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풍류의 원형과 세계사적 의의 外

2018. 3. 8. 21:49잡주머니



한국 풍류의 원형과 세계사적 의의


  2018. 2. 2. 15:25       서정록


1.

   이땅의 조상들이 이루어냈던 아름다운 도, ‘풍류(風流)’는 지금도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 속에서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역사시대에 우리의 삶을 옭아맸던 국가와 계급과 물질의 길은 원래의 풍류의 모습을 왜곡시켰고, 오랫동안 우리문화에 덧씌워졌던 외래문화 또한 이땅의 풍류의 모습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종내는 이땅의 풍류의 원형을 놓고 설왕설래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동안 풍류는 중국의 유불선(儒佛仙)의 영향 하에서 해석되어 왔다. 유불선이 들어온 후 이른바 그들의 장점을 취합해 ‘풍류’를 만들어 어리석은 민중을 교화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러한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중국으로부터 유불선이라는 학문다운 학문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정신이 깨어났다는 말과 같다. 그동안 역사 교과서에서 이땅의 고대문화나 정신으로 유불선 이외의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으니 유불선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문화다운 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이러한 해석은 얼핏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중국에서 유불선이 전래되기 전에는 이땅에 문화랄 만한 것이 없었고, 유불선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개화되었다는 시각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벽화를 보면 샤마니즘이 문화적으로 중심적 위치에 있었음이 드러난다. 즉 샤마니즘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무덤 내부의 공간이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공간에는 그에 상응하는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 견주어 유불선은 오히려 주변적이거나 부수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다. 그만큼 샤마니즘의 세계관이 뚜렷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백제, 신라, 그리고 고대 일본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땅에 내놓을 만한 문화가 없었다는 식의 해석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치원 선생이 난랑비(鸞郞碑) 서문에서 ‘국유현묘지도, 왈풍류, 포함삼교 접화군생(國有玄妙之道, 曰風流, 包含三敎 接化羣生)’이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이땅에는 현묘지도의 아름다운 풍류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국가가 생기고 계급이 생기고 물질의 욕망이 생기면서, 그리고 중국의 유불선이 덧씌워지면서 그 아름다운 도가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짧지만 함축이 많은 위의 문장을 대할 때면 왠지 그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그의 마음이 짙게 느껴지는 것이다.


2.
   우리민족은 그 어떤 민족보다도 영적인 민족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의 유교정책 하에서 이땅의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받던 무당(샤만)들이 하루아침에 천한 하층민으로 전락한 상황에서도, 그리고 그때 이래로 그들의 사회적 활동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상황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나라보다도 샤만이 많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것은 이땅의 기층문화로서 샤마니즘이 갖는 뚜렷한 위치를 말해준다.


   다만, 현실계와 영계가 시계의 두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고 본다면, 영성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사회 구성원들의 지적, 정신적, 문화적 현상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땅의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면, 삼국시대 이래 국가체계의 확대와 신분과 계급 제도, 그리고 물질적 욕망의 확대재생산의 구조를 발달시켜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현재 이땅의 샤마니즘 현상은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국가와 계급과 물질의 욕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그 이전 시대의 샤마니즘 현상과는 많이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땅의 고대의 풍류문화를 이해하고자 할 때 부득이 국가와 계급과 물질의 욕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아무래도 이땅의 고대 풍류는 국가와 계급과 물질이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기 전 이땅의 소박한 민중들이 지니고 있었던 순수한 영적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세계라 할 때는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의 샤마니즘 현상, 또는 가깝게는 전통시대의 북미 인디언들이나 일부 제3세계 민족들의 국가와 계급과 물질적 욕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적인 삶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밝혀둔다.


3.
   ‘풍류’라는 용어는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 서문에 나타나기 전에 중국에서 먼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풍류’란 말의 의미를 둘러싸고 혼란이 있는데, 중국에서 풍류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위진(魏晉)시대이다. 그때는 유교를 국교로 했던 한나라 이래로 중국에서 영적인 사고가 크게 위축된 시대였다. 유교와 노장에서는 영혼과 내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히 중국에서 샤만의 활동은 끊어지고, 그 빈틈을 방사(方士)들의 신선사상과 도교가 메우게 된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들이 풍류라 할 때의 ‘풍(風)’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국풍(國風)’, ‘정풍(鄭風)’ 등의 예에서 보듯이, 노래와 가무, 시문을 뜻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풍류라 할 때 중국에서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시문(詩文)이나 주연, 가무를 즐기는 귀족적 향취 내지 북방민족들에게 쫓기는 신세를 한탄하고 은둔자적하며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청담(淸談), 현학(玄學)의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에 반해 샤마니즘 문화를 토대로 하는 동북아의 풍류는 <바람 風, 흐를 流>, 즉 ‘바람과 물’의 영적인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이 한나라 이래로 영적인 사고를 부정하고, 인문주의적 경향을 발전시켜온 것과 달리 이땅의 문화는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성의 토대 위에서,
1)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살아있는 생명이며,
2)모든 존재는 영적으로 평등하고,
3)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4)서로 의존하며 살아가고,
5)각각의 존재는 모두 다 그 나름의 임무와 직분을 갖고 태어났다는 사고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말하는 풍류는 중국인들이 말하는 풍류와는 그 함의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무릇 중국의 풍류가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시문과 술과 가무로 그들의 답답한 심사를 푸는 문화라면, 이땅의 풍류는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세계를 토대로 몸과 마음과 영혼의 통합을 이루고, 일상의 삶에서 신성함을 찾으며, 주위의 다른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삶의 근본적인 방식을 말하기 때문이다.


4.
   그렇다면 이땅의 풍류적 사고의 전제가 되는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사고란 무엇인가?
북유라시아와 북미 원주민들의 샤마니즘에서 샤만(또는 주술사)들은 영성에 대해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서 설명해왔다.
ㄱ.숨결
ㄴ.피(또는 물)


   먼저 숨결을 보자.
많은 아시아와 아메리카, 호주, 아프리카 등지의 원주민들의 창조신화를 보면 창조주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만물을 만든 뒤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자,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기독교의 창세기에도 전해진다.
여기서 생명의 숨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람이다. 그 바람이 우리의 몸에 들고 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이 된다. 우리가 숨을 쉰다는 것은 곧 바람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인데, 나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다 숨을 쉰다는 것이 샤마니즘의 생명관이다. 말하자면 동식물은 물론 해님도, 달님도, 산도 강도, 심지어 우리가 무생물이라 치부하는 돌멩이까지도 숨을 쉰다고 여기는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벽화에는 천정의 해와 달이 숨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으며, 산이 춤을 추는 것이 표현되어 있다. 춤을 춘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고구려벽화에는 이처럼 모든 존재가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샤마니즘의 생명관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그런데 숨을 쉬는 동안 우리의 숨결은 주위의 다른 존재들의 숨결과 섞이게 되어 있다. 우리가 들이쉬는 숨결에는 다른 존재들의 숨결이 들어와 있고, 나의 숨결은 다른 존재들의 숨결에 갈마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 서로의 숨결을 나누고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자연과 우주의 차원으로 확장하면 우리는 숨을 쉬는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만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숨을 쉬는 행위를 통해서 모든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숨을 쉬는 이 작은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생명은 하나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 몸을 도는 는 어떤가. 고대인들은 피가 곧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상처가 나 피를 많이 흘리게 되면 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피는 물이다. 우리 몸의 70%가 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음식이나 음료수의 형태로 물을 섭취한다. 그리고 그 물은 신진대사를 통해 몸밖으로 분비, 또는 배출되며, 그것은 하천을 통해 바다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수증기가 되어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우리는 그 물을 받아 마신다. 이렇게 우리의 몸을 드나드는 물은 단순히 들고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의 몸을 드나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물은 또한 다른 존재들의 몸을 넘나들게 되고, 결국 이 물의 순환과정을 통해서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숨결과 마찬가지로 물, 또는 피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렇게 모든 생명은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람과 물은 우리의 몸을 넘나들며 다른 존재들과 우리를 관계시키고, 서로 이어주며, 서로 의존관계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 고대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관통하여 흐르면서, 생명세계가 지속되도록 해주는 근원적인 에너지, 또는 생명력이 바로 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성을 설명하고자 할 때 그들은 그러한 근원적인 생명력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바람과 물을 비유로 들었던 것이다.


5.
   시베리아의 샤마니즘의 연속선상에 있는 북미 원주민들 또한 이와 동일한 사고를 갖고 있는데, 그들 역시 바람, 물, 영성은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전통시대 북미 원주민들의 경우 아시아와 동북아의 샤마니즘이 물질화, 계급화, 국가화, 기복화의 길을 걸어온 것과 달리 고대의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그들의 순수한 영적인 삶은 오늘날 영성운동에 관심을 가진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 가운데 서남부 인디언들과 나바호족은 바람이 생명의 숨결이 되어 우리 몸을 드나드는 것이 얼마나 영적인 것인가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그들은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바람이 불자 나뭇가지가 춤을 춘다고 말한다. 나뭇가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나뭇가지가 노래한다고 말한다. 바람이 불어 산의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을 두고 산이 춤을 춘다고 말한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을 긴 사람이 노래하고 춤춘다고 말한다. 그리고 창조주가 우리의 몸에 불어넣어준 생명의 숨결은 우리 몸 안에서는 생각이 되고, 밖에 나가서는 말이 된다고 말한다. 우리 마음의 근원이 바로 숨결임을 그들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과 물의 이런 영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호주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의 원주민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이런 바람과 물의 순환에 기초한 영적 이해를 엿볼 수 있는데, 마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리라고 예언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발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마태복음 3:11).

