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도의 내단수련과 신종교 수련 - 김용휘 外

2018. 3. 8. 18:53잡주머니


한국선도의 내단수련과 신종교 수련 - 김용휘

2018. 2. 8. 10:47



1. 머리말
   중국에서 도교가 공식 전래되기 이전부터 한반도에 나름의 선도적 전통이 있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인정하는 듯하다. 그런데 한국 선도 연구에 있어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는 중국에서 도교가 들어온 이후 한국의 독자적인 仙風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중국 도교 속으로 그냥 흡수되어 버리고 따로 존재하지 않는지, 아니면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든 내려오는지 하는 것이다.

   해동전도록이나 청학집 등에 나타난 한국 선맥을 보면 통일신라 이후에는 독자적인 모습으로 내려오는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김가기, 최승우 등의 당나라 유학파들이 중국의 종리권 등에게서 내단적 수련도교를 전수받은 것을, 특별한 선연이 있는 제자에게 전수함으로써 은둔적 지식인에 의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한 채 비전되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흔히 한국도교사의 특징은 고려때는 과의적 도교, 조선에서는 내단적 수련도교로 정리되어 왔다. 그리고 그 내단수련의 내용도 중국의 그것과 큰 차별성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될 경우 드는 의문은 도교전래 이전의 고대의 선풍은 어디로 갔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남아서 내려왔다면 중국과는 다른 한국 선도 수련의 특징이 남아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한국 도교사를 고려의 과의도교와 조선의 내단적 수련도교로 특징지을 경우 이는 귀족 엘리트, 적어도 은둔적 지식인들에 의해서만 향유된, 그리고 문헌상으로 남아 있는 것만으로 한정함으로써 한국의 선도 역사를 글을 남길 수 있는 엘리트 지식인 중심으로 축소시킨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비록 한국에서는 민중을 기반으로 한 도교교단은 수립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몇몇 지식인들에 의한 고도의 내단 수련의 전통 외에 산간에서 다른 수련법, 예를 들면 기도나 주문, 부적 등의 이른바 좌방적인 전통으로 수련한 사람들은 없었던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지금까지 한국도교사, 또는 선도사에서 한국의 수련 특징을 내단 중심으로만 본 것은 일단 문헌 중심으로만 파악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또 이 이면에는 이른바 좌방적인 수련을 한 단계 낮은 것으로 보는 조선도교사 이래로 암묵적인 무시가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이는 지고신에 대한 경천의례를 중시하고 홍익인간과 性通功完을 중시하던 고대적 전통을 스스로 약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좌방선도의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는 문제와 맞물린다. 그러나 아직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텍스트상으로 그 존재를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근거 자료는 못 본 것 같다. 물론 박현 같은 이는 좌방선가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우방의 지식인들과는 달리 산간에 묻혀 사는 처사와 逸士, 평민과 천민들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다고 한다.

