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일본인 그들은 누구인가? / 역사문 동명 님

2013. 8. 1. 23:44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대 일본인 그들은 누구인가?|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동명 | | 조회 130 |추천 0 | 2013.07.31. 15:44 http://cafe.daum.net/alhc/ALGC/3626


<고대 일본인 그들은 누구인가?>


   현재 일본열도에 사는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조상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일본인들은 크게 3가지 방향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는 홋까이도를 중심으로 퉁구스계인 아이누족이며, 둘째는 쿠슈를 중심으로 중국 남방계의 이동설, 셋째는 한반도 가야인의 도래설 등이다.

 

   19세기초 일본이 패권주의에 한창 열을 올리던 시기 일본인 기원론에 관한 연구자들이 나타나는데, 키무라 타카타로, 이시카와 산시로, 오야베 젠이치로, 사카이 카츠토키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키무라 타카타로이다. 키무라는 일본어와 그리스어나 라틴어, 일본 신화와 그리스·로마 신화, 이집트 신화, 『성서』 등의 유사점에 주목하여, 유사한 것은 모두 동일한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이자나기노 미코토(伊邪那岐尊)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이며, 스사노오노 미코토(須佐之男尊)는 페르세우스로,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Susa)의 건설자이며, 오오쿠니누시노 미코토(大國主命)는 요셉이며, 야마토타케루노 미코토(日本武尊)는 아폴론이다. 이리하여 키무라는 일본인의 선조가 고대 그리스인·고대 로마인·고대 이집트인이며, 이전에는 천황의 지배 아래 전세계에 군림하고 있었던 민족임을 입증한다고 하였다.


    특히 일본인과 유태인의 동조론은 가장 많은 지지자를 끌어모은 설로서 알려져 있는데, 그 논증은 예를 들면 사에키 요시로의 논(論)에서 “(쿄토의 우즈마사의) "우즈"는 "Ishu" 즉 "Jesus"(예수), 또 "마사"는 "Messiah"(메시아)의 전와어(轉訛語)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랍어 및 셈족어의 "예수·메시아"(Jesus, the Messiah)의 전와어에 다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언어유희적인 독단인 듯한 것이며, 도저히 학술적인 설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러한 설이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일본인의 선조를 오리엔트 혹은 유럽의 고대 문명의 건설자인 백인계 인종에서 구하고 있는 점은 주의해 두어야 할 점일 것이다.

    위의 학설들이 쇼와 초기에 들어서면 더욱 도착(倒錯)된 논리가 탄생한다. 즉 “일본인이 다른 모든 민족의 기원이 되었다. 라는 설이다. 이러한 설을 뒷받침 하는 역사서가 있는데, 그것이 죽내문헌이다. 연력무수(年歷無數)의 과거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역사서에는, 일본이 전 인류의 고향이며 일본의 천황은 신무천황의 즉위 이전에도 수백대, 수천억년에 걸쳐서 전 세계에 군림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석가, 모세, 그리스도, 무하마드 등은 모두 천황의 자손이라는 가장 도착된 형태의 자민족지상주의적 일본인 기원론을 찾아낼 수 있다.


    홋까이도를 중심으로 퉁구스계인 아이누족의 도래설을 제외하고 일본인 기원론에 대한 불을 짚피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광개토왕비의 발견이다. 물론 광개토왕비가 발견되기전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고대 일본의 임나지배를 근거로 정한론이 제창되었으며, 또한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서 지배하는데 있어 정당화하는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일본에 의한 임나지배는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일관되게 기록되고 이야기되어 전해내려온 사항이었다. 그러다 광개토왕비가 발견되면서 그 비문의 내용중에 “왜가 신라와 가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것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한국 역사학계는 1960년경부터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야마토 조정의 직접적인 임나 지배는 과장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일본에서도 1970년대 들어 여기에 동조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칸 마사도모의 <임나고>를 필두로 하여 임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나카 미찌요의 <加羅考>, 쓰다 소우키찌의 <任那疆域考>, 이마니시류의 <가라강역고>, 아유가이 후사노신의 <일본서기 조선 地名攷>, 스에마쓰 야스카즈의 <임나흥망사>,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이노우에 히데오의 <임나일본부와 왜>(1978)에 이르기까지 거의 1백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임나 문제는 한.일 역사 학계의 뜨거운 감자이었다.

