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삼성기(三聖紀)’는 원천석(元天錫)이 저술했는가?.

2018. 3. 5. 23:11우리 역사 바로알기





그 실체적 근거를 살펴보자.

 

최익현(崔益鉉)은 면암집(勉菴集 24) 목은사실편(牧隱事實編)()에서

원운곡(元耘谷 원천석(元天錫))의 기록한 것은 선배들이 모두 동사(董史)에 비유하였다

(至若元耘谷所記則前輩皆比之董史)”라는 대목이다.

이를 근거로 원천석과 원동중(元董仲)이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글들이

일부 지면에 오르고, 윗 글을 그 인용 근거로 제시했다.


여기서 적시한 문제의 董史는 어떤 뜻이며, 비유(比喩) 용어의 쓰임세를 살펴보자.

동사는 춘추좌전(春秋左傳 宣公2)동호(董狐)의 직필(直筆)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

이어 동호는 춘추 시대 진()의 사관(史官)이다. 어떠한 위세(威勢)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대로 직필(直筆)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사관으로 이름이 높았다.”라 기록되어 있다.

이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한

동호의 곧은 붓을 일러 동호직필이라 불렀다.

 

비유라는 말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이다.

비유의 효과는 이해를 돕고, 생동감을 주며 사실감을 느끼게 한다.

董史에 비유하였다라는 원문의 뜻은 원천석의 글들이 董狐의 직필처럼

곧은 붓을 가진 훌륭한 사관이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다.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비유의 뜻이 넘쳐 났고 상징(象徵)도 아니게 되지 않았는가 싶다.

동호의 사관을 비유한 이 내용이 전화위복(轉禍爲福) 식으로

원천석이 삼성기 저자로 매김 되는 우()를 범하지 않았는지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다.

 

三聖紀(上下)’를 아울러 원천석이 지었다 했으니,

상편을 지은 안함로(安含老)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안함로는 신라의 고승으로 578(진지왕 17) 태어나 640(선덕여왕 9)에 입적했다.

납자필람(衲子必覽)에 의하면 안함(安含)은 법명이요, ()는 존칭이라 기록되어 있다.

흥륜사 십성(十聖) 중의 한 사람으로 속성은 김()씨다.

 

1457년 세조가 참서(讖書)라 하여 수거령을 내려 찾던 여러 고사서 중 하나였다.

원동중(元董仲)은 활동연대가 미상인 승려로 안함과 동시대 고승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료를 찾아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림) 황해도 해주목(海州牧) 부분에,

"세간에 전해 오기를 안함, 원노, 동중 3인이 산 중에 땅을 택하여 수양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또 옛 고죽군의 터가 남아 있다.

(世傳昔有安含元老董仲三人卜地以築之山中又有孤竹郡遺基)"라 기록되어 있다.

삼성기 저자가 3인으로 기재되어 혼란을 야기 시키고는 있으나, 동시대 인물로 표기되어 있다.

수거령의 원문 또한 安含 老元 董仲三聖記로 되어 있다.


그 실증적 사실을 살펴 추적해 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시대 인문지리서로, 1418년 세종 즉위년부터 8년 동안

야심차게 만들어진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저본(底本)이다.

그 뒤 동국여지승람 완성, 수정, 개수, 증보의 과정을 거쳐

중종 5(1530)신증(新增)’이 추가, 완성됐다.



신찬팔도지리지는 대륙 지명을 한반도로 이동시켰다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지리서(地理書)이다.

이로보아 위에 거론된 삼인명(三人名) 또한 역사 왜곡을 시켜

후대에 혼란을 야기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보인다.

海州와 수양산성, 고죽군의 대륙 지명을 살펴보면 그 해답이 자명해 지기 때문이다.


해당 문중(門中)과 원로들은 사적(史蹟)를 보건 데,

耘谷 외에 일부인이 주장하는 董仲라는 호()는 본적이 없다고 한결 같이 증언하고 있다.

지리서 왜곡과 董史를 비유한 춘추(春秋)의 사실(史實) 확인 기록을,

원천석으로 비유하여 사실(事實)로 보는 착상은 또 다른 역사 왜곡을 낳는 것은 아닐까?.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다. 참고로 원문을 싣는다.

 

 

勉菴先生文集卷之二十四

牧隱事實編跋

 

牧隱李先生當高麗之季與圃隱先生倡程朱之學振儒風變夷俗植綱常興禮儀以啓我朝文明之運天之生先生於東方豈偶然哉惟其遭値革除危忠大節爲時所諱焚稿碎誌之擧改削詐做之史互相蔽玷銘狀之述亦不得直筆䵝昧差爽不啻若雲塞霧翳一自尤翁夫子所述神道碑陰記出而先生之爲先生如靑天白日凡前此訿毁先生掩翳大節者擧莫能售其說矣惟芝湖李公選棘棘不已於先生尤翁雖不能使屈猶不還收陰記則尤翁之意亦大可見矣至若元耘谷所記則前輩皆比之董史而與尤翁陰記大義無不符合然則後之尙論先生者不可捨此而信彼也審矣先生後孫瓛在篤學明義常慨憂于玆博搜羣書得其實然後及贊政容稙相與發議旣洗改神道之刻如尤翁之旨復輯諸家論述之直史爲事實編一將付剞劂廣布壽傳請余置一言夫贒人君子微言常行之爽實其所係亦不細况在大節第一關頭者終未暴白於世如玉之玷泥爲不知者口實則其爲世道之害固何如哉是誠不可緩也玆不敢以病擾辭謹略以管見書之如此云爾



출처 : soo709
글쓴이 : 한문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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