   또 정재승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름난 좌방의 인물들까지 거론하면서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이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액면 그래도 믿을 수는 없다. 다만 산간에서 지식인들에 의한 내단 위주의 수련법과는 별도로 기도나 주문, 부적 등을 중심으로 수련했던 다양한 수련 전통이 있었을 개연성은 매우 높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텍스트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없다고 단정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한국선도사를 왜소화할 뿐 아니라 선도 수련의 한쪽을 잃어버리는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또한 고도의 장기적인 수련을 요구하는 내단 수련법만으로는 당장 고통받는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할 때, 보다 간이하고 대중적인 수련체계의 존재 여부는 한국선도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불교에서도 정토종같은 종파가 나온 것은 아미타불에 대한 타력적 신앙과 특히 간이한 염불수행을 통해 일반 민중을 구제하려는 치열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런 좌방적 실체를 역사적으로 논증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직 필자의 연구 수준을 넘어서는 것일뿐 아니라 보다 많은 자료조사와, 또한 문헌적인 연구방법론과는 다른 다양한 연구 방법론의 고민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다만 본 연구는 동학의 수련이 주문을 위주로 한 좌방적인 수련법에 기반하고 있다는 데 착안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동학을 비롯한 근대 신종교는 민중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구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어쩌면 최초의 한국의 선도적/도교적 교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기에, 신종교의 수련법에 대한 연구는 어쩌면 잃어버린 우리의 선도적 전통의 일면을 다시 드러내 줄 수 있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동학 수련에 나타난 여러 모습들을 통해 동학을 비롯한 한국 신종교는 한국 고대의 선의 전통, 특히 지고신에 대한 경천의식과 민중의 아픔을 함께하는 홍익인간, 성통공완적인 수행전통을 계승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동안 몇몇 은둔적 지식인에 의해 간신히 지켜온 한국의 선도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한국 선도의 전개와 신종교의 등장
   흔히 한국도교의 특징은 일단 고려 때는 과의도교, 조선에 들어서는 내단 중심이라는 평가되고 있다. 또한 국가가 주관하는 도관은 있었지만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성립된 교단 도교는 없었다는 점도 특징이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특징이 생기게 되었는가?
여기서 하나 고려해야 할 점이 도교를 향유한 주체가 누구였나 하는 점이다. 고대 한국의 선교(仙敎)도 국가의례적 성격이 강했고, 이후의 고구려의 조의나 신라의 화랑도도 대개 엘리트들이 향유한 것이었으며 고려의 과의도교 역시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도교사에서 흔히 조선 도교의 특징을 ‘수련도교’또는 ‘내단수련적 성격’이라고 할 때 그 의미를 다르게 보면 도교가 지식인들에게 양생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졌지 민중들의 신앙으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에서의 도교는 기층민중들에게까지 신앙적 차원으로 저변이 확대되지 못하고 주로 왕실과 지배계층, 그리고 지식인엘리트의 양생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졌다고 하겠다.

   물론 중국에서도 도교가 왕실과 결탁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초기의 도교 교단인 태평도나 오두미도는 다분히 민중적 성격을 많이 띠고 있었고 때문에, 지배층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국의 도교는 지배층에서는 관방도교적 성격으로, 은둔적인 엘리트 지식인 계층에서는 중국의 몇몇 道書를 중심으로 수련하고 아주 제한적으로 비전되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외에 산간에서 내단 외의 기도나 주문 등을 위주로 한 이른바 좌방적인 다양한 그룹들이 존재했을 것이고, 이는 때로는 정감록류의 참위설과 여러 민간신앙과 친연성을 가지면서 넘나들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도교는 지식인과 기층민중에게 전개된 양상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고대의 선의 전통은 중국의 도교를 만나 지배계층에게는 재초과의와 수련도교로 이어졌고, 일부 산간에서 좌방선가의 전통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기층민중에게는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지 못하고 결국 불교, 특히 미륵신앙과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민간신앙에 흡수되고 말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기층민중 속에 내재하고 있던 저항적 에너지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민중적 차원으로 승화된 것은 한말(韓末) 등장한 신종교라고 봐야 할 것이다. 동학을 비롯한 신종교는 고대 한국의 선풍과 미륵신앙적 요소를 계승하여 당시의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서 인간평등 사상, 후천개벽이라는 새로운 교리 해석을 바탕으로 민중의 열망에 부응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어떤 측면에서 신종교는 최초의 한국적 도교 교단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한국 선교의 두드러진 개성으로 ‘지고신에 대한 신앙 전통’을 들 수 있다. 또 한국 신선사상의 핵심은 ‘유일신 신앙과 성통공완(性通功完)’이라고 정리하기도 한다. 한국의 종교문화사의 특징은 유달리 ‘하느님’에 대한 신앙전통이 매우 강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도교의 역사에서도 왕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천제(天祭)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수련법에서 이것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는 좀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것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역시 신종교이다. 신종교의 신관의 특징은 중국의 다양한 도교신의 신앙전통과 달리 전통적인 천신신앙에 있다.
특히 동학의 신관은 비록 나중에 보다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긴 하지만 초기에는 고래로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소박한 ‘하늘님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증산교에서도 비록 다양한 도교적 신이 등장하지만 결국 증산교의 가장 핵심적 신앙이 강증산 자신을 절대유일의 최고신격으로 높이고 있다는 데서 ‘하늘님’신앙을 반영한다.
   두번째로 신종교에 반영된 고대 仙의 특징으로 수련을 통한 인격변화의 관념, 즉 신선의 관념이다. 여기서도 특징은 단군신화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자력적 수련과 타력적 기도 또는 신앙이 통합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자력적 수련도 중시하지만, 그와 더불어 지고신에 대한 정성과 간구를 통해 感應․感通됨으로써 인격의 전이가 일어나고 환골탈태가 되는 것이다.
   이는 신종교의 수행에서 여전히 ‘하늘님’에 대한 신앙적 요소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신앙적 요소는 신종교의 교의가 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보다 탈인격화된다. 신종교 수행에서 중요한 점은 많은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엘리트적 수행법을 지양하고 간이하고 집단적인 수행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신선을 내단수련을 통해 가능한 경지로 보기보다는 민중의 집단적 수련 에너지의 발로를 통한 집단적 깨달음을 중시한다. 즉 집단 영성적 요소가 강하다는 점이 신종교의 또다른 특징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는 모든 신종교에 공히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구자격인 동학과 증산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신선사상이 미륵신앙과의 결합을 통해 유토피아적 개벽사상, 지상선경의 사상을 열어냈다는 점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미륵신앙적 요소가 결국 개벽사상으로 결실을 보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신선사상이 유토피아적 말세사상과 결합되면서 지상에서 선경을 열어내자는 지상선경, 지상천국의 관념, 즉 개벽사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미륵하생신앙이 가진 현세적 삶의 중시가 보다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여기서 중국도교에 비해 보다 현세성이 강조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지고신에 대한 신앙전통이 신종교, 특히 동학 성립에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한국 신종교는 민중들의 새 세상에 대한 오랜 열망에다가 고래의 선교적, 천신신앙적 전통과 자력적 수련전통, 조화론적․원융적 세계관 등의 仙의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면서도 민중의 저항적 에너지를 승화하여 반봉건․반외세의 가장 한국적 종교 교단을 형성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3. 동학의 성립과 그 수행법
   동학은 주지하다시피 구한말의 국내외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겠다는 輔國安民의 기치로 10여년의 방랑생활과 7여년의 구도행각을 통해 1860년(경신년)의 결정적 신비체험으로 성립되었다. 동학을 흔히 유불선 삼교 합일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것들의 수평적 혼합은 아니다. 수운의 사상적 배경에서는 영남 유학, 즉 퇴계학적인 풍토의 유학적 지식인이라는 점이 고려될 필요가 있으며, 상대적으로 불교의 영향은 약하다.

