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1/2 - 김안로(金安老)

2018. 3. 5. 14:11잡주머니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이였던 김안로(金安老)가 경기도 용천(龍泉)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쓴 야담설화집.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1/2 - 김안로(金安老)| 고문고사(古文故事)



허현 | 조회 158 |추천 0 | 2017.12.14. 06:42 http://cafe.daum.net/heocheonik/N1Hi/1421 


   포은(圃隱) 정문충(鄭文忠)사당이 옛부터 영천(永川)에 있었다. 손문정(孫文貞) 순효(舜孝) 칠휴공(七休公)이 일찍이 이 도의 관찰사로 있을 때 영천군 경계를 지나다가 말 위에서 술에 취하여 졸면서 몽롱한 가운데 포은 사당이 있는 마을을 지났다. 꿈결에 희미하게 한 늙은 노인을 보았는데 수염과 머리가 희고 의관이 아주 점잖았다. 노인이 말의 머리를 막아 서면서, “내가 포은이라.” 하고, 또 말을 계속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너무 퇴락하여 바람과 비를 막을 수가 없다.” 하는데, 마치 그에게 부탁하는 빛이 있어 보였다. 칠휴공이 놀라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고로(故老)에게 물어서 그 옛터를 찾았다. 그리고는 그 고을 사람들에게 권하여 사당을 다시 지었다. 집이 이루어지고 물품들이 모두 비치된 뒤 칠휴공은 몸소 잔을 드리고 사당의 낙성식을 올렸다. 그리고는 스스로 큰 잔에 술을 가득히 마시고 취하여 마루의 벽에 글을 쓰기를, “문 승상(文丞相.송 나라 문청상)과 충의백(忠義伯) 두 선생의 간담이 서로 비추어 일신을 잊고 사람을 기강을 세우시니 천만 세에 우러러 마지 않는다. 이권(利權)이 있는 곳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분주히 모여드는데, 맑은 서리 흰 눈에 송백만이 창창한데 집 한 간을 지어서 비바람을 막게 하니 공의 신령(神靈)도 편안하고 내 마음도 편하리다.”라 하였다. 나는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충성스러운 혼과 굳센 넋은 천지 사이에 있어서 넓게 조화(造化)의 원기와 함께 흘러가는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사당의 성패로써 남에게 힘을 빌리는가. 아마도 이 노인[七休公]의 마음이 넉넉하고 아름다워 평생을 두고 충성과 관용으로써 마음을 삼았으므로 그 정신과 기맥(氣脈)이 혹 황홀한 사이에 감동된 것인가 보다. 내가 동도(東都.경주)의 부윤이 되니 이웃 고을이 곧 영천(永川)이라, 옛일들을 물어서 포은의 사당은 아직 있는 것을 알았으나 칠휴공의 글씨는 이미 다 떨어져 나가 흔적이 없어지고 돌 같은 데 글을 새긴 일은 본래 없었다. 아, 유유한 백 수십 년 동안에 칠휴공 한 사람을 기다려서 사당을 수리하였는데, 기록을 새긴 이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던가. 개연(慨然)히 그 고을의 군수 장군(張君)과 모의하여 돌을 장만하는 역할은 그 고을에서 부담하고, 거기에 새길 글은 나에게 청하였는데, 내가 상주가 되어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일이 다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한탄스러워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뒤에 오는 군자에게 바랄 뿐이다.


   ● 칠휴공(七休公)이 여러 군을 순행할 때, 길을 가다 효자나 열녀의 정문(旌門)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참배를 하고 지나갔다. 금오산(金烏山) 아래 길재(吉再) 선생이 살던 곳에 가서 제문을 지어 잔을 드리고 말하기를, “사당 아래서 절하며 뵈오니 당신 모습을 뵙는 것 같습니다. 금오산과 낙동강 물은 옛날과 같은데 선생은 어디에 계십니까. 초황(蕉黃)과 여단(荔丹)을 드리오니 영령(英靈)께서는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 늙은 내가 문자를 다듬는 데에는 뜻이 없으나 가슴에서 나오는 말이 절로 이러한 정도였으니 가히 그 풍채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소릉(昭陵.단종의 생모)이 폐해진 지가 계유년(1513년)까지 58년 동안이었는데, 인심이 원통하게 생각하여 복구되기를 바란 지가 오래되었다. 어느 날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소세양(蘇世讓) 군(君)이 처음으로 그 주장을 하였다. 그러자 임금께서 슬피 여겨 대신에게 명하여 《춘추비기(春秋秘記)》에서 그 당시 폐한 이유를 찾아 보도록 하니, 과연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폐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공경(公卿)들을 대대적으로 모아 의논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을 받고 대궐에 들어갈 때에 판상(判相) 장순손(張順孫)유영상(柳領相) 집에 들러, “오늘 의논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유영상이 강건히 불가(不可)하다고 말하였다. 대궐 안에 들어가 의논하게 되어서 삼공(三公) 이하는 모두 어렵게 여기고, 오직 신용개(申用漑)ㆍ강혼(姜渾)ㆍ장순손(張順孫)과 나의 계부(季父) 충정공(忠貞公.김전)만이 마땅히 복구하여야 된다고 말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들이 간하고, 태학생(太學生)들도 소(疏)을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아 때가 지나도록 수합(守閤)을 하였으나 형세가 잠잠해지고야 말 것 같기에 그때 내가 김국경(金國卿) 등과 속삼강행실청(續三綱行實廳)에 있었으므로 동료들과 상의하여 말하기를, “대간들이 중도에 중지하면 뒤에 가서는 복구될 기회가 없게 될 것이요. 우리들이 출위(出位)하는 것으로 혐의를 삼을 수 없으니 소장(疏章)을 올려 대간의 형세가 누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때 마침 태묘(太廟)의 나무에 벼락이 떨어지니, 임금께서 놀라고 두려워하여 그날로 태묘에 참배하고 공경과 대간과 시종을 급히 불러, “들어와서 나의 잘못된 것을 말하라.” 하였다. 그때 소릉의 복구 문제를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의론들이 모두 이에 동의하자 드디어 임금이 허락하는 명을 내려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그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처음 소릉이 폐해진 뒤에 바닷가로 옮겨서 장사지내고는 제사지내고 수호(守護)하는 일을 폐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단지 무덤의 봉분만 있었으므로 여전히 사람들이 의심하였던 것이다. 악전(幄殿)을 설치하고서 묘를 이장하려고 깊이 파들어 갔으나 옥갑(玉匣.관)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다. 이날 밤 감독관이 선잠을 자는데, 꿈에 휘장을 치고 안석에 기대어 왕후의 모습을 갖추고 그 옆에 두 명의 시비[丫鬟]가 모시고 있는데 감독관을 불러 위로하기를, “너희들이 수고한다.” 하므로, 감독관이 엎드려 놀라 땀이 흘렀다. 꿈이 깬 뒤에 이상히 생각하고, 다음날 아침에 두어 자 남짓 더 깊이 파니 홀연 손바닥 만한 칠조각이 삽날에 붙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 관의 두꺼운 칠이 떨어져서 올라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장하는 일을 잘 마치게 되었다. 안산(安山) 사람이 말하기를, “소릉이 폐위되기 전날 밤에 울음소리가 마치 능 안에서 나오는 것 같이 들리는 것을 인근의 백성들이 이상하게 여겼는데, 다음날 역마가 갑자기 들이닥쳐 능이 드디어 옮겨졌다는 것이다. 또 민가에서 집을 지을 적에 폐해진 능에서 나온 석물(石物)을 가져다 쓴 사람은 반드시 병을 앓았으며, 양(羊)을 먹이거나 말을 놓아서 묘를 밟게 하면 맑았던 날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폭풍이 불게 되므로 사람마다 조심하고 신처럼 여겼다.” 하였다. 새로 이장할 능터를 현릉(顯陵.문종의 능) 왼쪽에 정하였는데, 두 능 사이에 잣나무가 빽빽이 하늘을 가리고 있던 것이 능의 역사(役事)를 시작하던 날에 갑자기 두서너 그루가 이유없이 말라버려 그것을 베어버리니, 두 능이 서로 마주보는데 가리워지는 것이 없었다. 이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예전에 기정(岐亭) 권숙달(權叔達)승정원(承政院)에 숙직하던 날 밤 꿈에, 해평(海平) 정미수(鄭眉壽)유영상(柳領相)과 서로 치며 싸우는 모습이 마치 큰 원한이 있는 것 같았으며, 영상이 대단히 곤욕을 당하는 것 같았다. 권기정이 놀라 남에게 이야기를 하였는데, 수일 만에 능을 복위하자는 의론이 나왔다. 그러자 유영상이 제일 먼저 난색을 표하였는데, 그 의론이 끝날 무렵 갑자기 병이 들어 조정에서 수레에 실려 나와 오래도록 앓다가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병들었을 때 자제에게 근일 조정에서의 정사를 묻기에, 소릉 일로 힘써 다툰다고 대답하니, 유공이 머리를 흔들면서 말하기를, “이 일은 끝내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고집이 이처럼 대단하였다. 불러 모아 대답하게 할 때 만일 유공이 있었더라면 임금의 뜻을 끝내 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해평(海平)은 곧 소릉의 외손이므로 사람들이, “신령이 있다면 어찌 이 일에 원한과 통분이 없겠는가.” 하였다. 귀신이 갚는 것이나 남몰래 보답하는 것이 무리가 아님을 기정의 꿈에서 증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진실로 황당한 것이므로 꼭 그러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우연히 일의 기회가 서로 감응된 바가 있는 것 같으니 이 역시 이상한 일이다.


   영묘(英廟.세종)께서 문화 정치에 뜻을 독실히 가져 인재를 육성한 미덕이 전대(前代)보다 훨씬 뛰어났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선비들을 모아 날로 번갈아가며 숙직하도록 하여 토론(討論)하는데 대비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대접하기를 융성하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주(瀛洲.신선이 있는 곳)에 오른 것에 비유하였다. 문충(文忠) 신숙주(申叔舟)가 하루는 숙직 당번이었다. 밤 2경쯤 되어서 임금께서 환관에게 명령하기를, “가서 숙직하는 선비가 무엇을 하는가 엿보고 오라.” 하니, 환관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지금 촛불을 켜고 글을 읽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처럼 연달아 두서너 번을 엿보도록 하였는데, 글읽기를 여전히 중지하지 않더니 닭이 울어서야 비로소 잠들더라고 보고하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잘 갖옷[貂裘]을 벗어 잠이 깊이 든 틈을 타서 덮어 주었다. 문충(文忠)이 아침에 일어나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았다. 선비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 현묘(顯廟.문종) 오래도록 세자[承萃]로 있을 때, 춘추가 점점 높아가면서 학문에 빠져 낮과 밤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달이 밝고 인적이 고요할 때 혹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집현전 숙직실에 가서 그들과 어려운 것을 물었다. 그때 성삼문(成三門) 등이 숙직을 하면서 갓과 띠를 밤에도 감히 풀어놓지 못하였다. 하루는 야반이 될 무렵에 세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옷을 벗고 누우려 하는데, 홀연히 문밖에 신발소리가 들리더니 근보(謹甫.성삼문)를 부르며 들어오므로 성삼문이 놀라 일어나 얼떨결에 맞아 절을 하였다. 이때 임금의 부자(夫子.공자) 학문에 부지런함과 선비를 독실히 좋아함이 진실로 천고에 듣기 드문 일이었다.