   이 문장에 나오는 ‘성령holy spirit’이란 말은 '성스러운 숨결holy breath'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를 번역한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사람이 늙은 나이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가 있습니까?” 하고 묻는 대목이 있는데, 이에 대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한다고 하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바람은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으니라(요한복음 3:5-8).

   여기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의 말은 정확히 ‘물과 바람’이다. 이때의 성령 역시 위의 세례요한의 경우처럼 성스러운 숨결의 그리스어에서 온 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영적 이해가 고대 샤마니즘의 영적 이해와 동일선상에 서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바람과 물에 대한 영적 이해는 초기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끼친 로마시대의 이교도와 영지주의적 전통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6.
   바람과 물의 이러한 영적 특징북미 원주민들은 나선형, 또는 원의 상징을 통해서 설명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신성한 원(Medicine Wheel)’, ‘생명의 원(Circle of Life)’, '원안의 원(Circle in Circle)'이 그것이다. 의상과 각종 생활도구에 장식된 나선형 무늬, 또는 원을 통해서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면서 변화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구려벽화에서는 바람과 물이 나선형과 원의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는데, 류운문(流雲紋) 형태의 각종 바람이나 구름, 물결, 햇살, 넝쿨, 화염 문양이 그것이다. 특히 덕흥리고분, 쌍영총, 수산리고분, 삼실총 등에는 지상계와 천상계를 구분짓는 도리에 이러한 류운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바람과 물의 나선형, 원의 형태가 현상계(지상계)와 영계(천상계)의 경계를 나타냄을 뜻한다. 아무르강의 소수민족들은 이러한 나선형, 원의 무늬를 건축물의 기둥과 도리, 각종 생활도구 등에 장식하는데, 이는 이러한 무늬가 일종의 기도, 또는 주술적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고구려벽화의 이러한 류운문은 당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선비족의 경우 외에는 중국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한나라 이래 유교적 사고가 지배하면서 영적 사고가 결여된 중국문화의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견주어 나선형 형태의 류운문은 삼국시대의 각종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등의 유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에 바람과 물로 상징되는 풍류적 사고가 이땅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7.
   바람과 물의 영적 의미를 상징화한 이러한 나선형, 원의 도상은 샤마니즘에 기초한 티벳 불교 만달라에서도 확인된다. 티벳 불교의 만달라는 원과 사각형을 기조로 복잡하게 짜여져 있는데, 티벳의 만달라가 이처럼 복잡한 형태로 발전한 이유는 인도의 초기 만달라 위에 점차 형이상학화, 존재론화한 불교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만달라 도상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실제로는 나선형, 원으로 상징되는 바람과 물의 영적 이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원이라는 것은 그 위에 무수한 점이 있다고 하면, 그 각각의 점은 원에 의존하고, 원은 각각의 점에 의존한다. 이렇게 원 위의 점들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다른 점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게 각각의 점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작인 동시에 끝이 된다. 이렇게 원 위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이 돌아간다. 뿐만 아니라 원 위의 점들은 높낮이 없이 모두 평등하다. 그와 함께 각각의 점은 중심이 되며, 주인의 자리가 된다. 이것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중심이며 주인의 위치에 있는 것과 같다. 어디 그뿐인가. 원이 우주의 만물을 상징한다면 원의 모든 존재를 관통해서 흐르는 생명력은 신이 되고, 그 신은 다시 각각의 존재에 내재해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북미 원주민들의 원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티벳 불교의 만달라에 대한 핵심적 통찰에 해당한다.
그런데 바람과 물의 영성을 상징하는 이러한 나선형과 원의 문양, 또는 도상들은 고대의 샤마니즘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유럽의 고대민족인 켈트족의 나선형 장식무늬가 그러하며, 아무르강 중하류 지역에 거주하는 고아시아족 - 나나이족, 니브흐족, 울치족, 우데헤족, 네기달족 등이 그러하며, 또한 북유라시아를 휩쓸던 스키타이-흉노족그들의 후예인 게르만-바이킹족의 나선형, 원의 도상이 그렇다. 또 샤마니즘 문화를 갖고 있는 제3세계 원주민들의 각종 의상에 장식된 무늬와 생활도구에 장식된 나선형, 원의 무늬들이 그렇다.

8.
   최치원 선생이 일찍이 <이땅에 아름다운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고 했던 풍류는 이와 같은 바람과 물의 영적 이해를 토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풍류도가 퇴락해가던 신라 말기에 그가 이와 같은 풍류에 대한 영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성에 바탕한 영적 지혜가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풍류의 인식론을 이른바 ‘접화군생(接化羣生)’이라는 말로 압축하고 있는데, 이 접화군생에 대해서 그동안 학자들은 ‘민중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바람과 물에 대한 영적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이러한 해석은 전혀 맞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의 모든 행위가 서로 관계지어져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접화군생은 일상의 신성한 행위 또는 삶 속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며 뭇 생명들이 살아간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신라인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접화군생이라고 하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아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학자들은 왜 이 접화군생은 그리도 다르게 해석하는가! 그것은 이 개념에 접근하는 많은 이들이 유불선이 전래되기 훨씬 전부터 이땅에 존재했던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샤마니즘은 영혼을 중심으로 이 세상의 현상과 변화를 바라본다. 그런데 영혼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다. 때문에 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적 세계를 어떻게 가시적으로 표현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바람과 물에 의한 영적 비유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이 접화군생의 의미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놀랍게도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다. 그는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설명으로 ‘시(侍)’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신다는 것은 안으로 신성한 영(혼)이 있고, 밖에는 천지만물의 기화가 있으며, 세상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생명임을 아는 것이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여기서 안으로 신성한 영(혼)이 있고, 밖에는 천지만물의 기화가 있다는 <내유신령, 외유기화>는 곧 안으로는 신령한 영의 작용이 있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천지만물의 기화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내유신령, 외유기화>란 말은 모순된 말이다. 왜냐하면 ‘신령’이란 영(spirit), 또는 영혼을 말하는데 반해, ‘기화(氣化)’란 주자학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주자학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 또는 영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현상계 너머의 그 모든 작용을 이화(理化)로서 설명한다. 그것은 원리, 법칙을 말할 뿐 영혼을 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신령과 기화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도 양자를 함께 쓰고 있는 것이다.


   수운 선생 역시 이러한 이질적인 개념의 조합으로부터 생기는 문제점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고자 하나 기존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던 언어적 한계 때문에 부득이 그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들이 동학을 어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내유신령, 외유기화> 속에 담긴 함의를 보지 못하고 문자에 얽매여 이를 놓치는 것이다.
그러나 수운 선생이 <내유신령, 외유기화>라고 말함으로써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한마디로 모신다는 것은 안에 있는 신성한 영의 작용이 밖으로 드러난 일상의 행위(氣化) 속에서 세상사람들이 모두 다 귀중한 생명임을 아는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운 선생의 이러한 시(侍)에 대한 이해는 정확히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이해를 갖고 있던 민중들의 지혜에 바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내유신령, 외유기화>는 <내유신령, 외유접화(內有神靈, 外有接化)>으로 푸는 것이 나았다고 생각된다. 기화를 접화군생에 나오는 ‘접화(接化)’로 푸는 것이 옳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기화(氣化)’는 신령과 양립할 수 없는 주자학적 개념인데다 자칫 유물론적 해석을 범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랬더라면 안으로는 영의 작용이 있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일상의 삶이라는 민중적 지혜를 오롯이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수운 선생이 신내림을 통해 깨달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왜 주자학의 ‘기화’가 아니라 샤마니즘의 영적 지혜를 배경으로 하는 ‘접화’라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접화군생의 의미를 좀더 살펴보자.
이 접화군생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접화’와 ‘군생’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군생’은 뭇 생명이 살아간다는 의미이니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그렇다면 접화는 어떤가.
   먼저 ‘접(接)’이 무당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들을 만날 때 사용하던 말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실제로 ‘신접(神接)’, 또는 ‘접신(接神)’이라 하면, 현상계와 영계의 만남, 또는 그 경계를 뜻한다. 무당들이 영을 접하는 것을 그리 표현했던 것이다. 또 우리가 흥이 났을 때, ‘신난다’. ‘신명이 난다’, ‘신이 오른다’는 등의 표현을 쓰는데, 이 또한 접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접은 현상계 너머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만나거나 그와 관계된 영적인 만남에 사용하던 말인 것이다. 