   선도에 대해서도 신비체험 이전에 수운에게서 내단수련을 했다거나 하는 흔적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사항은 신비체험 이후 자신의 체험을 기술하고 동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는 선도/도교적 용어들을 상당히 많이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가장 먼저 경신년의 신비체험 과정에서 등장하는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이라든가, 장생(長生), 궁궁(弓弓), 지상신선(地上神仙), 불사약(不死藥), 무위이화(無爲而化) 등이 그것이다. ‘神仙’을 포함하여 ‘仙’자가 들어간 용어가 동경대전에 12회, 용담유사에 9회나 나온다. 또한 수련법에 있어서 주문을 중심으로 한 수련법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좌방도교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동학은 일차적으로 수운의 신비체험과 그 반성적 작업을 통한 侍天主라는 철학적 명제를 자각함으로써 나온 신비주의적 종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학은 그 이름에서 표명하고 있듯이 이 땅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의 아픔에 직접적으로 응답하기 위해, 서학과 다름은 물론 중국의 유학과도 다른 우리땅 ‘동국의 학문’을 정립하겠다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   러므로 동학은 중국 중심의 사상에서 벗어나 고대의 하늘님 신앙을 가장 중심에 놓고 중국과 다른 한국의 독자적인 학문이자 종교교단를 수립하고자 한 수운의 치열한 고민의 결실이다. 또한 수행법에 있어서 선도적인 면모가 가장 강하다는 측면에서 큰 틀에서 분류한다면 한국 고대의 선의 전통을 계승하되 민중적 차원에서 다시 부흥시킨 어쩌면 한국의 역사에서 명시적이고 전면적으로 등장한 최초의 선도 교단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제 동학의 수련을 중심으로 동학이 고대의 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유교적 수양과 선도적 수련, 그리고 의도적이었든지 아닌지를 떠나 결과적으로 그의 수련법이 한국 선도의 좌우방을 어떤 식으로든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늘님에 대한 신앙, 경천을 가장 중시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한국의 仙의 전통의 가장 큰 특징은 천신신앙 즉 지고신에 대한 신앙전통과 제천의례라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지고신에 대한 신앙전통이 중국의 다양한 도교신의 신앙전통과 달리 한국 근대 신종교, 특히 동학의 신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동학의 신관은 우리 민족의 소박한 ‘하늘님 신앙’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용담유사에 “무지한 세상사람 아는 바 천지라도 경외지심 없었으니 아는 것이 무엇이며”라고 하고 있듯이 동학의 종교적 신앙과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늘님에 대한 경외지심, 또는 하늘님에 대한 성경신(誠敬信)이다.