   ● 선묘(宣廟.성종)가 글을 좋아하여 윗 대 두 임금 세종과 문종을 이어 유림(儒林)을 사랑하고 장려하는 것이 보통 규모에서 우뚝 솟아나서 당시에 문장에 뛰어난 선비들이 옥서(玉署.홍문관)에 가득 찼다. 매계(梅溪.조위)ㆍ삼괴(三魁.신종호)ㆍ뇌계(礌溪.유호인) 및 우리 선대부(先大夫.김흔) 등이 더욱 융성한 사랑을 받아서 항상 지은 글을 달마다 적어서 올렸다. 매계와 뇌계는 모두 부모가 늙었으므로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원하니, 특별히 쌀을 내려주어 그 부모를 넉넉하게 해 주었다. 뇌계가 올린 글 가운데,


북쪽을 바라보니 임금과 신하는 막혀 있고 / 北望君臣隔

남쪽으로 오매 어미와 자식이 한데 모였도다 / 南來母子同


라는 시구가 있었는데, 임금께서 조용히 읊으며 이르기를, “호인(好仁.뇌계)의 몸은 비록 외지에 있지만 마음은 임금을 잊지 않고 있다.” 하였다. 매계(梅溪)가 상주가 되었을 때 제물(祭物)을 내려 영광스럽게 하여 은총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까지 미치게 하니, 사람마다 감격하여 흥기하였다. 인재를 고무시키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진실로 천고(千古)에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 영상(領相)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서 상주가 되어 관직을 그만두었다가 상을 마치고 다시 그 자리에 복직되어 규례대로 은명(恩命)에 사례드리니, 임금이 불러 합문 밖에 오게 하여 위로하고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매 한 마리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노모가 있으니 공사를 마치고 여가가 있거든 교외에 나가 사냥을 하여 반찬을 장만하라.” 하였다. 또 밤에 불러들여 술과 과일을 내려 주시니, 성희안이 소매 속에다 감귤(柑橘) 십여 개를 넣어두었다가 술이 취하여 엎어져서 인사불성이었다. 중관(中官)이 업고 나갈 때 소매 속의 감귤이 떨어져서 땅에 흩어지는 것도 몰랐다. 그 다음날 감귤 한 광주리를 옥당(玉堂)에 내려 주시고 전교하기를, “어제 희안이 감귤을 소매에 넣은 것은 어버이에게 드리려고 하였던 것이므로 다시 주는 것이다.”라고 하니, 성희안이 뼈에 사무치게 임금을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국난을 안정시키는 일에 앞장서서 은혜를 갚고 충성을 다하였다. 선묘(宣廟)가 선비를 대접한 성의와 인재를 알아보는 총명이 진실로 신하로 하여금 충성을 다하도록 한 것이고, 성희안이 위태로움을 제거하고 안정을 이루어 공훈이 사직(社稷)에 있었으니, 또한 임금이 알아주어 대우한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 할 수 있다.


   ● 문종(文宗)ㆍ성종(成宗) 두 임금은 해서(楷書)로 쓰는 법에 정통하였다. 문종의 글씨는 힘차고 살아 움직이는 진기(眞氣)가 있어 진(晉) 나라 사람의 오묘한 경지를 능가하였다. 그러나 돌에 새긴 두서너 가지만이 세상에 전할 뿐 지극히 보배롭고 신비한 글씨는 참으로 필적을 보기 드무니 애석하다. 성종의 글씨는 아리땁고 단정하여 조용히 조송설(趙松雪)의 법도에 맞았다. 임금께서는 또 묵화(墨畵)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모두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능이어서, 모방하고 연습하지 않아도 신묘하게 옛법에까지 나아갔다. 정사하시는 여가에 고요하게 혼자 계실 때가 있으면 때때로 붓과 먹을 잡고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는데, 한 치만한 종이나 한 자 너비의 베 조각이라도 세상에 흩어져 있으면 그것을 얻은 사람들이 완상하고 첩첩이 싸서 두기를 큰 구슬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상사생(上舍生) 박원령(朴元秢)이 글씨를 조금 잘 썼는데, 성종께서 보고 칭찬하여 그의 고향에 글을 내려 종이와 붓을 주도록 하여 장려하니, 그 고을에서 빛나게 되어 놀라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러한 조그마한 기예(技藝)가 어찌 임금의 감상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마는, 임금 자신이 능하다 하여 신하의 조그마한 기예도 버리지 않고 융성하게 권장하는 것이 반드시 이처럼 성심에서 나왔다. 이로 말미암아 문장과 서화와 백공의 기술을 게을리하지 않고 정밀하게 하였으니, 임금이 고무시키고 변화시키는 기틀이 단지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사이에도 있다는 것을 알겠다. 만일 성의로써 좋아함이 보통 인정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비록 백방으로 권하고 엄하게 과정을 세워도 다만 시끄럽고 게을러지기만 할 것이다. 이러한 성의가 아니었다면 어찌 사람을 감동시키기를 이렇게 깊이 할 수 있었겠는가.


   ●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이 어릴 때부터 이미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런데 번잡한 것을 벗어버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서 이름을 설잠(雪岑)이라고 고쳤다. 남추강(南秋江.남효온)과 법도 밖의 교우가 되어서 미친 듯이 시를 읊고 방랑하며 한 세상을 희롱하였다. 중이 되었으나 불법(佛法)은 받들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미친 중이라고 지목하였다. 저자 거리를 지나다가 혹은 응시(凝視)하느라 돌아갈 것도 잊어버리고, 한 곳에 잠자코 서서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혹은 길거리에서 대소변을 보며 여러 사람들이 보는 것도 꺼리지 않으니, 아이들이 욕하고 비웃으면서 기와나 자갈을 던져 쫓아버리기도 하였다. 자기의 종과 전택(田宅)을 남이 빼앗아 가는데도 내버려두고 조금도 개의하지 않다가 갑자기 그 사람에게 돌려주기를 청하니 그 사람이 불응하자 설잠(雪岑) 자신이 곧 송사(訟事)를 하여 대면하여 싸우며 심문에 대답하는데 시끄럽기가 흡사 시정(市井)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처럼 끝내 변론해서, 승소하여 관가(官家) 문서가 다 이루어지자 품안에 품고 문을 나와 하늘을 보며 크게 웃고는 갑자기 문서를 끄집어내어 찢어 개천 속에 던져버렸다. 그가 남을 희롱하고 세속을 업수이 여김이 이와 같았다. 광묘(光廟.세조)가 내전(內殿)에서 법회(法會)를 열 때, 설잠(雪岑) 또한 뽑혀 들어갔다가 갑자기 새벽에 도망쳐 간 곳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을 보내 찾아보니 일부러 길가 변소에 빠져 얼굴만 내놓고 있었다. 사미(沙彌.나이 어린 중) 한 사람이 목청이 청초하여 능히 상성(商聲)을 내에 길게 읊으면 여운이 공중에 돌아서 슬프게 느껴졌다. 매번 달 밝은 밤에 홀로 앉아 그 사미로 하여금 〈이소경(離騷經)〉을 한 번 읊게 하고 번번이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마시고 취하면 말하기를, “우리 영묘(英廟)를 뵐 수 없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매우 슬퍼하였다. 모든 중들이 추대하여 신사(神師)라 하고 복종해 섬기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였는데, 하루는 일제히 청하여 말하기를, “제자들이 대사(大師)님을 오랫동안 모셨는데 아직도 한 번 가르치시는 것도 아끼시니 대사님의 청정법안(淸淨法眼.고상한 사상)을 끝내 누구에게 전하려 하십니까. 이 중생들이 방향을 모르니 금비(金篦.금으로 칼)로 긁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더욱 간곡히 청하니, 설잠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마.” 했다. 그래서 크게 법연(法筵)을 열고 설잠이 가사(袈裟)를 입고 가부좌(跏趺坐)를 하자 중들이 에워싸고서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경청하였다. 설잠이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끌고 와야 한다.” 하니, 중들이 무엇에 쓸지 몰라서 소를 끌어다 뜰 밑에 매어두었다. 설잠이 또 말하기를, “꼴을 가져와서 소 뒤에 두라.” 하고는 크게 웃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 이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니, 소는 짐승 가운데 가장 미련한 것이다. 무식한 사람을 속담에, ‘소 뒤에 꼴 둔 것이다.’라고 한다. 중들이 부끄러워서 모두 물러가고 말았다. 근대에 시 짓는 중들 중에서는 설잠이 으뜸이 되었다. 시가 정중하여 소순기(蔬荀氣)가 적었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 글을 지어(금오신화를 일컫음) 석실(石室)에 감추어 두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글은 대개 기이한 것을 우의법(寓意法)을 써서 기록하였는데, 《전등신화(剪燈新話.명 나라 초년에 지어진 단편소설)》 등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다.