   샤마니즘 현상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접의 성격은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또는 신이 오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 또한 정신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정신과 달리 우리의 몸이 세속적인 것이고, 그래서 신성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몸은 신성한 영 또는 정신과 소통할 수 없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접신이나 신명과 같은 영적인 만남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부의 영혼의 작용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우리의 일상의 삶이요 행위라는 것을 상기하면 사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동안 서구식 교육을 받아 몸과 물질은 세속적인 것이고, 정신과 영혼은 신적이고 고귀한 것이라는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몸의 움직임에 영혼이 함께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몸과 영혼, 물질과 정신은 물과 기름처럼 다르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 또한 영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샤마니즘의 영혼관이다. 우리의 몸은 그냥 body가 아니라 spiritual body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몸과 영혼의 분리를 허용치 않는 것이다. 몸과 영혼의 분리는 그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 몸에 영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일상의 행위에는 신성함이 깃들게 된다. 우리가 하는 그 모든 행위가 단순한 세속적인 행위를 넘어 거룩하고 신성해질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거룩하고 신성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접이 일상의 삶 속에서 신성함을 찾는 행위, 즉 일상과 종교의 일치와 분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는데, 접의 이러한 성격은 모든 존재를 ‘모시라(侍)’는 말로 압축하고 있는 동학의 가르침처럼 우리에게 일상의 모든 행위가 신성하고 거룩해지도록 주위의 모든 존재를 공경하고 돌볼 것을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접은 먹고, 입고, 쓰는 일상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도 늘 기도하고, 감사하고, 되먹이라고 가르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은 다른 존재들이 자신의 귀중한 목숨을 우리에게 내어준 것이고, 우리가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위는 폭력과 저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을 불균형과 부조화로 이끌 것이다. 일상 속에서 감사와 되먹임을 통한 살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접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교화하고, 가르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도, 풍류가 바람과 물의 영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영적으로 평등하며, 다 존재이유와 이 세상에 나서 할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남을 교화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조상들과 제3세계의 원주민들은 말한다. 만남은 언제나 평등해야 하며, 오직 그때에만 평화가 있다고.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동학에서 그들의 최소조직의 명칭에 접이란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이때의 접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고 서로를 영접(迎接)하고 대접(待接)하고 접촉(接觸)하는 모든 행위가 신성한 행위임을 가리키기 위해 선택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접은 단순한 물리적 만남, 또는 관념적 만남이 아니라 영적인 만남, 즉 영혼과 영혼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관계의 정화(精華)’, 또는 ‘관계의 성화(聖化)’라 할 수 있으니, 접은 일상적 삶 속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나선형 춤을 통해 모든 존재를 그 중심에 이르게 하고, 신을 만나게 하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샤마니즘에서 접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현재’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데, 오직 그때에만 일상의 행위들 속에서 신성함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접화의 또 한 부분인 ‘화(化)’는 교화(敎化), 감화(感化), 변화(變化), 그리고 화육(化育) 등의 예에서 보듯이 변화와 성장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영적인 만남을 뜻하는 ‘접’과 변화, 성장을 가리키는 ‘화’를 합친 접화는 일상의 삶 속에서 신성함을 찾는 동안 사람들이 영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접의 개념과 동학에 나타난 민중적 지혜를 바탕으로 접화군생의 생략된 부분을 보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안으로는 영의 작용이 있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일상의 삶 속에서 신성함을 찾는 동안 영적으로 변화하며, 뭇 생명들이 살아간다.
內有神靈, 外有接化. 羣生.

  여기서 일상의 신성한 행위라는 것은 나의 행위가 악이 되지 않고 거룩하게 되는 행위로,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늘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의 신성한 행위는 주위의 모든 존재들과의 균형과 조화로운 관계를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꽃 한송이가 피려면 해도 비춰야 하고, 비도 내려야 하고, 바람도 불어야 하고, 별들도 비춰야 하고, 땅 속의 미생물들이 도와주어야 하고, 하다못해 지나가는 동물들이 아는 척이라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꽃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절로 피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온갖 부대낌과 시련과 고통과 기다림 속에서 어느 날 기적처럼 피는 것이다.
결코 자기 혼자서 꽃을 피워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자연의 형제, 친척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들의 도움 속에서 핀다는 것이다. 접화군생은 바로 그러한 관계 속에서 사람은 물론 동식물과 해와 달, 별, 산과 강,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존재를 공경하고, 그들과 균형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하나되는 가운데 영적으로 성장하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땅의 아름다운 도, 풍류는 이와같이 우리의 일상의 모든 행위 - 움직이고, 행동하고, 만나고, 관계맺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사냥하고, 일하는 모든 행위, 숨쉬고 밥먹고 배설하고, 자고 일어나는 모든 행위가 신성한 행위가 되도록,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주위의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하나되고,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삶의 원리를 가리킨다.

9.
   이러한 풍류적 세계관에서 나의 행위는 나 개인의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행위 -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 - 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돌고 돌아 결국 내게 돌아온다. 때문에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서는 사적이고 이기적인 행위보다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존재를 위한 봉사와 헌신의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풍류적 세계관에서 볼 때 이 세상의 생명에너지는 그 자체로는 선(善)도 악(惡)도 아니다. 마치 태양이 대지 위의 모든 존재에게 고루 비치고, 비가 대지 위의 모든 존재를 고루 적시듯이 생명에너지 자체에는 호불호가 없는 것이다.
나의 행위는 결국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되는 것이다. 내가 자연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모든 존재와 더불어 하나되고 행복해지는 삶을 살아가는가, 아니면 자연의 순리를 거부하고, 물질을 탐하고 이기심을 발동하여 나만의 쾌락을 추구하는가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이 말하는 풍류는 생명의 에너지를 모든 존재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모두가 더불어 하나가 되고 행복해지도록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거스르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풍파(風波)에 시달린다’고 했으니, 이는 곧 풍류의 길에서 벗어나 자연과 불균형과 부조화에 이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또한 이 세상의 생명에너지는 잠시도 그 자리에 머무르는 법이 없다. 물이 흐르듯이 부단히 흐른다. 그래서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생명에너지는 끊임없이 변한다. 이것은 주위의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른 존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때문에 우리는 늘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변화 속에서, 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풍류의 세계관, 이러한 삶의 태도를 최치원 선생은 유불선 삼교(儒佛仙 三敎)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안에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주지와 같고, 무위로서 일을 하고 침묵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와 같으며, 모든 악행을 멀리하고 착한 일을 행함은 석가의 교화와 같다.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여기서 ‘국가에 충성한다(忠於國)’는 것은 국가체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체계가 개입하면 영적인 순수한 삶은 어렵다. 이러한 사실은 영적인 순수한 삶을 살고 있는 시베리아 소수민족이나 제3세계, 또는 북미 원주민들이 여전히 부족공동체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확인된다. 만일 그들 사회에 국가체계가 개입한다면 그들의 영적인 순수한 삶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국가가 개입하기 전의 모습인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로 고치는 것이 옳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땅의 조상들의 풍류적 삶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안에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자연의 법을 거스르지 않고 무위의 삶을 살고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침묵을 사랑하고, 악행을 멀리하고 늘 선함을 위해 힘쓴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조상들의 풍류적 삶의 태도는 놀랍게도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전통시대 북미 원주민과 일부 제3세계 원주민들의 생태적이고 영적인 삶의 태도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최치원 선생이 난랑비 서문을 쓸 당시, 비록 국가화, 계급화, 물질화의 영향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 조상들이 고대 동북아에 면면이 전승되어 내려오던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지혜를 상당부분 들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10.
   서구의 자연과학이 이 세상을 지배한 이래로 오늘날 전세계의 전통문화와 원주민문화는 물질화되고, 상품화의 길을 걷고 있다. 그 결과 조상들의 아름다운 공동체적 삶과 영적인 지혜는 망실되고, 자연은 우리의 삶의 주요한 부분이 아니라 경제적 성장을 위한 물적 기반(환경)으로 전락해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거미줄같은 관계망 속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던 이땅의 아름다운 도를 잃어버린 채 갈수록 개인주의와 자아의 섬에 갇혀 가고 있다.
   이러한 작금의 상황은 19세기 중엽 동학이 태동되던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이 잃어버렸던 풍류적 세계관 - 이 생명의 세계관, 친자연적 세계관을 바로 알고, 그것을 다시 세워, 자연을 살리고 모든 존재가 더불어 하나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생명과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보다도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풍류적 세계관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새로운 영성과 평화 운동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또한 그 진로를 놓고 고심하고 있는 국내의 생명평화 운동에 새로운 풍류적 인식론과 미학을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길을 제시하고 있으니, 바로 여기에 이땅의 풍류가 갖는 보편적이고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11.
   1990년대 이래 서구의 대체의학계에서는 기존의 인식체계, 또한 인간을 몸과 마음과 감정, 정신으로 나누어 분석해오던 인식체계로는 온전한 인간이해와 치료에 한계를 갖고 있음을 인식하고, 기존의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적 틀이 아닌, holistic view를 통해서 인간의 몸과 마음, 감정, 정신을 하나의 에너지 체계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이 전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즉 ‘몸과 마음과 영혼은 하나’이며, 몸과 마음과 영혼에 대한 개별적 접근은 각기 다른 측면에서의 부분적인 설명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인간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총체적인 이해를 통해서만 그 참된 인격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서구의학 이외의 전통의학과 제3세계의 대체의학을 모두 묶어 ‘vibrational medicine’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인류가 새로이 바람, 흐름, 결, 떨림의 인식론, 곧 바람과 물의 풍류적 인식론을 요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2018. 2. 1. 12:19 

