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6. 21:42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이 내용은 광개토경 호태왕 비문과 일본서기등을 대조할 때 뭔가 석연치않은 왜에 대한 실체에 의문을 던지기 위해 작성한 것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 이와 유사한 생각을 잡지 등에 이미 올렸는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추론이며 진정한 실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개인 견해입니다 편의상 경어는 생략하였습니다 광개토경 호태왕 비문의 왜인에 대한 종래의 설은 모두 직접 일본열도와 관계가 있거나 아니면 한반도 남부지역 가야에 대한 이칭인 왜로 인식되어 왔으며 따라서 일본 어용학자 식민사학자 등 역사를 아전인수로 왜곡하는 무리들에게 믿음직한 근거자료로 제시되어 왔었다 .
한편 이 같은 왜를 부정하기 위해 정인보 북한 박시형 같은 이는 渡海破 주체를 고구려로 보아 오히려 고구려가 바다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고 까지 해석하였다 그러나 식민사학자든 국내 사학자든 모두 일본열도 왜라는 전재 하에 해석만을 달리한 것 뿐이다
그러나 광개토경 호태왕 비문의 倭人을 일본열도와 관계없는 다른 무엇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경우에는 전혀 다른 해석이 내려지게 되며 구태어 신묘년조에 대한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 六年丙申(396)王躬率▨軍討伐殘國 백제와 신라는 옛날에 속민인 연유로 조공해 왔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임나.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396년 왕이 몸소 (군사를) 인솔하고 가 백제를 토벌하였다.
왜 <고구려>는 <왜>가 백제.임나.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는데 <왜>를 치지 않고 백제를 쳤을까? 그 이유는 백제와 왜가 같은 편이라고 고구려는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왜인은 일본열도와 관계없는 그 무언가를 지칭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 무엇인가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추측 불가능한 것이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라도 눈여겨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을 읽어보면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전제는 광개토경 호태왕 비문의 왜가 일본열도와 무관하거나 관계가 아주 적다는 것에 있다. 광개토경 호태왕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왜가 기록되어있다
1.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 六年丙申(396)王躬率▨軍討伐殘國 1. 백제와 신라는 엣날에 속민인 연유로 조공해 왔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임나.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396년 왕이 몸소 (군사를) 인솔하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2.九年己亥(399)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遣使還告以▨ 2. 399년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태왕이 평양 아래를 순행하니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왕이 전하길, <왜인이 신라에 가득하여 성지를 파괴하고 신라왕을 신민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태왕에게 귀의하여 명을 청합니다> 고 하였다. 태왕은 은헤롭고 자애로워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사신을 돌려 보내며 밀계로써 고하게 하였다.
3.十年庚子(400)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戌兵▨新羅城▨城倭寇大潰城▨」 3. 십년경자 400년 보기병 5만을 파견하여 가서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가 신라 안에 가득하였다. 고구려군이 사방에 이르자, 왜는 퇴각하였다.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와 가라에 이르러 따라가 성을 장악하니 곧 성이 항복하였다. (이에) 안라인이 수병하도록 하였다. 신라성 []성을 장악하니 왜가 궤멸되었다.
4.十四年甲辰(404)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 여기서 1.신묘년은 후발사건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2.3.4만이 실제 왜인이 활동한 내용이다 신묘년조는 신묘년부터 이후로 영락 9.10.14.17년의 활동명분(원인) 요약 전제한 것이다. 이 활동을 모두 일본열도로 간주할 경우 백제와 임나, 신라국도까지 함락시킬 정도의 대단한 세력이며 강대한 왕조 즉 일본열도 전역을 지배하는 왕조가 존재한다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일본인 스스로 기록한 일본측 기록을 참조할 경우 전혀 다른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 그 근거자료는 다음과 같다.
1.일본서기 『日本書紀』巻十応神天皇十四年 (癸卯二八三 /보정연대 403년) 일본서기 권십응신천황십사년 是歳。弓月君自百濟來歸。因以奏之曰。臣領己國之人夫百廿縣而歸化。然因新羅人之拒。皆留 加羅國爰遣葛城襲津彦。而召弓月之人夫於加羅。然經三年而襲津彦不來焉。 『日本書紀』巻十応神天皇十六年(乙巳二八五/보정년대405) 八月。遣平群木菟宿禰。的戸田宿禰於加羅。仍授精兵詔之曰。襲津彦久之不還。必由新羅人 拒而滞之。汝等急往之撃新羅披其道路。於是木菟宿禰等進精兵莅于新羅之境。新羅王愕之服 其罪。乃率弓月之人夫。與襲津彦共來焉。 廿年(409)秋九月。倭漢直祖阿知使主。其子都加使主。並率己之黨類十七縣而來歸焉。 2.『続日本紀』巻卅八延暦四年(七八五)六月癸酉 右衞士督從三位兼下総守坂上大忌寸苅田麻呂等上表言。臣等本是後漢靈帝之曾孫阿智王之後也。漢祚遷魏。阿智王因神牛教。出行帶方。忽得寳帶瑞。其像似宮城。爰建國邑。育其人庶。後召父兄告曰。吾聞。東國有聖主。何不歸從乎。若久居此處。恐取覆滅。即携母弟迂興徳。及七姓民。歸化來朝。是則譽田天皇治天下之御世也。於是阿智王奏請曰。臣舊居在於帶方。人民男女皆有才藝。近者寓於百濟高麗之間。心懷猶豫未知去就。伏願天恩遣使追召之。乃勅遣臣八腹氏。分頭發遣。其人民男女。擧落隨使盡來。永爲公民。積年累代。以至于今。今在諸國漢人亦是其後也。臣苅田麻呂等。失先祖之王族。蒙下人之卑姓。望請。改忌寸蒙賜宿祢姓。伏願。天恩矜察。儻垂聖聽。所謂寒灰更煖。枯樹復榮也。臣苅田麻呂等。不勝至望之誠。輙奉表以聞。詔許之。坂上。内藏。平田。大藏。文。調。文部。谷。民。佐太。山口等忌寸十一姓十六人賜姓宿祢。 이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광개토왕 시기 한반도 남단에서 소란을 피운 왜인이란 이들 대방계 유민인 궁월군 아지사주같은 중국계 유민을 자처하는 집단 뿐이다. 이들이 한반도에서 탈출한 후 그 이후의 향방을 기록한 것은 수서 왜인전이다.