   ● 채빙군(蔡聘君) 양정공(襄靖公)이 어릴 적에 아버지 임소를 따라서 경산(慶山)에 살 때, 두 아우와 관사[衙閤]에서 함께 자다가 밤중에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옷을 입고 혼자 방 밖으로 나가보니 화원경(火圓鏡.확대경)과 같은 흰 기운이 오색(五色)처럼 현란하게 공중에서 차바퀴처럼 돌아 먼 곳에서 차차 가까이 오는 것이 바람과 번개처럼 빠르므로 양정공이 놀라 창황히 방으로 들어왔다. 겨우 문턱을 넘어섰는데, 그것이 방안으로 따라 오는가 싶더니, 조금 있다 막내동생이 가장 방구석에서 자다가 놀라 일어나 뛰며 아프다고 계속해서 부르짖으며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 양정공은 조금도 상한 데가 없었다. 대저 사기(邪氣)가 사람을 상하게 할 때는 반드시 허(虛)할 때를 타니 사람의 기운이 온전하면 해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친우 성번중(成蕃仲)의 집에 일찍이 귀신의 장난이 있었는데, 초저녁 종이 울릴 무렵에 은은히 서산(西山)의 수풀 속에서 나와 돌을 던지기도 하고 불을 붙여 와서 한 여종을 능욕(凌辱)하여 임신이 되었는데 마치 사람과 접촉하는 것 같았다. 민가에 이따금 이러한 환난을 만나는 수가 있으니, 의원들이 말하는 바 귀태(鬼胎)라는 것이 이것으로, 백방으로 막으려고 애써도 되지 않는다. 번중은 강건하고 바른 기운이라야 그것을 누를 수 있다고 여겨 술을 흠뻑 마시고 기운을 내어 수레 밖에 혼자 앉아서 얼굴빛을 엄하게 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하고서 귀신이 오는 방향으로만 바라보며 잠시도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두서너 시간을 지나도 아무 소리와 자취도 없기에 마음으로 귀신이 겁이 나 도망간 줄 알고 곧 몸을 돌려서 문턱을 넘으려 하는데, 갑자기 마음이 떨리더니 귀신이 던진 돌이 벌써 발뒤꿈치에 떨어졌다. 정기(正氣)가 진실로 사기(邪氣)를 누를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정기가 부족함이 있으면 사기가 도리어 그 틈을 타고 들어오게 되니, 그 기미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이러한 점이 있다.


   ●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은 젊을 때부터 기개(氣槪)가 침착하고 굳세어 길을 가면서도 한 번도 좌우를 보지 않고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아서 간혹 길을 잃어버릴 때도 있었다. 일찍이 친구들과 글을 읽을 때 도둑놈이 밤에 그 방에 침입하여 옷과 신을 모두 가져 가버리니, 다른 친구들은 모두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충정공은 홀로 태연한 마음으로 마음에 두지 않고 붓을 뽑아 벽에다 쓰기를, “이미 나의 옷을 빼앗아 갔으니 내 신은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데, 이미 내 옷도 뺏고 또 내 신도 도둑질하니 내가 도선생(盜先生)을 위하여 찬성할 수 없구나.” 하니, 식자들이 비로소 그 도량에 항복하였다. 과거에 합격[釋褐]하여 군기 직장(軍器直長)이 될 때 광묘(光廟.세조)가 문관(文官)을 뽑아 천문학을 연구하도록 하니, 공(公)이 추보법(推步法.천체 운행하는 법칙)을 연구하였다. 때마침 일식(日食)을 보고, 양정공이 일식법(日食法)을 추산하여 적어서 올리면서 끝에 소장(疏章)을 달아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사냥놀이를 그만두고 언론의 길을 열라는 등의 일을 말하니, 임금이 급히 내각(內閣)으로 불러들여 소장 중에 있는 말을 지적하며, 거짓으로 위엄과 노기를 띠면서 시험삼아 이르시기를, “내가 백 일을 돌아오지 않았다든지, 밀가루로 희생을 대신한 실수가 없는데, 네가 어찌 나를 하강(夏康)과 양무(梁武)에 비유하느냐.” 하고, 역사(力士)에게 명하여 그를 끄집어 내려서 원장(圓杖)으로 치게 하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리를 떨었다. 임금이 또 칼집에 든 칼을 무릎에 올려 놓고 명하기를, “내 칼이 칼집에서 다 빠지는 것을 보거든 곧장 목을 베라.” 하고, 서서히 칼을 빼니 서릿빛 같은 칼날이 사람에게 번쩍번쩍 비쳤다. 칼이 다 뽑혀 갈 때 역사(力士)가 도끼를 잡고 칼만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공은 여전히 변치 않고 질문에 따라서 틀림없이 대답하니, 임금이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면서 이르기를, “참 장사로다. 늦게 만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잔을 드리라고 명하니, 공이 조용히 일어나 피를 씻어내고 옷을 찢어서 상처를 동여매고 술단지 있는 곳으로 가서 잔에 가득 부어서 올리는데 진퇴하는 품이 매우 찬찬하였다. 임금이 대단히 기이하게 여기더니, 마침내 정승에까지 이르렀다.


   ● 을해년에 내가 직제학(直提學)으로서 일본 사신 남호(南湖)ㆍ서당(西堂) 등을 위로하는 길에 응천(凝川)에 이르렀다. 그때 국상을 당하여 화려한 일을 일체 버리고 망호당(望湖堂)에 혼자 있는데, 흰 달빛이 주렴으로 비쳐 들어오고 물과 산이 아득하였다. 하늘은 적적하고 인적은 고요한데 맑은 기운이 뼈에 사무친다. 기이한 흥이 가득 차 올라 마음에 울렁거려 감당할 수 없기에 입속으로 읊조려 한 글귀를 얻어 새벽에 일어나 붓을 찾으니, 필갑(筆匣) 안에 빈 붓대만 있고 붓촉은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이불을 헤치고 옷을 털어 보아도 끝내 찾지 못하여 마음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말을 세우고 떠날 무렵에 다시 필갑을 열어보니 붓촉이 이전과 같이 붓대에 꽂혀 있었다. 그날 밤 누워 잘 때 그것으로 편지를 다 쓰고 내 손으로 필갑에 넣고 뚜껑을 덮었으니, 빠져 나갈 틈도 없었고 또 좁은 방에 장판이 유리쪽 같았고 깨끗한 벽에 아무런 다른 물건도 없었으니, 머리카락이나 부러진 바늘이라도 모두 더듬어 찾을 수 있었다. 삼면이 다 막혔고 남쪽만 비어 있었는데 내가 그 밑에 누워 있었다. 숙직하고 있는 하인들이 내왕도 하지 않았고, 필갑이 머리맡에 있어서 손으로 시종 만지고 있었으니 열고 닫을 사람도 없었다. 모르겠지만, 붓촉이 처음에는 어떻게 필갑에서 빠져나갔으며, 빠져나갔으면 어디에 숨어 있었으며, 또 어떻게 다시 필갑에 들어왔었는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 귀신이 한 일이지 사람이 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을 주사(主使)에게 하니, 주사가 말하기를, “옛말에, ‘시가 이루어지매 귀신을 울린다.’ 하고, 혹은, ‘신령이 운다.’ 하고, 혹은, ‘귀신이 근심한다.’ 하니,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는가 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곳을 지나간 시인이나 문장가들이 읊조려서 벽 사이에 새겨둔 현판(懸板)이 비늘 같이 달리고 굴껍질같이 붙었으니, 그 희롱과 모욕을 받은 것이 귀신도 익숙해졌을 것인데, 나의 이 보잘것없는 한 시구(詩句)에야 무엇 때문에 그러했겠는가. 반드시 시도(詩道)에 빈약하기 때문에 손벽치며 놀리는 조롱을 면하지 못한 것이라.” 하고, 서로 한바탕 웃고 떠났다. 그때 이비중(李棐仲)이 주사(主使)로 있었다.


   ● 성종 때에 흉년으로 인하여 모여서 술마시는 것을 금하였다. 때마침 늦은 봄이라 백화(百花)는 난만하고 달은 낮같이 밝았다. 임금이 후원(後苑)을 산보하다가 문득 생각하기를, “이러한 좋은 밤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반드시 모여서 술먹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자건(紫巾.궁중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은 자색 두건을 쓰고 있었다) 두서너 사람을 시켜 장안의 다섯 거리를 수색하여 아뢰라.” 하였다. 마침 참판 송영(宋瑛)의 집에서 큰 모임을 베풀었는데, 당시에 이름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여러 악기소리에 취하여 농담이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심부름꾼 한 사람이 그 음악소리를 따라 갔으나 모두들 자건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심부름꾼이 문 밖에 서서 귀를 기울여 웃음소리를 듣고는 채빙군(蔡聘君)의 웃음소리인 줄 알고 뒷걸음질쳐 도망하였다. 이 심부름꾼은 본래 이조(吏曹)의 종으로, 채빙군이 이조 낭관으로 있을 때 말을 몰던 사람이었다. 다음날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비로소 그 사실을 들었다. 권충민공(權忠愍公)이 채빙군에게 편지로 하례(賀禮)하기를, “덕성스럽다, 그대의 웃음이여. 복스럽다, 그대의 웃음이여. 그대의 웃음이 아니었더라면 일이 위태할 뻔하였네.” 하였다. 이것은 선비들 사이에 전해가며 웃음꺼리가 되었다. 당시에 조정이 아주 청명하여 사방에 아무런 걱정이 없었으며, 풍년이 들고 재물이 풍부하여 화한 기운이 가득하여 조정에는 충후(忠厚)한 기풍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서로 꼬집고 고소하는 풍속이 없었다. 사대부들이 신의로써 서로 대하고 시기하고 알력하는 일이 없어지니, 관청이 맑고 한가로워 아침이나 저녁이나 여가가 많아서 날로 글짓고 술마심으로써 서로 즐기게 되어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기풍을 양성하기를 좋아하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 풍류를 흠모하였다. 그때의 기상을 지금은 다시 볼 수 없으니, 미루어 생각하여 길이 탄식함을 금치 못하겠다.