   임나 문제에 있어서 중립적인 위치에 놓인 중국 사료들을 살펴보면, 송서나 남제서 및 양서에서는 임나, 가라(任那, 加羅)의 두 나라가 병기되고 있다. (서기 525년) 전후의 상황을 기록한 양직공도(梁職貢圖) 백제조에서는 임나의 기록은 없다. 한원(翰苑)에 임나가 보이며, 그 주석에 “신라 고로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가라와 임나는 신라에게 멸망되었으나, 그 옛 땅은 신라 수도의 남쪽 700~800리 지점에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통전, 태평어람, 책부원귀도 한원과 거의 비슷하게 기술하고 있다. 중국 사료에서 임나는 서기 4세기 후반에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백제의 대중국 외교관계와도 깊이 관련이 있는 상황이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비하여 동진과 외교관계를 긴밀히 하면서부터 임나가 대륙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렇듯 중국이나 일본사료에서는 임나에 대해 대체적으로 자세히 기록 하였으나,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사료에는 임나에 대한 기록이 소략하다. 이는 신라정통론에 입각한 기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러한 신라정통론에 타격을 입힌 것이 바로 광개토왕비의 발견이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

   1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벌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서기 400년) 광개토왕은 말갈을 포함하여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 하였다. 고구려군은 신라성을 탈환하고 낙동강 동남쪽에 자리잡은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점령함으로써, 신라 원정을 마무리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서기 400년) 기록과 고구려군의 도움을 기록하지 않았다. 가야에 대한 김부식의 이러한 편찬 태도가 임나 문제에 대한 한.일 역사학계간에 논쟁을 야기시킬줄이야 몰랐을 것이다.

    광개토왕비문을 자세히보면 고구려군이 신라성에 나타나자 왜군은 임나가라로 퇴각한다. 이는 임나가라가 신라공격의 첨병 지역임을 알수가 있고, 임나가라와 왜국은 같은 세력임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언뜻보면 임나가라는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인 것처럼 비춰진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수록된 신라 초기의 기록을 보면 임나가라와 왜국은 다른 종족임을 알수가 있다. (기원전 57년) 혁거세가 경주를 중심으로 사로국을 통합하였다. 그후 (기원전 50년)에 “왜인(倭人)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하였다.”라는 것과 (기원전 39년)조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하였다.”라는 기록을 대조하면 당시 왜인들과 변한이라고 불리워졌던 가야인들은 다른 세력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삼국지>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 예(濊), 왜(倭)에서 모두 와서 가져갔다. 사고 팔 때는 모두 철을 사용하였으니 마치 중국에서 돈(錢)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삼국지에 따르면 변한은 왜인들과 철을 교역하였다고 한다. 이로보면 당시 왜인들은 원거리 항해가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삼국사기에 “(서기 14년) 왜가 병선(兵船) 백여 척으로 사로국의 변방을 공격하였다.”라는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이렇듯 가야인과 왜인들은 교역을 통해 물품뿐만 아니라 인적교류도 많았을 것이다. 사로국 초기 왜인들과의 교역 중심지는 지금의 낙동강 동남쪽의 가야인들이다. 그후 낙동강 서쪽에서 웅거하던 변한인들을 통합한 수로왕이 각 부족의 추대로 가야국(加耶國) 최초의 군주에 오른다.

 

(    서기 57년) 사로국의 왕이된 탈해이사금은 왜국과 최초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탈해이사금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은 이면에는 낙동강 동쪽 가야인들의 협조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기 66년) 낙동강 중류에서 할거하던 가야계가 사로국에 편입되면서 낙동강 동남쪽 가야와 사로국은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결국 (서기 77년) 동가야가 사로국을 공격했으나, 대패하였다. 파사이사금은 동가야에 대한 정벌과 압박을 가해, 결국 동가야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때 일부 동가야인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시작한 것이 최초의 도래인이라 볼수 있다. 동가야를 제압한 사로국은 서가야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이와중에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사로국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서가야의 중심국인 금관국과 사로국은 일전을 벌였지만, 사로국은 별성과없이 물러났다. 사로국이 서가야와의 전쟁에서 실패하자 열도로 건너간 동가야인들이 주축이 되버린 왜국은 이 틈을 이용하여 사로국과 화친을 맺고 동가야 지역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보장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3세기 왜국과 긴밀한 관계에 놓인 동가야와 서가야간에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이른바 포상8국과 가라의 전투이다. 이 시기부터 왜국은 과거 동가야의 지역에 거점을 두었던 것이다.

