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농상집요』 미스터리

2018. 3. 5. 23:29차 이야기

행촌(杏村) 3서(三書)로 알려진 『농상집요(農桑輯要)』는 행촌 이암(李巖 1297~1364)이 元나라에서 도입한 경세실무서(經世實務書)이다. 이암이 도입한 계기와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지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3,500년 전 고조선에서 농상(農桑)를 권장하고, 학문을 일으켜 문화가 크게 진보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을 먼저 살펴보자.


BC 2240년 부루단군(扶婁壇君)께서 “도랑을 파고 농업과 양잠(養蠶)을 권장하며, 학교를 지어 학문을 일으키시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고 그 명성이 나날이 퍼져 갔다(辛丑元年...勸農桑設寮興學文化大進聲聞日彰)”
행촌 이암이 단군세기에 쓴 이 ‘권농상(勸農桑)’ 기록이 元의 농상집요 편찬과 맞물려 있음을 본다. 元나라의 농상집요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농서(農書)를 두루 참고하여 정리한 서책이다. 농상집요는 7권 3책으로 이 책의 실제 저자는 맹기(孟祺), 창사문(暢師文), 묘호겸(苗好謙) 등으로 알려져 있다. 권1에 전훈(典訓), 경간(耕墾), 권2 파종(播種), 권3 재상(栽桑), 권4 양잠(養蠶), 권5 과채(瓜菜), 권6 죽목(竹木), 약초(藥草), 권7 자축이며, 끝 부분은 세용잡사(歲用雜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농상집요에 앞서 6세기경 간행된 『제민요술(齊民要術)』은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합 농업기술서로 알려져 있다. 북위(北魏)의 북양태수(北陽太守)였던 가사협(賈思陣)이 저술하였으며 전10권이다. 제민은 서민을 뜻하며, 농업기술의 안내서로 오곡, 야채, 과수, 향목(香木), 상마(桑麻)의 종식법(種植法), 가축의 사육법, 술, 간장의 양조법 그리고 가공, 판매, 조리과정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제민요술은 ‘당시의 학술들을 모아 저술했다’ 했으며, 농상집요는 ‘옛 농서를 참고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두 농서는 단군조선이 편찬한 방대한 경세서(經世書)를 인용, 기사협은 이를 자서(自書)로, 元나라는 자국의 경세서로 탈바꿈한 정황이다. 어쨌던 행촌의 이 기록은 의식문명(衣食文明)의 뿌리가 한민족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元나라는 이를 근원으로 1273년 농상집요를 비롯, 『왕정농서(王禎農書)』, 『농상촬요(農桑衣食撮要)』 등을 연이어 편찬, 보급하여 농업국가 체제로 탈바꿈을 시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목을 중시하는 기조에서 농사를 중시하는 성향으로 바뀌어 가는 것은 초기의 난국을 지나 국내의 평정을 위해 백성들에게 먹고 입는 것으로 하늘을 삼아 주어야 했을 것이다.


대 제국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더욱 절실했을 터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요, 식이위천(食以爲天)이었을 것이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데 있다. 생명보다 더 존귀한 땅의 가치, 꿈과 희망이다. 절대자는 이를 해소하므로써 사명과 권위를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 절대적 가치를 단군조선의 경세서에서 해답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몽골 제국은 1206년 징기스칸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기록에는 BC 2137년 “황제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다.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다(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或曰今蒙古族)”라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칭기스칸은 3,343년의 단군조선의 역사를 잘라 냈다. 그들의 건국지(建國誌)인 몽골비사(蒙古秘史)는 단군조선의 흔적(痕迹)을 지워버리고 칭기스칸을 몽골 건국의 시조로 재구성했음이다. 또한 대진국(大震國) 대야발(大野勃)의 19세 손(孫)이 칭기스칸이며, 시조모(始祖母) ‘알랑 고아’ 신화가 만들어 지고 그녀의 아버지가 고주몽(高朱蒙)이라 했다. 영웅 탄생은 항상 건국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1271년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었다. 