   ● 우리 집에 일찍이 화분에 안석류(安石榴) 두어 그루를 심어 두었더니, 그 한 그루가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렸는데, 마치 사자(獅子)가 웅크리고 앉아서 돌아보는 형상과 같았다. 머리와 얼굴과 꼬리와 목덜미의 갈기와 네 발톱이 하나도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어 요사이 인가의 부인들이 수에 새긴 웅크리고 앉은 사자와 같으니 살아서 움직이는 모양이 그보다 훨씬 나으니, 참 이상하다. 예전 진(晉) 나라 안제(安帝) 때에 무릉(武陵)에서 한 꼭지에 여섯 개가 달린 실과를 상서롭다 하여 올리니, 제(齊) 나라 안덕왕(安德王)은 씨가 많은 것은 자손이 많을 조짐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후일의 박식한 사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 다음 해 또 등잔불꽃 위에 두 줄기가 뻗어 올라가서 가늘기가 실끝만 하고 길이는 한 치가 넘고, 두 줄기에 꼭지가 쌍쌍이 나서 맺힌 꽃봉오리가 마치 터지려는 붉은 연꽃과 같은데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으니 정말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옛말에, “등잔불의 꽃은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하였는데, 그 후에 과연 기쁜 소식이 있었으니, 어찌 단지 두 가닥 횃불이라고만 할 수 있을 것인가.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나이 어린 사람 가운데서 학문에 가장 우수한 선비를 뽑아서 궁중에 있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궁중의 서적을 마음대로 찾아 보도록 하여 장래에 쓰려 하였다. 광록시(光祿寺)에서 술과 성대한 밥상을 공급하고, 태자와 친왕(親王)들이 번갈아가며 그들을 접대하였다. 황제가 때로 친히 와서 논란을 벌이고는 백금과 말ㆍ의복 등의 물건을 내렸으니, 이들에 대한 융성한 은총이 일찍이 옛날에는 없던 것이었다. 우리 왕조 세종이 비로소 이 제도를 모방하여 서생들에게 특별히 휴가를 주어 독서하도록 하였으나, 거기에 선발된 사람은 전후 삼사명에 불과하였다. 성종 때에 이르러 이 규정이 점점 갖추어져 처음 여섯 명을 선발하여 오랜 휴가를 주어 장어사(藏魚寺)에서 그들 마음대로 책을 보도록 하였다. 중년에는 용산(龍山)의 황폐한 절간을 중수하여 한림원 학사들을 한 달씩 번갈아 쉬게 하였다. 그 뒤에는 다시 일곱 명을 뽑아서 일 년마다 교대하도록 하고 나라에서 술ㆍ음식ㆍ종이 같은 여러 가지 비품을 나누어 주었으니, 옛날보다 더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용산당(龍山堂)을 넓게 중축하려고 내신(內臣)을 보내어 시찰하고 짓도록 하였는데 담장ㆍ마굿간ㆍ부엌ㆍ창고 등 아무 부족한 것 없이 모두 완전하게 구비되었다. 조위(曹偉)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고, 또 편액에다 독서당(讀書堂)이라는 글자를 크게 쓰도록 하고 술과 풍악을 베풀었으며, 승지(承旨)를 보내어 낙성하도록 하여 춤추며 노는 지극한 즐거움이 만연히 무르익어서야 모두들 파하였다. 다음 날 아침 사례하는 소장을 써서 대궐에 보내는데 붉은 비단으로 싼 함을 메고 앞에 나가며 여악(女樂)이 따르게 하였으니, 임금의 하사를 영화로 여긴 것이다. 거리의 남녀들이 놀라 어리둥절하였으니, 진실로 천고(千古)에 없던 유학의 일대 성대한 사건이었다. 극도로 성하게 되면 쇠망(衰亡)하는 것이 사물의 이치인 만큼 중년에 연산군 시대에 폐지되었던 것이 다시 당대에 복구되었으니, 어찌 서당이 폐지되었다가 다시 복구된 것도 세상의 융성하고 침체한 풍조에 따라간 것이 아니겠는가. 용산당(龍山堂)의 폐허에는 이제 단지 빈 터만 남아서 정업원(淨業院)을 빌려 임시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 공부하는 곳이 동리와 저자 곁에 있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다시 동호(東湖) 북쪽 기슭에 깨끗한 터를 마련하니, 크고 아름다운 품이 용산의 옛 제도 보다 훨씬 뛰어났다. 나라에서 내리는 공급품의 풍성함도 옛날 법식보다 넉넉하였으나 차차 형식으로 흘러서 서당은 비록 폐지되지 않았으나, 언제나 비어 있고 그 일은 벌써 중요시 되지 않게 되었다. 나와 같이 못난 사람도 일찍이 시종 여러 선비들의 말석(末席)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점점 옛날 같지 못함은 어찌 이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워하며 많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


   ● 내부(內府)에 수정으로 만든 잔 한 쌍이 있는데, 하나는 네모이고 또 하나는 둥근 것으로 크기는 반되 들이이고, 깨끗하기로는 티 한 점도 없다. 술을 따르면 금빛 물결이 가늘게 일어 찰랑찰랑 그 가운데 찬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맑기가 털끌 하나 섞이지 않은 듯하고 은은하기로는 물빛과 달빛이 서로 비춰 하늘에 닿은 듯하니, 정녕 세상에 보기 드문 절묘한 보배이다. 일찍이 중국 사신을 접대할 적에 이 두 잔을 붉은 비단으로 받침하여 금 그릇ㆍ옥 그릇과 나란히 하여 술상 위에 섞어 놓았더니, 중국 사신 정동(鄭同)이 보고 찬탄하여 그 중 하나라도 얻어가기를 원하였으나, 성종께서 조종조(祖宗朝)에서 보존해 온 것이라 하여 허락지 않으셨다. 어느 날 승정원에 술을 내릴 때 임금이 둥근 잔을 내어 따르게 하였는데, 그 부어지는 모습이 하늘에 노을이 일 듯하고 깨끗한 얼음이 투명한 듯하며 붉고 흰 빛이 서로 엉켜 안팎이 투명하니, 불피워 밥해 먹는 자의 입에 댈 것이 아니었다. 적영반(赤瑛盤)에 앵두를 담아 하사했다는 영화도 이에 비길 바 못 되며, 파리배(玻瓈杯)에 포도주 따르는 사치스러움도 어찌 이에 비길 수 있으랴. 모두들 경탄하여 이 진기한 잔을 받는 즉시 들이키니, 흠뻑 취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성허백당(成虛白堂)은 본시 술을 마실 줄 몰라 여러 차례 잔을 사랑스레 만지작거리면서 차마 놓지 못하고 하리(下吏)에게 차를 따르라 하기에, 하리가 끓는 물을 불쑥 부으니 잔 가운데가 갑자기 터지고 말았다. 모두들 술에서 깨어나 이를 알고는 하루 종일 애석해 마지않았다. 다른 네모난 잔을 독서당(讀書堂)에 내리면서 전교(傳敎)하기를, “그대들로 하여금 술만 먹게 하려 함이 아니라 나의 진중(珍重)한 뜻을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였다. 그때에 강혼(姜渾) 공ㆍ신용개(申用漑) 공ㆍ김감(金勘) 공ㆍ김일손(金馹孫) 군 등이 독서당에 있었는데, 엎드려 그것을 받아 갑(匣) 속에 싸 간직하면서 오랫동안 보전할 계책을 도모하되 이에 관한 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고, 금으로 잔대를 만들고 거기에 명문(銘文)을 새기기를, “청정함은 변색되지 않고, 비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으며, 내려주신 물건을 덕(德)으로 삼아 오래도록 저버리지 말기를 생각하라.” 하였다. 그 뒤로는 술이 내려오면 임금이 예(例)대로 하고 나서 술잔을 한 바퀴 돌리자마자 곧 갑속에 간직하니, 혹시 떨어트려 부수지나 않을까 해서이다. 연산조(燕山朝) 때 독서당이 폐지되자 잔을 옥당(玉堂)으로 옮기고, 옥당이 없어지자 또 시강원(侍講院)으로 옮겼다. 성조(聖朝.중종)가 중흥하자 다시 옥당에서 독서당으로 옮겨 왔는데, 그것이 옥당에 있을 때 구경하던 자가 실수하여 한 쪽이 약간 흠이 생겨 지금까지도 보는 자들이 한탄하는 바이다. 독서당의 존폐(存廢)가 무상하니 잔도 이리저리 옮겨 다녔고, 그것을 간수하는 사람이 여러 번 바뀌어서 보존에 태만하기 쉬워 위태로운 순간이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아직도 거의 온전히 보존하여 성종의 보화를 보배로 여기지 않고 어질고 착함을 보배로 여기시던 거룩한 뜻을 빛내게 되었으니, 어찌 지극한 보배를 신들이 아껴 여지껏 사문(斯文)을 위해 보존하여 성상의 은택을 영원히 불멸하도록 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국의 내시 이진(李珍)왕헌신(王獻臣) 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왔을 때 연창(延昌) 김감(金勘)이 수찬(修撰)으로서 반접(伴接)하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이진이 그의 상을 보고, “크게 벼슬하겠다.” 하더니, 다음 해에 이진이 다시 조서(詔書)를 받들고 왔을 때는 연창이 이미 금띠를 두르고 승정원의 으뜸가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진이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전번의 나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지요. 그대는 화를 면할 상이요.” 하였다. 그때 채빙군(蔡聘君) 서경(西京)의 관찰사로 있어 내가 선비로 장인을 모시고 있었는데, 조서(詔書)가 처음 서경부(西京府)에 당도할 때 처남 채생(蔡生)과 함께 몸을 주렴 뒤와 행랑에 숨기고서 구경하고 있었다. 중국의 선비 장월(張鉞)이란 자가 자못 학식이 있고, 자태 또한 단정하였는데, 우리를 보고 말을 건네고 싶어 하였으나 통하지 않으므로 눈짓으로 서로 만나보고 싶은 뜻을 전하며 부채에 몇 자 적어 서로 보였다. 이튿날 장월이 이진에게 그 일을 말하여 이진이 반접사(伴接使)에게 만나보기를 청하여 통역관으로 하여금 우리들을 들어오도록 하였다. 이진이 술과 안주를 차려 몇 순배 들고 나서 장월로 하여금 종이 쪽지에, “중국 사신이 묻는 바는 몇 가지 경전(經典)에 능통하냐.” 하고 쓰게 했다. 내가 답하기를, “오경(五經)을 대략 안다.” 하니, 《서경(書經)》《주역(周易)》의 글을 몇 줄 끄집어내거늘 그 뜻을 대충 강론하고, 내가 또 몇 가지 물음에 글로써 답하니, 이진이 “중국의 과거 시험에는 각각 경전 하나만 익히면 될 뿐, 이처럼 다 능통할 필요는 없다.” 하고, 자리에서 바싹 다가앉아 내 손을 잡고 손금을 보며, 또 앞상과 뒷상을 보는데 혹은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서 고루 보고 혹은 손가락으로 만져도 보고 칭찬하기를, “어찌 장인을 이렇게 닮았어, 관상법에 의하면 귀한 상이다.” 하였다. 다음으로 채생(蔡生)을 보는데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듯이 말하기를, “얼굴은 아버지에 비할 수 있는데, 예쁜 점으로 말하면 아버지보다 조금 낫다.” 할 뿐, 그의 길흉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진이 서울에서 수개월 머문 뒤 돌아갈 때 장인이 대동강에서 배로 맞이하였는데, 이진이 갑자기 묻기를, “안찰사(按察使)의 아드님은 잘 있소.” 하였다. 이때는 이미 채생이 죽은 지 수개월 뒤라 사실대로 말했더니 이진이 위로하기를, “나는 이내 그럴 줄 알았소. 그대는 두 사위가 있으니 부디 그것을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하고, 이어 나의 소식을 묻더라는 것이다. 그가 숙녕관(肅寧館)에 도착하여 또 장인에게 묻기를, “작은 사위는 어찌 서경에서 나를 보지 않소.” 하니, “예법(禮法)에 사사로이 배알함을 금하오.” 하고 대답하니, 그가 보지 못하고 감을 두 번 세 번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연창(延昌)은 그때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어서 어떤 재앙이나 면할 수 있었던 것인데, 마침내 연산주의 뜻에 거슬려 영남 방면 안찰사로 좌천되었으나, 연산주의 학정이 날로 심하여 화가 거의 박두한 것 같았다. 때마침 일이 생겨 불려 올라오게 되었으나, 곧 반정(反正)의 거사가 일어나 훈공(勳功)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일의 순조로움이 마치 도와주는 자가 있는 듯하였으므로 화를 면하리라던 말이 또한 들어맞게 되었다. 그 6년 뒤는 무신년(1508년)이었다. 이진이 또 사신으로 와서 장인을 보고, “둘째 사위는 어느 관직에 있소.” 하므로, 답하기를, “이조 정랑이요.” 하였다. 왕년에 길가에서 우연히 그를 한 번 만나보았을 뿐이오, 일이 또 오래되었는데, 모르겠지만 이진이 어떻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은근함이 있는 듯하다. 아마 그가 관상법에 자부심을 가져 그 기술이 들어맞는지를 시험하고 싶어서인 듯하니 매우 가소로운 일이다. 예전에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의 사신을 남궁(南宮.예조)에서 잔치를 베풀어 접대할 때, 광양군(廣陽君) 이세좌(李世佐)가 예조 판서, 장인이 참판이었다. 잔치가 파하자 그 사신이 통역관에게 말하기를, “상법(相法)에 의하면 판서는 흉하고, 참판은 좋다.” 하기에, 통역관이 말하기를, “판서는 혼자만이 출세한 것이 아니라 자제 셋이 모두 급제하여 중직을 맡고 있어 그 복이 세상에 드문 바인데 어찌 흉하다 하는가.” 하였더니, 사신이 한참 말이 없다가,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광양군은 키가 크고 몸이 비대하여 그 모습을 보면 역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알 수 있었으므로 사신의 말을 듣고는 모두 허망한 소리라고 웃고 말았는데, 그 얼마 안 되어 광양군의 온 집안이 화를 당하게 되고, 장인은 마침내 무사하게 되어 편안히 늙어 돌아가셨으므로 그가 남의 길ㆍ흉ㆍ화ㆍ복을 잘볼 줄 알았다. 점치는 것[卜]은 그 수(數)를 미루어 보는 것이고, 상보는 것[相]은 그 모양을 보아 아는 것으로, 마치 촛불을 비추고 수를 세는 것 같아서 속일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미리 정해져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힘으로써 도모하고자 하여 마음과 힘을 기울여도 이루지 못하면 도리어 그 과정을 원망하고 허물하는데, 이는 미혹되어 헛수고만 하는 짓이라 하겠다.


