 따라 대씨로 자신의 성씨를 삼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신당서》의 찬자들은 속말말갈 사람들 중에 발해의 왕성인 대씨를 쓰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발해의 왕족인가 하고 착각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구당서》의 '고려별종'이라는 말과 《신당서》의 '본속말말갈'이라는 말은 서로 상치되는 말도 아니고 틀린 말도 아니다. '고려별종'이라는 말은 발해의 본래 계층, 즉 발해가 고려계에서 나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본속말말갈'이라는 말은 말갈인으로서 고려계 귀인의 성씨를 따른 부곡민과 노비 같은 피지배층을 말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고려에 더부살이했다', '고려에 신하 노릇 했다'는 말도, 《송막기문》의 내용을 따라 "발해의 고려 귀인들 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신하(노비) 노릇했다"고 해석하면 어긋날 것도 상치될 것이 없다(참고로 송 시대에 만들어진 《무경총요》는 "발해는 부여의 별종으로 본래 부여의 땅이다[渤海 夫餘之別種 本夫餘之地]"라고 해서 이번에는 고려가 아닌 부여의 별종으로 적고 있다).


대조영, 그리고 고구려


[高王諱祚榮, 震國公子也. 嘗爲高句麗將, 驍勇善騎射. 及震國公卒, 乞四比羽敗死, 祚榮遁.]

고왕(高王)의 휘는 조영(祚榮)으로 진국공의 아들이다. 일찌기 고려의 장수였으며, 날래고 용감한데다 말 타고 활쏘는 것[騎射]이 뛰어났다. 진국공이 죽고 걸사비우가 전쟁에서 죽자, 조영이 뒤를 이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말이야 바른 말로 사실 발해의 왕으로서 고려와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대조영 때부터다. 아버지 걸걸중상이 고려가 망한 뒤에 영주에 와서 '살았다'는 것과 비교하면, 대조영은 고려에서 '장수'까지 지냈다고 했다. 일단 실질적으로 그는 발해의 초대 건국자다.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본인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대(大)'라는 한문식 외자성씨를 쓰기 시작했다는 정도일까. 걸걸중상은 《구당서》에는 나오지 않고 《신당서》에만 나온다(서로 연관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까지 나왔다). 


 재미있는 것은 발해 관련 기록에서 당의 두우가 지은 《통전》을 빼면, 대부분의 발해 관련 기록에서 발해와 그 왕실 성씨인 대씨 일족에 대해서 악착같이 '말갈'이라고 몰아붙이면서도 유독 대조영 한 사람에 대해서만은 '고구려인' 내지 '고려'와의 연관성을 적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신당서》만 하더라도 고려에 더부살이하던 속말말갈로서의 발해의 성을 대씨라고 했지, 대조영 한 사람을 바로 가리켜서 말갈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발해에 다소 무심했던 조선조에서 펴낸 《고려사》만 해도 발해를 속말말갈이라 부르면서도 정작 건국자 대조영에 대해서만은 '고구려 사람[高句麗人]'이라고 적고 있다. 


[渤海本粟末靺鞨也. 唐武后時, 高句麗人大祚榮走保遼東.]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라 당 무후 때 고구려 사람 대조영이 도망쳐 요동을 차지했다.

《고려사(高麗史)》권1, 태조 8년 가을 9월


 《고려사》뿐 아니라, 《구당서》와 《신당서》, 《오대회요》나 《입당구법순례행기》, 《삼국유사》및 《계원필경》을 보면 '발해'라는 나라와 '대씨' 일족에 대해서는 말갈족의 나라라느니 고려의 잔당들이라느니 하고 갈팡질팡하면서도, 대조영을 설명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일관되게 '고려 사람[高句麗人]'(《고려사》), '고려별종[高麗別種]'(《구당서》) 혹은 '고려의 옛 장수[高麗遺將]'(《신라고기》)라고 하는 식으로 '고려'와의 관계를 빠짐없이 적고 있다. 요컨대 '대씨'라는 성을 칭하는 일족은 후대에 내려가면서 고려인에서 말갈인으로 그 속성에 변화가 있었지만, 대조영 자신은 적어도 '고려인'이라는 속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신당서》에서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더부살이하던 존재"라고 말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대조영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씨 일족 전체에 대한 것이지만, 대씨 일족 전체가 속말말갈이라고 해서 대조영까지 속말말갈인이 될 수도 없는 것이, 앞에서도 말했지만 중간에 대조영의 직계가 끊어져서 양자를 들여 후손을 삼았다는 법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혈연상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선대로부터 이어지는 '계승성'을 말하기 위해 성씨를 사칭하는 것은 예로부터 흔히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말갈족만 해도 《송막기문》에서 증언하는 것처럼 대다수 피지배층이 자기 주인의 성씨를 갖다 쓰는 일도 적지 않았는데, 지배층은 소수 고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대다수 말갈족인 상황에서 말갈족들이 대씨 성을 쓴다고 그들이 모두 대조영의 후손이 되는 것도 아니고, 대조영 자신이 말갈족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협계태씨족보》에는 대조영의 어머니 성이 시(時)씨였다며 꿈에 북두칠성의 정기를 삼키고 그를 잉태했는데, 태어날 때에 온 방에 상서로운 자줏빛 기운이 가득했고, 태어난 아이의 얼굴이 검게 옻칠한 것마냥 번들거리고, 잔등 왼쪽에는 해, 오른쪽에는 달이 새겨져 있었다나? 있는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재미로 스쳐가는 이야기 정도로나 소개할 뿐이다.


