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 23:41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서기 304년) 분서왕이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자, 구수왕의 둘째 아들인 비류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 초고왕계가 저는 성씨가 부여씨로 부여에서 대방을 거쳐 백제로 온 부여세력이라고 보여집니다.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 나오는 고이왕은 해씨로 부여씨인 초고왕에게 왕위를 빼았기고 난후 해씨를 대표해서 반정에 성공해서 왕위를 이어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백제에는 최초의 왕인 온조왕의 성씨인 해씨와 그 이후에 부여씨, 그리고 큰 호족 세력을 형성한 진씨에 의해 다스려 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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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梁書) 제이열전(諸夷列傳) 백제전의 일부
晉太元中王須 진(晉)나라 태원(太元, AD 376-396) 때는 임금 수(須)가 義熙中王餘映 의희(義熙, AD 405-418) 때는 임금 여영(餘映)이 宋元嘉中王餘毗 송(宋)나라 원하(元嘉) 때는 임금 여비(餘毗)가 並遣獻生口 사신을 보내 사람을 바쳤다.
餘毗死 여비(毗死)가 죽자 立子慶 아들 경(慶)이 임금이 됐다. 慶死 경(慶)이 죽자 子牟都立 아들 모도(牟都)가 임금이 됐다. 都死 모도가 죽자 立子牟太 아들 모태(牟太)가 임금이 됐다.
齊永明中 제(齊)나라 영명(永明, AD 479-502) 때 除太都督百濟諸軍事 <<태도독 백제 제군사 鎮東大將軍百濟王 진동대장군 백제왕>> 관직을 제수(除授)하였다. 天監元年 천감(天監, AD 502-519) 원년에 進太號征東將軍 큰 이름인 <정동장군>을 더했다.
尋爲高句驪所破 고구리와 싸워 크게 지고 衰弱者累年 힘이 약해진 지 여러 해가 되었다. 遷居南韓地 나라를 남쪽 한(韓) 땅으로 옮겼다.
普通二年 보통(普通, AD 520-526) 이 년(521) 王餘隆始復遣使奉表 임금 여융(餘隆)이 처음으로 다시 사신을 보내고 글을 올렸다. 稱 글에 累破句驪 <고구리를 여러 차례 깨뜨렸습니다. 今始與通好 이제 처음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하고 적혀 있었다. 而百濟更爲強國 백제가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其年 그해 高祖詔曰 고조(양 고조 소연(蕭衍))가 조서(詔書)를 내려 行都督百濟諸軍事 <행도독 백제 제군사 鎮東大將軍百濟王餘隆 진동대장군 백제왕 여융은 守藩海外 바다 밖에서 번방(藩方)을 지킨다. 遠脩貢職 멀리서 공물을 바치며 迺誠款到 지극한 정성(誠款)을 보이니 朕有嘉焉 내(朕)가 매우 기쁘다. 宜率舊章 마땅히 옛 규정에 따라 授茲榮命 이 영예로운 작위를 내린다. 可使持節 <<사지절 都督百濟諸軍事 도독 백제 제군사 寧東大將軍百濟王 영동대장군 백제왕>> 관직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五年 오 년(524) 隆死 융(隆)이 죽자 詔復以其子明爲 다시 조서를 내려 그 아들 명(明)에게 持節督百濟諸軍事 <<지절(持節) 독백제 제군사 綏東將軍百濟王 수동장군 백제왕>> 관직을 주었다.
號所治城曰固麻 임금이 살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성을 고마(固麻)라고 부른다. 謂邑曰檐魯 마을은 담로(檐魯)라고 부른다. 如中國之言郡縣也 지나 말로 군현(郡縣)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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