   ●  갑술년(1514)에 닭에 관한 이상스러운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 혹은 암탉이 변하여 숫탉이 되고 혹은 세 발 달린 병아리가 생겨나는 등 이러한 이변(異變)들이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한(漢) 나라 사람 경방(京房)이 지은 《주역》〈요(妖)〉라는 제목에, “임금이 부인의 말을 잘 들으면 괴상한 닭이 생겨난다.” 하였다. 한 나라 원제(元帝) 때에 암탉이 변하여 숫탉이 되는데 울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차 왕비(王妃)가 황후(皇后)로 될 것이다.” 하더니, 정말 왕비의 존귀함이 보통이 아니었으나 황후까지는 미처 오르지 못하였다. 당(唐)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천자로 있을 때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일이 두 번이나 있었고, 위황후(韋皇后)가 정권을 농락할 때도 세 발 달린 닭이 있었다. 이처럼 괴상한 닭이 생기면 모두 여자의 화가 있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근심하였는데, 을해년 봄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돌아가셨으니 변란(變亂)치고 이보다 더 큰일이 있으랴. 승지 정성근(鄭誠謹)은 평소 곧고 결백하여 일편 단심으로 도서 편찬에 정력을 쏟았음을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연산군 때 벼슬에서 떨어져 불우한 처지로 있으면서 비분강개하여 통속적인 노래를 지어 밤중이면 슬프게 불러 그의 임금님에 대한 사랑과 못잊어 애태우는 마음을 붙였다. 내가 그 노래 가사를 따서 적었으니, 그 일절에, “나는 자네 마음 생각하는데 자네는 내 마음 같지 않네. 자네 마음 진정코 나와 같다면, 천하에 이런 일 어찌 있으랴. 서로들 생각함이 모자란다 한들, 오히려 질투나 말았으면.” 하였고, 그 이절에, “도리(桃李)꽃은 은광(恩光)에 아첨하느라 다투어 빛깔을 곱게 하네. 늦 국화인들 어이 꽃이 아니련만, 적막하니 늦은 때 누가 살펴주나. 서릿바람 화초를 흩날려 버린 뒤에, 외로운 향기 가을 뜰에 피었어라.” 하였다. 그 노래 소리가 처량하면서도 곱고, 그 가사가 원망하면서도 역시 시인이 남긴 회포라 하겠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소경(離騷經)〉은 슬프고, 한(漢) 나라 가의(賈誼)〈장사부(長沙賦)〉는 괴로움을 읊은 것이다. 〈이소경〉과 〈장사부〉의 전아(典雅)함과 정승지(鄭承旨)의 이 속된 노래가 비록 다르다 하겠으나, 머나먼 이들의 마음은 천년에도 서로 통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찢어지고 목이 메어지게 함은 매한가지라 할 것이다. 옛날 문충(文忠)이 어머니를 모심에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노쇠하심을 민망히 여겨 목계가(木鷄歌)를 지었는데, 익재(益齋)가 가사를 짓기를, “나무로 조그마한 닭 한 마리를 새겨, 젓갈로 집어 벽 위에 올려 놓으니, 이 닭이 울어 시간을 알리니, 어머님 얼굴에도 해 지는 듯하네.” 하였다. 이 노래가 지금까지 악보에 전해져 오관산곡(五冠山曲)이 되었으니, 뒤에 악보를 만드는 이가 있으면 혹시라도 이것을 수집하여 현악(絃樂)에 연주하면 아마도 목계(木鷄)와 더불어 전해질 수 있으리라.


   ● 허암(虛庵.정희량)이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짓는다는 소문이 났는데 특히 시를 잘 지었다. 늦게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어갔는데, 남의 길흉(吉凶)을 잘 알아 맞추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갑자사화(甲子士禍)는 무오사화보다 더 심하리라.” 하고, 승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산조(燕山朝)의 사화(史禍)가 무오년에 일어났는데, 허암이 일찍이 용만(龍灣)으로 귀양갔던 일이 있었던 까닭이다. 덕수현(德水縣) 남쪽에서 상중에 있던 어느 날 남녀 노비를 모두 내보내되, 그 중 어른은 나무하고 아이는 나물을 뜯게 하여 저녁거리를 장만하게 하고 자기 혼자 빈 집을 지키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늙은 종 한 명이 집에 심부름꾼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지체없이 돌아오니 허암이 없었다. 이웃 사람을 불러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단지 남강(南江)즉 조강(祖江)의 상류에서 낡은 신발 한 켤레가 모래톱에 벗겨져 있는 것만 발견될 뿐이었다. 필시 강물에 빠졌으리라 하여 어부와 수군을 동원하여 배를 타거나 헤엄을 치기도 해서 강 아래와 윗쪽을 모두 찾아 보았으나 결국 그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얼마 후 연산주(燕山主)의 학정이 더욱 심하여 마구잡이로 죽였으니,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라는 것으로 허암이 살아 있었다면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취를 스스로 감추어 죽지 않았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묘향산(妙香山)의 어느 절에서 한 중을 만났는데, 비록 스스로 춥고 배고픈 시늉을 하지만 속된 중의 거동이 아니어서 마음속으로 괴이쩍게 여기다가 훗날 다시 그를 찾아보니 이미 행방이 묘연했으니, 의문의 여지없이 그가 허암일 것이다.” 하고, 또 다른 이는, “길가 한 여관의 벽에 두 절구시가 적혀 있는데,


새가 낡은 담구멍을 기웃거리는데 / 鳥窺頹垣穴

사람들은 석양에 물 깃는구나 / 人汲夕陽泉

산수로 집을 삼는 사람 / 山水爲家客

천지 어느 곳에 있는가 / 乾坤何處邊

비 바람에 전날 놀랬기에 / 風雨驚前日

문명 세계를 지금 저버리노라 / 文明負此時

외로운 지팡이로 우주를 노닐면서 / 孤笻遊宇宙

시끄러움 꺼려 시마저 짓지 않노라 / 嫌鬧並休詩


하였다. 이 시도 필시 허암이 지었을 것이다.” 하였다. 어떤 이는 또 말하기를, “일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이런 시를 지어 남의 의심을 불러 일으킨 것이지, 허암의 것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모든 사람이 익사하면 시체가 떠오르거나, 혹은 떠서 강변으로 밀려나오는 법이니, 만약 그가 과연 투신자살하였다면 반드시 강가에서 밀려나오는 법이니, 뒤에도 끝내 찾지 못하였음은 무슨 일인가. 빈 신발만 강변에 남겨서 자기의 익사한 사실을 남들에게 보이려고 한 점은 더욱 의심스러운 바이다. 신기할 정도로 앞을 잘 알아맞춘 그였으니, 어찌 화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서 머리를 깎고 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천하에는 이처럼 기이한 재주있는 사람이 없은 적이 없으니 반드시 죽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아직 상복(喪服)을 벗기도 전이며 아버지 또한 살아계신데, 과연 세상을 등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화가 가족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차라리 인륜(人倫)을 어지럽히는 죄를 범하여 짐짓 가문이라도 보전할 계책을 꾀한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할 일이다. 내가 덕수(德水)에서 귀양살이 하던 곳이 허암의 고향과 가까웠는데, 그곳의 유식자(有識者)가 모두들 그와 같이 이야기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들의 궤변을 좋아하고 허탄한 일을 즐기는 것은 진실로 상식적인 이론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황당한 일을 믿고 천륜을 버려 까닭없이 물에 뛰어든다는 일은 더욱 믿기 어려운 것이다.” 하니, 이는 그가 아직 죽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다.