건국 시점과 관련한 이설(1) - 영주로의 사민과 보장왕


[唐高宗總章元年, 高句麗滅, 仲象與子祚榮, 率家屬徙居營州, 稱舍利. 舍利者, 契丹語帳官也.]

당 고종 총장 원년(668년)에 고려가 멸망하자, 중상은 아들 조영(祚榮)과 함께 가속을 거느리고 영주(營州)로 옮겨가 살면서 사리(舍利)라 칭했다. 사리란 거란말로 장관(帳官)이라는 뜻이다.

《발해고》 군고(君考), 진국공(震國公)


 많은 사학자들은 걸걸중상 - 대조영 일가가 영주로 사거, 즉 강제이주된 시점을 고려 멸망 직후인 669년의 일로 해석한다. 신ㆍ구《당서》를 비롯해 《당회요》와 《오대회요》같은 대부분의 기록들이 그냥 '고려 멸망 이후'라고만 언급하고 있어서, 669년에 당의 서부와 남부 변경 지대로 옮겼다는 3만여 호의 유민들 가운데 대조영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여겼던 것. 하지만 이들이 이때 옮겨진 곳은 장강(양자강)과 회하 이남, 지금의 호베이와 섬서, 하난, 스촨 및 간쑤 성 최변방에 해당한다. 대조영 일가가 고려 유민으로서 669년에 영주로 강제이주되었다면, 어떻게 30년 동안이나 여기서 줄곧 거주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거란과 말갈이 당의 '기미주' 형태로 집단 거주하던 지역에. 더구나 훗날 거란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고려 유민으로서 독자 세력을 이룰수 있었던 이유까지도.

  

 고려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이 요동주도독 조선왕으로서 요동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옆에는 앞서 강제이주되어 여러 주로 분산되었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옛 고려인들도 있었다. 왕이 구체적으로 언제 말갈과 모반을 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677년과 681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는 정도는 알 수 있다. 보장왕을 견제하기 위해 당조에서 함께 딸려 보냈던 연남생이 679년 5월 29일에 죽고, 10월에 돌궐이 당의 정주를 치면서 해족과 거란족을 꾀어 영주를 치게 했던(이때 토벌군으로 출전한 사람 중에는 남생의 아들 헌성도 있었음) 좀 시끌한 무렵이었다.

 

[高麗ㆍ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ㆍ越, 北撓幽ㆍ燕ㆍ齊ㆍ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貞觀中, 我唐太宗皇帝, 親統六軍渡海, 恭行天罰, 高麗畏威請和. 文皇受降廻蹕. 此際我武烈大王, 請以犬馬之誠, 助定一方之難, 入唐朝謁, 自此而始. 後以高麗ㆍ百濟, 踵前造惡, 武烈入朝請爲鄕導, 至高宗皇帝顯慶五年, 勅蘇定方, 統十道强兵ㆍ樓舡萬隻, 大破百濟, 乃於其地, 置扶餘都督府, 招緝遺氓, 蒞以漢官, 以臭味不同, 屢聞離叛, 遂徙其人於河南. 摠章元年, 命英公徐勣, 破高句麗, 置安東都督府, 至儀鳳三年, 徙其人於河南ㆍ隴右, 高句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爲渤海.]

고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吳)ㆍ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幽)ㆍ연(燕)ㆍ제(齊)ㆍ노(魯)를 휘어 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수황(隋皇)이 통제하지 못하여 요동을 정벌하였고,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당 태종 황제께서 몸소 6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토벌하니 고려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였습니다. 문황(文皇)이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우리 무열대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한 지방의 전난 평정에 도움을 청하여 당에 들어가 조알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고려와 백제가 이전의 악을 계속 짓자 무열왕이 입조하여 그 향도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고종 황제 현경(顯慶) 5년(660)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명하여 10도의 강병과 누선 1만 척을 거느리고 백제를 대파하고, 이어 그 땅에 부여도독부를 두고 유민을 불러 모아 한관(漢官)에게 다스리게 하였는데 성향이 서로 달라 반란을 일으키므로 드디어 그 사람들을 하남으로 옮겼습니다. 총장 원년(668년) 영공(英公) 서적(徐勣)에게 명하여 고려를 깨뜨리고 안동도독부를 두었다가 의봉 3년(678년)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ㆍ농우 지방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고려의 유민들은 모여서 북쪽 태백산 아래를 근거지로 나라를 세워 발해라 하였습니다.

 