4세기에 접어들어 유리이사금은 왜국 정벌을 논의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 두었고, 오히려 왜국과 화친을 맺는다. 그러다 왜국 조정의 연이은 혼인 요구를 사로국이 거절하자 (서기 345년)에 드디어 왜국이 국교를 끊었다. 이로부터 가야인들이 주축이된 왜국은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략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계속되는 왜국의 집중 공격에 위기를 느끼고 고구려에 구월을 요청하고자 실성이사금을 볼모로 보낸다. 백제와 치열한 공방을 버리던 고구려는 백제가 후연 및 왜국과의 공동 전선을 구축하자, 이러한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백제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 두 개의 전선을 구축한다. 그 하나의 전선이 신라를 공격하고 있던 왜군과 동가야 지역에 거점을 두고 있던 임나가라를 몰아내는 것이다.


    고구려에게 참패한 왜군과 이 전쟁에 참여한 일부 가야인들이 이때 일본열도로 이동하였다. 왜국은 동가야 지역에 존재하던 거점을 다시 확보하고자 (서기 408년) 대마도(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전진기지로 삼는다. 그러나 왜국은 동가야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한반도 가야인들의 도래설에 대한 대강을 살펴 보았다.

근래에 들어 한반도 가야인들의 도래설을 인정하는 일본 역사학자들이 나타났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최근 김해 대성동에서 발굴된 기마 고분은 3세기 무렵 강력한 철기문화를 이룩했던 한반도의 진(辰) 왕조가 일본의 규슈 지방을 정복한 뒤 김해에 임나일본부를 두었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한반도 가야인들의 일본열도 도래설은 점점 그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한반도 가야인들의 일본열도 도래설을 가지고 일본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앞서 논의한 퉁구스계 아이누족이 일본열도 대부분에 정착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고대 일본열도의 원주민들은 누구일까? 이것에 대한 고찰을 해보기로 한다.


<산해경(山海經)>

蓋國在鉅燕南, 北倭。倭屬燕。개국은 거연 남쪽이고 <왜>의 북쪽이며 왜는 연나라에 속한다.

<논형(論衡)>

成周之時, 越裳獻雉, 倭人貢暢。주나라 성왕 때 월상(越裳)에서 꿩을 바치고, 왜인들이 제사에 쓰이는 술을 만드는 원료인 창초(暢草), 즉 울금초를 공물로 바쳤다.

<한서지리지>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낙랑(樂浪)의 해중에는 왜인들이 사는데 1백여 나라로 나뉘어져 있으며, 해마다 공물을 바치러 오는 것이 이따금씩 눈에 띈다고 한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일본인의 고대 명칭으로 알고있는 왜(倭)에 대한 중국 한(漢)나라 시기에 편찬된 사료들이다. 위 사료들의 내용을 보면 왜인들의 거주지가 한반도 및 열도를 비롯하여 대만까지 넓은 의미로 기술 되어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왜인이 바로 고대 일본인의 기원을 알수있는 단초가 되지 않나 싶다.

   위의 세가지 사료중에 논형에서 말하는 왜인들이 가장 연대가 오래 되었다. 주나라 성왕은 (기원전 1000년)경 사람이다. 이때 왜인들이 울금초를 공물로 바쳤다고 했다. 울금초는 생강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이며, 열대아시아 원산으로 우리 나라·인도·인도네시아·중국·대만·일본 등에 분포한다. 마르코 폴로는 예로부터 중히 여기는 울금이 중국 푸젠성(福建省)에 있다 하였고, 명나라 때의 통아(通雅)에 울금으로 황색을 염색한다고 하였으며, 미얀마에서는 승려복을 울금으로 염색하였다고 한다. 이로보면 울금초의 생산지역은 중국 남부지역임을 알수가 있다. 따라서 주나라 성왕때 왜인이 울금초를 바쳤다고 하니, 당시 왜인이라함은 월족(越族)으로 볼수있다.