풍류도와 선맥 그리고 차축시대
김상일(한신대교수)

  종교학자들은 우리나라 무선층의 유래를 단군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같다. 그러나 대종교의 강무학은 이는 어불성설이고 일제가 단군을 미신화하려는 말살정책에서 유래한 것이라며 반발한다. 무속행위는 고려 태조 때부터 통치자들이 통치수단으로 자행한 민심을 추스리고 무마하려는 술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무속과 복술의 시작은 차라리 중국의 복희 팔괘에서 유래하며, 단군은 홍범구주라는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을 채택했다는 것이다(강무학, 1982, 122). 강무학의 이러한 주장은 무속을 한갓 저열한 종교형태로 보려는 일제나 서양의 또 다른 세뇌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무층은 개인의 의식이나 문명의 층에서 가장 넓고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층이다. 무층을 부정하면 뿌리를 자르고 줄기만 남은 나무와 같다. 즉 무층에서 발전된 선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의 문화전통과 풍속은 무와 선의 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삼한의 끽음(喫飮), 가야의 끽라(喫儸), 고구려의 동맹, 백제의 교천(郊天)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형태로는 신시교‧신선도‧대신교가 고구려에서는 경천교‧선인도‧동맹제로, 신라에서는 경천교‧풍류도‧화랑도로, 백제에서는 왕신교‧풍월도로, 발해에서는 천신도‧진종대도로, 요금에서는 천신교로, 고려에서는 왕검교‧팔관회‧연등제로, 조선에서는 대종교‧단군교가 있었다(이강오, 1995, 395). 동학은 바로 우리 민족의 기나긴 전통을 물려받아 등장한다. 그리고 구한말 우리나라에 소개된 서교 또는 기독교는 비로소 자기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고, 그리고 한국 기독교인들은 전혀 낯선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랜 동안 잊혀진 ‘하날님’을 다시 만난 듯했다. 무층의 몇 가지 특징은 성과 속의 종합, 신인융합, 화복의 조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층의 특징은 차축시대의 등장과 함께 억압받는다. 그러나 이 무층은 가장 원형적인 것으로 억압받을 수 없으며 억압은 곧 정신병리현상을 초래한다. 무적인 행위는 존재의 근원인 혼돈, 즉 카오스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합리적 자아에 의해 분열과 소외를 느끼면 느낄수록 ‘원형(arche-pattern)’으로서의 무적 자아는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무층에 대한 억압은 무모한 짓이다. 우리나라에 차축시대의 유산인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 무층은 억압받기 시작했다. 그것도 수천년 동안을 그러나 구한말 수운은 무층을 다시 복원시켜 냈으며 그 힘은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풍류도는 문명사의 한 단계는 선맥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선맥의 종주국은 동이족이 살던 지역이라는 것은 중국 선의 특징과 문헌을 통해 분명해진다. 우선 선진시대 이전(기원전 3세기 이전)의 중국 신선사상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신선사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앞에서 말한《사기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제의 위왕(기원전 356~ 320년)과 선왕(기원전 319~301년), 연의 소왕(기원전 311~279년) 시대에 신선사상이 유포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 왕들은 사람들을 시켜 바다에 들어가 삼신산을 찾게 했는데 삼신산은 발해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선인들이 살고 있으며 불사약이 있고 그곳의 만물과 금수는 모두 희고 황금 궁궐 속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세상의 군주가 동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사기》봉선서 제6). 이에 대하여 도광순은 중국문헌에서 ‘바다 한가운데’라고 할 때는 우리나라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사기의 기록은 동이지국을 두고 “군자가 죽지 않는다”는 말과도 일치하며, 나중에 진시황제가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한반도와 제주도까지 사람들을 보낸 경우를 보아도《사기에서 말하는 신선국은 동이족이 살던 한반도와 발해지역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와 연이 동이족의 은왕조와 가까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이외에《사기의 직접적인 표현인 선의 연원이 동이족에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도광순, 1992, 25~26). 한편 제나라는 공맹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다. 그렇다면 동북 아시아 일대에서 차축시대의 맥락이 무와 선층과 이어지면서 등장하는 것을 반영한다. 이는 마치 올림포스 신전이 있는 아테네에서 차축시대의 철학이 등장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무‧선층과 차축시대의 연속성 및 비연속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중국‧인도‧그리스의 세 곳에서 차축시대가 등장했다는 야스퍼스의 주장과 차축시대와 함께 인류보편적 가치인 이성이 등장했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차축시대가 등장하지 않은 문명권을 야만시하고 열등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야스퍼스의 이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차축시대가 등장하지 않았는가?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가 바로 신선사상이다. 최치원이 중국에서 목격한 것은 차축시대가 1천 년쯤 지난 다음에 나타난 그 폐단이었다. 그리고 차축시대의 유불도의 폐단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 종합에 있으며 풍류도가 그것을 종합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선층은 무층에서 자연스럽게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무에서 선으로 넘어올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으로 보아 우리나라는 선이 나타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임에 틀림없다. 철학이 그리스 아테네라면 선맥의 기원은 우리나라가 아닌가 한다. 아예 무와 선을 철학에서 도외시하고 무시해 버리려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선의 강조가 그들에게 수치스런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유가가 선가의 책을 불태운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이와는 다르며 선층의 역할과 구실에 따라서 그 이후에 나타나는 철학사상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에 선층의 몫에 높은 비중을 두게 된다. 선층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적 균열’에 대하여 ‘한국적 화합’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한국의 선맥은 차라리 중국의 문헌을 통해 그리고 중국 선맥의 연원을 통해 분명하게 밝혀진다. 이러한 귀중한 선맥을 우리 자신이 지금 혐오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혐오이다. 선층은 도교와 그 형태가 유사하여 중국에서 유입된 도교와 많은 혼동을 빚는다. 그래서 선맥이 중국에서 유래한 것은 아닌지 우리의 고유성에 대하여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맥만은 그 지적소유권을 우리나라로 돌릴 수밖에 없는 확실한 전거들이 있다. 그 전거들이란 우리 쪽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의 것들이다. 즉《사기》와《포박자》 등에 의하면 “옛날에 황제가 있었는데 청구(한국)에 이르러서 풍산(백두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문을 받았는데 이로써 여러 신선들을 불러들이게 되었다”(《포박자》〈지진〉, 권 18). 선맥이 한국에서 유래했음에 대하여 김범부는 “신선의 선도는 조선에서 발생했다. 그것이 중국으로 옮겨간 것이지 중국 고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국 고대문헌에는 신선설이 없다. 12경과《노자》에도 없다. 시기적으로 춘추시대에도 없었고,《장자》에서 비로소 선인, 신인설이 있다. 전국시대에 해당한다”(《동방사상논총》, 이종익 편저, 제12장, 70)(유병덕, 1985, 36). 우리 쪽 문헌으로는 그런 점에서《삼국유사》의 단군신화만큼 선맥의 실체를 뚜렷하게 그려낸 것도 없다. 차축시대가 철학에 치중한 나머지 선맥은 백안시되어 왔다. 스타워즈라는 미국산 영화에서 ‘요다(Zedai)’라는 주인공이 신선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새 천 년은 동북 아시아 일대의 신선사상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젠 차축시대의 철학으로는 너무 합리적이고 원시적 샤머니즘은 너무 비합리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양자가 모두 대안적 사상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 조화로운 위치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선층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운에게서 선층의 실체를 찾아나서게 된다. 그 이전에 한국 선맥의 줄기를 찾아보는 것은 수운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마나이즘은 북위 40도 전후에서 발생한 것을 보면 기후적으로 춥고 더운 곳에서는 선풍이 일어나기 어렵다. 선층의 중요성은 바로 유불도의 붕아를 잉태하고 있는 층이 선층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차축시대에 접어들어 삼중주의 균열이 생겨 결국 갈라지는 현상이 생기고 분가한 이후부터는 서로 반목질시하는 현상마저 나타났던 것이다. 고운이 말하는 풍류도가 선맥에 해당한다. 그러나 풍류도는 아직 철학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양뇌가 분할되기 이전의 의식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철학이란 분할뇌의 소산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긍정과 부정의 양가적 평가를 모두 하는 것이 바른 판단이다. 선층은 아직 문자화하기 이전의 설화들로 가득 차 있으며 기록된 자료 역시 호머의《일리어드같이 신비와 신화적인 이야기들로 되어 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의 동화의 세계와 같다. 문명의 유년기에 나온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동화를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되듯이 이런 유년기의 문화유산을 비과학적이라 치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가운데 어리석은 일이다. 아동문학은 그 자체로서 문학적인 가치가 있듯이 선층의 유산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호머의《일리어드를 통해 트로이 전쟁의 전모를 거의 복원할 수 있듯이 분할뇌 이전의 자료로서도 얼마든지 이면적 역사를 찾을 수 있다. 서양문학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호머의 작품에 통하듯이 말이다. 우리나라 선맥에 관해서는 남겨진 도가 사서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아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사서류들이 유가들에게 소멸되고 말았다.