   오제 후부터 성인이 나시어 일월성신과 천지도수를 글로 적어내어 천도의 떳떳함을 정하여 일동일정과 일성일패를 천명에 부쳤으니, 이는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르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군자가 되고 학은 도덕을 이루었으니, 도는 천도요 덕은 천덕이라. 그 도를 밝히고 그 덕을 닦음으로 군자가 되어 지극한 성인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부러워 감탄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이 근래에 오면서 세상사람들이 각자위심에 빠져 천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천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수운은 당시 세태의 근본적 원인을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고 보았고, 그것의 근본적 해결책은 고대로부터 중시해왔던 경천(敬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수운이 하늘님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게 되는 계기는 1855년 울산의 여시바윗골에서의 이른바 ‘을묘천서’라는 사건을 통해서이다. 수운은 이를 계기로 수행의 방법을 독서와 사색에서 하늘에 기도하는 방법으로 전환한다. 그래서 수차례 하늘에 49일 기도를 드리면서 보국안민의 계책을 간구한 끝에 결국 1860년 하늘님과 문답이 열리는 결정적 신비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알 수도 없고 말로 형언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비한 목소리(仙語)가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 물은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 하지 말고 두려워 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다.

   어찌된 일인지를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또 묻기를 “그러면 西道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하였다. 이에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靈符 있으니 그 이름은 仙藥이요 그 형상은 太極이요 또 형상은 弓弓이니, 나의 靈符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呪文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長生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고 하셨다.

   이처럼 상제의 선어(仙語)를 들고,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받음으로써 세상을 건질 도를 얻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부의 이름을 선약(仙藥)이라고도 하였다.
물론 수운의 하늘님 관념은 이후에 조금 변하면서 모든 사람들 안에 모셔져 있음을 강조하고 그 모신 한울님을 정성과 공경과 믿음을 다해서 부모님처럼 받들 것을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시천주(侍天主)이다. 그래서 수운은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하늘님만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 하단말가”라고 하였다.

   이처럼 수운의 하늘님 관념이 내재적인 모습으로 바뀌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수운의 신관은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상제의 관념에서 출발하고 있고, 이는 고대 선(仙)의 지고신에 대한 신앙적 전통을 이은 것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2) 유교적 마음공부와 도교적 기운 공부의 병행
   수운은 기본적으로는 유교적 지식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퇴계의 정맥을 계승하고 있으며 경주 일대에서 문집을 남길 정도로 이름난 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운이 유교적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동학을 세운 이유 중의 하나는 유교의 가르침이 더 이상 실효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운은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라고 읊었다. 이는 물론 당시 성리학적 질서가 더 이상 세상을 이끌어갈 수 없는 현실적 세태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성리학적 공부 방법론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침이요 수심정기는 오직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다”라고 하여 ‘수심정기(守心正氣)’라고 하는 새로운 공부법을 내놓기에 이른다.

   여기서 ‘수심’은 성리학적인 마음공부를 가리킨다면 ‘정기’는 선도적인 기운공부, 몸공부를 가르킨다고 할 수 있다. 수심의 공부 외에 정기의 공부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적인 공부 외에 도교적인 기운공부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운공부를 강조하는 이유는 마음으로 욕망과 감정을 조절하려 해도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기운이 조화롭지 않으면 아무런 실천력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운공부를 통해 몸의 기운을 조화롭고 강건하게 바꿔야 한다.

