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5. 23:12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본 고는 지난 12월 16일 국회학술세미나 발제문 중, “기자조선은 환작(幻作)되었다” 논문의 일부분을 재정리한 것이다. 새 왕조가 창업될 때마다 상계보를 청보화(淸譜化)하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왕권자나 빈천자가 권력 반열에 오르면 자신과 가문의 부족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유명 인물로 상계를 조작했다. 수구세력들은 목숨을 구걸하고 기생하며, 거짓 역사를 만들어 야합했다. 절대 권력자의 환부역조 (換父易祖)에 적극 동참한 것이다. 일부 왕조와 문중비사(門中秘史)는 이렇게 만들어 졌다. 어떤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거나 단언할 때 ‘내 성(姓) 갈겠다’라 한다. 조선은 유교의 영향으로 성(姓)을 바꾸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이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럼에도 姓이 바뀐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연원을 살펴보자. 번한세가(番韓世家)에는 老子와 孔子가 나눈 이야기가 전한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해서 묻는 중에, 노자 아버지의 성은 韓이고 이름은 乾이며, 조상은 풍인(風人)이라 하였다. 후에 서토를 탈출하여 ‘아유타(阿踰陀)’에서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孔丘 適周問禮 於老子李耳 耳父姓韓名乾 其先風人 後西出關由內蒙古 而轉至阿踰陀 以化其民)라 기록했다. 당시 세상을 지배했던 孔子의 어록, 그럼에도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老子를 가문으로 끌어들여 조상으로 삼았다. 이는 빈천(貧賤) 가문을 미화시키기 위한 상계(上系) 조작이었다. BC 1122년 商나라 箕子는 황제헌원의 16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헌원은 공손성(公孫姓)으로 후에 모성을 따라 희성(姬姓)으로 바꾸었다. 기자의 본명은 자서여(子胥餘), 商(殷)나라 왕족 성인 子姓이다. 商을 떠나면서 箕姓이 되었다. BC 324년 기후(箕詡)가 번한조선을 찬탈, 130년 후 BC 194년 기준(箕準)은 韓氏로 둔갑(冒姓)한 뒤 조선에 정착 韓, 奇, 鮮于氏로 바뀌었다. BC 1285년 기자조선(奇子朝鮮)이 이들 3姓을 사성(賜姓)한 1천여 년 계대를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송두리체 뒤집어 놓았다. 후한서(後漢書)가 조작하고 조선이 500여 년을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충실을 기하므로써 동북공정과 식민사학의 빌미를 제공했다. 또 다른 한 사례를 보자. 징기스칸 생전에 만들어졌다는 몽골비사이다. ‘대진국(大震國) 대야발(大野勃)의 19세손이 징기스칸’이라는 부분이다. 몽골 제국은 1206년 징기스칸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BC 2137년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다.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다(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或曰今蒙古族)”라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칭기스칸은 3,343년의 역사를 잘라 냈다. 단군조선의 흔적(痕迹)을 지워버리고 몽골 건국의 시조로 재구성했음이다. 단군의 역년을 기록한 위 두 사서는 위서(僞書)요, 몽골비사 만이 진서(眞書)라 주장한 데 따른 것이다.
행촌 이암(李巖)은 2096년의 거짓 단군 년대를 썼으며, 대야발이 십수삼년 고행 끝에 편찬한 단기고사 또한 거짓 글이 된 셈이다. 825년 단기고사를 번역하고 중간서를 쓴 발해인 황조복(皇祚福), 신채호(申采浩)의 중간서 교열을 본 이시영(李始榮)은 허명이었는가?. 홍암 나철, 홍범도, 오동진, 김좌진 등 일제에 항거하며 사재를 털어 고사(古史) 발간에 심혈을 기우린 독립투사들은 거짓 역사에 동참했는가?. 우리가 애써 동족 계념으로 연민의 정을 나눈 몽골은 외적(外敵)이었는가? ▲ 2012년 7월29일 화사 이관구 학술대회(독립기념관)에서 처음으로 번역, 공개된 ‘황조복(皇祚福)(825년)의<단기고사 중간서>. 자료제공=조준희국학인물연구소장) 원조비사(元朝秘史)라고도 불리는 몽골비사(원명: Monggolvn Ni'uca Tobca'an 몽고륜 뉴차 톱카안)는 칭기스칸의 22대 조상 부르테 치노와 코아이마랄로부터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를 기록한 것이다. 칭기스칸의 조상들(1절~58절)은 신화와 문학적 허구와 역사적 사실이 녹아들어 있다는 평이며 부르테 치노 또한 신화적 존재로 부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영웅 탄생은 항상 건국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칭기스칸의 조상 계대를 살펴보자. <부르테 치노=코아이 마랄-바타치칸-타마차-코리차르 메르겐-아오잠 보로올-살리 카차오 *참고서적: ‘몽골비사,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고려로 망명, 1천여 년 세가(世家)를 이루고 기록한 太氏 문중원로이며 역사학자인 太虎英씨는 한 마디로 ‘어불성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이 문중의 상계대는 고려로 직결되어 있으며, 몽골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음이 대동족보로 확인된다 했다. 太氏大同譜와 世系圖 대야발(大野勃)의 생몰년대는 미상이다. 다만 단기고사를 완성한 년도가 천통(天統) 31년으로 729년이다. 대야발의 생년을 700년으로 추정하면 징기스칸(1155년생)과는 445년의 시차가 생긴다. 1세 30년을 기준하면 15世로, 19世 까지 120년의 공간이 발생한다. 1231년(고종18) 대집성大集成), 1253년(고종40), 1260년(원종 즉위년) 대금취(大金就)가 몽골 정벌에 큰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오르고 太씨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시조 대중상(大仲象)의 18세손으로 934년(태조 17) 고려로 귀부한 11世인 왕세자 대광현(大光顯)의 8세손이다. ‘이로부터 직계손은 太씨(1526년 太氏世系譜)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태호영씨의 설명이다. 현재 太씨는 협계(陜溪), 영순(永順), 大씨는 밀양 등으로 분파되어 있다. 太씨는 9천여 명, 大씨는 5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왕계(王系)는 대조영(大祚榮) 계대가 6세에서 절손, 7세부터 대야발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칭기스칸과 동계(同系)이면서 항몽했던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불과 50여 년 차이다. 목이 쉬도록 하소하는 ‘우리 역사 알리기’는 ‘신 사대주의 역사 알리기’로 변질된 게 아닌가?. 신 사대(事大)의 출발이 또 이렇게 시작되고 있음이다. 내 역사를 얼마나 더 짓밟고 짓이겨야 할 것인가? 편향된 시각이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파나류산(波奈留山) 아래에 한인씨(桓仁氏)의 나라가 있는데...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여 리이다. (三聖記 下篇, 古記云波奈留之山下有桓仁氏之國... 其地廣南北五萬里東西二萬餘里)” 차라리 이들 모두 ‘단군의 후예들이다’라 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역사 해석이 아닐까? “한국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이다.” 라고 신날하게 비판한 러시아 사학자 푸틴의 강의 요지를 살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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