大業三年, 其王多利思北孤遣使朝貢. 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 故遣朝拜, 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至書日沒處天子無恙”雲雲. 帝覽之不悅, 謂鴻臚卿曰:“蠻夷書有無禮者, 勿複以聞.”明年, 上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 度百濟, 行至竹島, 南望羅國, 經都斯麻國, 乃在大海中. 又東至一支國, 又至竹斯國, 又東至秦王國, 其人同於華夏, 以為夷洲, 疑不能明也. 隋書 卷八十一 列傳第四十六 倭傳 진왕국 즉 궁월군 집단은 일본서기 웅략 년에 부민으로 재편하고 우두머리(禹豆母利麻佐)직책으로 임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日本書紀』巻十四雄略天皇十五年(辛亥四七一)秦民分散臣連等 各随欲駈使 勿委秦造 由是 秦造酒甚以爲憂 而仕於天皇 天皇愛寵之 詔聚秦民 賜於秦酒公 公仍領率百八十種勝 奉獻庸調絹縑 充積朝庭 因賜姓曰禹豆麻佐 【一云禹豆母利麻佐 皆盈積之貌也】 이와 같이 광개토경호태왕비문의 왜를 일본기록과 대조하면 전혀 왜왕조 활동이 아닌 대방유민(부여출신->대방>백제>일본)에 관한 것임을 알수 있다 그런데 왜 비문에는 왜라고 구태어 기록한 것일까?
그 이유는 광개토왕 비문이 건립된 것은 장수왕2년(413년)이므로 이미 낙랑대방 유민을 모두 일본열도로 추방한 이후에 작성된 것이다. 또 낙랑대방고지를 모두 고려가 점거한 상황에서 낙랑대방 유민잔당세력의 본거지 수복같은 행위를 정당하게 기록해 줄 필요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장수왕 2년에 이미 이들이 왜열도로 건너가 왜에 합류하였으므로 실제상 왜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왜인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광개토경호태왕비문 영락 9년 (399) 신라국경을 가득 메운 것은 왜병이나 일본열도의 왜가 아니라 대방계유민 120현민이다. 영락10년 고구려 관군이 도착하자마자 도주한 것도 군사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등 완결처리가 되지 않은 이유는 영락10년 모용선비 침략 때문에 일단 고구려 관군은 소수의 병력만을 남긴 채 퇴각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 대방체류민은 마지막으로 백제와 연합하여 대방본거지를 탈환하기 위해 영락 14년(404)년 수복전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그리고 그들은 모두 소수왜인을 데리고 온 실제이름은 알 수 없고 일본서기에 소스비고로 기록된 가공적 왜장이 길잡이가 되어 일본열도로 탈출하였다는것이 사건의 진상이다. 따라서 광개토경호태왕비문의 왜에 관한 기록은 동아시아 대사건도 아니며 일본열도 왜왕조의 역사발전 과정이라든가 통일왕조 성립같은 근거자료도 될 수 없으며 왜의 군사활동 근거로도 될 수 없다. 또 소수의 왜군이 백제 또는 낙랑 대방 유민의 길잡이 노릇을 한 것을 가지고 왜왕조를 부각시킬 만한 재료라고 하기에는 보잘 것 없는 기록임은 물론이다. 그런고로 대방고지를 두고 고구려와 백제간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 가운데 일본으로 탈출한 유민사로서 참조자료는 될지 모르지만, 사건자체는 대단한 특히 일본왕조의 통일여부 따위를 논하는 재료라든가 왜왕조 성립 등에 관해서는 아무 가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역사사건은 과장된 기록 속에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며 그런 면에서 예로부터 정치적 날조선전 및 후세의 재탕 삼탕 날조에 해석과 해석을 거듭하는 식민어용학자들은 마치 길거리에 떨어진 뼈다구를 침흘리며 따라다니는 犬種으로 보면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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