   ● 옛날 고려조(高麗朝)에 불교(佛敎)가 성행하였을 때 요승 학열(學悅)의 무리가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여 온 세상이 미쳐 날뛰게 하였으므로 떠받듦이 어느 다른 중보다 으뜸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학열 중이다.” 하였는데, 학열이라는 발음은 우리말로 무엇을 한다는 뜻과 흡사하니, 이것은 할 만한 것은 중이라는 것으로, 선망과 찬탄어린 말이다. 근세에 와서는 선비를 벼슬자리에 추천하는데 협잡이 많다. 시골의 무뢰배와 어리석고 요망한 것들이 스스로 현량(賢良)으로 은퇴해 있다고 하면서 자기 신분의 높음을 표방하고 주자(朱子)와 정자(程子)를 내려다 보아 처음에는 한 계급의 벼슬도 없던 자가 의레 육품(六品)에 뛰어 오르곤 하였다. 노필(盧㻶)이란 사람이 있어서 처음에는 겨우 주부(主簿)였는데 갑자기 지평(持平)과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여 권세를 날린 일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필 벼슬이다.” 하였는데, 노필이란 발음은 높일이라는 우리말과 비슷하므로, 높일 만한 것은 벼슬뿐이라는 것으로, 이 또한 부러워하며 찬탄해 마지않은 말이다. 이와 같이 대(對)를 맞추는 공교로움이 마치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아 이야깃거리가 될 만하다. 과거에 연산주(燕山主) 교동(喬桐)에 유폐될 때 시중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충성이 사모(詐謀)인가, 거동이 교동인가. 흥청 운평(興淸運平.연산조에 미인을 모집하여 흥청파 운평 등으로 등급을 나누었음)은 어디 두고서, 가시덤불 밑으로 돌아가는가.” 하였다.


   ● 연산조에는 관리들이 사모(紗帽)에 충성(忠誠)이란 두 글자를 모두들 써 붙이게 하였는데, 쓰는 사모(紗帽)와 속인다는 뜻의 사모(詐謀)와 음이 같다. 또 연산주가 방탕하고 표홀하여 사방 팔방으로 쏘다녔다. 모든 출입하는 것을 거동(擧動)이라 하였다. 팔도의 군현은 모두 기생과 악기를 베풀어놓고 그 중에서 으뜸가는 미인을 뽑아 이원(梨園)으로 올리고 그들의 이름을 운평(運平)이라 부르며 운평 가운데 왕의 사랑을 받으면 흥청(興淸)이라 하였다. 또 연산주를 교동에 안치할 때 가시덤불로 주위를 둘렀는데, 가시[荊棘]란 말이 우리말의 각시[妻]란 말과 비슷하며, 밑[底]이란 뜻은 또 사람의 음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항간에 나도는 조롱과 해학들인데도 그 속에는 세상을 비웃고 풍자하는 뜻이 함축되어 있어 한 시대의 일을 잘 묘사함으로써 실재하였던 사실을 여실히 들추어 내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세속에 나도는 가요를 채집하여 백성의 여론을 살피는 일은 이와 같이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다.


   ● 근래 채(蔡)씨란 성을 가진 한 학생이 훈련원(訓練院)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해가 져서 어둑어둑할 무렵에, 거리에 나섰는데 길에는 행인의 발걸음이 점차 드물어지고 달빛이 어스름하여 먼데 있는 사람의 모습은 희미하게 볼 수 있으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만큼 떨어져 한 부인이 길에 서 있거늘 서로 한동안 바라보다가 채생이 천천히 다가가 보니 소복에 비녀를 나지막이 꽂았는데 얼굴은 밝고 요염한 것이 사람에게 비쳐 왔다. 채생이 정신이 황홀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짓을 넌지시 해 보고 손으로 더듬어 보아도 여인은 놀라거나 싫어하는 빛이 없었으므로 몸을 바싹 붙이고 말하기를, “좋은 밤 한가로운 풍경에 귀한 분을 이렇게 만나니 솟아나는 정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순간적으로 미친 짓을 저질렀소만 진(晉) 나라의 한수(韓壽)가 향(香)을 훔친 일이 무어 그리 죄가 되리오. 부디 조금이나마 용서해주시오.” 하니, 부인이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군자(君子)는 어떤 분이시기에 오다가다 만난 아녀자에게 이다지도 정중하신가요. 미천한 계집에게 혹시라도 뜻이 계시다면 제가 가는 곳으로 따라오시겠나이까.” 하였다. 채생은 놀랍고 즐거움이 지나쳐, “이것이 바로 감히 청할 수 없다는 것이요. 아직 낭자의 성씨조차 모르기에 굳게 잠긴 깊숙한 집을 상상만 하여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소.” 하니, 부인이, “이미 정을 허락한 바이온데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하고, 소매를 잡고 같이 걷는 것이었다. 골목길을 돌아 개천 하나를 건너니 큰 저택이 바라보이는데 흰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채생을 잠깐 기다리게 하고 부인이 먼저 들어가고 나니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인적도 뚝 끊겼다. 채생이 주위를 배회하며 기다림에 지쳐 놀란 듯 잃어버린 듯도 하여 마음을 채 가눌 수 없었다. 한참 만에 머리를 갈라 땋은 한 소녀가 문을 반쯤 열고 나와 채생을 인도하여 여덟 겹 문으로 들어서니 흰 돌로 기둥을 한 누각이 솟아 있는데, 집의 짜임새나 그 웅장한 모습이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 않았다. 그 옆에 깊숙하고 아늑한 방이 있는데 녹색 창과 자주빛 발이 영롱하여 눈이 부셨다. 부인이 문앞에 나와 맞으며, “모두 잠들기를 기다리느라고 너무 오래 서 계시게 해서 혹시 의심이나 하시지 않았는지요.” 하고 소매를 끌어 앉혔다. 사방 벽을 살펴보니 쳐놓은 병풍과 걸린 서폭(書幅)의 색깔이 눈부시며, 수놓은 자리와 꽃방석이 아름답게 깔려 있고 화장대와 화롯불의 성대함이 모두 세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채생의 마음이 괴이하고 눈이 현혹되어 여기가 필시 신선이 사는 진경(眞境)이 아닌가 의심하여 스스로 부끄럽고 위축되어 얼굴이 찌푸려짐을 어쩌지 못하였다. 부인이 소녀에게 술을 들여오라고 명하여 주안상이 들어왔는데 모두 진기한 것들이었다. 쌍룡으로 얽혀진 귀가 달린 백옥(白玉)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채생에게 권하면서 용모를 단정히 하고 말하기를, “미천한 계집의 운명이 기구하여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자라서도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여 유모에 의탁하여 살다 보니 규방(閨房)의 법도(法度)에 익숙치 못합니다. 매양 고요한 밤에 풍경을 완상하며 긴 한숨 속에 지내다 동무를 따라 길거리에 나섰는데 홀연히 치닫는 마차와 뛰는 말이 길을 메우고 달려 오기에 길가로 조금 피한다는 것이 그만 길을 잃고 동무마저 놓쳐 홀로 길을 방황하던 차에 다행히 그대의 멋있는 모습을 뵙고 또한 은근한 정을 보여 주심을 알고서 저도 모르게 법도를 이같이 어기게 되었으니, 만약 그대가 저를 천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평생을 모시어 이 몸이 닳아 없어지더라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하였다. 채생이 일변 마시고 일변 감사하여 미칠 듯 기뻐 말문이 막혀 더듬거릴 뿐, 속으로 이는 필시 하늘에서 내려준 복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말을 그칠 줄 모르는데, 밤 시각을 알리는 종은 이미 세 번을 울렸다. 술은 거나하고 말소리도 끊어지니 소녀가 살며시 들어와 채생의 각대(角帶)와 초립(草笠)을 받아 횃대에 걸고 금침(錦枕)을 펴고 촛불을 내어 간 뒤 채생이 부인을 덥썩 끌어안고 두 사람이 즐기는데 벌이 노는 듯 나비가 춤추는 듯이 얽히기를 다한 후에도 서로들 기이한 상봉을 못내 기뻐하여 퉁소 불던 한 쌍이 달밤에 만나던 기쁨도 어이 이 같으랴 싶었다. 시간은 새벽을 재촉하나 즐거운 흥은 아직도 멀었는데, 갑자기 천둥 소리가 머리를 때리듯 요란하여 놀라 눈을 뜨니 자기가 돌다리 아래 누워서 흙투성이 돌을 베고 떨어진 거적을 덮고 있어 코를 찌르는 악취가 앞을 가리며, 벗은 초립과 각대는 다리 기둥 틈에 걸려 있었다. 아침해가 이미 솟아 인마(人馬)가 시끄럽게 내달리고 땔나무 실은 수레 두 대가 쿵쿵거리며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채생이 소스라쳐 놀라 미친 사람처럼 집으로 되돌아와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안정되는 듯하였으나 아직도 망연히 마음이 울적하여 마치 하늘에 오르다 떨어진 기분이었다. 고개를 빼어 혹시나 한 번 더 만나볼 수 있을까 초조해 하였으나 곧 요귀에게 홀린 줄을 알고 무당이 굿을 하고 의원이 뜸도 뜨는 등 약물과 기도를 백방으로 하여 겨우 병이 낫게 되었다. 그 다리는 서울 안 큰 개천 하류에 있는 것으로 다리 이름은 태평교(太平橋)라 한다. 채생을 만나본 어떤 사람이 그 일을 퇴재(退齋)란 분한테 상세히 얘기하니, 퇴재가 듣고 탄식하기를, “그런 일이 있었던가. 요귀는 사람을 묘하게 홀리느니라. 추악하고 요괴로움을 꾸며 미모로 나타나고 간악하고 위장된 일을 오히려 미담(美談)으로 바꾸며, 악취를 향기롭게 하고 더러운 흙투성이를 훌륭한 궁실로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홀리고 눈을 어지럽혀 갖은 수법으로 현혹시켜 유혹하니 기개가 지극히 크고 강직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군들 유혹되지 않겠는가. 채생이 계집과 만나게 된 것을 스스로 기뻐하고 있을 때 만약 옆에서 누구 귀에다 대고 요귀임을 알려 주더라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또 구하여 주려고 하더라도 오히려 노여움만 사게 될 것이고, 심지어는 귀신의 힘을 빌어 해치려 하였을 것이니, 그때 만약 다리 위의 천둥 소리만 없었던들 다리 밑 귀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천하에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민심을 문란케 하는 것이 귀신보다도 더한 일이 많은 것이니, 채생의 그렇게 당한 유혹 정도는 이미 수없이 많았으리라. 다행히 약물과 기도로 채생의 병은 고쳤지만, 만약 어느 누가 하우(夏禹)의 솥 만들던 일을 돌이키고 우저(牛渚)의 일을 비추어 세상의 요귀로 하여금 대낮에 그 요망스러운 짓을 못하게 하여 천하의 뭇 사람들을 채생과 같은 홀림에서 풀어 줄 수 있을까.” 하였다.