선맥의 수난
중국에서는 유불도가 번갈아 가며 왕조를 지배했다. 한의 유가, 위진의 도가, 수당의 불가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와 고려에는 불가, 조선에는 유가가 지배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면 도가가 마치 빠져 있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아직 학계에서 고조선을 확실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다. 고조선이야말로 도가사상과 일맥상통하는 선맥의 광맥과도 같은 시대이며, 그 기간도 가장 길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도가에 관한 사서류는 모두 고조선에 관한 기록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유불도 삼교의 정립이라는 관점에서 삼교보다 오래된 선맥의 사서는 제거되었다. ‘차축시대 콤플렉스(axial age complex)’ 때문이다.《규원사화나《환단고기》같은 사서류들이 모두 선가의 문헌에 속한다. 유교가 지배이념으로 좌우되던 시기에 중국보다 오래 된 역사와 공자를 훼손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여간 모험이 아니며 그것을 보관하다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가 사서류들은 신비적인 것과 신화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현대 실증주의 사학자들과 과학주의 사상들은 이를 모두 위서로 취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말해 육안으로 영안을 오해하는 범주오류를 사가들이 범하고 있다. 그러나 호머의《일리어드를 통해 트로이 전쟁의 역사를 거의 완벽하게 복원해 낼 수 있듯이 이들 선가 사서들을 통해 우리는 숨겨진 역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말에 말귀가 있듯이 글에도 글귀가 있다. 선가 사서류 속에 있는 글귀를 찾아낼 생각은 하지 않고 한 칼에 이들 글들을 매도하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이다.
전해지는 도가 사서류로는《해동전도록》,《해동이적》,《청학집》을 들 수 있다. 그리고《규원사화》,《환단고기 같은 사서류들을 모두 이들과 같은 부류에 넣어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이들 사서류들이 빛을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위협감을 느낀 유학자들은 이들 사서류들의 줄기를 잘라서 자기의 역사 상한선 밑에 두려고 했고, 불교학자들은 자기들 교리에 맞게 각색하려고 했다. 그리고 서교 또는 기독교는 아예 뿌리째 뽑아 버리려고 한다. 기독교가 단군을 부정하려는 근본의도 역시 여기에 있다. 이들 차축시대 유산들이 선맥을 제거시킬 때에 그것은 자기들이 설 자리마저 부정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수운이 이 선맥을 다시 찾았다. 도가 사서류는 한민족의 자존심이며 이를 부정해 버리면 우리가 우리라고 언급할 수 있는 자기언급을 근본적으로 할 수 없게 되어 민족정신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왜 이런 자기 자학적인 행위를 우리 학계는 구태여 의도적으로 하려는지 그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청학집을 보면 우리 선맥의 조종은 ‘환인진인’이다. “환인진인이 동방선파의 조종이고, 환웅천황은 환인의 아들이다”(조여적, 1998, 16). 이렇게《청학집의 저자 조여적은 변지가 지은《기수사문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그 전거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환인의 선맥은 환웅으로, 환웅의 선맥은 단군으로 이어진다. 단군의 선맥은 신라의 사선(四仙)인 영랑‧보덕‧옥보고‧이순보에게 이어진다. 사선의 선맥은 다시 물계자‧원효‧도선을 거쳐 대세 구칠, 그리고 드디어 최치원에게 이른다.《청학집은 환인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으나 중국의 광성자와 환인을 비견하면서 중국의 선맥에 대하여 우리에게도 고유한 선맥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환인진인은 가히 모든 선맥의 조종이 될 수 있다고까지 했다.
《해동이적에서는 단군을 복희에 비견하면서, 단군은 왕위에 있으면서도 선인이 되었다고 한국 선맥의 독특성을 아울러 지적했다. 즉 중국의 광성자는 아무런 지위도 없이 신선이 되었지만, 단군은 왕이면서 동시에 신선이 되었으니 중국 선은 초탈적인 데 반하여 한국의 선은 현실을 떠나지 않는 선임을 강조했다. 차축시대에 들어와 중국에서 유가는 현실에 집착하고 도가는 현실을 일탈해 버린다. 노자가 관직을 버리고 산해관을 통해 숨어 버린다는 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환인‧환웅‧단군은 모두 왕위에 있으면서 선에 의한 통치를 했으며 홍익인간‧재세이화는 모두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선인들은 결코 체제 밖의 인물들이 아니었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체제를 긍정하는 선층 때문에 그 속에 유가도 도가도 포함시킬 수 있었다. 한국 선의 이러한 메타적 성격 때문에 그 위대성이 한결 더하게 된다. 이러한 초월과 현실이 조화된 한국 선맥은 고운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그는 관리로서 또한 선인이 된다. 신라의 화랑, 그리고 드디어는 수운에게 이르러서도 이러한 실천과 현실을 겸전한 선맥은 그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영성이 생겨난다. 노자나 광성자같이 현실을 초탈하여 선인이 되기는 쉽다. 그러나 현실적 직위나 가정과 사회 속에 살면서 선인이 되기란 어렵다. 한국 선의 특징이 바로 이런 데 있었다. 수운의 깨달음은 일상성 속에서 일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즉 대인은 소인과 같이 땅으로 되돌아온다.
중국의 경우 포박자는《신선전에서 광성자가 선의 조종이며 황제에게 글을 가르쳤고 그가 도교의 시원적 인물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에는 중국과는 또 다른 선맥이 있었으며 그 특징마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해동이적에서는 중국과 다른 고유한 선맥이 있었고 그 조종은 환인이며 최치원에게까지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청학집은 단군시대부터 선맥이 연원하여 최치원에게까지 이른다고 했다. 그리고《해동이적은 중국의 도교가 전수될 무렵은 최치원이 생존할 무렵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세 문헌이 모두 최치원을 한국의 선맥과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중국에도 선맥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도 고유한 선맥이 있었는데 양자를 접합시킨 인물이 바로 최치원이라고 모두 주장했다(김낙필, 1989, 149). 특히《해동이적에서 광성자와 단군을 비교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는 곧 우리나라 차축시대의 특징을 나타낸 것이다. 즉 중국적 균열에 의해 이론과 실천, 초월과 현실이 유리되는 현상이 중국에서 있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단군은 왕위를 버리고 선인이 되기 위해 산으로 숨지는 않았다. 오히려 왕으로서의 통치가 다 끝나고 수를 다하고 나서야 산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중국의 도가가 현실을 외면하고,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가 현실을 도피하고, 붓다가 왕궁을 버리고 산으로 숨어 버리는 행위는 모두 후대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상이 초현실적으로 되는 데 큰 원인으로 작용하는 병폐이기도 하다.
단군이 세상을 이치로 다스린다는 ‘재세이화’ 사상과 널리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늘 이 세상을 탐했다는 ‘탐구인세’ 사상은 현실과 초현실이 균열되지 않은 한국 선맥의 전통이다. 만약에 도가와 도교사상에 치중하여 현실도피적 또는 유가처럼 현실집착적일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고구려가 도교 때문에 망했다고 할 때, 그리고 조선조가 유교 때문에 망했다고 할 때에 우리는 현실도피와 집착이 모두 병적이며 결국 우리나라 역사는 고유한 한국의 선맥으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수운은 구한말에 이런 선맥의 전통을 부활시켜 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보국안민과 그의 수심정기하는 사상은 바로 현실과 이상이 구별되지 않는 한국 선맥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치원은 이렇게 중국에 ‘건너감’과 ‘돌아옴’을 통해 선맥의 창조적 변혁을 창출해 낼 수 있었다. 수운은 고운의 이러한 선맥의 전수자이다.
구동학과 신동학:〈난랑비서〉
최치원이 지었다는〈난랑비서는 한국사상의 자기 정체성을 말해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리고 한국 선맥의 사상적 특징과 논리구조를 이만큼 선명하고 간결하게 보여주는 자료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난랑’은 어떤 개인 ‘화랑’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안창범에 따르면, 난랑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비명에 한 나라의 사상이나 성격을 담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랑’은 특정 인물이 아닌 화랑도와 신선도를 동시에 표현하기 위한 보통명사이다(안창범, 1988, 224). 한편으로 안창범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여기에 그 난랑비 본문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일컬어 풍류(風流)라. 삼교의 근원이 선사(仙史)에 상비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고 군생을 접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들어가면 집안에 효(孝)하고 밖에 나오면 나라에 충(忠)했으니 이는 노사구(魯司寇)의 종지요, 무위(無爲)한 일에 처하여 불언(不言)의 교(敎)를 행했으니 이는 주계사(周桂史)의 종(宗)이요, 제악(諸惡)을 짓지 않고, 제선(諸善)을 봉행했으니 이는 축건태자(太子)의 화(化)라. 곧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의 진리를 포함한 현묘한 풍류도(風流道)이다.