 신라의 최치원이 지은 『상태사시중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는 발해의 건국이 678년의 고려 유민의 강제이주과정에서 있었다고 적었는데, 한문문장의 특성(굉장히 오랜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 일을 압축해서 동일시점에서 이어진 것처럼 기술한 것)상 인과관계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사건의 발생순서대로 이리저리 빼먹고 생략해서 서술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정관 연간'으로 시작해 당 태종의 고려 원정 실패, 김춘추의 입당과 나ㆍ당 동맹 체결, 현경 5년(660년)의 백제 멸망부터 웅진도독부 설치와 백제 유민의 반발 및 그 유민들의 하남 이주, 총장 원년과 의봉 3년(2년)조 다음으로 개원 20년조에서도 발해의 등주 공격에서 당의 요청으로 인한 신라의 공격과 실패까지 대체로 개별 사건의 발생시점에 맞춰 연대를 표기했으니, 분명 의봉 3년(2년)이란 시점에 고려 유민들이 모여 발해를 건국했다고 한 것도 뭔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정작 의봉이라는 연호는 3년(678년)이 아닌 2년(677년)까지고, 고려 유민들이 강제 이주된 것도 보장왕이 공주로 소환당한 뒤인 개요 원년(681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최치원은 보장왕이 요동에 보내진 것이 사건의 발단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이렇게 적은 것인듯 하다. 보장왕이 말갈족과 연계해서 당과 맞서려다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다시 공주로 유배되고 다른 유민들도 하남과 농우로 이주되는 와중에 대조영 일가는 영주 땅에 체류하게 됐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말갈발해조에 보면 "의봉 3년(2년)인 고종 무인년(정축년)에 고려의 잔얼들이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태백산 밑에 웅거하며 이름을 발해라 했다[儀鳳三年高宗戊寅, 高麗殘孼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勃海]."는 기록이 나오는데 '고구려'를 '고려'라고 쓴 것, '國號渤海'와 '國號爲渤海'라는 간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최치원이 적은 글귀와 일치한다. 발해의 건국세력에게 677년, 보장왕이 말갈족과 짜고 고려를 부흥시키려 했던 이 시점이 뭔가 중요한 때로 여겨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고려가 멸망할 즈음에 이미 대조영은 고려의 장수였다. 명색이 '장수', 군사를 거느리는 지휘관인데 최소 20대 전후는 되어야 할 것이고, 30년 뒤에 발해가 건국될 무렵에는 쉰살 가까이 되었을 것이며 사망 무렵(718년)에는 일흔줄이었을 게다. 20대는 장수가 되기에는 너무도 젊은 나이이고, 대조영에 대해 《발해고》가 묘사한 바 "용맹이 뛰어나고 용병에 뛰어났다"고 한 것은 쉰이 가까운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을, 대조영의 나이 2, 30대 때에 681년 강제이주되었다고 본다면 논란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점도 대조영이 고려의 장수라고 한 기록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서기 681년에 2, 30대였다고 치면 대조영의 출생은 고려 멸망 6, 7년 전인 661년이나 662년이 될 텐데, 그가 아직 여서일곱살 밖에 안 되었을 때에 고려가 망했다. 여서일곱살 밖에 안 된 아이에게 장수라니 가당키나 한 것인가? 30대라고 쳐도 열대여섯의 나이는 여전히, 장수가 되기에는 경험도 부족하고 어린 나이다. 도대체 누가 대조영에게 '장수'라는 직함을 주었을까.


건국 과정과 관련한 이설(2) - 보덕국의 멸망과 발해


 발해의 건국기년과 관련해 혼선이 또 늘어나는 점은 고려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기록.

 

前麗舊將大祚榮     고려[前麗]의 옛 장수 대조영

得據太白山南城     태백산 남쪽 성에 홀연히 머물렀도다

 

【今南柵城也. 五代史曰 『渤海本粟靺鞨, 居營州東.』】

【지금의 남책성(南柵城)이다. 《오대사(五代史)》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인데 영주(營州)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於周則天元甲申     때는 주(周) 측천(則天) 원년 갑신.

 

【羅之滅麗後十七年也.】

【신라가 고려를 멸한(668) 뒤 17년이다.】

 

開國乃以渤海名     개국하여 이름지어 발해(渤海)라 일컫도다

 

 발해가 신라에 의해 고려가 패망한 뒤 17년이 지나서 세워졌다고 한 것이다. 측천무후가 주를 선포한 서기 690년은 간지로 따져서 경인년이므로 《제왕운기》에서 갑신년이라고 한 것은 옳지 않다. 갑신년은 서기로 환산하면 684년인데 고려가 멸망한 것은 총장 무진년(668년)이고 갑신년까지는 16년인데 17년이라고 한 것은 틀린 말이다.(사실 이 점은 근소한 오류로 봐줄 수도 있다) 흑히 우리가 698년이라고 하는 것은 발해의 건국기년에 대해 기록한 《유취국사》에서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시점을 천지진종풍조부천황(天之眞宗豊祖父天皇, 아메노마무네토요오호지노스메라미코토) 2년으로 기록한 것을 따른 말이다. 이는 즉 일본의 문무(文武, 몬무) 천황 2년(698년)이고 당 측천무후 성력 원년에 해당한다. 


 기록된 것만 보면 측천무후는 쓴 연호가 엄청나다.

 

천수(天授): 690년∼692년

여의(如意): 692년

장수(長壽): 692년∼694년

연재(延載): 694년

증성(證聖): 695년

천책(天冊): 695년

등봉(登封): 695년∼696년

만세통천(萬世通天): 696년∼697년

신공(神功): 697년

성력(聖歷): 698년∼700년

구시(久視): 700년∼701년

대족(大足): 701년

장안(長安): 701년∼705년

 

 이들 연호 속에는 갑신이라는 간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흔히 알려진 발해의 건국기년이라는 698년도 갑신이 아닌 무술이며, 측천무후와 '갑신'이라는 간지가 연관이 있는 건 어쩌면 684년, 갑신이라는 간지가 들어가는 해에 그녀의 인생 속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과도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 서력 684년 3월에 측천무후는 자기 소생의 셋째 황자인 주왕(周王) 현(顯)을 고종의 뒤를 이어 새로운 황제로 내세웠다. 그것도 전임 황태자였던 이현(흔히 장회태자로 알려진 인물. 허난설헌의 시 곡자哭子에 등장하는 황대사黃臺詞라는 노래가 곧 이 사람이 지은 시다)을 죽이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더구나 중종은 얼마 뒤 폐위당한다(1월 3일에 즉위해서 2월 26일에 폐위당했다니 이건 뭐). 그리고는 막내아들 단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고, '섭정'을 시작한다.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면서 낙양을 신도(神都)로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다니 사실상 측천무후가 황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그리고 9월에 양주에서 일어난 이경업의 반란도 30만 군사를 동원해 40일 만에 깨끗이 진압하고,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하면서 새로 내각을 짰다(이로부터 6년 뒤인 690년에 예종 역시 어머니 측천무후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태자로 밀려났음). 이승휴의 눈에는 측천무후가 허수아비 황제를 내세워 제멋대로 정치하는 것이 꼭 실제 황제가 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굳이 《유취국사》의 기록을 따라 698년을 믿겠다면 아귀를 맞춰볼 여지도 없지는 않다. 측천무후 원년인 서기 690년은 간지로는 경인인데, 발해가 건국되었다는 698년은 성력 2년으로 똑같이 측천무후의 치세이자 '원년'이다. 이걸 이승휴가 착각한 것이라고 말이다. 여담이지만 《제왕운기》가 말한 684년은 공교롭게도 신라에서 보덕국이 멸망한 바로 그 시점이다. 고려의 안승이 왕으로서 다스렸던 고려 유민의 나라 말이다.