   월족은 분포 지역이 매우 광범위하였는데, 주로 중국 동남부와 남부 지역에 분포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소남 · 상해 · 절강 · 안휘 · 복건 · 대만 · 광동 · 광서 등지는 모두 고대 월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국외로는 베트남 북부의 광대한 지역까지 펼쳐져 있다.

    동주(東周) 춘추시기의 우월(于越)은 회계(會稽) 지금의 절강성 소흥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구천이 스스로 월왕이라 칭하면서 월(越)나라를 세웠다. 춘추 말기에 월나라는 오(吳)나라와 잦은 전쟁을 치렀다. (기원전 473년)에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도읍을 낭야(琅琊)로 옮기고 패주라 일컬었다. (기원전 344년)에 초(楚)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월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월나라는 멸망하고 무강(無疆)은 피살되었다. 이에 월나라의 영토는 대부분 초나라의 남쪽 지역에 귀속되었으며, 월나라 백성 중 일부는 바다 건너 대만 팽호(澎湖) 등의 섬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대만 등으로 이동한 월인들이 북으로 오끼나와 및 쿠슈로 이동하지 않았나 싶다.


<삼국지 왜전>

    남자는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無大小) 모두 경면(黥面), 문신(文身)한다. 예로부터 그들이 중국에 사자를 보낼 때는 모두 대부(大夫)라 자칭했다. 하후소강(夏后少康)의 아들이 회계(會稽)에 봉해지자 머리를 깎고 문신하여 교룡(蛟龍)이 해끼치는 것을 피했다. 지금 왜(倭)의 수인(水人)들이 물에 들어가 물고기와 조개(魚蛤) 잡는 것을 좋아하니 문신(文身)하는 것이 또한 큰 물고기와 물짐승들을 누른다고(厭) (위협한다고) 여겼고 뒤에는 점차 장식으로 삼게 된 것이다. 여러 나라들의 문신이 각기 다르고 때로는 왼쪽이나 때로는 오른쪽에 있고 때로는 크거나 때로는 작아서 존비(尊卑)에 차이가 있었다. 그 도리(道里)를 헤아려 볼 때 응당 회계(會稽), 동야(東冶)의 동쪽에 있을 것이다.


    월인들이 대만 및 오끼나와 쿠슈로 이동한 후에 편찬된 사료인 위지 왜전에 따르면, 왜인들은 모두 문신하였다고 한다. 문신 풍습은 과거 월인들의 풍속이었다. 현재 일본은 지금도 오나라의 남방 한자음으로 한자를 읽고 온몸에 문신을 하며 대만의 흑치 풍습을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절강성 하모도(河姆渡) 유적을 고증한 결과 월족은 중국 최초로 벼를 재배한 민족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월인들은 물에 능숙하여 배를 만들고 부리는 데 뛰어났으며, 이러한 능력이 바로 일본열도로 이동 할수 있었던 증거로도 충분하다.

 

    Human Genetics에 발표된 김욱 교수의 논문을 보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한족(베이징인)보다도, 남쪽의 운남인과 가깝고 심지어 베트남인과도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고 한다. 또한 스펜서 교수의 유전자 이동지도에 의하면, 중국인은 M175유형의 돌연변이형을 가지는데, 티벳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동남아를 거친 후 북상하여, 북중국지역에서는 다시 아형인 M122유형의 돌연변이를 가진다. 이를 김욱 교수의 논문과 비교하면 한국인에게는 M122유형보다 M175유형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월인들이 회계 동쪽 바다를 건너 대만 그리고 북쪽으로 큐슈 지역까지 이르러서 일본열도의 원주민이 되었다는 가설을 세워 보았다. 물론 문헌기록을 기준점으로 고찰한 것이므로 더 이전 시대에 퉁구스계 종족들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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