이 글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유(儒)‧불(佛)‧도(道)가 있기 전에 우리 고유의 ‘풍류도(風流道)’라는 현묘한 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풍류도란 도대체 무엇인가? 유동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란 나라에 본래 현묘한 도가 있었다는 것이요, 이것이 삼교의 진리내용을 포함한다는 뜻도 된다. 그러면 그 현묘한 풍류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샤머니즘, 특히 한국적인 샤머니즘이었다”(유동식, 1969, 24~25). 유동식은 현묘지도 또는 풍류도를 샤머니즘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유동식의 주장은 전형적으로 무층과 선층을 구별하지 않는 데서 생긴 자연스런 결과이다. 그리고 유동식의 논리는 샤머니즘이란 풍류도의 그릇에 외래적인 유불도를 담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유불도는 우리의 고유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논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자세히 논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다만 문명사적 맥락에서 풍류도의 자리매김만을 해두려고 한다.
최치원이 말한 삼교, 즉 유교‧불교‧도교는 분명히 차축시대의 산물이다. 만약 풍류도를 샤머니즘이라 한다면, 이 샤머니즘은 원시시대의 산물이다. 풍류도에는 샤머니즘에는 없는 요소들이 분명히 있다. 즉 풍류도에는 원시시대라기보다는 오히려 차축시대의 요소들이 많이 발견된다. 왜냐하면 풍류도가 무층과 철층인 차축시대의 가운데, 즉 선층에 속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풍류도가 유교‧불교‧도교를 종합해서 이루어졌다고 하거나, 풍류도가 이 삼교를 종합했다고도 하지 않고, 풍류도 가운데 유교‧불교‧도교가 다 ‘포함(包含)’되어 있다고 했다. 풍류도는 삼교를 종합한 그 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메타 또는 품격(品格)이라고 한다. 그리고 삼교는 대상격 또는 대격(對格)의 종교들이라는 것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가서 삼교의 진리를 배운 몸이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신라로 되돌아와서 풍류도에 정신적‧학문적인 만족을 느꼈던 것이다.
류승국은 풍류도를 ‘고신도(古神道)’로 보았다. 유교의 효(孝) 개념은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고대신앙 속에 있었다고 보았다(류승국, 1983, 80). 공자는 자신이 말했듯이 요‧순의 사상을 승계‧발전시켜 서술한 정도였다. 한자(漢子)를 창제했다는 복희가 신석기시대의 인물이고 보면, 차축시대 이론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차축시대 이전에 동북 아시아에서는 이미 서양에서 말하는 차축시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동양에서는 차축시대의 상한선을 훨씬 위로 기원전 4000~2000년으로 잡는 것이 옳다. 이 때를 제1기 차축시대로 보아야 한다. 요‧순 시대와 복희시대가 모두 이 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동이계가 완전히 문화권을 형성할 때로서, 이 차축시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동이계였다. 이런 역동적 이해 없이 동북아 문명이해는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용커가 차축시대의 문화원으로 중국의 ‘중앙부(central China)’로 잡은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견해이다. 제1기 차축시대는 중국의 동북 아시아 동이계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요령성에서 새로 발굴된 홍산문화는 황허강 유역의 용산문화를 1천 년이나 앞서고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제1기 차축시대의 주인공은 동이계가, 제2기 차축시대는 화하계가 주도했다. 이런 이해가 ‘역동적(dynamic)’ 이해라는 것이다. 플라톤과는 달리 공자는 전시대를 서술했다고 했다.
그리스 호머적 존재구조는 무층과 철층으로 넘어오는 과도적 과정에서 생겨난 층이다. 풍류도 역시 호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풍류도가 신라의 화랑도에 이르러서는 좌‧우뇌의 특징을 균형잡는 특징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즉 초인격적인 특징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높은 자기초월과 극복의 도덕적 가치관과, 또한 인간의 본능적 감정과 이성을 조화시키는 오락적 기능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서로 도의로써 연마한다(相磨以道義)”와 “남녀가 모여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즐긴다(男女相悅)”이다. 이러한 균형은 초인격심리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므로, 만약에 이 균형이 깨어져 버리면 풍류도는 제 맛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러면 ‘화랑’이 도의만 중요시하는 ‘선비’나 오락만 중요시하는 ‘화랭이’로 변질되어 버린다. 화랑이 삼국을 통일시킨 이후 화랭이가 되듯이 말이다. 이와 동시에 ‘풍류도’ 역시 풍류객의 전유물이 되었다. 초인격이 전인격으로 추락한다. 이렇게 변질될 때마다 나라는 국란에 처하고 국민정신은 누란의 위기에 직면한다(황준연, 1999, 32~33). 그리스에서는 이미 차축시대에 들어와, 그리고 중국과 인도에서도 같은 시기에 도덕과 오락의 균형은 깨지고 말며 이러한 균열된 사상이 유교와 불교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풍류도의 두 특징을 파괴시키고 만다. 풍류도의 삼교포함 정신을 균열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신채호는 낭가나 풍류도의 전통은 항상 북벌을 주장한 반면, 유교는 항상 중국 존화주의에 사로잡혀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신채호, 1983 참고). 소아마비 증상에 걸린 것이다.
최치원의〈난랑비서비록 짧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역사적 의미는 자못 크다. 유‧불‧선 삼교를 그 안에 ‘포함(包含)’하고 있을 만큼 큰 생각이 바로 풍류도요, 현묘지도이다. 이러한 풍류도는 화랑도와 같은 현상으로 나타났다. 화랑도의 세속오계는 유교와 불교의 도덕률을 종합시킨 현묘지도의 극치였다. 화랑도는 외래성과 고유성을 조화시킨 절묘한 것이었다(류승국, 1988, 94). 서양역사 속에서는 원시시대에 있었던 샤머니즘적인 신화‧주술‧토템 같은 요소들이 차축시대에 들어오면서 이성에 의해 합리적인 것으로 와해되어 버리고 마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양쪽이 다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풍류도는 민족 고유의 것으로 구체적 현실 속에서 잠재해 왔음을 시사해 준다. 유동식은 이러한 풍류도의 묘를 ‘한’이라고 보았며, 화랑도‧금척(金尺)‧화백(和白)‧금탑(金塔) 같은 것을 이 한의 짓으로 보았다. 삼교를 포함하는 묘, 즉 한의 솜씨 및 짓은 그 비시원적인 성격에서 나온다(유동식, 1997, 169).
서양은 고대로부터 사고의 ‘시원적(orientable)’인 성격 때문에 고질적인 이원론(dualism)의 함정 속에 빠져왔다. 내면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구별시켜 둠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원시시대는 무의식의 역사, 차축시대는 의식의 역사로 보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상승과정으로 문화를 구별지으려 했다. 야스퍼스의 역사구분, 토인비의 역사분류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어딘가에 시원점을 두고 거기서 부차적인 것이 점차로 발전되어 나온다고 보는 사고방식을 ‘시원적’이라 정의할 때, 서양의 역사관, 철학적 사고예술 등의 모든 것이 시원적인 것으로 물들어 있다.
이 점에서는 중국이나 인도의 것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예외는 아니다. 정도의 차이란 인도나 중국의 불교를 고찰해 보면 여실히 나타난다. 인도의 용수는 어느 정도 불교에 ‘무’의 개념을 도입하여 비시원적인 불교를 만들려고 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고, 이것이 중국으로 들어와서는 더욱더 시원적인 것으로 심화되었을 뿐이다. 이런 불교는 한국으로 들어와 비시원적인 불교, 즉 통불교(Buddhism of total interpenetration)를 통해 완성될 수 있었다. 고구려 승랑, 신라 원측‧원효‧의상에 의해 통불교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특징은 최치원이 지적한 현묘한 풍류도라는 우리 고유의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형 논리가 고유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의 차축시대 이론은 인간의식의 진화를 시원적으로 본 데서 내려진 결론이다. 최치원의〈난랑비서 이러한 차축시대 이론을 뒤집는, 그리고 동북 아시아의 역사 재평가라는 과제를 제시하는 자료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존 캅의 이론은 야스퍼스의 것보다는 훨씬 더 비시원적인 방법론에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accumulation)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기독교적 존재(Christian existence)’란 바로 원시시대의 존재(primitive existence)와 차축시대의 존재(axial existence)를 축적한 것으로 보았다. 즉 기독교는 신화, 주술(병 고치는)의 원시적 존재의 성격과, 차축시대의 가치인 사랑이나 정의 같은 규범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최치원이 풍류도와 삼교를 갈등 없이 본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캅의 축적이론은 A. N.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의 이론을 도입한 결과이다. 과정철학은 서양 전통철학의 이원론적 성격을 배격하고, 의식과 무의식을 하나의 ‘사실존재(actual entity)’로 묶어서 생각한다. 캅은 기독교를 이러한 사실존재적인 성격으로 보아 원시적인, 그리고 차축시대의 통전자로 보았다. 이와 같은 캅의 과정철학적 방법론은 최치원의 글을 이해하는 데 야스퍼스의 이론에서 느끼는 거부감보다는 적게 만든다.
고운의 ‘건너감’과 ‘돌아옴’
캅은 종교끼리 대화할 때에 상대편을 자기 편으로 유인하려는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러한 대화법은 넘어서야 한다면서 그는 ‘대화를 넘어서(beyond dialogue)’를 역설했다. 그러면서 그는 ‘건너가기(passing over)’와 ‘돌아오기(coming back)’의 방법을 통해서 대화를 넘어서는 대화할를 수 있다고 했다. 건너가기와 돌아오기의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에 ‘창조적 변혁(creative transformation)’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바로 이러한 창조적 변혁을 성취시킨 대표적 인물로서 9세기 고운 최치원을 꼽을 수 있다.
고운은 12세 때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갔다가 28세 때 다시 신라로 되돌아왔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유불도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 나라에 건너가 풍류도를 하느니만 못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신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 때에 그는 중국에서 과거에도 합격하여 높은 관리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상적 만족을 중국에서 채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느 한 사상에서 상대편 사상으로 건너간 다음에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캅은 쇼페하우어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든다. 그는 불교로 건나간 다음 돌아오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동양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로 건너간 다음 동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창조적 변혁의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교토학파 사람들은 창조적 변혁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과정신학을 배워 와서 이를 불교와 접목시켜 그들 스스로 ‘크리스찬 부디스트(Christian Buddhists)’로 자처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 클레어몬트 학파 사람들은 동양의 불교를 배워 와 이를 과정신학과 접목시켜 ‘부디스트 크리스찬(Buddhist Christians)으로 자처한다. 이러한 건너감과 돌아옴의 과정 속에서 ‘아미타 그리스도(Amida Christ)’가 옥동자같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토불교의 서방정토 사상과 재림예수 사상과 결합되어 ‘미륵 예수(Maitreya Jesus)’가 태어난다(캅, 1980, 123).
고운이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중국의 유불도 삼교를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서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중국적 균열(Chinese dissociation)’ 바로 그것이다. 중국에서 유불도가 개별적 독립체계로서는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한 것은 인정했다. 그러나 유불도 삼교가 서로 분열되어 있는 그들의 배타적인 태도에 실망했으며 그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상체계가 결여되어 있는 중국사상에 싫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내 나라로 돌아가 풍류도를 하느니만 못하다”는 말을 남긴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풍류도가 설령 원시적 형태에서 탈바꿈하지는 못했지만 유불도 속에 내포되어 있는 위대성을 그는 높이 평가했으며 이는 곧 ‘한국적 화합’이라는 원형으로 삼교 사이에 균열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풍류도란 바로 선층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무에서 갓 넘어와 무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으며 아직 합리적 자아가 나타나지 않은 층이 선층이다. 선층이 파열되면서 유럽‧인도‧중국 등지에서 삼중주 균열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차축시대에 접어들어 동북 아시아 동이지역에서는 이런 균열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춘추전국시대를 맞으면서 중국에는 화하계를 중심으로 하여 균열이 생기면서 선층이 파괴된다. ‘포삼교(包三敎)’에서 ‘포(包)’는 집합적 개념이다. 요원에 대한 부류적 개념이다. 풍류도가 삼교의 요소를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은 부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삼교가 대상적이라면 풍류도는 메타적이다. 중국이나 인도, 유럽에서 이런 메타적 성격의 무와 선층을 파괴시켰다는 것은 후대 사상에 심각한 이원론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풍류도의 메타적 성격에 대한 논란을 소개해 둘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에서 ‘포삼교(包三敎)’를 두고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유불도 삼교가 포함되어 풍류도가 만들어진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면 결국 풍류도는 우리의 고유한 사상이 아니라 외래 삼교가 들어와서 껍데기같이 만들어진 것이 된다. 이에 대하여 안창범은 사전적 의미로 ‘포함(包涵)’과 ‘포함(包含)’을 구별한다. 즉 ‘포함(包涵)’은 “밖으로부터 널리 모두어 싼다”로서 포섭이나 포용의 의미가 있고, 반대로 ‘포함(包含)’은 “이미 그 속에 들어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논리적인 표현을 빌리면 전자는 A형적이고 후자는 E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난랑비서‘실내포함삼교(實乃包含三敎)’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삼교의 사상을 이미 자체 내에 지니고 있다”로 번역해야 한다(안창범, 1988, 240). 중요한 지적이다. 그래서 포삼교는 고유한 풍류도가 있어서 그것이 부류격의 메타가 되어 요원격 대상인 삼교를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삼교가 외부에서 이입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풍류도와 삼교는 이와 같이 ‘포함(包含)’관계에 있다.
아무튼 고운은 중국으로 건너가서야 풍류도의 메타적 성격을 재발견했다. 그런데 메타와 대상은 위계적인 관계에서는 안 되며 상호 되먹임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바로 고운의 건너감과 돌아옴을 통하여 대상과 메타의 되먹임 현상이 일어났으며 여기서 창조적 변혁이 가능해진다. 대상은 부분적이고 메타는 항상 전체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메타는 대상과 되먹임을 하기 때문에 대상의 내용에 따라서 메타 역시 그 성격이 커지고 풍부해질 수 있다. 고운은 풍류도 안에 있는 원시적 유불도의 붕아들을 살려 중국에서 차축시대 들어와 독자적으로 발달되고 심화된 유불도들로서 다시 채웠던 것이다. 메타와 대상의 되먹임은 바로 카오스 현상이며, 이는 거울이 반사하고 반사되는 것과도 같다. 이제 1천 년이 지나 고운의 27세 손인 수운은 다시 심화된 유불도와 새로 들어온 서학까지 수용하여 품격으로서의 풍류도로 다시 되먹임시켰던 것이다. 여기에는 고운이 아직 몰랐던 신유학이라는 삼교를 포함(包涵)시킨 요소를 첨가시켰다. 신유학의 삼교는 ‘포함(包含)’이 아니라 ‘포함(包涵)’이다. 수운에게는 풍류도라는 되먹임된 변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한국사상은 삼교가 개별화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묶여졌다.
우리나라에서 선층은 유불도를 ‘분광(spectrum)’시키는 역할을 한다. 고운에 의하면 유불도는 풍류도에서 분광된 ‘잔상(殘像)’과도 같다. 한국사상사는 풍류도에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분섭의 과정과도 같다. 흩어지면 거기서 유불도가 개별적으로 분광되어 나오고 다시 모이면 그것이 풍류도가 된다. 풍류도는 말 그대로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실체가 있으면 개별적인 다른 개체들을 완전히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체가 있으면 포함(包含)할 수 없다. 제 자신의 성격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을 자기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제 자신이 타자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처럼 낳고도 소유하지 않는다(生而不有). ‘수운’이란 이름 그대로 물과 구름같이 자기 실체성이 없는 변하는 과정 자체, 즉 ‘하’의 작용만 있다. 외로운 구름 ‘고운’과고 같다. 만사를 포함하지만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에 각자를 각각 그 나름대로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삼태극 안의 ‘태극’이 그러하듯이 신라‧고려에서는 불교가, 조선에서는 유교가 개별적인 잔상으로 살쪘다. 그러나 동학에 이르러 이들 잔상들은 다시 모여 한국의 선층은 더욱 풍만하게 되었다. 마치 피가 심장에 모였다 흩어지는 과정에서 생명이 유지되듯이 풍류도의 분섭작용에 의해 한국의 얼은 살아 맥박칠 수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운은 당나라로 건너가 차축시대에 분화된 삼교를 모두 수용하여 돌아왔으며 이를 다시 풍류도로 살찌워 하나되게 했다. 그러나 고려는 불교를, 조선은 유교를 따로 개별적으로 심화시켰던 것이다. 개별적으로 심화시키는 과정에서도 한국에서 불교는 무선과 병행했으며 유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과정이 결여된 서양에서는 19세기에 이르러 균열양상이 심화되어 20세기의 비극이 되었으며 다음 세기까지 그 여파는 계속될 전망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19세기에 동학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운은 개별화된 삼교와 기독교까지 포함하여 되먹임의 되먹임을 다시 한 것이다. 이러한 동학의 등장은 실로 인류의 희망이라 할 수 있으며 새 천 년의 대안적 사상이라 하겠다. 신서학까지 포함시켜 버리면 헌팅톤의 문명충돌론이 동학 앞에 무색해질 것이다.