이암이 원나라로부터 농상집요를 도입한 해가 첫 원행(元行) 2년 후인 1330년과 두 번째 원행인 1349년(충정왕 1)으로 어느 시기인지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단군세기가 완성된 해가 1363년이다. 이암에게 이 33년과 14년이란 시차에서 도입한 의도와 계기는 무엇을 말함일까?. 원나라가 3,500여 년 전 단군조선의 역사를 지우고 학문을 기묘하게 인용한 흔적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단군세기 집필과정에서 이암은 원과의 역학관계에서 차마 발설할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농상집요를 도입하면서 이암은 어떤 감회에 젖었을까?. 후학들의 역사의식과 자중(自重)을 독려한 것은 아닐까?. 끝없는 의문점이 남는 것은 단군세기의 기록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다. 행촌은 단군세기 서문(檀君世記 序文)에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 그 혼을 잃고서 형체가 보존될 수 있겠는가(國猶形 史猶魂 形可失魂而保乎)라 하여 ‘역사의 혼’을 강조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암의 自畵像 <출처; 고성이씨대종회>


이암은 1349년 이 서책을 그의 외생(外甥)인 판사(判事) 우확(禹確)에게 전달하였고, 우확은 강시(姜蓍 1339∼1400)에게 전하여 이암 사후 8년이 지난 1372년 『원조정본농상집요(元朝正本農桑輯要)』를 판각했다. 이는 농상집요를 대본으로 삼은 새로운 판본이다. 강시가 농상집요를 입수, 판각할 수 있었던 사연 또한 혈연관계를 꼽을 수 있겠다. 강시는 진주군(晉州君)으로 책봉되었던 하즙(河楫)의 딸과 혼인했고, 부인 河씨의 어머니가 이암의 누이였던 것이 그 요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농상집요 후서(後序)를 보면 판각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색은 “만약 그 일을 기필코 시행해 보려고 한다면, 이단(異端)을 몰아내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고려의 풍속을 변화시킬 길이 없을 것이요, 따라서 이 책에 기재되어 있는 것들도 한갓 글자로만 남게 될 것이니, 강군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라 하여 간행 자체가 정도(正道)에서 벗어 난 자〔異端〕들의 질시와 핍박이 녹녹치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할 수 있겠느냐는 암시적 물음으로 보아 당시 고려의 정치적 상황은 극도로 혼란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확이 전달자 역할에 그친 이유 또한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이색이 지적한 이단(異端)은 누구인가?. 후서를 썼던 당시 이색의 관직은 대사성(大司成)이었으며, 1373년에는 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知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으로 고위 관리였다. 고려 정국은 1360년대부터 1370년대까지 왜구(倭寇)와 홍건적(紅巾賊)의 침략, 1370년 1차 요동 원정이 있었고, 간행 2년 후인 1374년 공민왕 시해(弑害)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 혼란과정에서 친원파와 친명파로 나뉘어 파벌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볼 때, 이들 당파 주역들을 이단으로 지칭한 것이 아닌가 싶다.



▲농상집요 판각본(출처: ‘진주강씨 역사의 눈’ 편찬위원회)


이색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강시가 판각을 강행한 것은 이암과의 혈연관계를 넘어 찬란했던 단군조선의 문명을 기록한 단군세기를 접했을 확률이다. 이를 접한 강시는 이암의 역사의식, 구국 충정의 염원과 고조선의 문명을 후대에 알리기 위한 강한 소명의식으로 간행에 심혈을 기우렸을 개연성이다. 강시의 결단 유무에 따라서는 농상집요 판각 자체가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어떠한 방식이 되었던 농경역사의 맥(脈)은 고려를 거쳐 신생 조선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농상(農桑)에 획기적인 변화와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 계기를 가져왔다. 1429년(세종11) 농사직설(農事直說)을 비롯, 1655년(효종 6)에 간행된 농가집성(農家集成)을 집필하는데 토대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강시의 증손인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은 세종 때 화훼원예(花卉園藝)와 관련된 『양화소록(養花所錄)』을, 아우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1475년(성종 6)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저술하여 선대의 농학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들 또한 선대의 역사적 소명의식을 물려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양화소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화훼 원예서로 우리나라 고유 원림 문화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으며, 금양잡록은 노농(勞農)의 경험을 수용하여 직접 실험한 내용을 수록한 점이 돋보인다.