발해 건국의 계기 - 거란의 반란


[臣謹按渤海之源流也. 句驪未滅之時, 本爲疣贅部落鞅羯之屬, 寔繁有徒, 是名栗末小蕃, 甞逐句驪內徙, 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 至武后臨朝之際, 自營州作孽而逃, 輒據荒丘, 始稱振國. 時有句驪遺燼勿吉雜流, 梟音則嘯聚白山, 鴟義則喧張黑水, 姶與契丹濟惡, 旋於突厥通謀, 萬里耨苗, 累拒渡遼之轍, 十年食葚, 晚陳降漢之旗.]

신이 삼가 발해의 원류(源流)를 살펴보았습니다. 고려가 망하기 전엔 본시 사마귀만한 부락의 말갈 족속으로서 번영하여 무리가 이루어지자 속말소번(粟末小蕃)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려를 따라 내사(內徙)하더니, 그 수령 걸사비우 및 (고려 장수인) 대조영 등이 무후가 조정에 군림할 때 영주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황량한 언덕 하나 냉큼 차지하였습니다. 처음 진국(振國)을 일컬으니, 그때 고려의 유신(遺燼)과 물길잡류(勿吉雜流)를 거느리고 올빼미같은 목소리로 군사를 백산(白山)에 모으고, 부엉이같은 뜻을 품고 흑수(黑水)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처음엔 거란과 짜고 악을 행하더니, 이어 돌궐과 통모하여 만리 벌판에 곡식을 경작하면서 여러 번 요수(遼水)를 건너는 수레에 맞서며, 10년이나 오디를 먹다가 늦게나마 한에 항복하는 깃발을 들었나이다.

《동문선》 권제33, 표전(表箋)3,

발해(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

 

 최치원의 글에서 보이듯, 신라 사람들은 평소에는 발해를 고려 후신으로 묘사하다가도, 당에다 신라의 우월함을 과시할 때에는 말갈 떨거지라고 낮춰 불렀다. 유명한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는 당에서 발해 사신을 신라 사신의 윗자리에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최치원이 당에 감사하려고 쓴 글인데, 신라의 우월함을 과시하듯 늘어놓는 과정에서 발해가 형편없이 깎였다. 소종 건녕 4년(897년)에 작성되었으니까, 굳이 말하면 신ㆍ구《당서》보다 더 오래된 사료이기도 하다. 악의에 찬 표현을 제거하고 보면 발해라는 나라의 건국 과정에 대해서 증언해줄 자료로 쓰일 수도 있다.


[武后萬歲通天元年, 契丹松漠都督李盡忠, 歸誠州刺史孫萬榮, 叛唐陷營州, 殺都督趙文翽.]

무후(武后)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 거란의 송막도독(松漠都督) 이진충과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 손만영이 당에 반기를 들고 영주를 함락시켜 도독 조문홰를 죽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진국공(震國公) 만세통천 병신(696년) 5월

 

 보장왕 3년(645년) 대고려 전선에 투입시키고도 끝내 실패하고, 안시성에서 눈까지 하나 잃은 채 귀환하면서 영주를 들렀던 당 태종은 당시 거란 추장 굴가(窟哥)에게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굴가의 후손으로서 좌위장군 탄한주자사 귀순군왕에 책봉된 고막리(枯莫離)와 좌위대장군 이진충, 그리고 그보다 앞서 말갈 추장 돌지계(突地稽)와 함께 당 조정에 사신을 보낸 거란 대추장 손오조의 후손 귀성주자사 손만영. 두 사람 다 당의 이름을 갖고 당의 벼슬을 하고 있긴 했지만 거란족의 일파인 셈이다. 신라와 마찬가지로 당의 기미정책에 순순히 응하지는 않았던 거란족은 굴가가 죽은 뒤 해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당의 행군총관(行軍總管) 아사덕추빈(阿史德樞賓) 등이 송막도독 아복고(阿卜固)를 사로잡아 낙양에 보내버리고, 굴가의 후손인 진충이 거란족을 다스리는 송막도독이 되었다.

 

 이 무렵 영주도독 조문홰(趙文翽)는 흉년으로 거란족이 굶주리는데도 진휼하기는 커녕, "교만하여 자주 휘하의 거란인 추장들을 모욕하였으므로 이진충 등이 모두 원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다 못한 이진충은 마침 인질로 당에 입조한 적이 있어 중국의 지세를 자세히 알던 손만영과 짜고 거병했고, 평소 자신들을 모독하던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차지해 반란을 일으켰다. 만세통천 2년 5월의 일이었다.