고운의 ‘동인’의식과 수운의 ‘동학’
수운의 ‘동학’은 단순히 ‘서학’에 대립하는 배타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고운의 ‘동인’의식을 이해하고 나면 이러한 오해가 풀릴 것이다. 고운은 중국에 유학해 있는 16년 동안 민족주체의식을 느끼고 신라로 돌아왔으며, 그의 글에는 유난히 ‘동(東)’이라는 말이 많이 나타난다. 하동 쌍계사에 있는 고운의 친필인〈진감선사 대공탑비문에 보면 ‘동인지자 동방성인, 동봉, 동국’이란 말이 나온다. 특히 이 쌍계사 비문에서 고운은 “일찍이 서토(중국)에서 놀던 이가 와서는 모두 보고 깜짝 놀란다”라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마치 서양에 이민을 가 살던 사람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한국문화의 우수함과 위대함을 보고 새삼 놀랐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에 배울 것이 있어 건너갔지만 ‘중국적 균열’현상에 실망하고 되돌아온 고운으로서 자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하는 순간의 글이다. 봉암사 비문에서는 놀라움에 대한 더 구체적인 표현이 있다. “아름다운 동쪽 나라의 유순한 성격으로 하여 …… 하물며 동방 제후의 나라로 우리와 같이 큰 것이 없고, 인걸 지령은 생명을 사랑하므로 근본으로 삼고, 풍속은 서로 사양하므로 그것으로 먼저 하니, 밝고나 태평의 봄기운이 은은하구나.” 고운의 이 말 속에는 풍류도의 포삼교 정신이 다 포함되어 있으며 결국〈난랑비서에서 말하는 ‘풍류도’야말로 동토의 자랑이라는 것이다. 즉 생명사랑은 부처의 교훈을, 사양하는 풍속은 공자의 교훈을, 그리고 자연스런 우주의 변화는 노장의 교훈을 지칭했다. 그는 끝 구절에서 ‘상고지교화(上古之敎化)’라고 함으로써 동토에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교훈임을 암시하고 있다. 삼교 ‘포함(包含)’ 정신이 분명해진다.
고운은 역사적 현실 속에 살고 있는 동인의식을 고취하는 면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동(東)’이라는 자연현상 그 자체가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백월보광지탑비문에서 고운은 “빛나고 성대하고 또 실다워서 팔방의 형질에 비치는 것은 새벽 해처럼 고른 것이 없고, 기운이 화평하고 포근하여 확실히 만물의 효력이 있는 것은 봄바람처럼 넓은 것이 없나니 오직 동풍과 뜨는 해는 모두 동쪽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했다. 어느듯 고운은 ‘동’을 우주자연의 것으로 돌린다. 그래서 그의 동인의식이란 반드시 역사현실적인 것으로, 서토의 중국에 대립하는 개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아마도 고운의 이러한 동인의식을 고려한다면 수운의 ‘동학’이라는 개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운의 ‘동’ 개념은 ‘생명’‧‘창조’‧‘평화’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동은 밝고 깨끗하며 상쾌한 곳이다.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어 창조의 여명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래서 그는 서방에 반대되는 동방이 아니라, 생명의 보금자리와 평화가 가득한 곳으로 ‘동’을 보고 있음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10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전세계 장로교 대회를 개최한 일이 있으며 그 때의 표어가 ‘생명(life)‧창조(creation)‧평화(peace)’였다. 세기말에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사상을 상징적 표어로 삼은 것이다. 고운과 수운이 말하는 ‘동’은 바로 이러한 가치관을 지닌 보편적 의미로 쓰였다.
류승국은 고운의 이러한 보편적 ‘동’ 의식을 중국의 갑골문에서 찾았다. 갑골문이나 금문에 의하면 ‘동이(東夷)’가 ‘동인(東人)’으로 적혀 있다. ‘이(夷)’와 ‘인(人)’을 동일시했다. 동이족을 특히 ‘인방족(人方族)’이라고 함으로써 ‘고방’‧‘마방’‧‘호방’ 등과 구별했다. 동작빈의《갑골문 단대 연구례에 의하면 “人方은 곧 夷方이다. 이는 곧 동이를 의미한다”라고 했다. 노간(勞幹)의〈중국문화 논집에는 글자의 변천과정을 잘 지적해 두었는데 인(人) → 시(尸) → 이(夷) → 인(仁)과 같다. 그래서 ‘동이’의 ‘이(夷)’는 사람 보편을 의미하는 것이며 드디어 유교의 근본인 ‘인(仁)’ 사상마저 동이에서 유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류승국, 1983, 73). 특히 고운이 봉암사 비문에서 ‘아름다운 동이의 유순한 성격(旭夷柔順性源)’이라고 할 때에 이는 도가사상의 ‘유박(揉撲)’사상을 이르는 말이다(류승국, 1983, 965).
《산해경》〈대황동경〉제14에서는 “청구국(한국)의 사람들은 유순하고 질박하다”고 했다. 노자《도덕경에서 ‘박(樸)’은 도의 중심되는 개념이며 도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무욕‧무지‧무위의 도는 질박한 나무와 같다. 박을 알면 모든 일이 안정되고 질서가 잡힌다고 했다. 만물의 뿌리가 되는 것이 바로 ‘박’이다. 이러한 도가의 중심사상을 들어《산해경은 동이족을 두고 ‘유박’하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운이 “동이족이여 유순하다”고 할 때에 이는《산해경에 보이는 구절과 일치한다.
이와 같이 고운이 동인의식을 가졌다고 할 때에 서방‧중국에 대한 한갓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본성의 ‘인(仁)’에 통하고 우주의 본원적 성격과 연결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고운의 동인의식에서 유래하여 수운의 ‘동학’이 나오게 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수운의 동학의식 역시 고운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강무학(1982).《단군조선의 농경문화, 서울:관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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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류도의 이해|작성자 예비선인



