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화랑이란 누구인가?

2018. 3. 9. 03:07병법 이야기

신라 AD 530년 이후 지방 순회 음악회가 베풀어졌다. 이는 화랑이 주도한 것이었다.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郎碑序)에는 우리나라에 본시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도, 불, 유(道, 佛, 儒) 삼교사상을 이미 자체 안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하여 절로 감화시키는 것이다. 신선도, 화랑도, 현묘지도, 풍류도가 모두, 삼교사상을 근본적으로 이미 자체 안에 지닌, 합리적인 종교였다. 여기에 난랑(鸞郎)은 신선과 화랑도를 함께 엮어 동시에 표현한 복합명사이다. 화랑은 난조(鸞鳥)처럼 오색이 찬란하며, 연한 녹색의 구슬로 장식하고, 분을 곱게 바르며,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산수간을 다니면서 도의를 갈고 닦고 풍물놀이와 노래와 춤을 즐긴 것이다. 또 겸손하여 지위가 높아도 윗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검소하여 부자이면서도 사치하지 아니하며, 인자하여 권세가 있어도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이를 삼덕행(三德行), 삼미행(三美行)이라고 하였다.화랑이 오색찬란하게 구슬로 분장함은 난조의 몸체에 오색을 갖춤과 같았으며, 화랑이 춤을 즐겼음은 난조가 오음(五音)을 즐기는 것과 비슷했다. 화랑의 삼덕행은 난조의 인자함과 유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난랑을 신선화랑(神仙花郞)이라고도 하였다. <난조 ;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황과 비슷하다는 상상의 새. 붉은 것에 오채(五彩)가 섞이고 그 소리는 오음(五音)에 해당한다고 함>

단군 시대에 소도(蘇塗)를 나라 안에 많이 세워 천지화(天指花;무궁화)를 심고, 미혼 젊은이들을 모아 글읽고 활쏘기 등을 하게 하니,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였다. 국자랑이 나들이 할 때 천지화를 머리에 꽂았으니 천지화랑이라고도 하였다. 이 소도가 선 곳에는 반드시 경당(扃堂)이 있어, 미혼 젊은이들에게 충성, 효도, 믿음,용기, 어짊 등의 다섯가지 바른 길과 글쓰기, 활쏘기, 말타기, 예절 익히기, 노래와 춤 익히기, 무술 등 여섯 가지 재주를 가르쳤다. 여랑(女郞)을 원화(源花)라 하였고, 남랑(男郞)을 화랑, 또는 천왕랑(天王郞)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소도가 있는 곳은 반드시 경당과 더불어 화랑도가 펼쳐졌고, 소도는 배달나라의 환웅천황(桓雄天皇) 시대에도 있었으니 화랑도는 한옛시대 그 전부터 있었다.

화랑은 선인(仙人), 선랑(仙郞), 천왕랑(天王郞), 선풍(仙風)이라고도 하였다. 단군왕검을 선인이라하였으니, 화랑은 곧 제사와 정치를 주관하는 자이기도 하였다. 강화도의 삼랑성(三郞城)은 단군 때 축조한 것으로 삼랑성의 낭은 화랑의 낭과 같은 글자이며 뜻이다. 이로 볼 때 화랑의 연원은 단군 때, 또는 그 이전 배달나라 환웅천항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화랑은 본래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武士)로 당시에는 선비라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조의(皁衣)를 입어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 하였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하여 화랑이라고 하였다. 화랑은 단군 때부터 내려오던 종교의 혼이요, 나라 사랑의 중심이라고 할 만하다.

화랑도는 신라시대에 창설된 것이 아니라, 배달나라 시대, 단군조선 시대의 소도제천의식(신선도)와 더불어 시행되었던 제도를 신라시대에 되살려 부흥시킨 것이다. 고조선이 무너지자, 그 유민이 신라를 세워 국가체재가 정비되면서 화랑도가 부활되고, 재조직된 것이다. 그래서 화랑도의 모체는 법흥왕 때 풍월도로 부할되고, 진흥왕 때 강화되고 제정비된 것으로 보여진다. 곧 신라 23대 법흥왕 원년에 고조선 때부터 있었던 풍월도, 화랑도가 법흥왕에 의하여 1차적으로 재활되었고 진흥왕 원년에는 2차적으로 더욱 강화된 것이다.

신라 24대 진흥왕 때 미혼 자제들을 가려 뽑아서 곱게 단장시켜 화랑이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은 도의를 연마하고 노래와 춤을 즐기면서 산수간을 누비고 다니면서 유람하는데 가보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였다. 이때에 각 사람의 됨됨이를 살펴 인재를 가려 뽑아 조정에 등용하였다. 이는 진작에 있어왔던 우리 풍월도의 화랑을 삼국통일을 위한 재목으로 활용하기 위한 조치였다. 신라가 반쪽이나마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자 화랑을 도외시했다. 그래서 화랑은 놀이의 집단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뒤에 왕권강화를 위해 수입한 불교나 유교에 의해 화랑은 서서히 천인집단으로 몰리게 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사당패, 남사당패, 무당 등의 천인 계층으로 급락하여 간다.
출처 : 네티즌초록꿈사랑본부
글쓴이 : 방영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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