 

 하북 지방을 중심으로 난은 4년 동안 이어졌다. 이진충은 영주에 머무르면서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일컫고, 손만영을 장수로 삼아 당의 변경을 공격해 들어갔는데, 2주일도 못 되어 10만에 가까운 무리들이 그에게 가담했다고 한다. 8월에 평주의 협석곡에서 당군을 패배시켰는데, 9월에 청변도행군대총관으로 거란을 토벌하러 나선 건안군왕 무유의의 참모였던 진자앙의 문집에 보면 당군이 이때 두려워한 것은 거란이 서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요동 방향 말이다. 677년 이래로 신성에 있었던 안동도호부는 이미 9월에 한 번 거란군에 포위된 적이 있었다(《자치통감》). 요동이 전란에 휩싸여 있었음은 진자앙의 문서ㅡ만세통천 2년(697년) 3월에 요동주 고(高) 도독에게 보낸 총공세 전략에 대한 관고에서 거란을 합공하자고 한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물론 이들은 평주의 동협석곡에서 거란에게 패했지만). 안동도호부가 요동 지역 기미주를 총괄하는 기구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의 보고와 중앙의 지시가 안동도호부를 거치지 않고 요동도독과 청변도대총관 사이에 직통으로 오가고 있음은 이미 안동도호부가 기미주 총괄기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진충은 10월에 전사했지만, 지금의 북경 근처인 영평에서 손만영이 이끄는 거란군은 당의 왕효걸이 이끄는 17만 당군을 궤멸시킬 정도로 엄청난 군사력을 과시했다. 연이은 전승에 해족을 비롯한 인근 유목민들이 거란족에게 가담해 세력이 불어나는 와중에도, 거란족은 나라를 세운다는 목표까지 세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의 학정과 종족차별에 분개해 일어난 그들의 최종 목표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당 자체의 멸망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전쟁은 군사적인 승리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거란족의 반란은 요동 지역의 옛 고려인과 말갈족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도록, 방벽을 만들어 주었다. 서기 696년 5월.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영주를 떠난 걸걸중상의 무리는 동쪽으로 180리 연군성, 여라수착을 지나 옛 고려의 요수를 건너, 안동도호부(요양)와 요동도독부(무순)의 북쪽 길을 가로질러 최초로 요동 지역에 정착했다. 대중상이 도망쳤다는 오루하는 대석하, 읍루하(揖婁河)ㆍ홀한하(忽汗河)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송화강 지류의 하나인 목단강(牧丹江)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오루하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아 스스로 지켰다.

 

 거란의 기세에 눌려 요동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당은 돌궐의 묵철가한에게 원병을 청했고, 돌궐이 나서면서 해족은 곧바로 거란을 버리고 당-돌궐에 붙어버린다.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가운데 손만영은 수십 기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가 그의 종에게 배신당해 죽고, 반란은 1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거란의 반란을 진압한 당은 기세를 몰아 요동에 집결해있던 반당 세력을 공격했다. 기록에는 당 조정에서 공격을 앞두고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에게 각기 진국공(震國公)과 허국공(許國公)이라는 작위를 내렸다고 했는데, 채찍으로 치기 전에 내놓는 당근이라곤 해도 국공이라는 지위는 왕 바로 아래 있는 3등 작위로 반란자에게 이만큼의 지위를 주었다는 건 그들의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해준 것이라 하겠다. 물론 받지 않을 경우 그만큼 더 세게 때린다는 의미이고.


 아니나 다를까. 말갈 추장 걸사비우가 명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측천무후는 바로 병력을 내어 들이쳤다. 지휘를 맡은 것은 거란족 출신의 옥금위대장군(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中郞將) 소구(索仇). 걸사비우는 그 싸움에서 전사한다.


천문령 싸움

 

 한편 이진충과 손만영의 난을 진압한 당은 그 해 6월에 약속대로 회양왕 무연수와 돌궐 카간인 묵철의 딸을 혼인시키려 했지만, 이씨(당 황실의 성씨)도 아닌 무씨와 혼인하기 싫다면서(아마 이건 핑계였을 듯) 8월부터 정주와 조주 등의 하북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돌궐과 당 사이의 혼담이 깨지자, 돌궐 토벌을 위해 측천무후는 그 해 9월에 적인걸과 설눌을 각각 하북도행군부원수와 안동도경략에 임명했다. 이들의 원정은 요동에서 거란 잔당 토벌의 일환으로, 대조영이 이끄는 고려 유민들을 공격하는 이해고에 대한 지원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李楷固窮○度天門嶺 祚榮引高句麗靺鞨兵大破之 楷固僅以身免]

이해고는 천문령을 넘어 끝까지 추격해왔다. 조영은 고려와 말갈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를 크게 쳐부수었다. 해고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천문령 전투. 지금의 혼하와 휘발하 사이에 있는 장령자ㅡ길림성 남부를 가로지르는 용강산의 오도구 근처에서, 대조영이 이끄는 고려 유민들과 말갈족, 그리고 이해고가 이끄는 당의 추격군이 전투를 벌였다. 혼하와 휘발하 두 강을 사이에 끼고 남북으로 뻗어 있는 산이다. 그 동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매복작전에 알맞은 지형이다.

 

 이 무렵 대조영이 이끄는 무리들은 전투원이 몹시 부족했다. 군사훈련을 제대로 못받은 사람들도 있어 험악한 산지에서 필요한 명령체계조차 갖춰져 있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적의 위협을 피해 도망치는 유민 집단의 입장인 그들에게는 많은 관리가 필요한 '말'이 부족했다. 그들은 당과 거란의 연합군이 이끄는 기마전력을 무력화하면서 아군의 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작전이 필요했다. 그것은 당군이 천문령의 협곡을 넘어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기다려 공격하는 것.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에 보니까, 이때 대조영이 택한 전략이라는 것이, 적의 기마전력과 보병부대를 분리한 다음 보병부대를 먼저 각개격파하고, 고립된 기마부대를 습격하는 것이었단다. 그러기 위해 천문령을 빠져나와 오도구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지대ㅡ보병이 이동하기는 편리해도 기병에게는 불리한 이곳에서, 협곡 여기저기에 군사들을 숨겨놓고 당의 기마병들을 수시로 습격해 저격하면서 치고 빠지는(HIT and RUN) 전술을 택했다. 결국 보병들은 지칠 수밖에.