   몸의 기운이 조화와 균형을 찾고 강해질 때, 이에 따라 마음 상태도 조화롭게 될 뿐만 아니라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心力이 생긴다. 이런 측면에서 수운은 우선 몸이 천지의 기운과 상통하게 되어 몸에 氣化之神이 생기는 상태, 즉 하늘의 기운과 하나로 통하는 강령체험(降靈體驗)을 중시한다.
   이는 도덕 실천의 심력(心力)은 천지와의 기운이 상통하여 스스로 몸에 기화의 력이 생길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자기를 중심으로 전 우주의 생명과 간격없는 영적․기적인 생명의 네트워크가 형성됨으로써 자기를 둘러싼 주변 모두와 기화상통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월도 “만일 수심정기가 아니면 인의예지의 도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심정기의 이치는 마음과 기운을 같이 공부하여 도덕실천의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게 한 것이 일차적인 이유라고 하겠다.

   두번째로 수심정기의 공부는 단지 인격적인 함양이나 도덕실천 외에도 우주의 기화 작용과 만물 화생의 이치를 깨닫는 방법이라고 한다. 마음과 기운을 동시에 주체로 삼아 공부하되, 기운의 변화가 어떻게 마음의 변화로 나타나는지, 반대로 마음이 주체가 되어 이 마음씀에 따라 어떻게 기운이 작동하는지 그 마음과 기운의 메커니즘을 잘 살펴서 몸과 우주의 기화의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월은 “사람이 능히 그 마음의 근원을 맑게 하고 그 기운바다를 깨끗이 하면 만진이 더럽히지 않고, 욕념이 생기지 아니하면 천지의 정신이 전부 한 몸 안에 돌아오는 것이니라.”고 하여 수심정기가 되면 저절로 욕념이 생기지 않아 천지의 정신과 하나가 된다고 하였다. 또 수심정기의 상태와 효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거울이 티끌에 가리우지 않으면 밝고, 저울에 물건을 더하지 않으면 평하고, 구슬이 진흙에 섞이지 않으면 빛나듯이, 사람의 성령은 한울의 일월과 같아서 성품이 중심에 이르면 백체가 자연히 편안하고, 영기가 중심에 이르면 만사가 자연히 신통해진다”
그래서 해월은 도를 이루고 못 이루는 것이 모두 수심정기에 달렸다고 하였다. 나아가 수심정기가 되면 천지의 운절된 기운도 보충할 수 있다고까지 말하였다.

   이로써 보면 수심정기가 의미하는 것은 지극한 수련를 통해서 마음과 기운이 하늘의 기운과 화해진 상태, 즉 심화기화(心和氣和)가 되어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도덕적 의지가 충만하며, 밝은 지혜가 생긴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수운은 모든 공부에서 마음뿐만 아니라 기운이 다스려져서 화평한 상태(심화기화)가 되는 것을 중시하였다. 지기의 기운이 온 몸에 가득 찰 때 자기 몸의 부조화된 기운들이 저절로 조화롭게 될 뿐 아니라, 참으로 신령하고 거룩한 마음이 되어 자발적인 실천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둘째로 마음이 주체가 되어 이 마음씀에 따라 어떻게 기운이 작동하는지 그 마음과 기운의 메커니즘을 잘 살펴서 몸과 우주의 조화를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는 창조적 주체로의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마음이 하늘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 마음을 잘 지켜서 잃지 않고, 또 마음씀에 따라 기운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깨달아, 나의 본래를 자각할 뿐만 아니라 하늘과 그 덕을 합하고 우주의 기화작용을 온전히 깨달아 그 조화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성리학적 공부론의 문제제기에서 비롯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선도적인 기운공부의 보완을 통해 보다 조화로운 공부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좌방수련을 중심으로 우방수련을 보완
   수심정기가 동학 수도의 원리라면, 주문 공부는 동학 수도의 구체적인 방법이자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선가에서는 주문법은 좌방(左方) 또는 좌도방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좌방은 흔히 주문이나 부적 등의 타력, 귀신이나 영적존재들의 힘을 빌려 어떤 특정 분야의 능력을 획득하는 수련법을 말한다. 박현은 한국 선가의 흐름을 우방과 좌방으로 나누고 우방은 마음을 우선적으로 닦는 쪽이며, 좌방은 몸부터 다스리자는 쪽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방은 주로 지배층 인사들이 위주가 된 닦음이었으며 이것이 한국 선가의 주류로서 역사를 이끌어 온 반면, 좌방은 산간에 묻혀 사는 처사와 逸士, 평민과 천민들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다고 한다. 그런데 임난 이후 이런 분리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면서 통합 움직임이 있었고 이것이 통합되면서 나온 것이 동학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아직은 그것의 확실한 역사적 근거가 제시되지 못하고 있어서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일이다.