    홍익인간의 참뜻(염표문) 이론 도(道)


# 간단한 소개

고조선의 11대 단군이신 도해단군이 백성들에게 내려준 내려준 65자의 글


홍익인간의 원래 뜻이 마지막 16자에 잘 나타나 있다.

(일본애들이 16자 중 4자만 알려지게해 홍익인간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일신강충 : 진리가 나에게 내려와 있으니

성통광명 : 그 진리를 밝게 깨달아

제세이화 :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홍익인간 : 모든 생명을 행복하게 하라


또한 이 마지막 16자가  나의 인생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출처] 홍익인간의 참뜻(염표문)|작성자 예비선인

 

  *** 전재자 註

염표문(念標文)은 《환단고기》에 기록된 글이다. 도해 단군이 옛날부터 동양에 전해내려오는 천지인 사상에 대한 깨달음과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홍익인간이 되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일종의 시이다.  ㅡ 위키 백과


염표문| 우리들 얘기
이준우 | 조회 26 |추천 0 | 2017.09.27. 11:16 
  

  念 標 文

 

      以玄黙爲大하니 其道也 普圓이오 其事也 眞一이니라.

      以蓄藏爲大하니 其道也 效圓이오 其事也 勤一이니라.

      知能爲大하니 其道也 擇圓이오 其事也 協一이니라.

      一神降衷하사 性通光明하니 在世理化하여 弘益人間하라  

 

    (천 이현묵위대 기도야 보원 기사야 진일

     지 이축장위대 기도야 효원 기사야 근일

     인 이지능위대 기도야 택원 기사야 협일

     고 일신강충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   

 

    하늘은 현묘한 침묵으로 광대하니,

    그 도는 지극히 넓어 원융무애하며,

   그 하는 일은 참됨으로 만물이 하나 되게 함이니라. 

 

    땅은 하늘의 뜻과 기운을 모아서

    만물을 기르는 것으로 성대하니,

    그 도는 하늘의 뜻과 도를 본받아 원만하며,

    그 하는 일은 만물을 길러 하나 되게 함이니라.     

 

    사람은 천지의 지혜와 능력이 있어 위대하니,

    그 도는 천지의 업을 이루는 것으로 원만한 것이요,

    그 해야 할 일은 서로 협력하여 온 세계가 하나 되게 함이니라.   

 

    고로 삼신께서 참마음을 내려 주셔서

   사람의 본성은 본래 신의 광명에 통해 있으니

    삼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여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

 

   (* : 널리, 광대할, : 둥글, 온전할, 蓄藏 : 거두어 둠, : 속마음, 참마음)  

 

   ‘염표문 (念標之文)뜻을 전하는 글이란 뜻이며, ‘단군세기에서, 11세 단군 도해 (재위 BC 1891 ~

         BC 1835)’ 께서 돌에 새긴 글이죠. ‘염표문에는 하늘, , 사람의 창조 정신과 목적이 들어있음다.

        ’도해 단군께선 재위 원년에 소도 (國仙蘇塗)‘를 처음으로 설치하고, ’웅상 (雄常 : 제사를 모시던 나무)‘

         또한 처음으로 정하시죠. ^^

         글고 우리들이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지능이란 단어도 도해 단군으로부터 유래 ...

 

  ‘홍익인간의 유래

 

       ‘홍익인간 (弘益人間)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신 분은 배달 초대 환웅이셨던거발환 (居發桓)’ 환웅천황

      이죠. ^^ 환웅천황께선 재위 94(신시개천 원년 BC 3897 ~ 신시개천 94BC 3804)이고, 천수가 102세임다. ㅎ

 

      ‘배달의 건국이념으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삼성기 상, 단군세기, 신시, 삼한관경,

       마한세가 상 하, 소도경전본훈, 고구려, 대진국에 걸쳐 계속해서 우리 한민족의 건국이념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현 울 나라의 개천절103로 정해져 있는데, 바로 배달의 건국일조선 (고조선) 건국일이나

      양력이 아니고 음력 103임다. 이것도 한시바삐 바로잡아야 하겠죠. ^^

 

cafe.daum.net/red2017/GNGX/37   정유독서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