 

 협곡의 출구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협곡 출구에 세워놓은 장애물(기병의 돌진을 막기 위한 장치)을 발견했고, 대조영이 직접 이끄는 유민군들이 당군을 공격했다. 이해고는 주력군인 경기병 대신 갑옷으로 중무장한 중기병을 내세워 밀어붙이고, 대조영은 말갈 궁기병들에게 활을 쏘아 당군 중기병을 막게 하면서 퇴각한다. 중기병들은 화살은 막을지 몰라도 무게 때문에 경기병보다 속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 도망치는 유민군을 당군은 곧바로 경기병을 선두로 하고 중기병들을 그 뒤에 세워서 유민군을 추격해온다.

 

 하지만 당의 경기병들이 말갈 궁기병들을 뒤쫓는 '찰나'가 바로 대조영이 노리던 순간이었다. 대조영은 곧바로 예비로 남겨두었던 군사들을 총동원해, 당의 기병대와 분리된 보병들을 냅다 들이쳐버렸다. 협곡에서 이리치고 저리치고, 쳤다 빠졌다를 반복하는 고려군의 게릴라 전술에 맥이 빠져 이미 지쳐있던 그들을, 대조영은 고려군과 그 양익(兩翼)에 포진한 말갈족들을 이끌고 일제공격해 모조리 궤멸시켜 버렸다. 장애물이 많은 환경에서 보병을 대동하지 않은 중장비는 기습공격에 취약하다나?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말갈의 유인부대를 쫓아다니던 당의 기병들은 결국 기세를 몰아 여기저기서 기습해오는 군사들에게 각개격파당하고, 이해고는 병사 몇 명만을 거느린채 요동성 쪽으로 도망쳐버렸다. 이상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에서 발췌한, 천문령 전투의 전말이다.


진국의 건국

 

 이후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추슬러서 읍루의 동모산(東牟山)에 거처했다. 이 무렵 대조영을 따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참여한 집단은 대개 세 부류였다. 


 대조영 일가가 681년 강제사거되는 와중에 영주에 잔류하게 된 고려 유민(高麗別種). 

 걸사비우가 죽은 뒤 대조영이 끌어들인 속말말갈 세력, 

 당에서 이들을 회유할 때에 요동과 요서에서 모여든 고려의 옛 백성(高麗餘種). 

 천문령 싸움 이후에 참여한 구려유신과 물길잡류. 

 

 대조영 휘하의 말갈족ㅡ옛 걸사비우가 거느리던 속말말갈은 따져보면 꽤나 대조영에게 고분고분한 편이다. 걸사비우 사후에도 별도의 행동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대조영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러 떠날 때 그들은 모두 대조영을 따랐다. 그렇게 대조영은 지금의 동모산에 이르러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 진국의 왕으로 섰다. 이것이 당 측천무후 성력(聖歷) 원년, 신라 효소왕 7년, 일황 문무(文武, 몬무) 2년으로 간지로는 태세 무술(698)의 일이었다. 안정복 영감은 《자치통감》과 《문헌통고》 발해전(渤海傳)을 인용해 서기 700년에 측천무후의 명으로 거란의 잔당을 쳐서 평정하던 이해고가 대조영의 군사까지 추격하다가 천문령 너머에서 패전해서 돌아왔다고 한 것을 두고 대조영의 발해 건국이 700년에 있었다고 적었지만, 《속일본기》에 발해 건국을 문무 천황 때의 일이라 적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틀린 얘기다. 




 《구당서》에는 계루고지, 《신당서》에는 읍루고지라고 되어있는 이곳 동모산은 발해의 최초 도읍지로 기록에는 구국(舊國)으로 나오는 곳이다. '구국'이라는 건 '옛 나라(수도?)'라는 의미인데, 누구의 옛 나라였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곳은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장백산의 빽빽한 밀림지대, 그 위에는 거란과 돌궐이 있어 당의 침공을 막는 중간방벽이 되어주고, 송화강 일대의 넓은 평야와 두만강 남쪽의 철광지대가 펼쳐져 있어 나라를 세우기에 적합한 땅이었다. 대조영이 당의 추격군을 격퇴하고 정착해 성을 쌓기 전에 이미, 건국터로서 군사적 목적뿐 아니라 행정 중심지 즉 임시수도로서 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마치 추모왕이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서쪽에 궁궐 대신 임시로 지었다던 초막처럼, 아직 국세가 안정되지 못하고 당의 추격이 언제 있을지 모르는 군사적 위협 앞에서 수도 역시 대규모의 요새로 지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세기까지도 동모산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는데, 1949년 돈화 부근의 육정산 고분군에서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돈화가 제국의 초기 도읍지였음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다. 그와 동시에 돈화시 서남쪽에 있는 성산자산이 바로 동모산이고, 그곳에 남아 있는 산성이 바로 대조영이 쌓은 성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성산자산은 해발 600m 높이의 작은 산으로, 돈화분지의 평야지대 안에 외따로이 솟아 있다. 그 중턱에 남아있는 산성은 길이가 2km 정도로 돌과 흙, 모래를 섞어 쌓았는데 위에서 보면 타원형에 가깝다. 성벽 높이는 1.5-2.5m, 밑변 너비는 5-7m 정도. 남쪽 벽에 망보는 치(雉)가 세 군데 남아 있다.