   다만 본논문은 그런 역사적인 근거제시와는 별도로 동학의 수련법 자체에서 좌방적인 요소와 우방적인 요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단 주문을 위주로 수련을 한다는 점에서 동학은 좌방을 위주로, 또는 출발을 좌방으로부터 하는 공부법임에는 틀림없다. 주문은 일차적으로 “하늘님을 위하는 글”이라고 하였고, “강령지법”이라고도 하였으니, 한마디로 하늘님을 지극히 위함으로써 하늘의 기운과 통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돈화는 주문을 “내유신령의 도리를 찾아 몸에 기화의 력(力)을 얻음으로써 천주(天主)를 섬기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주문은 한울님을 념념불망(念念不忘) 잊지 않는 방법이며,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고 섬기는 글이며, 천심을 회복하게끔 하는 공부법이다. 그래서 수운은 주문 21자를 풀이한 후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에 이르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문은 일차적으로 하늘의 기운과 상통하고자 하는 공부법이긴 하지만 단순히 타력적인 힘에 의지해 조화를 부리려는 수단은 아니다. 차라리 앞 절에서 서술한 수심정기를 하기 위한 구체적인 공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수운은 경신년 신비체험을 통해 하늘로부터 주문과 영부를 받았으며, “열세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 심학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 하였어라 현인군자 될 것이니 도성입덕 못 미칠까” 라고 하여 주문만 열심히 외어도 누구나 하늘의 지기(至氣)와 지극히 화해져서 현인군자가 되고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동학의 주문 수련은 형식적으로는 좌방적 공부법에 속하지만 그 내용에서는 우방적인 것을 아우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동학의 주문수련은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된다. 하나는 현송법이라고 해서 큰 소리로 21자(강령주문8자와 본주문 13자)를 일정하게 반복해서 외운다. 이는 강령을 받기 위한 것이며 기운을 위주로 하는 수련법이다. 이를 반복하게 되면 기운을 느끼게 되는데 그러면 마음이 밝아질 뿐만 아니라, 마음에 힘이 생긴다. 이 힘은 몸의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고, 몸의 조화롭지 못한 기운을 평정함으로써 약을 쓰지 않고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고, 세상을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기도 하고, 불의에 맞서는 힘이기도 하다.

   다음으로는 묵송법이라고 해서 강령주문을 뺀 본주문 13자만 가지고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마음의 본체와 우주의 근본을 관하는 공부를 한다. 이를 통해 마음이 하늘이라는 것을 온전히 깨닫고 나면 모든 물든 마음에서 벗어나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고, 구름걷힌 뒤 태양이 비치듯 밝은 지혜가 나온다고 한다.
이를 굳이 수심정기와 연결시키면 현송법은 정기공부이고, 묵송법은 수심공부라고 할 수 있다. 수운은 이 주문을 통해서 글을 배우지 않은 서민들도 마음의 근본을 깨칠 수 있게 하였고, 수심정기가 되게 함으로써 모두가 현인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수운이 꿈꾼 개벽의 세상은 바로 이 주문을 통해 모두가 수심정기가 되고 현인군자가 되는 ‘군자공동체’의 세상을 의미한다.