   ● 국조(國朝)에 거문고 타는 악사(樂師) 이마지(李馬智)란 자가 그 솜씨가 당대에 으뜸이었다. 장지(長指)로 제일궁(第一宮)을 짚어 줄을 튕김에 가볍고 무거운 억양이 무상하게 변하니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의 맑고 흐리며 높고 낮으며 가늘고 굵으며 성글고 잦은 소리가 모두 이에서 나왔다. 가락의 기이한 변화가 당시의 악사들보다 출중하여 음악을 즐기는 인사들이 다투어 맞이해 갔다. 매양 달밤이면 빈 대청에서 손 가는 대로 한 가락 타면 바람이 일고 물이 소용돌이치듯 하며, 하늘은 차고 귀신의 휘파람 소리와도 같아 듣는 자로 하여금 머리칼이 쭈삣쭈삣 서게 하였다. 어느 날 자리에 앉은 이들이 모두 정승이거나 귀한 손님들이었다. 이악사 이마지가 정신을 가다듬고 한 곡조 타니 구름이 가듯 냇물이 흐르듯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다가 갑자기 툭 트이는가 하면 홀연히 닫히며 펴지고 오무라듦이 변화무쌍하여 좌상에 앉은 이들이 음식맛을 잃어 술잔을 멈추고 귀 기울여 정신을 모으고 우두커니 앉은 모습들이 흡사 우뚝 선 나무와 같았다. 갑자기 변하여 고운 소리를 내니 버들개지가 나부끼듯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듯 광경이 녹아날 듯 고운 듯하여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취하고 사지가 사르르 풀리는 듯하였다. 또 다시 높이 올려 웅장하고 빠른 가락이 되니 깃발은 쓰러지고 북은 울리는 듯 백만의 병사(兵士)가 일제히 날뛰는 듯하여 기운이 뻗치고 정신이 번쩍 들며 몸을 일으켜 춤추게 되는 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잠깐 멈췄다가 다시 변하여 상성(商聲)으로 크게 울리니 숲들을 흔들고 나무도 뒤흔들 듯하여 산과 골짜기가 다 우는 듯하고 치조(徵調)로 되니 원숭이가 수심 짓고 두견이 원망하는 듯하여 나뭇잎이 우수수 지니 진정 감개가 처량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속눈썹을 적셨다. 이어서 다시 줄을 바로잡고 진(軫)을 옮겨 한 번 쭉 그으니 우레 소리가 뚝 그친 듯, 남은 소리가 잔잔히 울려 창틈이 바르르 떨더라. 거문고를 밀어 무릎 아래에 놓고 옷깃을 여미고 슬픈 얼굴을 하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인생 백년도 잠깐이요, 부귀 영화도 한순간이다. 영웅호걸의 의기(意氣)도 그가 죽고 나면 뉘 알리오. 오직 문장(文章)에 능한 사람은 그의 글을 남기고 글씨와 그림에 능한 사람은 그 자취를 비교하여 저작자(著作者)들의 능력 정도를 평가할 수 있으니 천년 만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이다. 허나 나 같은 이는 몸이 한낱 아침이슬처럼 사라지고 나면 연기가 사라지고 구름이 없어지듯 하리니 비록 이마지가 음률에 능했다 하나 뒷사람이 무엇을 근거로 그 재주를 알아주랴. 옛날 호파(瓠巴)백아(伯牙)는 천하에 오묘한 기술을 가졌으나 죽고 난 그날 저녁 이미 그 소리를 다시 들어볼 수 없었거늘, 하물며 천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랴.” 하고는 말을 마치고 긴 한숨을 내어 쉬니 자리에 앉은 이들이 모두 눈물로 옷깃을 적시더라. 이마지 같은 이는 정말 옹문주(雍門周)와 비등한 기술을 가졌다 할 것이다. 그의 신기한 곡조들은 대부분 스스로 만든 것이었는데,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끼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쩌다가 한두 곡을 몰래 배운 자가 있어 오늘까지 전해져 이마지의 곡조라 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변하여 마침내 그 온존함을 잃어 버렸으니, 마치 광릉산(廣陵散)의 곡조가 전해지지 않음과 같다. 또 여자 악사 조이개(曹伊介)란 이가 있어서 가야금 타는 솜씨가 기묘하여 이마지(李馬智)와 동시대에 살면서 각각 그 기술의 극치를 이루었으므로 나라에서는 악사의 명수로 이 두 사람을 일컬었다고 한다.


   ●무인년(1518) 5월 15일 임금님이 친히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정사를 보셨다. 그때는 좌의정 김응기(金應箕) 공(公)이 탄핵되어 면직되었으므로 그 자리가 오래도록 비고 보충되지 않고 있었다. 하루는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우의정 신용개(申用漑)를 불러 좌의정을 천거하라고 하자, 두 분이 똑같이 나의 계부(季父) 충정공(忠貞公)을 추천하였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근시(近侍) 중에 널리 의논하기를 청하는 자가 있어서 즉 승지 문근(文瑾)이었다.정부(政府)ㆍ육조(六曹)ㆍ한성부(漢城府)ㆍ대간(臺諫)ㆍ시종(侍從)들을 모아 각기 천거해 보도록 하니, 육조와 한성부에서 말하기를, “대신에 관한 일과 정승을 임명하는 일을 어찌 하층 관료들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성종대왕께서 정승을 임명하시려 할 때 조회(朝會)에 입시(入侍)한 재상들로 하여금 추천하도록 명하시자, 당시 정승의 한 사람이던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못났으나 삼공(三公)의 무거운 책임을 맡고 있사오니 정승을 천거하는 일은 신에게 하문하심이 마땅하올 일이니, 아래로 육조(六曹)의 의견까지 들으실 필요가 없는 줄 아뢰오.’ 하므로 성종대왕께서는 사과하고 마침내 그의 말을 채택하셨으니, 이는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입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모두 사양하여 기다리지 않고 물러갔다. 정광필ㆍ신용개 두 정승이 큰 명을 받들어 먼저 추천한 사람과 찬성 이계맹(李繼孟)ㆍ판서 남곤(南袞) 등을 추가하여 올리자, 임금님께서는 특별히 호조 판서 안당(安瑭) 어떠냐고 물으시니 시종(侍從)들이 비밀리에 찬성하여 성취시켰다. 이날 정사에서 안당이 이조 판서의 후보로 들어갔다가 즉석에서 정승 발령을 받고 나왔다. 그리고 이장곤(李長坤) 공을 불러 이조 판서에 대치시키고, 또 우승지(右承旨) 김정(金淨)을 뽑아 참판(參判)으로 삼고, 한충(韓忠)을 응교(應敎)로 승진시키고, 김구(金絿)를 전랑(銓郞)에 전직(轉職)시켰으니, 이는 모두 왕의 뜻이었다. 모두 나이가 젊은 신진의 선비들이라서 예리한 기상이 있고 일하기를 좋아하나, 세상일에 경험이 적어 모든 일을 도모하고 명령을 시행할 때 반드시 옛일을 끄집어 내어 삼대(三代)의 정치를 당장 실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시행해 오던 헌장(憲章)을 많이 뜯어 고치려 하는데, 늙고 경험 많은 신하들은 이루어진 법을 그대로 지키기를 고집함으로써 의견이 완전히 엇갈리게 되었다. 신진 인사들은 재상을 가리켜, “자기네들이 무슨 일을 하리오.” 하면서, 오로지 안당만을 촉망하여 그들의 진로를 개척하려한 지 오래되었고, 한충과 김구도 당시에 촉망되는 인사여서 때를 노리던 젊은이들이 바야흐로 벼슬 한 자리 얻을 준비를 하며 서로 축하들을 하고 있었다. 그날 임명장이 수여될 때 홀연히 우레 소리와 같은 지진이 일어나 대지가 떨고 건물이 흔들려 마치 작은 배가 풍랑을 만나 기우뚱거리다 전복될 듯하여 인마(人馬)가 놀라 자빠지고 그 중에는 기절하는 자도 많았다. 성안의 집들이 무너지고 가지런히 널려 있던 단지나 항아리 같은 그릇들이 서로 부딪쳐 부서진 것을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지진이 그쳤다 일어났다 해서 밤새도록 그치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빈 뜰로 뛰쳐나가 압사(壓死)될 것을 피하였다. 이로부터 그 기세가 차차 수그러지기는 하였으나 날마다 여진이 계속되어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그쳤으니, 이는 팔도가 모두 그러한 바로 일찍이 보기 드문 이변이었다. 그 뒤 일이 순조롭지 못하여 안당과 김정은 죽임을 당하고 한충도 곤장을 맞아 죽고, 김구는 섬으로 귀양갔으며, 이장곤 공도 쫓겨나게 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하늘이 인간에게 경고한 바가 진실로 거짓됨이 없는가 보다. 아, 두려운 일이로다.