 

 대조영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구국'에 대해서 뭐라 말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단순하게 '구국'이 '발해의 옛 수도'라는 뜻으로 쓰인 것은 아닌 듯 하다. 대조영의 손자인 문왕이 '구국'에서 '상경'으로 옮기는 가운데 '현주'라는 곳을 수도로 삼은 일이 있는데, 만약 '(발해의)옛 수도'라는 뜻으로 '구국'이라는 이름을 썼다면 왜 동모산에만 '구국'이라고 부르고 현주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은 걸까. 수도 차별도 아니고. 대조영의 첫 도읍을 '계루고지'라고 부른 《구당서》의 기록을 생각할 때, '구국'이라는 말은 대조영이 딴 길로 안 새고 고려 옛 땅을 제대로 잘 찾아갔다는 반증이 아닐까.


 바다는 옛 숙신족ㅡ예족의 터전이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저항없이 영역을 넓힐 수도 있고, 연해주를 확보함으로써 일본과 교류할 수 있었다. 당과 신라 양쪽을 가상적국으로 삼은 판에, 진으로서는 어떻게든 자신의 우호를 만들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대상은 서북쪽의 거란족과 해족, 돌궐, 그리고 동쪽 바다 너머의 일본이었다. 《신당서》를 인용한 《발해고》는 발해가 돌궐과 통모한 뒤, 부여ㆍ옥저ㆍ조선ㆍ변한 및 바다 북쪽의 10여개 국을 공략해 차지했고 동쪽으로 바다, 서쪽으로 거란, 남쪽으로는 이하를 경계로 신라와 접하고 5천리 강토에 10만여 호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마치 한꺼번에 일어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과는 어긋난다.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 된 마당에 어떻게 그렇게 넓은 영토를 얻었겠으며, 만약 그랬다면 고왕 사후 10대 선왕까지 평정이 안 된 말갈 제족이 남아있었을 리가 있겠나. 아마 후대의 기록을 마치 개국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끌어올려 적어놨을 것이다.

 

 다만 "만리 벌판에 곡식을 경작하며, 요수(遼水)를 건너는 수레에 여러 번 맞섰다."는 최치원의 글귀는 발해를 건국한 뒤 대조영이 자신의 영토 안에서 행했던 정책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도와준다. '만 리'라는 거리가 대조영의 영토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조영의 거점과 당의 수도 사이의 거리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전자라면 건국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만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넓은 세력권을 차지한 대조영의 수완에 다시금 감탄하게 되고, 후자라면 당이 함부로 발해를 공격하지 못했던 이유ㅡ'길이 멀다'는 단어에 대해 되새기게 된다. 영주(조양)에서만 2천리 되는 거리라지 않던가.

 

[時奚契丹皆叛唐, 道路阻絶, 武后不能致討焉.]

그때에 해(奚)와 거란 둘 다 당에 반기를 들어 길이 막혔으므로 무후는 이를 토벌하지 못했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동사강목》에 보면, 대조영은 나라를 세운 뒤 곧장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에는 발해가 처음 거처할 땅을 정하고 신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신라에서 대조영에게 대아찬(제5등) 벼슬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마침 신라와 당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ㆍ당 전쟁(676년)이 끝난 뒤, 발해가 세워진 698년까지 20여 년 동안 신라와 당이 사신을 주고받은 것은 두세 번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692년에는 그 유명한 '묘호 논쟁'도 있었다. 신라에서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에 당조에서 항의한 사건(이라고 해봐야 당의 사신 독단으로 벌인 헤프닝 정도였겠지만)이 그것이다. 신라가 당과 사이가 좋지 않은 만큼 그들에게 사신을 보내 수교해놓자고 대조영은 생각했을까. 그럼에도 신라는 바로 이듬해에 사신을 당에 보내버렸다. 그리고 효소왕이 죽은 뒤 성덕왕 때에 이르면 당에 43차례나 사신을 보낼 정도로 두 나라 관계는 가까워진다.

 

 대조영의 아들 무왕 이후로 발해의 국왕들은 대대로 연호를 썼고 그것이 중국의 《구당서》나 《신당서》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정작 대조영이 어떤 연호를 썼는지는 기록에 안 나와서 모른다. 한국의 《태씨족보》가 대조영의 연호를 천통(天統)이라고 적은 것은 아마도 《발해국지ㆍ장편》에 따른 것 같은데, 20세기 초 요동 지역의 학자였던 김육불이 지은 이 책은 중국 본위로 엮어졌기 때문에 발해를 보는 관점과 이론에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발해사 연구에 크게 기여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김육불 역시도 대조영을 고려 출신으로 보고 발해가 고려 문화의 연장선에 놓여있음을 강하게 주장했었다).


당과의 수교

 

[中宗卽位, 遣侍御史張行○, 慰撫之. 王亦遣子入侍.]

중종이 즉위하자(705)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을 보내어 위무했다. 왕도 아들을 보내어 궐에 들어가 천자를 알현시켰다.

《발해고》 군고(君考), 고왕(高王)

  

 《시경(詩經)》노송(魯頌)편에 이런 노래가 있다.

 

翩彼飛鴞   이리저리 나는 저 올빼미

集于泮林   저 반궁의 나무숲에 모였네.

食我桑黮   우리 뽕나무 오디 먹고

懷我好音   고운 소리로 날 부르네.

