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실체적 근거를 살펴보자.
최익현(崔益鉉)은
면암집(勉菴集
권24)
《목은사실편(牧隱事實編)》
발(跋)에서
“원운곡(元耘谷
원천석(元天錫))의
기록한 것은 선배들이 모두 동사(董史)에
비유하였다
(至若元耘谷所記。則前輩皆比之董史)”라는
대목이다.
“이를
근거로 원천석과 원동중(元董仲)이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글들이
일부 지면에 오르고,
윗
글을 그 인용 근거로 제시했다.
여기서 적시한 문제의 ‘董史’는
어떤 뜻이며,
비유(比喩)
용어의
쓰임세를 살펴보자.
‘동사’는
춘추좌전(春秋左傳
宣公2年)에
“동호(董狐)의
직필(直筆)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
이어
“동호는
춘추 시대 진(晉)의
사관(史官)이다.
어떠한
위세(威勢)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대로 직필(直筆)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사관으로 이름이 높았다.”라
기록되어 있다.
이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한
동호의
곧은 붓을 일러 ‘동호직필’이라
불렀다.
‘비유’라는
말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이다.
비유의
효과는 이해를 돕고,
생동감을
주며 사실감을 느끼게 한다.
‘董史에
비유하였다’라는
원문의 뜻은 원천석의 글들이 董狐의
직필처럼
‘곧은
붓’을
가진 훌륭한 사관이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다.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비유의
뜻이 넘쳐 났고 상징(象徵)도
아니게 되지 않았는가 싶다.
동호의
사관을 비유한 이 내용이 전화위복(轉禍爲福)
식으로
원천석이 삼성기 저자로 매김 되는 우(愚)를
범하지 않았는지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다.
‘三聖紀(上下)’를
아울러 원천석이 지었다 했으니,
상편을
지은 안함로(安含老)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안함로는 신라의 고승으로 578년
(진지왕
17)
태어나
640년(선덕여왕
9)에
입적했다.
납자필람(衲子必覽)에
의하면 안함(安含)은
법명이요,
노(老)는
존칭이라 기록되어 있다.
흥륜사
십성(十聖)
중의
한 사람으로 속성은 김(金)씨다.
1457년
세조가 참서(讖書)라
하여 수거령을 내려 찾던 여러 고사서 중 하나였다.
원동중(元董仲)은
활동연대가 미상인 승려로 안함과 동시대 고승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료를
찾아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림)
황해도
해주목(海州牧)
부분에,
"세간에
전해 오기를 안함,
원노,
동중
3인이
산 중에 땅을 택하여 수양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또
옛 고죽군의 터가 남아 있다.
(世傳昔有安含元老董仲三人卜地以築之山中又有孤竹郡遺基)"라
기록되어 있다.
삼성기
저자가 3인으로
기재되어 혼란을 야기 시키고는 있으나,
동시대
인물로 표기되어 있다.
수거령의
원문 또한 《安含
老元 董仲三聖記》로
되어 있다.
그 실증적 사실을 살펴 추적해 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시대 인문지리서로,
1418년
세종 즉위년부터 8년
동안
야심차게 만들어진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저본(底本)이다.
그
뒤 동국여지승람 완성,
수정,
개수,
증보의
과정을 거쳐
중종
5년(1530년)에
‘신증(新增)’이
추가,
완성됐다.
신찬팔도지리지는
대륙 지명을 한반도로 이동시켰다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지리서(地理書)이다.
이로보아
위에 거론된 삼인명(三人名)
또한
역사 왜곡을 시켜
후대에 혼란을 야기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보인다.
海州와
수양산성,
고죽군의
대륙 지명을 살펴보면 그 해답이 자명해 지기 때문이다.
해당
문중(門中)과
원로들은 사적(史蹟)를
보건 데,
耘谷
외에
일부인이 주장하는 ‘董仲’라는
호(號)는
본적이 없다고 한결 같이 증언하고 있다.
지리서 왜곡과 ‘董史를
비유’한
춘추(春秋)의
사실(史實)
확인
기록을,
‘원천석으로
비유’하여
사실(事實)로
보는 착상은 또 다른 역사 왜곡을 낳는 것은 아닐까?.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다.
참고로
원문을 싣는다.
勉菴先生文集卷之二十四
牧隱事實編跋
牧隱李先生。當高麗之季。與圃隱先生。倡程朱之學。振儒風。變夷俗。植綱常。興禮儀。以啓我朝文明之運。噫。天之生先生於東方。豈偶然哉。惟其遭値革除。危忠大節。爲時所諱。焚稿碎誌之擧。改削詐做之史。互相蔽玷。銘狀之述。亦不得直筆。䵝昧差爽。不啻若雲塞霧翳。一自尤翁夫子所述神道碑陰記出。而先生之爲先生。如靑天白日。凡前此訿毁先生。掩翳大節者。擧莫能售其說矣。惟芝湖李公選。棘棘不已於先生。尤翁雖不能使屈。猶不還收陰記。則尤翁之意。亦大可見矣。至若元耘谷所記。則前輩皆比之董史。而與尤翁陰記大義。無不符合。然則後之尙論先生者。不可捨此而信彼也審矣。先生後孫瓛在。篤學明義。常慨憂于玆。博搜羣書得其實。然後及贊政容稙。相與發議。旣洗改神道之刻。如尤翁之旨。復輯諸家論述之直史。爲事實。編一。將付剞劂。廣布壽傳。請余置一言。夫贒人君子微言常行之爽實。其所係亦不細。况在大節第一關頭者。終未暴白於世。如玉之玷泥。爲不知者口實。則其爲世道之害。固何如哉。是誠不可緩也。玆不敢以病擾辭。謹略以管見。書之如此云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