단 사대모화(事大慕華)라는 시대적 비극으로 고조선의 찬란한 문명 기록이 분서(焚書)되어 누락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농상집요와 관련,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양잠(養蠶)을 기초로 만들어진 제지술(製紙術)이다.
BC 1419년 “뽕나무 껍질(桑皮)로 종이(紙)를 만들었다” 단기고사의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보면 양잠과 더불어 고조선 문자를 남기기 위해 종이 제작은 꾸준히 이루어 졌다는 추론이 충분하다. 이 기록만으로도 종이 제작은 세계 최초요, 최고(最古)다.

고려지(高麗紙)의 이름 잠견지(蠶繭紙). 고려지라 했으나 이는 고구려를 칭한다. 고구려는 또 고조선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켰다.


전북 남원 실상사 극락전에 안치된 조선시대 건칠불(乾漆佛) 좌상의 머리 안에서 14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불경이 발견됐다.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와 불교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컴퓨터 단층촬영 결과 불경은 뽕나무 종이에 은가루로 쓴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이라고 2017년 5월 24일 밝혔다. 19대 구모소(緱牟蘇) 단군 때 ‘뽕나무 종이’를 발명했다는 기록이 증빙된 것이 아닌가.


▲뽕나무 종이/ 실상사 건칠불좌상에서 나온 대반야바라밀다경 <출처: 불교문화재연구소>


천자와 제후는 공상(公桑. 桑田)과 잠실(蠶室)을 가지고 있어서, 궁실의 부인들은 반드시 공상(公桑)에 뽕나무를 심어 잠실(蠶室)에서 누에를 쳐서 옷감을 짜는 일을 의무적으로 하였다. <시경(詩經)> 국풍에도 "단비 내리고 난 뒤에 말구종에게 명해서 새벽별
보고 일찍 멍에 메워 상전(桑田)에서 머무니(靈雨旣零 命彼倌人 星言夙駕 說于桑田)"라 하여 비단과 종이의 역사가 동이족에 의해 발명되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송나라 서긍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창고마다 서책이 가득하여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으며, 기서와 이서 또한 많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고대사서들. 황제국의 찬란한 문화와 함께 수많은 고대사서를 장정했을 세계 최고의 종이 잠견지는 고려 멸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도경>을 비롯, <고반여사(考槃餘事)>, <문방사고(文房肆攷)> 등 고려지의 우수성을 예찬하는 고사서의 기록에서 선조들의 가녀린 숨결만을 확인해 볼 뿐 사라진 종이의 한 부분도 찾을 길이 없다.

‘고려의 종이부채 학같이 나는 듯 상당의 솔 그을음에 사향 향기라 (高麗紙扇鶴翎翔 上黨松煙麝澤香)’ 고려의 문신이며 재상이었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고려지를 찬미한 시 구절이 그가 지은 <동국이상국전집> 제15권에 남아 고려의 찬란한 문화를 다시 엿보게 한다.


잠견지(蠶繭紙). 세상 어느 민족도 감히 그 제조 기술을 흉내 낼 수 없었던 고려의 종이였으며, 또한 최고의 품질로 명성을 떨치며 송, 당이 부러워하여 다투어 썼음을 이규보는 시를 빌어 노래했다.