 

 신라의 최치원이 "10년이나 오디를 먹다가 늦게야 한(漢)에 항복하는 깃발을 들었다."고 한 것은 바로 발해의 당으로의 사신 파견을 말하는 것이었다. 상효라는 이 단어는 뽕나무 '상'에 올빼미 '효'를 쓰는데, 의역하면 '교화에 감화를 받아 지난날의 흉포함을 고치고 착하게 되었다'는, 한 마디로 손 씻고 개과천선했다는 뜻이다. 올빼미하고 부엉이 목소리가 듣기 거북해도 오디를 먹으면 목소리가 고와진다나. 발해를 가리켜 '올빼미'라고 해놓고 '10년간 오디를 먹었다'는 건, 내심으로는 당의 문화를 찬탄하고 또 두려워하면서도 겉으로는 표현을 못하고 끙끙대면서 10년이나 찌질댔다는 그런 식으로 발해를 깎아내린 것이다.

 

 《당서》에 보면 이때에 대조영이 당에 보낸 것은 왕자 문예, 대조영의 둘째 아들이자 훗날 2대 무왕으로 즉위하는 대무예의 동생이다. 당과 진 사이의 분쟁과 갈등을 해소하고, 정보를 빼내는 것이 그의 역할. 이 무렵 측천무후가 중종에게 다시 제위를 돌려줌으로서, 당은 다시 이씨 왕조를 회복하고 신룡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정해 반포했다. 그리고 장행급을 파견해 진을 위무한다. 당이 겁내는 것은 진과 돌궐의 연합이었다. 만리장성 끝자락 연산줄기를 넘어 돌궐족과 진이 연합해 당에 쳐들어온다면 그것은 골칫거리였다(실제로 당은 돌궐과 화친을 맺은 이듬해에야 진과 정식으로 국호를 수립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고려 멸망 이후 흩어졌던 옛 세력들을 대조영은 하나하나 수습해나가며, 고려 부흥이라는 원대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나갔다. 당으로서는 이진충-손만영의 난 이후 거란족에게 빼앗긴 영주 지역을 탈환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로 부각되었고, 어차피 돌궐이나 거란, 해족들에게 후방을 공격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진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진도 당과 사이가 계속 나빠 봤자 좋을 것 없었기에, 711년 11월에 먼저 사신을 당에 보냈고, 2년 뒤 돌궐과 화친을 맺은 당은 진에 사신을 보내 화답했다. 현종 선천(先天) 2년(713년), 낭장(郎將) 최흔(崔忻)을 보내 왕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은 것이다. 기록은 이때부터 '발해'라는 호칭을 쓰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최흔과 홍려정비

 

 2006년. 우리 나라에서 『북관대첩비』 반환된다고 한창 들떠있던 때에 중국에서도 일본에 문화재반환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북관대첩비』처럼 일본 황궁에 정원석처럼 놓여있던 『홍려정비』가 그것이다. 러ㆍ일 전쟁 때 일본 해군이 여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1905년에 여순을 함락시켰을 때, 그곳에서 이 비석을 발견하고 일본으로 가져와 1908년 명치 천황에게 전리품으로 바쳤다. 이 『홍려정비』를 세운 것이 바로 최흔이다. 높이 1.8m에 폭 3m로 『광개토태왕릉비』나 『진흥왕순수비』에 비하면 '애기'정도밖에 안 되는 이 비석이 세워지게 된 것은 최흔이 돌아오는 길, 이곳에 들러 우물을 파고 그 기념으로 새긴 데에서 연유한다. 여순시에서 비석기념관까지 세울 정도로 눈에 불을 키고 반환하려 든 이 『홍려정비』의 내용은 진짜 별거 아니다. "칙지절선무말갈사(勅持節宣勞靺鞨使) 홍려경(鴻臚卿) 최흔은 우물 두 개를 파서 영원히 남기노라. 개원 2년(713) 5월 18일에 기험(記驗)하노라[勅持節宣勞靺鞨使, 鴻臚卿崔忻井兩口永爲. 記驗開元二年五月十八日.]."


  일본 궁내청에서야 이 비석이 국유 재산인 만큼 반환은 물론 공개도 안 하고 있다고 그래서 사진은 찾지 못했다. 아사히신문에서 이걸 보도할 때에는 중국이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하는 역사전쟁에 이 『홍려정비』를 이용하기 위해서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고, 우리 나라에서도 '발해의 유물'인 『홍려정비』를 중국측에서 반환을 요구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비석을 중국이 우리 나라와의 역사논쟁에서 “발해는 당의 지방정부로 중국 역사에 속한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할 유력한 물증이 될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과연 이 비석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공식활동이 있었고 그 결과로 세워진 비석도 아니고, 최흔 자신이 독단으로 우물 파고 그걸 기념하기 위해 독단으로 여기에다 세운 비석 아닌가. 지절선무말갈사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발해에서는 이미 '진(震)'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었는데 굳이 '말갈'이라고 쓴 것에서 이 비석을 쓴 사람의 '정신상태'가 이미 중화사상에 찌들어 있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발해와 당나라가 우호를 맺으려는 상황에서 그렇게 발해의 자존심을 건드릴 소지가 다분한 '말갈'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적어넣어 놓으면 발해 사람들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뒀을까.


 한편 신라에서는 이 해 12월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개성(開城), 옛 고려령으로 동비홀(冬比忽)이라 불리던 북쪽에 성을 쌓았다. 5년 뒤에는 다시 한산주 관내에 여러 성을 쌓았다는 기술이 있는데, 이러한 신라의 북방에서의 동향은 대개 발해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데에는 이설이 없는 듯 하다.



출처: http://outsiderhistory.tistory.com/17?category=478429 [버려진 역사의 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