   이처럼 주문이 기본적으로 좌방적 수련이긴 하지만, 묵송수련은 마음의 본체와 우주의 근본을 관하고 깨치는 공부이므로 사실 우방적인 수련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학은 주문 수련을 중심으로 하지만, 좌방으로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좌방과 우방을 아우르고 兼修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4) 타력적 신앙과 자력적 수행의 조화
   수운의 초월적 신비체험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侍天主吾心卽汝心의 자각을 통해 내재적 신비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한울님과 하나되는 체험, 즉 한울님과의 啓示體驗이 신비적․내재적인 결합체험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수운의 시천주의 시(侍)자 해석에서 “모신다는 것은 안으로 신비로운 靈이 임재해 있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전체생명과의 氣化作用이 있다”고 한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는 유신론적 종교에서 흔히 나타나는 신의 계시체험과 무신론적 신비주의 전통 또는 동양종교에서 흔히 발견되는 神秘主義的 一體性體驗, 合一體驗이라는 다른 두 전통의 양극단이 잘 조화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초월성과 내재성의 조화이며, 실천 수행의 차원에서는 타력적 신앙과 자력적 수련의 조화이기도 하다. 이는 초월적(超越的) 영성(靈性)과 합리적(合理的) 철학(哲學)의 묘합(妙合)이라 하겠다.
동학의 수련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의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대중적인 간이한 수련법이라는 것이다. 해월은 “부귀한 자만 도를 닦겠는가, 권력 있는 자만 도를 닦겠는가, 유식한 자만 도를 닦겠는가, 비록 아무리 빈천한 사람이라도 정성만 있으면 도를 닦을 수 있느니라.”라고 하여 수도(修道)를 통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여 깨달음을 몇몇 특별한 존재들의 전유물로 보지 않는다.
무지랭이 백성들의 종교였던 동학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呪文을 위주로 하는 간이하고 대중적인 수련 방식으로 한울님과의 신비체험은 물론 내재적인 합일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주문과 영부의 의미는 앞에서도 논했듯이 특별한 사람만이 세속을 떠나서 특별한 수행과 고행을 통해서 도를 통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이라는 도구로써 누구나 쉽고 간단하게 자기의 各自爲心을 버리고 敬天, 順天의 한울적 삶에 동참하게하는, 즉 내 안의 靈性을 최대한도로 발휘케하여,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삶에서 神靈한 삶으로의 차원 변화를 기하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4. 맺음말

본 연구는 중국에서 도교가 들어온 이후 한국의 독자적인 仙風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그 면모가 선도의 역사적 전개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또 그것이 왕실과 귀족, 지식인 엘리트를 중심으로만 논의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때문에 백두산, 묘향산, 태백산, 지리산 등의 산간에서 이른바 좌방적인 수련을 하는 그룹들의 존재를 너무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는 문헌자료만으로 선도역사를 봐 온 한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종교학이나 민속학, 고고학, 인류문화학은 물론 문학자료, 전설, 또는 구술자료까지 폭넓은 연구방법론의 확대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국선도를 지식인 엘리트를 중심으로 기술함으로써 스스로 왜소화시킨 한계를 노정시켜온 측면이 있고 민중적 차원에서 선도적 전통을 바라보지 못한 문제를 드러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한국에서는 삼국 이래로 민중을 기반으로 한 선도적 교단이 정식으로 수립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선의 전통이 구한말의 대내외적인 모순 상황에서 민중의 뜨거운 열망에 부응하여 다시 일어난 것이 동학을 비롯한 신종교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그 일단을 규명해 보고자 하였고, 방법론적으로 동학의 수련을 중심으로 동학이 고대의 선의 전통, 그리고 선도의 좌방과 우방의 어떤 면모를 계승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동학의 수련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한민족의 하늘님에 대한 신앙, 경천을 되살려 내고자 하는 종교운동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새롭게 내놓은 守心正氣의 수련법은 유교적 마음공부와 도교적 기운 공부의 병행함으로써 보다 실천적이고 원만한 수련법을 제시하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초월적 하늘님에 대한 타력적 신앙을 중시하면서도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결국 心卽天을 깨닫는 자각적․자력적 수련으로 나갈 것을 강조함으로써 초월성과 내재성, 타력적 신앙과 자력적 수련을 조화시키고 있다.

   또한 장기간의 고도의 수행인이 아닌 무지랭이 백성들도 참여할 수 있는 간이한 주문 수련법을 통해 결과적으로, 의도했든 안했든 간에 좌방수련을 중심으로 우방수련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결국 동학의 수련은 한국 선도의 전통이 지식인 엘리트에게만 전유되어 온 것이 아니라 산간에서, 또 민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내려오던 것을 민중을 중심으로 다시 살려내고 아우러낸 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출처] 한국선도의 내단수련과 신종교 수련 - 김용휘|작성자 예비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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