고려지(高麗紙)라 불리운 잠견지는 "금견(錦繭: 누에고치로 만든 비단)을 가지고 만드는데, 종이의 색깔이 하얗기가 명주[綾]와 같고, 질기기가 비단[帛]과 같아서, 여기에다 글씨를 쓰면 먹이 진하게 배어 아주 좋다. 이것은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역시 기이한 물품이다" 는 기록이 <고반여사(考槃餘事)>에 보인다.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은 <해동역사(海東繹史)> 문방류(文房類)에서 상등ㆍ중등ㆍ하등의 당나라 진적은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 모사한 육조(六朝)의 진적과 명나라의 명화(名畫)의 두루마리 또한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고 썼으며,

성호 이익(李瀷 1681-1763)도 그가 쓴 <성호사설> 제4권 견지(繭紙)편에 송나라 조희곡(趙希鵠)이 지은 <동천청록(洞天淸錄)>에 "고려지는 면견(綿繭)으로 만들었는데 빛은 비단처럼 희고 질기기는 명주와 같아서 먹을 잘 받으니 사랑할 만하여 이는 중국에 없는 것이니 역시 기품이다. 면견 또는 잠견(蠶繭)으로 난정첩을 썼다는 것도 이 고려지를 가리킨 듯하다."라는 기록을 인용해 밝혔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당 태종은 왕희지가 잠견지에 서수필(鼠鬚筆)로 쓴 난정진적(蘭亭眞跡)을 얻어내어 그것을 모각(摸刻)하여 황자(皇子)와 근신(近臣)에게 내려 주었는데, 겨우 수본에 그치고 그 석(石)은 부서졌으며, 진본은 순장(殉葬)되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그가 쓴 <완당전집(제4권)>에서 밝혔다.


흔히 종이 역사를 다룰 때마다 105년 후한 때 처음으로 채륜에 의해 제지술이 발명되었다고 하나, 서화사(書畫史)에서 보듯 “양한(兩漢)ㆍ삼국(三國)ㆍ이왕(二王)ㆍ육조(六朝)ㆍ수(隋)ㆍ당(唐)의 임금과 신하들의 묵적(墨跡)은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고 하였으니, 제지기술 또한 왜곡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는 동이족을 의식, 의도적으로 감추었음이 드러난다.


고구려의 섬세하고 다양한 제지기술은 원료·용도·생산지에 따라 크기·지질·색깔·이름 등을 달리해 다양하게 만들어졌을 것이며, 이규보가 시구절로 그 사실을 알린 것처럼 숱한 전쟁사에서도 고려 때까지 그 맥을 면면히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대야발(大野勃)은 단기고사(檀奇古史) 서문에서 고구려 멸망 당시 소정방과 설인귀가 국서고(國書庫)를 부수고, <단기고사>와 <고구려사>, <백제사>를 전부 불태워 버려 13년 동안 자료를 수집, 다시 편집했다고 밝히고 있어 고구려의 <유기> 또한 고구려 멸망과 함께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서(國書)의 중요성으로 미루어 이 때의 <유기>는 잠견지로 장정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출처 :계명대학교 우즈베키스탄 탐사여행 http://cafe.daum.net/2011kmgep/FH3/8>


751년 당나라 때 고구려 출신 고선지(高仙芝 ?∼755) 장군이 당나라와 사라센간의 달라스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된 사병들에 의해 국가 기밀인 종이 제작기술이 적국에 전해지고, 전 세계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의 종이 제작기술은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거쳐 1150년 유럽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스페인에 전달되었다. 이어 프랑스(1189년), 독일, 이태리, 벨기에, 영국(1490년), 러시아(1566년), 노르웨이(1650년), 미국(1690년), 그리고 캐나다(1803년) 등에 전달되어 천손민족의 종이 기술이 전 세계 인쇄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농업과 양잠(養蠶)을 권장하여 세계 최초 의식문명과 제지술을 일군 선대(先代)의 놀라운 지혜와 노고를 보았다. 그러나 여말선초(麗末鮮初) 집권층의 사대모화사상에 의해 고사서는 불태워져 사라지고 왜곡되거나 굴곡되었다. 이제 그 흔적의 편린(片鱗)들이나마 모아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삼아야 할 것이다.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출처 : 遼東收復을 꿈꾸며...
글쓴이 : 한 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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