   ● 옛날부터 항간에 동요(童謠)가 유행하는 것은 처음에는 아무 뜻도 없고 아무런 실정(實情)도 없는 데서 나오며, 인위의 작용이 내포되지 않는 그런 자연적인 천성에서 순수하게 우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동요가 어떤 미래의 예언이 되어 그것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우리 나라 태종 때에는, ‘저 남산에 가서 돌을 치는데 돌을 치는 정(釘)이 남지 않을 것이다.’라는 동요가 있었다. 정(釘)이라는 것은 돌을 치는 기구이다. 그런데 머지않아 남은(南誾)과 정도전(鄭道傳)이 일로써 주살(誅殺)되었다. 남산이란 남은을 가리키는 말이고, 정(釘)은 정(鄭)과 같은 음으로 정도전을 말한 것이다. 여(餘) 자의 풀이는 우리말로 남은(南誾)과 음이 비슷하니, 정도전과 남은이 없어질 것이라는 뜻이 된다. 성종조에, ‘망마다승슬어이라[望馬多勝瑟於伊羅]’라는 동요가 유행하였는데, ‘망마다’라는 것은 속담에 사절(辭絶)한다는 말이고, 위의 사(辭) 자는 굳이 사절한다는 사 자이다. ‘승슬어이라’라는 것은 속담에 염증이 나서 물리친다는 말이니, 모두 단절이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윤서인(尹庶人)이 죄가 있어서 폐위(廢位)되었다. 연산조(燕山朝)에, ‘견소의로고굿기로고 (見笑矣盧古仇叱其盧古)ㆍ 지금 관리들 장부에 천민이나 서족들의 이름자를 적을 때 방언(方言)에 바른 소리가 없어서 적기 어려운 것은 ㅅ[叱]자를 빌려서 조음(助音)으로 적으니, 이것은 그러한 예와 같은 것이다.패아로고(敗阿盧古).’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그 때 사람들이, “세 개의 노구를 합쳤다.”라 하였으니, 노구는 쇠탕기로 대(大)ㆍ중(中)ㆍ소(小) 세 겹의 탕기가 한 갑에 들어 있던 것을 세속에서 삼합로구(三合爐口)라 하는 것이다. 노고(爐古)라는 것은 말이 끝날 때 어떤 사실을 결단(決斷)하는 말로 노구(盧口)와 음이 비슷하여 같은 말 세 가지가 중복되는 것이 노구 셋이 합쳐진 것과 같은 것이다. ‘견소의로고(見笑矣盧古)’라는 것은 행위가 무도한 짓을 많이 해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이고, ‘굿기로고(仇叱其盧古)’라는 것은 방언에 더러운 행동을 하여 난잡하고 부정(不淨)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패아로고(敗阿盧古)’라는 것은 방언에 이미 이루어진 일을 망가뜨리는 것을 말한다. 한 말이 끝나면 반드시 노고(盧古)라는 말로 사실을 단정하는 것은 속어체(俗語體)가 그런 것이다. 이 동요의 전체의 뜻은 연산군이 많이 패도(悖道)하고 황난(荒亂)하여 이미 이루어 놓은 대업(大業)을 망가뜨려서 몸이 끝내 보전되지 못하여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연산군 때에 또 다음과 같은 동요가 있어서, ‘매이역가미애역가수묵묵(每伊斁可每伊斁可首墨墨)’이라 하였으니,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박원종(朴元宗)과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성희안(成希顔) 등이 모두 남산 아래 묵사동(墨寺洞)에 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나라를 평정하는 계책을 가장 먼저 수립한 사람들이다. ‘매이(每伊)’라는 것은 세속 사람들이 존장(尊長)을 불러 말씀을 고할 때 쓰는 말이고, 역(斁) 자는 임금의 이름자와 같은 음이고, 가(可) 자는 사람들이 서로 이름을 부를 때 조사로 쓰는 말이며, 불러서 어버이나 임금에게 고하는 뜻이기도 하다. ‘수묵묵(首墨墨)’이라는 것은 그 계획을 세운 우두머리가 묵사동에 있다는 뜻이다. 이것 역시 진(晉) 나라의 오마남도(五馬南渡)의 동요와 같은 것이다. 나라의 흥폐는 천명(天命)과 인심의 향배(向背)이기도 하여 반드시 먼저 그 징조가 나타나는 것이니, 옛날부터 그러한 것이다. 그전에, ‘기객야야만손야재(其客也耶萬孫也哉)’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천하고 비루하여 가소로울 정도였다. 백성 가운데 만손(萬孫)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스스로 양평군(襄平君)이라고 하면서 조정에 자수하여 말하기를, “옛날 사약을 내릴 때 유모가 양민의 집에서 비슷한 아이를 데려와 대신 죽게 하였다. 내가 사실은 양평군으로 연산군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관리를 시켜 사실을 조사하여 결국은 근거없는 거짓말을 하였다 해서 주살되었다. ‘객야야(客也耶)’라는 것은 ‘이 손님은 어떤 손님인고’라는 뜻이며, ‘만손야재(萬孫也哉)’라는 것은 이 손님이 곧 만손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한 미친 사람인데 무슨 관계로 동요로써 미래를 예언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이러고 보면 천지간의 모든 사물의 성패와 생몰(生沒)에도 모두 미리 정해진 운명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묘한 이치를 알고 은미한 조짐을 식별할 줄 아는 선비라야 가히 앉아서도 미래를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과 악이 서로 바뀌는 이치는 역시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근래의 ‘슬파곤(瑟破鯀)’이란 동요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과 나의 장인 채나재(蔡懶齋)는 모두 인품이 호탕하여 구애됨이 없으며 원래부터 산림(山林)의 기상이 있었다. 함께 승정원에 계실 때 대수롭지 않은 일로 같이 벼슬에서 물러나 당나귀에 짐을 싣고 젊은 종으로 하여금 봇짐과 항아리 술을 지게 하고서 산천을 유람하였다. 마침내 동쪽 관동(關東) 방면으로 발길을 돌려 풍악산(楓嶽山)에 올라 동해에 해뜨는 광경을 구경하고 으슥한 바위틈과 깊은 골짜기로 신선의 발자취를 따라 찾아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헌 갓을 젖혀 쓰고[蓬累] 갓끈을 드리우고[垂條] 포의망혜(布衣芒鞋)로 거리낌없이 돌아다니나, 행장이랬자 별 것 없어 금마문(金馬門.홍문관) 앞에 선 봉지의 손님[鳳池客.임금의 글을 대신 짓는 사람]과 같을 리 없다. 길을 지나감에 일부러 성읍(城邑)을 피하여 다니니 그들을 알아보는 이도 없었다. 다만 아름다운 경치를 따라 가고 싶은 곳만 찾아 다녀 길의 멀고 가까운 것은 가릴 바 아니었다. 하루는 흥에 겨워 흥청거리며 서산에 해지는 줄을 모르다가 당황하여 갈 곳이 없어 어느 현의 향교를 찾아가 하룻밤 쉬고 갈 수 있기를 간청하였다. 그때 마침 교관(校官)이 출타하였다가 돌아오니 제생(諸生)들이 닭을 잡고 술을 걸러 선생의 노고를 쉬게 할 연회를 마련하였다. 교관은 코가 주독으로 벌겋고 수염이 텁수룩하며, 모자를 뒤로 젖혀 쓰고 띠를 느슨히 매었는데 왼쪽으로는 백목(白木) 안석에 기대고 오른손으로는 주점 아가씨를 끌어 안고 있다. 어린 학생은 뒤에서 부채질을 하고 당장(堂長)은 앞에서 술을 따라[進鍾]  술이 거나해지자 마음이 흡족하여 부산하게 떠들어 대다가 [唱噱] 이 분들이 대문간에 서 있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늙고 지친 선비[措大]들이라 생각하여 같이 어울려 한 잔 하자고 하며 제생(諸生)들의 오른편에 앉게 하고 커다란 바가지에 술을 가득 떠 권하며 말하기를, “선비들이 늦게 왔으니 마땅히 몇 잔 더 들어야 할 것이오.” 하며 상스러운 농담에 우스갯소리로 마치 어린애 대하듯 한다. 공들도 같이 마시면서도 언동을 삼가는데 교관이 아가씨의 등을 어루만지며 노래도 하게 하고 술도 권하며 말하기를, “선비들은 나의 이렇게 어긋난 짓을 탓하지 마시오. 공부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필경은 이 지경이 되었소. 하나 여기에도 그런대로 멋이 있으니 당신네들도 뒤에는 아마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자 가(歌) 자로 연구(聯句)를 지어 한 구(句)를 부르면 받아 부르기로 합시다.” 하여, 나재(懶齋)가 먼저 짓고 허백(虛白)이 따라 지으니, 교관이 그것을 읊어 내겨가면서 손뼉을 치며, “비록 채나재(蔡懶齋)의 문장이라도 어찌 이보다 나으랴.” 하였다. 그것은 당시에 나재의 문명이 높아 사람들 입에 자자하였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에 안찰사의 하인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두 승지(承旨)분들이 여기 오시지 않았는가.” 하니, 교관이 비로소 알고 놀라 생땀을 흘리며 숨어 버렸다. 또 공들이 포천(抱川)의 어느 길가에서 아침밥을 지으며 풀숲에 앉아 말안장을 내려 말을 쉬게 하고 짐을 풀어 소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 촌사람이 밭이랑을 가로질러 걸어 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하기를, “사직(司直)들은 영안도(永安道) 시장에 사는 소 거간꾼이 아니오.” 하므로, 허백(虛白)이 일부러 느릿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촌사람이, “쌀 한 섬으로 소 한 마리를 바꾸어 줄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허백이, “다 팔아버리고 단지 남은 것이라곤 짐 실은 소 뿐이오.” 하니, 그는 욕하며 가버렸다. 창도역(昌道驛)에 이르러 병으로 며칠 동안 체재하면서 개천가의 작고 반반한 돌을 주어 바둑알로 하고 종이에 선을 그어 바둑판을 만들어 같이 간 무관(武官) 이소(李昭)와 함께 세 사람이 앉아서 바둑을 두며 즐기고 있는데, 역졸(驛卒) 한 사람이 다가와 옆에 걸터 앉는다. 형색이 우락부락 사납게 보이는 자로, 매어 놓은 소와 말을 풀어 문 밖으로 쫓아내면서 큰 소리로 욕하기를, “어떤 놈들이 감히 짐승을 제멋대로 매어두어 뜰을 이렇게 더럽히는가.” 하기에, 허백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는 어찌 사람을 이다지도 박대하는가, 뒷날 우리가 찰방 벼슬이라도 한 자리 할지 어떻게 아는가.” 하니, 역졸은 하늘을 쳐다보고 깔깔대고 웃으며, “나는 이미 늙었소. 또 영안도(永安道)의 사직(司直)으로서 찰방이 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하였다. 대개 벼슬 못하는 북쪽 사람들이 그들의 대열 가운데서 특히 성적이 좋은 자가 있으면 서위(西衛)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으므로 남들이 그를 높여 부르기를, ‘사직이라.’ 한 때문이었다. 얼마 후에 허백이 이 도(道)의 안찰사가 되고, 이소(李昭)가 이 부(府)의 수령이 되었다. 역졸이 보니 모두 전에 자기가 욕한 이들이라 대경실색하여 말하기를, “영안도(永安道)의 사직을 나는 이제 다시는 가벼이 대하지 않겠다.” 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하였다. 예로부터 어진 사람이나 고결한 인격자로서 천한 곳에 묻혀 낮은 벼슬자리에 앉아서 세정을 완미(玩味)하고 세속을 기롱(譏弄)하는 이는 적지 않은데, 세상 사람들이 겉모양만 보고 그를 능멸하고 모독하는 일이 허다하다. 교관(校官)이 선비들을 선비로 대우하지 않는 일이 드물 것이고, 역졸이 공들을 사직(司直)이라 욕한 일도 마찬가지이니, 이는 각별히 조심할 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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